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6월 12일 수정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마가복음서론
1장: 전도사역을 시작하심
2장: 죄인을 부르러 오심
3장: 열두 제자를 세우심
4장: 비유로 말씀하심
5장: 예수님의 능력
6장: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7장: 내면적 성결
8장: 베드로의 신앙고백
9장: 변화산 사건
10장: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움
11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2장: 변론하심
13장: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종말
14장: 잡히심
15장: 죽으심
16장: 부활하심
서론
마가복음의 저자는 베드로의 통역자이었던 마가이다. 초대교회는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했음을 풍성하게 증거한다. 파피아스(60- 130년경)에 의하면, “장로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가 되었기 때문에, 비록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하신 행적을 순서적으로 기록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자기가 기억한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한다(유세비우스, 교회사, 3. 39). 이레니우스(130-200년경)도 증거하기를, “[베드로와 바울이] 떠난 후에 베드로의 제자이며 통역자인 마가가 베드로가 행한 설교를 기록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고 하였다(Against Heresies, 3. 1. 1). 마가복음의 많은 생생한 내용들은 이 복음서가 목격자의 증언들을 담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 마가복음의 단순한 문체, 활기에 넘친 솔직한 언어, 생동감 있는 묘사 등은 베드로의 증거에 어울린다.
마가는 본명이 마가 요한이고 그 모친은 마리아이며 그 집은 제자들의 집회장소로 사용되었다(행 12:12). 그는 바나바의 사촌이었다(골 4:10). 그는 바울의 일차 전도여행 시 그와 함께 갔다가 얼마 가지 않아서 되돌아갔다(행 13:5, 13). 본서에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한 청년이 따라오다가 벌거벗은 채 도망쳤다는 기록은 아마 본인을 가리켰을 것이다(막 14:51-52). 그는 후에 바울과 베드로를 도왔다(골 4:10; 몬 24; 딤후 4:11; 벧전 5:13). 디모데후서 4:11,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베드로전서 5:13, “내 아들 마가도 [문안]하느니라.” 두 사도와의 관계는 마가복음의 신빙성을 확고히 한다.
마가복음의 저작 시기에 관하여,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말하기를, “마태는 히브리인들 가운데서 그들 자신의 방언으로 하나의 기록된 복음서를 내었다. 그 동안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에서 말씀을 전하며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그들이 떠난 후 베드로의 제자이며 통역자인 마가는 우리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한 것을 기록으로 남겨 전해주었다”고 하였다. ‘떠난 후’라는 말이 그들의 죽음을 가리킨다면, 마가복음은 아마 주후 68년경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요청으로 기록되어졌을 것이다. 베드로는 주후 65년경 (혹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68년경), 바울은 주후 67-68년경 순교하였다고 보인다.
마가복음에는 몇 가지 특이한 점들이 있다.
(1) 마가복음은 간결한 복음서이다. 그것은 마태복음의 8분의 5 정도로서 복음서들 중에 가장 짧다.
(2) 마가복음은 ‘선교 복음서’라는 별명을 가지며 전도용으로 가장 적합하다. 특히 이 책은 이방인들을 위해 쓰인 것 같다. 구약의 인용은 단 한번뿐이다(1:2-3).
(3) 마가복음은 행적의 복음서이다. 이 책에는 ‘곧, 즉시’(유데오스 40회, 유뒤스 1회)라는 말이 41회 나오며, 예수님의 비유들은 5개만 나오고 그의 행하신 기적들은 19개나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족보와 유아시절의 기사는 생략되어 있다.
(4)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들에 대해 비교적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한다. 예를 들어, 2:3은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어서” 왔다고 표현하고, 4:38은 예수께서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셨다고 증거하며, 5:41과 7:34는 “달리다굼”이나 “에바다”라는 아람어를 그대로 증거하고, 6:14-29는 세례 요한의 죽음을 자세히 증거하고, 6:39는 무리를 “푸른 잔디에” 앉히셨다고 말하며, 9:14-29는 간질병 소년의 치료를 자세히 증거하고, 14:30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 주를 부인하였음을 증거한다.
1장: 전도사역을 시작하심
1-11절, 세례 요한의 증거
[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주 앞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고(마 16:16), 사도 요한은 그가 쓴 요한복음 끝에서,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하였다(요 20:30-31).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요 1:12) 의미와 다르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셨다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그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했고(요 1:14), 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독생하신 아들](전통본문)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했다(요 1:18).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7). 또 그가 새벽녘에 풍랑 이는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배에 있던 제자들은 그에게 경배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했다(마 14:33).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
[2-5절] 선지자 이사야[선지자들](전통본문)1)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전통본문)2)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요한이 세례를 베풀며](전통본문)3) 이르러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마가는 말라기 3:1과 이사야 40:3의 예언을 인용하였다. 이 예언들이 세례 요한에게서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예언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다(사 46:10). 그가 그의 행하실 일을 예언하시는 것은 우리로 소망 중에 하나님을 기대하다가 그 일이 이루어질 때 그를 더욱 확신케 하려 하심이다. 과거의 예언 성취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도 확신하고 소망하게 된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이었다. 회개는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버리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회개는 죄사함의 필수 조건이다(행 2:38; 3:19). 죄사함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복이다. 죄가 사람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기 때문에, 죄사함은 행복의 첫걸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사함을 위한 회개가 필요하다. 주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눅 5:32).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후에 베드로를 통해 3천명을 회개시키는 일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버려두시면 선지자 예레미야 때처럼 41년간의 사역이 결실 없는 사역이 될 수도 있다. 씨를 심으시고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다(고전 3:7). 메시아의 오심은 이렇게 준비되었다.
[6-8절]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신끈]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띤 것은 선지자 엘리야의 모습을 나타낸다(왕하 1:8). 요한은 광야생활과 설교사역에 적합한 검소한 복장을 하였다. 세례 요한은 먹는 음식도 단순하여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 석청(石淸, 멜리 아그리온 mevli a[grion)은 들판에서 얻을 수 있는 야생꿀을 가리킨다. 반찬이 많은 식탁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해야 한다(잠 30:8; 마 6:11).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아를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라고 증거했다.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무엇보다 능력의 차이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사람의 능력은 극히 제한적이다. 요한복음 1:34에 보면, 세례 요한은 메시아께서 신적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은 그 분의 신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천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다.
물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하고 성령세례는 실제로 죄씻음을 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단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사람을 중생시키시고 죄씻음을 주실 것이다. 이것은 그가 승천하신 후, 성령의 강림으로 성취되었다(행 1:5). 오늘날 예수님 믿는 자들은 다 성령세례를 받았다. 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5-6,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거듭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9-11절]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땅의 북부에 있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요단강은 갈릴리 호수로부터 남쪽의 사해까지 이어지는 긴 강이며 요한이 세례를 베푼 곳은 남쪽의 유대 지역이었다(마 3:1; 막 1:5).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곧 우리의 죄를 짊어진 대속제물로 세례를 받으셨다고 보인다. 요한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은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하였다(요 1:29, 32-34).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셨다. 또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혹은 내가 기뻐하는 자라].” 이것은 마태, 마가, 누가 등 세 복음서가 다 증거하는 하나님의 친 음성의 증거이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여기에 계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께서 그에게 내려오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인간 예수께서 메시아 신분을 확인하신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탄생 때부터 신적 메시아이시지만, 인간 예수의 메시아 의식은 아마 점진적으로 자랐을지도 모른다. 물론 누가복음 2장에 증거된 대로, 그는 열두 살 때에 벌써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그의 부모에게 말씀하셨다(눅 2:49, KJV). 이제 아버지께서는 그를 전도 사역에 내보내시기 전에 그의 메시아 신분을 밝히 증거하셨고 인간 예수님은 그 사실을 확인하시고 확신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의 증거를 받으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친히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으셨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은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의 한 기본적 내용이다. 그러므로 마가는 마가복음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시작하였다. 우리는 네 권의 복음서들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충분한 증언들을 들었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을 받았다.
둘째로, 예수께서 오셔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죄사함의 일이다. 이것은 그가 오시기 전에 와서 그의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 요한의 사역을 통해 증거되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죄가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었고 죄사함은 그 해결책이다. 죄가 모든 사람의 모든 불행의 근본적 원인이다. 그런데 죄사함은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대속의 제물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죄는 용서될 수 없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대속사역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의 죄를 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다. 또 이것은 단순히 물세례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세례, 곧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로만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의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난다.
12-20절,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심
[12-13절]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광야는 거칠고 들짐승이 있고 온갖 위험이 있고 특히 마귀의 시험이 있는 곳이다. 마태복음 4:2에 보면, 그는 40일간 금식하셨다. 40일간의 금식과 사탄에게 시험받으심은 그의 전도사역을 위한 준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시험을 받을 수 없으나 인간 예수님은 받으셨다. 그는 친히 인간의 연약함을 체험하셨다(히 4:15). 첫 사람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마귀의 시험에 넘어졌었다. 그러나 둘째 사람(고전 15:47) 예수께서는 승리하셨다. 세상은 영적 전쟁터이다. 신앙생활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14-15절]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전통본문)4)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세례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하나님께는 완전한 시간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이 끝났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갈릴리에서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시작하셨다. 갈릴리는 이스라엘 땅의 북부 지방이다. 예루살렘은 남부 유대 지방에 있었다. 예수님의 공적 전도사역은 예루살렘이나 유대 지방에서가 아니고 갈릴리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지역이나 외적인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그의 자유로운 뜻에 따른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내용을 가리킨다. 죄인들은 그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예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전파하셨다. 모든 일은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작정하신다.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찼다. 그때는 다니엘이 예언한 바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때이다. 다니엘 2:44, “이 열왕의 때[곧 로마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이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이 신약교회이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주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전파하셨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회개는 죄를 깨닫고 죄를 버리고 돌이키는 것이다. 우리는 십계명을 어긴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죄와, 온갖 부도덕의 죄, 즉 불효,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등을 가리킨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을 가리키며(롬 1:2-4),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칭의(稱義)와 영생이다(고전 1:22-23; 롬 3:23-24; 6:23; 요 3:16). 사람은 누구나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을 얻는다.
[16-20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는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다(막 2:17). 사도 바울도,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라고 말하였다(딤전 1:15). 전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맡기신 일이며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것은 교회의 최대의 임무와 사명이며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중요한 일이다. 주께서는 이 중요한 일을 위해 전도자들을 부르셨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얻으려면 그 이름에 대해 들어야 하고 들으려면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구원을 위해서는 전도가 필요하고 전도를 위해서는 전도자가 필요하다. 누군가 사람들에게로 가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롬 10장).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할 사람들이 필요하시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어부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는 주와 함께 있으면서 주의 말씀을 잘 배워야 한다. 오늘날 전도자는 성경에 정통하여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이해해야 한다. 또 전도자는 주님의 인격과 삶을 본받아야 한다. 그는 무엇보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마 11:29). 또 전도자는 주께서 가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을 각오해야 한다(딤후 4:3-5).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그 나라가 곧 신약교회이다. 죄인들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나라에 들어온다.
둘째로,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 그는 모든 불경건과 부도덕을 깨닫고 버리고 돌이켜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한다. 누구든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
셋째로, 전도는 예수님의 사명이었고 신약교회의 사명이다. 우리는 전도를 중요하게 여기자. 전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는 방법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에게 맡기신 일이다.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중요한 일, 곧 지옥 갈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임무요 사명이다. 우리는 전도지를 주위에 배포하자.
21-34절, 귀신들림과 열병을 고쳐주심
[21-22절]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처음 전도하신 마을이었다. 그는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지내셨고 가버나움에서 전도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율법이 명한 성도의 생활 규칙이었다. 그 날에는 육신의 일을 쉬어야 하였고 세속적인 일을 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했고(출 31:13-15) 공적인 집회로 모여야 했다(레 23:3).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구약의 율법이 완성되었지만, 그 완성은 위축된 방식으로가 아니고 풍성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신약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7일 중 하루 이상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예배의 날로 지킨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의 규례와 습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고(눅 4:16) 거기서 가르치셨다. 회당은 바벨론 포로 시대에 생긴 유대인들의 집회 장소로 오늘날 예배당과 비슷한 곳이며 그들은 안식일에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성경말씀을 배웠다. 회당 예배는 오늘날 교회의 예배와 비슷하였다. 신약 성도들도 성수주일, 십일조, 예배당 중심의 생활 같은 경건한 습관을 가져야 하고 우리의 자녀들도 그런 습관을 가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당에 모인 경건한 모든 사람들은 그의 교훈에 놀랐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권세와 권위로 가르치셨다. 사람들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가르침을 어찌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는가?
[25-28절]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영’이라는 단어이다. 악한 천사 곧 악한 영이 귀신이다. 귀신은 사람 속에서 더러운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며 사람으로 더러운 일을 행하게 한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을 미워하고 음란하고 거짓되고 탐욕적인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고 그런 말과 행동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우리가 과거에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는데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했고 우리가 그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말했다(엡 2:1-5).
회당에서 만난 그 더러운 귀신은 나사렛 출신의 청년 예수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임을 알고 있었고 그가 자신을 멸할 수 있는 자임을 알고 두려워하였다. 그는 예수가 평범한 한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히 구별하신 자이며 더러운 귀신들을 멸할 수 있는 신적 권세를 가진 자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악령도 상당한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단지 그는 예수를 믿고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 구원은 범죄한 인간들에게만 주어졌고 범죄한 천사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귀신을 꾸짖고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그의 말씀은 권위가 있는 말씀이었다.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왔다. 그 귀신은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였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서로 물었다.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예수님의 말씀은 귀신들까지도 복종시키셨다. 그의 소문은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다. 귀신들을 복종시키는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오늘도 우리를 도우시는 신적 구주이시다.
[29-31절]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주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다.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말하자, 그는 나아가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누가복음 4:39는 그가 열병을 꾸짖으셨다고 증거한다. 그러자 그의 열병이 떠나고 그는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예수께서는 열병 환자를 고쳐주셨다. 그는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신적인 능력을 가지셨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32-34절]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날이 저물어 해가 질 때, 사람들은 모든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께 데려왔다. 본문은 “온 동네가 문앞에 모였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과장법일 것이다. 그러나 온 동네의 모든 사람이 모일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을 고치셨고 많은 귀신들을 내쫓으셨다. 그러나 귀신들이 그를 알아보므로 그들의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들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오신 그의 사명을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각가지 병들과 불행들이 있다. 그것들은 근원적으로 인간의 죄 때문에 왔다. 죄 없는 천국에는 병도 불행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각종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그의 행하신 일들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가 각종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그의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자. 예수께서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 귀신은 그에게 복종하였다. 또 그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다. 또 그는 가버나움에서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신적 능력을 가진 주님이시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자.
또 우리는 예수께서 참된 의사이심을 깨닫자. 그는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사람을 영육으로 온전케 하실 수 있는 의사, 특히 우리의 죄악된 생각과 감정, 또 우리의 연약한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켜 주시는 구주, 곧 우리의 인격의 결점와 약점을 변화시켜 주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단번에 법적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깨끗케 하셨고 우리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고, 또 비록 우리의 성화가 매우 더디고 불완전하지만, 오래 참으시며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날마다 점점 더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기적주의는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는 기적을 전하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고전 1:22-24). 방언, 병고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한 삶이다(고전 13:1-2). 바울은 거짓된 기적주의를 경계했다(살후 2:9-12). 기독교는 초자연적 기적과 은사를 믿지만,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성경의 교훈을 열심히 배우고 믿고 행하는 것으로 충분한 줄 알아야 한다.
35-45절, 예수께서 하신 일들
[35-39절]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미명에’라는 말(엔뉘콘 리안 e[nnucon livan)은 ‘(아직) 꽤 어두울 때’ 즉 이른 새벽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그는 새벽기도를 하신 것이다. 그가 매일 새벽기도를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확실히 새벽기도의 본을 보이셨다. 새벽기도는 하루의 복잡한 일과가 시작되기 전, 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시간에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또 밤에 충분히 잠을 잔 후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시작하는 것은 가장 귀하고 정성어린 일이다. 또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오늘 해야 할 일들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그러나 새벽기도를 생활화하려면 성도는 밤에 좀 일찍 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기도하신 것은 신비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인간 예수님의 사역에 필요하였다고 보이며, 그것은 모든 성도들과 특히 사역자들에게 본이 된다. 예수께서는 기도로 그의 전도사역을 수행하셨고 진행하셨다. 인간 예수께서는 그의 사역을 위해 기도로 날마다 새 힘을 공급받으셨다. 그와 같이, 오늘 우리 모든 사역자들은 기도로 우리의 직분을 수행하고 날마다 기도로 하나님께 새 힘을 공급받아야 할 것이다. 신성(神性)을 가지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기도하셨다면, 죄악된 세상에서 죄성과 연약성을 가진 우리들이 어떻게 기도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도들과 초대 성도들은 기도에 전념하였다(행 6:4; 2:42).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모든 사람이 주를 찾는다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이는 내가 이를 위하여 왔음이니라.” 그는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셨다.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들을 내어쫓으셨지만, 그것은 그의 주된 사역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주된 사역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이를 위해 전도하는 일이었다. 그가 병을 고치신 것은 그의 신적 능력과 긍휼에 수반된 일이었다. 회개와 천국 선포를 통해 영혼들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그의 더 중요한 사역이었다. 몸의 건강과 병의 치료도 귀하지만, 영혼의 구원은 더 가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단지 이 세상에서의 복된 삶이 아니고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복이다. 죄의 결과는 질병과 죽음과 불행이었으나, 죄씻음의 구원은 영원한 생명과 행복이다.
오늘날 전도는 일차적으로 전도자의 임무지만(마 28:19; 막 1:17; 딤후 2:2; 딛 1:3), 넓게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귀한 일이다. 모든 성도는 가정복음화를 위해 힘써야 한다. 특히 믿는 아내들은 믿지 않는 남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순복하고 그들 앞에서 선하고 거룩한 행실을 보이면서(벧전 3:1-2) 전도해야 한다. 또 모든 성도는 이웃에게 친근히 하며 정직하고 선한 본을 보이면서 한 사람이라도 주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해야 한다.
[40절] 한 문둥병자[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나아왔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부정(不淨)하므로 진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다(레 13:45-46). 그런데 그가 예수께 나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였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가 꿇어 엎드려 간구한 것은 그의 겸비함과 간절함을 보인다. 그의 질병은 그에게 유익하였다. 그는 그 고난을 인하여 겸손히 예수께 나아와 엎드렸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는 그의 말은 그가 예수님의 신적 인격과 능력을 믿었음을 나타낸다.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예수께서 자기의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런 놀라운 믿음이 있었다.
[41-42절]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품으시고]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는 이런 불치의 병자를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다. 그는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곧 그의 병이 그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졌다. 그것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이었다. 나병을 고쳐주신 예수님,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오늘날 주 예수께서는 나병보다 더 더럽고 나쁜 우리의 죄악을 깨끗이 씻어주셨고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셨다(롬 3:23-24; 요 3:16).
[43-44절]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예수께서는 그에게 엄히 경계하시고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그가 그에게 엄히 경계하신 것은, 그의 사명이 병고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임을 군중들로 오해하지 않게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가 그에게 그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의 깨끗케 됨을 인해 모세의 명한 것을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의 규례대로(레 14:2-32) 하라고 하신 것이다.
[45절]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그 사람은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했다. 그는 이 점에서 주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았지만, 자신에게 이루어진 그 놀라운 일을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다시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새벽기도를 실천하자. 새벽기도는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가장 좋은 시간에, 또 가장 적절한 때에 하는 정성어린 기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새벽기도를 생활화하려면 밤에 좀 일찍 자는 습관을 드려야 한다. 또 우리는 시시때때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예수께서는 새벽기도, 밤기도, 철야기도를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기도에 힘쓰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지 않고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둘째로, 예수께서는 나병을 깨끗케 해주실 뿐 아니라, 나병보다 더 더럽고 나쁜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해주시는 구주이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이루시는 구원 사역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죄이며 죄씻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밖에 없다. 죄를 씻는 길은 예수의 피밖에 없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택자들의 구원을 위함이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 사역을 이루셨다. 이제 죄인들은 회개하고 이 속죄의 복음을 믿음으로 죄씻음의 구원을 받는다.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구원의 방법이며 신약교회에 주신 최대의 과제이다. 우리 모두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며 또 시시때때로 전도해야 한다.
2장: 죄인을 부르러 오심
1-12절,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
[1-4절]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는 모여온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그는 주로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셨다. 구주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죄인을 구원하신다. 교회의 중심적 사역은 말씀사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또 풍성하고 힘있게 전파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인도되었다. 중풍병은 뇌혈관이 터지거나 막혀 팔이나 다리 등의 기능이 손상되는 병이다. 세상에는 많은 병들이 있고 많은 불행한 일들이 있다. 그것들의 궁극적 원인은 죄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그 모든 불행의 해결책이 있다.
중풍병자를 데려온 네 사람은 모인 무리를 인하여 그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그의 누운 상을 달아내렸다. 그들은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런 일을 하였다. 이것은 상당한 비용지출과 집 주인이나 거기 모인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방법 외에는 그 병자가 고침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또 그 기회를 놓치면 다른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대가(代價)도 중풍병의 치료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행위는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믿음과 열심은 본받을 만했다. 이제 우리는 병고침을 위해 그런 열심을 내지 말고 영혼 구원과 전도를 위해 그런 열심을 내어야 한다. 병고침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필요한 일이지만, 영혼 구원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위한 일이다. 우리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믿음과 열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시간과 돈과 힘을 써야 한다.
[5-7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죄와 질병이 관련이 있음을 보인다. 욥이나 바울의 경우와 같이, 어떤 특정한 병이 특정한 죄의 결과가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병은 근원적으로 죄에서 왔다. 죄가 없었던 세상에는 병도 없었다. 질병의 원인이 그러하다면 그 해결책도 분명해진다. 죄사함이 그것이다. 죄사함은 실상 사람의 병뿐 아니라 모든 불행의 해결책이다. 그것은 모든 인생의 불행에 대한 해결책이다.
어떤 서기관들이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생각한 것은 어떤 점에서 정당했다. 입법자와 재판자이신 하나님 한 분 외에 죄를 사할 권한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의 신적 영광을 보았더라면, 그들은 그를 참람하다고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8-12절]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그의 영으로]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께서는 그 서기관들이 속으로 품은 생각을 그의 영으로 아셨다. 그의 인성(人性)은 신성(神性)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신적 지식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사람의 속을 다 알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은 일상적인 말이며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보다 쉬운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원적 해결책을 주시고 또 가르치시기 위해 그것보다 더 어려운 말을 택하셨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 사역이 있다. 그것은 죄사함이다. 죄사함은 인생의 근본 문제의 해결이요 그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었다. 그는 이 권세로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셨다.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시는 것이 구주 예수께서 하시는 구원의 일이다.
그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자, 그는 일어나 곧 자기가 누웠던 상을 들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갔다. 예수께서는 죄사함에 근거하여 그 병자의 중풍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말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의 일들을 행한 자는 없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이런 유의 기적들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영적으로 중풍병자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셔서 정상적인 생활, 곧 경건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게 하신다. 죄인의 구원은 병자의 치료보다 훨씬 더 큰 일이다. 죄인들의 구원은 더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제한된 것이 아니고 영원한 천국의 삶에 관계된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놀라운 일을 쉬지 않고 행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자.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으로 그의 병을 고쳐주셨다.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려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제 죄인들은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는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로마서 3:22,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며, 예수님 믿는 자들은 이미 죄사함을 받았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자. 중풍병자를 데려왔던 사람들처럼, 우리는 중풍병보다 더 불행한 죄로 인해 상한 영혼들을 구주 예수께로 인도하자. 우리는 다른 이들, 즉 가족이나 친구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자. 우리는 천하보다 더 귀한 한 명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힘과 시간과 돈을 아끼지 말자.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13-17절, 많은 죄인들이 따름
[13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집에서도 바닷가에서도 말씀을 증거하시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말씀사역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죄인들을 구원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이 레위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마태일 것이다(마 9:9-13). 세리 즉 세무공무원은 부정과 불법이 많은 직업이었고 죄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주목하셨고 사역자로 부르셨다. 예수님의 관심, 그의 생각, 그의 의도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과 그 일을 위해 사역자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레위는 주님의 부름을 받자 곧 일어나 그를 좇았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복음의 일꾼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 곧 그와 함께 있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는 자이어야 한다.
[15절]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예수께서는 늘 바쁘셨겠지만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기를 피하지 않으셨다.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은 세리들과 죄인들은 레위의 친구들로서 레위의 전도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교만한 위선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지만, 많은 죄인들은 그를 따랐다.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은 믿음의 길에 들어서는 첫걸음이다.
[16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전통본문)5)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서기관들은 보통 바리새인들 중에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가 의인이라면 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가? 그들은 이것을 죄인들과의 교제라고 잘못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제의 차원이 아니고 영혼 구원과 전도의 차원에서 그들과 함께 잡수신 것이었다. 우리는 교제의 차원과 전도의 차원을 구별해야 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한 자들이었다. 회개하고자 하는 진실한 죄인들이 실제로 악을 행하면서도 의인인 척하는 위선자들보다 구원에 가깝다.
[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그 서기관들의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불러 회개시키러](전통사본)6) 왔노라”고 하셨다. 누가복음 5:32는, 예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나 병원이 필요치 않다. 의사나 병원은 병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병자는 고침을 받을 것이나, 건강한 척하는 자는 그 병으로 죽을 것이다. 병자는 병원 가기를 싫어하거나 자기 병을 속이지 말고 병원에 가서 바른 진단과 치료를 받아야 고침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 병 때문에 죽고 말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죄에서 건져내시는 구주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구주는 죄인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우침 받고 그 죄를 인식하고 그 죄의 씻음 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은 구원의 첫걸음이다. 그러나 의인인 척하는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멸망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죄가 인생의 근본 문제요, 죄사함이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그러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신 가장 놀랍고 감사한 선물이며, 사람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보다 더 복되고 감사하고 감격적인 사건은 없다.
우리는 예수께서 죄인들의 구주이심을 확신하자. 우리는 과거에 다 죄인이었다. 그러나 구주 예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해주셨다. 그는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다. 오늘날에도 죄인은 누구나 그에게로 나아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어떤 죄인이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엎드려 간구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또 우리는 구주 예수님의 심정을 본받아 사람들과 전도적 접촉을 하자. 세상 사람들, 불신자들, 이방종교인들, 그 어떤 죄인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을 하나님께로, 구주 예수께로, 또 바른 교회로 인도하자.
그러나 우리는 교회적 교제, 즉 성도간의 교제의 선은 지키고 원칙은 지켜야 한다. 우리는 교제와 절교(분리)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불신자들이나 이단자들이나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을 말씀의 바른 교훈으로 성실히 훈련시키고 적절한 권징도 시행해야 한다.
18-22절, 금식 문제에 대하여
[18-20절]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바리새인들의 제자들]7)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메시아의 오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습관을 따라 금식을 하였다고 본다. 그들은 메시아께서 오셨으나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록 금식하지 않았지만, 참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종교적 형식만 지키는 자가 되지 말고 참 생명, 즉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기쁨과 즐거움의 때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동안에 금식할 일이 아니었다. 금식은 비상한 기도, 결사적인 기도의 형태이다. 지금은 그들이 그리스도로 기뻐할 때이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금식할 때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에 그들은 금식할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날을 가리킨다. 그때 제자들은 금식할 것이다. 그들은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하며 이후에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간구할 것이다.
신약시대에 금식이 불필요하거나 폐지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세 제자와 함께 높은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한 간질 환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데려와 고쳐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때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갔고 그 아이는 나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음을 지적하신 후에 전통본문에 보면, “이런 유의 것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7:21).8) 주께서 금식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울 따로 세우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었다(행 13:1-3). 수리아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였고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가 되었다.
이와 같이, 신약교회에서도 특별한 경우에는 금식기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금식 기도는 율법적 규례에 의한 것이 아니고, 또 경건 생활의 규칙으로 규정할 것도 아니다. 규칙적 금식이 더 경건한 것도 아니라고 본다. 신약성도는 언제든지 특별한 기도의 제목이 생겼을 때 자원함으로 금식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
[21-22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이 비유에서,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율법 아래서의 옛 생활방식을,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 가죽부대와, 또 암시된 바, 새 옷은 복음 아래서의 새 생활방식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신약 아래서 우리가 어떤 법적 규정에 얽매여서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자유함과 자원함으로 섬겨야 함을 암시한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율법의 속박과 공포로부터의 자유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롬 7:6; 갈 5: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의(義)가 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거룩함을 얻었고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롬 3:24; 히 10:10, 14). 그러므로 우리는 또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자유는 율법의 속박과 공포로부터의 자유이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얻음을 통해 얻게 된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원함으로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했고(갈 5:13),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가 명백히 구별됨을 증거하였다(갈 5:19-23). 사도 베드로도,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교훈하였고(벧전 2:16), 성도가 선한 행실로 자신의 구원을 견고케 해야 하며 또 흠과 점 없는 인격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벧후 1:5-11; 3:14). 또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곧 중생한 자들은 계속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했고, 또 의를 행함과 형제 사랑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명확히 구별된다고 교훈하였다(요일 3:9-10). 우리는 자유함을 얻었으나 이제 자원함으로 계명을 힘써 지켜야 한다.
23-28절,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자름
[23-24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한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다. 그때는 맥추절 즈음이었던 것 같다. 마태복음 12:1은 그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말한다. 그때 당시 매우 경건하고 보수적인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남의 밭을 지날 때 이삭을 자른 것은 율법이 허용하는 것이요 죄가 아니었다(신 23:24-25). 단지 안식일에 행한 그 행위가 문제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고 비난한 것이었다.
[25-2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한 사건을 들어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답하셨다.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할 때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간 때가 있었다. 아비아달은 아히멜렉의 아들로서 성경 역사에서 그 부친보다 더 알려져 있으므로 그의 이름을 언급하신 것 같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먹을것이 없어 배가 몹시 고팠으므로, 제사장은 그들에게 성전의 거룩한 떡을 주어 먹게 하였었다. 이 일은 구약의 의식법에 저촉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 비상한 때에 부득이한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큰 죄로 여기지 않으셨고 다윗과 그 일행들을 용납하셨다. 이와 같이, 이 경우에도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삭을 잘라먹었겠는가 하고 이해한다면 큰 비난거리가 될 것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27절]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디아)[때문에]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니.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디아 dia;)[때문에]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안식일 계명을 포함한 모든 율법의 목적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씀이다. 모든 율법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며(신 10:12-13), 안식일 계명도 그러하다. 안식일은 사람의 육신적 휴식과 영적 성장을 위하여 주신 규례이다. 출애굽기 23:12, “너는 6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7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물론, 사람이 안식일에 자기 마음에 원하는 바를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매우 엄격하여 이 계명을 범하는 것은 큰 죄로 여겨졌다. 또 안식일에 매매 행위나 육신을 위한 오락은 중지되어야 하였다(느 13:15-17; 사 58:13). 그러나 안식일의 본 정신은 사람을 위하는 데 있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믿음의 성장을 위해 중요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자들에게는 복이 약속되어 있었다(사 58:14). 실상,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쁨과 행복, 평강과 건강이시다. 다른 날 할 수 있는 일을 안식일에 허용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나, 우리가 안식일의 참 의미를 이해한다면, 상대의 사정을 고려치 않고 그의 행위를 단순히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생명을 구하는 일이나 의식주에 관한 부득이한 행위는 정죄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28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에도 주인이 되신다.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주일을 지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참 안식과 자유가 있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의 복과 자유를 누리는 날이다. 주일은 휴식과 예배의 날이다. 우리는 이 날 오락과 세속적 일을 금하고 교회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우리는 주 안에서 안식일을 즐거이 지키지만, 남의 어려운 형편을 동정함이 없이 그를 정죄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안식일의 참 목적을 이해하자.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이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지만, 그것은 결국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신 날이다. 구약 율법의 모든 내용이 결국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다. 안식일 없는 자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고 세속적인 삶을 산다. 그러나 안식일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고 그를 소망한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증진시키고 우리의 구원을 견고케 하고 우리로 영생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한다. 또 우리는 이 법을 지킴으로 영적인 복은 물론 육적인 복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안식일을 자발적으로 지키자. 신약시대에는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날이요 거룩한 날이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을 예배의 날로 받았다. 사도시대로부터 교회는 주일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렸다.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날에 세속적 일들과 육신적 오락을 피하고 휴식하며 교회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며 듣자. 또 이런 일들을 가장 귀히 여기자.
3장: 열두 제자를 세우심
1-19절,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심
[1-4절]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한편 손 마른 불쌍한 불구자를 보셨다. 그의 간절한 소원은 자신의 병의 치료이었을 것이다. 예수께는 그를 치료할 능력이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님 주위에 있었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 그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는가 엿보았다. 우리는 비난거리를 찾으려고 엿보는 자가 되지 말고, 예수님을 진실히 믿고 그의 교훈을 배우며 그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공개적 사역이었다. 그는 비밀리 무엇을 가르치거나 행하지 않으셨다. 그의 가르침과 행하신 일들은 책들에 다 기록되어 오늘 온 세상에 드러나 있다. 그는 선행과 악행, 생명 구출과 생명 죽임 중 안식일에 어느 것이 옳으냐고 질문하셨다. 그의 질문은 그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것이었다. 그는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기를 원하셨다. 그 행위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처럼 보였고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자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그 반대이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선한 일을 행하려 하셨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행하려 하였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는 것은 확실히 악한 일이다.
[5-6절]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시고 노하셨다. 사람의 심령의 온유함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면 사람의 마음은 완악할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저 불쌍한 병자를 고쳐주기를 원하셨다. 그는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의 손을 내밀자 그것은 회복되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신적 능력의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神性)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참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는 이 사건에서 우리가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할 수 있음을 증거하셨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헤롯당은 주후 6년 헤롯 아켈라우스가 파면되고 로마 총독이 임명될 때 결성된 헤롯 가문 지지자들이었다. 그들은 세속적 권력과 돈과 명예를 추구하였던 것 같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함께 예수 죽일 일을 의논하였다. 그들은 악한 일을 위해 협력하였다. 복음사역자에게 진실한 동료들도 있지만 원수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교회 일에는 사탄의 방해가 있지만, 주께서는 언제나 승리하신다.
[7-10절]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等待)하도록[미리 준비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밀치려] 함이더라.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셨을 때,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그를 좇았다. 그는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시기 위해 작은 배를 미리 준비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그가 많은 사람을 고치셨기 때문에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그를 만지려고 밀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진리보다 기적에 더 흥미를 느낀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 성경은 그 사실을 반복해서 증거하였다(막 1:34; 마 4:23-24; 8:16; 9:35; 14:35-36). 복음서들에 기록된 것들은 대표적인 예들에 불과하였다. 마태복음에는 14개, 마가복음에는 13개, 누가복음에는 17개, 요한복음에는 단지 5개, 합하면 중복된 것을 빼고 사복음서에 단지 26개의 병고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11-12절]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엄히] 경계하시니라.
더러운 귀신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다. 그는 많은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마 4:24; 8:16; 막 1:34). 귀신은 더러운 영이다. 귀신은 범죄한 영이며 또 사람을 범죄케 하는 영이다. 우상숭배, 이기주의, 미움, 음란, 쾌락주의, 거짓은 악령의 활동과 연관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질병을 위해 회개하며 기도할 뿐 아니라, 의학적 치료, 적절한 수면, 영양 있는 식사, 기분전환, 운동 등의 방편을 감사히 사용해야 한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셨다. 그것은 병고침이 그의 중심적 사역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자신의 사역을 오해하지 않게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의 사역의 목표는 단지 육신적 회복이 아니고 죄사함에서 오는 영육의 회복이었다. 회개와 죄사함의 구원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가 먼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그의 사역이 충분히 이해되기 어려웠다.
[13-15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후스 에델렌 ou}" h[qelen)[원하고 계셨던]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병들을 고치며]9)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산에 오르사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불러 열 둘을 세우셨다(눅 6:12-13). 그 구별된 열 둘은 그가 세우기를 원하신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도(使徒)라고 불리었다(눅 6:13). 이처럼 사도들은 주께서 직접 택하여 세우신 자들이었다.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그러므로 사도는 주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열두 제자들과 바울에게 제한된다. 오늘날도 교회는 주께서 원하는 자들을 직분자들로 세워야 한다. 그것은 디모데전서 3장에 기록된 장로와 집사의 자격 요건대로 세우는 것이다.
주께서 열두 사도를 세우신 목적은, 첫째로,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그것은 그와 함께 있음으로써 그의 말씀을 빼놓지 않고 배우며 또 그의 인격과 행위를 배우고 본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자는 선생에게 배우며 그를 보며 본받는 자이다.
둘째는 그들을 전도하러 보내시기 위해서이었다. 사도는 전도하게 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자이었다. 사도의 중심사역은 전도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도서 1:3에서,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하였다.
셋째는 그들에게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주시기 위해서이었다. 이것은 특히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세이었다. 사도행전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병고치는 권세는 사도의 표와 신분증이었다.
오늘날도 목사와 전도자의 첫 번째 임무는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하고 성경 읽고 묵상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6: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 디모데전서 4: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정통하고 하나님과 기도로 많이 교통해야 하고 그의 인격과 삶이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충성되고 능력 있는 일꾼이 될 수 있다.
[16-19절] 이 열 둘을 세우셨으니,10)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예수께서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자들과 그 외에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러나 그는 단지 병을 고치려고 오지 않으셨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죄가 인생의 근본 문제이며 죄문제의 해결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둘째로, 우리는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위선자가 되지 말고 항상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자가 되자.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를 믿고 따르는 길에 평안만 있지 않고 미움과 핍박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주께서 오늘날도 신실한 일꾼들을 많이 불러주시기를 기도하자. 또 주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성경말씀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그 말씀에 정통해야 하고 하나님께 많이 기도해야 하고 또 그의 인격과 삶이 말씀의 교훈에 맞는 모범된 자이어야 할 것이다.
20-35절, 예수를 비난하는 자들과 따르는 자들
[20-22절]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생활하셨다. 우리도 이 세상을 오랫동안 살려고만 하지 말고, 바르게, 충실하게, 바쁘게 살다가 천국에 가기를 소원한다. 예수님의 친속들은 그를 붙들러 나왔다. 사람들이 그가 미쳤다고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칭찬과 사랑을,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모욕과 핍박을 받았었다(고후 6:8). 오늘날에도 주의 충실한 종들에게 선한 평판도 있지만, 악한 비방도 있을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 즉 성경학자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 거기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지폈고 그를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비난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없이도 성경학자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종교는 이론적 내용을 가지지만, 경건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 종교가 이론뿐이라면 죽은 것에 불과하다. 참 종교는 이론적 내용을 가진 참 생명이다.
[23-27절]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사탄은 사탄을 쫓아낼 수 없다.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설 수 없듯이,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한다. 그러므로 사탄을 힘입어 사탄을 쫓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고서야 그 집 물건을 빼앗을 수 있듯이, 사탄보다 강한 자만이 그를 내쫓을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그 일을 하실 수 있다.
[28-3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죄는 사하심을 얻는 죄가 있고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가 있다. 모든 죄들이 다 사하심을 얻을 수 있으나, 단지 성령 훼방의 죄를 범하는 자는 사함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5장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구분하며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을 암시하였다(요일 5:16).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어떤 일이 성령의 활동이 분명한 데도 그것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것을 가리켰다.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병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는 것을 더러운 귀신에게 돌리며 비난하였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명백한 일을 부정함으로 회개의 가능성을 내쫓는 지극히 완고한 마음이다. 이런 유의 죄는 오늘날 이단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성경에 증거된 명백한 사실들을 고의적으로 부정하고 악하게 비난한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성령의 활동을 대항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께서만 일으키실 수 있는 회개를 할 수 없고, 회개가 없으면 죄사함의 구원도 없다.
[31-32절]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동생들과 그의 모친]11)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예수께는 동생들이 있으셨다. 마가복음 6:3과 마태복음 13:55에는 그의 남동생들의 이름이 나온다. 마가복음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그 외에도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예수님의 형제들에 대해 말한다(요 2:12; 7:3, 5, 10; 행 1:14; 고전 9:5; 갈 1:19).
[33-35절]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뜻을 행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께서는 육신의 가족보다 믿음의 가족을 더 중시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요 가족들이다.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뜻은 한마디로 믿음과 순종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요 6:40; 롬 3:21-24). 또 순종은 율법에 명령된 하나님의 뜻이다(신 10:12-13). 순종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유효한 인간 의무이다(롬 6:12-13). 순종은 서로 사랑함과 거룩한 삶과 선행 등으로 표현된다(요 13:34; 살전 4:3; 딛 2:14).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한 큰 가정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령을 훼방하는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성경의 증거들과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를 다 인정하고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따르는 자가 되고, 마음을 완고하게 가지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육신의 가족보다 더 친밀한 하나님의 가족들임을 알자. 하나님의 뜻은 믿음과 순종, 즉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며 거룩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한 가족이다.
4장: 비유로 말씀하심
1-20절, 씨 뿌리는 비유
[1-8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바다 위에 배에 앉아 가르치셨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었다. 그는 어느 곳에서나 기회 있는 대로 가르치셨다. 그는 설교하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셨다. 그는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셨다. 비유는 일상적 사건이나 사실을 들어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하셨다. 예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장애가 없는 일반 사람들은 들을 귀를 다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그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할 것이나, 육신의 귀는 가지고 있지만, 듣고 깨닫는 영적인 귀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은혜 주시는 자들만 가질 것이다.
[10-12절]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그 비유]12)을 묻자오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라고 표현하셨고, 또 ‘너희’와 ‘외인,’ 즉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과 버려두신 자들을 구별하셨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는 확실히 제한적이다. 비유는 예화와 다르다. 예화는 사람의 이해를 돕는 이야기이지만, 비유는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자들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뜻이 있는 이야기이다. 비유에는 표면적 내용과 이면적 내용이 있다. 비유의 표면적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이면적 진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신 자들, 그래서 불신앙과 죄악으로 그 마음이 굳어진 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께로 돌아오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깨닫는 마음의 눈이 열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13-15절]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그들의 마음에]13)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예수께서는 그 비유를 설명해주셨다.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처럼 생명이 있다. 마른 씨를 땅에 심으면 싹이 나듯이, 평범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 역사(役事)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마 13:37), 그의 사도들과 그 후 오늘날까지 목사들과 전도자들이 그 직무를 이어받는다.
주께서는 씨가 뿌려진 땅을 네 종류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킨다. 첫째로,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깨닫지 못하고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의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을 가리켰다. 주께서는 그의 말씀을 뿌리는 일을 하시지만, 사탄은 그 말씀을 빼앗는 일을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싫어하며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생각을 흐트러뜨리고 진지하게 받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생각을 집중하고 진지하게, 졸지 말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고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될 것이다.
[16-17절]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둘째로, 씨가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해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곧 넘어지는 것을 가리켰다. 세상에는 질병이나 궁핍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다. 또 특히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한 환난과 핍박도 있다. 하나님 말씀의 뿌리,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자들은 환난 중에 넘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견고함을 위해 성경책을 주셨으므로(눅 1:1-4; 딤후 3:14),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
[18-19절]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재물]의 유혹(아파테)[속이는 것](KJV, NASB)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셋째로, 씨가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그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것을 가리켰다. 누가복음 8:14는 거기에 ‘쾌락’을 추가하였다. 재물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처럼 사람을 속인다. 그러나 실상 재물은 환난날에 사람들을 구원하지도 못한다(잠 11:4; 습 1:18; 겔 7:19). 돈은 어느 날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린다(잠 23:5).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9-10). 그러므로 우리는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려는 마음을 버리고 또 세상 염려를 버리고, 성경 교훈대로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딤전 6:6, 8).
[20절]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넷째로, 씨가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여 열매를 맺는 것을 가리켰다. 누가복음 8:15는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식물의 씨앗 하나는 심기어 자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한 사람은 많은 선한 일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단지 인간편에서 성실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진지하게 듣고 깨닫고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그것을 지켜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사람은 그의 충성의 정도대로 차등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와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진지하게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말씀을 잘 이해하고 믿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믿음이 성경을 통해 견고해지고 성경말씀에 뿌리를 내리게 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돈의 속임과 육신의 쾌락을 다 버리고 멀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진지하게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고 그 말씀을 붙들고 인내하며 그 교훈대로 의와 선을 실천하여 많은 열매 맺는 자가 되어야 한다.
21-34절, 겨자씨 비유
[21-23절]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드러나지 않을](전통본문)14)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말’은 열 되짜리 큰 통을 뜻하고, ‘평상’은 침상을 뜻하고, ‘등경’은 등잔걸이를 뜻한다. 등불은 큰 통 아래나 침상 아래 두지 않고 등잔걸이 위에 걸어둔다. 이처럼,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은밀하게 전해질(秘傳) 것이 아니고 세상 만민에게 공개적으로 전해지고 알려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성경책에 기록되어 세상 만민에게 공개되어 있다.
[24-25절]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듣는 너희는]15) 더 받으리니 [이는]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빼앗길 것임이니라].
우리는 듣고 배운 말씀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 우리를 취급하실 것이다.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대하실 것이지만, 말씀에 대해 무관심하고 불신앙적이면 그는 우리를 버리실 것이다. 왜냐하면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 ‘있는 자’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이 있는 자라는 뜻일 것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이 없는 자는 이미 가진 지식과 은혜도 빼앗길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읽고 듣고 음미하고 간직하고 실행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들은 말씀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삼가며 굳게 지켜야 한다(히 2:1; 고전 15:1-2).
[26-29절]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사람이 씨를 땅에 심으면 어느새 씨에서 싹이 나와 자라서 이삭이 생기고 그 이삭이 충실한 곡식이 되면 낫을 대어 추수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의 전파를 통해 세상에서 시작되며 처음에는 싹이 나듯이 작은 단체이지만 점차 성장한다. 이 비유는 천국의 성장성을 가리킨다. 세상에 심겨져 싹이 나며 성장하는 천국은 지상의 교회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온 세상에 충만히 이루어지고 그의 택한 백성이 다 구원을 얻게 되면, 그때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세계복음화와 복음 전도는 주께서 신약교회에 명령하신 최대의 사명이며 과제이다.
[30-32절]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성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다시 한번 더 증거된다. 겨자씨는 씨들 중에서 심히 작은 씨이지만, 심긴 후에 자라면 모든 채소보다 더 커지며 큰 가지를 내므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겨자씨 나무는 키가 3미터 이상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천국, 즉 복음 전파와 교회 설립은 처음에는 심히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놀랄 만큼 심히 커질 것이다. 이것은 전체 교회를 두고 하신 말씀이지만, 성도 개인의 성화나 지교회나 교회들의 영적 건립과 영적, 수적 성장도 그러하다. 그러나 공중의 새가 깃들인다는 말씀은 세계 교회가 심지어 마귀와 악령들이 그 안에 자리를 잡을 만큼 커질 것을 암시하신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점도 교회 역사를 통해 이미 성취되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는 마귀와 악령들의 종인 많은 이단자들이 들어와 있다.
[33-34절]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예수께서는 많은 비유들로 말씀을 가르치셨다. 비유는 그의 설교 방식의 한 특징이었다. 비유들은 표면적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나, 그 이면적 의미는 해석이 필요하였다. 예수께서는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해주셨다. 이제 성경은 수수께끼 같은 책이 아니고 어려운 부분이 해석된, 이해할 만한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주관적으로 그 뜻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성경 자체가 밝히 보이는 뜻, 특히 성경의 전체적인 뜻을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죄악됨,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 경건과 도덕성의 새 삶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성경의 대의를 아는 자들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복음은 은밀하게 전해지지 않고 세상 만민에게 공개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받으며 또 간직하고 행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말씀의 교훈 속에서 개인의 구원의 확신과 성화를 이룰 뿐 아니라, 세계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고 전도자들을 파송하고 후원해야 한다.
35-41절,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심
[35-38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아펜테스 ajfevnte")[보낸 후에] (KJV, BDAG)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날이 저물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무리를 보낸 후에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 다른 배들도 함께하였다. 그런데 큰 광풍이 일어났고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가는데도 큰 광풍이 있었다. 이 세상에는 마귀의 시험이 많다. 세상의 주권자는 하나님 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KJV)[혹은 방석](NASB, NIV)를 베시고 주무시고 계셨다. ‘고물’은 배의 뒷쪽을 가리킨다. 육지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주께서는 깊은 잠이 드셨던 것 같다. 잠이 드신 것은 그가 사람의 본질을 가지신 분이시며 육신의 피곤을 느끼셨고 잠이 필요하셨음을 증거한다. 물론 그는 신성(神性)으로는 그 상황을 아셨겠지만 잠잠하셨다. 주께서는 성도의 고난의 현실에서도 때때로 잠자듯이 조용하시다.
제자들은 그를 깨우며 말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직 알지 못하고 그를 단지 ‘선생님’으로 부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날 밤 그들은 예수께서 신적 구주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39-41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예수께서는 깨셔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말씀하셨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주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다. 바람과 바다가 인격이 아닌데도, 주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자연만물도 예수님께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계(靈界)와 인간계뿐 아니라 자연계도 다스리신다. 그는 천사들과 사람들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자연만물도 주관하신다. 사람들 가운데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큰 광풍을 제어할 자가 아무도 없지만, 예수께서는 그것을 제어하실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인생의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광풍을 제어할 자가 아무도 없지만, 주께서는 그것을 제어하실 수 있다. 그는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며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고 서로 말했다. 이 사건의 중심 교훈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람과 바다를 명령하여 복종시키는 그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고 신성을 가지신 자, 곧 사람이시며 하나님이신 자이시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풍성한 증거들이다.
또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연환경까지도 주관하심을 증거한다. 그는 풍랑뿐 아니라, 홍수와 가뭄, 태풍과 폭설을 주관하신다. 그는 우리의 건강이나 가정의 일들도 주관하시고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일들도 주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의 죄사함과 영생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의 모든 문제들을 도우시며 해결하실 수 있는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문제들을 만날 때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일들을 그에게 간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교훈하였다(빌 4:6-7).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큰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세상에 바람을 꾸짖고 큰 풍랑을 잔잔케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이 사건과 또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져주신 일들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확신하자.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신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는데 큰 광풍을 만났다. 세상에는 사람이 예기치 못하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다. 그것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자들에게도 생기며 참된 교회에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큰 광풍을 잔잔케 하셨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다(히 13:8). 그는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그는 오늘도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를 자연재해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다. 또 그는 우리의 건강과 경제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악을 멀리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또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시시때때로 그에게 나아가 감사하며 죄를 고백하고 버리기를 결심하며 우리의 모든 소원을 아뢰어야 하고, 또 그 교훈의 말씀을 힘써 실천해야 한다.
5장: 예수님의 능력
1-20절,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심
[1-4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가다라인]16)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가다라인의 지방은 갈릴리 호수 동남쪽 10킬로미터 지점 야르묵 강에 인접한 마을이다. 예수께서 배에서 나오시자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그를 만났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더러운 영이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을 끊었다.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 그러하다. 인생의 삶은 죽음의 그늘진 곳에서 방황하는 삶이다. 오늘도 지옥의 문 앞에서 방황하는 인생--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현실이다. 인생의 방황과 광기(狂氣)를 제어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고서는 그들에게 소망이 없다.
[5-8절]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그것은 일종의 미친 증세이었다. 오늘날도 귀신의 작용으로 미친 자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 늘 소리지르며 또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정상적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사람이 귀신이 들리면 이렇게 비정상이게 된다. 이렇게 미친 증세를 가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악령의 작용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며 헛된 것을 구한다. 사람들은 자기 절제심을 버리고 자기의 몸을 광란적 활동들에 내맡긴다.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하였다. 악령도 예수께 대한 지식이 있었고 그의 신적 권세를 인정하였다. 예수님은 과연 영의 세계를 다스리며 악령을 내쫓을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시다.
[9-12절]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그 악령의 이름은 ‘군대’이었다. ‘군대’라는 원어(레게온 legewvn)는 6,000명 가량의 인원으로 구성된 로마의 부대 단위를 가리킨다. 그 사람 속에 이렇게 많은 악령들이 들어갔다. 많은 더러운 악령들이 그에게 들어갔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힘이 세고 난폭했던 것이다. 그 귀신들은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했다.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었다. 돼지는 풀이나 곡식을 잘 먹는다. 그 귀신들은 예수께 자기들을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시기를 간구하였다.
[13-17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2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에게 고하매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께서는 귀신들의 간청을 허락하셨다. 허락하실 권세가 그에게 있었다. 더러운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떼에게로 들어갔다. 그러자 2천 마리나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능력이 증거되었다. 또 예수께서 한 명의 영혼을 돼지 2천 마리보다 더 귀하게 여기심도 증거되었다. 돼지 한 마리를 50만원만 쳐도 돼지 2천 마리의 값은 10억원이다. 주께서는 인간의 가치를 그보다 더 크게 여기신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도이다.
돼지 치던 자들은 도망하여 읍내와 마을에 고하였다. 사람들은 그 일이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예수께 와서 그 귀신 들렸던 사람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해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사람들은 그들에게 고하였다. 이 사건을 본 사람들은 많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많은 목격자들의 공공연한 증거들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 지방 사람들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다. 그것은 2천 마리나 되는 돼지의 손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인생의 참 가치가 무엇인지와 그 불쌍한 사람을 고쳐주신 신적인 구주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 대한 무지(無知) 때문에 그를 영접하며 존숭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를 배척하였다.
물질적 손해는 아마 돼지떼의 주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보았다면 그 손실은 충분히 보상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돼지 2천 마리보다 더 가치 있는 분이시며, 그를 통한 인생의 구원도 그러하다. 우리는 이 지식과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 믿음 중심, 성경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지 말고 그를 환영하고 따라야 한다.
[18-20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온전한 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참으로 큰 일이었다. 그는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였고 모든 사람은 기이히 여겼다. 오늘날도 주께서는 죄와 사망과 악령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성령의 사람, 곧 바른 정신을 가진 인격적인 사람을 만드신다. 그것은 영원한 죽음과 형벌로부터 영생과 행복으로 이전시키는 일, 곧 구원의 일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크고 가치 있는 일은 없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께서는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다. 육신의 질병도 고치기 어렵지만, 정신적 질환도 고치기 어렵다. 현대인은 정신적 방황이 심하고 돈과 쾌락을 추구하고 절제심이 부족하다. 그들을 치료하시며 구원하실 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뿐이시다.
둘째로, 우리는 한 명의 영혼을 귀히 여기자. 주께서는 귀신 들린 자 한 명의 영혼을 귀히 보시고 그를 구원하셨다. 그는 그 영혼의 가치를 돼지 2천 마리의 가치보다 크게 여기셨다. 사람들은 사람의 영혼보다 돈 몇 천만원을 크게 여긴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의 구원은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한 명의 영혼의 구원을 귀히 여기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하자. 그 귀신 들린 자가 고침 받은 것은 주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기인한다. 우리의 구원도 그러하고, 또 다른 이들의 구원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시면 어떤 무지하고 완악한 죄인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하고 전도하자.
21-43절, 두 가지 기적을 행하심
[21-24절]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회당장’은 회당에서 예배를 준비하며 주관하는 자이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존귀한 직분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높아지면 마음이 교만해지기 쉽다. 그러나 회당장 야이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예수께 와서 겸손히 그의 발 아래 엎드려 열두 살된(42절) 자기 딸의 병 고침받기를 원하였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 딸은 외동딸이었다(눅 8:42). 주께서는 곧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신 것 같다. 그러나 그 회당장의 믿음은 컸다. 그는 예수께서 죽게 된 자기 딸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그의 딸이 구원을 얻어 살게 될 것을 믿었다. 그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믿은 것이다. 또 그는 금방 허락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많이 간구했다. 마침내 그의 간구는 응답되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요청대로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셨다.
[25-26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었다. ‘혈루증으로 앓는다’는 원어(우사 엔 뤼세이 하이마토스 ou\sa ejn rJuvsei ai{mato")는 ‘피가 흐르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유출병이다(레 15:2). 그는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 좋다는 의원은 다 찾아다녔고 좋다는 약을 다 복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효험이 없었고 도리어 더 심하여졌다. 12년 동안 그러했으니 몸도 마음도 몹시 쇠약해졌고 돈도 많이 허비했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오늘날도 의술과 약이 유익하지만 여전히 제한성을 가진다.
[27-29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그 여자는 감사하게도 예수께서 많은 불치의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다. 또 그뿐 아니라, 그의 속에는 믿음이 생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 여자는 예수님에게서 마지막 희망을 발견하고 그에게로 나왔다. 그런데 많은 무리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어서 그에게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는 자신의 누추한 모습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기가 부끄러웠을 것이지만,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믿음은 남 모르게 조용히 그의 옷에 손을 대는 행동으로도 충분히 표현되었다. 믿음은 어떤 고정된 신앙고백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때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말랐다.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그는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았다.
[30-33절]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도 그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아셨다. 또 그는 자기의 옷에 손을 댄 여자가 있음을 아셨고 그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말하였다.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그 여자의 믿음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불치의 병의 고침을 받았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원리는 병 고침에서나 영혼 구원에서나 동일하다. 12년된 불치의 혈루병을 고쳐주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날도 도덕적 불치병자와 같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35-36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즉시](전통본문)17)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께서 가시는 중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통보가 왔다. 그가 예수께 간청한 일은 불가능하게 된 듯하였다. 사람들은 딸을 위한 그의 간청을 포기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인간편에서의 상황이었다. 하나님의 일은 이 모든 상황과 반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믿는 자는 낙망치 않고 어려운 현실을 거슬러 행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하는 말을 즉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해야 하는 까닭은 병든 자를 고치실 수 있고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자가 그와 함께 있으시고 그가 그 딸을 살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가 원하시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성경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나 오직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믿고 진행해야 한다.
[37-39절]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떠들석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 세 제자는 예수님의 최측근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실 그 현장에 있을 산 증인들이었다. 죽음은 과연 사람들에게 가장 슬픈 일이며 사람에게 어찌할 수 없는 원수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음 앞에서 안정을 잃고 슬퍼하며 소동한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무력(無力)함을 절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생의 끝으로 본다. 그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없다. 그러나 실상은 죽음이 생의 끝이 아니고 부활이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 아이를 잔다고 표현하셨다. 죽음은 자는 것과 같고 부활은 깨는 것과 같다. 주께서는 이제 그 아이를 깨우실 것이다. 그는 마지막 날에 모든 죽은 자들을 깨우실 것이다.
[40-41절]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비웃었다. 그들이 비웃은 까닭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신 줄 알았다면 그의 말씀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낮고 제한된 생각으로 주님과 그의 말씀을 판단하고 멸시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어보내신 후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셨다. 그들은 증인이 될 것이다. 다른 이들을 내보내신 것은 그들이 주님을 믿기보다는 기적이나 구경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적은 단지 사람의 호기심이나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사람을 불쌍히 여기심에서 나온 것이며 사람을 회개와 믿음의 길로 이끄는 높은 목적이 있다.
예수께서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달리다 쿠미”(전통본문). 그것은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뜻이다. 이것이 주께서 그 죽은 소녀를 깨우신 행동이었다. 그것은 단순하고 쉬웠다. 그러나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실 때 빛이 있었듯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으셨다.
[42-43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그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즉각적 효력이 있었다. 이것은 신적 능력이었다. 이것은 그의 신적 인격의 증거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고 그 이상이셨다. 그가 사람이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다. 그 속에는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로 거하셨다(골 2:9).
다시 살아난 그 소녀는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곧 크게 놀라고 놀랐다. 그의 부모와 세 제자들은 그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 그 외에 그 집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은 그 사건의 증인이었다. 예수의 기적 사건들은 이와 같이 많은 증인들의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증거된 바이었고 그 증거들은 오늘날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후시대의 사람들은 이 기록된 증거의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알고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셨다. 그 까닭은 병고치는 일이 그의 사명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께서는 단지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기 위해 오지 않으셨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육체적, 물질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더 근원적인 영혼의 죄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또 해결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께서는 그 살아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가 정상적인 자연법칙을 인정하셨음을 보인다. 사람은 기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정상적 자연법칙으로 산다. 기적은 역사상 특별한 경우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었지 성도의 일상적 생활법칙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법칙을 무시하고 기적주의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이 몸의 건강을 원한다면, 그는 영양 있게 소식(小食)을 하고 적당히 운동하고 적절히 잠을 자고 평안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그는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자를 고쳐주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먹은 외동딸을 살려주셨다. 물론 그는 단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 그의 사명은 죄인들을 죄와 사망과 불행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다.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회당장 야이로나 혈루병 앓던 여자는 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병 치료나 영혼 구원은 원리가 동일하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된다. 예수께서는 불치의 병이나 죽음의 해결자이실 뿐 아니라, 죄와 죽음과 지옥의 문제의 해결자이시다. 그를 믿는 자는 죄사함의 구원을 얻고 영생의 복된 삶을 얻는다.
믿음은 행위로 나타난다.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은 그의 딸의 치료를 위하여 예수께 간절히 구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자의 믿음은 무리 속을 헤치고 예수께 접근하여 그의 옷이라도 만지려고 한 행위로 나타났다. 믿음은 행위로 나타난다. 오늘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 믿음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고 죄를 멀리하고 계명을 지키는 삶으로 나타난다.
6장: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1-6절, 고향 사람들이 배척함
[1-2절]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예수께서는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다. 마태복음 2장의 증거대로, 아기 예수는 얼마간의 애굽의 피난생활 후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와서 사셨고, 그래서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었다. 또 요한복음 1:45에 보면,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우리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만났는데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하였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열 일곱 번이나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다(마 26:71; 막 14:67; 16:6; 눅 4:34; 18:37; 24:19; 요 1:45; 18:5, 7; 19:19; 행 2:22; 3:6; 4:10; 6:14; 10:38; 22:8; 26:9).
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는 30세까지 안식일마다 참석하셨을 그 회당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셨다. 이제는 그가 일하시는 때이었다. 사람은 겸손히 배우며 자라야 할 때가 있고, 또 일하며 가르쳐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또 교회가 요청하는 때에 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사렛 동네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아는 지식이 없었다. 그들은 그가 가르치는 말을 듣고 그가 어떻게 그런 지혜와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하고 놀라며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통해 그가 인간의 지혜와 능력 이상의 것을 소유하신 분임이 증거되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보다 지혜와 능력의 차이이다.
[3절]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 알고 있었고 또 그의 동생들이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이며 또 그의 누이들도 그들과 함께 있다고 말하며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마태복음 13:55는 그들이 그를 목수의 아들로 알고 있었다고 말하며 또 그의 동생들의 이름도 언급했다. 그들에게 예수는 목수의 아들 목수이며 그의 동생들의 형제, 즉 단지 한 인간이었다. 그들은 그가 신적 본질과 속성을 가진 자가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의 형제들과 누이들처럼 그는 사람이며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배척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을 듣고 그의 능력의 일들을 보았지만 무지와 완고함 때문에 그를 거절하고 배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그의 어린 시절을 가지고 판단할 때가 아니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들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때이다. 그가 마리아의 아들 목수이며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의 형제일지라도 그의 교훈과 행위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면, 그들은 교만과 완고함을 버리고 겸손히 그를 영접하고 그를 인정하고 그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했던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16-17). 또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증거했다(고후 4:6).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귀한 은혜이다. 그가 은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4-6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다는 말씀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선지자의 어린 시절의 연약한 외모만 보고 그를 무시하기 쉽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사렛에서는 몇 사람의 병자들에게만 안수하여 고치셨다. 그는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는 기적을 행치 않으셨다. 믿을 만한 상황에서도 믿지 않는 그들의 불신앙은 기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택한 백성을 찾아 모든 마을에 이곳 저곳 두루 다니며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환경여건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신약성도는 주일에 교회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지혜로 가르치셨고 능력의 일들을 행하셨다. 그것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의 지혜와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었다. 그의 지혜로운 가르치심은 그의 신적 인격을 드러내며 그의 능력의 일들은 그것을 확증하였다. 그의 전도 사역에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증거는 부족하지 않았다.
셋째로,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였다. 사람이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고 교만과 완고함이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다. 주께서는 바른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다.
7-13절, 열두 제자들을 둘씩 보내심
[7절]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열두 제자들이 전도를 위해 둘씩 보냄을 받은 것은 예비적인 일이었다. 장차 주께서 부활하신 후 그들은 성령을 받아 땅끝까지 주의 증인으로 파송될 것이다(마 28:19, 20; 행 1:8). 오순절 성령강림 후 신약교회는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받았고 그 일을 수행해야 했다.
주께서 제자들을 둘씩 보내신 것은 증거의 확실성과 상호협력을 위함이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증거보다 두 사람의 증거는 더 힘이 있고 확실하다. 또 제자들은 서로 위로하고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전 4:10).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동역자(同役者)들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의 부족을 보충하며 서로를 붙들어 줄 수 있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분증이었다. 오늘날 말씀의 사역자들은 비록 그런 외적인 권세의 표는 없지만, 말씀의 권세의 표를 가진다. 말씀의 권위와 감동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표이다. 주께서는 주의 종들을 말씀의 권세로 붙드시고 사용하신다.
[8-9절]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주께서 제자들에게 여행에 필요한 양식이나 주머니나 돈, 그리고 여분의 지팡이나 신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일꾼들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사실을 교훈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전도자의 삶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는 삶이므로, 복음 전도자는 세상의 걱정 근심을 가급적 초월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전도자들이 저축이나 보험이 필요 없다고 지나치게 생각할 것은 없다고 본다. 범사에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고 저축하며 사는 것은 모든 성도의 기본적 생활 태도이어야 할 것이다.
[10절]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이것은 전도자가 한 지역에서 이집 저집 이동함으로써 부덕(不德)한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전도자의 삶은 편안함을 위해 택한 길이 아니고 주와 함께 고난에 참여해야 할 길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유하게 된 집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거기에 만족하며 더 나은 곳을 찾아 이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딤전 6:8).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과 종들을 굶주리게 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다.
[11절]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가 저 성보다 더 견딜 만하리라](전통본문)18) 하시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전도자들을 영접할 것이며 그들이 전하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이다.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은 그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마 10:40). 그러나 전도자들은 그들을 영접지 않는 자들에게서 나갈 때 발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음을 증거해야 했다. 이것은 불순종자에 대한 마지막 경고이다. 주께서 보내신 전도자들을 거절하는 죄는 인간의 죄들 중에 매우 큰 죄로 간주된다. 주께서 전도자들을 거절하는 죄가 유황불비로 소멸되었던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의 죄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12-13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제자들은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였고 많은 병자들을 고쳤다. 그들이 나가서 한 활동은 두 가지이었다. 하나는 회개하라고 전파한 것이다. 세례 요한도 회개를 전파하였다(막 1:4). 예수께서도 회개를 전파하셨다(막 1:15). 사도 바울도 전도 활동을 할 때 회개를 전파했다고 증거하였다(행 20:21). 하나님의 뜻은 회개이다. 즉 죄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를 깨닫고 버리고 떠나야 한다.
제자들이 나가서 한 또 하나의 활동은 많은 병자들을 고친 것이다. 제자들은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다. ‘기름을 바르는 것’은 성령의 능력의 활동을 상징한 것 같다. 병자 치료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었다. 그것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보증하는 표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중요하다. 주께서는 친히 모든 마을에 두루 다니며 전도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을 둘씩 둘씩 마을들로 보내셔서 전도하게 하셨다. 복음을 전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둘째로, 주께서는 전도자들에게 권세를 주셨다. 주께서는 전도자들만 보내지 않으시고 병자들을 고치며 귀신들을 내쫓는 능력을 주셔서 보내셨다. 그 권세는 사도들의 표이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들에게 말씀의 충만함과 성령의 권세와 권위를 주신다.
셋째로, 전도자들은 세상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전도자는 의식주의 문제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가 그들의 필요한 것을 주실 줄 알고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성해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전도자들을 영접해야 한다.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그를 보내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과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14-29절, 세례 요한이 목 베임을 당함
[14-16절]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열두 제자들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의 이름이 유대 땅에 더욱 알려졌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나 한 선지자라고 보았으나, 헤롯 왕은 듣고 그가 목베어 죽인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했다. 본문의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디바스로서 갈릴리와 베레아를 통치하였었다(주전 4년-주후 39년). 누가복음 9:7에 보면, 헤롯은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했다.
[17-20절]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에네코 ejnevcw)[원한을 품고]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많은 것을 행하며](전통본문)19) 달게 들음이러라.
헤롯 안디바스는 그의 이복형제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재혼했고 세례 요한은 그것이 옳지 않은 행위라고 지적했었다. 헤로디아는 요한에 대해 원한을 품고 죽이고자 했으나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해 보호하며 그의 말을 달게 듣고 그의 교훈을 따라 선한 일들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죽이지 못하였다.
[21-29절]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女兒)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한대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본문은 세례 요한이 어떻게 순교로 생을 마쳤는지 증거한다. 헤롯 왕은 공의보다 자기의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헤롯이나 헤로디아나 그의 딸처럼 살지 말자. 그들은 세상의 것들을 다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부귀와 권세와 육신적 행복을 누렸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두려워하지 않았고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불륜도 행했고 의인을 옥에 가두었고 마침내 죽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보다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더 중요히 여겼다. 그들은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악한 자들이었다.
둘째로,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살다 가자. 세례 요한은 제사장직을 버리고 가난하고 거친 환경의 삶을 선택했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생활한 경건한 자이었다. 그는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했고 또 왕의 잘못을 지적할 정도로 용기가 있었다. 헤롯 왕도 그가 의롭고 거룩한 사람임을 알았고 그를 두려워하였고 그의 말을 듣고 선한 일을 많이 행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쓸쓸히 목 베임을 당했으나,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 우리는 성도답게 살다 가자.
30-44절, 5병 2어의 기적
[30-33절]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사도들은 돌아와 예수께 모여 그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보고하였다. 그들이 행한 것은 병고친 일들이며 그들이 가르친 것은 회개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단지 선포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가르쳤다. 그들은 회개가 무엇인지, 왜 회개해야 하는지 설명했을 것이다. 전도는 선포와 더불어 가르치는 것을 포함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전도 보고를 들으신 후,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음식 섭취와 휴식이 필요하다. 주께서는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몸이 때때로 휴식이 필요함을 아신다. 그것이 그가 날마다 밤을 주셔서 잠을 자고 쉬게 하시는 이유이며 또 7일에 하루를 휴식의 날로 주시는 이유이다. 그들은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갔다. 그러나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쉬는 곳까지 따라왔다. 그들의 사모함과 열심은 매우 컸다.
[3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께서는 나오셔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 당시의 무리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바른 교훈과 인도를 받지 못했으나 바른 말씀을 갈망하여 원근 각처에서 모여왔다. 그들은 말세의 교인들과 달랐다.
예수께서는 사모하는 그들에게 여러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마태복음의 증거대로 그는 그때 병자들도 고치셨지만(마 14:14) 더 중요한 것은 가르치시는 일이었다. 물론, 그가 후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그의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는 주로 무리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다. 그의 뒤를 이은 사도들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행 6:4). 배교와 혼란의 말세에도 우리는 여전히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옛길이며 바른 길이다.
[35-37절]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2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요한복음 6:7에 보면, 빌립이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2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을 가지고도 부족하리이다]”라고 말했다. 2백 데나리온의 돈도 없었겠지만, 비록 그 돈이 있다 하더라도 갑자기 어디서 그 많은 떡을 구하며, 또 그것을 어떻게 싣고 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께서는 그 저녁에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신적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다.
[38절]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사람들에게는 먹을 떡이 없었다. 제자들이 얻은 음식은 단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다. 이것들은 그 많은 무리들에게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었다. 그러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는 것도 감사하였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것은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이었다(요 6:7). 그 아이는 그것을 예수님께 기꺼이 바쳤던 것 같다. 그것을 바치기 싫어했다면, 강제로 빼앗아 주님 앞에 가지고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자기도 배가 고팠을 텐데 그것을 바쳤다. 이 작은 것, 그러나 그 귀한 것을 가지고 주께서는 기적을 행하셨다.
우리는 한 알의 밀이 어떻게 많은 밀 이삭을 맺고 한 마리의 물고기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알들을 낳는지 그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연세계에서 이미 그런 일을 많이 하고 계심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떡 다섯 개로 많은 떡을 만드시고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물고기를 만드시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39-40절]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마가복음은 주께서 무리들을 ‘푸른 잔디’(클로로스 코르토스 clwrov" covrto") 위에 앉게 하셨다고 더 생생하게 증거한다. 푸른 잔디밭은 그 날 저녁 무리들의 야외식당이 되었다. 주께서는 무리를 백 명씩, 오십 명씩 질서정연하게 앉히셨고 그래서 그 저녁 그 기적의 떡을 먹은 자들의 수는 쉽게 파악되었다. 무리들은 무슨 음식이 나올 것인가 궁금했을 것이다. 그보다 제자들은 어디에서 이 많은 무리를 먹일 음식이 공급될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염려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한치 앞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치 말고 믿고 조용히 그의 하시는 일을 기다리며 기대해야 한다.
[41절]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축사하다’는 원어(율로게오 eujlogevw)는 ‘감사하다, 축복하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셨다. 그런데 그 저녁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줄어들지 않고 없어지지 않았다. 제자들과 무리들, 또 그 음식을 주님께 드렸던 아이는, 너무 감격적인 일을 보았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그 날 저녁의 일은 결코 잊혀질 수 없었을 것이다.
[42-44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그 날 밤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 그 기적의 떡을 배불리 먹었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의 육신적 필요를 풍성하게 공급하셨다. 남은 떡을 거두게 하신 것은 기적의 떡이 오용되지 않게 하시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일을 기념하고 어떤 기념물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다. 떡을 먹은 사람들은 남자가 5천명이었다. 마태복음은 여자와 아이 외에 5천명이라고 증거한다(마 14:21).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족히 만명은 넘었을 것이다. 그 기적은 만여 명의 증인을 가진 일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떡 기적은 인간이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기적이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따르자.
둘째로,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육신의 양식도 주셨다. 그는 말씀을 들으려고 저녁까지 머물었던 무리를 위해 떡 기적을 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날마다 만나를 주셨다. 예수께서는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교훈하시면서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6:32).
셋째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의 양식도 주신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셨다. 그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6:51). 그는 우리에게 의(義)와 영생을 주셨다. 또 성경말씀은 영의 양식이다.
45-56절, 바다 위로 걸어오심
[45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eij" to; pevran pro;" Bhqsai>davn)[벳새다 건너편으로](KJV, NASB) 가게 하시고.
무리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다 먹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웠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벳새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다. 누가복음 9:10은 오병 이어의 기적이 벳새다에서 일어났다고 증거한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의 북동쪽 해안 지역에 있고, 북에서 갈릴리 호수로 들어오는 요단강의 동쪽에 있다. 또 본문 53절과 마태복음 14:35는 그들이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요한복음 6:17, 24-25는 그들이 가버나움에 왔다고 말한다. 게네사렛 땅은 벳새다 건너편 곧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에 있는 가버나움과 게네사렛 마을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 명칭이었다고 보인다.
쉴 시간도 없이 계속 무리를 대해야 했던 제자들은 몹시 피곤했을 것이다. 떡 기적 사건이 있은 후 예수께서는 그들을 재촉하여 먼저 배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게 하셨고, 자신은 무리들을 보내기 위해 남으셨다. 이것은 제자들을 위한 그의 사랑과 배려이었고 또 원근각처에서 모여왔다 돌아가는 무리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그의 겸손한 관심과 사랑이었다. 주께서는 한 사람의 영혼을 귀히 여기시고 또 한 명의 잃어버린 영혼을 불쌍히 여기신다.
[46절]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무리를 다 보내셨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고 밤이 깊었을 것이다. 그는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그가 밤 4경, 곧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신 것을 보면, 그는 그 밤에 여러 시간 동안 기도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다. 그는 새벽기도에 힘쓰셨고(막 1:35) 밤기도에 힘쓰셨다. 신성(神性)을 가지신 그에게는 기도가 필요하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그는 기도에 힘쓰심으로 우리의 모범이 되셨다.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특히 그는 큰 일을 이루신 후에 기도하는 본을 보이셨다. 사람은 어려울 때 기도하기는 쉬워도 성공적인 일을 행한 후에 기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때 자만과 해이의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人性)을 가지셨으나 그의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을 보호하며 지도하셨을 것이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를 바르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심령으로 힘을 얻기 위해 시시때때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47-48절]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거스르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날은 저물어 밤이 깊었고 배는 바다 가운데 있었고 예수님은 홀로 육지에 계셨다. 그런데 마귀가 떡 기적 사건을 샘내어 바람을 격동시키기라도 한 듯이, 이상하게도 거친 바람이 제자들의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엊저녁에는 성공적이었으나 지금 그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세상에는 성공과 실패가 뒤섞여 있다. 그러므로 성공이라고 생각될 때 우리는 너무 기뻐하여 자만하지 말고, 실패라고 생각될 때 너무 낙심하여 불신앙에 빠지지도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바람 때문에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셨다. 그는 멀리서도 모든 것을 보셨다. 밤 사경 즈음, 즉 새벽 서너 시경에 그는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셨다. 그 깊은 밤, 그 바다 중간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을 제자들에게 그는 친히 가까이 오셨다. 그는 오늘날도 세상의 풍랑 속에서 분투하는 성도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그들을 도우시고 위로하실 것이다.
[49-51절]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놀라고 의아해 하였다](전통본문).20)
제자들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배에 오르시자 바람은 그쳤다. 제자들은 마음에 심히 놀라고 의아해 하였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은 기적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한 일이다. 물건이 공중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물 위에서 가라앉는 것은 자연법칙이지만,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영의 힘이 붙들면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다.
[52절]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것은 그가 물 위로 걸어오심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들이 그때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다면 그가 물 위로 걸어오심을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깨닫게 되었다. 마태복음 14:33에 보면, 배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적 영광을 깨닫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53-55절]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채로 메고 나아오니.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 북동쪽 해안의 벳새다에서 갈릴리 북서쪽의 땅으로 건너갔다. 요한복음은 그들이 가버나움으로 갔다고 기록한다(요 6:17, 24-25). 게네사렛 땅은 게네사렛과 가버나움을 포함한 넓은 지역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사람들은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그가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자를 침상 채로 메고 나아왔다. 사람들은 병고침을 위해서는 열심을 가지지만, 이제 자신의 죄 문제 해결을 위해 열심을 품어야 한다.
[56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병자를 시장에 두었다는 표현은 주께서 사람들이 많은 시장에서 전도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전에 혈루병 여인처럼, 사람들은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기를 원하였고 옷가에 손을 대는 자는 병고침을 얻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영광을 나타낸 일들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본받자. 그는 밤늦게 무리를 돌려보내신 후 홀로 산에 남아 기도하셨다. 그는 새벽에도(막 1:35), 밤에도, 또 밤새도록 기도하셨다(눅 6:12). 기도는 능력의 통로이며 승리의 길이다.
또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잊지 말자. 주께서는 바람이 거스르므로 괴로이 노를 젓는 제자들을 외면치 않으셨고 또 많은 병자들이 자기에게 접근하여 옷가에라도 손을 대기를 원하는 것을 거절치 않으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눈을 가지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주님, 풍랑 이는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시는 주님, 많은 병자들을 다 고치시는 주님,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 구주이시다(마 28:20). 우리는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알고 그를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자.
7장: 내면적 성결
1-13절, 씻지 않고 먹는 것
[1-5절]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보고 흠을 찾았다](전통본문).21)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전통]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물로 씻지]22)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과 침상들]23)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전통]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씻지 않은]24)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예수께서는 씻지 않은 손으로 떡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것을 크게 여겼고 거기에서 흠을 찾았다.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않았고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로 씻지 않으면 먹지 않았고 그 외에도 잔과 주발과 놋그릇과 침상들을 씻는 것 등을 지켜왔다. 그들은 그의 제자들이 왜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지 예수께 물었다. 그들의 지적은 그의 제자들에 대한 비난일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 대한 비난이었다고 보인다. 즉 장로들의 유전을 버리는 것은 잘못이며 그것을 용납한 선생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기들의 경건 생활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보다 낫다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는 교만한 태도도 나타낸다고 보인다.
[6-9절]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遺傳)[전통] [즉 주발과 잔을 씻음과 기타 너희가 행하는 여러 가지 일들]25)을 지키느니라[지킴이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예수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는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면서 그들의 외식의 악을 지적하셨다. 그 외식자들은 입술로는 무엇을 고백하나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 대신에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으며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린다고 지적하셨다.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했더라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으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도 없었고 사람의 전통이나 붙들고 외식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겉모습으로만 경건하고 의로워 보였던 것이다.
[10-13절]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그들이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한 예를 드셨다. 모세의 율법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명령되었으나(출 20:12; 21:17), 장로들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렸으면 부모에게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교훈에 반대된다. ‘고르반’은 예물이라는 뜻이다. 헌금이 부모에 대한 물질적 보답의 의무를 면제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였다고 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은 사람의 전통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뿐이다. 사람의 교훈은 그 자체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이 성경적인 한에서만 권위가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의 신앙생활의 규범은 성경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했고(딤후 3:16), 또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遺傳)[사도적 교훈 곧 신약성경]을 지키라”고 교훈했다(살후 2:15).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은 어떤 훌륭한 사람의 교훈이 아니고 심지어 교회의 공식적 신앙고백도 아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성경뿐이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전통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 그것을 어긴다고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성경으로 사람들의 전통들을 늘 분별하고 판단하고 평가하여 혹시 부족함이 있으면 그것을 수정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는 인간관계의 도덕적 계명들도 힘써 지켜야 한다. 성도는 어떤 구실로도 성경에 계시된 도덕적 계명들을 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며, 살인하지 말고 남을 미워하거나 비방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마음으로라도 음란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탐심을 품지 말아야 한다.
14-23절,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14-19절]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26) 하시고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외식자들은 외적 정결만 힘썼다. 그러나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과 부정결은 도덕적 문제이지 단지 위생적 문제가 아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말씀을 듣고 배울 때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주께서 아무리 바른 말씀을 하셔도 영적인 귀가 없는 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이 말씀뿐 아니라 모든 말씀들이 그렇다. 아무리 많은 말씀들이 선포될지라도 깨달은 말씀만 유익이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주께서 무리를 떠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그 비유에 대해 묻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으로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고 설명해주셨다. ‘뒤’라는 원어(아페드론 ajfedrwvn)는 ‘변소’를 뜻한다. 사람이 먹는 것들은 유익한 영양분들은 몸에 다 흡수되고 나머지는 다 배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는 것들 자체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음식물 자체는 더러운 것이 아니고 깨끗하다.
[20-23절]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전통본문은 “간음, 음란, 살인, 도둑질, 탐욕”의 순서이다.27) ‘음탕’이라는 원어(아셀게이아 ajsevlgeia)는 ‘음탕’ 혹은 ‘방탕’이라는 뜻이고, ‘광패’라는 원어(아프로쉬네 ajfrosuvnh)는 ‘미련함’이라는 뜻이다(BDAG). 마음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그 악한 생각들은 간음, 음란, 살인, 도둑질,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미련함 등이다. 사람은 죄로 심히 부패되어 있어서 육신적 욕망에 지배를 받고 있다. 모든 인류는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무능력해져 있다. 구약의 역사가 이 사실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17:9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했고, 예레미야 13:23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아담의 자손인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참된 의와 선을 행할 수 없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늘 마음의 깨끗함을 지켜야 한다. 참된 성결은 마음의 성결이다. 마음의 악한 생각들, 간음, 음란, 살인, 도둑질, 탐욕, 악독, 속임, 음탕, 방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미련함 등을 씻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이 마음의 성결을 얻는 길은 오직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피로 죄씻음을 받는 길뿐이다(행 15:9; 히 10:22).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만 가능하다.
24-30절, 이방 여자의 딸을 고쳐주심
[24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와 시돈]28)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의 마을들에서 전도하신 후 일어나셔서 거기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경으로 가셨다. 두로와 시돈 지경은 갈릴리 서북쪽 지중해 연안 지역이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이 필요한 곳은 어디나 방문하셨다. 그는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였으나 숨길 수 없으셨다. 그가 병자들을 고치고 기적들을 행하셨다는 소문은 그곳까지도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소문은 그의 사명을 왜곡시킬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모르게 하려 하셨다. 그는 병자를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25절]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렸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께서는 그를 아셨고 그가 올 것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주께서 그 여자와 그의 병든 딸을 위해 그곳에 가셨는지도 모르겠다. 그 병든 어린 딸은 더러운 귀신 곧 더러운 영이 들려 있었다. 더러운 영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정신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부모에게 대항하고 이웃에 대해 원망하고 거짓되고 음란한 정신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악한 성질들을 사용한다. 그 딸은 이런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26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수리아-페니키아] 족속이었다.마태복음 15:22는 그가 ‘가나안 여자’라고 말한다. 두로와 시돈 지방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주 지역이 아니고 이방인들의 지역이었다. 그는 이방 여자이었다. 그는 예수께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기도는 구하는 것이다. 기도는 어떤 형식을 갖춰야 하거나 주문처럼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할 소원들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나의 딸을 고쳐주시옵소서.”
마태복음 15:22에 보면, 그 여자는 예수께 나와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메시아라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또 그는 예수께서 각종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신적 구주이심을 믿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감히 예수께 나아와 그의 딸의 치료를 간청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처음에는 대답지 않으셨다. 그러자 그는 예수께 절하며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다시 말했다.
[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을 자녀들과 개들에 비교하셨다. 그의 처음 반응은 매우 무정하게 보였다. 그의 말씀은 그 여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씀이었다. 우리가 주님께 이런 취급을 받는다면 우리는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 여자를 시험하는 것이었고 그 여자는 그 시험을 잘 통과하였다.
[28절]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 여자는 마음의 상처를 받는 대신에 매우 겸손하게 대답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과 특권과 복을 누리나 이방인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없으며 또 이방인들에게는 경건도, 도덕성도 부족함을 인정한 것이다. 단지 그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말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말하였다(마 15:27).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바른 마음가짐이다. 사람은 자신이 피조물이요 부족한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 그 여자는 겸손하게 그러나 간절하게 딸의 병고침을 간구하였다.
[29-3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마태복음에는, 주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5:28).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고 아이는 치료되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인간의 정신적 질병의 심각성을 인식하자. 우리는 현대인의 정신적 질병의 치료를 위해 적당한 휴식, 운동, 맑은 공기 마시기, 등산, 걷기, 친구와의 교제, 자기 감정의 조절 훈련, 그리고 신경정신과적 처방 등이 다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을 믿고 그의 도우심을 구하자.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 이 세상에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자는 하나님밖에 없다.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오늘날도 사람의 영육의 질병을 완전히 고쳐주실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겸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해야 한다. 본문의 이 여자는 겸손한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와 응답을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할 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고, 또한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믿음 없는 기도나 교만한 자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31-37절,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심
[31-32절]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원문은, “예수께서 다시 두로와 시돈 지경에서(전통사본)29) 나와 갈릴리 호수로, 데가볼리 지경 안으로30) 오시매”이다.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호수 서북쪽 지중해 연안 도시들이다.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 다시 갈릴리 호수 쪽으로 내려오셨다. 데가볼리 지경은 갈릴리 호수 남쪽의 일부와 남동쪽의 요단강 건너편 일부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귀먹고 어눌한 자[말을 더듬는 자, 언어장애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병자 자신이 예수님께 나아와 고침 받기를 간구한 경우도 있지만, 어떤 때는 주위의 사람들이 병자를 예수께 데려오기도 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에게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다. 세상에는 병환자들이 많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것은 인류의 죄의 결과이었다. 이 세상은 참으로 슬프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들이 많은 세상이다. 그러나 그런 불행한 일들은 장차 죄 없는 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33-34절]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예수께서 그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신 것은 사람들이 그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뒤에 사람들을 경계하시며 아무에게라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알 수 있다.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병자를 고쳐주기 위함이 아니고 죄인들의 죄를 씻어주기 위함이셨다.
그가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신 것은, 그 귀먹고 어눌한 자의 문제가 무엇이며 그가 지금 그를 위해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셨다. 그의 문제는 귀와 혀에 있었다. 특히 혀의 장애는 그의 말의 기능을 어렵게 하였다. 사람의 말은 목청과 입뿐 아니라, 혀의 움직임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문제되는 바로 그곳에 그의 치료의 손을 얹으셨다. 그의 이 특이한 행동은 그 귀머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그를 고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에바다”(ejffaqav)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31) 그는 하늘을 향해 탄식하셨다.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실 때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곤 하셨다(막 6:41; 요 11:41; 17:1). 그는 하나님을 향해 탄식의 기도를 드리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죄의 결과로 인한 인간의 불행을 보시고 탄식하신 것이다.
[35-37절]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그런데 곧32)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해졌다. 주님의 치료는 신속하고 완전하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이었다. 누가 예수님처럼 고칠 수 있겠는가? 아무도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만 하실 수 있다. 오늘날도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오늘날도 그는 살아계셔서 일하시며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영적 불구자들을 치료하신다.
예수께서는 그 병자를 데려온 자들에게 경계하시며 아무에게라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가 경계하실수록 그들은 더욱 널리 전파하였다. 사람들은 심히 놀라,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하신 일들은 다 잘 하신 것뿐이다. 그는 참으로 좋으신 구주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긍휼이 많은 주님이시다. 그는 귀먹고 어눌한 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는 그 고통하는 사람을 보시고 하늘을 향해 탄식하셨다. 이와 같이 그는 병자들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셨다. 오늘날도 그는 불행한 일을 당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신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중풍병자, 나병환자, 앉은뱅이, 소경, 귀머거리, 귀신들린 자 등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심지어 죽은 자도 살려주셨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20개, 마가복음은 18개, 누가복음은 20개, 요한복음은 8개 각각 증거한다.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풍성히 증명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확신하자.
구주 예수께서는 오늘날도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사도 시대 이후에 외적 기적은 중단되었을지라도, 내면적 기적, 곧 죄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일, 심령의 눈과 귀가 열려 성경말씀을 이해하고 입이 열려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하며 전도하는 일은 항상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 그것은 외적 기적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좋은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들을 예수께 데리고 나와 고침 받고 구원받게 하기를 힘써야 한다.
8장: 베드로의 신앙고백
1-10절, 두 번째의 떡 기적
본문은 두 번째의 떡 기적 사건으로서 떡 일곱 개로 약 4천명을 먹이신 일이다. 이것도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인다. 마가복음 7:31은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로 오셨음을 증거하였고, 마태복음 15:29는 마가복음과 같은 사건을 증거하기 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 오셔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고 많은 무리가 그 앞에 모였고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두 번째의 떡 기적도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났다고 보인다.
[1-3절]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그때에 심히 큰(팜폴루 pampovllou)(KJV)33) 무리가 주 앞에 모여 있었고 그들에게는 먹을것이 없었다. 그 시대에는 일반 백성들에게 물질적 유여함이 없었던 것 같다. 더욱이, 그곳은 광야이었고(4절) 그들은 이미 사흘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주님 말씀을 듣는 일에 대단히 열심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그들이 길에서 기진할 것을 염려하셨다. 그들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딱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고 그래서 떡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떡 기적은 무리를 불쌍히 여김에서 나왔다.
[4-7절]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도무지 인간적으로는 대책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많은 무리를 위해 떡을 살 돈도 없었겠지만, 돈이 있다 하여도 그 많은 분량의 떡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가진 것은 떡 일곱 개뿐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시며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들 앞에 놓게 하셨다. 그는 작은 것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제자들은 그 떡을 무리들 앞에 놓았다. 또한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었는데, 주께서는 축복하시고 그것도 그들 앞에 놓게 하셨다.
[8-10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4천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그 날, 놀라운 기적이 다시 일어났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다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나 거두었다. 그 떡을 먹은(호이 파곤테스 oiJ fagovnte")34) 사람들은 약 4천명이었다. 마태복음 15:38은 먹은 사람이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약 4천명’이라고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다. 마태복음 15:39의 전통본문은 그들이 ‘막달라’ 지경으로 가셨다고 증거한다. 막달라는 갈릴리 바다의 서쪽 해안 중간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그 날 보잘것 없어보이는 떡 일곱 개로 그 큰 무리의 필요를 해결해주셨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복음화의 큰 일을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통해 이루셨다. 교회의 모든 일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주심으로 된다. 전도는 단지 돈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설립도 그러하다. 신약교회의 역사는 이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보잘것없는 금액의 헌금이, 보잘것없는 조직력과 행정력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대한 일을 이루어 왔고 지금도 또 앞으로도 이루어 갈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공급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날 떡 일곱 개로 약 4천 명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그는 배가 심히 고팠을 그 무리들에게 참으로 풍성하게 공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겨우 먹이지 않고 배불리 먹이는 분이시다. 천하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천지만물의 창조자시며 섭리자이신 그는 부자이시다. 그는 원하시면 자기 백성에게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 좋은 것을 공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며 살아가야 한다.
셋째로, 떡 기적은 영적으로 예수께서 자기 몸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는 것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6:48, 51). 그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고 잔을 주시며 “이것은 많은 사람의 죄사함을 위해 흘리는 나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6:26-28). 그는 한 분이시지만,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 그의 살과 그의 피는 많은 사람에게 영생의 양식이 되었다. 과연, 외적으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 분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풍성한 양식이 되신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께로 나아오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는다.
11-21절,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11-13절]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詰難)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다. ‘힐난하다’는 말은 ‘트집을 잡아 비난하다’는 뜻이지만, 그 원어(쉬제테오 suzhtevw)는 ‘변론하다’는 뜻이다(BDAG). 예수께서는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그는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셨다.
기적은 사람의 호기심의 만족을 위해 호기심거리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자들에게 유익이 되나, 믿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한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들을 보았으나 그를 믿지 않았다(요 12:37).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그의 기적들을 보고, 또 오늘날에는 그것들을 기록한 성경의 증거를 읽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요 20:30-31).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어도 성경말씀의 충족한 증거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예수께서는 제자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고(요 20:29), 또 사도 베드로도 말하기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였다(벧전 1:8-9). 우리는 기적을 구하지 말고 기적보다 귀한 믿음을 구해야 한다.
[14-16절]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본문은 잘못된 교훈을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므로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었을 때, 주께서는 그들에게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도 하셨다(마 15:6). 그런데 제자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라고 했다. 제자들은 떡의 누룩을 생각했으나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헤롯의 교훈을 가리키셨다. 바리새인들의 교훈은 외식적이었고, 사두개인들의 교훈은 이성주의적이었고, 헤롯의 교훈은 세속주의적이었다고 본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잘못된 교훈들을 조심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도 바른 교훈이 아닌 것들은 다 조심해야 한다. 요한일서 4:1,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오늘날 우리는 천주교회나 이단종파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교회연합운동, 포용주의, 은사주의, 열린예배 같은 교회 속화 운동을 경계해야 한다.
[17-21절]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5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4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떡이 없음에 대해 의논함을 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둔함을 지적하시며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제자들이 떡 기적을 잊어버렸는가 하고 물으셨다. 그는 떡 다섯 개를 5천명에게 떼어줄 때 남은 조각을 몇 바구니나 거두었는지, 또 떡 일곱 개를 4천명에게 떼어줄 때 남은 조각이 몇 광주리나 되었는지 물으셨다. 제자들은 열 둘과 일곱이라고 각각 대답하였다. 바구니와 광주리의 차이는 불분명하다.
두 차례의 떡 기적은 확실한 사건들이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사건들을 다시 확인시켜주셨고 또 후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 기적들의 확실함을 한번 더 증거하셨다. 그러나 떡 기적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과 인격이다. 떡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예수께서 행하신 병고침의 일들을 포함한 모든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과 인격을 증거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외적인 기적보다 내면적인 믿음을 구하자. 또 성경적인 바른 교훈을 붙들자. 또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확신하자. 그는 두 차례나 떡 기적을 행하셨다. 그는 소경, 앉은뱅이, 나병환자, 중풍환자, 열병환자, 귀신들린 자 등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실 뿐 아니라, 또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하셨고, 포도주 기적과 떡 기적을 행하셨고, 바다 위로 걸어오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이런 기적들은 확실히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거기에 더하여, 그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받고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자.
22-26절, 소경을 고쳐주심
[22-23절]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예수께서는 벳새다에 이르셨다. 그곳은 떡 기적을 행하셨던 곳이다(눅 9:10).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그에게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였다. 그들은 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었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있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영적 소경인 죄인들을 구주 예수께로 인도하는 열심 있는 성도들의 모범이다. 소경은 참으로 불쌍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도,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항상 어두운 세계 속에서 산다. 그는 생활하기나 길을 걷기에도 불편하다. 물론 세상의 불행한 일들이나 미움과 격노의 얼굴이나 죄악된 일들을 보지 않는 장점도 있기는 하다.
예수께서는 그 소경의 손을 붙들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셨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병자들을 고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는 믿음 없는 자들 앞에서는 기적 행하기를 꺼려하셨다(막 6:5-6). 그는 그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셨다. 그 소경은 비록 볼 수 없어도 무엇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주께서는 아마 그의 눈에 손을 얹으셨을 것이다. 그런 후, 그는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다.
[24-26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그 소경은 우러러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실 때에는 병자가 보통 즉시 고침을 받았으나 이 경우는 웬일인지 즉시 고침을 받지 못했다. 그 소경은 사람들이 보이지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간다고 말하였다. 그의 눈은 시력을 얻었으나 완전치 못하였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 눈에 다시 안수하셨고 그로 다시 쳐다보게 하셨다. 그 소경은 완전하게 고침을 받았고 만물을 밝히 보았다. 주께서는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전통본문에 보면, “마을에 들어가지 말고 마을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35)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병고침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가 두 번 안수하심으로 소경을 고치신 것은 우리의 영안(靈眼)을 고쳐주시는 일에 비교될 수 있다. 사람에게는 영안(靈眼)이 있다(계 3:18). 우리는 과거에 죄인이었고 영적 소경이었다(엡 4:1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었을 때 우리의 영안(靈眼)이 열리었다(고후 4:6). 그러나 마음의 눈의 시력은 단번에 완전케 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밝아진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17-19에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천국 영광의 풍성과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힘써야 하고 진리의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에베소서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신약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이미 얻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 귀머거리와 벙어리, 소경과 앉은뱅이 등을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려주심과,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통해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고 또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 구원을 얻었다. 신약성경의 증거를 통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다 구원을 얻었다.
둘째로, 우리는 더욱 더 밝은 영적 시력을 사모하자.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와 뜻을 희미하게 이해하지 말고 밝히 이해하고 확신하기를 소원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하였다(엡 1:18-1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의 진리와 십자가 대속(代贖) 사역과 죄사함의 가치와 천국과 영생의 가치에 대해 더욱 깨닫기를 소원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심령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를 소원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진리, 즉 믿어야 할 교리적 내용과 행해야 할 생활교훈을 다 바르게 깨닫고 믿고 확신하고 또 그 모든 교훈을 힘써 실천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영적 소경인 우리 주위의 믿지 않는 많은 이웃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 육신의 소경도 불쌍하지만, 영적 소경은 그보다 더 불쌍하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목적도, 죄의 심각성도, 지옥 형벌도 알지 못하고, 천국의 영광도, 영생의 보화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우리는 그런 자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그의 눈이 열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자신의 죄악됨과 허무함을 깨닫고 죄사함과 영생과 천국의 복된 구원을 얻게 하자.
27-30절,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함
[27-28절]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제자’라는 호칭은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 268회나 사용되었다.36) ‘제자’는 선생님에게 말씀을 배우며 그를 따르는 자를 가리킨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에서 약 40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도시이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근본적인 질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는 그에 대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참 믿음은 바른 지식을 동반한다. 예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사람들의 견해를 모르셔서가 아니고 이제 제자들이 자기에 대해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지 선지자나 종교적, 도덕적 선생이 아니셨다.
[29-30절]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이전에 자신에 대해 많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증거한다. 단지, 세례 요한이 그에 대해,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증거하였고(막 1:8), 그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로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다(막 1:11). 또 그가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실 때 그 귀신이 그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불렀다(막 5:7).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기보다 행동으로 증거하셨다.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는 자신이 전도하기 위해 오셨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셨다. 또 그는 나병환자, 중풍병자, 열병환자, 한편 손 마른 자, 혈루병자, 귀머거리, 소경 등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또 귀신들린 자들을 많이 고쳐주셨다. 또 그는 다른 기적들도 행하셨다. 그는 떡 기적을 두 번 행하셨고 바다 위로 걸어오셨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고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물으심으로써 자신에 대한 바른 견해를 알리기를 원하신다. 그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리스도는 신분을 나타낸다.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구약시대에 선지자, 제사장, 왕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는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으로 오실 자이었다. 그는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며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시며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며 보호하시며 악한 자들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신 것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견해를 나타낸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다. 사실, 이것이 복음서 전체의 요지이며 성경전체의 기본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맨 처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했다(막 1:1).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고(요 20:31) 또 사도들이 전한 가장 기본적 내용이 바로 이것이었다(행 5:42; 16:31).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구원받는 믿음이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행 16:31).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자신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그것은 그 당시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이며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라야 메시아에 대한 바른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께서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사회적 안정을 주시고 병자들이 고침 받고 물질적 궁핍이 제거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이사야는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예언하였다(사 35:1-2, 5-6).
그렇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 그런 환경적 회복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미래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먼저 영적 회복에서부터, 즉 먼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 세상의 육신적, 물질적, 사회적 회복도 뒤따를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요지이며 복음서들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인류의 구주로 세상에 보내셨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전부는 아니다. 장차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시작된 구원은 영화롭게 완성될 것이다. 그것이 영광의 천국이다. 메시아의 사역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렇게 완성될 것이다.
31-38절, 예수님을 따르는 길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이때 이후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적어도 두 번 더 증거하실 것이다(마 16:21; 17:22-23; 20:17-19).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도 말씀하셨다(마 20:17-19).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실 자가 아니고, 오히려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후 다시 살아나실 자이시다.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했다(고전 1:23). 그의 죽음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속죄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32-33절]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책망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때까지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무지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았지만 고난 받으실 그리스도로는 알지 못하였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사는 것만 생각했지 죽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베드로의 최선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에 불과하였다.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교훈한다. 그것은 세 가지 내용이다. 첫째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꺾고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 그것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사람에게 주신 의무이었고 구약 율법의 요구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행하신 일이었다. 히브리서 5:8-9는,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자기 뜻을 꺾고 하나님 뜻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는 사형수의 형틀이다. 사형수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가서 거기서 그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요한복음 19:17은,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말로 골고다라는 곳에 나오셨다고 증거한다.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
셋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제자는 선생의 교훈을 믿고 그 교훈을 행하며 그의 본을 따르는 자이다. 그것이 그를 따르는 것이다. 주께서는 이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제자들은 그를 따라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주께서는 자기 희생을 요구하셨다. 이것은 무거운 요구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되 이런 희생을 생각지 않는다. 이런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들은 믿는 일을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바로 깨달았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즐거이 복종할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해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지옥 형벌을 받을 죄인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우리가 죄사함과 구원을 얻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희생이 우리에게 지나친 요구가 되겠는가?
[35-37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만일 사람이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 한다면, 그는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자요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참 제자이며 그의 구원은 확실할 것이다. 사람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다 얻는다 할지라도 영생의 구원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38절]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누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한다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마 24:30) 그를 부끄러워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며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아직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는 그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통해, 그의 제자들의 증거를 통해, 즉 신약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확신하자.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러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셨다. 그는 죽음으로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셨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주신 자기 부정의 길을 걸으라는 교훈을 따르자. 그것은 그가 친히 가신 길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자. 우리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이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의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을 행하자. 우리는 자기 희생과 죽음까지도 각오하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그의 영광의 재림을 소망하자.
9장: 변화산 사건
1-13절, 변화산 사건
[1절]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다음절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나타낸 변화산 사건이나 성령께서 능력으로 강림하신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을 가리킬 것이다. 다니엘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로마 제국 시대에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을 예언했다(단 2:44). 이 예언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막 1:15; 4:26).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그의 심령 속에서 시작된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의 강림으로 복음 전파를 통하여 확장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2-3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예수께서는 때때로 세 제자들을 데려 다니셨다. 늘 함께 있으면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은 훈련이다.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변형되셔서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눈같이(전통본문)37) 심히 희어졌다. 그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이요 그의 거룩함과 무죄(無罪)함의 영광이다. 평소 감춰져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 산에서 밝히 드러났다.
[4-6절]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모세와 엘리야의 나타남은 신기하고 특별한 사건으로서 그들이 죽었으나 그들의 존재가 없어진 것이 아니고 그들의 영혼이 불멸하다는 것과 그들이 영광 중에 안식을 누릴 천국의 존재를 증거한다. 특히 구약 성도들 중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대표한다. 구약의 율법은 모세를 통해 전달되었고, 엘리야는 구약시대의 대표적 선지자로서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 또 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제사 제도와 성막 제도로 예표되었고 선지자들의 글들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시다.
[7절]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구약시대로부터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의 표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 가운데 찾아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친 음성의 증거이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있었다(막 1:11). 변화산 사건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또 하나의 유력한 증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실제로 중요한 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8-10절]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변화산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이 잠시 나타난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 일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부활은 그의 그리스도 되심을 확증할 것이다.
[11-13절]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구약성경 말라기 4:5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예언했다. 이 예언대로 보냄을 받은 자가 세례 요한이었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11:14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17:13에 보면, 제자들은 성경에 예언된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임을 알았다. 그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은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도 무시하였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사람들은 회개하고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산 위에서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의 증거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듣자.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복음서들에 기록된 그의 모든 말씀과 모든 성경을 읽고 듣고 믿고 실천하자.
14-32절,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
[14-16절]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산 아래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변론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병 고침이나 귀신 내쫓음에 대해 변론했을지 모른다. 그때 마침 예수께서 내려오셨다. 모든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였다. 그들이 놀란 것을 보면 그들이 방금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려와 그를 맞으며 문안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에게(전통사본)38)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고 물으셨다.
[17-18절]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 아들은 그의 외아들이었다(눅 9:38). 귀신이 그를 잡으면 그가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고 파리하여 갔다. 그것은 간질 증세와 같았다. 그의 소망이었을 외아들이 이런 악한 귀신에 붙잡혔으니 참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그의 제자들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받았으나(막 3:15; 6:7) 믿음이 약하여 그 아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서기관들도, 무리들도 믿음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미 행하신 기적들을 통해 그를 믿을 만했으나 그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를 탄식하셨던 것 같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는 열심이 있어도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는 열심이 없다. 그러나 긍휼의 주께서는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말씀하셨다.
[20-22절]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그 아이의 병은 아마 수년 이상된 불치(不治)의 병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예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구해야 할 때 그에게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확실한 믿음이 없었다.
[23-2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네가 믿을 수 있다면, 믿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니라](KJV)39)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그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었다. 전통사본에 보면,40) 그는 울면서 소리질렀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말하였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믿음이다. 믿음 없는 자는 성경 읽고 기도하는 생활에 힘쓰지 않으며 예배드리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세상일이 바쁘다고 주일예배 빼먹기를 쉽게 할 것이다. 그런 행위들은 믿음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걱정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섭리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을 위해 간구해야 할 것이다.
[25-27절]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말씀하셨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예수님의 이 명령으로 충분하였다.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자연계와 정신계를 주관하는 능력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가 명령하시자, 그 귀신은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다. 그 아이는 죽은 것같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그 아이는 일어섰다. 그 벙어리 되고 귀먹은 더러운 영은 나갔고 그 아이는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전하였다. 귀신은 예수님께 복종하였다. 그의 말씀에는 신적 능력이 있었다. 이 일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하였다.
[28-29절]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전통사본에는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되어 있다.41)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약하면 조금 기도하고, 믿음이 강하면 많이 기도할 것이다. 금식은 몸에 힘을 주는 음식의 공급을 중단하고 포기하는 것이므로 비상한 기도의 방식이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성도는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금식하며 기도한다. 금식 기도는 어려운 문제 해결의 열쇠이다.
[30-32절]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人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예수께서는 이미 낮아지셨고 또 죽으심으로 더 낮아지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이다.
오늘날도 성도는 악령들과 싸운다(엡 6:12). 귀신은 악하고 더러운 영이며 사람을 불행케 하는 영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성도를 범죄케 하려 한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우리는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친히 귀신을 명령하여 내쫓으셨다. 그는 신적 능력을 가지신 신적 인격이시다. 그는 우리의 대속(代贖)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주께서는 믿음 없는 세대를 책망하셨다.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믿음이 있다면 아무 문제가 아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말씀과 기도로 능력의 주님과 동행하며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공급하심을 받는다.
우리는 오직 기도로 행하자.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기도는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로 행해야 한다. 또 중대하거나 매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금식하며 기도하자. 29절,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33-42절, 서로 섬기며 영접할 것
[33-34절]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제자들에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명예심과 야망이 있었다. 이것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다. 죄성의 본질은 교만이요 그것은 남에게 높임을 받으려는 명예심과 남을 지배하려는 욕심을 포함한다. 그들은 주님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들의 변론이 부끄러운 것임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의 결함을 고쳐주기를 원하셨다. 모든 잘못은 고쳐야 한다. 열 번이라도 지적을 받고 죽을 때까지라도 고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하고 온전한 인격이 되기를 원하신다.
[35절]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교회 안에서 큰 자는 나이나 학력, 재력이나 사회적 신분, 심지어 신앙 연륜에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다 한 요소이긴 하겠지만, 바른 판단 기준은 아니다. 주의 말씀대로, 교회에서 큰 자는, 겸손히 다른 교인을 섬기는 자이다. 겸손히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크게 여기시는 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심으로 친히 겸손의 본을 보이셨다.
[36-37절]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내 이름으로’라는 말은 ‘내 이름 때문에’라는 뜻이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름 때문에, 예수님 믿는 가정의 자녀라는 이름 때문에, 그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려는 이유 때문에, 그를 영접하는 것을 말할 것이다. 예수님 이름 때문에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것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자로 내보내실 때도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까닭은 예수께서 그 아이를 위해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며(마 16:26),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실 영혼이다(고전 8:11).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영접해야 한다.
[38절]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은 그 사람이 진실한 신자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시대에 귀신을 내어쫓는 하나님의 은사가 제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주께서 풍성한 은사를 내리시는 시대에 주어진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 내어쫓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의 이런 태도는 파벌주의나 당파심의 위험이 있었다고 보인다. 우리를 따라야만 옳다, 우리 교회에 나와야만 된다는 생각은 분명히 파벌주의요 당파심이다. 제자들이 단지 그가 그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판단하였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사람에게는 이런 편협한 마음이 있고 그것도 죄악이다.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이는]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없음이니라].
여기에 예수님의 포용심이 나타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이 없고 내용적으로 명백한 오류가 없는 한, 그를 허용하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역사적 정통 기독교 신앙을 비방하는 자유주의자들을 용납하거나 그들과 교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적 기독교를 명백히 이탈하고 왜곡시킨 천주교회나 각종 이단종파들을 용납하거나 교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명백히 비성경적인 교훈을 하거나 바른 교회와 목사를 비방하는 것이 아닌 경우, 우리 파가 아니고 우리 교회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를 비난하고 정죄하려는 태도는 편협한 당파심인 것이다. 우리는 그런 마음가짐과 태도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제와 절교, 포용과 경계의 선을 잘 그어야 한다.
[40절]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주께서는 “이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임이니라”(전통본문)42)고 말씀하셨다. 물론 이 말씀은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는 자의 모든 일이 허용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을 행하며 그를 공공연히 반대하지 않는 자는, 비록 다른 점들에 있어서 잘못이 있을 수 있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위하는 자라는 뜻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른 형제들에 대해 이런 정도의 포용심을 가져야 한다.
[41-42절]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작은 종 하나를 대접하는 것은 확실히 상을 받을 일이며,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어린아이 하나를 범죄케 하는 것은 심히 큰 죄악이 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자신을 낮추며 모든 사람을 섬기는 마음으로 행하자. 주의 제자된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의 종처럼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이런 자가 교회에서 큰 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자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이어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형제 자매이다. 교인들이 목사와 장로들과 교회 직분자들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지만, 직분자들 자신은 모든 교인들의 종처럼, 그들을 섬기며 사랑하고 그들의 믿음과 기쁨을 돕는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를 영접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교인 한 명, 또 어린아이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귀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한 영혼의 가치는 크다. 우리는 겸손히 서로 사랑하고 오래 참고 용납하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돌아보고 피차 복종하고 서로 영접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교훈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이러한 교훈을 실천하는 성도들의 모임이 참 교회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를 드러나게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정도의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런 자를 무시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어린아이 하나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기를 힘써야 하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큰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
43-50절, 지옥의 교리
[43-50절]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니라.]43)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44)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니라.]45)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불의]46)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받으며 모든 제물이 소금으로써 뿌려지리라].47)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또한 가장 강조해서 지옥의 교리에 대해 말씀하셨다. 지옥은 천국과 대조되는 세계이다. 천국과 지옥은 세상의 마지막 상태 곧 영원한 상태이다. 그것은 몸의 죽음 후의 영혼의 상태일 뿐 아니라, 부활 후의 영원한 상태이다. 천국은 영생의 나라요 영광과 행복과 즐거움이 있는 나라이지만, 지옥은 영원한 형벌과 고통과 불행과 치욕이 있는 세계이다. 주께서는 두 손과 두 발과 두 눈을 가지고 범죄하여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손과 한 발과 한 눈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가르쳐주셨다. 지옥은 악인을 위한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은 부활과 연관되어 있다. 주 예수께서는 이중 부활에 대해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5:28-29에서 그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5:28-29). 사도 바울은 경건한 유대인들처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을 믿었고(행 24:15),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라고 증거했다(딤후 4:1). 그것은 구약 다니엘 12:2에서 이미 증거된 진리이었다.
지옥의 교리는 성경적 교리이다. 그것은 특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증거하신 교리이다. 주께서는 복음서에서 이 본문 외에 다른 여러 곳에서도 지옥에 대해 말씀하셨다(마 5:22, 27-30; 10:28; 23:15, 33; 25:41, 46; 눅 12:5). 주께서 가르치신 지옥은 악인의 몸과 영혼이 함께 던지우는 형벌의 장소이지만(마 10:28), 그는 누가복음 16:23-28에서 악인이 죽은 후 아직 부활하기 전에도 그 영혼이 지옥에서 고통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1:9에서 주의 재림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지옥이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끝부분에서 지옥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하였다(계 19:20; 20:10, 14-15; 21:8).
지옥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자이시다. 죄의 보응은 죽음이요(롬 6:23) 그것은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 지옥은 또한 죄의 무서운 사실을 증거한다. 죄는 결코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여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지옥으로 이끄는 심각한 문제이다. 큰 죄를 지은 사람만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모든 죄인이 다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성경은 천국과 지옥 외에 다른 장소를 말하지 않는다. 제3의 지대는 없다. 죄는 사람을 지옥 꺼지지 않는 불로 인도하는 무서운 존재이다.
그러면 지옥에서 구원받는 길은 무엇인가? 본문은 사람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으려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그러나 범죄치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성경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계 20:15). 또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인식하고 두려워하자. 사람은 다른 이의 몸을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에 던지시는 두려우신 심판자이시다(마 10:28). 지옥은 하나님의 공의가 어떠함을 잘 증거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공의를 바르게 인식하고 그를 두려워하자.
또 우리는 죄의 심각한 문제를 인식하자. 죄는 심각한 문제이다. 죄의 보응은 죽음이며 그것은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죄는 사람을 지옥으로 이끄는 무서운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하고 모든 죄를 다 끊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손과 우리의 발과 우리의 눈이 우리로 범죄케 하지 못하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자.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속죄신앙을 가지자. 그것만이 지옥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의 의는 예수의 피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의만 의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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