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열두 제자를 보내심
1-23절, 열두 제자를 전도자로 보내심
[1절]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셨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막 3:13). 누가복음은 주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 그들을 세우셨다고 말한다(눅 6:12-13).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를 택한 것이 아니요 그가 그들을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하셨다(요 15:16). 교회 직분자들은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는 대로 세워진다(롬 12:5-8; 고전 12:4-6; 27-28; 엡 4:11). 물론, 자격자들은 회중의 선택을 받는다(행 1:21-26; 6:2-6; 14:23).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 물론, 그들의 더 중요한 일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에게 듣고 배우는 것이며 또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병 고치는 권능을 신분증처럼 주셨다. 사도들은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행 2:43; 5:12). 사도 바울의 말대로, 기적을 행하는 것은 사도들의 표이었다(고후 12:12).
[2-4절]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마태는 열두 제자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마태는 그들을 ‘사도’라고 불렀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바돌로매는 아마 나다나엘(요 1:45)을 가리키고, 다대오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언급된 야고보의 아들 유다를, 또 가나안인 시몬은 셀롯인 시몬을 가리키는 것 같다(눅 6:15-16; 행 1:13). 가룟 유다는 열두 사도의 명단에 들어 있지만, ‘예수를 판 자’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은 시작보다 결말이 중요하다.
[5-6절]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주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친히 부르시고 세우시고 능력을 주시고 사명을 주셔서 내어보내시며 전도하라고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친히 교회의 직분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시고 능력을 주시고 사명을 주실 것이다. 주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다. 아직 사마리아나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할 때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전도에 순서가 있었다. 오늘날도 우리는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던 자들, 교회에 다니다가 시험에 들었거나 낙심하여 교회를 떠나갔던 자들을 먼저 돌아보고 그 후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7-8절]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가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세계이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믿었다면 천국이 그의 심령에 이미 임한 것이다. 그는 사탄이 왕노릇하던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자가 되었다.
주께서는 사도들에게 병 고침의 능력을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일종의 신임장이었다. 사도들의 주된 임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병을 고치는 일이나 기타 다른 일이 아니지만,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의 표로서 그들은 병 고치는 능력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의 일들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은혜이므로 다른 이들에게 거저 주어야 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돈을 버는 방법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9-11절]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전도자들은 여비나 옷이나 신이나 먹고 마시는 것의 문제로 염려하지 말고 오직 주께서 맡기신 일에 충성해야 했다. 일꾼들이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은 마땅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다. 주께서는 또,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고 말씀하셨다. 합당한 자란 신앙적으로, 경제적으로 합당한 자라는 뜻이라고 본다. “너희 떠나기까지”라는 말씀은 땅의 것을 구하는 자처럼 자기에게 더 유리하게 보이는 곳으로 옮겨다니지 말라는 뜻을 포함한다. 주께서 보내신 곳이라면 그가 떠나라고 하시기 전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또 성도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12-15절]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전도자들은 그들이 머무는 집을 위해 평안을 기원해야 했다. 그들을 영접하는 그 집이 이 평안을 받기에 합당하면 그들의 빈 평안은 그 집에 임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영접도 아니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아니하면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그들의 발의 먼지를 떨어버려야 했다. 그것은 관계의 단절을 상징한다. 어떤 성의 사람들이 사도들의 전도와, 기적들을 통한 확증을 보고도 그들을 영접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들은 소돔 사람들보다 더 큰 죄를 범하는 자들이다. 소돔 사람들은 그런 기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의 일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증거한 신약성경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가 신약성경의 말씀들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다면, 그의 죄악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증거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날도 전도자들은 물질적인 것들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주께서 명하신 대로 천국 복음, 곧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담대히, 가감 없이 만방에 전해야 하고, 또 성도들과 교회는 그들의 전하는 바를 믿고 그들을 따르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16절]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전도자들은 순진한 양들이다. 그들을 세상에 내보내는 것은 마치 양들을 이리 떼 속에 보내는 것과 같다. 전도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도리어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죽임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뱀은 지혜의 비유로 사용되었다. 전도자들은 악한 세상에서 지혜롭게, 신중하고 사려 깊게 처신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한다. 참 지혜는 순결한 지혜이다. 야고보서 3:17은,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바른 사상과 거룩한 인격은 전도자의 첫 번째 덕목이다.
[17-18절]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전도자들은 특히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공회에 넘겨주며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공회와 회당이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는 기관이 될 것이다. 전도자들은 심지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될 것이다.
[19-20절]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전도자들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설 때에 무엇을, 어떻게 말할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그들 속에 계셔서 말씀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성령께서는 모든 전도자들에게 전할 말씀과 능력을 주실 것이다.
[21-22절]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탄의 역사는 강하다. 성도가 경건과 의에 굳게 서서 악과 타협하지 않고자 한다면, 사탄은 심지어 가족들과 이웃들을 통해 전도자의 믿음을 파괴하려 할 것이다. 전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미움과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건짐을 받을 것이다.
[23절]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人子)가 오리라.
핍박으로 인한 피신은 정당하고 지혜에 속하는 일이다. 피할 수 있는 데도 피하지 않고 죽는 것이 충성은 아니다. 전도자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순교의 때가 오면 순교할 수 있다. 그러나 피신하여 다른 곳에서 전도할 수 있는 데도 피신하지 않고 잡혀 죽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人子)가 오리라”는 말씀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가리키든지, 혹은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선택된 모든 사람들이 사는 곳들을 비유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킬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셨다. 전도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다. 전도의 사명은 넓게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졌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둘째로, 전도자는 물질을 초월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모범이 된다. 주께서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무리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4:33). 사도 바울도 교훈하기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하였다(딤전 6:7-8).
셋째로, 전도자는 핍박을 각오해야 한다. 주께서는 사도들이 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고 핍박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의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라 권하며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행 14:22). 또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다(빌 1:29). 우리는 천국 복음을 널리 전하는 자가 되고, 물질을 초월하며 자족하고,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며 살아가야 한다.
24-42절, 사람을 두려워 말고 주님만 사랑할 것
[24-27절]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 곧 사탄을 가리킨다(마 12:24). 악한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알세불이라고 불렀다면 그의 제자들에게 어떤 비난을 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악한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복음 전도자들과 설교자들은 사람들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감추인 진리들은 밝히 전파되어야 하고, 그들이 집안에서 은밀하게 배운 진리들은 집밖에서 공공연히 전파되어야 한다. 오늘날도 설교자들은 골방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한 후에 강단에서 담대히 선포해야 한다.
[28-31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몸의 죽음이 사람의 끝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불멸적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기다린다. 사람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멸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다. 앗사리온은 약 16분의 1 데나리온인 로마 동전이었다(BDAG, NBD). 보잘것없어 보이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참새보다 귀한 존재인 사람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죽지 않을 것이다. 전도자는 그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32-33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은 사람 앞에서 그를 시인해야 한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를 부인한다면 그를 믿는 것이 아니다. 정말 그를 믿었다면 사람 앞에서 그를 시인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사람들의 핍박과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고 비겁하게 굴복하지 말고,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히 전해야 한다.
[34-36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고 검을 주러 오셨다. 그가 오셔서 우리에게 참 평안을 주신 것이 사실이지만(마 11:28),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심령 속에와 성도들의 교제 가운데 있는 평안이며 화목이다.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평안이 아니고, 또 진리와 비진리, 혹은 선과 악의 화해가 아니다. 복음은 막연한 평화의 개념이 아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오히려 죄와 마귀와 세상의 악과 싸우는 영적 전쟁이다.
모든 성도의 삶이 그렇지만, 특히 전도자들의 삶이 그렇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에게 그에 대한 최고의 헌신과 사랑과 복종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과 순종의 최고의 대상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절대적 헌신과 사랑과 복종은 때때로 집안 식구들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일으킬 것이다. 또 미워하고 핍박하던 식구들과 한 번 혹은 여러 번 싸움과 갈등을 치룬 후 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킨 후에야 가정의 참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나 전도자의 사명의 걸음을 시작했기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생긴다면, 그것은 아마 이상한 일이 아니고 정상적 과정이다. 그러나 참고 진행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은혜와 유익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편에 계시고 그의 위로와 평안이 그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있을 것이다.
[37절]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모든 성도들에게 그러하지만, 특히 전도자들에게 있어서, 부모님께 대한 사랑과 효도와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보다 우선 될 수 없다. 부모에 대한 의무 때문에 주의 부르심을 거부한다든지 주의 계명을 어겨서는 안 된다. 작은 예로, 부모님을 위한 생신 잔치 때문에, 친척들의 결혼식 때문에, 주일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녀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자녀 사랑, 자녀 교육, 자녀 후원이 하나님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 자녀들 때문에 경건생활이나 사명의 걸음이 지장되어서는 안 된다. 자녀들을 돌보는 것보다, 혹은 같은 원리로, 남편이나 아내를 돌아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도 자기의 가족들을 돌보고 사랑해야 하지만, 주님을 사랑함보다 더 할 수는 없다. 모든 성도는 아무리 피곤하고 바쁜 일상생활일지라도 하루에 30분 정도라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 읽는 시간을 우선적으로 구별해야 한다.
또 우리는 먼저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앙적으로 교회 안에서 성장하도록 힘써야 한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게 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이 죽었거나 병들었다면 어찌 기뻐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는 통곡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세상적인 교육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가 먼저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것을 원하신다. 세상 공부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다. 성도는 세상의 그 무슨 일보다 하나님 섬기는 일을 첫째로 여겨야 한다.
[38-39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성도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자기 사랑은 곧 세상 사랑이요, 하나님 사랑과 반대된다. 돈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돈 사랑인지, 하나님 사랑인지, 또 100년 간의 삶을 위할 것인지, 영생을 위할 것인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이 세상의 것을 위해 사는 자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그러나 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는 확실히 영생의 복을 받을 것이다.
[40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전도자들은 주 예수의 이름과 권위로 파송된다. 그러므로 그들을 영접하는 것은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고난이 많을 것이나 이런 존귀한 신분을 가진다. 이것은 그들에게 위로가 된다.
[41-42절]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람이 선지자를 선지자로 알아보고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을 의인으로 알아보고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다. 또 주의 젊은 종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전도자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된다. 우리의 선행이 그 자체로는 상 받을 가치가 없지만 주께서는 그것에 대해 상을 약속하셨다. 선행의 첫 번째 동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이지만, 상급의 약속도 부수적인 동기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의 선행에 대해 상 주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자. 사람의 위협 중에 가장 큰 것은 죽인다는 위협이다. 그러나 사람은 우리의 몸만 죽일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께서만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실 수 있다. 보잘것없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목숨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죽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허락하시는 죽음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고 또 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의 목숨은 오직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무엇을 두려워하고 주저할 것인가?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는다면,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우리를 시인하실 수 있겠는가?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가족보다, 우리 자신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마땅한 일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에서 가장 사랑을 받으셔야 할 분이시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얻은 모든 성도들은 복음을 위해 헌신한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전도자들을 영접해야 하고 주께서는 그들의 선행에 대해 상을 약속하셨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들과 전도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또 그들의 선행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상을 주실 것이다.
11장: 믿음 없는 세상
[1-3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오실 그이’란 메시아를 가리킨다.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했던 요한이지만(마 3:11-12; 요 1:29-34), 옥중에서 그에 대해 의심이 생긴 듯하다. 이제 그는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서 과연 오실 그 메시아이신지,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할 것인지 물었다.
[4-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행하신 병고침의 기적들은 그가 메시아이시라는 확실한 증거이었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본 대로 그들의 선생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네 권의 복음서들에 증거된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의 증거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자리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7-11절]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그들이 떠나자,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문자 그대로 풀을 가리킬 수 있지만, 의심하는 사람을 표현할 수 있다. 주께서는 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부르시며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는 말라기 3:1의 예언을 성취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보다 앞에 와서 그의 길을 예비하리라고 예언된 하나님의 사자이었다. 선지자들 중 메시아를 직접 보고 그를 소개한 자는 요한밖에 없었고 많은 사람을 회개시켜 메시아를 맞이하도록 길을 준비하였으므로 선지자 중 가장 큰 자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아직 구약교회에 속해 있었다. 본문의 ‘천국’은 신약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의 모임이다. 신약교회 교인들은 세례 요한보다 메시아에 대해 더 나은 지식과 굳건한 믿음을 가질 것이다.
[12-15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들을]17)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 없이, 회개하고 믿는 모든 이들이 담대히 천국으로 들어감으로 이것을 ‘침노’라고 표현하셨다.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의 끝이다. 구약 마지막 책인 말라기 끝에 예언된 엘리야는 세례 요한이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한 이후부터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오고 있다.
[16-19절]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人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그의 자녀들로]18)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 세상은 믿음이 없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또 하나님의 일에 대해 바르게 반응하지 않고 잘못되게 반응한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심히 자기 중심적인 판단과 비난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시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악을 행하거나 즐기는 자도 아니시다. 지혜의 주님께서는 자기의 자녀들에게는 의로우시다는 인정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의 자녀들이 된 것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하신 일들에 대해 무지하게 불평하지 말고, 지혜의 자녀들로서 그 일들을 이해하고 사모하고 협력하는 자가 되고 무지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20-24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음부(하데스)는 지옥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그의 권능의 일들을 가장 많이 베푸셨던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의 마을들의 사람들이 회개치 않음을 책망하셨다. 외형적 기적이 내면적 회개를 항상 동반하지는 않는다. 인생의 마음은 얼마나 어둡고 둔하고 완고한지 모른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기독교는 초자연적 은사를 전하거나 추구하는 은사주의가 아니고 죄를 깨닫고 버리고 떠나는 회개 운동이며 거룩한 인격과 삶의 운동이다.
마지막 심판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에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의 모든 행위, 즉 옳고 그른 행위와 선하고 악한 행위에 대해 공의로운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벌은 차등할 것이다. 큰 죄인은 큰 벌을, 작은 죄인은 작은 벌을 받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이다. 또 기적을 보고도 회개치 않는 완고한 마음은 심판날에 큰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어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을 구할 것이 아니고, 참된 회개와 믿음, 바른 인격과 삶을 구해야 한다.
[25-26절]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유식한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들, 즉 세상 지식이 적고 비교적 순진한 자들에게 나타내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영광만 찬송케 하셨다.
[27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류의 구원에 관한 모든 것들을 맡겨주셨다. 사람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직분과 권세와 영광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시고, 또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요 6:44), 또 자기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17). 또 본문에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하나님 아버지를 아시고 또 우리로 하나님을 깨닫게 해주신다.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무지와 불신앙과 죄악에 빠져 있는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마을들과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놀라운 구원의 초청을 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영육으로 수고롭고 무거운 짐 진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들에게 그는 편히 쉬게 하시겠다는 구원의 초청을 하신 것이다. 이 초청은 초청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적 인격이심을 보인다. 이 세상에서 누가 이런 초청을 할 수 있겠는가! 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적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는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에게 참으로 안식을 주신다.
[29-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스스로 낮아지셨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예수님 믿는 자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며 그를 본받는다. 예수님을 믿는 길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가 명하신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는 제자의 길이다. 그의 멍에는 성도의 직분과 봉사자의 직분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짐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멍에를 메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을 것이다. 믿음 안에 들어와 보면, 그의 멍에는 무거운 것이 아니고 가벼움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지식과 믿음을 얻었고 구주께서 주신 구원과 안식을 얻었으므로, 이제 겸손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며 배워야 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었는지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회개했는지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 한다. 기독교는 단순히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고, 회개 운동이며 거룩한 삶의 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말과 행위에 대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심치 말고 믿고 그의 소원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참 안식을 누려야 한다. 주께서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에게 참 안식을 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주 안에서 쉼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이다. 우리는 그 평안을 누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한다. 주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그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길이다.
12장: 바리새인들과 변론하심
1-21절, 안식일 문제
[1-2절] 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님의 전도 사역은 물질적으로 유여한 사역이 아니었다. 주를 따르는 길은 물질적 유여함을 기대하지 말고 가난도 각오해야 하는 길이다. 바리새인들은 주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보고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율법에 의하면, 이웃의 밀밭 사이로 지날 때 이삭을 따먹는 것은 가능하였다(신 23:25).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는 노동의 행위가 아니고 배가 고파서 얼마큼 따먹은 것뿐이므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주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였다고 비난한 것이다.
[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성소의 떡상의 떡은 제사장들이 먹는 떡이지만(레 25:9), 사무엘상 21:1-6에 보면, 다윗의 일행이 몹시 배가 고팠을 때, 그들에게 제공되었다. 또 제사장들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율법에 규정된 제사들을 드려야 하였다(민 28:9-10). 그것은 예외적인 일들이었다.
[6-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거기에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이다. 사람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실상, 구약시대의 성막이나 성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정당한 말씀이었다.
또 예수께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호세아 6:6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인용하시면서, 그들이 그 말씀의 뜻을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전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자유함이 있다. 이 자유는 방종을 위한 자유가 아니고, 다윗의 경우나 제사장들의 경우와 같이 부득이한 일들에서의 자유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지 예배 의식보다 자비한 마음을 원하신다. 안식일 문제에 대하여,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태도보다 남을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즉 이 경우 제자들의 배고픈 형편을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마가복음 2:27에 보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규례들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다. 신명기 10:13은,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또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구약의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이다. 출애굽기 20:10, “제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출애굽기 31:13,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뜻이 된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인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 곧 참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또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해 주실 참된 안식의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을 이루셨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16-17에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범죄한 이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죄로 인해 저주받은 세상에는 안식이 없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심으로써 우리는 참 안식을 얻게 된 것이다.
죄는 안식을 잃어버리게 했으나, 죄사함은 참 안식을 회복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또 요한복음 14:27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참된 평안을 누리며 또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9-14절]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예수님을 비난하려는 자들은 그에게서 비난거리를 찾으려 애썼고 그것을 안식일 문제에서 찾은 것 같았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안식일에도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붙잡아 내는 것을 예로 들면서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시고 교정하시기를 원하셨다. 사람은 양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이므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함을 암시하셨다. 그런 후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 마른 손을 내밀자 그 손은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건강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어떻게 마른 손이 그렇게 회복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하였다. 말씀으로 마른 손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그 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였다. 실상 안식일을 범한 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한 바리새인들이었다. 자신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며 예수는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은 그 날 예수님을 송사할 꼬투리나 찾았고 그를 죽이려 공모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악한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선한 일을 행하신 것이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악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5-21절]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외치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자 많은 사람이 그를 좇았다. 그는 그들의 병을 다 고쳐주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표적인 예들 외에도,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병 고침의 사역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성경의 진실한 증거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고 그를 따르며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또 주께서는 병 고침 받은 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사도 마태는 주께서 이렇게 경계하신 것은, 이사야 42:1-3에 기록된 바와 같이,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 . . .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외치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고 말했다. 마태는 본문에서 히브리어 성경이 아니고 헬라어 70인역을 인용했다고 보인다.
주께서는 오늘날 어떤 전도자들과 같이 세속적인 마켓팅 방법을 사용해 자기를 선전하며 떠들썩하게 활동하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조용한, 그러나 내용 있는 사역을 하셨다. 겸손한 자는 자신을 감추지만, 교만한 자는 자기를 과시하며 자기를 자랑한다. 주께서는 겸손하셨고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그러나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듯이 연약한 자들을 오래 참으시고 마침내 죄인들의 구원을 다 이루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감히 말할 수 없는 말이다. 사람으로서 누가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예수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날로 구별된 날이다. 그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감히 그러한 말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예수께서 참된 신성 즉 참된 신적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그는 바른 인격자가 아닐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이든지 미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가 아니고 그가 주장하신 그대로 성전보다 더 큰 자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또 그는 한편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고 그 외에도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말로만 자신을 증거하신 것이 아니고 친히 병 고침의 능력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안식일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안식을 상징하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음으로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었다. 또 우리는 오늘날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지킬 때 단순히 예배 의식을 중시하는 데 머물지 말고 참된 경건과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 마음을 열고 사모하며 또 병약한 자들을 돌아보고 처음 교회에 찾아온 자들을 기쁨으로 맞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교회를 비방하거나 교우들을 비방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교회를 허무는 자가 되지 말고 교회를 세우는 덕스러운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바른 태도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용한 사역을 본받아야 한다.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들이 여러 가지 떠들썩한 행사들을 하며 본래의 교회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교회의 예배들이 충실한 성경 강해가 없는 소란스런 모임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교회는 성경에 가르친 대로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충실히 강론하며 배우고 서로 교제하며 사랑하고 구제해야 한다.
22-37절,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심
[22-30절] 그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주시매 그 벙어리[눈멀고 벙어리된 자](전통본문)19)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아마 그 안식일에,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 귀신은 악한 영이며 사람들에게 정신적 연약을 일으킨다. 즉 사람에게 건전한 생각과 건전한 감정과 건전한 의지 대신에 연약한 생각과 연약한 감정과 연약한 의지를 가지게 하며 부정적인 생각과, 남을 미워하는 생각이나 감정과, 음란한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게 하고, 또 거짓말도 하게 한다. 또 귀신은 육체적 연약도 일으킨다. 이 사람은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가 되었다. 그는 시력을 잃었고 아마 청력도 잃었고 벙어리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불쌍한 사람을 고쳐주셨다. 그 눈멀고 벙어리된 자는 말하며 보게 되었다. 그러자 무리들은 다 놀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말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메시아를 가리킨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말하였다(사 35:1-2, 5-6).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위가 이런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사람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보수신앙을 가진 성도들같이 보였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고 도리어 그를 귀신의 왕의 힘을 입은 자로 비난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 그는 사람들의 모든 생각을 아신다. 그는 말씀하셨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인 것 같다. 예수께서는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너희의 아들들’은 귀신을 쫓아내었던 사도들이나 아니면 당시에 자칭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께서는 사람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신인양성(神人兩性)이 한 인격을 이루신 자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크신 하나님이시며(딛 2:13) 참 하나님이시다(요일 5:20). 이 세상은 마귀와 악령들이 활개치는 곳인데,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 속에서 활동하는 귀신 곧 악령을 쫓아내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속에 임한 증거이었다. 그 병자는 영육의 회복을 얻었다. 그는 바른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눈멀고 벙어리된 그의 몸도 고침을 받았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에게 임했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그가 말씀하신 강한 자는 마귀를 가리키고 마귀를 결박한 자는 사람으로 오신 자신을 가리켰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또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한다’는 것은 그 생각과 뜻과 입장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의 교회를 세우려면,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과 우리의 입장을 그의 생각과 그의 뜻과 그의 입장에 일치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 아니고 허무는 자들이 될 것이다.
[31-32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악한 비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비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주께서는 모든 죄와 악한 비방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살인과 간음의 죄라도, 또 하나님을 비방한 죄라도 회개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을 훼방하며 비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성령을 비방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회개를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죄의 경계선을 넘고 있다고 보인다. 그들은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는 그의 신적 영광을 보고도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한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성경에 말씀한 ‘진리를 안 후 짐짓 범하는 죄’(히 10:26)나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와 비슷하다.
오늘날 은사운동이나 거짓된 신비주의는 예수께서 보이신 증표를 가지지 않는다. 그 운동은 교리적 교훈적 정통성이 없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사람을 높이고 거룩함과 절제가 없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실 때도 자신을 높이지 않으셨다. 그는 오늘날 자신을 높이는 세속적 신비주의자들과 완전히 다르시다. 성경은 거짓된 신비주의에 대해서 조심하라고 교훈한다. 마태복음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못했으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9-10,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33-35절]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나무와 그 열매는 같이 간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고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힌다. 우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 사람도 그렇다. 우리는 사람의 행위를 보고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말은 사람의 중요한 행위이다. 우리는 사람의 말을 보고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악한 비난을 내뱉는 것은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고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셨다. 그것은 마귀의 자녀라는 뜻이다. 세례 요한도 그에게 왔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그렇게 불렀었다(마 3:7).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말씀하셨고(요 8:44),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마 23:33).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은 정신적 의미이다. 사탄은 죄의 근원자이다. 독사의 자식들은 사탄의 죄성을 받은 자들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 사람은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선한 말을 할 수 없고 악한 말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36-3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아르고스)[쓸데없는, 부주의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사람의 말은 그 인격의 표현이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쓸데없이 혹은 부주의하게 던진 한 마디 말이라도 심판날에 그 말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말로 의롭다 하심을 얻기도 하고 우리의 말로 정죄를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르고 참되고 선한 말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
물론, 우리가 선한 말을 하려면 우리는 먼저 중생해야 한다. 중생의 새 생명을 얻은 자만이 선한 말과 행실을 나타낼 수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로 중생(거듭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얻었다(딛 3:4-5). 이제 중생한 자는 평소에 선을 쌓는 인격 훈련을 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언어생활의 훈련도 해야 한다. 야고보서 3:2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말에 온전한 자가 온전한 자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신 예수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에 관해 성경에 증거된 많은 증거들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그는 죄로 인해 멸망할 인류를 구원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시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 누구든지 회개하며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계이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 즉 통치권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이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교훈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선한 말만 해야 한다.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과 그의 모든 진리를 믿는 믿음으로 하는 말을 해야 하고 열 정탐꾼들처럼 불신앙적인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고 남을 함부로 비방하지 말고 존중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선하고 은혜롭고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한다.
38-50절, 가장 큰 표적
[38-40절]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人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표적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을 이미 들었을 것이지만 그것들을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항상 악하고 음란하다. ‘악하다’는 말은 남을 미워하고 속이고 해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또 ‘음란하다’는 말은 부부관계의 윤리를 지키지 않고 남편이 다른 여자와 또 아내가 다른 남자와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은 부부관계의 윤리가 약해진 시대인 것 같다. 또 음란을 조장하는 문화나 풍조가 많은 것 같다. 매춘(賣春) 행위도 성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의 풍조를 대항해야 하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소원하며 지켜야 한다.
예수께 나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심령에 변화를 받아 예수님을 믿고자 한 것 같지는 않고 단지 기적을 보려는 흥미를 가진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을 보이거나 기적을 추구하는 기적주의적 종교가 아니다. 주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다(고전 1:22-23). 기독교는 기적주의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전함으로 그를 믿어 구원을 받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새 삶을 살게 하는 교훈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씀은 자신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3일 만의 부활을 가리켰다. 예수께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암시한다. ‘밤낮 사흘’이라는 말은 3일을 가리키는 대략적 표현일 것이다. 예수께서 무덤에 계셨던 시간은 금요일 저녁부터 주일 새벽까지, 즉 정확히 말하면, 하루 반쯤이었지만, 성경은 그가 3일 만에 부활하셨다고 말한다(마 16:21; 고전 15:4).
[41-42절]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선지자 요나보다, 솔로몬 왕보다 더 큰 분이시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였으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치 않았다. 또 남방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 왕의 지혜의 소문을 듣고 그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심히 먼곳에서 많은 수행원을 이끌고 방문하였으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단지 물질적 차원의 기적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니느웨 사람들보다 못하고 남방 여왕보다 못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들은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다.
[43-45절]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들을 체험했지만,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 그를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많은 귀신들도 내쫓아주셨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마치 빈집과 같이 참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쫓겨났던 귀신이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자기가 나왔던 그 집에 들어가 거하듯이, 이 악한 세대의 나중 형편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그 세대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귀신이 그 세대의 주인 노릇을 할 것이며 더 악한 다른 귀신들과 더불어 그 세대를 더 악화시킬 것이다. 믿다가 타락한 자들, 즉 종교적 배교자들과 이단들은 세상보다 더 악하게 될 것이다.
[46-50절]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다. 예수께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등의 남동생들과 누이들이 있으셨다(마 13:55-56; 막 6:3). 예수께서는 맏아들이셨다(마 1:25 전통본문;20) 눅 2:7). 천주교회가 마리아가 평생 처녀이었고 죄가 없이 출생했고 후에 승천했고 기도의 대상이며 하늘의 여왕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우상숭배적인 교리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라는 한 사람의 말에 대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시며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육신의 가족 관계보다 영적인 가족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그는 그의 제자들을 “나의 동생들”이라고 부르셨다. 부활하신 후에도 그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마 28:10).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9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가족에 맏아들이 되셨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성경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전도사역을 하기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마 4:17; 막 1:15).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고 말했고(행 17:30), 또 자신이 전한 내용을 요약하기를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말했다(행 20:21). 또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로마서 6:22에서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3:23에서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말했다. 이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의 뜻이 죄의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에 대한 순종임을 밝히 보인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들과 부활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특히 ‘요나의 기적’ 즉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믿음의 견고한 기초가 된다.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둘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요나보다 큰 자이시며 솔로몬보다 큰 자이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믿음 없는 사람들처럼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니느웨 사람들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스바 여왕처럼 그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고 듣고 배우고 실천하기를 사모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육신의 가족 관계보다 더 중요한 영적 가족 관계이다. 우리는 이미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 가르친 모든 선한 교훈을 듣고 마음에 두고 힘써 실천해야 한다.
13장: 천국 비유들
본장에서 예수께서는 천국에 대해 일곱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다.
1-23절,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9절]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들을](전통본문)21)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말씀을 전하셨다. 그는 배에 올라가 앉으셔서 말씀하셨고, 사람들은 해변에 서서 그의 말씀을 들었다. 그것은 야외 집회이었다. 그는 무리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것은 본장의 일곱 가지 비유들 중 첫 번째 비유이다.
[10-13절]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제자들이 예수께 “왜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말하자, 그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천국의 지식이 모든 사람에게 다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천국은 비밀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들, 곧 선택된 자들만 얻게 된다. ‘있는 자’ 곧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더 알게 되지만, ‘없는 자’ 곧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는 그의 아는 지식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14-17절]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의 완악함으로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을 예언하셨었다. 하나님의 선택은 진리에 대한 관심과 이해와 믿음과 순종으로 나타나나, 하나님의 버리심은 진리에 대해 관심 없음, 깨달음 없음, 믿음 없음, 순종 없음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마음은 무지하고 완고할 뿐이다. 그러나 천국 복음을 깨닫고 믿는 자는 복되다. 옛부터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보기를 원하였고 듣기를 원했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의 친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닫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복 받은 자들이다.
[18-23절]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주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의 뜻을 설명해주셨다. 씨는 천국 말씀을 가리켰다. 씨 속에 생명이 있듯이, 천국 말씀 속에는 구원의 생명이 있다(벧전 1:23). 길가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달음이 없는 자인데, 마귀가 와서 그가 들은 말씀을 빼앗아 간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천국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환난과 핍박이 일어날 때 곧 넘어지는 자를 가리켰다. 그의 믿음은 감정적이고 확신이 없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받으나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 등의 장애물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를 가리켰다. 육신의 쾌락도 그 장애물에 포함된다(눅 8:14).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인내하며 행하여 열매 맺는 자를 가리켰다. 좋은 땅에 뿌리운 경우 외에 세 경우들은 다 실패한 경우들이다. 그들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사람 편에서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뿌리를 내리며, 세상 염려나 재물의 유혹을 이기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열매를 맺는 자들이다. 그 열매의 분량 즉 성화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고전 15:10).
이 비유는 천국이 현재 땅 위에서 시작됨을 말한다. 천국은 장차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지만, 현재 씨앗처럼 세상에 널리 뿌려지고 있고, 택한 자들의 마음 속에 심겨져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다. 천국의 현재적 단계가 바로 신약교회이다. 교회는 천국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 천국의 현재적 단계는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있다. 신약교회 속에는 중생하지 못한 자들도 들어올 수 있고 또 중생한 자라도 성화의 정도가 다 달라서 어떤 이들은 아직 중생하지 못한 자처럼 옛 사람의 성질, 곧 무지하고 죄악된 성질이 남아 있고 그 성질 때문에 그의 삶에 부족한 흔적이 많고 선한 열매가 보이지 않기도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된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깨닫고 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구약시대에 선지자들과 의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기를 원하였고 그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였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의 교훈을 받고 그의 영 곧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의 임재를 느끼며 그의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인해 하나님께 늘 감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천국 복음을 들을 때 그것을 밝히 깨닫고 믿고 확신해야 한다. 골로새서 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누가복음 1: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셋째로, 우리는 바른 믿음의 성장을 가로막는 세상의 염려나 돈 사랑, 육신의 쾌락 사랑 등의 장애물들을 제거해야 한다.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넷째로, 우리는 천국 복음을 듣고 깨닫고 믿고 확신하고 행할 바를 행하여 선한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이며 그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뜻은 죄인이 구원받아 의와 선을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누가복음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우리는 믿고 인내하며 실천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한다.
24-43절, 곡식과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24-30절]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하셨다. 어떤 사람이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렸는데, 사람들이 자는 동안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가라지’라고 번역된 원어(지자니온 zizavnion)는 ‘독보리’를 뜻한다고 한다(BDAG). 싹이 자라고 열매를 맺을 때에 곡식뿐 아니라, 가라지도 보였다. 집 주인의 종들이 말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은 원수가 그렇게 한 것을 알았다. 종들은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때 주인은 말했다.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였다. 그는 가라지를 뽑는 일을 추수 때까지 보류하게 하셨다. 물론, 분명하게 드러난 오류들은 지적되고 교정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18:15-18,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고린도전서 5:12-13,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그러나 교회의 완전 정화는 마지막 심판 때까지 유보되었다.
[31-33절]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라카논 lavcanon)[채소]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께서는 또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를 하셨다. 이 두 비유는 천국의 확장성(擴張性)을 보인다. 천국은 겨자씨 한 알과 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적은 무리”라고 부르셨다(눅 12:32). 그의 제자들은 적은 무리로 시작되었으나, 그들로부터 시작된 구원 운동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퍼져나갈 것이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역사이었다(행 1:8). 그러나 겨자씨 한 알같이 시작된 천국은 싹이 나고 점점 자라서 큰 나무가 될 것이다. 또 천국은 가루 서말의 밀가루 반죽을 전부 부풀게 한 누룩 같을 것이다. 그것은 비록 작은 것이지만 장차 온 세상에 널리 퍼질 것이다. 이것이 신약교회이다. 과연 신약교회는 2천년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심히 커졌고 온 세계 방방곡곡에 널리 세워졌다.
겨자씨 비유에서 자란 후에는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말씀은 교회의 부패와 사탄과 악령들의 침입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와 현실을 볼 때 그렇다. 요한계시록 18:2는 큰 성 바벨론이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말세에 배교한 교회를 암시하였다.
[34-35절]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시 78:2).
[36-43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들을](전통본문)22)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人子)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계시며 성령으로 전도자들을 통하여 계속 좋은 씨를 뿌리신다. 밭은 세상이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씨는 천국 말씀이었지만,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서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다. 그들이 모여 교회를 이룬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을 가리켰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이다. 원수가 가라지를 뿌렸다는 것을 보면, 이 가라지는 이단자들과 거짓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으나 중생하지 못한 자들이다. 41절 말씀대로, 그들은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이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추수 때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마지막 심판 때이다. 추수꾼들은 천사들이다. 이 세상의 끝에 심판 때에 천사들은 하나님의 나라 곧 신약교회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자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풀무 불 곧 지옥 불에 던질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데서부터 시작되어 성장하여 세계적인 교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속한 교회가 비록 작을지라도 낙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세계복음화임을 알고 오늘날 세계 교회의 성장과 확장을 보고 감사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마 24:14; 눅 24:47; 행 1:8; 계 7:9).
둘째로, 신약교회는 영적 전쟁터이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을 방해하며 교회를 부패시킨다. 배교 운동의 중심에는 마귀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루어질 것이다. 세상 끝날 곧 마지막 심판 때에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불법을 행하던 악한 자들은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며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현실 교회의 불완전함을 보고 낙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교회의 순결성 지키기를 힘써야 하고 지교회와 교단은 권징을 성실히 시행해야 하지만, 현실 교회는 불완전하다. 교회 안팎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있고 중생치 못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온전함을 위해 노력하지만 그 연약을 보고 낙심치 말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종교적 형식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면적 은혜, 곧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가 가라지가 아니고 참된 곡식일진대, 우리는 경건과 의와 거룩과 선과 진실을 나타내야 한다.
44-58절, 보화, 진주 장사, 그물의 비유들, 고향인들의 배척
[44-46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예수께서는 또 보화의 비유와 진주 장사의 비유를 하셨다. 이 두 비유는 천국의 존귀성을 보인다. 천국의 존귀성은 영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천국의 백성된 자들의 존귀성이다. 천국과 영생은 우리가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살 수 없는 정도의 가치를 가진 나라요 생명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서 천국 백성의 존귀성을 강조하신 것 같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천국 백성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고, 극히 값진 진주와 같다. 출애굽기 28:9, 12, 21, “호마노 두 개를 취하여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그 두 보석을 [대제사장의 의복인] 에봇 두 견대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어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 “[대제사장의 의복인 판결흉패에 붙이는]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 둘이라. 매 보석에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인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예수께서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해 또 극히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과 그 진주를 사듯이 자기 목숨을 바쳐 그 영혼들을 사셨다. 이것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께서는, 짐승처럼 무지하고 벌레같이 무가치한 우리들을 귀한 보화같이, 극히 값진 진주같이 존귀하게 여기셨다.
[47-50절]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주께서는 또 그물 비유를 하셨다. 이 비유는 천국의 현재적 단계인 신약교회가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음을 보인다. 그물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다 들어 있듯이, 신약교회에는 의인과 악인이 세상 종말의 때까지 섞여 있을 것이다.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에 교회 안에 있는 의인들과 악인들은 완전히 분리될 것이다. 악인들은 분리되어 영원한 지옥 불에 던지울 것이며 거기서 고통 중에 부르짖을 것이다. 천국은 온전한 의인들의 나라, 곧 진선미의 영광스런 세계가 될 것이다.
[51-52절]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신약교회의 말씀의 사역자들을 가리킨다. ‘새 것’과 ‘옛 것’은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가리킨다고 본다. 교회의 말씀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신구약성경에서 영의 양식을 공급한다. 우리에게는 성경이라는 풍부한 말씀 곳간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곳간을 두고 영적으로 굶주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늘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또 교회적으로 늘 성경을 강해하고 그것을 듣고 배우고 복습함으로 영의 양식의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시 1:1-3; 119:165; 골 3:16).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믿고 행하는 것은 의인들의 표가 될 것이다.
[53-58절]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셔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그의 고향 사람들은 놀라며 말했다.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그들은 그를 목수의 아들인 한 평범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그의 어린 시절이나 그의 남동생들과 또 그의 누이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낮추어 보았고 배척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그의 신적 영광이 감취어 있었던 것 같고, 그가 30세가 되어 메시아로서 전도 사역을 시작하셨고 또 많은 기적들을 행하심으로 그 신성(神性)의 영광을 나타내셨으나, 그들에게는 아직 그의 신적 영광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께서는, 벌레같이 무가치한 우리를 귀한 보화같이, 극히 값진 진주같이 여기셔서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셨다.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핏값으로 사신 존귀한 자들이다. 우리는 그 은혜를 감사하며 그를 위해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늘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또 교회적으로 늘 성경을 강해하고 그것을 듣고 배우고 복습함으로 영의 양식의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큰 평안이 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믿고 행하는 것은 의인들의 표가 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성도들을 볼 때 그들의 외모, 재산, 사회적 신분, 학력 등 외적인 조건들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믿음과 인격을 보고 귀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
14장: 떡의 기적
1-21절, 세례 요한의 죽음, 5병2어의 기적
[1-5절] 그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이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들 중 하나인 헤롯 안디바이다. 그는 갈릴리와 요단강 동쪽의 베뢰아 지방을 다스렸다. 다른 아들들로는 팔레스틴 북동쪽의 이두래와 드라고닛을 다스렸던 헤롯 빌립과, 남쪽의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렸던 헤롯 아켈라오가 있었다. 전에 헤롯 안디바는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헤롯 안디바는 자신의 첫째 아내인 아라비아의 아레타스 왕의 딸을 버리고 자기 동생의 아내를 취하였었다. 하나님의 사람 요한은 헤롯의 그 잘못을 용감하게 바로 지적하였고 그 지적 때문에 그는 옥에 갇히게 된 것이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 했으나 무리들이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했다. 마가복음에 보면, 실상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했고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했다(막 6:19-20). 악인들은 양심에 비추어 옳은 일을 하기보다는 단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그들의 말과 여론을 두려워할 뿐이다. 일반 대중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는 자를 그 나라의 왕과 왕후가 죽이려 했다는 것은 심히 잘못된 일이었다.
[6-8절]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헤롯은 생일을 맞아 잔치를 했다. 사람들은 자기 생일을 축하하며 잔치를 연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게 감사함이 없는 생일 축하는 무의미하다. 불경건한 자의 생일은 복이 아니고 지옥을 향한 첫걸음에 불과하다. 육신의 생일이 영원한 천국의 삶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의 생일 축하에 큰 의미와 가치는 없다.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헤로디아의 딸은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했다. 헤롯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말했다. 헤로디아의 딸은 자기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했다. 헤로디아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선지자 요한을 미워해 옥에 가두게 했을 뿐 아니라, 또한 이제 그를 죽이려 한 것이다.
[9-11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왕은 허세(虛勢)로 한 자기의 맹세에 자기가 걸려 넘어졌다. 그가 근심한 것은 군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고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그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헤롯은 공의의 판단과 처리보다 자기의 명예와 체면을 더 중시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권력을 남용하여 하나님의 사람 요한을 죽이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요한의 목은 잘리웠고 그의 머리는 소반에 담겨 왔다. 사람의 독한 미움과 복수심은 기어코 이런 끔찍한 일을 만들고 말았다. 사람은 만물보다 더 악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옥중에서 목베임으로 그 생을 마쳤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한을 위해 작정하신 생애의 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결코 수치가 아니고 영광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을 것이며, 의로운 순교자의 죽음 후에는 영광과 큰 상급이 있다.
[12절]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세례 요한이 죽기까지 그를 따른 제자들이 있었다. 메시아가 오셨으나 그들은 아직 메시아에게 속하지 않았다. 세례 요한의 시대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는 얼마 동안 중첩되었다. 요한 자신이나 그의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죽은 후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 같다. 이제 한 시대는 갔고 한 시대가 왔다. 세례 요한의 시대가 끝났고 메시아의 시대가 왔다.
[13-14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옥에서 목베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셨고 헤롯이 자기를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라고 말한다는 소문도 들으셨을 것이다. 그는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셔서 따로 빈들에 가셨다. 무리들은 그가 어디 계신다는 말을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그를 좇아갔다. 예수께서는 나오셔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구약교회는 부패되어 있었고 그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치 않았다.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들같이 근심하며 방황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중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그의 신적 능력으로 그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15-18절]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저녁시간이 이미 지났지만 사람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배가 끝나자마자 바삐 집으로 돌아가는 오늘날 교인들과 달랐다. 제자들도 그들을 돌려보내자고 제안하지 않았고, 단지 식사시간이니까 마을에 들어가 음식을 사먹게 하자고 말했다. 그 방황하며 갈망하는 무리를 위해 주께서는 자리를 피하거나 그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려 하지 않으셨다. 그는 오히려 그들의 육신적 양식에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것은 한 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것이었다(요 6:8-9). 그 떡 다섯 개는 너무 부족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그 보잘것없는 것을 가지고 그 많은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이실 수 있었다.
[19-21절]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약](원문) 5천명이나 되었더라.
주께서는 무리를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 ‘축사한다’는 원어(율로게오 eujlogevw)는 ‘감사한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음식물을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그는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무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다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 주님의 떡 기적은 겨우 배고픔을 면하는 정도가 아니고 무리에게 배부름을 주는 것이었다. 떡을 먹은 사람들은 여자와 아이 외에 약 5천명이 되었다. 즉 장년 남자만 약 5천명이었다. 원문에는 ‘약’(호세이 wJsei;)이라는 말이 있다(KJV, NASB). 오늘날과 같이, 그 당시에도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거기에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리는 만 명이 족히 넘었을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숫자이다. 그 많은 무리들이 그 저녁에 놀라운 떡의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 그들은 이 일에 산 증인들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헤롯과 헤로디아의 악행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 중에 음행하거나 간음하는 자,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사람은 모든 죄를 버리기를 결심하고 예수님의 의만 의지하고 작은 실수라도 행치 않도록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따라 의와 선만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의 생애가 하나님의 작정대로 됨을 알아야 한다. 세례 요한은 옥에서 순교하였다. 모두가 다 순교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순교로 생을 마치는 자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작정하셨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의 영광스런 나라를 소망하며 오직 믿음과 계명 순종으로 살아야 한다.
셋째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이상 먹이신 예수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한 알의 씨가 썩어 수천 혹은 수만 개의 곡식을 만들어 내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만 아시는 신비한 법칙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신이시다(욥 42:2). 예수께서 행하신 떡 기적은 그의 신성(神性),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넷째로, 떡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풍성히 공급해주실 수 있음을 증거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물들을 기르시고 먹이시는 섭리자이시다(시 104:25-29).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도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마 6:11).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주의 문제를 염려하지 말고, 단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하며(마 6:33)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과 교훈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22-36절, 바다 위로 걸어오심, 병자들을 고치심
[22-24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예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다. 그는 무리를 보내신 후에 육신적으로는 피곤하셨을 것이지만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저물었고 그는 아마 여러 시간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산에 혼자 계셨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지셨으나 기도의 본을 보이셨다. 기도는 연약한 인생인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와 힘을 얻는 길이다.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 있었다. 24절에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라는 구절은 헬라어 전통본문에는 “바다 가운데 있어”라고 되어 있다(KJV).23) 갈릴리 바다는 타원형 바다인데, 남북의 직경은 약 21킬로미터, 대략 합정동에서 안양까지이며, 동서의 직경은 약 11킬로미터, 대략 합정동에서 동대문까지인 큰 바다이다.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서 거센 바람과 흉흉한 물결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전날 놀라운 떡 기적을 체험했던 제자들이 그 기적의 감격이 아직 생생히 남아 있었던 때에 어려운 일이 생겼다. 바다는 항상 안정이 없다. 세상은 항상 안정이 없고 평안과 환난이 번갈아 찾아온다(전 7:14).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훈련 과정이다.
[25-27절]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밤 사경(四更) 즉 새벽 3시부터 6시 즈음에 예수께서는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그는 밤늦게까지 산에 계셨고 새벽녘에 제자들에게 오셨다. 그는 어려움 당한 제자들을 위해 급히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풍랑 이는 바다 위로 걸어오실 수 있으셨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제자들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고 말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질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잠시라도 그들을 놀라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거센 바람과 물결로 인해 고난 당하는 제자들을 도우려고 오신 것이었다.
[28-31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거센](전통본문)24)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었다. 그는 잠시 바다 위로 걸었다. 그는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물 위로 걸어본 자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얼마 걷지 못하여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갔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다. 주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주시며 그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셨다. 성도는 세상의 어려운 현실만 보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낙망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바라보아야 한다.
[32-33절]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사람들은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른 고백이었다.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은 단지 사람이 아니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이셨다.
[34-36절]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예수께서는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육신에 병든 자들도 많이 고쳐주셨다. 그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는 사람들은 다 고침을 받았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9:35,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풍랑 이는 바다 위로 걸어오셨다. 또 그는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만이 아니고, 많은 병자들이 그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기를 원하며 손을 대었을 때 고쳐주셨다. 그의 병고침의 기적들에서 나타난 그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런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성경의 증거들에 근거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는 구주이실 뿐 아니라,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어려운 일들에서 우리를 도와주실 주님이시다. 바다 위로 걸어오셔서 제자들을 도우시고 믿음 적은 베드로를 도우신 그는 오늘도 그를 믿는 자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달려와 도와주실 것이다. 이사야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예수께서는 육신의 피곤에도 불구하고 밤늦도록 산에서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기도하기를 힘쓰셨다면, 육신의 연약성과 죄성을 가진 우리들은 얼마나 더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는가? 우리는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등 많은 문제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15장: 마음의 더러움
1-20절, 사람을 더럽히는 것
[1-6절]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遺傳)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遺傳)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떡 먹을 때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으로 좋은 일이다. 또 장로들의 교훈은 그것이 성경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따르는 것이 옳고 덕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은 것이 비난할 만큼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전통에 맞지 않으면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남을 비난하기 쉽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면 부모에게는 안 드려도 괜찮다고 가르쳤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 때문에 사람에 대한 의무를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부모를 공경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의 교훈이나 심지어 교회의 교훈도 그들처럼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주께서는 이 지적과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절대적 기준과 규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이셨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절대적 기준과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뿐이다. 우리는 성경이 명하는 것은 하고 금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성경이 침묵하는 문제에 대해 독단적이지 않는 것이 좋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절대적 기준과 규칙이며 최종적 권위이다. 우리는 사람의 전통과 교훈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그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을 순종해야 한다.
[7-9절]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겼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었다는 증거는 그들이 자신이 만든 규칙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변경시키고 폐지시킨 것이었다. 이것이 어리석은 외식자의 종교생활이었다. 성경의 교훈을 저버린 종교생활은 헛된 일이었다.
[10-14절]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天父)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사람을 참으로 더럽게 하는 것은 도덕적 문제이다. 위생적 문제는 죄 문제와는 다르다. 더러운 손으로 먹는 것은 위생적으로는 좋지 못하나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주의 말씀을 듣고 마음과 기분이 상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심은 것마다 내 천부(天父)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씨 뿌림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으신 것이 있고, 심으시지 않은 것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으신 것은 영원한 생명, 곧 중생(重生)의 새 생명을 얻은 자이다. 그는 구원받은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가짜이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 그에게는 새 생명이 없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결국 뽑힐 것이다. 그는 환난과 시험의 때에 또는 엄격한 진리의 교훈 앞에 뽑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 때에 뽑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의 교훈 앞에 실족하는 자는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러나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바른 말씀을 믿고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15-20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베드로는 예수께 이 비유를 설명해주시기를 구했다. 주께서는 그들의 깨달음 없음을 지적하며 말씀하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카르디아 heart)은 인격의 중심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신 6:5).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의 마음이 심히 부패하였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 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새 생명은 마음의 변화를 수반한다. 구원은 마음의 변화로 나타난다(겔 36:26).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 마음(heart)의 변화는 무엇보다 생각(누스 mind)의 변화를 포함한다. 구원받은 자는 그 생각이 변한다. 전에는 사람이 그 생각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으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생각의 변화가 일어난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에베소서 4:23-24, “오직 심령[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의 생각은 경건하고 거룩한 것을 추구한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살고 죄악되고 불결한 것을 멀리하기를 원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경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 기준과 규칙이다. 예수께서는 장로들의 유전 즉 교회의 전통과 성경 중 어느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절대적 기준과 규칙이 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성경이 절대적 기준과 규칙이 됨을 밝히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에 성경이 절대적 기준과 규칙임을 알고 오직 성경을 열심히 전하고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믿고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심으신 자인지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심으신 자들은 중생(重生)한 자들이다. 그들의 중생은 참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증거된다. 하나님께서 심으신 자들은 시험과 환난이 와도 쉽게 뽑히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으시지 않은 자들은 시험과 환난이 올 때 뽑힐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내면적 성결을 소원하고 실천해야 한다.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단지 위생상 불결일 뿐이지, 사람을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더럽히지는 못한다. 사람의 더러움은 마음 속에서 나오는 악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성결보다 내면적 성결, 즉 마음의 성결을 사모하고 그 성결을 지키기를 힘써야 한다.
21-39절, 가나안 여자의 딸을 고쳐주심, 두 번째의 떡 기적
[21-22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두로와 시돈 지방은 이스라엘 북서쪽 국경지역으로 원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땅이었다(수 13:6). 주께 나아와 귀신 들린 자기 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친 가나안 여자는, 마가복음 7:26에 보면, 헬라인이었고 수로보니게 족속이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신적 메시아로 믿었다고 보인다. 그는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고 두 번 더 그를 ‘주여’라고 불렀다(25, 27절). ‘주여’라는 말은 신적 호칭이며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라는 뜻이다. 그의 딸은 귀신으로 인한 정신적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부족한 자로 여기며 예수께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간구하였다.
[23-26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와서 예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을, 자기를 도우실 수 있는 신적인 존재로 여겼다.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들에, 이방인들을 개들에 비유하셨다. 그것은 영적 특권에 있어서 사실이었다.
[27-28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 여인은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한대 자신이 이방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같은 은혜라도 주시기를 간구했다. 그 여자는 마침내 응답을 얻었다. 주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시자, 바로 그 시각 그의 딸이 고침을 받았고 건강의 회복을 얻었다. 기적이 일어났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한번 더 증거되었다. 그는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사람의 영육의 질병, 곧 심신의 문제를 고쳐주셨다.
[29-31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주시니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의 회개와 죄사함의 영혼 구원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육신적 질병들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 등 각종 병자들을 데려와 예수님의 발 앞에 두었고, 예수께서는 그 병자들도 다 고쳐주셨다. 벙어리는 말하고 불구자는 건전하게 되고 절뚝발이는 걸으며 소경은 보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중풍병, 나병, 열병, 귀신들림, 간질, 혈루병, 소경, 벙어리, 손 마름, 절뚝발이 등 오늘날 병원의 신경외과, 피부과, 내과, 신경정신과, 비뇨기과, 안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등에 해당하는 다양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전하였다.
병 치료의 기적들은 그의 신성(神性),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증거와 표이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복음서들의 증거를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확신해야 하며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얻어야 한다.
[32-33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무리들은 이미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사흘 동안이나 그 광야에 거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 먹을 것은 다 떨어지고 육신의 힘도 다 떨어졌을 것이다. 그냥 해산하면 길에서 기진할 자들이 있을 정도이었다. 이때 예수께서 그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는 단순히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을 위해 이 두 번째 떡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사흘이나 있었던 무리들을 위해 행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의 영적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고, 또한 육신적 문제, 즉 떡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셨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 대해서도 그러하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의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그는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신도 돌보시고 기르시는 목자이시다.
주의 제자들은 얼마 전에 경험한 떡 기적은 잊었던 것 같다. 그들은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 그들은 잠잠히 주의 능력을 의지하고 기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성적 계산에만 빨랐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면, 만일 그들이 첫 번째 떡 기적을 기억하였었다면, 그들은 주님께 어떤 해결책을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운 현실에서 믿음 없음을 드러낼 뿐이었다.
[34-3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는 많은 무리들을 위해 없는 것과 같은 음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셨고 모든 것이 가능하셨다. 예수께서는 무리로 땅에 앉게 하셨고 그 보잘것없는 음식을 가지고 축사하셨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떼어주기 시작하셨고 제자들은 주님께 그것을 받아 무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보잘것없는 음식은 그의 손에서 신기하게 늘어났다. 주께서 떼어주시는 행위는 수없이 반복되었고 온 무리가 배불리 먹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람들의 육신적 필요에 대한 그의 기적적 행위는 그 필요가 충족되고 남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37-39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막달라](전통본문)25) 지경에 가시니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가나안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셨고 각종 질병에 걸린 자들을 고쳐주셨고,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4천명 이상을 먹이셨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둘째로, 무슨 문제든지 겸손히, 간절히 주께 구하는 자는 도우심을 얻을 것이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문제의 해답이다. 가나안 여인은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히 주께 나아와 간구함으로 딸의 병을 고침받았다. 우리는 무슨 일이나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히 주께 간구해야 한다.
셋째로, 구원과 성화는 외적 기적보다 더 중요하다. 하나님의 뜻은 택자들의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이다. 2천년 기독교 역사는 그 일이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성경말씀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증거한다. 우리는 기적을 구하지 말고 회개와 믿음과 순종과 성화를 구해야 한다.
16장: 베드로의 신앙고백
1-12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1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신앙 사상이 서로 달랐다. 바리새인들은 보수적인 신앙을 가졌으나 형식적이며 위선적이고 사두개인들은 자유적인 신앙을 가졌고 세속적인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이질적인 사상을 가진 두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데는 연합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불화할지라도 진리를 대적하는 데는 연합하는 것 같다. 그들은 예수께 와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요청은 그들의 믿음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들의 호기심의 만족을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믿으려 하는 자는 이미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확인함으로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주신 기적들을 확인해 보려 하지 않고 또 다른 하나의 기적을 구하는 것은 확실히 불신앙적이다. 오늘 우리도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충분하게 여기지 않고 추가적 기적을 구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부족함과 마음의 완고함을 나타낼 것이다.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天氣)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중생치 못한 자들은 세상의 지식과 판단력은 있어도 진리의 지식과 영적 판단력은 없다. 메시아께서 오셨다는 증거들은 많았다. 구약 예언들은 성취되고 있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 다윗의 자손으로 오심, 나병, 중풍병, 소경, 벙어리, 앉은뱅이 등 많은 불치(不治)의 병자들을 치료하심, 죽은 자들을 살리심 등은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표들이었다. 메시아께서는 확실히 오셨다. 그러나 소경된 유대 지도자들은 시대의 표적들을 분별치 못하였다.
[4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경건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으나,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표적을 구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세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자들, 내면적 성결과 변화보다 기적 같은 것에 관심을 가졌던 이런 자들은 참 교회에 속하지 않고 교회 밖에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런 자들의 불신앙과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하실 표적은 없으셨다. 주님의 기적들은, 주로 그를 따르며 그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러나 요나의 표적이라고 표현되는 한 가지 표적은 남아 있었다. 요나가 삼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일 간 무덤에 있으실 것이다. 물론 이 삼일은 대략적 표현이라고 보인다. 요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모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과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은 불신앙적 세상을 위해 주시는 마지막 표적(sign)이다. 이 표적 앞에 사람들은 가부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거부할 것인가? 실상 다른 표적은 필요하지 않았다.
[5-10절]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재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4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으로 갈 때 떡 가져가기를 잊었다. 예수께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때때로 주님의 비유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아시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4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주께서 제자들과 하신 이 대화는 앞에 기록된 두 차례의 떡 기적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가진다. 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시고, 떡 일곱 개로 4천 명을 먹이신 이 두 차례의 떡 기적들은 지어낸 신화가 아니고 역사적 사건임을 주께서 다시 확증해주신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사건들은 이중 삼중적으로 증거되었다. 불신앙자들은 그 어떤 증거를 보고 들어도 믿지 않겠지만, 믿으려 하는 자들은 믿을 만한 증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믿지 못할 어떤 것, 불확실한 어떤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으시고, 믿을 만한 많은 증거들을 성경에 제시해 주시면서 믿으라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권하시는 것이다.
[11-12절]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보수 신앙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바로 알지 못하였고 자기 의(義)를 의지하고 자랑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지식도 많았고 상당한 열심도 있었으나 종교의 외적 규례들만 중시했고 더 중요한 그 내면성을 무시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겉모습보다 마음이다. 마음의 할례는 경건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주의에 떨어져 있었다.
다른 한편, 사두개인들은 그 당시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존중했으나 다른 성경들은 무시했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천사도 영도 몸의 부활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의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었고, 또 세상의 권력과 금력과 결탁한 세속주의자들이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현실에 잘 적응하였고 잘 타협했다. 당시에 사회적 신분이 있고 물질적으로 부유했다고 보이는 제사장들은 이 파에 속하였다.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곧 교훈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교훈은 누룩같이 퍼져나가는 힘이 있다. 좋은 교훈은 좋은 영향을 끼치지만, 잘못된 교훈은 나쁜 영향을 끼친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 형식주의에 떨어져 있었고 사두개인들은 자유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교훈들을 분별하고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해를 당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을 위해 주시는 마지막 표적이다. 그의 많은 기적 행하심의 일들과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표이다. 이 표적 앞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거부할 것인가 가부간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다른 표적은 필요치 않았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들의 잘못된 교훈들을 분별하며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해를 당할 것이다. 그것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다(딤후 2:17). 그것은 자신만 망치지 않고 온 교회를 망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 바른 교훈을 붙들어야 하고 잘못된 교훈을 분별하고 멀리해야 한다. 여기에 성경 읽기와 성경 연구의 중요성이 있다.
13-20절, 베드로의 신앙고백
[13-16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人子)를 누구라 하느냐?[사람들이 인자인 나를 누구라 하느냐?](전통본문)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방문하셨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은 이스라엘 땅의 가장 북쪽에 있는 헤르몬산 기슭이며 요단강의 발원지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인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의 인성(人性)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대답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는 다시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구약에 예언된 자로서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을 완성할 자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구원의 길을 전하시는 참 선지자이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참 제사장이시며, 교회와 온 세상을 의로 통치하실 왕이시다.
또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세상의 창조주와 섭리자이신 하나님께는 외아들이 계시다. 아버지와 아들은 옷만 바꿔 입으신 것이 아니고, 두 구별된 인격이시다. 이것은 신비이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啓示)된 만큼이 이러하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친근히 부르시면서 베드로가 자기에 대해 한 고백이 복되며 그의 깨달음과 지식과 믿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우리의 눈을 여시고 귀를 여심으로써만 가능하다(행 16:14).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또,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원어에서 베드로는 남성명사인데, “이 반석 위에”라는 구절에서 ‘반석’은 여성명사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구절에서 ‘반석’은 베드로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가리킨다고 본다. 고린도전서 3:11은 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소속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다. 또 그가 친히 그의 교회를 세우신다. 그는 성경의 바른 진리와 성령으로 그의 교회를 온 세계에 세우셨고 오늘도 계속하여 세우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음부’(陰府, 하데스 a{/dh")는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킨다.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모든 사람은 죽는다. 무덤은 죽은 자들의 집이며, 지옥은 죄인들이 죽은 후에 들어가는 집이다. 그러나 주께서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 그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깨끗케 되었다. 죄가 제거됨으로 죽음도, 무덤도, 지옥도 극복되었다. 무덤과 지옥의 권세가 구원받은 성도들을 이기지 못한다.
[19-20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천국 열쇠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신 권세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복음 진리는 영생과 멸망, 천국과 지옥을 나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막 16:15-1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정치적 자유를 주시며 물질적 가난과 궁핍으로부터의 복을 주시는 자로 이해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 죄인들의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위해 오신 사실은 아직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기의 십자가에 죽음과 삼일 만의 부활이 있을 때까지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본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 우리의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진리의 반석 위에 굳게 세워져 있음을 감사하고 더욱 힘써야 한다. 목사들은 그 복음 진리를 바르게 선포해야 하고 성도들은 그 복음 진리를 믿고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 즉 무덤과 지옥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의 복을 항상 감사하며 그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전도라는 천국 열쇠를 힘써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전도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전도자들은 그 도구이다. 믿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며 믿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28절, 자기 부정을 가르치심
[21-23절]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책망하여](KJV, NASB, NIV)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고 제자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 분명해졌을 때, 예수께서는 비로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날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책망하며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했으나 그가 죽으실 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고 그를 영광의 왕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죄인들의 구원이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베드로의 책망을 들은 주께서는 돌이키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는 방금 전에 바른 신앙고백으로 칭찬을 들었지만, 지금 심한 책망을 듣는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방해하면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의 말은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메시아께서 죽는 것인데 베드로는 그것을 가로막았다.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며 독생자께서 택자들을 위해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의 생각, 가치관, 명예, 자존심, 세상적 부귀와 영광을 버리고 그 대신 하나님의 생각과 가치관,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라는 뜻이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라는 뜻이다. 사형수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가서 거기에 달려 죽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는 죽음을 각오할 수 있다. “나를 좇으라”는 말씀은 주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그의 행위를 본받으라는 뜻이다. 주님은 친히 십자가의 길을 가졌다. 그의 제자된 자들도 그의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25절] [이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그것을] 찾으리라[찾을 것임이니라].
이 말씀은 자기 희생의 행위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자기 희생의 행위가 영생 얻는 자의 당연한 삶임을 보인다. 성도의 자기 희생적 삶은 그가 영생의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주께서는 두 가지 목숨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는 육신의 목숨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목숨이다. ‘목숨’이라는 원어(프쉬케)는 ‘육신의 생명’이라는 뜻도 되지만, ‘영혼’이라는 뜻도 된다. 본문은, “누구든지 자기 육신의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자기 영혼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자기 육신의 목숨을 잃으면 자기 영혼을 찾으리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때 영생할 수 있지만 그 생명을 소유하지 못할 때 영생할 수 없고 도리어 둘째 사망(계 21:8) 즉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육신의 목숨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의 목숨이다.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자기 영혼](KJV, NASB, NIV)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본절은 육신의 목숨에도 적용될 수 있으나 영혼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적용된다. 사람은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얻기 위해 믿음을 버리고 죄를 짓지만, 그는 비록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린다 할지라도 죽어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그러므로 수십년의 행복을 위해 영원한 불행을 택하는 것은 결코 유익하거나 지혜로운 삶이 아니다. 영생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화이다. 세상에서 그것보다 귀한 것은 없다.
[27-28절] [이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갚을 것임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주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의 천사들과 함께 오는 날은 그의 재림 때이다(마 24:30; 살전 4:16). 그때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다. 그 날은 그의 공의로운 심판의 날이다(롬 2:6-7).
예수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좀 어려워 보이지만, 다음에 기록된 변화산 사건을 가리키지 않는가 생각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베드로처럼 잠시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뜻과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육신의 목숨을 위해 살지 말고 영혼의 목숨 즉 영생을 위해 살아야 한다. 사람의 육신의 목숨도 귀하지만,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영광스런 부활의 생명은 비교할 수 없이 더 귀하다. 예수께서는 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이 영생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목숨을 위해 살지 말고 천국에서 누릴 영생을 위해 살아야 한다.
17장: 변화산 사건
1-13절, 변화산 사건, 엘리야가 먼저 왔음
[1-2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엿새 후라고 날짜를 꼽은 이유는 바로 앞부분의 예언대로 세 제자들이 주께서 그의 나라에 임하시는 영광을 미리 보았음을 증거하는 것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변형되셔서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그것은 그의 본래의 영광, 곧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보이신 것이었다. 영광의 주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의 본질을 취하셨고 그것도 연약하고 낮은 모습을 취하셨다. 이사야 53:2에 보면, 선지자 이사야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예언했었다. 사도 바울은 그에 대해 이 세상의 관원들이 그를 알지 못하여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했다(고전 2:8).
[3-5절]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였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직접 받은 인물이었다(요 1:17).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다”고 증거하셨다(민 12:7-8). 엘리야는 선지자들 중에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산 채로 하늘로 올리운 특별한 인물이었다. 그 둘이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했다고 보인다.
베드로는 예수께 말하였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그가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또한 후시대에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친 음성으로 아들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여 주셨다.
베드로는 후에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이 사건을 회고하면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으며 하나님께서 친 음성으로 주신 증거를 들었다고 말하였다. 베드로후서 1:16-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6-8절]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의 신성의 영광의 나타남은 짧은 시간 동안만이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경험의 반복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영광의 주로 확실히 믿고 그 믿음대로 그의 계명에 순종하며 그를 위해 사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것이 필요하다.
[9절]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은 참된 믿음을 위해서만 알려질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광을 오용치 않도록 주께서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자신이 알려지지 않게 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그의 신적 영광과 기적들은 단순한 호기심의 만족이나 지상 왕국 건립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되고,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또 믿으려 하는 자들에게는 성경에 증거되고 기록된 이런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확실한 표들이다.
[10절]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말라기 4:5-6은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예언하였다. 당시 성경학자들인 서기관들은 이 예언이 메시아께서 나타나시기 전에 엘리야 같은 한 선지자가 나와서 대중들을 회개시킬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11-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人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엘리야가 먼저 왔다는 것은 사람의 환생(還生)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승천한 엘리야가 다시 어린 아기로 출생하거나 하늘로부터 강림할 수는 없다. 이 예언은 한 선지자가 엘리야의 심령으로 나타나 엘리야 당시와 같이 배교적인 시대의 상황을 거슬러 외로이 그러나 능력 있고 충성되게 사역할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 선지자가 왔다. 그가 세례 요한이었다. 누가복음 1:17에 증거한 대로, 그의 출생을 예언했던 천사는,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서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말하였다.
그가 예언대로 왔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해 임의로 대우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대로 회개의 세례를 받았으나, 대중의 지도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와 비슷하게, 메시아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게도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많은 고난과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무지한 대중들은 그를 핍박하는 일에 동참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눈과 귀가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를 공경하고 따를 것이다. 동일한 인물에 대해 또 동일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그 두 부류는 나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의 영광, 즉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알아야 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광의 주님이시다. 그는 본래 하나님이시다(요 1:1).
둘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히 음성으로 예수님에 대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증거하셨다. 그것은 주의 제자들을 위해 또한 후시대에 그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증거이었다. 우리는 이 증거들을 믿어야 한다.
셋째로, 영광의 주께서는 연약하고 낮고 비천한 사람의 몸으로 오셨고 고난을 당하셨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우리는 낮아지시고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주님을 믿고 또 본받아야 한다.
14-27절, 간질병 아들을 고쳐주심, 반 세겔 세금을 내심
[14-16절]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린 사람은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신적 능력을 인정하였고 예수께서 자기 아들의 불치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아들의 병은 간질병이었다.26) 그 아들은 그 병으로 심히 고생하고 있었고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졌다. 몸이 상했고 여러 번 죽을 위험도 겪었다. 그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지만, 그들은 그를 고치지 못하였다.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제자들이 그 병을 고치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을 고치려는 제자들도, 병 고침을 받으려는 당사자도 믿음이 없었다. 믿음이 없으면 병을 고칠 수 없고 병 고침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20절에서 믿음을 강조하셨다. 그는 고향 나사렛에서도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고 배척하므로 아무 권능도 행하지 못하시고 소수의 병자들에게만 안수하여 고치셨었다(막 6:3-5).
예수께서는 간질로 고생하는 그 아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신 후, 그 병을 꾸짖으셨고 그러자 그에게서 귀신이 나갔고 그 아이는 그때부터 나았다. 그 아이가 미친 것같이 자주 발작을 한 것은 단지 신체적 이상이 아니고 귀신으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성경은 모든 병이 다 귀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본문의 사건처럼 어떤 병은 귀신으로 인한 것임을 증거한다(눅 13:11의 경우도).
[19-20절]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믿음이 없기 때문이라](전통본문).27)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도 없음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다. 주께서는 그들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기적주의를 가르치신 말씀이 아니다. 성경은 기적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무슨 일이나 어떤 동기나 의도를 가지고서든지 믿음을 가지고 명령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나님께 구하면 얻을 수 있고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일반적 교훈에 맞다.
[21절] [그러나 이런 유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전통본문).28)
주께서는 기도와 금식을 강조하셨다. 금식은 간절한 기도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곳들에서 강청의 기도를 가르치셨다(눅 11:8). 또 그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탄원한 과부의 비유에서 낙심치 않는 간절한 기도도 가르치셨다(눅 18:1-8).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의 부르짖는 간구, 특히 금식 기도를 잘 들어주실 것이다.
[22-23절]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人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였다.
[24-26절]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반 세겔’이라는 원어(디드라크몬)는 ‘두 드라크마’라는 뜻의 단어이다. 이것은 성전 세금이다. 출애굽기 30:11-16에 보면, 이스라엘의 20세 이상된 모든 사람은 생명의 속전(贖錢)으로 반 세겔을 내어야 했고 그 돈은 성막 봉사에 쓰였다. 베드로는 주께서 세금을 안 내는 자라는 비난을 받지 않으시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아마 그는 자신과 주님께 돈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의 대답은 주께서 모든 것을 처리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한 것이었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말하기 전에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그의 한 일을 알고 계셨다. 그의 지식은 사람의 제한성을 초월하신다. 관세(텔로스)는 소득세, 통행세를 가리키고, 정세(켄소스)는 인두세나 주민등록세를 가리킨다(BDAG).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성전세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전세가 면제될 자가 있다면 바로 그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온 세상의 왕의 아들이시며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27절]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부요하신 주께서는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 삶을 사셨다(고후 8:9). 그에게는 한 세겔도 없으셨다. 제자들의 주머니도 비어 있었다. 주께서는 사람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 낚시한 물고기의 입 속에 있는 한 세겔을 성전세로 내게 하셨다. 우리는 국가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얻은 이 사건은 신기한 일이었다. 주께서는 바다 속에 물고기 입에 물린 한 세겔을 보셨다. 그것은 그의 전지(全知)하심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그 고기가 베드로의 낚시에 첫 번째로 걸린다는 것도 놀랍다. 그는 그 물고기를 보셨고 그 입 속에 있는 한 세겔을 보셨고 그 물고기가 정확히 바로 그 시각에 베드로의 첫 번째 낚시에 걸리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신적 능력으로 되어졌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이 다시 한번 더 드러났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귀신 들린 간질병 환자를 고쳐주셨고 물고기 입 속의 한 세겔을 보셨고 그 물고기를 낚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다. 주께서는 간질병을 꾸짖으셨고 귀신을 복종시키셨고 불치의 병들을 고치셨다. 우리는 무슨 문제든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 그에게 기도하고 겸손히, 간절히 의탁해야 한다. 우리의 건강도, 경제적 안정도, 자녀 문제도, 사회적 평안도 그에게 기도하자.
셋째로, 우리는 비상한 경우에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는 “이런 유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강청의 기도, 결사적 기도를 드려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교회나 국가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국가가 정한 세금을 정당하게, 기꺼이 납부해야 한다.
18장: 겸손과 용서를 가르치심
1-14절, 겸손을 가르치심
[1-3절]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크다’는 원어(메이존)는 ‘더 크다’ 혹은 ‘가장 크다’는 뜻이다(BDAG).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니이까?”(KJV, NASB, NIV)라는 질문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교만과 명예심을 보인다. 그때 예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돌이켜’라는 말은 ‘회개하여’라는 뜻이다. 그는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지적하시고 책망하시듯이 “너희가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대체로 아직 교만과 명예심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은 교만과 명예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씀은 겸손한 인격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뜻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원받은 자는 교만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겸손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과정이요 구원받는 자의 표가 되는 것이다.
[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려 하지만 교회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다. 예수께서는 후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0:26-27). 겸손은 교회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매우 중요한 덕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 .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했다(빌 2:5-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 교회에서 큰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그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자이다. 교회는 서로 섬기는 자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5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교만한 사람은 높은 자에게는 아첨하고 낮은 자를 무시한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사랑하고 귀히 여긴다. 그 아이가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더욱 그렇다.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다(고전 12:27).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후에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마 25:31-46) 그의 형제들, 곧 그의 종들과 성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며, 그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방문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이며, 또 그의 이름을 가진 소자(小子) 하나의 영접 여부가 구원과 멸망을 나누며, 의인과 악인, 영생에 이를 자와 영벌에 던지울 자를 나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나, 구원의 표가 된다. 우리는 겸손히 서로를 영접하며 서로를 섬겨야 한다.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예수께서는 그를 믿는 어린아이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 곧 범죄케 하는 것이 큰 죄가 됨을 말씀하신다.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는 말씀은 얼마나 무서운 경고인가? 남을 범죄케 하는 것보다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우리는 산즉 남을 살리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지 남을 범죄케 하고 남을 멸망시키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7절]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이 세상에는 남을 범죄케 하는 일들이 적지 않고, 그로 인해 세상에 화가 있다. 우리는 남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에 바쳐질지언정, 남을 죄 짓게 하는 것, 예를 들어, 이단을 가르친다든지, 위선적 말과 행위로 남에게 참 신앙과 교회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게 한다든지 술취하고 음란한 풍조를 사회에 조장하는 등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8-9절]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주의 말씀은 매우 엄격하고 철저하시다. 그는 우리의 손이나 발, 우리의 눈이 우리를 계속 범죄케 한다면 그것을 찍어버리고 빼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다. 두 손,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계속 범죄하여 지옥 가는 것보다 한 손, 한 발, 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지 않아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구가 된 몸이 때때로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일 수 있다. 건강한 몸으로 죄만 짓는 것보다 불구의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더 복되다.
만일 우리가 불구의 몸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지백체를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고 선하게 사용해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이미 찍어버려야 했을 지체, 뽑아버려야 했을 지체를 가진 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손, 우리의 발, 우리의 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불구자가 되는 것이 더 유익하다.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소자’는 그를 믿는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기독교는 인격적 종교이다. 한 사람의 생명은, 어른의 생명이든 아이의 생명이든 혹 태아의 생명이든 동등하게 귀하다.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은 비인격적이다. 물론 가정이나 교회에서 질서와 직분의 차이는 존중되어야 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격을, 그것이 어린아이의 인격일지라도, 업신여기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히 여기시고 그들의 천사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기 때문이다.
[11절] 인자(人子)는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전통본문).29)
남을 범죄케 하는 것은 그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구주께서 오신 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의 제자된 우리는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힘쓰고 한 영혼을 실족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 주께서는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이가 심각한 종교적, 도덕적 결함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업신여기거나 정죄하지 말고 오히려 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전도하고 권면하여 그를 구원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12-13절]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 15:3-7의 ‘잃은 양의 비유’와 비슷하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려는 것이 목자의 심정이요 그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은 매우 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어린 한 영혼이라도 우리의 실수로 인해 범죄하게 하고 잃어버려지게 할 수 있겠는가?
[14절]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믿는 자녀들, 어린아이나 청소년 하나라도 잃어버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겸손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겸손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
둘째로, 교회에서 큰 자는 겸손히 형제를 섬기는 자이다. 겸손의 덕은 구원받을 때뿐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도 늘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교훈했다(롬 12:10). 겸손은 성도의 성화(聖化)의 정도를 알 수 있는 덕이다.
셋째로,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해야 한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거나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어린아이 하나라도 잃어버려지지 않는 것이다.
15-20절,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15절] 네 형제가 [네게]30)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책망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교회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교제이다. 그런데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죄를 범할 때가 있다. 그 죄가 말로 우리를 잘못 비난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의 돈을 떼어먹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할 때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 사람의 성화는 다 불완전하여 말의 실수가 있을 수도 있고 또 사람이 지혜롭게 살지 않으면 궁핍해져 남에게 물질적 손실을 입힐 수도 있다.
예수님을 믿는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주께서는 그 대처 방안을 말씀해 주신다.
첫 번째는 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충고하고 책망하는 것이다. 개인적 충고와 책망이 첫 번째 단계이다. 우리는 그런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먼저 알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또 ‘저런 자와는 만날 것도 없어!’ 하고 그를 끊거나 정죄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그를 찾아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그에게 충고하고 책망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시간이 들고 수고가 든다. 또 잘못하면 마음 상하는 말을 한 마디 더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그에게 충고하고 책망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그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아끼는 성도의 바른 태도이다. 만일 그가 들으면 우리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성도의 교제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연합과 하나 됨을 보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16절]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두 번째 단계는, 만일 그 형제가 개인적 책망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확증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증참한다’고 번역한 말은 ‘확실케 한다,’ ‘확증케 한다’는 뜻이다. 신명기 19:15는,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17절]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세 번째 단계는, 만일 그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는 것이다. 교회에 말한다는 것은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에게 말하거나 또 기회가 있다면 회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만일 그 범죄한 자가 교회의 판단 즉 당회의 판단이나 회중의 판단도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와의 교제를 끊어야 한다. 그는 교인으로 여겨 사랑의 교제를 나눌 대상이 아니다. 그는 교회 밖에 있는 외인(外人)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성도의 교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은 교회적 권징의 효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매는 것은 권징의 시행 즉 교회적 벌을 주는 것이요 푸는 것은 해벌(解罰) 즉 교회적 벌을 거두는 것을 가리킨다. 교회적 벌은 권계(권면과 책망), 성찬식 참여 금지, 제명 출교 등이 있다. 권징은 비록 지상교회에서 시행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것이며 효력을 가진다. 교회에서 시행된 정당한 권징은 하나님 앞에서 효력이 있다. 물론, 한 교회에서 시행된 정당한 권징은 다른 교회에서도 효력이 있다.
[19-20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문맥적으로 교회적 권징에 관련하여 주신 말씀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두세 사람이라도 바른 판단과 합심된 소원은 효력이 있다는 말씀이다. 지교회의 당회(목사와 장로들의 회)가 결정한 권징이나 회중이 결정한 권징, 또 노회나 총회가 결정한 권징은 만일 그것이 성경적으로, 양심적으로, 이성적으로 정당성을 가진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효력 있는 권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합심기도의 일반적 교훈이기도 하다고 본다. 성도들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을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것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개인의 기도도 힘이 있지만,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는 더욱 힘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잘 들어주실 것이다. 주께서는 특히 두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들 중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 주께서는 더욱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할 때 우리는 먼저 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책망하고, 만일 그 형제가 개인적 책망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확증케 하고,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만일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교회에서 시행한 정당한 권징이 하나님 앞에서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셋째로, 우리가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을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잘 들어주실 것이다. 합심 기도는 효력이 있다.
21-35절, 용서에 관해 가르치심
[21-22절]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형제가 우리에게 무슨 잘못을 범한 후 그것을 사과하면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한다. 물론, 용서는 상대방의 사과와 회개를 전제한다. 만일 형제가 내게 잘못을 범하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하지 않는다면, 용서라는 말도 무의미할 것이다. 주께서는 앞절들에서 형제가 사과하지 않을 경우 권징의 절차를 따라 행하고 만일 그가 교회적 권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와 교제를 끊으라고 교훈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사과하는 형제에 대해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실상 일곱 번이나 반복해 잘못을 범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에게 용서해주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단지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고 사과만 하면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이다. 상대가 진심으로 사과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를 언제든지 용서해야 한다.
[23절]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주께서는 용서를 가르치시기 위해 천국을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비유하셨다. 이 비유에서 천국은 신약교회를, 임금은 하나님을, 또 종들은 교인들을 가리킨다. 신약교회는 천국의 현재적 측면이다. 임금이 종들과 회계 즉 재무 결산을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된 신약교회 교인들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신다.
[24-27절] 회계할 때에 1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었다(한 달란트는 약 30킬로그램이었고, 한 데나리온은 약 5그램이었다)(NBD).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는데(마 20:2), 그것을 오늘날 품삯으로 10만원만 치더라도, 한 달란트는 약 6억원이며, 1만 달란트는 약 6조원이 된다.
그 종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르나 그 빚은 한 개인이 갚기에 불가능한 액수이다.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명했다. 그 종은 엎드리어 절하며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말했지만, 빚을 갚을 가능성은 없었다.
주님의 비유는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모두의 과거의 영적 처지를 암시한다. 성도들이 구원받기 전의 죄의 빚은 스스로 갚기 불가능한 양이었다. 그 죄 때문에 우리는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였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죗값은 지옥 형벌이었다.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주신 구원이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얻거나 행위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은혜의 구원이다.
[28-30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종은 나가서 그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1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00일 품삯에 해당한다. 그것은 물론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1만 달란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동료를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말했다. 그 동료가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말하며 엎드려 간청하였으나, 그 종은 그 동료의 청을 허락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그를 옥에 가두었다. 그는 자기가 주인에게 1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것을 기억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 큰 은혜를 기억하였다면, 그는 100데나리온 정도의 빚은 기꺼이 탕감해주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특히 우리가 서로를 용서해야 할 근거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1만 달란트의 빚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를 비유하며, 100데나리온의 빚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범한 잘못을 비유한다. 하나님께서 1만 달란트의 빚과 같은 우리의 죄, 곧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했던 죄를 용서해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의 잘못을, 그것이 어떤 큰 잘못이라 할지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31-34절] 그 동관들[동료 종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동료 종]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그 종의 동료들은 그가 용서치 않음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였고, 주인은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붙였다. 주인은 그 종에게 그가 베푼 것과 같은 긍휼을 그도 그의 동료에게 베풀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 종은 그 주인에게 긍휼을 입은 것과 같이 그 자신도 그의 동료에게 긍휼을 베풀었어야 했다. 주인의 말은 정당한 말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은 우리는 마땅히 서로 긍휼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35절]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주께서는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것은 참 두려운 경고의 말씀이다. 용서는 우리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사항이다. 주께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칠 때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 6:12)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치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었다(마 6:14-15). 사도 바울도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32).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형제의 잘못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단지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고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이다. 상대가 진심으로 사과하면, 우리는 그를 언제든지 용서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1만 달란트 빚진 것 같은 우리, 즉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했던 우리를 용서하셨다. 우리가 지은 죄의 빚은 우리 스스로 갚기 불가능했다. 우리는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고 천국에 들어가기에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용서하셨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치 않으실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범하는 형제의 잘못은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100데나리온의 빚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가 탕감받은 빚에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주어야만 한다.
19장: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어려움
1-15절, 이혼에 대하여,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심
[1-2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셨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실 일이 가까웠고 그의 갈릴리 사역은 끝나가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유대 지방, 특히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이다. 큰 무리가 그를 좇았고 그는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셨다.
[3-6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며 이혼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 질문하였다. 예수께서는 창세기 2장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셔서 결혼시키셨다. 결혼은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제도이었다. 주께서는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하셨다. 사람이 부모를 떠난다는 말은 결혼이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것을 뜻함을 보인다. 주께서는 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심으로 남녀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부부라는 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심지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들이 나누어서는 안 된다.
[7-8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있는 이혼의 규정을 들어 다시 물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신명기 24:1은,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라고 규정하였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 법에서 ‘수치되는 일’(some uncleanness, 에르왓 다바르)이라는 말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솸마이파는 그 말을 부부관계의 불성실, 즉 외도(外道)와 음행의 뜻으로 바르게 해석했으나, 힐렐파는 그 말이 남편의 마음에 상하거나 맞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해석했다. 힐렐파에 의하면, 아주 하찮은 구실로도 이혼이 가능했다.
예수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이혼 규정을 주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이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본래의 결혼 제도의 뜻과 다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관계이다. 결혼 서약은 영속적 성격을 가진다. 사람이 그 서약을 파한다고 파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부당한 이혼들 때문에 세상은 혼란하고 고통스럽다.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또 그 버리운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함이니라](전통본문).31)
주께서는 배우자가 결혼 서약을 저버리고 음행한 경우 이혼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셨다.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음행한 것은 부부관계에서 참을 수 없는 일이며 그 분노는 정당하고 그 경우 이혼이 허락된다. 그러나 부당한 이혼은 간음죄로 간주된다.
전통사본에 보면, 예수께서는, “또 그 버리운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부당한 재혼도 간음죄로 간주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부당한 이혼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될 수 없으므로 부당하게 버린 자나 버리운 자와의 재혼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당한 이혼 후에는 재혼이 가능하다고 본다.
[10-12절]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독신(獨身)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는 말은 “그것이 주어진 자들 외에는”이라는 뜻이다. 그들 중에는 날 때부터 고자(鼓子)된 자들이 있다. 이들은 선천적으로 결혼이 불가능하거나 심리적으로 결혼을 원치 않는 자들이다. 또 궁중의 내시들과 같이 사람들이 만든 고자들도 있고, 또 사도 바울같이(고전 7:7) 천국을 위해 스스로 독신이 된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받을 만한 자들만 받을 수 있다. 독신주의는 강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보통 결심을 넘어선다. 또한, 독신생활이 결혼생활보다 더 나은 생활방식이라는 생각도 잘못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이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결혼도, 독신도 복되나 은혜 주지 않으시면 그 어느 쪽도 복되지 않을 것이다.
[13-14절]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누가복음에 보면, 사람들은 ‘자기 어린 아기’를 데려왔다(눅 18:15). 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기 아이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예수께 자기 아이들을 데려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오늘날도 믿는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을 예배에 참석시킬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 받게 해야 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것을 귀찮게 여겨 그들을 꾸짖었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분히 여기셨다고 증거하였다(막 10:14). 어린아이들을 무시하는 어른들의 행동은 주님의 분노를 일으키고 책망을 받을 만했다. 주께서는 또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모든 어린아이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나, 믿는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분명하다.
신자들의 아이들은, 아직 신앙고백을 못하기 때문에 예수께 나올 수 없고 천국과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용납되고 환영을 받는다. 그들은 참으로 천국백성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구약시대로부터 믿는 가정의 아들들에게 할례를 베풀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했던 언약의 원리가 신약시대에도 보인다. 믿는 가정의 아기들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이나 외인들이 아니고, 언약 안에 있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간주된다. 그들은 커서 하나님을 배반하기 전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15절]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증거되어 있다(막 10:16). 그는 이처럼 실제로 어린아이들을 영접하셨고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된 우리 부모들이 어떻게 자녀들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 알 수 있고, 우리 믿는 어른들이 어떻게 교회에 나온 어린 생명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천국에서나 교회에서 어른이나 어린아이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린아이 하나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의 큰 실수요 부족이다.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를 귀히 영접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결혼 제도를 귀히 여겨야 한다. 결혼은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것이며 부부 관계는 부모-자식 관계보다 더 가까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된다. 결혼 서약은 사람이 파한다고 파해지는 것이 아닌 영속적 성격을 가진다.
둘째로, 우리는 이혼과 재혼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배우자가 결혼 서약을 저버리고 음행한 경우는 이혼이 정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부당한 이혼은 하나님 앞에 간음죄에 해당한다. 부당한 이혼들 때문에 세상은 혼란하고 고통스럽다. 또 부당한 이혼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될 수 없으므로 부당하게 버린 자나 버리운 자와의 재혼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정당한 이혼 후에는 재혼이 가능하다고 본다.
셋째로, 독신(獨身) 생활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사람의 보통 결심을 넘어선다. 그러나 그것이 결혼생활보다 반드시 더 나은 것은 아니다.
넷째로, 우리는 신자들의 아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믿는 가정의 아기들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아니고, 언약 안에 있고 천국 백성으로 간주된다. 그들은 커서 하나님을 떠나기 전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된다. 구약시대로부터 믿는 가정의 아들들에게 할례를 베풀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했던 언약 원리가 신약시대에도 적용된다.
16-30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움
[16-17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한]32)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느니라](전통본문).33)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 누가복음은 그를 ‘한 관원’이라고 말했다(눅 18:18). 마가복음에 보면, 그는 달려와 꿇어앉아 말했다(막 10:17). 아마 많은 사람이 있는 길에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진지함과 열심을 보인다. 영생은 사람에게 가장 관심 있는 문제이다. 전도서 3:11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한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느니라.” 이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과 같다. 주께서 이렇게 대답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선하지 않고 하나님만 선하시기 때문이며, 또 그 사람이 예수님을 단순히 한 선한 선생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상 예수께서는 선한 선생님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다.
주께서는 그 사람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구약의 율법의 내용을 반복하신 것뿐이다. 레위기 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그러나 사실상 계명들을 지켜 영생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계명들은 우리의 죄악됨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롬 3:19-20). 그러나 사람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된 후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얻는다(갈 3:24).
[18-22절]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는 십계명 중에 인간 관계에 대한 계명들을 주로 말씀하셨다. 사람의 죄성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 할 때, 또 지키려 할수록, 드러난다. 율법은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의(義)가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
그 청년은 말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릴 때부터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전통본문)라고 말했다.34) 이 청년은 상당히 착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막 10:21).
그러나 주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의 요청은 그 청년의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그의 문제점은 물질에 대한 애착이었다. 그는 물질적으로 부유한 자이었다. 그의 문제점은, 그가 그의 물질적 부요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 또 그가 물질적 부요가 있을 때는 비교적 정직하고 선하게 살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가난할 때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 3:5).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 그는 겉으로는 착하고 진지하고 유망해 보였지만, 속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그는 물질에 대한 애착 때문에 주의 말씀을 참으로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물질적 애착의 극복 없이는 사람에게 온전함이 없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순종하지 못하였다. 그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해답을 들었지만, 영생을 얻지 못하고 돌아섰다. 물질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는 영생의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돌아섰다.
[23-24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동의어(同義語)이며 그것들은 ‘영생’(16절)과 ‘구원’(25절)과도 동의어이다. 주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으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 것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보인다. 돈이 그에게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니고 매우 위험한 일이다.
[25-26절]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제자들은 주의 말씀을 듣고 심히 놀라며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말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며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옛날에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욥도 부자이었지만(창 13:2; 26:12-14; 욥 1:3)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경건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스스로 돈에 대한 애착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소유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식하고 그의 영광을 위해 선한 일에 쓸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돈은 영적 성장과 성화에 걸림돌이 된다.
[27-29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35)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백 배]36)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었다(마 4:20, 22). 오늘날도 전도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야 한다. 주께서는 그렇게 주님을 따른 제자들에게 좋은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세상이 새롭게 될 때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권세를 그들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그들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렸다면, 백 배를 받고 확실히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백 배를 받는다는 말씀은 현세와 내세에서 받을 것들을 다 포함할 것이다.
‘영생을 상속한다’는 말씀은 이런 헌신의 대가로 영생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이런 헌신이 영생을 얻는 확실한 표가 된다는 뜻일 뿐이다. 주님께 자신을 드린 자는 확실히 영생에 이를 것이다.
[30절]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주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먼저 된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이방인들의 다수가 먼저 될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동일한 원리가 신약교회 안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신자에게는 믿은 연도가 중요하지 않고 지금 어떻게 믿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비록 늦게 시작했을지라도 믿음에 앞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일하고 높은 마음을 버려야 한다.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살며 계명들을 지키며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율법에 나타나 있는, 어느 시대나 변함 없는 하나님의 뜻이다(레 18:5; 신 5:32-33; 10:12-13).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온전히 순종하려 하면 할수록, 자신이 그 계명들을 순종치 못한 부족한 죄인임을 깨닫고 절망하게 된다. 율법은 우리를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로마서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셋째로, 우리가 영생에 이르려면 우리는 물질에 대한 애착과 욕심을 끊어버려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을 부정해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고 모든 소유를 버려야 주의 제자가 될 수 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재물의 욕심은 영생의 길을 방해하는 가시떨기와 같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우리는 돈에 대한 애착과 욕심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 그것이 영생에 이르는 성도의 바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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