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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10>/6·25전쟁 발발 핵심 원인 중 하나는 ‘남한 내 좌익세력’

영국신사77 2020. 5. 22. 23:36

6·25전쟁 발발 핵심 원인 중 하나는 ‘남한 내 좌익세력’

[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10>

 

입력 : 2020-05-22 00:06/수정 : 2020-05-22 01:15

 

1950년 인민군 포로들이 국군 헌병의 감시 아래 함경남도 함흥 지역 우물 속에서 민간인 시신 65구를 수습하고 있다.

 


사람들은 6·25전쟁을 북한이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아 남침한 전쟁이며 국군과 유엔군은 불법 남침한 북한군과 이를 지원한 중공군을 물리친 전쟁으로 알고 있다. 이런 시각은 6·25전쟁을 일으킨 핵심적 주체세력 하나를 간과하고 있다. 바로 남한 내 좌익세력이다.

6·25전쟁은 북한군이 남한 좌익세력과 합세한 전쟁이었다. 남한 내 좌익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전쟁이 일어났다 해도 그토록 참혹하지 않았을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전면적 남침을 시작한 다음 날인 26일 김일성은 방송 연설을 통해 남한의 좌익세력과 빨치산에게 “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는 지령을 하달했다. 6·25전쟁 당시 12만명(확인되지 않은 실종자까지 포함하면 최대 100만명 추정)에 달하는 남한 내 민간인 학살은 인민군에 의해 이뤄진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남한 내 좌익들에 의해 자행됐다.

좌익들은 완장을 차고 가가호호 가택수색을 하고 공무원, 군, 경찰, 학자 등 소위 인텔리 계층을 체포해 인민재판에 회부해 처형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경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경찰과 군인, 그 가족들을 체포해 그 자리에서 인민재판에 회부했다. 체포를 거부하면 즉결 처형을 했다.

인민군은 공무원, 군, 경찰, 학자 등 인텔리 계층을 최우선 대상으로 학살했다. 부녀자와 어린이까지 학살했고 반동분자로 낙인찍히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친척까지 몰살당했다. 이 같은 양민학살은 시작에 불과했다. 인민군 남침 초반에는 계획적, 조직적, 선별적 학살이었지만,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인민군과 좌익들은 무차별 대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9·28 서울수복 이후 전세가 역전되면서 인민군과 좌익들은 후퇴하는 과정에서 체포·수감하고 있던 우익들을 대전교도소, 전주교도소 등에서 집단 처형하고 북으로도 끌고 갔다.

 

북한 공산군은 퇴각하면서 함흥 반룡산 동굴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 주민들을 학살했다.

 


인민군은 퇴각하면서 도 시 군별 또는 읍 면 단위로 인원수를 할당했다. 좌익은 주민들을 무수히 학살했는데, 집행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귀 코 눈 등 신체 일부를 증거로 가져오게까지 했다.

대전에서는 1000여명의 애국인사들을 학살할 때 끓는 물을 사용하는 등 천인공노할 끔찍한 수법을 썼다. 10월 2일 대전형무소를 직접 취재한 종군기자 류붕렬씨의 증언이다.

“정말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져 있더군요. 어린아이까지도 총알이 아깝다고 구덩이를 파서 돌로 찍어 죽인 후 아무렇게나 묻어버렸어요. 두 개의 우물에는 사람을 단무지 식으로 생매장해서 죽였고요. 공산당들은 사람을 우물 속에 한 겹 쳐넣고는 카바이드로 덮어버리고 또 처넣고 하는 차곡차곡 단무지 담는 식으로 생매장을 했어요. 시체를 끌어내다가 ‘사람 살려’라는 가냘픈 소리가 들려 들춰보니까 13세 난 남자아이인데 우물 속에 쳐넣은 300여구의 시체 중에서 살아난 단 한 사람이었지요.”

 

좌익 인사들이 염산교회 성도들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돌.

 


전남 영광군 백수면에 살았던 장맹룡씨는 6·25전쟁 당시 좌익들에 의해 6촌 이내 친척 300여명이 떼죽음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특히 영광군 염산교회 교인 77명은 좌익들에 의해 바다에 수장됐다. 염산교회 김방호 목사는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죽창과 몽둥이로 살해당하고 나머지 가족들도 그 자리에서 학살당했다. 염산교회 옆 마을에 있는 야월교회에서도 집단학살이 일어났는데, 전 교인 65명이 모두 학살당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설립자였던 고 김준곤 목사는 1950년 10월 3일 고향 전남 신안군 지도면에서 좌익에 의해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내가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슬픔과 고통을 겪었다. 자신도 죽도록 매를 맞았고 21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원산 함흥 평양지역에서 학살은 더욱 잔인했다. 당시 함흥교화소에서 학살당한 양민들의 시신발굴에 참여했던 김인호 선생의 증언이다.

“함흥교화소에서 일어난 학살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했다. 곳곳에 잘려나간 팔다리가 즐비했고 100여개가 넘는 방들에는 모두 시체가 쌓여 있었다. 화장실 안에도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오물통 안에도 도끼에 머리가 찍혀 두개골이 파손된 시체들이 오물 속에 처박혀 있었다. 이런 잔학한 만행을 북한군은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했다. 일본군도 이렇게 잔인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같은 민족끼리 더 잔인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치가 떨렸다.”

6·25전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전쟁의 주범인 김일성 공산집단이 자행한 만행이 얼마나 반인륜적이고 반민족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최근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김재동 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9092&code=23111111&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