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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Job) 1장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음-10장 욥이 하나님께 탄원함

영국신사77 2020. 4. 15. 09:23


욥기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2월 21일 수정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 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야곱 벤 카임이 편집한 제2 랍비 성경(봄버그판)을 표준적 마소라 본문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고 본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음

2장: 욥이 자기 건강까지 잃음

3장: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함

4장: 엘리바스--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

5장: 엘리바스--하나님의 징계는 복되다

6장: 욥--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7장: 욥--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8장: 빌닷--네 자녀들이 범죄했기 때문이다

9장: 욥--하나님과 쟁변할 자 없다

10장: 욥이 하나님께 탄원함

11장: 소발--욥에게 회개를 촉구함

12장: 욥--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형통을 허용하셨다

13장: 욥--나의 허물과 죄를 알게 하소서

14장: 욥--인생은 그림자같이 신속하다

15장: 엘리바스--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

16장: 욥--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다

17장: 욥--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함

18장: 빌닷--악인의 빛은 꺼진다

19장: 욥--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다

20장: 소발--악인은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

21장: 욥--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한가?

22장: 엘리바스--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23장: 욥--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

24장: 욥--하나님께서 악인의 심판을 지연하신다

25장: 빌닷--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다

26장: 욥--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은 측량할 수 없이 크다

27장: 욥--악인은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다

28장: 욥--지혜는 고귀하다

29장: 욥--옛날은 복되었다

30장: 욥--그러나 지금은 고난 중에 있다

31장: 욥--나는 의롭게 살았다

32장: 엘리후가 말을 시작함

33장: 하나님은 자신을 다 알리지 않으심

34장: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심

35장: 사람의 선악은 하나님께 영향을 주지 못함

36장: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의로우심

37장: 하나님은 능력이 크심

38장: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심

39장: 동물 세계가 주의 손 안에 있음

40장: 네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41장: 온 천하의 것이 내 것이다

42장: 욥의 회개와 회복


서론

욥기의 저자는 전통적으로 욥 자신이거나 모세라고 본다.1) 어떤 학자들은, 욥의 사건이 족장 시대의 것일지라도, 욥기는 솔로몬 시대에 쓰였다고 보며,2) 또 어떤 이들은 심지어 욥기가 욥과 그 친구들의 실제의 대화를 쓴 역사가 아니고 하나의 드라마라고 하지만, 욥기는 희곡이 아니고 역사적 내용이다. 풀(Poole)은 말했다.

본서는 허구나 비유가 아니고 참된 역사이다. 그것은 우리가 거기에서 장소들, 인물들, 사물들과 그 상황들에 대한 정확하고 명확한 진술들(2:11; 42:14 등)을 가진 그 책의 전체 문맥으로부터, 또 에스겔 14:14와 야고보서 5:11같이 그를 경건과 인내의 참되고 두드러진 예로 말하는 성경의 후대 저자들로부터 충분하게 분명하다.3)

욥기 내용은 모세 이전 주전 2천년경의 족장 시대에 적합하다. 그것은 특히 욥의 오랜 수명(약 200세 이상)4)이나 제사 방식과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등에서 추론할 수 있다. 또 욥기의 배경은 이방 세계이다. 욥기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112회 사용하지만(엘 54회, 엘로아흐 41회, 엘로힘 17회), 여호와라는 명칭은 32회만 사용한다.5) 또 구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17회밖에 나타나지 않는 ‘전능자’(솻다이)라는 명칭이 본서에서는 31회나 사용된 것도 특이하다. 이런 점들은 욥기의 내용이 족장 시대의 사건이고 그 시대에 쓰여졌음을 보이는 것 같다.

욥은 ‘우스 땅’에 사는 자이었다(1:1). 우스 땅은 에돔 지역이었다고 본다(애 4:21). 헬라어 70인역의 욥기 끝에는 욥을 아브라함의 5대손인 에돔 사람(에서의 자손)이라고 증거하는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그의 이름은 전에는 요밥이었고, 그는 아라비아 아내를 취하여 엔논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다. 또 그 자신은 에서의 아들들 중 하나인 그의 아버지 자레와 그의 어머니 보소라의 아들이었으므로 그는 아브라함의 5대손이었다. 또 이들은 에돔을 다스리는 왕들이었고 . . . . 또 그에게 온 친구들은 에서의 자손들 중 데만 사람들의 왕 엘리파스와 소캐 사람들의 군주 발닷과 미내 사람들의 왕 소발이었다.6)

욥기의 주요 내용은 욥의 고난과 회복이다. 본서의 특징적 진리는 고난이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에는 (1) 죄에 대한 징벌로 받는 고난이 있다. 그것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2) 특정한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고 단지 신앙 인격의 훈련을 위한 고난도 있다. 욥의 고난은 그런 고난이었다.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고전 4:11-13; 고후 6:6-10; 11:23-27)도 이런 고난이었다.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죄의 징벌이 아니고 단지 그의 인격의 단련을 위해 주시는 고난이다. 성도는 이런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마 5:10-11; 행 14:22; 빌 1:29; 골 1:24; 딤후 3:12).

1장: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음

1-5절, 의인 욥

[1절]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우스 땅’은 에돔 지역이었던 것 같고(애 4:21), 욥은 아브라함 시대 사람이거나 그의 몇 대 자손이었던 것 같다.7)

본문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한다. ‘순전하다’는 원어(탐)는 비교적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을 가리킨다.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증거할 때(창 6:9), ‘완전한’이라는 말도 같은 뜻이다. 또 성경이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할 때도(딤전 3:2) 같은 뜻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에 비추어 또 자기 양심에 비추어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4에서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간증하였고,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2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다”고 말했다.

또 욥은 정직하였다. ‘정직함’은 올바름, 기준에 맞음이라는 뜻이며 의롭다는 말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바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또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악에서 떠난 자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경건의 본질이요(잠 1:7) 그럴 때 사람이 악을 떠날 수 있다(잠 16:6). 노아나 다니엘도 그러했다.

[2절]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욥은 많은 자녀들을 두었다. 자녀 출산은 하나님의 뜻이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물론, 자녀를 안 주시는 경우도 있다. 노아는 500세 이후에 세 아들을 낳았다(창 5:32). 아브라함도 100세에 한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자녀 출산은 하나님의 일반적 뜻이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다(시 127:3). 자녀 출산과 양육은 비록 힘든 일이지만 복되고 보람 있는 일이다.

욥은 자녀들을 낳아 기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우리는 수고롭고 복잡한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에녹도 그러하였다. 창세기 5:21-22,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독신(獨身)은 신앙생활하기에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정상적 신앙생활은 현실도피적 생활이 아니다. 정상적 신앙생활은 현실 속에서 수고하면서 사는 생활이다. 그것은 결혼한 사람들이 자녀들을 낳아 기르며 가정을 이끌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며 성도의 일차적 경건 훈련의 장소이다. 자녀는 가정에서 경건한 부모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법을 배운다. 성도는 가정에서 믿음과 사랑, 겸손과 인내, 순종과 용서 등을 연습한다. 가정에서 잘 생활하는 자가 바르고 좋은 인격이 된다.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교훈했다(엡 6:1, 4).

[3절] 그 소유물은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겨리[1천]요 암나귀가 5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욥은 물질적 부요함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물이며 재물의 복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도 복을 주시므로 그가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巨富)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었었다(창 26:12-14).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몸의 소생과 토지 소산과 가축들의 새끼의 복을 약속하셨다(신 28:4).

그러나 물질적 부요는 신앙생활에 큰 방해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며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24). 왜냐하면 부자는 마음이 해이해지고 교만해지고 하나님 대신 돈을 의지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다(딤전 6:9-10).

그러나 욥은 부자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고 교만치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고 재물에 종노릇하지 않았다. 그는 욥기 31:24에서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욥은 동방 사람들 중 가장 큰 자이었다. 동방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처의 자손이나(창 25:1-6),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이나(창 25:12-18), 에서의 자손을 가리킬 것이다(창 36장).

[4-5절]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칫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의 자녀들은, 아마 다 성장한 후에도,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누이들까지 청하여 함께 먹고 마셨다. 그들은 형제들 간에 우애가 좋았다. 욥의 가정은 부모와 자녀 간에 또 형제들 간에 사랑과 순종과 우애가 있는 모범이 되는 가정이었다.

그런데 욥은 그 잔칫날이 지나면 자기 자녀들이 혹시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하여 그들을 집으로 불러 성결케 하였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하나님게 번제를 드렸다. 욥은 죄의 심각성과 성결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건과 거룩함과 온전함뿐 아니라, 자녀들의 경건과 거룩함과 온전함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육신적 차원에서 자녀들을 위할 뿐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 자녀들을 위했다. 그는 자녀들의 구원과 신앙 인격을 위해, 죄 짓지 않게 하기 위해, 혹 지은 죄를 씻음 받게 하기 위해 힘썼다. 그는 부모로서 열 명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그러했다.

본문은 “욥의 행사는 항상 이러하였더라”고 말한다. 그는 한두 번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의 행사가 항상 그러하였다. 그것은 참된 자녀 사랑이다. 부모에게 주는 성경 교훈의 핵심은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라는 것이다. 잠언 22:6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교훈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의인 욥은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된다.

첫째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온전하였고 정직했고 악을 떠났다. 우리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온전하고 정직하고 악을 떠나야 한다.

둘째로, 욥은 많은 자녀들을 낳아 기르면서도 하나님을 잘 섬겼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을 잘 기르면서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

셋째로, 욥은 물질적 부요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잘 섬겼다. 물질적 부요는 많은 경우 신앙생활에 시험거리가 되지만, 욥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도 물질적 여유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

넷째로, 욥은 자녀들의 경건함과 온전함과 거룩함을 위하여 힘썼다. 부모의 첫 번째 의무는 자녀들을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인격이 되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가르치자.

6-22절, 욥이 재산과 자녀들을 잃음

[6-7절]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가리킨다. 욥기 38:7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다고 말한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들 중 하나이다. 그의 죄는 교만이었다(딤전 3:6). 사탄은 실재(實在)한다. 그는 에덴 동산에서 뱀 속에 들어가 하와를 범죄케 하였다. 요한계시록 12:9는 그를 ‘큰 용, 옛 뱀’이라고 불렀다.

사탄은 땅에 두루 돌아다니며 활동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죄 짓게 하고 성도들과 하나님의 일들을 대적하고 어지럽히며 파괴시킨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이며(요 8:44) 다윗을 격동시켜 인구조사를 하게 하였고(대상 21:1)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였다(슥 3:1). 그는 예수님을 시험한 자요(마 4장)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하며(고후 4:4) 세상의 죄악된 유행과 풍조를 조장한다(엡 2:2). 그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그는 온 천하를 꾀는 자이다(계 12:9).

사탄의 권세는 크다. 그는 이 세상 임금(요 12:31),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에 권세 잡은 자(엡 2:2)라고 불리우며 요한일서 5:19는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사탄은 마침내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0은, 세상 나라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최종적으로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운다고 예언하였다.

[8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순전하고 정직하고 경건하고 악에서 떠난 자이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이었다. 사람의 판단과 평가는 완전치 못하다. 사람은 다른 이의 중심을 알지 못하고, 그의 외모만 보기 쉽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귀한 종 바울을 비난하고 욕하고 악평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평가이다. 잠언 16:25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한다. 구약성경은 열왕들의 역사를 기록할 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자이었는지, 악한 자이었는지를 기록하였다. 솔로몬은 늙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치 못하였다(왕상 11:4). 아사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고(왕상 15:11), 오므리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상 16:25), 아하시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상 22:52). 열왕기상하에는 29번, 역대하에는 11번, 총 40번 ‘하나님 보시기에’ 혹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표현이 나온다.8)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지 말고 정직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남을 볼 때도 외모만 보지 말고 그의 중심을 살펴보려 하고 그의 신앙 인격을 유의해 보아야 한다.

[9-11절]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탄의 비난은, 욥이 까닭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물질적 복 때문에 섬긴다는 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적 복 때문인가? 그러면 물질적 복이 없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중단될 것이다. 그가 물질적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도 버릴 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고난을 받거나 순교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런 신앙은 고난을 견디기 어렵고 순교는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성경은 순수한 신앙을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씨 뿌리는 비유 중에, 돌밭에 떨어진 씨는 환난과 시험에 넘어지는 경우를 가리켰다(마 13:20-21).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했다(행 14:22). 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고(빌 1:29), 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고 말하였다(롬 14:7).

[12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의 소유물을 주관하는 권세를 주셨다. 손은 힘을 상징한다. 사탄은 세상의 것을 상당히 주장한다. 그는 욥의 모든 재산을 없애고 모든 자녀를 죽이기도 하였다. 누가복음 4:6에 보면, 사탄은 예수께 말하기를, 나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내가 나의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준다고 하였다. 사탄은 상당한 권세를 가졌다.

그러나 사탄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또 하나님의 허락하신 한계 안에서만 그 권세를 가지며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유일한 주권자이시다. 그는 사탄과 악령들도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귀신들은 심지어 돼지 속에 보내시기를 그에게 간구하였었다(마 8:31). 세상 끝에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악령들을 지옥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계 20:10).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심은 유익케 하시는 깊은 뜻이 있다. 사람은 평안할 때 교만해지고 해이해지고 범죄하거나 탈선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천국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세상의 헛됨을 알고 죄를 멀리하고 더 거룩해지며 하나님만 더 사모하고 의지하며 천국을 소망하게 되고 또 무엇보다 겸손해진다(시 119:67, 71; 고후 1:8-9; 12:7).

[13-22절]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赤身)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하루아침에 큰 재앙을 당했다.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들이 욥에게 와서 스바 사람이 습격하여 소와 나귀을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고 말했고, 또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양과 종을 불살랐다고 말했고, 또 갈대아 사람들이 습격해 약대들을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고 말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거친 들에서 대풍(大風)이 와서 집이 무너져 자녀들이 다 죽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때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말하였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가 주관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다. 그는 이 모든 일에서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해 어리석게 원망치 않았다. 열 정탐꾼의 불신앙적 보고를 받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던(민 14:1) 이스라엘 백성과는 너무 달랐다. 욥의 신앙과 의로운 인격은 고난 가운데서 더욱 빛났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에서 사탄과 악령들과 싸운다. 사탄과 악령들은 이 세상을 주관하며 때때로 성도들에게 시험과 고난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과 악령들이 오직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우리에게 고난을 줌을 알고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물질적 복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를 믿고 그를 섬기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고 그의 뜻과 계명에 순종하여 그 앞에서 바르게 살자.

셋째로, 우리는 재산과 자녀들을 잃었으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이다”라고 말한 욥처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원망치 말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가 주시기도 하고 취하시기도 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찬송과 영광을 돌리자.

2장: 욥이 자기 건강까지 잃음

[1-3절]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에게 닥친 재앙은 사탄이 준 것이지만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된 것이며 욥은 그런 고난 속에서도 그의 순전함과 믿음을 굳게 지켰다.

[4-5절]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람은 생명이 귀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희생해도 자기 생명이 보존되면 만족하지만, 몸이 병들어 죽을 지경이 되면,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께 욕할 것이라고 사탄은 주장한다. 사탄은 끝없이 변론하고 반론하고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송사쟁이이다.

[6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는 깊으신 뜻 가운데서 사탄의 활동 범위를 정해 어느 정도 허용하신다. 그는 사탄에게 욥의 건강을 치도록 허락하셨다.

[7-9절]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은 악한 피부병으로 욥을 쳤다. 심각한 악창이 그의 온 몸에 났다. 욥은 몸이 너무 가려워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었다. 그때 욥의 아내는 남편을 동정하거나 위로하기는커녕 그를 몹시 구박하였다. 그러나 욥은 믿음 없는 아내의 구박에도 낙망치 않고 더욱 믿음으로 나아갔다. 참 신자는 돛단배와 같다. 돛단배는 바람이 있어야 앞으로 잘 나아간다. 참된 신자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그의 믿음이 더욱 빛난다. 그는 더욱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의지하고 그의 계명을 지킨다.

[10절]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이것은 그가 앞에서 말한,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1:21)보다 더 진전된 고백이다. 욥은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전제하고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거저 받았으면 재앙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께 복 받는 것을 좋아한다면, 재앙 받을 때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자기 중심적이며 심히 이기적인 태도일 뿐이다. 욥의 고백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처분에 겸손히 순응해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크신 지혜와 의와 선으로 사람의 모든 일을 섭리하심을 믿어야 하고, 고난 중에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

[11-13절]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相約)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7일 7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의 친구 세 사람은 욥의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러 서로 약속하고 왔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에서의 자손이며(대상 1:45), 수아 사람 빌닷은 아마 아브라함의 후처(창 25:2) 혹은 첩(대상 1:32) 그두라의 자손일 것이다. 그들은 경건하고 존귀한 자들이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욥의 고난이 심각함을 알았다. 욥은 사람들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했다. 그들은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겉옷을 찢었고 하늘을 향해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렸다. 사람이 괴로움이 심하면 겉옷을 찢는다. 르우벤은 구덩이에 요셉이 없음을 보았을 때 겉옷을 찢었었다(창 37:29). 또 욥의 친구들은 7주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한 말도 못하였다. 욥의 큰 고통은 이렇게 묘사되고 증거되었다.

그러나 욥의 고통의 기간은 긴 것 같지 않다. 첫 번째 재앙은 하루에 되었고(13절) 두 번째 재앙은 첫 번째 후, 몇 일 안 되어서이었고, 친구들의 방문도 두 번째 재앙 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욥기 3장부터 42장까지의 내용은 방문하여 7일 후, 하루 동안의 일이라고 본다. 그러면 욥의 고난은 몇 달 정도이었던 것 같다(욥 7:3).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탄의 활동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사탄은 하나님께 나아와 욥을 비난하면서 그의 몸의 건강을 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구하였다. 사탄은 끊임없이 성도들을 비난하고 시험하며 오늘날도 세상을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그러나 우리는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들까지도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오직 우리 자신을 살펴 회개할 바를 찾으며 입으로라도 범죄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 벗은 몸으로 와서 죽을 때 벗은 몸으로 간다.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과 같이 때때로 하나님의 재앙을 받는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3장: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함

[1-10절]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男兒)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유암[어둠]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자들]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자들]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그 새벽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욥의 친구들이 욥을 방문한 지 7일 후에, 욥은 입을 열어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다. 그는 차라리 그 날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또 그 날의 새벽이 밝아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평안할 때 자기의 생일을 중요하게 여기며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심각한 고통 중에서는 생일이 결코 기쁜 날이 아니다. 생일의 저주는 이 세상의 삶의 헛됨을 잘 보여준다.

8절의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은 마술사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것은 욥이 그들을 인정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11-19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counselors)[모사들, 조언자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사림)[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버려진] 낙태한[낙태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욥은 또 그가 어찌하여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않았고 살아서 엄마의 젖을 빨며 살았는가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거기에는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의 임금들과 모사들이 있고 금은으로 집에 채운 존귀한 자들도 있었을 것이며 또 자신이, 태어날 때 죽어서 난 아이들처럼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 거기에는 악한 자들의 소란스러움도 없고 수고하고 피곤한 자들에게 평안이 있고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도 평안이 있을 것이며 종들에게는 자유함이 있다고 말한다.

[20-26절]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이는]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이는]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미쳤음이로다].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로게즈)[격동, 소동]만 임하였구나.

욥은 몸의 극심한 고통 중에서 죽음과 무덤을 심히 사모한다. 사람은 극심한 고난 중에 죽음을 사모하게 된다. 욥의 처지는 매우 고통스런 처지이었다. 그는 음식을 먹기 전에 탄식소리가 나며 그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그에게 임했고 그의 무서워하는 것이 그의 몸에 미쳤다. 그에게는 평안이나 평온함이나 안식이 없고 격동과 소동만 있었다. 사람은 고난 중에 죽음을 사모한다. 선지자 엘리야도 그러했다. 그는 바알의 선지자들과 갈멜산 대결에서 승리하고 그들을 다 죽였으나, 엘리야가 한 일을 아합 왕에게서 들은 왕후 이세벨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고 통보하자, 두려워 자기 목숨을 위해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며 말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고난이 많고 허무한 세상을 사랑하지 말자.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상 헛되다(전 1:2; 12:8).

둘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천국만 소망하자. 시편 39:5-7, [다윗도]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천국은 이 세상보다 더욱 사모할 만하다. 고린도후서 4:18, [바울도]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우리가 천국의 복됨을 안다면, 우리는 돈과 명예와 쾌락에 이끌려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 수 있다.

4장: 엘리바스--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

[1-6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너의 경외함이 네 확신이 아니며 네 행위를 완전히 함이 네 소망이 아니냐?(NASB, NIV)]

본장은 욥의 친구 중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이다. ‘염증이 난다’는 원어(라아)는 ‘참을 수 없다. 조급하다’는 뜻이라고 본다.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는 말은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조급하지 않겠느냐?”는 뜻 같다. 엘리바스는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말을 듣고 그의 생각을 말하지 않고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엘리바스는 전에 욥이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 즉 힘이 빠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 즉 낙망하여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또 그는 “그러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니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니 네가 놀란다”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어려움 당한 이웃을 위로하기는 쉬우나 막상 자신에게 그런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것을 이기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엘리바스는 또 욥에게 “너의 경외함이 네 확신이 아니며 네 행위를 완전히 함이 네 소망이 아니냐?”(NASB, NIV)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장래를 확신케 되고 행위를 완전히 할 때 장래를 소망케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형통함과 평안함이 있다. 시편 25:12-13,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또 행위를 완전히 하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다. 잠언 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잠언 10:9,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7-11절]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사자의 우는 소리와 사나운 사자의 목소리가 그치고 젊은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늙은 사자는 움킨 것이 없어 죽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엘리바스는 또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는 정직한 자는 망하지 않으나 악을 계획하고 행하는 자는 재앙을 당할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을 받을 것이며 사자같이 강한 자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징벌하시고 그는 엎드러지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악한 자들은 망할 것이다. 시편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1:6,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잠언 13: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기쁨과 행복]은 꺼지느니라.” 잠언 14:11,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섭리자, 심판자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은 신약성경도 여전히 증거하는 성경 진리이다. 로마서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갈라디아서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12-21절]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하여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異像)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그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느니라. 그때 내가 종용한[조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아침부터 저녁]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장막 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하루살이에게라도’(19절)는 구절은 ‘하루살이 혹은 나방(moth) 앞에서도’(KJV, NASB)라는 뜻이라고 본다. ‘장막 줄’(21절)이라는 원어(이스람)는 ‘그들의 탁월함’(KJV) 혹은 ‘그들의 장막 줄’(NASB, NIV)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장막 줄이 뽑힌다는 말은 장막을 거둔다는 뜻으로 사람의 육신의 죽음을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엘리바스는 사람이 아무리 의롭고 거룩하다 하여도 창조자 하나님보다 의롭고 거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욥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욥기 9:2,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수아 사람 빌닷도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라고 말했고(욥 25:4), 엘리후가 욥에게 노를 발하며 그의 부족을 지적할 때도 그가 하나님보다 자기를 의롭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욥 32:2).

사람은 실상 하나님 앞에서 의(義)를 내놓을 것이 없는 죄인이다. 그는 죄성을 가진 누추한 피조물이다. 더욱이, 사람은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존재이며 조만간 죽을 존재이고 그의 삶은 덧없이 짧고 허무하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사 40:6; 벧전 1:24). 또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셔서 인생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부족과 허무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경외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과 천국과 영생만 사모해야 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우리의 행위를 완전케 하자. 그것이 성경의 교훈이요 거기에 소망과 평안이 있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시편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잠언 4:18-19,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둘째로, 사람은 범죄하면 망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다. 시편 1:6,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1:6,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잠언 13:9,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 14:11,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로마서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하고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하신 완전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부족, 또 비천과 허무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소망해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이며 연약한 죄성을 가진 존재이다. 우리에게는 의가 없다. 사람의 행위는 부족하고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모든 죄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만 순종하며 그의 말씀대로 의롭게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존재이며 우리의 의는 누더기옷과 같음을 알고 겸손해야 한다.

5장: 엘리바스--하나님의 징계는 복되다

1-16절,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자

[1-2절]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천사들]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이는]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키느아)[화](BDB)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멸함이니라].

사람이 왜 분노하고 화를 내는가? 그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다 맡기지 않고 교만하고 욕심을 부리고 불만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분노와 화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특징이며 그것은 그들에게 해가 되게 한다. 그것은 오늘날 의학 상식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사람의 몸의 질병들의 원인이 되며 결국 사람을 죽게 만든다. 또 그것은 사람으로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기 쉽게 만든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26-27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고 그 마음에 온유와 겸손, 자족함과 이웃 사랑이 있으면, 분노와 화를 많이 줄일 수 있고 또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여기에 사람이 건강하게 사는 길도 있다. 즉 사람이 건강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야 하며(잠 3:7-8), 마음을 평안하게 하며 과로하지 말고 적당한 노동이나 운동을 하고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되 가급적 소식(小食)을 해야 한다.

[3-5절]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그 자식들은 평안한 데서 멀리 떠나고 성문에서 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그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미련한 자는 그 자녀들도, 그 재산도 다 복되지 못하다. 사람은 다 미련한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를 얻지 못하면 그 자신도, 그의 자녀도, 그의 재산도 복되지 못할 것이다.

[6-7절] [비록](키)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아니지만](KJV),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모든 사람들의 고난과 불행은 타고난 것과 같다. 그것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 기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여자에게 잉태와 해산의 고통을 선언하셨고 아담에게는 땀 흘리는 수고의 삶을 선언하셨다. 또 땅은 그로 인해 저주를 받았다(창 3장).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고난이며 고난으로 충만하다. 욥은 인간의 삶을 전쟁이나 품꾼의 날에 비교하였고, 또 인생이 괴로움이 가득하다고 말하였다. 욥기 7:1,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차바)[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군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욥기 14:1,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야곱은 자신이 지나온 130년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표현하였고(창 47:9), 하나님의 종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90:10).

사람의 참된 평안과 영생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8-11절]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시켜[일으켜] 안전한 곳에 있게 하시느니라.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들, 기이한 일들을 셀 수 없이 많이 행하셨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그가 행하신 기이한 일들로 가득하다. 시편 104:24는,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우주를 운행하시고 천지만물을 주관하신다. 그는 수없이 많은 짐승들과 새들과 물고기들을 기르시고 먹이신다. 시편 104:27은,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라고 말한다.

인간 사회에서의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도 그러하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의 구원 계획을 가지고 인류 역사를 섭리하신다. 그는 아브라함을 불러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그는 요셉의 생애를 섭리하셨고, 모세의 생애를 섭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많은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다. 그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또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 기이한 일들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의 기적, 죽음, 부활을 통해 복음을 확증하셨고 신약교회를 세우셨고 자기 백성에게 천국의 산 소망을 주셨다. 그는 오늘날 우리 개인의 영육의 삶도 섭리하신다. 그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12-14절]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므로 그들은 낮에도 캄캄함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간교한 자들, 세상적으로 지혜로우나 심령이 비뚤어져 있고 패역한 자들의 계획과 계교를 다 파하신다. 그는 그것들을 다 헛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시편 9:15-16은,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라고 말하였다. 또 고린도전서 3:19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을 자기 궤계에 빠지게 하신다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형들이 아버지 몰래 요셉을 팔아버린 일이 드러나게 하셨다. 그는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을 죽이려던 하만의 계획도 헛되게 하셨고 도리어 그와 그의 동료들이 죽임을 당케 하셨다. 또 그는 은 30에 주님을 배신했던 가룟 유다의 계획을 헛되게 하셨다. 유다는 그가 받은 돈을 유대 지도자들에게 도로 갖다준 후에 목매어 죽었다. 예수께서는 저 악한 유대 지도자들과 또 주님을 배신한 제자에 의해 십자가에 내어준 바 되었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15-16절] 하나님은 곤비한(에브욘)[궁핍한] 자를 그들의 입의 칼에서, 강한 자의 손에서 면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소망이 있고 불의가 스스로 입을 막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이며 또한 긍휼의 처분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고난으로 인해 도움이 필요한 성도들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며 악한 자들의 입과 손에서 건져내어 주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정당한 일 외에는 분노하지 말자. 우리는 교만과 욕심과 불만과 미움과 시기를 버리고 모든 일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온유와 겸손, 의와 선, 사랑과 자족함으로 살자.

둘째로, 사람은 고난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엘리바스는 사람이 고난을 위해 났다고 표현한다. 세상의 고난은 근원적으로 죄에서 왔다. 우리는 오직 사람의 참 평안과 영생이 되신 구주 예수님 안에 거하자.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악을 벌하시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행치 말고 악인들의 계획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공의로운 섭리자이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계명대로만 행하자.

17-27절, 하나님의 징계는 복되다

[17절]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 왜냐면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라는 표이기 때문이다. 잠언 3: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징계는 유익이 많다. 우선,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로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만든다. 시편 119:67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하고, 시편 119:71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말한다. 또 히브리서 12:10-11은,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한다.

모든 고난은 우리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소망하게 만드는 유익이 있다. 시편 39편에 보면, 다윗은 죽을병에 걸렸을 때 땅의 것이 그림자같이 헛됨을 깨닫고 고백하기를,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39:6-7). 사도 바울도 아시아에서 극심한 환난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죽을 고생을 하였을 때 이를 통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고후 1:8-9).

[18-20절] [이는]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고치심이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 자체로 끝나지 않고 유익을 주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신다. 부모는 자녀를 훈계하고 책망하고 벌을 주고 또 필요한 경우 매도 들지만 그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려 함이며 매를 때린 후에도 상처에 약을 발라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를 때리시고 고통을 내리시지만, 그 고통을 물리쳐 주시고 그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징계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개인이나 세상의 최종적 심판은 무서운 것이지만, 현실의 삶의 여정에서 받는 하나님의 징계는 감사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가지 환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섯 번이나 일곱 번 잘못을 해서 징계를 받아도 회개하면 구원해주시고 재앙을 거두어 주신다. 사람은 부족해서 실수하고 그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을 아시고 오래 참으시고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할 때 고쳐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

주께서는 세 번이나 그를 부인했던 베드로가 통회자복했을 때 그의 큰 실수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찾아오셨고 그에게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다시 주셨다. 주께서는 그의 부활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던 믿음 없는 도마에게도 찾아와 그의 믿음을 새롭게 해주셨다. 주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서로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마 18:22). 이것이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우리를 기근으로부터 지키시고 건져주신다. 시편 33:18-19는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 시에 살게 하시는도다”라고 말한다. 모든 생물들이 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때를 따라 먹을 것 주시기를 바란다(시 104:27).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자이시다(마 6:26). 그는 까마귀 새끼가 그를 향해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해 먹을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욥 38:41).

또 하나님께서는 전쟁 때에도 우리를 칼 권세에서, 즉 오늘날 말로 하면 총알이 빗발치며 포탄이 여기저기서 터지는 상황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건지신다. 그러므로 사무엘상 23:14는,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많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매일 찾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않으셨다고 증거한다.

[21절]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람들의 비난의 말들로부터도 피하여 숨게 하신다. 시편 31:20은,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口舌)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라고 말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멸망이 올 때도 피할 길을 주신다. 시편 91편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셔서 새 사냥꾼의 올무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이므로 성도는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대낮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한다고 고백하였다(시 91:1-8).

[22절]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아니할 것은.

성도는 멸망과 기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종류의 멸망이든지, 어떤 정도의 심한 굶주림이든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과 공급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로 고난을 주시지만, 그는 우리가 진실히 회개할 때 그 고난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다.

또 성도는 들짐승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리와 늑대, 또는 멧돼지 등의 들짐승들은 농작물을 해치고 사람도 해친다. 신명기 32:24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징벌로 들짐승들을 보내실 것을 경고하셨다. 에스겔 선지자는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징벌의 방법으로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보내실 것을 예언했다(겔 5:17; 14:21; 33:27). 에스겔 14:2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네 가지 중(重)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害)가 더욱 심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회개하며 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들짐승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지켜주실 것이다.

[23절]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밭의 돌들은 땅을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게 만든다. 또 날카롭고 뽀족한 돌들은 밭갈 때 사람의 손과 발을 상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밭에 돌이 우리와 언약을 맺게 하실 것이다. 또 들짐승도 우리와 화목케 하실 것이다. 들짐승이 우리에게 위협이나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에스겔 34:25는 하나님께서 회복의 시대에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24절]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양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장막의 평안함이란 가정과 가족들의 평안함, 즉 가족들의 건강과 일용할 양식이 있음과 환경적 평안과 가족들 간의 화목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거두시면, 가족들에게 질병과 궁핍과 불화가 찾아올 것이다.

또 양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다는 것은, 양들이 질병에 걸려 죽거나 사나운 짐승에게 찢겨 죽는 일이 없이 다 건강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말로 우리의 직장과 사업에 또 가정의 물질생활에 어려움이 없이 평안한 것을 말한다. 땀흘려 일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지만, 그 수고의 대가를 누리고 물질적 유여함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다. 신명기 28:4-5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몸의 소생과 토지의 소산과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25-27절]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네가 알 것이라.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 볼지어다, 우리의 연구한 바가 이 같으니 너는 듣고 네게 유익된 줄 알지니라.

자손들의 수적 번창은 하나님의 복이다. 다산(多産)은 하나님의 복이다(시 127:4-5).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이며 상급이다(시 127:3). 또 병약함 속에 겨우 연명함이 아니라 상당한 건강 속에 장수(長壽)함은 하나님의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모 공경에 대해 장수의 복을 약속하셨다(출 20:12). 잠언 16:31은 백발이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말했고, 잠언 20:29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이 백발이라고 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며 원숙한 인격자가 되어 임종을 맞는 것은 복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징계는 복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이며 또 유익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를 거룩케 만들고 믿음 있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고 달게 받아 거룩하고 믿음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또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회개하는 자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신다. 그는 일곱 가지 환난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기근과 전쟁과 사람들의 비난과 들짐승에게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 그는 마침내 우리의 가정에 평안을 주시고 생업에 복을 주시며 물질적 여유를 주시고 장수(長壽)와 다산(多産)의 복을 주신다.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고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족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바르게 살기만 힘써야 한다.

6장: 욥--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1-7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분한(카아스)[고통](NASB, NIV)을 달아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좋겠도다. 이는 그것이]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것임이로다].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성급]하였구나(BDB, NASB). [이는]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같이 여김이니라.

욥의 고난은 재산의 상실, 자녀들의 죽음, 몸의 병이었다. 이것은 전능자의 화살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었다. 즉 욥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했다. 욥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가 하나님께서 취하셨다고 고백했었고(1:21),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재앙도 주신다고 고백했었다(2:10).

그러면 해결책도 하나님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에서 그를 구원하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편을 회복시키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다시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32:39에서,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8-9절]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욥은 극심한 고통 중에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끊으시고 데려가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는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며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사람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됨을 알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다.

[10-13절] 그러할지라도[나를 죽게 하실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무자비한, 혹독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카카드)[부인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내가 무슨 기력이 있관대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관대 오히려 참겠느냐?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지혜(투쉬야)[건건한 지혜 혹은 영속적 성공]가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욥은 혹독한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받고 기뻐한다고 고백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요 기쁨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지 않은 까닭에 얻은 위로와 기쁨이었다. 시편 119편의 저자도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119:50, 92). 성도에게는 위로와 기쁨의 비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신비한 위로와 기쁨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을 가졌고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했다고 증거하였다(고후 8:2).

[14-15절]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고난 당하는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그는 전능자 경외하기를 폐하도다.]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거짓되이 행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

욥은 지금 고난 당하고 있으나 그를 위로하러 온 그의 친구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폐한 자와 같고(KJV, Poole), 마치 우기(雨期) 외에는 말라 있는 시내(와디 wadi라고 부름)와 같다.

[16-23절]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취었을지라도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고[그 길들은 굽어지고 없어지는도다](KJV, NASB)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리고[바라던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너희도 허망한 자라.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 내가 언제 말하기를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포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救贖)하라 하더냐?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일진대 고난 당하는 친구를 동정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마음과 그의 고통스런 처지를 이해하고 같은 마음과 감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하였고(엡 4:32),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같은 감정을 가지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했다(벧전 3:8).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우리도 이웃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24-27절]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그렇지만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뇨? 너희가 말을 책망하려느냐?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욥은 자기를 향한 자기 친구들의 책망이 잘못된 책망이라고 말한다. 그는 남의 허물을 구체적으로 지적함이 없는, 단지 추측만 가지고 하는 막연한 책망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는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고 말한다. 책망은 확실한 잘못에 근거해야 한다. 또 그는 남의 말꼬리나 잡는 책망도 잘못이라고 한다. 절망하는 자의 말은 바람 같은데 그 말꼬리나 잡고 책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한다. 또 그는 그들의 책망이 동정심이 없는 책망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너희는 고아를 제비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라고 말한다.

우리가 남을 책망하려면 그의 허물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지적하며 책망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상대방의 말꼬리나 잡는 자가 되지 말고 그의 말의 중심내용에 대해 논하며 잘못된 점을 책망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의 책망은 동정심을 가진 책망이어야 할 것이다.

[28-30절]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불의한 것이 없게 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

욥은 자기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 확신하며 말한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4장에서 자신이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고백하였다. 고린도전서 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양심의 판단에 스스로 자책할 것이 없을 때 담대함을 얻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2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라고 말했다.

욥기 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알자.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인 줄 알자. 우리는 우리의 고난을 남의 탓으로만 돌려 원망과 불평을 하지 말자.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자.

둘째로,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의로운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자.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우리는 의를 행함으로 고난 중에도 기쁨과 위로를 얻고 담대히 살자.

셋째로, 우리는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이지 말고, 변함 없는 참 사랑과 동정심을 가지고 고난 당하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고 구제하고 선을 베풀자. 또 우리는 남에게 잘못된 권면이나 책망을 하지 말고 바른 지식과 동정심을 가지고 권면하고 책망하자.

7장: 욥--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1-5절]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차바)[군대, 전쟁, 봉사, 힘든 노동](BDB, NASB, NIV)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군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군은 그 삯을 바라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야르케 솨웨)[헛된 달들 동안]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合瘡)되었다가(라가)[굳었다가] 터지는구나.

세상에는 평안이 없다. 모세는 시편 90:10에서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했다. 주께서는 사람들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마 11:28). 욥은 여러 달 동안 혹독한 고난을 경험하고 있었다. 욥이 고난 당한 기간은 여러 달이었다고 보인다. 세상에 고난이 있는 까닭은 첫 사람의 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해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3: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또 하나님께서는 장차 참된 안식의 세계인 천국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이다(롬 14:17).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린다. 히브리서 4:9-10,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6-10절]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무덤]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천을 짜는 베틀의 북은 쉴새없이 빠르게 움직인다. 욥은 자신의 날들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고 표현한다. 인생의 삶은 쏜살같이 빠르고 흐르는 물같이 신속하다. 모세는 7, 80년의 일생이 날아가듯이 신속히 간다고 말하였다(시 90:10). 한 주간이 빨리 지나가고 한 달이 빠르게 가고 한 해가 빨리 가며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가 찾아온다.

또 욥은 자신의 삶이 소망이 없고 한 호흡 혹은 바람(루아크) 같고 복된 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짧고 허무하다. 다윗은 시편 39편에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시 39:5-6). 야고보서 4:14는 우리의 생명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표현하였다.

욥은 자신이 조만간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이 짧고 덧없이 빠르기 때문에, 사람이 죽고나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지상에서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죽음으로 사람의 땅 위의 삶은 끝난다.

[11-16절]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용[큰 바다 짐승]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자리[침대]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愁心)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異像)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에쳄)[아마 ‘뼈의 쑤심’](BDB)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욥의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었다. 그는 ‘내 마음의 아픔’ ‘내 영혼의 괴로움’에 대해 말한다. 그는 육체의 고통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이유를 알지 못할 때, 또 믿음이 약해지거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 생기는 고통이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품는 바다인가, 또는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큰 바다 짐승인가라고 묻는다.

또 욥은 침상에서도 평안치 못했다. 침상은 하루하루 피곤한 인생에게 휴식의 공간이지만, 욥은 침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서운 꿈으로 인해 놀라고 이상(異像)으로 인해 두려움을 가졌다.

이러한 고통 중에서 욥은 죽는 것을 소원하여 말한다. 그는 이미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었다(욥 3:1).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기를 기뻐하시고 그 손을 들어 그를 끊으시기를 사모했었다(욥 6:8-9). 이제 그는 몸의 고통보다 숨이 막혀 죽는 것을 원한다.

[17-19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파카드 ד������������)[살피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시고 마음을 두신다. 시편 8:4도,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말하며, 시편 144:3도,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라고 말한다. 사람은 죄가 많고 부족한 존재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중하게 여기시고 선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아침마다, 분초마다 살피시고 시험하신다. 그는 사람을 잠시라도, 침 삼킬 동안이라도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포괄적이다. 그는 우리의 모든 삶,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시 121:4). 시편 139:1-4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말씀하셨다(마 10:30). 요한계시록 2:23에서, 주께서는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말씀하셨다.

[20-21절]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내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3)이시다. 그는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우리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고 우리의 혀의 말을 다 아신다(시 139:2-4).

20절 중간의 원문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이다(MT, KJV).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욥은 자신의 부족과 죄를 인정한다. 또 그는 죄의 보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낀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 앞에 의인은 아무도 없다. 욥기 34:21은,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신다”고 말한다. 또 히브리서 4:12-13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한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진심의 순종으로 조금 의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욥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치 않으시고 그를 주목하셔서 그의 심령으로 무겁고 피곤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고서는 사람은 자신의 죄들에 대해 아무 해결책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간청한다.


욥기 7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수고로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평안을 누리자. 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또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참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요 14:27). 천국은 영원하고 충만한 참된 안식의 세계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이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서 헛된 세상일에 시간을 다 쓰지 말고 세월을 아끼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엡 5:15-17)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선한 일들에 힘쓰자. 그것은 전도, 참 교회 건립, 바른 신학교 건립, 교회 내의 구제 등의 일들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죄인이며 무익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중히 여기시고 우리를 잠시라도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살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천국의 복을 주셨음을 감사하며, 평안할 때, 즉 심령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여유, 침상에서의 평안이 있을 때, 구주 예수님을 확신하고 또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과 도덕적 온전함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지만, 그때에라도 우리는 욥을 기억하고 또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잘 참고 감당하자.


8장: 빌닷--네 자녀들이 범죄했기 때문이다

[1-7절]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만일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고 주께서 그들을 그 죄(죄책 혹은 죄의 형벌)에 붙이셨다면](KJV, NASB),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그는]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빌닷은 욥의 자녀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여 데려가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빌닷의 말은, 욥의 가정에는 해당되지 않으나, 사람이 범죄하면 하나님께서 벌하여 데려가신다는 것은 일반적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므로 사람의 죄에 대해 벌하신다. 그는 사람이 범죄할 때 그나 그의 자녀를 죽이기도 하신다. 주께서는 요한계시록 2:23에서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 사람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받으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다.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또 회개하는 자는 현재 미약할지라도 장차 심히 창대케 되는 복을 누릴 것이다.

[8-10절] 청컨대 너는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이는]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없으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같음이니라].)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는 말을 발하지 아니하겠느냐?

옛시대 사람의 말과, 열조의 터득한 일은 옛길, 검증된 길이며 선한 길이다. 신명기 32:7에서, 모세도,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는 에녹에게, 노아에게,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다윗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며 그의 음성을 들었던 경건한 선조들의 증언과 지혜는 유익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고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렘 6:16). 옛적 길, 선한 길이 있다. 그것이 옛신앙, 보수신앙이다.

그것은 과거에 매이거나 미래지향적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며 어느 시대에나 가감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시대마다 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변질을 경계해야 한다.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7-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보수신앙은 귀한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15에서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전해진 내용]을 지키라”고 말했다. 성경은 옛날부터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저장소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보수해야 한다.

[11-13절] 왕골(고메)[파피루스 나무]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푸르러도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카네프)[불경건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빌닷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불경건한 자를 파피루스 나무나 갈대에 비교한다. 그것들은 진펄이나 물에서 왕성히 자라지만 아직 푸르를 때 다른 풀보다 일찍 말라버린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불경건한 자는 하나님 대신 사람이나 돈이나 세상 권력을 의지하는데, 사람은 악하고 연약하고 변하며 돈은 있다가 없어지고 세상 권력도 허무하다.

[14-19절]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식물이 일광을 받고 푸르러서 그 가지가 동산에 벋어가며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감기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그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그 길의 희락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악인들의 믿는 것은 거미줄 같다. 또 그들은 한때 왕성한 것 같아도 곧 자취를 찾을 수 없이 뽑히는 식물과 같다. 그래서 이사야 2:22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했고, 또 잠언 23:5는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했고, 시편 20:7은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고 했다. 하나님 대신에 사람과 돈과 재물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0절]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즉.

‘순전한 사람’이라는 원어(탐)는 ‘완전한 자, 온전한 자,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뜻과 계명대로 사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 자가 ‘의인’이다. 성경은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을 ‘의로운 자’라고 부른다(창 6:9; 욥 1:1; 겔 14:14, 20). 하나님께서는 그를 재앙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를 도우시고 건지시고 그에게 능력을 베푸신다. 시편 34:19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하고, 또 시편 37:25는,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는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다. 그는 악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고 그를 재앙에서 건져주지 않으신다.

[21-22절]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풍성히 주신다. 시편 4:7에서 다윗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창 12:3).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시고 그런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신다. 그는 그런 악인들의 장막을 없어지게 하실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을 알고 죄를 심각히 여기며 죄를 회개하기를 힘쓰자. 범죄치 않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이어야 한다. 범죄하는 부모와 자녀들은 망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다. 이것은 옛날부터 검증된 진리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식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옛길을 주목하고 참조하고 연구하되 성경을 힘써 읽고 연구하고 믿고 행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 것을 의지하는 불경건한 자가 되지 말고 늘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살고 그와 교제하자.

넷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정직하게, 즉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이 살고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자.

9장: 욥--하나님과 쟁변할 자 없다

1-15절,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고 순종하자

[1-2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욥은 친구들이 옳은 말을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진리이지만, 단지 그 적용이 적절치 않았다. 그러나 욥은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겠느냐고 반문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도덕적 표준이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사 64:6).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 3:10).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3:20-22).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0). 그 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뿐 아니라, 성도들의 성심의 율법 준행도 포함한다.

[3-4절]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사람은 하나님과 변론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유한한 죄인인 인생이 어떻게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말로라도 다툴 수 있겠는가? 인생은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도하며 그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고 실천하려고 힘써야 할 뿐이며, 하나님과 다투며 변론하려 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음을 굳게 하고 하나님을 거역한다면, 그는 결코 형통한 자가 될 수 없다.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와 오는 세상에서 결코 아무 좋은 것도 기대할 수 없다.

[5-7절]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이 흔들리며 그가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시며.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악에 대하여 노하시면 지진을 주셔서 산을 무너뜨리시고 옮기시며 땅을 움직이실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 종말의 징조들 중의 하나로 지진을 말한다(마 24:7; 계 16:17-20).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앙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기도 하신다. 그는 낮에도 어두움을 주실 수 있고 역사상 그런 일들이 있었다. 출애굽기 10:23에 보면,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들 중 아홉 번째 재앙에서 하나님께서는 애굽 온 땅에 3일 동안 캄캄한 흑암을 주셨었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었다(마 27:45).

[8-11절]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홀로 창조하셨고 바다도 주장하신다. 또 그는 북두성(곰 자리)과 삼성(오리온 자리)과 묘성(황소 자리)과 남방의 밀실(밀집된 별 자리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그는 하늘의 별들을 주관하는 자이시며 또 기적을 행하는 자이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그는 살아계시고 지금도 활동하고 계시지만 영이시므로 그의 지나가심과 활동을 사람들이 알 수 없다.

[12절]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는 천지만물을 주셨고 우리의 생명을 주셨고 우리의 가족을 주셨다. 그는 우리의 건강을, 재물을, 우리나라를, 그리고 우리의 모든 좋은 환경여건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빼앗으시기도 하신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물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주신 모든 것을 빼앗으실 수 있다. 그는 주로 사람들의 죄를 징벌하실 때, 주신 것을 빼앗으신다. 그러나 간혹 성도들의 훈련을 위해 무엇을 빼앗기도 하신다. 그는 생명을 빼앗아 죽게도 하시고, 가족을 빼앗아 고아와 과부가 되게도 하시고, 건강을 빼앗아 아프게도 하시고, 재물을 빼앗아 가난하게도 하신다. 그는 국가를 빼앗아 나라 없는 설움을 당케도 하시고, 좋은 환경을 빼앗아 고난을 당하게도 하신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빼앗으시는 것, 곧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을 피하거나 막아낼 수 없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그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죽이시면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고 가족을 취하시면 고아와 과부가 될 수밖에 없고 건강을 취하시면 아플 수밖에 없고 재물을 취하시면 가난할 수밖에 없고 나라를 취하시면 방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의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시다. 그는 신명기 32:39에서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11에서 하나님을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13-15절]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큰 바다 짐승]을 돕는 자들[라합의 동류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더불어 변론하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는 참으로 두렵다. 큰 바다 짐승과 그 동류들이라도 하나님 앞에 다 굴복할 것이다. 하물며 연약한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그 위엄 앞에 어떻게 서서 감히 하나님 앞에 무어라고 대답하며 변론할 수 있겠는가. 비록 우리가 의로울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대답할 수 없고 우리를 심판하실 하나님, 엄위하신 그에게 간구할 수 있을 뿐이다. 욥은 하나님의 엄위하심, 하나님의 능력, 특히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를 알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들의 의(義)가 내세울 것이 없는 의(義)임을 인정하고 있다.

사람의 의는 하나님 앞에 보잘것없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의 의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지 못한다. 신약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빌립보서 3:9는,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했다. 또 히브리서 10:19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자랑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이며 우리의 담대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뿐이다. 물론 순종의 삶은 더욱 평안과 담대함을 줄 것이다(요일 3:21-22).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엄위하신 절대주권자이심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힘이 강하시다. 그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엄위하신 심판자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를 거역할 수 없고 그와 다툴 수 없다. 그가 빼앗으시면 막을 자가 없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의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뿐임을 알자. 욥은 친구들의 말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한다. 사람의 행위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족투성이이며 완전하게 의롭지 못하다.

셋째로, 비록 우리의 의가 구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얻은 의이지만,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모든 말씀들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얻은 의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

16-24절, 고난 중에 하나님만 바라보자

[16절]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욥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주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눅 18:1).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했고(살전 5:17) 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했다(빌 4:6-7).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영적 호흡과 같다.

또 욥은 기도 응답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우리의 기도는 응답된다. 기도는 응답을 받는 데 가치가 있다. 시편 65:2는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고 증거한다. 주께서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마 7:7-8), 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셨다(요 14:14).

욥의 말은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을 때 교만치 말아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특히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비천한 피조물이며 부족하고 누추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을 받았어도, 우리의 부족한 점들을 생각하면 감히 무엇을 자랑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겸손과 두려움으로 감사해야 할 뿐이다. 기도 응답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때문에 영적 교만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17-19절]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

욥은 자신이 당하는 큰 고통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중에라도 불평하거나 낙심치 말고 그 고난이 하나님께로서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를 호출한다’는 원어(요이데니)는 ‘나를 호출한다’는 뜻이다(MT, BDB, KJV).9) 본문은, 내가 호출을 당하여 엄위하신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20절]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느낀다. 엄격한 기준으로 보면, 나는 죄인이며 내 속에는 사악함과 부패성이 있다는 것을 그는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사실상 항변할 자격도, 항변할 담력도 없는 인생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라 할지라도 그것을 달게 받고, 또 훈련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한다. 베드로전서 4:12-13은,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신다.

[21절]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멸시하리로다].

“나는 순전하다마는”이라는 말은 문맥상 “나는 순전할지라도”라는 뜻 같다(KJV, NIV). ‘순전함’이라는 원어(탐)는 ‘완전함, 흠 없음’이라는 뜻이다. 욥은 양심에 가책되는 것이 없는 순전한 삶을 살았다. 욥기 6:10,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욥기 6:29,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욥기 9: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로 에다 나프쉬)라는 원문은 “나는 나의 영혼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가 지금 왜 이런 처지에 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또 그 결말이 어떨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든지, 혹은 앞절과 더불어 그가 자신의 온전함과 의를 하나님 앞에서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든지, 혹은 뒤따르는 구절과 함께, 고난 중에 심히 피곤해서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며 존중할 힘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욥은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가망성이 없고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살고 싶은 의욕도 버리고 있었다. 욥은 욥기 6:8-9에서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고 말했고, 7:15-16에서는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뼈의 쑤심]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22-24절]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홀연히 재앙(쇼트 )[매, 채찍]이 내려 도륙될[사람들을 죽일]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맛사)[절망(BDB, KB, NASB, NIV) 혹은 시련(KJV)]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그가 그 재판관들의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의인에게도 고난과 재앙을 내리신다. 그는 악인에게 주시는 것과 비슷하게 의인에게도 고난을 주신다. 의인도 자연적 재해나 교통사고 등을 당한다. 또 악한 세상에서 의인이 불의한 재판을 받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또 보통은 그 재난이 욥의 경우처럼 일시적이지만, 어떤 경우는 순교의 죽음으로 끝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성도에게 닥친 이런 고난은 이해하기 어려운 불행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또는 영생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큰 일이나 큰 불행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성도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믿음을 증거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그를 믿는 것이, 그리고 진리가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며 순수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그러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악인들을 공의로 심판하신다. 그는 의와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평안과 복을 주시고, 불의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재앙과 화를 주신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선악을 심판하시고 보응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심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시편 58:11은,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고 말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또 기도 응답을 믿어야 하지만, 기도 응답을 받았을 때에 자신이 누추한 존재임을 알고 자랑치 말고 교만치 말고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때때로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으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을 달게 받고 자신에게 어떤 부족과 죄가 없는지 살피고 생각 나는 죄가 있으면 고백하고 버리기를 결심하며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의 긍휼과 위로와 힘과 구원을 구해야 한다.

25-35절, 고난의 해결책

[25-26절] 나의 날이 체부(遞夫)(루츠)[달리는 자](NASB, NIV)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움킬 것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욥은 고난 중에 자기의 날들이 빨리 지나간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날들이 달리는 자보다 빠르며 빠른 배와 같고 먹이를 낚아채려 내려오는 독수리와 같다고 말한다. 시편 39:5는 사람의 일생을 손넓이 만하며 없는 것 같다고 말했고, 시편 90:5는 그것을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는 풀 같다고 했다. 시편 90:10은 사람의 날들이 날아가듯이 신속히 간다고 말한다. 세월은 화살 같고 흐르는 물과 같다. 야고보서 4:14는 우리의 일생을 잠깐 보이다고 없어지는 안개라고 말했다.

욥은 그 고난의 날들의 빠른 흐름 속에서 행복한 일들을 볼 수 없었다. 사람의 일생은 고난의 길이다. 우리의 세월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우리는 이 빠른 세월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이 인간의 정로(正路)요 복된 삶인가? 에베소서 5:15-17은,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주의 뜻이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다. 성경의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성경에 명하신 선한 일들에 힘쓰는 것이다. 그것은 전도와 구제를 포함하여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한 선한 봉사의 일들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함이다(딛 2:14).

[27-28절]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욥은 고난에 대하여 두 가지 가능한 대책을 언급한다. 하나는 그의 원통함 혹은 불평을 잊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얼굴빛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 즉 마음을 기쁘게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대책은 잠시 도움이 되거나 많이 수련하면 약간은 도움이 될지 모르나, 참된 대책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대책일 뿐이다.

계속 그의 몸이 아프고 계속 그의 환경이 심히 어려운데, 어떻게 그것이 참된 대책이 되겠는가? 그는 그의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무죄(無罪)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죄인처럼 고통 가운데 버려두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망각이나 인위적 기쁨은 대책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참된 대책, 완전한 대책은 어디에 있는가? 참되고 완전한 대책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심령에 참된 평안과 위로를 주셔야 가능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의 환경을 회복시켜 주셔야 그의 고통이 그칠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참 대책, 완전한 대책이 되신다. 주께서는 친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원하였다(살후 3:16).

[29-31절] 내가 정죄(定罪)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욥은 본문에서 인간의 죄책(罪責)의 문제를 말한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정죄(定罪)하심이라고 표현한다. 죄인에게 고난의 징벌을 주시듯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난을 벗어나려는 모든 수고, 예를 들어 망각하는 것이나 마음과 얼굴을 기쁘고 즐겁게 가지는 것 등이 헛될 것이다.

또 그는 자신이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 즉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을지라도 주께서 그를 개천에 빠지게 하실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가지는 죄악된 생각, 죄악된 감정, 죄악된 말, 죄악된 행위들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 같고, 더욱이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 그것을 증거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깨끗한 옷을 더러운 몸에 입지 않듯이, 그의 옷이라도 그의 죄악된 몸을 싫어할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 사람의 고난의 해결책, 사람의 죄책의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람 속에나 사람의 행위나 노력에 있지 않다. 사람의 고난의 해결책은 오직 평안의 하나님 안에 있고, 사람의 죄책의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에 있다. 사도 바울은 담대히 말하기를,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다(롬 8:33-34).

[32-33절]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은 하나님께서 육신이 아니시고 영이시며 크신 위엄을 지니신 영이시므로 단지 육신적으로 대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위엄 앞에서 감히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질하여 재판할 수 없다’는 말은 ‘함께 법정에 갈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원고가 되시고 욥이 피고가 되든지, 아니면 욥이 원고가 되고 하나님께서 피고가 되시든지 간에, 그가 법정에 가서 자신의 고난의 정당성을 따져볼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또 그 둘 사이에 판결할 자도 없다고 말한다.

[34-35절]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

35절 후반절의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는 원문(키 로-켄 아노키 임마디)은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구나”라는 뜻이다(MT, KJV, NASB).

욥은, 하나님께서 고난의 막대기로 그를 치셨고 그를 누르시며 그 위엄으로 그를 두렵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그에게 감히 무슨 말씀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 막대기를 그에게서 떠나게 하시면 그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으나 지금 그의 처지는 그렇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욥의 심적 고통과 방황의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그 고난과 징계의 막대기를 거두시는 데 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의와 평강을 주시는 데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지혜롭게 살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 또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해 선한 일들을 힘쓰는 것이다.

둘째로, 고난 중에 망각이나 심리적 노력은 참된 해결책이 못 된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만 참 해답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참된 평안과 위로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인간의 고난의 해결은 오직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 안에 있고, 인간의 죄책의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거두어주셔야 우리가 평안을 얻을 수 있으며 모든 고난의 근본 원인인 우리의 죄책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해결되었다.

넷째로, 성도는 고난 중에 참으며 겸손히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기도해야 한다. 시편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복이다.


10장: 욥이 하나님께 탄원함

[1-2절]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

욥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그 고난 중에 두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며 그것을 알기를 원한다.


[3-4절]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호의의 빛]을 비취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

욥은 하나님께서 악한 꾀를 품는 악한 자들을 징벌하지 않으시고 호의를 베푸시는 것 같음에 대해 묻는다. 또 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외모로 보고 악한 자를 선한 자로 잘못 판단하기 쉬우나,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다르지 않으신가라고 반문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삼상 16:7) 공의로, 완전하게 판단하실 것이다.

[5-7절]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査實)[실상을 조사]하시나이까?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그러나]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자가] 없나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달리 사람의 일생의 모든 일들을 단숨에, 완전히,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판단하시며, 그래서 자신이 악하지 않음도 아실 것이지만, 자신이 현실의 고난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8-9절]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손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에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게 하시면, 그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10-11절]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출산케 하시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사람의 몸과 신체기관의 시작은 참으로 신비롭다. 엉긴 젖 같은 작은 수정란이 어떻게 정교한 몸과 몸의 각 기관이 되는지 참으로 신비롭다.

사람의 몸은 9,000억개 이상, 아마 수조 개의 세포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또 사람의 몸에는 200개 이상의 뼈들과 600개 이상의 근육들이 있다고 한다. 또 눈, 귀, 코, 입 외에 약 130개의 많은 기관들이 여러 계통들을 구성한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위와 식도와 내장과 간 등으로 구성된 소화기 계통, 코와 폐 등으로 구성된 호흡기 계통, 피와 심장 등으로 구성된 순환기 계통, 임파와 호르몬 등으로 구성된 내분비 계통, 뇌, 척추, 신경 등으로 구성된 신경계통, 그리고 비뇨기 계통 등이 그러하다고 한다. 사람의 몸의 구조는 참 정교하다.

[12절]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몸뿐 아니라 생명을 주셔서 살아 움직이게 하셨는데, 그것은 그 몸 속에 영을 주셨기 때문이다. 영 혹은 영혼은 사람의 생명 원리이다. 그것이 몸과 결합되면 몸은 산 자가 된다.


[13절]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은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고난의 일들, 현재의 재앙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섭리하신다.

[14절]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유치 아니하시나이다.

욥은 자신이 범죄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이 범죄한 적이 있으나 하나님의 죄사함을 믿었음을 보인다. 그러나 지금 그는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사해주셨는지 의문을 가진다.

[15절]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올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목도함이니이다.

욥은 자신이 악하면 화를 받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데도 머리를 들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많은 환난과 부끄러움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있는 것인가?

[16-17절]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기이한 능력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갈마들여[번갈아 가며]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갈마들어[번갈아 가며](칼리포스 웨차바)[교대(交代)들과 군대가](원문) 치는 것 같으니이다.

욥은 머리를 높이 들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항변하지만, 주께서는 사자처럼 그를 대하시고 그의 기이한 능력을 그에게 나타내신다. 주께서는 그의 친구들로 번갈아 가며 그를 치게 하시며 그를 향해 진노를 더하시며 군대가 번갈아 가며 치는 것같이 하신다. 의인도 때때로 고난을 당하고 그 고난의 이유를 잘 모를 때가 있다.

[18-19절]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찜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있어도 없던 것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겼으리이다.

욥은 극심한 고난 중에서, 왜 자신을 태어나게 하셨는가라고 하나님께 질문한다. 그가 차라리 태어날 때 죽어서 태어났더라면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며 있어도 없던 것같이 되어 태에서 곧바로 무덤으로 옮겼을 것이라고 말한다.

[20절]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저으기[조금이라도] 평안하게 하옵시되.

욥은 고난 중에 자신의 일생이 짧음을 더욱 느낀다. 다윗도 죽음 앞에서 인생이 손넓이만큼 되고 없는 것같이 짧다고 고백하였다(시 39:5). 욥은 이 짧은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고난을 그치시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을 거두시고 자신을 버려두셔서 조금이라도 평안을 얻게 해달라고 소원한다. 이 수고로운 세상에서 참 평안은 오직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

[21-22절]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이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세데르)[질서]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욥은 그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즉 그가 죽기 전에 그렇게 해달라고 소원한다. 무덤은 흑암의 땅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질서가 없다. 무질서와 혼돈뿐인 곳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게 살다가 당하는 고난을 참고 악인의 형통에 대해 불평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평소에 오직 바르고 선하게만 살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기다리자.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신비한 창조물임을 알고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영광을 돌리자.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고난의 이유를 잘 모르는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선한 뜻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이사야 50: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넷째로, 우리는 짧은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만 참 평안을 주심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