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회개치 않으면 망함
1-5절, 회개치 않으면 망함
[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 . . .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였다. 아마 이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올라와 제사하던 중에 로마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므로 그들의 피가 그들의 제물에 섞였던 것 같다. 그들은 어떤 큰 죄를 범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2-3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하나님께서 큰 죄인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벌하시는 경우들도 있으나, 오히려 참으시고 내버려두시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당한 재난을 보고 저가 큰 죄를 지었다고 성급히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당한 재난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여 교훈을 삼고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교훈의 중심이다. 구원은 결코 회개 없이 받는 구원이 아니다. 회개는 죄를 깨닫고 버리는 것이다. 구원은 반드시 회개를 동반한 믿음을 통하여 받는다. 회개는 구원에 절대필수적이다. 죄를 회개치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장 3절은 바르게 말하기를, “회개는 모든 죄인들에게 매우 필수적이어서 아무도 그것 없이는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하였다.
[4-5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시온산 기슭에는 ‘실로에’ 혹은 ‘실로아’라는 이름의 작은 샘이 있다. 거기에 있던 망대가 무너지므로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었다. 그들은 아마 샘물에 몸을 씻으려고 왔다가 그런 일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우연처럼 보이는 일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날에 자동차 사고, 열차 사고, 비행기 사고, 화재, 붕괴 사고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데, 그것도 다 그러하다.
우리는 이런 일들로 죽은 자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그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를 교훈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필립 헨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에 대해 많이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만일 내가 강단에서 죽는다면 회개를 설교하다가 죽기를 원하며, 만일 내가 강단 밖에서 죽는다면 그것을 실천하다가 죽기를 원한다”라고 했다.67) 모든 사람은 다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다 멸망하고 만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를 회개해야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한 모든 죄를 다 깨닫고 다 버리자.
6-9절, 열매를 못 맺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6절]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 . . .
예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이 비유는 앞에서 하신 회개에 대한 말씀과 연결된다. 무화과 열매는 회개의 열매를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님 전에 일했던 세례 요한도 강조했던 내용이었다. 그는 무리에게 말하기를,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 .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하였다(눅 3:7-9).
회개의 열매는 죄악된 행실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세상은 하나님보다 돈과 쾌락을 더 사랑하고 악하고 음란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지 경건한 말이나 모습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의 변화와 변화된 삶이다. 좋은 열매는 경건하고 선한 삶을 가리킨다.
[7절]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 . . .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과원지기는 말씀의 사역자들을 가리킨다. 3년은 하나님께서 각인을 위해 정해두신 기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 동안 그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3년은 짧지 않은 기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열매를 맺지 않을 때 땅만 버리도록 계속 그를 그냥 버려두지는 않으실 것이다. 열매를 못 맺는 무화과나무가 땅만 버리듯이, 회개치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만 미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를 심판하실 것이다.
[8-9절]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 . .
과원지기는 대답하였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과원지기는 1년의 기간을 더 허락해주시면 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특별히 관리해보겠다고 요청하였다. 그 특별관리란 그를 향한 더욱 강력한 말씀의 교훈과 책망과 훈련을 가리킬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육체적, 환경적 시련도 포함될 것이다. 연장된 1년 후에는 두 가지 결과가 남을 것이다. 회개의 열매를 맺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받고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영히 버림을 당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6:9-10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또 갈라디아서 5:19-21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회개는 열매로 나타난다. 그것은 변화된 삶이다. 불경건과 부도덕에서 경건과 하나님 사랑, 거룩, 의, 선, 진실로 변화된 삶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정하신 기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나 그 기간이 끝나면 마지막 심판이 있고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게 될 것이다.
10-17절, 18년 동안 꼬부라진 병자를 고쳐주심
[10-11절]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8년 동안을 . . . .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는 아직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셨다. 장차 구약의 토요일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폐지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 신약의 주일로 바뀔 것이다. 또 그는 회당 집회에 참석하셨다. 회당은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에 생긴 유대인들의 예배당이었다. 예수께서나 사도들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때는 아직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가 구별되기 전이며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가 명확히 나뉘기 전이었다.
그때 거기에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프뉴마 에쿠사 아스데네이아스)[질병의 영을 가지고 있었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다. 이것은 이 여인이 18년 동안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한 것이 귀신의 활동이었음을 나타낸다. 악령들은 이 세상에서 불경건하고 악하고 불행한 일들의 배후에 역사하고 있다. 에베소서 2:2는,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한다. 이 여인은 오랫동안 이 질병으로 고생하였다. 그러나 이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고침을 받을 때가 왔다.
[12절]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 . . .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부르셨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느니라.” 그 여자가 소원하기 전에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부르셨다. 물론 이 여자가 마음 속으로 자신의 병고침을 소원했을 것이다. 그는 아마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병고침을 요청할 용기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셨던 경우처럼 요청받지 않으신 때에 긍휼을 베푸셨다. 많은 경우에는 그가 병자들의 소원을 들으시고 긍휼을 베푸셨으나 이 경우는 그가 말로 표현된 소원을 들음이 없이 긍휼을 베푸신 것이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느니라.” ‘여자여’라는 말(귀나이)은 성인 여자를 부르는 일반적 호칭이었던 것 같다(요 19:26). ‘네가 네 병에서 놓였느니라’는 말씀은 병을 치료하시는 그의 권위있는 말씀의 선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권위있는 선언이었다. 그 권위 있는 말씀은 곧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드러내었다.
[13절]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안수하실 때 그 여자는 곧 몸을 폈다. 18년 동안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했던 그의 몸은 즉시 펴졌다. 하나님의 능력은 눈으로 볼 수 있게 전달되었다. 예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예수께서 중한 열병으로 앓았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을 때도 그가 곧 일어났었고(눅 4:39) 친구들이 데려왔던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을 때도 그가 곧 일어났었다(눅 5:25). 이 경우도 그 여자는 곧 몸을 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을 보면, 그 여자에게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되었던 이 여인은 이제 그 매임과 그 질병에서 해방되었다. 이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이 증거되었다.
[14절]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 . . .
회당의 책임자인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말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그의 태도는 겉보기에는 안식일을 존중하며 철저히 지키는 것 같았으나, 그에게는 무지와 완악함이 있었다. 그는 방금 예수께서 메시아이신 증거를 보았으나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회당 예배를 인도하는 그의 수고는 무의미하였다. 사람의 종교적 직분과 활동은 그의 내면적 경건과 직접 관계가 없는 것 같다.
[15-16절]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 . . .
주께서는 대답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18년 동안 사단[사탄]에게 매인 바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그 회당장과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에도 자기들의 소나 나귀를 마구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면서 이 불쌍한 여인을 그 오랫동안의 사탄의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성경은 교회에서 제명출교되는 것을 사탄에게 내어준다고 표현하고(고전 5:5) 또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흑암의 권세에서 살았다고 표현하고(골 1:13) 또 온 세상은 악한 자 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표현하였다(요일 5:20). 그 여인은 소나 나귀보다 귀한 인간 영혼이었고 더욱이 ‘아브라함의 딸’ 곧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으나 오랫동안 사탄이 준 질병으로 고생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고침을 받았고 사탄에게서 놓임을 받았다.
[17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 . .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였고 모든 사람들은 그의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였다. ‘그의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들’이란 방금 전에 그가 병을 고치신 일과 그의 바르고 지혜롭고 은혜로운 말씀들을 가리킬 것이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우리는 과거에 죄와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과 자유함을 얻었다.
18-21절,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심
[18-19절] 그러므로[또 그는]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 . . .
그러므로[또 그는](전통본문)68)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정원]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세계이다. 그것은 사탄과 죄와 죽음의 권세가 없는 세계이다. 그것은 병고침을 받았던 한 여인과 같이 죄인들이 사탄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들어가는 세계이다. 비록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마귀의 시험과 장난이 없지 않지만,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안에 있으며 신자는 그것을 능히 이긴다(롬 8:35-39). 천국은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며 인류 역사의 한 종착지이다. 그것은 성도들의 소망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원에 심기운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셨다. 그는 심기운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정도가 되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작은 세력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자라고 확장되며 마침내 크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과연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 곧 구원받은 영혼들로 구성된 신약교회는 매우 작은 무리로 시작하여 점점 자라 지금은 온 세계에 가득한 단체가 되었다.
[20-21절]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또 누룩에 비유되었다. 누룩은 보통 악과 그 영향력을 비유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비유되었다. 뱀이 일반적으로 사탄을 비유하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워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마 10:16), 그는 누룩을 ‘하나님의 나라’에 비유하셨다. 여기에서 누룩은 퍼져나가는 것, 즉 확장성을 가리켰다. 누룩을 반죽된 가루 서 말 속에 두면 반죽 전체가 부풀게 되는 것처럼, 미미하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마침내 온 세계에 퍼져 거대한 교회를 이루며 온 세계를 새롭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작게 시작되었으나 점점 켜져서 마침내 온 세상에 퍼지는 큰 나라가 되었다. 그것이 기독교 구원 운동과 교회 운동이다. 그것은 인간적 계획과 수단방법으로 무엇을 이루려는 운동이 아니다. 인류의 구원운동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 시작되고 점점 확장되어 온 세계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고 성경 교훈대로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바르게 믿고 살면서 천국을 사모하며 이 복음을 만민에게 전파하자!
22-30절, 구원받는 자와 제외되는 자
[22-24절]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 . . .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며 가르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다. 우리도 교회에 모여 오는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어디서든지 기회 있는 대로 가서 말씀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그는 이 구절을 포함하여 본문 전체에서 몇 가지 진리를 말씀하셨다.
첫째로,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며 우리가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그 좁은 문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의 보내신 유일한 구주이시다. 예수님 외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할 다른 구주가 없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둘째로, 구원에서 제외될 자들이 많을 것이다. 마태복음 7:13-14에서도 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만인구원설은 거짓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멸망할 것이다. 노아 시대에 노아의 가족 8명 외에 모든 사람들은 다 홍수로 멸망하였다.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에도 여호수아나 갈렙이나 다윗같이 경건하고 의롭게 산 자들은 소수이었다. 오늘날도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믿고 따르는 자들은 적은 무리인 것 같다. 많은 이들이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
[25-27절]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셋째로, 구원의 문은 닫힐 때가 올 것이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을 때가 올 것이다. ‘집 주인’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켰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 곧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계 3:7)이시다. 천국문은 지금 열려 있으나 항상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이 닫힐 때가 있다. 문이 한 번 닫힌 후에는 아무도 그리로 들어갈 수 없다. 마치 노아 방주의 문이 닫힌 후에는 아무도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과 같다.
넷째로,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집주인은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하였다. ‘어디로서’라는 말은 문자적 의미는 장소를 가리키지만, 담겨진 의미는 근원을 가리킨다. 물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므로 우리가 천국 가려면 다른 근원이 필요하다.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3, 5). 또 주인은 그들을 ‘행악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 행악자는 천국에서 제외될 것이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 영원한 멸망을 받는 이유는 회개치 않은 죄 때문이다. 회개는 거듭남의 증거이다.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사람은 거듭나서 죄를 회개해야 구원을 얻을 것이며 구원받은 자는 의와 사랑으로 그 구원을 증거할 것이다.
다섯째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것이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에게서 떠나야 한다.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 간의 분리는 불가피하다. 죄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지 못한다. 시편은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라고 말씀하였다(시 5:4-6).
[28-29절]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여섯째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큰 불행을 당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 그리고 동서남북에서 온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천국 잔치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밖으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고 더 이상 그의 작은 긍휼도 받지 못할 것이며, 그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지옥 형벌을 가리킨다.
[30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 . . .
예수께서는 또 “보라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일곱째로, 먼저 복음을 받은 자들도 멸망할 수 있다. ‘나중된 자’는 이방인을 가리키며 ‘먼저된 자’는 유대인을 가리키겠지만, 이 말씀은 또한 먼저 믿은 자와 나중에 믿은 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구원에는 순서가 없다. 복음을 먼저 들었으나 구원받지 못하는 자도 있고, 복음을 나중에 들었으나 구원받는 자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좁은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거듭났는가?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점검하고 선행으로 그것을 확인하자. 구원의 문이 닫힐 때가 올 것이며 많은 이들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31-35절, 예수님을 죽이려 함
[31절] 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 . . .
곧 그때에[그 날에](전통본문)69)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 말하였다.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여기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안디바로서 당시 갈릴리 지방을 관할하고 있었다(눅 23:7). 예수께서는 아직 갈릴리 지방에 계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피신시키려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도 예수님을 환영치 않으므로 배척한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헤롯이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지 않고 배척했다. 그러나 주를 진실히 믿는 자들은 그를 영접하며 가까이 할 것이다.
[32절]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예수님은 세상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그는 선지자적 권위를 가지고 헤롯을 ‘저 여우’라고 부르셨다. 여우라는 말은 그 간교함과 잔인함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오늘과 내일’은 ‘명확하지 않은 얼마간의 기간’을 가리킨 것 같다. 즉 ‘헤롯의 죽이겠다는 위협 속에서도 내가 얼마 동안 좀더 나의 일을 계속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제3일’은 ‘얼마 있지 않아서 곧’이라는 뜻일 것이다. ‘[내가] 완전하여지리라’는 원어(텔레이우마이)는 ‘내가 완전하여지리라’는 뜻 외에 ‘내가 목표에 이르리라’(NASB, NIV)는 뜻이 있다. 그것은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의 대속(代贖)의 사명을 다 이루실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에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33절]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는 그런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가셔야 할 사명의 길을 가셨다. 바울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했다(행 20:24).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 예수께서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계 2:10).
[34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루살렘은 많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에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쳤었다. 이제도 헤롯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한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 특히 유대 지도자들은 그를 죽이려 하였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여러 번 모으려 하였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바로 이스라엘의 목자이심을 증거한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그는 여러 번 이스라엘을 품으려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원치 않고 그를 거절했다.
구약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약교회도 타락하고 배교적이었던 때가 종종 있었다. 중세시대의 로마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신실한 많은 종들과 성도들을 고문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단체가 되었었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과거의 그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 적이 없다. 천주교회의 기본적 교리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 많은 개신교회들은 또다시 타락하여 배교(背敎)의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이 포용하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들은 역사상 가장 이단적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교회처럼, 오늘날 교회들은 또다시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과 보수 신앙의 증언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의 신앙의 순수성은 점점더 약화되고 있는 것 같다.
[35절]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그는 예루살렘 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셨다. 이 예언은 우리가 아는 대로 주후 70년 로마 장군 디도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 성취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였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또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예언과 더불어 자신의 다시 오심에 대해 말씀하셨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란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가리켰을 것이다.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려고 다시 오실 것이다. 히브리서 10:37, “잠시 잠깐 후에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31절로 35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교회를 거절하고 핍박하고 죽이는 자가 되지 말자. 예수께서 사랑으로 부르실 때 그의 음성에 응답해 그에게로 나아오자. 거기에 참 평안과 영생이 있다. 또 우리는 세상의 핍박자들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직분을 완수하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룰 때까지 우리는 어떤 환경 여건 속에서도 변함 없이 충성해야 할 것이다.
14장: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
1-6절, 고창병 환자를 고쳐주심
[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 . . .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한 우두머리의 집에 떡을 잡수시러 들어가셨다. 그는 그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거절치 않으셨다. 그는 죄인들과 접촉하기를 꺼리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 영혼을 구원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자들에게 필요하듯이, 의인들에게는 구주가 필요치 않고 죄인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눅 5:31).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엿보고 있었다. ‘엿보다’는 원어(파라테레오)는 ‘자세히 주시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그를 환영하고 영접할 것이지만, 사람이 그를 오해하고 시기하고 미워한다면 그를 거부하고 주시하고 경계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 대신에 오해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2-4절]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 . . .
거기에 주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었다. 고창병(dropsy)은 수종(水腫) 혹은 부종(浮腫)이라고 하는데 몸이 붓는 병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안식일에 그 병자를 고쳐주실 것인지 질문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시며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잠잠하자,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치시고 보내셨다.
얼마 전에 예수께서는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몸이 꼬부라져 펴지 못하던 여자를 역시 안식일에 고쳐주셨는데(눅 13:15-16) 이번에는 고창병 환자를 고쳐주셨다. 주께서 고창병 환자를 고쳐주신 것은 그의 크신 긍휼 때문이며 또 그가 신성(神性)을 가진 구주이심을 증거한 것이었다. 안식일이라는 종교적 규례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인애(仁愛)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호 6:6). 바리새인들은 종교 의식만을 중시하는 무지한 외식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의식이나 형식보다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이 훨씬 더 중요하다.
[5-6절]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 . . .
예수께서 또 그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함을 그렇게 표현하셨다. 그는 지난 번 사건에서도,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었다(눅 13:15-16).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은 이렇게 상식적 추론으로도 그 정당성이 이해되는 일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생각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일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신앙 생활의 더 중요한 내용, 즉 경건과 도덕성을 중시하지 아니하고 단지 종교적 형식만을 붙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안식일 혹은 주일을 지킨다는 생각 때문에 영혼을 구원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는 더 중요한 일을 빠뜨리거나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종교적 형식이나 규례보다 하나님의 도덕적 명령 즉 의와 선과 진실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그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7-11절, 자기를 낮출 것
[7-10절]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 . . .
예수께서는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상석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상석에 앉으려 하는 마음은 일종의 이기심과 명예심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상석에 앉으려 하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교훈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서 겸손하게 처신하라는 교훈이시다. 그것은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존귀케 되는 길이기도 하다.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 . . .
예수께서는 또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명하신 성도의 매우 중요한 덕이다. 잠언 18:12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했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했다(벧전 5:6). 교만은 다툼의 원인이기도 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람을 낮아지게 만들지만, 사람이 겸손하면 다른 사람과도 화평케 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높임과 사랑을 받는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려 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자. 그것이 마땅하며 또 그것이 그가 존귀케 되는 길이기도 하다.
12-14절, 어려운 자들을 대접할 것
[12절]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 . . .
예수께서는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富)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선을 베푼 후 상대방에게서 그 선의 갚음을 받으면 먼저 베푼 선이 더 이상 칭찬과 상을 받을 선이 되지 못할 것이다.
[13-14절]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잔치를 배설하거든[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불구자들]과 [발을]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우리는 세상에서 단순히 베푸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그러면 의인들의 부활의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칭찬과 보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는 생활이다(눅 12:33-34).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갚아 주실 것이다(잠 19:17). 이렇게 단순히 베푸는 생활은 사람이 내세를 바라볼 때만 가능하다. 내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하나님의 보응과 보상을 바라볼 때,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의롭고 정직하고 선하게 살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오해와 비난을 받을지라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갈 6:9-10).
우리는 현세의 육신적, 물질적 복만 생각하지 말고 내세에 천국에서의 영육의 영원한 복을 생각하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소망하고 그의 뜻과 계명을 즐거이 순종하여 이 세상에서 단순히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되, 특히 병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선을 베풀자.
15-24절, 큰 잔치의 비유
[15-17절]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 . . .
함께 먹는 사람들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원문에는 16절 초두에 “그에게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다. 그 식사 자리에서도 예수님의 관심은 단지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고 진리를 가르치시는 일이었다. 주께서는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다. 이 비유에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시며 그가 베푼 ‘큰 잔치’는 신약교회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세상에 사는 모든 이방인들도 초청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다. 그것은 성찬 교제이며 성도들 간의 식탁 교제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먹는 즐거움을 누린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그 잔치에 청하셨다. 그는 그 청한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말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주인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꾼으로서 본문에 4번이나 언급되는(17, 21, 22, 23절) ‘종’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을 상징할 것이다.
[18-20절]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 . . .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다 일치하게 사양하였다. 하나는,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또 하나는,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또 하나는,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들의 핑계거리는 사람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일들이었다. 성경도 이런 일들에 대해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한다. 그러나 잔치에 초청을 받았던 그들은 먼저 그 잔치에 참여해야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이것이 안식일 계명이나 십일조 계명의 정신이다. 성도는 7일 중 하루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6일을 자신의 일들에 쓰며,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10분의 9를 자신의 일들을 위해 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그 주인을 무시하였다. 그들이 그 잔치에 참석한다고 해서 밭의 일을 하지 못하거나 소를 시험하지 못하거나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그 초청을 사양하였다. 예수 믿는 자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고 가난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안식일을 지키는 자에게는 복된 약속을 주셨다(사 58:14). 믿는 자들은 십일조 헌금을 내기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십일조 헌금에는 풍성한 복이 약속되어 있다(말 3:10). 그러나 믿음 없는 자는 그 어느 것도 실천할 수 없다.
[21절]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 . . .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말했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불구자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이것은 우리의 이웃 사람들 가운데서 육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들을 데려오라는 뜻이다. 건강한 자들과 물질적으로 여유를 가진 자들은 그 주인의 잔치 초청을 거절하였으나, 병약한 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은 그 초청을 들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육신적으로 병약한 자들이 먼저 교회로 인도함을 받고 먼저 천국의 복을 받게 하셨다.
[22-24절]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 . . .
종이 말했다.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말했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산울가’라는 원어(프라그모스)는 ‘산울타리 가의 길’을 가리킨다. 여기의 ‘내 집’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며 현재의 교회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저절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전도하고 사람들을 강권함으로 된다. 잔치 자리에 오는 것은 바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을 가리킨다. 처음 잔치 초청을 거절하였던 사람들은 그 잔치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빼앗길 것이다.
15절로 24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일들이 바쁘다고 핑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 곧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행하는 일을 세상일들보다 먼저 앞세워야 한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초청을 해야 하고 사람들을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워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초청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언제까지 연연하지 말고 우리의 초청 대상을 변경하고 확대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우리 주위에 가난한 자들이나 병약한 자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초청해야 한다. 또 우리는 다른 동네에 있는 사람들도 누구든지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집을 채우는 일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열심으로 전도하고 영혼들을 강권하여 참된 교회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된 잔치 자리로 인도해야 한다.
25-35절,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25-27절]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 . . .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 때 예수께서는 돌이키시며 말씀하셨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과 함께 간다고 다 그의 제자인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도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와 제자 아닌 자를 분명히 구별하여 말씀하셨다. 그는 그에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믿음은 가족 관계를 초월한 절대적 차원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물론, 주의 말씀은 가족들을 미워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른 곳에서 가족을 사랑해야 할 것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본문에서 ‘미워한다’는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가족에 대한 의무가 충돌하거나 하나님의 명령과 가족의 명령이 충돌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택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가족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우리 목숨이 위협 당하는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신앙의 정절과 절개를 지켜야 한다.
신앙은 절대적 차원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자이시다. 아무리 사랑스런 가족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영생을 주지는 못한다. 사실상 육신의 생명도 연장시켜주지 못한다. 불치병에 걸린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가족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과 구원이시다.
우리가 가족에 대한 의무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목숨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한다면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 차원에서 믿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이며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현실에서 자기를 부정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고난의 현실은 자기 부정의 시험대요 훈련장이다. 성도는 현실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주를 따라야 한다. 그것은 주의 말씀과 본을 따라 사는 것을 가리킨다.
[28-30절]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사람은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먼저 그 비용을 예산하여 그 일이 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시작해야지, 그런 검토가 없이 그냥 시작하면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중도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31-32절]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서 저 이만 명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자신의 군사력이 상대방보다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처음부터 전쟁을 시작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군사력을 비교해보지 않고 어리석게 전쟁을 일으킬 자는 없을 것이다.
[33절]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께서는 또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위의 두 비유가 암시하는 바는, 사람이 자기의 가진 것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망대를 건립하는 것과 다른 나라와 전쟁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비유되었고, 건축비용을 예산하는 것과 전투력을 비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영생을 위해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 사람은 자기의 가진 것으론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시편 49:8은, “저희 생명의 구속(救贖)이 너무 귀하여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가진 것과 힘으로는 불가능한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버리면 얻는다는 것은 역설적인 진리이다. 우리는 일시적 세상을 버리면 영원한 천국을 얻으며,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면 썩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을 영원한 영광의 세계의 행복을 얻는다. 우리는 썩어질 육신의 몸을 버리면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얻으며, 세상적 기쁨을 버리면 비록 현재는 때때로 주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만 장차 영원히 눈물 없는 기쁨과 평강의 세계를 얻는다.
[34-35절]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소금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상징하고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그들이 성도답게 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이나 자신을 부정하거나 초월하지 못하고 세상에 얽매이고 자기 욕심에 얽매여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 자는 실상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이며 참된 성도가 아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요한일서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다가 주를 배신하였고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다(딤후 4:10). 우리는 맛 잃은 소금 같은 교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참된 성도,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께 나오는 무리 중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 제자는 자기 가족들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우리 가족을 사랑해야 하지만, 만일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가족에 대한 의무가 충돌한다면, 우리는 하니님께 대한 의무를 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우리의 절대적 가치이시고 우리의 영생이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며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참 신앙이요 참 제자의 길이다.
15장: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심
1-10절, 잃은 양, 잃은 은전(銀錢)
[1-2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 . . .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실 때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에게 가까이 나아와 말씀 듣기를 원하였다. 당시에 죄인들로 알려진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과 영혼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원망하여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관심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을 그들의 죄를 용납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단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과 접촉하셨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그들을 회개시키며 구원하기를 원하셨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위를 가지고 자신들이 자유주의자들이나 천주교인들과 함께 전도대회를 여는 일을 합리화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적용이다.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오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배교자들과 함께 집회를 인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며 그것은 옳지 않은 방법이며 행동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런 방법으로 전도하지 않으셨다.
[3-6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한 비유로 말씀하셨다. 우리는 비유를 이해할 때 그 중심적 진리를 붙드는 것이 중요하다. 비유를 풍유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풍유적 해석은 비유의 모든 세밀한 부분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비유 해석에서 지나친 추측이나 상상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경은 수수께끼 같은 책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읽고 깨달을 수 있는 책이다. 성경에 어려운 구절이 없지 않지만, 그 중심적 주제와 교훈은 명료하여 성경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잃은 양의 비유라고 부르는 이 비유에서 보이는 바는 세 가지다. 첫째는 양들의 주인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주인이 그 양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찾도록’이라는 원어(헤오스 휴레 아우토)는 ‘찾을 때까지’라는 뜻이다. 주인은 그 양을 조금 찾아본 정도가 아니었고 찾을 때까지 끈질기게 찾았고 마침내 찾았다. 셋째는 주인이 그 양을 찾은 후 매우 기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의 기쁨을 자기 혼자만 가질 수 없어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함께 나누었다.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것이 이 비유의 중심적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원받은 모든 자들보다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우리도 이런 심령을 가져야 한다.
[8-10절]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두 번째 비유인 잃은 은전(銀錢)의 비유도 동일한 진리를 나타낸다. 드라크마는 헬라 화폐로서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과 같은 가치이며 그것들은 다 은전(銀錢)으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의 가치이었다. 이 비유에서 한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귀하게 여겼고 그것을 찾기 위해 열심히 애써 마침내 찾았고 그것을 찾았을 때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모아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 기쁨이 된다.
1절로 10절까지의 두 비유 즉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은전(銀錢)의 비유는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낸다. 첫째는 한 사람의 영혼을 귀히 여기시는 것이다. 둘째는 잃어버린 한 영혼 즉 회개해야 할 한 죄인을 열심히, 부지런히, 끝까지 찾으시는 것이다. 셋째는 죄인 한 명의 회개를 크게 기뻐하시는 것이다.
만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 드시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며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한 명의 영혼을 귀히 여기시고 그를 찾기 위해 불붙는 심령을 가지고 계시고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들 아흔 아홉보다 더 기뻐하고 즐거워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자.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열심히, 부지런히, 끝까지 힘쓰자. 국내에도 해외에도,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자. 또 주께로 돌아오는 한 명의 영혼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기뻐하자.
11-32절, 탕자의 돌아옴
[11-13절]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로 말씀하셨다. 세 번째 비유는 잃은 아들, 곧 탕자의 비유이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아버지는 그 재산을 각각 나눠주었다. 그런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은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갔고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였다.
이 둘째 아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류의 모습를 나타낸다. 인류는 자기의 자유 의지로 창조주 하나님을 멀리 떠나갔다. 그는 하나님의 간섭을 원치 않았고 자신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였다.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며 재산을 낭비하였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좋은 것들, 지혜와 재능, 시간과 건강과 재물을 허비하는 삶을 살고 있다.
[14-16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 . . .
둘째 아들은 그가 가진 재산을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다. 그는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살았다. 집주인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주는 자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허랑방탕한 삶을 미워하신다.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불성실한 자들에게 큰 흉년을 내리신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기근이거나 질병, 전쟁, 지진, 화재, 교통 사고, 실직, 가정 파탄 등의 불행을 가리킨다. 그 결과, 인류는 궁핍해지고 낮고 비천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떠난 생활은 얼마 동안 즐거움을 주는 듯했으나 곧 불행으로 드러났다.
[17-19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 . . .
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말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원문은 ‘그가 자신에게 왔을 때’라는 말로서 제 정신이 들었다는 뜻이다. 큰 흉년은 하나님의 재앙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는 궁핍 속에서 제 정신이 들었다. 바른 생각과 깨달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궁핍이 그에게 불행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 궁핍을 통해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되었고 또 자신이 돼지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낮고 비천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탕자는 또 몇 가지를 더 깨달았다. 첫째로, 그는 자기 아버지 집의 부요하였음을 기억하였다. 둘째로,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셋째로, 그는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아버지께 그렇게 고백하겠다고 생각했다. 넷째로, 그는 자신이 아들의 자격이 없고 일꾼으로 여겨달라고 하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회개할 때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자신의 빈곤함을 깨달으며 또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이므로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한 자요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기보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깨닫는다. 이런 바른 깨달음은 구원의 정상적 과정이다.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걱가 . . . .
그 아들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그는 깨달은 대로 행했다. 바른 생각에서 바른 행동이 나온다. 이것이 회개다. 회개는 자신의 죄와 불행을 바르게 깨닫고 그것을 슬퍼하고 일어나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직도 상거(相距)[거리]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나타낸다. 아버지는 그를 겨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뜨겁게 맞아들였다. 그것이 회개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회개하는 죄인을 향한 그의 긍휼과 사랑은 지극히 크시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자기 독생자를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내어주셨다.
[21-22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 . . .
그 아들은 말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며 고백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뉘우침을 기쁘게 받았다. 그러나 그 아들이 자기는 이제 아들의 자격이 없다고 고백했을 때,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긴 것은 그가 그를 종으로가 아니고 귀한 아들로 인정한다는 표시이었다. 아버지를 떠나 아들의 자격을 포기했던 그에게 아들의 자격을 다시 준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포기하고 죄와 마귀와 사망에게 종노릇하였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죄인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과 특권을 다시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씻으시고 의의 옷을 입혀주시고 영광의 천국을 기업으로 주신다.
[23-24절]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 . . .
아버지는 또 말했다. “또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그들은 다 즐거워하였다. 본 비유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즉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로 인하여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여 잔치를 베풀고 먹고 즐거워하였다. 그의 기쁨의 이유는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이 마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과 같고 잃은 아들을 다시 얻은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심히 기뻐하신다.
[25-32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 . . .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었다. 종이 대답하였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그 아들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였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자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본문은 맏아들의 태도를 증거한다. 어떤 이들은 맏아들을 집안에 있는 탕자라고 해석하지만, 그것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본문은 그가 그 날도 밭에 있다가 돌아왔다고 표현하고 또 그의 고백에서도 그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기며 그의 명령을 어김이 없었다고 하였다. 또 아버지의 말에서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은 성실한 아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를 집안의 탕자라고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러나 그는 돌아온 자기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했다.
맏아들의 노한 마음은 이해할 만하였다.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며 성실히 여러 해를 보냈던 그에게는 염소 새끼 하나라도 주어 그의 친구들과 즐기게 한 일이 없었고 근검절약하며 성실하게만 살았던 아버지께서 재산을 탕진한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은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맏아들의 불평에 대해 아버지는 자신의 기쁨이 정당하다고 증거하였다.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고 인간미가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맏아들을 위하지 않았거나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목자가 양우리 안에 남아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미워하지 않았듯이, 또 여인이 주머니 속에 있는 아홉 개의 은전을 미워하지 않았듯이, 아버지는 결코 맏아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사실상 아버지의 모든 소유는 큰아들의 것이었다. 단지, 아버지의 현재의 기쁨은 잃었던 것 같은 둘째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기쁨인 것이다. 그 기쁨은 잃어버리지 않은 것에 대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명이 회개하면 천국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 명을 인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한 기쁨이 있다는 뜻이다(눅 15:7).
탕자의 비유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모든 사람은 다 회개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로 인해 얼마나 궁핍하고 비천해졌는지를 깨닫고 주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측은히 여기신다. 그는 그들을 영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과 특권을 회복시켜 주신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특히 죄인 한 명의 회개를 매우 기뻐하신다. 교회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교회에 나온 한 명의 영혼을 하나님의 기쁨의 심정을 가지고 기뻐하고 환영해야 한다.
16장: 돈을 사랑치 말 것
1-12절, 불의한 청지기
본문은 성경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들 중의 하나이다.
[1-7절]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 . . .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재산 관리인이다. 그런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렸다. 주인은 그를 불러 말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그 청지기는 해고한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말했다.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그가 “기름 백 말이니이다”라고 말하자,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고 말하였고, 또 다른 이에게 말하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그가 “밀 백 석이니이다”라고 말하자,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고 말하였다.
그 청지기가 생각해낸 방법이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빚을 임의로 감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가 해고된 후에 그들이 그를 그들의 집으로 영접해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하나씩 불렀고, 기름 백 말을 빚진 자에게는 오십 말로 감해 주었고 밀 백 석을 빚진 자에게는 팔십 석으로 감해 주었다. 이것은 기왕의 그의 불성실에 더하여 주인의 재산에 더욱 더 큰 손해를 끼친 일이었다.
[8절]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 . . .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자기 멋대로 처리했으니 옳지 않은 청지기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 주인은 그 청지기가 지혜 있게 행하였다고 칭찬하였다. 그것은 주인의 재산을 바르게 잘 관리했다는 뜻이 아니고, 그 청지기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머리를 썼다는 뜻이다. 물론 그 청지기의 지혜는 선한 지혜가 아니고 세상적인 지혜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덧붙여 말씀하셨다고 본다.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어려운 구절이다. ‘재물’이라는 원어(마모나스)는 ‘재물, 재산, 부(富)’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왜 재물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표현하셨는가? 그것은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돈뿐 아니라 시간, 건강, 재능, 생명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내 것처럼 생각하고 내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주께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불의한 청지기와 비교하여 말씀한 것이다. 인간의 세상 생활은 청지기의 생활과 같다. 우리는 어느 날 이 세상을 떠나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축내는 불의한 방식으로 빚쟁이들에게 선심을 써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가지고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재물로 하나님의 일에 힘씀으로써 하나님과 친근해지면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또 우리가 재물로 구제와 선행에 힘씀으로 믿음 안에서 가난한 형제들과 친근해지면, 우리의 구제와 선행으로 도움을 받은 가난한 성도들은 천국에서 우리를 기쁘게 대하며 영접할 것이다. 이것은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19-21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녹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녹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전도와 구제를 위해 헌금하며 돈을 쓰는 것을 말한다(눅 12:33; 딤전 6:17-19).
[10-12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주의 말씀에, ‘지극히 작은 것’은 세상의 재물을 가리키며, ‘큰 것’은 천국의 보화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천국의 보화와 비교할 때 세상의 재물과 부(富)는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다. ‘불의한 재물’도 땅의 재물을 가리키며, ‘참된 것’은 천국의 보화를 가리킬 것이다. 이 세상의 부와 재물은 헛되지만, 천국의 보화는 참되다.
또 주의 말씀에, ‘남의 것’도 세상의 재물을 가리키며, ‘너희의 것’은 천국에서 받을 부(富)와 영광을 가리킨다고 본다. 세상의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단지 청지기처럼 하나님의 것을 맡은 것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장차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히 누릴 영광스런 기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주께서 교훈하고자 하시는 바는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바른 물질 생활에 대해서이다.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같이 주인의 물질을 낭비하지 말고 충성된 청지기같이 물질을 바르고 성실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전도와 구제를 위해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재물을 바르고 성실하게 사용할 때,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더 큰 것, 참된 것, 영원히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을 받으며 누리게 될 것이다.
1절로 12절까지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성도들의 바른 물질 생활에 대해 교훈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물질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의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돈뿐 아니라, 우리의 시간, 우리의 건강, 우리의 재능, 우리의 생명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내 것처럼 생각하고 내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낭비하는 것이며 불충성된 일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로 알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 그의 뜻대로 바르고 성실하게 사용해야 한다.
성경에 계시된 대로, 전도와 구제를 위해 물질을 보관하고 사용하는 것은 바로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힘과 건강으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근검 절약하여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로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일과 우리 주변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에 후하게 사용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선하고 충성된 청지기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바르게, 선하게 사용하자.
13-18절, 온전한 도덕 생활
주께서는 사람의 물질욕과 명예욕과 정욕에 대해 말씀하신다.
[13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 . . .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본절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한 결론과도 같다. 집의 종들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한 사람을 미워하는 셈이 되고 한 사람을 중히 여기면 다른 한 사람을 경히 여기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며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9:23; 14:26, 33). 또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했다(딤전 6:9-10). 또 사도 요한은 신자들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하였다(요일 2:15). 우리는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겨야지 세상이나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 . . .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을 듣고 그를 비웃었다. 물질욕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고 완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라도 배척하고 멸시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배척하고 멸시하는 악한 태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었다. 오늘날도 사람이 물질욕을 가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배척하게 될 것이다.
[1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주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마음 속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뿐 아니라, 또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옳다고 여기는 마음과 사람들 중에서 높임을 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음을 보셨다. 그것은 교만과 명예욕이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 속에 있는 각양의 죄악된 마음의 실상을 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시며 선악 간에 판단하신다(삼상 16:7). 특히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다. 요셉이나 모르드개나 다니엘처럼 하나님께서 자연스런 상황을 주셔서 높임을 받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 거짓되게 혹은 정당하지 않게 높아지려는 마음은 교만이요 명예욕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높임을 받는 것을 ‘가증한 것’이라고 여기신다. ‘미움을 받는 것’이라는 말은 ‘미워할 만한 것,’ ‘가증한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주시지 않은 명예는 가증한 것이다.
[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 . . .
예수께서는 또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구별을 말씀하신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구약시대는 요한의 때까지이었다.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며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듯이 들어간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전도 사역을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셨다(마 4:17). ‘나라’ 혹은 ‘왕국’은 ‘통치’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사람들의 범죄로 죄와 마귀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특별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와 생명으로 시작되었다.
[17절]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주께서는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시대에 율법이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주께서는 율법의 한 획이 무효화되지 않고 다 성취될 것을 강조하셨다. 마태복음에서도 주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17-18). 그는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다 이루셨다(롬 10:4; 고전 1:30).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의롭고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롬 6:13).
[18절]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 . . .
주께서는 또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의 도덕적 결함의 다른 중요한 한 요소인 정욕의 죄를 지적하신다. 사람의 이 죄악성은 결혼 생활의 불성실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그것이 간음의 죄악이다. 또 남편에게 버리운 이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결혼 관계는 사람이 나눈다고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모든 이혼과 재혼을 정죄하는 말씀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32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말씀은 음행이 이혼의 합법적 이유가 됨을 보인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이혼의 합법적 이유이다. 또 사별(死別)한 경우나 합법적 이혼을 한 경우, 재혼은 합법적이라고 본다. 성경은 이혼이 아닌 별거(別居)를 정죄하지는 않는다. 부득이한 경우, 성도는 별거하여 살 수 있을 것이다.
13절로 18절까지의 말씀은 한 마디로 온전한 도덕 생활을 증거한다. 여기에 언급된 세 가지 주제인 돈과 명예와 정욕은 사람들을 죄악과 멸망으로 이끄는 요소들이며 성도들을 실패케 하고 멸망케 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물질욕과 명예욕과 정욕을 버려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돈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돈이란 합법적으로 버는 돈, 즉 직장에서 정당하게 받는 봉급 같은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며 근검절약하여 살아야 한다. 그 이상의 것을 원할 때 시험에 떨어지기 쉽다. 예를 들어 남편들은 직장에서 불의의 돈을 받게 되고 아내들은 무리한 직장 생활 때문에, 남편을 돕는 집안일이나 자녀 교육의 일을 다하지 못하는 결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 불행한 일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예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높이실 때까지 겸손히 우리의 처한 환경과 위치에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와 남편으로 만족해야 한다. 결혼한 이들은 결혼 관계를 복되게, 귀중하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며,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나 혼자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 형편과 처지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으며 생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범죄하게 되고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19-25절, 부자와 거지 나사로--사람의 죽은 후 상태
[19-21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 . . .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아마포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즐기며 살았다. 나사로라고 이름한 한 거지가 있었다. 그는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부스러기들](전통본문)70)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 하였고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 부자는 그 거지를 동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22-23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 . . .
어느 날 그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이다. 성도가 죽은 후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는 구약과 신약성경의 차이가 없다. 시편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누가복음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어느 날 그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매우 거창하고 호화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혼은 음부[지옥] 고통 중에 떨어졌다. ‘음부’는 때때로 ‘무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명백히 ‘지옥’을 가리킨다. 지옥은 악인이 죽은 후 그 영혼이 들어가는 형벌의 장소이다. 그는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본 것을 보면, 지옥은 낮은 곳에 있고 천국은 높은 곳에 있고 천국과 지옥 간의 거리는 매우 멀다. 선지자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리웠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도 하늘로 올리우신 것을 생각하면, 천국은 높은 하늘 위에 있는 곳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옥은 땅 아래의 어떤 곳이라고 생각된다. 그 곳은 아마 지구 속의 어떤 곳일지도 모른다. 화산을 통해 드러나듯이, 지구 속에는 매우 뜨거운 불이 있다. 지옥은 바로 그런 불못이다.
그 부자는 지옥에서 천국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고 또 아브라함과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옥에서 천국을, 또 천국에서 지옥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자가 지옥에서 천국의 광경을 본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허락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단지 교훈을 주는 가상적 이야기일 것이다.
[24절]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 . . .
그 부자는 아브라함을 불러 말하였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부자는 지옥에서 불꽃 가운데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지옥에는 뜨거운 불로 인한 심한 열기와 갈증,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있었다.
[25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 . . .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살았을 때’란 육신이 살았을 때를 말한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적이기 때문에 육신이 죽은 후에도 의식을 가지고 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았을 때 좋은 것들 곧 의식주의 풍요로움을 누렸었다. 그러나 그때 실상 그는 영적으로는 빈곤하였었다. 그는 하나님도, 그 계명도, 인생의 참 목적과 의미도 알지 못하고 단지 죄 가운데 낙을 누리며 살았었다.
한편, 거지 나사로는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았었다. 그는 육신적, 경제적 궁핍 속에서 살았다. 그의 몸에는 헌데가 있었고 먹을것도 부족한 거지이었다. 그는 의식주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는 자이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전체 문맥을 볼 때, 그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들 즉 구약성경을 알았고 믿었다. 물론, 세상에서 가난하면 자동적으로 성경을 믿고 내세에서 위로와 안식을 받는 것은 아니다. 거지 나사로는 아마 가난과 질병 속에서 자신의 허무함과 죄인됨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겸비하게 하나님을 찾았고 만났고 그를 믿고 의지하였을 것이다. 실상, 외적인 유여함보다 이것들이 인생에게 큰 복이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렸던 그 부자는 내세에서 고통과 고민 가운데 있었고,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했던 그 거지 나사로는 내세에서 위로와 안식을 누렸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이었다. 만일 내세에 공의의 보응이 없다면, 만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마지막 심판이 없다면, 인간 생활에서 도덕의 진정한 이유와 가치를 알 수 없고 세상의 도덕 질서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본문은 사람의 죽은 후의 상태를 분명하게 증거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로 증거되었다. 이 세상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섞여 살지만, 저 세상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다. 그 곳에서는 분리가 있을 것이며 최종 심판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으로 분리될 것이다. 의인은 위로와 안식의 천국으로 인도되고, 악인은 고통과 형벌의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죽은 후의 상태와 다를 수 있다. 부자는 지상에서 호화로이 살았으나 죽은 후에 고통을 당했고, 나사로는 병약하고 가난했으나 죽은 후에 평안을 누렸다. 천국은 안식과 위로가 있는 곳이지만, 지옥은 고통의 장소이다. 23절, “저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24절,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고통을 받나이다].” 25절, “너는 고민[고통]을 받느니라.” 28절, “이 고통받는 곳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은 죄인들이 회개해야 할 이유요, 또한 먼저 믿은 우리가 전도해야 할 이유이다.
26-31절, 전도의 필요성과 방법
[26절]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 . . .
아브라함은 또 말했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라는 말은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지옥에는 천국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좁은 길로 가는 사람보다 많다(마 7:13-14).
‘큰 구렁이 끼어 있어’라는 원어는 ‘고정된 큰 간격이 있어’라는 뜻이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간격은 아담 이후 변경할 수 없이 고정되어 있다. 이것은 거기에 들어간 영혼들의 상태도 고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사람의 최종 상태는 고정된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오는 것도 불가능하고,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죽음으로 고정된 사람의 최종 상태는 아무도 변경할 수 없다.
여기에 하나님의 엄위하신 공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공의와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시고 불의와 죄악에 대해 경고하시지만, 저 세상에서 그는 공의의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그 보응은 엄위하지만 이미 공개적으로 예고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시며 그의 공의도 변하지 않으신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선언하신 그대로 공의의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27-28절]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 . . .
그 부자는 말했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다. 그 곳은 악인들의 형벌의 장소이다. 그 곳은 불이 있는 곳이다. 지옥의 공포는 이방인들도 양심으로 느꼈던 공포이다. 모든 악인들은 그 곳에 가게 될 것이다.
그 부자는 지옥의 고통 중에서 세상에 남아 있는 형제들을 기억하였다. 자기에게 아무런 위로가 없을 것을 깨달은 그는 세상에 남아 있는 다섯 형제들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에게 “내 형제 다섯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호소했다. 또 그는, 자신은 이 처지를 돌이킬 수 없을지라도, 나사로가 세상에 다시 가서 자기 형제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어 그들만은 이 곳에 오지 않기를 원하였다. 지옥의 고통을 경험한 자는 당연히 그런 소원을 가질 것이다.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죄인들이 회개해야 할 바로 그 이유이다. 자기의 죄를 회개치 않는 자마다 그 곳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사실들은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29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 . . .
아브라함은 말하였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충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는 말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들으라’는 뜻이다. 구원을 갈망하는 자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들어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복음을 듣고 믿지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30-31절]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 . . .
그 부자는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라고 하자, 아브라함은 그에게 또 말하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말을 인정치 않았고 성경의 효력을 믿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통해 회개와 구원의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죽은 자가 살아서 그들에게 돌아가 전도하면 그들이 회개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오순절파와 그 파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성경을 통해 믿지 않는 자는 기적을 보아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약교회 시대에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사람을 구원하셨고 또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고린도전서 1:23-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기독교는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고 성경주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사람의 구원을 위해 충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도 구원은 성경에 증거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을 믿고 행하고 전해야 한다.
사람의 죽은 후의 상태는 변경할 수 없다. 이 고정된 상태는 사람의 죽음으로 확정된다. 사람은 죽기 전에 구원을 받아야지 죽은 후에는 그의 상태를 변경시킬 수 없다. 죽은 후에는 이미 늦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는 없다. 죽기 전에 회개해야 하고 죽기 전에 전도해야 한다.
사람을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은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이다. 사람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 기독교는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이다. 우리는 오직 성경을 읽고 믿고 실천하고 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늘도 죄인은 성경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
17장: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
1-4절, 회개와 용서
[1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실족케[범죄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사람이 악하고 무지해서 남을 범죄케 하는 일이 불가피하게 생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죄는 사람을 멸망케 하는 악이다. 자신이 범죄하면 자신이 멸망하듯이,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면 그를 멸망시키는 것이니,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2절]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 . . .
그러므로 주께서는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는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에 믿음이 약한 자 하나를 가리킨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주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고 믿음이 약한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은 작은 시험이 와도 잘 넘어진다. ‘연자맷돌’은 ‘당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을 뜻한다. 사람이 그런 맷돌을 목에 걸치고 바다에 던지우면 살 가망이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단호하시고 강하시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그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주님의 표현이 강한 만큼, 이 말씀은 인간에게 있어서 죄가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보여준다. 죄는 사람을 죽음과 지옥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사함을 주는 구원이다. 그는 이 구원을 위해 자기의 독생자를 사람으로 보내셨고 십자가에 속죄제물로 내어주셨다. 인간의 죄악들로 인한 대가는 이처럼 매우 컸다. 우리는 범죄가 큰 문제이며 자신의 범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는 것도 큰 죄악임을 깨닫자. 우리에게 있어서 죄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3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형제의 범죄를 용납하지 말아야 하지만, 다른 한편 그의 회개를 거절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형제의 범죄를 용납하면, 우리는 신앙적, 도덕적 방종과 해이에 떨어질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형제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형제의 회개를 받아주지 않고 거절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한다면 우리는 그를 책망해야 한다. ‘경계하라’는 원어(에피티마오)는 ‘책망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죄와 잘못을 회개한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주의 말씀은 만일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범한 죄를 뉘우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용서와 그와의 교제의 회복을 보류할 수 있다는 뜻도 내포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만일 우리에게 범죄한 자가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고 회개치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마 18:17). 용서는 상대방의 회개 즉 상대방이 자신의 죄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을 전제(前提)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4절]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 . . .
예수께서는 또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라는 말씀은 인간의 부족과 연약을 증거한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죄와 실수도 자주 하고 회개도 자주 하며 용서도 자주 해야 한다. ‘하루 일곱 번이라도’라는 표현은 용서의 횟수에 제한을 두지 말고 상대가 언제든지 회개하면 그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뜻이다. 또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이라는 말은 회개하는 자의 중심의 진실성 여부를 따지거나 판단하려 하지 말고 단지 그의 사과의 말에 근거하여 그를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사랑의 교제에서 매우 요긴한 한가지는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서로 사랑하며 일치 단합하여 주를 섬기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기 전에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그들도 서로의 부족과 연약을 용서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우리는 범죄를 큰 문제로 여기자. 자신의 범죄도 그렇고, 특히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는 일이 그렇다. 계속 범죄하는 자는 하나님의 징벌과 장차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죄가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이다. 죄를 큰 문제로 여기자.
우리는 회개와 용서를 중요하게 여기자. 회개는 복된 일이다. 인간이 연약하여 죄도 자주 짓고 회개도 자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 용서해주신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가 사과할 때 즉시 그를 용서하고 또 비록 반복해서 그러할지라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주의 명령이며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5-6절,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5-6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 . . .
사도들은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아뢰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함을 깨닫고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함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리의 작은 믿음은 날마다 자라고 성장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다면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큰 믿음은 큰 역사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실상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우리는 우리에게 좀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겨자씨보다 작은 믿음이라는 것, 즉 심히 작은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심히 적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만 바라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주여, 우리의 믿음이 심히 적사오니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주님께 아뢰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이 꽤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 자신의 믿음이 심히 적음을 인정하며 주님을 향해 또 사람들을 향해 항상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7-10절, 무익한 종이라는 마음가짐
[7-9절]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감사]하겠느냐?”
종들은 주인의 밭을 갈거나 양을 쳤다. 그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 밭에서 돌아와서도 금방 편안히 상에 앉아 음식을 먹지 못했고 주인의 상을 준비하고 수종들었고, 주인이 음식을 먹은 후에야 먹을 수 있었다. 또 주인은 그의 명령을 다 행한 종들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옛 시대의 주인과 종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 이상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우리는 피조물이며, 더욱이 우리는 그를 거역했던 죄인들, 즉 그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했던 죄인들이었다.
[10절]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 . . .
주께서는 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신약 교회의 모든 봉사자들이 가져야 할 정신이다. 우리는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생각하고 처신해야 한다. 우리는 봉사의 직무를 행할 때도 우리의 힘과 재능으로 한 것이 아니고 주의 주신 은혜와 힘으로 했고 그때에도 우리에게는 많은 부족과 흠이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못한다. 이런 정신과 태도가 오늘날 목사들과 제직들과 주일학교 교사들과 찬양대원들이 가져야 할 봉사의 정신과 태도이다. 우리 모두는 종의 정신으로 겸손히 주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도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알고 믿음의 성장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종들과 같고 절대순종하고 죽도록 충성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한 후에도 우리 자신이 무익한 종임을 겸손히 고백하며 처신해야 한다.
11-19절,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1-13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 . .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는 북부 갈릴리 지방에서 중부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서 남부 유대 지방의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다. 그때 그는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쳤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동네 밖에서 살아야 했다(레 13:46). 그래서 그들은 멀리 서서 소리쳤을 것이다.
그들은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께 대해 얼마큼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들은 적어도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고 자기들의 병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고 외쳤다.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 받기를 간구하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얻을 것이다.
[14절]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 . . .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들이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레 14장). 그러므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주의 말씀은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겠다는 뜻을 포함하였다. 예수께서 어떤 때에는 나병환자를 즉시 고쳐주신 경우도 있었으나(마 8:3),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즉시 고쳐주지 않으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옛날 엘리사 선지자가 아람 군대장관 나병환자 나아만에게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였다(왕하 5:10). 이런 말씀들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한다. 참된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 열 명의 환자들은 주의 말씀대로 갔고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 그들은 믿고 순종하였고 그때 그들은 병고침의 은혜를 받았다.
예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일이었다. 그는 말씀으로 그 불치의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의 능력은 신성의 능력이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이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우리의 구주로 세상에 보내어주셨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5-16절]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 . . .
그 열 명의 나병 환자들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였다. 그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열 명이 다 병고침을 받았으나, 그 중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께 감사하였다. 다른 이들은 기쁨과 들뜬 마음으로 제사장에게 갔다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있었다. 또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이심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 돌아와 그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과 피가 섞인 족속이었다. 주께서는 그를 ‘이방인’이라고 표현하셨다(18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하며 배척하였었다. 그러나 주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오늘날 신약교회의 교인들인 이방인 신자들은 이 사마리아인과 같은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구원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그 구원을 감사하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다.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신 치료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몰랐다. 인간은 참 무지하고 부족한 존재이다. 그는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감사도 돌리지 못하는 존재이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 . . .
예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치를 나타낸다. 또 이 말씀은 그가 나병 치료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도 받았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12절로 19절까지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수많은 불치의 병들을 고쳐주실 뿐 아니라, 더 눌랍게도 우리를 지옥 불못에서 구원하셨다.
둘째로,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고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순종은 믿음의 당연한 표현이다. 믿는 자는 순종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그가 주시는 영육의 좋은 것들을 받으며 누릴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영육의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의 나병환자처럼 되지 말자.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구원과 영육의 모든 복을 감사하고 또 사람들에게도 감사하며 살자.
20-21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음
[20-21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 . . .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묻자,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정치적, 경제적, 육체적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가난과 질병에서 구원을 얻는 나라를 바랐던 것 같다. 오늘날도 자유주의적 교회는 정치적, 경제적 하나님 나라 개념을 가지고 있고, 오순절파 교회는 육체적, 물질적 하나님 나라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주님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그런 개념들과 달랐다.
주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내면적으로 시작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 개인의 심령 속에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 즉 교회 속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통치를 부정하고 있으나 회개하고 예수 믿는 신자들 속에는 그의 통치가 회복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믿고 순종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산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중생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 복음 운동은 하나님 나라 확장 운동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우리는 참된 회개와 속죄 신앙으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가 이미 우리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깨닫자.
22-30절, 인자(人子)의 나타나는 날
[22절]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 . . .
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때가[날들이](원문)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인자(人子)의 날들(원문)’은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활동하시는 날들, 곧 메시아 시대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리우시므로 사람들은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차 그가 다시 오실 것이다.
[23-24절]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리라(전통본문).71)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예수께서 나타나실 날은 그가 승천하셨다가 재림하시는 날을 가리킨다. 그의 재림의 때에 그는 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저편까지 비췸같이 온 세상이 다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은 세계적 사건이 될 것이다. 사실 온 세계는 이미 인터넷망과 인공위성 전파들로 연결되어 있고 어느 한 지역의 일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25절]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영적으로 임하고 있고 또 장차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지만, 이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일이 있어야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시작될 나라이므로 이 일을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이 있어야 했다. 그는 실상 이 일을 위해 오셨다(마 20:28).
[26-30절]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주의 재림의 날은 노아의 때와 비슷할 것이다. 노아의 여덟 식구는 홍수로부터 구원을 얻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등 세상일에 분주하다가 멸망을 받았다. 오늘날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자들은 주의 재림의 날에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고 세상일에만 분주하다가 심판과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 날은 또 롯의 때와도 비슷할 것이다. 롯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등 세상일에 분주했다. 오직 롯과 그의 두 딸들만 소돔성에서 구원을 받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늘로서 내리는 유황불비로 다 멸망하였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도 비슷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일에만 분주하게 살다가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고 장차 그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장차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구원받을 성도들은 다 깨어 그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모해야 한다.
31-37절, 롯의 처를 생각하라
[31절]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주의 재림의 날은 회개치 않은 죄인들에게 심판과 멸망의 날이다. 그 날에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다 불타버릴 것이다. 베드로후서 3:10-11은,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불타버리리라](전통본문).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재림의 날에는 사람이 지붕 위에 있다가 집안 물건을 가지러 내려갈 필요가 없고 밭에 있는 자는 집에 돌아가려 할 필요가 없다. 이제 모든 것들이 불태워질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
[32-33절]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 . . .
예수께서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구원하고자](전통본문)72)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롯의 아내처럼 세상과 세상의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버림을 당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2:15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적 목숨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신앙의 절개를 저버리고 육신의 목숨을 부지(扶支)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주의 재림 직전에 대환난의 시대가 올 것인데, 우리는 어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만 소망하며 하나님의 진리만 붙잡고 육신의 생명을 초월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3:8, 10에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 . .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라고 말했고, 요한계시록 14:9-12에는,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 . . .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라고 했다.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며 믿음을 지켜야 한다.
[34-35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주의 재림의 날은 대분리(分離)의 날이 될 것이다. 그 날 밤에 함께 자던 사람들 중에서 데려감을 당할 자도 있고 버려둠을 당할 자도 있으며, 함께 일하던 사람들 중에도 그러할 것이다.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들림을 받는 것을 가리키며 버려둠을 당하는 것은 세상에 남겨져 두려운 심판을 받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데려감을 당하는 것을 휴거(携去, rapture)라고 부른다.
마태복음 24:30-31,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37절]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 . . .
그들이 “주여, 어디오니이까?”라고 말하자, 주께서는 “주검(소마)[몸]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본절의 뜻은 해석하기 어려워 보인다. “주여, 어디오니이까?”라는 질문은 들림을 받은 자들의 집결지를 물은 것 같다. 주께서는 그 질문에 대해 일반적 사실로 대답하신 것 같다. “몸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 이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몸들을 위해서는 심판의 천사들이 모여올 것이지만, 영적으로 살아 있는 몸들을 위해서는 영광의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도록 성도들을 돕는 천사들이 모여올 것이라는 뜻 같다.
주의 재림의 때에 대분리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들림 받고 어떤 이는 버림받을 것이다. 들림 받을 자는 영광의 부활과 영생을 경험할 것이지만, 버림받을 자는 두려운 멸망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여기에 구원의 필요성이 있고, 또 전도의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특히 롯의 아내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오직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천국에 두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애착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육신의 목숨에 연연하지 말고 영원한 천국을 확신하고 소망하며 거기에 합당한 순결하고 선한 삶을 힘쓰자.
18장: 낙망치 말고 기도할 것
1-8절,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하자
[1-5절]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재림의 주를 기다리며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한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이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그런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그의 원수에 대한 그의 원한을 풀어 주기를 간구하였다. 그는 얼마 동안 그 과부의 말을 듣지 않았으나 후에 속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에이스 텔로스)[끝까지]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그 재판관은 그 과부가 그를 끝까지 괴롭게 할 것이므로 그의 탄원을 들어주었다.
[6-7절]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 . .
주께서는 또,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비록 오래 참으실지라도](전통본문)73)”라고 말씀하셨다.
‘하물며’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저 과부보다 얼마나 더 나은가를 뜻한다. 하나님은 불의하고 악한 재판관이 아니시고, 의롭고 선하신 재판장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뿐 아니라, 그의 공의와 선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좋은 아버지이시다. 또 우리는 불의한 재판관 앞의 불쌍한 과부와 같은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바 된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정당한 소원을 밤낮 부르짖어 아뢸 때, 전능하시고 공의롭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잘 들어주시겠는가!
‘그 밤낮 부르짖는’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고난 중에서 또 원통한 일을 당했을 때, 열심히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할 것을 보인다. 주께서는 기도에 관해 교훈하실 때,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다(마 7:7-8).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예레미야 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는 구절은 전통본문에는 옛날 영어성경(KJV)처럼 “비록 저희에게 오래 참으실지라도”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 보기에 때때로 더디며 그래서 우리는 낙망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낙망치 말고 인내하며 하나님께 더욱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나타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눈물을 아신다. 하나님의 마음은 속히 응답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딜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나으시고, 그의 시간표가 우리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더 완벽하고 선하심을 믿자. 우리가 조금만 더 참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속히’ 우리의 기도 제목과 우리의 원통한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성경에는 고난 중에 간절히 기도하여 응답받은 예들이 많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시작했고 미스바에 백성을 모아 큰 회개의 기도회를 가지고 있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다. 이스라엘에게는 심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때 사무엘은 젖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큰 우뢰를 발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어지럽게 하시므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패배케 하셨다(삼상 7장).
헤롯 왕이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 가운데 가장 중심적 인물들 중 하나인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옥에 가두었을 때, 성도들은 그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 베드로까지 죽임을 당한다면 교회에는 큰 손실과 타격일 것이었다. 그러나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의 결과, 헤롯이 그를 잡아내려고 한 그 전날 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구출시켜 주셨고 원수들의 계획과 기대를 폐하셨다(행 12장).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신이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부언하셨다. 주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그 날에, 무덤에 있던 성도들은 살아나고 모든 믿는 자들은 다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재림의 주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광의 천국과 영생을 주실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큰 약속이며, 거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소망이 있다. 그러나 주의 재림 직전의 세상은 믿음이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물질적 부요와 평안, 그것과 더불어 생기는 육신적 쾌락과 죄악들이 주된 요인일 것이다. 세상 나라의 특징은 각종 불경건한 사상들과 종교들과 음행과 사치이다(계 18장). 가난과 고난과 질병은 오히려 사람의 구원과 참된 믿음을 위해 유익하다. 물질적 풍요와 안락한 삶이 사람들로 육체의 쾌락을 사랑하고 음란하게 만든다.
주께서는 멸망할 세상보다 교회를 더 염려하신다. 그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믿음이 식어지지 않고 그들의 기도 생활이 식어지지 않기를 원하신다. 기도 생활은 믿음과 비례한다. 우리는 고난 많은 세상에서 믿음이 약해지지 말고 열심으로 밤낮 하나님께 기도하자. 우리에게는 믿음의 부흥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 연구를 통해 올 것이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롬 10:17).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믿는 자들이 많았다(행 17:11-12).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책을 가까이 함으로써 믿음이 강하여져서 어떤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낙망치 말고 기도하며 응답받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도는 어려운 일이 많은 세상에서 낙망치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비록 더딜지라도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기억하자. 그 재판관도 보잘것없는 한 과부의 탄원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독생자의 피로 구원하신 그의 사랑하는 택하신 자녀들의 소원을 외면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의 응답을 확신하고 참고 낙심치 말고 열심히 기도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우리의 기도 생활은 우리의 믿음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를 소원하자. 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여 늘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하자.
9-14절,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 . . .
또 예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의 높은 수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이 명령을 다 지킬 수도 없고 지키지도 못했다. 또 사람이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것은 마음으로 범하는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것이다(마 5:28; 요일 3:15).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자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한다. 이런 자는 자기의 큰 단점을 보지 못하고 남의 작은 단점을 보는 자이다. 그러나 남을 멸시하는 것 자체가 큰 죄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10절]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 . . .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하신 이 비유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자들, 즉 하나님을 섬기는 교인들 중에 두 부류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이다. 바리새인은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이고,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깨닫고 고백하고 자신을 낮추는 자이다.
[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 . . .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따로’라는 원어(프로스 헤아우톤)는 ‘자기 자신에게’라는 뜻이다(NASB).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들으실 만한 기도가 아니고 자신에게 하는 독백과 같은 기도이었다는 뜻 같다.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자’로 표현하였다. 그는 자신을 토색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죄인들과 구별하였다. 토색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며 불의는 법을 어기는 것이며 간음은 부부관계를 벗어난 것이다. 그는 또 자신을 성전 한 쪽 구석에서 기도하고 있는 세리와도 구별했다. 그는 세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그를 멸시했다.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 . . .
그는 또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매우 경건하고 도덕적이게 보이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금식은 자신의 죄악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아니고, 종교적 의(義)와 공로를 쌓는 행위에 불과하였다. 또 그의 십일조 생활도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감사하여 드린 것이 아니고, 단지 물질의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거나 종교적인 자기 자랑으로 드린 것 같다. 본문은 금식과 십일조까지도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앙심 없이 드릴 수 있음을 보인다.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 . . .
한편,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말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것은 겉보기에 경건한 모습이 아니고 마음 속에서부터 자신이 죄인인 것과 자기 속에 죄악된 성질들이 많이 있음을 깨닫고 통회하는 기도이었다. 그는 자신의 선함을 자랑할 것이 없었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것밖에 없었다.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 . . .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내리실 수 있다. 그는 그 세리가 그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평가하셨다. 그 바리새인은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그에게는 무지(無知)의 죄, 위선의 죄, 교만의 죄, 이웃 사랑이 없는 죄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이치가 있다. 자신이 꽤 의로운 줄 알고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물리침을 받을 것이지만,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깨닫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용납하심을 받고 붙드심과 세우심을 받을 것이다. 가난한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통회 자복하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를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을 것이다.
오늘날도 예배당에 드나드는 자들 중에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바리새인처럼 외적으로는 종교적 형식을 다 지키지만 자신의 부족에 대한 깨달음이 없어서 자기가 의롭다고 믿고 남을 멸시하는 자요, 다른 하나는 세리처럼 자신의 부족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처럼 되지 말고,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기에 심히 부족한 큰 죄인임을 깨닫고 자신의 죄성과 연약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세리 같은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즉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은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물리치심을 받을 것이다.
15-17절, 어린아이들을 용납하심
[15-16절]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 . . .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는 어린 아기들을 가진 부모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왔고 예수께서 그들을 만져주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그 부모들을 책망하였다. 아마 그들은 그 부모들이 예수님을 번거롭게 한다고 생각했거나 그들이 쓸데없이 자기들의 아이들에 대해 인간적 욕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어린아이들을 자기에게로 가까이 부르셨다. 그는 믿는 이들의 어린아이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용납하셨다. 또 그는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신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다.
어린아이들이 무시당할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구약의 할례에 대한 규정에서 명백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정에서 태어난 아기를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게 하심으로써 그 아기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원임을 증거하셨다(창 17:10-14). 그러므로 믿는 가정에서 출생한 아이들은 이방인들이 아니고, 언약 백성이요 하나님의 기업과 상급이다(시 127:3).
이런 언약 원리가 신약시대에도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근거가 된다. 구약시대에 유아들을 언약 백성으로 삼으셨던 하나님께서 그 후에 그들을 교회에서 제외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그 표로 교회는 그들에게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17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의 성품은 천국 백성에게 필수적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의 단순하고 순진한 성품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사람은 세상을 살수록 생각이 복잡해지고 상대방의 말도 잘 믿지 않는다. 믿음은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과 순진함에서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진실하고 확실하다. 단지, 사람의 마음이 복잡해서 그것을 잘 믿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어린아이같이 단순하고 순진한 마음을 가진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잘 믿을 수 있고 또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다.
사도 요한의 제자요 순교자인 폴리갑은 아홉 살에 하나님을 믿었고, 18세기에 유명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일곱 살에, 영국의 청교도 지도자 리차드 백스터는 여섯 살에, 유명한 찬송저자 아이삭 왓츠는 아홉 살에 각각 하나님을 믿었다고 한다. 사람은 어릴 때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고 그런 자는 커서도 그 믿음을 쉽게 떠나지 않는다.
본문의 교훈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물리치지 말고 용납해야 한다. 우리는 어린 영혼 하나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특히 믿는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은 집안에 있는 이방인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업이며 상급이다.
둘째로,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순진하게 천국을 영접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한 증거의 말씀이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이 복잡하여 확신에 이르지 못하고 의심의 수렁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이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순진해질 때 그는 천국의 말씀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순진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과 칭의(稱義), 천국과 영생의 복을 받는 자의 모습이다.
18-30절, 재물을 버리고 영생을 취하라
[18절]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 . . .
어떤 관원이 물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관원은 고급 공무원이다. 마태복음에는 이 사람을 ‘청년’이라고 표현하였다(마 19:20, 22).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하였다. 의롭고 선한 행위를 통해 영생에 이른다는 소위 ‘업보’(業報) 사상은 이방종교들의 특징이며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천주교회나 율법주의적 기독교의 사상이기도 하다. 물론 율법의 외적인 조건은 ‘행하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거나 영생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롬 3:20).
[1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의 말씀은 그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그 관원이 주님을 단지 선한 사람으로 여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은 다 죄인이며 악하다(롬 3:10; 왕상 8:46; 시 51:5).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며 죄와 불결이 전혀 없으시다.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그에게 있는 참된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을 지키셔서 그로 하여금 범죄치 않게 하신다. 우리에게는 죄성이 있어서 항상 거룩하게 살지 못하며 오직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조금씩 거룩한 열매를 맺지만,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신비하게 연합되어 있으시므로 그의 신성의 도움으로 죄에 떨어지지 않으신다고 생각된다.
[20-21절]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 . . .
예수께서는 또,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가 그것을 다 지키면 영생을 얻을 것을 약속한다. 신명기 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러나 사람은 율법을 다 행하지 못하며, 따라서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 관원은 예수님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어느 정도 율법을 성실히 지킨 사람이었던 것 같고 상당히 의롭고 착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선한 행위의 부족함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선과 의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인정받을 만한 선과 의가 되지 못하는 부족한 행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22절]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 . .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네가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사람마다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 관원의 경우는 하나님 대신 물질을 주인으로 섬긴 것이 부족이었다. 물질에 대한 그의 애착은 하나님의 명령이나 주님의 초청보다 더 크고 강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주께서는 모든 신자에게 이것을 요구하지는 않으신다. 모든 신자가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도의 마음가짐은 그래야 한다. 성도는 재물을 버려야 주님을 바르게 따를 수 있다. 그러므로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 자발적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행 2:45).
둘째,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우리가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하시는 선한 일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우리의 자원적 절제와 헌신과 선행은 우리로 천국에서 상을 얻게 할 것이다(고전 9:17).
셋째,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주께서는 아무에게나 이런 초청을 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그를 제자로 부르시는 특별한 초청이었다. 그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었다면 그를 따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보다 물질이나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그는 결코 주님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23절]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그 관원은 큰 부자이었기 때문에 주의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다. 그는 영생을 얻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그 많은 재물을 버릴 수 없었다. 마태는 그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갔다고 기록했고, 마가는 그가 재물이 많으므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고 말했다. 그의 근심은 재물 사랑과 영생 소원의 충돌에서 생긴 근심이었다. 신앙 생활의 과정에는 그런 근심이 있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그러므로 주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4:33).
[24절]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 . . .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저가 심히 근심하는 것을 보시고](전통본문)74) 말씀하셨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 이것은 현재 부자이든지 가난한 자이든지 모든 사람이 명심해야 할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잠언 23:4-5,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디모데전서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25-27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 . . .
예수께서는 또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는 말은 불가능한 것을 나타내는 속담인 것 같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사람은 물질적 부요 때문에 영생과 천국을 얻을 수가 없다.
듣는 자들은 말하였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영생을 얻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구원얻는 것은 다 같은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은 하나님께 즉 그의 능력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할 뿐이다.
[28-30절]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 . . .
베드로가 말했다.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집 즉 신약교회가 우리의 집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의 식구들임을 의미하신 것일 것이다. 천지의 은금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대상 29:11; 시 24:1). 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다 하나님의 가족들이다(마 12:50; 눅 8:21).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홀로 사는 자들도 결코 외롭지 않다. 또 주께서는 내세의 복을 ‘영생’이라고 말씀하셨다. 영생보다 더 귀한 복은 없다. 이와 같이 경건은 금세와 내세에 약속이 있다(딤전 4:7-10).
18절로 30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재물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버리자. 주께서는 모든 신자가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본문이 보이는 바는 모든 신자가 재물에 대한 사랑과 애착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벌기는 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의 심령으로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가자. 하나님과 그 나라에만 참된 소망이 있다. 하나님만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시다. 오직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며 또한 평강과 기쁨의 길이다. 시편 23: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자.
셋째로, 이런 경건한 삶에 현세와 내세에 약속이 있음을 알자. 성도는 현세에서 그가 버린 것을 여러 배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진실한 성도들의 교제를 허락하셨다. 성도들은 다 한 식구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의 부족이 없도록 늘 공급하여 주실 것이다. 이것이 현세의 약속이다. 또 내세에는 확실히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광스러운 영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의 재물에 연연하지 말고 돈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힘있게 따라가자!
31-34절, 자신에 대해 예언하심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언하신 내용이다. 그는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다 아시는 신적 존재이셨다.
[31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 . . .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말씀하셨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그는 며칠 후의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것은 그의 용기와 충성심을 나타낸다.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에 메시아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어떤 때에는 그들이 제사나 유월절 어린양이나 성막 등의 예표들을 통해 증거하였고 어떤 때에는 보다 직접적 예언들을 통해 증거하였다. 구약성경은 한마디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 증거하였다. 구약성경에 메시아에 대해 기록된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다 성취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예언의 성취이시다.
[32-33절]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그는 그의 생애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 곧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에 대해 예언하셨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으시고 능욕을 받으시고 침뱉음을 받으시고 채찍질을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아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표되고 예언되어 있었다. 죄인인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 짐승을 죽여 드렸던 제사들은 메시아의 죽음을 예표하였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이 집집마다 잡았던 유월절 어린양은 메시아의 죽음을 예표하였다. 제사장들이 오직 짐승 제물들의 피를 가지고서만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성막 제도는 메시아의 죽음의 필요성을 증거하였다. 더욱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장에서 메시아의 대속적(代贖的) 고난과 죽음에 대해 분명하게 예언하였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장사되신 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실 것이다. 이것도 구약성경에 증거되고 암시된 바이었다. 시편 16:8-10,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 죄가 없으신 메시아의 생애는 죽음으로 끝날 수 없으셨고 그는 반드시 다시 사셔야 하셨다. 호세아 6:2는,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예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복음의 골자이다. 고린도전서 15:3-4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증거하였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중요한 까닭은,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였고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그의 대속 사역을 확증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구원 신앙의 핵심이다. 로마서 10:9-10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했다.
[34절]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 . . .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그들이 그의 말씀하신 바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심히 어두워져 있어서 하나님의 확실한 진리도 잘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작은 깨달음이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때에만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마 11:27), 또 그는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17).
31절로 34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자. 구약성경은 많은 예표들과 예언들을 통해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밝히 증거하였다. 또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예표되고 예언된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과 그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밝히 증거한다. 성경의 중심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구원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구약성경과 그 내용을 바로 알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성경의 진리들은 우리에게도 감추어져 있고 우리도 그것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진리들을 깨닫고 믿게 하셨다. 이 사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아직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은혜주시기를 간구하자.
셋째로,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용기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충성된 주님의 모습을 본받자. 우리는 고난이 예상되는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낙심치 말고 용기를 잃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계명을 즐거이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충성하자.
35-43절,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
[35절]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 . . .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오셨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증거한다. 옛날 여리고는 파괴되었고 헤롯이 남쪽으로 넓혀 새 여리고 성을 건립했다고 한다. 마태와 마가는 옛 여리고 성을 두고 말하고 누가는 새 여리고 성을 두고 말한 것 같다. 예수께서는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는 것을 보셨다. 그는 가족도, 친구도, 아름다운 세상도 볼 수 없었다. 그는 아마 물질적으로도 돌보아줄 가족도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구걸하는 거지이었다. 실상, 모든 인간은 하나님도, 천국과 지옥도 알지 못하는 소경이다. 그것은 육신의 소경보다 더 큰 불행이다.
[36-37절]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 . . .
그는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무리들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그 소경에게는 절호의 기회이었다. 예수님은 그 불쌍한 소경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셨다.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시 그런 기회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구원의 문을 열어놓고 계신다. 그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도록 부르고 계신다. 아직도 복음이 교회를 통해, 전도자들을 통해 전파되고 있다. 오늘도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세상 곳곳을 지나가고 계신다.
[38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 . . .
소경이 외쳐 말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는 말은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음을 나타낸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많은 말들을 들었고 생각했고 그를 메시아로 깨닫고 믿었던 것 같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롬 10:17). 오늘날도 우리가 예수님에 관하여 성경에 증거된 대로 읽고 듣고 묵상할 때 예수님을 믿고 확신할 수 있다.
그는 지체치 않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다. 그것은 겸손한 부르짖음이었다. 사람은 다 자존심이 있어서 남의 동정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자존심을 버리고 그의 긍휼을 구하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는 겸손히 그 앞에 나아가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의 복을 얻는다(마 5:3).
[39절] 앞서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 . . .
앞서가는 자들은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다. 믿음의 길에는 항상 방해거리가 있다. 그것은 때때로 믿는다는 이들을 통해 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소경은 주님께 부르짖는 것을 중단치 않았다. 그는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던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어려움을 극복할 때 더욱 강해진다. 또 믿음에는 항상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할 때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해야 한다.
[40-41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 . . .
예수께서는 머물러 서서 “그를 데려오라”고 명하셨다. 그의 낙심치 않은 부르짖음은 응답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머물러 서셨고 그를 데려오라고 명하셨다. 사람들의 뜻과 예수님의 뜻은 달랐다. 예수님은 그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를 외면치 않으시고 불러주셨다. 오늘날도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부르짖는 자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의 소원을 다 아뢸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가 가까이 오자, 그는 물으셨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는 말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 소경의 소원은 분명하였다. 그것은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주여’라는 그의 말은 그가 예수님을 자신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뜻이 있다고 본다. 그의 소원은 단순하고 분명하였다. 오늘날도 모든 죄인들은 자신들이 다 영적 소경인 것을 깨닫고 보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영적 소경인 것을 깨달아야 구원을 얻을 것이다.
[42-43절]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 . . .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러자 그는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따랐다. 백성들은 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의 치료는 단순하고 즉각적이었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치료하셨다.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었다.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었다. 예수님은 인생을 불행에서 건져주시는 신적 구주이신 것이 다시 한 번 증거되었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참으로 많았다. 그는 많은 확실한 증거로 증거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즉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인간을 불행에서 건져내시기에 유능하신 구주이시다. 그러나 이 치료는 믿음의 간구에 대한 응답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의 사역이지만 단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35절로 43절까지의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능력의 구주이심을 다시 한 번 더 증거한다. 오늘날도 영적 소경인 모든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소원을 아뢸 때 영적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자이심을 알고 시시때때로 그에게 나아가 기도해야 할 것이다.
19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10절, 삭개오의 구원
[1-3절]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 . . .
예수께서는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셨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며 또 부자이었다. 예수께서 그곳에 가신 것은 삭개오라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세상적 직위가 있고 경제적 부요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기가 어려울 것이다. 당시에 세리들은 죄인으로 여겨졌다(7절). 아마 많은 사람이 그를 상종하지 못할 자로 여기며 그를 멀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삭개오에게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가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 끌리고 있었고 그것을 확인해 보기를 원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었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부족한 점과 주위 사람의 장애 때문에 주께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4-5절]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 . . .
그러나 그는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진행하는 길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보아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그의 신분에 맞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움이나 체면이나 혹은 나무에서 떨어지면 다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뽕나무에 올라갔다. ‘뽕나무’라는 원어(쉬코모라이아)는 ‘시카모 무화과 혹은 무화과 뽕나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그 뽕나무 아래에 도달하셨을 때 그를 우러러 보시며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께서는 신성(神性)의 지식으로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다. 그는 오늘날도 구원하실 자를 다 아신다. 그는 죄인에게 가까이 하시고 그를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또 삭개오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셨다. 가정적 구원은 확실히 큰 복이다.
[6-7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 . . .
예수님의 말씀은 삭개오에게 너무 예상 외의 것이었다. 그의 생각에, 거룩하신 예수께서는 그를 상대해주지 않으시고 그를 대면하시면 필경 책망하실 것 같았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책망 대신 자기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그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다. 그의 이런 반응을 보면,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일 것이라는 긍정적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그의 마음은 더욱 감동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에 관하여 수군거렸다. 상대의 행위의 동기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은 수군거리는 일을 잘한다.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죄인과 친구가 되어 그의 죄를 인정하거나 그와 함께 죄악의 낙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오직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겉으로만 보고 주관적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8절]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 . .
삭개오는 서서 주께 말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였다. ‘주님’이라는 명칭은 단순한 존칭 이상의 뜻이 있었고 사실 신성(神性)의 명칭이었다. 그는 또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며 만일 남의 것을 억지로 혹은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고백은 바른 회개를 보인다. 참된 회개는 죄의 청산이다. 예수님 앞에 선 삭개오에게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격적 감화와 성령의 강력한 역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9-1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 . . .
예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가정적 구원을 선언하셨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었고 죄를 청산하기를 결심하였다. 참된 회개와 믿음을 가진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사명은 단지 사람들의 병들을 고쳐주거나 기적들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1절로 10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님은 죄인을 영접하시고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죄인 삭개오를 먼저 찾아오셨고 그 집에 들어가셨고 마침내 그를 구원하셨다. 예수님의 주관심은 영혼 구원이었고, 그의 사명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었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든 죄를 버리기를 결심하자.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고 기쁨으로 영접하였고 자신의 죄를 청산하기를 결심했다. 오늘날도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사모하며 찾는 자는 만날 것이며 그를 기쁨으로 영접하고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청산하기를 결심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심정을 품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영접하자. 물론,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어린 소자 하나와 주의 종을 영접해야 하지만, 우리는 또한 한 명의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그를 영접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주관심이어야 한다. 오늘날도 주께서는 성령으로 우리를 통해 죄인들을 찾으시며 만나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11-27절, 열 므나의 비유
[11-12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 . . .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그는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셨다. 그것이 열 므나의 비유이었다.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임할 것이지만,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날 것이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갔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자신을 어떤 귀인으로 표현하셨다. 예수님 자신은 지극히 존귀하신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요 1:1, 14). 그는 왕으로 오셨으나 아직 본격적으로 왕의 일을 하지 않으셨다. 물론 지금 그가 하늘에서 하나님 오른편에서 영적으로 교회를 다스리고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지만, 그는 장차 다시 오심으로써 그의 왕 되심을 완전하게, 영광스럽게 나타내실 것이다. 그는 자신이 먼 나라로 가실 것으로 표현하셨다. 그가 가신 천국은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또 그가 왕위를 받아 왕의 영광을 가지고 돌아오시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릴 것이다.
[13-14절]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 . . .
그 귀인은 그 종 열 명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말하였다. ‘그 열 명의 종들’은 ‘그의 백성’과 구별된다. 그들은 그의 제자들, 복음의 일꾼들, 오늘날 목사와 전도자들, 또 넓게 보면 교회의 직분자들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이 그 종들의 재능대로 어떤 이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이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이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주인이 종들에게 동일하게 한 므나씩을 주었다. 한 므나는 100데나리온이며 60분의 1 달란트이었다. 똑같이 한 므나씩 준 것은 어떤 동일한 임무를 가리킨다. 그것은 복음 사역의 임무를 가리킬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재림의 날이 되기까지 하나님의 교회의 여러 직분들을 주셔서 행하게 하신다(마 28:20).
그런데 그 백성은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범죄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난 세상은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적대적이다. 구약교회는 빈번히, 그리고 신약교회 조차도 종종, 배교적이었고 불신앙적이고 불순종적이었다. 이것은 죄악된 인간 본성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변하지 않고서는 이 인간의 반항적 병폐는 결코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15-17절]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 . . .
귀인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불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광 가운데 왕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주님의 재림은 미래의 확실한 사건이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그가 세우신 복음의 일꾼들과 교회 직분자들을 불러 그들이 얼마나 충성되이 일했는지를 평가하실 것이다. 재림하신 주께서는 친히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 첫째가 나아와 말했다.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말했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비록 한 므나는 장사하기에는 별로 큰 자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종은 그 작은 것을 가지고 성실히, 열심히 일하였다. 그는 놀지 않았고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주인은 그에게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주께서 충성한 복음의 일꾼들에게 내리실 상이다. 그 상은 직분자들의 충성의 정도에 따라 주어질 것이다.
[18-19절]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 . . .
그 둘째가 와서 말했다.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말했다.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두 번째 종도 열심히 일하여 이익을 많이 남겼다. 그는 비록 첫 번째 종처럼 열 므나를 남기지는 못하였지만 다섯 므나나 남겼다. 복음의 일꾼들의 열심과 성실성은 각각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좀더 열심히, 성실하게 일할 것이고 다른 이는 그보다 좀 못할 수도 있다. 종들의 일한 정도에 따라 그의 사역의 열매의 양도 다를 것이다. 주인은 그 두 번째 종에게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복음의 일꾼들에게는 그들이 일한 만큼의 상이 주어질 것이다.
[20-23절]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 . . .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했다.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세 번째 종은 앞의 종들과 달랐다. 그는 받은 한 므나를 수건에 싸두었었다. 그는 주인에 대해 합당치 않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종의 임무는 주인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것이며 그것만 잘 하면 된다. 그 외의 다른 것은 그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주인에 대해 두려워했고 불평했고 부정적이었고 주인의 명령에 순종치 않았다. 그는 종으로서 합당치 않은 자이었다.
주인이 말했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이자]까지 찾았으리라.” 종의 임무를 하지 못한 그는 착한 종이 아니고 악한 종이었다. 또 그가 주인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 은을 은행에 두어 주인이 올 때 이자라도 받게 해야 옳았다. 그 종은 주인에 대해 잘못된 생각과 두려움과 불만을 가진 것 뿐만 아니라, 지혜가 없었고 게을렀다.
[24-27절]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 . . .
주인은 곁에 섰는 자들에게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고 말했다. 그들이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주께 대한 믿음과 순종과 충성의 열매가 있는 자는 상을 받고 더 받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순종과 충성의 열매가 없는 자는 마지막 심판 때에 그가 받았던 것조차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주인은 또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교인들과 종들의 종말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과 백성이 아니고 원수들이다.
11절로 27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장차 왕권을 가지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주의 재림의 소망을 굳게 붙들자.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둘째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착한 종들같이 작은 일들에도 충성하자. 우리 모든 직분자들은 예수께 대한 잘못된 생각과 불평과 거역함과 게으름을 버리고 그의 왕권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복음을 널리 전하고 하나님의 모든 일에 충성하자. 또 모든 교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거부하고 대항하는 불신앙적, 불순종적 사람들이 되지 말고 그의 왕권을 믿고 항상 성경 읽고 기도하며 서로 사랑하고 그의 재림을 사모하며 성경의 교훈들을 힘써 순종하는 자들이 되자.
셋째로, 주께서는 다시 오셔서 주의 종들에게 그들이 일한 대로 상을 주실 것이다. 고린도전서 3:8,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충성하자.
28-40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8-30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 . . .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다. 그는 거기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었다.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그는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그 일은 그의 신적 지식을 증거한다. 그는 아무도 타보지 않은 그 나귀새끼를 아셨고 그것을 보셨고 그것을 풀어 끌어오라고 지시하셨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그의 신적 영광을 본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뜻도 있지만(마 21:4-5), 또한 그의 겸손을 나타낸다. 또 그가 다른 사람의 나귀새끼를 타고 가신 것은 그가 가난한 삶을 사셨음을 보인다. 그는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소유자이셨지만, 세상에서 나귀새끼 한 마리도 소유하지 않으셨다.
[31-34절]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 . . .
주께서는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셨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났다. 그들이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주인들이 말했다.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그들은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하였다. 제자들에게 하신 그 명령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나귀새끼의 참 주인이 됨을 암시하셨다. 예수님은 그 나귀새끼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이 되신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것은 그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이 세상의 참 주인이신가?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소유하고 살지만, 우리의 모든 소유의 참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시다.
[35-38절]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 . . .
제자들은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태웠다. 주께서 가실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 그들에게는 겸손함이 있었고 예수님을 향한 경외심이 있었다. 그는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셨다. 모든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모든 능한 일을 인해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그들은 예수께서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아, 곧 약속된 왕이신 것을 믿었다. 구약성경에는 오실 메시아께서 왕으로 증거되어 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39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 . . .
그러나 무리들 중에는 믿는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리들 중에는 어떤 바리새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보수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의 신앙은 바르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 정도로 알고 존경했을지는 몰라도 그를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아 곧 우리의 구주이시요 생명의 주인이심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를 찬송하는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예수께 요청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무지함과 믿음 없음을 드러낼 뿐이었다. 우리 가운데는 아직 예수께 대한 이런 정도의 지식을 가진 자들은 없는지!
[40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그는 제자들의 찬송과 고백이 정당함을 증거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격언적 표현인 것 같다. 혹은 여기의 돌들이 이방인들을 표현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실 자들에게 예수께 대한 참 믿음과 순종심을 주실 수 있고 또 그렇게 주실 것이다.
28절로 40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곧 우리의 주, 우리의 왕이시다. 이것이 신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바이다. 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겸손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기쁨으로 그를 찬양하자.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표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셋째로, 우리 중에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오늘 그 생각을 버리라. 모든 무지와 불신앙을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자. 나다나엘은 처음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나 그를 만난 후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다(요 1:45-49). 도마도 처음에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본 후 그에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요 20:28).
41-48절, 성을 보시고 우심
[41절]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 그가 세상에서 30여년 동안 사시면서 여러 번 우셨겠지만, 특히 성경은 그의 우심에 대해 세 번 증거하였다. 요한복음 11:35에 보면 그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셨고, 또 본절의 말씀이 하나이고, 또 히브리서 5:7에 보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아뢰었다.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가리켰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것은 그 성의 장래를 생각해서이었다. 그 장래를 생각하니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예수님은 동정과 사랑의 눈물을 가진 분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공의만 가지신 분이 아니시고 또한 따뜻한 동정과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다.
[42절]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 . . .
예수께서는 또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참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얻는 마음의 평안과 환경적 평안이다. 사람은 범죄함으로 참 평안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평화를 주러 오셨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이 평화의 일이 예루살렘에게는 숨기어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핍박하고 죽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주시는 평화를 알지 못했다.
[43-44절]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그는 예루살렘 멸망의 날을 내다보셨다. 그것은 주후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은 포위되고 마침내 함락되었고 예루살렘 거민들과 그 자녀들은 땅에 메어침을 당하였고 성전과 성벽과 집들은 다 무너졌고 불태워졌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메시아를 보내어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돌아보시는 날을 알지 못했고, 그 날을 저버린 결과는 너무 비참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날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죄인들은 슬픔과 불행의 날이 다가오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45-46절]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 . . .
그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그 안에서 파는 자들과 사는 자들을](전통본문)75) 내어쫓으셨다. 그는 권위를 가지시고 그렇게 하셨다. 사실상, 구약의 성전은 바로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을 위한 집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예표한 집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바로 그 성전에 대해 가장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
그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 사실을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증거하셨다. ‘기록된 바’라는 성경 인증은 ‘신구약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는 개신교회의 기본적 신념을 확증한다. 구약의 성전은 일차적으로는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미리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물론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도 보여준다. 즉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는 곳이었다. 오늘날도 예배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송하고 기도하는 곳이다. 또 이것은 교회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의무이다.
그러나 당시에 성전의 이 순수한 기능이 망가졌었다. 성전 안에는 소나 양들을 파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종의 독점적 판매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성전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제사를 위한 소나 양들을 독점적으로 팔아 이익을 남겼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것은 도적질이나 강도질과 같았다. 그래서 주께서는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지적하며 책망하셨을 것이다. 구약교회는 부패되어 있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어떤 명목이든지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똑같은 악이다. 어느 교회가 장로와 권사 같은 직분자들을 세우면서 혹은 병고침을 위한 안수 기도에서 헌금을 요구한다면 그것도 강도질과 다를 바 없다.
인자하신 주께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신 것은 성전을 향한 그의 열심 때문이었다(요 2:17). 성전의 청결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고 중요한 문제이었다. 교회의 순결성은 교회가 지켜야 할 일들 중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교회에서 모든 교리적 오류와 윤리적 오류를 제거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오늘날도 교회를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순수한 교회가 되게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47-48절]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 . . .
예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설교와 가르침은 그의 사명이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마 4:23; 막 1:38). 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라고 교훈하였다(딤후 4:2). 교회는 어떠한 환경 여건에서도 바른 설교와 가르침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였지만,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방법]을 찾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교훈에 대하여 두 가지 상이한 반응이 있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모든 백성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현상은 진리의 운동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이었다(행 28:24-25).
41절로 48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시고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셨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영접하며 온전히 따르자. 그것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영접할 때 하나님과 화목하고 마음과 환경의 참된 평안을 얻는다. 우리는 주님을 거절하고 배척하는 어리석고 악한 자들이 되지 말고 오직 그를 영접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참된 제자들이 되자.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참된 교회, 순수한 교회가 되게 하자.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교회는 우리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소망을 둘 수 있는 곳이다. 만일 교회가 부패된다면, 우리는 어디에 소망을 둘 수 있겠는가?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는 우리가 용납할 수 없고 용납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오늘날 교회는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순결성의 회복을 위한 노력은 우리가 힘써야 할 매우 중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로 하여금 순수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듣고 배우는 교회가 되게 하는 일을 위해 힘쓰자.
20장: 변론하심
1-8절, 자신의 귄세의 출처를 묻는 말에 답하심
[1-2절]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 . . .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의 출처를 질문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나 기적들을 행하실 때나 성전뜰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실 때에 권위 있게 행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이 가지신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이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바로 알려고 질문한 것 같지 않고 단지 그를 비난할 거리를 찾기 위해 한 것 같다. 정말 믿고자 하는 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이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7: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3-4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 . . .
예수께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참 선지자임을 아는 자는 예수가 어떤 자인지 알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친히 증거하였기 때문이다(요 1:34). 그러나 세례 요한을 믿지 않고 거절한 자는 예수님도 믿지 않고 거절할 것이다.
[5-7절]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 . . .
그들은 서로 의논하여 말했다.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그들은 대답하였다.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그들의 대답은 매우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이었다. 선한 양심과 용기를 가진 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요한은 하나님의 진노의 임박함과 각 사람의 회개의 필요성을 외쳤다. 역사상 거짓 선지자들은 부드러운 말을 했고 심판과 회개를 외치지 않았다. 요한이 회개를 외친 것은 확실히 참 선지자의 표이었다. 백성들은 요한을 참 선지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심히 무지하고 완악하였다. 누구든지 세상의 명예나 권세나 부귀나 육신의 쾌락을 구하는 삶을 회개치 않고서는 예수님께 참으로 나올 수 없다.
[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 . . .
예수께서는 그들의 중심을 아시고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들에게 말해도 그들이 듣지 않고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게 진리를 말하는 것은 마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것과 같다(마 7:6).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음에 나오는 악한 농부들에 대한 비유를 통해 그 지도자들의 악함을 지적하시고 자신의 권세의 출처에 대해서도 증거하셨다.
9-18절, 악한 농부들에 대한 비유
[9-10절]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 . . .
예수께서는 한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러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었는데 농부들은 그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키며,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농부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가리킨다. 주인이 얻기를 원한 ‘포도원 소출’은 하나님의 백성의 열매 즉 하나님께 대한 참 경건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선행을 가리킬 것이다. 주인이 보낸 ‘종’은 하나님의 참 선지자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참 선지자를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를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 하나님의 종을 거절하고 박대하는 것은 곧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거절하고 박대하는 것이었다.
[11-12절]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 . . .
주인이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다. 주인이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쫓았다. 세 번씩 보내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여러 번 자기의 종들을 보내셨음을 뜻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열심과 오래 참으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거절하였다.
[13-16절]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 . . .
포도원 주인이 말했다.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나타낸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다.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보다도 뛰어나신 분이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4-16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 . . .
농부들은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말했다.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그들은 그를 포도원 밖으로 내어쫓아 죽였다. 그러므로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와서 그 농부들을 다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사람들은 듣고 말했다. “그렇게 되지 말지이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것이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셨다. 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죽일 그 지도자들의 결말에 대해서도 증거하셨다. 주인은 와서 그 농부들을 다 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그것은 아들을 죽인 죄악의 대가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교회 대신에 이방인들의 교회를 세우실 것을 나타낸다. 그 비유를 듣던 백성들은 일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일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17절]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 . . .
그는 그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예언된 바이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는 시편 118:22의 말씀도 그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건축자들 곧 지도자들에게서 버림을 받으실 것이다. 그는 그들의 미움과 계략에 의해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건축자들의 버린 돌’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결코 실패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승리의 일이 될 것이다. 과연 유대 지도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예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우리를 위한 영원한 대속(代贖)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약교회의 머릿돌이 되셨다. 신약교회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터 위에 튼튼히 세워지게 되었다.
[18절]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 . . .
주께서는 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구원의 돌인 동시에 심판의 돌이 되신다. 어떤 완악한 사람도 그가 깨뜨리시면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는 어떤 악한 죄인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는 구주이시다. 그러나 그에게 걸려 넘어진 자들 곧 그를 거절하고 믿지 않는 자들은 다 깨어지고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는 그를 대항하는 모든 사람들을 마지막 날 영원한 멸망의 형벌로 벌하실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7-9,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절로 18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거절하지 말자.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는 것은 인생의 무지요 완악함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와 선을 힘써 행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결말을 두려워하자.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영원히 참지는 않으신다.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오며 모든 사람이 그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성실한 하루 하루를 살도록 힘써야 한다.
19-26절,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19-20절]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 . . .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했으나 백성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그의 말을 책잡으려 했다.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교묘하게 그를 죽일 구실을 찾고 있었다.
[21-22절]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 . . .
그들이 물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그 정탐자들의 말은 외식적이었다. 그들의 말은 옳은 말이었으나,그들은 실제로 예수를 그렇게 믿지 않았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유대 나라의 독립을 갈망하던 자들 가운데는 로마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한 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반대는 로마 황제를 거역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누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찬성한다면 유대인들에게 친(親)로마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 질문은 반대도, 찬성도 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넣어보려고 머리를 썼다.
[23-25절]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데나리온 . . . .
예수께서는 그 간계를 알고 말씀하셨다. “[왜 나를 시험하느냐?]76)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그들은 대답했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그는 말씀하셨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교묘히 시험하였지만, 예수님은 신적 지혜와 능력으로 그들의 간계를 아셨다. 데나리온은 당시에 통용되던 은전이다. 옛 시대의 돈은 그 시대의 정치 상황을 나타내었다. 동전이나 은전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과 글이 쓰여 있었다. 그것은 로마 황제의 통치권을 나타내었다.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한 영토이었고 로마 황제의 통치권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로마의 은전을 사용하였고 따라서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합당하였다. 성경은 신자들이 세속 국가에 세금을 내라고 가르친다. 로마서 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다. 시편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소득의 십분의 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레위기 27: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말라기 3:9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십일조]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들은, 십일조는 율법 시대의 규례이며 신약시대에는 폐지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단순히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고 율법이 완성된 것이며 그것은 구약 때보다 축소되거나 쇠약해진 완성이 아니고 더 풍성해진 완성이다. 즉 구약시대에는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다가 신약시대에는 전체가 내 것이 되는 식의 성취가 아니고 오히려 신약시대에는 나의 소득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 되는 식의 성취인 것이다(롬 12:1; 고전 6:19-20). 그러므로 십일조 정신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들의 헌금은 십일조 이상이어야 합당하다.
[26절]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 . . .
그들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였다.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지혜로웠고 정당하였다.
19절로 26절까지에 나타난 진리와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지혜와 지식을 알자. 그는 유대 지도자들과 그 정탐자들의 간계를 아셨다. 그의 대답은 사람들의 기대를 초월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지혜와 지식을 통해 그의 신적 영광을 알자. 우리는 복음서들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자. 우리는 천국 시민이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가 속한 세속국가를 사랑하고 그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위정자들에게 복종하고 또 규정된 세금을 성실하게 내야 한다. 또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신약 아래서도 구약성경의 교훈과 모범대로 소득의 온전한 십일조와 감사 예물들을 힘써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는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한 자들이 되지 말자.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고 죽이려 했고 거짓되며 외식적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는 자, 진리의 대적자,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 말자.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 교회를 허무는 자, 하나님의 일을 파괴하는 자가 되지 말자.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는 자가 되자.
27-40절, 부활에 관해 증거하심
성경과 예수님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 부활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실생활에도 큰 차이를 가져온다. 부활을 믿는 자는 하나님 중심, 진리 중심, 내세 중심으로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지만,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자기 중심, 물질 중심, 이 세상 중심으로 허무하게 살 수밖에 없다.
[27-28절]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 . . .
예수님 당시에 유대 사회에는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이라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활도 없고 영도 없고 천사도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다(행 23:8).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천사도 믿지 않는다. 이 세상은 장차 불타 없어질 것이며 모든 사람은 죽어서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부활과 천국을 믿지 않고 이 세상만 믿으니, 참으로 허무한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사두개인 같은 불신앙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사두개인들이 언급한 모세의 법은 ‘수혼(嫂婚) 제도’라고 불리는 법으로 신명기 25:5-6에 있다. 이 법은 결혼한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하여 그 첫아들로 형의 가문을 잇게 하는 법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자식이 없이 죽는 사람의 가문이 없어지지 않게 했다. 이것은 메시아께서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수 있게 하는 목적을 가진 법이었다.
[29-33절]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 . . .
그들은 계속 말하였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저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인들은 부활의 사실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부활의 성격도 오해하였기 때문에 이런 극단적 경우에 대해 질문했던 것 같다. 그들은 부활 때에도 부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34-3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예수께서는 부활에 대해 몇 가지 증거하셨다. 첫째로, 모든 사람이 부활에 참여하지 않고 한정된 사람들만 참여할 것이다. 이것은 악인들의 부활을 부정하신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요한복음 5:28-29에서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부활은 의인의 부활을 가리킨다. 이 부활에는 제한된 수의 사람들만 참여할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요 3:5). 죄악된 삶을 버리고 예수님의 피로 깨끗케 된 자들만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갈 수 있다(계 21:27; 22:15). 이들은 인류 전체가 아니고 제한적이다.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은 많고 영생의 길로 가는 사람들은 적을 것이다(마 7:13-14).
둘째로, 부활한 자들은 결혼하지 않는다. 천국에서는 부부 관계가 없다. 결혼은 이 세상에서만 필요하다. 자녀 출산이나 음행 방지의 목적에서 특히 그렇다(창 1:28; 고전 7:2). 천국에서는 더 이상 자녀 출산이 필요치 않다. 또 부활한 몸은 전혀 육신의 정욕과 죄악성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음행의 죄를 범할 일이 없다.
셋째로, 부활한 자들은 다시 죽을 수 없다. ‘천사와 동등하다’는 말은 사람이 천사처럼 영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천사처럼 결혼하지 않고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천사가 결혼하지 않듯이, 부활한 사람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천사가 죽지 않듯이 부활한 사람도 죽지 않을 것이다. 천국에는 사망이 없고 질병이나 아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 다시 없을 것이다(계 21:4). 거기에는 장례식이나 무덤이 없다. 죽음은 죄로 인해 왔기 때문에 천국에는 죄가 없으므로 죽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5에서 말하기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였다.
[37-38절]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예수께서는 부활의 성경적 근거를 증거하셨다. 그는 부활을 직접 증거하는 구절들(사 26:19; 단 12:2)을 인용하지 않고 이것들보다 더 근원적인 구절을 인용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자신에 대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는 구절이다(출 3:6). 그는 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안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 즉 죽은 인물들을 기억하는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등은 다 죽었지만, 그 영들은 다 천국에 살아 있고 그 육체도 어느 날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므로, 의인들의 영광스런 부활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부활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부활이 확실한 소망이 되게 하셨다.
[39-40절]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 . . .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했다.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이는 그들이 아무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비난거리를 찾으려던 유대 지도자들은 아무런 소득을 얻을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담대하게, 정당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잘 대답하셨다.
27절로 40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 못하는 믿음 없는 사두개인 같은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저 세상 곧 천국과 영광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는 자들로서 의인들의 복되고 영광스런 부활을 믿고 소망하자.
둘째로, 우리는 부활을 소망하는 자답게, 이 세상의 육신적, 물질적 삶 중심으로 살지 말고, 저 세상 곧 천국과 영생의 삶 중심으로 살자. 우리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보이는 세상을 위주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국을 위주하며 살자(고후 4:18). 부활을 믿지 않으면 자기 중심, 물질 중심, 이 세상 중심으로 허무하게 살 수밖에 없지만, 부활을 믿으면 하나님 중심, 천국 중심, 내세 중심으로 살 수 있다.
41-44절, 다윗의 주, 그리스도
[41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장차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셨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했고(사 11:1), 또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고 말하였다(사 11:10). 이새는 다윗의 부친이다. 또 예레미야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예언하였다(렘 23:5-6).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그가 한 인간으로 오실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42절]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 . . .
예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말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셨다. 그는 구약성경의 시편을 인용하셨다. 진리의 근거는 성경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성경이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증거하셨다. 이곳에서도 그는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그것이 그 표제어(서두의 작은 글씨로 된 내용)에 나타난 대로 다윗의 글임을 증거하셨다. 시편의 표제어까지 인정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경이 진리의 규범임을 증거하셨다. 그는 성경에 근거하여 메시아에 관해 증거하셨다. 이것은 그가 다른 곳들에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신 것과 일치한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대해 정확하고 오류 없는 규범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오늘날 진리의 근거는 성경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원하시는 내용을 다 성경에 기록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교훈과 뜻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즉 객관적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고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누구든지 성경에 밝히 가르쳐진 내용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고, 또 누구든지 성경에 밝히 가르쳐진 내용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다. 누구든지 성경에 밝히 가르치지 않은 것을 다른 이에게 가르쳐서는 안 되며, 또 누구든지 성경에 밝히 가르치지 않은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경은 그리고 오직 성경만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규범이요 법칙이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성경에 의하면, 다윗은 메시아에 대해 ‘나의 주’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지만, 다윗 자신은 메시아를 ‘나의 주’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다른 한 증거이다.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참 사람이심을 증거하지만, 그를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주’라는 말은 여호와와 동등한 명칭으로서 메시아께서 신적 존재이심을 증거한다.
메시아께서 신적 존재시라는 것도 성경에 예언된 바이다. 이사야는 메시아에 대해 예언하기를,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政事)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하였다(사 9:6). 또 미가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영원 전부터니라]”고 예언하였다(미 5:2).
신약성경도 예수께서 ‘주님’이심을 풍부하게 증거하는데 그것은 그의 신성의 명칭이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에 대해 ‘예수’라는 명칭(617회) 외에 ‘주’라는 명칭(200회)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77) 신약성경은 예수라는 명칭(975회) 다음으로 ‘주님’이라는 명칭(749회)을 많이 사용했고 ‘그리스도’라는 명칭 (569회)도 그 다음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과 하나님이시다(고전 8:6; 빌 2:9-11; 계 17:14).
예수께서는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메시아의 사역에 대해 증거한다. 메시아의 사역은 한마디로 원수를 멸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통하여 이루시는 일이다. ‘발등상’은 ‘발 놓는 대’를 뜻하며, 발등상으로 둔다는 것은 굴복시키고 제압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세상 만사를 주권적으로 섭리하시고 인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네 원수’ 즉 메시아의 원수는 인류의 원수인 사탄을 가리킨다.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는 주님의 재림으로 사탄이 완전히 굴복되는 때이다. 이것은 창세기 3:15의 예언이 성취되는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말씀하셨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최초의 복음이요 메시아 예언이었다.
사탄의 굴복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히브리서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러나 사탄의 완전한 굴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사탄이 완전히 굴복될 때까지 예수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권세를 가지고 세상과 교회를 다스리심을 의미한다.
41절로 44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근거가 되고 규범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바로 알고 열심히 읽고 배우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 곧 참 사람이시며 ‘주님’ 곧 참 하나님이심을 알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원수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가 다시 재림하실 것을 알자. 넷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계신 살아계신 주님이시며, 환난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위로자와 인도자, 그리고 크신 도움과 힘이 되시는 것을 깨닫자.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45-47절, 서기관들을 주의하라
[45-47절]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 . . .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삼가라’는 말은 ‘주의하라’는 뜻이다. 제자들은 외식적인 서기관들을 본받지 말고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였다.
서기관들의 문제는 외식이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였다. 그들은 겉모양으로는 점잖고 품위 있었지만, 그들의 속은 달랐다. 옷뿐 아니라 사람의 얼굴 같은 외모도 그러하다. 외적인 아름다움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항상 내면적, 인격적 아름다움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서기관들은 기도할 때도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였다. ‘외식으로’라는 원어(프로파세이)는 ‘보이려고’라는 뜻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들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보이려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사람의 겉과 속은 항상 똑같지 않다. 겉으로는 볼 것이 없어도 속으로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은 외모를 보기 쉬우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무엇을 행해서는 안 된다.
서기관들은 또한 교만과 명예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上座)와 잔치의 상석(上席)을 좋아하였다. 명예는 좋은 것이지만,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교만에서 나오는 욕심이다. 인간은 그렇게 훌륭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심히 부족한 죄인이며 무익한 종들이다(눅 17:10; 18:13). 우리에게는 명예가 합당치 않고, 오직 겸손함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가르치셨다(마 20:26-27).
서기관들은 또한 탐심과 물질욕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취했다. ‘가산’이라는 원어(오이키아스)는 ‘집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과부들의 집들과 그 재산을 탐하였고 그것들을 취하였다. 그들 때문에 과부들은 마음에 큰 고통을 당했고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었다. 우리는 돈을 벌되 정당하게 벌어야 한다.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그것은 물질을 신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먹을것과 입을 것으로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딤전 6:7-10).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들의 받는 판결[형벌]이 더 중하다고 부언하셨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결국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외식자는 회개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훌륭한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 솔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려 해야 한다. 외식자는 하나님께 더 큰 형벌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외식하는 사람들을 조심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자. 또 우리 자신이 외식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자. 우리는 경건과 선행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해서는 안 되고 오직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한다. 또 우리는 명예심과 교만을 경계하고 겸손히 형제를 높이고 섬기는 자가 되자. 교만과 명예심은 성도에게 무서운 악이다. 또 우리는 모든 탐심과 물질적 욕심을 버리고 정당하고 의롭게 돈을 벌고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사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이 세상보다 천국과 내세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한다.
21장: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
1-4절, 가난한 과부의 헌금
[1-4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 . . .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하나님의](전통본문)78)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렙돈은 유대인의 동전으로서 당시 통용되던 돈들 중에 가장 가치가 적은 돈이다. 1렙돈은 128분의 1 데나리온이었다. 1데나리온을 6만원쯤으로 본다면, 그 과부는 천원쯤 헌금한 셈이다.
주께서는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부자들은 풍족한 처지에서 헌금하였으나 그 과부는 어려운 처지에서 그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헌금 액수만 보기 쉬우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의 경제적 형편에 비추어 보신다. 그런데 이 가난한 과부의 행위는 지나친 것인가? 그 여인은 종교에 너무 빠진 광신자이었는가?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다. 성경에서 최초로 십일조를 언급한 것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오면서 멜기세덱에게 그가 얻은 노획물의 10분의 1을 드린 것이었다(창 14:20).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발적 감사 행위이었다. 창세기 28:22에 나오는 야곱의 십일조 서약도 자발적인 것이었다.
구약의 헌금 규례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정신에 근거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지극히 합당한 일이었다. 자식이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듯이, 인생이 창조주 하나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섬기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다. 십일조 규례는 하나님의 주 되심에 대한 인정과 감사의 표시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금 3천 달란트(약 100톤)와 은 7천 달란트(약 240톤)를 하나님께 드렸고, 그의 뒤를 따라 나라의 지도자들과 관리들도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위해 많은 금액을 즐거이 드렸다. 그때 다윗은,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대상 29:11, 14). 그렇다! 헌금은 우리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우리에게 주신 것들 중에서 얼마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 곧 “하나님의 헌금”이다.
이런 말씀들을 살펴볼 때, 본문의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참된 헌금의 귀한 모범이다. 그의 헌금은 십일조 정도가 아니었다. 비록 금액은 보잘것없어도 그는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우리는 헌금을 액수로 판단치 말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신다. 그는 부자들의 많은 액수의 헌금보다 한 가난한 과부의 보잘것없는 액수의 헌금을 더 크게 여기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판단이요 하나님의 평가이다. 우리도 헌금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자.
또 우리는 그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본받자. 그는 자기의 있는 바 곧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바쳤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과 지식과 깨달음, 또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과 헌신은 얼마나 크고 강렬하였는지!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금을 드리고 있는가?
5-19절, 종말의 징조들
[5-11절]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美石)과 . . . .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美石)과 헌물(獻物)로 꾸민 것에 대해 말하자, 예수께서는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그는 또 말씀하셨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주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세상 종말의 징조들에 대해서도 함께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는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웠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곧 재림주로 자처할 것이다.
둘째로, 그는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국가들 간의 전쟁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전쟁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겠지만, 인류는 20세기에 1,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처참한 전쟁을 경험하였고 이제 3차 세계 대전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 만일 3차 세계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전쟁은 이전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처참한 전쟁이 될 것이다. 핵폭탄과 화학가스폭탄과 세균폭탄은 인류에게 큰 공포의 대상이다. 이러한 전쟁들과 전쟁들의 소문은 세상 종말의 한 징조이다.
셋째로, 그는 “처처에 큰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큰 지진의 힘은 최초의 원자폭탄의 약 만 배의 힘이라고 한다. 큰 지진들은 20세기에 더욱 빈번해졌다고 한다. 20세기에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지진들은 24개 이상이 되며, 그 중 2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도 14개나 된다.79) 지진은 세상 종말의 한 징조이다.
넷째로, 그는 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기근도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1870년대에 남부 인도에서 약 5백만명이 기근으로 죽었고 중국에서는 9백만명 이상이 죽었다. 1929-30년에는 중국의 황하강의 홍수로 인한 기근으로 약 2백만명이 죽었다. 1943년 인도 동부 벵갈에 대 기근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후 150만명 이상이 기근으로 죽었다. 1960년대 이후 아프리카의 소위 사하라 사막 남부 사헬 지역과 남부 아프리카, 특히 이디오피아 등에 심각하여 수백만명이 죽었다.80) 세계은행은 지구상에서 매일 7억 5천만명 이상이 굶주리고 있다고 보고한 적이 있다.81) 기근은 세상 종말의 한 징조이다.
다섯째로, 그는 온역 곧 악한 질병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역사상 수많은 질병들이 있었지만, 의학이 발달된 오늘날도 병원들은 각종 환자들로 붐빈다. 고혈압, 당뇨, 암 등은 오늘날의 대표적 질병이다. 특히, 성도덕의 타락과 음란, 특히 동성애로 인하여 성병이 유행하고 아직도 치료약이 없는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 질병이 확산되고 있다. 악한 질병들은 세상 종말의 한 징조이다.
여섯째로, 그는 하늘로서 무서운 일들과 큰 징조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세계는 이상 기후의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 학자들은 그것이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홍수와 폭설과 폭염 등이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세상 종말의 한 징조로서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다.
[12-17절]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혹은 ‘준비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口才)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일곱째로, 그는 성도들이 핍박과 미움과 순교를 당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 때에 로마 황제에 의한 핍박, 종교 개혁 시대에 로마 교황에 의한 핍박 등은 예비적 단계이었다. 그때 진실한 성도들은 많은 고난과 핍박과 심지어 순교를 당하였었다. 20세기 초, 우리 선조들은 일본 통치 시대의 신사 참배 강요와 이북의 공산당의 핍박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주의 재림 직전에 세계적 전제국가, 아마 공산국가로 인해 이 예언은 성취될 것이다. 그때, 성도들은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에게 핍박을 당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오늘날 공산 세계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성도의 핍박과 미움과 순교의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성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신 구주이시며 기독교 진리가 유일한 진리임을 믿는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흑백 논리적이고 비타협적이다. 기독교는 중립주의를 배격한다. 하나님과 세상, 천국과 지옥, 진리와 거짓, 생명과 사망, 의와 불의 사이에는 결코 중립 지대나 회색 지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신념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다원적인 세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때때로 미움과 핍박을 받는 것이다.
[18-19절]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너희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얻으라].82)”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다. 물론 우리가 순교의 죽음을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죽음 앞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킬 것이며 우리의 몸도 마지막 날에 온전한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다. 단지 우리는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한다(계 13:10; 14:12).
우리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장차 불타 없어질 것을 생각하고 거기에 너무 애착을 두며 살지 말자. 우리는 주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세상 종말의 징조들을 깨달아야 한다. 종말이 되면,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며, 전쟁과 전쟁 소문이 있을 것이며 큰 지진, 기근, 악한 질병들, 하늘의 징조들, 핍박과 순교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 이런 징조들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 가운데서 끝까지 인내하면서 살자. 우리는 삼위 하나님과 성경 말씀을 다 믿고 기도하고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성경 교훈을 성실히 행하며 살아가자.
20-24절,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
[20-21절]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 안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본문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주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을 예언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그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때 유대에 있는 많은 사람이 산으로 피신하였고 예루살렘 성 안에 살던 많은 사람이 성밖으로 나갔는데,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기억한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22절]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예수께서는 또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 멸망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말씀들이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자들에게 율법에 공의의 형벌을 경고해두셨다.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은 그러한 경고들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연약함을 보였고,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께서 오셨는데도 그를 영접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들의 행위는 역사상 그들의 많은 죄악들 가운데서도 가장 극악한 범죄 행위이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사건을 통해 그들에게 상당한 보응과 벌을 내리실 것이다.
[23-24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그 날은 큰 환난의 날이기 때문에, 임신한 여인들과 젖먹이는 여인들에게 화가 될 것이다. 그들은 피신하거나 먹을 양식을 얻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또 그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이방 나라들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때에 칼과 기근에 죽은 유대인들이 110만명 이상이었고,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9만 7천명이었다고 한다.83)
특히,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이다.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충만한 수의 이방인들이 예수 믿어 교회 안에 들어오기까지라는 뜻이다. 그 기간은 이방인 교회들의 시대이다. 이방인 교회들의 기간이 지나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25-26에서 말한 대로, 유대인들의 국가적, 민족적 대회심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인다.
25-28절, 자신의 재림(再臨)에 대한 예언
[25-26절] 일월성신[해와 달과 별들]에는 징조가 있겠고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리고] 일월성신[해와 달과 별들]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는 자신의 재림 직전에 있을 하늘과 바다의 징조들에 대해 예언하신다. 11절에서도, 그는 세상 종말과 자신의 재림 직전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멸망 직전에 하늘에서 불붙은 칼과 혜성(彗星)과 불빛과 병거와 군대 등이 보였다고 하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런 내용을 전했다고 한다.84)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는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에 더 놀랍고 두려운 징조들이 있을 것이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다. 마태복음 24: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또한 바다도 파도들의 우는 소리를 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심할 것이다. 이 때 세상 사람들은 이런 놀랍고 두려운 일들로 인하여 혼란 중에 마음의 고통과 근심을 가질 것이며 세상에 임할 일들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할 것이다.
[27절]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구름을 . . . .
예수께서는 또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징조들이 있은 후에, 주께서는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는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이다(행 1:9-11). 사도 요한은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말하였다(계 1:7).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의 초림(初臨)과 너무 대조될 것이다. 초림 때에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셨고, 그 어린 아기는 마굿간의 말구유에 누이셨었다. 그는 세상에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러나 재림의 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는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은 위엄과 영광이 넘칠 것이다. 그는 왕의 영광, 심판자의 영광을 가지고 오실 것이다.
[28절]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 . .
예수께서는 또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救贖)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의 구원이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았지만(엡 2:8), 우리의 구원은 아직 소망 가운데 받은 구원이며 몸의 구속(救贖)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롬 8:23-24). 주의 재림 때에 우리의 몸은 죄성이 전혀 없고 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부활함으로 영화롭게 되며, 살아 있던 자들은 산 채로 영화롭게 변화될 것이다. 그것이 영화(榮化)이다. 이 구원의 날이 점점 더 가까워 오고 있다(롬 13:11).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중요한 한 의미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은 곧 우리의 영화로운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들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더욱 분발하고 힘을 내어 하나님과 다시 오시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세상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로 때때로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믿음과 소망까지 약해질지라도 우리는 일어나 머리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화로운 구원의 날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고 힘을 내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재림의 날을 확신하고, 또한 그 재림의 날이 곧 우리의 영화로운 구원의 날이 됨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더욱 간절히 소망하자. 주께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우리 성도들도 그의 영광스런 모습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29-38절, 항상 깨어 기도하라
[29-31절]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 . . .
예수께서는 또 한 비유로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무화과나무는 주로 여름에 싹이 나서 열매를 맺어 가을에 추수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싹이 나는 것을 보면 누구든지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주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에 대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아야 한다. 그 징조들은 거짓 그리스도들의 나타남, 전쟁들과 지진들과 기근들과 악한 질병들, 핍박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의 징조들 등이다. 주께서는 자신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러운 시작을 동일한 시점으로 간주하셨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현재의 하늘과 땅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여 두신 징조들의 나타남을 주목해야 한다. 과연, 오늘날 그것들 중 다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거짓 그리스도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고, 전쟁들과 지진들과 기근들과 악한 질병들이 많이 있고, 핍박들도 많이 있다. 주께서 예언하신 징조들이 이미 많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32-3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주님의 말씀의 확실함을 증거한다. ‘이 세대’는 일차적으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자신의 재림을 연결시켜 말씀하셨고, 그의 예언은 그가 말씀하신 지 약 40년 후 예루살렘 성의 멸망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세대’는 또한 이 세상을 가리켜야 할 것이다. 주의 재림 때에도 비슷한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예언한 모든 징조들이 이 세상이 지나가기 전에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루살렘 멸망과 같이, 주의 재림 직전에도 같은 징조들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주께서는 덧붙여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의 말씀의 진리성을 한번 더 증거한 것이다. 주께서 하신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세상은 변하고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
[34-35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우리는 다가올 주의 재림의 날과 영광스러운 천국의 시작을 생각하며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마땅히 조심해야 한다. 마음이 둔해진 자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고 잊고 살다가 그 날을 뜻밖에 맞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 날에 버림을 당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마음이 둔해지는 원인들로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 등 세 가지를 언급하셨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첫째로, 방탕함이 성도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방탕함은 과도한 쾌락의 추구를 가리킨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즐거움이 있다. 먹는 즐거움이 있고 가정의 즐거움이 있고 운동이나 취미 생활의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즐거움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둘째로, 술취함도 성도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술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술취함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큰 죄가 된다(고전 6:9-10).
셋째로, 생활의 염려도 성도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생활의 염려는 죄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죄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생활의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든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신 대로, 이생의 염려와 돈과 쾌락은 말씀의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다(눅 8:14).
주의 재림은 온 지구상의 사람들에게 덫과 같이 갑자기 임할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멸망과 심판의 덫이 될 것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 중에도 조심하지 않는 자는 그 날을 뜻밖에 맞을 위험 가운데 있다.
[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 . . .
예수께서는 또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장차 올 멸망을 피하고 영광의 구주 앞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서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대환난을 통과할 것이다(마 24:21, 29; 행 14:22; 살후 2:1-3; 계 7:14.). 그러나 깨어 있는 자들은 그 대환난에서 멸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계 13:10; 14:12).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태도이다. 성도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을 감사하며 또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로와 능력을 간구한다.
[37-38절]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 . . .
예수께서는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다. 낮은 사람이 일하는 시간이고 밤은 쉬는 시간이다. 모든 백성은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갔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죽이려 하였으나 모든 백성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성전에 나아왔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워 옴을 아셨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거나 위축됨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고 담대하게 다 가르치셨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오늘날 주의 종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우리는 환경에 위축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성실한 전파자와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29절로 38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그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이 오늘 시대에 벌써 상당히 이루어졌음을 깨닫고 주의 재림의 날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음을 알자.
또 우리는 주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함을 알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그의 모든 말씀 곧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없어지지 않고 다 성취됨을 깨닫자. 우리는 신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고 특히 신약성경에 증거된 종말 예언의 말씀들을 다 믿자.
또 우리는 방탕함이나 술취함이나 생활의 염려로 우리의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조심하자. 우리는 과도한 쾌락과 오락을 추구하지 말고 술취하지 말고 생활의 염려에도 빠지지 말자.
또 항상 깨어 성경을 읽고 기도하자.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며 동행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을 하나님께 고하며 그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감사하며 그의 위로와 능력을 항상 간구하자.
22장: 잡히심
1-13절, 예수님을 죽이려고 연구함
[1절]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웠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 생활을 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오기 전날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의 장자들을 죽이는 재앙을 내리실 때 양의 피를 문틀에 발라 그 재앙을 면하였던 일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무교절은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먹는 절기라는 뜻이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1월 14일 저녁이었고 무교절은 1월 15일부터 7일간이었다(레 23:5-6). 유대인들의 하루는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이기 때문에, 오늘날로 보면 유월절과 무교절 첫날은 같은 날 저녁이었다. 날이 저물기 전이 유월절이요 날이 저문 후부터 무교절 첫날이 된다. 신약성경에서는, 본문에서와 같이, 유월절과 무교절이 동일시되기도 한다.
[2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 . .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무슨 방책으로 죽일까 연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대제사장들은 제사장들 중에서 선택된 지도적인 인물들로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과 회원들이었고,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그 사본을 만드는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롭게 행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연구하고 있었다.
신약성경 복음서들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처럼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던 까닭을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마 12:14; 요 5:16 전통본문). 둘째로,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고 그를 죽이려 하였다(요 5:18; 마 26:65-66). 셋째로, 그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을 악하다고 하시므로 그를 미워하였다(요 7:7). 넷째로,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다(마 27:18).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연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백성들의 다수가 예수님을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에는 일반 백성보다 지도자들이 더 악하였다. 오늘날에도 일반 성도들보다 목사나 장로 등 교회직분자들이 더 타락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항상 조심해야 한다.
[3-4절]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 . . .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 가룟 유다가 주를 배신한 것은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자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였다. 군관들은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로서 대제사장을 보좌하는 자들이었다고 한다. 성경은 그의 배신의 원인을 네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작정이다(눅 22:22).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작정의 결과이며, 악한 자의 악행도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다. 둘째는 그의 불신앙 때문이다(요 6:64). 믿지 않는 자는 결국 배신한다. 셋째는 돈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이다(마 26:15; 요 12:6). 물질적 욕심이 결국 그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넷째는 사탄의 활동이었다(눅 22:3; 요 13:27). 악한 자의 배후에는 사탄의 활동이 있다.
[5절]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가룟 유다의 제안을 받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였다. 마태복음 26:15에 보면, 가룟 유다가 먼저 그들에게 돈을 요구하였고 그들은 은 30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은 30’은 은 30세겔(약 300그램)을 가리키든지 아니면 은전 30개 즉 30데나리온(약 150그램)을 가리킬 것이다. 가룟 유다는 돈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마침내 3년 동안 따랐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영생의 주님을 은 30에 바꾸었다. 그는 참으로 가련한 자이었다!
[6절]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 . . .
유다는 허락하고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허락하다’는 원어(엑소몰로게오)는 ‘약속하다’는 뜻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대제사장들과 약속했다. 그는 예수님을 무리가 없을 때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그것은 그들의 연구 결과이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였고 백성의 반대를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또는 백성이 반대할 시간이 없도록 민첩하게 예수를 처치하기 위해서 무리가 없는 시간을 찾고 있었다. 악한 자들은 악을 행하는데 그들의 지혜를 사용하고 있었다.
[7절]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지라.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르렀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계획한 일과 유월절 양 잡는 날은 우연하게도 일치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것은 구약의 예언과 예표가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것이었다. 옛날 출애굽 시대에 애굽에 내려진 장자 재앙 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집 문틀에 발라진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이 되었듯이,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희생되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구원이 되실 것이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이었다.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는 것 같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행까지도 선한 구원의 일을 이루시는 과정이 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심으로 인류의 구속(救贖)을 이루실 것이다.
[8-13절]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가서 . . . .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그들은 말했다.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는 말씀하셨다.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그들은 나가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였다. 그들의 유월절 식탁은 주님의 신적 지식에 대한 확인과 확증이었다. 신성의 영광을 보이신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유월절 어린양이 되실 것이다.
1절로 13절까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인간은 참으로 사악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악만 행하는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으로, 또 말씀과 성령으로 단속지 않으시면, 우리는 언제나 넘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믿음에 굳게 서야 하며,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만 의지해야 하며, 순간마다 성령의 인도하심만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악한 자, 위선자, 살인자, 간음자, 배신자가 될 수 있다.
둘째로, 인간의 죄악이 아무리 크고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실패치 않으시고 성취되신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온 세상의 모든 일들을 홀로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 세상은 주인 없는 집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우리 죄를 위한 유월절 어린양이 되게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바라고 그의 뜻에만 순복하며 살자. 그것이 영생이요 평안이요 참된 행복이다.
14-23절, 나를 기억하며 이것을 행하라
[14-16절]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 . . .
때가 이르자 예수께서는 [열두]85) 사도들과 함께 앉으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그의 열두 제자들과 함께 이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들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그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속죄 사역을 이루셔야 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은 장차 천국에서 충만하게 누릴 것이다. 천국은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축제가 될 것이다.
[17-18절]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 . . .
예수께서는 잔을 받으시고 감사하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그는 그 날 밤 잡히시고 다음날 새벽 정죄를 받으시고 그 날 아침 9시에 처형되실 것이다. “이 잔을 가져다가 너희끼리 나누라”는 말씀은 장차 예수님이 떠나신 후 제자들이 주님 없는 식탁을 나누어야 할 것을 암시하시는 것 같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다. 주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천국에서는 기쁨이 넘칠 식탁 교제가 있을 것이지만, 그때까지 제자들은 육신적으로 주님과 떨어져서 그들 스스로 유월절 식탁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19절]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 . .
예수께서는 또 떡을 가져 감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그는 유월절 떡을 자신의 몸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는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자신의 몸을 우리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실 것이다.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주께서는 또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직역하면 “나를 기억하며 이것을 행하라”는 말씀이다. 성찬 의식은 주의 명령이다. 주께서는 ‘이것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의식을 행해야 한다. 이 의식의 중요한 의미는 예수님을 기억하는 데 있다. 무엇을 기억하는 것인가?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고난의 주님을 기억한다.
[20절]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저녁 먹은 후에 주께서는 잔도 이와 같이 하며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는 유월절의 포도즙을 자신의 피로 표현하셨다. 구약도 피 뿌림이 있었다(출 24:6-8). 그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하였다. 이제 예수께서 오셨고 우리를 위해 친히 자신의 피를 부으실 것이다. 그것은 옛 언약과 대조되는 새 언약이 될 것이며 옛 언약에서 예표된 바가 실체(實體)로 드러나는 것이다. 또 옛 언약 아래서는 죄와 심판이 강조되었으나, 새 언약 아래서는 죄사함과 의가 강조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구약과 신약을 정죄와 의로 특징지어 표현하였다(고후 3:9). 그러나 두 언약은 두 별개의 언약이 아니고 동일한 은혜의 언약이다. 유월절 잔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실 피를 상징하였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부어질 새 언약의 피이었다.
[21-23절]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들은 서로 물었다.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인간의 큰 죄는 하나님의 큰 구원을 이루고 있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의 죄는 큰 죄이었지만 단지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는 일에 불과하였다.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 선하고 악한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범죄의 책임은 분명히 인간에게 있다. 하나님은 악을 조장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패와 죄악까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
14절로 23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찬의 의미를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자. 성찬의 떡과 성찬의 포도즙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우리가 죽어야 할 죄인이었으나, 우리 대신 죄 없으신 그가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셨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고 그것이 우리의 죄씻음이 되었다. 우리는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그의 고난을 기억하고 감사한 마음과 믿음으로 참여하자.
둘째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를 따르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믿자.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우리 속에는 여전히 죄성이 남아있고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실패와 연약의 자취들이 있으나, 우리는 그의 의만 감사히 받고 의지하며 오직 그의 뜻만 순종하자.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따르자.
24-30절, 섬기는 자가 되라
[24절]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제자들 가운데서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생겼다. 이것은 인간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명예심과 교만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방금 전에 자신이 한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시고 죽으실 것을 암시하신 때에 제자들이 누가 크냐 다투었으니 참으로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다. 제자들의 문제점은 명예심과 교만을 버리지 못한 데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문제점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있는 문제점이다. 교만은 다툼을 일으키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분열시킨다.
그러나 겸손은 교회의 단합과 일치를 가져온다. 에베소서 4:1-3,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빌립보서 2:2-4,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25-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교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죄악이다. 그것은 마귀의 죄이다. 마귀는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함으로 마귀가 되었다(딤전 3:6).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미워하신다(잠 6:16-19). 세상에서는 큰 자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지만, 교회에서는 큰 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마태복음 23: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27절]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원문에는 27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주님 자신이 제자들을 가운데서 섬기는 자로 계시기 때문이었다. 본문의 사건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행위가 있은 직후에 되어진 것 같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제자들이 서로 용서함으로써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될 것을 교훈하시는 뜻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친히 제자들을 섬기신 것을 나타내는 뜻도 있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섬기는 자로 처신하셨다.
주께서는 친히 겸손의 본을 보이셨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는 주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28-30절]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제자들은 주님의 공적 사역 기간 동안 그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주님과 함께한 자들이었다. 주께서는 사람들에게서 오해와 비난과 미움을 당하셨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주님과 함께하였다. 비록 그들에게 많은 부족과 실수와 결함이 있었지만, 한가지 귀한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랐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중요하였다. 오늘날 우리도 많은 부족과 실수와 결함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이다.
주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이제 보상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들에게 격려가 되는 말씀이다. 아버지께서 나라를 자신에게 맡기신 것같이 그는 그 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그들이 그의 나라에서 그의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실 것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장차 충만한 즐거움과 영광과 존귀를 주실 것이다. 이러한 상은 그들에게뿐 아니라, 주를 위해 헌신한 모든 일꾼들에게 약속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고전 3:7-8).
24절로 30절까지의 교훈은, 우리가 교만과 명예심을 버리고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또 이웃을 섬기며 서로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다. 우리가 이처럼 주의 교훈을 따를 때 주께서는 내세의 풍성한 즐거움과 영광으로 상 주실 것이다.
31-34절, 시몬을 위해 기도하심
[31-34절]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세상에는 사탄의 시험이 있다. 그것은 우리로 범죄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시듯이, 사탄도 실제로 존재한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이다. 그는 에덴 동산에 실제로 있었고 뱀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었다. 요한계시록은 그를 ‘큰 용, 옛 뱀, 마귀, 사단’이라고 표현하였다(계 12:9). 우리는 사탄의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하였다. 그는 인류 역사 처음부터 이제까지 활동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 당시에 그의 제자들을 밀 까부르듯이 이런 일 혹은 저런 일로 시험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시몬 베드로는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다고 고백했으나 그는 그 날 밤 주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그것은 3년간 주를 따라다니며 훈련받은 것을 무(無)로 돌리는 큰 실수와 범죄일 것이다.
사탄은 베드로뿐 아니라 또한 우리 중 누구라도 그렇게 범죄하게 할 수 있다. 사탄은 지금도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 되게 하는 악령이다. 사탄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이며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이다(엡 2:2).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본성의 죄악성과 연약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깨어 있지 않는다면 우리도 시몬 베드로와 같이 큰 실수와 범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의 활동은 제한적이다. 사탄은 주의 제자들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님께 요청하였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욥 1:12; 2:6). 온 우주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사탄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활동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겨야 한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고 또 믿음까지 잃으면 완전히 실패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지키면 우리는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사탄을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연약해서 실수하고 범죄할 수 있으나, 죄를 깨닫는 순간 그 죄를 고백하고 그것을 버리고 그것을 떠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회개를 기뻐하신다(계 2:5; 3:19).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 즉 우리가 죄짓지 않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회개할 때 다른 이들을 굳게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죄에서 떠나라고 권면하고 믿음과 의에 굳게 서도록 격려할 수 있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의 큰 죄를 범한 후 통회자복하고 회개하면서 자기 속에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주시고 성령을 거두지 마시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한 후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라고 말했다(시 51:10-13).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큰 죄를 범했으나 회개하고 돌이킨 후 다른 이들을 굳게 할 수 있었다.
오늘 본문은 또 주께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백성을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렸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위해서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하시는 대제사장이시다(히 2:17; 4:14).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브리서 7:25,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의 중보의 기도는 효력이 있다.
주께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신 내용은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대속하신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성도에게 있어서 생명줄이다. 사람이 예수님 믿는 믿음이 있으면 영원한 생명이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영생이 없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요 3:36; 롬 1:17). 이 복음 신앙, 속죄 신앙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된다(요일 5:4). 믿음이 쇠약해지지 않는다면, 시몬 베드로처럼 어떤 실수와 범죄의 현실에서도 다시 일어나 주께 엎드려 용서를 구하며 새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시험을 조심하자. 사탄은 실재하며 지금도 성도들을 밀 까부르듯이 시험하여 실수하고 범죄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사탄의 시험을 조심하며 죄 짓지 않기를 힘써야 하며 깨어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또 우리는 믿음을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과 사탄의 시험을 이긴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다 함을 얻고 승리하며, 또 혹시 우리가 실수하고 범죄했을 때라도 즉시 돌이켜 회개하고 주께로 나아올 수 있다.
또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시며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리신다. 특히 그는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많은 실수와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도로 믿음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회개하고 새 힘을 얻는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효력이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드리심으로 우리를 도우심을 깨닫고 감사하자!
35-38절, 부족한 것이 있더냐?
[35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 . . .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열두 사도들은 주의 명령대로 돈을 넣은 전대나, 여행용 물건을 넣은 주머니나, 여분의 신들을 가지지 않고 전도의 길을 떠났을 때, 부족한 것이 없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보호와 공급을 체험하였다. 우리가 믿음 중심, 말씀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만 산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말했다(시 23:1).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33에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먹을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며 산다는 뜻이다. 우리가 믿음과 순종으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해주실 것이다. 히브리서 13:5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것뿐 아니라 육적인 것도, 또 내세의 것뿐 아니라 현세의 것도 공급해주신다.
[36절]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 . . .
예수께서는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계속 기적적 보호와 공급을 체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는 많은 기적들에 관해 말하지만 기적주의는 아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목적으로 특별한 경우에 주신 것이다. 이제 제자들에게는 핍박도 있고 해도 받고 심지어 죽임도 당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이나 거처할 집의 부족도 있을 것이다.
제자들은 주께서 죽으신 후에는 돈주머니나 여행 가방이 필요하고 아마 호신용 검도 필요할 것이다. 주의 말씀의 참 뜻은 제자들이 이제는 모든 정당한 인간적 방편을 무시하지 말고 사용하라는 것이라고 본다. 제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손으로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사도 바울은 자기 손으로 일하는 본을 남겨주었다(행 18:3; 행 20:34-35). 그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교훈하였다(살후 3:10). 성경은 우리에게 성실하고 근면한 생활을 장려한다(잠 6:6-11; 10:4; 11:16; 12:24).
[37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그는 자신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웠음을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의 작정대로 또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되는 것임을 말씀하셨다. 성경에는 메시아께서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을 것이 기록되어 있다(사 53:12).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께서는 마침내 불법자로 간주되셨고 그래서 가장 극한 사형을 당하셨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인으로 취급되셨다. 그 시대에는 도덕도, 정의도 없었다. 오직 불의만 판을 쳤고 억울함이 가득하였다. 이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속(代贖)의 이치가 있었다. 죄 없으신 그가 형벌을 받으셨으므로 죄 있는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또 이제까지 고난 없는 전도 사역을 했던 제자들은 이제부터 고난을 각오하며 해야 할 것이다.
[38절]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 . .
그들이 말했다.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족하다.” 어떤 주석가들은 본절을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의 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자 주께서 “그만 말하자. 그만하면 되었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36절에서 그가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그는 호신용 칼을 허용하신 것 같다. 그러나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그의 평소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마 5:39-44) 그것을 쓸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검이 두 개면 족하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35절로 3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주권적으로 보호하시고 공급하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므로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 중심, 진리 중심, 믿음 중심으로 사는 자에게는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이 있다 .
둘째로, 우리는 모든 정당한 인간적 방편들을 무시하지 말고 사용하면서 날마다 근면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적 방법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공급하실 수 있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방법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정당한 인간적 방편들을 사용해야 한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부지런히 일해야 하고, 주부는 집안일에 부지런해야 하고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우리는 기적주의의 생각을 버리고 또 쉽게 많은 돈을 벌려는 생각도 버리고, 또 게으르게 놀고 먹으려 하지 말고 각자의 일에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주의 제자들도 고난의 길을 걸었음을 기억하고 고난을 각오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므로 그 고난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높으시고 뜻을 이루는 일이 됨을 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어떤 힘든 형편과 처지라도 하나님만 의지하며 인내하며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끝까지 실천해야 한다.
39-46절, 감람산에서 기도하심
[39절]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 . . .
예수께서는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셨고 제자들도 좇았다. 예수께서는 감란산에 가셔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으셨다. 습관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한다. 매일 규칙적으로 시간을 구별하여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습관, 주일을 거룩히 지키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물건을 사거나 텔레비젼을 보거나 운동을 하지 않는 습관, 교회의 공적인 예배 시간에 빠지지 않는 습관 등은 좋은 습관이며 자신의 믿음의 성장에 유익하다.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40절]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 . . .
예수께서는 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주께서는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셨다. 그는 특히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이 세상에는 죄악된 일들과 마귀의 시험들이 많다. 이것들은 우리의 연약하고 부패한 본성을 자극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고 거역하고 범죄하게 만든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죄를 안 짓는 것이다. 기도는 바로 성도가 죄 짓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기도하는 자는 깨어 마귀의 시험을 대적하고 죄를 피할 수 있다.
[41절]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무릎을 꿇고 하는 것은 간절한 기도이다. 사도 바울도 종종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행 20:36; 엡 3:15). 우리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하고(마 6:7) 주문을 외우듯이 헛된 반복을 하지 말아야 하지만, 냉냉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성경은 부르짖는 기도에 대해 많이 증거한다(시 3:4; 18:6; 27:7; 28:1; 30:2; 40:1; 렘 29:12). 주께서는 우리가 끈질긴 강청의 기도와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셨다(눅 11:8; 18:6).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되, 시시때때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것이다.
[42절]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의 잔을 피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라도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앞세우셨고 그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셨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보다 언제나 더 지혜로우시고 선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고난의 현실 가운데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달게 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내 뜻을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야 한다. 이것이 합당한 기도 자세이다.
[43-44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 . .
한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그의 힘을 도왔다. 예수께서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고 땀은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 ‘힘쓰고 애써’라는 원어는 ‘고통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기도는 쉬운 일이 아니다. 주께서는 고통 가운데서도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이 된다. 우리도 항상 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며 특히 고난과 환난의 날에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피난처와 견고한 망대로 삼고(시 61:3)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이다.
[45-46절]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 . . .
예수께서는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해 잠든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주께서 잡히실 날 밤이었지만,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지 못했다. 그들은 슬픔을 인하여 잠이 들고 말았다. 주를 진실히 믿고 따랐던 그들, 3년간이나 주님의 친 음성으로 은혜로운 교훈의 말씀을 받았던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육신은 여전히 연약하였다. 인간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 우리의 성화란 얼마나 더디고 보잘것없는지!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쳐 복종시키는 연습, 자기 부정(극기)과 절제의 연습을 해야 한다.
39절로 46절까지의 내용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얻었다. 첫째로, 우리는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계명을 순종하는 좋은 습관을 기르되, 특히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습관과, 공예배에 규칙적으로 참석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기도함으로 죄와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깨어 기도하는 자는 시험에 떨어지지 않고 시험을 이길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기도하되 특히 어려운 일들을 당했을 때 끈질긴 강청의 기도,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올려야 한다. 주께서 무릎을 꿇고 땀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셨듯이, 우리도 환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앞세우며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보다 더 지혜롭고 더 선하시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47-53절, 잡히심
[47-48절]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에 하나인 . . .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왔다.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였다. 가룟 유다는 주께 입맞춤으로 그를 악한 무리에게 넘겼다. 입맞춤은 당시의 인사법이었다.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의 서신들에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롬 16:16; 고전 16:20; 고후 13:11; 살전 5:26; 벧전 5:14). 그것은 성도의 거룩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물론 동성간의 인사로 제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밤에 가룟 유다는 예수를 잡으러 온 무리들 앞에 서서 그에게 나아와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증거된 대로 그 무리들과 약속한 ‘군호’이었다(마 26:48; 막 14:44). 그는 그 무리에게 예수를 확인시켜 그를 잡게 하려고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거짓되고 위선적인 인사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에게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열둘 중에 하나’이었던 유다, 3년간이나 주와 동행하며 그의 의롭고 선한 인격과 교훈과 행동을 친히 보았던 유다, 예수께서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그이었지만, 그 밤에 그는 주님을 배신하고 악한 유대 지도자들편에 서서 예수를 체포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것이 인간의 악하고 어리석은 모습이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고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을 것이다(마 27:5). 참으로 불쌍한 유다이었다!
[49-50절]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 . . .
주님의 좌우에 있는 자들이 그 될 일을 보고 말했다.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편 귀를 떨어뜨렸다. 요한복음은 그가 시몬 베드로라고 증거한다(요 18:10). 그는 의롭고 선하신 주님을 잡는 무리를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칼을 빼어 주님을 잡는 사람을 쳤다. 그의 칼은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쪽 귀를 잘랐다. 베드로의 양심에는 그것은 공무집행 방해의 행동이 아니고 정당방위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께서 죽으셔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워 사형 선고를 받고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능욕과 채찍질을 당한 후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말씀하셨었다(마 20:18, 19). 그는 잡히셔야 했고 죽으셔야 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의 가실 길이었다. 이사야 53장은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자세히 예언하였다. 또 예수께서는 평소에,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교훈하셨었다(마 5:39). 그러므로 베드로의 행위는 정당하지 못하였다. 그 의분의 칼은 참으로 주를 위하는 것이 못 되었다. 오히려 그는 잡히시는 예수님의 뒤를 묵묵히 따랐어야 하였다.
[51절]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예수께서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시며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 그는 자기를 잡는 무리까지 긍휼히 여기셨고 그들의 악행을 참으셨다. 여기에 주님의 긍휼과 인내가 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라고 하셨다(마 26:53-54). 한 영은 약 6천명의 군인들을 가리킨다. 열두 영은 약 7만 2천명이다. 그것은 그가 충만한 수의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그 권세를 쓰지 않고 끝까지 참으셨고 악인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해주셨다. 여기에 주님의 긍휼이 다시 증거된다. 비록 그 종이 자기를 잡으러 온 악한 자들에 속해 있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떨어진 오른쪽 귀를 붙여주셨던 것이다. 이것이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이 아닌가? 사도 바울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말했다(롬 12:20). 주께서 오른쪽 귀를 낫게 해주신 것은 그의 긍휼과 사랑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능력이었다.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이 떨어진 귀를 붙여줄 수 있는 자가 또 누구인가? 그의 능력은 신성(神性)의 능력이었다. 그는 잡히시는 그때에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무리들에게 능력으로 증거하셨던 것이다.
[52-53절]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 . . .
예수께서는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어제까지 예수께서 성전에서 무리를 가르치셨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들은 무리 앞에서 그를 잡을 만큼 악하게 행동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양심은 그런 정도만큼 그들을 제재하였다. 그러나 이제 악한 자들의 때가 왔다. 어두움이 세상을 지배하는 때가 왔다. 유대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낼 때가 왔다. 그들의 양심은 통제력을 잃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극악한 죄를 지었다. 그들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 인격자요 도덕적 인격자이셨던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영광의 주님을 죽이려 하였다. 인류의 모든 죄악은 그들의 이 행동,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죽이려는 이 행동에서 절정을 이룰 것이다.
47절로 53절까지는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입맞춤으로 주님을 배신하는 자가 되지 말자. 그것은 거짓이었고 위선이었고 이중적 행동이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마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그에게 은 30을 달아주었다(마 26:14-16). 은 30은 30데나리온을 가리킨다면 오늘날 돈으로 180만원 정도이며, 30세겔을 가리킨다면 360만원 정도이다. 그는 돈 몇 백만원에 주님을 팔았던 것이다. 재리의 유혹은 신앙의 실패자가 되게 한다. 그것은 가시떨기에 뿌리운 씨와 같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3년간이나 따라다녔고 주의 교훈과 기적을 친히 보았고 들었지만, 돈에 대한 욕심과 사랑 때문에 주님을 배신하였다. 그는 돈에 대한 사랑 때문에 멸망하였다. 우리는 돈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을 배신하는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신앙을 팔아먹는 자가 되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죽기까지 고난을 참고 선을 베푸는 자가 되자. 예수께서는 잡히시던 그 밤에 이러한 모범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 우리는 주의 교훈을 기억하고 힘써 실천하자. 마태복음 5:38-44,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는 주의 말씀과 모범을 지키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자(계 2:10).
54-62절, 베드로가 주를 세 번 부인함
[54-55절]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 . . .
예수를 잡으러 왔던 자들은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갔고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다. 사람들은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고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다. 그는 몇 시간 전에 주님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말했었지만, 그 말대로 행하지 못하였다. 그는 주님 가까이에서 주님과 함께 당당히 주를 따르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그는 비록 멀찍이일지라도 주님을 따르기는 하였다. 그는 주님께서 잡히신 상태로 유대 지도자들의 심문을 기다리고 계실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갔고 불가에 둘러앉은 사람들 가운데 앉았다. 그만큼 그는 주님을 따랐다.
[56-57절]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 . . .
한 여종이 베드로가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며 말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도 같은 내용을 증거한다(마 26:69; 막 14:66, 67). 요한복음에는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 18:17). 공관복음서들에 나오는 그 여종은 바로 문 지키는 여종이었다. 베드로는 그 여종의 말을 즉시 부인하였다.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이것이 베드로가 그 밤에 첫 번째로 주님을 부인한 것이었다.
[58절]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 . . .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그를 보고 “너도 그 당이라”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말했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마태복음에는 다른 여종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고(마 26:71) 마가복음에는 그 여종이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이 사람은 그 당이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막 14:69). ‘그 여종’은 처음 말한 여종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요한복음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다고 증거한다(요 18:25). 베드로가 두 번째 주님을 부인했을 때에는 이런 일들이 동시에 있었던 것 같다. 마태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그때 맹세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마 26:72).
[59-60절]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가로되 . . . .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말하였다.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말하였다.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었다. 마태복음에는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말하였다”고 증거하고(마 26:73), 마가복음에는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라고 했다”고 증거한다(막 14:70). 요한복음에는 “대제사장의 종 하나가 베드로에게 말하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고 했다”고 증거한다(요 18:26). 본문의 한 사람은 그 대제사장의 종인 것 같다. 베드로는 갈릴리 사투리를 사용했던 것 같다. 베드로가 세 번째 주님을 부인했을 때 사람들과 그 중의 한 사람인 대제사장의 종의 지적이 동시에 있었을 것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세 번째에는 베드로가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마 26:74; 막 14:71).
이와 같이, 베드로는 사람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였고 심지어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그렇게 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것을 보면, 사람에게 행위의 의(義)라는 것은 없다. 아담이 한번 범죄함으로 죽었듯이, 인간의 많은 실수와 범죄는 자신의 행위의 의를 완전히 부정하게 만든다. 모처럼 쌓은 것 같은 행위의 의도 한번의 실수로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만다. 인간은 의가 없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이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왔었다. 그는 믿음이 없었고 중생치 못했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수는 믿음이 있고 중생한 자에게 있는 연약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자기 목숨의 위협 앞에서 연약하였다. 그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며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는 주의 말씀을 잊었다.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의 연약한 본성의 모습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후 능력 있는 증거자가 되었다. 사도행전에 증거된 대로, 베드로는 주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채찍질과 능욕을 기뻐하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행 5:40-42).
[61-62절]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 . . .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뜰에 있었던 것 같고 주께서는 베드로가 그를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것을 들으셨던 것 같다. 특히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며 주님을 부인하는 목소리는 주님께도 들릴 만한 목소리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주님은 그의 하는 말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 그의 눈길은 베드로의 눈과 마주쳤을 것이다. 그의 눈길은 베드로의 큰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눈길이었을 것이다. “네가 나를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느냐? 3년간이나 나를 따라 다녔던 네가 나를 모른단 말인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치 말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던가? 너의 육신의 목숨이 그렇게 귀하냐? 죽는 것이 그렇게도 두려우냐?” 그러나 주님의 눈길은 또한 회개하라고 부르시는 긍휼의 눈길이었을 것이다. “베드로야, 네가 그렇게도 연약하냐? 3년간의 제자 훈련은 다 어디로 갔느냐? 빨리 회개하라. 속히 돌이키라.”
그때 베드로는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났고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연약과 부족과 주께 대한 불신실함을 뉘우치는 회개의 통곡이었을 것이다. 그는 몇 시간 전에 주님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고 말했던 자신의 말을 심히 부끄러워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 결심을 했을 것이다. 이 밤에 그의 통곡은 진심의 회개의 통곡이었다.
54절로 62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헛된 자신감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시편 62: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우리는 스스로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하고 의지하자.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증거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2-33). 우리는 주를 시인하고 증거하는 자가 되자.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실수와 죄를 깨달을 때 즉시 회개해야 한다. 지체치 말고 통회자복하고 진심으로 마음을 찢는 눈물이 있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심의 회개의 눈물을 받으시고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붙드실 것이다.
63-71절, 공회 앞에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심
[63-65절]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 . . .
지키는 사람들은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우고 [얼굴을 때리고]86) 물었다.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또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런 희롱과 매맞음과 모욕을 당할 잘못을 한 적이 없으셨으나 무지하고 악한 자들은 그에게 그런 악을 행하였다. 인간은 참으로 악한 존재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으셨다. 그는, 이사야 53:7의 예언대로,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으셨다.
[66-68절]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 . . .
날이 새자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모여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말했다.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그는 대답하셨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요 놓아주지 않을 것이니라].87)”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이 그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고 증거하시자, 대제사장은 옷을 찢으며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겠느냐?”고 말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확인하고 믿으려는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그들은 다 그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였고 그의 얼굴에 침 뱉고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렸다(마 26:65-67; 막 14:63-65).
실상,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벌써부터 결심하고 있었다. 누가복음 19:47-48,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누가복음 20: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과 같이 될 것이었다(눅 20:17).
그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는가?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고 악하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요 8:37). 그들은 자신들의 악함을 회개치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모양은 가고 있었으나 그 아들을 미워하고 죽이려 하였다. 그들의 경건한 모양은 위선에 불과하였다. 종교가 타락하면 세상보다 더 악해지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고 사탄의 종들이었다.
[69-70절]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다 가로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그들은 다 말하였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는 대답하셨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시면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다. 그것은 확실히, 법정 앞에서 자신에 대해 하신 엄숙한 증언이었다.
공회 앞에서 하신 그의 증언은 자신의 사역적 신분과 인격에 관한 것이었다. 우선, 그는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는 요청에 대해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는 말씀으로 우회적인 긍정을 하셨다. ‘그리스도’는 구약에 예언된 구주를 가리킨다(요 4:25-26).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어서 “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는 말씀도 하셨다(마 26:64; 막 14:62). 또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는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라고 분명하게 대답하셨다.
특히, 하나님 우편에 앉는 것과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다니엘서에 예언된 메시아의 모습이다. 다니엘 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일찍이 사도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의 내용이었다. 베드로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었다(마 16:16).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증거한다(요 3:16). 포도원 비유에서 증거된 대로, 그는 주인의 종들과 다른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다(눅 20:13).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리스도로 오셨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신 참 선지자시요,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참 제사장이시요, 우리를 다스리시고 원수 마귀로부터 지키시는 참 왕이시다. 이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는다(요 3:16; 1:12).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다.
[71절] 저희가 가로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예수님의 말을 들은 그들은,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그의 증언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예수님은 그가 친히 증거한 바로 그 분이든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이 증거한 바로 그 분이 아니라면, 그는 선한 선생이 아니고 사기꾼이나 정신병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엄숙한 재판석에서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께서 진실을 말씀하셨다. 그는 그의 증거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를 위해 참 선지자와 참 제사장과 참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인격에 대한 증거들은 신약성경에 풍부하다. 그의 많은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그는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고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 그는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다. 그는 그 외에도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이 모든 내용이 진실한 증인들인 그의 제자들에 의해 증거되었고 네 권의 복음서들에 기록되었다. 그는 유대 지도자들의 미움과 시기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삼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유대인 공회 앞에서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참된 증거이다. 우리는 유대 지도자들의 말을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다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자. 우리 중에는 한 사람도 신약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멸망당하는 자가 없기를 소원한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그를 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멸망을 당할 것이지만,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다. 또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그 나라를 위해 우리 자신을 즐거이 하나님께 바치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자. 오직 믿음과 순종만이 이 허무한 세상에서 가치 있는 일임을 알자.
23장: 죽으심
1-12절, 빌라도와 헤롯에게 심문 받으심
[1-2절]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가서 . . . .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가서 고소하여 말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당시의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으므로 유다 지방을 통치했던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최종적 재판권이 있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로마 총독으로 하여금 예수를 정죄하도록 머리를 썼다. 일반 대중은 로마 총독의 결정에 도전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의 손에 의해 죽이려 하였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제출한 고소 내용은, 첫째로 이 사람이 우리 백성을 미혹한다는 것과, 둘째로 그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것과, 셋째로 그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고소 내용은 사실과 정반대 되는 비난이었다. ‘미혹한다’는 원어(디아스트레포)는 ‘타락시킨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전파하셨고 그들이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의 마음은 어둡고 완악하여서 예수가 백성을 타락시킨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고소 내용도 사실과 달랐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내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다. 그는 로마 제국의 정권을 반대하는 어떤 정치적 운동을 하지 않으셨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에게서 비난거리를 잡기 위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었다(눅 20:25). 성경은 성도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 나라에 세금을 내야 할 것을 가르친다(롬 13:7).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었다.
세 번째 고소 내용은 사실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그리스도요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셨다.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셨다(사 9:6-7; 렘 30:9). 예수님은 바로 그 예언된 분이시다. 그러나 만일 저 지도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그들은 그 이유와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전에 예수께서는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해 요한의 제자들에게 답하시면서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었다(눅 7:22).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에 대하여 많은 증거를 남겨주셨다. 그러나 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저들은 아무런 반증도 제시하지 않았다.
[3절]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는 대답하셨다.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는 그들의 세 가지 고소 내용 중 세 번째 것에 대해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는 말로 분명하게 자신의 신분에 대해 증거하셨다. 그는 유대인 공회 앞에서 엄숙히 맹세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셨듯이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도 자신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두 사건에서 자신의 인격과 신분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셨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일차적으로 세상적 의미가 아니었다. 요한복음에는 좀더 자세히 그 내용이 쓰여 있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8:36). 그의 왕국과 왕권은 영적 의미가 있다. 그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물질적 나라가 아니고 영적 나라이다. 물론 그 나라는 장차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며 그 나라의 완성은 물질적 풍요를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현재에는 죄를 회개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 속에 임하는 영적인 나라이다.
[4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 . . .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말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을 즉시 알았다. 그것은 그의 이성적, 양심적 판단이었다. 이방인 빌라도는 타락한 유대 종교인들보다 더 이성적이었고 더 양심적이었다. 그의 판단으로는 예수님이 죽임을 당할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 유대 지도자들이 제시한 고소 내용은 객관적 근거를 가지지 않았거나 타당한 반증을 가지지 않았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5-7절]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 . . .
무리는 더욱 굳세게 말했다.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참 믿음을 가지라고 외치고 가르친 것이 백성을 소동케 하고 선동한 것인가? 상황이 옳지 않음을 느낀 빌라도는 그 재판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는 물었다.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그는 그가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냈다.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롯 가문은 에돔인 곧 에서의 후예이었다. 이 헤롯은 헤롯 안디바인데 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갈릴리 지방을 다스렸던 왕이었다. 그는 세례 요한을 죽였던 왕이기도 하다.
[8-9절]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 . . .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심히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그를 보고자 하였고 또 무슨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까닭이었다. 예수님의 소문은 일반 대중 속에서만 퍼진 것이 아니고 헤롯 왕궁에까지 퍼졌다. 특히 예수님을 따르며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던 여인들 가운데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도 포함되어 있었다(눅 8:3). 요안나는 자기 남편에게 예수님에 관해 많이 이야기했을 것이며 그 남편 구사는 기회 있는 대로 헤롯에게 예수님에 관해 말했을 것이다. 헤롯은 여러 말로 예수께 물었다. 그의 관심은 기적 행하심 같은 외적인 데 있었고,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진리나 예수님에 관한 진리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께 많은 말로 물었지만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서서 힘써 고소하였다. 예수님을 고소할 말한 악한 점이 그에게 있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엄숙한 재판정을 악용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런 행위를 더욱 미워하신다. 그것은 인간의 양심을 저버린 완악하고 패역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지도자로서의 지위와 인간적 꾀를 가지고 의인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인간은 참으로 악하였고 타락한 교회는 참으로 가증하였다.
[11-12절]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 . . .
헤롯은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였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악인들에게 무시와 조롱을 당하셨다. 그는 그에게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었다. ‘빛난 옷’은 왕의 복장을 흉내낸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으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런 수치와 멸시를 받으셨고 그것을 참으셨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이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가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도 평탄한 길이 아니고 고난을 겪는 길이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하고 우리의 인격을 거룩하고 겸손하고 온전하게 하는 데 유익하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1절로 12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공회 앞에서처럼 빌라도의 법정 앞에서도 친히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풍성히 증거한다!
둘째로, 세상은 참으로 악하였다. 빌라도나 헤롯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않았다. 유대 지도자들의 무지와 죄악은 더욱 컸다. 그들은 마음이 어두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그를 고소하고 비난했고 다른 이들은 그를 무시하고 조롱했다. 그들은 다 진리나 정의에 관심이나 열심이 없었다. 죄가 없는 죄수라면 당연히 풀어주어야 했지만, 아무에게도 그런 정의감이 없었다. 그들은 세상 권세나 명예나 돈이나 쾌락으로 인생을 즐기며 만족하며 사는 자들이었다. 우리는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代贖)의 죽음이었다. 빌라도는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증거했다. 또 헤롯도 같은 판단을 하였기 때문에 그를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그들은 다 재판장의 위치에 있었다. 예수님께 죽을죄가 있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증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는 그런 죄가 없었다. 죄 없는 자가 죄인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다. 여기에 기독교의 대속의 진리가 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위한 대속제물이 되셨고,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13-25절, 빌라도의 잘못된 판결
[13-17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 . . .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모으고 말하였다.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査實)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헤롯도 그러하였으니 이는 내가 너희를 그에게 올려보내었음이라].88)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명절을 당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주었다.]89) 22절에 보면, 그는 세 번째로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거한 것이다. 이것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이성적, 양심적 판단이었다. 빌라도의 판단은 그의 이성과 양심에서 나온 바른 판단이었다.
[18-23절]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 . . .
무리들은 일제히 소리질렀다.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民亂)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이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소리질러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그들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였고 그들의[그들과 대제사장들의]90) 소리가 이겼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권하였고 충동하였다(마 27:20; 막 15:11). 요한복음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은 소리질러 말하기를 “이 사람을 놓아주면 [로마 황제]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였다(요 19:12). 유대 지도자들은 백성을 교묘히 선동하였고 총독 빌라도를 궁지로 몰아 넣었다. 마태복음에는 빌라도가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마 27:24). 유대 지도자들은 백성을 선동하여 민란을 일으키려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민중의 힘을 빌려 총독 빌라도를 압박하였다. 거기에는 이성도, 법도, 양심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실 것이다.
[24-25절]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 . . .
빌라도는 그들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였다. 빌라도는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마가복음은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그렇게 했다고 증거했다(막 15:15). 백성의 뜻 배후에는 유대지도자들의 뜻이 있었고 그 지도자들 속에는 예수께 대한 시기와 미움이 있었다. 빌라도는 그들이 시기함으로 예수를 자기에게 넘겨준 줄을 알고 있었으나(마 27:18; 막 15:10) 그를 정죄하였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정당한 이유 없이 죄인으로, 그것도 십자가의 극형에 처할 극악한 죄인으로 정죄되셨다. 총독 빌라도의 판결은 이성대로나 양심대로나 법대로 된 판결이 아니었다. 그의 판결은 정의와는 상관없었고 단지 백성의 뜻과 기분에 맞춘 판결이었다.
13절로 25절까지에서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대속(代贖)의 이치를 깨닫자. 죽어야 했던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고 바라바이었다. 그러나 바라바는 놓여났고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다. 여기에 구원의 이치가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바라바 같은 죄인들이며 지옥 형벌을 받아야 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참혹한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죽으셨다. 죽어야 했던 자들은 우리이었고 그가 아니었지만, 그는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고 우리는 그의 속죄의 죽음 때문에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놓임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해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감사히 받자.
둘째로, 우리는 비겁하고 비굴한 자가 되지 말고 정직하고 용기 있게 살자. 로마 총독 빌라도는 이성과 양심으로는 예수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사람들의 여론과 총독직의 유지를 위해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이성적, 양심적 판단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낯을 보고 그릇된 판결을 내렸다. 공의의 판결을 내려야 할 재판장의 위치에 있었던 그가 불의한 판결을 내렸다. 우리는 빌라도처럼 사람들의 낯을 보고 비겁하고 비굴하게 악을 행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성경에 근거하여, 그리고 이성과 양심을 따라 정직하고 용기 있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을 각오하자. 주 예수께서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다. 하나님의 진실한 많은 종들도 고난의 길을 걸어갔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다(딤후 3:12).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하려면 많은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행 14:22). 그 환난 중에는 예수께서 받으신 것과 같은 불의한 판결과 부정당한 정죄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와 의는 결국 승리할 것이며 거짓과 불의는 결국 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진리와 의의 편에 서서 핍박과 고난을 각오하며 살아가자. 빌립보서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자.
26-32절,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
[26절]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 . . .
그들이 예수님을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좇게 하였다[그로 예수님 뒤에서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원문, KJV, NASB, NIV). 요한복음 19:17이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나오셨다고 증거하는 것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의 앞쪽을, 그리고 시몬은 십자가의 뒤쪽을 짊어졌을 것이다. 십자가 형틀이 무거워서 예수께서 혼자 지실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를 위해 십자가를 져줄 제자가 아무도 없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그들이 구레네 시몬을 억지로 잡아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였다고 말하며(마 27:32; 막 15:21) 또 마가복음은 그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그와 그의 아들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복음서 기록 당시에 교회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것을 계기로 그와 그 가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던 것 같다.
주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쓸쓸한 길이었다. 사도 바울도 증거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고 했고 또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딤후 1:15, 16; 4:14-16).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은 때때로 쓸쓸한 길이다.
[27절]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 . . .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왔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감성적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믿고 사랑했던 것 같다. 오늘날까지 교회 시대에도 그러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여자들은 믿는 일에 더 열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의 눈물은 예수께 대한 동정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저 의롭고 착하신 분이 끔찍한 십자가형을 받기 위해 사형장으로 가고 계셨다. 그들의 가슴은 슬픔과 애통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실히 믿은 여자들의 눈물은 다른 이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어 수많은 여자들이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들은 가슴을 치며 예수를 따라오고 있었다. 주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이렇게 눈물과 통곡이 있었던 길이었다.
[28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 . . .
그때에 예수께서는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는 그들의 동정적 눈물보다 더 중요한 일을 암시하셨다. 유대 지도자들과 무리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는 역사상 가장 극악한 죄를 짓는 공범(共犯)들이었다. 그들은 의인에게, 그것도 단순히 의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의인에게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을 현세와 내세의 죄벌은 얼마나 클 것인지!
[29-31절]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주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암시하신다. 그 날은 얼마나 무서운 심판과 형벌의 날일지! 아들들은 전쟁에 징집되어 나가 죽을 것이다.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의 일이 오히려 큰 슬픔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어떻게든지 피하기를 소원할 것이다.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는 의인과 악인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보내신 메시아를 박대하고 배척하고 정죄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루살렘 사람들의 큰 악에 대해 엄한 벌을 내리실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대로 약 40년 후인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심히 참혹하게 이루어졌다.
우리는 본문에서 두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주께서 가신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각오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처음에 그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셨다. 제자들 중에는 아무도 그것을 함께 질 자가 없었다. 또 그 길에는 수많은 여자들의 통곡이 있었다. 우리가 주를 따르려면, 우리는 주의 가신 고난의 길을 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0-1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다(골 1:24). 우리는 고난에 참여할 각오를 가지자.
둘째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동정적으로 슬퍼할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죄를 성찰하고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한 그들의 죄악은 인간 본성의 절정적 죄성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인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를 정죄하고 죽이는 사람들의 극악함과 세상에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고 통회자복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됨을 철저히 성찰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지옥 심판을 인해 두려워하고 눈물을 흘려야 한다.
32-38절, 십자가에 못박히심
[32절]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 . . .
예수께서 사형장으로 나아가실 때 다른 두 행악자들도 사형을 받으러 그와 함께 끌려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사형수의 한 사람으로 취급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심히 부당한 대접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예언된 내용의 성취이었다. 이사야 53:12, “이는 그[메시아]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주께서는 이 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본이 되셨다. 우리도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주님을 생각하고 참아야 하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다(벧전 2:19-21).
[33절]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 . . .
해골이라 하는 곳[골고다]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였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굴골렛)로 ‘해골’이라는 뜻이다.91) 그것은 아마 그곳이 사형장이었고 해골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거나 그곳 지형이 해골 모양이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일 것이다.
십자가 사형 방식은 옛날부터 세계 곳곳에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신명기에 보면, 모세의 법에 죄수를 나무에 달아매는 사형법이 있는데(신 21:22-23) 아마 십자가 사형 방식인 것 같다. 로마 사람들은 베니게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사형법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시민들에게는 그런 사형법을 적용시키지 않았고 단지 노예들에게만 적용시켰다.92) 탈무드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우상숭배자와 신성모독죄를 범한 자에게 십자가형을 내렸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우에 두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다. 그들은 흉악범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극악한 죄인으로 취급되셨다. 그의 양손과 양발에 큰 못들이 박혔고 거기로부터 피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는 많은 출혈로 인해 감당할 수 없는 심신의 고통을 느끼셨을 것이다. 마가복음의 증거대로 그는 3시부터 9시까지 즉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 달리셨다(막 15:25, 34).
[34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큰 고통 중에 죽어가는 중에서도 그를 못박는 자들이 자기들의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해서 그러니 용서해주시기를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그것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참된 사랑의 행위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바로 알았다면 그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행 3:17; 고전 2:8). 물론 그들의 무지(無知)가 변명의 구실이 될 수는 없다. 비록 지식을 가지고 범하는 죄보다 작은 죄일지라도, 무지의 죄도 죄이다.
군병들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았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들은 그의 겉옷을 넷으로 나누어 가졌고 통으로 짜진 그의 속옷은 제비 뽑아 가졌다(요 19:23, 24). 시편 22:18은, “[저희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고 예언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겉옷뿐 아니라 속옷까지도 벗기움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인간들에게 이런 큰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다.
[35-37절]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 . . .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였다. 그들은 의분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관원들도 비웃으며 말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말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그들의 눈에 예수는 왕관도 없고 왕국도 없고 군대도 없는 가련한 왕처럼 보였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단지 조롱거리이었다.
[38절]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있었다. 전통사본에는 “헬라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 글자들로”라는 말이 있다.93) 요한복음도 같은 내용을 증거한다(요 19:20).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주장하신 내용으로서 사실상 그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뜻이다. 이 죄패가 헬라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쓰여졌다는 것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온 천하에 알리는 의미가 있다. 당시에 헬라어를 쓰던 일반 대중들이나 라틴어를 쓰던 지식인들이나 히브리어를 쓰던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이 사실을 알아야 했다.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천하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하나님의 복음이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는 참으로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가? 아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었다. 그는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함이었다.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마 20:28). 그의 고통과 수욕의 죽음 때문에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큰 구원을 얻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33절로 3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이시다. 십자가 위에 헬라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쓰인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의 말은 예수께서는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할 소식임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구주이시며 누구든지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이름이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과 수치와 조롱을 당하셨다. 그가 그런 고난을 당하신 것은 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택한 백성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다. 그가 그런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그가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이 구원을 얻는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원수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그 고통스런 십자가 위에서 그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셨다. 그는 그들이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러하니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하였다. 그의 용서의 기도는 그가 평소에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던 그의 교훈을 실천하신 것이며, 그것은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 것이며 그런 후에는 죄를 멀리하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인격과 삶을 가리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의 거룩하고 선한 성품을 본받아 우리도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가족들에게나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우리를 해치는 원수에게까지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39-43절, 한 사형수의 구원
[39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 . . .
예수님 곁에는 좌우에 두 행악자가 십자가에 달렸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그들을 ‘강도’라고 표현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악한 행위 때문에 십자가의 사형이라는 매우 중한 형벌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절망적 형벌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상황은 똑같았지만, 그 둘의 생각은 서로 달랐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였다. ‘비방하다’(블라스페메오)는 원어는 ‘욕하다, 오만불손하게 대하다’는 뜻이다. 그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예수께 말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았고 예수께 대한 바른 지식과 깨달음이 없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오만불손하게 함부로 욕하고 비난하였다. 인간은 참으로 무지하고 완고하다.
[40-41절]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 . . .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전혀 달랐다. 그는 그 사람을 꾸짖어 말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고 양심적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받는 형벌이 자신들의 행위에 합당한 것임을 양심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생각이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행한 일들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비록 큰 악을 행해 사형을 받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바른 반성과 뉘우침이 있었고 또 예수께 대한 바른 깨달음과 판단이 있었다.
이런 뉘우침과 깨달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죄인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엡 2:1).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어서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다(롬 3:11).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죄인이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말하였다(롬 9:18).
[42절]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 . . .
그는 또 예수께 말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전통사본).94) 그 행악자는 바른 깨달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하였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주신 구주이시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자신을 맡기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 . .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그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참되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진실로 말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이 세상에 다른 어느 곳에도 진리가 없지만,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회개하며 그를 믿은 그 행악자에게 확실히 낙원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다.
사람은 죽으면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 악을 행한 자는 지옥에 던지운다(눅 16:22-23).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낙원은 천국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셋째 하늘과 낙원을 같은 곳으로 말했다(고후 12:2, 4). 그 행악자는 죽는 즉시 그 영혼이 주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구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은 열려 있다. 고린도후서 6: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믿으면 즉시 구원을 받는다.
그 행악자는 자신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악행으로 사형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사람의 선행은 누더기옷과 같다(사 64:6).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가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가고 복된 영생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한 행악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악한 죄인이라도, 어떤 절망적인 순간에라도, 심지어 죽음의 문앞에서라도 구원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면 어떤 죄인도 구원하실 것이다. 저 행악자가 받은 구원이 바로 그러한 구원이었다. 인간적으로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저 죄인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구원하셨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동일하다. 그러나 오늘날도 구원얻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에게 자신을 의탁해야 한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
44-49절, 죽으심
[44절] 때가 제6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 . . .
때가 제6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였다. 제6시는 정오이다. 예수께서는 제3시(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정오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고 오후 3시까지 그러하였다. 그 세 시간 동안의 캄캄한 어두움은 그때의 세상의 어두움을 잘 나타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그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도 버림을 받으셨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증거된 대로,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마 27:46; 막 15:3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많은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요 1:29).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 5:2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와 형벌의 죽음을 죽으셨다(갈 3:13).
[45절]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숨이 끊어지시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그것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 27:51; 막 15:38).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졌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9장과 10장은 이 은혜의 사실을 자세히 증거한다. 특히,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던 성소에 신약시대에는 누구든지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별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큰 대가를 치루셨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자유로이 만나 뵐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16은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교훈하였다.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 . . .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불러 “아버지여, 내 영혼[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셨다. 그가 아버지께 부탁하신 영은 그의 인성의 영이다. 사람은 죽을 때 그 영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을 때 즉시 천국으로 들어간다. 스데반은 죽을 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행 7:59). 베드로전서 4:19는,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라고 말한다.
[47절]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 . . .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에 대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말했다(마 27:54; 막 15:39). ‘그 된 일’이란 3시간 동안 온 땅이 어두워짐과 성소 휘장이 찢어짐 등의 일을 가리킬 것이다. 이방인이었던 그 백부장은 이런 일들을 보면서 예수께서 의로운 자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깨달았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그때에 저 이방인 백부장은 예수께 대한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그에 대해 증거하였다.
[48-49절]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 . . .
이것을 구경하러 모인 무리들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예수님을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았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여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그리고 살로메 등이었다(마 27:56; 막 15:40).
44절로 49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또 어떤 연약과 어려움 가운데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항상 담대히 나아가자.
둘째로, 우리는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영을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긍휼과 구원의 은혜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십자가 대속사역을 의지하여 우리의 영을 항상 하나님께 의탁하자.
셋째로,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고 증거해야 한다. 이방인 백부장은 그렇게 하였다. 복음서들이 증거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어야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또 다른 이에게 그를 증거하는 자가 되자.
50-56절, 장사되심
[50-51절]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 . . .
유대인의 공회 의원, 즉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 사회의 최고 의결 기관으로서 예수님 당시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 요셉은 공회원들의 결의와 행사에 동의하지 않은 자이었다.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본문은 그 요셉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그는 선하고 의로운 자이었다. 악한 자들이 가득한 그 시대에 선하고 의로운 한 사람이 있었다. 둘째로, 그는 공회원들의 계획과 행사에 동의하지 않은 자이었다. ‘결의’라는 원어(불레)는 ‘계획’이라는 뜻이다. 공회원들의 계획과 행사란 그들이 예수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할 계획과 행사를 가리킨다. 그는 다른 동료들이 악을 행할 때 그 일에 양심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셋째로,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예수님 당시 경건한 자들은 메시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었다(눅 2:25-38).
[52-53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 . . .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무덤과 장사(葬事)를 위해 요셉을 예비하셨고 사용하셨다. 마가복음 15:44에 보면, 요셉의 요청을 받은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후 그 시체를 내어주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자기 무덤에 넣어 두었다(마 27:60). 장사(葬事)는 죽음의 확증이다. 그는 죽으셨고 장사되셨다. 그의 부활은 단지 기절했다가 회생(回生)한 것이 아니었다. 죽은 몸이 영광스럽게 변하여 다시 사신 것이다. 예수님의 무덤은 다른 시체가 없는 새 무덤이었다. 그러므로 삼일 후 부활하신 자는 예수님 외에 다른 이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장사(葬事)에는 거창한 장례 의식이 없었다. 그의 시체는 그저 세마포에 싸여서 무덤으로 옮겨졌고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이 멀찍이 따른 조촐한 장례 행렬이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확실히 쓸쓸한 장사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무슨 예식이든지 거창하게 하려 하지 말고 간소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장례식도 찬송과 기도, 간단한 권면이나 말씀 선포로 이루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54-56절]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 . . .
이 날은 예비일이었고 안식일이 거의 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안식일의 예비일, 즉 금요일이었다. 안식일이 거의 되었다는 말은 금요일 오후가 되었다는 뜻이다. 당시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질 때부터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이었기 때문이다.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은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와 향품과 향유를 예비했다. 그들은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었다.
그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위해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였다. 그것은 그의 시체에 바르고 그 곁에 두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것들은, 아마도 물로 씻지도 못하고 피로 얼룩진 채로 장사된 예수님의 시체를 씻고 냄새를 줄이는 데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필요하게 보이는 일이지만, 그들은 안식일 때문에 그 일을 중단하고 계명을 좇아 쉬었다. 그들은 경건한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부활하실 주님을 기대하지 못하고 단지 그의 시체에 향품을 두고 향유를 바르려고 하였다.
예수님은 장사되었다. 그는 확실히 죽으셨고 그 시체는 바위에 판 무덤에 놓이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장례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하실 일들을 위해 그의 종들을 남겨두신다. 그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의 무덤을 준비하고 장사(葬事)를 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일들을 위해 쓰시려고 남겨놓으신 종들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악한 시대를 분별하고 거기 물들지 말고 필요할 때는 기꺼이 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면서 하나님과 그의 일을 위하여 한 부분, 한 분야에서 쓰이는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악하고 불의한 자들의 틈 속에서 선하고 의롭게 살고 악한 자들의 계획과 행사에 요셉처럼 ‘아니오’라고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또 이 세상에 가치와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무슨 예식이든지 너무 거창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장례식은 쓸쓸하고 조촐하였다. 우리는 결혼식이든지 장례식이든지 무슨 의식이든지 그 자체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한다. 거창한 결혼식보다 믿음 안에서의 사랑스런 부부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하고 그럴 듯한 장례식보다 그 영혼이 믿음으로 살다가 천국에서 복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의식이나 형식보다 그 내용과 실질을 더 중요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가 되자. 예수님을 따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와서 일주간이나 거기에서 머물렀고 남자 제자들이 다 도망쳐버릴 때 주의 곁에 비록 멀리서라도 머물렀고 그의 시체가 무덤에 장사될 때도 그 광경을 자세히 보았던 저 여인들처럼 우리는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가려네/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가려네.” 어떻게 주를 따를 수 있는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족과 실수가 있을 때마다 겸손히 회개함으로써 할 수 있다.
24장: 부활하심
1-12절, 빈 무덤과 천사들의 증거
[1-4절]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 . . .
안식 후 첫날, 주간의 첫날, 즉 일요일 새벽에 이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전통본문)95)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 속에 그의 시체가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여자들은 다 그 빈 무덤의 증인들이었다. 빈 무덤은 복음서들이 공통적으로 증거하는 내용이다. 빈 무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증거이며 중요한 증거이다.
그 여자들이 이를 인하여 근심할(디아포레오)[당황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 있었다. 그들은 확실히 천사들이었다. 그들은 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천사들의 존재를 믿는다. 천사들은 예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났고 롯에게 나타났으며 야곱에게도 나타났다.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새벽에 천사들이 그 여자들에게 나타났다.
[5-8절]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 . . .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말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계실 때에 세 번이나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6: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태복음 17:22-23,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마태복음 20:18-19,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3일에 살아나리라.” 누가복음에도 한 번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9:22,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그러나 제자들은 주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고 그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고 그 여자들도 천사들의 말을 듣고서야 주의 말씀, 곧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였다.
[9-12절]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 . . .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들에게 고하였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이었다. 또 그들과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였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다른 여자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의 증인들이었고 또 예수님의 부활과 갈릴리에서의 예언을 기억나게 한 천사들의 말의 증인들이었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않았다. 그들은 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다. 주께서 세 번이나 말씀한 적이 있으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고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거나 기대하지도 못했으며 또 그 아침에 여자들의 빈 무덤에 대한 증언과 천사들의 나타나 한 증언을 듣고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참으로 마음이 어둡고 무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 여자들의 말을 확인하려 하였다. 베드로에게는 확실히 믿음이 있었고 그의 믿음은 그의 인간적인 불신앙과 회의를 극복하게 하였고 빈 무덤의 사실을 확인하게 하였다. 그가 무덤에 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였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요한도 같이갔고, 그들은 무덤에 들어가 몸을 쌌던 세마포만 놓인 것을 보았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은 것을 보았다(요 20:6-7). 베드로는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비어 있었고 무덤의 돌문은 열려 있었다. 그것은 갈릴리로부터 왔던 여자들이 확인한 사실이었고 또 베드로와 요한도 확인한 사실이었다. 복음서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을 증거한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첫 번째 강력한 증거이다.
또 그 여자들은 천사들의 증언을 들었다. 천사들은 예수께서 거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증거하였다. 그들은 또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언하신 대로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하며 그들에게 주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였다.
성경은 그의 부활의 증인들의 증언들의 기록이다. 많은 증인들이 그의 부활을 엄숙히 증거하였다. 또 예수님 자신께서 그의 부활에 대해 예언하셨기 때문에, 만일 그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셨다.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죄악을 대속한 구주이시며 기독교가 모든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진리임을 확증한다.
13-35절, 엠마오로 가는 길에 나타나심
[13-17절]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 . . .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25리(60스타디아, 약 11킬로미터)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였다. ‘이 모든 된 일들’이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신 일, 삼일 후에 여인들이 그의 무덤이 비었음을 발견한 일,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일, 베드로가 그 빈 무덤을 확인한 일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물을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길가면서 [슬픈 얼굴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전통본문).9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지 못하고 빈 무덤과 천사의 전한 말도 믿지 못했던 그들에게는 오직 슬픔과 근심만 있었다.
[18-20절]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 . . .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그가 말씀하셨다. “무슨 일이뇨?” 그는 말하였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몇 년 동안 유대의 전 지역에서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고 마셨다. 그것은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큰 슬픔과 낙심과 공허함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21-24절]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救贖)할 자라고 . . . .
그 제자는 또 말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救贖)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가 생각하는 구원은 예수께서 유대 나라를 로마 제국으로부터 건져주시고 또 백성들을 가난으로부터 건져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포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기대는 예수의 죽음으로 산산이 다 깨어졌고 절망이 그를 덮쳤던 것 같다.
그는 또 말했다.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들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그 동안 되어진 일들에 대해 소박하게 증거하였다. 그러나 그의 소박한 말들은 사람들이 성경이 진실하게 증거하는 내용들을 믿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5-27절]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 후에 그는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해 증거하였다(요 5:39; 딤후 3:15). 구약성경의 제사 제도와 유월절 규례와 성막 제도 등이 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증거하고 있다. 특히, 시편 22편이나 이사야 53장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잘 예언하였다. 그리스도는 오셔서 죽으신 후 영광 가운데 들어가실 것이다.
[28-31절]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 . . .
그들의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자 예수님은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셨다. 그들은 강권하여 말했다.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시고 축사[축복]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확실히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변화된 몸이었다.
[32-35절]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 . . .
그들은 서로 말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들은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들과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그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였다. 부활의 증인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것들은 연약한 인간들의 환각 작용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 확실한 객관적 사실들이었다.
13절로 35절까지에서의 교훈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다시 한번 더 확증한다. 그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고 그와 여러 시간 대화하였었다. 또 본문은 부수적으로 두 가지 교훈을 준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성경을 풀어 설명하심으로써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증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오늘날도 주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성경을 통해 우리 속에 역사하신다. 그는 우리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며 확신케 하신다.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는 불신앙과 슬픔과 낙심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믿음과 기쁨과 힘을 주셨다. 주 예수께서는 오늘날도 연약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믿음과 기쁨과 힘을 주실 것이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를 믿고 주를 섬기며 따르자.
36-43절,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확인시키심
[36절]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 . . .
엠마오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두 제자가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셨다. 그것은 기적적 나타나심이었던 것 같다. 요한복음 20:19도,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증거한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확실히 놀랍고 신기한 몸이었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으신 후 슬픔과 낙심과 불안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주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평강을 기원하심으로 그들을 크게 위로하셨다. 실상, 예수께서는 참 평안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었다(마 11:28). 죄는 사람에게 슬픔과 근심을 가져왔으나 구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죄사함과 참 평안을 주셨다. 참 평안은 하나님의 복음이 주는 큰 복이다.
[37-40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 . . .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보는 것을 영[유령]으로 생각하였을 때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셨다. ‘의심’이라는 원어(디알로기스모이)는 ‘생각들, 변론들, 의심들’이라는 뜻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단순히 영이 아니셨다. 부활하신 그의 몸은 손과 발을 가진 몸, 살과 뼈가 있는 몸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셨던 바로 그 몸, 옆구리에 창으로 찔리셨던 바로 그 몸, 무덤에 장사되셨던 바로 그 몸이 영광스런 몸으로 다시 부활하신 것이었다. 우리도 우리의 몸이 그렇게 부활할 것이다. 우리의 이 연약하고 누추한 몸은 장차 강하고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으로 신비하게 변화될 것이다(고전 15:42-44).
[41-43절]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 . . .
제자들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기고 있었다. 그때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에 대한 한가지 더 구체적인 증거를 주셨다. 그것은 음식을 먹으신 일이었다. 그는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토막과 벌꿀집](전통본문)97)을 드리자, 그는 받으시고 그 앞에서 잡수셨다. 그는 제자들 앞에서 음식까지 잡수시므로 자신의 부활, 곧 그의 육체적 부활을 확실히 증거하셨다. 부활하신 그는 단순히 영이 아니시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몸을 가지고 계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체적 부활이셨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신비한 몸이었다. 그의 부활은 확실히 영화로운 부활이었다. 그것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영이 아니었고 사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살과 뼈가 있고 음식을 잡수실 수도 있는 몸이었다. 그의 옛날 몸이 없어지고 새 몸을 입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십자가에서 상하신 바로 그 몸으로 영화롭게 부활하신 것이었다. 그는 양손과 양발에 못자국이 있는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내 손과 내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는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셨다(요 20:2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고 그를 믿음으로 영생의 구원을 확실히 얻자.
44-49절, 성경의 요점을 깨우치심
[44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 . . .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생선과 꿀벌집을 잡수신 후에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그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하셨듯이 다른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부활이 성경에 예언된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구약성경에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 혹은 예표된 모든 내용들은 다 이루어져야 했다.
[45절]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주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 본절에 ‘마음’이라는 원어(누스)는 ‘생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일깨워주실 때 우리는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이해하려 할 때에 우리는 성경책이 필요하고 또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사역이 필요하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사용하여 우리의 생각을 깨우치셔서 우리에게 바른 지식을 주신다.
[46-48절]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회개와 죄사함](전통본문)98)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기록되었으며 그것이 합당하니](전통본문)99)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리스도에 관해 성경이 기록한 마땅한 바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가 고난을 받고 제3일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많이 예언하고 또 암시하였다(짐승 제사들, 이사야 53장, 시편 22편 등). 또 그의 부활에 대해서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암시하였다(시 16:10; 110:1; 호 6:2). 둘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회개와 죄사함을 목표로 한다. 회개와 죄사함은 예루살렘이나 유대 땅에서만 이루어질 것이 아니고 모든 족속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이다. ‘그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죄사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의 대속의 죽음과 그의 중보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을 나타낸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여 그들로 확신에 이르기를 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서 이 회개와 죄사함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셨다. 증인에게는 자신의 달변이 중요하지 않고 단지 증거해야 할 내용에 대한 성실한 증언이 중요하다. 그는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성실히 증언하면 된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부여된 임무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달변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 하지 말고 오직 그들이 보고 들었던 바를 성실히 증거해야 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바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성실히 증거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했다(고전 2:1-2).
[49절]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예루살렘]100)에 유하라.” 증인들은 또 용기와 능력이 필요하다. 그들은 증거할 내용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며 주께서도 성령의 오심에 대해 많이 증거하셨다(요 14-16장). 주께서 친히 성령을 보내실 것이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성령과 능력을 받기까지 예루살렘 성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하셨다. 사도행전 1:4, 8,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성경의 요지를 깨닫자.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다. 성경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대속사역이다. 그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그 확증이다. 회개하는 죄인들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는다.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자.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증인이지만,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사람들로 죄사함과 영생을 얻게 하자.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가정이나 동네나 직장이나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이 되자.
50-53절, 승천하심
[50-51절]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 . . .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셔서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셨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2-3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요 11:18). 그곳은 감람산 기슭이었다. 주께서는 베다니에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셨고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종말에 관해 교훈해주셨었다(요 11장; 마 24장). 그는 베다니에서 제자들에게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리우셨다](전통본문).101) 이것은 그가 부활하신 지 40일 후의 일이었다(행 1:3, 9).
부활하신 주께서는 승천하셨다. 요한복음 6:62에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고 말씀하셨었다. 누가는 누가복음 9:51에서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기록하였다.
마가는 마가복음의 거의 끝부분에서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고 증거하였다(막 16:19).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그가 이전에 쓴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다고 말한 후, 1:9-11에서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자세히 증거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3:16에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고 말하였고, 로마서 8:34에서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하였다. 히브리서 4:14는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고 말했다.
[52-53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 . . .
제자들은 [그에게 경배하고](전통본문)102)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였다[찬송하며 찬양하였다](전통본문).103) [아멘](전통본문).104) 제자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인간 스승으로 섬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하였다. 예수님은 참으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요 1:14). 제자들이 늘 성전에 있은 것은 성령을 기다리라는 주의 명령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삼일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셨음을 믿으며 또 주께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심을 믿는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으나,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므로 지극히 높임을 받으셨다. 그는 지금 온 세상과 교회를 통치하시고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우리도 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찬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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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누가복음에는 약 312개의 특유한 말이 나온다(디이슨, 신약개론, 232쪽).
2) 이단 반박, 3. 1. 1.
3) 이와 대조하여,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교훈이, 또 마가복음에는 그의 능력이 강조되어 있다(메이천, 신약개론 (하), 317쪽).
4) 디이슨, 237-39쪽.
5) Byz A C D ita b d e ff2 vg syrp copbo-mss Tertullian Diatessaron 등.
6) 예수님의 탄생 연도는 마태복음 2장에 증거된 대로 헤롯 대왕(주전 40-4년)의 죽음 이전이며 2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인 것과, 누가복음 3:1(“디베료 가이사[주후 14-37]가 위에 있은 지 열 다섯 해”)과 3: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시니라”)을 고려할 때 아마 주전 4년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7) Byz A lat 등에 있음.
8) Byz (syrp s) copbo arm geo (Diatessaron Origen3/5) 등이 그러함.
9) Byz A D 등이 그러함.
10) Byz A syrp copbo-mss 등에 있음.
11) Byz A C it syrp copbo-pt 등이 그러함.
12) 엔 휘포타쏘메노스 h\n uJpotassovmeno"; 미완료과거시제와 현재분사.
13) 원문 아르코메노스 ajrcovmeno"[‘시작하는’]는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 영어흠정역은 “예수 자신은 약 30세가 되기 시작하셨고”라고 번역했으나, 근래의 영어성경들은 한글개역처럼 번역하였다(BDAG, NASB, NIV).
14) Byzpt A D lAD ita d ff2 vg syrp 등에 그러함. 그러나 Byzpt Lectpt itb it(e) 등은 “그 이상은 아람이요 그 이상은 요람이요”라고 되어 있음.
15) 루터, 풀, 벵겔, 라이트푸트, 헨리, 알렉산더, 고데, 부로더스 등.
16) J. C. Ryle, 복음서 강해, II, 106.
17) Byz A (D ita b d e ff2 vg) syrp 등에 있음.
18) Byz A it vgcl syr(p) Origen1/2 arm 등에 있음.
19) Byz A it (copbo-pt) 등에 있음.
20) Byz A vgcl syrp copbo-mss Irenaeuslat 등에 있음.
21) Byz A syrp copbo-pt 등에 있음.
22) 근래의 영어 성경들(NASB, NIV)이 몇 개의 고대 사본들에 근거하여 ‘갈릴리’라는 말 대신에 ‘유다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는 본문을 택한 것은 잘못이다. 전통본문의 고대적 지지는 충분하다. Byz A D ita b d e ff2 vg syrp copbo-mss arm 등이 그러하다. 또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4:23과 마가복음 1:39의 증거를 비교해볼 때도 ‘갈릴리’라는 본문은 확실히 옳다.
23) Byz א* A C D ita b d e ff2 vg syrp copbo-pt arm 등에 있음.
24) Byz A C (D) ita b d e ff2 syrp arm 등에 있음.
25) Byz A latt syrp 등에 있음.
26) Byz A C latt arm 등에 있음.
27) Byz A C D ita d ff2 vg arm 등이 그러함.
28) J. C. Ryle, Matthew Poole 등.
29) 복음서 강해, 2권 187-188쪽.
30) Byz A C D ita b d e ff2 vg syrp copbo-mss arm Origen Diatessaron.
31) Byz א A C D W ita b d e ff2 vg syrp s copbo arm Diatessaronarm 등.
32) 토사우텐 피스틴 tosauvthn pivstin.
33) Byz A C (D itd) vg syrp (arm) 등에 있음.
34) Byz A C itb 등에 있음.
35) 칼빈, 박윤선 등.
36) Byz A (D) ita b (d) e ff2 vg syrp copsa-ms bo-pt Origengr 2/3, lat 등.
37) Byz A (D) vg syrp s arm 등에 있음.
38) Byz A W syrp c s Diatessaronsyr 등이 그러함. ‘거라사’는 ‘가다라’에서 남동쪽으로 40여 킬로미터 떨어진 얍복강 부근의 마을이었다.
39) Byz א A C W ita b ff2 vg syrp c copbo Origenlat 등에 있음.
40) Byz א A C D vg lat syrp 등이 그러함.
41) Byz A C 등에 있음.
42) Byz A W lat syrp 등에 있음.
43) Byz A C W (ita b e ff2 vg) syr(p) (copbo-mss arm) 등이 그러함.
44) Byz A C* W itb e vg syrp c Diatessaron Clement Tertullian 등.
45) M.
46) Byz א* A 등.
47) Byz A C D W ita b d syrp 등에 있음.
48) Byzpt (D) ita b (d) e vgcl ww syrp c copbo-mss (copsa bo-pt) 등에 있음.
49) Byz A C W syrp 등에 있음.
50) Byz p45 75 א A C W ita b e vg syrp c copsa bo arm 등에 있음.
51) Byz א A C W syrp copbo Irenaeus Clement Origen Tertullian 등.
52) Byz א A C W syrp c copbo Irenaeus Clement Origen 등이 그러함.
53) Byz p45 A D syr 등이 그러함.
54) 이찬영, 성경지리총람, 267-269쪽.
55) Byz p45 75 A C* W vg syrp c copsa 등이 그러함.
56) Byz A C D W it(a) b d e (ff2) vgmss syrp c copsa bo 등에 있음.
57) 마 4:17; 행 1:3; 28:23, 31.
58) Byz א* A C D W itb d e ff2 i vgmss syrp copbo 등에 있음.
59) Byz A C D W itb d ff2 i vgmss syrp copbo-mss Diatessaronsyr 등.
60) Byz א A C D W itb (d) vg syrp (c) (copbo) 등에 있음.
61) Thayer의 신약 헬라어 사전. 이 말은 구약성경에 나오는(왕하 1:23)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과 같은 말이라고 본다(KJV). 그것은 ‘파리들의 주’ 곧 귀찮은 파리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진 신이라는 뜻일 것이다.
62) ‘손을 씻는다’는 원어(밥티죠 baptivzw)는 ‘세례주다’는 바로 그 단어인데, 이 말은 ‘물에 담그다’는 뜻 외에, ‘씻다, 깨끗게 하다’는 뜻이 있다.
63) Byz A (D) W it syrp copbo-pt 등에 있음.
64) Byz A (D) W latt syr copbo-ms 등이 그러함.
65) Byz A C (D) W vg syr(p) 등에 있음.
66) Byz p45 A W itb d e ff2 i vg syrp c s arm geo Diatessaronsyr Tertul- lian 등이 그러함.
67) J. C. Ryle, Ryle's Expository Thoughts on the Gospels, II, 112.
68) Byz A 등.
69) Byz W lat syr(c s) copsa-ms bo 등이 그러함.
70) Byz A (D) W ita d vg syrp copsa-ms bo-pt arm Origen 등이 그러함.
71) Byz A (D W*) ita (b) d (e ff2) vgmss (vg syrp) 등이 그러함.
72) Byz א A W ita b e ff2 i vg (copbo) arm 등이 그러함.
73) Byz W it 등이 그러함.
74) Byz A D W ita b d (e) ff2 i vg syrp c s (arm Diatessaron) 등.
75) Byz A (C) W vg (syrp c s) 등이 그러함.
76) Byz A C D W lat syr 등에 있음.
77) ‘인자(人子)’(116회), ‘하나님의 아들’(67회), ‘그리스도’(58회) 등.
78) Byz A D W ita d e ff2 i vg syrp Origen Cyprian 등에 있음.
79) 월드 북 사전.
80) 월드 북 사전.
81) 조선일보, 1995. 4. 28.
82) Byz א D W itd i Origen 등이 그러함.
83) J. C. 라일, 사복음서 강해, 2권, 363쪽.
84) 라일, 365쪽.
85) Byz A C W lat syrp copbo 등에 있음.
86) Byz A* (D) W lat 등에 있음.
87) Byz A D W it(a) b d (e) ff2 vg syrp c s arm 등에 있음.
88) Byz A D W ita b d e ff2 vg (syrp c s arm) 등에 그러함.
89) Byz א W itb e ff2 vg syrp arm (19절 후--D itd syrc s) 등에 있음.
90) Byz A D W itd syrp (c s) copbo-mss arm 등에 있음.
91) 영어성경은 해골이라는 말을 Calvary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은 라틴어 벌게이트 성경의 calvaria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92) 예수님 당시 십자가형에 대한 여러 기록들이 있다. 예를 들어, 주전 4년 로마의 장군 바루스는 2천명의 폭도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다고 한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처형되어 십자가를 만들 나무뿐 아니라, 또한 십자가를 세울 장소도 부족하였다고 한다.
93) Byz א* A W itb d e ff2 vg syrp 등에 있음.
94) Byz A W lat syr 등에 있음.
95) Byz A W (syr copbo-pt) 등에 있음.
96) Byz W ita b ff2 vg syrp (c s) arm 등이 그러함.
97) Byz it(a) b ff2 vg syrp c copbo-pt arm geo Justin 등에 있음.
98) Byz A C D W ita b d e ff2 vg syrs 등이 그러함.
99) Byz A W vg syrp copsa-ms 등에 있음.
100) Byz A syrp copbo-mss 등이 그러함.
101) Byz p75 A B C W vg syrp copsa bo 등에 있다. “하늘로 올리우시니”라는 말이 없는 사본은 시내 사본(א*)과 베자 사본(D)뿐이다.
102) Byz p75 א A B C W vg syrp copsa bo arm 등에 있다.“그에게 경배하고”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사본은 베자 사본(D)뿐이다.
103) Byz A W vg syrp Diatessaron 등이 그러함.
104) Byz A B vg syrp copbo-mss Diatessaron 등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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