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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Isaiah) 1장: 이스라엘과 유다의 부패상-10장: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영국신사77 2020. 4. 14. 18:42


이사야 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5월 14일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 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야곱 벤 카임이 편집한 제2 랍비 성경(봄버그판)을 표준적 마소라 본문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이스라엘과 유다의 부패상

2장: 하나님의 날

3장: 유다의 멸망을 예언함

4장: 시온의 회복

5장: 하나님의 심판

6장: 이사야의 환상

7장: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함

8장: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따르라

9장: 메시아 왕국

10장: 앗수르에 대한 심판

11장: 메시아 시대

12장: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 찬송함

13장: 바벨론에 대한 경고

14장: 바벨론 왕의 멸망

15장: 모압에 대한 경고

16장: 모압의 멸망

17장: 다메섹에 대한 경고

18장: 구스에게 주는 메시지

19장: 애굽에 대한 경고

20장: 애굽과 구스가 사로잡힐 것

21장: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경고

22장: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

23장: 두로에 대한 경고

24장: 땅을 심판하심

25장: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함

26장: 구원의 노래

27장: 이스라엘의 회복

28장: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29장: 예루살렘에 대한 진노

30장: 이스라엘의 패역과 하나님의 은혜

31장: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32장: 메시아의 통치

33장: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34장: 열국에 대한 심판

35장: 새 세계

36장: 산헤립의 침입

37장: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38장: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39장: 바벨론 사자의 방문

40장: 이스라엘의 회복

41장: 너를 도우리라

42장: 주의 종

43장: 하나님의 백성

44장: 유일하신 하나님

45장: 하나님은 유일한 구원자

46장: 하나님은 절대주권자

47장: 바벨론의 멸망

48장: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49장: 이스라엘의 회복

50장: 메시야의 사역

51장: 하나님의 의와 구원

53장: 메시야의 고난과 대속사역

54장: 이스라엘의 영광스런 미래

55장: 하나님을 청종하라

56장: 고자(鼓子)와 이방인도 받으심

57장: 우상숭배자들을 고치심

58장: 나의 기뻐하는 금식

59장: 하나님께서 자기 의로

60장: 영광스럽게 회복됨

61장: 메시아의 구원 시대

62장: 예루살렘의 회복

63장: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함

64장: 하나님의 회복의 손길을 간구함

65장: 하나님의 심판, 새 하늘과 새 땅

66장: 하나님의 심판


본문 혹은 각주에 자주 사용된 약어

KJV

영어 King James Version.

NASB

영어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NIV

영어 New International Version.

LXX

고대 헬라어 70인역.

Syr

고대 수리아어역.

It

고대 라틴어역.

Vg

고대 라틴어 Vulgate역.

BDB

Brown-Driver-Briggs, Hebrew Lexicon of the O. T.

KB

Koehler-Baumgartner,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Langenscheidt

Karl Feyerabend, Langenscheidt's Pocket Hebrew Dictionary to the Old Testament.

NBD

The New Bible Dictionary. IVP.

Poole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JFB

Jamieson, Faussett, Brown의 주석.


1장: 이스라엘과 유다의 부패상

1-9절,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

[1절]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異像)이라.

이사야는 주전 740년부터 680년 사이에 남쪽 유다 나라에서 사역한 선지자이었다. 그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선지자인데, 다른 선지자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인용되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로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전달하였다. 그들이 전한 내용은 모세의 율법과 일치하며 그 율법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전한 내용의 요지는 죄의 책망과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 또한 회복의 예언들이며 그 회복의 예언들 중에는 메시아 예언도 포함된다.

[2-3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됨을 지적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배려하고 양육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효막심하고 배은망덕한 자식같이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거역하다’는 원어(파솨)는 ‘배반하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한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수없이 많이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았더라면 하나님께 순종했을 것이다. 그들은 짐승보다도 못한 자들이었다. 소와 나귀도 그 정도의 사랑을 받았다면 그것들은 그 주인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4-5절]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멸시하며]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이스라엘 백성은 범죄한 나라이며 허물진 백성이며 행악의 종자이었고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멸시하며 멀리하고 물러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모하고 귀히 여겨야 할 보배이신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버렸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를 맞으면서도 더욱 패역하였다. ‘패역하다’는 원어(사라)는 ‘거역하다, 변절하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배교하며 변절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였고 패역하였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 속에 있는 치료 불가능한 죄성이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고칠 수 없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17:9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하였다. ‘심히 부패한’이라는 원어(아누쉬)는 ‘절망적이게 악하다’(KJV), ‘치료 불가능하다’(NIV)는 뜻이다.

[5-9절] . . .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같이 황무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밭의 상직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징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평안을 빼앗으셨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징벌이 이스라엘의 높은 지도자들로부터 비천한 평민들까지 미쳤고, 그것이 육신적 질병과 정신적 피곤을 포함하였음을 보인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치료와 회복의 처방을 주지 않으셨다. 그들은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중한 병에 걸렸으나 의사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적절하고 좋은 약의 처방을 받지 못한 환자와 같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치료와 회복의 처방을 받지 못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또 이스라엘 땅은 황폐했고 성읍들은 불에 탔고 토지는 이방인에게 삼키웠다. 하나님의 징벌은 사회적, 경제적 재앙으로 임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징벌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도 있었다. 이사야는 딸 시온이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밭(오이밭--KJV, NASB)의 상직막[원두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다고 표현하며 만군의 여호와께서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그들이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로 이스라엘에게 조금 남겨 두셨다. 이사야서에는 ‘남은 자,’ ‘남는 자,’ ‘남아 있는 자’ 등의 말이 약 13번 나온다.2) 이것은 죄로 멸망케 된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을 암시하며 멸망케 된 인류 중 일부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의 선택을 암시한다.

이사야 1:1-9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배반하지 말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많이 받고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효막심하고 배은망덕한 자식같이 하나님을 배반하였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짐승보다 못한 자들이 되었다. 이성 없는 짐승들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주인을 거역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고 주인의 말을 듣고 그를 기쁘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에서 가장 큰 보배이신 하나님을 버렸고 매를 맞으면서도 더욱 거역하며 변절하였다. 그것은 인간 본성 속에 있는 치료 불가능한 죄성을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배반하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엄하게 징벌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전염병으로 치셨고 그들에게서 몸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빼앗으셨고 또 그들에게 치료와 회복의 처방을 주지 않으셨다. 그는 또 그들에게서 사회적 평안과 경제적 평안도 빼앗으셨다. 그들에게는 전쟁과 혼란이 있었고 기근과 궁핍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음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징벌 중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조금 남겨두셨다. 그것은 포도원의 망대 같고 오이밭의 원두막 같았다. 하나님께서 만일 조금 남겨두지 않으셨으면 이스라엘은 옛날 소돔과 고모라 성같이 완전히 멸망했을 것이다. 우리의 구원도 그러하다. 구원의 본질은 의(義)의 회복이다. 우리에게 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다. 바울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했다(롬 3:21-24).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과 그의 의(義)만 믿고 의지하자.

10-20절, 헛된 종교의식

[10절]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옛날 멸망당한 소돔의 관원들과 고모라의 백성과 다를 바 없었다. 옛날 소돔과 고모라는 물질적 풍요를 누렸던 성들이었지만, 심히 죄악되었고 불경건하고 음란했고 이웃 사랑의 실천이 없었다(창 13:13; 18:20; 19:1-13; 겔 16:49-50). 이와 같이,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회를 세우는 일에 무관심했고 해이하고 안이했고 부도덕했던 자들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이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1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스라엘 백성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수히 많은 제물들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들은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을 드렸고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드렸다. 오늘날 말로 표현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형식적인 예배들을 드렸고 헌금들을 바쳤다. 그러나 그런 예배들과 그런 헌금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다.

[12절]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밟는다’는 원어(라마스)는 ‘짓밟는다’는 뜻이다(BDB, NASB).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는 말씀은 형식적으로 성전을 드나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짓밟고 멸시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속임수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을 멸시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보이러 오라고 그들에게 요구한 적이 없으셨다.

[13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월삭들]과 안식일[안식일들]과 대회[대회들]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많은 제물들을 ‘헛된 제물’이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형식적인 것들, 즉 그들의 마음에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제물들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분향과 월삭들과 안식일들과 정한 절기들의 모임들을 가증한 것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는 그것들을 미워하셨다. 왜 그러하셨는가? 그것은 그들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종교의식이 아니었고 그들이 악을 떠나는 것이었다. 악을 버리지 않고 악을 행하면서 형식적인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헛된 일이며 가증한 일이었다. 오늘날도 우리는 악을 버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겨야 하고, 그렇지 않은 형식적인 예배나 기도나 헌금, 형식적인 예배회들과 기도회들과 집회들은 헛된 일이며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다.

[14절]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그들의 정기 집회들은 헛된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일이었으며 그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일이었고 그가 지시기에 곤비한 일이었다. 그런 형식적인 종교 의식들은 결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를 피곤하게 만드는 일들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런 예배, 그런 헌금, 그런 기도, 그런 찬양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는 참된 경건과 순종심으로 그를 섬겨야 한다.

[15절]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는 응답을 받을 때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기도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많이 기도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의 기도는 왜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이었는가? 그것은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손에 가득한 피는 살인의 피이며 미움의 피이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요일 3:15). 그들에게 미움과 살인이 가득한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는가?

[16-17절]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책은 한마디로 회개하라는 것이다. 모든 악을 버리고 선과 의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착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의와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성경의 요점이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18-20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많은 죄를 씻는 길은 한마디로 회개 곧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밖에 없다. 그것은 ‘마음의 순종’ 즉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였지만, 이제는 그의 뜻에 즐거이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고 하였다(행 2:38).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형식적인 교회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 형식적인 교회생활이란 하나님을 믿는 모양만 있고 악을 버리지 않고 선을 행치 않는 교회생활이다. 그것은 교회를 짓밟는 일이다. 이사야 1:12-14,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형식적인 교인에게는 진실하고 진지한 마음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와 기도, 그런 헌금과 그런 집회들을 헛되고 가증하며 짐스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교회생활을 하지 말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함과 진지함이 없이, 하나님께서 악이라고 지적하신 바들을 회개함이 없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바른 교회생활은 악을 버리고 계명을 순종하면서 하는 것이다. 이사야 1:15-17,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우리는 계명에 어긋나는 모든 악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악을 버려야 하고 부모를 공경치 않은 악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마음으로라도 남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고 음란을 버려야 하고 도적질하지 말아야 하고 거짓말하지 말아야 하고 탐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계명을 순종해야 한다. 계명의 내용은 의와 선이며 사랑이다. 우리는 범사에 올바르게 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어려운 사람들을 동정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 선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21-31절, 예루살렘의 타락과 회복

[21-23절]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었도다.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성의 타락한 현실을 지적한다. 예루살렘 성은 본래 ‘신실하던 성읍’이었으나, 지금은 육신적 음행과 영적 음행 즉 우상숭배가 가득한 성이 되었다. 공평과 의가 충만했던 그 성은 지금 살인자들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거기에는 의에 대한 이성과 양심의 판단이 없었다. 경건의 변질은 도덕적 부패를 가져온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떠난다(잠 16:6). 선지자는 또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라고 말한다. 찌끼가 섞인 은이 가치가 떨어지며 물이 섞인 포도주가 맛이 떨어진다. 이와 같이, 그 성은 무가치해졌고 그들은 더 이상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또 유다의 지도자들은 패역했다. ‘패역하다’는 원어(사라르)는 ‘완고하고 반항적이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완고하고 반항적이었다. 그들은 도둑들을 처벌하기는커녕 도둑들과 단짝이 되었다. 그들은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좋아하였다. 그들은 고아나 과부 같은 자들의 억울한 송사를 정당하고 의롭게 처리하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당시 구약교회는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심히 부패해 있었다. 신약교회의 역사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

[24-27절]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아비르) [권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으며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救贖)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救贖)이 되리라.

선지자는 자기의 말과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구별한다. 물론 그들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 속에서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며 말씀을 선포할 때도 있다. 이처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선포하는 자들이었다. 이사야는 타락한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을 전하였다. 그것은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의 마음을 함께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예루살렘 성을 징벌하시고 깨끗게 하시고 이전과 같이 회복시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24, 25, 26절에서 ‘내가,’ ‘내가,’ ‘내가’라고 반복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일을 행하실 것을 보인다. 심판과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자이시며 또한 구원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과 구원을 행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것인가? 그는 악인들을 제거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대적과 원수는 바벨론 사람들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중 악인들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포로로 삼은 바벨론 나라를 징벌하실 것이며 그것이 이스라엘의 회복의 기회가 될 것이지만, 그는 또한 이스라엘 나라 중의 모든 악인들도 공의로 징벌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 안의 찌끼와 혼잡물을 온전히 제하여 버리실 것이며 그들의 지도자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시키실 것이다. 한 사회가 바르게 되려면 그 사회의 지식인들과 지도자들이 바르게 되어야 할 것이다. 천국에는 악인들이 없을 것이다. 참된 교회 안에도 드러나게 죄를 짓는 악인들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 예루살렘은 다시 경건하고 의로운 성이 될 것이다. 이것은 참 교회와 천국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죄인들은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구원은 의의 회복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로 사람을 구원하시고 의인 되게 하시며(롬 1:17; 3:21-26) 또 실제로 의와 거룩을 행케 하실 것이다. 구원받고 회복된 새 세계는 의의 세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참된 교회와 천국에서 그것을 볼 것이다.

[28-31절]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이사야 선지자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다. 그들이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고 그들이 택한 동산으로 인해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이 그곳들에서 행했던 우상숭배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뜻이다. 선지자 호세아도 말하기를, “저희가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아름다움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행하는도다”라고 하였고(호 4:13), 후에, 선지자 예레미야도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라고 하였다(렘 2:20).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우상숭배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 그들은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며 물 없는 동산 같을 것이다.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악인들은 물 없는 동산에 잎사귀가 마른 상수리나무같이 완전히 불타서 멸망할 것이다. 패역한 자들과 죄인들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거슬러 행한 자들은 다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의 심판은 다 이루어질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과거의 잘한 점을 자랑하지 말고 현재의 부족을 살피자. 예루살렘 성은 신실하고 공평이 충만하며 의가 있는 성이었고 은과 같이 가치가 있고 포도주같이 맛이 있고 즐거움을 주는 도시이었으나, 지금은 도덕적으로 타락하였고, 찌끼가 섞인 은 같고, 물이 섞여 맛이 떨어진 포도주같이 되었다. 과거의 잘한 것은 잘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재가 어떠한지 물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잘한 점들을 자랑하지 말고 현재 우리의 영적 상태, 신앙적 상태가 어떠한지 또 우리의 현재의 도덕적, 인격적 부족이 무엇인지 살펴야 하고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구주 하나님만 의지하자. 하나님의 옛 백성 이스라엘은 심히 부패하고 타락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 가운데서 찌끼를 청결케 하고 그들을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깨닫고, 사람이나 사람 속에 있는 선한 무엇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감사하고 찬송하며 예수 그리스도만 항상 의지해야 하고 또 우리의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성령님의 도우심만 의지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실제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와 방향은 의와 거룩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의를 이루셨다(롬 10:4).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행 10:43; 13:38-39; 롬 3:22). 이것은 법적인 의이며 법적인 구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적으로도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롬 8:13).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불결한 자들은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현실 속에서 실제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2장: 하나님의 날

1-4절, 여호와의 전의 산

[1절]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미가 4:1-3도 본문과 똑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사야와 미가는 같은 시대에 사역한 선지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 선지자에게 같은 내용의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내용은 “말일에” 즉 “마지막 날들에” 되어질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신약시대에 관한 것이었다. 신약시대는 말세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말하였고(벧전 4:7), 사도 요한도 그의 서신에서 “이것이 마지막 때라”고 말하였다(요일 2:18).

성경에 의하면, 인류의 역사는 대략 주전 4천년 전부터 시작된다. 구약시대가 약 4천년이며 신약시대가 지금부터 약 2천년 전부터이다. 천지 창조는 주전 4천년경에 있었다. 노아의 출생은 주전 3천년경에 있었고, 아브라함의 출생은 주전 2천년경에, 또 다윗의 출생은 주전 천년경에 있었다. 신약교회 시대는 2천년이 흐르고 있다. 이 2천년은 교회의 확장의 기간이었지만, 그 중 주후 500년부터 1500년까지 천년 동안은 서방교회가 매우 부패하고 변질된 기간이었다. 이것이 로마 천주교회 시대이었다. 주후 1500년대 초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교회가 새로워졌고 개신교회들이 세워졌고 부흥하며 확장되었다.

19세기 이후 세계복음화가 힘있게 촉진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 교회들은 다시 불신앙과 배교에 떨어지고 있고,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선전과 잘못된 연합운동과 은사운동, 그리고 교회음악과 예배 형식에 있어서의 세속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다. 역사의 대종말이 가깝다고 느껴진다. 인류 역사 6천년은 지루하고 매우 긴 시간이다. 역사는 시작이 있고 대종말이 있다. 그 후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 즉 복된 천국과 두려운 지옥이 있다.

[2절]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여호와의 전의 산’은 시온산으로서 신약교회를 가리키고, 또 ‘모든 산꼭대기’와 ‘모든 작은 산’은 이방 나라들과 이방 종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교회는 모든 나라들과 이방 종교들 위에 뛰어날 것이다. 이 일은 역사상 충분히 증거되었다.

만방이 그리로 모여든다는 것은 세계복음화를 말한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에게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신약교회 안으로 모여들며 강물처럼 흘러 들어올 것이다. 이것이 세계복음화이다. 이것은 성경에 밝히 계시된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고(창 22:18), 시편에는,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67:3),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113:3), 또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117:1)라고 말하였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엄숙히 명하셨다. 그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말씀하셨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 신약교회에 주신 최대의 임무와 사명이다.

[3절]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道)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많은 민족과 백성이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를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족속이 신약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을 보인다. 주 예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세상]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4:14). 사도 요한은 환상 가운데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선” 것을 보았다(계 7:9). 그는 또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라고 외치는 하늘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었다(계 11:15). 세계복음화는 성취되고 있고 마침내 다 성취될 것이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전파될 것이다. 주께서는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라고 하셨고(눅 24:47),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8).

[4절]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세상의 만국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있은 후에 세상에는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다. 칼은 쟁기날이나 만들고 창은 낫이나 만들 것이다.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이 없을 것이며 전쟁을 위한 연습이나 훈련도 없을 것이다. 평화로운 나라가 올 것이다. 천국은 의와 평안이 충만한 세계일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도, “그 날에는 . . .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고 예언하였다(호 2:18).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신약시대가 마지막 때임을 알자.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마지막 날들의 일들은 신약시대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신약시대는 이미 종말의 시작이다. 물론 그것은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으로 그 절정을 이룰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구약성경에 예언된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인류의 유일한 구주이시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다른 구주는 없으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센 마음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고(행 11:23),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고(행 13:43),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만 거해야 한다(행 14:22).

셋째로, 우리는 세계복음화가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인 줄 알고 세계복음화의 대업(大業)에 동참하자. 사도 시대에 이미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 시작했다(롬 15:19). 바울은 이 복음이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라고 증거하였다(골 1:23). 오늘날 이 복음이 세계 곳곳에 전파되고 있으나 아직도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있다면, 우리는 전도자들을 그곳으로 보내야 하며 전도지들을 그곳에 배포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복음화의 일에 직접 몸으로, 또 기도로, 또 헌금으로 동참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평안의 날을 소망하자. 하나님의 마지막 대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 후에 평안의 새 세계가 임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평안의 왕으로 오셨다(사 9:6-7). 천국은 의와 평안의 나라이다(롬 14:17). 하나님의 약속대로 의인들만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다(벧후 3:13). 그때는 모든 눈물과 고통과 질병과 죽음이 없을 것이다(계 21:4). 우리는 이 의와 평안과 기쁨의 천국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자.

5-11절, 하나님께서 버리심

[5절]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빛은 지식과 진리와 의와 기쁨을 상징한다. ‘여호와의 빛’은 하나님의 지식과 진리, 그의 의와 기쁨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과 진리 안에 행해야 하며 그의 의와 기쁨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며 영생이며, 사람의 참 행복이 거기에 있다.

[6절]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인 야곱 족속을 버리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이유는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죄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죄는 무엇보다 우상숭배의 죄이었다. 우상숭배는 죄 중에 첫 번째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기는 죄이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이방인들과의 교제에서 비롯되었다. 이스라엘 땅에는 동방 풍속, 곧 앗수르와 바벨론의 풍속이 가득했다. 그것은 무역이나 국제결혼 등을 통해 들어왔을 것이다. 그들은 블레셋 사람같이 술객이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의 거짓된 신비주의가 이스라엘 땅에 유행하였다. 또 그들은 이방인들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다. 참 종교의 부패는 이처럼 잘못된 교제를 통해 시작되었고 조장되었다.

[7-9절]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였다. 그들의 경제력은 컸고 군사력은 강하였다.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자신들의 물질적인 유여함과 군대의 힘을 의지하였을 것이다. 우상숭배는 물질적 유여함과 사회적 안정 속에서 더 활발해지는 것 같다. 그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우상을 만들고 자기들의 손가락으로 만든 그것을 공경하여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손으로 만든 허무한 것을 섬기고 있었다. 우상숭배에는 천한 자나 귀한 자가 차이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버리심은 더 이상 용서가 없는 하나님의 마지막 조처이었다. 그것은 신약성경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같았다. 사도 요한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고 말하였다(요일 5:16). 이스라엘 백성은 용서받지 못할 심각한 죄악의 자리에 떨어지고 있었다.

[10-11절] 너희는 바위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그 날에 사람의 교만한 눈이 낮아지며 사람들의 높은 마음이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버리심의 결과에 대해 증거한다. 하나님의 버리심의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다. 그들은 바위틈에 들어가며 땅 속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해야 할 것이다. 모든 죄가 그러하지만, 특히 우상숭배의 죄는 사람의 교만과 높은 마음의 결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나타날 때 사람들의 교만한 눈과 높은 마음은 다 꺾어지고 부서질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결말이며 인류 역사의 결말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상숭배를 멀리하자.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근본적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우상숭배는 사람의 죄 중에 가장 큰 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계명 중 첫째와 둘째의 계명을 어기는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은 참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이다. 현대의 우상은 돈과 쾌락이다. 우상숭배자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계 21:8).

둘째로, 우리는 불신자와의 교제를 조심하자. 하나님께서 야곱 족속을 버리신 까닭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였고 블레셋 사람처럼 술객이 되었고 이방인들과 손을 잡아 언약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방인들과의 교제가 그들을 부패시켰고 우상숭배에 떨어지게 하였고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겠느냐?”고 교훈하였다(고후 6:14).

셋째로, 우리는 물질적 유여함을 의지하지 말자. 이스라엘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했고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였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는 그들로 안이하게 만들었고 그들로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게 하라”고 교훈했다(딤전 6:17). 우리는 물질적 유여함을 의지하지 말자.

넷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자.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사람의 모든 교만과 우상숭배가 다 파하여지고 여호와 하나님만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만 높이자.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성경 전체의 요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식과 진리, 하나님의 의와 기쁨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육의 참된 행복과 영생의 길이다.

12-22절, 여호와의 날

[12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본문은 그가 앞에서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고 말한 것에 대한 이유이다. 그 이유는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한 자들과 거만한 자들과 자고한 자들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하늘의 군대인 천군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시는 여호와라는 뜻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이며 그의 심판의 수종자들이다. 그들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여호와의 날 곧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와 징벌의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은 모든 교만한 자들과 거만한 자들과 자고한 자들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할 것이다. 교만은 인간의 가장 큰 죄이며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다. 하나님 없는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교만이다. 그들은 사람을 만물의 척도로 본다.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고 사람이 기준이다.

교만은 하나님 대신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교만한 자는 자기 주관, 자기 주견, 자기 고집만 내세운다. 또 그것은 불순종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적하는 인간 중심의 사상은 사상적 교만이며, 선을 행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도덕적 교만이다. 성경을 좀 읽는 자, 기도를 좀 하는 자는 신앙적 교만, 영적 교만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 물리치시고 낮추신다.

실상,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은 세상을 만든 자가 아니다. 자기 자식도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고 단지 낳았을 뿐이며 조물주의 도구가 된 것뿐이다. 사람은 자기의 존재 목적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죽음 후의 일도 알지 못한다. 사람은 세상의 기원도, 세상의 종말도 알지 못한다. 사람은 질병 앞에서나 죽음 앞에서 심히 무능하다.

[13-16절]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과 모든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과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라는 말은 이웃 나라의 교만한 지도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은 교만한 이웃 나라들을 가리키고, “모든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은 그들의 강한 성들을 가리켰고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은 물질적 부요를 가리켰다고 본다. ‘조각물’이라는 원어(쉐키이요옷)는 ‘보물들, 조각품들’이라는 뜻이다. 부자는 교만하기 쉽다.

[17-18절]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 잠언 6:16-17,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온 세상의 주권자와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목적이시며 최고의 가치 곧 가장 귀한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따라야 한다. 시편의 히브리어 명칭은 ‘찬양들’이라는 뜻이다. 시편의 주요 내용과 결론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높이며 찬양해야 한다.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다. 우상은 사람이 고안해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교만과 무지 속에서 자기 뜻대로 만들어낸 헛것이다. 시편 115:4-8,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오늘날의 우상도 마찬가지다. 돈과 세상의 부귀, 영광, 권세, 명예, 또 육신의 쾌락 등은 헛된 우상이다. 에스겔 7:19,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뜨리는 것이 됨이로다.”

[19-21절]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지고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오면, 사람들은 자기들이 섬겼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이 다 쓸모 없고 무가치하고 무익하고 무능한 것임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것들을 던져버릴 것이다. 그들은 바위굴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위엄과 그 위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며 그것을 보고 심히 두려워 떨 것이다.

[22절]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의지하지 말라’는 원어(키들루)는 ‘끊으라’는 뜻이다. 그것은 사람을 높이고 자랑하고 의지하는 것을 끊으라는 뜻이다. 사람은 그 호흡이 코에 있으며 수에 칠 가치가 없다. 사람의 모든 대단하게 보이는 것들은 그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고 다 헛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거나 높이거나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모든 교만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이스라엘을 치실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날이 임할 때 나타날 것이다. 그 날은 심판과 진노와 징벌의 날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모든 사람들을 낮추실 것이다. 교만은 인간의 죄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죄이다. 교만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매우 미워하신다. 교만한 자는 망하고 말 것이다. 교만한 자는 패망하고 거만한 마음을 가진 자는 넘어진다고 성경은 말한다. 성도는 신앙적 교만, 영적 교만도 버리고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는 결코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교만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모든 헛된 우상을 버리자.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오면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질 것이다. 우상들은 사람들의 기도를 듣지 못하고 그들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현대적 우상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인의 우상은 사람의 이성이나 돈이나 세상적인 부귀 영광이나 육신적 쾌락이다. 사람들은 사람의 이성이나 돈이나 세상적인 부귀 영광이나 육신적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며 살지만, 그것들은 다 헛된 우상들이다. 우리는 그 모든 우상을 다 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헛된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것들은 참으로 허무한 것들이다. 우리는 모든 우상을 버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높이자. 교만한 자들은 다 낮아질 것이다. 우상들은 다 없어질 것이다. 모든 교만한 자들과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위엄과 그 위대하심 앞에 두려워 떨며 피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결론적으로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한다. 인생은 수에 칠 가치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시고 공의롭고 선하시고 진실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높여야 한다.

3장: 유다의 멸망을 예언함

1-12절, 유다의 멸망과 혼란을 예언함

[1-3절] [이는]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버리실 것임이라.] 곧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그 의뢰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50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공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

본문은 앞절에서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한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주 만군의 여호와’ 곧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며 그 중에는 각 방면의 훌륭한 사람들도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유다 백성이 의지했던 것들을 열거한다. 첫째는 식품들이다. 양식과 물은 사람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다. 둘째는 군대이다. 군대는 국가적 안전에 필수적인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다. 셋째는 사회의 지도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재판관 곧 방백들과, 종교인들 곧 선지자와 복술자와 ‘능란한 요술자’들과, 또 장로들과 50부장들과 귀인들과 모사들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다. 넷째는 기술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문적인 기술자들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다.

오늘날도 세상 사람들은 식품들, 군대와 군사력, 사회의 지도자들과 인재들, 기술자들과 과학자들을 의지하고 의뢰한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도 돈이나, 건강이나, 세상적 지혜나, 학벌과 학력이나, 기술 등을 자랑하고 의지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제거하실 때 다 없어질 요소들이다.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거나 의지하지 말고, 오직 섭리자 하나님만 자랑하고 의지해야 한다.

[4-7절] 그가[내가](MT, KJV, NASB, NIV) 또 아이들로 그들의 방백을 삼으시며 적자들[어린아이들]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혹시 사람이 그 아비의 집에서 그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너는 의복이 오히려 있으니 우리 관장이 되어 이 멸망을 네 수하에 두라 할 것이면 그 날에 그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않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로 백성의 관장을 삼지 말라 하리라.

구약시대의 선지자는 종종 성령의 감동 가운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유다에 사회적 혼란을 주실 것이다. 우선, 사회에 지도자들이 없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이들로 그들의 방백을 삼으시며 적자들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실 것이다. ‘적자들’이라는 원어(타알룰림)는 ‘변덕스러움, 자유분방함’이라는 뜻으로 ‘변덕스런 아이들’(NASB)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어른들에게 바른 지도를 받아야 할 어린아이들이 도리어 어른들을 다스린다고 하니 얼마나 혼란한 일이겠는가?

또 백성은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해칠 것이며, 예절이 없고 무질서할 것이다. 아이는 노인에게, 비천한 자는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다. 나이 든 자를 존중하는 것은 사회의 기본적 질서이며 그것은 제5계명에 내포된 바이다. 그러므로 레위기 19:32는,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유다 사회는 기본적 예절과 질서를 저버렸고 아무도 유다 사회에는 지도자 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8-12절]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스려서 그 영광의 눈을 촉범[격노케]하였음이라.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나의 백성이여,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

본문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의 이유를 말한다. 8절의 ‘멸망하다’는 원어(카솰)는 ‘비뚤거리다’는 뜻이다. 그것은 유다가 패망하기 전의 모습을 묘사한다. 유다는 비뚤거리다가 엎드러져 멸망할 것이다. 그들의 언어와 행위는 여호와를 거슬러 그 영광의 눈을 격노케 하였다. 그들은 불신앙적인 말과 불평, 원망, 비방의 말을 하였다. 또 그들은 우상숭배하였고 살인과 음행에 빠졌다.

그들의 얼굴은 그들의 죄를 증거했다. 사람의 죄는 그의 얼굴로도 증거된다. 죄는 감추기 어렵다. 그러므로 죄는 즉시 토해내고 청산하고 새 출발하는 것이 좋다. 회개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치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소돔 사람들처럼 그 죄를 숨기지 않고 공공연히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들은 뻔뻔스럽기까지 했던 것이다. 특히 지도자들의 잘못이 컸고 결정적이었다. 그들을 몰아대는 자는 변덕스런 아이같이 행하며 부녀들이 관할했다. 지도자가 잘못을 하면 그 사회는 가망이 없다.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에 대해 보응을 선언하셨다. 그들은 재앙을 자취했다. 의인에게 복이 있을 것이며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이나, 악인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며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이다. 의인과 악인은 각기 행한 대로 공의로운 보응을 받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이다. 전도서 12:14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2:6-8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말하였다. 악에 대해 보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자.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과 돈과 지식과 기술 등을 의지한다. 우리는 그런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의지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재앙의 날에 없애실 때 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실상, 그런 것들은 헛되며 사람의 영원한 삶과 행복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약속의 말씀만 믿고 소망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이제까지 누린 평안과 질서를 감사하고 사모하자. 죄는 지도자의 부재(不在)를 가져오고 서로 미워하고 예절도 질서도 없는 사회를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이며 재앙이다. 그러나 경건과 의는 교회와 사회에 지도자가 있게 하고 서로 사랑함을 실천하며 질서 있는 교회와 사회를 만든다. 사회적으로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능하고 진실한 인재들이 대통령과 국회의원들과 장관들 등 나라의 봉사자가 되려 할 것이며, 또 교회적으로는 성숙한 인격자들이 장로 되기를 사모하며 목사 되기를 지망하며 헌신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누린 평안과 질서를 감사하며 계속 사모하자.

셋째로, 우리는 죄짓지 말고 말과 행위로 의롭게만 살자. 죄는 멸망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말과 행위로 죄짓지 말자. 우리는 불평과 원망, 및 비방의 말을 버리자. 특히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바르게 행해야 한다. 어떻게 행하는 것이 바르게 행하는 것인가? 성경대로 사는 것이 바르게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성경말씀의 교훈대로 살고자 힘써야 한다. 마태복음 3:8-9,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마다 모든 죄를 청산하고 오직 의를 행해야 하고, 미움을 버리고 오직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말과 행위로 죄짓지 말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자. 그것이 평안과 형통과 영생의 길이다.

13-26절, 시온의 딸들에게

[13-15절]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일어나시며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심문하시며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포도원을 강탈하였고 또 불의한 욕심을 품고 가난한 자들에게서 물건을 강탈하였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였고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압제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5:40). 또 가난한 자들을 무시한 것은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다.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우리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웃 사람 하나라도 존중하고 그에게 악을 행하지 말고 도리어 선을 베풀어야 한다. 더욱이 믿는 교우들에게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16절]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딸들의 죄악도 지적하신다. 시온의 딸들은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내었다. 그들의 죄는 교만과 음란과 사치의 죄이었다. 그들의 늘인 목은 그들의 교만함을 나타낸다. 교만한 자는 목을 빼며 남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인사도 하지 않는다. 또 그들의 정을 통하는 눈은 그들의 음란함을 나타낸다. ‘정을 통한다’는 원어(사카르)는 ‘추파를 던진다’(BDB), ‘요염하게 눈짓한다’(Langenscheidt), ‘유혹하는 눈짓을 한다’(KB)는 뜻이다. 또 그들이 ‘아기죽거리며’ 즉 ‘멋을 부리며’ 행하고 발로 쟁쟁한 소리를 내는 것은 그들의 교만함과 사치함과 멋부림을 보인다.

[17-23절]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딸들의 교만함과 음란함과 사치함과 멋부림에 대해 징벌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그는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여인들은 머리를 단장함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지만, 그들의 머리에 딱지가 생기면 그들의 아름다움에 큰 손상이 생길 것이다. 또 그들의 은밀한 곳이 드러날 것이다. ‘하체’라는 원어(포스)는 ‘이마’라는 뜻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KB, NASB, NIV), ‘은밀한 부분’이라는 뜻으로 본다(BDB, Langenscheidt, KJV).

선지자는 시온의 딸들의 스물 한가지의 장신구들을 열거하며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제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는 발목 고리, 둘째는 머리의 망사, 셋째는 반달 장식, 넷째는 귀고리, 다섯째는 팔목고리, 여섯째는 면박이다. ‘면박’이라는 한자어(面帕)는 요즘 쓰지 않는 말로서 ‘면파’라고 읽어야 맞다고 하며 그것의 원어(레알라)는 ‘얼굴 가리개’(veil)라는 뜻이다. 일곱째는 화관(花冠), 여덟째는 발목 사슬, 아홉째는 띠, 열째는 향합 곧 향수병, 열한째는 호신부(護身符) 곧 부적, 열두째는 지환 곧 반지, 열셋째는 코 고리, 열넷째는 예복, 열다섯째는 겉옷, 열여섯째는 목도리, 열일곱째는 손주머니 곧 지갑, 열여덟째는 손거울, 열아홉째는 세마포옷, 스무째는 머리 수건, 스물한째는 너울이다. 시온의 딸들의 장신구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세상에는 여인들의 장신구들이 다양하게 많다. 세상 사람들은 거기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 구약교회 교인인 이스라엘 여인들도 영적인 소망과 즐거움보다 물질적, 육신적, 세상적 소망과 즐거움이 컸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 자는 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부귀 영화와 권세 그리고 육신적 쾌락을 사랑할 것이다.

[24-26절] 그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너희 장정은 칼에, 너희 용사는 전란(戰亂)에 망할 것이며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무하여 땅에 앉으리라.

하나님의 심판 날에 시온의 딸들에게서는 썩은 냄새가 향수 냄새를 대신할 것이며 노끈이 그들이 머리나 허리에 띠는 장식띠들을 대신할 것이다. 또 대머리가 잘 손질된 머리털을 대신할 것이다. ‘숱한 머리털’이라는 원어는 ‘잘 손질된 머리털’이라는 뜻이다(KJV, NASB, NIV). 또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할 것이다. 또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다. ‘자자한 흔적’이라는 원어(키)는 ‘불에 탄, 그을린 (얼굴)’이라는 뜻이다. 포로로 잡혀가 고된 노역을 하기 때문에 여인들의 얼굴은 햇볕에 타고 상처투성이이고 씻을 형편도 되지 못할 것이다. 또 그들의 장정들과 용사들은 전쟁으로 죽을 것이며 그 성문은 슬퍼하며 시온성은 황무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곧 장로들과 방백들의 죄를 반복하지 말자. 그들은 남의 포도원을 삼켰고 가난한 자들의 물건을 탈취하였고 백성을 핍박하였고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압제하였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며 사랑과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둘째로, 우리는 교만하지 말자. 시온의 딸들은 교만하여 늘인 목으로 다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심히 미워하신다(잠 8:13). 교만은 마귀의 죄이다. 교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보다 인간을 높이고 의지하는 태도이다. 교만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나아간다. 교만한 자는 망한다. 성도의 기본적 덕은 겸손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약 4:6).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곧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의 겸손의 극치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교만을 버리고 오직 그의 겸손을 본받자.

셋째로, 우리는 음란하지 말자. 시온의 딸들은 정을 통하는 눈, 남을 유혹하는 눈으로 다녔다. 그러나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마 5:28). 음란은 자기 몸으로 범죄하는 죄이다. 사도 바울은,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 말하였다(고전 6:18).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살전 4:3). 그러므로 우리는 보는 것을 조심하고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거룩함을 지키고 우리의 눈의 거룩함을 지키자.

넷째로, 우리는 사치하지 말자. 시온의 딸들은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내었고 온갖 장신구들을 갖추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치를 미워하신다. 성도의 덕은 검소와 절제이다. 사도 바울은 여인들이 아담한 옷 곧 단정한 옷을 입으며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내면적 단장, 선행의 단장을 힘쓰라고 교훈하였다(딤전 2:9-10). 우리는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고 절제하며 살자.

4장: 시온의 회복

이사야 4장은 시온의 회복에 대해 증거한다. 이사야 1장부터 39장까지는 주로 심판에 대한 선언이다. 그러나 심판의 선언 가운데서도 본장과 같이 회복이나 위로의 메시지가 중간 중간에 나오는 것이다. 4장에 시온의 회복에 대해 예언하고, 9장의 메시아 왕국에 대해, 11장에는 메시아 시대에 대해 예언하고, 12장에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고 찬송하며, 25장에 또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고, 26장에는 구원의 노래를 부르고, 27장에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또 32장에 메시아의 통치에 대해, 또 35장에 새 세계에 대해 예언한다. 그리고 40장 이후에는 회복에 대한 메시지가 주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배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하시면서도 회복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1절]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우리로 수치를 면케 하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는 날에 남자들이 전쟁으로 많이 죽으므로 여자들은 결혼할 남자를 얻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남편에게 경제적 도움을 기대하지 않고 단지 남편이 있는 자라는 이름만이라도 얻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의 영광도 나타날 것이다.

[2-4절]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錄名)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싹’(체마크)[가지, 순]은 메시아를 가리킨다. 예레미야 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 예레미야 33:15, “그 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스가랴 3:8, “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체마크)을 나게 하리라.” 스가랴 6:12,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메시아께서는 영화로우시고 아름다우실 것이다.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했다(요 1:14).

또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을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남은 자라고 표현된다.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錄名)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은혜로 택하시고 세상에 남겨두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남은 자들을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 그들은 거룩하다고 칭함을 받을 것이다.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책망하시고 우리로 죄씻음 받게 하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중생시키시고 깨끗하게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 곧 ‘거룩한 자’라는 존귀한 이름을 얻었다.

[5-6절]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 또 천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천막으로 보호하실 것이다. 세상에는 여름의 무더위가 있고 겨울의 추위가 있다. 또 한낮의 뙤약볕이 있고 한밤의 폭풍우가 있다. 그때마다 우리는 피할 곳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셔서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실 뿐 아니라 이 환난과 고통 많은 세상, 눈물과 슬픔의 골짜기 같은 세상 가운데서 그들의 피난처가 되시고 은신처가 되신다(계 7:15-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와 은신처이시며 우리의 참된 위로자이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문은 메시아의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다. 메시아께서 오셨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도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하였다(딤전 1:15).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그를 믿고 의지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남겨두신 자들이 있고 그들은 거룩함을 얻을 것이다. 그 날에 주께서는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실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다. 고린도전서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거룩케 하심을 감사하자.

셋째로, 환난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실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실 것이다. 주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8:20).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늘 함께하실 것이다. 시편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로 굳게 믿고 의지하자.

5장: 하나님의 심판

1-7절, 하나님의 포도원

[1절]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선지자 이사야는, ‘나의 사랑하는 자’라는 말을 세 번 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할 뿐 아니라 또한 사랑해야 한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주 예수께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37-38).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좋아하는 것, 기뻐하는 것, 즐거워하는 것, 믿고 의지하는 것,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을 가리키며(7절) 또 ‘심히 기름진 산’은 가나안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가리킨다(출 3:8, 17; 13:5; 33:3; 레 20:24 등). 출애굽기 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2절]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극상품 포도나무’는 유다 사람을 가리켰다(7절).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경건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고 복을 받은 족속이다. 땅을 파서 돌을 제거하고 망대를 세우고 술틀을 파듯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거주했던 우상숭배적이고 음란한 원주민들을 멸망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 땅에 정착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셨으나 그들은 들포도를 맺었다. ‘들포도’라는 원어(베우쉼)는 원래는 ‘악취나는 무가치한 것들’이라는 뜻이다. 들포도는 그들의 불경건함과 부도덕함을 가리킨다. 7절은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다.

[3-4절]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감동 속에 하나님의 친 음성을 대언(代言)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셨고 그들에게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해 패역하였고 불순종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사람의 전적인 부패함과 무능력을 증거한 역사이었다. 그러므로 선지자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하였다(렘 17:9).

[5-6절]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찔레]와 형극[가시들]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국경선이나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외국 군대가 들어와 멸망을 당할 것이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 땅은 황무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땅의 들판에는 가시나무와 엉겅퀴만 날 것이며 더욱이, 그 들판은 비도 내리지 않아 황폐해지고 황량해질 것이다.

[7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선지자 이사야는 포도원의 비유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는 여호와의 포도원이 이스라엘 족속을 가리켰고 그의 기뻐하시는 포도나무가 유다 사람을 가리켰다고 설명한다. 좋은 포도는 그들이 행한 공평과 의로움의 행위를 가리키고, 들포도는 피흘림의 행위와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가리켰다. ‘포학’이라는 원어(미스파크)는 ‘살륙, 피흘림’이라는 뜻이다. 원문에 ‘공평’(미슈파트)과 ‘포학’(미스파크), ‘의로움’(체다카)과 ‘부르짖음’(체아카)은 비슷한 발음으로 대조를 이룬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도덕은 땅에 떨어졌다. 불의와 불법으로 인한 탄식과 고통의 부르짖음들은 컸다. 그들에게는 ‘좋은 포도’ 즉 공평과 의, 사랑과 진실의 도덕성이 없었다. 공평과 의, 사랑과 진실의 도덕성은 사람이 창조된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며 성령의 열매이다. ‘들포도’는 살륙과 피흘림, 미움, 거짓, 사악함, 즉 죄악된 행위들을 가리켰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사야는 하나님을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불렀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좋아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오래 참고 기다리며 겸손히 순종하며 즐거이 섬기는 것이다. 신명기 6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교훈하였다(신 6:4-5).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주신 계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다.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38).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자.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 때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오래 참고 기다리며 하나님께 겸손히 순종하며 그를 즐거이 섬길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셨다. 좋은 열매는 거룩과 의와 사랑과 진실의 인격과 삶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거룩과 의와 사랑 대신에 불결과 죄악으로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버리며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잠언 16: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그것은 사람이 본래 지음 받았던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또 그것은 성령의 열매들이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는 의와 사랑과 진실의 좋은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자.

셋째로, 우리는 들포도를 맺는 자들과 그 포도원은 결국 망하고 황폐케 됨을 기억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과 기대를 저버리고 좋은 포도 대신 들포도를 맺다가 결국 멸망했다.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울 것이다. 요한복음 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불의와 미움과 악과 거짓을 행하는 자들은 영원한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8-17절, 이스라엘의 죄와 멸망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멸망에 대한 말씀이다.

[8절]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에 대해 지적한다.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자신들이 사는 집을 확장하였고 또 필요 이상으로 밭을 사고 또 샀다. 그것은 집과 땅, 즉 재산에 대한 욕심이었다. 그것은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함이 없는 자들의 행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욕심으로 가득한 자들에게 진노하셨다. 이기적 욕심을 가진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9-10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 천군 천사들의 찬송과 섬김을 받으시며 온 세상을 능력으로 섭리하시고 심판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는 참으로 허다한 가옥들이 황폐하며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또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날 것이라고 말한다. 열흘갈이(ten acres) 포도원은 약 1만평의 땅이다. 한 바트는 약 22리터이다. 한 호멜지기는 약 220리터의 곡식을 추수할 수 있는 밭인데, 거기서 겨우 한 에바 즉 약 22리터만 수확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엄중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황폐케 하시며 그 수확과 소득을 매우 부족하게 하실 것이다.

[11-12절] 아침에 일찌기[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은 아침 일찍부터 독한 술을 마시고 그들은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했고 잔치를 열며 각종 악기를 연주케 했으며 포도주를 마시며 즐겼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그의 손으로 하신 일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생각할 것이다.

[13-14절]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며 음부[지옥](KJV)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연락하는 자가 거기 빠질 것이라.

이사야는 그의 백성의 무지와 불경건에 대해 하나님께서 징벌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쟁에 패배해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 그들은 일용할 양식의 궁핍을 경험할 것이다. 그들의 호화로움과 향락은 끝날 것이며 그들은 다 음부 즉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15-16절] 천한 자는 굴복되고 귀한 자는 낮아지고 오만한 자의 눈도 낮아질 것이로되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천한 자나 귀한 자나 다 패망을 경험할 것이다. 특히 교만한 자들이 낮아질 것이다. 사람은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복종치 않고 범죄한다. 교만은 불순종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들이 멸망당할 때 그들의 교만은 낮아질 것이다. 그때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공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실 것이다. 그가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그의 영광이 온 땅에 나타날 것이다.

[17절] 그때에는 어린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같이 먹을 것이요 살찐 자의 황무한 밭의 소산은 유리하는 자들이 먹으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하여 그 땅이 황폐해질 때 어린양들은 거기서 자기의 풀밭처럼 풀을 뜯어먹을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평안하고 부요하여 쾌락을 즐기지만, 그 날에는 그들의 밭이 황무한 밭이 될 것이다. 그 밭들은 주인 없는 밭이 되어 거기서 무슨 열매나 결실이 나면 나그네들이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치와 향락의 삶을 멀리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교만과 우상숭배 속에서 사치했고 향락에 빠졌다.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재리(財利)와 일락(逸樂)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경건하고 선하게 사는 일을 방해하며 그런 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결국 실패자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눅 8:14). 물질에 대한 욕심 즉 돈 사랑과 육신적 쾌락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게 가로막는 치명적 요소이다. 사치와 향락은 성도에게 매우 큰 시험거리이며 경건하고 선한 삶에 반대된다. 그것은 결국 사람이 실패자가 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사치와 향락을 버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검소하고 절약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술취하며 잔치에 각종 악기를 갖추었지만, 여호와의 행하심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이나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들을 드렸다. 그들은 자기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빌립보서 2:20-22,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우리는 교회의 예배회들에 힘써 참석하며, 기도와 전도에 힘쓰며, 하나님의 일들, 즉 전도와 봉사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8-30절, 화 있을진저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죄악들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한 내용이다.

[18-19절]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그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로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그 도모를 속히 임하게 하여 우리로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짓과 죄악을 행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의와 선과 진실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구약교회의 성도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의와 죄악과 거짓으로 행하였다. 이스라엘 사회에는 거짓말들이 많았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섭리를 믿지 않았고 그의 하시는 일을 참고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조롱하듯이 말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불신앙을 나타낼 뿐이었다.

[20-23절]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빚기에 유력한 그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과 악을 바르게 판단하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부패한 사회의 모습이었다. 잠언 28:4는,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고 말한다. 악을 선하다, 선을 악하다 하는 것은 그 심령이 도덕적으로 심히 부패되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도덕적 혼란을 미워하신다. 잠언 17:15은,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한다. 성도는 선악 판단을 바르게 해야 한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해야 하며, 선한 것은 선하다 하고 악한 것은 악하다 해야 한다. 그것이 공의로움이요 올바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지혜롭고 명철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상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는 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는 없다. 잠언 26: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낮추며 우리의 부족을 인정해야 한다.

또 이스라엘 사회는 사람들이 술을 잘 마시는 사회이었다. 이것이 구약교회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했고 독주를 섞어 만들기에 유력했다. 그러나 술 취함은 사람을 실수케 만든다. 술 취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전 6:9-10). 금주와 금연은 그리스도인의 좋은 전통이요 지혜와 복이다.

또 이스라엘 사회에는 뇌물이 많이 오고갔고 그로 인하여 도덕적 판단이 혼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은 뇌물을 받고 악인을 의롭다 하고 또 의인을 악하다 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3:8). 그러나 그들은 그 법을 지키지 않았다.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사회는 이처럼 거짓과 죄악이 많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작정과 섭리를 믿지 않았고 선과 악을 잘못 판단했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을 지혜롭다고 생각하였고 술을 즐겼고 뇌물이 많이 오고갔다. 이스라엘 사회는 심히 부패되고 죄악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런 죄악들에 대해 진노하셨다. 18-23절에서, 선지자는 이미 ‘화 있을진저’라는 말을 네 번이나 사용하였다(18, 20, 21, 22절). 사람의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화와 진노이다.

[24-25절] 이로 인하여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 분토같이 되었으나 그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 손이 오히려 펴졌느니라.

성경에서 불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불일 수도 있지만,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불같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킨다. 불은 두려운 것이다. 그것은 다 태우고 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같이, 그 뿌리로부터 썩고 망하겠고 꽃 같은 찬란한 영광은 티끌처럼 날아갈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멸시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떨며 존중할 것이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존중한다면 겸손하며 정직하고 선하며 진실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심히 죄악되어 하나님의 진노로 그 시체가 거리에 쓰레기같이 많게 될 것이며 그래도 하나님의 노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

[26-30절] 기를 세우시고 먼 나라들을 불러 땅끝에서부터 오게 하실 것이라. 보라, 그들이 빨리 달려 올 것이로되 그 중에 곤핍하여 넘어지는 자도 없을 것이며 조는 자나 자는 자도 없을 것이며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신들메는 끊어지지 아니하며 그들의 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기어졌으며 그 말굽은 부싯돌 같고 차바퀴는 회리바람 같을 것이며 그 부르짖는 것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 그 소리지름은 어린 사자들과 같을 것이라. 그들이 부르짖으며 물건을 움키어 염려 없이 가져가도 건질 자가 없으리로다.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리워져서 어두우리라.

선지자 이사야는 죄악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서운 전쟁에 대해 예고한다. 하나님께서는 먼 나라들을 불러와서 이스라엘을 치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를 침공할 이방 나라들의 군대는 빠르고 강할 것이며 그들 중에는 피곤해 넘어지거나 조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무기는 날카로울 것이며 그들의 병거 바퀴는 회리바람 같을 것이며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는 사자들의 부르짖는 소리와 같을 것이다. 온 땅은 흑암과 고난으로 가득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에 대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해 불같이 진노하셔서 먼 나라들을 불러와 그들을 치실 것이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에 쓰레기같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경고대로이었다. 레위기 2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거역하면 그들의 대적들에게 패배하고 그들을 당할 힘이 없을 것이며 이스라엘은 마침내 멸망하고 그 땅은 황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었다(14-17, 31-33, 37-38절).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을 가져온다. 신약성도가 범하는 죄도 구약성도가 범하는 죄와 그 본질이 다르지 않다. 모든 죄는 다 악하고 공의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무엇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인가? 우선, 우리는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며 그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존중하고 그 말씀을 읽고 듣고 믿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말씀의 교훈을 따라 믿고 따르는 것이다. 또 우리는 성경이 가르친 대로 거짓과 죄악을 버리고 멀리하며 선악을 바르게 판단해야 한다. 선악을 바르게 판단하는 기준은 성경이며 바른 이성과 깨끗한 양심으로 그것이 이루어진다. 또 우리는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 항상 겸손히 처신해야 하며, 술 취하지 말아야 하고 결코 불의한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하며 그래야 복되다.

6장: 이사야의 환상

1-7절, 이사야의 환상

[1절]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 유다 왕국의 열 번째 왕이었다(주전 790-739년경에 통치).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그가 하나님을 구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나라를 형통케 하셨다. 그러나 그가 강성해졌을 때, 그는 마음이 교만해졌었고,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들만 할 수 있었던 하나님께 분향하는 일을 하려다가 하나님께서 치시므로 즉석에서 나병 환자가 되었고, 그는 죽는 날까지 나병 환자로 살다가 죽었다(대하 26:5, 16, 19, 21).

교만하여 범죄했던 웃시야 왕이 하나님의 엄한 징벌로 그 말년에 불행하게 살다가 죽었을 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두려우심을 크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나님의 공의로 인간 왕은 실패하고 죽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참된 왕으로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는 자들이었다. 이사야는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2:41에서 이사야가 주의 영광을 보았다고 증거한다. 주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는 우리는 구약시대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곧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사야가 본 주께서 높은 보좌에 앉으신 것은 그가 왕이심을 나타낸다. 이사야는 그를 ‘왕’이라고 불렀다. 5절,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또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은 그가 제사장이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이신 동시에 제사장이시다.

[2-4절]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이사야는 천사들이 그 영광의 주를 모셔 선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천사들을 ‘스랍들’이라고 말한다. 성경에 나오는 가브리엘과 미가엘은 천사 개인의 이름이고, 그룹과 스랍은 천사 부류의 이름들이라고 보인다. 이사야 6장에만 나오는 스랍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이었다. 스랍들은 각기 여섯 날개가 있었고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면서 서로에게 외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하였다.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다른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들의 겸손을 나타낸다. 또 그들이 다른 두 날개로 난 것은 그들이 민첩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나타낸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뜻을 즐거이 순종한다.

스랍들의 찬송 소리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다. 거룩함이란 유한한 피조 세계로부터 초월해 계심과 죄와 불결로부터 떠나 계심을 가리킨다. ‘만군의 여호와’는 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들을 거느리신 능력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이시다.

천사들이 외치는 소리로 인해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의 표시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시내산에 내려오실 때에도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었고 온 산이 크게 진동했었다(출 19:16, 18). 이와 같이,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는, 비록 웃시야 왕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벌로 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었으나, 영원하신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죽지 않고 살아계시며 지극히 거룩하시고 온 세상에 그의 영광이 충만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았던 것이다.

[5절]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았을 때 자신의 죄악됨을 깨달았다. 특히 그는 자신의 입술의 더러움을 깨닫고 고백하였다. 사람의 말은 그의 인격을 나타낸다.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하고 악한 사람은 악한 말을 한다(마 12:35). 특히 사람의 죄성은 그의 말로 나타난다. 죄인의 특징은 악한 말을 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첫 번째 표는 말의 성결에서 나타날 것이다. 변화된 인격은 말의 변화로 증거될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했다. 어부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적 영광을 보았을 때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었다(눅 5:8). 요한계시록 1:17에 보면,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보았을 때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었다.

[6-7절]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제단 숯불을 선지자 이사야의 입에 댄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으로 이루신 속죄로 그를 정결케 하심을 상징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추하고 더러운 우리의 입술을 정결케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온 몸을 깨끗케 한다. 죄사함 곧 더러운 악의 제거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며 특히 말씀의 봉사자인 선지자들에게 필요한 일이다. 오늘날도 말씀의 봉사자들에게 필요한 일이다. 우리의 입이 정결하지 않다면, 우리는 이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복음은 죄사함의 길이다. 죄사함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죄사함 받은 자들만 말씀의 봉사자가 될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깨닫자.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보았다. 하나님을 알며 그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며,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있다(요 17:3).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주 예수님의 영광을 깨닫자.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죄성(罪性)을 깨닫자. 이사야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자임을 깨달았다. 베드로는 주 앞에 엎드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었고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었다(눅 5:8; 딤전 1:15).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심히 부족함과 죄악됨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자. 우리의 부족을 고치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몸과 입술을 정결케 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얻어야 한다(딤후 2:21). 고린도후서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8-13절, 나를 보내소서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자신의 추함과 입술의 부정함을 깨달았고 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제단의 숯불로 그의 입을 정결케 하심도 보았다. 그는 이런 일들을 환상 중에 보았다. 그런 후, 그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라고 표현하신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이신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몇 번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창 1:26), 또 범죄한 첫 사람들을 에덴에서 내어보내실 때(창 3:22), 또 바벨탑을 쌓는 자들의 언어를 혼란시키실 때(창 11:7)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위해 사람을 사용하심을 보인다. 그것은 성경 역사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을 위해 사람을 사용하신다. 또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실 만한 사람이 많지 않음을 보이는 것 같다. 하나님의 일은 어려운 일이며 그의 일을 수행하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응답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했다. 그는 어디에서 이런 헌신의 용기가 났을까? 그것은 분명히 그가 본 사죄(赦罪)의 환상에서 났을 것이다. 죄책감은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과 무기력함에 머물게 만든다.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은 죄사함을 확신할 때 힘과 용기를 얻고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하게 될 것이다. 죄는 영원한 멸망의 원인이며 거기에는 두려움밖에 없지만, 죄사함은 영생의 길이며 거기에는 기쁨과 평안이 넘친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9-10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말씀은 슬프고 이상한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달려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진리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은혜 주실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지만, 그가 버려두신 자들에게는 그의 은혜를 주지 않으신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고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무지 깨닫지도 못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그의 진리를 믿고 구원을 받지도 못하고 참된 의와 선을 행하지도 못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사도행전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사도행전 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로마서 9:16, 18,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이며 개혁주의가 믿는 바이다.

[11-13절]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10분의 1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유다의 성읍들은 다 황폐할 것이다. 10분의 1이 남아 있을지라도 그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다. 불순종하는 유다는 결국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이처럼,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의 사역은 전망 없는 사역같이 보였다. 하나님의 일은 때때로 그러하였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41년간 사역했지만, 유다는 결국 멸망했다. 예루살렘 성은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결국 멸망했다. 예레미야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이런 사실들은 인간이 심히 부패되어 있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이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을 배우게 된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을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그러나 전도자는 고난을 각오하며 전도자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딤후 4:3-5).

그러나 사람이 무지하고 완악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루터기는 나무를 벤 후에 남은 나무둥치를 가리킨다. 유다가 멸망해도, 그 그루터기는 남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땅의 ‘거룩한 씨’는 메시아를 암시한다. 그것이 이사야서 전체에 흐르는 메시아 진리이다. 이사야는 또 ‘남은 자’에 대해 많이 말한다.3) 그들은 메시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처음에는 적은 수효일 것이지만(눅 12:32), 마지막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수가 될 것이다(계 7:9). 하나님의 일은 실패하지 않고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힘들고 지루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씨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서 구주를 보내주실 것이다. 그가 우리의 거룩하신 구주 예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내신 인류의 구주이시다. 그는 멸망할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시다.

둘째로, 중생한 신약성도들, 즉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오늘날 하나님의 남은 백성이다. 그들은 육신적 이스라엘이 아니고 영적 이스라엘이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이다. 그 표는 믿음과 순종과 거룩의 삶이다. 우리는 이 배교적인 말세지말에 남은 자들의 표를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오늘날도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종들이 요구된다.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실 때, 이사야는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하였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바른 교회를 건립하기 위해 보내실 사람들을 찾으신다. 오늘날도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할 신실한 청년들과 사람들을 찾으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그 죄사함을 확신하고 그 죄사함 받은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즐거이 헌신하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기를 소원하자.


7장: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함

1-9절, 연기 나는 두 나무토막

[1-2절]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더라.

다윗 왕 때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아람 나라를 지배하기도 했었다. 또 다윗 집에는 하나님께서 그 집을 보호하신다는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남방 유다의 원수들의 거대한 세력 앞에서 유다 왕 아하스는 두려워 떨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죄로 인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3-4절]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유다 왕 아하스가 악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그것은 유다 나라의 경건한 자들을 위한 위로와 격려이었고 또 하나님의 긍휼로 악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가 그 아들 스알야숩과 함께 아하스를 만나게 하셨다. 스알야숩이라는 말은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뜻으로 그 이름 자체가 유다 백성에게 소망과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아하스에게 주신 말씀의 내용은, 아람 왕 르신과 북방 이스라엘 왕 베가를 두려워 말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이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 즉 연기 나는 두 나무토막에 불과하다고 표현하셨다. ‘연기 나는 두 나무토막’은 화덕에서 불타는 나무가 아니다. 그것은 화덕에서 꺼내져, 불이 꺼져 가는, 그래서 연기만 많이 나는 나무이다. 아람 나라와 북방 이스라엘 나라의 세력은 꺼져 가는, 연기 나는 나무토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앗수르 왕에게 패망할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유다 왕은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들로 인해 낙심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5-7절]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곤하게 하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파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을 삼자 하였으나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은 동맹을 맺고 유다를 쳐서 파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자는 계획까지 세웠지만, 그 계획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세워지고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한 국가의 흥망성쇠뿐 아니라, 온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8-9절]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65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65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북쪽 이스라엘 나라의 완전한 멸망과 그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일을 가리켰다.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주전 733년경)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3세(주전 744-727년경)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다. 열왕기하 15: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또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 때에(주전 722년경) 이스라엘은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주전 727-722년경)에게 망하였고 포로로 잡혀갔다. 열왕기하 17:6, “호세아 9년에 앗수르 왕(살만에셀)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그 후 앗수르 왕 에살핫돈(주전 681-669년경)은 사람들을 앗수르 땅에서 옮겨 사마리아 여러 성들에 두었다. 열왕기하 17:24,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 북방 이스라엘은 회복의 가능성이 없어졌다. 65년의 기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히 모르나, 아하스 2년(주전 740년경) 때로부터 에살핫돈이 므낫세 왕을 포로로 잡아간 때(주전 675년경; 대하 33:11)까지의 기간이 대략 65년이 된다.

그러나 유다 왕 아하스는 선지자로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앗수르 왕을 의지했고 다메섹 신(神)들을 의지했다. 역대하 28:16, 23, “그때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에게 보내어 도와주기를 구하였으니,” “[아하스 왕은]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가로되 아람 열왕의 신들이 저희를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케 하였더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끝으로 말씀하시기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와 유다 백성에게 굳건한 믿음이 필요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은 범죄하면 약해진다. 유다 왕 아하스는 우상을 섬긴 악한 왕이었다. 그 결과, 아하스와 유다 나라는 매우 약해졌다. 그들은 북쪽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의 침공 앞에 두려워 떨고 있었다. 성도가 범죄하면 약해지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을 확신치도 못한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말씀에 순종하여 의를 행해야 담력을 얻는다.

둘째로, 하나님의 허락 없는 사람의 계획은 다 헛되다. 아람은 이스라엘과 동맹하여 유다를 침공하고 정복하려 계획하였고 새로운 왕까지 내정하였으나, 본문 7절은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시편 127:1-2에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말하였다. 또 야고보는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말했다(약 4:15).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이 없는, 사람의 모든 계획들이 다 헛됨을 알고 모든 계획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믿자. 본문 9절은,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서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아하스는 앗수르를 의지하려 하였었다(왕하 16:7).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자. 이사야 26:3-4,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자. 우리는 개인의 생사화복이나 국가의 흥망성쇠가 다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음을 알자. 세계 역사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알자.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자.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난 중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굳게 의뢰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모든 말씀과 약속을 믿어야 한다.

10-16절, 임마누엘의 징조

[10-11절]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징조’라는 원어(오스)는 ‘표적’이라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표적을 구하라고 하신 것은 아하스가 하나님의 예언, 곧 유다 나라를 치기 위해 동맹한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가 ‘연기 나는 두 나무토막’에 불과하며 그 나라들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불신앙적인 아하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 하신 것 같다. 아하스가 하나님의 표적을 보고 그것을 보이셨던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좋을 것이다. 그 표적이 그에게 믿음을 갖는 동기가 되어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고 앗수르 나라를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게 되면 좋을 것이다.

[12절]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그것은 그가 믿음이 강하여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무시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시험치 아니하겠다고 말했으나, 그것은 일종의 위선적인 말이었다고 본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그 대신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했고 온갖 우상들을 섬겼다.

역대하 28:16, “그때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에게 보내어 도와주기를 구하였으니.” 역대하 28:22-25,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가로되 아람 열왕의 신들이 저희를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케 하였더라.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훼파하고 또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단을 쌓고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아하스는 심히 죄악된 상태에 있었다.

[13-14절]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는 아하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힘쓰고 앗수르를 의지하려 한 것은 사람들과 하나님을 괴롭게 한 일이라고 책망하듯이 지적하였다.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주실 놀라운 한 징조와 표적을 선포한다. 그것은 아하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뜻의 선포이었다. 그것은 임마누엘이라고 불린 메시아의 초자연적 탄생에 대한 예언이었다. ‘징조’ 혹은 ‘표적’이라는 말은 임마누엘의 초자연적 탄생에 맞다. ‘처녀’라는 원어(알마)는 단지 ‘젊은 여자’(RSV)라는 뜻이 아니고, ‘결혼하지 않은 젊은 처녀’를 가리킨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용법이나 고대 헬라어 70인역이나 또 신약성경의 적용에서 분명하게 증거된다.

구약성경의 몇 가지 예를 보자. 창세기 24:43, “내가 이 우물 곁에 섰다가 청년 여자(알마)가 물을 길러 오거든.” 이 단어는 16절의 ‘처녀’라는 말(베술라)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출애굽기 2: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알마)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아가 1:3,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아가 6:8,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알마)가 무수하되.” 이 마지막 예에서도 그것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가리켰다.

신약성경의 적용에서도 분명하다.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파르데노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70인역 인용). 또 사도 마태는, 그 모친이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고, 그 남편 요셉이 저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했고, 천사가 꿈에 나타나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했고, 이사야 7:14의 예언의 성취이며, 또 요셉이 주의 천사의 분부대로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는 다섯 가지 점을 증거했다(마 1:19-25). 누가도 천사가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말하였다고 증거했다(눅 1:34-35).

또 구약성경에 메시아께서는 신적 존재로 예언되어 있다.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영원 전에]니라.” 신적 존재인 메시아께서는 사람의 보통 생육법보다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본문에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탄생으로 이루어졌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이사야의 예언은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의 증표이었다.

[15-16절]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

본문은 예언된 메시아께서 탄생하신 후 5, 6세가 되기 전에 이스라엘의 왕과 아람의 왕의 나라들이 멸망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물론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 왕들과 나라들은 주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오래 전에 다 멸망하였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유다 땅의 보전에 대한 약속도 내포하였다. 지금 유다 땅은 그 두 나라에게 위협을 받고 있지만, 그 두 나라는 망할지라도, 유다 나라는 보존될 것이며 그 나라는 메시아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질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아하스는 불신앙적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표적들을 주실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예언들과 표적들을 기록하고 증거한 책이다. 우리는 아하스와 같이 헛된 우상을 믿고 섬기지 말고 무능한 존재인 사람도 의지하지 말고 허무한 돈이나 세상 권력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순수하게 믿고 또 성경만 믿자. 우리는 성경에 가르쳐주신 대로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한다. 오늘날에는 잘못된 사상들, 말들, 풍조들이 너무 많다. 우리는 성경을 믿지 않고 가감하는 자유주의, 이성주의를 경계하고 모든 성경을 다 믿어야 한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믿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거짓된 신비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주께서는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4:11, 24). 사도 바울도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살후 2:9-12). 오늘날에는 자유주의와 신비주의가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믿지 않는 사상들을 경계하고 또 예언과 방언과 병고침도 조심하고 오직 성경 교훈을 믿고 행해야 한다.

17-25절, 앗수르 왕의 오는 날

[17절]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니라.

장차 여호와께서 에브라임 곧 북쪽 이스라엘 나라가 유다 나라와 분열하여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아하스와 그의 백성 곧 유다 백성과 그의 아비 집 곧 다윗 왕가에 임하게 하실 것이며 그것은 곧 저 북방에 있는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라고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앗수르 왕을 오게 하실 것이다. 복과 화는 다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과 국가에 복을 주기도 하시고 재앙을 내리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왕을 부르실 것이다. 앗수르 왕은 이전에 유다 왕 아하스가 도움을 요청했던 자이었다.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라고 말했었고,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그에게 예물로 보내었었다(왕하 16:7-8).

그러나 유다 나라는 장차 그들이 의지했던 앗수르 나라에게 화를 당할 것이다.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자 유다 왕 히스기야는 라기스로 사자를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라고 말했고, 앗수르 왕이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에게 내게 하므로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또 그때에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다(왕하 18:13-16). 유다 나라에 이런 치욕적인 일이 마침내 일어났었다.

[18-19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본문에는 ‘그 날에’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18, 20, 21, 23절). 그 날은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날, 그의 진노하시는 날, 그의 재앙의 날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심판의 날이 있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한 시간표대로 진행된다. 역사는 그가 행하신 일들의 기록이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의 선악간의 행위들이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를 이루는 방편이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애굽과 앗수르를 파리와 벌로 비유하셨다. 그것은 그들 침략군들의 수가 많고 신속하고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공격적이고 그로 인한 고통과 해가 매우 클 것을 보인다. 적군들은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덤불과 푸른 풀밭 등 모든 곳에 들어와 그곳들을 점령할 것이다. 그 땅에는 그들을 피하여 숨을 곳이 거의 없을 것이다. 모든 땅은 그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황폐케 될 것이다.

[20절]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 나라를 의지했으나 이처럼 유다 나라는 장차 앗수르 나라에게 큰 화를 당할 것이다. 이사야 10:5에서는 하나님께서 앗수르 사람들을 그의 진노의 막대기와 몽둥이라고 표현하셨으나, 본문은 앗수르 왕을 세내어 온 삭도 곧 면도칼이라고 표현했다. 머리털이나 수염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부분이다. 그러나 침략자들은 와서 그 털들을 다 밀어버릴 것이다. 유다 나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곧 존귀한 자로부터 비천한 자까지 다 노략되고 짓밟힐 것이다. 장차 유다 나라는 큰 낭패를 당할 것이다.

[21-22절]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그 내는 젖이 많으므로 뻐터를 먹을 것이라. 무릇 그 땅 가운데 남아 있는 자는 뻐터와 꿀을 먹으리라.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른다는 말은 가난한 생활을 묘사한다. 황폐한 유다 땅에 남은 사람들은 가난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수가 적기 때문에 우유와 버터가 많을 것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이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농사나 장사가 되지 않으므로 곡식, 과일, 고기 등을 먹지 못하고 주로 뻐터와 꿀만 먹는다는 뜻도 가지는 것 같다.

[23-25절] 그 날에는 천(千) 주에 은 1천 개의 가치 되는 포도나무 있던 곳마다 질려[찔레]와 형극[가시나무]이 날 것이라. 온 땅에 질려[찔레]와 형극[가시나무]이 있으므로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보습으로 갈던 산에도 질려와 형극 까닭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놓으며 양의 밟는 곳이 되리라.

많은 포도 수확으로 큰 소득을 올렸던 포도원이 장차 가꿀 일손이 없어서 찔레와 가시나무만 무성할 것이다. 온 땅에 찔레와 가시나무가 있으므로 사람들은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짐승을 사냥하기 위해서이든지 짐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보습으로 갈던 산에도 찔레와 가시나무 때문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놓으며 양의 밟는 곳이 될 것이다. 이전에 밭과 포도원이었던 땅은 더 이상 밭 농사나 포도 농사를 하지 못하고 황폐하게 방치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자. 본문에는 ‘그 날에’라는 말이 반복되어 있다. ‘그 날’은 하나님의 작정된 심판의 날이다.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왕을 불러오실 것이다.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날이 있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이 있다. 우리 개인을 향해서도, 또 우리 가정이나 우리 교회나 우리 국가나 온 세계를 향해서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자. 이 세상은 주인 없는 세상이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고 다스리는 자가 없는 세상이 아니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가 인도하시는 대로 어디든지 가야 한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자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믿고 그의 선하심과 특히 그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두려워하자. 이스라엘의 죄악은 그 사회로 멸망케 하였고, 유다의 죄악도 그 사회로 패망케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두려워하고 죄를 짓지 말자. 히브리서 2:1-3,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공의로운]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말고 특히 고의적인 죄를 짓지 말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만 소망하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자는 하나님만 소망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데 있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 계명을 저버리고 자기 뜻대로 산 것이 불행의 원인이었다. 북쪽 이스라엘이 그러했고 남쪽 유다도 그 뒤를 좇고 있었다. 하나님을 찾고 그의 계명에 순복하지 않는 자는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왕을 불러 그들의 땅을 황폐케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전에 누렸던 풍요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이방 나라들에게 수치와 모욕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소망하며 그의 계명을 힘써 행한다면, 그들은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며, 지금 징벌 아래 있다 할지라도 머잖아 회복의 날을 보게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 안에 평안과 영생이 있다. 우리는 모든 불경건과 불신앙과 모든 죄악을 회개하고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소망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자.

8장: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따르라

1-10절, 앗수르가 오리라

[1-2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거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마헬살랄하스바스’(마헤르 솰랄 카쉬 바즈)라는 원문은 ‘노략이 속히 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전쟁이 속히 올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또 그에게 주신 이 계시는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스가랴를 통해 확증될 것이다.

[3-4절] 내가 내 아내(한네비아)와 동침하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긴 바 될 것임이니라.

이사야의 가정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의 아들은 메시아의 예표처럼 보인다. 그 아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대로 ‘노략이 속히 온다’는 뜻이었다. 그 아이가 자라서 ‘내 아빠(아비), 내 엄마(임미)’라고 말할 줄 알기 전에, 즉 아마 두세 살이 되기 전, 앞으로 2-3년 내에, 아람과 이스라엘이 망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아람과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경에 앗수르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악한 세상 나라는, 일시적으로 강할지라도, 결국 망하고 만다. 땅에 있던 전제국가들, 백성의 인권을 짓밟고 자유를 빼앗던 그 독재국가들은 다 망하고 말았다. 대 로마 제국도, 군국주의 일본 제국도, 나치 독일도 다 망했다. 불경건하고 부도덕하던 아람과 이스라엘도 그렇게 망할 것이다. 그들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망할 것이다. 그들의 재물과 노략물은 앗수르 왕 앞으로 옮긴 바 될 것이다.

[5-8절]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일러 가라사대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수로들과 강들]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유다 백성의 잘못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를 기뻐하고 의지한 것이었다. ‘실로아’는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샘물의 이름이다. 그것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그리로 보내어 눈을 뜨게 하셨던 그 실로암 못이다(요 9:7).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참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것은 야단스럽거나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달변이 아니고, 조용하고 진실하고 진지한 교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그런 말씀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주위의 나라들의 요란스런 우상숭배적인 행위들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적 방식, 육신적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먼 곳으로부터 앗수르 사람들을 불러오셔서 유다 백성이 의지하는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를 멸망시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주’ 하나님이시다. 그는 이 세상의 악한 세상 나라들을 마침내 멸망시키실 것이다.

앗수르 나라의 침공은 유다 땅에도 큰 타격을 줄 것이다. 앗수르 왕은 “그 모든 곬[수로들이나 강들]에 차고 그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칠” 것이다. ‘그 모든 곬과 그 모든 언덕’은 아람과 이스라엘의 골짜기들과 강들과 언덕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앗수르 왕은 아람과 이스라엘을 정복한 후에 유다에까지도 접근해 올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고 말한다. 앗수르의 침공은 하나님의 백성의 범죄 때문에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유다 나라를 ‘임마누엘이여’라고 부른 것은 그 나라가 ‘임마누엘’ 곧 메시아의 땅이며 장차 메시아로 인해 회복될 것을 암시한다. 메시아께서는 장차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다.

[9-10절]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부서지리라](NASB).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는 함께 도모하라.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내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이니라.

최종적으로는 앗수르 나라를 포함하여 모든 열방이 다 멸망할 것이다. 지금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가 유다 나라를 침공하고 위협하고 있지만, 그들은 수년 내에 앗수르 나라에게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앗수르 나라는 영원한 나라인가? 아니다. 앗수르 나라도 모든 지혜와 모략으로 계획하며 전쟁을 준비하고 행하지만 결국 망하고 말 것이다. 세상 나라들은 다 멸망할 것이다. 본문은 ‘필경 패망하리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한다. 그것은 세상 나라들의 계획이 결국 실패할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시행되지 못하리라’고 덧붙여 말한다.

열국이 패망하고 그들의 계획이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유다 나라에는 임마누엘의 약속이 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의 약속이다. 그것은 이사야 7:14에서 임마누엘이라고 불릴 한 아기의 탄생을 예언했을 때 이미 암시되었다. 메시아께서 오셔서 이루실 일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결국 패망하고 유다 나라는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그는 이사야의 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가 ‘내 아빠, 내 엄마’라고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과 사마리아, 곧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를 멸망케 하실 것이다. 또 그는 열국들의 멸망을 선언하셨다. 그 예언 속에는 앗수르 나라의 멸망도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악의 세력들을 다 파하실 것이다. 이 세상의 악한 나라들은 결국 다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섭리자이시다(시 96:10). 세상 나라는 마침내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계 11:15).


둘째로, 우리는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로 만족하자. 유다 백성의 문제는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적 사상과 풍조를 배격하고 역사적 기독교 사상과 생활 즉 성경적 기독교의 교훈과 규례와 생활로 만족하자. 우리는 성경의 교리적, 윤리적 교훈을 잘 이해하고 믿고 확신하고 굳게 붙들고 지키자. 우리는 옛신앙을 붙들자. 우리는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으로 만족하며 그 진리, 그 신앙, 그 생활을 굳게 붙들자.


셋째로, 우리는 임마누엘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까지도 앗수르 나라의 침공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시면서도 유다 백성을 ‘임마누엘이여’라고 부르셨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방 나라들의 패망과 그들의 계획의 실패의 이유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이니라”고 말했다(10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이라는 뜻인 임마누엘은 메시아를 가리켰다(사 7:14).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과 승리는 메시아의 사역에 의존한다. 인생은 다 부족하고 성도도 여전히 죄성을 가지고 있고 실수와 범죄가 없지 않은 존재들이지만, 우리의 의(義)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시다. 그는 우리의 의를 이루셨다. 주 예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마 28:20). 또 성령께서도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신다(요 14:16). 우리는 구주 예수님만 믿고 그의 교훈을 행하자.


11-22절,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11-12절]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 것을 내게 경성시켜 가라사대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하나님께서는 강한 손, 즉 강한 감동으로 그의 뜻을 알게 하셨다.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이 강하고 그 영향이 너무 크므로 하나님께서는 강한 감동으로 선지자를 교훈하셨다. ‘이 백성’은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를 다 포함한 것 같다. 북방 이스라엘 나라는 배교적이었고 남방 유다 나라는 타협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라고 교훈하셨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너는 백성들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너는 그들의 생활방식으로 살지 말라”고 교훈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12절에 두 번 나오는 ‘맹약한 자’라는 원어(케쉐르 ר������������)는 ‘공모(共謀)’라는 뜻이다. 12절 후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맹약한 자 혹은 공모(共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나라가 아람 나라와 동맹하여 유다 나라를 치려 한 것을 가리켰다고 본다. 그 연합군의 침공, 그 공모는 유다 백성에게는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3-15절]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인류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개인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는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의 동맹이 위협적이고 두려운 일이지만, 유다 백성은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유다 백성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한다. 역사상 경건한 성도들은 다 그러하였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풀무불과 사자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의지하고 소망하였다. 오늘날 신약교회의 성도들인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적 유다 백성에게는 오히려 거치는 돌이 되실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다.

이 사실은 또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때에도 그러하였다. 베드로전서 2:8,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16-18절]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싸매며 봉함한다’는 것은 보존한다는 뜻인 동시에 감춘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향해 낯을 가리우시지만,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만 바라본다. 그는 세상 풍조와 여론을 역행하며 살아야 했다. 그의 길은 고난의 길이며 외로운 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이 가야 할 길이다. 이사야는 또 자기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징조와 예표가 되었다고 말한다. 첫아들 ‘스알야숩’은 ‘남은 자들이 돌아온다’는 뜻을 가졌고, 둘째 ‘마헬살랄하스바스’는 ‘노략이 속히 임한다’는 뜻이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계시의 말씀을 잘 보존해야 했다. 그 말씀은 유다 백성에게 경고가 되고 소망이 될 것이다.

[19-22절]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아쉐르 에인-로 솨카르)[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며](KJV, NASB) 이 땅으로[그들은]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노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선지자 이사야는 특히 신비주의적 거짓 선지자들에 관해 경계했다. 그가 사역하던 시대에 유다 사회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 중에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 즉 은사주의적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표준이 율법과 증거, 곧 성경말씀뿐임을 단호하게 말한다. 기적들은, 신구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리들을 확증하는 목적으로 어느 기간 동안 주셨던 것이었다.

기독교는 결코 기적을 추구하고 기적을 의존하는 기적주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사는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힘쓰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말씀 중심 곧 성경 중심으로 살지 않는 자는 그 속에 진리의 빛, 곧 참된 지식이 없는 자이다. 거짓된 신비주의에 빠져 거짓된 것을 의지하고 그것들에게 묻는 자들은 결국 방황하고 곤고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환난과 고통의 흑암에 떨어질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자.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온 세상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섭리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홀로 주관하시며 인류의 역사를 홀로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시다. 여호와 하나님만 우리의 의지할 자이시며 우리의 참된 피난처이시다. 주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고(마 10:28), 또 그는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4:6).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참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만 붙들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생활에 유일한 규범이다.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며”(원문).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성경적 기독교, 역사적 기독교인 옛신앙을 굳게 붙들자. 특히 오늘날 불건전하고 거짓된 신비주의, 은사주의가 난무하여 성도들을 혼란시킨다. 기독교는 신비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은사 추구적, 은사 의존적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성경말씀의 바른 교리를 믿고 바른 생활교훈을 따라 살자.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옛 길을 바로 알아서 바로 믿고 바로 사는 신앙생활을 하자.


9장: 메시아 왕국

1-7절, 메시아 탄생의 예언

[1-2절]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을 당하고 흑암 가운데 있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며 멸시를 당하고 무겁게 멘 멍에와 어깨에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가 있을 것이다(4절). 이스라엘 나라는 죄로 인해 이방 나라에 포로가 되고 많은 핍박과 학대와 고통을 당할 것이다. 이 예언이 과거 시제로 표현된 것은 이사야 때에 북쪽 나라가 벌써 멸망하여 그렇게 되었든지 아니면 머잖아 확실히 그렇게 될 것을 나타낼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인류의 영적 상태도 죄와 고통과 사망 아래 있었다.

그러나 고통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히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빛과 즐거움이 올 것이며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 찾아올 것이다. 전에 고통하던 자들에게 이제 흑암이 없을 것이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으나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인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해변 길’(Via Maris)은 북쪽의 다메섹에서 갈릴리 호수와 므깃도를 이어 남쪽 블레셋의 가사로 이어지는 구약시대에 매우 중요한 도로이었다. ‘요단 저편’이라는 표현은 가나안 땅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방인의 갈릴리’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북쪽 지방이 이방 나라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 부패했음을 나타낸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들에게 빛이 비췰 것이다. 빛은 지식과 의와 기쁨을 가리킨다. 그 빛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요한복음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부터 전도사역을 시작하셨다. 마태는 이사야서의 본문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예언적 내용을 성취하셨다고 말하였다(마 4:12-16).

[3-5절]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하나님께서는 또 그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실 것이다. 본문은 그가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4) 그들은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주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미디안의 날같이 꺾으실 것이기 때문이며,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땔감같이 살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를 통한 영혼들의 구원과 교회의 건립과 확장과 그로 인한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은 이 예언의 성취이다.

[6-7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政事)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은 메시아 예언에서 절정을 이룬다. 선지자 이사야는 신적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였다.

이사야가 메시아를 ‘한 아기’라고 말한 것은 메시아의 인성(人性)을 증거한다. 메시아께서는 한 인간으로 탄생하실 것이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고 과거시제를 사용한 것은 미래 사건에 대한 확실성을 나타낸다. ‘기묘자’라는 원어(펠레)는 ‘놀라우신 분’이라는 뜻으로 메시아의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그의 성육신(成肉身)과 동정녀 탄생, 그의 기적 행하심, 또 그의 부활 등은 다 신기하고 놀라운 일들이다. 사람으로 오실 메시아께서는 신적 존재이시다. ‘모사’(요에츠 ץ������וֹי)(조언자)라는 이름은 메시아의 지혜를 나타낸다.

‘전능하신 하나님’(엘 깁보르)이라는 말은 그의 능력을 나타내며 특히 ‘영존하시는 아버지’(아비-아드)라는 말은 그의 영원성, 아버지와 일체(一體) 되심, 그의 사랑, 생명의 근원 되심 등을 증거한다. 그것은 다 메시아의 신성에 관계된다. 메시아께서는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가지신 독특하고 놀라운 인격이시다.

‘평강의 왕’(사르-솰롬)과, “그 어깨에 정사(政事)[다스리심]를 메었고,” “그 정사(政事)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메시아의 통치 사역, 즉 그가 왕으로 통치하시며 자기 백성에게 평안을 주실 것을 보인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며, 과연 그대로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대속(代贖)으로 의와 평안을 이루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고(고후 5:18; 롬 5:1) 참 평안을 얻었다. 주께서는 친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또 그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그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다. 그 평안은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에 근거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메시아께서는 참 빛으로 오실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참된 지식과, 구원과 내세에 대한 참된 지식을 주시고 완전한 의를 주시고 기쁨과 행복을 주실 것이다. 과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참된 지식과 완전한 의와 기쁨과 행복을 주셨다. 우리는 그것들을 벌써 상당히 누리고 있다.

둘째로, 메시아께서는 신성(神性)을 가진 자이실 것이다. 그는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실 것이다. 그는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독특하고 놀라우신 인격이실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우리는 신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셋째로, 메시아께서는 특히 평안의 왕으로 오셨다. 이 세상에는 참된 평안이 없다. 참 평안은 하나님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복이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이 평안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그 평안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다. 예수님 믿고 죄사함 받은 자마다 이 평안을 누린다. 우리는 이 평안을 감사하며 또 이 은혜와 복을 다른 이들에게도 증거하자.

8-21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8-12절]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고델)[거만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대적들](아람 사람들을 가리킨 듯함)을 일으켜 그[그들을](원문)를 치게 하시며 그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선지자 이사야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교만함을 지적한다.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셨고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게 하셨으므로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그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들은 교만하고 거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징벌을 대항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의 원수인 아람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격동시켜 이스라엘 나라를 삼키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5) 하나님의 노가 쉬지 않으실 것이다.

[13-17절] 이 백성이 오히려 자기들을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며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 이 백성이 각기 설만(褻慢)하며(카네프)[불경건하며](BDB, NASB, NIV) 악을 행하며 입으로 망령되이(네발라)[어리석은 것을]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 장정을 기뻐 아니하시며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선지자 이사야는 자기 백성의 무지와 완악함을 지적한다. 사람이 실수하고 범죄할 수는 있어도 그 실수와 죄를 깨닫고 인정하고 회개하고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자녀가 부모의 교훈을 어기고 잘못할 수 있으나 부모가 그것을 지적할 때 즉시 그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그것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똑같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고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선언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존귀한 자들을 친히 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하루 사이에 그들을 죽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백성을 인도하는 자들의 역할은 중요하다. 만일 그들이 백성을 잘못 인도하면 백성은 잘못된 길로 가고 마침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다 불경건하며 악을 행했고 어리석은 것을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고의적으로 악을 행할 때는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도 않으실 것이다. 비록 고아와 과부라 하더라도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질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철저할 것이다.

[18-21절] 대저 악행은 불 태우는 것 같으니 곧 질려[찔레]와 형극[가시]을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서 연기로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이 땅이 소화(消火)되리니 백성은 불에 타는 섶나무(잎나무, 잔가지 등)[불의 연료]와 같을 것이라. 사람이 그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우편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좌편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에 비유한다.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이 땅은 불태워질 것이다. 백성은 불에 타는 섶나무[잎나무, 잔가지 등] 즉 불 연료와 같을 것이다. 소돔 고모라는 하늘의 불로 멸망을 당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주 불로 표현한다. 나훔 1:6은,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최종적 진노의 형벌은 지옥 불못이다.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이며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을 것이다.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가복음 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스라엘 나라는 굶주림 속에서 서로의 것을 빼앗으며 또 그들은 연합하여 유다를 칠 것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질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참으로 두렵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람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일으켜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을 치실 것이다. 또 그는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는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들이 불로 섶나무를 태우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태우실 것이다. 또 그는 그들이 서로의 것을 빼앗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이렇게 무서울 것이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12, 17, 21절에 반복해 나오는 말씀이다.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하나님이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징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평안 안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자.

둘째로, 우리는 모든 죄악을 멀리하되 특히 교만을 멀리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길은 죄와 교만을 버리고 멀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특히 교만이었다. 교만은 그 자체가 큰 죄악이며 멸망의 길이다. 교만은 사람의 모든 죄들 중에서 근본적인 죄악이다. 사람들은 교만한 마음 때문에 자기 중심적으로 살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복종치 않고 거역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하였다. 교만한 자들은 자기를 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다. 그것은 큰 잘못이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본을 삼아 조심해야 하고, 만일 우리가 어떤 죄를 지적받는다면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그 지적을 대항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여 우리의 부족을 깨닫고 겸손히 회개해야 하고 모든 교만과 모든 죄악을 다 버리고 또 부족한 점을 고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결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인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인도자들이 백성을 미혹케 하므로 인도를 받는 백성이 멸망을 당하였다. 우리는 인도자들을 잘 만나야 한다. 구약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은 헛된 평안을 선포하며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다. 예레미야 6:14, “그들[선지자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대수롭지 않게]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해도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라고 말했어야 했다.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 즉 거짓 목사들의 출현을 예언하시며 그들을 경계하라고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우리는 목사들이 전하는 말과 그 행실을 보고 그들이 참된 목사인지 여부를 알 수 있다. 마태복음 7:20,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또 먼저 믿은 자들이나 교회의 직분자들은 말과 행실에 있어서 다른 이들에게 좋은 본이 되어야 하고 교회와 교우들에게 덕을 세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좋은 인도자를 만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10장: 앗수르에 대한 심판

1-19절, 앗수르에 대한 심판

[1-4절]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너희에게 벌하시는 날에와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 영화(榮華)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 포로된 자의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의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징벌 선언의 계속이다. 그 지도자들은 백성을 위해 봉사하기커녕 옳지 않은 법령을 공포했고 가난하고 빈핍한 자들을 불공정하게 판결하며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과부의 소유물이나 고아의 소유물을 강제로 빼앗았다. 그러니 그런 자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가 선포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율법은 공의와 선과 진실을 명한 법이다. 그러므로 불의와 악이 가득한 이스라엘 사회에 대해, 선지자는 징벌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재앙의 날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러 도망칠 수 없고 다 포로로 잡혀가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그 정도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5-6절]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忿恨)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고이 카네프)[한 불경건한 나라](BDB, NASB, NIV)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는 앗수르를 ‘나의 진노의 막대기’라고 부르셨고, 또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忿恨)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앗수르 사람들을 보내어 한 불경건한 나라, 즉 이스라엘 나라를 치게 하시며 그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시며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같이 짓밟게 하려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세계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세상 나라들을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앗수르 나라를 그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은 그들이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사람들의 악함에 대해서도 진노를 선언하신다.

[7-11절] 그의 뜻은 이 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 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보다 우승하였느니라. 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하도다.

앗수르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았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지 못하였다. 앗수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 이스라엘 나라의 침공과 탈취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의 뜻과 마음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달랐다. 그들은 여러 나라들을 파괴하며 멸절시키려 하였고 심지어 유다 나라까지도 침공하려 했다. 그들은 자기 방백들을 열방 나라들의 왕들과 같고 자기 신상들을 유다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의 신들보다 낫다고 자랑하며 교만하였다.

[12-14절]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를 옮겼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으며 나의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나라들을 침략하려는 앗수르 왕의 그 욕심과 그 교만을 미워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주’(아도나이)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온 세상의 주인 곧 소유자시요, 주관자 즉 통치자시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시온산과 예루살렘, 즉 유다 나라를 징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일을 다 행하신 후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고델 레밥)[거만한 마음](BDB, NASB, NIV)과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실 것이다. 앗수르 사람들은 마음이 교만하였고 높은 눈으로 자신들의 힘과 지혜를 자랑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였다고 생각하였다.

[15-19절]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 그 영화의 아래에 불이 붙는 것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요 그 거룩한 자는 불꽃이라. 하루 사이에 그의 형극과 질려[가시나무와 찔레]가 소멸되며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인이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그 삼림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

앗수르 사람들의 교만과 자랑은 합당치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의 도끼나 톱과 몽둥이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랑은 마치 도끼가 찍는 자에게 자신을 자랑하는 것과 같았고, 톱이 켜는 자에게 자신을 큰 체 하는 것 같았고, 마치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고 몽둥이가 사람을 들려 함과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한 자랑을 미워하시고 불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의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 그들의 영광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불과 같으실 것이다. 하루 사이에 그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다 소멸되며, 그 나라는 몸이 아픈 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과 같을 것이라. 그 삼림에 남은 나무의 수가 적어서 아이라도 능히 셀 수 있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세계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 앗수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나라와 유다 나라 그리고 그 주위의 이방 나라들을 징벌하실 것이며 징벌하셨다. 그러나 그는 앗수르 나라의 악함에 대해서도 징벌하실 것이다. 그는 개인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하며 의지하고 섬기며 순종하자. 그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경배하며 섬길 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다. 이사야 45:6-7,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우리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창조자와 섭리자,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더욱 알고 그를 믿고 섬기며 순종하자.

셋째로, 우리는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의와 악을 미워하신다. 특히 그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학대하는 것을 미워하시고, 또 그는 높은 마음, 교만한 마음, 자랑하는 마음을 미워하신다. 그는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또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고 교훈하셨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하였다(엡 4:31-32). 우리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과 선을 실천하자.

20-34절, 남은 자가 돌아올 것

[20-23절]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그 날’ 곧 하나님께서 앗수르 나라를 심판하시는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은 다시는 자기를 친 앗수르 같은 나라를 의뢰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 하나님을 진실히 의뢰할 것이며, 야곱의 남은 자들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최종적 심판과 멸망을 작정하셨고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 그는 불의와 죄에 대해 매우 진노하시고 공의로 엄히 징벌하실 것이다. 이 세상은 마침내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끝까지’는 말은 ‘완전한 멸망’을 암시한다(BDB, NASB).

‘남은 자’라는 말이 본문에 4번 나온다(20, 21, 21, 22절).6)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하여 남은 자들, 곧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세상의 멸망 중에 오직 그들만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곧 앗수르 나라를 멸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다시 앗수르 나라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진실히 의지할 것이다.

[24-27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 내가 불구에[머잖아, 곧] 네게는 분을 그치고 노를 옮겨 그들을 멸하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반석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죽이신 것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 드신 것같이 하실 것이라.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하나님께서는 다시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신다. 유다 나라는 지금 앗수르 나라의 침공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머잖아 유다 나라를 침략하는 앗수르 나라를 징벌하시고 멸망시키실 것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 곧 주권자이시며 무수히 많은 천사들을 거느리신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채찍을 들어 앗수르 나라의 왕을 치실 것이다. 옛날 기드온 시대에 미디안 사람들을 오렙 반석에서 쳐죽이게 하신 것처럼, 또 출애굽 시대에 애굽에서 모세가 바다를 향하여 지팡이를 든 것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일하실 것이다.

또 앗수르 나라가 심판을 받는 그 날에, 그들의 무거운 짐이 이스라엘 백성의 어깨에서 떠나고 그 멍에가 이스라엘의 목에서 벗어질 것이다. 27절에 ‘기름진 까닭에’라는 원문(밉페네 솨멘)은 ‘기름 바름 때문에’(KJV)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에 주신 기름 바름, 특히 하나님께 기름 바름을 받으실 메시아를 가리킨 것 같다(Poole, 박윤선). 앗수르 나라의 멸망과 이스라엘 나라의 구원은 메시아 예언 때문에 이루어질 것이다.

[28-32절] 앗수르 왕이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치중(輜重)[짐]을 머무르고 영[언덕]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하매 라마는 떨고 사울의 기브아 사람은 도망하도다. 딸 갈림아, 큰 소리로 외칠지어다. 라이사야, 자세히 들을지어다. 가련하다, 너 아나돗이여. 맛메나 사람은 피난하며 게빔 거민은 도망하도다.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앗수르 왕7)은 유다에 들어올 것이다. 그는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짐을 머무르고 언덕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할 것이다. 아얏, 미그론, 믹마스, 게바는 다 예루살렘 부근에 있는 유다 나라의 성들이다. 그때 유다 성읍들은 두려워 떨며 도망칠 것이다. 적군들은 손을 흔들며 성들을 공격할 것이다.

[33-34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철로 그 빽빽한 삼림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작벌을 당하리라.

‘주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16, 23, 24, 33절)은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천군 천사들을 거느리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천지만물과 사람들 개인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와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혁혁한 위력으로’라는 원어(베마아라차)는 ‘와지끈하게’ (with a terrible crash)(NASB)라는 뜻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와지끈하게 꺾으실 ‘그 가지’는 앗수르 왕을 가리킬 것이며(Poole, J. A. Alexander, 박윤선), 레바논도 앗수르를 가리킬 것이다(겔 31:3). 또 ‘그 장대한 자들’(원문)과 ‘높은 자들’(원문)도 앗수르 나라의 장군들을 가리킬 것이다. 또 ‘권능 있는 자’는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천사(사 37:36)를 가리킬 것이다.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졌다(왕하 18-19장). 앗수르 나라는 바벨론 나라에게 멸망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장차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두려워하자. 22절, “넘치는 공의로 훼멸[멸망]이 작정되었음이라.” 세상의 마지막 심판은 작정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우상숭배와 음란을 심판하실 것이며, 또 앗수르 나라의 교만과 악함과 강포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작정되어 있다. 로마서 2:5, 16,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그 심판은 참으로 두려운 사건일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마지막 날에 예비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모든 죄를 미워하고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남은 자들이 되어야 한다. 21-22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로마서 11:4-5, “[엘리야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자들을 가리킨다. 온 세계에서 남은 자들만 모든 우상숭배와 죄를 회개하고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며 하나님만 진실하게 믿고 순종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며 의와 선을 행하자. 남은 자들은 모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행위들과 습관들과 삶을 청산하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자들이 될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그 남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만 늘 사모하면서 의와 선을 힘써 실천할 것이다. 로마서 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