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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Job) 21장 욥--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한가? -30장 그러나 지금은 고난 중에 있다

영국신사77 2020. 4. 15. 09:26


21장: 욥--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한가?

[1-7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또 조롱할지니라.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가 어찌 초급(焦急)[조급]하지 아니하겠느냐? 너희는 나를 보아라, 놀라라, 손으로 입을 가리우라. 내가 추억하기만 하여도 답답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壽)[장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보면, 악인은 죽어야 하고 단명(短命)해야 하고 세력이 소멸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즉시 시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시행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지 못한다. 어떤 때는, 아니, 빈번하게 악인이 건강하게, 오랫동안 살고 그 세력도 강하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심판을 지연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마지막 심판 때에 불평할 수 없게 하시기 위함이다(롬 2:4). 셋째로, 그것은 악인을 다른 사람의 심판과 징계의 도구나 최종심판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함이다.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그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도 심판의 도구로 쓰셨다. 그러나 악인들은 마침내 멸망할 것이다.

[8절]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악인들은 그 자녀들이 번창하고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날 말로 하면, 그들은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한다.

[9절]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악인에게 가정적 평안이 있고 하나님의 징벌이 없는 경우도 있다. 욥은 욥기 12:6에서도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고 말하였다.

[10절] 그 수소는 영락 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 암소는 새끼를 낳고 낙태하지 않는구나.

목축업은 옛날 근동 거주민들의 주업이었다. 가축의 출산은 기업 번창의 주된 요소이었다. 본문은 악인의 기업이 쇠하지 않고 번창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말로 하면, 그들이 매월 타는 봉급이 증가하고 그들이 경영하는 기업의 순이익이 증가하는 것을 말한다.

[11절] 그들은 아이들을 내어보냄이 양떼 같고 그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악인들은 자녀들을 많이 출산하여 잘 기르며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즐거움과 행복이 있어 보인다.

[12절] 그들이 소고(小鼓)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악인들은 작은 북과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를 불며 즐긴다. 즉 그들은 악기들을 연주하며 노래하고 유흥을 즐기는 여유를 가진다.

[13절]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

‘경각간에’라는 원어(베레가)는 ‘한 순간에, 갑자기, 평안히’라는 뜻이다(BDB). 본절은 악인의 빠르고 고통 없는, 평화로운 죽음을 묘사하는 것 같다(NIV). 시편 73:4는,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라고 말한다.

인생의 삶이 이 세상이 전부이며 이 세상뿐이라면, 악인의 고통 없는 평안한 죽음은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주의 사도들과 초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받았고 심지어 순교도 당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은 불멸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죽은 후의 세계가 있다. 또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마지막 심판이 있다. 전도서 12:14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9:27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한다. 주께서 누가복음 16:19 이하에 기록케 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죽은 후의 세계가 있고 선악간의 보응이 있음을 잘 교훈한다.

[14절]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나이다.

‘그러할지라도’(NIV)라는 원어(와)는 ‘그러므로’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KJV). 악인들은 건강하고 형통하고 평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멀리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15절] 전능자가 누구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하는구나,

악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예배하려는 마음이 도무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불경건이며 무신론이다. 악인들은 불경건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16절] 그들의 복록이 그들의 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악인들이 평안과 형통을 누리는 것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신 은혜이다. 그러나 사람의 죄들 가운데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죄가 가장 근본적인 죄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살고 있고 그의 공급하심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햇빛을 받고 비를 맞고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다(행 17:25-28). 이론적이든지 실제적이든지, 무신론은 인간의 죄 중에 가장 근본적인 죄이다. 악인의 생각과 욥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17-18절] 악인의 등불이 꺼짐이나 재앙이 그들에게 임함이나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케 하심이나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같이, 폭풍에 불려가는 겨같이 되는 일이 몇 번이나(캄마)[얼마나 자주] 있었느냐?

악인의 행복이 그치고 재앙이 그에게 임하고 그가 하나님의 진노로 곤고케 되고 폭풍 앞에 불려가는 검불같이 되는 일, 즉 악인에 대한 심판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19-20절] 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쌓아 두셨다가 그 자손에게 갚으신다 하거니와 그 몸에 갚으셔서 그로 깨닫게 하셔야 할 것이라.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시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하셔야 할 것이니라.

욥은 하나님께서 그 자손들에게가 아니고 악인들 자신에게 직접 징벌하셔서 그들로 깨닫게 하셔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21-22절] [이는] 그의 달 수가 진하면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함이라.] 그러나 하나님은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욥은 만일 악인이 죽고 나면, 그 자손의 불행이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그는 또 부언하기를, 그러나 누가 감히 심판자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23-26절]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평강하며 안일하고 그 그릇(아틴)[들통, 양동이](BDB)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 골수는 윤택하였고 어떤 사람은 죽도록 마음에 고통하고 복을 맛보지 못하였어도 이 둘이 일반으로 흙 속에 눕고 그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

이 세상에서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이 다 시행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전도서 8:11도,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라고 말했다.

[27-28절]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궤휼(메짐마)[악한 생각]도 아노라. 너희의 말이 왕후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의 거하던 장막이 어디 있느뇨 하는구나?

‘왕후’라는 원어(나디브)는 ‘존귀한 자’라는 뜻이다. 친구들은 악한 군주나 악인의 집이 다 패망한다고 말했었다.

[29-30절] 너희가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 악인은 남기워서 멸망의 날을 기다리움이 되고 멸망의 날을 맞으러 끌려나감이 된다 하느니라.

길 가는 사람들도 악인들이 죽은 후 최종적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들이 세상에서 평안히 죽는 일이 있음을 말한다.

[31-34절] 누가 능히 그의 행위를 면박하며 누가 능히 그의 소위를 보응하랴마는 그를 무덤으로 메어 가고 사람이 그 무덤을 지키리라. 그는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기고 그 앞선 자가 무수함같이 모든 사람이 그 뒤를 좇으리라. 이러한즉 너희의 위로가 헛되지 아니하냐? 너희의 대답은 거짓뿐이니라.

악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그들 앞에서 그들의 행위를 면박하고 그들의 행위에 대해 보응할 수 있는 자도 없겠지만, 악인들은 평안히 무덤에 묻히며 그들의 무덤을 지키는 자까지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도 그런 길을 밟았고 또 그 후에도 그러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에는 악인들이 평안히 살다가 평안히 죽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물론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있을 것이다.


욥기 21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악인의 일시적 외적 번창과 형통을 보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 

악인은 때때로 형통한 것 같고 장수하고 자녀들도 잘 되고 

사업도 번창하고 물질적 유여함도 누리며 평안한 임종도 맞는다. 

우리는 그런 것을 보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신론적 현세주의를 멀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사람의 참된 가치와 복은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죽은 자들의 부활과 내세가 있다. 

천국과 영생이 있고, 지옥과 영벌이 있다. 

욥의 삶과 악인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경건과 도덕성을 저버리고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범죄치 말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22장: 엘리바스--악을 버리고하나님께로 돌아오라

[1-3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완전충족하시므로 사람이 그에게 무슨 유익을 드릴 것이 없다. 사람의 의나 행위의 온전함은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욥기 35:7-8,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사람의 죄는 하나님께 손해되는 것은 없으나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권위를 대적하므로 하나님의 진노와 벌을 가져온다.

[4-5절]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

엘리바스는 욥이 당하는 재앙이 큼을 볼 때 필경 그의 죄악이 크다고 그릇되게 단정한다. 그러나 그가 말한 악들은 분명히 악이다.

[6-9절]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 잡으며[담보로 취하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갈한 자[피곤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가 거기서 사는구나. 네가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담보로 취하거나 헐벗은 자의 옷을 벗기는 것은 악한 일이다. 성경은 이웃의 옷을 담보물로 취했으면 해 지기 전에 돌려보내라고 가르쳤고(출 22:26) 또 맷돌을 담보물로 취하지 말라고 했다(신 24:6). 그것은 옷 없이 추운 밤을 지내거나 맷돌 없이 식사를 준비하는 어려움을 고려한 것이다. 또 피곤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않고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않는 것도 악한 일이다. 성경은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고 말했다(잠 25:21). 또 구제하지 않는 것도 악한 일이다. 권세자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존귀한 자에게 거기에 살게 배려하면서도, 과부는 돕지 않고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고아의 팔을 붙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꺾고 학대하는 것도 악한 일이다.

[10-11절] 이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며 어두움이 너로 보지 못하게 하고 창수가 너를 덮느니라.

악인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과 벌을 받을 것이다.

[12절]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별의 높음이 얼마나 높은가?

하늘이 참 높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별들보다 더 높이 계신다.

[13-14절]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리운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궁창으로 걸어 다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이것은 엘리바스의 잘못된 추측이었다. 욥은 하나님께 대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엘리바스가 묘사한 사람은 분명히 악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높이 멀리 계셔도 모든 사람의 행동을 다 아시고 빽빽한 구름과 흑암 가운데서도 다 아신다. 오늘날 사람들이 만든 수많은 인공위성에도 고성능, 초정밀 카메라가 있어 하늘 높은 곳에서 지구 위의 일들을 상당히 자세히 알아내며, 적외선 카메라는 캄캄한 밤에도 사람과 그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식별할 수 있다.


[15-16절] 네가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어버리웠고 그 터는 하수로 인하여 함몰되었느니라[그 터는 강물에 흘러 내려가는도다}.

엘리바스는 욥이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 한다고 그릇되이 비난한다. 그 길은 죄악된 길 곧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길인데 욥은 그런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다. 또 ‘그 터는 하수로 인해 함몰되었느니라’는 원문은 ‘그 터는 강물에 흘러 내려가는도다’는 뜻이다. 악인들은 결국 망한다는 뜻이다.


[17-18절]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악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기를 원한다. 아니, 실상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고 부정한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주셨다. 그들이 땅에서 누렸던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다(대상 29:14; 약 1:17).


[19-20절]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무죄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우리의 대적이 끊어졌고 그 남은 것(이스람)[그들의 풍성함](BDB, NASB)이 불사른 바 되었다 하느니라.

의인들이 악인들의 멸망을 본다는 뜻이다. 악인은 결국 망한다.


[21-22절]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우리는 하나님을 친근히 해야 한다(원문)(신 10:20; 약 4:8). 그것은 말씀과 기도의 삶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원문).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했다(롬 5:10).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 또 이렇게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은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의와 선을 힘써 행해야 한다. 성도는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믿음과 회개와 순종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계속 누려야 한다. 엘리바스는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평안의 복이다. 그 평안은 몸의 건강과 경제적 안정과 가정적 행복과 사회적 평안을 다 포함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복은 영생이다(시 1:1-3; 119:165). 디모데전서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23-26절]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네 보배[베체르(betser,금의 광석), nuggets(땅에서 발견되는 귀금속, 특히 금) 덩어리][금의 원석 등]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곧 참된 회개이다.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의 교훈을 받으며 그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섬기며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요 경건이다. 그러면 병들었던 인격이 새로워지고 불행했던 환경이라도 회복될 것이다. 또 모든 사람은 자기의 장막 곧 집에서 불의를 멀리해야 한다. 자신이 죄와 불의를 멀리해야 할 뿐 아니라, 자기의 집 곧 자기의 아내와 자녀들도 죄를 멀리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회개요 회개의 열매를 맺는 일이다.

또 사람이 이 세상의 보화를 마음에 최고 가치로 품고 살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주께서는 누가복음 14:33에서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이 세상의 보화를 버려야 하나님을 참 보화로 깨닫고 모실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다 해롭게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하였다(빌 3:7-8).


[27-28절]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

사람이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가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불의를 버리고 물질 사랑을 끊고 하나님을 보화로 삼으면, 그는 기도의 응답을 얻을 것이다. 또 그러면 그는 감사히 서원을 갚게 될 것이다. 죄는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는다. 시편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사람이 의를 행하면 기도의 응답을 얻을 것이다. 주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5:7). 또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하였다(요일 3:21-22).

엘리바스는 또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입의 교훈을 받고 불의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보화로 삼으면, 그는 무엇을 경영하든지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형통케 하심을 경험할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는 자는 그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과도 연관된다. 주께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4).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소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다.


[29-30절]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

성도에게는 낮춤의 고난이 있다. 성도에게 때때로 질병, 가난, 원수들, 핍박 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그 고난에서 건지시고 높이신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건지실 것이며 성도의 손이 깨끗함을 인해 그런 자가 건짐을 입을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온 자, 그 장막에서 불의를 버린 자, 세상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보배로 삼은 자는 기도 응답을 받고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지고 고난 중에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의인은 다른 사람이 구원을 얻는 데 중간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 모세는 그들을 멸하시려는 하나님 앞에 서서 그들의 용서를 간청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하였고 그의 진노를 막았다(출 32:9-14). 또 야고보서 5:15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말하였고, 요한일서 5:16은,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고 말했다.

엘리바스는 욥이 악을 행했다고 단정하고 악인이 결국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욥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개인의 건강과 경제적 안정과 가정적, 사회적 평안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엘리바스는 또 욥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이 세상의 보배를 버리고 하나님을 보배로 삼으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는 기도 응답을 받고 그의 경영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그가 높임 받고 구원 받고 또 남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욥은 엘리바스가 말한 그런 악한 자가 아니었다. 욥은 이미 하나님과 친근히 지내며 정직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엘리바스를 통해서도 교훈을 얻는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하나님과 친근히 하고 화목하고 하나님을 보배로 삼고 그를 사랑하며 오직 의롭고 선하게만 살고 이웃을 구제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이며 우리의 하는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질 것이며 또 우리 자신뿐 아니라 남도 구원하는 자가 될 것이다.


23장: 욥--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

[1-5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도 혹독히(Syr,Targ, Vg, KJV, NIV) 원망하니 받는 재앙[그의 손](LXX, Syr, NASB, NIV)이 [나의]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변론]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욥은 극심한 재앙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나아가 호소하기를 원하며 또 고난의 이유를 알기를 원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과 멀어지지 말고 하나님께로 더 나아가야 할 것이다.

환난 때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시편 50:15에 약속하셨다. 야고보서 5:13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교훈한다. 고난 당할 때가 곧 하나님께 기도할 때이다. 또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고 말한다(약 4:8).

주께서는 불의한 재판관 비유에서 우리가 고난 중에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눅 18장). 그러나 기도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 믿음이 있어야 고난 중에 낙망치 않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굳게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6-7절]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야심 비)[내게 힘을(KJV) 혹은 관심을(NASB) 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

욥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권능이 많으시지만 무조건 피조물들과 그 권능으로 다투며 위협하지 않으신다. 그는 겸손히 그에게 나오는 자를 용납하신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감히 전능자 하나님과 변론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아뢰었다(창 18:23, 27).

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셨다(사 1:18).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들과 변론하기를 원하신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6:37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셔서 그에게 나오는 자들을 용납하시고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정직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러므로 시편 34:8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였고, 시편 65:2는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라고 말했다.

[8-9절]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섬길 때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4:24). 영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전서 6:16에서 하나님을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라고 표현하며 증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신 무한하신 영이시다. 그는 예레미야를 통해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셨다(렘 23:24).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는다”고 고린도후서 5:7에서 말했고, 히브리서 11:27은 모세가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다”고 증거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지금은 보이지 않는 내세의 영광의 천국을 믿고 소망한다. 바울은 로마서 8:24-25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하였고, 고린도후서 4:18에서는,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하였다.

[10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베카나니)[그가 나를 시험하셨으니](BDB)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신다”고 말한다. ‘나의 가는 길’이란 그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 그가 지금도 걷고 있는 길, 또 그가 앞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 욥의 친구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오해하고 그릇되이 비방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정확히 아신다.

또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한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이라고 번역하면 그가 그 시련을 통해 그의 인격이 단련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환난과 시험이 성도의 인격을 단련시키며 온전케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로마서 5:3-4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문은 단순히, “그가 나를 시험하셨으니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것은, 그가 앞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 그의 당한 환난의 일에 대해 하나님께 묻고 공정한 판단을 받기를 원하며 하나님께서 자기의 친구들의 비난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해 주시기를 원한 내용에 이어진다고 보인다(매튜 풀, 매튜 헨리, 재미슨-포셋-브라운). 욥은, 그의 마음과 그의 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셨으니, 그가 정금 같은 자로 인정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11-12절]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욥은 자신의 발이 그의 걸음 곧 하나님의 명하신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그의 길 곧 하나님의 명하신 교훈을 지켜 치우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의 걸음’ ‘그의 길’은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가리킨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생각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교훈대로 살아야 한다. 잠언 6:23은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했고, 시편 119:105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증거하였다(딤후 3:16).

욥은 또 그의 입술의 명령 곧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아니하였고 일정한 음식 곧 날마다 그에게 필요한 양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의 양식에 비교하였다. 우리가 육신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일정한 음식을 먹듯이, 우리는 영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4:4).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며 그 말씀을 묵상하고 힘써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고(마 28:20), 사도 바울은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교훈하였다(살후 2:15).

[13-14절]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뜻이 일정하다’는 원어(베에카드)는 ‘한 마음을 가지신다’ (in one mind)(KJV) 혹은 ‘유일하시다’(unique)(NASB)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한 마음, 변치 않는 마음, 일정한 뜻을 가진 유일하신 자이시다. 그와 비교할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의 뜻을 돌이킬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을 다 행하시는 자이시다. 그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그는 욥을 향해 작정하신 것을 다 이루실 것이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 . .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 46:10-11).

[15-17절]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셨음이니라[그러나(NASB, NIV) 나는 어두움 앞에서 끊어지지[죽지] 아니하였고 그가 어두움을 내 얼굴에서 가리지도 아니하셨도다].

지금 욥은 주권자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며 또 낙심한다. 그러나 그는 그 재앙의 어두움으로 아직 죽지 않았고 그 재앙의 어두움이 아직 제거되지도 않았다.

욥기 2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올 때 그가 자기에게 나아와 기도하는 자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좋은 것을 주시는 그의 인자하심을 믿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이시므로 우리가 그를 뵈올 수 없으나 우리는 굳센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오직 그에게 기도해야 하고 또 그를 따르며 섬겨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 우리의 가는 길을 오직 그는 아신다. 우리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우리의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지 못하지만,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께서는 다 아신다. 그는 우리가 참으로 그를 알고 경외하며 사랑하는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을 도무지 모르고 그를 두려워함도 없고 그를 사랑함도 복종함도 없는 쭉정이와 같은 자인지 다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실한 성도인지 아닌지 아신다. 실상,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가 우리의 중심을 아시면, 우리는 낙망할 것이 없다. 그는 주권적 섭리자이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평소에 우리의 생각대로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길을 굳게 붙들자. 욥은 고난의 시련이 있지만, 이것을 잘 참으면 정금 같은 인격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인격의 남은 죄성을 더욱 깨닫고 버리기를 결심하게 되며 조금씩 성화에 이른다. 욥은 자신의 인격이 정금같이 될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평소에도 죄를 멀리하고 정금 같은 인격자로 살기를 힘써야 한다. 또 고난 중에도 낙심치 말고 잘 참고 바르게 행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고난을 통해 불순물이 다 제거된 순수한 금과 같은 인격자로 성숙될 것이다.

욥은 평소에 하나님의 교훈을 따랐고 그의 말씀을 일정한 음식보다 귀히 여겼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계시들의 저장소인 신구약성경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을 힘써야 한다. 우리는 매일 성경 읽는 일을 하루 세 끼 밥을 먹는 것보다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렇게 사는 자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복되며(시 1:3), 큰 평안을 얻으며 장애물이 없을 것이며(시 119:165), 우리에게 닥친 모든 현실은 합력하여 선과 성화를 이룰 것이다(롬 8:28).

24장: 욥--하나님께서 악인의 심판을 지연하신다

[1절]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시간들]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어찌하여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날들]을 보지 못하는고?

‘정한다’는 원어(차판)는 ‘감춘다, 저장한다’는 뜻이다.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심판의] 시간들이 전능자로부터 감추이지 않았으나, 어찌하여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심판의] 날들을 보지 못하였는고?”이다. ‘시간들’이나 ‘날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가리킨다고 보이며 본문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심판을 지연하심을 말한 것이라고 본다.

[2-4절] 어떤 사람은 지계표를 옮기며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욥은 악인에 대해 묘사한다. 땅의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악한 일이다. 신명기 19:14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先人)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고 말하였다. 또 양떼를 빼앗아 기르는 것이나,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는 것이나,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는 것도 악한 일이다. 시편 68:5는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표현하였고, 신명기 10:18은, “[그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억울함을 갚아주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신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 또 가난한 자들을 동정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5-12절] 그들은 거친 땅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내는구나. 밭에서 남의 곡식을 베며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산중(山中) 소나기에 젖으며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주리면서 곡식단을 메며 그 사람의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하면서 술틀을 밟느니라.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티플라)[보기 흉함, 불미함](BDB)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욥은 가난한 자들에 대해 묘사한다. 세상에는 악한 자들로 인하여 신음하며 부르짖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다. 입을 옷이 없고 겨울에 따뜻한 방이 없고 먹을 음식이 충분히 없고 마실 물이 충분히 없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악인들의 불의한 일과 그 가난한 자들의 신음을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 같은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고 그의 심판도 없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형제들 중 하나가 주릴 때에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방문하는 것이다(마 25:35-40). 그런 행동이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의 실천이다. 성경은 우리의 원수라도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교훈한다(롬 12:20). 또 이 세상에서 악인에 대한 심판이 시행되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은 죽지 않았다.

[13절]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 첩경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광명[빛]은 참 지식과 의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다(요일 1:5). ‘빛의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빛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빛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 길에 머물지 않는 자들, 곧 십계명을 버리고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악하고 거짓된 삶을 사는 자들을 가리킨다.

[14-17절]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적같이 되며,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변장하며, 밤에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은 다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욥은 살인하는 자, 간음하는 자, 도적질하는 자를 예를 들어 말한다. 이들은 다 어두움의 사람들, 곧 어두운 시간에 일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빛을 싫어하고 빛을 두려워한다. 주 예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고 말씀하셨다(요 3:20).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빛된 생활을 해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4). 사도 바울은 우리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고 교훈했고(롬 13:13), 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다(엡 5:8-9).

[18-21절]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 산업은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행치 못할 것이라.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무덤]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인즉 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기억함을 다시 얻지 못하나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그는 잉태치 못하므로 해산치 못한 여인을 학대하며 과부를 선대치 아니하는 자니라.

악인들은 빨리 쇠잔할 것이고 그들의 산업은 저주를 받고 그들은 다시 포도원의 소산을 즐기지 못할 것이다. 범죄자는 곧 죽어 무덤에 묻힐 것이다. 그를 낳은 태, 곧 그의 모친도 그를 잊어버리고 벌레가 그 시체를 먹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기억지 못하고 그는 나무처럼 꺾일 것이다. 악인은 슬픈 여인들도 동정치 않고 도리어 학대한다.

[22-23절] 그러나 하나님이 그 권능으로 강한 자들을 보존시키시니 살기를 바라지 못할 자도 일어나는구나. 하나님이 그들을 호위하사 평안케 하시나 그 눈은 그들의 길에 있구나.

옛날 영어성경은 22절을 “그는 또한 그의 권세로 강한 자들을 이끌도다. 그가 일어나니 아무도 생명을 확신하지 못하도다”라는 뜻으로 번역했다(KJV). 그러면 그것은 악인들이 다른 동료들을 끌어들이고 사람들은 그 악한 자들을 두려워한다는 뜻일 것이다. 23절도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고 ‘그 악인’이라고 보며 그 동료들이 어느 정도 평안을 누리지만 그의 눈이 그들의 길에 있다는 뜻 같다.

그러나 근래의 한 영어성경은 “그러나 그는[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그 강한 자들을 끌어내시도다. 그가 일어나시나 아무도 생명을 확신하지 못하도다”라는 뜻으로 번역했다(NASB). 그러면 23절의 ‘그’도 하나님을 가리킬 것이다. 한글개역은 후자에 가깝다.

[24-25절] 그들은 높아져도 잠시간에 없어지나니 낮아져서 범인(凡人)처럼 제함을 당하고 곡식 이삭같이 베임을 입느니라.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 지적하거나 내 말이 헛되다 변박할 자 누구랴.

악인들은 얼마간 평안을 누리나 결국은 다 죽게 될 것이다.

욥기 2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다고 낙심치 말아야 한다. 악인들은 일시적으로 형통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최종적, 공의의 심판이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남의 땅의 경계표를 옳기고 앙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와 과부의 소를 볼모잡으며 빈궁한 자를 몰아내는 등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탐심 등의 죄악을 버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고 또 그의 계명과 교훈을 따라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남에게 선을 베풀며 구제하기를 힘써야 한다.

25-26장: 빌닷과 욥--벌레 같은 인생, 전능하신 하나님

[25:1-3]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평안]을 베푸시느니라. 그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 광명의 비췸을 입지 않은 자가 누구냐?

‘권능’이라는 원어(하메쉘)는 ‘다스림, 통치권’을 가리키고, ‘위엄’이라는 원어(파카드)는 ‘두려움’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통치권과 두려움을 가진 주권자이시며 땅에 평안을 주신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지 않은 자가 없다.

[4-6절]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밝지]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고 깨끗지 못하다. 사람은 죄로 인해 죽고 썩는 존재로 비천해졌다. 사람은 벌레와 같다. 이사야 41:14, “지렁이[벌레] 같은 너 야곱아.” 사람은 허무하고 죄악되다. 이것은 염세주의 사상이 아니고 사실이고 현실이다. 사람이 자신이 피조물이며 죄인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 앞에 겸비해진다. 사람의 존귀함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 곧 참된 지식과 의에 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의를 회복하였으므로 이제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의 계명을 순종함으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가야 한다(창 6:9; 욥 1:1; 단 1:8).

[26:1-4]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 도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 구원하였구나. 지혜 없는 자를 참 잘 가르쳤구나. 큰 지식을 참 잘 나타내었구나.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을 내었느냐? 뉘 신[누구의 영]이 네게서 나왔느냐?

[5-6절] 음령(陰靈)들(레파임)[죽은 자들]이 큰 물[바다]과 수족(水族)[거기 거하는 것들] 밑에서 떠나니 하나님 앞에는 음부[지옥]도 드러나며 멸망의 웅덩이도 가리움이 없음이니라.

[7절]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하나님께서 땅을 공간에 다셨다는 말씀은 놀라운 말씀이다. 이것은 오늘날 확인된 사실이지만, 옛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은 욥기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책임을 보인다.

[8-10절]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는 자기의 보좌 앞을 가리우시고 자기 구름으로 그 위에 펴시며 수면에 경계를 그으셨으되 빛과 어두움의 지경까지 한정을 세우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구름과 비, 빛과 어두움을 주장하신다. 그는 엄청난 양의 수증기를 하늘에 쌓으시고 때를 따라 많은 비를 내리신다.

[11-14절]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기둥이 떨며 놀라느니라. 그는 권능으로 바다를 흉용케 하시며 지혜로 라합[큰 바다 짐승]을 쳐서 파하시며 그 신[영]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손으로 날랜 뱀을 찌르시나니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 그 큰 능력의 우뢰야 누가 능히 측량하랴.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신다. 또 그는 바다의 흉용한 물결을 일으키게도 하시고 잔잔케 하기도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욥기 25-2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벌레 같은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자. 사람의 존귀함은 하나님의 형상, 즉 참 지식과 의에 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고 실제로 의롭고 선한 삶을 살도록 힘쓰자. 거기에 인생의 참된 가치가 있다. 

둘째로,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섭리자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자. 이 세상 사는 동안 겪는 고난 중에서도 우리는 모든 문제를 오직 하나님께만 맡기자. 하나님 안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있다.

27장: 욥--악인은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다

[1-6절] 욥이 또 비사(譬詞)를 들어[그의 이야기를 계속하여](NASB, NIV) 가로되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거짓]을 발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욥은 하나님께 맹세하면서 바른 말, 진실한 말을 하겠다고 말한다. 의와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덕이지만, 불의와 거짓은 마귀의 속성이요 마귀 왕국의 악이다. 사람은 교만과 무지와 욕심 때문에 악하고 거짓된 말을 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모든 악하고 거짓된 말을 버리고 의와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엡 4:25).

욥은 죄 때문에 재앙을 당했다는 친구들의 비난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았고 그 마음이 그를 책망할 일이 없다고 증거하며 자신의 순전함을 말한다. 욥은 앞에서도 자신의 순전함을 여러 번 말했었다(욥 6:10; 10:7; 13:18).

물론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셨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의롭게 살아야 하고 양심적으로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도록 살아야 한다(고전 4:4).

[7-12절] 나의 대적은 악인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사곡한(카네프 ף������������)[불경건한](BDB)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에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 환난이 그에게 임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의 뜻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주 허탄한 사람이 되었는고.

욥은 악인의 허망함에 대해 증거한다. 불경건한 자가 불의로 이익을 얻었을지라도 그가 죽을 때 그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주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다(마 16:26). 또 그는 풍년 만난 어리석은 농부의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그 부자 농부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하셨다(눅 12:20). 잠언 14:32는, 의인은 죽음에도 소망이 있지만[그것은 천국의 소망이다], 악인은 환난에서 엎드러진다고 말하였다.

악인은 평소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교훈을 멸시하였기 때문에 환난의 날에 하나님을 불러도 그가 응답지 않으실 것이다. 잠언 1:28,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실상, 악인들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사모하며(시 73:25) 그에게 쉬지 않고 기도하며(살전 5:17) 또 환난 날에 하나님의 도우심의 응답을 받는다(시 50:15).

[13-15절]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강포자가 전능자에게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그 자손이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그 후예는 식물에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그 남은 자는 염병으로(밤마웻)[죽을 때(KJV, BDB), 전염병 때문에](NASB. NIV, KB) 묻히리니 그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며.

욥은 악인의 받는 보응에 대해 말한다. 악인의 많은 자녀들은 전쟁에서 죽을 것이며 그 후손은 양식에 배부르지 못하고 기근을 당할 것이다. 또 남은 자들은 전염병으로 죽을 것이며 그의 과부들은 울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울지 못하는 까닭은 너무 충격적이기 때문이거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기뻐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그들 자신도 그의 학대 때문에 신음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6-18절] 그가 비록 은을 티끌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같이 예비할지라도 그 예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 은은 무죄자가 나눌 것이며 그 지은 집은 좀의 집 같고 상직군[포도원 지키는 자]의 초막 같을 것이며.

악인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 은을 많이 저축하고 의복도 많이 예비할지라도, 그의 돈과 의복, 곧 그의 재산은 다른 이들에게 돌려질 것이며 그의 집도 허물어질 것이다. 그의 모든 수고는 헛될 것이다.

[19-23절] 부자로 누우나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요(KJV)(혹은 ‘다시 그리하지 못할 것이요’(LXX, Syr, NASB, NIV) 눈을 뜬즉 없어졌으리라. 두려움이 물같이 그를 따라 미칠 것이요 폭풍이 밤에 그를 빼앗아갈 것이며 동풍이 그를 날려보내며 그 처소에서 몰아내리라. 하나님이 그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쏘시나니[던지시니] 그가 그 손에서 피하려 하여도 못할 것이라. 사람들이 박장(拍掌)하며[박수치며] 비소(誹笑)하고[비웃고] 그 처소에서 몰아내리라.

악인의 삶은 복되지 못할 것이다. 악인은 부자로 누우나 다시 그리하지 못할 것이다(혹은 부자로 살다가 죽을지라도 그 조상들이 모여 있는 곳, 곧 안식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두려움과 혹독한 환난이 그에게 닥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끼지 않으시고 사정없이 치시고 취하여 가실 것이며 사람들도 그를 비웃을 것이다.

욥기 27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악인은 평소에 불경건하고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그에게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그는 환난 때에 엎드러진다. 우리는 평소에 불경건하게, 악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악인의 받는 보응은 참으로 두렵다. 그와 그의 자녀들은 전쟁에서 죽고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으며, 그들의 많은 은과 의복은 다른 이들의 소유가 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만 의지하며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고 또 거리끼는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28장: 욥--지혜는 고귀하다

[1-4절] 은은 나는 광[광산]이 있고 연단하는 금은 나는 곳이 있으며 철은 흙에서 취하고 동(銅)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사람이 흑암을 파하고 끝까지 궁구하여 음예(陰翳)[침침한 그림자]와 유암(幽暗)[어두움] 중의 광석을 구하되 사람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구멍을 깊이 뚫고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달려 내리니 멀리 사람과 격절되고 흔들흔들 하느니라.

금이나 은, 구리나 철은 각각 캐는 광산이 있다. 사람은 캄캄함을 무릅쓰고 매우 깊은 갱도를 파고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곳에 매달려 내려가서 흑암 속에서 금은동철의 광석을 찾고 그런 것들을 캐낸다. 귀중한 것들을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5-11절] 지면은 식물을 내나 지하는 불로 뒤집는 것 같고 그 돌 가운데에는 남보석이 있고 사금도 있으며 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며 위엄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였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였느니라. 사람이 굳은 바위에 손을 대고 산을 뿌리까지 무너뜨리며 돌 가운데로 도랑을 파서 각종 보물을 눈으로 발견하고 시냇물을 막아 스미지 않게 하고 감취었던 것을 밝은 데로 내느니라.

사람은 땅 위에서 식물을 심고 가꾸고 먹을 것을 얻지만, 지하는 불로 뒤집는 것 같고 각종 보석은 땅 속에와 돌 가운데 있다. “지하는 불로 뒤집는 것 같다”는 표현은 영감된 과학적 발언이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중심에는 약 5,000도의 뜨거운 불이 있다고 추측한다. 화산이 한 증거다. 땅 속의 각종 금은보석이 있는 곳은 공중의 새들도, 사나운 짐승들도 모르나, 사람들은 그것을 찾아내고 캐어낸다.

[12절]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사람이 소유한 것들 중에 지혜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금은보석도 사람이 찾기 쉽지 않으나 노력하여 상당히 찾아내어 얻는다. 그러나 지혜와 명철은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땅 위의 어느 곳에 있고 깊은 바다의 어느 곳에 있는가?

[15-19절]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수마노(onyx)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치 못하겠고 황금이나 유리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산호나 수정으로도 말할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홍보석보다 귀하구나.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측량하지 못하리니.

욥은 지혜의 가치가 정금이나 은, 남보석, 수정, 홍보석[루비, 진주]과 황옥보다 참으로 크다고 말한다. 그것은 돈 몇 천만원이나 몇 억원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가치 있다. 잠언 3:13-18도 지혜가 가장 귀하다고 증거했다.

[20-22절]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리워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지혜와 명철의 곳은 모든 생물과 공중의 새에게 숨겨져 있다. 그러나 멸망과 사망에 들어간 자들은 지혜에 대해 소문을 들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혜가 없어서 멸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혜보다 심히 가치 없는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았다. 많은 사람들은 헛된 세상 것에 큰 가치, 아니 모든 가치를 두고 살고 있다. 그러나 전도서는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도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사람이 참 지혜의 가치성을 깨닫는다면, 그는 세상의 허무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와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행하며 살 것이다. 거기에 참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23-28절]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뢰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 그때에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궁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지혜가 이 세상의 금은보석보다 가치 있으나 사람이 지혜를 알지 못하지만, 온 세상을 두루 보시고 세상의 땅끝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 바람의 무게를 다시고 바닷물의 분량을 재실 수 있고 비와 우뢰와 번개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곧 온 우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길을 아시고 그것이 있는 곳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보셨고 찾아내셨고 그것을 선포하셨고 굳게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고 말씀하셨다. 욥의 말은 잠언의 말씀과 같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시작]이며(잠 9:10) 그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 지혜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혜와 지식을 말할 수 없다. 모든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그를 아는 데로부터 나온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에 그의 명하신 삶의 규칙이 요약해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키며 악을 떠나는 것이 지혜와 명철이며, 그렇지 못한 것이 미련함과 어리석음이다(잠 8:13).

지혜는 금은보석보다 가치 있는 것임을 알고 지혜를 사모하며 구하고 얻자. 요한복음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참된 지혜는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요 섭리자이신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며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이 지혜이며 그렇지 않은 것이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를 얻어 영육의 복과 현세와 내세의 복을 누리자. 경건 훈련을 교훈한 디모데전서 4:7-8도 같다.

29장: 욥--옛날은 복되었다

[1-3절] 욥이 또 비사를 들어[이야기하여] 가로되 내가 이전 달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에 지내던 것같이 되었으면―그때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취었고 내가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에 행하였었느니라.

욥은 지난날들에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재난과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신다. 신명기 32:10, “여호와께서 그를[자기 백성을]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욥은 또 지난날들에 하나님의 등불이 그의 머리에 비취었고 그가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에 행하였었다고 말한다. ‘그의 등불’이나 ‘그 광명’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의 빛, 곧 그를 기쁘게 하시고 행복케 하시는 빛이다. 민수기 6:24-26에 기록되어 있는 대제사장의 축도는 다음과 같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욥의 과거는 복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다. 지금 그는 고난 가운데서 그 복된 시간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4절] 나의 강장하던 날과 같이 지내었으면― 그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

욥은 과거에 그가 누렸던 가정적, 영적 복을 회상한다. ‘강장하던’이라는 원어(코레프)는 ‘추수의 때’라는 뜻인데(BDB), 인생의 전성기와 결실기를 가리킨다고 본다. 욥은 그때 하나님의 우정이 그의 장막 위에 있었다고 말한다. ‘우정’이라는 원어(소드)는 ‘의논, 친밀함’이라는 뜻이다(BDB). 욥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 시편 25:14, “여호와의 친밀함(דוֹס)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5절] 그때는 전능자가 오히려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자녀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욥은 가정적인 행복을 누렸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여러 명의 자녀를 주셨고 그 자녀들은 그 곁에서 잘 자랐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은 인생의 가장 큰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6절] 뻐터가 내 발자취를 씻기며 반석이 나를 위하여 기름시내를 흘려 내었으며.

욥은 물질적으로도 유여함의 복을 받았다. 그의 양들과 소들은 수가 많았고 그는 그것들에게서 많은 우유를 얻었고 뻐터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먹고 남을 정도였다. 또 “반석이 나를 위하여 기름시내를 흘려 내었다”는 말은 돌밭 같은 곳에서도 감람나무들이 번성하여 감람유를 풍성하게 산출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다시 말해, 욥은 물질적 풍성함과 유여함을 누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욥은 가정적, 물질적 복을 누렸다.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이었다. 신명기 28장에 밝히 증거되어 있는 대로, 우리의 영육의 복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는 만복의 근원이시다.

[7-11절] 그때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베풀기도 하였었느니라. 나를 보고 소년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방백들은 말을 참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귀인들은 소리를 금하니 그 혀가 입천장에 붙었었느니라. 귀가 들은즉 나를 위하여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위하여 증거하였었나니.

욥은 과거에 소년들뿐 아니라, 노인들과 방백들과 귀인들에게서도존경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그 앞에서 말도 조심했다.

[12-14절]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사람들이 그를 존중하였던 까닭은 그가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르짖는 가난한 자나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져내었고 망하게 된 자나 과부도 도와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그를 위해 축복하고 그로 인해 기뻐 노래하였다. 선한 삶은 하나님의 뜻이며 모세의 율법과 잠언과 구약성경 전체에서 강조된 바이다.

[15-17절]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査實)하여[조사하여]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내었었느니라.

욥은 자신이 선한 삶을 실천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가난한 자들을 도왔고 또 억울한 일을 당한 자의 구원을 위해 애썼다. 이렇게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였고 그 앞에서 말도 조심하였던 것이다.

[18절]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선종(善終)하리라. 나의 날은 모래같이 많은 것이라.

‘내 보금자리’는 그의 가정을 가리킨다. 날이 모래같이 많다는 것은 장수(長壽)한다는 뜻이다. 욥은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적 행복 속에서 평안히 오래 살다가 생을 마치겠다고 생각하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의 끝이나 내일의 행복과 불행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 있다.

[19-20절] 내 뿌리는 물로 뻗어나가고 내 가지는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이슬에 젖으며 내 영광은 내게 새로와지고[새로워지고] 내 활은 내 손에서 날로 강하여지느니라 하였었노라.

욥은 자신의 삶을 나무에 비유한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 뿌리가 물로 뻗어나가고 그 가지가 밤새도록 이슬에 젖어 충분한 물을 취하는 푸른 나무처럼 복되었다고 말한다. 시편 1:1-3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악을 멀리하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의 나무와 같다고 말했다. 또 욥은 자기의 영광과 형통이 영속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영광이 더욱 새로워지고 그의 세력과 힘이 날로 강하여지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므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 교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평안과 장수의 복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높고 깊으신 뜻은 아무도 모르며 그의 섭리하시는 길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사람은 자신의 내일의 일이나 행복과 불행을 알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한다.

[21-23절] 무리는 내 말을 들으며 나의 가르치기를 잠잠히 기다리다가 내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였었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이슬같이 됨이니라. 그들이 나 바라기를 비같이 하였으며 입을 벌리기를 늦은 비 기다리듯 하였으므로.

욥은 전날에 자신이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욥의 말을 이슬같이, 단비같이 여기며 사모했다. 악인의 말은 악하고 파괴적이지만, 의인의 말은 가치가 있고 남에게 유익을 준다. 잠언은 의인의 혀가 천은(天銀)과 같으며(잠 10:20), 또 지혜로운 자의 혀가 양약 같다고 말한다(잠 12:18). 욥은 그런 혀를 가졌다고 보인다.

[24절] 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함소하여 동정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었느니라.

본절의 원문은, “내가 그들을 보고 웃을지라도 그들이 그것을 믿지 않으며 나의 얼굴빛을 무색케 아니하리라”는 뜻 같다(KJV). 사람들은 욥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비웃는 인격이 아님을 인정했다는 뜻 같다. 그들은 욥의 얼굴빛을 무색하게, 즉 그를 무안하게 하지 않았다.

[25절] 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고 으뜸으로 앉았었나니 왕이 군중(軍中)에[군대 가운데]에 거함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도 같았었느니라.

욥은 사람들의 길을 택해주었다. 또 그는 왕이 자신의 군대 가운데 거함같이 그들 중에 으뜸으로 앉았고, 또 애곡하는 자들 중에 위로하는 사람과도 같았다. 욥은 그의 고백대로 참으로 사람들 가운데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경건하고 선하고 존경받는 인물이었다고 보인다.

욥기 29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친근히 함으로써 그의 보호와 그의 기쁨을 누렸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고 그의 등불이 그의 머리에 비취었고 그의 친밀함이 그의 장막에 있었다고 고백한다. 우리도 창조자, 섭리자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말씀과 기도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그의 보호하심과 그의 지식과 기쁨을 누리기를 원한다.

둘째로, 욥은 하나님의 복을 누렸다. 그는 가정적 복을 누렸고 물질적 여유의 복을 누렸고 또 사회적으로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복을 누렸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녀의 복을 주셔서 여러 명의 자녀들이 복되게 자랐고, 물질적 여유를 주셔서 먹고 쓰고 남음이 있게 하셨고, 또 사회적으로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얻게 하셨고 그의 지혜와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유익한 교훈과 조언을 주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자는 복을 누린다.

셋째로, 욥은 구제와 선행을 실천하였다. 욥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였고 고아들을 돌아보았고 장애인들을 도왔다. 그런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며 사람들도 존경하는 삶이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며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되는 삶이다. 우리도 구제와 선행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욥처럼 큰 고난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조금 더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30장: 욥--그러나 지금은 고난 중에 있다

[1-8절]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기롱하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나의 보기에 나의 양떼 지키는 개 중에도[개들과 함께] 둘 만하지 못한 자니라. 그들은 장년의 기력이 쇠한 자니 그 손의 힘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랴.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파리하매 캄캄하고 거친 들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BDB, NASB) 떨기나무 가운데서 짠 나물도 꺾으며 대싸리[댑싸리] 뿌리로 식물을 삼느니라. 무리는 도적을 외침같이 그들에게 소리지름으로 그들은 사람 가운데서 쫓겨나서 침침한 골짜기와 흙구덩이와 바위 구멍에서 살며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 모여 있느니라.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비천한 자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고토로부터 매질을 당한(혹은 벌을 받은)](BDB, NASB) 자니라.

이 세상에는 존귀한 자도 있고 천한 자도 있다. 인격 훈련이 잘 되고 재산이 있고 사회적 신분이 있는 자들이 있는 반면에, 인격 훈련을 잘 받지 못하고 가난하고 사회적 신분이 없는 자들이 있다. 욥은 예전에는 존경을 받는 존귀한 자이었다. 그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였다. 그는 많은 재산도 있었고 사회적 신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재앙으로 병들고 가난해졌을 때, 그는 심히 비천한 상태에 떨어졌다. 그는 지금 심지어 비천한 젊은이들의 조롱을 받고 있다. 사람의 존귀함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가?

[9-15절] 이제는 내가 그들의 노래가 되며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들은 나를 미워하여 멀리하고 내 얼굴에 침 뱉기를 주저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내 줄(KJV, NIV)을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케 하시매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그 낮은 무리가 내 우편에서 일어나 내 발을 밀뜨리고 나를 대적하여 멸망시킬 길을 쌓으며 도울 자 없는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구나. 성을 크게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들어오는 것같이 그들이 내게로 달려드니 놀람이 내게 임하는구나. 그들이 내 영광을 바람같이 모니 내 복록이 구름같이 지나갔구나.

이전에 존귀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병들고 가난해진 욥은 지금 비천한 자들의 조롱과 핍박을 받고 있다. 그들은 욥을 조롱하고 미워하며 침 뱉고 있다. 욥은 이 고난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곤고케 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욥의 발을 밀뜨리고 멸망시킬 길을 쌓고 그의 길을 헐고 재앙을 재촉하며 그에게 달려든다.

세상에는 때때로 의인들에게 이런 핍박이 있다. 예수께서 당하신 핍박은 그런 유의 핍박이었다. 로마 군병들은 그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고 희롱하며 침 뱉고 갈대로 그 머리를 쳤다(마 27:29-30). 대제사장의 종들은 그를 손바닥으로 때렸다(막 14:65). 시편 22:6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고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했었다. 사도들도 주리고 목말랐고 헐벗고 매맞았고 정처가 없었다. 바울은 자신들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고전 4:9-13).

[16-23절] 이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으니[직역하면, ‘내 영혼이 내 위에 부어지며’] 환난날이 나를 잡음이라.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몸에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하나님의[혹은 ‘나의 병의’(KJV)] 큰 능력으로 하여 옷이 추하여져서 옷깃처럼 내 몸에 붙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로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히 하시고 완력으로[강한 손으로] 나를 핍박하시오며 나를 바람 위에 들어 얹어 불려가게 하시며 대풍 중에[폭풍의 소란함 속에](BDB) 소멸케 하시나이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가시리이다[이는 주께서 나를 죽게 하시며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가실 것을 내가 앎이니이다].

욥은 지금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다. 그의 마음은 물같이 녹았고, 그의 몸은 뼈가 쑤시고 아픔이 쉬지 않으며, 그의 옷은 추하여졌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진흙에 던지셨고 티끌과 재 같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응답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잔혹히 하셨고 강한 손으로 핍박하셨다고 말하며 또 그로 바람에 불려가게 하시고 폭풍의 소란함 속에 소멸하게 하시며 그를 죽이려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욥보다 더 심한 고통이었다. 시편 22편은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라고 예언했었다(14-16절).


[24-31절]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베이)[폐허 더미에서]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겠는가? 고생의 날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내 마음이 어지러워서[내 창자가 끓어오르고](KJV) 쉬지 못하는구나. 환난날이 내게 임하였구나. 나는 햇볕에 쬐지 않고 검어진 살을 가지고[슬퍼하며](KJV, NASB) 걸으며 공회 중에 서서 도움을 부르짖고 있느니라.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내 가죽은 검어져서 떨어졌고[벗겨졌고] 내 뼈는 열기(熱氣)로 하여 탔구나. 내 수금은 애곡성(哀哭聲)이 되고 내 피리는 애통성(哀痛聲)이 되었구나.

본문은 욥이 고난 중에 가진 슬픔을 묘사한다. 그는 과거에 고생하는 자를 위해 울고 빈궁한 자를 위해 근심했었다. 그러나 그에게 큰 슬픔이 왔다. 그는 복을 바랐으나 화가 왔고, 광명 즉 기쁨과 행복을 기다렸으나, 흑암 즉 슬픔과 불행이 왔다. 그의 창자는 지금 끓어오르고 있다. 그는 햇볕에 그을리지 않았으나 살이 검어졌다. 그것은 그의 슬픔 때문이었다. 그는 이리의 형제처럼, 타조의 친구처럼 살고 있다. 그의 살갗은 검어져서 벗겨졌고 그의 뼈는 열기로 인해 탔다. 그의 수금과 비파는 슬픔의 노래, 애통과 애곡의 노래의 악기가 되었다.

성도는 고난 중에 슬퍼할 때가 있다. 다윗은 시편에서,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라고 말했고(시 55:17), 또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말했다(시 56:8).


욥기 30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람의 의미와 가치를 외적인데 두지 말아야 한다. 

욥은 지금 천한 자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있으나 

그는 천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존귀한 성도이었다. 

세상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으며, 

사회적 신분이 있는 자가 있고 평범한 사람이 있고, 

배운 자가 있고 그러지 못한 자가 있다. 

모든 사람은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는다. 

시편 49:12는 “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말했다. 

참으로 사람의 가치는 외적인 데 있지 않고 

내적인 데, 즉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둘째로, 욥의 고난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예표이었다. 사람이 당하는 고난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홀로 주관하시는 섭리자이시다. 특히 욥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사도들과 교회 역사상의 순교자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해 고난을 받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교회를 위해 담당하였다. 이처럼 의인들도 때때로 고난을 당한다.


셋째로, 우리는 의롭게 행하는 중에 고난을 당하면 욥을 기억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참고 견디어야 한다. 야고보서 5:10-11,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베드로전서 2:21,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4:12-13,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