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사복음서·사도행전강해·김효성목사

마태복음 1장-9장 / 김효성 목사

영국신사77 2020. 4. 18. 16:37


마태복음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11월 27일 수정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 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예수 그리스도의족보, 초자연적 잉태

2장: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피신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4장: 공적 사역을 시작하심

5장: 완전한 의의 삶

6장: 참된 경건의 삶

7장: 행위로 열매 맺는 삶

8장: 주님의 능력

9장: 죄를 사하는 권세

10장: 열두 제자를 보내심

11장: 믿음 없는 세상

12장: 성령 훼방죄

13장: 천국 비유들

14장: 떡의 기적

15장: 마음의 더러움

16장: 베드로의 신앙고백

17장: 변화산 사건

18장: 겸손과 용서를 가르치심

19장: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어려움

20장: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21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2장: 유대의 지도자들과 변론하심

23장: 위선자들을 책망하심

24장: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

25장: 깨어 충성할 것

26장: 잡히심

27장: 죽으심

28장: 부활하심

서론

‘복음’이라는 원어(유앙겔리온)는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가장 좋은 소식이다. 복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생애를 증거하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라는 네 권의 책에 적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사복음서의 처음 세 권은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 불린다. ‘공관’이라는 말은 ‘함께 보여진’이라는 뜻이다. 처음 세 권은 ‘대조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이와 다르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들의 내용을 보충하는 성격을 띤다.

본서의 저자는 마태이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직업이 세리이었다(마 9:9; 10: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진실한 증인들이었고 이 책에 기록된 내용들은 다 사실이었음을 믿는다.

마태복음이라는 명칭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주후 1세기 말 디다케(80-100년경)에서 자주 사용되었고 바나바 서신(70-100년경)에서는 심지어 ‘기록되었으되’라는 표현이 사용되면서 인용되었다. 그 외에도 순교자 저스틴(100-165년경) 등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인용 혹은 암시되었다.

초대교회는 만장일치로 본서를 사도 마태가 쓴 책으로 돌린다. 파피아스(60-130년경)는 “마태는 히브리어로 로기아(어록집)를 작성하였다”고 말했다.1) 로기아는 어떤 책이었을까? 그것은 아마 마태가 아람어로 쓴 복음서이며 다른 사람이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했든지(잔), 아니면 마태가 아람어로 쓴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담은 한 책이며 후에 그가 또 헬라어로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벵겔, 엘리코트).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마태는 또한 히브리인들의 방언으로 된 하나의 기록된 복음서를 히브리인들 가운데 내어놓았다”2)고 말했다. 오리겐(185-254년)도 본서를 마태의 저작으로 돌린다.3) 마태는 뛰어난 사도가 아니었으므로 그가 본서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본서가 그에게 돌려진 것은 이상한 일일 것이다. 로마제국의 세리(세금 공무원)이었던 그는 아람어와 헬라어를 잘 알았을 것이다.

마태복음의 저작 연대는 주후 45-50년경이라고 본다. 초대교회는 많은 핍박을 당했고 이런 환경 속에서 신자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고 위로 격려하며, 또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증거하는 것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전통에 의하면, 사도 마태는 15년간 팔레스틴에서 전도사역을 했고 그 후 이방나라들로 갔다. 그러므로 그는 아마 팔레스틴을 떠나기 전에 유대인들을 위해 본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또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이 미래의 일로 예언되어 있는 것을 보면, 본서는 주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마태복음에는 다음 몇 가지 특별한 점들이 있다.

(1)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강조한다.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본서에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9회 나오고, 구약성경의 인용이나 암시가 약 65회 나온다.

(2) 본서는 왕과 왕국(나라)을 다루는 구약적 요소를 지닌 책이다. ‘천국’(하늘나라)이라는 말이 33회나 나온다.

(3) 본서에는 ‘의로운’이라는 말(디카이오스 divkaio")이 19번, ‘의’라는 말(디카이오쉬네 dikaiosuvnh)이 6번 나온다.

(4) 본서에는 복음서들 중에 유일하게 ‘교회’(16:18; 18:17, 17)라는 말이 나온다.

(5)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생으로 강조한다. 물론, 그의 구주 되심은 전제되어 있다.

(6) 본서에는 6개의 설교들 혹은 교훈들이 있다:

5-7장, 산상설교.

10장, 전도자 파송의 교훈.

13장, 천국에 대한 비유들.

18장, 겸손과 용서에 대한 교훈.

23장,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

24-25장, 감람산 교훈.

(7) 본서에는 15개의 비유와 20개의 기적이 나온다.

(8) 본서에는 이방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있다.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방 여인들 두 명(라합과 룻)이 언급되고, 28장에는 복음을 온 세계 모든 족속에게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나온다.

(9) 가룟 유다의 후회, 돌문의 인봉, 보초병의 배치, 성도들의 부활 등의 사건은 본서에만 나온다.

(10) 본서에는 ‘그때에’라는 말(토테 tovte)이 90회나 나온다.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보면, 마가복음에는 단지 6회, 누가복음에는 14회, 요한복음에는 10회 나온다.

1장: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초자연적 잉태

1-17절,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비블로스 게네세오스)[족보의 책]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연결고리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되고 약속된 메시아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고(창 22:18), 또 다윗에게 그의 몸에서 날 자식으로 그 나라의 위(位)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고 약속하셨다(삼하 7:12-13, 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들은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었다고 보인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사 9:7), ‘다윗의 의로운 가지’(렘 23:5), ‘내 종 다윗’(겔 34:23), ‘그 왕 다윗’(호 3:5)이라고 불렀다.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은 세 가지 진리를 보여준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때가 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전 3:1). 하나님의 때는 때때로 긴 세월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주전 2천년경의 인물이고, 다윗은 주전 천년경의 인물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조급하지 않으신다. 그에게는 천년이 하루 같으시다(벧후 3:8).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신 분이시다. 그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약속과, 다윗의 자손으로 영원한 왕위를 얻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셨다. 사람은 심령의 정직함과 진실함이 없어서 혹은 약속을 지킬 여건이 되지 못해서 약속을 어긴다. 시간 약속을 어기고 빌린 돈을 갚겠다는 약속을 어긴다. 약속을 어기는 것은 죄이다(롬 1:3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는 약속대로 메시아를 보내주셨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시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일을 만세 전에 계획하시며 그것을 이루시는 주권자이시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성 때문에 약속을 못 지킬 경우가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시다.

[2-3절]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태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특별한 이름들이 있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죄인들의 이름이다. 실상, 마태복음을 쓴 마태 자신도 과거에 죄인이었다. 그는 당시의 사람들이 비난하고 정죄했던 세리 즉 세관공무원이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신약성경 27권 중 한 권을 쓴 성경 기록자가 된 것이었다.

마태가 예수님의 족보 속에 쓴 특별한 이름들 중 하나는 다말이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이었다. 유다는 아내가 죽은 후 외롭게 지내다가 창녀라고 생각한 한 여자에게 들어갔는데, 그가 바로 다말이었다. 다말은 남편이 죽은 후 시아버지가 옛날 풍습대로 시동생을 남편으로 주지 않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었다. 이것은 유다에게 부끄러운 실수이었고 다말에게도 악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수치스런 죄악들을 깨끗케 하시기를 원하셨다.

[4-5절]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된 또 다른 특별한 이름은 라합과 룻이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이었고, 룻은 모압 여인이었다. 그 둘은 다 이방인이었다. 한 사람은 부도덕하고 천한 신분의 이방 여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젊어서 과부가 된 불행했던 이방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 둘의 공통점은 그들이 다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라합은 천한 죄인이 존귀한 성도가 된 경우이었고, 룻은 불행한 이방인이 복된 선민이 된 경우이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이방인들이 은혜로 구원받을 것을 예시한 것이 분명하다.

[6절]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우리야의 아내라는 여인도 언급되었다. 우리야는 다윗의 충성스런 신하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아내를 범하고 그 죄를 은닉하기 위해 그 남편 우리야를 고의로 전장(戰場)에 내세워 죽게 하였다. 그것은 다윗의 생애에 지울 수 없는 큰 오점(汚點)이며 죄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엄한 징계를 받아야 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낳은 첫 아기는 죽었고 다윗은 자기 집에 칼이 영영히 떠나지 않는 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실수 외에는 다윗은 역사상 보기 드문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7-11절]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악한 남자들도 많이 들어 있다. 다윗의 자손들인 유다의 왕들은 대부분 악한 자들이었다. 솔로몬은 노년에 우상숭배에 떨어졌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교만한 자이었다. 아사는 경건하였으나 말년에 발에 병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사에게 구하였다. 여호사밧도 경건했으나 악한 왕 아합과 교제를 끊지 않음으로 그의 자녀들의 타락과 부패의 길을 닦았다. 요람[여호람]은 아합의 딸을 취함으로 북방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본받았고 말년에는 하나님께서 치시므로 창자에 고치지 못할 병이 들어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 유다 왕들의 명단에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으나, 그들도 다 악한 자들이었다.

그 다음, 웃시야는 교만해져 제사장의 일을 하려 하다가 나병이 들어 여생을 마쳤다. 므낫세는 가장 악한 왕이었다. 그의 많은 우상숭배로 유다 왕국은 결국 멸망에 이르렀다. 아몬, 여고냐(여호야긴) 등도 악하였다. 마침내 유다 왕국은 멸망했고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로 이어진다. 구약시대의 역사 전체가 그러하지만,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들의 역사는 사람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증거했다. 그러나 메시아의 족보는 그런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 흘러 내려왔다. 사람들의 많은 부족과 연약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오셨다. 그는 주권자시요, 그의 크신 긍휼은 죄인들을 능히 구원할 구주를 보내셨고 또 그들을 실제로 구원하셨다.

[12-17절]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移居)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移居)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의 것과 좀 다른데, 그 차이는 다음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옛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일이 종종 있었다. 둘째로, 옛 시대에도 입양(入養) 제도가 있었고, 또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후손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수혼(嫂婚) 제도가 있었다(신 25:5-10). 셋째로, 누가복음 3장의 족보는 마리아의 족보일지도 모른다.4) 비록 우리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들 간의 차이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성경의 진실성과 권위를 믿기 때문에 그 두 족보가 다 진실하고 정확함을 믿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지키셨다. 그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아를 보내주셨다. 그는 약속을 지키셨다. 그는 신약 성도들에게도 주 예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과 천국을 약속하셨다. 그는 그 약속도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망치 말고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자.

둘째로,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구주로 오셨다. 그의 족보 속에는 다말, 라합 같은 여자들과 악한 왕들의 이름들이 들어 있다. 그는 이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마 9:12-13). 죄인이었던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그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하나님의 뜻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셋째로, 사람들의 많은 부족과 연약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오셨다. 크신 긍휼의 주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할 구주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그들을 실제로 구원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측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연약함이나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음을 믿어야 하고, 세상의 악인들은 악을 행할지라도, 참된 성도들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참 교회를 세우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18-25절,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잉태

[18-25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아들[그 여자의 맏아들](전통본문)5)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본문은 몇 가지 사실을 증거한다. 첫째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음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나셨는데, 요셉은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었다(20절).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16절,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누가복음 1: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구약성경은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이사야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예레미야 23: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에스겔 34: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둘째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셨다고 증거한다. ①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하였고 동거하기 전에 ②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18절). ③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자기 약혼녀의 임신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19절). 예수님의 법적 부친인 요셉은 경건하고 의롭고 착한 사람이었다. ④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했다(20절). ⑤ 또 그는 이것이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이사야 7:14의 말씀이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자유주의자들이 ‘처녀’라는 원어(알마)를 ‘젊은 여자’로 번역하려 했지만, 그 말은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로 볼 때 ‘결혼한 젊은 여자’를 가리키지 않고 ‘처녀로 간주되는 젊은 여자, 즉 소녀’를 가리킨다(창 24:43). 그러므로 고대 헬라어 70인역은 이 단어를 ‘처녀’(파르데노스)라고 번역하였다. ⑥ 요셉은 잠을 깨어 일어나 주의 천사의 지시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그 여자의 맏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24-26절). 예수님의 법적 부친인 요셉은 절제심도 있는 사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셨다. 그는 마리아의 맏아들이셨다(25절 전통본문; 눅 2:7).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예수께서 이렇게 사람이 되신 것은 그의 신성(神性)과 무죄성(無罪性)에 합당했다. 그는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보통 사람들의 출생 방법으로 나지 않으셨다. 누가복음 1:35,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한 훌륭한 종교적 인물이 아니셨다. 우리는 단지 그의 사상이나 인격을 본받는 자들이 아니다. 물론, 그는 우리의 모범이시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모범 이상이시다. 그는 우리의 찬송과 경배의 대상이시다. 신약성경은 그에게 신적 명칭, 신적 속성, 신적 사역, 신적 영광을 돌린다. 특히 그의 모든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믿는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시고 동등하신 분이심을 믿는다.

셋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죄인의 구주이심을 증거한다.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헬라어는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와 같은데, ‘구원’이라는 뜻이다. 메시아의 하시는 일은 구원의 일이시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구원은 단지 육신의 질병이나 경제적 가난이나 환경적 재해로부터의 구원이 아니고,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죄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요, 그 외의 것들은 죄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일 뿐이다. 메시아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불러 회개시키러] (전통본문) 왔노라 하시니라”(눅 5:32).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엄격히 말해 ‘자기 백성’(21절) 즉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성경은 선택의 진리를 가르친다.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요 6:37, 39).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다고 증거하였다(엡 1:4-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들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해 오셨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을 계속하신다. 그 일은 지금 참 교회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전도는 교회의 첫 번째 임무, 곧 교회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들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그들의 몸과 시간과 물질을 거룩하게, 즐거이 드려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다윗의 혈통은 아니시지만, 법적으로 다윗의 자손이 되셨다. 그는 다윗의 자손인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셨다.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셨다. 그것은 초자연적 잉태와 탄생이셨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두 번이나 말하였다(18, 20절). 그것도 구약 예언의 성취이었다. 이사야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의 독특한 초자연적 탄생은 그의 신성(神性)과 무죄성(無罪性)에 합당했다. 사람의 부부관계에서 난 자들은 원죄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죄 없는 거룩한 인격이셨다. 또 그는 본래 사람이 아니셨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셨다.

셋째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의 구주이시다.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사람과 세상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친히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2장: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피신

1-12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동방박사의 경배

[1-3절]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주전 40년부터 주전 4년까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서 유다 땅을 다스렸던 헤롯 왕(헤롯 대왕) 때에, 예수께서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 그가 탄생하셨을 때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 그의 별을 보고 예루살렘에 왔고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은 그들의 말을 듣고 소동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셨다. 이것은 구약 예언들의 성취이었다. 구약성경은 메시아께서 다윗의 왕위를 잇는 왕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사야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 . .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레미야 23: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에스겔 34:24,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호세아 3:5,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 . .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4-8절]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께서 어디서 나겠느냐고 묻자, 그들은 미가 5:2로 대답했다. 거기에는 유대 땅에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에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모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아의 출생지에 대한 성경 예언을 잘 알고 있었으나, 동방박사들과 함께 그리스도께 경배하러 간 것 같지 않다. 그들의 지식은 생명이 없는 지식이었다. 참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고 마음의 순종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를 사랑하고 사모하며 그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헤롯은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했다.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그러나 헤롯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를 경배하려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보인다.

[9-12절]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동방에서 보던 별은 박사들을 앞서 인도하였고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다. 그들은 별을 보고 심히 크게 기뻐하였고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모친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아기 예수님은 아마 마굿간의 구유에서 집으로 옮겨졌던 것 같다.

동방박사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동방’ 곧 먼 이방나라에서 왔다. 그들은 믿음의 환경에서 자란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별에 대한 적은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별에 이끌리어 먼 길을 여행하였고 아기 메시아를 찾는 열심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그의 모친과 함께 한 집에 계신 아기께 경배하였고 준비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귀한 예물도 드렸다.

이스라엘 나라 지도자들은 경건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죽은 형식적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나, 동방박사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지한 열심이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그런 경건과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먼 길을 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저 하나님께서 하신 기이한 일에 놀랄 뿐이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 구약성경은 메시아께서 왕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사 9:6-7; 렘 23:5; 겔 34:24; 호 3:5). 유대인의 왕이신 그는 만왕의 왕이시며 교회의 머리와 주님이시다. 그는 지금 우리의 심령을 다스리시며 또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우리는 그에게 순종하고 그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동방박사들에게 은혜를 주셨다. 그는 유대 땅의 왕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게 주지 않으셨던 은혜를 그들에게 주셨다. 그는 오늘날도 그가 원하시는 자들에게 환경을 초월하여 긍휼과 구원을 베푸신다. 우리가 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감사함으로 구주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가장 귀한 예물을 구주 예수님께 드려야 한다. 동방 박사들은 먼 곳에서 찾아와 아기 예수께 경배했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예물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에게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한다.

13-23절, 아기 예수님의 피신과 성장

[13-15절]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동방박사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고 말했다. 요셉은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다.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호 11:1)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옛 시대에 꿈을 사용하여 그의 뜻을 알리셨다. 요셉이 마리아와 조용히 절교하려고 생각하였을 때에 주의 사자는 꿈에 나타나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니 그를 데려오라고 말했었다(1:20). 주의 사자는 꿈에 동방박사들에게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지시했었다(2:12). 그는 또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일어나 애굽으로 피난하라고 하였다(2:13). 또 그는 헤롯이 죽은 후에 꿈에 나타나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였고(2:19), 또 꿈에 요셉 가족이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도록 지시하였다(2:22).

하나님께서는 법적 부친인 요셉으로 하여금 아기 예수님과 그의 모친을 위한 보호자의 역할을 하게 하셨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황금 예물은 요셉 가족의 도피생활을 위해 유용했을 것이다. 실상, 세상의 모든 은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16-18절]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들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남자아이들을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다. 그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베들레헴에서 15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까지)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졌다.

헤롯이 박사들에게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2:8)고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유대인의 왕인 메시아가 자기 아들들의 왕위를 위태하게 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죽이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박사들이 그에게 알려주지 않음으로 그의 은밀한 계획이 실패했을 때, 그는 베들레헴 부근의 2살 이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이는 큰 악을 노골적으로 저질렀다. 사람은 참으로 악하다. 그의 통치연대가 주전 4년에 끝나는 것을 보면, 헤롯은 이런 악을 행한 후에 죽은 것 같다.

[19-23절]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또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고 말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아켈라오(헤롯 아켈라오, 주전 4년-주후 6년)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했고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살았다. 이것은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었다.

나사렛(나조라이오스)은 구약성경의 나실인(히브리어 네지르, 헬라어 나지르나 나제이라이온, ‘바쳐진 자, 구별된 자’)이나 ‘가지’(히브리어 네체르)(사 11:1)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실인 중에 나실인이시며,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가지’이시다.

나사렛 마을은 시골 벽촌이었다. 예수님은 시골 사람이셨다. 그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셨다. 거기서 그는 약 30년을 사셨다. J. C. 라일의 말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이 어디에 사느냐보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냐가 더 중요하다.” 사람의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됨됨이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악인들은 악한 일들을 계획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들과 백성들을 위해 비상하게 개입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위태할 때는 피할 길을 열어주신다.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전까지는 그러하다. 그의 뜻을 좌절시킬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세 전에 작정하신 바를 다 이루시는 자이시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룬 후에는 죽음도, 순교도 가능하지만, 그 전에는 결코 헛된 죽음이 그에게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염려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며 그가 이루시는 일을 바라보며 참고 기다려야 한다.

둘째로, 이 세상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을 짓밟고 죽이기도 하는 악한 세상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한다. 비록 이 세상은 그러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이기적이게 악하게 살지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4-5). 참된 신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고난 받으심을 본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성육신(成肉身)은 그의 가난해지심이었다. 그는 본래 부요하신 자, 곧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의 신성의 영광과 부요는 참으로 컸다. 그러나 그는 자발적으로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고후 8:9). 그는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셨다. 마리아는 그의 탯줄을 따뜻한 방이나 병원에서가 아니고 쌀쌀했을 마굿간에서 끊었다. 얼마 후 요셉은 가난한 자가 드리는 제물인 비둘기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그는 한 시골에서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자신을 감추셨다. 그는 평생 집이나 나귀를 개인 소유로 갖지 않으셨다. 그가 때때로 시장하셨던 것을 보면 드실 음식이 늘 준비된 것 같지도 않다. 마침내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우리는 그의 낮아지심과 가난해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부요함 즉 부활과 영생을 얻었다. 죄로 인하여 허무하고 비천하고 무가치했던 우리, 벌레와 같았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기도할 줄 몰랐던 우리가 기도하는 특권을 얻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자들이 되었고, 천국 기업을 상속받는 자들이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선전하는 것은 세상 사람의 모습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모습은 아니다.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고 감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실 때까지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만 높이고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1-3절] 그때에 세례[세례주는 자]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사 40:3) 하였느니라.

유대 광야에서 전도한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예비한 자이었다. 그가 외친 내용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회개는 죄를 인정하고 그것을 미워하고 그것을 청산할 결심을 하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께서도 회개하라고 전파하셨고(마 4:17) 자신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눅 5:32). 또 그는 사람이 멸망치 않으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눅 13:3) 하나님께서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의인 아흔 아홉명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다(눅 15:7).

[4절]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야생꿀]이었더라.

세례 요한은 제사장 가정에서 태어났으므로 제사장의 귀한 의복과 생활 환경을 가질 수 있었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 생활을 선택하였다. 그의 복장은 검소하였고 그의 음식도 검소했다.

[5-6절]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에 달려 있다.

[7-10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바리새인들은 경건하고 보수적인 자들이었고 사두개인들은 주로 부유한 제사장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회개하였기 때문에 온 것 같지 않다. 요한이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른 것은 모든 죄인이 다 마귀의 자식이지만(요 8:44; 요일 3:10) 그들이 특히 남을 죽이는 독을 품은 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선포하였다. 또 그는 그들의 헛된 확신을 지적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헛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회개치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헛된 소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였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의지적 결단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전의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그것으로부터 돌이키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 죄 가운데 머물면서 구원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열매로 나타난다. 신앙생활은 인격과 삶으로 증거된다.

[11-12절]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 요한은 특히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에 대해 증거하였다. 그는 메시아께서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시며 자기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과연 메시아께서는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이 능력이 많으시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의 사역에 대해 두 가지로 증거하였다. 첫째로, 메시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과 불의 세례는 죄를 씻으시는 성령의 중생 사역을 가리킨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하며 불은 더러운 죄악을 태워 깨끗케 하는 것을 상징한다. 요한은 죄씻음을 상징하는 물세례를 베풀고 있었으나, 메시아께서는 실제로 죄씻음을 주는 성령의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미 성령의 세례, 즉 중생과 죄씻음을 받았다.

둘째로, 메시아께서는 불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알곡과 쭉정이가나뉘듯이 마지막 심판 때에 의인과 악인이 나뉠 것이다. 의인은 천국에 들이고, 악인은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메시아께서는 심판자이시며, 그의 심판은 악인들에게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이다. 지옥의 교리는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교리이다(마 10:28; 막 9:43-49).

[13-17절]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그에게](전통본문)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합당치 않으나, 예수께서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다.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은 그가 세례 제도에 순종하심과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의 모든 죄를 담당한 자로서 죄사함의 세례를 받으심과, 또 그럼으로써 삼위 하나님의 증거를 받으심을 의미하였다고 본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오심을 보셨다. 그때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여기에 삼위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오시고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친 음성으로 증거하셨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회개해야 하고 또 회개의 증거를 나타내어야 한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전파했다. 후에 예수께서도 같은 내용을 전하셨다(마 4:17).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죄악된 삶을 떠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셨다(눅 24:47). 바울도 자신의 전도 사역을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요약하였다(행 20:21). 모든 사람은 회개하고 죄악된 삶을 청산해야 하고 그 회개는 실제로 변화된 인격과 삶으로 증거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의 복장과 음식은 검소해야 한다. 세례 요한의 복장과 음식이 검소하였다. 성경은 값진 옷이나 호화로운 단장을 금한다(딤전 2:9; 벧전 3:3). 또 성경은 검소한 식생활을 교훈한다(잠 23:20; 딤전 6: 7-8). 장차 올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들, 이 세상에서는 전도와 구제를 사명과 임무로 여기는 그들은 검소한 복장과 식생활을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어야 한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께서 성령으로 세례 주시는 자이시며 또 장차 불로 심판하실 자이심을 증거하였다. 성령의 세례는 중생(重生)의 은혜를 가리키며, 이것이 주께서 주시는 구원이다. 또 주께서는 마지막 날 의인과 악인을 나누시며 천국과 지옥으로 이끄실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께서는 비둘기같이 그에게 임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늘로부터 친 음성으로 그를 증거하셨다. 그는 친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고 사랑하며 사모하고 따라야 한다.

4장: 공적 사역을 시작하심

1-11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1절]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예수께서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인류 역사의 실패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시험에 넘어짐으로 시작되었다(창 3장). 그러므로 이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의 사역이 마귀의 시험을 이기심으로 시작되는 것은 합당하였다.

[2-4절]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40일을 밤낮 금식하신 후 주리셨는데, 그때 마귀가 그에게 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돌에게 명하여 그것이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성경말씀을 사용하셨다. 그는 세 번이나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시며 구약성경을 인용하셨다. 그는 자신의 신적 권위 대신 성경을 사용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생활의 정확무오한 규칙이다. 또 에베소서 6:17의 표현대로, 성경은 ‘성령의 검’이다. 그것은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이며 마귀의 시험에 대한 최선의 대책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돌로 떡을 만드시지 않으셨다. 그 까닭은 떡이 인생의 삶에 본질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떡이 없으면 사람이 죽지만 그것은 육신의 죽음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돈에 큰 가치를 두고 산다. 그러나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매우 어렵다고 말씀하셨고(마 19:23-24) 사도 바울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했다(딤전 6:10). 실상,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5-7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귀는 두 번째로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고 말했다. 마귀도 성경을 어느 정도 알지만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못한다. 오늘날도 마귀의 종된 많은 이단들과 거짓 목사들이 성경을 인용하지만,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그것을 바르게 적용하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마귀가 성경을 잘못 인용하고 적용할 때 성경의 다른 말씀에 의해 반박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딤후 3:16). 성경의 참 저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성경에는 통일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전체적 빛 아래서 부분들을 이해해야 하고 명확한 교훈의 빛 아래서 불명확한 문제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성경을 많이 통독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말씀은 성도가 어떤 상황에서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같이 주를 시험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됨을 보인다.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므로 옳지 않고(고전 10:9) 경계해야 한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신비적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고전 1:22-23) 배고플 때에 먹고 피곤할 때에 쉬고 돈이 필요할 때에 일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생활이다. 또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적 교만과 자랑과 명예심에서 나오기 쉽다. 기적을 행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하며 허풍과 과장이 심하다. 우리는 기적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8-11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귀는 세 번째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말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대답하셨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은 사람이 이 세상 사는 동안만 가치가 있고 마지막 심판 때에 다 불타버릴 허무한 것들이다. 마귀가 세상 권세와 영광을 누구에게 줄 권한을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마귀에게 엎드려 절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마귀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 십계명의 1, 2계명의 명령대로,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그에게 절하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마귀의 존재를 인식하고 마귀의 시험을 물리쳐야 한다. 마귀는 실제로 존재한다. 그는 신화적인 존재나 상징적 표현이 아니고 실재하는 자이다. 그는 오늘도 택한 백성을 범죄케 하려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부패시키려 한다. 성도들과 교회는 지금도 마귀와 전쟁 중에 있다(엡 6:10-11; 벧전 5:8).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존재를 인식하고 마귀의 여러 가지 시험들을 물리쳐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때 성경말씀을 사용하여 물리쳐야 한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성경말씀을 사용하셨다. 그는 성경이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는 중요한 도구가 됨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고 마음에 기억함으로써 마귀가 시험할 때 성경말씀을 검과 같이 사용하여 적절히 인용하여 물리쳐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육신의 양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히 여겨야 한다.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고 몸도 중요하지만 실상 영혼이 더 중요하다. 몸의 질병보다 영혼의 죄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떡은 몸에 유익하지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영혼에 유익하다. 그것은 구원과 영생을 주는 말씀이다.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기적주의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기적주의란 현실의 문제를 하나님의 기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우리는 기적을 믿지만, 기적이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 방식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기적을 구함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모든 일에 있어서 겸손히, 인내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순종해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사람의 참 본분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그 계명과 교훈을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조건 아래서도 마귀와 세상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만 높이고 섬기고 영화롭게 하며 그의 명령을 힘써 따라야 한다.

12-25절, 전도 사역을 시작하심

[12-17절]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사 9:1-2).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이사야의 예언대로 갈릴리 지방에서 그의 전도사역을 시작하셨다. 이로써 죄와 슬픔의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이는]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가까웠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전하신 말씀은 세례 요한의 전한 내용과 동일하였다.

‘가까웠다’는 말은 완료시제로서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뜻이다. 천국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에는 메시아의 시대에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건설될 것이 예언되어 있다(단 2:44). 이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전도하심으로 시작되었다.

천국이 가까웠다는 데에 회개의 절박성도 있다.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며 회개치 않고 죄 가운데 사는 것이 천국에서 제외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던 사람들, 곧 불경건하고 부도덕하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죽음이요 불행이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생명이요 행복이다. 회개는 죄인이 그 불경건과 부도덕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미워하고 그 죄로부터 돌이키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회개하고 구원과 영생을 구하여야 한다.

[18-22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다. 그들은 다 어부들이었고 그 일터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주께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 번째 주요한 일은 제자를 삼는 일, 곧 전도자를 부르신 일이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었고 그는 자신이 전도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다(막 1:38).그는 자신이 전도하실 뿐만 아니라 전도할 자들을 제자로 부르셨다. 전도의 일은 중요하며 전도자를 부르는 일도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전도자를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그 어부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었다.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사람을 구원한다는 뜻이다. 죄인의 구원이 전도자의 임무요 목표다.

주께서는 ‘나를 따르라’는 초청의 말로 전도자를 부르셨다. 전도자는 주의 부르심을 통해 세워진다. 오늘날도 그는 전도자들을 부르신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단순한 초청 이상이다. 그것은 주의 하시는 일을 보고 배우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전도자는 주님을 따르는 자, 즉 주님의 발자취를 보고 배우며 준비되고 훈련되는 자이다.

부르심을 받은 그들은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20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2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부르시는 그가 누구이신지, 또 부르신 그 일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렇게 응답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전도하는 일을 위해 그의 몸과 마음을 바치며 시간과 재능과 돈과 자기 생명까지도 바칠 것이다.

[23-25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세 가지 일을 하셨다. 첫째로, 그는 회당에서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을 가르치셨다. 둘째로, 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것은 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전하신 것을 포함할 것이다. 셋째로, 그는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 그에게는 병자들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셨고 또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셨으므로, 그는 병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고 다 고쳐 주신 것이다. 그의 소문은 온 수리아에 퍼졌다. 갈릴리와 데가볼리뿐 아니라,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도 허다한 무리가 그를 따랐다. 사람들은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왔고 그는 그들을 다 고쳐주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전파하셨다. 그것은 전도의 내용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고 중요하다. 사도행전 17:30-31,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그것은 주께서 전하신 내용이며 또한 사도들이 전한 내용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전도 사역의 내용을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요약해 말했다(행 20:21). 회개는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이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해야 할 필수적 과정이다.

둘째로, 전도자들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주 예수께서는 전도자들을 부르셨다. 사람은 전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 로마서 10:14-15, 17,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전도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막 1:38). 전도는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그는 자신이 전도하실 뿐 아니라, 이 사명을 이을 전도자들을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셨고 그들이 그를 보고 배우며 훈련을 받게 하셨다. 오늘날도 교회는 전도자들을 부르고 훈련시키고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야 한다.

셋째로, 교회는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해야 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세 가지로 증거되었다. 그는 각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교회는 주님의 사역을 계승해야 한다. 첫째, 교회는 천국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고 전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첫 번째 임무이며 사명이다. 둘째, 교회는 모든 성경말씀, 즉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교리와 생활 교훈을 잘 가르쳐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함으로써 성경에 대한 바르고 풍성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셋째, 교회는 병약하거나 가난하거나 어려운 일 당한 자를 돌아보아야 한다. 비록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병 고치는 능력은 없지만, 교회는 복음 전도와 말씀 교훈과 함께 그가 가지셨던 사랑과 긍휼의 심정으로 병환자나 가난한 자나 어려운 일 당한 자를 심방하고 구제해야 한다.

5장: 완전한 의의 삶

1-6절, 팔복 (1)

[1-2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태는 무리와 제자들을 구별한다. ‘무리’는 이런 혹은 저런 동기로 예수께 나온 자들이며,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고 그의 교훈을 행하려는 자들을 가리킨다. 오늘날도 교회에 나온 사람들 중에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 그가 산 위에서 가르치신 보배로운 교훈이라고 하여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부른다. 그 대상은 제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먼저 여덟 부류의 복된 자들을 언급하셨다. 흔히 ‘팔복(八福)’이라고 불린다. 처음 네 가지 복은 구원을 위한 준비이고, 나머지 네 가지 복은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본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부유한 자는 자신이 지혜와 지식, 의와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지혜와 지식, 의와 힘이 없음을 깨달아 하나님을 찾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는 겸손한 자이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교만과 함께 간다. 교만은 하나님 대신 자신을 높이고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라는 것과, 또 자기가 의뢰하는 돈이나 세상의 것들은 환난 날에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며 영생을 보장하지 못하며 지옥에서 자기를 구원하지도 못한다.

믿음은 가난한 심령에서 시작된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를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아무도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심령의 가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66:2에서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리라[돌아보리라]”고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그의 소유가 될 것이다. 성경에 증거된 대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주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려면 우선 자신의 빈곤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 자신이 지혜와 지식이 부족하고 의가 없고 힘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물론,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는 계속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무능력을 늘 인식하고 우리의 우리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늘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약 4:6; 벧전 5:5).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사람에게 복이 되는 애통은 회개의 애통뿐이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하고 자신의 죄의 심각함, 즉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노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고 자신의 부족과 죄를 인해 애통해야 한다. 그런 자는 복이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하였다(시 51:17). 또 요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라고 말하였다(욜 2:12-13). 예수께서 한 동네에 들어가셨을 때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그의 뒤로 와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그것은 회개의 눈물이었다고 본다(눅 7:37-38).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죄 문제의 해결을 통해, 즉 죄사함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앞에 말한 그 여자에 대해 예수께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듯이(눅 7:47, 50),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죄의 용서는 지극히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다. 왜냐하면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고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우리의 더러운 죄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깨끗케 되기 때문이다.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하다는 말은 겸손하다는 말과 비슷하다. 그것은 교만함, 완고함, 패역함, 목이 곧음과 반대된다. 교만한 마음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나아가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은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간다. 온유는 믿음의 성품이다. 믿는 자와 믿으려 하는 자는 심령이 온유해야 한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고 그의 모든 교훈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할 수 있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얻는다. 여기의 ‘땅’은 이 세상에서 땅을 얻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는 강한 자나 힘센 자가 땅을 차지하겠지만, 천국은 다르다. 천국은 온유한 자가 얻는다. 온유한 자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도 여전히 온유해야 한다.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온유는 또한 성령의 열매이다(갈 5:23).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교훈하였고(엡 4:2), 또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고 말했다(골 3:12).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 즉 그 계명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경건과 도덕성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자신에게 의가 없고 죄만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의가 없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구원의 문 앞에 서 있다. 그는 의를 풍성히 얻을 것이다. 그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완전한 의를 말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4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했고 또 로마서 3:20-22에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팔복의 처음 네 가지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준비를 보인다고 본다. 심령의 가난,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는 이러한 덕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지혜와 지식과 의와 힘의 부족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우리 자신의 죄와 연약을 생각하며 애통해야 하며 또 온유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고 의로운 인격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7-12절, 팔복 (2)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두 번째 네 가지 복은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본다. 첫째는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긍휼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성품이다. 사도 바울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라고 말하였다(엡 2:4-5). 예정도, 속죄도, 중생도 하나님의 긍휼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당연한 태도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32에서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권면하였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6:14-15에 보면, 주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긴 자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며, 긍휼히 여기지 않은 자들을 긍휼 없이 대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야고보서 2:13에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겨야 마땅하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아담이 범죄한 후, 사람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매우 부패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했다(렘 17:9). 주께서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덕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20). 사람의 마음이 더러운 것은 물욕, 정욕, 명예욕 같은 욕심 때문이다. 사람의 욕심은 사람으로 죄를 짓게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모든 욕심을 다 버리고 죄씻음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섬길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것은 장차 천국에서 그의 영광을 보는 것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영이시므로 마음이 더러운 자, 곧 죄와 탐욕으로 더러운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우리가 그를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나,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그의 영광을 볼 수 있고 거기에서 그의 영광의 형상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올 수 있을 것이다.

[9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사람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으로 화목케 되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골로새서 1: 20-22,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것은 복음 전도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지만, 구원받은 자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무를 주셨다고 말하였다(고후 5:18).

둘째로, 화평케 한다는 말은 사람들 간의 화목도 의미한다고 본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은 서로 간에도 화목하기를 힘쓸 것이다. 서로 화목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땅한 행위이다. 갈라디아서 5: 19-21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전통사본] 등 아홉 가지를 육체의 일들로 말하였고 또 이런 일들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로마서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하였다. 야고보서 3:17은,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고 말했다.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불화를 제거하시고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에, 화목케 하는 성도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하다는 뜻이다. 성도다운 행위, 즉 거룩하고 선한 행위는 구원의 표요 확증이다. 특히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전도의 일과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화목시키는 일은 성도다운 선한 일이다.

[10-12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팔복의 처음 네 번째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인데, 다음 네 번째는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음이다.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하나님께로 나오고 구원을 받지만, 구원받은 후 그가 남을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케 하고 심지어 의를 위하여 핍박까지 받는다면 그는 성도다운 사람이 될 것이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이다. ‘의를 위하여’라는 말은 ‘의 때문에’라는 뜻이다. 의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즉 하나님의 계명대로 산 것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확실히 천국 백성이다. 의를 행하는 것이 구원받은 천국 백성의 표라면,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사람은 의를 사모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아야 하고, 구원받은 자는 그 의를 위해 살고 의를 전파하고 의를 위해 고난과 핍박과 순교도 당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인하여’라는 말은 ‘나 때문에’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욕과 핍박을 받을 것을 내다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평탄한 길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마 16:24-25). 그것은 핍박받을 것도 예상되는 길이다. 마귀는 예수님 믿는 자를 미워하고 세상을 충동하여 성도를 핍박케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 믿는 자를 욕하고 핍박하며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로 비난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그러나 주의 제자들은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상을 말씀하시며 핍박받을 제자들을 격려하셨다. 이 구절은 또한 천국에서의 상급의 차등을 보인다. 마지막 심판 때에 사람의 죄악에 대한 형벌에 차등이 있을 것이듯이, 선행에 대한 상급에도 차등이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또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역사상 참 선지자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이 바른 말을 했기 때문이고, 그 바른 말이 회개치 않는 사람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회개치 않는 자들은 참된 목사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 사람들을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며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 공의로 징벌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서 가장 복된 일이다. 그것은 참으로 주를 믿고 따르며 섬기는 표가 되며 큰 상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것은 결코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행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핍박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뉘우쳐야 하고 어떤 고난과 핍박이 닥쳐와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바르게, 충성되게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복의 처음 네 가지는 구원을 위한 준비를 보인 것이라고 보며 그 다음 네 가지는 구원받은 자들의 덕을 보인다고 본다. 심령의 가난함,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함, 마음의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할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복되다. 구원의 복은 가장 큰 복이다. 이제 구원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족과 실수와 연약을 볼 때 멸시하지 말고 그를 긍휼히 여겨야 하고, 이 죄악된 세상 속에서 죄성을 가진 우리들이지만 물욕과 정욕과 명예욕으로부터 마음을 깨끗케 해야 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또 서로 간에도 화목하게 해야 하며, 또 이제는 의를 위해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받을 각오를 하며 살고 실제로 고난도 받아야 한다.

13-16절,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님 믿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보고자 하는 자들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고 그를 섬기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님도 모르고 그를 믿지 않는 자들이며 성경말씀도 모르고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소금의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짠맛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 방지이다.

소금의 첫 번째 역할은 짠맛이다. 소금은 모든 음식에 필수적이다. 만일 소금이 없다면,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소금은 맛있는 음식에 필수적이다. 너무 짜게 먹는 것은 건강에 안 좋다고 하지만, 음식은 간이 적당할 때 가장 좋은 맛을 낸다.

영적으로도, 인생의 최고의 맛은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알고 거기에 맞게 사는 것이다. 삶의 의미가 없고 목적이 없고 허무하고 부도덕한 삶은 맛이 없는 삶과 같다. 사람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은 바로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거기에 기쁨과 평안도 있다.

소금의 두 번째 역할은 부패 방지이다. 이것은 짠맛의 부수적 역할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상하기 쉬운 식품을 오랫동안 보관하는 한 방법은 소금에 절이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중요한 방법이다. 소금은 식품의 부패를 방지한다.

영적으로도, 예수님 믿는 자들은 사회의 부패와 악화를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늘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교회에 모여 성경적 교훈을 받는다. 하나님의 바른 교훈을 받는 자들만 악을 떠날 것이다. 그들이 그 교훈대로 산다면 세상이 급격히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악된 이 세상에서 도덕성의 최후의 보루이다.

그러나 주의 말씀대로, 만일 그들이 짠맛 곧 경건과 도덕성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일 것이다. 경건과 도덕성을 상실한 교인들은 세상에 아무 유익이 없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짓밟을 것이다.

[14-16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성경에서 ‘빛’은 지식, 의와 진실, 기쁨과 행복, 생명을 상징한다. 그러나 반대로, 어두움은 무지, 불의와 거짓, 슬픔과 불행, 죽음을 상징한다.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다. 세상에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고 의와 진실이 없고 기쁨과 행복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교회는 이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었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부르셨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가 있다. 기독교는 은밀한 교훈을 주고 받는 밀교(密敎)가 아니다. 기독교회의 모임은 공개된 모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교회로 모이며 예배를 드렸고 설교들은 다 공개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다 공개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세상 앞에 예(例)가 된다. 그것은 좋은 예나 나쁜 예가 된다. 그것은 주로 인간 관계, 대인관계에서 나타난다. 물론, 사상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인 자들이 있다. 또 기독교를 오해해서 기독교를 비방하는 자들도 있다. 또 진리의 지식의 차이 때문에, 기본적인 혹은 중요한 생각의 차이 때문에 부득이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범사에 정당하게,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사랑이 없다든지 악하다든지 거짓되다든지 하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특히 우리의 착한 행실을 강조하셨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선하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선한 행실이 사람들 앞에 증거가 되게 해야 한다.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교훈한다(레 19:18). 기본적으로, 우리는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한다.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특히 가난한 자나 외로운 자나 병든 자를 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구제 행위를 강조한다. 굶주리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남겨주셨다. 서로 사랑함은 서로 친절히 대하고 서로 용서하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 13:4-7). 에베소서 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며 아버지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종들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주인들에게 순종해야 하고, 주인들은 종들에게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엡 5:22, 25; 6:1-4, 5-9).

욥은 선하게 살았다. 그는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나누기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고기도 배부르게 먹게 하였고, 우거할 곳이 없는 나그네에게 방도 제공하였다(욥 31:16-20, 31-32).

주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잘 못하면 하나님께 욕이 돌아간다(롬 2:23-24). 사람은 다 죄성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 바르고 선해야 하고 금전 관계에 있어서도 깨끗하고 선해야 한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주목하며 틈을 노린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깨어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 소금은 짠맛을 낸다. 그것은 음식을 맛있게 하는 필수 요소다. 그것 없이는 모든 음식이 맛을 낼 수 없다. 인생의 참 맛, 삶의 참된 의미와 가치와 목적은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참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알게 되었다. 또 그의 뜻대로 선한 삶, 사랑하는 삶을 가정에서부터 또 모든 인간관계에서 실천할 때 거기에 인간의 아름다움과 참 맛이 난다. 또 소금은 부패를 방지한다. 우리는 불의하고 악하고 거짓된 세상에서 의와 선과 진실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들이 그 사회의 도덕성의 수호자가 되지 못한다면 세상은 소망이 없다. 그러나 성도들이 깨어 있다면 세상은 급속히 부패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경건과 도덕성을 지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빛은 지식과 의와 진실, 기쁨과 행복을 상징한다. 이 비유에서 주께서는 특히 우리의 선한 삶을 강조하셨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서 선한 삶의 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정에서, 동네에서, 직장에서 이런 삶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이기적이게 살지 말고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사랑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선한 삶을 삶으로써 그들이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17-20절, 구약성경을 이루려 오심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모세가 쓴 처음 다섯 권의 책들은 모세의 율법이라고 불리며 그것이 구약성경의 핵심이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구약시대의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완전케 한다’는 원어(플레로오 plhrovw)는 ‘이룬다, 성취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이나 구약성경을 폐지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 율법이나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의 관계, 즉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폐지가 아니고 성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십자가 속죄 사역은 모세의 율법의 폐지가 아니고 성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덕법을 성취하셨다. 즉 도덕법이 요구하는 의(義)를 이루셨다. 예레미야는 장차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일어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불리리라고 예언했고(렘 23:5-6) 다니엘은 메시아의 때에 죄악이 영원히 속량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날 것을 예언하였다(단 9:24).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도덕법의 의를 이루셨다. 로마서 10:4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식법도 성취하셨다. 그는 구약의 상징적 의식들, 제사 제도, 성막 제도, 절기 등의 실체로 오셨다. 구약의 의식법들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상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죄사역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했다(골 2:16-17).

또 히브리서는 “이 장막[성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했고(히 9:9-12), 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말했다(히 10:1).

초대교회의 이단자 말시온은 구약의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신약의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서로 다른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폐지하기 위하여 오셨고, 율법과 복음은 서로 모순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큰 오해이었다.

역사상, 율법주의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구약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반(反)율법주의라는 잘못된 사상도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사상이었다. 이 두 사상은 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오해한 것들이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본문의 ‘율법’이라는 말은 구약성경 중의 모세 5경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켰다고 보인다. 주께서는 이 말씀에서 구약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증거하셨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라는 표현은 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도 신적 권위를 가짐을 증거한다. 이 말씀은 성경의 축자(逐字) 영감[단어 영감]을 증거한다. 아니, 단지 축자 영감 정도가 아니고, 축점(逐點) 영감, 축획(逐劃) 영감을 보이는 것이다. 도덕법이나 성경은 결코 폐지되지 않고 남김없이 성취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다 이루셨다.

[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태복음에서 ‘천국’은 두 가지 뜻을 가진다. 첫째로, 천국은 신약교회를 가리킨다(마 11:11-12; 13:24, 31, 33, 44, 45, 47). 천국은 이미 신약교회로 시작되었다. 천국은 좋은 씨처럼,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이미 뿌려졌고 심어졌다. 둘째로, 천국은 장차 영광스럽게 임할 것이다. 그 영광의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생활의 정도는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성경을 다 믿고 힘써 지키는가 하면,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한 차이가 내세 천국에서의 인격의 차등을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성경은 상급의 차등은 분명히 가르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전성, 즉 영화에 이르게 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성화된 정도의 차등이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는 자는 교회 안에서 확실히 큰 자이며 다 지키지 못하는 자는 확실히 작은 자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의 온전한 순종, 작은 부분까지의 순종은 모든 신자에게 요청된다.

[20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함이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상당한 수준의 의처럼 보였다. 그것은 외적으로 별로 흠 잡을 데 없어 보이는 의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켰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것 등 율법을 준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거리가 멀고 온갖 탐심과 거짓으로 차 있다고 지적하셨다(마 15:8; 23:25, 28).

주께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가? 주께서는 두 가지의 내용을 염두에 두셨다고 본다. 첫째는, 주께서 장차 십자가 죽음의 대속 사역으로 이루실 완전한 의를 가리켰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가 되셨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 얻은 그 의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된다.

둘째는, 성심의 율법 준행을 가리키셨다고 본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신 6:5). 주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셨다(마 15:8). 우리가 성심으로 율법을 준행할 때 우리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을 것이다. 성도는 율법을 행하되 단지 외적으로가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성심으로 해야 한다. 그것은 외적 행위보다 더 나은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에 비추어 보면, 이 성심의 율법 준행은 천국에 들어갈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것이 조건이 된다면,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부정이 되며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경고한 대로 저주 받을 이단이 된다. 성심의 율법 준행은 참된 믿음의 증거로서 필요할 뿐이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참으로 깨달은 자는 율법을 성심으로 행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구약과 신약을 충돌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 둘은 조화를 이룬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세의 율법, 즉 구약성경의 성취이다. 그것은 도덕법의 성취 즉 도덕적 의의 성취이시며 의식법의 성취 즉 상징과 예표의 실체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충돌시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근거해 신약성경을 이해하고, 신약성경에 비추어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한 의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충족한 자격이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이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은 의를 확신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도덕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지만, 여전히 모든 계명과 성경 교훈을 성심으로 준행해야 한다. 그것이 온전함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의 성화의 목표는 도덕적 완전이다. 우리는 성경을 힘써 읽고 다 믿고 그 교훈을 온전히 행해야 한다.

21-26절, 살인에 대하여

[21절]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살인은 죄악이다. 침략 전쟁이나 대량 학살은 큰 죄악이다. 출산하기 전의 태아를 죽이는 낙태도 살인이며, 자기 목숨을 끊는 자살도 일종의 살인이다. 불법적 폭력 시위나 자살 폭탄 테러나 음주 운전도 일종의 살인 행위이다.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은 그의 율법 해석의 권위를 나타낸다. 주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형제에게 욕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노하는 자마다’라는 구절은 전통본문에 ‘까닭 없이 노하는 자마다’라고 되어 있다.6) 화는 정당한 경우에 낼 수 있겠지만, 까닭 없이 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까닭 없이 성질 내는 것은 형제를 미워하는 표이며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 고린도전서 13:5는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까닭 없이 노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또 형제에게 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라가’(rJakav)라는 아람어는 ‘바보, 빈 머리’라는 뜻으로 남을 경멸하는 욕이다. 우리는 형제에게 ‘바보, 빈 머리, 미련한 놈’ 등의 욕을 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후욕하는[욕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했다(고전 6:10). 욕하는 것은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며 남을 미워하는 행위이다. 남을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자나 형제에게 바보나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공회 즉 법정에 잡혀가게 되고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거나 욕하는 것은 다 형제를 미워하는 살인죄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 불에 들어갈 죄이다.

[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주께서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후에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고 교훈하셨다. 사랑을 실천하고 화목하는 것이 예배보다 더 중요하다고 교훈하신 것이다. 예배 행위보다 우리의 실생활이 더 중요하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했다(삼상 15:22).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죄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표는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3:9-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로마서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했다. 선한 삶은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는 인간 관계에서 나타난다.

[25-26절]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私和)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엄격하고 철저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우리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을 가고 있는 자와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엄격하고 철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관계의 죄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선한 마음을 품고 살며 남을 존중하며 서로 화목할 것이다. 선한 삶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고전 13:4-5). 에베소서 4:29, 31-32,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야고보서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제6계명의 내용이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지 말고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고 욕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마음으로 그를 죽이는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서로 화목해야 한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함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다.

27-37절, 간음, 이혼, 맹세에 대하여

[27-28절]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adultery)은 결혼한 사람이 자기 배우자가 아닌 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키며, ‘음행’(fornication)은 결혼관계가 아닌 두 사람 사이에 합의적 성관계를 가리킨다. 간음치 말라는 계명은 부부관계 외의 성행위, 즉 간음, 음행, 근친상간, 강간, 매춘, 동성애, 수간(獸姦) 등을 정죄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주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그와]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자를 보고’라는 말은 우리가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함을 보인다. 사람은 보는 데서 감정적 충동이나 소유의 충동을 가진다. 아이들은 마트에서 장난감을 보면 가지고 싶어한다. 사람은 좋은 옷이나 먹음직한 음식을 보면 사고 싶어하고 먹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그런 충동을 가지지 않으려면 안 보는 것이 상책이다.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이었으므로 그 과일을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어 그도 먹게 했다(창 3:6). 다윗은 저녁 때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내려다보았고 그가 심히 아름다워 보여(삼하 11:2)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게 해 동침하는 실수를 범했다.

물론, 안 보고도 상상할 수 있고 또 보고도 충동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면 충동을 받기 쉬운 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죄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안 보는 것이 낫고 보아도 잠깐 보고 두 번 보지 않거나 자세히 보지 않는 것이 낫다.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그를 포옹하거나 그를 취하고 그와 함께 눕는 불결한 상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남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여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성도덕이 해이하고 매춘 행위도 많은 음란한 시대에 살고 있다. 또 음란 풍조를 조장하는 영화, TV 드라마, 인터넷, 스마트폰의 영상물들이 홍수처럼 밀려와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있다. 과연 말세이다. 우리가 여성의 미니 스커트나 짧은 반바지, 너무 파진 옷, 짝 달라붙는 옷 등을 반대하며 또 청년들의 은밀한 남녀 교제를 금지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성적 충동을 일으킬 수 있고 음란죄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경건하고 지혜로운 성도는 그런 일을 피해야 한다.

주께서는 여자를 보고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그와 간음했다고 말씀하셨다. 마음에 미움을 품고 까닭 없이 노하고 또 형제를 욕하는 것이 살인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듯이,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이 아니고, 간음해야만 간음이 아니다. 마음에 미움을 품는 것도 살인이요,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다. 그것들은 다 큰 죄악이다.

[29-30절]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지옥은 실재하며 범죄하는 자는 지옥에 던지울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불구자로 성결하게 살 수 있다면 온전한 몸으로 범죄하며 사는 것보다 낫다. 두 눈으로 범죄한다면 한 눈으로만 보는 자나 장님이 더 낫고, 두 손으로 범죄한다면 한 손이 없거나 못 쓰는 자가 더 낫다. 건강한 몸보다 불구나 장애가 더 유익할 수 있다. 사람에게 두 눈이 건강한가, 두 손이 튼튼한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 눈과 그 손으로 바르게 사는가 아니면 범죄하는가 하는 것이다.

또 이 말씀은 범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지를 보인다. 건강한 몸보다 더 복된 것은 깨끗한 인격이다. 건강한 몸이 있어도 범죄하는 자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가 있어도 범죄하지 않는 자는 지옥에 던지우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며 범죄치 않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의 몸은 죄 짓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롬 6:13). 우리의 눈은 성경을 읽는 눈이 되고, 우리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되며, 우리의 손은 선한 봉사를 하는 손이 되고, 우리의 입은 주를 찬송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입이 되고, 우리의 발은 전도와 봉사의 선한 일을 하는 발이 되어야 한다.

[31-32절]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주께서는 또 이혼에 관해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말씀은 음행이 이혼의 정당한 이유가 됨을 보인다. 음행의 이유 외에도, 신앙적 이유로 상대가 분리하기를 원하는 경우(고전 7:15)나 고의적으로 배우자를 버린 경우도 불가피한 이혼의 경우라고 보이며, 또 구타나 학대 등 심히 비인간적인 고통을 당하는 경우나 전쟁으로 인해 오랫동안 분리된 경우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혼은 극히 삼가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2:16에서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부당한 이혼이 옳지 않듯이, 부당한 재혼, 예컨대 부당한 이혼자와의 결혼도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부당한 이혼이나 부당한 재혼을 다 인정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보다 더 너그러워서는 안 될 것이다.

[33-36절]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무엇을 엄숙히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참된 맹세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표이며 그런 자만 할 수 있다. 신명기 6:12-13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고 말하였고, 또 신명기 10:20도,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로나 땅으로나 예루살렘으로나 네 머리로 맹세하지 말라는 뜻이요, 모든 맹세를 다 부정하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마태복음 26:63-64에 보면, 그는 대제사장이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할 때,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대답하심으로 맹세하셨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23에 보면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라”고 말함으로써 맹세하였다. 이와 같이, 진실한 맹세는 오늘날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2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사람이 그것으로 맹세해야 할 이름이며, 거기서 그것은 모든 거룩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스럽고 두려운 이름으로 헛되이 혹은 경솔히 맹세하는 것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죄악되며 매우 미워해야 한다. 하지만, 중대한 일들에서 맹세는 구약 아래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약 아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증되므로, 그러한 일들에서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되는 합법적 맹세는 행해져야 한다.”

[37절]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우리는 맹세할 때 예와 아니오를 명확히 말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일을 하나님 앞에서 또 그의 이름으로 주장하거나 증거해서는 안 되고 또 자기가 할 수 없는 일 즉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을 하나님 앞에서 또 그의 이름으로 성급하게 약속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주장하고 증거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약속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옳다고 말하고,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을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상대에 대해 음란한 마음을 품음으로써 마음으로 간음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으로 미워함이나 까닭 없이 노함이나 형제를 욕함이 마음의 살인이듯이,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마음의 간음이다. 우리는 마음의 간음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몸의 지체들을 죄의 도구가 되게 하지 말고 의의 도구가 되게 해야 한다. 두 눈과 두 손을 가지고 범죄하여 지옥 가는 것보다 한 눈과 한 손을 가지고 범죄치 않고 천국 가는 것이 훨씬 더 낫다. 하나님의 공의는 매우 두렵고 엄격하고 철저하시다. 죄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계명을 어기는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는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범죄하는 모든 죄인은,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부당한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가 음행했거나 신앙 문제로 분리하기를 원하거나 고의적으로 자신을 버렸거나 심한 구타나 학대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이혼해서는 안 된다.

넷째로, 우리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엄숙히 증거하며 약속하는 맹세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일이나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일에 대해서는 맹세해서는 안 된다.

38-48절, 악한 자를 대적치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

[38-42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5:2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완전한 의이시다(롬 10:4). 그 의를 받은 자는 또한 완전한 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은 철저한 공의의 보응을 가르친 말씀이다. 이 공의는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우리의 오른편 빰을 치는 자에게 왼편도 돌려대며 우리를 고소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우리를 억지로 5리를 가게 하는 자에게 10리를 동행하고 우리에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공의의 법을 부정하실 수 없으므로, 이 말씀의 뜻은 좀더 깊은 데 있다고 본다.

엄격한 공의의 법에 의하면, 우리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하는 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고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의로 벌하지 않고 선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공의로 보복하지 말고 선대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나라에 경찰력이나 사형법이나 군대나 합법적 전쟁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로마서 13:4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사자들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보응하기 위하여 ‘칼’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이나 사형, 군대나 전쟁은 사회의 질서와 국가의 안녕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사회와 국가와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전통본문)7)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27-28도 비슷하다.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은 “원수를 갚지 말라”는 레위기 19:18을 좀더 설명하며 강조하신 것이다. 사람이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서 보면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원수 같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를 불쌍히 여기고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원수를 우리 스스로 갚으려 하지 말고 도리어 그를 사랑하고 그를 축복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45-47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는 말씀은 원수 사랑의 행위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행위구원론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원수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답고 하나님의 자녀의 표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가르치심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한 복음 진리와 충돌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 계시로 된 것이며(갈 1:11-12) 또 열두 사도들의 복음 이해와 일치했기 때문이다(행 15:11, 25-26; 갈 2:9).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롬 5:10). 그것은 원수 사랑의 행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의 사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친한 사람과만 인사하고 대화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 우리가 교회에 나온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지 않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 도둑들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친하며 서로 위하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보다 나아야 한다.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처럼 완전자가 되라는 뜻은 아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자이시고, 피조물인 우리는 유한하고 시작이 있고 불완전한 존재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는 혼동될 수 없고 없앨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피조물인 사람은 아무리 영적으로 성장해도 신이 될 수 없다.

본문의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은 도덕적 완전을 의미한다. 그것은 친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친하지 않은 사람들,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도 선을 베푸는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창 1:26, 27)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하나님께서 해와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주시는 것과 같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선하고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보복하려 하지 않으셨다. 공의의 보복 자체는 악이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악한 자에게도 선을 베푼다는 것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긍휼과 선을 베풀 때 악인도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선하게 대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고 우리를 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자기를 못 박은 자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돌로 치는 무리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다. 우리도 주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악인들에 대해서는 두고라도 우선 교우들 중에 낯선 자들에게 친절히 인사하고 따뜻하게 대하고 좁은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그 교회에 처음 나온 자들에게 온화한 태도로 대함으로 그들이 편안함을 느끼게 해야 한다. 우리는 아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끼리만 인사하지 말고 교회에 처음 나왔거나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에게도 인사하며 친절히 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원수에게까지도 친절해야 한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온전함같이 온전하라고 말씀하신 뜻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선하고 너그럽고 친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이다.

6장: 참된 경건의 삶

1-8절, 은밀한 구제와 기도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구제]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전통 사본에는 ‘의’라는 말이 ‘구제’라고 되어 있다.8) 구제는 주요한 의의 행위이다. 주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적인 구제를 경계하시고, 구제할 때 은밀하게 해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우리는 구제할 때에 자신을 드러내는 구제를 해서는 안 된다. 구제는 선한 행위이지만, 자기를 드러내는 구제는 자기를 자랑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구제할 수 있는 물질적 여유나 선한 마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다. 그러므로 외식적인 구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자기 자신을 높이는 악행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급이 없다.

[2절]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혹은 ‘받고 있느니라’].

외식자는 자기의 구제 활동으로 사람의 영광과 칭찬을 구한다. 그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 ‘저 사람은 구제를 많이 하는 것을 보니 정말 사랑이 많은 좋은 사람이야!’라는 사람의 칭찬을 이미 상으로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장차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상은 없다는 것이다.

[3-4절]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주께서는 우리가 구제할 때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고 교훈하셨다. 우리가 은밀하게 구제하면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지 않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보시고 아시므로 그의 선한 행위를 기뻐 받으시고 복을 주시는 것이다. 전통사본에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는 말 가운데 ‘드러나게’라는 말이 있어서9) “너희 아버지가 드러나게 갚으시리라”고 되어 있다. ‘은밀하게’라는 말(엔 토 크륍토)과 ‘드러나게’라는 말(엔 토 파네로)이 서로 대조를 이룬다. 사람 앞에 보이려고 한 구제와 선행은 사람의 칭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상이 없을 것이지만, 은밀하게 행한 구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드러나게 갚으실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의 드러난 행위만 보고 칭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밀한 행위를 보시고 보상하신다.

[5-6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드러나게] 갚으시리라.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주께서는 바른 기도의 태도에 대해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은밀한 기도이며 다른 하나는 중언부언하지 않는 기도이다. 첫째로, 주께서는 기도할 때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외식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참 기도 많이 한다, 참 경건하다”는 칭찬을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해야 하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 기도는 외식이다. 그는 사람들의 칭찬이라는 상을 이미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상을 기대할 것이 없다.

주께서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골방 기도가 가장 이상적인 기도이다. 골방 기도는 참으로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기도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나는 기도한다’고 알리거나 보이려 하거나 또 사람들에게 말하는 기도가 아니고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기도이다. 이것은 참으로 바른 기도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은밀한 기도를 들으시며 ‘드러나게’10) 갚으실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무슨 기도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좋은 것을 드러나게 주실 것이다.

[7-8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둘째로, 주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중언부언’은 주문을 외우듯이 헛된 말을 반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간절한 기도를 할 때 말의 반복이 있는 것은 자연스럽고 정당하겠지만, 무조건 말이 많으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미신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인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바른 마음에서 나온 진실한 기도가 아니라면 기도할 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효력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태도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 사실, 그는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우리의 영적 유익이 되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롬 8:28).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인격적이게, 차근차근하게 기도할 것이며, 기도하기 전에 기도할 내용을 생각하며, 중요한 기도 제목들을 묵상할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 대화할 때, 대화의 주제를 먼저 생각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우리는 우리의 기도 제목들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주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아시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아시지만, 하나님의 일들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에스겔 36: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우는 아기에게 엄마가 젖을 먹이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

물론, 그는 우리의 구하는 것 이상을 주시며(엡 3:20) 우리가 미처 구하지 못한 것도 주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실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견고케 되고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얻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구제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은밀하게 해야 한다. 주께서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3-4절).

둘째로, 우리는 기도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은밀하게 해야 한다. 주께서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6절).

셋째로, 우리는 기도할 때 인격적 기도를 힘쓰고 무의미한 말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주문 외우듯이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감사와 고백과 간구의 내용을 또박또박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9-10절, 주기도 (1)

[9절a]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러므로 너희는’이라는 말은 외식자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고 이방인들은 무의미한 말을 반복하여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된 너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자 하는 너희는 바르게 기도하라는 뜻이다. 원문은 ‘너희는’(휘메이스)이라는 말을 강조한다.

주께서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표현하셨다. ‘하늘’은 문자 그대로 하늘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신다고 표현하였고 또 엘리야와 예수님 자신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증거했다. 시편 115:16은 땅은 인간에게 주셨지만,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또한 하나님께서 높으신 하나님, 초월자이신 하나님,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이기도 한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의 창조자, 보호자, 공급자이심을 나타낸다. 그의 피조물인 인류가 넓은 의미에서는 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역하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잃었었다. 그러므로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고 때가 되어 하나님께 돌아와 그를 경외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만 하나님의 자녀이며(요 1:1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거룩한 존경과 확신을 가지고 가까이 나아가야” 할 것이다(소요리문답 100문답).

[9절b]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여섯 가지의 내용을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첫 번째 내용은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이다. ‘거룩’은 구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무한한 구별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은 지극히 거룩하고 영광스런 이름이시다. 그의 이름은 우리가 큰 두려움을 가지고 불러야 할 이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섬기며 그를 높이고 찬송하며 그가 창조자와 섭리자이심을 고백하여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그를 부정하고 무시하고 경멸하며 대적하고 욕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물질적 부요와 존귀, 세상의 권력, 육신의 쾌락을 더 크게 여기며 살고 있다.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도 우상을 섬기며 음란과 거짓과 탐욕으로 행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비방을 받기도 했다. 로마서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해 늘 기도하며 힘써야 한다.

[10절a] 나라이[주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두 번째 내용은 “주의 나라가 임하옵소서”이다. ‘나라’에는 백성과 땅과 왕과 법이 있다. 원래, 하나님의 나라의 왕은 하나님이시며 백성은 인류이며 땅은 세상이고 법은 그의 명령이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켰더라면, 그 나라에서의 삶은 평안과 행복의 삶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질병도 가난도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그 나라에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 결과, 평안과 행복의 삶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그의 통치권의 회복을 간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권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때 시작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전도사역을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전도는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소요리문답 102문답은 이미 시작된 이 나라를 ‘은혜의 나라’라고 표현하였다. 죄인들은 사탄의 나라로부터 구출되어 이 은혜의 나라에 들어왔고 그 안에서 보호함을 얻는다.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은택을 맛본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거룩의 열매를 맺으며(롬 6:22) 항상 기뻐하고(살전 5:16) 평안하며(요 14:27; 살후 3:16) 또 물질적 공급도 받고(마 6:33) 건강도 누린다(잠 3:7-8; 약 5:14-16).

그러나 신약교회들은 요한계시록 2-3장에 증거된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서 보듯이 아직 미완성이며 불완전하다. 성도들의 성화가 불완전한 만큼, 지상 교회들은 불완전하다. 거기에는 죄가 있고 다툼과 갈등도 있고 분열과 하나님의 징벌도 있다. 비록 지교회와 지교단이 권징을 성실히 시행해야 하지만(고전 5:13; 계 2:14, 20), 전체교회의 완전 성화는 마지막 심판 때까지 보류되어 있다(마 13:29).

이와 같이 “주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복음이 온 세상에 널리 전파되고 택한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 충만하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도하는 것, 즉 전도와 영혼 구원과 교회의 설립을 위한 기도이다.

이 기도는 특히 교회의 말씀 전파의 사명을 위한 기도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9:37-38). 우리는 교회에 말씀의 봉사자들이 부족하지 않고 또 그들이 힘있게 말씀을 전하기를 위해 항상 기도해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1,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게 하옵소서.”

또 우리는 교회가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교회는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회개시키고 회개한 자들을 경건과 거룩함으로 굳게 세우며 온전케 하며 깨끗한 예배와 봉사를 늘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소요리문답은 장차 이루어질 이 나라를 ‘영광의 나라’라고 부른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부활하고 변화될 성도들이 들어가 영생할 나라이다. 거기에는 죄도 슬픔도 질병도 죽음도 없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러므로 “주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택자들의 구원과 교회의 설립과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광의 나라를 대망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을 재촉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벧후 3:12).

[10절b]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세 번째 내용은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천사들과 죽은 성도들을 통해서이다. 하늘에 있는 악한 천사들은 땅으로 추방되었고 선한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겸손하고 민첩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 완전케 된 죽은 성도들도 늘 하나님을 찬송하며 평안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땅이 문제이다. 땅은 마귀의 권세 아래 있다. 마귀는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이며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이다.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요일 5:19). 우리는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과 싸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뜻하신 바를 이 땅 위에서, 역사 속에서 다 이루신다. 세계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였고 그를 대항하였다. 그것이 죄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기도 내용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첫째로, 택자들의 구원과 전도와 교회의 건립이다. 하나님의 뜻은 택자들의 구원이요(요 6:39)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요(마 28:19; 막 16:16) 교회의 건립이다(마 16:18). 둘째로, 하나님이 뜻은 우리가 죄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며(살전 4:3), 또 선한 일을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이다(딛 2:14). 그 선한 일이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일하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뜻은 성도들의 복된 부활과 영광스런 천국과 복된 영생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섭리의 목표이며 모든 성도의 소망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며 높이고 찬송해야 하고 범죄치 말고 그의 명령을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나라와 영광의 나라를 포함한다. 우리는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개인의 성화와 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고 또한 주의 재림과 영광의 나라의 임함을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택자들의 구원과 교회의 건립, 온전한 성화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또 영광스런 몸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날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11-18절, 주기도 (2), 금식

[11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네 번째 내용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이다. 그것은 날마다 필요한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매우 소박한 기도이다. 잠언 30:8도 사람의 두 가지 기본적 소원 중 하나로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는 소원을 말하였다.

사람은 육신을 가진 존재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의 구원과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일용할 양식도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출되어 메마르고 거친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주셨다. 그것은 비상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심을 잘 보여준다. 시편 104:14-15는, “[하나님께서]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 근심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는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몸을 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필요함을 아시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6:25-26, 31-32).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그의 계명에 순종하고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우리가 경건하고 바르고 선하게 살 때 그는 우리에게 지혜와 건강과 직장을 주시고, 또 수고의 대가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그는 만복의 근원이시고 그가 주시는 복은 영적인 복뿐 아니라, 육신적, 물질적 복도 포함한다.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다섯 번째 내용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이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에서 ‘우리의 죄’는 구원받은 이후의 죄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의 옛 죄악들은 깨끗이 씻음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남은 죄악성 때문에 때때로 실수하고 범죄한다. 성도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런 실수와 죄가 죄 아닌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모든 행위는 여전히 다 죄이다.

죄는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한다. 죄씻음은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요한복음 13:10에 보면, 주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목욕하였다는 말씀은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그의 속죄의 보혈로 죄씻음 받음을 말씀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목욕한 사람이라도 발이 더러워져서 발을 씻듯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성도도 날마다 삶의 현실에서 실수하거나 범죄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로막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근심하시고 우리의 양심도 하나님과 멀어지게 될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그런데 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 우리의 죄의 용서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다른 이를 용서함에 결부시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엡 4:32). 그러나 실상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많은 죄들과 부족들을 용서해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달을 때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고 또 그때 하나님 앞에서 담력을 얻고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13절a]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여섯 번째 내용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이다. 세상에는 마귀의 시험이 많다. 마귀는 우리로 불신앙과 낙심과 죄에 떨어지도록 시험한다. 주께서는 시몬에게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고 말씀하셨다(눅 22:31). 베드로도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도다”라고 말하였다(벧전 5:8). 사도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였다(엡 4:26-27).

주께서는 우리가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떨어져도 거기로부터 구원 얻도록 도우신다. 그는 시몬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눅 22:31-32). 그러나 우리도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눅 22:46). 사도 바울은 우리가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진리의 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등의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고 또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엡 6:10-18).

[13절b] ([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있사옴이니이다]. 아멘.)

예수께서는 또 기도의 맺는 말로서 “[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고 말씀하셨다.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이는, 왜냐하면’이라는 말(호티 o{ti)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심과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심과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주심도 그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 제목들을 아뢰는 것이다.

[14-15절]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후에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자를 용서하라고 교훈하시며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가 값으로 계산할 수 없이 큰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만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해주셨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다.

주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를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빚을 탕감받은 것과 같으며,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하는 자를 용서하는 것은 백 데나리온 정도의 빚을 탕감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셨었다(마 18:23-35).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며,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다. 그러면 1만 달란트는 6,000만 데나리온이다. 1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의 가치의 차이는 매우 매우 크다. 이처럼 우리가 큰 용서를 받았으므로 우리는 작은 용서를 해야 한다.

[16-18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은 비상한 기도의 한 방법이다. 그것은 비상하게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효력 있는 기도의 한 방법이다. 마태복음 17:21 전통본문에 보면, 예수께서는 세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그 모습이 영화롭게 변화된 사건이 있은 후에 산에서 내려와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던 간질 환자를 고쳐주신 후 “이런 유의 것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려 할 때에 금식하였다. 사도행전 13:2-3,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금식은 중요한 기도의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금식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는 모양을 내지 말고 평상시와 같이 행함으로 은밀하게 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매우 소박한 기도이다. 구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의 위로와 평안뿐 아니라 육신의 일용할 양식도 주신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도 범죄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아야 하고 그래야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로막히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형제의 부족을 먼저 용서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지 않고 범죄치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죄 짓지 않는 것은 성도에게 가장 중요하다.

넷째로, 우리는 비상할 때 금식할 수 있다. 금식은 비상한 기도의 한 방법이다. 금식 기도는 효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은밀히 해야 한다.

19-24절,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19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은 자신을 위해 돈이나 재산을 저축하고 선한 일들을 위해 그것을 쓸 줄 모르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보물은 집이나 건물과 땅, 은행 예금과 적금, 주식과 펀드, 금 패물, 현금 등을 가리킨다. 땅에 쌓아둔 재물은 좀과 동록이 해하듯이 손실이 생기기도 한다. 집값이나 땅값이 떨어지기도 하고 은행 이자가 낮아지고 주식값, 펀드값이 하락하고 금값이 떨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돈 가치가 하락하기도 한다. 또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듯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도적질이나 사기나 심지어 강탈을 당하기도 한다.

[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은 돈과 재물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선한 일, 즉 전도와 구제를 위해 쓰는 것을 말한다. 주께서는 그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들을 위한 후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전도자로 보내실 때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시며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10).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에바드로디도 편에 자기에게 보내준 선교헌금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말했다(빌 4:18). 선교헌금은 우리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다.

주머니를 만들어 하늘 나라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은 구제하는 일도 가리켰다. 누가복음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주께서는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의 형제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는 것이 곧 주님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5:35-40). 잠언 19:17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꾸어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구제도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다.

[21절] [이는]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있음이니라].

우리의 보물과 우리의 마음은 같이 간다. 우리는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일들을 위해 마음을 쓰고 돈도 쓴다. 자식을 보물로 여기는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아내를 보물로 여기는 사람은 그를 위해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고 처갓집을 위해 돈을 쓰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젊을 때 어려운 유학생활 중에, 비록 먹을 것은 많이 사지 못하고 입을 옷은 때때로 헌옷을 사 입었지만, 사명자로서 성경과 신학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책들을 사려고 애썼고 나의 아내도 이 일에 나보다 더 긍정적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전도와 교회 설립을 위해, 주의 이름으로 하는 구제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더 귀하시다. 그는 우리의 가장 귀한 보화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우리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신 그의 사랑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이 크다.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가 얻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신분의 회복과 영생과 천국 기업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이 크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전도를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교회 설립과 부흥을 위해, 신학교 설립과 운영을 위해, 문서 사역, 인터넷 사역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다.

[22-23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맑으면(NASB), 좋으면(NIV)]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눈은 몸의 등불과 같다. 우리의 눈이 좋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지만, 우리의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네게 있는 빛’은 우리의 영안(靈眼), 마음의 눈, 곧 영적 지식, 진리의 지식, 깨달음, 분별력을 가리킨다고 본다.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르고 힘있게 살 수 있으나,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크게 여기고 그 헛된 것들을 위해 시간과 돈과 힘을 낭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 대신에 세상의 것들과 세상 일들 가치 있게 여기는 자들은 영안이 어두운 자들이다.

창세기 13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잘못된 선택을 볼 수 있다. 그는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 물이 넉넉한 요단 들을 택하고 소돔과 고모라 성 가까이로 이주했다. 그러나 창세기 13:13은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말한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의 외적인 조건, 즉 물질적 유여함만 보고 그들의 종교적, 도덕적 상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의 판단과 선택은 나중에 그의 재산과 아내까지 잃어버리고 자신과 딸들만 겨우 구원을 얻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직장이나 직업이나 거주지를 택할 때 월급이나 직위나 외적 조건만 보지 말고 먼저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여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생각과 태도이다.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는 한쪽을 더 위하거나 다른 한쪽을 더 소홀히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고,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 즉 하나님과 세상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주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기운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씨라고 말씀하셨다(마 13:22). 재물에 대한 애착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결국 실패케 할 것이다. 주께서는 자기에게 찾아온 한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으나,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떠나갔다(마 19:21-22). 주께서 세우신 열두 사도 중 가룟 유다는 결국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흥정하였고 그들은 그에게 은 삼십 개(아마, 30스타테르 즉 120데나리온, 노동자의 4개월 품삯)을 달아 주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시대가 올 것인데, 그때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육신의 쾌락을 추구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딤후 3:1-5).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하며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뿐이며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며 오직 하나님과 그의 뜻을 구하는 자들만 영원할 것이라고 교훈했다(요일 2:15-17). 결국, 사람은 둘 중의 하나를 택한다. 하나님인가, 아니면 세상 즉 돈인가, 둘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만 참 주인으로 섬긴다면 우리는 바른 길에 서 있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돈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수단에 불과하며, 우리는 돈에 종노릇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돈을 이 땅에 쌓아두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도와 구제를 위해 언제든지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과 돈을 주인으로 섬긴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에 서 있는 것이며 우리는 결국 실패자가 될 것이다. 세상과 돈을 섬기는 자는 결국 세상과 돈이 불탈 때 함께 지옥의 불에 던지울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돈을 땅에 쌓아두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고 천국에 소망을 두는 자가 아니다. 사람이 이 세상 사는 동안 예기치 못한 일을 위해, 또 노후의 대책을 위해, 어느 정도 저축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돈을 땅에 쌓아두기만 하는 자가 있다. 그는 그것들을 다 못쓰고 죽을 것이다. 자식들을 위해 남겨두는 것도 큰 의미는 없다. 그것이 자식들에게 유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돈과 재산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전도 사업을 위해, 바른 교회들의 건립을 위해, 바른 신학교들을 위해, 바른 문서 사역과 인터넷 사역을 위해, 주의 이름으로 하는 선한 구제 사업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주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돈을 쓴다. 우리가 세상의 일들에 가치를 두면 그런 것들을 위해 돈을 쓸 것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선한 사업들에 가치를 둔다면 그것들을 위해 돈을 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은 정도대로 살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세상의 헛된 것을 위해 살 것이지만, 우리의 눈이 밝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선한 사업들을 위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우리의 시간과 돈과 우리 목숨까지도 드릴 것이다. 또 그것은 주의 말씀대로 참으로 우리를 위하는 일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돈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25-34절,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그러므로’라는 말은 우리가 돈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은 이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임을 보인다. 그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이며 선하고 유익한 교훈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음식의 내용, 옷의 종류에 너무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더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하지 말고 더 좋은 옷을 입으려 하지 말고 그런 것들에서 가치와 행복을 찾으려 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은 잘 먹고 잘 입어야 오래 살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 장수마을은 반드시 부자 동네가 아니다.

우리는 먹을 수 있는 것을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는 것이 좋다. 맛있는 음식이 몸에 해로운 경우도 많다. 과자나 빵, 동물성 기름이 많은 음식, 위에 너무 짜거나 맵거나 자극적인 음식, 흰밥 같은 탄수화물의 과도한 섭취 등. 또 과식은 오히려 몸에 나쁘다. 잡곡, 야채, 과일, 견과류, 생선, 계란, 육류 등 골고루 소식하는 것이 좋다.

주께서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음식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사람이 옷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음식이 사람을 위해 있고 옷이 사람을 위해 있다. 그러므로 옷도 단정하고 편한 옷이면 좋다. 물론 색깔도 밝고 예쁜것은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옷이 너무 요란하거나 단정치 못한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피부에 좋고 몸에 편한 옷이 좋은 옷일 것이다.

주께서는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염려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염려는 평안이 없고 근심하며 걱정하는 것이며 마음이 나뉘는 것이다. 염려하는 사람은 마음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다. 또 심하면 머리가 아프기도 한다. 염려하는 마음은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 평안은 마음의 단순함이다. 거기로부터 마음의 고요함, 조용함이 생기고 마음의 평정과 평온이 있다. 평안한 마음은 잔잔한 호수와 같다. 이런 평안에서 기쁨과 행복이 나온다. 그러나 불안과 염려, 걱정과 근심은 우울함, 두려움을 만들고 그런 마음은 사람을 행복하지 못하게 한다.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天父)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훨씬 더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도 기르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고 말씀하셨다(욥 38:41). 하나님께서는 새뿐 아니라 모든 생물들을 기르신다. 시편 104:25-29는,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흙으로 돌아가나이다”라고 말한다.

‘공중의 새’는 ‘부지런히 날아다니는 새’를 가리킨 것 같다. 새들은 먹이를 찾고 얻기 위해 부지런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고 기르신다. 우리는 새들보다 훨씬 더 낫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먹을 것을 공급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위해 준비하실 것이다.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키’라는 원어(헬리키아)(KJV)는 일차적으로 ‘나이, 수명’을 가리킨다. 또 ‘한 자’(페퀴스)라는 말은 시간의 측정에도 사용된다. 근래의 영어성경들은 ‘그 수명을 한 자나 더 연장할 수 있느냐?’라고 번역했다(NASB, NIV). 우리가 염려해도 우리의 키를 좀더 크게 할 수 없고 우리의 수명을 좀더 연장할 수 없다면, 왜 쓸데없이 염려하느냐는 뜻이다. 우리의 염려는 우리의 목숨을 위해, 또 몸의 건강을 위해 아무 유익이 없고 오히려 해를 준다. 마음의 평안은 몸의 건강에 유익하지만, 마음의 불안과 염려는 몸에 병이 될 뿐이다.

[28-29절]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천 짜는 일]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심지어 솔로몬도 그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주께서는 옷에 대한 염려를 언급하시며 들의 백합화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씀하신다. 모든 꽃은 다 아름답다. 색깔도 모양도 아름답다. 들판에서 자라는 작은 안개꽃 같은 것도 보잘것없어 보여도 누구에게 보이려고 그런지 예쁘다. 식물의 생명력은 강하고 놀랍고 신기하다. 이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들의 백합화는 심는 수고나 천을 짜거나 재단하고 바느질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으나 솔로몬의 아름다운 옷보다 더 아름답다.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옷이라도 하나님의 창조물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의 솜씨는 사람의 솜씨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뛰어나고 놀랍다.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아름다운 백합화나 들풀들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시적인 들풀들도 그처럼 아름답게 입히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입히실지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와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다(창 1:26, 27). 하나님의 자녀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신약교회 교인들은 더욱 존귀하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우리는 믿음이 적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는 온데 간데 없고 물질세계만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은 못보고 물질세계만 보는 무지하고 믿음 없는 자들이다.

[31-32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것임이니라. 이는].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아심이니라].

주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다시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두 가지 드셨다. 첫째로, 물질생활에 대한 염려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이방인들,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과 공급하심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그들은 미래에 대한 염려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아는 우리들, 또 하나님의 아신 바된 우리들, 세상 끝날까지 그의 보호와 도우심과 공급을 받을 우리들은 달라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 즉 우리의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 그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보호자시요 공급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물질적 필요에 대해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11)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사람은 단순히 열심히 살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먹이시고 기르시고 입히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고 교훈하셨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생활 지침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 곧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그의 의를 구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며 행하는 것을 말한다. 죄 짓지 않고 의롭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의식주에 부족이 없이 영원히 죽지 않고 행복한 삶을 누렸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은 이 세상에서는 땀 흘려 일하는 것도 포함한다. 구약성경은 우리가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고 가르친다(출 20:9). 성경은 우리가 개미에게 가서 근면함을 배우라고 가르친다(잠 6:6-11). 성경은 게으르지 말라고 가르치며(롬 12:11), 또 일하기를 힘쓰며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가르친다(살전 4:11; 살후 3:10). 우리는 세상일에도 부지런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 곧 의식주의 필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가 먼저 힘쓸 것을 힘쓰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들을 채워주실 것이다.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이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족함이니라].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주의 말씀도 중요한 교훈이다.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내일 일을 염려하게 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이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족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그 날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 하루로 충분하다. 내일의 것을 오늘 염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루하루 그가 인도하시는 대로 살면 된다. 사람은 일을 할 때 조금 염려하기도 할 것이나,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면 된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고 내일 일을 오늘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염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의식주의 문제를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먹는 음식의 내용이나 입는 옷의 종류보다, 우리의 목숨과 몸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음식을 골고루 조금 먹으면 되고 옷을 편안하고 단정하게 또 따뜻하게 입으면 된다. 우리는 내일 일도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면 된다. 우리는 한 날의 괴로움이 그 날에 족한 줄 알고 살면 된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누가 밥 먹여주냐?’고 우리를 비웃지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친 백성들에게 밥을 먹여주실 것을 믿고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 곧 성경 교훈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공중의 새들과 들의 백합화들을 보며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의 불행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바른 길이며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식주의 모든 필요들을 채워주실 것이다.

7장: 행위로 열매 맺는 삶

1-12절, 비판과 기도에 대하여

[1-5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주께서는 비판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간혹 남을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일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주께서 우리가 남을 비판하는 일을 완전히 금하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남의 잘못된 사상이나 행동을 판단하고 비판해야 그것을 따르지 않고 본받지 않을 수 있다. 주께서는 특히 교회의 질서와 거룩을 위해 교리적 오류나 윤리적 오류를 판단하고 비평할 책임을 교회 전체, 특히 목사들과 장로들에게 주셨다. 그는 마태복음 18:18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교회의 권징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6:17에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말했고, 또 디도서 3:10에서는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4: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말했다.

주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비판의 행위 자체를 정죄하신 것이 아니고 그 비판이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는 일을 매우 조심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는 일을 매우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도 비슷한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주께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다. ‘티’는 작은 결점을 말하고 ‘들보’는 큰 결점을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결점은 보지 못하거나 보아도 작게 여기고 남의 결점은 잘 보고 그것을 크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큰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작은 결점을 크게 여기고 그것을 비평하기 쉬운 것이다. 자신의 큰 결점을 보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점을 지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께서는 그런 사람을 ‘외식하는 자여’라고 부르셨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옳고 남이 틀렸고 자신이 선하고 남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이 더 큰 결함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의 작은 결점을 비평하기 전에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큰 결점을 찾아 고치려 해야 할 것이다.

[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귀한 진리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보며, 개와 돼지는 무지하고 악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복음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고의로 하나님과 그의 종들과 그들이 전하는 진리를 거절하고 대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발로 밟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도자들에게도 해를 입힌다.

하나님의 진리 속에는 죄의 지적과 정죄, 즉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 형벌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를 깨닫는 자는 회개하며 구원의 진리를 감사하게 받을 것이지만, 그러나 회개치 않는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가 기분 나쁜 말들에 불과할 것이다. 사도행전에 많이 기록된 대로, 사도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악한 자들은 그들을 비방하였고 다른 이들까지 선동하여 그들을 해치려 했다(행 13:45, 50; 14:5, 19; 19:9 등). 사람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으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함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침이 있어야 한다. 참된 구원은 회개, 즉 겸손히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을 동반한다.

[7-8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주께서는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다. 세상일도 이치가 비슷하겠지만, 이것은 기도에 대한 진리이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은 더 간절해지는 기도를 나타낸다. 또 ‘그러면’이라는 말의 반복은 기도의 응답을 강조한다. 하나님을 향해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응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구하지 않으면 무엇을 받을 수 없다.

기도는 단지 우리가 어떤 필요와 부족을 느낄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의지할 때 더 잘할 수 있다. 기도는 우리의 믿음에 비례한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고, 믿음이 적으면 조금 기도할 것이며, 믿음이 강하면 많이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기도의 본을 보이셨다. 그는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고 또 밤에 기도하셨으며 때로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주께서는 기도 응답을 강조하시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도 응답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낙심치 않고 더욱 잘 기도할 수 있다. 기도 응답을 믿지 않는 자는 응답이 더디면 낙심할 수도 있겠으나, 응답을 믿는 자는 낙심치 않고 더욱 열심히 기도할 것이다.

[9-11절]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주께서는 기도의 응답에 대해 한 비유로 설명하셨다. 사람은 무엇을 구하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부모는 없다. 악한 인생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된 우리가 무엇을 구할 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그의 기도 응답을 믿을 뿐 아니라, 그가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는 좋으신 아버지이시며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온 세상을 섭리하시며 특히 참된 교회들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했다(롬 8:28).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물론 인간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으나, 문맥이 보이는 바와 같이 기도의 교훈의 결론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을 받기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려야 함을 교훈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시간과 돈과 힘을 드린다면, 그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시간과 돈과 힘을 드리지 못하고 드려도 부스러기를 조금 드리고 오히려 그의 미워하시는 것들, 즉 이 세상의 죄악되고 헛된 것들을 좋아하고 그런 것들을 위해 살았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의 좋은 기도 응답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평소에 그에게 좋은 것을 드려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일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연약하고 부족한 점들을 성찰하고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큰 결점이 있는데 남의 작은 결점을 지적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교리적, 윤리적 거룩함과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남을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매우 조심해야 한다. 또 남을 비평할 때에도 공개된 일이 아닌 경우는 먼저 당사자에게 개인적으로 말해야 하고, 또 공개된 일의 경우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신중하게, 덕스럽게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구원의 거룩하고 복된 진리를 지혜롭게 전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무지하고 악한 자들에게 그냥 던지듯이 전하면 우리는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먼저 그에게 하나님께서 계심과 사람이 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전하고 깨우치며 또 사람은 누구나 죄인임과 그 죄의 심각함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때 필요한 이런 준비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믿고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신자의 특권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으나, 믿음이 없는 자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며 또 기도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 읽기와 기도,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야 한다.

13-14절, 좁은 문, 좁은 길

[13-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문’은 구원의 방법을 가리키며, ‘길’은 구원받은 자의 생활방식을 가리킨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만 유일한 구주로 믿어야 함을 말한다. 주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그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며 구원의 진리시요 영생이 되신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증거하였다(딤전 2: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사도 베드로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증거했다(행 4:12). 죄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또 우리는 좁은 길로 가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성경 교훈만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길을 가셨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25).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고난이 예상된다. 그들은 고난을 각오하며 그를 따라야 한다. 주께서는 심지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가족보다, 우리 자신보다 그를 더 사랑하고 따라야 한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후 그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며,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행 14:22). 또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고(빌 1:29), 디모데후서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걷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좁은 문이며 좁은 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 구주로 믿어야 하고 성경의 교훈만 따르고 어려운 희생과 고난도 각오해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다. 그것은 다원주의의 문이다. 그것은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종교다원주의의 문이며, 모든 철학과 인생관과 가치관을 포용하는 상대주의의 문이다. 그것은 세상 사랑, 돈 사랑, 육신의 쾌락 사랑도 포용한다. 그것은 기독교 안에도 들어와 있다. 천주교회는 오래 전부터 이방종교들과 세상의 풍습들을 포용하였고,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과 은사주의도 그런 경향을 가진다. 거기에는 오직 관용이라는 한 가지의 덕만 있고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같은 배타주의는 악으로 간주되고 배척을 받는다.

그러나 그 넓은 문과 그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한다. 다원주의, 포용주의의 사상은 마귀의 사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배치된다. 그것은 오류에 빠져 있는 자들로 하여금 회개치 못하게 만들며 그 죄 가운데 거하게 만든다. 요한계시록 18: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정신]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세상은 각종 더러운 정신들의 집결지이다. 교회들도 배교하며 다원주의적이고 포용주의적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로 가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 많은 종교인들이 그리로 가고 있고 또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사람들도 그리로 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참된 신자들이 아니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아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과 대조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힘들어서 찾는 이들이 적다. 역사적, 성경적 기독교는 배타주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천국 가는 길이시며 인생의 진리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다(요 14:6). 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가족보다, 또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마 10:37-38). 주님의 말씀대로,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막 16:16).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주를 세상에 주지 않으셨다(행 4:12).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딤전 2:5). 성경적 기독교는 배타주의이다. 예수 그리스도만 구주이시며 성경만 진리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은 우리의 주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을 절제하며 성경의 교훈에 복종하는 것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우리에게도 죄성과 죄의 습관이 남아있다. 우리에게는 항상 내면적 싸움이 있다. 우리가 자신을 부정하고 절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오늘날같이 교회가 넓어져서 속화된 때에 옛신앙, 성경적 신앙, 보수신앙을 지키는 것은 좁은 길을 걷는 것이다. 많은 목사들과 교인들이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전통적, 정통적 교리들을 저버린 자들이 많다. 이런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시대적 풍조를 반대하고 옛길을 붙드는 것은 편협하거나 극단적이게 보이는 외로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이 어렵고 외롭고 힘든 길일지라도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이 길만이 영생의 길이다.

그러나 좁은 문을 찾고 좁은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고, 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하였다(고전 1:18, 22-24).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은혜로 부르시는 자들만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이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따를 것이며 또 성경 교훈대로 바르게 살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좁은 길로 가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성경만 믿고 성경 교훈대로만 살아야 한다. 우리는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자유주의, 교회연합운동, 신복음주의, 은사주의로 가지 말아야 하고 오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한다. 또 우리는 성경말씀의 바른 교훈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죄성과 연약성을 극복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인내하고 절제하며 영광의 천국만 바라보고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사랑치 말고 신구약성경의 가르침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정직하게 살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항상 온유하고 겸손하게,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영생의 길이다.

15-29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15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 즉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자이다. 이 일은 오늘날 목사들에게 맡겨져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거짓 선지자들, 거짓 목사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전하는 자들, 즉 비진리를 전하고 올바르지 않은 말을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거짓말하는 자들, 자기의 생각을 전하는 자들, 자기 자랑이 많은 자들, 세상적 수준의 생각과 도덕을 전하는 자들, 성경의 충실한 본문 해석 대신에 세상적인 이야기들, 허탄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 자들, 성경 진리들과 멀어지게 하는 자들, 바른 교회와 멀어지게 하는 자들, 바른 종들을 비방하고 그들과 멀어지게 하는 자들(고후 12:16-17; 갈 4:17),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자들이다.

주께서는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중적이며 위선적이며 겉과 속이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려고 와 있는 사탄의 사자들이다. 그들은 겉만 보아서는 잘 모른다. 그들의 사상과 인격성을 보아야 알 수 있다. 그들은 사심(私心)이 있고, 물질욕, 명예욕, 권세욕 등이 있다. 그런 자들은 교회 헌금을 불필요한 일들과 부당한 일들에 과다지출하고 헌금을 남용하고 교회 공금을 부당하게 취하고 헌금을 세상적인 사업들에 투자하고 교인들의 투자금을 떼어먹는다. 성도들은 이런 거짓 목사들을 분별하여 물리쳐야 한다.

[16-20절]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운다. 이와 같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참 목사와 거짓 목사는 그의 행위로 분별할 수 있다. 우리는 단순히 그의 외모의 훤칠함이나 유창한 말만 가지고 그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탄의 사자들도 그런 점들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의 종들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은 그 행위들이다. 사람은 그의 행위로 판별된다. 그 행위란 그의 경건성과 도덕성의 행위를 가리킨다. 그의 행위가 경건한가, 깨끗한가, 의롭고 정직한가, 선한가, 진실한가? 이것이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새 생명은 단순히 말에 있지 않고 거룩한 인격과 삶에 있다.

하나님의 종들과 마귀의 종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은 명백히 구별된다. 요한일서 3:10은,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거짓 목사들은 그 행위로 분별된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들이 찍혀 불에 던지우듯이, 불경건, 사욕(私慾), 불의, 악, 교만, 거짓을 추구하고 행하는 목사들은 천국에서 제외되고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참된 경건과 도덕성이 없는 자들은 참으로 심판을 받고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여, 주여’ 하는 고백은 입술만의 고백일 수 있고 입에 발린 말에 불과할 수 있다. 진정한 고백은 마음의 고백이어야 하며, 그것은 행위로 나타나는 고백이다. 사람의 행위는 마음에서 시작되며 마음먹기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거짓된 목사들은 입술로는 주님을 부르지만, 그들의 고백이 진실한 마음의 고백이 아니므로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헛된 고백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고백이다.

주께서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특별한 의미에서 부자(父子) 관계이시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것이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선한 행위가 없는 입술만의 고백은 죽은 고백에 불과하다. 의롭고 선한 행위는 참된 믿음의 표시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만 받지만, 믿는 자는 반드시 의롭고 선한 행위들을 가져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은 선한 행위가 있는 자이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구원의 증거가 된다. 사람이 행위로 천국 가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 없이 천국 가는 것도 아니다. 생명은 반드시 인격과 행위의 변화로 나타난다. 입술의 신앙고백이 있어도 선한 행위가 없다면 그는 구원받은 자가 아닐 것이다. 그의 고백은 헛된 고백에 불과할 것이다(마 3:8-10). 사람의 행위는 마음의 표현이다. 회개한 자는 반드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22-23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못했으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 날은 마지막 심판의 날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 중에는 거짓 선지자들, 즉 거짓 목사들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열심으로 하셨듯이, 사탄도 하나님의 일 방해하기를 열심으로 행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들을 일으켜 일하게 하셨듯이, 사탄도 그의 사자들을 일으켜 다양한 거짓된 운동들을 일으켰다. 거짓 목사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목사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심지어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기적도 행하였다. 본문은 사탄도 그의 종들을 통해 기적들을 행할 것을 보인다.

그러나 거짓 목사들의 위선은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데서 드러났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도무지’라는 원어(우데포테)는 “내가 너희를 안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그들이 기적을 행했던 행위들이 주님과 상관없이 행해졌음을 뜻한다. 거짓 목사들이 주님께 거절당한 까닭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가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이다.

누구든지 악을 행하면서 구원받은 줄로 생각하고 마지막 심판대에서 주께 인정받을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악인을 구원하시지만, 그를 악에서 건져 선한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지 악한 그대로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다. 행위는 사람의 구원을 판별할 수 있는 표가 된다. 아직도 악을 떠나지 않은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가 참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모든 죄를 버리고 주 앞에 복종하고 말씀의 교훈대로 사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의롭고 선한 행실로 우리의 믿음의 진실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주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마지막 심판대에서 버림받은 이유는 불법을 행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었고 천국과 영생과 상관없는 자들이었고 마귀와 상관된 자들이었고 지옥과 상관된 자들이었다.

[24-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주께서는 그의 산상보훈의 결론으로 행위에 대한 강조를 하신다. 계명의 실천이 중요하다. ‘누구든지’는 모든 제자들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나의 이 말’은 산상보훈 전체를 가리킨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과 같다. 여기에 ‘집’은 사람의 인격과 삶을 가리킨다. 주의 말씀 순종의 행위는 그의 신앙 인격과 삶을 견고하게 만든다. 그런 자는 정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이다. 폭우나 폭풍은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시험과 환난, 질병과 궁핍 등을 상징한다. 순종의 행위로 자기의 신앙을 견고케 한 자에게는 그 어떤 시험과 환난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시험과 환난을 이기고 또 이길 것이다.

그러나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과 같다. 말씀 순종의 행위가 없는 자의 인격과 삶이라는 것은 겉모양은 살아 있으나 실상 죽은 것과 같다. 그가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교회생활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는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자와 같다. 이런 자의 집은 폭우와 폭풍이 올 때에 무너지며 그 무너짐이 심할 것이다. 행함이 없는 교인들은 시험과 환난이 닥쳐올 때 크게 흔들리고 넘어질 것이다. 참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갈 5:6).

[28-29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무리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치시는 것은 권세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기관들은 아마 많은 지식과 말이나 표현의 아름다움으로 가르쳤을 것이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로 하나님의 진리를 명료하고 은혜롭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오늘날 거짓 목사들을 가리킨다. 나무는 열매로 알듯이, 참 목사와 거짓 목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그의 인격과 행위이다. 그의 바른 교리 사상은 기본이며, 특히 그의 경건성과 도덕성 즉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는지, 또 그가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자인지가 그가 참 목사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표가 된다. 그가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라면 두말 할 것도 없이 거짓 목사이다. 또 그가 선하고 진실한 도덕성이 없다면 그는 확실히 거짓된 목사일 것이다.

둘째로, 사람의 정직하고 선한 행위는 그가 천국에 들어가는 자라는 한 증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입술만의 고백, 즉 입에 발린 형식적 고백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주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21절).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입술의 고백뿐 아니라, 마음의 고백이 필요하고, 그 마음의 고백은 반드시 정직하고 선한 행위로 나타날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포함하지만,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대로 바르고 선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셋째로, 주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다.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자이며 홍수가 나고 폭풍이 불어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자이며 홍수가 날 때 그 집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4-25절). 우리의 믿음은 주의 모든 말씀, 즉 성경의 모든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성장하고 견고해지며, 그러면 어떠한 시험과 환난이 닥쳐와도 넘어지지 않고 굳게 설 것이다. 이것이 지혜로운 참 성도의 모습이다.

8장: 주님의 능력

1-4절, 나병 환자를 고치심

[1-2절]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나병 환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5-7장에서 사도 마태는 예수께서 산 위에서 하신 설교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세히 기록했다. 예수님의 설교는 무리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고, 그 결과, 허다한 무리가 그를 좇았다. 8-9장에서 마태는 예수께서 능력의 일들을 행하신 것을 기록한다. 예수께서는 말만 하시고 행함이 없으시고 능력이 없으신 자가 아니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즉 신적 능력을 가진 자이셨다. 마태는 먼저 예수께서 한 나병 환자[한센병 환자]를 고쳐주신 사건을 증거한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나아왔다. 나병은 살이 붓고 얼굴, 손, 발이 변형되고 감각이 없어지는 무서운 병이다. 나병 환자는 일반 사람들과 격리되어야 했다(레 13:46). 많은 사람이 좋은 조건을 갖고도, 아니 그 좋은 조건 때문에, 예수께 나오지 않았고 그에게 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아마 이 병 때문에 겸손해졌고 그의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았고 자신의 누추한 모습 그대로 예수께 나왔고 그에게 절했다.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더 나오기 쉬운 것 같다. 시편 119편 저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다(67, 71절).

그 나병 환자는 예수께 나아와 절하며 말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단순히 예수님께 존칭어로 ‘주여’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그는 예수께서 원하시면 그의 불치의 병인 나병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즉 신적인 구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주여’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호칭이라고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삶과 죽음, 건강과 연약, 복과 재앙을 다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책에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신 32:39). 선지자 사무엘의 모친 한나도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바르게 고백하였다(삼상 2:6-7).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 곧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으로 믿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적 구주이실진대 그에게도 능치 못하심이 없어야 할 것이다. 놀랍게도 이 나병 환자 속에는 예수께서 원하시면 자기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그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그의 지식과 믿음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와 그의 병고침을 간청한 그 나병 환자의 간청을 물리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8).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해졌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의 일이었다. 이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부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이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롬 4:17)의 바로 그 능력이었다.

예수님의 치료는 의학적 치료와 달랐다. 의학적 치료는 대개 점진적이고 많은 경우에 불완전하다. 심각한 질병의 경우, 부득이 수술을 실시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치료나 회복보다 차선책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전하였다.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졌다.” 그것은 그의 완전한 신적 능력의 치료이었다.

[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병고침이 그가 세상에 오신 주된 임무가 아니었음을 보인다. 일차적으로, 그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마 9:13; 눅 5:32) 또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하기 위하여(막 1:38; 16:15) 오신 것이었다.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그것은 단지 부수적인 일이었다.

또 예수께서 그 고침 받은 이에게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사람이 자기가 병고침 받았음을 확증하고 또한 율법의 규정을 지켜야 함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이루기 위해 오셨다.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 간구해야 한다. 고난은 우리에게 힘든 일이지만 유익이 있는 일이다. 고난 당할 때가 곧 하나님께 기도할 때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환난과 고난의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아야 한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119:67, 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은 유익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힘써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겸손히 그에게 경배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예수께 나아오지 않았을 때 그 나병 환자는 그에게 나아왔다. 그는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주께 나아왔고 그에게 엎드려 절하였다. 불치의 병인 나병이 그에게는 오히려 주 예수께로 나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고난은 그의 어두운 마음에 깨달음을 주었고 교만한 마음을 깨뜨려 온유하고 겸손케 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과 주 예수께로 나아오지 못한다. 주 예수께서는 그 나병 환자를 고쳐주셨다. 불치의 병인 나병을 고쳐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고 겸손히 그에게 경배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나병 치료보다 더 중요한 죄사함을 받았다. 나병 치료의 사건은 죄사함의 구원에 비교될 수 있다. 영적으로, 모든 죄인들은 나병 환자와 같다. 죄는 나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죄는 모든 죄인들을 영원한 지옥의 멸망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께서는 원하시는 모든 자들의 모든 죄를 즉시 깨끗케 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는 신적 구주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자.

5-17절, 중풍병, 열병,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심

[5-9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100명의 부하를 지휘하는 군대 장교이다. 이 백부장은 자기 종의 병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다. 그의 종은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백부장은 자기 종에 대해 사랑과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예수님의 존귀한 신분과 자신의 천한 영적 상태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신적 인격과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단지 말씀만 해주셔도 자기 종의 질병을 고치실 수 있음을 믿는다고 말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지식과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아는 지식과 작은 믿음을 주셨다.

[10-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이스라엘 중에서라도]12)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이 백부장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이방인이었으나, 그의 믿음은 이스라엘 중에서라도 찾아볼 수 없는 큰 믿음이었다. 주께서는 동서로부터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천국에서 제외되고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가는 처지가 될 것을 예언하셨다. 사람의 믿음은 반드시 그의 부모가 가진 믿음에 비례하지 않는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예수께서는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믿음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그의 치료는 대체로 치료받는 자의 믿음에 근거했으나, 때로는 그와 관계된 이의 믿음에 근거하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의 말씀은 즉시 효력을 나타내었다. 바로 그 시간 그 백부장의 하인은 나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능력이었고 그것은 치료의 능력을 포함했다. 또 그의 치료는 완전했다. 백부장의 종의 중풍병을 오직 말씀으로 고쳐주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를 믿고 확신해야 한다.

[14-15절]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다. 마가복음은 그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증거한다(막 1:29). 예수께서는 많은 무리들 중 특히 몇 명의 제자들을 늘 그와 함께 있게 하셨다. 그는 베드로의 집에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누가복음은 그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렸다고 증거한다. 열병은 높은 열로 고생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셨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께 요청했다고 증거한다. 이번에는 그 환자와 직접 관계된 자의 요청이 아닌 것 같다. 이와 같이, 환자 본인이든지, 그의 주인이든지, 혹은 그와 좀 멀리 관계된 자일지라도 치료를 간청할 때 주께서는 치료해 주셨다. 주께서 그의 손을 만지시자 그의 열병은 떠나갔다. 마가는 예수께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다고 증거했고, 누가는 그가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시자 병이 떠났다고 하였다. 그 열병은 즉시 치료되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는 즉시 일어나 예수께 수종들었다(눅 4:3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은 이와 같이 나병, 중풍병, 열병 등 다양한 병들의 치료에서 나타났고, 치료를 요청한 자들도 환자 자신, 혹은 환자의 주인, 혹은 환자의 이웃 등 환자와 다양한 관계의 사람들이었다. 어떤 때는 주께서 환자에게 손을 대셨고 어떤 때는 단지 말씀으로만 하셨고 어떤 때는 그 병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주 예수의 치료는 즉각적이며 완전하였다.

예수께서 병들을 고치신 사건들은 그의 신적 능력과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런 증거들을 읽고 듣고 그가 누구이신지 깨닫고 그를 믿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신적 구주가 계시다.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구주이시며,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성령으로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구주이시요, 또 우리의 육신의 문제까지도 도우실 수 있는 주님이시다.

[16절]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날이 저물었을 때,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왔다. 귀신들은 타락한 천사들이다. 그들의 왕은 사탄이다. 귀신들은 모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일들 배후에 활동하고 있고 또 많은 질병들, 재난들, 불행한 일들을 일으킨다. 특히 귀신이 들어와 그를 주장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과 의지를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귀신 들린 자들이다. 이들은 정신 이상자들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께 왔을 때,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주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창 1장).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말했다(히 4:12). 신구약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성경을 열심히 또 규칙적으로 읽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을 얻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성과 세상의 악과 마귀의 시험을 이길 능력을 얻을 것이다.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사 53:4)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주께서는 우리의 죄뿐 아니라, 죄의 결과인 모든 질병과 슬픈 일들도 담당하셨다. 우리는 아직 모든 질병과 슬픈 일들이 믿는 자들에게서 완전히 제거됨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죄사함은 그것들을 제거하지만, 주께서 남겨두신 것들은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함일 뿐이다. 우리가 천국에 이를 때면 죄와 그 결과들은 다 사라질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들을 다스리는 신적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그는 나병과 중풍병과 열병을 치료하셨고 귀신 들린 자들도 고쳐주셨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이것이 사복음서의 목적이다.

둘째로,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야 한다.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무엇을 간구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구하는 바를 들어주셨다. 기도는 믿음의 증거이며 표현이다.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으나,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할 것이다. 

18-34절, 제자들의 길, 풍랑을 잔잔케 하심,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심

[18-20절]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 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 행하심에 큰 감동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어디든지 따르겠다는 결심은 놀라웠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말씀은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길이 어떠할 것을 암시한다. 주께서는 개인 소유의 집을 가지지 않으셨다. 주의 제자가 되는 길은 경제적 불안정과 심지어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며 따라야 하는 길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고, 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다(행 14:22; 딤후 3:12). 오늘날 교회들이 고난 없는 기독교를 전파함으로 교인수만 늘이고 있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가난과 고난의 삶을 각오해야 한다.

[21-22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이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는 초청을 먼저 하셨다(눅 9:59). 하나님의 아들께서 개인적으로 그를 초청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러나 그는 먼저 자기 부친을 장사하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요청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가리킨다. 주의 말씀의 뜻은 세상일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거나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부모의 죽음을 인해서도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었다(레 21:11).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군사로 모집된 자들은 자기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딤후 2:4). 하나님의 일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들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일들, 즉 가족 관계나 직장 관계의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거나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 매튜 풀은 사람에 대한 어떤 사랑과 의무의 일도 우리가 우리의 첫 번째 순종을 드려야 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보다 우선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J. C. 라일은 장례식, 결혼식 등의 방문이 신자의 시간을 빼앗고 신자로 하여금 어떤 분명한 종교적 의무를 못하게 할 때, 그것들은 신자의 영혼에 올무가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첫 번째의 순종을 하나님을 위해 또 하나님의 일을 위해 드려야 한다.

[23-27절]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풍랑]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우리를]13)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예수께서는 나병환자, 중풍병자, 열병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등을 고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바람과 파도도 꾸짖어 잔잔케 하셨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신성(神性)을 가지신 사람이셨다. 어떤 사람이 그런 불치의 병들을 고치고 바람과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할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께서만 또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께서만 그런 일들을 하실 수 있다.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구주이시다.

이 세상은 종종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다. 주를 믿고 따르는 길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삶의 온갖 풍랑을 제거해 주실 수 있고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수 있다. 세상에 고난은 있지만, 하나님 안에 구원과 평안이 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아시아에서 많은 환난을 당하였고 죽을 지경에 있었으나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간증했다(고후 1:8-10). 환난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현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28-34절]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겔게세네](갈릴리 호수 동쪽 해변)(전통본문)14)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 [예수]15)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떼에 들여보내소서 한대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마가복음 5:1-20과 누가복음 8:26-40은 이 사건을 더 자세히 증거하지만, 귀신 들린 자가 두 명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복음서들은 서로 보충적이다. 마가복음 5:13은 돼지떼가 거의 2천 마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돼지를 치던 자들은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였으나, 온 성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다.

본문은 귀신이 실제 존재하며 그 수가 많음을 증거한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그 귀신의 이름을 ‘군대’라 했다. 귀신은 타락한 천사 즉 악한 영이다(엡 6:12). 온 세상에서 활동하는 귀신들의 수는 많을 것이다. 또 귀신들은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았고 또 자신들의 멸망할 운명을 알고 있었다. 또 귀신은 매우 사나웠다. 마가복음은 그 귀신 들린 자들을 더러운 영을 가진 자라고 표현했다. 귀신들은 불경건하고 악하고 부도덕한 세상의 풍조들 배후에 활동하고 있는 영들이다.

본문은 또 사람의 가치가 참으로 큼을 보인다. 귀신 들린 영혼들의 가치는 돼지 2천 마리보다 더 귀하였다. 그러나 가다라[겔게세네] 사람들은 그 귀신 들린 자들의 회복이 얼마나 귀한 일임을 깨닫고 감사하고 기뻐하기보다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항상 환영을 받는 자가 아니셨다.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은 항상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길이 아닐 것이다.

본문은 무엇보다 예수께서 귀신들도 주관하는 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에게 그 사람들에게서 나가 돼지떼에 들어가라고 명하셨다. 그는 귀신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귀신들은 때가 되면 그들이 멸망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말하였다. 누가복음 8:31은 귀신들이 자기들을 무저갱[지옥]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고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장차 귀신들을 지옥에 던져넣으실 수 있는 심판의 권세를 가진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시다. 그는 천상천하에 유일하신 신인(神人), 즉 사람이신 하나님 또는 하나님이신 사람이시다. 그는 자연계와 영계를 주관하시는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우리가 믿는 구주 예수께서는 바로 참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전지하거나 전능할 수 없다. 전지와 전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이다. 예수께서 온갖 종류의 질병을 치료하시며 자연계를 명령하시며 또 귀신들을 명령하실 수 있다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구주, 신적 인격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는 능력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고 그러므로 그에게 기도하는 자는 복되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의지할 만하지 못하나, 그는 우리가 참으로 의지할 자가 되시며 가장 가치 있는 분이시며 우리의 힘과 기쁨이 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큰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가 아니고서는 큰 풍랑을 잔잔케 하실 수가 없으며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하고, 그를 알지 못하는 자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이 물질적 안정이 없는 길임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물질적 부요를 바라고 주를 따르지 말고 그가 진리의 주님과 구주이시기 때문에 고난을 각오하며 그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평안과 건강과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주를 믿고 따를 때 우선순위를 주께 두고 따라야 한다. 가족에 대한 의무는 당연한 일이며 이웃에 대한 선한 일도 해야 하지만, 만일 그 일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충돌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우선순위를 거기에 두어야 한다.

넷째로,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은 큰 풍랑도 있고 사람들의 배척도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길이다.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고 고난의 길이지만, 능력의 주님과 늘 동행하는 길이다. 그 길은 주의 능력을 체험하는 길이며 선한 열매를 체험하는 길이다.


9장: 죄를 사하는 권세

1-17절, 중풍병자를 고치심, 죄인들과 잡수심, 금식에 관한 질문

[1-3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마가복음은 이 사건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 때에 있었다고 증거한다(막 2:1). 마가복음에 보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네 명이었고, 또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께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렸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신적 인격과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들의 믿음은 의심하는 약한 믿음이 아니고, 끈질긴 열심을 가진 확고한 믿음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어떤 서기관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라고 말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하나님 한 분만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4-6절]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人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 그는 사람들의 숨은 생각을 다 아신다. 그는 신적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그의 신적 인격의 증거를 진지하게 생각지 않고 그를 참람하다고 정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신 아버지’로 예언하였었다. 그러나 성경을 필사하고 연구하던 자들인 서기관들의 생각은 악하고 무지하고 완고하였다.

예수께서는 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둘 다 쉬운 말은 아니지만, 육신의 병을 고치는 기적보다 영혼의 죄를 사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쉬운 말 대신 어려운 말을 택하셨다. 그것은 중풍병뿐 아니라 모든 병이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증거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중풍병은 죄와 관련이 있었다. 성경은 죄와 병의 인과 관계를 말한다. 신명기 28장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 하나님께서 폐병, 열병, 학질, 종기, 치질, 괴혈병, 개창 등으로 치실 것이라고 말했다(22, 27-28절). 죄가 질병의 주요한 원인이므로 죄사함은 그 병의 치료와 회복의 첫걸음이 된다. 주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즙을 주시면서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라고 말씀하셨다(마 26:28). 죄가 사람의 근본문제이므로 죄사함은 사람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된다.

예수께서는 온갖 질병을 고치시는 능력뿐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이것이 실상 그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관심은 단지 병의 치료나 경제적 안정 정도가 아니고, 사람들의 죄 문제에 관한 것이다. 죄인의 구원과 변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관심이시다. 이를 위해 그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실 것이다. 죄사함은 그의 중심적 사역이다.

그는 그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죄사함만 주지 않으시고 죄의 결과로 온 육신의 병도 고쳐주셨다. 주께서는 우리의 몸의 연약과 물질적 부족도 동정하신다. 그는 세상의 온갖 종류의 불행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그러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7-8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그 중풍병자는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놀라운 순간들인지! 무리들은 그 사건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그를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다.

[9-11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와 변화된 현재를 간증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세관에 앉아 있던 그에게 주께서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세무 공무원들은 불의한 이익으로 자신을 부요케 하는 자들로 여겨졌다. 그러나 마태에게는 회개하고 믿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주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일어나 그를 좇았다. 그는 그의 유여한, 그러나 아마 더러워진, 생활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귀한 결단을 내렸다.

마태는 자기 집을 방문하신 예수께 식사 대접을 하였다. 그때 그는 그의 친구들도 다 청했다. 예수께서는 마태의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셨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 교제는 목적과 동기가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그들과 함께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잡수신다고 비난하였다.

[12-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불러 회개시키러]16)(눅 5:32) 왔노라 하시니라.

병자에게 의사 선생님이 필요하듯이, 죄인에게는 구주가 필요하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순히 형식적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우리가 남에게 긍휼 베푸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예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셨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회개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던 자들이 돌이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회개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고,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의 처소를 버리고 이 누추하고 죄와 슬픔이 많은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이 일을 위해서이었다. 이것이 그의 사명이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은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들을 회개시키려면 죄인들과 접촉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 격리된 삶은 바람직하지 않다. 죄인들을 구원하려면 죄인들의 세계 속에 들어가 그들과 만나야 한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교회의 전도적 접촉은 어떤 대상에게도 개방되어야 할 것이다. 또 우리가 죄인들을 접촉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긍휼하고 친절한 마음으로 대하며 복음을 전함으로 한 명이라도 구원하려고 힘써야 한다.

[14-15절]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께 나아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물었다. 율법에 의하면, 7월 10일 속죄일은 자기 영혼을 괴롭게 하는 금식일이다. 또 바리새인들은 한 주간에 이틀씩 금식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결혼 비유로 대답하셨다. 그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시고 제자들을 혼인집의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제자들이 신랑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동안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러므로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고 기뻐할 때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정죄되어 십자가에 못박히게 내어준 바 되실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 주의 제자들은 금식할 것이다. 금식은 특별한 때, 비상한 때에 하는 것이지, 아무 때나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신약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16-17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주께서는 금식을 폐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율법 규정이나 관습대로 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고 본다.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에 비유된 복음은 율법 형식에 얽매일 수 없고 새 형식을 필요로 했다. 금식도 복음의 자유 안에서 행해져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하였다(갈 5:1). 야고보는 복음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표현했다(약 1:25).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바로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친히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죄는 세상과 인류의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이었고 그러므로 죄사함은 세상과 인류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속을 이루셨고 지금도 그 일을 하신다.

둘째로, 죄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와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구원의 복음이다.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인류는 불행과 사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사도행전 13:38-39,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이미 믿는 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직 믿지 않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셋째로, 신약 성도는 복음의 자유와 참된 평안과 기쁨 안에서 살아야 하고 이제는 죄를 멀리하고 의와 선만 행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속 사역으로 우리를 죄의 공포와 형벌과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했다(갈 5:1).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표현했다(약 1:25).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그 은혜 안에서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멍에 아래서가 아니고 의와 자유 안에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만 섬기며 의와 선과 사랑을 힘써 실천해야 한다.

18-38절, 소녀를 살리심, 혈루증, 소경, 벙어리를 고치심

[18-19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마가복음에 보면, 그는 회당장 야이로이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딸은 열두 살 난 외동딸이었다. 본문에는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라고 말했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처음에 회당장이 예수께 와서 간구할 때는 그 딸이 아파서 죽어가려고 할 때이었고 예수께서 고쳐주려 가시다가 다시 집에서 통지가 오기를 딸이 죽었다고 하였다. 마가와 누가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내용을 마태는 간략히 증거하였다. 이 직원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했다. 자기 딸이 죽으려 할 때에도 예수께서 자기 딸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고 딸이 죽었다는 통지를 받고서도 여전히 예수께서 그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와 간구했다. 믿는 자는 기도하고 믿음의 기도는 응답을 받을 것이다.

[20-21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혈루증은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출혈병이다. 이 병을 열두 해나 앓았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는지! 마가복음에는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기록되어 있다(막 5:26).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이런 믿음이 생긴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22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여기에 ‘구원’은 육신의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즉 병의 치료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료하셨고,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행위이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주의 말씀은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치를 보인다(행 16:31).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23-26절]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잔다’는 말씀은 죽음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죽은 자는 자는 자와 겉모습이 비슷하고 부활의 때에 깨어날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가 “달리다 쿰”(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러자 그 소녀는 일어났다. 그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이셨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 사람이셨다.

[27-28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앞을 못 보는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 속에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시라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많은 건강한 자들이 교만하고 무지하여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인정치 않았을 때, 이 소경들에게는 겸손한 마음과 깨닫는 마음이 있었고 예수께서 그들을 고쳐주실 수 있음을 믿고 간청하였다. 주님께 구하는 자가 무엇을 얻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지 않는다면, 아무도 주께 구할 수 없을 것이다.

[29-31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종종 병자들을 만지시면서 고쳐주셨다(눅 4:40). 그것은 병자들에 대한 그의 관심과 긍휼과 사랑을 나타낸다. 그는 또 그들에게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들이 밝아졌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으셨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영광이 있다. 참으로 그는, 문제가 많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신 것은 사람들이 단지 그를 병 고치는 자로 오해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32-34절]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자기의 생각과 마음과 뜻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없는 그 벙어리는 얼마나 답답한 삶을 살아왔겠는가? 그러나 그는 주 예수께 와서 귀신이 쫓겨나고 입이 열려 말을 하였다. 무리들은 기이히 여겨 말하였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도다.”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은 특별하셨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달리, 그는 모든 종류의 병들을, 즉각적으로, 또 완전하게 치료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하신 일을 마귀의 일로 돌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신 일을 마귀의 일로 돌리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다. 그들은 무지하고 악하였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바로 아는 지식을 주셨고, 그에게 합당한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그에게 돌리게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앞에서는 못 고칠 병이 없었다. 나병도, 중풍병도, 열병도, 소경도, 귀머거리도, 벙어리도 다 고침을 받았다. 귀신 들린 것도 고침 받았다. 심지어 죽은 자도 살아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어려운 문제들을 낱낱이 그에게 아뢰어야 한다.

[35-38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사도 마태는 4:23에 이어 본문에서 다시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말했다. 첫째는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이고,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고, 셋째는 사람들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신 것이다.

또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방황함을 보시고 동정하시며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영혼 구원의 전도는 추수와 같다(요 4:35). 주께서는 추수할 것이 많으나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은 많은 것 같으나, 열심 있는 성도들과 헌신한 전도자들은 많지 않고(빌 2:21-22) 바른 지식과 인격을 갖춘 일꾼들은 더욱 더 적다. 주께서는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추수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일이다. 그는 친히 추수할 일꾼들을 만세 전에 작정하시고 일으키시고 세우신다. 우리는 전도의 일을 위해 또 전도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죽은 소녀를 살려주셨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을 고쳐주셨고 두 소경을 고쳐주셨고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셨고 그 외에도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이런 기적의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이다.

둘째로, 사람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본문은 혈루병 여인이나 두 소경이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이 말씀은 구원의 이치를 보인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얻는다. 어떤 큰 죄인이라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면 즉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주께서 그의 속죄사역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교회는 성경강해와 전도와 심방의 일을 힘써야 한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하신 일들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병약한 자들을 심방하고 돌아보아야 한다. 목사들은 성경에 정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가르쳐야 하고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전해야 하고 병약한 자들을 심방해야 한다. 교인들도 그 일들을 위해 기도하고 동참하고 협력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의 일꾼들을 보내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한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들, 구원의 복음과 성경의 바른 교리와 생활 교훈을 가감 없이 전하고 가르칠 자들이 많이 필요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일이다. 교회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그런 헌신자들을 후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