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공동서신 · 계시록 강해-1

요한계시록 20-22장[천년왕국, 새 예루살렘] /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6. 13:03

요한계시록 차례

요한계시록 20장 (90 - 95)

강해 90 : 천 년간의 사탄의 결박(계20:1-3)

강해 91 : 첫째부활에 참여할 자(계20:4-6)

강해 92 : 천년왕국의 생활(계20:6)

강해 93 : 천년왕국의 종국과 사탄의 심판(계20:7-10)

강해 94 : 흰 보좌 심판대(계20:11-15)


요한계시록 21장 (95 - 98)

강해 95 :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계21:1-4)

강해 96 : 천국을 기업으로 받지 못할 자(계21:5-8)

강해 97 : 새 예루살렘의 구조(계21:9-21)

강해 98 :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계21:22-27)


요한계시록 22장 (99 - 101)

강해 99 : 생명수의 강(계22:1-5)

강해 100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계22:6-16)

강해 101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17-21)

=================================================

요한계시록 20장 (90 - 95)

◆ 밤중소리 02-02 | VIEW : 2,048

강해 90 : 천 년간의 사탄의 결박(계20:1-3)

강해 91 : 첫째부활에 참여할 자(계20:4-6)

강해 92 : 천년왕국의 생활(계20:6)

강해 93 : 천년왕국의 종국과 사탄의 심판(계20:7-10)

강해 94 : 흰 보좌 심판대(계20:11-15)


강해 90 : 천 년간의 사탄의 결박

(계20:1-3)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첫째부활’ ‘천년왕국’ ‘흰 보좌 심판’에 대한 말씀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짧게 전개되지만 이 모든 계시는 종말론 해석에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가지는 문제들입니다. 다만 여기서 천년왕국이란 분명한 언급이 없고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는 말씀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천년왕국을 해석하는 일에 여러 가지 견해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 천년설’ 등이 그것입니다. 이 문제를 천년기설千年期說이라고 합니다.


1. 천년기설에 대한 신학적 견해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문제에 있어서 어떤 천년기설을 취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요한계시록 뿐 아니라 성경해석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이 천년 기설에 대한 성경적인 올바른 견해를 갖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 먼저 후천년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교회의 경우, 이 후 천년설을 취하고 있는 신학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별로 문제시 될 것이 없습니다. 후천년설이란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이전에 이 땅위에 천년왕국이 먼저 도래한다고 하는 신학적 견해인 것입니다.

(2) 다음에 무천년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천년설이란 문자 그대로 천년왕국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적 견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전후하여 그 이전에나 이후에나 천년왕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그 대신 이들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신약시대 전 기간을 천년으로 해석하고 교회시대를 천년왕국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무천년설에는 많은 모순과 성경해석에 불합리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결국 오래지 않아 사장死藏될 것입니다.

그 첫째의 모순은 마귀의 일천년간의 무저갱에의 결박을 신약시대의 마귀의 활동제약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무천년설을 주장하다 보면 첫째부활에 대한 해석이 난관에 부닥치게 됩니다. 그리스도 재림 시에 첫째부활이 있으면 언제인가 다른 부활이 또 있어야 하는데 무천년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그런 부활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자들) 첫째부활을 죽은 자의 살아나는 사건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중생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성경에 가장 가까운 해석이라고 볼 수 있는 ‘전천년설’ 의 경우를 보면 이 경우에도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못하고 굉장히 다양한 해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전천설에 대하여 ‘역사적 전 천년설’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세대주의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대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기 때문에 그들의 해석 역시 전천년설이기는 하지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2. 붉은 용의 결박과 무저갱

우리는 요한계시록 20장이 어느 시점에서 성취될 계시인가에 대한 그 시기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계시록19장에서 주님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잡아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남은 존재는 땅으로 내어 쫓긴 붉은 용뿐입니다(계12:7-9). 용은 영적 존재이므로 또 다른 조치가 필요했기 때문에 아마겟돈 전쟁 후에 천사로 하여금 결박케 하여 무저갱에 일천년간 던져 넣게 되는 것입니다.

(2) 무저갱이란 아부쏘스(ἄβυσσος)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深淵이란 뜻입니다. 이곳은 원래가 악령들이 갇혀 있는 악령들의 감옥입니다. 요한계시록 9장에서 이 무저갱 속에 갇혀 있었던 악령들이 세상으로 올라오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눅8:31절에서 무저갱으로 들어가기를 싫어하는 군대 귀신의 간구가 나옵니다. 이 악령들이 첫째 화시기에 지상으로 올라와 그 이마에 인 맞지 아니한 자들에 대한 핍박이 있게 되는데 이 핍박을 첫째 화라고 부릅니다.

(3) 사탄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는 이유는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왜 이들을 무저갱 속에 결박한 채 가두어 두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사용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천년왕국이 끝날 즈음, 만국을 미혹하게 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서 태어난 2세들을 미혹하게 하므로 택자와 불택자를 갈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하나의 완전한 문장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 각 곳에 널려 있는 종말적인 사건들은 다른 사건과 연계된 단편적인 사건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곳의 종말적 사건을 가지고 종말론 전반적인 면을 해석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런 단편적 사건들을 한곳에 모아 조직적으로 말씀해 주신 계시가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얼마나 세밀하고 완벽한지 감해도 안 되고 더해도 안 된다는 경종을 주고 있습니다. 천년왕국은 상징적으로 만들어 놓은 공상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신기루처럼 가상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얼마 후에 우리들 앞에 성큼 다가올 이런 사실들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강해 91 : 첫째부활에 참여할 자

(계20:4-6)

본문에는 첫째부활 자들에 대한 범위와 그들이 받을 축복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종말론을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부활에 관한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종말론의 결론이 이 부활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첫째부활에 관한 문제는 부활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대한 연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1. 신학의 오류에서 나온 두 가지 모순

신학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일은 어떤 성경적 문제에 대한 일방적 결론입니다. 가령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신학은 그들의 부활관이 무천년설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석하면 당장에 무천년설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에 나오는 첫째부활 자들에 대해 말씀을 액면대로 받아드리면 무천년설이 설립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천년 주의자들은 부득불 첫째부활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첫째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중생을 의미하는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역사적 전천년설’에서는 부활을 ‘첫째부활’과 ‘둘째부활’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첫째부활이란 성도들의 부활이고 둘째부활은 불신자들의 부활이라고 정립해 놓고 있습니다. 이들의 신학적인 부활관을 보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모든 성도들이 부활한 몸으로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지상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홀연히 변화 받아 공중에서 이들과 합세합니다. 그리고 이 성도의 부활과 변화를 첫째부활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상이건 지상이건 부활되지 못한 성도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해결할 수 없는 큰 신학적 문제가 생깁니다. 천년왕국에서는 누가 살아가며 천년왕국은 왜 존재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2. 성경적인 첫째부활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첫째 부활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1) 그러면 본문에서 누구를 가리켜 첫째 부활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4절과 5절에서 첫째부활자의 범위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부활이라.”

우리는 위에서 첫째부활 자를 두 구분으로 나누인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첫 번째 대상인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들’에 대해서는 순교자들이라고 말하면서도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해답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둘을 잇는 ‘또’라고 하는 접족사는 둘 다 같은 첫째 부활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임을 의미해 줍니다. 그리고 ‘이는 첫째부활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는’이라고 한 말은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들’과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을 함께 지칭한 말입니다. 우리는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어떻게 순교자로 볼 수 있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 다음에 나오는 ‘살아서’란 말에서 순교자들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 ‘살아서’란 말은 원어로 에제산(ἔζησαν)으로 ‘살아나서’란 뜻입니다.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들’과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라고 한 두 종류의 첫째부활 자들을 한데 묶어서 ‘살아서’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이 곧 첫째부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란 누구며 왜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들’로 나오는 순교자들과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문제는 계6:11절에서 쉽게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제단 아래에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무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들이 첫 번째 언급해 주신 순교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께 외치기를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하는 간구에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나님께 간구한 순교자 외에 다른 또 한 종류의 순교자가 있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들 순교자가 11장에서 순교하는 두 증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계20:4절에서 두 종류의 순교자를 보았으며 그들이 첫째부활자로 살아나서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20:5절에 나오는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고 하신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순교자들의 첫째부활에 참여할 수 없었던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시기를 가리킨 것입니다.


결론 :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고 했습니다. 천년왕국에는 많은 백성들이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성도들이 그 곳에서 천년 동안 살아갑니다. 또 그들이 천 년간 생산할 후손들도 엄청나게 많을 것입니다. 그 곳에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특별한 성도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들이 첫째 부활자인 순교자들인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영광이 이처럼 크다는 사실을 알고 주를 위해 가장 영광스러운 순교의 자리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강해 92 : 천년왕국의 생활

(계20:6)

천년왕국은 천국과 구별된 다른 또 하나의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수 있는 소망의 나라인 것이 아니라 인류의 종말,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만 약속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상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이 나라를 대망해 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고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린 연유도 알고 보면 이 같은 천년왕국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천년왕국은 어떻게 세워지는가?

천년왕국으로 언급된 성경구절은 없지만 천년왕국에 대한 확실한 약속은 성경에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단2:44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 시리니..” 단7:22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

슥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고전15: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하시리니.”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계20:6 “ ...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1) 천년왕국은 분명히 새로운 세계입니다. 기존의 세계, 곧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는 천년왕국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지상의 모든 것들은 마지막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일곱 번째 대접심판으로 불로 사름이 되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이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2) 천년왕국은 하나님에 의하여 새롭게 이 지상에 창조되는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이 지구는 마지막 일곱째 대접 심판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셋째 날 창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 다시 ‘뭍이 드러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 땅은 새로운 형질이 이뤄질 것입니다. 그 때 지구의 중심부에 있는 맨틀에 소장된 많은 보석과 금은보화와 아름다운 진귀한 보석들이 땅의 돌처럼 솟아나 온 세상에 가득 찰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이처럼 예비하신 후, 하늘 공중으로 이끌어 올리운 그의 백성들을 데리고 이 나라에 내려와 그의 왕국을 이루실 것입니다.

(4) 이 나라의 백성은 셋으로 구분될 것입니다. 하나는 이 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실 이 나라의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음에 왕이신 예수님을 도와 그와 함께 왕 노릇할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첫째부활자로 순교자들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계20:6절에서 ‘이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천년왕국에서 살아갈 백성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의 재림 시 공중으로 이끌려 올려 간 지상의 생존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부활하거나 변화되는 몸으로 이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2. 천년왕국에서의 생활

천년왕국의 생활은 매우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천년왕국이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다르다면 그 안에서의 생활도 다를 것입니다.

(1) 이 세계에는 사망이나 저주나 질병이 없습니다. 허물과 죄악도 끝납니다(단9:24). 적어도 천 년간이란 기간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마귀가 천년 동안 무저갱에 결박된 채 갇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죄가 없으면 사망도 없습니다.

(2) 이 세계에서는 신체적 장애나 결함이 없는 온전한 육신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질병이나 노쇠나 고통은 모두 죄의 저주로 말미암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는 이미 용서받았고 사탄이 사라지고 죄가 없어진 이 세계에는 이런 모든 저주들이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3)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은 천년 동안 죽음이 없게 되며 자손의 자손을 보게 되며 공해가 전혀 없는 세상에서 인생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과 행복을 최대한도로 누릴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지금 참으로 이 같은 복을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역사적 시점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대의 그 수많은 성도들이 오늘 우리가 누리기를 원하는 이 영광의 날을 소망하며 순교적인 삶을 살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년왕국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약속된 소망을 바라보시고 주님의 신부가 될 신부의 단장을 게을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강해 93 : 천년왕국의 종국과 사탄의 심판

(계20:7-10)

천년왕국에도 인류의 마지막이 있습니다. ‘천년 동안 왕 노릇하리라’는 말이 천년 후에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의미해 줍니다. 천년왕국의 세계는 미혹이 없고 죄악이 없고 질병도 없고 사망도 없으며 저주도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 다시 마귀가 등장합니다. 천 년간 무저갱에 갇혔던 마귀가 잠깐 동안 풀려나는 것입니다. 마귀가 침투하자 다시 이 세상에 미혹이 들어오고 죄악이 들어오고 그리스도에 대한 반역이 일어납니다. 이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되며 천년왕국의 종국이 오게 됩니다.


1. 천년왕국의 끝에 일어나는 일

7절에서 ‘천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우리는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사탄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에 의해 큰 쇠사슬에 결박당하여 일천년 동안 무저갱에 던져 잠그는 사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천년이 차매 하나님께서 마귀를 무저갱에서 잠시 동안 석방시켜 땅의 사방의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도록 하락하셨다고 했습니다.

(2) 우리는 여기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한다’는 말에서 곡과 마곡이란 어느 특정한 지리적인 지역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땅의 사방 백성들 중 사탄에게 미혹 받은 자들을 곡과 마곡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곡과 마곡은 천년왕국의 사방의 백성들 중 사탄에게 미혹 받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곡과 마곡은 겔38장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북방지역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곡과 마곡이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사주를 받은 무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3) 붉은 용이 무저갱에서 놓임 받게 되자 이 자는 즉시 천년왕국으로 들어와 미혹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마귀의 미혹에 사방 백성들 중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게 되는데 이들이 곡과 마곡을 이루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에덴동산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에덴에서 사탄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죄악이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만을 사랑했으며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타락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에 마귀가 등장했습니다. 그토록 무죄한 사회에서 살아온 그들이었지만 시험하는 자, 이 마귀의 등장으로 그만 미혹을 받게 된 것입니다.

천년왕국도 이처럼 회복된 에덴동산으로 모든 것이 완전했습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왕이신 그리스도를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등장으로 미혹을 받은 무리가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미혹 받을 무리는 천년왕국에서 태어난 2세에 국한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 하면 공중휴거로 천년왕국에 들어간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이미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중생한 사람으로 멸망 받을 수 없는 영생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

천년왕국에 살아가는 백성들도 죄가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 천년 간 살아온 그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에 올라가는 최종적인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1) 천년왕국에서 태어난 2세들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태어나 살아온 축복된 자녀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한 것은 아닙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 없이 살아갈 동안에는 그에게 죄가 없었고 타락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영생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간 것은 아닙니다. 그가 불순종하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위험요소를 가지고 살아간 것입니다. 천년왕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2) 그뿐 아니라 천년왕국은 거대하고 인류의 번성이 왕성했던 사회입니다. 인류가 살아가는 곳에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풀어놓아 천년왕국 백성들을 미혹케 하심으로 택자와 불택자를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무저갱에서 석방된 붉은 용은 이제 이들 불택자들을 미혹하여 일단의 곡과 마곡의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여 지면에 널리 퍼져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진 뿐 아니라 사랑하시는 성까지 포위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랑하시는 성’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는 첫째부활 자들이 거처하는 성입니다.

(3) 그러나 이 싸움은 곧 끝장이 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곡과 마곡에 속한 무리는 한 번도 싸워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폭우처럼 쏟아 부으시는 불로 인하여 당장에 그 자리에서 소멸해 버리는 것입니다.


결론 : 이로써 천년왕국은 그 막을 모두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살아서 그 곳에 들어간 성도들은 한 명의 누락자도 없이 모두 그 때 홀연히 변화를 받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하늘의 흰 보좌 심판대 앞을 거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지상에서 천년왕국으로 옮겨진 성도들은 이미 중생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탄의 미혹을 받지 않고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복된 이 무리들 중에 들어갈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강해 94 : 흰 보좌 심판대

(계20:11-15)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천년왕국 시대가 끝나면 

눈에 보이는 우주의 모든 만상은 사라지고 

곧 하늘에 크고 흰 보좌가 펼쳐지는데 

이곳에서 산 자와 죽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시작됩니다. 

흰 보좌 심판은 인류의 마지막 심판을 의미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이 이곳에서 이 때 실시됩니다. 

산 자란 천년왕국 마지막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 받은 성도들을 의미하며 

죽은 자란 무덤에서 일제히 부활할 부활 자들을 가리킵니다.


1. 흰 보좌 심판대

흰 보좌 심판대란 인류의 마지막 심판의 장소를 말하는데 

그 장소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1) 사도 요한은 이 흰 보좌에 대하여 

다만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장소는 하나님이 인류의 심판을 위해 펼쳐 놓으신 특별한 장소로 

하나님이 심판 주로 앉아 계시기 때문에 

흰 보좌란 이름이 부쳐졌을 것입니다.


(2)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간 데 없더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과 

그리고 우리들 머리 위에 넓고 높게 펼쳐진 저 하늘은 

실인즉 그 운명에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3) 이때에 인류의 마지막 대부활이 일어납니다. 

부활에 관한 문제는 교리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무천년설과 전천년설의 신학적 견해가 다릅니다. 

여기서 부활교리에 관한 큰 혼선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에 관한 심각한 문제점은 

무천년설이 아니라 전천년설에 있습니다. 

이 설에서는 신자와 불신자의 부활의 시기가 천 년간의 간격이 있는데 

이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부활관은 전천년설의 교리를 성경적인 부활관에 맞춘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부활에 관한 문제를 

전천년설에 억지로 맞추었다는 데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첫째부활 자들은 문장 그대로 순교자들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변화사건은 

천년왕국이 끝나 흰 보좌 심판대로 옮길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신자들은 낙원에서, 불신자들은 음부에서, 영적으로 머물러 있다가 

천년왕국이 끝나 흰 보좌 심판 시에 일시에 부활하게 되는데 

신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불신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간단히 설명했지만 이 부활관이 성경적인 부활관입니다.


(4) 12절에서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3절에서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준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표현은 인간들이 어떤 모양과 어떤 형태로 죽었건, 

지구의 체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건 간에 

죽은 자들의 부활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2. 자기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흰 보좌’는 광대한 인류심판의 광장입니다. 

이 흰 보좌에는 두 종류의 책들이 펴져 있습니다.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고 했습니다. 

‘펴 있는 책들’은 심판 받을 자들의 명단과 

그들의 심판 받을 행위가 기록된 책입니다. 

불신자들은 이 책에 기록된 대로 각기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이 때 생명의 부활로 살아나 흰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냉수 한 그릇의 상’도 이곳에서 상급으로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는데 

이 때 이 상이 공평하게 베풀어질 것입니다.

한편 왼편에 있는 자들이 설 곳은 흰 보좌 중에 왼편쪽입니다. 

이곳은 지옥에 보내질 악인들의 심판의 장소입니다. 

이곳에 선 자들은 자기들이 행한 대로 기록된 행위책에 따라 

엄격하고 준엄하게 신문訊問을 받을 것이며 

그것에 상응한 심판의 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이들은 심판의 부활로 살아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도 그들의 행한 죄과에 따라 받을 심판의 종류가 

제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은 형벌의 장소지만 그 곳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모두 똑같은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

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심판이 끝나면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게 된다고 했습니다. 

천국에는 사망과 음부가 필요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것들을 둘째 사망 속에 던져 넣으십니다.


결론 : 인류의 모든 역사는 완전히 끝났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류사는 

죄와 사망과 눈물과 질병과 고통 속에서 얼룩져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어 

우리를 그 저주 가운데서 건져내셨습니다. 

흰 보좌 심판은 바로 그 마지막 결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대적자 사탄을 쫓는 무리에게 대한 심판은 불가피했습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흰 보좌에 있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의 상급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보람 있는 남은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95 - 98)

◆ 밤중소리 02-02 | VIEW : 608

강해 95 :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계21:1-4)

강해 96 : 천국을 기업으로 받지 못할 자(계21:5-8)

강해 97 : 새 예루살렘의 구조(계21:9-21)

강해 98 :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계21:22-27)


강해 95 :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계21:1-4)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천년왕국까지의 모든 계시를 배웠습니다. 천년왕국까지는 이 땅에서의 세계였습니다. 이 땅에서의 세계는 육신으로 살아갑니다. 비록 천년왕국일지라도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여 왕 노릇하실 예수님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권을 가지고 왕 노릇할 순교자들인 첫째부활자 외에는 육을 가진 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천년왕국의 소멸과 함께 이런 지상의 세계는 영원히 막을 내리고 이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우리가 경주하는 경주장의 최종 도착지이며 이곳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인간 역사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요한계시록21장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나라를 보면서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우리의 영원한 본향입니다. 천년왕국까지의 나그네 생활을 마감하고 이제 영원한 안식처로 들어가 살아갈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1.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이제 천년왕국도 지나갔습니다. 보이는 세계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1)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이 천국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사야65:17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오해한 나머지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천년왕국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2) 이 새로운 세계의 모습에 대하여 요한은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들 선생이 어디론가 떠나시는 일에 불안을 느끼며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위로해 주신 것입니다(요14:2-3). 이처럼 예수님이 먼저 가셔서 예비하신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그 나라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간 곳

이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여기서 요한이 밝힌 ‘처음 것들’이란 인간들이 육신으로 살아 온 보이는 세계와 육신적인 모든 생활을 포함한 말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 신비에 쌓인 우주의 모든 존재도, 인간의 생활에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 죽은 자들은 부활하고 살아 있는 자들은 변화 받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보이는 이 처음 것들이 필요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2) 보좌에서 큰 음성이 들려오기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장막이란 사람이 거처하는 집을 의미한 말인데 하나님의 장막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하나님의 보좌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거처가 다른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이란 사실을 밝혀 주는 말씀입니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의 성도들의 삶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친히 뵙지 못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뵈오며 그 하나님을 영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새로운 가족관계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4) 이 때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신다’고 했습니다. 눈물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 흘리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만약 천국에서조차 눈물을 흘린다면 천국은 완벽한 축복의 동산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모든 눈물을 씻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위로이시며 이런 것들이 또한 주님을 사랑한 증거가 되어 하늘에서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5) 이 나라에 대해서 4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에게 다시는 사망이 없습니다. 천년왕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사망이란 이미 지나간 일들입니다. 사망은 죄에서 나왔습니다. 이제 죄는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죄의 원인자이며 제공자인 사탄은 영원한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를 범할 수 없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들에게는 이 같은 천국의 약속이 분명히 주어져 있습니다. 이 나라를 바라 볼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어려움을 소망 가운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나라는 환상의 나라도 아니며 신기루 같은 꿈의 나라도 아닙니다. 우리의 손이 미치지 못할 공상의 나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확실한 약속으로 보장하신 우리의 본향이며 이 나라의 상속을 위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를 그의 피로 구속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


강해 96 : 천국을 기업으로 받지 못할 자

(계21:5-8)

천국의 유업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최대의 영광입니다. 만약에 이 유업이 약속되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유업에 확신을 가지고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한 것입니다(고전15:19).


1. 이기는 자가 유업으로 얻을 기업

(1) 5절 말씀에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기존의 세계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 지구 안에 있었던 모든 피조물들도 없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지나갔다는 말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으로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고 한 말씀은 만물에 대한 새로운 창조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롭게 전개되는 천국의 새로운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곳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로운 하늘의 세계입니다.

(2) 하나님은 또 요한에게 이르시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말’이라고 하신 말씀은 1절에서 4절까지의 천국의 약속에 대한 확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고 참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신실하고 참되다’고 하신 것은 언약에 대한 맹세의 형식으로 다짐하시는 확실한 약속입니다. 이것을 기록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 6절에서 하나님은 ‘이루었도다’고 말씀하시고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루었도다’고 하신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계시적 성취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종말에 될 일에 대한 계시를 사도 요한에게 전부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마지막으로 최종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유업의 땅인 하늘의 천국모습까지 보았습니다. 이 계시는 이미 계시 상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는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요한에게 보여 주신 계시처럼 하나의 가감도 없이 모두 그대로 성취될 것임을 말합니다.

(4) ‘이기는 자가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세상을 이기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일5:5).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신분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곳에서 ‘이긴 자’라고 하는 말의 정확한 뜻은 일곱 교회에서의 이기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2. 둘째 사망에 들어갈 자들

이기는 자의 반열에 들어가지 못하여 천국의 유업에서 탈락할 자들은 둘째 사망에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 ‘두려워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심판 날에 하나님을 두려워 할 자들은 둘째 사망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들은 주의 재림 시, 두려움으로 주님을 맞이할 자들인 것입니다.

(2)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한 자들입니다. 모든 인류가 둘째 사망에 들어갈 죄는 바로 이 항목의 죄악인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3:18).

(3) ‘흉악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살아 계심을 분명히 보여 주시고 감화와 감동을 주셨지만 이를 고의적으로 거역하고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자들입니다(히6:4-6).

(4) ‘살인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 자들입니다. 거짓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들도 영적 살인자들이기 때문에 이 무리 중에 들어갈 것입니다.

(5) ‘행음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영적 행음자들입니다. 음녀 교회는 행음자들의 총 본산입니다. 그에 속하여 활동하는 모든 자들도 행음자요 또한 이들과 손을 잡고 음행의 포도주를 마신 자들도 이들 행음자의 무리 중에 포함 될 것입니다.

(6) ‘점술가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귀신의 영으로 점을 치는 자들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미혹자들입니다.

(7) ‘우상 숭배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적그리스도와 그의 우상 앞에 경배하므로 짐승의 표를 받은 무리입니다.

(8)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진리의 복음을 거짓되게 전한 자들입니다. 이단의 무리가 이 중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천국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의 땅입니다. 그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으며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영원하며 그 아름다운 모습과 축복된 그 곳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입술이나 글로 족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1:3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땅을 바라보시면서 이 세상의 고난을 견디며 이 날을 소망으로 삼으며 이 땅에서 사람들이 바라는 헛된 영화나 영달에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나라에서 우리 주님이 손을 흔들며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그 손길이 보이지 않습니까?


강해 97 : 새 예루살렘의 구조

(계21:9-21)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요한을 향하여 ‘이리 오라’고 불렀습니다. 이 때 요한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높은 산으로 올려 갔습니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보기 위해 새로운 계시의 장소로 옮겨진 것입니다. 요한이 이곳에서 계시로 천국의 모습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요한에게 천국을 보여 주시기 위해 하늘에 있는 천국이 실제로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요한의 이런 모든 광경은 계시로 보았을 뿐입니다.


1.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영광

본문 10절과 11절에는 거룩한 성의 영광이 나옵니다. 그 성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꽉 찬 성임을 여러 가지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1) 9절에서 천사는 요한에게 이 새 예루살렘 성을 어린양의 아내라고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한 것입니다. 왜 이 성을 ‘어린양의 아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성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 하늘의 새 예루살렘은 가장 위대한 걸작품입니다. 이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계21:2).

(2) 21절에서 요한은 예루살렘 성에 대해 그 성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고 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온 성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충만하게 비취는 그런 성입니다. 요한은 이 같은 빛을 인간 언어의 최상의 표현으로 ‘지극히 귀한 보석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고 했습니다.

2.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의 구조

12절부터 계속해서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의 구조가 여러 가지 비유와 상징적 표현으로 계시되고 있습니다.

(1) ‘크고 높은 성곽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곽이란 성 둘레를 말하는데 이것은 새 예루살렘을 둘러서 있는 천국의 성벽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이 성곽을 척량했는데 144 규빗이라고 했습니다.

(2) 이 성곽엔 ‘열두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문들 위에는 이스라엘 자손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으며 문에 열두 천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열두 문, 열두 천사, 열두 지파의 이름 등, 열둘이란 수효가 들어간 이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육적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3) 14절에서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12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천국의 성곽은 열두 기초석으로 쌓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곽 위에는 12 사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12 지파나 12 사도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구별이 아닙니다. 그리고 구약교회나 신약교회의 구별도 아닙니다. 원래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없으며 육적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구별이 없습니다. 다만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의 백성들을 선택하셨을 뿐입니다.

그 기초석에 대하여 각색 보석으로 꾸민 기초석으로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담황옥, 비취옥, 청옥, 자정 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유의 보석들이 어떤 형태의 보석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 보석상들이 이름 부친 보석과는 천양지차가 있는 보석일 것입니다.

(4) 그런데 천사가 그 성곽을 척량했다고 했습니다. 16절에서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1만 2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고 했습니다. 1 스다디온은 약 180m 로 1만 2천 스다디온이란 약 2천Km의 정방형이 됩니다. 이것을 지구에 있는 한 도시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런던의 약 530만 배로 추정되는 면적이 된다고 어떤 신학자의 주석서에 쓰여 있습니다. 물론 이런 계산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측량 기구와 동일한지 그 여부에 대해서 알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한 계산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5) 21절에서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고 했습니다. 천사들이 서 있는 열두 문은 모두 진주로 다듬어진 문인데 문마다 한 진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의 길은 정금이라고 했습니다. 정금이라도 보통 정금인 것이 아니라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아직까지 천국의 기이하고 아름답고 놀라운 구조를 요한에게 보여 주신 계시를 통해서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아쉬운 마음으로 요한이 좀 더 자세하고 비디오로 찍어 놓은 필름처럼 표현해 주지 못했는지, 못내 아쉬워하면서 그 나라를 더욱 큰 소망 가운데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근래에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다녀왔다는 간증을 하지만 그들이 본 천국은 꿈에서 본 모습이며 하나의 환상에 지니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에 기만당하거나 그런 천국에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요한이 계시로 보고 우리에게 알려 주는 새 예루살렘이야말로 정말로 장차 우리가 들어가 살아갈 하늘의 처소요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의 참 모습임을 알고 그 나라에 대한 소망에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강해 98 :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

(계21:22-27)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가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나라 곧 새 예루살렘의 그 영광스러운 모습에 대하여 살펴본바 있습니다. 천국의 계시를 받은 요한은 그 영광스러움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여러 가지 보석의 경우를 예로 들어 너무나도 황홀하게 그려 놓았습니다. 요한은 이처럼 인간의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는 영광스러움에 황홀해 하면서 본문 21절 이하에서 그 거룩한 성 안에서 왕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자들에 대하여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새 예루살렘 성안의 성전

사도 요한은 22절에서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다’고 했 습니다.

(1) 요한이 새 예루살렘 성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보지 못한 이유는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없다는 말이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국에서의 생활은 그의 전 생애가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계속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그의 보좌가 성전의 구심점이 되어 성도들의 찬양과 경배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2) 그 성안에서는 해와 달의 비췸이 쓸데없다고 했습니다. 해와 달이 없어도 그 곳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등불이란 표현은 빛 그 자체, 곧 빛의 발원지를 말하는 것이지 어떤 빛의 조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양이 등불이 되신다는 말씀과 하나님의 영광이 비췬다는 말은 같은 뜻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도 그 같은 영광의 빛이 비췬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2. 거룩한 성을 왕래할 자들

24절에서 26절까지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거리를 활보할 자들에 대한 모습과 신분이 나옵니다.

(1)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고 했습니다. 이 성의 길은 그 길을 걷기에 합당한 자만이 걸을 수 있으며 이 성에는 그 곳에 거주하기에 알맞은 자만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땅의 왕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말입니까?

이들이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 순교 성도들인 것입니다. ‘이는 첫째 부활이라...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계20:4-6).

첫째부활자로 부활하여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할 순교자들은 그들의 순교의 그 영광을 그대로 가진 채 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 성에서도 왕 노릇 하는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계22:5). 26절에서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라고 했습니다. 만국의 영광과 존귀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영광과 존귀를 말하며 이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갈 것입니다.

(2)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곳에 다시 한 번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지 못할 자들의 신분이 나와 있습니다. 속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속되다는 말은 거룩하게 구별되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신약에 와서 속된 존재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성별 되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속된 자들인 것입니다.

가증한 일을 행한 자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모든 자들을 말합니다. 다음에 거짓말하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지 못한 거짓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는 다른 모든 종교의 경전을 전하는 자도 그것이 아무리 철학적이고 교육적이고 주옥같은 금언이라 해도 그 날에 거짓말하는 자들로 낙인이 찍혀 결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앞으로 반드시 이 같은 영광스러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들의 참 삶의 소망은 바로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가리켜 나그네, 혹은 외국인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곳에 들어가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지 못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결코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로 구원해 주셨으며 오직 그 나라에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라고 요한의 계시를 통해서 격려해 주시고 여러 가지 말씀으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99 - 101)

◆ 밤중소리 02-02 | VIEW : 725

강해 99 : 생명수의 강(계22:1-5)

강해 100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계22:6-16)

강해 101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17-21)


강해 99 : 생명수의 강

(계22:1-5)


우리는 오늘 드디어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인 22장에 이르렀습니다. 22장은 21장의 계속이자 요한계시록과 성경 전체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규모 있고 거룩하게 예비된 성인지 이 성을 바라본 요한은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1. 생명수의 강

사도 요한은 새 예루살렘의 계시에서 생명수의 강을 바라보고 놀랐습니다.

(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21장과 22장에서 계시되는 천국의 계시에서 바다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강물에 대하여 수정 같이 맑다고 했습니다. 이 강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강입니다. 이 강을 생명수의 강이라고 부르는 것은 새 예루살렘에 속한 모든 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입니다.

(2) 이 생명수의 물이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생명수 강의 근원을 밝혀 주는 말씀입니다. 이 생명수 강물은 새 예루살렘 길 가운데로 흐른다고 했습니다.

(3) 그런데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말씀해 주는 생명나무 역시 여러 가지 실과를 맺는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과일 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명수 강이란 뜻과 같은 의미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실과가 달마다 맺힌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표현은 달마다 추수하고 달마다 새롭게 맺힌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과실을 따먹어도 곧 다시 새로운 열매가 맺혀지기 때문에 그 신비적인 모습을 이처럼 표현했을 것입니다.

(4) 그리고 그 생명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생명나무에는 잎사귀도 달려 있습니다. 하기야 나무에 잎사귀가 없다면 보기가 별로 좋지 않을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푸른 것이 사라지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천국의 잎사귀는 천국의 분위기와 환경을 더욱 아름답고 신선하게 한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2. 어린양의 종들과 천국의 왕권자

우리는 3절 이하에서 아주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됩니다.

(1)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21장에서 이미 계시된 새 예루살렘의 새로운 면을 이곳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해 주는 표현이라고 보겠습니다.

다시는 밤이 없을 것입니다. 사탄이 주관해 온 영적 흑암도 영원히 사라져버렸습니다. 해가 지므로 찾아 온 밤도 이제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다고 했습니다. 낮의 햇빛이나 밤의 등불이 필요할리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히 그 성을 비췰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밝혀 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표현은 하나님과 어린양 되신 예수님과의 동등성을 충분히 입증해 주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불리는 그의 종들이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는 정확하게 그 대상자를 찾아내기란 어렵지만 이들은 분명히 ‘만국’이라고 불린 하나님의 백성들과는 차별을 두고 있는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는 말씀에서 계시록7장과 14장에 나오는 144000명의 하나님의 종들과 관계된 자들로 연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 하나님의 종들은 순교자들로 첫째부활 자들이며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할 하나님의 종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고 했습니다. 천국에도 왕권자의 권세를 가진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왕 노릇할 존재란 언제나 소수의 무리입니다. 천국의 모든 성도들이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왕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순교 성도들이 이런 왕권을 가지고 천국에서 영광을 누릴 것이란 사실은 아무것도 이상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결론 : 아무도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보고 온 사람은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계시로만 공개된 미 입성지역입니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 성도들이 장차 들어갈 새로운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에 내려 왔던 사람들은 모세와 엘리야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있는 곳은 새 예루살렘이 아니라 영적 안식처인 낙원입니다. 이들은 변화산에 나타나 영광의 모습으로 예수님과 대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나라인 낙원의 모습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도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천사에 의해 간접적으로 계시로 본 것입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가 오기는 했지만 그는 천국의 간증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장차 이곳에 올라가 살아갈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나라에 대하여 아주 소상히 바라보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으로 약속 받은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나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에 우리가 받을 영광스러운 그 상급을 생각하면서 주를 위해 보람 있는 삶을 살도록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강해 100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계22:6-16)


7절에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란 말씀이나 10절에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 그리고 12절에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사실과 그 날에 우리가 한 일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결론에서 요한계시록이 과연 어느 시대에 적용되는 예언의 말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이 본 계시는 주 재림의 시기에 관한 인류의 종말적인 계시이지 결코 1세기 경, 로마 시대 당시의 교회의 핍박 상황이 아닌 것입니다.


1.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요한계시록 22장에서 만도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을 세 번이나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주님의 재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확고한 주님의 다짐으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주시는 격려인 것입니다.

(1)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6절에서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란 말씀은 ‘약속에 관한 예언을 선지자들에게 하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종말에 관한 계시를 주시는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옛적부터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 재림의 대하여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시라고 밝혀 주시므로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 말씀’이심을 거듭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신 말씀의 다른 또 한 가지 이유는 우리의 신앙적인 자세에 대한 경종으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 재림의 시일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언제나 그 날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명심하여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대는 이 종말적인 계시들이 실질적으로 성취되어 가는 역사적 시점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조차 그러했거늘 하물며 종말에 이른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이 종말의 계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하며 그것을 자신의 생활에 적용시켜 세마포로 단장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예수님은 요한에게 보여 주신 이 계시의 말씀을 마감할 즈음에 이르러 엄히 말씀하시기를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치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종말에 관한 예언은 그것을 인봉할 때가 있고 그것을 개봉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종말적인 계시와 환상을 보여 주신 후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고 명하셨습니다(단12:4). 구약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집하는 유대인들이 아직까지 다니엘의 계시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봉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이 계시를 받은 시기가 인류의 종말에 이르러서가 아닙니다. 초림의 메시아가 오셔서 인간의 구원에 관한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이제는 재림의 메시아가 오셔서 오메가의 역사를 이루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항상 주 재림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에 올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되며 이 같은 일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인 것입니다.

(2)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두루마기란 의의 옷을 말합니다. 자기 행위의 의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이 옷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옷은 혼인자리에 반드시 입고 들어가야 할 예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옷을 더럽힐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이 흰 의의 두루마기는 이 세상에서 더럽혀 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빤다는 말은 죄를 회개함으로 더러워진 의의 옷을 깨끗케 한다는 뜻입니다.

(3) 그러나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개들이란 말은 이곳에 처음 등장하는 말입니다. 이들은 ‘소경이요 무지한 파수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사56:10-12). 점술가들이란 사람의 길흉화복을 말하며 사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점쟁이와 복술가들입니다. 음행하는 자란 영적 간음자로 음녀와 그와 동조하는 무리를 말합니다. 살인자란 성도들의 피를 흘린 황충이 떼들을 말합니다.


결론 : 16절에서 예수님은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요한에게 보이신 확실한 증언입니다. 이 증언은 그 무엇으로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분명히 듣고 그 날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신부들이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강해 101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22:17-21)


어느덧 오늘 말씀은 요한계시록의 최종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창세기1장이 인류의 알파라면 성경의 요한계시록은 인류의 오메가인 셈입니다. 창세기의 에덴이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의 새 예루살렘으로, 창세기의 아담이 요한계시록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하나님의 아들로 완성됨으로 하나님의 알파와 오메가의 대역사가 마쳐지며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형성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인류가 영원한 천국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는 변경됨이나 심판이나 종말이 없이 무한정으로 언제까지나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시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제한된 이 지구상에서 소망을 가지고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1. 성령과 신부의 초청

17절에 나오는 성령과 신부의 초청은 참으로 감격적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1) 이 천국에의 초청자는 성령과 신부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진리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의미합니다. 신약 시대가 성령시대로 불리는 이유는 성령이 초청자가 되시어 듣는 자들과 목마른 자들과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른 또 하나의 초청자가 나오는데 그 이름이 ‘신부’로 나와 있습니다. 신부란 그리스도의 신부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밝혀 주고 있는 신부는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이 교회야말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그의 소유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2) 초청자는 다양합니다. 먼저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초청의 말씀은 복음으로 전파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은 먼저 듣는 자들에게 초청의 우선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목마른 자도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목마른 자란 의에 목마른 자를 의미합니다. 이 의는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선물로 주시며 이 의의 소유자는 그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습니다.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위대한 선물을 원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원치 않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예언의 말씀에 대한 가감죄

18절과 19절에 나오는 말씀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하나의 경종으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1) 요한은 ‘내가 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증언이란 말은 틀림없는 확증을 의미합니다.

(2) 요한이 증언한 경종은 두 가지로 나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하실 것이요’라고 밝혀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것들이란 요한이 이 계시를 받아 일곱 교회로 보내는 편지로 쓴 이 계시의 내용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것들 외에 더한다는 말은 요한이 계시 받지 아니한 다른 모든 종말에 관한 계시를 의미합니다.

요한이 다 증언한 계시는 종말에 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후로는 절대로 다른 종(기도하는 종에게나 명망 있는 신학자에게나 유명하고 존경 받을만한 목사들)에게 종말에 관한 새로운 계시를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요한에게 다 증언한 ‘요한계시록’이면 족한 것입니다.

(2) 두 번째의 경종이 19절에 나옵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제하여 버리면’이란 말씀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분명히 계시해 주신 말씀을 임의로 변경시키는 일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예언의 말씀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계시를 엉뚱한 논리로 주님이 주신 계시를 모호하게 만드는 일을 말합니다. 이런 일은 순리대로 해석하기를 거부하고 신학적 견지에서 연구한다는 신학자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분명한 종말적인 계시를 상징적이라고 하여 계시의 진실을 감추는 일입니다. 상징이 아니라 ‘요한이 다 증언’한 계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하나님의 말씀을 다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론 : 요한이 이처럼 계시록의 끝마무리 시점에 와서 이 같은 경종을 준 일에 대하여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의 해석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계시를 전부 보이신 예수님은 이제 결론적으로 자신이 속히 오실 일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강조하셨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우리의 신앙적인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우리가 어느 시대에 살아가건 언제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간구의 생활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절실한 현실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랜 시간, 성의 있게 들으신 여러분들에게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