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사복음서·사도행전강해·김효성목사

마태복음 20장-28장 / 김효성 목사

영국신사77 2020. 4. 18. 16:38

20장: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1-16절, 포도원 품꾼 비유

[1절]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본문에서 주께서 포도원으로 비유하신 천국은 신약교회를 가리킨다. 신약교회는 다니엘 2:44에 예언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음으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들어왔다.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다.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포도원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나간 것은 포도원에 일할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서이었다. 추수 때에는 일꾼이 부족하여 포도원 주인이 사람들이 많은 길거리나 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구한다. 이른 아침은 시대적으로는 신약시대의 초기를 가리킬 것이나, 개인적으로는 사람들의 젊은 시절을 가리킬 것이다.

[2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포도원 주인은 하루 한 데나리온씩 일꾼들과 약속하며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포도원의 일은 포도열매를 따는 것이다. 성도들의 일은 교회에 들어와 우선 자신의 영적 성장을 힘쓰는 것이다. 그들은 예배에 잘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성경말씀을 들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헌금과 선한 봉사의 일을 힘쓴다. 또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한다.

한 데나리온은 구원과 영생과 영광의 천국을 가리킨다. 품삯이라는 표현은 마치 구원이 행위의 대가(代價)처럼 들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엡 2:8-9). 주인은 일방적으로 일꾼들을 불렀고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정하였다. 주인이 불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 포도원에서 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데나리온은 온종일의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었다. 단 한 시간만 일하고서도 한 데나리온을 받은 자들이 있었다.

[3-7절] 또 제3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6시와 제9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하고 제11시에도 나가 보니 [게으르게](전통본문)37)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네가 상당하게 받으리라](전통본문)38) 하니라.

주인은 또 제3시 즉 오전 9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말했다. 주인은 제6시 즉 정오와, 제9시 즉 오후 3시에 또 나가 그같이 했고 제11시 즉 오후 5시에도 나가 보니 게으르게 섰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그들은 종일토록 놀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일꾼으로 쓰는 이가 없다고 말했다. 주인은 그들도 포도원에 들어가게 했다.

오후 3시나 5시에 포도원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하루종일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한 자들이었다. 오후 3시나 5시는 시대적으로는 신약교회시대의 마지막에 해당할 것이며,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노년기에 해당할 것이다. 주께서는 포도원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을 게으르게 노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 그가 우리를 부르시는 시점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포도원인 그의 교회에 들어와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일은 바로 우리 개개인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과 선한 봉사생활을 가리킨다.

아직도 날이 저물지 않았다. 아직도 포도원에 일할 일거리가 남아 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일평생 허송세월하다가 생을 마치겠는가고 물으신다. 그는 우리에게 이제라도 자신의 성화(聖化)와 영적 유익을 위해, 또 다른 이들의 구원과 영적 유익을 위해,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다가 생을 마치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재림이 가까운 이 시대에도 말씀하시고 청년들뿐 아니라, 노인들에게도 말씀하신다.

[8-9절]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11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오후 6시쯤이 되면 날이 저물고 하루 일과가 마친다.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일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품삯을 주라”고 말했다. 제11시 즉 오후 5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들은 1시간만 일했지만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그 주인은 참 후한 사람이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한 데나리온은 구원과 영광의 천국과 영생을 가리켰다고 본다.

이 말씀은 구원과 천국과 영생이 사람의 수고의 대가(代價)로 얻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행위주의, 공로주의 관념은 성경의 구원 진리에 반대된다. 사람은 자기의 행위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에 미달한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만 또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롬 3:21-24).

[10-12절]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먼저 온 자들이 품삯을 받을 차례가 되었을 때, 그들은 더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들은 받은 후 그 집주인을 원망하며 말하였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앞장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은 처음부터 사도로 부름 받은 열두 제자들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들의 수고는 나중에 부름 받은 자들에 비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이 받는 품삯은 약속된 한 데나리온뿐이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동일한 한 데나리온이 모든 일꾼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공로주의적 사고방식에 역행한다. 주께서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에게 구원과 영광의 천국과 영생이라는 동일한 선물을 주실 것이다. 먼저 믿는 자에게나 나중 믿는 자에게나 동일한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름 받은 시대나 나이를 관계치 말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께 충성하면 된다.

[13-15절]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의 처사는 잘못한 것이 없었고 공의로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인은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포도원에 늦게 온 자들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주인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주인의 재산을 주인의 뜻대로 하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아니며, 또 포도원에 늦게 들어온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 것은 선한 일이지 악한 일은 아니었다.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는 많은 사람이 부름을 입으나 적은 사람이 택함을 입음이니라](전통본문).39)

나중에 일꾼된 자들은 이방인들, 먼저 일꾼된 자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며, 또 나중에 일꾼된 자들은 신입교인들을, 먼저 일꾼된 자들은 오래된 교인들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에는 연수나 햇수보다 진지함과 성실함이 더 중요하다. 신약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과 천국과 영생의 초청을 받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며 그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얻는 자들은 많지 않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신약교회는 포도원과 같다. 우리는 흑암의 권세 아래 있던 데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되었다. 이 나라는 포도원처럼 일하는 곳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포도원의 일은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성경말씀을 잘 읽고 배우며 하나님의 선한 일에 참여하는 것, 즉 개인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과 봉사생활을 가리킨다. 아직도 날이 저물지 않았고 포도원에 일할 일거리가 남아 있다. 우리는 일평생 허송세월하다가 생을 마치지 말고 이제라도 자신의 성화(聖化)와 영적 유익을 위해, 또 다른 이들의 구원과 성화와 영적 유익을 위해,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다가 생을 마쳐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만 감사하며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한다. 이방인이었고 아무런 의(義)가 없었던 우리를 예수께서 은혜로 구원하셨고 영광의 천국과 영생을 약속하셨다. 많은 사람이 천국과 영생의 초청을 받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며 천국과 영생은 얻는 자들은 많지 않다. 신앙생활에는 연수나 햇수보다 진지함과 성실함이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구원받았든지 간에 오직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한다.

17-34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 소경들을 고쳐주심

[17-19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3일에 살아나리라.

주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세 번째로 말씀하셨다.

[20-21절]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여기에 모든 사람 속에 있는, 특히 어머니들 속에 있는 욕심, 자기 자녀가 남보다 더 나은 자, 더 높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욕심이 보인다. 그것은 세상적 욕심이요 헛된 명예심이며 허영심이다. 사람이 이런 세상적 욕심을 제거하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그러나 성도는 이런 욕심을 품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단속해야 한다.

[22-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하나님 나라의 명예는 세상적 욕심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은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었다. 그와 같이, 주의 나라에서의 명예는 이 땅의 방식과 다른 방식, 곧 주와 함께 고난을 받는 방식에 의해 얻어질 수 있을 뿐이다.

주의 마시려는 잔을 자기들도 마시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의 중심은 그 점에서 순진했던 것 같다. 십자가의 고난을 잘 모르는 채 그들은 그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용감하게 대답하였다. 주께서는 그들이 주의 고난에 참여할 것을 암시하셨다. 그러나 주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지금 그것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작정이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의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감추어진 것을 알려고 할 것이 없다. 그런 관심 자체가 올바르거나 선하지 못하다.

열 제자는 그 말을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해 분히 여겼다. 그것은 그들 속에도 같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보다 높아지려는 욕심이 없는 곳에는 그런 유의 분노가 있지 않을 것이다.

[25-27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통치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고위 관리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세상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일이요 방식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태도는 타락한 사람의 본성적 행위이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전혀 다른 원리와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교회에는 남을 지배하는 자들이 없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런 유의 권위를 부정하신다. 모든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한 목표인 주의 영광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교회 안에 큰 자가 있다면 남을 섬기는 자가 그러하다. 이 얼마나 세상과 다른 원리요 방식인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회에서 큰 자가 되려고 하거나 으뜸이 되려고 하면, 다른 성도들을 겸손히 섬겨야 한다. 교회에서 훌륭한 자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고,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이다.

사실, 이렇게 하면 거기에는 갈등이나 분쟁이나 분노가 결코 없을 것이다. 인간 사회의 갈등과 분쟁과 싸움은 불의와 거짓과 교만에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의 법을 힘써 지키며 자신을 낮추고 서로 섬기려 한다면, 그런 곳에는 아무 싸움이나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이 곧 천국의 모형이다.

[28절]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주께서는 자신의 모범으로써 그의 교훈의 무게를 더하신다. 그는 섬김을 받으려고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도리어 많은 사람들을 섬기시며 자기 목숨을 그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 주님의 사역의 핵심은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의 의미이다. 그의 사역은 부수적으로 그의 낮아지심과 섬김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믿고 따른다면, 우리도 남을 섬기며 남을 위해 우리의 목숨도 바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29-30절]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다윗의 자손’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 두 사람은 불쌍한 소경이었지만 놀랍게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아라는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 들리는 소문을 통해 또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지식과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31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무리들은 그 불쌍한 소경들을 동정하기는커녕 그들을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말했다. 예수님을 좇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던 그들은 그의 동정심을 갖고 있지 못했다. 소경들이 고침을 받는 데는 예수님 측근에 둘러서 있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는 자들이 되지 못하여 오히려 방해거리이었다. 그러나 그 소경들은 더욱 소리질러 말했다. 주께 나아가는 자는 사람의 방해 때문에 낙심치 말아야 한다.

[32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소경들의 낙심치 않는 부르짖음은 마침내 주님의 관심을 끌었다. 예수께서는 머물러 서셨고 그들을 부르셨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무엇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기도하면, 그리고 낙심치 않고 계속 또 더욱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가 그의 시선을 우리에게 돌리시고 우리의 기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

[33-34절]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긍휼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소경들의 소원은 분명하였다. 그들은 눈을 뜨기를 원하였다. 구체적 기도 제목은 확실한 기도 응답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그러자 그들은 곧 보게 되었다. 주의 능력의 치료와 구원은 신속하고 완전하였다. 여기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적 영광이 나타났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으셨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속 사역을 이루셨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그는 확실히 신적 구주이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자신을 크게 여기지 말고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며 그의 교훈을 실천하는 것이다. 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넷째로,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소원을 긍휼과 능력의 주님께 구체적으로 아룀으로써 해결을 받을 수 있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우리의 소원의 목표와 방법이 바르다면, 우리의 간구는 응답받을 것이다.


21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17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3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주께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그것은 어미를 떨어질 수 없는 어린 새끼이었다. 그는 그의 전지하신 눈으로 그 나귀 새끼를 보셨다. 또 “나귀를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례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온 우주의 큰 주인이시며, 원하시는 대로 무엇을 취하거나 사용하실 수 있는 자이시다.

[4-5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태는 주님의 말씀이 스가랴 9:9의 메시아 예언의 성취임을 증거한다. 말은 전쟁의 동물이요 나귀는 평화의 동물이라고 한다. 이방의 왕들은 말을 탔고 나귀를 타지 않았다. 나귀는 경멸을 당하는 짐승이었다. 주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을 나타내신다. 그것도 어미에게 의존하는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더욱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 나라처럼 외적 영광을 따르지 않는다. 여기에 지극히 비천한 자들에게까지 미치는 은혜의 복음이 있다. 어떤 비천한 자도 예수께 나아올 수 있고 그는 그를 물리치지 않으실 것이다.

[6-7절]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옷을 그 위에 얹은 것은 안장을 대신해서였다. 주께서는 어린 나귀 새끼, 아직 안장도 없는 짐승을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주께서는 자기의 소유 혹은 공동 소유의 나귀 한 필도 없으셨다. 그는 가난한 삶을 사셨다. 지극히 부유하신 하나님의 아들,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소유자이셨던 그는 지극히 가난한 자가 되셨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된 우리의 삶이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할지 분명하다.

[8-11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무리가 겉옷을 길에 펼친 것은 그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다. 무리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여기며 환영하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로 소개하고 있었다. 비록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거절했고 죽일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리들을 감동하여 그를 증거하며 그를 찬양케 하셨다. 감격스런 일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그들 중 다수는 변절하여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칠 것이다. 이것이 변태무쌍한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사 2:22). 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한다고 너무 감격할 것도 없고 우리를 멸시한다고 너무 낙심할 것도 없다.

[12절] 예수께서 [하나님의]40)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성전이 불의의 이익을 얻는 매매의 장소로 악용되었다. 이것은 종교의 타락이었다. 거룩하고 경건한 종교의 이름 아래 자기의 이익을 노리는 이 불의한 종교지도자들은 성전 안에서 돈 바꾸고 비둘기 파는 자들과 결탁되어 있었음이 분명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고 일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땅에 속한 것, 썩어지고 불타 없어질 것을 구하는 가련한 종교인들! 예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향해서는 동정하셨으나,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 대해서는 격노하셨다. 주께서는 온유하며 겸손하시지만, 종교의 타락에 대해서는 분노하셨던 것이다.

[13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주님의 종교 개혁은 종교가 성경의 본래 가르침대로 되어야 한다는 정신에 근거하였다. 성경은, 성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라고 가르쳤다(사 56:7).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종교가 예배자들의 주머니의 돈을 교묘히 긁어모으는 행위로 변질되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종교 개혁은 항상 성경에 근거해야만 된다. 요시야의 개혁, 히스기야의 개혁이 그러하였고, 루터와 칼빈의 종교 개혁도 그러하였다. 오늘날의 종교개혁도 오직 성경의 교훈으로 돌아감으로써만 시작될 수 있고 성취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14절]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 행위들에 대해서는 격노하고 동정심을 보이지 않으시던 주님이지만, 성전에서 그에게 나아온 소경과 절뚝발이들에게는 긍휼과 능력을 베푸셨다. 그들은 예수께 나아와 고침을 받았다. 주께서는 뻔뻔스런 악인들에게는 노하셨지만, 도움을 구하는 죄인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셨던 것이다.

[15-17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주께서는 자신의 신적 영광을 많이 드러내셨지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오히려 그것들에 대해 분노했다. 이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또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아이들에 대해서도 분노했다. 사실, 메시아를 영접해야 할 저 지도자들이 주님을 거부하고 그를 죽이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기들을 사용하여 주를 찬송케 하셨던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려 하실 때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에 보내셔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어오게 하시며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무례한 것이 아니고 그가 온 세상의 참 주인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원하시는 것을 사용하실 수 있는 우주의 주인이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겸손히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는 자기 소유나 제자들의 공동 소유의 말이나 나귀가 없으셨다. 그는 나귀 새끼를 빌려 타고 가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을 노하셨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의 제사들과 제물들을 돈벌이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사용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종교의 부패는 가장 가증한 일이다.

넷째로,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갈릴리에서도, 유대 땅에서도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고쳐주셨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18-46절, 권위의 근원

[18절]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이른 아침이긴 하지만, 예수님 일행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자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가난한 환경은 그의 사역에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역은 가난 때문에 좌절되지 않는다.

[19절]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배가 고프셨던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셨다. 여기에 예수님의 인성(人性)의 증거가 있다. 사람이신 그는 배고픔을 느끼셨고 지식의 제한성을 가지셨다. 그의 인성은 우리의 것과 같은 참된 인성, 즉 육신적 연약성과 지식의 제한성을 가진 인성이셨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는 죄가 없으셨다(히 4:15).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는 부당한 그의 감정적 행위이셨는가? 무화과는 보통 열매가 먼저 생긴 후 잎사귀가 커진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열매가 이미 열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나무의 경우는 비정상적이었다. 열매가 열리지 않은 채 잎사귀만 무성했다. 이것은 선한 행위의 열매가 없이 종교적 형식들만 가득한 당시의 타락한 종교를 잘 나타내 주는 것 같았다.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는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20-22절]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주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믿음으로 하는 기도의 힘을 가르치셨다. 죽기 위해 올라가셨던 예루살렘에서, 또 이제 며칠 후면 십자가의 형틀을 지실 그가 제자들에게 기도하도록 교훈하며 격려하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교훈을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처럼 기적을 추구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역사에서 기적들을 주심으로 섭리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주의 교회의 복음 사역이 얼마나 놀라웁게 전진해 왔는지! 복음 사역에 크고 작은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지만, 기도하는 종들을 통해, 그들의 믿음의 기도를 통해 그 장애물들은 극복되었다. 때로는 순교의 피를 흘려야 하였지만, 복음 전파의 대행진은 꺾이지 않고 힘차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한 기적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지만, 기도를 통한 회개와 믿음, 구원과 성화는 언제나 기대한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강건케 하시고 자기 교회를 견고하게 하시기를 기대한다.

[23-27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위의 근원에 대해 질문하였다. 이것은 믿어보려는 동기에서 했다기보다 비난하려는 동기에서 했다고 보인다. 예수께서는 지혜롭게 되받아 질문하심으로 그들의 위선의 악을 드러내셨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은 요한도 인정치 않았고 그가 증거한 예수님도 인정치 않고 있었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도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권위의 근원은 세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이었다. 그러나 저 악하고 위선적인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28-30절]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예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한 아들은 가겠다고 했으나 안 갔고, 다른 아들은 안 가겠다고 했으나 갔다. 전통본문에는, 맏아들이 처음에 싫다고 대답했으나 후에 뉘우치고 갔고, 둘째 아들이 처음에 가겠다고 대답했으나 가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41)

[31-32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전통본문은 여기서도 첫째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 곧 신약교회를 상징하였고, 맏아들은 세리들과 창기들을, 둘째 아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상징하였다.

세리들과 창녀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으나 세례 요한이 옳은 길을 외칠 때 회개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자부하였지만, 요한이 전하는 말씀을 따라 회개하지 않았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른 자인가? 신앙생활은 처음보다 끝이 그리고 입술의 고백보다 실제적 행위가 더 중요하다.

[33-39절]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좇아 죽였느니라.

예수께서는 또 포도원 비유를 하셨다. 포도원은 구약교회를 가리켰고(사 5:2),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포도원을 관리한 농부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열매는 구원의 열매, 즉 의와 거룩의 삶을 가리킨다. 종들은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의롭고 거룩한 나라가 되기를 소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선지자들을 영접하지도,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하나님께서 많은 종들을 더 보내셨지만, 그 지도자들은 그들에게도 그러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데 그 지도자들은 그를 예루살렘 밖에서 죽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신 것이다.

[40-43절]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貰)로 줄지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주인은 그 악한 농부들, 곧 위선적 지도자들을 멸하고 포도원을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과 같으시다. 유대 지도자들은 그를 버렸으나 그는 교회의 머릿돌이 되셨다. 이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 곧 기이한 일이다. 이 비유의 요점은, 의롭고 선한 행실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의롭고 선한 행실이 있는 신약교회가 그것을 대신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의롭고 선한 행실과 삶이며, 참된 구원은 그런 행위와 삶으로 나타난다.

[44-46절]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메시아께서는 돌에 비교되셨다(단 2:34-35). 이 돌은 구원과 심판의 돌이다. 악하고 완고한 자도 이 돌 위에 떨어지면 심령이 부서질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 비유가 가기들을 가리킨 것인 줄 알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돌이시다. 그 돌은 완고한 심령을 부숴 구원하기도 하지만,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를 멸망시키기도 한다.

셋째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택자들의 구원, 회개와 믿음, 우리 자신의 성화, 참된 교회의 건립과 성장이 있기를 기대해야 한다.

넷째로, 신앙생활은 처음보다 끝이, 또 입술의 고백보다 실제적 행위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끝이 좋고 열매가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의롭고 선한 행실과 삶이며, 참된 구원은 그런 행위와 삶으로 나타난다. 의롭고 선한 열매가 없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22장: 유대의 지도자들과 변론하심

1-14절,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비유

[1-3절]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앞장의 포도원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었으나,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앞의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구원에 합당한 행위이지만, 여기에서 그가 주시는 바는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이다. 혼인잔치는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은 왕으로, 예수님은 왕자로, 천국은 왕자의 혼인잔치로 묘사되었다. 왕은 종들을 보내어 그 혼인잔치에 초청된 자들을 오라고 하였다.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가리키며, 먼저 초청된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왕의 초청을 받은 그들은 그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싫어했다.

[4-5절]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왕은 한번 더 다른 종들을 보내어 초청하였다. 이것은 왕의 인내요 친절이었다. 이번에는 잔치의 풍성함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며 초청하였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그러나 저들은 세상의 일들에만 관심을 두고 왕의 초청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갔다. 이것은 단순히 무관심이 아니고 왕의 초청에 대한 멸시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일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것을 무시하고 멸시한다.

[6-7절]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초청을 받은 자들이 그 초청을 멸시하며 자기 일들을 보러 가버렸을 뿐 아니라, 그 남은 자들은 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다. 이것은 더 악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복음의 초청을 먼저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 초청을 싫어하고 경멸하였고 심지어 그것을 전한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였다. 마침내 왕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악한 자들을 죽이고 그 동네를 불사를 것이다. 이것은 주후 70년경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을 가리킬 것이다. 그 이방나라의 군대는 하나님의 징벌의 몽둥이였다.

[8-10절]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손님]이 가득한지라.

기쁘고 즐거운 메시아의 혼인잔치가 준비되었으나 처음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잔치에 합당치 않았다. 사거리 길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번에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초청을 받았다. 드러난 악인이든지 비교적 선한 자이든지 구별 없이 많은 사람이 초청을 받아 교회로 나아온다.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가득하듯이, 하나님의 교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11:25).

[11-14절] 임금이 손[손님]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아무 말이 없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한 자가 있었다. 이 예복은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왕이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의를 상징한다. 이사야 61:10이 말한 ‘의의 겉옷’이다. 신약성경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표현하였다(롬 13:14; 갈 3:27).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사람들은 누가 예복을 입었는지, 누가 입지 않고 교회에 들어와 앉아 있는지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그것이 금방 드러난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예복은 자기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단지 교만과 불신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거절하고 자기의 행위의 의를 의지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 잘못은 주님께 있지 않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러므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정죄될 것이다. 예수님의 의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으로부터 추방되어 지옥에서 슬피 울며 고통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원의 복음으로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지만, 참으로 구원받는 자들은 적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천국은 기쁘고 즐거운 잔치와 같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천국은 의와 평안과 희락의 세계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천국 초청에 무관심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구원, 천국, 내세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천국 잔치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으로 이루신 의를 믿어야 한다.

15-33절, 세금 문제와 부활 문제에 대한 질문

[15-17절]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서로 의논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하나님의 원수들은 잠시라도 쉬지 않고 활동한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종교적, 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른 자들이었으나, 예수님을 핍박하는 데는 힘을 합했다. 오늘날도 다양한 사상들과 입장들을 가진 사람들이 때때로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데는 힘을 합한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존경하듯이 그가 참되시며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신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의로우시고 진실하심은 저들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참되셨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셨다.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한다는 친(親)로마파요, 또 하나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칠 필요가 없다는 반(反)로마파, 즉 민족주의파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변론이 있었을 것이며, 이것은 당시의 중요한 사회 문제이며 예수께 질문해 그를 곤란케 할 만한 문제이었다.

[18-22절]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예수께서는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질문 뒤에는 예수님을 올무에 넘어지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예’ 아니면 ‘아니오’일 것이요 그러면 그를 친(親)로마파나 반(反)로마파로 몰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유대 백성과 이간을 붙일 빌미가 되든지, 아니면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자로 비난할 거리가 될 것이다.

주께서는 그 시험하는 질문에 지혜롭게 대답하셨다. 그는 “셋돈을 내게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자, 그는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물으셨다. 그것은 가이사의 형상과 글이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통치 아래 살고 있었고 유대 땅에서는 로마의 화폐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 즉 세금 내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는 뜻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두 영역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요 다른 하나는 세상 나라이다. 우선,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므로 그 나라의 규범들을 지켜야 한다. 헌금도 그 중에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므로 세상에서 우리의 소유 중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지만, 성경은 특히 소득의 십일조와 첫열매와 헌물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레위기 27:30,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聖物)이라.” 잠언 3: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말라기 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 . .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러나 성도는 또한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 나라의 규범도 지켜야 한다. 베드로전서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 그것은 나라가 정한 납세의 의무를 포함한다. 로마서 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라.”

[23-28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인들은 당시 합리주의자, 자유주의자이었다. 사도행전 23:8은,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고 말한다. 합리주의, 자유주의는 곧 불신앙이요 이단이다. 그들이 언급한 형수와의 결혼 규정은 신명기 25:5-6에 기록된 법이었다. 거기에 보면,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한 독특한 경우를 들어 부활의 불합리성을 증거하려 했다. 이것은 기발한 착안이었다. 그들은 부활의 관념이 이 율법과 조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부활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29-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전통본문)42) 천사들과 같으니라.

예수께서는 격한 책망의 어조로 하지는 않으셨으나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사상이 비성경적 오류임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오해하다’는 말(플라나오)은 ‘잘못되다’는 뜻이다. 오류에 대한 그의 지적은 조용할지라도 힘이 있으시고 분명하셨다.

부활의 부정은 무엇보다 성경 진리에 반대되었다. 구약성경은 몸의 부활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였다. 이사야 26:19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라고 말했고, 다니엘 12:2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말했다.

또 부활의 부정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에게는 죽은 자를 살릴 능력이 있으시다. 부활이 사람 보기에 불가능하지 하나님께는 결코 어렵지 않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하실 수 있다.

또 결혼관계는 이 세상에 국한된다. 천국에서는 결혼이 없다. 이 점에서 부활한 사람은 천사와 같다. 천사의 세계에는 결혼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 때에는 사람에게 더 이상 자녀의 출산도 필요 없고, 육체의 정욕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사상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이 아니었다.

[31-33절]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사실상, 죽은 자의 부활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라는 말씀에서 증명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고 만 존재라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은 옛날을 기억하시는 일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사람을 불멸적 존재로 만드셨다. 범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으나, 구원은 당연히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을 내포했다. 사람이 죽고 만다면, 창조와 구원은 무의미할 것이다. 부활은 창조와 구원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아브라함이라는 존재가 결코 죽고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모든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불멸적 영혼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현재 살아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가 아니다. 사람은 영육의 결합체이다. 의인 아브라함은 지금 영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지만, 장차 다시 몸과 결합하여 영광스런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요 성도의 소망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죽어도 장차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요 11:25-26).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 나라에 살면서 정당하게 세금을 내어야 한다. 우리는 국민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두개인들처럼 사람의 몸의 부활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구약성경도 부활을 증거하고(사 26:19; 단 12:2) 신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다. 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안다면 몸의 부활은 믿지 못할 일이 아니다.

셋째로, 우리의 몸의 부활 후, 천국에서는 결혼이 없을 것이다. 결혼 제도와 결혼 관계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이다. 천국의 백성들은 죄성과 죄악된 욕망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34-46절, 큰 계명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34-35절]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사는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가르치는 사람이다. 마가복음에는 ‘서기관’이라고 표현했다(막 12:28). 모세오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들은 그 수가 많다. 그 많은 법들 중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고 관심 있는 문제이었을 것이다.

[37-3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예수께서는 신명기 6:5의 말씀을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은 주께서 신명기 6:4부터 인용하셨다고 증거한다. 신명기 6:4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여호와]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여호와]시라”는 말씀이다. ‘목숨’이라는 말은 신명기 본문에 ‘영혼’(네페쉬)이라고 되어 있다. 또 신명기에는 ‘네 힘을 다하여’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의 첫째 의무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 혹은 영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경건은 인생의 삶의 기본적 의무요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다(잠 1:7; 9:10). 사람의 모든 도덕적 생활은 참된 경건에서 나온다.

[39절]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법은 레위기 19:18의 말씀이다. 이웃 사랑은 모든 인간 관계의 법들의 완성이다.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40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온 율법과 선지자들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느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의 모든 교훈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런 도덕적 율법의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도덕법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 율법은 의로운 표준이며 규범이지만, 사람은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 지키지 못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요구인가, 우리가 얼마나 죄악되며 무능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이 왜 필요한가를 알려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41-42절]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아들]이니이다.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 중에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예언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대한 지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라는 것은 믿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43-44절]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주께서는 구약성경 중 시편의 영감성을 증거하셨다. 시편은 성도들의 기도의 글들, 즉 찬양, 감사, 고백, 간구의 글들이지만, 주께서 이런 시편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증거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의 정통 유대교의 성경관이었다.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성경관을 그대로 받으셨다. 사실,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그 시험을 물리치셨다(마 4:4, 7, 10). 그의 사도들도 동일한 성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행전 1:16,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베드로).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바울).

오늘날같이 성경에 대한 믿음이 없는 불신앙과 회의주의의 시대에 우리는 예수님 자신과 그의 사도들이 가졌던 바른 성경관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믿고 행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우리 인격을 온전케 한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는 시편 110:1의 말씀은 메시아의 승천과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메시아께는 원수가 있다. 그 원수는 사탄이다. 그를 발아래 두는 것은 사탄을 최종적으로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마 25:41). 이것이 사탄에 대한 최종적 형벌이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사탄의 최종 멸망 때까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이다. 그가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는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심판하여 영원한 멸망에 던져 넣으실 때이다.

[45-46절]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예수님의 질문은 메시아의 인성(人性)만 아는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메시아의 신성(神性)도 알아야 했다. 메시아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실 뿐 아니라, 또한 다윗의 주이시다. 다윗 왕도 메시아 왕국에서는 한 신민(臣民)에 불과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빌립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셨다(요 14:9).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6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말하였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의 신적 명칭, 그의 신적 속성, 그의 신적 사역, 그의 신적 영예를 통해 그가 신적 인격이심을 밝히 증거하였다. 구약의 예언도 그렇고(사 9:6), 신약성경은 더욱 그렇다. 믿는 자들은 복되다. 메시아께서는 참 사람이실 뿐 아니라, 참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요 참된 신성(神性)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놀라운 구주 예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믿음은 정통 유대교의 성경관이며 예수님과 사도들의 성경관이다. 우리는 불신앙과 회의주의가 많은 시대에 바른 성경관을 가져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참 사람이실 뿐 아니라, 또한 참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참된 신성(神性)을 가진 구주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지혜과 지식의 시작이다. 경건은 인생의 삶의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모든 도덕적인 삶과 헌신과 봉사는 참된 경건에서 나온다.

넷째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또 그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23장: 위선자들을 책망하심

1-13절, 말뿐임, 존경받기를 좋아함, 천국의 방해자

[1-3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모세의 자리’는 선지자의 자리이다. 모세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었다(신 34:10).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고 선포하고 전달하는 자이다. 오늘날 목사도 그러하다. 비록 성경에 전적으로 의거해야 하지만,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 선포자, 전달자의 자리에 있다. 

그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위선자들이었다. 위선자의 경건은 죽은 경건이다. 디도서 1:16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를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않는 자라고 말했다. 야고보서 2:26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런 위선자의 바른 말은 들을지라도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한다.

[4절]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위선적 지도자들은 무거운 짐만 사람들의 어깨에 지운다. ‘무거운 짐’은 하나님의 법들에 근거했다고 주장되는 규칙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율법의 역할이 사람들로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하여 그들로 절망과 좌절을 느끼게 하여 구주 예수께서 나오게 하는 것이지만, 종교가 외식에 떨어질 때 규칙들과 규례들만 많아질 것이다.

위선적 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는 무거운 종교적 의무들을 부과해 놓고는 자신들은 한 손가락으로도 그것들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위선이요 죽은 경건이다. 그러나 참 종교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말했다(딤전 4:12). 또 그는 디도에게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명하였다(딛 2:6-7). 사도 베드로도 장로들에게 교훈하기를,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였다(벧전 5:3). 참된 경건은 모범된 행위로 나타난다.

[5절]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신명기 6:8에 율법의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경문을 찼다. 경문(經文)은 이마와 팔과 허리에 차는, 성경구절들이 쓰인 가는 양피지 띠를 가리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였다. 그것은 자신을 더 경건하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칭찬과 높임을 받으려는 마음에서 나왔다. 그러나 참 종교는 형식이 아니고 실질이며, 외모로 함이 아니고 진심으로 함이다(신 6:5; 잠 4:23; 딤후 3:5).

[6-7절]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들이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는 것은 교만이며 명예심이다. 겸손한 인격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를 영원한 지옥 불못에서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며 자랑해야 한다.

[8-10절]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전통사본(Byz syrc 등)에는 8절에 “너희 선생은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되어 있다. 랍비, 아비, 및 지도자라는 명칭은 다 종교적 지도자를 가리켰다고 보인다. 우리들의 선생님과 영적 아버지와 지도자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15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말했다. 영적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항상 이런 칭호로 불리는 것은 합당치 않고 또 우리가 이런 칭호를 사랑하는 것도 합당치 않다. 우리는 겸손히 다 서로 형제 자매로 인식하고 부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다 봉사자들이다. 우리는 어떤 칭호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기의 명예나 유익을 위해 일하지 말고, 주의 영광과 성도들의 유익만을 위해 일해야 한다. 물론, 서로 존경하고 피차 복종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며, 주께서 세우신 교회의 직분자들을 존경하고 복종하는 것도 그러하다. 히브리서 13:17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교훈하였다.

[11-12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세상에서는 큰 자가 섬김을 받는다. 그러나 천국과 교회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이신 우리의 주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낮추어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셨다(마 20:28).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본받는 자들로서 직분이 중해지면 중해질수록 더욱 자신을 낮추어 주님처럼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겸손과 섬김은 영적 성숙의 표가 된다.

[1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반 백성들에게가 아니고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노하셨다. 마태복음 5장의 8복(福)과 대조적으로, 그는 위선적 지도자들에게 8화(禍)를 증거하였다(전통본문의 14절을 포함하여).

외식자들의 한 특징은 천국문을 가로막는 것이다. 천국은 사람들의 가장 큰 목표와 소망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로부터 영생과 천국을 약속하셨다(딛 1: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천국의 문이시다. 그는 좁은 문이시며(마 7:13) ‘양의 문,’ ‘구원의 문’이시고(요 10:8-9) 죄인들이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시다(요 14:6). 그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허락하셨는데, 이것은 복음사역, 말씀사역을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게 주신 열쇠이다. 그러나 참된 회개와 예수님 믿음을 전파하는 것은 천국문을 여는 것이지만, 참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것은 천국문을 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식자들은 천국의 안내자가 아니고 천국의 방해자 곧 천국문을 가로막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외식하는 지도자들의 말은 행하되 그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한다. 외식자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믿는 만큼 행해야 한다.

둘째로, 외식자들은 자신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보이려 하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높임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겸손한 봉사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에게 선생이나 아버지나 지도자라는 명칭을 받지 말고 겸손히 형제로 처신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외식자들은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들어가려 하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천국의 안내자들이 아니고 오히려 방해자들이다. 그들의 위선 때문에 진실한 많은 사람들이 실망한다.

14-24절, 물질욕, 지옥 자식 만듦, 헌금 중시, 종교형식 중시

[14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로다](전통본문).43)

외식자들은 과부들의 재산을 교묘히 취했다. 그들은 실상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천국과 내세에 소망을 둔 자가 아니고 땅의 것만 구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외식으로 길게 기도함으로 경건한 겉모양을 가졌지만, 속에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가득하였다.

이런 외식자들은 장차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주께서는 권능을 많이 베푸신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의 마을이 회개치 않음으로 두로와 시돈 같은 이방 도시나 심지어 옛날 유황불 심판을 받았던 소돔성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20-24). 죄에 경중(輕重)[크고 작음]이 있듯이, 심판에도 경중(輕重)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대로, 즉 그의 행위의 죄의 경중대로 합당한 벌을 주신다. 위선의 악은 큰 악이다.

[15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외식자들은 교인수 늘이는 데 열심을 가졌다. 그러나 교인의 수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인의 사람됨이다. 참된 회개와 구원이 없다면, 구름떼같이 사람들을 모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참된 신자들의 수효의 증가가 아니라면 무의미하다. 외식자들은 알곡 운동이 아니고 쭉정이 운동을 했고 얻은 교인들을 자기들보다 배나 더 부패하고 외식하는 지옥 자식이 되게 했다.

[16-22절]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성전의 금’이란 성전에 바쳐지는 헌금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외식자들은 영적 소경이었다. 무엇이 더 가치 있고 무엇이 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바른 판단이 없었다. 그들은 성전과 제단보다 제단에 바쳐진 헌금과 예물을 더 중시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탐심을 헌금이라는 종교적 형식에 감추었다.

성전과 제단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들이다. 그것으로 맹세함은 곧 그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 맹세함이 된다. 비록 어떤 가난한 자가 헌금이 없어 헌금 없이 맹세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참된 맹세가 될 수 있다. 물론, 헌금과 예물은 경건의 한 표현이다. 고린도후서 8:7-8,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헌금하는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십일조나 감사헌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헌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며 성전과 제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중시해서는 안 되며, 더 가치 있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23-24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cummin)의 십일조를 드렸다. 그것들은 향료들이었다. 이것은 땅의 소산물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율법에 근거한 것이다(레 27:30). 그러나 십일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행하는 것이며, 인(仁)은 자비와 사랑을 가리킨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신(信)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 물론 인간 관계의 신실성도 포함된다. 선지자 미가는,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미 6:8).

저 소경된 지도자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고 있었다. 주께서는 십일조 생활을 하루살이에 비교하셨고,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약대에 비교하셨다. 우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만, 종교생활의 형식보다 실질을 중시해야 하고, 실질이 없는 종교적 형식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함을 알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경건한 모양만 가지려 하지 말고 또 물질적 탐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아야 하고 특히 물질적 탐심을 경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교인수만 중시하지 말고 교인들의 사람됨을 중시해야 하고 그들을 결코 지옥 자식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참 교회의 건립은 알곡들을 창고에 채우는 것이지 쭉정이들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고 사랑함보다 헌금을 중시해서는 안 된다. 헌금이 순종의 표이지만, 하나님을 대치할 수는 없다.

넷째로, 우리는 종교생활의 내면적 실질보다 단지 종교생활의 형식을 중시해서는 안 된다. 십일조나 성수주일 같은 종교적 형식도 중요하고 귀한 것이지만,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훨씬 더 중요하고 귀하다.

25-39절, 외적 성결, 단장을 중시, 의인의 피를 흘림, 지옥 판결

[25-26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불의](전통본문)44)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외식자들은 외적 성결을 중시했으나 그들 안에는 탐욕과 불의로 가득했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성결이다. 마음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한다. 마음에 가득한 것은 말과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람은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내면적 성결이 없는 외적 성결은 가치가 작고 위선(僞善)에 그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3-7에서 말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27-28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외식자들은 내면적 성결이 없이 외적 단장만 힘썼다. 그들은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았다. 회칠한 무덤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과 불쾌한 냄새로 가득하다. 이와 같이 외식자들은 의롭고 선한 자처럼 보여도 실상 마음에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다. 우리는 먼저 내면적 성결과 단장, 즉 진실한 의와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모든 위선과 외식을 버려야 한다. 베드로전서 2:1-2,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자라게 하려 함이라(전통본문).”

[29-3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므네메이온)[혹은 무덤]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외식자들은 선지자들을 위하는 자들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과 다를 바가 없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의 말이 오히려 그들의 정체를 드러낸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고 하신다. 외식자들은 본질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고 마귀의 자식들이다. 뱀들과 독사의 새끼들이 사람에게 큰 해를 끼치듯이, 외식자들은 사람들에게 치명적 해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

[34-3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주께서 그의 종들과 성경 교사들과 해석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실 때 그들은 그들을 죽이고 때리고 핍박할 것이다. 주의 종들은 유대인들에게 죽임과 매맞음과 핍박을 받을 것이다. 교회는 이것을 기억하고 항상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유대인들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단지 의인 아벨로부터 역사상 흘려진 의로운 자들의 피흘림의 절정이 될 뿐이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 조상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대는 그 피흘린 죗값으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37-39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여러 번 예루살렘을 감싸려 하셨으나 예루살렘 거민들은 하나님을 대항하고 회개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 성은 최종적 회복의 때까지 황폐하게 될 것이다. 주의 재림의 때에 세상은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세상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영광스러운 회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이다(계 21:1-2).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외부적 성결보다 내면적 성결을 중시해야 한다. 외식자들은 위생적 성결은 지켰지만, 심령에는 탐욕과 불의가 가득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내면적 성결이다.

둘째로, 우리는 외부적 단장보다 내면적 단장을 중시해야 한다. 외식자들은 외모로는 아름답게 단장했으나 심령에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였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셋째로, 우리는 의인의 피를 흘리는 악을 행치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은 많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우리는 죄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그 반역의 정신을 조심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지옥의 판결을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천국 백성으로 바르게 살아야 한다.

24장: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징조들

1-8절, 미혹, 전쟁, 기근, 전염병, 지진

[1-2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누가복음 21:20에 보면, 예수께서는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주후 70년, 즉 약 40년 후에 로마 장군 디도가 이끄는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 성을 불 태웠을 때 성취되었다.

[3절]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태복음 24, 25장의 내용은 감람산 위에서 가르치신 내용이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멸망의 시기와,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징조에 대해 물었다. 두 사건은 별개의 것이지만, 비슷한 점이 있었다. 예루살렘 멸망은 세상의 마지막 심판의 그림자이었다. 매튜 풀은 주께서 말씀하신 종말 징조들이 요세푸스의 유대인의 전쟁들에서 증거되는 대로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도 어느 정도 나타났다고 말하였다.45)

[4-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첫 번째 징조는 거짓 그리스도들의 출현이다.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나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할 것이다. 마태복음 24:11, 24,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13:11-18에서 거짓 선지자의 출현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사실, 사도시대의 말기에 벌써 많은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났다(요일 2:18; 4:1-3; 요이 7, 9). 또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때뿐 아니라, 교회 역사상 이런 징조들이 나타난 때가 종종 있었고 16세기 종교개혁 때에도 그러했다. 또한 주의 재림 직전에 최종적으로 치명적 미혹과 교회들의 큰 혼란이 있을 것이다.

이단은 기독교의 근본교리들로부터 탈선된 견해나, 그런 견해를 취하는 인물과 집단을 가리킨다. 역사상 로마 천주교회는 매우 거대한, 대표적 이단이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선행과 고해성사와 미사를 구원에 본질적이라고 보며, 또 마리아를 중보자, 보혜사, 기도의 대상, 세상의 여왕으로 높임에 있어서 이단적이다. 1830년 이후 나타난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말일성도 그리스도의 교회], 안식교[제7일 안식일 재림교회=SDA], 크리스챤 싸이언스 등 세계적 이단종파들이 있고,46)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이단종파들이 있다.47) 1986년 4월 30일, 한국에 재림주로 자처하는 자가 35명,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자가 12명이라고 한다.48)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가장 큰 미혹은 자유주의 신학이다. 역사적 대교단들의 대다수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어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을 부정하는 사상으로 교회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이단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의 이름으로 전통적 교회들 안에 들어와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배교와 불신앙에 떨어지게 하였다.

[6-7절]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두 번째의 징조는 전쟁이다. 요한계시록 6장의 일곱 인의 환상들 중 두 번째 인은 붉은 말의 환상인데, 그것은 큰 칼 곧 전쟁을 상징하였다. 요한계시록 8, 9장의 일곱 나팔의 환상들 중 여섯째 나팔은 유브라데 강 주위에서의 큰 전쟁, 곧 ‘2만만’ 즉 2억명의 군사가 동원될 전쟁에 대한 환상이다. 또 요한계시록 16장의 일곱 대접의 환상들 중 여섯째 대접은 유브라데 강이 말라 동방의 왕들이 들어옴으로 세계적 연합군이 형성되고 아마겟돈(므깃도 언덕)에서 마지막 큰 전쟁이 일어나는 환상이다.

역사상 수많은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지만, 20세기에 일어난 두 차례의 세계적 전쟁은 가장 처참한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약 천만명의 군인들과 수많은 민간인들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은 약 1,700만명의 군인들과 셀 수 없이 많은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서방세계와 공산진영으로 서로 대립되었고 아직도 그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또, 중동 지역에서는 이스라엘 나라와 이슬람 국가들 간의 갈등이 여전하다.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중동에서부터일 것이라고 흔히 말하며, 그 전쟁은 아마 화생방 무기들(화학-생물학무기들, 핵무기들)을 동원한 인류역사에서 가장 처참한 전쟁이 될 것이다.

[7-8절] 처처에 기근(리모이)과 [무서운 전염병(로이모이)과](전통본문)49)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세 번째 징조는 기근이다. 요한계시록 6장의 일곱 인의 환상들 중 세 번째 인은 검은 말의 환상인데, 그것은 흉년을 상징했다. 근대에 들어와 기근은 세계적으로 더욱더 심해진 것 같다. 월드북 백과사전(The World Book Encyclopedia)에 의하면, 1870년대에 남부 인도에서 약 5백만명이 기근으로 죽었고, 중국에서는 9백만명 이상이 죽었다. 1929년과 30년에는 중국의 황하강의 홍수로 인한 기근으로 약 2백만명이 죽었다. 1943년 인도 동부 벵갈에 대기근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50만명 이상이 기근으로 죽었다. 1960년대 후 아프리카의 소위 사하라 사막 남부 사헬 지역과 남부 아프리카, 특히 이디오피아 등에서 수백만명이 죽었다. 지구상에서는 매일 약 7억 5천만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세계은행은 보도했다.50)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네 번째 징조는 무서운 전염병이다. 요한계시록 16장의 일곱 대접의 환상들 중 첫째 대접은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는 환상이며, 다섯째 대접은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해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는 환상이다. ‘헌데’와 ‘종기’는 원어에서 같은 단어(헬코스 e{lko")이다.

역사상 많은 전염병들이 있었지만, 오늘날 성도덕의 문란과 특히 동성애로 인해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 같은 무서운 병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에이즈는 아직 치료약이 없다. 유엔 에이즈 기구(UNAIDS)에 의하면, 2002년 7월, 에이즈 바이러스(HIV) 감염자수는 세계적으로 4천여만명이며, 향후 20년간 약 7천만명이 에이즈로 사망할 것으로 예상하였다.51).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다섯 번째 징조는 지진이다. 요한계시록 6장의 여섯째 인은 큰 지진에 대한 예언을 포함한다. 또 요한계시록 11:13에는 두 증인이 승천한 후 큰 지진이 나서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7천명이 죽을 것을 예언하였다. 요한계시록 16장의 일곱째 대접의 환상은 큰 지진이 있어 큰 성 바벨론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큰 우박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 큰 지진의 위력은 약 1억 8천만 톤의 강력한 폭약(TNT)과 같으며, 그것은 세계 최초로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약 만 배의 위력이라고 한다.

월드북 백과사전에 의하면, 역사상 대지진들이 있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대지진들이 더 빈번해졌다. 20세기에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지진들은 28개 이상이 되며, 그 중 2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이 20개나 된다. 많은 사망자를 낸 큰 지진만 몇 개 꼽아보면, 1920년 중국 중앙부 간서 20만명 사망, 1923년 일본 도오꾜-요코하마 14만 이상 사망, 1976년 중국 북동부 헤베이 24만명 사망 등이다. 최근의 큰 지진은 2008년 5월 중국 쓰촨성 약 10만명 사망 추정, 2010년 1월 아이티 약 22만명 이상 등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주께서는 주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이 있을 것이며 그 전에 여러 징조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본문은 다섯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미혹이다. 많은 거짓 목사들이 나타날 것이다. 둘째는 전쟁이다. 세계적인 전쟁들이 일어날 것이다. 셋째는 기근이다. 세계적인 기근이 있을 것이다. 넷째는 전염병이다. 무서운 전염병들이 돌 것이다. 다섯째는 지진이다. 많은 큰 지진들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이 가까움을 인식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

9-14절, 핍박, 배교, 불법 성행, 사랑의 식어짐, 세계복음화

[9-10절]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여섯 번째 징조는 핍박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미 사도 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나(요일 2:18, 22), 신약성경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성도들을 핍박하는 한 정치적 인물 혹은 세력인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을 예언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3-4,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저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 불리거나 숭배함을 받는 모든 것보다 자신을 높여 하나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처럼 앉아 자기를 하나님으로 나타내느니라”(전통본문). 요한계시록 13:1, 2, 7,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초대교회 시대의 로마 황제, 중세교회 시대의 로마 교황은 예비적 징조이었다. 그때 진실한 성도들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었다. 20세기 초 우리 선조들은 일본 통치시대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북 공산당의 핍박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주의 재림 직전 세계적 독재자의 출현으로 이 예언은 성취될 것이다. 이때 진실한 성도들, 즉 짐승의 표(666)를 받지 않는 자들은 큰 핍박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때에 참된 성도들은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계 13:10; 14:12).

또 이런 핍박의 때 많은 사람들은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적 평안을 위해 하나님을 배신하고 믿음을 버리고 오히려 참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설 것이다. 이들은 가룟 유다의 후예들이며 진실한 성도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런 배신자, 변절자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하고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신앙 양심을 따라 바르게 살고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11-13절]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일곱 번째 징조는 배교(背敎)이다. 거짓 목사들이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할 것이다. 많은 형식적 교인들이 참 신앙을 배반하고 변절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3에서 주의 재림 직전에 배교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背道)하는 일이 있고.” 과거에 천주교회가 바른 신앙을 배반하고 멀리 이탈하였었고 오늘날도 여전히 그러하다. 오늘날에는 자유주의 신학들이 많은 사람들을 바른 신앙에서 떠나게 만들고 있다. 많은 배교자들과 변절자들이 기독교회 속에 들어와 있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 개신교회인 장로교, 루터교, 감리교, 침례교 등 거의 모든 교파들의 신학교들, 목사후보생들, 목사들의 사상을 부패시키고 있다. 세계의 대교단들은 자유주의를 고의로 포용하거나 자유주의화되어 있다.52) 세계의 대다수의 주류 교단들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속해 있는데, 이 단체는 배교적이다. 우리나라도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통합) 등은 자유주의적 교단들이다. 물론 그런 교단들 안에도 보수적 목사들과 교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 교단의 신학교들이 자유주의적이므로 그 교단들은 분명히 자유주의적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와 같이, 21세기의 기독교회들은 또다시 배교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예언된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징조의 성취이다.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여덟 번째 징조는 불법이 성하는 것이다. 말세 교회의 문제는 교리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윤리적인 것이다. 교회들 안에 불법과 부도덕한 일들이 많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신약성경에 밝히 교훈한 바를 저버리고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고 낙태를 허용하고 동성애를 용납하고 있다.53)

그러나 성경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분명히 교훈한다. 고린도전서 14:34-37은,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며 율법에 이른 것같이 복종해야 하며 이것은 주의 명령이라고 말했고, 또 디모데전서 2:11-14는,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울 것이며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 이유로 창조의 원리와 범죄에 대한 징벌을 들었다. 또, 출애굽기 21:22-24는 낙태가 살인임을 분명히 증거하였고, 고린도전서 6:9-10은 동성애의 죄를 짓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증거하였다. 교회는 윤리적으로도 거룩해야 한다.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아홉 번째 징조는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다. 교회들이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부패할 때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을 행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성도들은 끝까지 견디고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7:14,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열 번째 징조는 세계의 복음화이다. 세계의 복음화는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세계복음화의 역사이었다. 백년 전에 복음이 아시아의 동쪽 끝부분인 한국에까지 도착하였다. 교회의 남은 사명은 여전히 세계복음화이다. 우리는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현대 교회들의 배교 때문에 낙심치 말고 세계복음화를 위해 계속 힘써야 한다. 성령께서는 신약교회 안에 오셨고 영원히 거하신다. 그의 능력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세계복음화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을 포함할 것이다. 로마서 11:25-26,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문맥상 육신적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 혹은 선택된 충만한 수의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본다(촬스 핫지).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주께서는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징조들로 다섯 가지를 더 말씀하셨다. 첫째는 핍박이다. 공산국가 같은 독재국가의 핍박이 있을 것이다. 둘째는 배교이다. 교회들이 전체적으로 바른 진리에서 이탈할 것이다. 셋째는 불법 성행이다. 교회들이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해이해짐으로, 교회들은 중세시대처럼 다시 불법이 성행할 것이다. 넷째는 사랑의 식어짐이다. 교회가 해이해지고 불법이 성행하면 사랑이 식어질 것이다. 다섯째는 세계복음화이다.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가지만, 세계복음화의 하나님의 뜻은 다 이루어질 것이다.

15-28절, 멸망의 가증한 것, 대환난, 거짓 기적들

[15-18절]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다니엘 11:31은,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예언은 주전 167년 수리아 왕 안티오커스 4세(일명 ‘에피파네스’)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고 제사를 폐지하고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울 것을 가리켰다고 본다.

이것은 역사상 성취되었다고 보이나, 예루살렘 멸망과 주의 재림의 징조로 제시되었다. 로마 군대는 주후 66년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주후 70년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였다. 주의 재림 직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3-4, “저 불법[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주께서는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때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예루살렘 멸망의 때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요단 건너편, 페레아 지방 북쪽 펠라로 도피했다고 증거했다. 또 주께서는 집안의 물건이나 겉옷을 가지러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 재난이 급속하므로 세상것에 대한 모든 애착을 버리고 급히 피해야 할 것을 가리켰다. 누가복음 17:32에 보면, 주께서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다.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유황불비로 멸망하는 그 날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고 속히 산으로 도망하라는 천사의 지시를 저버리고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창 19:26). 우리는 세상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의 명령대로만 살아야 한다.

[19-20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것은 피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혼은 정당한 일이지만 심신의 고통도 뒤따르며 환난의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고전 7:26-28). 또 주께서는, 겨울에나 안식일에도 피난하기 어려우니까 그런 때를 피하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21-22절]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큰 환난이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의 때에 식량이 떨어져 여자가 그의 자식을 죽여 먹은 일이 있었다”고 기록했다.54)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에도 큰 환난이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환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대환난을 가리키며(계 6:12-17; 8:13 등) 그 환난의 정도는 점점 더 심해지고 특히 일곱 대접은 극심한 재앙을 예언한다고 본다(계 16장).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환난의 날들을 감하실 것이다. 환난의 기간을 요한계시록에서는 3년 반으로 자주 표현했다(계 11:2; 12:6; 13:5). 이것은 문자적 기간일지 모르나 그 기간은 제한되고 짧을 것이다. 그것은 택자들 곧 구원받을 자들을 위해 그럴 것이다. 그들은 진노의 대상이 아니므로 피할 길을 얻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9:4, “(황충 재앙 때)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23-25절]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예수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다시 강조하신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미혹하게 할 것을 말씀하셨다. 신앙의 초보적 단계에서는 진리의 기초적 지식들이 필요하지만, 신앙의 성장 과정에서는 많은 영적 싸움들을 해야 하고 많은 시험과 미혹을 분별하며 이겨야 한다. 사탄은 할 수 있는 대로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려 한다. 택함 받은 성도들은 비록 최종적으로 실패하지 않겠지만 깨어 조심하고 싸워야 한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후서 2:9-10에서, “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거짓된 기적주의가 재림 직전의 징조로 유행할 것이며 그 근원은 사탄, 그 대상과 진짜 피해자는 진리를 거부한 멸망할 자들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참된 성도들은 이 사실을 알고 조심해야 한다. 거짓된 기적주의 혹은 은사주의는 모세가 이미 신명기 13:1-5에서 경계한 바이었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자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하며 그 기적이 이룰지라도 그를 따르지 말고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주의 예언의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주께서는 미리 말씀하셨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성실한 순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며 믿고 순종해야 한다.

[26-28절]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人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주의 재림은 번개같이 온 세상에 동시에 알려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어느 특정한 산이나 집에 가야만 주의 재림을 대비하거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방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가 우리의 구원이며 그를 진실히 믿는 자는 이미 구원받은 자이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는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인 악인들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뜻 같다. 참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이 혼란이 심하고 참된 교회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순결한 교회를 세우고 거기에 속해야 할 권리가 있고 또 의무도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환난 날에 세상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롯의 아내처럼 세상 애착을 갖다가 멸망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의 명령대로만 살아야 한다.

둘째로, 주의 재림 직전의 대환난은 성도들도 참여할 고난의 때이지만, 우리는 진노의 대상이 아니므로 피할 길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시대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섭리자 하나님께 우리의 생명을 맡기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려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교회들 안에 거짓된 기적운동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은사운동은 바른 교리과 생활 교훈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마귀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운동을 조심해야 한다. 기적들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교리와 생활 교훈이다. 우리는 기적을 따라가지 말고 바른 교리와 생활 교훈을 따라가야 한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 바른 교훈이다. 우리는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믿고 순종해야 한다.

29-51절, 재림, 깨어 있으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

[29-30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人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人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대환난 후에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다. 이 예언은 문자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6, 8장에 나오는 여섯째 인과 넷째 나팔 환상에서 예언된 해와 달과 별들의 이상 현상들과 같다.

그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자체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일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주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것을 볼 것이다. 주 예수님의 재림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사건이다.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1:7,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다가왔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았던 죄인들은 두려움과 후회가 가득한 마음으로 애곡할 것이다.

주께서는 재림하는 자신을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마 18:20; 28:20) 사람의 아들로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신다. 재림하시는 주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 마태복음 26:6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人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물론 이 말씀들에서 강조된 것은 구름이 아니고, 우리가 볼 수 있게 오신다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그의 승천 때에 천사들이 증거한 바이었다(행 1:9-11).

재림하시는 주님은 능력과 큰 영광을 가지실 것이다. 그것은 그의 초림(初臨)과 다를 것이다. 그의 초림은 연약한 어린 아기의 출생이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신 고난의 종의 출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재림(再臨)은 다를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큰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온 세상의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이다.

[31절]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끝에서 저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은 지구 동쪽 끝에서부터 서쪽 끝까지 사방에서 하늘로 들릴 것이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전서 4:16-17에 증거된 ‘휴거’(rapture)라는 사건이다. 성도들은 그때 하늘로 들리어 기쁨으로 주를 영접할 것이며, 불신앙과 죄악 가운데 살던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은 두려움과 후회의 슬픔 속에 있을 것이다.

[32-33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人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그 잎사귀가 나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리킨다고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본문은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움을 알듯이 이 모든 일이 일어나면 주의 재림이 가까움을 알라는 뜻일 뿐이다. 무화과나무와 여름은 이 모든 일과 재림에 비교될 뿐이다.

[34-35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그의 예언이 확실히 성취될 것을 강조하신다. 예루살렘 멸망의 예언은 주후 70년에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 이와 같이, 주의 재림 약속도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주께서는 신약성경 끝부분에서도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20). 세상의 일들은 다 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며 확실하다(벧전 1:24-25). 우리는 영원한 그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고 굳게 붙들어야 한다.

[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55)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재림의 날과 시간을 알려주지 않으시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사도행전 1:7에 보면, 주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2천년 전에 재림의 시간을 2천년 후라고 알려주셨다면, 많은 이들이 해이해지거나 낙망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 비밀은 성도들에게 유익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37-39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人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人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이면 그는 멸망의 길을 걷는 자일 것이다. 주의 재림의 날 곧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노아가 방주를 준비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듯이, 우리 모두는 구원의 방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안에 거해야 한다. 예수님 안에만 심판을 피하는 곳이 있다.

[40-41절]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큰 분리가 일어날 것이다. 어떤 이는 데려감을 당하고 어떤 이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한 자들은 하늘로 들리어 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죄의 낙을 누리던 사람들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42-44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주의 재림 사건 앞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깨어 있는 생활이다. 깨어 있는 생활이란 믿음과 순종의 삶, 곧 정상적 신앙생활을 가리킨다고 본다. 깨어 있는 성도는 말씀과 기도 가운데 믿음을 가지고 살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산다.

주께서는 자신의 재림을 도둑의 침입으로 표현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어떤 이들의 추측처럼 주의 재림이 어느 순간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그 사건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일 뿐이다. 왜냐하면 주의 재림은 여러 징조들 후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둑이 갑자기 침입하듯이 주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므로, 우리는 주의 재림을 예비해야 하는 것이다.

[45-47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종들은 말씀의 봉사자들, 집사람들은 성도들, 양식은 성경말씀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들은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자기 직무를 완수하는 자들이다. 하나님 안에서는 충성하는 자가 지혜자이다. 그들은 주의 백성들을 맡아 때를 따라 영의 양식인 신구약성경의 말씀을 가르칠 것이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복된 자들이다(잠 25:13). 주께서는 그들에게 천국을 맡기실 것이다.

[48-51절]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자리](NASB, NIV)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주께서는 악한 종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들은 주의 재림에 대해 긴박한 마음을 갖지 않고 주의 재림을 진지하게 기다리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의 마음은 해이하고 거칠어지고 방탕함에 떨어진다. 내세를 소망하지 않는 자는 현실의 즐거움만을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올 것이다. 재림은 악한 종들에게 무서운 징벌로 임할 것이다. 그들은 내어쫓기며 외식자들로 간주되며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가상적 경고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신자라면, 우리는 깨어 있는 삶으로 참 믿음을 증명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확실한 사건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게, 영광스럽게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죽은 성도들은 영광스럽게 부활하며 살아 있는 자들은 영광스럽게 변화 받아 하늘로 들리어 주를 영접할 것이다. 그러나 땅에 남은 자들은 두려움 속에서 통곡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믿고 소망하며 맞이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게 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믿음과 순종의 삶, 곧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 가운데 믿음으로 살고, 계명을 순종하며 사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 말씀의 핵심은 죄를 멀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하며 믿음으로 행해야 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주의 재림을 대비하여 깨어 있는 삶이다.

셋째로, 주의 종들은 지혜롭고 충성된 종들이 되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지혜롭고 충성된 종들이 되어 늘 깨어 신구약 성경을 교인들을 위해, 그들의 영적 성장, 곧 성화를 위해 바르게 가르치며 전해야 한다.

25장: 깨어 충성할 것

1-13절, 열 처녀의 비유

[1절]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본문의 천국은 신약교회와 교인들을 가리킨다. 천국은 신약교회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주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신약교회와 교인들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들과 같다.

유대 나라의 결혼 풍습은 밤에 신랑이 그의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맞으러 오면 신부의 친구들이 나가서 그들을 맞아 함께 잔치에 참여한다고 한다. 이때 어두운 길을 밝힐 등불이 필요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열 처녀들은 신약교회와 교인들을 가리켰다. 결혼 잔치는 영광스런 천국을 가리켰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한다(사 54:5; 호 2:19). 신약성경도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맞는 정결한 처녀라고 비유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 말하였고(고후 11:2), 요한계시록 19:7은,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자신을] 예비하였으니”라고 말했다.

[2-4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열 처녀들 중 다섯 명의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졌으나 기름을 가지지 않았고 나머지 다섯 명의 지혜로운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넉넉히 넣어 등과 함께 가져갔다. 등은 교인들의 신앙고백을 가리키고, 기름은 그들이 가진 내면적 은혜를 가리켰다. 성경에서 기름은 흔히 성령을 상징한다. 성도들의 내면적 은혜는 성령의 활동이시다.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늘 거하시며 일하신다.

신약교회의 교인들 가운데는 두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성령께서 주시는 구원과 중생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주의 계명에 순종하여 거룩과 사랑의 열매를 맺는 자들이다. 그러나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 믿는 모양은 갖고 있으나 성령의 내면적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 즉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 생명과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이 없기 때문에 거룩과 사랑의 행실도 없다. 그들은 예수님 믿는 모양만 가진 형식적인 교인들이다. 비록 그들이 천국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소망은 헛된 것이다.

[5-6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열 처녀들은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다. 인간편에서 볼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매우 더딘 것 같다. 벌써 2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를 포함하여 열 처녀 모두가 졸며 잤다는 것은 주의 재림 직전에 기독교계 전체가 해이해질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도 연약이 있다. 또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심히 보잘것없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다(눅 18:8). 그러나 우리의 본성이 약하지만, 진실한 교인들과 종들이 있을 것이다.

밤중에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났다. 밤중은 환난과 핍박의 때를 암시할지도 모른다. “보라, 신랑을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는 천사들의 소리일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매우 더딘 것같이 보여도, 그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천사들의 음성을 듣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곧 일어나 재림의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지혜로운 자들은 복되다. 신앙생활은 평소생활이다. 구원받은 새 생명을 가진 자는 평소에 믿음으로 살고 죄를 멀리하고 사랑을 실천한다.

[7-9절]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미련한 처녀들은 그들의 꺼져가는 등불을 위해 지혜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지혜로운 처녀들이 가진 기름은 미련한 자들과 나눠 쓰기에 충분치 않았다. 이것은 신자 개인이 받은 구원의 은혜가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해 나눠 쓰기에 충분치 않음을 보인다. 구원은 각 개인의 문제 즉 각자가 준비해야 할 문제이다. 개인의 구원은 다른 이의 은혜에 의존할 수 없다.

[10-12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신약교회 교인들 중에는 등과 기름을 예비하여 결혼 잔치에 들어갈 자들이고, 등만 있고 기름이 없어 결혼 잔치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이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뒤늦게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하고 요청하였으나, 주께서는 그들을 거절하셨다. 그 두 부류의 분리는 분명하였다. 미련한 자들은 주께서 처음부터 알지 못하신 자들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주님의 택한 양들이 아니었고 믿는 모양만 갖춘 형식적 교인들이며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그들의 구원을 증명한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이는]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알지 못함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대로 다시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을 믿고 소망하는 모든 성도들,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해야 할 교훈이 여기 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과 시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깨어 있는 삶은 기름을 준비하는 것으로 표현되었고 기름은 우리 속에 주신 성령의 은혜를 가리켰고, 그 은혜의 증거는 참된 신앙고백과 거룩과 사랑의 실천이다. 그것은 한두 번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평소의 생활을 가리킨다.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거룩과 사랑을 행하는 자가 깨어 있는 자이다. 그러나 무지와 죄악 속에서 육신적 즐거움을 누리는 자들은 영적으로 잠든 자들 혹은 죽은 자들이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삶으로 우리의 구원을 증명해야 한다.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삶은 참된 믿음의 증거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천국은 혼인잔치와 같이 기쁘고 즐거운 세계이다. 이 세상은 죄가 많고 죄로 인해 슬픔과 눈물과 질병과 죽음이 있다. 그러나 천국은 죄와 슬픔과 눈물과 질병과 죽음이 없는 복된 세계이다. 천국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안과 희락이다(롬 14:17).

둘째로, 우리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과 같이 등과 기름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형식적인 신앙고백, 입술만의 신앙고백을 하지 말고, 바른 지식과 심령에서 나오는 바른 신앙고백을 해야 하고 그와 더불어 성령의 내면적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 은혜를 받은 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살고 경건하게 살며, 계명을 순종하여 의와 선을 행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주의 재림을 준비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생활은 실상 앞에서 말한 등과 기름을 준비한 생활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재림을 약속하신 지 벌써 2천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그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계 1:7; 22:20). 그는 한밤중에 갑자기, 그러나 24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대환난의 징조들 후에 오실 것이다.

14-30절, 달란트의 비유

[14-15절]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바로]56) 떠났더니.

타국에 가는 주인은 승천하실 주님 자신을 가리켰고, 종들은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을 가리켰다. 주인은 그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그 소유를 맡기셨다.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조건들, 즉 부모, 가정 환경, 유산(遺産), 지능지수(IQ), 재능, 건강, 학력, 조국, 시대 등은 다 하나님의 소유이며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다. 또 우리가 구원받은 후 하나님께 받은 각양의 은사들과 직분들도 그러하다(롬 12:6-8). 그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구원의 은혜를 주셨지만(눅 19장의 므나 비유), 이 세상에서 각 사람의 재능과 은사를 따라 서로 다른 직업들과 교회의 직분들을 주셨다.

[16-18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일은 열매를 맺는 일이다. 우리 각 사람은 개인의 성화의 일을 받았고 또 여러 가지 선한 봉사의 일들을 받았다. 우리 모두는 믿음과 순종으로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선한 일들 중에 매우 선하고 귀한 일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교회를 세우고 구원받은 영혼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며 교회의 사명이다. 우리는 이 선한 일을 위해 일하며 협력하며 충성해야 한다.

주께서는 그가 각자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만큼 열매를 기대하신다. 다섯 달란트 주신 자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주신 자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달란트 주신 자에게는 한 달란트를 기대하신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너무 비교하지 말고 우리가 받은 만큼,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부지런히, 충성되이 일하며 열매를 맺으면 된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부지런히, 충성되이 수고하고 일하여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 한 달란트를 낭비하지도 않았지만, 그것으로 부지런히 수고하고 일하여 이익을 남기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재능과 은사와 직분을 그저 묵혀 두었다. 그는 확실히 게으른 자이었고 주께로부터 받은 직분에 충성하지 않았고 선한 열매를 맺지 못했다.

[19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오랜 후에’라는 말씀은 주의 재림이 상당히 지체될 것을 암시한다. 회계하는 것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에게 맡기신 일에 대해 결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순종에 대한 심판이다. 고린도후서 5:9-10은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하였다.

[20-23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믿고 존중하였고 그 명령에 순종하며 충성했다. 그들은 게으름을 피우거나 주인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 교만한 자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직 겸손한 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주인은 그들을 칭찬했고 그들에게,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말했다. 주께서는 우리의 순종과 선행과 충성에 대해 보상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천국은 희락이 있는 행복한 곳이며, 충성된 종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다.

[24-25절]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스클레로스)[엄한, 완고한, 까다로운]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이 엄하고 까다로운 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주인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했다. 그러나 주인은 엄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주인이 자기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주면서 장사하라고 부탁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종들은 주인의 뜻에 순종해야 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 주인의 뜻에 순종치 않고 그를 두려워하며 그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다. 그는 일하는 수고와 어려움을 피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를 땅 속에 묻어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그의 명하신 일을 해야 하고 수고와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26-30절]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取利)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에 대해 잘못 생각했고 그의 명령을 거역했고 게을렀다. 사상은 행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생각은 순종과 선행과 충성이 없는 삶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있는 자, 곧 바른 지식과 믿음, 순종과 충성, 거룩과 선행의 열매가 있는 자와, 없는 자, 곧 바른 지식과 믿음, 순종과 충성, 거룩과 선행의 열매가 없는 자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있는 자는 더욱 풍족해질 것이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을 자신의 성화와 다른 사람들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잘 사용하지 못했다. 그는 무익한 종이었다. 주인은, “그를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했다. ‘바깥 어두운 데’는 지옥을 가리킨다. 악한 자들은 새 예루살렘 성 곧 천국의 바깥에 거하게 될 것이며 그곳은 영원한 지옥 불못이다(계 21:8, 27; 22:15).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의 가진 모든 재능과 은사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다. 그것이 어떤 유의 것이든지 또 그것이 얼마큼 주어졌든지 간에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들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충성해야 한다. 우리는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 받은 자처럼 하나님을 알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수고하며 작은 일에도 충성해야 한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에베소서 5:15-16,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셋째로, 우리는 지옥 불못을 피하고 천국의 즐거움을 기대해야 한다. 지옥은 영원한 불못이다. 그러나 천국은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충성된 자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듣고 그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다.

31-46절, 양과 염소의 비유

[31-33절] 인자(人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주께서는 재림주인 자신을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로 표현하셨다. 그는 신성(神性)으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인성(人性)으로는 지금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거기로부터 세상으로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그는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며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 그는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시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들과 염소들을 분별하는 것같이 하셔서,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실 것이다. 양은 의인들, 염소는 악인들을 상징했다. 열국 심판은 구약성경에도 예언된 바이다. 요엘 3:2,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서 그들을 국문[심문]하리니.” 오바댜 1:15,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왔나니.”

[34-36절]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구원받은 자들은 이미 하나님께 복 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받은 복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 하나님의 자녀 됨, 천국을 상속받음 등이다. 특히 천국은 창세로부터 준비된 나라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복된 유산이며, 성도 개인과 신약교회 전체의 소망이다.

주께서는 천국에 들어갈 의인들의 선한 삶이 주님을 섬긴 삶이라고 증거하셨다. 그들은 주께서 주리실 때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실 때 마시게 했고, 나그네 되셨을 때 영접했고, 벗으셨을 때 옷을 입혀드렸고, 병드셨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히셨을 때 방문하였다. 주께서는 자신의 고난을 전제하시며 의인들이 그를 사랑하고 섬겼다고 말씀하셨다. 선행은 구원의 근거는 아니지만 구원받은 증거가 된다.

[37-40절]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의인들은 주님을 직접 섬긴 일이 없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내 형제들’은 그의 부활, 승천 후에 이 세상에 파송될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을 가리켰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10:40에서도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었다. 주를 믿는 모든 성도들도 ‘여기 내 형제들’에 포함될 것이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18:5에서는 그를 믿는 소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결국 주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

[41-46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永罰)에, 의인들은 영생(永生)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주께서는 왼편에 있는 자들, 곧 염소와 같은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이유는 하나뿐인데, 곧 죄 때문이다. 죄를 회개치 않고 죄씻음을 받지 못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형벌이 내려질 것이다. 저주받은 악인들이 들어갈 마지막 장소는 지옥이다. 그곳은 ‘영영한 불’의 장소이다(막 9:43, 48; 계 20:10). 그곳은 마귀와 악령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지만, 범죄하고 회개치 않는 모든 사람들도 거기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라고 했다. 그때 임금이 대답하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부활 승천하여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 자신은 지금 고난을 당하고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주의 제자들과 전도자들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것이다. 주의 관심은 그들에게 있다. 주의 제자들은 얼마 후면 온 세계로 보내질 것이다. 이제 주께서는 일반 신자들이 주의 제자들과 전도자들을 주님을 영접하듯이 영접하기를 원하신다.

주께서는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전도자들을 영접지 않는 것은 천국을 상실하고 지옥에 던지울 큰 죄악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믿음을 증거한다. 주께서 보내신 종들에 대한 태도는 주께 대한 태도를 나타낸다. 그들이 참된 신자들이라면, 주의 종들을 사랑하고 귀히 여겼을 것이다. 그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정한 자들은 주를 믿는 자가 아닐 것이다. 주께서는 결론적으로 “저희는 영벌(永罰)에, 의인들은 영생(永生)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들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중요한가? 주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실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새 계명의 실천에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다. 새 계명이 큰 계명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죄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서로 사랑함을 실천치 않는 자는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사는 자요(2:9-11) 아직도 새 생명이 없는 자요(3:14-15) 중생치 못한 자라고 증거하였던 것이다(3:9-10).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 마지막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영광 중에 재림하실 주 예수께서는 모든 나라들과 사람들을 모으시고 심판하실 것이며 의인들과 악인들을 나누실 것이다. 고린도후서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둘째로,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의인들을 위해 예비하신 곳이며 하나님께 복 받은 의인들이 들어갈 영생(永生)의 나라이다. 그러나 지옥은 마귀와 악령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며 저주받은 악인들이 들어갈 영벌(永罰)의 장소이다.

셋째로, 우리는 주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와 주의 이름을 가진 작은 성도 하나를 귀히 여겨야 한다. 주께서는 이 비유에서 주의 형제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를 영접지 않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주의 모든 종들과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는 동시에 또한 의무가 된다. 모든 성도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실천하되, 주의 작은 종 한 사람과 작은 성도 한 사람을 영접하기를 힘써야 한다.

26장: 잡히심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3년여의 사역 기간 중 마지막 주간의 교훈들과 사건들을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였다(마태는 일곱 장, 마가는 넉 장, 누가는 다섯 장, 요한은 여덟 장).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16절, 공모와 배신, 향유를 부음

[1-2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人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주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목요일 밤에 가지셨다면, 이 말씀을 하신 날은 그 이틀 전, 즉 화요일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넘기우실 것이다. ‘판다’는 원어(파라디도미)는 ‘넘긴다’는 뜻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주요 절기이다. 유월절에 집 문의 좌우 설주[기둥]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의식은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음을 예표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7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어린양으로 표현하였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아셨고 제자들에게 이미 세 차례나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예언하셨다(마 16:21; 17:22-23; 20:18-19).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은 그의 신적인 지식을 증거한다. 또 그가 이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그들로 그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당황치 않게 하시고 또 그들 자신도 장차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을 각오하게 하심이었을 것이다.

[3-5절] 그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衙門)(아울레)[뜰, 관저]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돌로)[몰래, 은밀히](BDAG, NASB) 잡아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요(民擾)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가야바는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다(눅 3:2; 요 11:51). 그는 겉으로는 존귀하게 보였겠지만, 실상 메시아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 악한 자이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 죽이기를 공모하였다. 실상 그들은 처음부터 그런 일을 계획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 때문에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일 것을 의논했었다(요 5:16 전통본문; 마 12:14). 또 요한복음 5:18에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고 말함을 인해 그를 죽이려 했다. 또 요한복음 7:7은 그가 그들을 악하다고 증거하기 때문에, 요한복음 12:19는 온 세상이 그를 따르기 때문에, 또 마태복음 27:18은 그들이 그를 시기하기 때문에 죽이려 했다고 증거한다.

하나님을 섬기며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친다는 종교지도자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까닭 없이 죽이려고 이렇게 악한 일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의 교훈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지적하고 성경과 이성에 입각한 공정한 비평을 하여야 했었다. 까닭 없이 미워하고 죽이려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6-7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그 나병환자 시몬은 아마 이전에 나병을 앓았다가 고침을 받은 자이었을 것이다. 이 일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유월절 엿새 전 베다니에 오셨을 때에 아마 그 날에 있었던 일이고, 예수께 향유를 부었던 그 여인은 나사로의 여자 형제 마리아이었던 것 같다(요 11:1-2; 12:1-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머리에 붓고 또 그의 발에도 붓고(요 12:3) 자기의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 향유 냄새는 온 집에 가득하였다. 세상에서 귀한 분들은 값비싼 옷이나 신발, 고급화장품이나 장신구로 자기 몸을 단장한다. 그러나 세상에 참으로 값비싼 향유를 발라야 할 분이 계시다면, 그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8-9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향유가 3백 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증거한다(막 14:3-5; 요 12:3-6). 그것은 노동자의 3백일 이상의 품삯에 해당한다. 노동자의 품삯을 하루 10만원으로만 잡아도 그것은 약 3,000만원 이상의 가치가 되는 값비싼 향유이었다.

그렇게 분노한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요한복음 12:3-6은 이렇게 기록한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는 선한 일에 대해 말하였지만 실상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는 돈궤에서 돈을 훔치는 도적이었다.

[10-12절]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葬事)를 위하여 함이니라.

주님의 판단은 그들과 달랐다. 그는 그가 좋은 일을 하였으므로 그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우리가 항상 할 수 있지만, 자기를 위해 향유를 붓는 일은 항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지상 생애는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가 죽으시기 전에 아마 자기가 가장 아끼던 귀한 향유를 그에게 부어드리고 싶어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를 잡아죽이려 한 그때에,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견하며 그에게 자기의 귀한 향유를 부어 그의 죽음을 준비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실상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깨뜨려 그 어떤 향유보다 더 귀한 그의 보배로운 피(寶血)를 다 쏟아주셨다.

[1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행위가 후시대에도 기억될 만한 일이라고 칭찬하셨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도 귀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쓴 돈,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쓴 돈은 참으로 귀한 돈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쓰는 시간과 돈과 수고는 참으로 귀하다. 주께서는 먼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성체(聖體)를 깨뜨리시고 보혈을 다 쏟아주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돈과 수고를 드려야 한다.

[14-16절] 그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은 30은 아마 30스타테르, 즉 120데나리온을 가리킬 것이다(NBD). 그것은 마리아가 드린 향유 값인 300데나리온(막 14:5; 요 12:5)보다는 못했으나 꽤 큰 금액이었다. 한 사람은 300데나리온 짜리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렸으나, 다른 한 사람은 120데나리온을 얻으려고 주님을 배신하였다. 이것은 너무 대조적이다. 지식과 무지, 믿음과 불신앙, 충성과 배신은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었다.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배신하였다. 사람은 심히 무지하고 악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의 곁에서 그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그의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 체험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고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셨다. 요한복음 6:64,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그의 불신앙은 없어지지 않았다. 또 그는 도적이었다. 요한복음 12:6은 그가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갔다고 말한다. 그의 돈 사랑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의 물질에 대한 탐심은 마침내 그를 멸망케 하였다.

또 사탄의 활동이 강하였다. 누가복음 22:3은,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고 말하고, 요한복음 13:27은,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은 사탄의 능력보다 크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면 사람은 누구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음으로 바로 살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한다. 마리아는 값이 300데나리온 이상인 귀한 향유를 죽음을 앞두신 주께 부어드렸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이 주께서 우리 위해 흘리신 보혈에 감히 비교될 수는 없다.

둘째로, 하나님과 주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쓴 돈은 가난한 자를 구제한 돈보다 귀하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다 주셨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돈과 수고를 드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 한 사람은 300데나리온 짜리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렸으나, 다른 한 사람은 120데나리온을 얻으려고 주님을 배신했다. 지식과 무지, 믿음과 불신앙, 충성과 배신은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3년간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닌 생활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17-30절, 유월절 저녁식사

[17-19절]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예수님의 3년의 공적 사역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인 그의 죽음의 사건, 곧 인류 구속(救贖)의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일은 때가 있다(전 3:1-8).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작정하신 때에 이루신다.

유월절은 1월 14일 저녁이며 유월절 식사를 하면 무교절 첫날이 된다. 본문의 유월절은 예수께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 후 아마 네 번째로 맞는 유월절일 것이다(요 2:13; 4:35; 6:4).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한 큰 다락방을 빌리게 하셨다(막 14:15; 눅 22:12). 제자들은 주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였다.

[20-23절]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그 유월절 저녁식사는 결코 즐거운 식탁이 아니었다. 주께서는 그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 즉 그의 측근의 제자들 중 하나가 그를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아주 친하고 믿던 열두 제자들 중 하나가 그를 배반하고 그를 대적할 것이다. 가룟 유다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 참여했다. 그는 그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 가까이에 앉았던 것이 분명하다. 요한복음은, 그가 예수께로부터 빵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으며, 또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었다고 증거하였다(요 13:27, 30).

[24-25절] 인자(人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人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은 성경에 기록된 바요 하나님의 작정된 바이며, 그 일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복음 6:64에 보면, 주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가 믿음이 없었고 장차 그를 팔 것을 처음부터 아셨다. 또 누가복음 22:22에 보면, 주께서는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작정과 사람의 도덕적 책임의 관계는 심오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작정하시고 섭리하시지만, 악을 행하는 사람은 그 악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둘은 다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이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회개도, 믿음도, 순종도, 끝까지 주를 따름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가룟 유다가 다른 제자들과 다르게 예수님을 ‘랍비’ 곧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예수님을 신적 구주, 즉 그의 신성(神性)을 믿지 않았음을 보이며 또 “내니이까?”라는 그의 질문은 주께서 그의 은밀한 계획을 모르시리라는 생각을 나타내는 것 같다.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신적 지식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가룟 유다는 최종적으로도 구원에서 제외된 불쌍한 영혼이지만, 세상에서도 그의 마지막은 불행하였다. 성경은, 그가 예수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뉘우쳐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스스로 목매어 죽었으며(마 27:3-5), 또 그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 증거하였다(행 1:18).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믿음 없고 가련한 배신자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지금 자신을 부정하고 믿음과 순종을 실천해야 한다.

[26-27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그 날 밤에 사용된 빵은 큰 한 덩어리의 빵이었던 것 같다. 가룟 유다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 곧 최초의 성찬식에 참여했다(눅 22:21; 요 13:26-27). 비록 그가 그 성찬식에 참여하였지만,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었다. 성찬의 떡과 포도즙은 그 자체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떡을 ‘내 몸’이라고 말씀하시고 포도즙을 ‘내 피’라고 말씀하신 것은 상징적 표현이라고 본다. 떡과 포도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상징적 일치가 있다. 즉 그 떡은 예수님의 몸과 같고 그 포도즙은 예수님의 피와 같다. 주께서는 이 엄숙한 의식에서 그의 신성(神性)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1:27은 사람이 주의 떡과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경고하였다.

[28절]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새 언약의](전통본문)57) 피니라.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맺으신 구원의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신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죄사함을 위한 것이다. ‘많은 사람’은 택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들의 수는 매우 많다.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또 성경은 피가 생명이며 속죄의 피가 죄를 씻음을 증거한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중요하며 우리에게 있어서 속죄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 요한복음 6:53-5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없었다면, 이 세상에서 죄인들에게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속죄 신앙은 기본적인 구원 신앙이다. 그것은 구원의 생명이다.

[29-30절]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즐거운 식탁교제를 나눌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헛되이 주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열두 제자들의 수에 들었고 3년 동안 예수님 가까이에서 그의 교훈을 받고 그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지만 그를 헛되이 따르다가 마침내 배신자가 되었다. 가룟 유다의 실패의 원인은 그가 돈 사랑을 버리지 못한 데 있다. 그는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쳤다(요 12:6).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자신을 부정하고 돈 사랑, 육신의 쾌락 사랑, 세상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가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가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이 되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사랑하며 그의 계명만 따라야 한다.

31-46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심

[31-35절]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주께서 인용하신 것은 스가랴의 예언이었다(슥 13:7). 그는 그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제자들이 그를 버릴 것을 말씀하셨고 그가 부활하신 후 갈릴리로 먼저 가실 것을 말씀하셨다. 주께는 신적 지식이 있으셨다.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했다. 그들의 말은 진심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선한 소원과 참된 고백도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이 없으면 실패하고 말 것이다. 사람은 심히 연약한 존재이며 사람의 굳은 결심도 그러하다. 승리의 삶은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의 능력과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36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은 감람산이라고도 하며 주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주 가셔서 기도하셨던 곳이었다(눅 22:39). 예수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은 그의 인성(人性)의 증거이었다. 물론 그의 신성(神性)으로도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시겠지만, 그가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은 그의 인성을 나타내셨다고 본다. 그는 잡히시기 전날 기도하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과 교훈이 된다. 우리가 큰 일이 앞두고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일,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다.

[37-39절]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곧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좀더 나아가셨다. 이 세 제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서도 최측근의 인물들이었다(눅 8:51; 9:28). 그는 그때 심히 고민하며 슬퍼하셨다. 그는 우리와 같이 연약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셨다. 그는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누가복음은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으며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증거하였다(눅 22:41, 44). 그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그가 자신에게서 지나가기를 원하신 ‘이 잔’은 십자가의 못박히심과 죽으심을 가리켰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육신적 고통뿐 아니라, 택자들의 죄책을 담당하는 영적 고통이 있는 죽음이었다.

그의 기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의 신비하고 독특한 인격을 증거한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보자로서 참 사람이 되셨다(딤전 2:5). 그는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피하기를 원하셨고 마음의 큰 슬픔과 고통 중에 땀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셨다. 히브리서 5:7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증거하였다. 그의 기도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보이신다.

십자가의 죽음은 사람으로서 피하고 싶은 일이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뜻을 꺾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다. 그의 기도는 자기의 뜻을 고집하고 관철하려는 기도가 아니었다. 그의 기도는 자기를 꺾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서 거룩하시고 선하시고 완전하시며, 오직 그의 뜻이 땅 위에서 다 이루어지셔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그는 아버지께 복종하심으로 그의 온전함을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5:8-9는,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증거했다.

십자가의 죽음은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속죄를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벌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다. 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깊은 의미 곧 속죄적 의미가 있다. 우리의 죄 문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피 흘리신 죽음으로 우리는 죄씻음의 길을 얻었다.

[40-41절]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시간]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토 프뉴마)[영은] 원이로되[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주 예수께서는 한 시간 동안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한 시간 동안도,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깨어 기도하지 못했고 피곤하여 잠을 잤다. 기도는 시험을 이기는 길이며 사람이 깨어 기도할 때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으나,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바른 것을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다.

[42-46절]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人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의 기도는 세 번 반복되었다. 그것은 한 시간씩 세 번, 약 세 시간의 기도이었을 것이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비슷하였던 것 같다. 아버지의 뜻은 그 아들이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를 통해 그것을 다시 확인하고 확신하셨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그렇게 하기로 굳게 결심하셨을 것이다.

두 가지 교훈을 기억하자.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본받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그는 세 번이나 반복하여 아마 3시간 가량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절히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누가복음은 그가 얼굴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는 인간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것을 피하고 싶으셨으나, 자기의 뜻을 꺾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를 결심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그 기도를 본받아야 한다. 기도는 우리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둘째로, 시험을 이기는 길은 깨어 기도하는 것뿐이다. 세상에는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이 있다. 이런 일을 이기려면 우리는 성경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말씀과 기도밖에 없다. 에베소서 6:18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 싸움을 싸우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교훈했다.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길은 말씀과 기도밖에 없다.

47-75절, 잡히심, 심문받으심, 베드로의 부인함

[47-49절]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유다는 위선적 입맞춤으로 주님을 잡히시게 했다. 이 세상에는 돈 욕심, 배신, 폭력이 있으나, 천국에는 의와 사랑과 진실이 있다.

[50-5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요한복음 18:10은 칼을 쓴 그 제자가 베드로이며 그 종의 이름이 말고라고 증거했고 누가복음 22:51은 주께서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고 증거했다. 기독교는 칼을 사용하지 않고 폭력이나 물리적 힘으로 사람들을 정복하거나 다스리지 않는다. 또 기독교는 돈이나 사람의 지혜나 조직을 의지하여 일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모두 인간적이고 세상적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로 전하고 사랑의 실천으로 전한다.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볼 때 무력(無力)하게 보일지 몰라도, 말과 사랑은 칼보다 강하다.

[53-56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營)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그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영(營)이라는 원어(레게온)는 6천명 정도의 군인들로 편성된 로마제국의 군대단위이다. 열두 영은 7만 2천명 가량의 군인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많은 수의 천사들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힘이 없어서 잡히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 진영에서 하룻밤에 18만 5천명을 죽게 하신 일이 있으셨다(사 37:36). 그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예수님 잡는 그들을 당장 다 멸하실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경의 예언대로 잡혀 죽으셔야 했다. 성경의 성취는 곧 하나님의 뜻의 성취이었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아의 강림과 죽음에 대한 예언들과 예표들이 많이 있다. 성경의 예언들과 예표들은 성취되어야 하였고 또 성취될 것이다. 그는 그 예언들과 예표들대로 죽어야 하셨고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제물이 되어야 하셨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일이었다.

주께서 잡히시던 그 밤, 그의 제자들은 다 그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 고백했던 자들이었다(33, 35절). 그러나 그 결심과 고백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때 두려워하여 다 도망치고 말았다. 그들은 비겁하고 연약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들만의 연약이 아니고 바로 모든 사람의 연약, 곧 오늘 우리의 연약이기도 하다. 우리도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실패하고 말 것이다.

[57-58절]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죽이려고 이미 공모(共謀)하였고 그 새벽에 소집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를 죽이는 일에 열심이 있었다. 바른 지식이 없는 잘못된 열심이 얼마나 위험한지!

베드로는 그의 고백대로 주님을 따르지 못했지만, 다른 제자들처럼 멀리 도망치지는 않았다. 그는 멀찍이라도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관저의 뜰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가까이 주님을 따랐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지난 밤 그가 주와 함께 깨어 기도했더라면 아마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59-61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58)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거짓 증거를 찾으나 얻지 못하였고]59)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두 거짓 증인]60)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공회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유대 나라의 최고의결기관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일 명분을 만들기 위해 거짓 증거들을 찾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악하고 마귀적이다. 의로운 판단은 합당한 증거들과 논리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경우같이,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그것을 위해 그럴듯한 증거들을 찾는 일은 매우 악하다.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거짓 증인들을 통해서도 예수를 사형시킬 만한 적절한 구실을 찾지 못했다. 예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나(요 2:19) 그것은 자기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고(요 2:21) 설령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뜻이라 하더라도 그를 죽일 이유는 되지 못하였다.

[62-64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人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공회, 즉 재판정에서 자신의 신분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에 대하여 시편 110:1과 다니엘 7:13의 예언을 사용하시면서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시며 엄숙히 증거하셨다. 이것은 주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공적인 답변이시며 진술이셨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신분을 말씀하셨다. 그는 수가성 여인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었다(요 4:25-26). 그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인정하셨다(마 16:1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것은 그의 행하신 모든 기적들과 부활을 통해 확증된다(요 20:30-31). 예수님의 인격을 존중하는 자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바를 믿어야 한다.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시라면 그는 사기꾼이나 미치광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

[65-66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시는 것은 결코 참람한 말이 아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도 제시함 없이 그를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이미 작정하였다. 공회의 재판은 형식에 불과하였다. 공정한 심사가 없는 법정! 이것이 부패된 세상과 교회의 모습이었다.

[67-68절]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악한 자들에게 얼굴에 침 뱉음, 주먹으로 침, 손바닥으로 때림을 받으셨고 학대와 조롱을 받으셨다.

[69-75절]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사람도]61)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관저 바깥뜰에서 한 여종과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하였다. 조금 후에 그는 다른 여종과 사람들 앞에서 맹세하며 예수님을 부인했다. 또 그는 세 번째로 사람들 앞에서 저주하며 맹세하며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는 “내가 거짓말하는 것이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때 닭이 곧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기억하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공회, 즉 재판정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엄숙히 증거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확신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고 끝까지 그를 따라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악한 자들에게 침 뱉음과 주먹으로 침과 손바닥으로 때림을 당하셨다.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주께서 이런 고난을 당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우리는 그의 고난을 기억하자.

셋째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쳤고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하며 저주하며 부인하였다. 그들의 연약은 우리의 연약이다. 우리의 온전한 순종과 충성은 우리의 진지한 결심만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다.

27장: 죽으심

1-10절, 빌라도에게 넘겨줌, 가룟 유다의 자살

[1-2절]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본디오]62)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고 빌라도는 로마 황제가 세운 유대의 총독이었다(눅 3:1).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목표는 예수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로마 총독에게 넘겼다. 죄인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결박하였다. 그들은 새벽에 그 일을 했다. 그 악한 자들은 악을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밤늦게도 이른 새벽에도 분주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긴 까닭은, 그들에게 죄수를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한복음 18:31에 보면, 빌라도가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했다. 또 그들은 예수를 죽임에 있어서 백성들의 비난을 피하려 하였다. 즉 그들은 이 일을 위해 로마 총독을 이용했다. 저 타락한 종교인들은 로마 총독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악을 행했던 것이다. 그들은 세상적으로 지혜로웠으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3-5절]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에게도 양심은 있었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양심이 마비되었을 때는 3년간 따르던 주님을 배반하였지만, 그 양심이 깨어났을 때 그는 자기 행동을 후회하였다. 은 30으로 인한 잠시 동안의 기쁨보다 양심의 고통은 더 컸다. 그것이 범죄한 자의 후회와 고통이다. 유다는 그 돈을 쓸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었다. 그는 쓰지도 못할 돈 때문에 주님을 팔아넘긴 헛된 수고를 하였던 것이다. 죄를 짓는 모든 사람은 이처럼 무지하고 어리석다.

유다는 예수님의 정죄 당하심을 ‘무죄한 피’라고 증거하였다. 그는 이 말을 통해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거하였다. 이 배신한 제자까지도 주님의 무죄함을 증거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화인 맞은 양심, 즉 완전히 무감각한 양심을 가졌고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나 후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의 죄는 매우 컸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했다. 또 사도행전 1:18은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고 증거하였다. 이 증거는 그의 자살에 대한 보충적 설명이라고 보인다.

유다가 자살한 것을 보면, 그의 후회는 회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죄악된 행위를 슬퍼하는 것만이 아니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 또 참으로 회개한 자는 이제 자신의 남은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 그러나 자살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고 단지 자기의 행위에 대해 후회하고 절망하는 행위일 뿐이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후 7:10).

[6-10절]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定價)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유대 지도자들의 행위는 마치 불쌍한 나그네들을 위하는 것 같은 위선적 행위이었다. 위선자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칭찬을 얻기 위해 선을 행하지만, 그들의 중심에는 의와 선과 진실이 없다.

마태는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定價)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이 섭리적 사건은 이미 구약 스가랴 선지자의 글에 예언된 바이었다(슥 11:13). 마태가 스가랴의 예언을 예레미야의 예언이라고 증거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주석가 라이트푸트는 유대인 학자 데이빗 김치의 글을 인용하여 예레미야가 선지자들 가운데 첫 번째 지위를 가졌고 그의 책이 선지서들 중에 첫 번째로 놓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브라운). 구약성경의 예언은 이와 같이 놀랍게 성취되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합심하고 열심을 품고 일해야 한다. 악한 지도자들은 새벽부터 악한 일을 위해 모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그렇게 하자.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죄와 실수를 깨달을 때 단순히 후회에 그치지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와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여 받고 남은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고 바르고 선하게 살기를 결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의 초자연적 성격을 확신해야 한다. 성경은 가룟 유다의 배신과 그 후의 일을 예언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11-26절, 빌라도의 판결

[11절]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적 죄목을 씌웠다. 그들은 공회에서 예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냐?”고 물었었으나, 이제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고소했다. 그들은 간교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총독에게 “네 말이 옳도다”(쉬 레게이스)[네가 말하는도다]라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총독 앞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증거하셨다. 구약성경은 왕이신 메시아를 예언하였다. 예레미야 30:9, “[너희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에스겔 37:24,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12-14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지만 아무 대답도 안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자기를 죽이려고 작정하고 빌라도에게 끌고 왔고 그가 자신을 변명한다고 바뀔 일이 아니었음을 아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저 모든 것을 아버지께 의탁하셨을 것이다. 빌라도는 그것을 매우 기이히 여겼다.

[15-19절]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前例)가 있더니 그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前例)가 있었다. 그때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었다. 마가복음은 그가 민란을 꾸미고 민란에 살인한 자였다고 증거한다(막 15:7). 그들이 모였을 때, 빌라도는 그들에게 예수와 죄수 바라바를 나란히 석방후보자로 제시하였다. 그는 그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을 알았고 예수가 사형 당할 만한 죄가 없었음을 알았다. 시기는 욕심에서 나오고 미움과 살인을 만드는 무서운 악이다. 총독의 아내도 예수님을 ‘저 옳은 사람’이라고 부르며 그를 상관치 말라고 말했다.

[20-23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선동하고 설득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다. 그들은 예수께 대해 공의로 판단하려 하지 않았고 어떻게든지 그를 죽여 버리려고 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죄함에 대한 백성의 판단력을 흐려놓았고 그를 죽이자고 설득하고 선동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악한 행동이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라는 빌라도의 질문은 재판관으로서 매우 무책임한 말이었다. 객관적 사실들과 증거들을 종합하여 법률적으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게 판단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재판관이 사람들의 의견이나 여론에 이끌려 재판하려 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잘못된 일이었다.

무리들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다고 말하자, 빌라도는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물었다. 예수께서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거짓증거를 하셨는가?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셨고 사랑과 거룩과 진실을 가르치지 않으셨는가?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죄목을 제시하지 못하고 더욱 소리만 질렀다.

[24-25절]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옳은]63)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빌라도의 심문은 아무 효험이 없었고 도리어 민란이 일어날 것 같았다. 무리의 외침만 정의인 것 같았으나, 그것은 정의가 아니고 유대 지도자들의 계산된 작전이었다. 과격한 데모도 비슷하다. 그런 곳에는 이성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여지가 없고 오직 선동과 폭력만 있다. 그런 것은 사회를 개선시키기보다 혼란시키고 더 악화시킨다. 그러므로 혁명이나 과격한 폭력적 데모는 거부되어야 한다.

“이 옳은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는 총독 빌라도의 말은 책임회피의 악을 더했다. 그는 예수를 놓을 권세도, 십자가에 죽게 할 권세도 가지고 있었다(요 19:10). 판결은 그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손을 씻는다고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

백성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 핏값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의 형벌을 과연 그들이 받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무지한 대답대로, 하나님께서는 후에 그 죄에 대해 보응하셨다. 그는 주후 70년 로마 군대로 예루살렘 성을 처참히 짓밟게 하셨다.

회개치 않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은 무섭다. 최종적으로 그것은 영원한 지옥형벌이다. 그러나 죄를 회개해도 때때로 훈련의 과정이 있다. 그것은 정확한 죗값은 아니지만 죄 때문에 주시는 고난의 훈련 과정이다. 우리에게 가장 최상의 길은 죄를 안 짓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범했을 때는 즉시 또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26절]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죽어야 할 죄인 바라바는 놓여났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죽음에 내어준 바 되셨다. 빌라도의 판결은 불의했다. 그 자신도, 그의 아내도 예수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없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노력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리들의 여론을 두려워하여 법과 이성과 양심의 판단에 반대되는 불의하고 무책임하고 비겁한 판결을 내렸다.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공의로운 판결을 내려야 할 그가 그 지위와 권세를 오용하였다. 그는 의로우시고 선하신 예수님께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인 사형을 선고했다. 예수께서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불의한 판결로 정죄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자신이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증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해야 한다. 그는 유대인의 공회에서도, 로마 총독의 법정에서도 자신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셨다. 우리는 그가 자신에 대해 엄숙히 증거하신 대로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를 따르자. 빌라도는 예수께서 죄가 없음을 알았고 유대 지도자들이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 함도 알았으나 무리의 여론을 두려워하여 법과 이성과 양심의 판단에 반대되는 불의하고 무책임하고 비겁한 판결을 내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 우리는 그 고난의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고난을 각오하고 따라야 한다.

27-44절,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심, 십자가에 달리심

[27-31절]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예수께서는 로마 군병들, 죄 많은 이방인들에게 조롱을 받으셨다. 그들은 조롱을 다한 후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갔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조롱과 침 뱉음과 갈대로 침을 당하셨다.

[32-34절]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신포도주 혹은 포도식초](전통본문)64)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군병들은 사형집행을 위해 예수님을 데리고 나가다가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자를 만나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웠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친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에 나오셨다(요 19:17). 그렇다면 십자가 형틀이 무거워 예수께서 혼자 지기에 힘드셨고 함께 져 줄 제자들도 없었으므로 지나가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들어 그의 십자가를 함께 지웠던 것 같다.

군병들은 골고다(라틴어, calvaria)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신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했으나 마시지 않으셨다. 그것은 사형수로 고통을 덜 느끼게 하는 진통제 역할을 한다고 한다(NBD). 그러나 그는 이미 십자가의 고난을 각오하셨다.

[35-38절]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누가복음 24:39-40에 기록된 대로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그의 상하신 손과 발을 보이신 것을 보면, 그는 십자가 위에서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히신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피흘림은 물론,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경험하셨고 그 고통은 여러 시간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후 그의 옷들을 제비뽑아 나누었다. 요한복음 19:23-24는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었고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어서 제비뽑아 취했다고 자세히 증거한다. 이것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라는 시편 22:18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 주께서는 부끄럽게도 겉옷과 속옷까지 벗기운 채 십자가에 달리셨다.

군병들은 그런 후 십자가 옆에 앉아 지켰다. 그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죄패가 있었다. 누가복음 23:38의 전통본문과 요한복음 19:20은 그 죄패가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이 죄패는 예수님의 신분을 바르게 증거하였고 그 내용은 온 세계의 각 언어로 알려져야 할 내용이었다.

그때에 그와 함께 강도 둘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십자가에 못박혔다. 예수께서는 강도들과 같은 죄인으로 취급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범죄자 중 하나로 간주될 것이라고 예언한 이사야 53:12의 예언대로 된 것이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 죄인이 되셨다.

[39-44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왕이라면].65)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희롱의 말은,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고 한 시편 22:7-8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 본문은 또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욕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강도는 누가복음에 증거된 대로 곧 회개하였다(눅 23:39-43). 그는 죽기 직전에 구원을 받았다.

밤새 기도와 심문으로 잠을 자지 못하신 예수께서는 무거운 십자가 형틀을 지고 사형장으로 나가셨고 겉옷과 속옷을 벗기는 수치를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피흘림과 큰 고통을 당하셨고 지나가는 자들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다.

본문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받을 각오를 하며 살아야 함을 교훈한다.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인 로마 군병들에게 조롱을 받으셨다. 밤새 기도와 심문으로 잠을 자지 못하신 예수께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나가셨다. 그 십자가는 무거워 그가 혼자 지기에 힘 드셨고 함께 져 줄 그의 제자들도 없었으므로 군병들은 지나가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같이 가게 하였고 그의 십자가를 함께 지웠던 것 같다. 그는 겉옷과 속옷을 벗기우는 수치를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피흘림과 큰 고통을 당하셨다. 그의 겉옷과 속옷은 제비 뽑아 나뉘었다. 지나가는 자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조롱하고 멸시했다.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처음에는 욕하였다. 그러나 한 강도는 누가복음에 증거된 대로 회개했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고난의 길을 가셨다. 예수님 믿는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며 주를 따라야 한다.

45-66절,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무덤에 장사되심

[45-46절] 제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더니 제9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제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였다. 이것은 유대인의 시간으로 말한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시간으로는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이다. 요한복음 19:14는 제6시(그것은 로마 시간 곧 오늘 우리의 시간과 같다고 본다) 즉 오전 6시에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았다고 말하고, 마가복음 15:25는 제3시 즉 오전 9시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가장 악한 죄를 범하는 이 시간 하나님께서 심히 노하심을 잘 나타낸다.

제9시 즉 오후 3시 즈음에 예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며 크게 소리지르셨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그것은 육신적인 고통의 부르짖음이며 또 택자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영의 고통이었다. 갈라디아서 3:13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말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시려고 자기 아들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 지우셨다. 사람들의 죄의 용서는 이처럼 큰 대가를 지불하였다. 택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났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한다.

[47-50절]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예수께서는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다. 요한복음 19:30은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 머리를 숙이고 영혼이 돌아가셨다고 증거했고, 누가복음 23:46은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다고 증거했다. 그는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버지께서 명하신 택자들을 위한 구속(救贖) 사역을 다 이루시고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51-54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몇 가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하나는,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음을 보인다. 히브리서 10:19-20은,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

다른 하나는,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성도들이 장차 부활할 것을 예시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

또 하나는, 사형을 집행했던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군병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증거하였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을 잘 모르던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때에 되어진 일들을 보면서 예수께서 죄가 없는 의인이시며(눅 23:47)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다.

[55-56절]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 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예수님을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들은 십자가 근처에서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제자들은 다 도망하였던 것 같다. 그들은 잡힐까봐 두려워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은 비록 멀리서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주를 믿고 따르며 주의 멍에를 짊어지는 데에는 여자와 남자의 구별이 없다. 여자들은 일차적으로 가정적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얼마든지 하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협력하며 주를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다.

[57-61절]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날이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다. 마가복음 15:43은 그가 존귀한 공회원이라고 말한다. 그도 예수님의 제자이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고, 빌라도는 내어주라 명하였다. 아무도 예수님을 동정하거나 도우려 하지 않는 것 같은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아리마대 요셉을 예비하셨고 그의 마음을 감동하셨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의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갔다. 거기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다. 예수님은 이사야 53:9의 예언대로 부자의 무덤에 묻히셨다. 무덤은 죄인들이 그 죗값으로 들어가는 감옥과 같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셔서 무덤에 내려가신 것이다.

[62-64절]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유대 지도자들은 충성된 증인 예수 그리스도를 ‘저 유혹하던 자’라고 악평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는다”고 고백하였다(고후 6:8).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예수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했다고 증거하였다. 물론 그들은 예수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가 그 말을 했다는 것은 믿었다. 그들은 적어도 오늘날 자유주의자들보다는 더 나았다.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예수께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제자들이 후에 그것을 삽입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상상치 못하였다. 그들이 상상한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선생의 시체를 도적질한 후 그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시체가 도둑질 당하면 문제가 더 복잡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어도 사흘은 그의 무덤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것을 빌라도에게 요청한 것이다. 그들의 계획은 완전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완벽해 보이는 계획을 헛되게 만드실 것이다.

[65-66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숫군[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숫군[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빌라도는,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고 말했다. 그들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했다. 실상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생님의 시체를 도적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것은 오히려 그의 부활을 더욱 힘있게 증거한다. 예수께서 실제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이 그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악의 세력이 크고 모든 선을 압도하는 것같이 보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권능의 기적을 행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시려고 자기의 외아들을 속죄제물로 내어주셨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찬송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모든 악한 죄를 멀리할 것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인도하셨음을 보인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이것은 성도들이 주의 대속 사역으로 장차 부활할 것을 예시하였다.

넷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시체를 훔쳐 간 후 만들어낸 신화일 수 없었다. 빌라도는 파수꾼들이 예수의 무덤을 적어도 삼일 동안 지키는 것을 허락했다. 파수꾼들은 무덤문을 막는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다. 이런 상황은 그의 부활을 더욱 증거한다.

28장: 부활하심

1-10절, 여자들에게 나타나심

[1절]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미안 삽바톤)이 되려는 미명(未明)에[주간의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이제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의 첫날 새벽, 동이 터오는 시간이 되었다. 마가복음 16:2는,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라고 말한다. 그 시간을 새벽 6시로 본다면, 이때는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신 금요일밤(아마 오후 6시경)부터 토요일 하루를 지나 일요일 새벽까지, 날짜로는 제3일이지만, 정확히는 만 하루 반이었다.

무덤을 보려고 왔던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였다. 마가복음 16:1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등 세 명을 언급하고, 누가복음 24:10은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고 말한다. 천사들의 증거와 빈 무덤의 확인은 두 명 이상의 여자들이 증거한 확실한 사건이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이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왔다(눅 23:55-56; 24:1). 이것은 예수님을 향한 여자들의 거룩한 사랑이었다. 그들은 두려움을 이기고 그의 시체에 향품을 발라 상처와 피흘린 흔적을 닦고 썩는 냄새를 막으려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의 부활을 기대하는 믿음은 없어 보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나 성도에게는 최선의 믿음과 사랑이 필요하다.

[2-4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문으로부터]66)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날 두 명의 천사들이 그 무덤에 있었다고 증거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들이다. 천사의 모습이 번개같고 그 옷이 눈같이 흰 것은 그들의 민첩함과 성결함을 보인다.

[5-7절]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주께서](전통본문)67)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천사는 여자들에게 무서워말라고 안심시키면서 세 가지의 내용을 말했다. 첫째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사실을 전했다. 둘째로, 와서 주께서 누우셨던 곳을 보라, 즉 빈 무덤을 확인하라고 말했다. 여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다. 빈 무덤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다 증거하는 예수님의 부활의 첫 번째 증거이다. 셋째로,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고 말했다. 부활의 소식은 그들에게 예수께 대한 확신과 위로와 힘을 줄 것이다.

[8-9절]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달음질하더라. 그런데 그들이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려고 가고 있었을 때 보라]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여자들은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섬겼음을 보인다. 인간 선생에게는 머리를 숙여 인사는 하지만 엎드려 절하지는 않는다. 요한계시록 22:8-9에 보면, 사도 요한이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을 때, 그 천사는,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하였다.

[10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 여기에 그의 인성(人性)이 나타나 있다. 인성에 있어서 그는 우리의 형제가 되신다(롬 8:29). 또 그의 말씀은 그의 겸손을 나타낸다. 그는 즐거이 우리의 형제로 자신을 낮추셨다. 그는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자신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거기서 제자들과 얼마 동안 교제의 시간 가지기를 원하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40일 동안의 나타나심(행 1:3)과 가르치심은 주로 갈릴리에서 행해졌던 것 같다. 거기에서 제자들은 낙심과 슬픔을 떨쳐버리고 부활의 주님을 확신하게 되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재무장하게 될 것이다. 또 거기서 그들은 주께로부터 전도의 대사명을 받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으나, 그를 본 증인들의 증언들을 통해 그를 확신해야 한다. 여자들은 천사들에게 그의 부활의 소식을 들었고 그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다. 또 돌아오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 우리는 그의 부활을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살아계심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어버리신 자가 아니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주님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신적 구주이시다.

셋째로, 우리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갈릴리로 가서 뵈었듯이 성경, 특히 신약성경을 통해 주님을 더 확실히 알고 믿고 따라야 한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죽음과 부활을 밝히 증거한다.

11-20절, 거짓 소문, 전도의 사명

[11-15절]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그 새벽에 되어진 일들, 즉 지진, 돌이 굴려진 것, 천사들의 나타남, 무덤이 비었음을 본 파수꾼들은 그 사실들을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그 사실들을 확인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그 새벽에 일어난 일들을 숨기려 했다. 악한 자들에게서 양심의 일깨움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이 긴급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대제사장들은 군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어 그 입을 막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이성적으로 타당성이 없는 말이다. 파수꾼들은 무장된 군인들이고 제자들은 보통 사람들이었다. 또 그들이 잠잘 때 도둑질하여 갔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는가? 또 만일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여 갔다면, 저 유대 지도자들은 그것을 능히 찾아내었을 것이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생님의 시체나 감추어 놓고 부활을 외치며 기뻐하고 핍박을 받고 순교까지 하는 거짓된 광신자들이 아니었다.

인류 역사는 거짓말들로 가득한 역사이다. 회개치 않는 악인들은 거짓으로 남을 속이며 자신도 속는다. 거짓말을 진리로 믿고 진리를 거짓말로 배척한다. 참된 지식과 믿음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모든 거짓을 추방하고 진리만 믿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리 안에서 살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늘 진리 안에서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16-17절]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열한 제자들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산에 이르러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 그에게 경배하였으나 아직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육신의 연약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확신케 되었다.

[18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본래 신적 권세를 가지고 계셨지만, 사람이 되신 후에도 그 신적 권세를 가지시고 신적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고 또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되신다(계 5:12-13). 그는 마귀와 악령들을 제압하는 권세와 죄인들을 구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이제 그는 제자들에게 세계복음화의 대사명을 주신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가장 큰 두려움을 가지고 순종되어져야 한다.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이 전도의 명령은 일차적으로 열한 제자들, 즉 사도들에게 주신 것이다. 디도서 1:3,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전도의 임무는 먼저는 사도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이어 목사들과 선교사들에게 있고, 또 넓게는 모든 성도들에게 있다. 이 전도의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약교회에 주신 최대의 사명이다.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세계로 가라고 명하셨다. 전도자들은 어느 곳이든지 가야 한다. 전도는 영혼들에게로 찾아가는 것이다. 오는 사람들도 가르치지만, 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가야 한다.

전도의 대상은 모든 족속들이다. 자기 나라 사람뿐 아니라, 온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은 세계복음화, 즉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여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아직도 세상에는 복음을 받지 못한 민족들이 있다. 세계복음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국내전도자들뿐 아니라, 해외전도자들이 필요하고 선교연구소와 선교사 훈련원들이 필요하다.

‘제자를 삼는다’는 말은 옛날 영어번역에는 ‘가르치다’로 번역하였다. 제자란 누구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행동을 본받는 자를 가리킨다. 제자를 삼으라는 주의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으라는 뜻이다. 우리의 선생님과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마 23:8-10). 전도자나 목회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그 구원의 새 생명이 자라게 하신다. 고린도전서 3:5-7,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다. 세례는 죄씻음과 하나님과의 연합의 표시이다. ‘이름으로(에이스)’라는 말은 ‘이름 안으로’라는 뜻인데, 이것은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 영적 연합이란 실체적 연합을 의미하지 않고 정신적 그러나 생명적 연합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은 영적 죽음을 가져왔다(엡 2:1).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연합됨으로 새 생명을 얻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혜택을 받고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심을 뜻한다. 이 복은 죄씻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믿음으로 받는 세례는 죄씻음을 표시하며 확증한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복이 바로 이것이다.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전도는 복음 전파와 세례로만 그치지 않고 주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주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은 사도들을 통해 전달되었고 해설되었고 신약성경에 다 기록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 목사들은 오직 성경 권위에 의존한다. 목사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가르침의 범위는 주께서 명하신 ‘모든 것’이다. 편식이 몸에 좋지 않듯이,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골고루 읽고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교리도 잘 알아야 하고 윤리적 교훈도 잘 배워야 한다.

또 가르침의 목적은 실천이다. 주께서는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한다.

주께서는 이런 명령을 주시면서 후원과 위로의 말씀을 첨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의 종들에게는 하나님의 지도와 도움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의 낙심과 좌절을 제거해주며 날마다 새 힘을 보장한다. 주님의 이 위로의 말씀은 보혜사[위로자, 격려자] 성령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주께서는 사명만 부여하신 것이 아니고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힘도 보장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전도의 사명 수행에 충실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한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

둘째로, 우리는 부활하신 주께서 주신 전도의 사명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이것은 주께서 신약교회에 주신 특별한 명령이며 신약교회가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이다. 전도는 예수님 믿는 우리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도 기억해야 한다. 성도의 세상 생활은 영적 전쟁과 같다. 전도자의 길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치 말고 오직 말씀과 기도로 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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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유세비우스, 교회사, 3. 39. 16.

2) 이단반박, 3. 1. 1.

3) 유세비우스, 교회사, 4. 25. 4.

4) 루터, 벵겔, 라이트푸트, 고데, 브로더스, 매튜 풀, 매튜 헨리 등.

5) Byz C D* W it(d) vg syrp arm Diatessaron 등.

6) Byz D ita b d h k vgmss syrp c s copsa meg bo Irenaeuslat Cyprian 등.

7) Byz (D* W) itd h (syrp copmeg) armmss 등.

8) Byz W itk syrp copmeg (syrc copbo 등도 뜻은 같음).

9) Byz W ita b n syrp s arm Diatessaronarm.

10) Byz W ita b h syrp arm geo Diatessaronarm 등.

11) Byz ita b h vgcl ww syrp c copmeg arm Diatessaronsyr 등.

12) Byz א C itb h vg syrp s copmeg arm Diatessaronsyr Origenlat 등.

13) Byz W ita b h k vg syrp s copsa meg bo arm 등.

14) Byz copbo arm Origen Diatessaronarm Lect 등이 그러함.

15) Byz W 0242vid it vgcl syrp copsa bo-pt 등에 있음.

16) Byz C syrs copsa 등.

17) Byz א C W ita b h vg syrp c cops meg bo arm Justin Diatessaron 등.

18) Byz C D ita d h vg syrs c copsa-mss meg arm geo Origen 등.

19) Byz C (W syrp) 등.

20) Byz C D* W it(d) vg syrp arm Diatessaron 등.

21) Byz C D W itb ff2 h vg syrp c copsa bo Diatessaronarm 등.

22) Byz C D W itd ff2 h vgcl syrp c s copsa meg bo arm Diatessaronarm Origen 등. 

23) Byz א C (D) W ita b (d e) ff2 h vg copmeg? Origen 등.

24) Byz C D ita b d e ff2 h vg syrp syrc s arm geo Origen 등.

25) Byz (C W copmeg bo) arm geo 등.

26) ‘간질을 앓다’는 원어(셀레니아조마이 selhniavzomai)는 ‘미치다’ (KJV, NASB), ‘간질을 앓다’(ASV, BDAG), ‘발작을 일으키다’(NIV)는 뜻이다.

27) Byz C D W ita b d e ff2 vg syrp s 등이 그러함.

28) Byz C D W ita b d ff2 vg (syrp) cop(meg) arm Diatessaron Origen 등.

29) Byz D W ita (b) d ff2 n vg syrp c arm geo Diatessaron 등에 있다.

30) Byz D (W) ita b d e ff2 vg syrp c s copbo-pt meg arm 등.

31) Byz B W vg syrp arm Origenlat 등.

32) Byz C W itb ff2 vg syrp c s copsa meg arm Justin Origen 등에 있음.

33) Byz C W syrp copsa bo-ms Justin 등에 있음.

34) Byz C D W it vgcl syr cop arm Origen 등에 있음.

35) Byz א C W ith vg syrp copsa bo arm 등에 있음.

36) Byz א C D W ita d e vg syrp c s copbo arm 등에 있음.

37) Byz C* W syrp 등에 있음.

38) Byz C* W syrp (c) (copbo-mss) 등에 있음.

39) Byz C D W itb d e ffe h n vg syrp c s copmeg bo-pt arm geo 등에 있음.

40) Byz C D W ita d e ff2 h vg syrp c 등.

41) Byz א* C* (D) W ita b d e ff2 vg syrp (c s) (copmeg) Origen 등.

42) Byz א W vg syrp s Origenlat 등.

43) Byz W itb ff2 vgcl (syrp c) copbo-mss Diatessaron 등에 있음.

44) Byz C syrp (vg syrs Clement) 등.

45) 매튜 풀, 성경주석, III, 113.

46) 오늘날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이단종파들은 유럽 50개, 미국 150개, 아시아 50개 등 도합 약 300개가 된다고 한다(박영관, 이단종파비판 II, 22쪽).

47) 기독신문, 1999. 5. 12, 5쪽.

48) 탁명환, 기독교이단연구, 61쪽.

49) Byz C (W vg) syrp copmeg arm Origenlat (Cyprian)에 있음.

50) 조선일보, 1995. 4. 28.

51) 조선일보, 2002. 7. 9, 13쪽.

52)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5판), 30-41쪽;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1-64쪽.

53)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5판), 153-158, 168-177쪽.

54) J. M. Kik, Matthew Twenty Four, pp. 53, 57; 박윤선, 신약주석 공관복음 (하), 728쪽에서 재인용.

55) Byz W vg syrp s copsa bo 등은 ‘아들도’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음.

56) Byz A C D W itd vg syrp 등에 있고, 16절에는 ‘바로’라는 말이 없음.

57) Byz A C D W ita d ff2 vg syrp s copsa bo arm Irenaeuslat Origenlat Diatessaron 등에 있음.

58) Byz A C W syrp 등에 있음.

59) Byz A (D) W it syr(s) 등이 그러함.

60) Byz (A) C D (W) it vg (syrs) 등이 그러함.

61) Byz A C W ita b ff2 h vg syrp (copbo) arm Origenlat 등에 있음.

62) Byz A C W ita b d ff2 h vg arm Origenlat 등에 있음.

63) Byz א A W ith vg syrp copsa-mss meg bo arm 등에 있음.

64) Byz A W syrp 등이 그러함.

65) Byz A W ita b ff2 h vg syrp s copmeg bo arm Origenlat 등에 있음.

66) Byz A C W syrp copbo 등에 있음.

67) Byz A C D W ita b d ff2 h vg syr(p) 등이 그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