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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Job) 11장 소발--욥에게 회개를 촉구함-20장 소발--악인은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

영국신사77 2020. 4. 15. 09:26


11장: 소발--욥에게 회개를 촉구함

[1-6절]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네 자랑하는(바드)(공허한, 쓸데없는)(BDB)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

소발은 욥이 자기의 말이 정결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말한다고 증거하며 하나님의 벌하심이 그의 죄보다 경하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일반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욥의 경우에는 맞지 않다. 욥의 고난은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었다. 욥기는 그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였다고 말한다(욥 2:3; 42:7-8).

[7-9절]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지옥]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밋다)[크심]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사람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지혜와 지식을 다 알 수 없고, 또 그의 섭리의 모든 일들, 그 목적과 그 방법도 알 수 없다. 시편 145:3,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8:17,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하시는 일들에 대해 우리 자신의 지혜로 알 수 없고 오직 성경말씀을 통해 또 하나님의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10-12절]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開廷)하시면[법정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허망한 사람이 지혜가 있으리라](NASB).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가 하시는 일들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또 그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위들, 특히 사람의 모든 악한 행위들을 보시고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그러나 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듯이, 허망한 사람은 지혜와 지식이 없다.

[13-14절]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가다듬고, 준비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가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뢸 때 우리 손에 죄악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멀리 버려야 하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손을 깨끗이 해야 한다. 우리는 죄악을 멀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죄와 불의가 우리의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 집에서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 아간은 멸망할 물건을 장막 땅 속에 묻었다가 온 가족이 멸망을 당하였다(수 7장). 아나니아 부부는 함께 하나님과 사도 베드로를 속이다가 즉사하였다(행 5장).

[15절] 그리하면 네가 정녕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얼굴을 못 든다. 죄를 짓고도 얼굴을 드는 자가 있다면 그는 뻔뻔한 자이거나 위선적인 자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멀리하고 의를 행하면 담대함을 가질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자는 불안함이나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담대함의 비결은 의를 행하는 데 있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요한일서 3:21,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죄는 양심에 불안을 가져오지만, 의는 양심에 평안과 담대함을 준다.

[16-17절]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두움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환난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그러나 우리가 손을 깨끗이 하고 악을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환난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다. 우리는 곧 환난을 잊을 것이며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다. 지금 환난이 강물처럼 부닥쳐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비가 그치면 곧 말라버리는 골짜기같이 곧 지나갈 것이다.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자는 평안을 얻고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다. 그의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을 것이며 어두움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다.

[18-19절]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지며 두루 살펴보고 안전히 쉬리니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첨을 드리리라.

‘첨을 드린다’는 원어(킬라, 피엘형)는 ‘호의를 구한다’는 뜻이다. 성도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망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며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성도를 두렵게 할 자가 없고 도리어 그에게 호의를 구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20절] 그러나 악한 자는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의 소망은 기운이 끊침이리라.

‘기운이 끊친다’는 말은 영혼의 호흡이 끊어진다는 뜻으로 죽는다는 말이다. 악한 자는 불경건하고 악하고 회개치 않는 자를 가리킨다. 악한 자는 눈이 어두워 재앙을 피하여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한다. 그는 재앙을 피할 수 없고 거기에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악인은 소망이 없다. 악인의 소망은 절망이다. 그의 소망은 기운의 끊침 곧 죽음뿐이다.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벌하심은 우리의 죄보다 가볍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에게 내리시는 징계는 실상 그들의 죄보다 가볍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달게 받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을 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작은 지식을 가질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시고 또 그의 하시는 모든 일들도 측량할 수 없다. 또 그는 사람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를 정확히 다 아시고 공의로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그가 주신 성경을 읽고 배움으로써 하나님을 알기를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그에게 기도할 때 우리의 손에 죄가 없고 우리의 집에 죄가 없어야 담대함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말과 행실을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품거나 또 우리 집에 죄가 있으면 우리의 양심을 불안하고 두렵게 하실 것이다.

넷째로, 죄는 불행과 재앙의 원인이지만, 죄를 회개하고 의와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평안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환난으로부터 구원을 얻고 우리의 삶에 기쁨과 평안을 얻을 것이다.

12장: 욥--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형통을 허용하셨다

[1-5절]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나도 너희같이 총명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으니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편안한 자는 발이 미끄러지는 자들을 위해 준비된 재앙을 멸시하는구나](NASB).

욥은 자신의 경건과 도덕적 삶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그는 자신의 의로움과 순전함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 실족하는 자같이 재앙을 당하고 있고 또 지금 친구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6절]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소발은 앞장에서 욥의 재앙이 그의 죄의 결과이므로 죄를 회개하라고 욥에게 말했는데, 욥은 이제 그의 권면을 반박한다. 모든 재앙이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왜 강도의 장막이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한가라고 반문한다. 과연, 세상에는 악인이 평안하고 형통한 일들이 있다. 시편 73편도 악인의 평안과 형통에 대해 말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시 73:4-5, 12, 14).

[7-8절]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욥은 악한 자들이 형통하다는 것은 자연계도 아는 진리라고 말한다. 자연계는 강한 것들이 약한 것들을 잡아먹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이다. 사자와 호랑이는 약한 짐승들을 잡아먹고, 독수리나 매는 약한 새들을 잡아먹고, 상어 같은 큰 물고기들은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그 강한 것들은 평안한 것 같고 형통한 것 같다.

[9-12절]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생물들의 혼(네페쉬)[생명](NASB, NIV)과 인생들의 영(루아크)[호흡](KJV, NASB, NIV)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변하지 아니하느냐?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이 모든 자연계의 현상은 하나님의 손이 행하신 것들이다.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들이다. 인간 세계에서 악한 자들이 활개치고 일시적으로 형통한 것도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며 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일들이다.

이런 도덕적 무질서는 창조 세계의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 세상은 본래의 도덕성과 질서를 잃어버렸고 악화되어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이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있고 천국에서는 완전한 의와 질서가 있을 것이지만, 세상에서는 악인이 형통한 일들이 있다. 이것은 단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도덕 개념으로는 이해되거나 설명되지 않는다.

[13-25절]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이지 못하느니라. 그가 물을 그치게 하신즉 곧 마르고 물을 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속하도다.] 모사(謀士)[고문들]를 벌거벗겨 끌어가시며 재판장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열왕의 맨 것을 풀어[푸시며]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충성된 자의 말을 없이 하시며 늙은 자의 지식을 빼앗으시며 방백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어두운 가운데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만국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열국으로 광대하게도[크게도] 하시고 다시 사로잡히게도 하시며 만민의 두목들[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시며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개인들의 생사화복(生死禍福)과 국가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다 지혜와 권능, 모략과 명철이 충만하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 영원하신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서 유일하신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그가 창조하신 자연만물을 주관하시고 인간 나라를 주관하신다.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다니엘 4:17,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또 세상에는 악인들이 형통하고 의인들이 고통 당하는 일들이 있다. 세상에는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일들이 있다. 또 세상에는 인간의 능력 밖의 일들, 즉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다 주권자 하나님의 손 안에서 되어지는 것들이다. 전도서 7:13,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욥은 자신의 경건과 도덕적인 삶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악인의 형통함이 있다. 이것은 개인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홀로 다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도덕적 무질서로 인해 당황하거나 낙심치 말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를 믿고 그의 공의로운 심판도 믿자. 우리는 오직 경건하고 성경의 교훈에 절대순종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의인은 결국 승리할 것이며 악인은 결국 망할 것이다.

13장: 욥--너희는 다 쓸데없는 의원들이다

[1-12절]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너희는 거짓말을[거짓말로] 지어내는 자(토펠)[바르는 자]요 다 쓸데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궤휼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좇으려느냐?[그를 위해 편벽됨을 보이려느냐?](NASB, NIV) 그를 위하여 쟁론하려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만일 가만히 낯을 좇을진대[편벽됨을 보일진대] 그가 정녕 너희를 책망하시리니 그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 위엄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느냐?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土城)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파악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진리를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바른 말, 좋은 말이라도 잘못 적용하면, 그것도, 계속 잘못 적용하면, 그는 거짓말로 바르는 사람이 되고 쓸데없는 의원과 같이 될 것이다. 또 그의 말은 불의하고 거짓된 말이 되고, 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재 같은 속담’이 되며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될 것이다.

[13-19절]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MT, ASV).10)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변호]하리라. 사곡한[불경건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혹은 ‘그는’](KJV) 나의 구원이 되리라. 너희는 들으라.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설명을 너희 귀에 담을지니라.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스스로 의로운[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욥은 친구들의 지적과 책망에 대하여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한다. 18절,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그는 앞에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었다. 욥기 9:21, “나는 순전하다마는.” 10: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또 12:4에서, 그는 자신을 “의롭고 순전한 자”라고 표현하였다.

욥은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실지라도 자신은 하나님을 의뢰하겠다고 말한다. 15절, “비록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 그러나 나는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호하리라.” 또 욥은 자신의 구원을 기대한다. 16절, “불경건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혹은 ‘그는] 나의 구원이 되리라.” 그는 자신이 불경건한 자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이 되시리라고 믿고 있다.

[20-28절]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착고[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한정하시나이다. 나는(웨후)[그는](KJV)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욥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심을 알고 그가 그의 손을 자기에게 대어 죽게 하지 마시고 그의 위엄으로 자기를 두렵게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면서(21절) 자기에게 주신 고난의 이유를 알기를 원한다.

욥은 자신의 죄 문제를 생각한다. 그는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라고 말하며(23절), 또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라고 말한다(26절).

욥은 또한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을 ‘날리는 낙엽’과 ‘마른 검불’이라고 표현하고(25절), 자신이 ‘썩는 물건의 후패함’과 같고 ‘좀먹은 의복’ 같다고 말한다(28절). 사람은 병으로 죽음의 문앞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신에 대한 바른 가치 평가를 한다.

욥기 1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을 자세히 읽고 기도 중에 묵상함으로써 바르게 해석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을 자신에게와 이웃에게 적절하게, 바르게 잘 적용해야 한다. 성도가 비록 진리를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잘못 적용한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와 같고 병도 고치지 못하는 쓸데없는 의원과 같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자책할 것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계속 주장했다(9:21; 10:7; 12:4).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바르고 선하게 살았음이 분명하다. 비록 그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와 부족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제사로 상징된 중보자의 의를 의지하며 회개하고 죄씻음을 받았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자책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았다. 고린도전서 4: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셋째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난 중에 자신을 성찰하고 우리의 죄를 살피고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고 오직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오래 참고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가자. 우리가 범죄치 않고 믿음으로 바르게만 살면 우리는 고난의 회복을 곧 경험할 것이다.

14장: 욥--허무한 인생을 쉬게 하소서

[1-2절]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욥은 인생의 삶이 짧다고 말한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다. 인생은 짧다. 욥은 또한 인생의 삶이 괴로움이 가득하다고 말한다. 모세도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다(시 90:10). 욥은 또한 인생의 삶이 꽃과 같이 쇠한다고 말한다. 이사야 40:6, 8,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욥은 또 인생의 삶이 그림자같이 신속하다고 말한다. 성경은 다른 곳들에서도 인생이 그림자와 같이 머무름이 없다고 말한다(대상 29:15; 시 39:6; 144:4). 시편 90:10,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3-4절]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을 들어 살피시나이까? 나를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나이까?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허무한 존재인 인생을 눈을 들어 살피시며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는가라고 묻는다. 또 그는 인생이 다 죄로 인해 더러워진 존재이며 이런 인생에게서 어떻게 깨끗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엄격히 심판하시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깨끗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모든 인류가 다 깨끗지 못하며 죄성을 가진 죄인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바이다. 창세기 8:21,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레위기 12장에 의하면, 여인은 출산 후 속죄제물로 자신을 속죄해야 하였다. 그것은 인간이 죄 가운데 출생하는 죄인임을 나타낸다.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로마서 3:10-12,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5-6절]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로 쉬게 하사 품꾼같이 그 날을 마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일생을 다 정하셨다. 그는 우리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을지를 다 정하셨다. 하나님의 정하신 그 제한된 날들 동안 우리는 세상에 살고 그 날이 끝나면 죽는다. 하나님의 정하신 그 제한을 아무도 넘어가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벨사살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고 주장하셨다(단 5:2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언제든지 그의 정하신 때에 불러가실 수 있다(눅 12:16-20).

이제 욥은 하나님께서 품꾼 같은 삶을 사는 자신에게 생이 마칠 때까지 평안 주시기를 소원한다. 평안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였다(시 4:8).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참 평안을 주셨다(요 14:27).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16에서,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7-12절]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강]가 잦아서 마름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나무는 찍힐지라도 소망이 있어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를 내지만,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는 것 같다. 시냇물이 말라 버림같이 사람이 죽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의 때가 있다. 사람은 죽고 마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하늘이 없어지고 잠자는 자들이 잠을 깨듯이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다(요 5:28-29).

[13-15절] 주는 나를 음부[무덤]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고난의]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변화가 오기까지](KJV, NASB) 기다렸겠나이다[기다리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였겠나이다[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 보셨겠나이다[사모하시리이다].

욥은 사람의 죽음을 음미하면서도 몸의 변화의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몸의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16-17절] 그러하온데[‘이는’(KJV, NASB) 혹은 ‘그러나’(ASV)]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세시오며 주는] 나의 죄를 살피지 아니하시나이까?(KJV)[살피지 아니하시나이다](NASB)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고난 중에 자신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세상에서 걷는 걸음들 즉 그의 행위들을 다 살피시고 의와 불의, 선과 악을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18-22절] 무너지는 산은 정녕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 주께서 사람을 영영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 보내시오니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

욥은 사람의 일생과 죽음을 묘사한다. 그것은 마치 산이 무너져 흩어지고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이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이 땅의 흙을 씻어버림 같다. 사람의 일생이 긴 것 같지만, 결국 산이 무너지고 바위가 옮겨지듯이, 무너지고 옮겨진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하신다. 사람은 임종이 가까우면 얼굴빛이 변하여 창백해지고 그의 아들이 존귀하든지 비천하든지 알아 보지 못하고 자기 살이 아프고 자기 마음이 슬플 뿐이다. 사람은 그렇게 임종을 맞는다.

욥기 1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짧고 괴로움 많고 쇠해지고 신속히 가는 삶 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고 영원한 천국을 얻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거기에 인생의 참 가치가 있다.

둘째로, 모든 사람은 더러운 죄인이다. 죄는 사람들의 불행의 근본 원인이며 죄 문제의 해결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밖에 없다. 사람의 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주 예수님의 보혈로만 씻음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를 감사하자. 

셋째로, 사람의 일생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길임을 알고 죽음을 염려하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써 일하고 또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자. 우리는 죽을 때 죽을 것이지만, 그때까지 충성해야 한다.

넷째로, 사람은 죽지만, 장차 몸의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다. 욥은 자신의 변화의 날, 곧 몸의 부활의 날을 소망한다. 신약성경은 우리의 몸의 변화의 날 곧 몸의 부활의 날을 밝히 증거한다. 고린도전서 15:42-44, 51-5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다.

15장: 엘리바스--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

1-16절, 가증하고 부패한 인생

[1-6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 어찌 유조(有助)치 아니한[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폐하여 하나님 앞에 묵도(黙禱)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택하였구나.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너를 쳐서 증거하느니라.

엘리바스는 욥에 대해 여러 말로 잘못된 비난을 쏟아내었다. 그는 욥의 말이 ‘헛된 지식,’ ‘무익한 말,’ ‘불경건한 말,’ ‘간사한 자의 혀’라고 비난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죄의 형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고 욥은 자신의 고난이 어떤 특정한 죄 때문이 아니라고 변호했던 것인데, 엘리바스는 계속 욥을 정당하지 않게, 그릇되이 비난한 것이다.

참된 성도도 친구들에게 이런 오해를 당할 수 있다. 욥의 고통은 경제적, 가정적,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친구들의 비난까지 겹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욥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요 욥기의 중심적 교훈이다.

우리는 친구에게 바른 조언을 주어야지 잘못된 조언을 주거나 그를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경우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잠 25:11). 또 잘 알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주관적 판단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완전한 판단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전 4:5).

[7-10절]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모의(謀議)[은밀한 회의](NASB)를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너의 아는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가 알지 못하겠느냐? 너의 깨달은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에게는 없겠느냐? 우리 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 연로하기도 하여 네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엘리바스는 욥의 확고한 지식과 신념에 대해 반박하면서 그 친구들 가운데는 나이 많은 자도 있고 심지어 욥의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으며 나이 많은 자들은 젊은 자보다 지혜와 지식이 더 많은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레위기 19:32는,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 말했다. 욥도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고 말했다(욥 12:12). 르호보암은 그 부친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의 조언하는 바를 버리고 그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의 조언을 따라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하며 행함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을 초래하였다(왕상 12:6-20).

그러나 진리의 지식과 바른 판단력은 반드시 연령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시편 119:100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지키는 자가 노인보다 더 명철하다고 말했다. 주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마 11:25).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나이가 많고 세상 경험도 많은 자들이었지만, 그 심령이 무지하고 완고하고 부패하였으며 하나님의 아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다.

[11-13절]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하시는 말씀을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마음에 끌리며 네 눈을 번쩍여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네 입으로 말들을 내느냐?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말씀하시는 말씀’은, 친구들이 욥에게 한 충고들, 즉 그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엘리바스는 자기들의 충고를 하나님의 위로와 온유한 말씀이라고 말하며 욥이 왜 그것들을 무시하느냐고 꾸짖는다. 그러나 사실상 욥의 친구들의 충고들은 하나님의 위로나 온유한 말씀이 아니었다.

또 ‘네 눈을 번쩍여’라는 표현은 불쾌하고 적대적인 마음을 눈으로 표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욥이 그런 눈빛을 하면서 그의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그의 입으로 말들을 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 욥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친구들의 잘못된 조언 때문에 마음이 상하였던 것뿐이다. 욥의 말은 친구들을 반대한 것이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바스가 욥의 말들을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불경건한 말로 이해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바르게 알지 못할 때 이런 실수를 하게 되고 상대방을 잘못 평가하거나 정죄하게 된다. 다윗은 그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이 종일 그의 말을 곡해하였다고 말했었다(시 56:5). 또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하셨다(요 16:2).

[14-16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不淨)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

엘리바스는 사람이 깨끗하지 못하며 악을 짓기를 물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수아 사람 빌닷도 그와 비슷하게 욥기 25:4-6에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고 하였다. 사람은 그 죄성과 그 결과로 인한 심한 비천함과 불행을 볼 때 가히 벌레와 구더기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전적 부패성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의 실패에서, 또 사사시대의 반복된 범죄에서, 또 구약의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서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특히 선지자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이 만물보다 심히 부패했고 선을 행하기에 무능함을 증거하였다(렘 17:9; 13:23).

욥은 절대적 의미에서 자신이 깨끗하고 의롭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욥은 자신의 죄악됨에 대해 욥기 14:4에서,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말한 것은 단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 큰 벌을 받을 만한 어떤 특정한 죄가 없다는 것을 뜻하였다. 평소에 욥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엘리바스가 증거한 사람의 부패성은 진리이지만, 그가 그것을 욥에게 적용하려 한 것은 무리하였고 적절치 않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친구들에게 바른 조언을 주는 자가 되자. 엘리바스는 욥의 다른 친구들과 같이 욥에 대해 잘못된 비난을 쏟아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남에 관해 잘 알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자. 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치 말자.

둘째로, 우리는 평소에 노인들을 공경하고 그들의 조언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히 여기고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지키자. 노인들은 보통 오랜 삶의 경험 속에서 상당한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바른 성경 지식과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또 오직 사실에 근거하여 사람과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하자. 또 그런 판단에 근거해서 친구들에게 바른 조언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알자. 사람은 깨끗지 못하며 물마심같이 악을 행하며 가증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충성하자.

17-35절, 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함

[17-19절]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나를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그 열조에게서 받아 숨기지 아니하고 전하여 온 것이라.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었느니라.

엘리바스는 지혜자들이 그 열조로부터 받아 숨기지 않고 전해준 것, 곧 사람의 전통적 지혜의 말을 욥에게 말하고자 한다.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었느니라”는 말은 그 열조들의 지혜가 외부의 것과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고 전달되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전통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것은 좋은 것도 있으나 좋지 않은 것도 있다. 심지어 교회적 전통도 그러하다. 교회 역사는 교회의 부패를 증거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떡 먹을 때에 손을 씻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켰으나 부모 공경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은 소홀히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주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다고 그들을 비난하였다. 그때 주께서는 책망하시듯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3-6).

[20-24절]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미스콜렐)[고통으로 몸을 뒤틀며]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 되었으므로(니츠페누)[혹은 ‘저장되었으므로’] 그 귀에는 놀라운(페카딤)[두려움의, 두려운 일들의](KJV, NASB, NIV) 소리가 들리고 그 형통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하리니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자신이 어두운 데서 나오리라고 믿지 못하고] 칼날의 기다림이 되느니라. 그는 유리하며 식물을 구하여[양식을 위해 방황하며]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한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환난과 고통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니.

엘리바스가 전하는 열조들의 지혜의 말은 악인이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악인은 일평생 고통으로 몸을 뒤틀며 강포자는 그 죽음의 날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나 다 작정되어 있다. 악인의 귀에는 두려운 일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형통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할 것이다. 악인은 자신이 그 환난에서 회복될 것이라고 믿지 못하며 칼날을 기다리다가 죽음을 맞을 것이다. 또 그는 양식이 부족하여 그것을 얻으려 방황하며 재앙의 날이 가깝다는 것을 안다. 환난과 고통은 그를 두렵게 하고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이길 것이다. 악인에게 질병, 기근, 전쟁 등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 재앙이 있다는 것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원리이다. 잠언 10:24,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악인들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57:21). 단지, 이 진리가 욥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25-27절] 이는 그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함이니라. 그는 목을 굳게 하고 두터운 방패로 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가나니 그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

본문은 악인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들며 전능자를 향해 거만하게 행하기 때문이다. ‘교만하여 배반한다’는 원문(이스갑바르)은 ‘거만하게 행한다’는 뜻이다(BDB, NASB). 고의적 불경건은 대단히 큰 죄악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와 선의 근거이시며 이유이시다. 모든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떠난다(잠 16:6).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 대신 자기 자신을 높이고 의지하며 거기에서 모든 죄가 나온다. 사람이 창조주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본문은 또 악인이 목을 굳게 하며 자기 방어물로 무장하며 하나님을 향해 달려들듯이 대적한다고 표현한다. 27절은 악인이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까닭을 말한다. “[이는](원문) 그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음이니라.” 악인이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그가 몸이 건강하고 물질적 여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몸이 아프고 물질적 어려움이 있으면 겸손히 하나님을 찾지만, 몸이 건강하고 물질적 여유가 있으면 자기 만족에 빠지고 영적으로 둔해지고 죄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창조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28-30절] 그는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하였음이니라[거하는도다].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항상 있지 못하며 그 산업(민람)11)이 땅에서 증식하지 못할 것이며 흑암한 데를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에 그가 떠나리라.

‘흑암한 데’는 환난과 재앙을 가리키며, ‘불꽃’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을 가리키며, ‘가지’는 사람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엘리바스는 악인의 보응에 대해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않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할 것이다. 그가 사는 도시와 성읍이 황폐할 것을 말한다. 또 악인은 비록 지금 부요함을 누리고 상당한 재산과 소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의 부요함은 끝나고 그의 재산은 항상 있지 못하며 그의 소득도 땅에서 쇠하여질 것이다. 즉 그의 경제적 유여함이 끝나고 궁핍이 찾아올 것이라는 뜻이다.

악인은 환난과 재앙을 떠나지 못하며 그것이 항상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또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은 그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을 쇠잔케 할 것이다. 그리고 악인은 마침내 하나님의 입김, 곧 그의 진노의 입김으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악인의 보응은 확실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말씀하신 바이다. 그것은 또한 사람이 양심으로 느끼는 바이며 또 삶 속에서 때때로 경험하는 바이다.

[31-35절]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 것은 허망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룰 것인즉 그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포도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사곡한(카네프)[불경건한] 무리는 결실이 없고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그들은 악한 생각을 배고 불의(아웬)[헛된 것]를 낳으며 마음에 궤휼[거짓]을 예비한다 하였느니라.

엘리바스는 계속 악인의 보응에 대해 말한다. 본문은 악인이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다가 허망한 결과를 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가 가졌다고 생각한 것은 결국 다 공허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다. 만일 그가 처음부터 그것의 헛됨을 깨달았다면 그는 세상 것들에 대한 생각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과 영생을 크게 여기며 사모하였을 것이다.

악인은 ‘그의 날’ 곧 그의 번창하고 성공하는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 곧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그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은 잘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포도나무에서 익지 않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고 감람나무에서 감람 꽃이 떨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 악인은 잘되는 것 같다가 멸망할 것이다.

악인들은 불경건하고 뇌물을 받는 자들인데 결실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복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또 그들의 장막, 그들의 집과 가정은 불탈 것이다. 그들은 악한 생각을 마음에 품고 헛된 것을 행하며 또 거짓된 것을 마음에 준비할 뿐이다. 의인과 악인의 삶은 판연히 다르고, 악인은 공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의 전통들은 완전치 못하다. 심지어 교회의 전통도 완전치 못하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은 오직 신구약성경뿐이다. 하나님의 말씀만 완전하다(시 19:7-8).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전통이나 교회의 전통을 너무 중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성경말씀만 굳게 지켜야 한다(살후 2:15).

둘째로, 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 악인에게는 질병, 기근, 전쟁 등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 재앙이 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구원받은 우리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을 알고 악인에게 고통과 두려운 일이 따름을 알고, 모든 악을 버리고 의와 선만 구하며 행해야 한다.

셋째로, 악인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해 교만하게 행하며 목을 굳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교만과 거만을 버리고 자신이 피조물이며 늘 부족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과 교훈을 힘써 배우며 실천해야 한다.

넷째로, 악인은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다가 허망한 결과를 당하며 그의 거처하는 곳은 황폐해지고 그의 경제적 유여함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악인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보응을 받을 것이며 그와 그의 가족과 그의 산업은 쇠잔해지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악인의 심판받음과 그의 환경적, 경제적 환난과 재앙을 알고, 그의 현재의 일시적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불평하거나 낙심하거나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에 큰 가치를 두지 말고 모든 욕심과 악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과 영생에 큰 가치를 두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며 장차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것이다.

16장: 욥--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다

[1-3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아말)[고통을 주는] 안위자로구나. 허망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격동되어 이같이 대답하는고.

욥은 친구들이 ‘[그를] 번뇌케 하는 혹은 고통을 주는 안위자’라고 표현한다. 그의 친구들은 고난이 죄의 형벌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그 생각을 욥에게 줄곧 적용하였다. 그들의 충고는 욥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고통을 더하였다. 죄에 대한 징벌은 하나님의 진리이지만, 욥의 고난은 단순히 신앙 인격의 성숙을 위한 것이었다.

[4-5절]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말을 지어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카사크)[덜었으리라](KJV, NASB, NIV).

욥은 만일 친구들이 자기 같은 처지에 있다면, 자기도 그들을 비난하며 책망하며 그들을 향해 머리를 흔들며 그들을 멸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욥은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가상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때에도 자신은 입으로 그들을 위로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우리가 우리의 고난 당하는 형제나 이웃을 위로하는 것이다.

[6절]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나니 잠잠한들 어찌 평안하랴.

사람이 잠잠히 있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 말하는 것이 보통 그의 마음의 근심을 푸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이 없이 그의 근심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욥은 심각한 고난 중에서 친구들에게 말해도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7절] 이제 주께서 나를 곤고케 하시고 나의 무리를 패괴케 하셨나이다.

‘나의 무리’라는 원어(아다시)는 욥의 가족들과 종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BDB, NIV). ‘패괴케’라는 말은 ‘황폐케’라는 뜻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곤고케 하셨고 자기 가족들을 황폐케 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고 있었다.

[8절]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양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나의 죄를 증거하나이다.

욥은 자신이 심신으로 쇠잔케 된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하며 그의 파리한 모습이 그를 대적하여 증거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고난 중에 자신의 죄를 생각하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원문에는 ‘나의 죄’라는 말은 없다(KJV, NASB, NIV). 우리는 욥처럼 고난 중에 “내게 무슨 죄가 있는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9-14절]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군박(窘迫)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대적이 되어 뾰족한 눈으로 나를 보시고

욥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그를 찢으시며 대적하신다고 말한다. ‘군박하다’는 원어(사탐)는 ‘대적하다’는 뜻이다. 또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 이를 가시고 뾰족한 눈으로 보신다고 말한다. 뾰족한 눈은 동정 대신 미움의 마음을 나타낸다.

[10-11절]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나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경건치 않은 자에게 붙이시며 악인의 손에 던지셨구나.

‘입을 벌린다’는 말은 남을 비난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위문하기 위해 와서는 그를 혹독하게 비난했다. 그들은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더 나았다. 이웃 사람들도 그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그를 대적했다. 욥은 또 하나님께서 그를 경건치 않은 자에게 붙이시며 악인의 손에 던지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욥의 소들과 나귀들과 약대들을 탈취해간 이웃 나라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12-14절]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던져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그 살(라브)[궁수]로 나를 사방으로 쏘아 인정 없이 내 허리를 뚫고 내 쓸개로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그가 나를 꺾고 다시 꺾고 용사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욥은 평안히 지냈던 자신에게 닥친 이 혹독한 고난이 주권적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것임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15절] 내가 굵은 베를 꿰어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굵은 베는 꺼칠하고 감촉이 좋지 않다. 구약 성도들은 금식할 때 보통 굵은 베옷을 입었다. 욥이 굵은 베옷을 입은 것은 그의 고통과 탄식을 나타낸다. 또 욥은 자신의 뿔, 곧 힘이 티끌에 더럽혔다고 말한다. 욥은 힘도 없었고 존영도 잃어버렸고 그의 명예도 더러워졌다.

[16절]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사람이 마음의 고통이 심해 많이 울 때 그의 얼굴도 붉게 상기된다. 또 욥은 자기의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그가 많이 울어 그 눈이 쇠해졌고 그의 기력도 쇠하여 곧 죽을 사람처럼 눈꺼풀이 감기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17절]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카마스)[‘강포, 악행’]이 없고[내 손에 악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Gesenius)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앞에서도 여러 번 말했지만, 욥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이 악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또 그는 나의 기도는 정결하다고 말한다. 그는 고난 중에도 기도를 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가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믿음을 증거한다.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한다. 또 욥은 정결한 기도 즉 거짓과 위선의 말로가 아니고 진실과 진심의 말로 한 기도를 하였다.

[18절]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

욥은 자신이 남의 피를 흘린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감추지 않기를 원한다. 또 그는 그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한다. 그는 고난 중에 낙심치 않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19절]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이 높은데 계시니라.

‘보인(保人)’[변호자](KJV, NASB, NIV)이라는 원어(사헤드)는 ‘증인’(에드)과 동의어이다(BDB). 욥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하늘에 계신 그의 변호자가 그를 위해 증거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20-22절]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변백하시기를 원하노니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욥의 친구들은 그를 조롱하고 있으나 욥은 낙망치 않고 하나님을 바라며 눈물로 호소한다. “하나님, 저의 중심을 살피시고 제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고 바르고 선하게 살고자 애쓴 것을 증거하여 주옵소서.” 욥은 죽기 전에 하나님의 바른 판단을 받기를 원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친구를 번뇌케 하고 그에게 고통을 주는 위로자가 되지 말고, 바른 말로 충고하고 권면하되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가지고 참된 위로로 위로하는 자가 되자.

둘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욥처럼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믿고 우리에게 고난의 현실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그것을 거두실 이도 하나님이심을 알고 인내하며 하나님만 바라며 의지하며 살자.

셋째로, 우리는 평소에 불의와 강포와 악행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과 교훈대로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 또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 중에 낙망치 말고 인내하며 계속 진실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자.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증인이시며 변호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사람의 오해와 비난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께서 아시고 판단하실 것을 믿고 그에게만 의탁하며 호소하자.

17장: 욥--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함

[1절]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구나.

욥은 기운이 쇠했고 살날이 다했고 무덤에 들어갈 일만 남았다고 말한다. 중한 병에 걸린 자들이 겪는 심적 과정일 것이다.

[2절]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오히려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

그를 조롱하는 자들이 그와 함께 있고 그의 눈이 그들의 격동함을 항상 보는 것은 그를 더욱 피곤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3절]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 친히 나의 보주(保主)가 되옵소서.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 자[나를 보증할 자]가 누구리이까?

욥은 심신의 고통 속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보증자가 되셔서 보증물을 주실 것을 기도한다. 자신이 죄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다.

[4절]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워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친구들의 마음에 아직 깨달음을 주지 않으셨다.

[5절] 친구를 지적하여 해를 받게 한 자의 자식들은 눈이 멀지니라.

본절은 “친구들에게 아첨의 말을 하는 자의 자식들은 눈이 쇠할 것이라”는 뜻이든지(KJV), “자기 소득을 위해 친구들을 비난하는 자와 그의 자식들은 눈이 쇠할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NASB).

[6절] 하나님이 나로 백성의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건강하고 부요할 때는 그 앞에 친근히 하고 그를 무시하지 못하던 사람도 그가 재산과 자녀와 건강을 잃으니 그를 떠나가고 그를 비웃고 그를 멸시하는 것은 흔히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7절]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그의 온 지체가 그림자 같다는 말은 그의 사지백체가 쇠해져서 그의 어두어진 눈으로 보기에 그림자같이 희미하다는 뜻이거나, 그의 몸이 쇠해져서 그림자같이 죽어 없어질 것 같다는 뜻일 것이다.

[8절] 정직자는 이를 인하여 놀라고 무죄자는 사곡한 자[불경건한 자] (NASB, NIV)를 인하여 분을 내나니.

욥은 자신을 정직자와 무죄자로 표현하고 그를 비방하는 자들을 불경건한 자로 표현하며, 자신이 그들로 인해 분을 낸다고 말한다.

[9절] 그러므로[그러나 nevertheless](NASB, NIV)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굳게 붙들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욥은 자신의 고난의 현실을 인해 놀라고 친구들의 공박에 대해 화와 분이 나지만, 자신을 ‘의인’과 ‘손이 깨끗한 자’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길을 굳게 붙들기를 원하며 점점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참된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10-11절] 너희는 다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마음의 사모하는 바(모라쉐)[품은 생각]가 다 끊어졌구나.

욥은 친구들이 다 무지하다고 말한다. 또 그는 자신의 날이 지나갔으며 그의 계획과 마음에 품은 생각이 다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가 계획하고 그 마음에 생각했던 바는 그의 건강과 행복 등을 포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다 끊어졌다. 그는 이제 자신이 오직 죽음 앞에 서 있음을 느끼고 있다.

[12절]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이 어두운 데 가깝다[어두움 앞에서 빛이 가깝다](NASB, NIV) 하는구나.

‘그들’이라는 말은 악인들을 가리키든지(NIV) 아니면 그가 마음에 생각했던 바(‘그것들’)를 가리킬 것이다(Amplified Bible). 후자라면, 내 마음에 품은 생각들이 밤부터 낮까지 계속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뜻이라면, 후반부의 ‘어두움’은 심적 고통을 가리킬 것이다.

[13-15절] 내 소망이 음부로 내 집을 삼음에 있어서 침상을 흑암에 베풀고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 내 자매라 할진대 나의 소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소망을 누가 보겠느냐? 흙 속에서 쉴 때에는 소망이 음부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욥은 이제 죽음을 생각할 뿐이다. 그렇다면, 죽음만 생각하게 되는 자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사람의 소망이 죽음으로 다 깨어지는 것이 아닌가? 고난 가운데 있는 욥의 심정과 심리는 절망적이었다.

욥기 17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욥은 고난 중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그는 참으며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에게 호소하였다. 우리는 고난 중에 참고 하나님만 바라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들의 해답이시다.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인내이다. 주께서는 그의 재림 전에 있을 대환난 시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고(마 24:11-13), 요한계시록은 대환난 때에 성도들에게 필요한 덕이 인내와 믿음이라고 교훈하였다(계 13:10).

둘째로, 욥은 의인이 그 길을 독실히 행한다고 말했다. 참된 성도는 때때로 이유 없는 고난에 떨어지고 그런 현실 때문에 놀라고, 또 그를 오해하고 비방하는 자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는 그때에도 자기 길을 굳게 붙들고 바르게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욥은 인간적으로 매우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죽음의 문 앞에 선 인생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그런 자를 위로할 말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의 복된 소망을 주셨다. 사람에게 참 소망은 하나님께서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과 부활과 영생뿐이다.

18장: 빌닷--악인의 빛은 꺼진다

[1-2절]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빌닷이 욥에 대해 ‘너희’라고 말하지만, 그가 말하는 대상은 욥이다. “말을 찾는다”는 원어(키네츠)는 “말에 올무를 놓는다”는 뜻이다(BDB, NASB). 빌닷은 욥이 친구들의 말에 올무를 놓는다고 비난한다. 그는 욥에게 심지어 “깨달으라”고까지 말하며 그를 무지한 자로 몰아댄다. 그러나 그는 욥에게 바르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3절]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不淨)하게 보느냐?

‘부정(不淨)하게 본다’는 원어(타마)는 ‘부정(不淨)하게 여긴다’(KJV)는 뜻도 있으나, ‘어리석게 여긴다’(게세니우스, BDB, NASB, NIV)는 뜻이 더 적절해 보인다. 욥은 친구들에 대해 17:4에서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했었다.

[4절]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라는 원문은 “자신의 분노 중에 자신을 찢는 자”라는 뜻이라고 보인다(KJV).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에 불평하고 대항하여 분노를 품고 자신을 찢고 상하게 만든다.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선조들은 광야에서 항상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며 멸망을 자초하였다(민 11:1; 14:1-3; 20:4; 21:5). 물론 그것은 욥의 경우에는 적절치 않았다.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는 말은 하나님의 공의가 불변적이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5-6절]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그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빛과 불꽃은 기쁨과 행복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의 기쁨과 행복은 사라질 것이다. 그의 가정의 기쁨과 행복도 사라질 것이다. 잠언 13:9는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고 말했고, 잠언 24:20도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말했다. 악인의 기쁨과 행복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7절] 그 강한 걸음이 곤하여지고 그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악인들은 일시적으로는 그 걸음이 강한 것 같고 그의 베푸는 꾀가 형통하게 될 것 같아 보이지만, 그의 강한 걸음은 곧 곤하여지고 그는 자기가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다.

[8-10절] 이는 그 발이 스스로 그물에 들어가고 얽는 줄을 밟음이며 그 발뒤꿈치는 창애에 치이고 그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그를 동일 줄이 땅에 숨겼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렸으며.

악인이 스스로 망하는 까닭은 그의 발이 스스로 자기가 만든 그물에 들어가고 올무의 줄을 밟기 때문이다. 빌닷은 그를 동여맬 줄이 땅에 숨겨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려 있다고 말한다.

악인은 자기의 올무에 자기가 걸린다.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자기 집 뜰에 높은 장대를 만들었던 하만은 자신이 거기에 달려 죽임을 당하였다(에 7장). 또 다니엘을 모함해 사자굴에 던져 죽게 하려 했던 동료들은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지워 죽었다(단 6장).

[11-12절]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래고 그 뒤를 쫓아 올 것이며 그 힘은 기근을 인하여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악인에게는 도적이나 강도나 무서운 짐승이나 무서운 질병과 큰 사고 같은 무서운 것이 임하여 사방에서 그를 놀래며 그 뒤를 쫓아올 것이다. 잠언 10:24는,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라고 말한다. 악인의 힘은 기근으로 쇠해질 것이며 그의 곁에는 무서운 재앙이 기다릴 것이다.

[13절] 그의 백체가 먹히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 지체를 먹을 것이며.

“그의 백체가 먹히리니”라는 원문은 “그것이 그의 피부의 부분들을 먹으리니”라는 뜻이다(MT, NIV). 원문에서 ‘그것’은 그에게 임한 재앙을 말할 것이다. 재앙이 그의 피부의 부분들을 해할 것이며 마침내 그는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14절] 그가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혀서 무서움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힌다는 말은 가족들의 안정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며, 또 ‘무서움의 왕’에게 잡혀간다는 말은 평안을 잃고 극한 두려움에 떨어진다는 뜻이라고 보인다.

[15-16절]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아래서는 그 뿌리가 마르고 위에서는 그 가지가 찍힐 것이며.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 장막에 거한다”는 원문은 “그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그의 장막에 거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든지(BDB, NASB), 혹은 “그것[무서움의 왕]이 그 장막에 거하므로 그것이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리라”는 뜻일 것이다(게세니우스).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라는 말은 그 집이 완전히 불태워지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악인은 그와 그 가정이 일시적으로 번창하는 것 같아도 결국 자신도, 그의 자녀들도 다 멸망할 것이다.

[17절] 그의 기념[기억]이 땅에서 없어지고 그의 이름이 거리에서 전함이 없을 것이며.

의인들의 기억은 세상에 오래 남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전해지지만, 악인들의 기억은 땅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그의 이름은 거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전함도 없을 것이다. 멸망의 예(例)로 경계를 삼는 것 외에는, 아무도 그를 기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18-19절] 그는 광명 중에서[광명에서] 흑암으로 몰려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악인들은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만 곧 불행 속으로 몰려 들어가며 또 세상에서도 쫓겨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전까지 세상을 적어도 양심 있는 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유지되게 하실 것이며, 악인들이 세상에서 쫓겨나게 하실 것이다.

[19절] 그는 그 백성 가운데서 아들도 없고 손자[자손]도 없을 것이며 그의 거하던 곳에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

악인은 대를 이을 자들이 없을 것이며 또 그가 부요하였을 때 그의 집에 머물었거나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도 다 그를 떠날 것이다.

[20-21절] 그의 날을 인하여 뒤에 오는 자가 앞선 자의 두려워하던 것 같이 놀라리라.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그러하니라.

건강하고 부요하고 행복했던 자가 어떻게 그렇게 완전히 망할 수 있는지 이전 사람들도, 후대 사람들도 놀랄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의하고 악한 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자기 자신만 망할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집과 가정도, 가족들까지도 멸망할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믿음 없고 무지한 자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불평하거나 대항하지 말고 그의 섭리를 항상 긍정하고 순응하자.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의 온전함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며 선하시다.

둘째로, 악인들은 일시적으로 강하고 형통한 것 같으나, 그들의 빛은 꺼지고 그들의 기쁨과 행복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하게 살지 말고 오직 경건하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고(사 48:22) 질병, 사고 등의 무서운 것들이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고, 의인들은 주 안에서 바르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기억하고 모든 종류의 악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


19장: 욥--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다

[1-6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말로 꺾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내가 과연 허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는 것이니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긍하며 내게 수치될 행위가 있다고 증명하려면 하려니와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은 알아야 할지니라.

우리는 바른 충고라도 한두 번 한 후 그가 그것을 듣지 않으면 더 이상 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은 없겠으나 욥은 사람 앞에서는 지적받을 잘못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의롭게 살려고 애쓴 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셨고 욥은 친구들이 그 사실을 바르게 알기를 원한다.

[7-12절] 내가 포학[해]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판단받음]이 없구나.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갔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같이 보시는구나.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수축하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쳤구나.”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셨고 공의로 판단치 않으시고 그를 향해 진노하시며 그에게 큰 재앙을 내리셨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자신이 죽은 자와 같고 소망이 없다고 말한다.

[13-17절]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우거한 자와 내 계집종들은 나를 외인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청하여야 하겠구나.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내 형제들에게도 싫어함을 받는구나](BDB, NASB, NIV).

하나님께서는 욥의 형제들과 친지들과 가까운 친구들로 그를 멀리 떠나게 하시고 그의 집에 우거한 자들과 그의 종들과 여종들까지도 그를 무시하고 박대하며 또 그의 숨결을 그의 아내와 그의 형제들도 싫어하게 하셨다. 욥은 고통에 더하여 이런 무시와 따돌림을 당했다.

[18-22절] 어린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뿐이로구나.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

어린아이들도 그를 업신여겼고 그를 조롱하였고 그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를 미워하며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대적이 되었다. 그는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뿐이었다. 욥은 하나님의 손이 그를 치셨다고 말하면서 친구들에게 하나님처럼 그를 핍박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그를 불쌍히 여기라고 말한다. 까닭 없이 고난받는 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불쌍히 여김과 위로의 말이다.

[23-24절]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욥은 족장시대의 사람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시대에 글자와 기록하는 방법이 있었고 책이 있었고 돌에 새기는 일이 있었음을 보인다. 욥의 소원대로 그의 일들은 자세히 욥기라는 책에 기록되었다.

[25절]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救贖者)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이것은, 욥의 구속자(救贖者)시요 우리의 구주이신 메시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생활하실 것을 증거하는 놀라운 예언의 말씀이다. 이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참으로 놀라운 지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으로 성취되었다. 요한복음 1:14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도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사실을 알게 하셨다.

[26절]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육체 밖에서’라는 원어(밋베사리)는 ‘내 육체로부터’(from my flesh)(NASB), ‘내 육체로’(in my flesh)(KJV, NIV), 혹은 ‘내 육체 밖에서’(apart from flesh)(BDB, NIV 난외주)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내 육체로’ ‘내 육체로부터’는 아마 ‘부활하여’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다. 그것은 부활 신앙과 부활 소망을 보인다. ‘내 육체 밖에서’는 ‘영으로’라는 뜻일 것이다. 즉 이 구절은 욥이 죽어 그의 몸이 썩는다 할지라도, 장차 부활하여 성육신하신 하나님, 신적 메시아를 볼 것이라는 뜻이든지, 영으로 하나님이신 그를 볼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27절]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내 눈이 보리라”는 뜻이라고 본다(KJV, NASB, NIV). 욥은 자기를 구원하실 구주의 살아계심을 확신한다. 또 “내 마음이 초급하다(칼라)”는 원문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쇠하다”는 뜻이다(BDB, KJV, NASB). 욥은 자기 눈이 메시아를 볼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지금 마음의 쇠약함이 있음을 고백한다.

[28절]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꼬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원문에는 ‘그에게’라는 말이 ‘나에게’(비 י������)라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말하는 욥의 입장에서 표현된 것이라고 본다. 또 ‘일’은 친구들의 비난이나 욥의 고난을 가리킬 것이다. 친구들은 욥을 비난하고 공박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비난의 근원이나 욥의 고난의 원인이 욥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비난이 욥의 잘못 때문, 즉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뜻이거나, 욥이 자기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뜻일 것이다.

[29절]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욥은 친구들의 비난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며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분노를 ‘칼’ 혹은 ‘칼의 형벌’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친구들이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두려워해야 하며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야 한다고 암시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도는 때때로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난을 당하지만, 낙심치 말고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참고 기다리며 바르게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의롭고 선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성도는 그의 친했던 친구들이나 심지어 그의 가족들이 그를 무시하고 멀리하는 절망적 고난 중에서도 그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도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또 사람에게 가치를 두지 말고 하나님께만 두고 그를 의지하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셋째로, 욥의 구속자(救贖者)이시며 우리의 구속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속(救贖)을 이루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그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가 구속하신 자들을 위해 중보하신다. 로마서 8:34,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는 우리를 죄와 죽음과 지옥 불못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예수께서 우리의 구속자이심을 확신해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그것만 두려워하고 범사에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20장: 소발--악인은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

[1-5절]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므로 내 생각이 내게 대답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초급함이니라.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깨닫는] 마음이 내게 대답하는구나.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있어 옴으로 악인의 이기는 자랑도 잠시요 사곡한(카네프)[불경건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소발은 욥의 말이 자기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의 말로 들리지만, 그의 깨닫는 마음으로 그에게 대답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옛날부터 이 세상에 내려오는 진리를 말한다. 그것은 악인의 이기는 자랑이 잠시이며 불경건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라는 진리이다. 악하고 불경건한 자들이 일시적으로 이기는 것 같고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 같으나 그들의 결말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6-9절] 그 높기가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그는 꿈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던 환상처럼 쫓겨가리니 그를 본 눈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

악인은 일시적으로 그 지위가 심히 높아져서 하늘에 닿고 구름에 미칠지라도 마침내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며, 꿈같이 지나가므로 그를 본 자들이 그를 찾을지라도 볼 수 없을 것이다.

[10-11절] 그의 자녀들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그 기골[뼈들]이 청년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

악인의 자녀들은 궁핍해져서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할 것이며 그 자신도 자기가 번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돌려줄 것이며 그가 한때 육체적으로 강건했으나 그 강건함과 기운도 쇠잔해질 것이다.

[12-16절]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 식물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다시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그가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악인의 악은 자기에게 독이 될 것이다. 그가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않고 입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 식물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와 같이 쓰게 되고 독이 될 것이다.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으로 다시 토할 것이다. 악인의 악은 결국 자신에게 독이 되어 그를 죽게 만들 것이다. 이웃을 미워함이나 속임이나 도적질하거나 탈취하는 것 등이 다 그러할 것이다.

[17-19절]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수고하여 얻은 것을 도로 주고 삼키지 못할 것이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워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림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악인은 물질적 복을 누리지 못하며 ‘꿀과 엉긴 젖[뻐터나 크림]이 흐르는 강’ 즉 복된 환경(출 3:8; 신 32:13-14)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기가 수고하여 얻은 것을 도로 주고 자신이 먹고 즐기지 못할 것이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도 자기에게 즐거움과 행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악인이 망하는 이유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리는 일이나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은 일 등의 악행 때문이다.

[20-21절]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편안함이 없으며] 그 기뻐하는 것[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치(혹은 [재앙으로부터] 건지지) 못하겠고 남긴 것이 없이 몰수히 먹으니 그런즉 그 형통함이 오래지 못할 것이라.

악인은 편안함이 없고 그 원하는 것을 재앙으로부터 건지지 못하겠고 먹을것도 남지 않고 그의 형통함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22-23절] 풍족할 때에도 곤액[재난]이 이르리니 모든 고통하는 자의 손이 그에게 닿으리라.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밥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같이 쏟으시리라.

악인은 풍족함을 누릴 때 갑자기 재난들이 닥치며 모든 고통하는 자들도 손을 펴 그에게서 무엇을 취하려 할 것이다. 또 그가 배불리 먹으려 할 때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비처럼 그에게 내릴 것이다.

[24-25절] 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활이 쏘아 꿸 것이요 몸에서 그 살을 빼어 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느니라.

악인은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수 없고, 그 재앙은 그에게 치명적이며 큰 두려움이 될 것이다. 그 재앙으로 그는 죽음에 이를 것이다.

[26-29절] 모든 캄캄한 것이 그의 보물을 위하여 쌓이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사르리라.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인즉 그 가산(家産)이 패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날에 흘러가리니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산업이니라.

악인에게는 절망적 어두움이 임하며 하나님의 불이 그를 멸하며 하늘과 땅이 그의 죄악을 드러내며 그와 그의 가산을 없앨 것이다.


욥기 20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악인은 일시적으로만 형통하여 자랑도 하고 즐거움도 누린다. 우리는 일시적인 세상의 형통과 영광이나 육신적 즐거움을 구하지 말고 또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둘째로, 악인은 불의하게 재물을 모으며 가난한 자를 학대한다. 우리는 돈에 종이 되거나 돈을 사랑하지 말고 특히 불의하게 얻는 소득을 좋아하지 말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셋째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은 공의롭고 철저할 것이다. 악인에게는 평안과 형통이 없을 것이다. 악인의 악행은 매우 공의롭고 철저한 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선만 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