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탄생지, 아테네의 '프닉스']
그리스 폴리스들 심각한 위기 - 빈익빈 부익부로 공동체 흔들려
유혈 투쟁 뒤엔 참주정치 만연… 안정 구실로 독재자가 권력 장악
솔론의 혁명적인 개혁 정책 - 상인 출신, 현인으로 추앙받아
전권 위임받자 전광석화식 개혁, 부채 탕감·토지 재분배로 안정
다수의 정치 참여 기틀 마련 - 시민들은 프닉스에서 민회 열어
인류 최초의 민주주의 실현… 대업 이룬 뒤 스스로 물러나
그리스 아테네는 서구 문명의 모태(母胎)다. 그 절정에 아크로폴리스가 있다. 누가 감히 이 신성한 언덕의 가치에 시비를 걸 수 있을까? 나 역시 아크로폴리스 앞에서는 언제나 옷깃을 여민다. 그러나 아크로폴리스만 중요하다거나 아크로폴리스만 보면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테네에는 그만큼 가치를 가진 유적이 더 있다. 그중 하나가 프닉스(Pnyx)다. 프닉스는 아크로폴리스, 아고라와 더불어 삼각형의 한 꼭짓점을 이룬다. 지리적으로도, 가치적으로도 그렇다. 프닉스는 아크로폴리스, 아고라와 인접한 숲 한가운데 있다. 탁 트인 너른 공터다. 고요하고 여유롭다.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를 바삐 오가는 수많은 관광객에게 이곳은 잊힌 공간이다. 씁쓸하다. 한편으론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비밀 장소를 알고 있다는 뿌듯함에 들뜬다. 프닉스를 건너뛴 아테네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테네가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 엄청난 위상, 세상 사람들을 아테네로 불러들이는 그 황홀한 마력은 모두 이곳에서 비롯됐다. 먼 옛날 아테네 시민은 이곳 프닉스에 모여 민회를 열었다. 국가 대소사를 자기 손으로 직접 결정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한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사람들은 말한다. 아테네가 민주주의의 요람이라고. 그렇다면 프닉스는 어떤 곳인가? 민주주의 탄생지다. 언제나 궁금했다. 2500년도 더 전에 아테네인들은 어떻게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만들고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고 일반적이라는 착각 속에서, 아니 무지 속에서 살아간다. 사실은 정반대다.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작위적인 제도다. 그리고 언제나 희귀한 현상이었다. 심지어 오늘날조차 보편적 제도가 아니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그 옛날, 아테네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답은 위대한 한 선구자에게 있었다. 그의 이름은 솔론이었다.
심각한 위기에 처한 아테네
기원전 6세기 초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세계의 폴리스들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폴리스 내부의 빈익빈 부익부가 너무나 심해져 공동체의 안정적 발전과 번영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대부분의 폴리스는 사태가 최악 상황으로 내몰릴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득권층의 반대가 격렬했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 상황에 불만을 품은 세력과 현 상황을 유지하려는 세력 사이에 투쟁이 되풀이됐다. 그렇게 유혈이 낭자해지면 질서와 안정을 구실로 뛰어난 독재자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는 참주(僭主) 정치가 유행했다.
아테네도 예외가 아니었다. 척박하기로 악명 높은 아티카 땅에서는 농업으로 생계를 잇는다는 것 자체가 도박이었다. 소농들은 언제나 가난에 시달렸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빚을 져야 했다. 빚이 쌓이면 땅을 빼앗겼고, 그다음에는 자기 몸을 저당 잡혔다. 끝내 빚을 갚지 못한 수많은 농민이 부자의 노예가 되거나 외국으로 팔려나갔다. 빚쟁이의 등쌀에 못 이겨 자식을 팔거나 외국으로 도주하는 시민이 속출했다. 부채 탕감과 토지 재분배를 요구하는 시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힘을 결집해갔다. 차라리 유능한 참주에게 나라를 맡겨 안정과 질서를 회복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아테네는 말 그대로 폭발 직전이었다. 보수적인 아테네 귀족들도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할 정도였다. 문제는 누구에게 아테네의 미래를 맡길 것이냐였다. 모두의 이목이 솔론에게 집중됐다.
민주주의의 방향을 제시한 솔론
솔론(Solon·기원전 640~560)은 유명한 상인이었다. 아테네 왕족의 후손이었으나 아버지 대에 이르러 몰락했다. 자기 힘으로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솔론은 상인의 길을 선택했다. 밥벌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돌며 경험과 지식을 쌓고자 했기 때문이다. 선택은 탁월했다. 솔론은 상인으로도 성공했고, 그리스 세계를 대표하는 일곱 현인에 꼽힐 정도로 지혜도 인정받았다. 문학적 소양도 탁월했던 그는 시인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솔론의 시는 사회 정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 삶의 주체로서 개인의 탁월함을 노래했다. 한마디로 솔론은 아테네 모든 계급의 지지를 받을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역사에는 아주 드물게 어떤 상황에 안성맞춤인 리더가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아테네와 솔론이 그랬다.
기원전 594년, 아테네는 솔론에게 개혁의 전권(全權)을 위임했다. 개혁은 전광석화로 진행됐다. 빚 때문에 노예로 전락한 시민은 해방했고, 시민의 과도한 부채는 탕감하고, 잃어버린 토지는 되찾아줬다. 가혹한 법은 폐지했다. 정치 개혁은 더욱 혁명적이었다. 당시 아테네는 1년 임기의 아르콘이 통치하고 있었다. 아르콘 출마 자격은 귀족에게만 주어졌고, 일정 자산을 갖춘 시민의 모임인 민회에서 선출했다. 한마디로 아테네의 정치는 소수 귀족이 주도하고 돈 많은 일부 시민이 보조하는 형태였다. 솔론은 이 틀을 깼다. 아르콘 출마 자격 기준을 혈통에서 재산으로 대체했다. 귀족과 더불어 상인에게도 최고 권력에 도전할 기회를 준 것이다. 민회 참가 자격도 아테네 시민 전체로 확대했다. 솔론의 이런 조치야말로 아테네가 장차 민주주의 혁명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제도 개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언덕
이 모든 대업을 이른 후 솔론은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10년을 목표로 외유에 나섰다. 대부분 정치인이 한번 잡은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선택이었다. 괜히 현인(賢人)으로 칭송받은 것이 아니었다.
솔론은 그렇게 아테네를 죽음 직전에서 구해냈다. 그가 없었다면 아테네는 다른 폴리스들과 마찬가지로 피의 난장(亂場)을 계속하다 자멸했을 것이다. 솔론 덕분에 아테네는 최악 상황을 면했다. 농민들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정치적으로도 민회에 참여할 권한을 획득했다. 상인들은 최고 권력을 넘볼 수 있게 됐다. 귀족들은 공멸 위험에서 벗어나 여전히 아테네 상류층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됐다. 이렇게 솔론은 과감하게 아테네가 민주주의로 나아갈 초석을 놓고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어떻게 이 위대한 업적을 일궈낼 수 있었을까? 사람을 사랑하고 정의를 믿었기 때문이다. 불의와 탐욕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600여 년이 지났다. 이제 프닉스는 잊힌 언덕일 뿐이다. 그러나 인생에 한 번은 찾아볼 만한 가치가 넘치는 곳이다. 만약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면 봄이 좋다. 4월이 오면 이곳에는 아름다운 들꽃이 가득 핀다. 비록 보잘것없는 들꽃일진 모르나 수만 송이가 모여 화려한 융단 한 폭을 이룬다. 그 어떤 화려한 꽃보다 아름답고 향기롭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참모습 아닐까? 이름 없는 다수의 합(合)이 뛰어난 소수보다 아름답다는 생각. 이름 없는 시민이 모여 그 어떤 철인(哲人)보다도 현명한 결정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생각과 믿음이 태어난 곳. 이곳은 프닉스다.
[아테네 도자기 유물 많은 건 솔론 덕분]
척박한 농지 고려해 경제개혁… 올리브·포도 등 특작물 심어
도자기에 올리브유 담아 수출, 농업 대신 교역 중심 사회로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많은 박물관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고대 아테네의 각종 도자기다. 왜 그럴까? 솔론 때문이다. 그는 노예로 전락한 시민들을 해방하고, 농민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테네가 자리 잡은 아티카 반도의 척박한 대지를 고려하면 농민들이 다시 빚지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솔론은 이런 사태를 막고자 경제 구조도 개혁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곡물 재배를 포기하고 척박한 토양에서 잘 자라는 올리브와 포도 등 특수 작물 생산에 주력했다. 특히 올리브에서 추출한 올리브유(油) 생산과 수출을 장려했다. 대신 올리브유를 팔아 번 돈으로 흑해 주변 곡창 지대에서 곡물을 수입했다. 도자기는 올리브유를 운반하고 저장하는 데 필수적인 용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