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History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48] 신흥 강자 무시하다 무너진 테베… 그리스의 자유도 끝났다[테베 패권의 시작과 끝,/ 레욱트라와 카이로네이아]

영국신사77 2020. 4. 1. 22:26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48] 신흥 강자 무시하다 무너진 테베… 그리스의 자유도 끝났다

조선일보
  • 테베=송동훈 문명탐험가


입력 2020.03.31 21:30 | 수정 2020.04.01 00:07

[테베 패권의 시작과 끝, 레욱트라와 카이로네이아]

스파르타와 레욱트라서 결전- 에파미논다스의 창의적 전술
좌익이 긴 사선형으로 진군, 스파르타 무찌르고 패권 장악

마케도니아의 성장- 테베 인질이었던 필리포스 2세
마케도니아 돌아가 개혁 정치… 군대 혁신, 왕권 강화, 귀족 통합

무사안일했던 그리스 세계- 숙적 테베·아테네, 뒤늦게 동맹
마케도니아에 맞섰지만 알렉산드로스 기병대에 짓밟혀

그리스 중부 보이오티아의 테베는 신화와 비극, 역사의 삼위(三位)에 놓인 도시다. 페니키아의 왕자 카드모스는 제우스에게 납치된 여동생 에우로페를 찾아 나섰으나 실패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델포이 신탁에 따라 테베를 건설했다. 여기까지는 그리스 신화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는 운명의 저주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쳤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는 테베의 왕이었다. 이처럼 오이디푸스를 비롯한 그리스 비극의 여러 소재가 테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 중반 테베가 한 세대 동안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것은 역사다. 황금기는 길지 않았다. 테베의 패권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무너졌고, 도시 자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파괴됐다. 대왕이 죽은 후에 재건됐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서일까? 지금 테베는 인구 2만여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됐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유물과 유적은 빈약하다. 그러나 한번쯤은 가볼 만하다. 조용한 도심을 걸으며 테베의 역사와 운명을 떠올리다 보면 스스로를 성찰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보이오티아 지방의 중심에 위치해 주변으로 소소하게 볼만한 곳이 많은 것도 장점이다. 특히 레욱트라와 카이로네이아가 좋다. 테베의 패권이 시작되고 끝난 옛 전쟁터들이다.

어제의 전우가 오늘의 적이 되다

레욱트라는 테베 서쪽 16㎞ 밖이다. 그리스에서 드물게 평평하고 풍요로운 땅답게 레욱트라로 가는 길은 밭에서 밭으로 이어진다. 그 평원 한가운데 조형물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다. 레욱트라 전투 기념비다. 본체는 원통형이고 지붕은 방패 모양의 장식을 둥글게 이어 만들었다. 'Leuktra Victory Monument'라 적힌 녹슨 표지판만이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전하고 있다. 먼 옛날 이곳에서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스파르타와 테베, 두 강대국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레욱트라 전투는 위대한 군사 강국 스파르타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 사람의 천재적인 지도자가 전쟁터는 물론이고 국가 간의 패권 경쟁에서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할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투이기도 했다. 오늘날 레욱트라에는 테베의 승리를 기념하는 조형물만이 남아 먼 옛날의 위대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서경석 작가
레욱트라 전투는 위대한 군사 강국 스파르타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 사람의 천재적인 지도자가 전쟁터는 물론이고 국가 간의 패권 경쟁에서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할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투이기도 했다. 오늘날 레욱트라에는 테베의 승리를 기념하는 조형물만이 남아 먼 옛날의 위대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서경석 작가
두 나라는 오랜 세월 동맹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기원전 404년)이란 길고 파괴적인 전쟁 내내 두 나라는 아테네를 상대로 함께 싸웠고, 승리했다. 혈맹의 관계가 틀어진 건 전후 처리 과정에서였다. 테베는 라이벌 아테네의 멸망을 원했다. 스파르타는 패배한 아테네를 존속시키고자 했다. 아테네의 빈자리를 테베가 차지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고, 국가이익만이 있을 뿐'이란 국제관계의 비정한 철칙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테베는 상처받았으나 강대국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보이오티아 전역을 통합하고자 했다. 테베의 야망은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을 원치 않는 스파르타의 소망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충돌이 불가피했다. 스파르타가 선수 쳤다. 친(親)스파르타 성향의 테베인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괴뢰정부를 세웠다(기원전 382년). 테베가 해방된 건 기원전 379년, 탁월한 정치가 펠로피다스(Pelopidas)에 의해서였다. 복원된 테베 정부는 확고하게 반(反)스파르타적 입장을 취했다. 펠로피다스는 에파미논다스를 발탁했다. 그는 숨은 진주였다. 둘은 손잡고 테베의 부흥을 위해 분투했다.

테베가 스파르타를 꺾다

테베 한복판에 서 있는 에파미논다스의 동상. /서경석 작가
테베 한복판에 서 있는 에파미논다스의 동상. /서경석 작가
마침내 스파르타는 테베의 성장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다(기원전 371년 7월). 레욱트라에 모습을 드러낸 스파르타 연합군은 중장보병만 1만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스파르타 왕 클레옴브로토스가 이끌었다. 이에 맞선 테베 연합군의 중장보병은 6500명에 불과했다. 명성, 사기, 군세 모든 면에서 스파르타가 우세했다. 그러나 테베에는 에파미논다스가 있었다. 스파르타가 가진 모든 우세를 무력화할 만큼 그는 탁월한 전략가였다. 전투에 앞서 에파미논다스는 중장보병의 진형에 큰 변화를 줬다. 전통적으로 중장보병 방진의 가로 열은 그 수가 12열 내외였다. 에파미논다스는 스파르타군 정예와 상대할 테베군 좌익의 가로 열을 50열로 대폭 늘렸다. 대신 중앙과 우익의 열은 줄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이한 진형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에파미논다스는 좌익의 테베군을 빠르게 진격시켰고, 중앙과 우익의 부대들은 돌격 속도를 늦췄다. 결국 테베군은 전체적으로 좌익이 앞서고 우익이 뒤처지는 사선형으로 전진했다. 스파르타는 모든 부대의 열을 동일하게 12열로 맞추고, 같은 속도로 전진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임했다. 자연스럽게 좌익의 테베군이 우익의 스파르타군과 먼저 충돌했다. 스파르타의 중장보병이 무적이기는 했지만 수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고작 12열의 방진으로는 빠르게 부딪쳐오는 50열의 방진을 막아낼 수 없었다. 스파르타 방진은 처참하게 깨어졌다. 충돌 초기에 왕과 많은 장교가 전사했기 때문에 스파르타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할 수 없었다. 테베군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에파미논다스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창의적인 전술로 무적의 스파르타 중장보병을 일대일 전투에서 쳐부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승리 이후, 그리스 세계에 난폭하게 군림하던 스파르타의 패권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재기를 위한 스파르타의 노력은 만티네아 전투의 패배로 수포로 돌아갔다(기원전 362년). 에파미논다스는 레욱트라에서 사용했던 전법으로 스파르타군을 궤멸시켰다. 스파르타는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테베도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에파미논다스가 전사한 것이다. 국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던 탓에 그의 부재(不在)는 테베의 미래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스 세계 전체에도 마찬가지였다. 당대의 역사가 크세노폰의 표현처럼, 모든 사람이 만티네아 전투의 승리자가 그리스의 통치자가 되고 패배자는 신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무승부에 가까웠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자였던 스파르타는 몰락했고, 패자였던 아테네는 부활했으나 예전만 못했다. 테베는 스파르타를 꺾었지만 에파미논다스의 죽음으로 지도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리스 세계는 권력의 공백이라는 위험한 상황을 맞이했다. 장차 누가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할 것인가? 새로운 바람은 북쪽에서 일고 있었다.

마케도니아가 테베를 이기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테베는 수백년간의 염원 끝에 겨우 달성한 패권을 너무나 쉽게 잃었다. 그 자리에는 패배 후 테베인이 세운 사자상이 외롭게 서있다. /송동훈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테베는 수백년간의 염원 끝에 겨우 달성한 패권을 너무나 쉽게 잃었다. 그 자리에는 패배 후 테베인이 세운 사자상이 외롭게 서있다. /송동훈
한 국가가 정상에 오르는 것은 어렵다. 정상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해양제국을 건설한 아테네도, 엄격한 과두제를 근간으로 한 군사 강국이었던 스파르타도 한 세대 이상 패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테베도 마찬가지였다. 도전자는 그리스 북부에서 새롭게 등장한 마케도니아였다. 거친 땅에 자리한 마케도니아는 강인한 백성과 풍부한 천연자원을 갖추고 있었지만 삼류 국가였다. 왕권이 약했고, 귀족들이 분열된 채 정쟁(政爭)만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운명이 바뀐 건 필리포스 2세(재위 기원전 359~기원전 336년)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어린 시절을 테베에서 인질로 보냈다. 이때의 테베는 에파미논다스의 지도력하에 스파르타를 꺾고 그리스 세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어린 필리포스는 에파미논다스의 개혁과 테베의 변화를 관찰하고 연구했다. 테베를 찾는 많은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그리스 폴리스들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스파르타의 가혹한 통치, 테베와 스파르타의 패권 전쟁을 거치면서 예전의 힘과 활력을 잃어버렸음도 알게 됐다. 모국으로 돌아와 왕좌를 차지한 필리포스는 테베에서 배운 것을 적용해 마케도니아를 개혁했다. 군대를 혁신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을 통합했다. 급성장한 마케도니아 왕국은 그리스 세계 전체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내분과 무사안일에 젖어 있던 그리스 세계는 마케도니아의 성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유일하게 아테네의 데모스테네스만이 필리포스를 경계하지 않으면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세계의 자유를 빼앗길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허사였다. 아테네인들은 변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유와 영광을 추구하고, 국가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100년 전의 시민들이 아니었다. 편안한 일상을 즐겼고, 힘든 군역은 용병에게 맡겼다. 자유를 사랑했지만,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피와 땀을 흘릴 생각은 없었다. 데모스테네스가 얘기하는 불편한 진실을 아테네인들은 외면했다. 필리포스의 야망이 구체화되고, 마케도니아의 군대가 남쪽을 향해 진군하자 정신을 차렸다. 테베도 취약한 패권에 안주하느라 세상의 변화를 놓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랜 숙적이었던 테베와 아테네는 뒤늦게 손잡고 마케도니아에 맞서기 위해 북진했다. 두 군대는 테베에서 북쪽으로 50㎞쯤 떨어진 카이로네이아에서 격돌했다.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기병대의 활약에 힘입어 마케도니아가 승리했다(기원전 338년). 테베의 패권은 무너졌다. 그리스 세계의 자유도 종말을 고했다.

그 결정적인 전투 현장으로 가는 길의 풍광은 레욱트라의 그것과 유사하다. 현장에는 테베인들이 싸우다 죽은 용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외로운 사자상만이 남아 있다. 돌사자의 표정이 참 묘하다. 슬픔인지 안타까움인지 무심함인지 종잡을 수 없다. 신화와 비극, 역사에 기록된 화려한 명성과 달리 눈앞에 남은 건 '테베'란 작은 도시와 목적 다른 두 개의 전쟁 기념비뿐이란 사실 앞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좀 더 생각해보면 그조차도 주제넘은 상념이다. 테베는 아테네, 스파르타와 더불어 그리스 세계의 삼대 패권국 중 하나였고, 테베의 적은 경이로운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다. 우리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대의 수많았던 폴리스들에 비하면 테베는 위대했다. 그러나 그 막강했던 패권도 한 세대를 넘지 못했다. 한 천재의 위대함을 자신들의 것으로 착각했고, 취약한 권력에 안주했고, 외부의 변화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들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갈 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31/20200331051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