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살로니카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영웅을 그리워하는 포퓰리즘의 나라 - 경제 활력 잃어 한적한 고속도로
교통요지 테살로니카 부근만 북적… 마케도니아 유적, 관광객 이어져
인류에 제시한 '동서 통합' 메시지 - 인종과 문화를 초월한 평등·관용
피정복민을 대제국의 신민으로… 페르시아 넘어 인도까지 아울러
영웅의 피붙이 몰살한 카산드로스 - 바빌론 왕궁서 33세 大王 급사하자
섭정의 아들이 마케도니아 차지… 왕의 어머니·부인·아들 모두 죽여
테살로니카(Thessalonica)는 그리스 북부의 중심이다. 아테네에 이은 제2의 도시이며 항구이다. 그리스를 여행하다 보면 잘못된 정치가 국가를 어떻게 망쳤는지 뼈저리게 느낄 때가 많다.
오랜 세월 계속된 포퓰리즘은 안 그래도 부존자원 없는 그리스 경제를 나락으로 떠밀었다. 의욕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떠났다. 남겨진 사회는 갈수록 활력을 잃었다. EU의 도움으로 고속도로는 그럴듯하게 만들었지만, 그 위를 달리는 차들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고속도로를 전세 낸 것 같은 기분에 우쭐하다가도, 낯선 이국에 홀로란 사실에 오싹하기도 하다.
이동하는 사람과 물건이 없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 나라가 멈춰 섰다는 증거다. 이때만큼은 매일같이 막히는 한국의 고속도로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런 그리스에서도 차량이 막혀 정체를 빚는 구간이 몇 개 있다. 테살로니카 주변이 특히 그렇다.
이 도시를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아테네, 동쪽으로는 터키 이스탄불, 북쪽으로는 북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를 거쳐 오스트리아 빈까지 길이 이어진다. 교통의 요지다. 물론 내가 테살로니카를 찾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 도시를 중심으로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유적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테살로니카에 이르다
고대에 그리스 북부는 문명의 경계였다.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코린토스를 중심으로 그리스 세계가 번영하던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에 이곳에는 낙후된 마케도니아 왕국이 있었다.
마케도니아인들은 스스로를 '그리스인'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리스인들은 '야만인'이라며 무시했다. 지금은 거꾸로다. 그리스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마케도니아'와의 인연을 강조한다. 냉전 이후 유고연방이 해체되면서(1991년) '마케도니아(Macedonia)'란 나라가 생기자 국명(國名)을 바꾸라고 집요하게 요구할 정도였다.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를 다른 나라에 빼앗길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오랜 협상 끝에 마케도니아는 '북마케도니아'로 국명을 변경했지만(2019년), 그리스에서는 이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것도 아테네에서!
마케도니아를 원수처럼 미워했고,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을 진심으로 기뻐했던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기원전 384년~기원전 322년)를 비롯한 고대 아테네인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마케도니아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한 집착은 테살로니카에서 절정에 달한다. 중앙 마케도니아주(州)의 주도(州都)이기도 한 이 도시는 해안가에 거대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기마상을 세워놓았다. 마치 테살로니카가 알렉산드로스의 도시인 양. 실제로 많은 여행객이 마케도니아의 옛 수도였던 펠라를 둘러본 후에 테살로니카에 들러 대왕의 동상을 감상한다.
비록 고대 로마,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풍부한 문화유산이 도시 곳곳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름을 따라갈 수 있는 건 없다. 아이러니는 테살로니카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도시는 대왕이 죽은 후에 세워졌다. 그것도 악연으로 얽힌 카산드로스에 의해서.
세상을 정복하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태어났다. 필리포스 2세와 에피루스 왕국의 공주 올림피아스가 부모였다. 스승은 대(大)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부모와 스승의 기대치를 한참 뛰어넘어,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스무 살 청춘에 아버지로부터 왕국과 동방 원정의 꿈을 물려받았다(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의 적들은 어린 왕을 깔보고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사방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반란을 바람처럼 빠르게 진압함으로써 자신이 탁월한 장군임을 증명했다. 주제 파악에 실패한 테베가 반란의 대가로 불타 사라진 것도 이때였다.
동방 원정은 기원전 334년 봄, 그리스 세계를 평정한 알렉산드로스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면서 시작됐다. 그는 파죽지세로 나아갔다. 당대 최강의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트렸고, 미지의 땅 인도까지 진출했다. 쉼 없는 원정은 기원전 323년 6월,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 왕궁에서 급사할 때까지 계속됐다.
사후 알렉산드로스는 역사에 '위대한' 정복자로 기록됐다. 단순히 넓은 땅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런 수식어가 붙은 게 아니다. 정복하는 과정에서 인종을 초월한 평등, 문화를 초월한 관용, 동서를 초월한 통합이란 새로운 이정표를 인류 앞에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상(理想)은 멀고 험한 원정길을 따라 형성됐고, 정복지가 넓어질수록 원대해졌다.
원정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외부의 적하고만 싸운 게 아니었다. 적은 내부에도 있었다. 더 위험하고 치명적이었다. 적은 선대 왕 때부터의 국가 원로, 명망 있는 군 지휘관, 대왕의 친구와 측근을 망라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알렉산드로스는 위험했고 무모했다.
왕은 마케도니아인이 정복자란 사실을, 그리스 문화만이 우수하고 동방은 야만의 땅이라는 것을 잊은 듯했다. 페르시아의 관습을 따랐고, 피정복민을 동등한 제국 운영의 파트너로 대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앞으로만 전진했다.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은 적이 됐다.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왕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던 이들은 친구로 남았다.
도대체 알렉산드로스는 왜 그랬을까? 스스로 이유를 밝힌 바는 없지만 미루어 짐작은 가능하다. 그는 1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과대망상에 가까운 이상, 위대한 지성, 무분별한 용기를 바탕으로 페르시아보다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세상의 경이(驚異)라 불릴 만했다.
문제는 제국의 운영과 영속(永續)이었다. 제국의 크기는 마케도니아의 국력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한참 벗어났다. 제국을 움직이고 유지하려면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현지인들의 참여와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현지인들이 그저 피정복민이거나 노예여서는 곤란했다. 그들은 동등한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신민이어야 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적을 왕은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마케도니아 군부의 2인자 파르메니온의 아들 필로타스는 왕의 친구였지만, 클레이투스는 전쟁터에서 왕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지만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오직 이름만을 남기다
카산드로스도 적이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원정을 떠나있는 동안 마케도니아의 섭정을 맡은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이었다. 카산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융합·포용 정책을 증오하는 철저한 마케도니아인이었다.
대왕의 사후 벌어진 처절한 후계 전쟁 과정에서 비정한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왕국을 차지했다. 그 과정에서 카산드로스는 걸림돌이 되는 알렉산드로스의 일가친척을 모조리 제거했다. 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 왕의 부인 록사네, 왕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 모두가 카산드로스 손에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력에 정통성을 더하려면 알렉산드로스의 피가 필요했다. 카산드로스는 무기력한 왕의 이복 여동생과 결혼했다. 순종적이었던 그녀는 카산드로스의 손에 묻은 핏자국을 지워줬을 뿐 아니라 대를 이을 아들도 셋이나 낳았다. 카산드로스는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그녀의 이름을 따 '테살로니카'라 이름 지었다.
긴 역사를 거치면서 테살로니카는 그리스 북부의 중심 도시로 성장했다. 도시의 건국자와 대왕의 악연을 잊은 듯, 알렉산드로스와의 인연을 강조하고 있다. 너른 광장 한가운데 바다를 향해 세워진 젊은 정복자의 기마상은 웅혼하고 고독하다. 마치 자신의 이상을 향해 앞만 보고 질주했던 왕과 같다.
그 이상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당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왕이 죽자 그의 이상이 가장 먼저 사라졌다. 제국은 부하들의 후계 다툼 속에 무너졌다. 그의 피붙이들도 사후 15년 만에 다 죽었다. 오직 그의 이름만 남았다. 그러나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기억될 이름이다. 그가 창조한 보편성에 입각한 세계시민주의와 함께. 대왕 알렉산드로스!
[테살로니카에서 둘째로 유명한 사람… 터키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테살로니카에서 둘째로 유명한 사람은 그리스인이 아니라 터키인이다.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1881~1938년). 터키 공화국의 건국자이며 초대 대통령으로 '아타튀르크(Atatürk·터키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케말이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그리스의 애달팠던 역사를 증명한다.
테살로니카가 그리스 북부와 함께 오늘날 터키의 전신(前身)인 오스만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진 건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