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사복음서·사도행전강해·김효성목사

마가복음 10장-16장 / 김효성 목사

영국신사77 2020. 4. 18. 17:10

10장: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움

1-12절, 이혼에 대하여

[1-2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전에 하시던 대로] 가르치시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가르치시는 사역이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유로이 궁금한 것들에 대해 질문하였던 것 같다. 본문의 경우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비난거리를 찾기 위해 질문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배우려는 태도가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셔서 가르치시는 데도 그러했다. 교만한 자는 어떤 훌륭한 선생이 와서 가르쳐도 배우려 하지 않으나, 겸손한 자는 평범한 교훈에도 귀를 기울인다. 남에게 배울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이 높고 교만한 사람이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배워야 한다.

[3-9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가로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시로부터 [하나님께서]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4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모세는 사람이 이혼증서를 써주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을 허용했다. 사람들은 악하여 연약한 아내를 학대하고 울리고 가슴에 큰 상처를 주고 그를 버리기까지 한다. 아내를 구박하고 학대하는 남편을 생각하면 여자에게는 차라리 이혼이 낫다. 결혼해서 구타당하고 마음과 육체의 고통 가운데 사는 것보다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이혼은 결혼 제도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본래의 뜻에 반대된다. 결혼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결혼한 남녀는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다. 그러므로 부부 관계는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이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보다 더 친밀한 관계이다. 부부 관계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먼저 고려되고 가장 잘 유지되어야 할 관계이며 다른 무엇에 의해서도 손상되어서는 안 될 관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부부의 관계를 사람이 나눌 수 없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버리든지, 아내가 남편을 버리든지, 버리는 행위는 옳지 않다. 결혼한 자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10-12절]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간음’은 결혼한 사람이 부부가 아닌 상대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본처에게’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에 ‘그에게’라는 말인데, 그것은 본처보다 재혼한 상대를 가리킬 것이다. 잘못된 이혼에 근거한 재혼은 간음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우리는 교만한 자처럼 성경 배우는 일을 무시하지 말고 믿고 실천하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배우고 믿고 실천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관계 중에서 부부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심을 알고 죽을 때까지 그 관계를 잘 지키고 유지해야 한다. 부부는 서로를 위하고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옳지 않은 이혼과 재혼을 죄악으로 간주하고 그 행위와 폐해들을 미워하심을 알고 그것을 극히 조심해야 한다.

13-16절, 아이들을 용납하심

[13-14절]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그 데려온 자들을]49)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것임이니라].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영접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모범대로 어린아이들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으로 영접해야 한다. 어린아이는 순진하여 무엇을 의심할 줄 모른다. 그는 배운 대로 믿고 행한다. 그러므로 어릴 때 바른 교육이 매우 중요하고 또 효과적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15-16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영접하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같이 영접해야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으시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 우리 어른들은 성경말씀을 복잡하게 생각하여 의심하지만, 어린아이는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순진하게 믿고 따른다. 우리는 어린아이들같이 하나님의 말씀, 천국 복음을 순진한 마음으로 받고 믿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천국 백성의 모습을 지닌 자들로 알고 주님의 모범대로 어린아이들을 사랑으로 영접하며 귀하게 여기며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성경말씀을 복잡하게 생각하여 의심하지 말고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듣고 받고 믿고 신구약성경에 증거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그 교훈을 순종해야 한다.

17-22절, 한 부자가 영생의 길을 질문함

[17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달려온 것을 보면 그는 열심이 있었고, 꿇어앉은 것을 보면 그는 겸손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에 대한 좋은 인상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영생의 방법에 대해 물은 것을 보면, 그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달리 종교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실상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다.

[18-1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선하지 않으셔서가 아니고 사람들 중에는 선한 자가 아무도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 함이었다. 세상에는 의인이 아무도 없고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다(롬 3:10, 23). 세상에는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선하시고 죄가 없으시다(히 4:15; 요일 3:5).

예수께서는 영생을 얻는 방법으로 사람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들을 열거하셨다. 그것은 계명들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율법에 제시된 하나님의 진리이다. 사람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데 있다.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영생을 얻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이다(요 3:16). 주께서 그에게 계명을 말하신 목적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을 깊이 깨닫게 하려 하심이었을 것이다.

[20-21절]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십자가를 지고](전통본문)50)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는 경건한 가정 교육을 받고 자랐던 것 같다. 그는 상당히 착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의 문제점이 재산의 많음에 있었음을 보셨다. 그는 영생을 사모하지만, 재물이 그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가 참으로 영생을 원한다면 그는 재물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 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라는 뜻이다. 영생은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취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재물은 결코 영생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

[22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깜짝 놀라서, 혹은 어두운 기색을 띠고](BDAG) 근심하며 가니라.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영생을 원했지만, 그것을 위해서 그의 많은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영생 대신에 재물을 택했다.

우리는 재물에 대한 애착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방해함을 알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영생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단지 백년 동안 유용한 재물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23-31절, 재물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움

[23-27절]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재물을 의지하는 자들이](전통본문)51)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들은 흔히 가난보다 재물의 많음을 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난보다 부요가 복인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반대로 재물이 많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매우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것은 아마, 부자가 그가 지금 누리는 물질의 유익들, 즉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차 등을, 그가 현재 실감하지 못하는 천국의 영원한 복을 위해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을 사랑하고 부자 되기를 좋아하는 세상에 구원얻을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무지한 마음을 깨우치셔서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의 헛됨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신다.

[28-31절]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아내나](전통사본)52)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어부였던 그들은 예수께서 부르실 때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려두고 그를 따랐다(마 4:20, 22).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가족이나 재산을 버린 자는 이 세상에서 가족과 재산을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 헌신자가 이 세상에서 가족과 재산을 백배나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인 신약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또 참된 헌신은 믿음의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믿은 유대인 신자들 중에 이방인 신자보다 나중 될 자가 많을 것이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재물이 많은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돈이냐 하나님이냐, 이 세상이냐 영생이냐, 양자 택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마 6:24).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9-10).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에 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매우 어렵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무지한 마음을 깨우치셔서 세상 사랑의 헛됨을 알게 하시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신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에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자.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해로 여겼고 배설물로 여겼다(빌 3:7-8). 우리는 이 세상 대신 천국과 영생을, 그리고 돈 대신 하나님을 택하자.

32-34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다시 예언하심

[32-34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決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주 부르셨다. 이것은 그의 인성(人性) 즉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의 아들로 오신 것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자기 비하(自己卑下)[자신을 낮추심]이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 나라의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이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 곧 제사를 집례하는 대제사장들과 성경을 연구하는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메시아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그것은 심히 모순된 일이었다. ‘능욕하다’는 말은 ‘조롱하다’는 말이다. 주님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였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3일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 일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증거된 대로 그대로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되어질 일을 정확히 예언하셨고 그 예언대로 그 일이 정확히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또 하나의 증거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 오셨고 많은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자들의 죄를 담당한 대속(代贖)의 죽음이셨다. 우리는 그의 죽음 때문에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었다. 그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성령으로 오셔서 오늘날도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주의 백성과 늘 함께하신다. 그는 우리의 성화를 이루시고 우리에게 위로와 능력을 주신다.

35-45절,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구함

[35-37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조금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그의 영광의 보좌 좌우에 앉기를 탐내었다. 그것은 순전히 세상적 욕심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했어야 했다.

[38-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예비된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니라].53)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나의 마시는 잔,’ ‘나의 받는 세례’는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킨다. 그런 고난을 그들이 과연 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그의 고난에 참여케 될 것을 암시하셨다. 야고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목베임을 당하였다. 터툴리안에 의하면, 요한은 로마에서 끓는 가마솥에 던지웠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그는 그 후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후에 에베소로 돌아와 늙도록 생존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성도가 소원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준비된 자들 즉 예정된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될 것이며 작정된 자는 그것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자리가 작정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열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말씀 나눔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히 여겼다. 그들이 분히 여겼다는 것은 그들 속에도 같은 욕심이 있었음을 보인다. 그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 속에도 비슷한 세속적 욕심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다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또 교회 안에서 높은 자리를 구하는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42-44절]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에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린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섬김의 정신이, 이론적으로는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없다. 세상은 힘과 권세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그것이 인간의 죄성의 한 면모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세상의 것과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섬김의 원리이다. 세상은 보통 지배의 원리로 운영되지만, 교회는 오직 섬김의 원리로 운영되어야 한다.

교회가 역사상 로마 천주교회처럼 세속정치와 결탁되어 교인들을 강압한 때가 있었고, 오늘날에도 이단종파들은 교인들에게 폭력과 강압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고 타락한 교회의 모습일 뿐이다. 교회는 믿는 이들의 자발적 모임이며 거기에는 일차적으로 사랑과 섬김의 원리가 지배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교회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섬기는 데는 실상 직분도 필요치 않다. 섬기는 것은 그냥 섬기면 된다. 그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를 몰라주어도 섭섭해하지 않는다. 모두가 이런 마음으로 생활한다면, 교회는 아름다운 모임이 되고 이 세상에서 벌써 천국의 모습을 이룰 것이다.

[45절] 인자(人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방금 주께서 하신 교훈의 근거를 제시해준다. 우리가 서로 섬기며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할 까닭은 주님 자신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은 몇 가지 진리를 담고 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요한복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주께서는 영광의 천국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내려오셨다.

둘째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代贖物)로 주신 것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자신의 죗값으로 죽어야 하든지, 아니면 대속물을 필요로 하였다. 왜 대속물이 필요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다. 죄에 대한 형벌이 없어도 죄가 용서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가 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 것이다. 로마서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恩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구원 이치인 것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섬김의 본을 보이셨다. 섬김을 받으셔야 할 주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속죄제물이 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고난의 종이 되셨다. 여기에 섬김의 모범이 있고 교훈이 있다. 교회 안에는 계급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직분은 계급이 아니고 오직 봉사의 직무와 책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은 존귀하고 그래서 우리가 그 직분을 존중히 여기고 그 직분자를 존경해야 하지만, 그 명예는 실상 그 직분에 대한 그의 충성과 열매에 달렸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내세의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명예심은 버려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허무하고 모든 육체는 풀같이 마르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같이 떨어지기 때문이다(전 1:2; 벧전 1:24). 사도 바울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갈 5:26).

교회 안에서는 큰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세상은 서로 높아지려고 할지라도, 교회는 섬기는 자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그것은 주께서 친히 교훈하신 바이며 본을 보이신 바이다. 로마서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무엇보다, 모든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 죽음은 몸의 죽음뿐 아니라, 정신적, 신체적, 환경적 불행과 특히 지옥의 형벌을 포함한다.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길은 구주 예수를 믿는 것뿐이다(요 3:36).

46-52절, 소경 바디매오를 고쳐주심

[46-48절]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소경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구절하다가]54)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소경 바디매오는 구걸하며 살았던 불쌍한 거지이었다. 그는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렀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 지방의 한 마을 나사렛 출신이셨다. 그는 사람이 지어낸 인물이 아니고 역사적 인물이셨다. 그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것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 소경은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자기의 불행한 처지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갈망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병 고치심과 기적 행하심을 보지 못했으나 소문을 통해 알고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믿음을 주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디매오는 자신이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지금은 자존심을 논할 때가 아니고, 자기 형편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구원을 받아야 할 때이다. 그는 겸손해졌고 예수님의 신적 능력과 자비를 믿었고 그를 향해 소리질렀다.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했으나 그는 더욱 소리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지 않았고 무례한 자로만 여겼으나, 그는 낙심치 않고 더욱 소리지른 것이다. 그의 믿음은 간절히 부르짖는 믿음, 사람들의 방해에도 낙심치 않는 믿음이었다.

[49-50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지나쳐 버리시는 듯하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도 처음엔 응답지 않으시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낙망치 않고 믿음으로 부르짖을 때 그는 머물러 서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간절히 그리고 낙망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소경은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왔다. 겉옷은 거지에게 중요한 소유물이었다. 그것은 몸을 가리고 밤에 추위로부터 지켜주는 필수품이었다. 지금 그 중요한 겉옷을 내어버리면 아마 그것을 다시 찾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의 겉옷도 팽개쳐 버리고 주께서 나아갔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열망하였다. 그는 예수께로 가면 그의 소경이 고침받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51-52절]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그 소경은 보기를 원하였다. 그 소경에게는 돈 몇 푼보다 시력의 회복이 필요하였다. 영적 소경인 모든 죄인들이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비참함과 구주 예수님과 내세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은 물질적인 소득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고 값진 일이다.

예수께서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소경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셨다. 그 소경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나? 첫째로, 그것은 지식 있는 믿음이었다. 그는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 메시아이심을 알았고 그의 신적 능력과 자비를 믿었다. 둘째로, 그의 믿음은 간절한 기도로 표현되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셋째로, 그의 믿음은 낙심치 않는 믿음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꾸중 속에서도 낙심치 않았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요구된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들음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자비의 구주이심을 인정하고 확신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크고 작은 영적, 육적 문제를 낱낱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되 여러 가지 환경적 시험들 중에도 낙심치 말아야 한다.

주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자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었고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다. 여기에 ‘구원’이라는 말은 시력의 회복을 가리킨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소경은 그의 시력의 회복을 얻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원리는 병고침들에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을 받는다. 죄인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하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하였다. 성경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기적들은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명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적 영광을 보고 그를 확신해야 한다.

고침을 받은 바디매오는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다. 그는 더 이상 소경도, 거지도 아니다. 그는 육신의 병만 고침 받는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주님과 그리스도로 믿어 영혼의 구원도 받았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시다. 오늘날도 영적 소경인 죄인들은 주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영안(靈眼)이 열려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계획을 알고 인간의 본분과 목적과 정로를 알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의 영광과 영생의 복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이미 구원받은 우리의 영안도 날마다 더욱 밝아져야 한다.

11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11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2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스가랴 9:9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예언하였다. 이것은 메시아 예언이라고 본다. 흔히,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나귀는 평화를 상징한다고 한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다. 또 나귀를 타심은 그의 겸손하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스가랴는 “[그가]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섬기러 오셨다. 또 그가 나귀새끼를 빌려 타고 가심은 그의 가난하심을 증거할 것이다. 그는 나귀 새끼 한 마리도 자기 소유로 갖고 있지 않으셨다. 그는 본래 부요하신 자이셨으나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해지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3-6절]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은 나귀의 주인이 있지만, 실상 예수께서 나귀의 참 주인이심을 증거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유재산권을 인정하지만, 실상 세상의 참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세상의 창조자요 참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24:1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말하였다.

복음서들에는 예수님을 ‘주’라고 표현한 구절이 200회 가량 나오며 사도행전에만 108번 가량 나온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증거하였다(행 2:36). 바울은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롬 10:9).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 구원이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아는 자는 그에게 순종할 것이다. 제자들은 가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 것은 예수께서 신적 지식을 가지셨음을 증거한다.

[7-10절]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무리들의 찬송은 호산나 찬송이었다. 이것은 구약성경 시편 118편에 있는 말씀이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이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가? 인간 세상에는 여러 가지 죄악된 일들과 불행한 일들, 즉 질병들, 자연 재해들, 전쟁, 기아, 그리고 마침내 죽음 등의 일들이 많고 인간은 이 모든 문제들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오직 세상의 창조주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그에게 해결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께서 오셨다. 인간의 구원의 갈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왔다. 예수님은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인간을 모든 불행에서 건질 자로 오셨다.

[11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특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대속 사역을 예표하였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신다. 그는 거기에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정죄를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또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죄와 죄의 결과인 모든 불행으로부터의 구원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요 1:3). 그는 한 나귀새끼의 참 주인이시다. 온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는 창조 세계를 그의 선하신 뜻을 위해 쓰신다.

둘째로, 부요하신 주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해 가난해지셨다. 그는 천국의 영광을 버리시고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우리는 그의 겸손을 본받자.

셋째로, 예수께서는 인류를 죄와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죄인들은 구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이미 그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그를 사랑하고 복종하며 그를 위해 살아야 한다.

12-14절, 무화과를 저주하심

[12절]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예수께서 시장하신 것은 그의 인성(人性)의 표시이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 본질을 가지셨으나 죄는 없으셨다(히 4:15).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신 그가 사람이 되신 것은 역사적 사실인 동시에 신비롭고 놀라운 기적이다. 또 그가 그 아침에 시장하신 것을 보면,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를 잘 대접했던 것 같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계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합당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이처럼 사람들의 눈은 어두웠고 사람들의 생각은 부족하였다.

[13절]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는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다. 그러나 가서 보니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가 연 때가 아니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지식의 제한성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신성(神性)으로는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인성(人性)으로는 지식의 제한성을 가지고 계셨다고 보인다. 사람은 멀리 있는 것에 대해 잘 모른다.

무화과는 잎사귀가 생기면서 동시에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서 보신 그 무화과는 잎사귀만 있고 아무 열매가 없었다. 이것은 당시의 형식적 종교와 같았다. 그것은,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는 종교, 형식과 겉모양은 있으나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과 삶이 없는 자들, 성경책을 갖고 다니고 기도하며 찬송하며 교회의 직분도 있으나 참되고 진지한 마음과 선하고 진실한 인격과 삶이 없고, 도리어 거짓과 탐욕, 미움과 음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매 없는 어둠의 일들을 버리고 선한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아니고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기를 원하신다. 종교적 형식과 겉모양과 직분만 가지는 자가 되지 말고, 참으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과 삶을 가진 성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14절]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선한 열매 없는 당시의 형식적 종교 지도자들을 정죄하시는 교훈적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나무에 비유하셨다. 나무들 중에는 열매 맺는 나무도 있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나무들을 찍어 버리신다. 세례 요한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었다(마 3:10). 예수께서도 포도나무 비유에서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5:2). 또 20절 이하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교훈도 주기를 원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참으로 기도하면 그가 이루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모양만 가진 교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열매 맺는 나무가 되어야 한다. 열매는 선한 행위를 가리킨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여 경건하고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15-19절, 성전을 깨끗케 하심

[15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성전은 성전뜰과 성소와 지성소(至聖所)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세 부분은 다 거룩하였다. 본절의 내용은 성전뜰에서의 광경이라고 본다. 거룩한 성전뜰이 일종의 장터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서 제물을 사고 파는 일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유대 지도자들과 결탁된 장사꾼들은 성전을 돈벌이의 장소로 삼고 있었던 것 같다. 평소에 대체로 온화하셨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더러워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성전이 더러워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케 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열심이 그를 삼켰다. 그는 성전 안에서 사고 파는 자들을 내어쫓으셨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16절] 아무나 기구[물건]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예수께서는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셨다.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을 더럽히고 거기에서 세속적인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다. 오늘날 교회도 거룩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딤전 3:15). 교회의 설교들과 교훈들과 교회의 모든 활동들은 거룩해야 하고 세상적인 것이 섞여서는 안 된다.

교회의 교훈은 육신적 문제나 물질적 문제, 즉 병고침이나 물질적 복을 받는 일에 관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활동도 거룩해야 한다. 교회는 일반적 교육사업, 구제사업, 자선사업 등 세상사업에 힘써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오늘 시대의 풍조는 목사들과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오락적인 요소들을 섞는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방식도, 사도들의 방식도 아니었고, 역사상 하나님의 경건한 종들의 방식도 아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특이한 현상이라고 본다. 그것은 교회의 세속화 현상이다. 목사들은 흥미 있는 말들로 교인들을 즐겁게 하는 말쟁이가 되고 있는 것 같다.

[17절]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며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집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섬기는 곳이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요 2:21) 또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가리킨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듯이, 신약교회도 모여 하나님을 섬기며 찬송과 기도와 말씀의 교훈이 있고 하나님의 일들을 수행하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의 교훈은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그의 나라, 죄와 심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중생(重生), 칭의(稱義), 그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 등의 문제와, 성도의 온전한 삶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교회의 교제는 예배와 성경공부와 기도 등 영적이어야 한다. 소풍이나 운동회 등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극히 제한적이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교회다운 일들을 힘써야 한다. 또 교회는 오직 영혼구원의 전도의 일에 힘써야 한다. 이것은 주께서 명하신 일이요 교회의 사명이다. 사도행전의 증거대로, 초대교회는 그 일에 힘썼다. 오늘날도 교회는 전도대 파송, 개척교회 설립과 지원, 해외선교사 파송과 지원, 목사와 선교사 양성 등을 대해 연구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힘써 실행해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는 당시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이라고 책망하셨다. 성전에서의 매매의 행위는 사람들에게 제물을 강제로 팔아 이익을 남기는 일이었다고 보인다. 그것은 종교를 빙자한 장사이며 강도짓과 같은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가증한 일이었다.

[18-19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매양 저물매 저희가[그는]55) 성밖으로 나가더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였다. 왜냐하면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들이 그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고 그 의로운 자를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무지하고 악하였다. 그들은 예수 때문에 자신들이 대중들에게 받을 존경과 명예의 상실을 염려했던 것 같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과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세상의 것들을 두려워한 것이다. 저물 때에 예수께서는 성밖으로 나가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집인 줄 알아야 한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와 같다. 성도들의 모임인 신약교회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집이다.

둘째로, 우리는 교회를 이용하여 물질적 이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며 물질적 이익을 얻는 자들을 책망하셨다. 종교를 이용하여 물질적 이익을 구하는 것은 큰 죄악이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를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교회는 예배와 바른 말씀의 교훈과 전도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20-26절, 기도와 용서에 대해 가르치심

[20-23절]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신적 능력이 있으셨다. 그런데 주께서는 이상하리만큼 놀라운 교훈을 하셨다. 주께서는 우리의 기도 생활에 대해 교훈하신다. 우리에게 어떤 태산 같은 어려운 문제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가장 어려운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그 외의 것들은 그것에 비하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예심이나 욕심으로 이런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받는]56)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다. 성경은 기도의 응답을 약속한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요한복음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기도는 응답을 받을 때 가치가 있다.

[25-26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하시리라](전통본문).57)

‘혐의’는 ‘마음상한 일이나 책망거리’를 가리킨다. 형제의 허물을 용서치 않는 죄는 기도의 큰 장애물이다. 남의 죄를 용서해야 우리도 하나님께 용서함을 얻으며 기도의 문도 열린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셨고(마 6:12), 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다(마 6:14-15).

또 주께서는 용서에 대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8:35). 또 그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식사 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3:14). 서로의 발을 씻기는 것은 서로 용서함을 가리켰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새 계명을 잘 지키려면 서로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태산 같은 어려운 문제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또 그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철저히 회개하고 온전한 순종을 결심하며 간절히 기도하자. 또 우리는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주시며 우리의 기도의 문도 넓게 열린다.

27-33절,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

[27-28절]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요 구약교회의 직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부패되어 있었다. 가장 경건하고 거룩해야 할 그들이 그렇지 못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오늘날도 신학교들과 교수들이 부패한다면, 목사들이 쉽게 부패할 것이며, 또 목사들과 장로들이 부패한다면, 교회는 쉽게 부패할 것이다. 교회의 직분자들이 부패한다면, 교회의 희망과 장래는 없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질문했다. 예수께서 사람의 권위로 활동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적인 권위로 활동하는 것인지 질문한 것이다. 사람의 권위는 제한적이고 오류가 있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절대적, 무제한적이며 무오(無誤)하다. 그들의 질문이 참으로 알기 위한 질문이었으면 좋겠다. 예수께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이심을 아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이기 때문이다(요 17:3). 그러나 그들의 질문은 진지한 마음의 질문이 아니고, 단지 예수님을 반대하고 그의 말을 흠 잡기 위한 것이었다.

[29-3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하늘로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뜻하고, ‘사람에게로서’라는 말은 사람이 스스로 가지는 권위를 뜻한다. 사람이 스스로 가지는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세우시는 종들에게는 그가 주시는 권위, 특히 말씀의 권위가 있었다. 세례 요한이 그러했다. 모든 무리들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임을 알았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인정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세례 요한의 천적 권위를 인정하였다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도 인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31-33절]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들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종임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백성들 앞에 그것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를 참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무리들의 비난을 피하는 대답을 했다. 인간적으로는 지혜로운 대답인지 모르나, 진리의 세계에서는 비양심적이고 비겁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의 원천은 분명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위의 근원에 대해 묻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세례 요한의 권위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되물으셨다. 그것은 그들이 그를 믿는다면, 자신도 믿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가지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말씀하셨고(요 7:16-17), 또 그는 자기의 행한 일들을 통해 자기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요 14:11).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신적 구주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따르며 그를 사랑하며 증거하자.

12장: 변론하심

1-12절, 악한 포도원 농부들

[1-5절]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에게 돌을 던지며](전통본문)58)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산울’은 생(生)나무 울타리를 가리키고, ‘즙 짜는 구유 자리’는 포도즙을 짜는 큰 통을 둘 자리를 가리킨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은 이스라엘 나라를, 농부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비유하였다. 때가 이르자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었다. ‘포도원 소출’은 성도들의 선행의 열매를, 주인이 보낸 종은 선지자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한 삶을 요구하셨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서 선한 행위 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종을 영접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한 행위의 열매를 보이지 않았다. 주인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었다. 그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며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며 죽이기까지 하였다. 유대 지도자들은 악한 자들이었다. 교회가 타락하면 세상보다 더 악해지는 것 같다. 타락한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참된 종들을 핍박한다.

[6절]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신 그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증거하셨다. 그는 선지자들과 다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히브리서 1:1-2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충분하게 증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세우신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이 충족하게 기록되었다.

[7-9절]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그 농부들은 참으로 악하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이었다. 이 비유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그 유대인들의 행위는 인간의 무지와 배은망덕의 극치이며 종교적 부패, 교회의 부패의 극치일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이 말씀은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죽인 죄에 대한 대가를 크게 받을 것이다. 또 구약교회는 이제 선한 열매를 맺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것이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 곧 신약교회이다.

[10-11절]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건축자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약교회의 머릿돌이 되셨다.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주와 교회의 기초가 되셨다(고전 3:11). 이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사람들의 눈에 기이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가장 극악한 행위를 인류의 구원이 되게 하신 것이다.

[12절]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까지는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해치려는 악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의 생명을 오직 하나님께 의탁하며 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보화를 보화로 알지 못하는 저 무지한 죄인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며 그가 세상을 위해 가장 복된 선물로 주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어야 할 그들이 도리어 그를 잡아죽이려 하니 참으로 불쌍한 자들일 뿐인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시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를 영접하고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한 열매를 원하신다. 그것은 경건하고 바르고 선한 삶을 가리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바르고 선한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셋째로, 창조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경건하고 선한 삶을 살지 못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과 그의 일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고 마지막 심판 날에 마침내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13-17절, 그리스도인과 세금

[13-16절]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고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 중에서 사람들을 보내었다. 예수의 교훈은 악한 위선자들에게 눈의 가시와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를 미워했고 그를 잡아죽이려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으로는 경건함을 추구하였고 정치이념에 있어서는 반(反)로마적이었으나 헤롯당원들은 로마 황제가 세운 헤롯 왕을 지지하며 친(親)로마적이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예수께 와서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참되시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저 악한 자들은 예수님께 이 말을 진실한 고백으로가 아니고 그를 시험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외식함을 아셨다. 만일 그가 옳다고 말하면 그들은 아마 그를 친(親)로마파로 몰아 반로마적 정서를 가진 대중들과 대립시키려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만일 그가 옳지 않다고 말하면 그들은 아마 그를 반(反)로마파로 몰아 로마법을 어기고 황제를 대적하는 자로 고발하려 할 것이다.

사람이 궁지에서 범죄치 않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만 살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 앞의 이익이나 세상적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대로만 전진하는 것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죽음의 길이라 해도, 그것은 실패가 아니고 승리이다. 예수께서는 항상 그러하셨다. 우리도 그를 본받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게 하신 후 “이 화상(畵像)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다. 당시에는 주로 세 종류의 돈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첫째는 유대인의 동전이고 둘째는 헬라인의 은전이고 셋째는 로마인의 은전이었다. ‘렙돈’이라는 유대인의 동전은 가장 가치가 작았다. ‘드라크마’라는 헬라인의 은전은 ‘데나리온’이라는 로마인의 은전과 값이 비슷하였다. 한 드라크마 혹은 한 데나리온은 약 128렙돈이었다(NBD). 또 당시의 데나리온 은전에는 디베료 황제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은전을 사용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 가이사의 통치 아래 있음을 의미하였다. 가이사의 통치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신 현실이었다.

[17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로마 돈을 사용하고 있듯이 로마 나라에 대한 세금의 의무도 합당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성도가 세속국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도 보여준다.

첫째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세속국가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가이사의 영역이 있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 국가가 교회를 압제하고 핍박해서도 안 되지만,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려 해서도 안 된다. 중세의 교황들이 세속국가의 황제들을 힘으로 지배하려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 요한복음 19:36에서, 예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세상의 악들에 대해 책망하는 설교를 해야 하지만, 세속적 일들에 대해 사사건건 간섭하려 해서는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진술하였다: “[교회의] 대회들과 협의회들은 교회적 문제 외에는 아무것도 다루거나 결정해서는 안되며, 비상한 경우들에 겸비한 청원의 방식으로나, 국가의 위정자들로부터 요구된 경우에 양심의 만족을 위해 충고의 방식으로 외에는, 국가와 관계되는 세속적 사건들에 간섭할 것이 아니다”(31:5).

둘째로, 성도는 자신이 속한 세속국가의 일들에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조국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국가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지 않는 한, 그 법에 복종해야 한다. 국가가 정한 세금도 성실하게 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국가의 위정자들을 ‘하나님의 사자’ 혹은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불렀고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고 규정된 세금도 바쳐야 한다고 말했다(롬 13:1, 4, 6, 7). 사도 베드로도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교훈했다(벧전 3:13).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진술대로(23:2), 우리는 심지어 합법적 전쟁에도 참여할 수 있다고 본다.

다른 한편,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시 24:1)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려야 할 것을 보인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소득의 십일조 이상과 감사헌금을 즐거이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세속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자.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지 않는 한 순종하고 세금도 충실히 내야 한다. 우리는 또 하나님께 대한 의무도 다하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목숨까지도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행해야 한다.

18-27절, 부활을 증거하심

[18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부활’이란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몸의 부활을 믿지 않고, 부활을 정신적 부활 정도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서 부활은 죽은 몸의 부활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이었다. 유대인 공회 회원들의 한 부분은 바리새인들이었고 다른 한 부분은 사두개인들이었다(행 23:6).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사도행전 23:8에 보면, 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였고, 바리새인들은 다 있다고 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당시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 오경을 믿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자유주의자보다는 보수적이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 불신앙자이며 적그리스도 정신을 가진 이단들이다.

[19절]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주님’이라는 호칭보다 낮은 존칭어이었다. 그들은 수혼(嫂婚, levirate) 제도라고 불리는 구약의 법을 인용했다(신 25:5-6). 그것은, 형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첫아들은 형의 자손이 되게 하는 규정이었다. 이것은 모세 이전부터 있었던 법이었다. 우리는 창세기 38장에서, 유다의 아들들, 엘과 오난과 셀라와, 유다의 며느리 다말과의 관계에서 그 예를 본다. 수혼법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보존을 위한 규정이었다. 이스라엘 지파들의 보존은 메시아께서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위해 필요하였을 것이다.

[20-23절]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일곱 형제의 이야기가 실제적 사건이었는지 가상적 이야기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사두개인들은 이 기발한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의 생각을 시험하려 했다. 그러나 인간의 최선의 질문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질문에 불과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이다.

[2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한 자들이었다. 인간의 몸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가르치신 진리에 일치하며 하나님께서 능히 하실 수 있는 바이다. 죽음의 원인은 죄이다.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속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외부의 침입자와 같았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죄씻음이 있으면 부활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죄사함을 믿는다면 몸의 부활도 믿어야 한다.

또 인간의 영혼은 불멸적이다. 거기에 인간 존재의 가치가 있고 또 두려운 점도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멸적 영혼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는 사실은 부활체의 인간 존재를 예상케 한다. 또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극악한 악인이 자살함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이 세상에서 공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공의가 확립되려면 죽은 자들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는 부활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능히 살리실 수 있는 자이시다.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께는 부활의 능력이 있다. 신명기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죽은 자들의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오해하였다.

[25절]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부활한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는 것은 사람이 천사들과 같이 영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영과 육이 결합된 존재이며 이것이 사람의 사람다운 특징이다. ‘천사와 같다’는 말은 단지 내세에서는 자녀 증식이 필요 없고 육신적 정욕도 없기 때문에 천사들과 같이 결혼의 필요성이 없다는 뜻이다. 천사들은 영이기 때문에 결혼이 없다. 이와 같이, 천국에서는 결혼이 없을 것이다.

[26-27절]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모세의 책’이라는 말은 주께서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이 하나님의 종 모세가 쓴 책임을 증거하신 것이며, 더욱이 ‘책’이라는 단수명사를 쓰신 것은 그 다섯 권의 책들이 한 권의 책으로 간주됨을 증거하신 것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모세오경을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주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성과 신적 권위성을 밝히 증거하셨다. 우리는 성경을 의심하게 하는 사탄의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성을 비롯하여 성경의 권위를 확신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증거로서 단순히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얼른 보기에 부활과 상관없는 말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용된 이 말씀의 참뜻은 예수께서 설명하신 바와 같이 인간의 부활을 내포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결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기억 속에만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족장들의 불멸적 영혼들은 지금도 살아 있고 장차 부활하여 복된 인간 존재들로 나타날 것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뜻하신 바이다.

본문은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 증거하셨다. 첫째로, 우리는 사두개인들처럼 성경의 어느 내용은 믿고 어느 내용은 믿지 않는 잘못을 범하지 말고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믿는 자들이 되자. 오늘날에는 성경말씀에 대한 불신앙과 회의주의가 만연하다. 이것은 확실히 마귀의 미혹이다. 우리는 자유주의라고 하는 사두개파적 불신앙을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의 초자연적인 계시들과 기적들을 다 믿고 특히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성경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 믿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들과 기적들을 많이 증거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다 믿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죽은 자들의 복된 부활을 믿어야 한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근본적인 뜻이다. 복된 부활과 영생은 하나님의 뜻이다.

28-34절, 첫째 계명

[28-31절]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영혼]을 다하고 뜻[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것이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요](전통사본)59)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 중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신명기 6:5에는 목숨과 뜻 대신에 ‘영혼’이라는 한 단어로 되어 있다. ‘영혼’이라는 히브리어(네페쉬)는 ‘영혼’과 ‘목숨’이라는 뜻을 다 가지고 있다. ‘뜻’이라고 번역한 말(디아노이아 diavnoia)은 ‘생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영혼 즉 목숨과 생각과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분이시다. 그는 그의 창조물인 인간들로부터 최상의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는 우리의 부모님보다 남편과 아내보다 자녀들보다 형제들보다 더 존귀하시다. 그는 재물보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보다 더 가치 있으시다. 세상의 것들은 다 낡고 없어지지만 그는 영원하시다. 그는 참으로 모든 피조물에게서 최상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섬기며 순종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는 우리의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둘째로 중요한 계명은 인간 관계의 계명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5계명부터 제9계명까지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과 같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고 남을 죽이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않고 탐내지 않을 것이다.

[32-34절]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며 마음과 지혜와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이나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계명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구약시대의 제사 제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다 지키지 못한 죄악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제도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상징하였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물론, 하나님의 계명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생활 법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계명들을 지켜 바르고 선한 삶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 어떤 외적 종교 형식보다 더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그 서기관이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고 칭찬하셨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사람의 생활 기준을 보이며 또 사람이 그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 중에 첫 번째 계명을 알고 그것을 우리의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또 우리는 그 첫 번째 계명을 못 지킨 큰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우리는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자.

35-37절, 다윗의 주, 예수

[35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가르치심은 그가 하신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선지자의 사역이었다. 그는 참 선지자이셨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는 말은 ‘성전 뜰에서’ 가르치셨다는 뜻이다. 그는 산에서도(마 5:1), 바닷가에서도(마 13:1), 다락방에서도(막 14:15; 요 14-16장), 또 성전 뜰에서도 가르치셨다.

서기관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쳤다. 구약성경은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을 예언했다. 이것은 다윗에게 암시된 바이었고(삼하 7:12-17) 여러 선지자들에게 계시된 바이었다(사 11:1; 렘 23:5-6; 겔 34:23). 그러나 구약성경은 또한 메시아께서 신적 존재이심을 여러 곳에서 예언하였다. 메시아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리었고(사 9:6) 그의 근본이 태초로부터라고 예언되었다(미 5:2). 그러나 서기관들은 메시아의 한 면만 알고 메시아께서 신적 존재일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36-37절]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네 발등상(발판)이 되게 하기까지](전통본문)60)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거룩한 저자들이 쓴 책들이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쓴 시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증거하셨다. 그는 성경의 영감을 증거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친 음성을 듣지 못하지만, 성경책을 통해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과 권위로 인쳐진 말씀이며 오늘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도구가 되는 책이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구약성경 시편 110:1은, 메시아께서 단지 다윗의 자손이 아니고, 또한 ‘다윗의 주’라고 말한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구약 원문에서 ‘주께서’라는 말(예호와)는 ‘여호와께서’이며, ‘내 주께’라는 말(라도니)은 본문과 같이 ‘내 주께’이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장차 오실 메시아를 ‘나의 주’(아도니)라고 부른 것이다. 다윗이 자신의 먼 자손인 메시아를 ‘주’라고 부른 것은 그의 신성(神性) 때문이었다.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며 또한 다윗의 주이시다. 그는 참 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자는 그의 신성(神性)을 알아야 한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곧 ‘영광의 주’시며(고전 2:8; 약 2:1), ‘하나님’(요 1:1), ‘크신 하나님’(딛 2:13),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말했다(고후 4:3-6).

예수께서 인용하신 구약성경에 의하면, 메시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를 그의 발 아래 두실 때까지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이것은 메시아의 사역과 통치권을 보인다. 그는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시지만, 하늘로 올리우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시고 마침내 원수를 발 아래 밟게 될 것이다. ‘네 원수’는 사탄을 가리킨다. 사탄과 인류의 싸움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된 오래된 싸움이다. 창세기 3:1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뱀 곧 사탄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었다. 그 싸움의 승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을 때 법적으로 성취되었고, 그가 재림하실 때 실제로 사탄을 멸하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0,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예수께서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시고, 백성들은 그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神人兩性)을 알아야 한다. 그는 한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고 많은 고난을 받으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신성(神性)의 면에서,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곧 참 하나님이시며 영광의 주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인간들에게 멸시와 미움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황공한 진리이며 하나님의 크시고 놀라우신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행 20:28). 우리는 예수님의 신인 양성을 깨달음으로써 그에게 합당한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다윗의 주 곧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아니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님이시요 우리의 왕 곧 우리의 통치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에게 순종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말씀인 성경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사랑하고 읽고 배우기를 힘쓰며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주께서는 누가복음 7:46에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주와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신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에 복종하자.

38-40절, 악한 지도자들

[38-39절]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의 몇 가지 특징을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했다. 즉 그들은 외적 치장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성도는 외적인 단장을 힘쓰지 말고 내면적 단장, 곧 인격과 도덕성의 단장을 힘써야 한다(딤전 2:9-10).

둘째로,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이나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높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세상적 명예심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랍비나 선생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교훈하셨고 또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마 23:8-12).

우리는 이런 교만한 외식자들을 삼가야 한다. ‘삼간다’는 원어(블레포 아포 blevpw ajpo;)는 ‘떨어져서 본다, 주의한다, 피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람과는 가까이하지 말고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바른 종들과는 가까이하고 존경하고 순종해야 하지만, 이런 외식자들은 주의하고 피해야 한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교회에서 내어쫓고 멀리하라고 교훈한다(요삼 9-12).

[40절]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셋째로, 서기관들은 과부의 집과 재산을 삼켰다. 그들의 관심은 이 세상에 불타 없어질 물질에 있었다. 그들은 외로운 과부들을 위하는 선한 자들이 아니고 단지 그 과부들의 집과 재산을 취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악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기회가 되면 그 과부들의 재산을 삼켰다. 그들은 악하고 나쁜 탐욕자들이었다.

그러나 참된 지도자는 돈에 대해 깨끗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고 돈을 사랑치 않는 자이어야 한다(딤전 3:3 전통사본). 불타 없어질 땅의 것을 사랑하는 자는 땅과 함께 망할 것이지만, 영원히 있을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이다.

넷째로, 서기관들은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였다.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이었다. 우리는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헛된 일이다. 주께서는 기도에 대해 교훈하실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6:5). 하나님께서는 골방기도에 잘 응답하신다.

서기관들의 특징들은 요약하자면 외식과 명예심과 탐욕이다. 그들은 외식적 복장, 외식적 기도를 하였고 명예심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높임과 존경과 대우를 받기를 좋아하였다. 또 그들은 땅의 물질을 탐하는 자들이었다. 이런 특징들은 다 헛되고 악한 것들이다.

주께서는 이런 서기관들이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죄와 벌에는 경중(輕重)이 있다. 죄에는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으며, 벌에도 큰 벌이 있고 작은 벌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신다. 그의 심판은 지극히 공의로우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악한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자들과 가까이하지 말고 좀 거리를 두고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살피고 조심하고 피해야 한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고 그들과 교제하고 또 그들의 조언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악한 자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그들의 외식과 명예심과 탐욕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보다 그의 인격성을 중시하고,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보다 하나님과 천국을 사랑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41-44절, 한 과부의 헌금

[41-42절]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명하신 헌금은 십일조와 감사예물이다(레 27:30-33; 말 3:8-10).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하는 이유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천지만물의 창조주요 주인이며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시 24:1). 더욱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고전 6:19-20). 헌금은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를 사랑하며 그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는 작은 표시이다.

헌금의 용도는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이다. 구약시대의 십일조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활비이었다. 신약시대에도 교회는 헌금을 가지고 말씀의 일꾼들과 교회의 특별한 봉사자들의 생활비의 전부 혹은 일부를 공급하고, 또 국내외 전도를 위해 전도자들을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그들의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원해야 한다. 또 헌금은 교회 안의 어려운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위해서도 쓰여야 한다.

여러 부자들은 많이 넣었으나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한 렙돈은 128분의 1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작은 가치의 돈이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는데, 약 6만원으로 보면, 한 렙돈은 500원 정도이고,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는 1000원 정도이다. 가난한 과부는 지극히 작은 돈을 헌금했다.

세상에는 빈부의 차이가 있고 그것은 여러 요인들로 인해 생기는 현상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차이가 더 심화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부자들의 너그러운 자발적 구제 행위가 요청된다. 성도는 열심히 돈을 벌되 사치하지 말고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 바울은 부자들이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교훈하였다(딤전 6:17-19).

[43-44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예수께서는 그 가난한 과부가 부자들보다 많이 헌금하였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관심은 단순히 헌금 액수의 크고 작음에 있지 않으시다. 부자의 많은 헌금은 선하고 귀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헌금 액수의 크고 작음보다 헌금자의 마음에 관심을 두신다. 예수께서는 헌금자의 헌금 액수와 그의 경제 형편을 비교하여 평가하셨다. 그것은 헌금자의 마음에 대한 평가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어려운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였다. 그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과 뜨거운 사랑의 표시이었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이다(고후 8:1, 4, 7).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헌금을 단지 금액의 크고 작음으로 평가하려는 우리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생각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 없음, 사랑 없음을 고백하고 반성하며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본받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헌금의 생활을 반성해보자.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고 경외하며 사랑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온 세상의 주권자와 주인으로 참으로 인정하며 그를 이 세상의 지존자(至尊者)로 참으로 인정한다면, 또 우리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참으로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과 생명을 포함하여 우리의 가진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저 가난한 과부처럼 정성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3장: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종말

1-8절, 배교, 전쟁, 지진, 기근의 징조들

[1-2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당시의 성전은 헤롯 대왕이 세운 것으로서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름다운 돌들이 사용되었을 것이고 건물들의 구조와 외모도 웅장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런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들 앞에서는 압도당한다. 제자들도 그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장차 완전히 파괴될 것을 예언하셨다. 구약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도덕적이게 살 때에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그것이 마침내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우리는 예배당 건물보다 교인들의 경건과 도덕성을 중요히 여겨야 한다.

[3-4절]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조용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세상의 종말과 자신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루살렘 멸망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한 작은 모형적 사건이었다.61)

[5-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속임]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주께서는 첫째로 사람들의 미혹을 언급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으로 와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부패, 신학의 변질, 교회지도자들의 변질을 암시하신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사람들을 사용한다. 그들은 잘못된 사상, 잘못된 말과 글, 잘못된 책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속인다. 사탄은 사람들을 한두 명 정도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사용할 것이다.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에도 많은 거짓 목사들이 나타날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속임에 넘어갈 것이다. 목사들만 변하는 것이 아니고, 교인들도 변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3에서 주의 재림 전에 먼저 배교(背敎)하는 일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고, 또 디모데후서 4:3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예언하였다.

오늘날 사탄의 속임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났다. 첫째는 명백한 배교이다. 그것은 뿌리깊은 로마 천주교회와 19세기 중엽부터 나타난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등 각종 이단종파들과 20세기 말 이후 기독교계 전반을 부패시킨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고 왜곡시킨 이단 사상이다.

둘째는 타협적 복음주의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자유주의나 로마 천주교회는 우리와 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서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하며 협력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배교의 속임수 못지 않게 정통 기독교회를 혼란시키는 거짓말이며 사탄의 속임수이다.

셋째는 은사주의의 혼란이다. 은사주의는 조용한 성경 강론보다 열광적 은사체험을 강조한다. 그들은 확실히 열심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열심 속에서 그들은 성령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와 로마 천주교회를 포괄하는 연합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사탄의 속임수이다. 기독교의 중심은 열광적 은사체험에 있지 않고, 말씀의 충실한 가르침과 참된 믿음과 온전한 순종의 삶에 있다.

주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교훈하셨다. 사람들을 주의해야 한다. 사람들의 잘못된 사상과 말, 글과 책을 주의해야 한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신구약성경이다. 성경은 우리의 발에 등이며 길에 빛이다(시 119:105).

[7-8절] 난리(폴레모스 povlemo")[전쟁]와 난리[전쟁]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기근과 소동이]62) 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의 징조로서, 주께서는 둘째로 전쟁을 언급하셨다. 주의 재림 직전에, 전쟁들의 소문이 들릴 것이며,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의 전쟁들이 일어날 것이다. 20세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 지금까지 세계는 핵전쟁의 위험 속에 살고 있다.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 전쟁은 화학무기, 세균무기, 핵무기의 지극히 참혹한 전쟁이 될 것이다. 세상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가까워 오고 있다.

세 번째의 징조는 지진이다. 19세기말 이후 세계 곳곳에는 무서운 지진들이 있어왔다. 큰 지진의 힘은 약 1억 8천만 톤의 폭약(TNT)과 같으며, 그것은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원자폭탄의 만 배 가량의 힘이라고 한다. 20세기에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지진들은 24개 이상이었고, 그 중에 2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도 14개이며, 5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도 7개이었다.63)

네 번째의 징조는 기근이다. 기근은 홍수, 가뭄, 폭설, 태풍, 자원 부족, 병충해, 이상 기온 등 자연환경적 요인도 있을 것이지만, 인구 증가, 군사비의 과다 지출, 정치가나 재벌들의 부정축재, 경제정책의 실패, 경제 공황 등의 사회적, 제도적 요인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19세기 말부터 세계 곳곳에서는 큰 기근들이 있었다. 1870년대에 남부 인도에서 약 5백만명이 기근으로 죽었고, 중국에서는 9백만명 이상이 죽었다. 1929년과 30년에는 중국의 황하강의 홍수로 인한 기근으로 약 2백만명이 죽었다. 1943년 동부 인도 벵갈에 큰 기근이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150만명 이상이 기근으로 죽었다. 1960년대 이후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남부 사헬 지역과 남부 아프리카, 특히 이디오피아 등이 심각하여 수백만명이 죽었다. 1995년 세계은행은 지구상에서 매일 7억 5천만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사실은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이 가깝다는 징조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속이는 목사들이 많이 나타났으므로, 우리는 목사들을 주의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는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일들이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목사들을 분별하고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신구약 66권의 성경만 기준으로 삼아 성경적 교리들을 믿고 바른 생활교훈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전쟁들, 지진들, 기근들의 징조들을 볼 때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 예언하신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의 징조들은 다 이루어질 것이다. 이 세상은 결국 다 불타 없어질 세상이다(벧후 3:7, 10-12).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세계 곧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천국에만 소망을 두고 성경 교훈들만 힘써 행하자.

9-13절, 핍박과 세계복음화의 징조

[9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관리들, 통치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의 다섯 번째 징조로서, 예수께서는 핍박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주 예수의 제자들을 공회에 넘겨줄 것이다. 원문에 ‘공회’라는 복수명사는 유대인의 공회를 포함하여 법정들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사람들은 주 예수의 제자들을 회당에서 매질할 것이다. 유대인들의 예배당인 회당이 오히려 참된 성도를 핍박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관리들과 임금들 앞에 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심문을 받고 법정에 서는 것은 그들이 위정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전도할 기회가 될 것이다.

[10절]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의 여섯 번째 징조는 세계복음화이다. 사도행전의 증거대로, 핍박과 전도는 함께 이루어졌다. ‘만국’이라는 원어(판타 타 에드네)는 마태복음 28:19의 ‘모든 족속’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모든 민족, 모든 국가에 전파되어야 한다. 물론 세계복음화는 세계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세계 모든 민족,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계복음화는 교회의 최대의 임무, 곧 교회의 사명이다.

[11절]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주 예수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끌려 법정들에 서게 될 것인데, 그들은 그때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염려할 것이 없다. 그들은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말하는 이는 그들이 아니고 성령이시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설교자들과 핍박당할 전도자들에게 힘을 주시는 말씀이다.

[12절]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핍박은 가족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한 식구가 다른 식구를 죽음의 자리에 내어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6). 신앙은 가족 관계를 존중하지만 또한 그것을 초월한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유일하게 절대적 차원의 일이다.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내고 영생을 줄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과 힘과 위로이시다.

[13절]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며 핍박할 것이다. 이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따르는 길은 외로운 길이며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며 가야 할 길이다. 그렇지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참된 믿음은 인내를 포함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참고 견디는 자들은 영광에 이를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의 다섯 번째 징조는 핍박이며, 여섯 번째 징조는 세계복음화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핍박을 각오하고 조심해야 한다. 그 핍박은 때때로 가족들을 통해서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 관계를 초월한 절대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 또 우리는 핍박 중에서라도 오직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한다. 세계복음화는 신약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임무와 사명이다.

14-23절, 환난의 날과 미혹하는 기적들

[14절]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전통본문)6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다니엘서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은 세 구절에 언급 혹은 암시되어 있다. 9:27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가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할 것을 가리킨 예언이라고 본다. 다니엘 9장은 메시아의 강림과 죽음을 예언한 장이다. 11:31과 12:11은 수리아 왕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울 것을 가리킨 예언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이방인들의 신상을 가리킨다. ‘서지 못할 곳’은 성전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본문에는 ‘거룩한 곳’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의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들과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책에 증거되어 있다.65) 그러나 다니엘에 예언된 사건들은 장차 세상 종말에 이루어질 사건의 모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확실히, 주의 예언은 예루살렘 멸망 때 뿐만 아니라,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에도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게 될 것을 보인다. 그것은 마태, 마가 복음서들에 증거된 주님의 예언의 문맥에서 분명하다. 또한 이 사실은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주의 재림 직전에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 곧 교회 안에서 하나님처럼 높일 것을 예언한 것과도 통한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예언하시면서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쓴 유세비우스는 예루살렘 멸망 시 제자들이 요단강 건너편 베레아 지방 북쪽의 펠라라는 곳으로 도피하였다고 전한다.66)

[15-20절]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 일이[너희의 피함이](전통사본)67)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예루살렘 멸망의 때에 주의 제자들은 지체치 말고 도피하여야 했다. 성도들은 환난의 때에 롯의 아내처럼 세상 것들에 미련을 두지 말고 도피해야 한다. 그 환난은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이다. 임신과 출산과 아기 양육은 귀하고 복된 일이지만, 환난이 올 때 큰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또 예수께서는 “너희의 피함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겨울’이라는 원어(케이몬)는 일차적으로 ‘폭설’이라는 뜻을 가진다. 겨울에나 폭설 중에 피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환난 날의 계절과 일기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그 환난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환난일 것이다. 그러나 주의 백성은 그것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환난 기간의 길이나 그 혹독함의 정도는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시대에도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가 감당할 만큼 환난을 주실 것이다. 만일 그가 이런 배려를 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도 그 환난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실 것이다.

[21-23절]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주께서는 앞에서 거짓 목사들의 미혹에 대해 언급하셨었다(5, 6절). 그는 이번에는 거짓 목사들이 기적을 행하면서 속일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그들은 기적들을 통해 택하신 백성이라도 속이려고 할 것이다. 기적을 행하는 거짓 목사들의 속이는 말에 빠지지 않으려면, 조심하며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사탄이 주는 거짓된 기적들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기적을 좋아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리 하신 모든 말씀과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만 붙들고 바른 교리를 믿고 바른 교훈을 행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장차 대환난의 시대가 올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마침내 다 불타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가치와 소망을 두고 살지 말고 장차 임할 천국에 가치와 소망을 두고 살자.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있다면, 우리는 장차 세상에 임할 대환난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의 손안에 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과 인간 역사의 주인이시며 섭리자이시다.

우리는 오직 이 세상의 종말과 장차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성경책을 늘 읽고 하나님께 늘 기도하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성경말씀을 다 믿고 소망하며 생활함으로써, 즉 성경적 믿음과 삶으로 세상 종말과 대환난과 주의 재림과 내세를 준비해야 한다.

24-27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24-26절] 그때에[그 날들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人子)가 구름을 타고[구름 가운데서]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대환난의 날은 여러 날들일 것이다. 그때에 사람들의 미혹과 전쟁, 지진, 기근, 핍박, 배교가 있을 것이며, 그런 후 거기에 더하여 천체의 변화가 있고 그 유구한 규칙성이 흔들릴 것이다. 해는 어두워지며 달은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 

그때에 주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내려오실 것이다. 다니엘 7:13-14는, 장차 심판 권세를 가지고 오실 자를 ‘인자 같은 이’로 묘사하였다. 주의 재림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사건이다. 그의 재림 때에 하늘에는 구름이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영광스런 사건일 것이다. 그는 큰 권능과 영광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다. 그가 처음 세상에 오실 때에는 가난한 가정에 연약한 어린 아기로 태어나셨고, 따뜻한 방이나 포근한 병원 침대에서가 아니고 춥고 더럽고 냄새났을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의 먹이통 속에 누이셨었다. 그는 비천한 종,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심판자로서 큰 권능과 영광을 가지고 오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일 것이다. 사람들은 재림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볼 것이다. 우리 주님 예수의 재림은 어떤 불신앙적인 신학자들의 생각대로 ‘세상의 기독교화(化)’에 대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세상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세상이 더 악화될 것을 계시한다. 재림의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다.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땅으로 내려오실 것이다. 사도행전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사람들은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심을 볼 것이다. 요한계시록 1:7은,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말했다.

[27절] 또 그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주께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때에 택한 백성들을 모으실 것이다. 신약 성도들은 하늘로 끌려 올라갈 것이다. 이것이 소위 ‘휴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목적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택자들을 모으시기 위함이다. 죽은 성도들은 부활할 것이며 살아 있는 성도들은 변화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악인들의 심판을 위해서이다. 사도신경의 표현대로,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는 마지막 대환난 후에 오실 것이며,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게 오실 것이며, 큰 권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그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하늘 이끝에서 하늘 저끝까지 모으실 것이다. 죽은 성도들은 부활할 것이며 살아 있는 성도들은 변화될 것이다. 그들은 다 영생할 몸을 얻을 것이며 복되고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주의 재림은 악인들에게는 큰 두려움이 될 것이다. 재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행위대로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며, 특히 악인들을 엄중하게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또 낙심하지 말고 성경말씀을 다 믿고 행하며 또 이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자.

28-37절, 깨어 있으라

[28-31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이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이런 징조들, 즉 전쟁, 지진, 기근, 세계복음화, 배교, 거짓 기적주의, 핍박 등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주의 재림이 가까이 이른 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본문은 비록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을 포함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 세대’는 30년 혹은 길게 잡아 100년을 의미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내세’와 대조해 ‘이 시대’ 혹은 ‘이 세상’을 의미할 것이다. 예루살렘 멸망은 역사상 주후 70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주의 재림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대사건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새 삶을 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해야 한다.

[32-33절]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깨어 있어 기도하라](전통본문).68).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세상의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반드시 올 것이지만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아들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물론 이 말씀을 그의 신성(神性)의 면에서 생각할 수 없고, 단지 그의 인성(人性)의 면에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는 신성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동질적이시지만,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동질적이시다. 사람의 지식은 제한적이다. 주의 재림의 날짜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의 날을 예언했던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안식교도들, 또 어떤 휴거론자들은 마귀에게 속은 자들이요 또 남들을 속이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또, “주의하라, 깨어 있어 기도하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33절 이하에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하셨다(33, 35, 37절).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34-35절]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깨어 있다’는 말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구원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이며, 산 자들은 이제 깨어 있어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생활이다. 고린도전서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은 구원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며(살후 3:2) 하나님의 은혜이다. 소망은 신자의 힘과 기쁨의 원천이며, 사랑은 생명의 표이며 열매이다.

[36-37절]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주의 재림은 많은 이들에게 갑작스러울 것이다. 성경은 주의 재림의 갑작스러움을 ‘도적같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마 24:43; 살전 5:2). 깨어 있지 못한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잠잔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우상숭배나 돈 사랑, 세상 사랑, 쾌락 사랑, 또 온갖 불의와 미움, 음란, 거짓 등에 빠지는 것이 잠자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깨어 있으라’는 주의 말씀은 당시의 제자들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신 말씀이며 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하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구원을 받아야 하며, 구원받은 산 자들은 불경건과 부도덕의 죄 가운데 잠들지 말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생활을 실천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 징조들과 더불어 확실히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세상의 종말과 주의 재림의 징조들이란 전쟁, 기근, 지진, 배교, 세계복음화, 핍박, 거짓된 기적주의 등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징조들을 볼 때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고, ‘아, 세상의 종말이 가깝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지고 있구나!’ 하고 이 세상의 종말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함을 느끼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의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은 천사들이나 심지어 인간 예수님 자신에게도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깨어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다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영원한 형벌의 멸망이 될 것이다. 또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불경건과 죄를 멀리하고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이 깨어 있는 생활이다. 깨어 있는 생활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우리는 늘 깨어 있는 성도가 되자.

14장: 잡히심

1-9절, 값진 향유를 부음

[1-2절]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民擾)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유월절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1월 14일 저녁이었고 무교절은 1월 15일부터 7일 간이었다(레 23:5-6). 이 두 절기는 때때로 동일시되기도 한다(눅 22:1).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때 유대인들은 어린양을 죽여 그 피를 대문틀 위 아래와 양옆 기둥에 발랐다.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궤계로 즉 은밀하게, 교묘히 잡아죽일 방책을 구하며 말하되 민요(民擾)가 날지 모르니 명절에는 말자고 하였다. 그들은 명절에 모여들 군중의 반대를 두려워하여 명절을 피하여 이 일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만일 예수께 무슨 죽일 죄가 있었다면, 정당한 절차를 따라 재판을 통해 처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 악한 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3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이 사건은 요한복음 12장에 기록된 사건과 같은 사건인 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오셨고 이틀 전에 이 일이 있었다. 향유를 부은 여자는 마리아일 것이다. 그는 자기가 간직하고 있던 매우 값진 순전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께 부었다. ‘옥합’은 석고병을 말한다. 본문은 그 여자가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말하고, 요한복음은 그의 발에 부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머리와 발에 다 부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그가 심지어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고 증거한다.

그 향유는 매우 값진 것이었다. 본문과 요한복음 12:5에는 그것이 300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암시되어 있다. 3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300일 품삯에 해당하고, 하루 품삯을 6만원만 치면 약 1,800만원이 되는 가치이다. 그것은 분명히 그 여자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그의 결혼을 위해 준비해둔 것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것은 자기 몸에 바르기 위해, 자신의 육신적 아름다움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의 생각이 달라졌음에 틀림없다. 우선, 그는 세상적 가치가 헛됨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가 마리아라면, 그는 오빠의 병과 죽음과 회생을 통해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람은 죽음 앞에 설 때 세상의 것들이 무가치함을 알게 된다. 그것은 세상의 금은보물이 자기 목숨을 건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300데나리온이 큰 것이지만, 이제 그 여자는 세상적 가치관을 넘어서게 되었다.

더욱이, 그 여자는 그 향유가 자기에게보다 예수께 더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수를 참으로 귀한 분으로 깨닫게 되었다. 예수는 인간적으로 자기 오빠를 병과 죽음에서 건져내 주신 은인이었다. 그 사실만 생각해도 그 향유의 옥합은 결코 큰 보답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병원들에서 못 고치던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준 병원에 몇 억을 기증한 아버지의 보답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뿐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믿었음에 틀림없다. 매우 값진 향유의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은 예수께 대해 가장 숭앙하고 가장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2천만원짜리 향유 옥합을 깨뜨려 드릴 만큼 귀한 분이셨다. 그 여자의 행동은 예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이기적 생각이나 외식적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는 그 향유가 자기 같은 죄인이 바를 것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4-5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 여자가 부은 그 값비싼 향유가 쓸데없이 낭비된 것이었는가?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여자를 책망한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가 아니고 돈궤를 맡은 자로서 거기 든 것을 훔쳐가는 도둑이기 때문이었다.

[6-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아니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사람의 행동의 동기를 보신다. 그는 선한 동기로 하는 행위를 귀히 보신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해심이 부족하다.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다. 가난은 반드시 환경이나 사회구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고, 많은 경우 게으름과 낭비와 과도한 욕심 때문에 온다. 우리는 갑자기 부자 되려 하지 말고 정직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선한 일이다. 우리는 원한다면 아무 때라도 그를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몇 일 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그는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다.

[8-9절]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그 여자가 자기의 가진 가장 귀한 보화를 주를 위해 사용하였을 때 우연하게도 그것은 주님의 장례식을 미리 준비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렇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의 한 일을 귀하게 여기시고 칭찬하셨다. 단순한 칭찬이 아니고, 그 여자의 한 일이 복음이 전파될 세상의 모든 곳에서 알려져야 할 모범이라고 암시하셨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많은 구제보다 귀한 일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에서 나온 지극히 높은 숭앙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헌신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보다 귀하다. 우리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홀로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 지식을 가지고 그를 사랑하며 그에게 헌신하자. 비록 우리에게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향유 옥합 같은 것은 없을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귀한 것, 즉 우리의 재능과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릴 줄 아는 제자들이 되자.

둘째로, 오늘날 하나님 사랑, 예수님 사랑은 일차적으로 그의 복음 사역, 영혼 구원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믿음의 일과 참된 교회를 건립하는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은 결코 시간의 낭비, 물질의 낭비가 아니고, 우리 인생의 삶 중에서 가장 귀한 일이다. 오늘 우리의 향유 옥합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도 우리의 가장 귀한 것, 곧 우리의 재능, 우리의 시간, 우리의 힘, 우리의 물질, 아니 우리 목숨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원하시는 일을 위해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와 한 명의 영혼의 구원과 그의 참된 교회의 건립과 부흥과 발전을 위해 드리자.

10-16절, 유월절 식탁 준비

[10-11절]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는 많은 제자들 중 열두 명의 수에 든 자이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은혜로운 말씀들을 들었고 그의 선한 인품과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았다. 그는 전도하기 위해 여러 동네들로 보냄을 받았다. 그는 병 고치는 능력을 받아 병자들을 고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자가 되었다. 확실히, 그는 참 믿음과 회개로 나타나는 거듭남의 은혜는 받지 못하였다. 유다가 선생님을 배신한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돈을 사랑했고 돈을 훔치곤 했었다. 요한복음 12:6,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한복음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6:64) 마침내 마귀의 이끌림을 받았다고 증거한다(13:2).

[12-14절]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유월절은 1월 14일 저녁이고, 무교절은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 간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하루를 해질 때부터 다음 해질 때까지로 보기 때문에 유월절과 무교절의 첫날은 오늘 우리의 개념으로 보면 같은 날 저녁이다. 그 두 날은 때때로 동일시되었다. 보내심을 받은 두 제자는 누가복음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었다(눅 22: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명령을 하신 것은 그의 신적 지식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경제적으로 유여하지 못하셨다. 그는 많은 돈을 저축하거나 좋은 집을 구입하려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부하려 하지 말고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생각하는 것도 최선의 생각은 아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자립적이고 독립적이게 키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단지 자신을 위해서나 자녀들을 위해서만 쓰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즉 전도와 구제를 위해, 참된 교회의 건립과 발전을 위해 써야 할 것이다.

[15-16절]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경제적 여유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하셨다. 하나님께 헌신된 한 성도를 통해 큰 다락방이 준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종들의 필요한 것을 준비하신다. 이것은 주의 종들에게만 해당되는 원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성도의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 우리는 의식주를 염려하거나 욕심부리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바로 살고 죄 짓지 말고 의와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돈을 사랑하지 말자.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결국 믿음을 잃어버리고 그 영혼이 멸망에 이를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고 돈을 땅에 쌓는 자가 되지 말고 하늘에 쌓는 자, 즉 전도와 구제를 위해 돈을 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 의식주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다.

17-21절, 예수님을 배신할 자

[17-20절] 저물매 그 열 둘을 데리시고 와서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배신하리라] 하신대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이르시되 열 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 집에 들어가 예비된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 저녁식사를 준비하였다. 날이 저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오셔서 함께 앉아 식사를 하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배신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주와 함께 식사하던 열두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주님을 배신하고 원수들을 도와 주님이 잡히게 할 것이다. ‘내니이까?’라는 원어(메 티 에고 mhv ti ejgw)는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이다. 이런 일은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열 한 명의 마음은 진실히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자이며 마침내 그를 배신할 자이었다.

[21절] 인자(人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세 가지 사실을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고난의 길을 가실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는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피흘리실 것이 예표되어 있거나 예언되어 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피흘려 죽으심을 예표하였다. 또 성막 제도에는 제물의 죽임과 피흘림 그리고 그 피를 성소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림 등이 있었다. 이것도 메시아의 죽으심과 피흘리심을 예표하였다. 구약성경에는 예표적, 상징적 사건들과 말씀들 뿐만 아니라, 또한 직접적인 분명한 예언들도 있었다. 창세기 3:15에 기록된 대로, 뱀은 여자와 원수가 되고 그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될 것이며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어떻게 고난을 통하여 원수 마귀를 이기실 것인가를 암시하였다. 특히, 이사야 53장 전체는 메시아의 고난과 죽으심을 예언한 놀라운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예표되고 예언된 대로 죽음의 길을 가셔야 했다. 그것은 그의 길이 하나님에 의해 작정되어 있었고 그 작정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누가복음 22:22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작정하신 대로 간다고 말씀하셨다.

둘째로, 그러나 그를 배신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책임의 관계를 가르쳐 준다. 가룟 유다가 주 예수를 배신한 것은 하나님의 작정된 바이지만, 그는 그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행위와 자연스럽게 연관된다. 하나님의 작정 진리는 숙명론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작정하셨으므로 사람이 무슨 일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인간의 책임 있는 행위를 긍정하고 요청한다.

구원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예정과 선택이 제1원인이지만, 구원받는 인간의 회개와 믿음과 순종은 당연히 요청된다. 회개하고 믿지 않으면 또 순종치 않으면 누구든지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결코 인간의 행위의 책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선택과 예정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고 순종할 수 있다. 악인들의 악행도 하나님의 작정된 바이지만, 그 악행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 가룟 유다의 악은 하나님의 작정된 바이지만, 그 악에 대한 책임은 가룟 유다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인간의 악행에 대한 책임의 관계를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는,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일들에 있어서 주권을 가지고 행하시고 이루신다는 사실과, 인간은 자기 악한 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악행까지도 주권적으로 작정하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주는 주권적 통치자가 없고 오직 불확실한 미래를 가진 수수께끼가 되고 말 것이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가룟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다. 이것은 사람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해준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가치가 단순히 출생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인간으로 출생했다는 것이 반드시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 그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았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으로 출생했다는 사실이 복이 아니고 오히려 화였다. 그것은 특히 사후에 심판과 지옥 형벌이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인간의 가치는 사람이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섬기며 그의 뜻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데 있다. 경건과 도덕성이 인간을 가치 있게 한다. 하나님께서 주권적 긍휼과 은혜로 선택하신 자들은 그런 삶을 살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확증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감사히 받자.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 같은 제물이 되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책임의 신비를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청산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순종하자.

셋째로, 우리는 인간의 가치가 경건과 도덕성에 있음을 알고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악한 삶을 버리고 경건하고 바르고 선한 삶을 살자.

22-26절, 주의 몸, 주의 피

[22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그들이 유월절 저녁식사를 할 때에 예수께서는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으라[받아 먹으라](전통사본).69) 이것이 내 몸이니라.” 이 말씀은 그 떡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그 떡 속에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비유적인, 상징적인 말씀임에 틀림없다. 그 떡은 분명히 실제로 떡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는 뜻이다. 떡을 떼어 나누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찢기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전에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신 후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요 6:51). 떡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의 기력을 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우리에게 참된 생명의 양식이 됨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물론 영적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내일 십자가 위에 못박혀 찢기고 상하실 그의 몸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실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을 것이다.

[23-24절]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께서는 또 잔을 가지고 감사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그것을 마셨다. 그는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새 언약](전통본문)70)의 피니라.” 이 말씀도 역시 그 포도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된다거나 그 포도즙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즉 그 포도즙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였다. 제자들은 실제로 포도즙을 받아 마셨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마신 것과 같은 뜻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이 참 양식인 것처럼 자신의 피도 참 음료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요 6:55). 피는 생명이다. 피가 없으면 생명체는 죽는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제사 제도에서 피는 죄를 속하는 뜻을 가졌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를 상징하였다. 그것은 속죄의 피이었다. 유월절 저녁식탁에서의 포도즙은 그런 의미를 가졌다. 그의 피는 많은 사람을 위해, 그들의 죄사함과 영생을 위해 흘리는 언약의 피이시며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는 피이시다.

[25-26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니라.

예수께서는 또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을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요 14:6). 천국에서는 즐거운 잔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주님과 함께 즐거이 음식을 들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 후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택한 백성을 대속(代贖)하신 일이다. 그는 그 대속 사역을 성찬식을 통해 증거하셨다. 그것이 오늘날 신약교회가 시행하는 성찬식의 의미이다.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받는다. 그것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새 언약의 내용이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이제 우리는 그 은혜를 감사하며 그를 위해 살며 그에게 충성하자.

27-31절, 베드로의 결심

[27-28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이것은 성경에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 구약 스가랴 13:7에는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다시 살아나실 것과 그런 후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갈릴리에서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은 갈릴리에서 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전도자의 사명을 처음 받았던 갈릴리에서 그들의 사명감을 다시 새롭게 하기를 원하셨다.

[29-31절]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주께서는 베드로가 연약하여 실패할 것을 알고 계셨다. 주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두 번의 고백은 진심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죽을 각오를 가졌음을 고백할 수 있는 자는 훌륭한 제자임에 틀림없다. 베드로만 그런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그 밤에 그들은 다 주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다(50절). 또 베드로는 그 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주의 제자들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일은 모든 사람 곧 우리의 의지의 연약함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너무 자신을 의지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도우심을 구하며 의지하며 행하자.

32-42절,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32-34절]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헤 프쉬케 무 hJ yuchv mou)[내 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겟세마네는 예루살렘 성전 동쪽 골짜기 너머에 있는 동산이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기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는 자주 기도하셨고 열두 제자들을 세우실 때에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다(눅 6:12-13).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에도 기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그때 그는 심히 놀라며 슬퍼하시며 “내 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예수님의 고통스런 모습을 본다. 십자가 형틀은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도 그 위기의 밤을 잘 이기려면 깨어 기도해야 했다.

[35-36절]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아바’라는 말은 아람어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잔’은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리는 고난을 말한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소원은 인간 예수님의 마음의 불안과 고통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은 그의 순종의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보다 훨씬 선하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최선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해야 한다.

[37-38절]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토 프뉴마 to; pneu'ma)[영]에는 원이로되 육신(헤 사르크스 hJ savrx)[몸]이 약하도다 하시고.

사람이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깨어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면 시험에 빠질 수 있다. 시험을 이기는 길은 깨어 기도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또 “영은 원하되 몸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영의 활동은 마음으로 표현되므로 이것은 영과 몸의 대조이며 또한 마음과 몸, 즉 심신(心身)의 대조이다.

[39-42절]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께서는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셔서 보시니 그들이 자고 있었다. 그 밤에 그의 기도는 동일한 내용이었다. 그 기도는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아마 약 세 시간의 기도이었을 것이다. 그가 한번의 기도가 끝날 때마다 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세 번째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또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깨어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심령은 원하지만, 우리의 육신이 약하기 때문이다.

43-52절, 잡히심

[43-47절] 말씀하실 때에 곧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많은] 무리가 검과 몽치[몽둥이]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랍비여, 랍비여](전통사본)71) 하고 입을 맞추니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인간 관계에서 입맞춤은 일반적으로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지만,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속이는 입맞춤이었다. 그것은 파송된 군사들로 하여금 예수를 확실히 잡게 하는 하나의 신호이었다. 요한복음은 곁에 섰는 자 중에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린 자가 베드로이었고 그 종의 이름이 말고임을 증거하였다(요 18:10).

[48-50절]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큰 죄인처럼 잡히시는 일이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성경에 능통하셨다. 또 그의 생애는 성경의 예언과 예표를 이루는 생애이었다. 우리도 어떤 점에서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함으로써 성경에 능통하기를 원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애도 성경의 교훈을 행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생애가 되기를 원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잡히셨다. 그때 그의 제자들은 다 그를 버리고 도망했다. 그것은 제자들의 진심의 결심대로 되지 않았고 “너희가 다 이 밤에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대로 된 일이었다. 그들은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고백했었다.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말했었다(31절). 그러나 그 위협과 공포가 있었던 현장에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하였다.

[51-52절]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청년들이 그를 잡자](전통본문)7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이 청년은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 중요한 책에 그 의미 없어 보이는 부끄러운 일을 기록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마가는 유월절 식사 후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라 겟세마네 동산까지 왔던 것 같다. 여하튼 베 천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다는 말은 그때의 두려운 분위기를 증거해준다. 당시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라도 그런 때에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라도 그런 위기 상황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의 뻔뻔스런 배신과 거짓된 입맞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도망침을 경험하셨다. 주께서는 마음의 큰 고통을 경험하셨다. 그것은 목회의 고통이었다. 그것은 구약교회를 목회하시는 하나님의 고통스런 마음과 같았다. 그것은 인간의 연약을 보시고 참고 품고 가셔야 하는 고통스런 일이었다. 교회를 목양하는 주의 종들은 세상에서 그런 고통을 각오하고 그런 인내를 배워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받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말고 주의 이름으로 당할 각양의 고난을 각오하고 끝까지,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53-65절,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심

[53-54절] 저희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이었다(마 26:57).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산헤드린 공회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최고회의의 의원들이었다. 그 새벽에 그들이 다 모인 것을 보면, 그 회의는 예수를 정죄하여 죽이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 소집된 계획된 회의이었다.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사회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의인(義人)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여 죽이려 할 정도로 극도로 부패해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좇았다. 그는 제자들 중에 그래도 용감한 편이었다. 비록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지는 못했으나 멀찍이라도 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갔고 직원들과 함께 불을 쬐었다. 때는 이른봄이었고 밤 날씨는 쌀쌀했던 것 같다.

[55-59절]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는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들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죽을죄를 지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14:1의 증거대로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려고 뜻을 정하였고 계획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 대해 거짓 증거하는 자들은 많았으나 그 증거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만한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다.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거짓되이 정죄하려 하였고 거짓 증인들은 그를 거짓되이 비난했다. 그러나 거짓 증거는 마귀의 죄요(요 8:44) 제9계명을 범하는 죄요 지옥갈 만한 큰 죄요(계 21:8) 천국 들어가지 못할 죄이다(계 21:27; 22:15). 잠언 19:5는,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고 말하였다.

[60-62절]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人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공회 앞에서 자신의 신분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대답하셨다. 그는 그 질문에 대하여 잠잠할 수 없으셨다. 그 질문은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묻는 중요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은 꼭 필요한 때에 말씀하셔야 했던 중요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또한 온 세상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찬송받으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신 것이다.

“너희는 인자(人子)가 권능의 오른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말씀과 일치한다.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다니엘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人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모든 사람들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날에 그가 하늘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는 것을 볼 것이다(계 1:7).

[63-64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예수의 증언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그 증언이 참람하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한 증거라고 간주하였다. 공회원들도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였다. 누가복음에 보면,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은 그들의 결의에 반대하였다(눅 23:50-51).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한 것은 이성적으로 정당한 판단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실 수 없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했었다. 예를 들어, 예수가 무슨 죄를 지었다든지, 거짓된 일이 있었다든지, 혹은 기적을 행하지 못하였다는 등의 증거들이 있어야 했으나 그런 증거들은 하나도 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본장 55절은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부당한 재판과 정죄를 받으셨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는 아무런 반증(反證)도 없이 그를 정죄한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은 예수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이며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우선, 주님 자신의 분명한 증언이 있다. 주께서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또한 그가 행하신 많은 기적들이 있다. 예수께서는 각종 병자들, 예를 들어 나병, 중풍병, 열병, 귀신 들림, 소경, 혈루증, 벙어리, 손 마른 병, 절뚝발이 등을 고치셨고 또 죽은 자를 살리셨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고 물 위로 걸어오셨고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셨다. 더욱이,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이런 증거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증거들이다.

[65절]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했고 그를 멸시하였다. 불경건하고 악한 세상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이와 같이 학대하였다. 예수께서는 이전에 제자들이 선생보다 더 낫지 못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마 10:24). 그러므로 그의 제자된 우리도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와 매맞음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공회에서 부당한 심문을 받으셨고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되셨다. 그는 또 사람들에게 침 뱉음과 주먹과 손바닥으로 침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께서는 죄인들에게 멸시와 학대를 당하셨다.

둘째로,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의 공회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또 그의 신분에 대한 증거들은 풍부하였다. 그가 행하신 모든 기적들과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한다. 이 모든 증거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이 많은 증거들을 믿지 않는다면, 어떤 증거를 통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는 구원의 가망이 없는 자일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은 자, 곧 버림받은 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을 자는 다 성경의 증거들을 통해 그를 믿는다. 우리는 그를 확신하자.

셋째로, 우리는 그의 이름과 그의 교회를 위해 당할 각가지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고난과 핍박의 길이다. 왜 고난이 있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 마귀와 악령들이 활동하고 있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 많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자가 선생보다 더 낫지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께서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면, 우리도 그러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물론 자신을 살펴 회개할 것이 있으면 해야 하지만, 그 고난을 참고 견뎌야 한다.

66-72절, 베드로가 주를 세 번 부인함

[66-68절]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婢子)[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마침 닭이 울더라.]73)

베드로의 부인은 육신의 목숨을 위한 비겁한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던 이전의 그의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행위이었다. 그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을 저버렸다. 그것은 인간의 부끄러운 연약함이었다. 3년 간의 제자훈련이 아무 소용이 없어 보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없고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킬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마침 닭이 울었다. 이것은 첫 번째 닭의 울음이었다. 베드로는 여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한 후 앞뜰로 나갔다. 앞뜰은 입구 쪽을 말한다. 그것은 그가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보이는 것 같다.

[69-70절] 비자[그 여종](원문)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너는 갈릴리 사람이며 네 말씨가 그러하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전통본문).74)

‘그 여종’은 처음 여종을 가리켰다고 본다. 두 번째 말한 사람에 대해 복음서들은 ‘다른 여종’(마 26:71),75) ‘다른 사람’(눅 22:58),76) ‘사람들’(요 18:25) 등 다양하게 말한다. 두 번째는 그 처음 여종을 포함하여 다른 한 여종과 또 남자들이 함께 말했다고 보인다.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너는 갈릴리 사람이며 네 말씨가 그러하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마태와 마가의 증거는 동일하지만, 누가는 “또 한 사람이 말했다”고 증거하고(눅 22:59), 요한은 “대제사장의 종 하나가 말했다”고 증거한다(요 18:26). 이때도,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말했는데 그 중에 한 사람 특히 대제사장의 종 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71-72절]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였다. 그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은 참으로 철저한 부인, 철저한 비겁과 불신실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큰 죄이었다. 그때 닭이 곧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울었다. 그는 심히 통곡하였다(마태, 누가).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그것도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부인한 것은 참으로 비겁하고 부끄러운 일이며 큰 죄이었다. 우리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부인치 않는 자가 될 수 있을까?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써 충성되고 능력 있는 증인들이 되었다. 그들은 핍박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주를 증거했다(행 4:8, 19-20, 31; 5:40-42). 오늘날 우리도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항상 성령 충만함으로써 죽도록 충성하는 증거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5장: 죽으심

1-15절, 빌라도에게 정죄되심

[1절]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유대인들의 공회는 이른 새벽 미명에 모였다(눅 22:66). 대제사장들은 그 새벽에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정죄한 후 그를 결박하여 끌고가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예수님은 죄수처럼 결박을 당한 채 총독의 법정 앞에 서셨다. 당시에 유다 나라는 로마 나라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로마 총독의 판결이 필요하였다. 특히 사형의 경우 그러했다. 요한복음 18:31에 보면,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었다.

[2절]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길 때 정치적 죄목을 걸었다. 로마 총독에게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럴 듯한 일이었다. 로마 제국에서 가이사 황제만 왕이며 또 그가 유대 나라에 세운 헤롯 외에 다른 왕이 있을 수 없었다.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그것은 가이사를 대항하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19:12에 보면, 유대 지도자들은 과연 이런 논리로 빌라도를 몰아붙였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공식적 재판 자리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임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네 말이 옳도다.” 유대인 공회 앞에서의 증언이 중요했듯이, 빌라도 법정 앞에서의 증언도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셨다. 그는 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유대인의 왕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믿고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3-5절]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로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악한 자들은 의로우신 예수께 대해 많은 비난거리를 만들어 빌라도에게 말했지만 예수께서는 그것들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대답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셨던 것 같다. 빌라도는 그것을 기이히 여겼다. 사실, 저 악한 자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려고 뜻을 정하였다.

[6-10절]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前例)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소리치며]77) 전례대로 하여주기를 구한대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함을 알았고 그를 놓아주기를 원했다. 시기는 무서운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인 죄악이다.

[11-14절]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무리들은 참으로 무지하고 무정하였고 불의하고 배은망덕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권력자들 앞에 아부하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15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

총독 빌라도는 백성의 여론에 몰려 불의하고 비양심적인 판결을 내렸다. 그는 예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리에게 만족을 주려고 잘못된 판결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와 미움과 악함, 무리들의 무지, 무정함, 배은망덕, 기회주의, 또한 빌라도의 불의하고 비양심적인 판결 때문에 정죄되셨다. 그는 악인들의 죄 때문에 정죄되셨다. 죄 없으신 그가 죄인들 때문에 정죄되셨다. 그 대신, 살인자 바라바가 풀려났다. 주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고 그 대신, 한 죄인이 옥에서 풀려난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주와 왕이심을 바로 믿자.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지옥 형벌을 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며 성경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목적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며 살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이시며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는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그를 섬기며 그에게 복종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길이며 선한 길이고 평안과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셋째로, 우리는 시기심과 악함과 배은망덕과 기회주의와 비양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말씀대로 바르게 살아가자.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심과 악함, 무리들의 무지와 배은망덕과 기회주의, 그리고 로마 총독 빌라도의 불의하고 비양심적인 판결의 죄악은 바로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의 내용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연약성의 요소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성화요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시기심과 악함, 배은망덕과 기회주의, 비양심을 다 버려야 한다.

16-28절, 십자가에 못박히심

[16-20절]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예수께서는 총독 빌라도에 의해 정죄되시고 사형 언도를 받으신 후 군인들에게 조롱을 당하셨다. 자색 옷은 왕의 복장을, 가시 면류관은 왕의 금관을 흉내낸 것이었다. 예수께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군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그를 조롱하였다. 희롱을 다한 후 군인들은 그에게서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그를 끌고 나갔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불경건한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조롱을 당하셨다.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십자가는 거기에 달릴 죄수가 지고 가는 것이 로마의 사형 집행 규정이었던 것 같다. 요한복음 19:17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에 나오셨다. 십자가 형틀은 크고 무거워서 예수께서 혼자 지시기에 힘드셨을 것이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같이 지고 갔다고 보인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잡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형틀을 같이 진 시몬 외에 그 십자가를 자원함으로 나누어질 제자가 하나도 없었다!

본문이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증거하는 것은 뜻이 있어 보인다.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교회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로마서 16:13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말하였다. 그 루포가 아마 본문의 루포일지 모른다. 여하튼, 구레네 시몬는 그 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자녀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불평스럽게 억지로 하였을 것 같은 그 봉사가 자신과 온 가족이 예수 믿고 구원의 복을 받는 기회가 된 것이다.

[22-23절]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78)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해골의 곳’이라는 뜻의 골고다는 그 언덕의 모양이 사람의 머리 모양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라고 한다. 군인들은 예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다. 마태는 ‘쓸개 탄 포도주79)’라고 기록했다(마 27:34). 그것은 십자가형을 당하는 죄수들에게 그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주는 ‘쓰고 신 포도주’를 가리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포도주를 받지 않으셨다. 우리를 위해 자원함으로 십자가를 지시는 그는 십자가에서 당할 고통을 피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24절] 십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당시의 십자가 처형 방식은 양손을 펴서 각각 못박고 양발을 포개어 못을 박는 것이었다고 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눅 24:39), 그는 분명히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셨다. 군인들은 또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다 취했다. 예수께서 이렇게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시고 겉옷과 속옷을 다 빼앗기신 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시편 22:16, 18은,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라고 예언하였다.

[25-26절] 때가 제3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마가는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시각을 증거하였다. ‘제3시’는 오늘날의 아침 9시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새벽에 유대인의 공회에서 심문받으시고 빌라도 법정으로 이끌려 가셨다(마 27:1; 막 15:1; 요 18:28).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빌라도 법정에 서신 시각이 제6시라고 기록한다(요 19:14). 그것은 오늘날의 시간과 같이 오전 6시를 가리킬 것이다. 그의 십자가 형틀 위에는 히브리어와 로마어[라틴어]와 헬라어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죄패가 달려 있었다(요 19:20; 눅 23:38 전통본문).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 메시아이심은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할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27-28절]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그가 불법자들과 함께 인정함을 받았다는 성경이 응하였느니라](전통본문).80)

예수께서는 두 강도들 사이에 죄인들 중 한 사람처럼 나무에 달리셨다. 28절(전통본문)은 이사야 53:12에 예언된 말씀이다. 의인이신 예수께서 극악한 죄인처럼 취급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에게 학대와 조롱을 당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러나 그는 온 세계의 사람들의 왕이시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시다. 구주 예수께서는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과 그의 가족들도 구원하셨다고 보인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며 따르자.

29-39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

[29-30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이것이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 할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시편 22:6-8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이었다. 거기에 말씀하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31-32절]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긴다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이처럼 무정하고 비양심적이며 사악할 수 있는가. 그들은 지금이라도 후회하며 예수를 측은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종교적 형식과 사람의 인격은 근본적 연관이 없는 것 같다. 종교적 형식을 가진 자라도 이렇게 악한 자가 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격의 변화이다. 구원은 죄인들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좌우편의 십자가에 못박혔던 강도들도 처음에는 둘 다 예수님을 욕했던 것 같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증거대로, 그 둘 중 한 사람은 십자가 위에서 회개하였다(눅 23:39-43). 이것은 참으로 은혜로운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강도라도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시간과 장소는 자유롭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죄인을 구원할 수 있으시다.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시간에도 한 명의 죄인을 또 구원하셨다.

[33절] 제6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더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6시부터 제9시까지, 즉 오늘날 시간으로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 어두움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슬픈 일, 즉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일을 행했고, 어두움의 권세가 이긴 것 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증거할 것이다. 또 그 어두움은 하나님의 크신 슬픔과 노여움을 증거하고, 아마 장차 예루살렘에 닥칠 무서운 재앙과 불행을 예시할지도 모른다.

[34절] 제9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이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군중들에게만 버림을 당한 것이 아니고, 또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불에서,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내셨으나,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처형에서 건져주지 않으셨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죄를 담당하신 속죄제물이셨다. 세례 요한의 증거대로,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요 1:29). 구약시대에 행해져 왔던 짐승 제사 제도는 메시아의 대리적 속죄를 예시(豫示)했다. 구약의 짐승 제물들은 메시아의 모형으로 죄인들을 대신해 피흘려 죽임을 당하고 불태워졌던 것이다.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예언하였다(사 53:5-6).

예수님의 고난은 속죄의 고난이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셨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증거했고(고후 5:21),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고 하였다(갈 3:13). 하나님의 버리심,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깊은 의미가 있다. 신인양성(神人兩性)이 영원히 연합된 예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지만, 그는 그 고난을 통해 우리가 당할 지옥의 형벌을 대신하셨다. 그것은 죄인들에게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35-38절]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하신 말씀은, 요한복음의 증거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었을 것이다(요 19:30).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택자들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고 우리의 완전한 대속(代贖)을 이루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다. 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이것은 이제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10:19-20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며(요 14:6) 천하 인간이 그로 인해 구원 얻을 유일한 이름이시다(행 4:12). 그러므로 우리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

[39절]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외치시며](전통본문)81)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고백이었다. 진리의 깨달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세상에 똑같이 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 예수를 통해 구원받는 사람이 있고 죄의 낙을 누리다 허무하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는 자가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조롱을 받으셨다. 지나가는 자들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들도 그를 욕하며 조롱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감사하자. 그는 우리를 위해 죄인들의 조롱을 받으셨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차례이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조롱을 당하고 십자가를 져야 할 차례이다. 주께서는 의를 위해, 주님을 위해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10-12).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택한 자들의 대속(代贖)과 완전한 의와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셨다. 성전의 휘장은 찢어졌고 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고 하나님과 즐거이 교제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사랑하며 그의 말씀, 곧 성경의 모든 교훈에 순종하자. 우리는 다시는 죄 가운데 머물지 말고 오직 의와 선과 진리의 도구로만 살자.

40-47절, 예수께서 장사되심

[40-41절]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남자들이 대부분 다 도망쳐버린 때에도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라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증인들이었다. 요한복음 19:25는 그 여자들 중에 그의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다고 증거한다. 성경에 보면, 여자들은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며 복음 사역에 수고하고 협력한 일이 많았다(눅 8:2-3; 롬 16:1, 3, 6, 13). 또 때때로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열심과 충성된 마음이 있었다.

본문에 언급된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자로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아주셨고 그 병을 고쳐주셨다(눅 8:2). 그는 고침을 받은 후 예수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섬겼다.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을 가리킨 것인지(막 6:3) 잘 모르겠다. 살로메는 마태복음 27장에 언급된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와 동일 인물인 것 같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인들의 심정은 심한 슬픔 가운데서 아마 의분했을 것이다. 세상의 도덕 질서가 이렇게 짓밟혀도 되는가? 의인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일이 있어도 되는가 ? 그들은 또한 허탈했을 것이다.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추종한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이제 그들의 주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끝났다!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신 것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들은 불신앙적이고 무지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나무랄 것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비슷하다.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약속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같이 살지 않고 현실만 보고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제자들이 그때에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 믿음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42-47절]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담대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아리마대 요셉을 예비하셨고 그를 사용하셨다. 요셉은 경건하고 의롭고 선했고 공회에서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없다고 자기의 의사를 표현한 자이었다(눅 23:51). 그러나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요셉은 그의 시신을 장사 지내드리는 것이 그에게 대한 마지막 예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세마포를 샀고 예수의 시신을 내려다가 아마 물로 닦고 세마포로 쌌고 바위 속에 판 자기의 새 무덤에 그를 장사했다(마 27:60). 예수님은 죽어 무덤에 내려가시기까지 심히 낮아지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저 여자들처럼 주님 가까이에서 주를 따르며 섬기고 주의 일에 충성하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도망친 그때에 그 여자들은 주의 십자가 가까이에 있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 조롱과 핍박의 길, 죽음의 길을 가야 한다.

둘째로, 그러너 슬픔과 절망의 날에도 하나님을 위하는 자들이 있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 자신의 바위 무덤에 장사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그의 교회를 위해 담대히 일하자.

16장: 부활하심

1-8절, 여자들의 빈 무덤 확인

[1절]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주간 안식일 전날 곧 금요일이었고(막 15:42) 그 날 해 지기 전 무덤에 안치되셨다고 보인다. 해가 졌을 때 안식일이 시작되었고 그 안식일은 토요일 저녁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본절에 ‘안식일이 지나매’라는 말은 토요일 저녁 해가 졌을 때를 가리킨다. 그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께 바르기 위해 향품을 샀다. 시체에 향품을 바르는 것은 부패하는 냄새를 방지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거룩한 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다.

[2-5절] 안식 후 첫날(테스 미아스 삽바톤)[주간의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다른 복음서들도 그 새벽에 여러 명의 여자들이 그 무덤에 갔다고 증거한다(마 28:1; 눅 24:1, 10). 그들은 가면서 무덤 문의 심히 큰 돌 때문에 걱정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와보니 그 돌이 벌써 굴려져 있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것은 천사가 한 일이었다(마 28:2-4).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유대 나라의 무덤은 흔히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 여자들은 무덤 안에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오른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랐다. 흰옷을 입은 그 청년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거룩한 천사이었다. 마태복음은,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돌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이 눈같이 희었다고 증거하였다(마 28:2).

누가복음은, 여자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고 이를 인해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 있었다고 말한다(눅 24:3-4). 요한복음은 천사의 나타남에 대해서는 생략하였다. 종합해보면, 그 새벽에 여자들은 무덤 밖에서 천사가 돌 위에 앉은 것을 보았고 그의 말을 들었고, 또 무덤에 들어가서도 두 천사를 보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증거했다.

[6절]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가 살아나셨다’는 원어(에게르데)는 ‘그는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삼일 만에 다시 일으키셨다. 그의 시신을 안치했던 그 자리에는 그의 시신이 없었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그 무덤을 떠나셨다. 무덤이 빈 것은 그가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무덤은 제3일에 비었다. 여자들은 천사들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환각 현상이 아니었다. 환각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없다. 그러나 여러 명의 여자들이 천사의 증거하는 말을 들었고 그 빈 무덤을 확인하였다. 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무덤은 심히 큰돌로 막았고 파수꾼들이 지키고 있었고 제자들은 죽음이 두려워 주님을 버리고 도망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 시체를 훔쳐가 숨겨둔 후 그가 부활했다고 용기 있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의 나타나심들과 더불어 그의 부활에 대한 강력하고 확실한 증거이다.

[7-8절]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예수께서는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들이 처음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던 그곳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고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재확인하게 될 것이다. 여자들은 심히 놀라 떨며 나왔고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가복음은 그들이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였다”고 말한다(눅 24:9). 아마 여자들 중 일부는 제자들에게 가서 고했고, 일부는 길에서 주를 뵈었고, 일부는 두려워 아무 말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후에는 모든 일을 증거했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으나 제삼일에 부활하셨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의 무덤은 비었다. 그는 부활하셨다. 그 새벽에 천사들은 그의 부활과 빈 무덤을 증거하였고 여자들은 그 빈 무덤을 확인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중요하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의 믿음의 근거이다. 그의 부활은 많은 증인들에 의해 증거되었다. 성경에 밝히 증거된 그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그의 불신앙의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며 기독교 확장의 원동력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고 그를 전파하자.

9-14절, 제자들의 불신앙

한글개역성경 마가복음 16:9-20에 괄호가 쳐 있고 본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어떤 사본에는 9-20절까지 없음”이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4세기에 쓰여진 두 개의 헬라어 사본들인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근거해 성경 원본의 본문을 추정한 잘못된 이론에 의한 설명이다. 그러나 9-20절의 본문은 절대 다수의 헬라어 사본들과 2-3세기에 기원한 고대의 역본들인 라틴어, 수리아어, 콥트어 역본들에 의해 확증된 본문으로서 확실히 신약성경 원본의 본문이다.82)

[9-11절] 예수께서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제 zh'/--현재시제)[살아계시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예수께서는 주간의 첫날 곧 일요일 이른 아침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다가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는데 거기에서 흰옷 입은 두 천사를 보았고 잠시 후 그의 뒤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요 20:11-18). 그는 가서 예수님과 함께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을 때 이 일을 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의 살아계시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13절]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누가복음은 이 일을 자세히 증거한다(눅 24:13-35).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약 11킬로미터 떨어진 엠마오로 가고 있었고 그 중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이었다. ‘다른 모양으로’라는 말은 ‘부활 전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라는 뜻일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화로워진 모습이었다고 보인다. 그 제자들은 길에서 주님을 만나 이야기하며 동행하다가 날이 저물어 한 곳에 유하러 들어가서 음식을 먹을 때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았다. 그들은 즉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 사실을 고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역시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14절]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그 후에 열 한 제자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먹고 있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또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의 완악함을 책망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여자들이 전한 천사의 증거나 빈 무덤의 증거를 믿지 않았고 막달라 마리아의 증거도 믿지 않았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증거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이성과 상식과 경험을 앞세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부정하고 불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주 예수께 책망받을 불신앙이었다.

예수께서는 무덤에 안치되신 지 삼일 만에 살아나셨다. 그것은 역사적, 객관적 사건이었고 사실이었다. 제자들은 처음에 믿지 않았지만, 후에 진실한 증인이 되고 이 일을 증거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앙에 떨어지지 말고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자.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다. 그는 육신으로는 하늘로 올리우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계시지만, 신성의 영으로는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속에 계시며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시며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15-18절, 복음을 전파하라

[15절]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태복음 끝부분에도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마 28:19). 이것은 전도의 명령이다. 이것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다 찾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주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복음(福音)’(유앙겔리온 eujaggevlion)[좋은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내용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셔서 대속(代贖) 사역을 이루셨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의 명령은 교회에 주신 주님의 최대의 명령이며 교회가 받은 최대의 임무와 사명이다. 교회는 이 사명을 위해 오늘날도 전도자들을 불러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후원해야 한다. 

주께서는 전도를 명령하시면서 몇 가지 내용을 지시하셨다. 첫째, 온 천하에 다니며 전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온 천하’(톤 코스몬 하판타)는 ‘온 세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아시아나 유럽이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나 어디든지 가야 한다. 특히 전도자들은 복음이 안 들어간 곳으로 가야 한다. 우리나라 안에도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농촌들과 섬들은 전도자들이 가야 할 우선적 전도대상지역이다. 세상에는 아직도 현대문명을 등지고 원시적 생활을 하고 있는 종족이 있고 글자가 없는 종족들도 있다. 또 복음이 자유롭게 전파되지 못하는 나라들과 지역들도 있다.

둘째, 만민에게 전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만민에게’라는 말(파세 테 크티세이)은 ‘모든 피조물, 즉 모든 사람에게’라는 뜻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有無識)을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 누구에게나 이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로,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전파하라’는 말(케룩사테 khruvxate)은 ‘선포하라’는 뜻이다. 전도는 인간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니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전도는 의논하거나 토론하는 것이 아니고, 선포하는 것이다. 전도는 주고받는 형식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전도는 죄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고전 1:21).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구제사업이나 사회활동을 하라고 명하지 않으셨고, 지옥 갈 영혼들에게 천국 가는 길, 예수 믿고 구원받는 길을 전하라고 명하셨다. 죽어가는 환자에게는 예쁜 옷이나 맛있는 음식이 중요하지 않고 병의 치료가 중요하듯이, 지옥 갈 영혼들에게는 밥이나 옷보다 천국 가는 길, 영생의 길을 알려주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전도의 목적은 구원이다. 이 구원은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이며, 세례는 그 구원의 외적인 표와 확증이 된다. 믿음은 무엇인가? 우선, 믿음은 지식을 포함한다. 우리는 누구에 대해 잘 알 때 그를 신임할 수 있다. 그에 대해 더 알수록 그를 더욱 신임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 만큼 믿을 수 있다. 믿음의 지식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주셨다(요 20:30-31). 믿음은 또 동의하며 동감하며 영접하는 것이다(요 1:12). 믿음은 또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18). 믿음은 행위와 구별되지만(롬 4:5), 참된 믿음은 순종의 행위로 증거된다.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 곧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뜻한다. 죄가 인간의 근본 문제이므로, 죄로부터의 구원은 그 문제의 해결이다. 로마서 3:23-24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한다.

죄 문제의 해결은 또한 죽음 문제의 해결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또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지만 죄사함이 있은즉 영원한 생명도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증거하였다(롬 6:23). 또 그 영생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복을 포함한다. 악인에게는 심판의 부활이 있고 영원한 지옥이 있다. 그러나 구원은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17-18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표적들은 사도시대에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사도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며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확증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더 이상 필요치 않으므로 중단되었다고 본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다. 십자가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다.

둘째로,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초자연적 기적들을 의존치 말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택한 죄인들을 다 불러 구원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19-20절, 승천하심

[19절]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임을 다시 자세히 설명해주셨고 또 이 구원의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후에 천국으로 올리우셨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들에 대해 생략하였다. 그것은 마태복음에 잘 증거되어 있다. 마가는 단지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님의 승천도 그의 부활의 한 중요한 증거이다. 그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승천할 수도 없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셨고 또 승천하셨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승천에 대해 자세하게 증거하였다. 사도행전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승천하신 장소는 사도행전의 증거대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감람원이라는 산이었다(행 1:12).

주께서는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그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는 바이다(롬 8:34; 엡 1:20; 골 3:1; 히 1:3; 8:1; 10:12; 12:2; 벧전 3:22). 주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가진 자로서 교회와 온 세상을 다스리심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20절]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주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고 그의 왕권을 행사하시기 때문에, 그는 제자들을 도우시고 역사하셨다. 그는 사도시대에 기적들과 초자연적 은사들로 말씀을 확증하셨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나 기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목적이 있었다(히 2:3-4). 그러나 신약성경이 다 기록된 후에는 기적들의 필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기적이나 초자연적 은사를 구할 것이 아니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배우고 믿고 실천해야 한다.

기독교는 기적을 구하는 종교가 아니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경건하고 바르고 선한 삶을 사는 종교이다. 2천년 기독교 역사는 기적을 행한 역사가 아니고 이미 확증된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새 삶을 산 역사이었다. 기적들이 없어서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거나 확장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중요한 것은, 성경에 증거된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믿고 바로 전하며 거기에 합당한 선한 삶을 사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기적들로 함께 역사하셨다.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 주께서 더 이상 기적들로 역사하지는 않으시지만, 우리는 살아계신 주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고 신구약성경말씀과 함께 또 그것을 통해 역사하심을 믿고 체험하며 산다.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20:31). 예수께서는 그가 행하신 많은 기적들을 통해 또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었는가?

또 우리가 이미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전도의 사명을 깨닫고 지역복음화와 세계복음화를 위해 힘쓰자. 교회는 전도자들을 불러모으고 바른 교훈으로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후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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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Byz A W vgms copbo-mss Irenaeuslat2/3 등.

2) Byz A vgcl 등에 있음.

3) Byz A (D) W (ita b d vg syrp copsa) arm 등이 그러함.

4) Byz A D W ita d vg syrp copbo-pt 등에 있음.

5) Byz A C D ita d e ff2 vg syrp copsa-mss bo-ms arm 등이 그러함.

6) Byz C 등이 그러함.

7) Byz W ita vgmss copsa-mss bo-pt 등에 있음.

8) Byz C D W ita b d ff2 vg (syrp) cop(meg) arm Diatessaron Origen 등.

9) Byz A W lat syrp s 등에 있음.

10) Byz A D itb d ff2 vg syrp s copbo arm 등에는 이 구절이 없음.

11) Byz C lat syr 등이 그러함.

12) Byz A (D W it) vgcl syrp (Origenlat) 등에 있음.

13) Byz (A) D lat syr copbo-pt 등에 있음.

14) Byz A C 등에 그러함.

15) Byz A syr copsa-mss bo-pt 등에 그러함.

16) Byz A C syrp Diatessaronsyr 등이 그러함.

17) Byz A C (ita)에 그러함.

18) Byz A ita syrp copbo-pt 등에 있음.

19) Byz A C D ita b d ff2 i vg syrp s c (arm) 등에 그러함.

20) Byz A D W it(a) b d vgmss syrp arm 등에 있음.

21) Byz W lat syrp copsa-ms 등에 있음.

22) Byz A D W ita b d ff2 i vg syrp s copbo arm Origen이 그러함.

23) Byz A D W ita b d ff2 vg syrp copsa-mss arm Origen 등에 있음.

24) Byz A it syr 등이 그러함.

25) Byz (A D ita b d ff2 i) vg (syrp copbo-ms) 등에 있음.

26) Byz A D W ita b d ff2 i vg syrp s copsa-mss arm 등에 있음.

27) Byz A (it) vg (syrp) syrs 등이 그러함.

28) Byz א A B vg syrp copsa bo arm geo 등이 그러함.

29) Byz p45 A W syrp s copsa-mss (arm) geo 등이 그러함.

30) ‘통과하여’라고 번역된 아나 메손 ajna; mevson은 ‘안으로’라는 뜻이다(BDAG, NASB, NIV).

31) 아람어 엣페사크의 음역(音譯)이다(BDAG).

32) Byz p45 A W vg syrp s copsa-mss arm geo 등에 있음.

33) Byz A copsa-mss bo-mss 등에 있음.

34) Byz A C W it vg syr copsa-mss bo-pt 등.

35) Byz A C (D itd) syrp copbo-pt에 있음.

36) 신약성경에 ‘형제들’(약 346회), ‘성도’(약 61회), ‘하나님의 자녀’(약 35번), 그 외에 ‘그리스도인,’ ‘신자’ 등의 호칭이 있다.

37) Byz A에 있음.

38) Byz A C에 있음.

39) Byz A (D itb d i vg syrp) 등에 그러함.

40) Byz ita (b) d (i) vg syrp copbo-pt 등에 그러함.

41) Byz p45vid A C D ita b d ff2 i vg (syrp s) copsa bo (arm) 등이 그러함.

42) Byz A D lat syrp copbo-ms 등에 있음.

43) Byz A D ita b d ff2 i vg syrp Diatessaron Irenaeuslat 등에 있음.

44) Byz A it(a) d (ff2) i vg Diatessaron 등이 그러함.

45) Byz A D ita b d ff2 i vg syrp Diatessaron Irenaeuslat 등에 있음.

46) Byz A C lat syrp copbo-ms 등이 그러함.

47) Byz A C lat syrp copbo-pt 등에 있음.

48) Byz (A C) D W (ita) itb d ff2 vg syrp copsa bo arm 등에 있음.

49) Byz A D W ita b d ff2 vg syrp s arm 등에 있음.

50) Byz A (W) (ita syrp s copsa-mss bo-mss arm) 등에 있음.

51) Byz A C (D ita b d ff2) vg syrp s copbo-pt arm geo (Diatessaron Clement) 등에 있음.

52) Byz A C syrp copbo-ms 등에 있음.

53) 알 호이스 헤토이마스타이(ajll! oi|" hJtoivmastai).

54) Byz A D W lat syr copsa 등이 그러함.

55) Byz א C D ita b ff2 i k vg syrs copsa bo 등이 그러함.

56) Byz A syrp s copsa-ms bo Origen 등이 그러함.

57) Byz A C D ita b d ff2 vg syrp copbo-mss Diatessaron, Cyprian 등.

58) Byz A C syrp 등이 그러함.

59) Byz A D W it vg syr copbo-ms 등에 있음.

60) Byz א A ita (b) d ff2 i k vg syrp arm 등에 있음.

61) 매튜 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종말 징조들이 요세푸스의 증거대로(유대인의 전쟁들, 제2권 11장부터 제4권까지) 예루살렘 멸망 직전의 상태에서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말했다. Matthew Poole, III, p. 113.

62) Byz A (W) syrp (syrs copsa-mss) Origenlat 등이 그러함.

63) The World Book Encyclopedia..

64) Byz A 등에 있음.

65) Josephus, Jewish War, 2. 19. 2-9; 2. 20. 1; 4. 3. 6-10; 4. 5. 4; 4. 6. 3; 4. 7. 3; Antiquities, 10. 11. 7;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3. 5. 3.

66) Eusebius, 3. 5. 3.

67) Byz A (itk) syrp cop 등이 그러함.

68) Byz א A C W itff2 i vg syrp s (copsa) copbo-pt arm Diatessaronarm.

69) Byz itff2 copbo-mss 등에 있음.

70) Byz A ita b i vg syrp s copsa bo-mss arm Diatessaron 등에 있음.

71) Byz A syrp 등에 있음.

72) Byz A (W copsa-mss) 등이 그러함.

73) Byz A C D ita d ff2 k vg syrp copsa-mss arm 등에 있음.

74) Byz A syrp copbo-pt 등이 그러함.

75) 알레 a[llh, 여성을 가리킴.

76) 헤테로스 e{tero", 남성을 가리킴.

77) Byz A C W syrp s copbo-ms (arm) geo 등이 그러함.

78) 라틴어로 calvaria이고 여기에서 영어의 Calvary라는 말이 나옴.

79) 전통사본에는 ‘포도주’ 대신에 ‘신포도주 혹은 포도 식초’라고 되어 있음.

80) Byz itff2 n vg syrp copbo-mss Origenvid (Diatessaronarm) 등에 있음.

81) Byz A C (D) W it(d) ff2 vg syrp s arm Origenlat 등에 있음.

82) Byz A C D itff2 n vg syrp c copsa copbo fay armmss Justin-Martyr Irenaeus Tertullian 등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