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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Genesis) 37장-50장 [Ⅸ.요셉의 역사] / 김효성 목사

영국신사77 2020. 4. 14. 13:52

 <차  례>

37장: 요셉이 팔림

38장: 유다와 다말

39장: 요셉의 고난과 형통

40장: 죄수들의 꿈을 해석함

41장: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

42장: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옴

43장: 형들이 베냐민과 함께 다시 옴

44장: 베냐민을 남겨두려 함

45장: 요셉이 자기를 알림

46장: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감

47장: 이스라엘이 고센 땅에 거함

48장: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함

49장: 야곱이 열두 아들들에게 예언함

50장: 야곱과 요셉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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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장: 요셉이 팔림

[1-2절]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17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요셉은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 즉 단과 납달리, 갓과 아셀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하였다. 그들은 때때로 잘못을 행했고 그것을 감추었던 것 같다. 그것은 실상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었다. 요셉이 그런 일들을 아버지께 고한 것은 그의 정직함과 도덕성을 보인다.


[3-4절]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야곱은 요셉을 여러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였다. 그것은 그가 하란에서 14년을 지난 91세 때 그를 얻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그의 사랑하던 아내 라헬이 낳은 아들이었고 그 어머니 라헬은 그가 여섯 살 때 그 동생 베냐민을 출산한 직후 죽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래서 야곱은 그를 더욱 사랑했고 그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혔다. 형들은 야곱의 이런 편애 때문에 요셉을 더욱 미워했고 그에게 하는 말이 친절하지 못했다(NASB, NIV).


[5-11절]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요셉은 어느 날 그가 꾼 곡식단의 꿈을 말했다. 형들은 그 꿈과 그의 말을 인해 그를 더욱 미워하였다. 그가 다시 꾼 해와 달과 열 한 별의 꿈은 더욱 그러했다. 요셉이 꾼 꿈들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두 번이나 비슷한 뜻을 보이는 꿈을 꾸었다. 이 일로 인해 요셉은 ‘꿈꾸는 자’라고 불리었다(19절).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옛날에는 꿈이 하나님의 계시의 한 방법이었다. 요셉의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었다. 그 꿈은 요셉에게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그가 그 꿈을 꾼 17살 때부터 애굽의 총리가 된 30살 때까지 13년간의 긴 고난의 과정을 이기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12-17절] 그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비의 양떼를 칠 때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떼가 다 잘 있는 여부를 보고 돌아와 내게 고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매 이에 세겜으로 가니라.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가로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나의 형들을 찾으오니 청컨대 그들의 양 치는 곳을 내게 가르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요셉이 그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요셉은 아버지의 명에 순종하여 헤브론에서 세겜까지 직선거리로 약 75킬로미터 이상인 거리를 갔고 거기서 형들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어떤 사람에게 물어 도단까지 약 20킬로미터를 더 갔다. 요셉은 아버지의 명을 완수하기 위해 충실하였다.


[18-20절]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누가 주동자인지는 몰라도 형제들이 대부분 동참했다. 그에 대한 그들의 미움은 그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려는 계획에 동참케 하였다.


[21-22절]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


맏형 르우벤은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구원하여 아버지께로 돌리려 했다. 후에 그들이 애굽에서 옛날 자신들의 악행을 기억하며 후회했을 때, 르우벤은 동생들에게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하였다(창 42:22).


[23-25절]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 먼 곳까지 찾아온 동생을 형들이 죽이려 했으니 사람은 참으로 악한 존재이다. 그들은 동생을 구덩이에 던진 채 앉아서 음식을 먹었다. 

미움은 참으로 무서운 악이다. 미움은 동생을 구덩이에 던져 넣어 잔인하게 굶겨 죽이려 하였다.


[26-28절]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20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굶겨 죽이는 것보다는 덜한지 몰라도 동생을 팔아 넘기자는 유다의 제안도 악한 것이었다. 후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사람을 납치하고 파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큰 악이다(출 21:16).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려 은 20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다. 미디안 사람 상인들은 이스마엘 상인들 속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은 20개는 20세겔을 가리킬 것이다. 레위기 27:5에 보면, 5세부터 20세까지의 남자의 값이 20세겔이었다. 요셉은 은 20세겔에 종으로 팔려갔다.


[29-32절] 르우벤이 돌아와서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아우들에게로 와서 가로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 채색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형제들 중 르우벤 외에는 누구 하나 요셉을 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요셉을 팔 때 르우벤은 거기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야 했다. 그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취하고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 옷을 그 아버지에게 가져와 이것이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들의 악한 행동을 이렇게 숨겼다. 그들은 악한 데 영리했다.


[33-35절]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이 얼마나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 죽었을까 생각하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또 자기가 괜히 아들을 심부름보냈다고 자책했을 것이다. 

야곱의 생애는 고생이 많았다. 20년 하란 생활은 수고로웠고 외삼촌 라반에게 큰 압박을 받았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에서 때문에 매우 긴장했었다. 세겜에서 그는 딸 디나가 강간 당하는 괴로운 일도 경험했다. 벧엘을 지나오면서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었고 맏아들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하는 비극도 경험했다. 

거기에 더해, 그는 이제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생각하는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이렇게 철저히 고난으로 훈련시키셨다. 

야곱에게 고난은 세상의 애착을 다 끊어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은혜의 방편이었다.


[36절] 미디안 사람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작정은 이렇게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창세기 37장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은 심히 죄악되다.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하는 요셉을 미워했고 죽이려 하였고 마침내 그를 팔아넘겼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하는 것이다(요일 3:15).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우리의 부족과 죄를 인정하고 철저히 회개하며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롬 12:10).


둘째로,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은 신기하게 이루어졌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을 때, 요셉의 꿈은 좌절되었고 고난의 어두움이 그를 삼킨 것 같았다. 그러나 꿈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안에서 삶의 목표를 정하고, 

믿음과 정직함으로 살고, 

고난 중에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작정하신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셋째로, 야곱은 고난을 통해 신앙 훈련을 받았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도 잃어버렸고 사랑하는 아들 요셉도 잃어버렸다. 그는 세상에서 모든 좋은 것을 다 잃어버렸다. 

신앙생활은 결국 세상의 헛된 것을 버리고 하나님과 영원한 영광의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야 한다(마 16:24).


38장: 유다와 다말

[1-5절] 그 후에(바에스 하히)[그때에](KJV, NASB, NIV)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유다의 제안으로 동생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일이 있었던 때, 즉 그 일이 있은 직후에, 유다는 형제들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 나아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였다. 

유다는 동생 요셉과 나이 차이가 약 3~4년이었으며 그때 약 20세였을 것이다. 그의 아내는 엘, 오난, 셀라를 낳아주었다. 3~4년의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6-8절]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여러 해가 지나, 유다는 맏아들 엘을 위해 다말을 아내로 얻어 주었다. 그런데 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다. 유다는 자식들을 경건하고 선하게 키우지 못한 것 같다.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에게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고 말했다. 

옛날부터 과부가 고인의 형제와 결혼하는 수혼[嫂婚, 계대(繼代)결혼]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후에 모세의 율법에 규정되었다(신 25:5). 이것은 형제의 대(代)가 끊어지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신 25:6).


[9-11절]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泄精)하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守節)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둘째 아들 오난은 그 씨가 자기의 것이 되지 않을 줄 알았으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정액을 땅에 배설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도 죽이셨다. 

유다는 그 며느리 다말에게 “수절(守節)하고[과부로]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그가 막내아들 셀라도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다말은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었다.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는 적어도 3~4년 이상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12-14절]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얼굴 가리는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얼마 후에’라는 원어는 ‘여러 날이 지난 후’라는 뜻이다. 여러 날이 지난 후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었다. 유다는 20년간 연속하여 불행한 일들을 당하였다고 보인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죽었고 그의 아내도 죽었다. 그것은 동생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한 그의 악한 제안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을 것이다.

유다는 아내가 죽고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며느리 다말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얼굴 가리는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곁 에나임 문에 앉았다. 

그것은 유다의 셋째 아들 셀라가 다 컸지만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기 때문에 계획적으로 시아버지를 유혹하기 위함이었다.


[15-16절] 그가 얼굴을 가리웠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 자부인 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다말이 베일로 얼굴을 가리웠으므로 유다는 그를 창녀로 여겼고 길곁으로 그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그는 그가 자기 며느리인 것을 알지 못했다. 비록 아내가 죽은 후이긴 하지만, 유다는 육신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 연약한 모습을 가졌다. 

사람의 본성 속에 죄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것을 잘 통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결혼 제도를 통해 사람이 죄 가운데 빠지지 않게 하셨다(고전 7:1-9). 

잠언 5:18-20,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


[17-19절] 유다가 가로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약조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가로되 무슨 약조물을 네게 주랴. 그가 가로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면박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이렇게 성 매매가 이루어졌고 다말은 시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하게됐다. 유다는 그가 창녀인 줄 알고 그에게 들어갔지만, 그것은 만일 그가 며느리인 줄 알고 행했다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악된 일이었다. 

레위기 20:12는 “누구든지 그 자부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음이라”고 말한다. 유다는 심히 수치스러운 실수를 범하였다. 그것은 유다의 생애에 큰 오점이었다. 그러나 그 실수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징벌이었던 것 같다.


[20-23절]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약조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가로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고 그곳 사람도 이르기를 여기는 창녀가 없다 하더라. 유다가 가로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내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나 그의 친구는 창녀와의 동침이 부끄러운 일임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양심은 부부의 사랑의 표인 성 관계의 본래의 가치를 저버리고 그것을 상품화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알고 있다.


[24절] 석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유다는 행음이 용납할 수 없는 큰 악임을 알고 있었다. 후에, 모세의 율법에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의 딸이 행음하면 그를 불사르라고 명령하셨고(레 21:9), 또 처녀가 그 아비 집에서 창녀처럼 행음하면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말씀하셨다(신 22:20-21).


[25-26절]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다말이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성 관계를 가진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이었으나, 유다가 다말에게 수절을 요구하면서 그의 막내아들 셀라를 그에게 아내로 주지 않은 것도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이었다. 유다는 다말의 잘못보다 자신의 잘못이 더 크다고 깨달았다.


[27-30절]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다말은 베레스와 세라라는 쌍둥이를 해산하였고, 룻기 끝에 보면, 그의 아들 베레스는 경건한 다윗의 조상이 되었다(룻 4:18-22).


창세기 38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은 참으로 죄악되다. 유다의 맏아들 엘은 하나님 앞에 악하였고 둘째 아들 오난도 그러했다. 다말의 행위도 매우 악했고 유다의 행위도 심히 부끄럽고 죄악된 일이었다. 

유다의 가정은 연약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몸의 죄성에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자.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둘째로, 유다의 가정의 불행은 하나님의 징벌이었다고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아들 엘과 오난을 죽이셨다. 유다의 아내도 얼마후 죽었다. 그의 며느리 다말은 죄악된 임신을 하였고 유다 자신도 죄악되고 부끄러운 실수를 했다. 

이것은 다 동생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한 그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하며 그의 말씀 앞에 떠는 자가 되자(사 66:2).


셋째로, 비록 사람이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 다말이 연약하고 유다도 연약했으나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다가 다말에게서 낳은 베레스는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랐다(마 1:3). 

사람이 연약하고 실수하고 범죄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실패함이 없이 진행되고 성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뜻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도하자(마 6:10).


39장: 요셉의 고난과 형통

[1절]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은 요셉을 종으로 샀다. ‘시위대장’은 청와대 경호실장 같은 직위이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렸고 그것도 바로의 시위대장에게 팔렸다.


[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 그는, 에녹과 동행하시고(창 5:22) 노아와 동행하셨듯이(창 6:9), 아브라함과 함께하시고(창 21:22) 이삭과 함께하시고(창 26: 3, 28) 야곱과 함께하셨듯이(창 28:15, 20), 요셉과 함께 하셨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다. ‘형통하다’는 원어(찰라크)는 ‘잘 되다, 성공하다,’는 뜻이다. 

요셉은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비슷하였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살면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많은 복을 받았다.

전지전능하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인생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자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위로와 힘과 용기를 얻고 기쁨과 평안을 잃지 않고 기도의 응답과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과 구원하심을 얻는다. 그는 몸의 건강도 경제적 안정도 전쟁의 승리도 얻는다.


[3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범사에 형통케 하심’이라는 말을 보면, 요셉은 주인이 맡긴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원만하게 잘 처리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도 그랄 왕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에게서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말을 들었다(창 21:22). 

또 이삭도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는 말을 들었다(창 26:28).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형통함의 복을 얻는 성도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증거가 된다.


[4절]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요셉은 주인 보디발에게 은혜를 입었다. 그것은 주인에게 인정을 받고 사랑을 입은 것을 말할 것이다. 그것은 종에게 큰 복이다. 

주인이 요셉에게 은혜를 베푼 것은 요셉의 인격의 됨됨이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그의 건실한 사상과 인격성, 도덕성에 있다. 말 잘하는 것이나 지식과 기술이 많은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도 좋은 요소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실한 사상과 인격성과 도덕성이다. 정직하고 착하고 진실함, 남을 배려함, 겸손함, 인내와 용기 등의 덕성이 그것이다. 요셉에게는 이러한 덕성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무슨 중요한 일에 대한 책임을 가질 자의 자질이다. ‘가정 총무’는 집안일의 총책임을 가진 자, 즉 가사 관리인이다. 그의 주인은 모든 소유를 요셉의 손에 위임하였다.


[5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요셉 때문에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고 그 복은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다. 본문은 책임자의 역할이 큼을 보인다. 무슨 일을 책임 맡은 자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맡은 모든 일에도 복을 주실 것이다.


[6절]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요셉은 주인의 신임을 얻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윗사람의 신임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남에게 신임을 얻는 인격이 좋은 인격이다. 요셉은 또한 용모도 잘 생겼고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7-9절]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家中)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得罪)하리이까?


요셉의 종살이가 형통한 것 같은 때 그에게 시험이 닥쳐왔다. 사람에게는 세상 사는 동안 많은 시험이 있다. 요셉의 시험은 그 주인의 아내로 인해 왔다. 그 주인의 아내는 단정치 못했고 욕망을 품은 눈으로 요셉을 쳐다보며 자기와 동침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그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주인이 그에게 집안의 모든 것들을 다 맡겼지만 그의 아내는 아니었다. 그는 또 만일 그가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임을 알았다. 간통은 하나님 앞에서 큰 악이다. 요셉은 양심이 바르고 도덕성이 있었다.


[10-12절]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주인의 아내는 전혀 도덕성이 없었다. 요셉은 그 여자의 말을 듣고 동침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함께 있지도 않았다. 그가 범죄할 위기에 빠졌을 때 그는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갔다. 그는 그 위기를 잘 모면하였다. 음행의 죄는 기회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13-19절] 그가 요셉이 그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그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왔기로 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주인의 아내는 요셉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웠다. 그는 자신의 단정치 못한 말과 행동을 반성하고 고치기는 커녕 요셉이 나쁜 사람인 것처럼 말했다. 잘못이 없는 이웃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은 갑절이나 더 나쁜 일이다. 양심을 가진 사람은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20-21절]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요셉은 비록 옥에 갇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셔서 감옥 책임자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다. ‘전옥’은 ‘감옥 책임자’ 즉 오늘날 말로 하면 ‘교도소장’이다. 

요셉에게 고난은 있었지만, 그는 그가 처한 현실에서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받았다.


[22-23절]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감옥 책임자는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요셉의 손에 맡겼고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였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기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


창세기 39장의 교훈이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고난을 겁내지 말자. 요셉은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다가 애굽에 종으로 팔렸다. 야곱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하루아침에 애굽 사람의 종이 되었다. 더욱이 그는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감옥에 갇혔다. 

요셉은 고난이 많았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우리가 바르게만 산다면, 우리는 고난을 겁내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형통케 하심을 사모하자. 요셉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입었고(2, 3, 21, 23절) 형통한 자가 되었다(2, 3, 23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이다. 왜냐하면 만복의 근원이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성도는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자들은 고난 중에도 위로와 힘과 용기를 얻고 기쁨과 평안을 잃지 않고 기도의 응답과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와 구원을 얻고, 건강도 경제적 안정도 전쟁의 승리도 얻을 것이다. 성도는 고난 중에도 형통한 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형통케 하심을 감사하고 사모하자.


셋째로, 우리는 오직 경건하게 또 거룩하게 살자.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은 그의 경건함 때문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죄 짓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중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인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큰 악임을 알았고 그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썼다.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자는 확실히 형통할 것이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함께하실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여 형통의 복을 누리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경건하게 살아야 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40장: 죄수들의 꿈을 해석함

[1-5절]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 주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그들을 시위대장의 집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의 갇힌 곳이라. 시위대장이 요셉으로 그들에게 수종하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수일이라.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몽조가 다르더라.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꾼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적 꿈이었다. 옛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꿈이나 이상으로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다. 창세기 20:3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꿈에 나타나셨다. 신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셨다(마 1:20; 2:13, 19).

물론 사람들이 꾸는 꿈들 중에는 헛된 꿈들도 많이 있었다. 거짓 선지자들도 꿈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그것은 헛된 것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몽사[꿈]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꿈]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렘 23:28).

오늘날엔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고 말씀하신다. 주께서는 이 사실을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의 말로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6:29에서 그는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말씀하셨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이미 죽었지만, 그들의 글들인 구약성경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하였다(딤후 3:16).


[6-8절]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관원장에게 묻되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요셉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꿈을 해석해주실 수 있음을 믿었고 그들에게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라고 말했다.


[9-15절] 술 맡은 관원장이 그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前職)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이 꾼 꿈에 대해 들은 후 그것은 사흘 후에 그가 복직될 것을 보인다고 해석해주었다. 또 그는 자신이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을 행치 않았다고 말했다.


[16-19절]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길함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그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요셉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먹으리이다 하더니.


요셉은 또 떡 굽는 관원장의 꿈에 대해서는 그것이 사흘 안에 그의 머리가 끊어지고 그의 몸이 나무에 달리고 새들이 그의 고기를 뜯어먹을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것은 매우 대조되는 해석이었다.


[20-23절] 제3일은 바로의 탄일이라. 바로가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할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으로 머리를 그 신하 중에 들게 하니라.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前職)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제3일은 바로의 탄신일이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은 요셉의 꿈 해석대로 한 사람은 복직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나무에 달렸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렸다.


두 관원장들이 꿈을 꾸고 요셉이 그것을 해석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 가운데 되어졌다. 2년 후 바로가 한 꿈을 꾸고 그 꿈을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술 맡은 관원장은 자기의 꿈을 해석해준 요셉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그를 추천할 것이다.


창세기 40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중시하자.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꿈이나 이상으로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으나, 

오늘날에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주야로 읽고 연구하고 묵상함으로 

견고한 믿음과 온전한 인격을 가지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권적 작정자,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자. 

잠언 3:6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했고, 

잠언 16:3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다. 

우리가 오직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경건하고 성결하고 겸손하자. 

요셉은 그렇게 살았다. 후에 다니엘도 그런 삶을 살았다. 

그들은 늘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했고 죄 짓는 일을 두려워했고(창 39:9; 단 1:8) 

꿈 해석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증거하였다(창 40:8; 41:16; 단 2:28).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과 함께하신다. 

물론 이런 인격과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41장: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

[1-8절] 만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하숫가에 섰는데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하숫가에 섰더니 그 흉악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세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 아침에 그 마음이 번민하여 보내어 애굽의 술객과 박사를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 꿈을 고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감옥에서 두 관원장들에게 꿈을 해석해준 지 만 2년 후에 

애굽 왕 바로가 한 꿈을 꾸었다. 

그것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와 흉하고 여윈 다른 일곱 암소에 대한 것과, 

한 줄기의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과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에 관한 것이었다.


[9-13절]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징조가 있는 꿈이라. 그곳에 시위대장의 종된 히브리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고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인에게 해석하더니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하고 그는 매여 달렸나이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은 옥에서 자기의 꿈을 해석해주고 그 해석대로 이루어졌던 요셉을 기억하며 바로에게 고하였다.


[14-16절] 이에 바로가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낸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오니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더라.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옥’이라는 원어(보르)는 ‘토굴 감옥’이라는 뜻이다. 

바로 앞에서 요셉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하나님을 드러내어 증거하였다.


[17-24절]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에 하숫가에 서서 보니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하숫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 먹고 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악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그 파리하고 흉악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진 소를 먹었으며 먹었으나 먹은 듯하지 아니하여 여전히 흉악하더라. 내가 곧 깨었다가 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더니 그 세약한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술객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보이는 자가 없느니라.


바로는 요셉에게 자기가 꾼 꿈에 대해 말하였다.


[25-31절]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이라.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 소는 7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내가 바로에게 고하기를 하나님이 그 하실 일로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기근으로 멸망되리니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요셉은 바로에게 그 꿈은 하나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은 7년 풍년과 7년 흉년에 대한 것이라고 해석해주었다.


[32-37절]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속히 행하시리니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치리하게 하시고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국중에 여러 관리를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5분의 1을 거두되 그 관리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에 적치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을 예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을 인하여 멸망치 아니하리이다.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38-40절]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41-45절]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온’은 헬리오폴리스라는 도시이었다.


[46-49절]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30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축하되 각 성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중에 저장하매 저장한 곡식이 바다 모래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요셉을 등용한 바로는 애굽의 중왕국시대 제12왕조(주전 2000- 1780년) 

센우스레트 3세(주전 1888-1852년)라고 본다.43)


[50-52절]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을 낳되 곧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지라.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므낫세의 뜻은 잊어버림이며, 에브라임의 뜻은 풍성함이다.


[53-57절]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 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더니 애굽 온 땅이 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각 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창세기 41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애굽에 팔려 종살이했던 요셉,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그를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꿈을 해석케 하셨고 왕의 인정을 받아 즉시 총리가 되게 하셨다. 

요셉은 13년 간의 긴 고난의 세월을 지나 하루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이었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복을 주시고 그를 높이신 것은 물론 그의 은혜 때문이지만, 

인간편에서 요셉은 경건하고 거룩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고 죄 짓지 않기를 힘썼다. 

그는 복 받을 만한 그릇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을 더욱 사랑하시고 

오직 그런 사람을 높이시며 크게 쓰실 것이다.


셋째로,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의 모든 성도들의 예표이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 죄 때문에 사람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러나 그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고 장차 재림하실 것이다. 

주의 제자된 우리도 고난 후에 영광에 이를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고 주 예수님을 따르며 

그를 위해 목숨을 잃고자 하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것이며(마 16:24-25) 

현재의 고난은 천국의 영광에 비교될 수 없다.


42장: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옴

[1-4절]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요셉의 형 10인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을 그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이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렵다 함이었더라.


[5-8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요셉은 22년 전에 형들이 자기 앞에 절하는 꿈을 두 번이나 꾸었었다(창 37:5-10).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었다. 그가 꿈을 꾼 지 22년의 세월이 흐른 때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비록 긴 고난의 시간들을 지났었지만, 그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9-13절]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로서 독실한 자니 종들은 정탐이 아니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주의 종 우리들은 12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말째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독실하다’는 말(케님)은 ‘정직하다’는 뜻이다.


[14-17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말째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이니라 하고 그들을 다 함께 삼일을 가두었더라.


[18-20절] 삼일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너희 형제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21-23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피차 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 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은 동생 요셉의 애걸함과 마음의 괴로움을 못들은 체했던 자신들의 악하고 무정했던 행동을 생생히 기억했고 그들의 악행이 그들에게 그대로 임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24-25절]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인의 돈은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요셉은 잠시 그들을 떠나가 울었다. 그는 그가 아버지 집을 떠나 은 20개에 이곳으로 팔려올 때로부터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약 13년 동안 외롭고 고생스럽게 보낸 세월의 일들이 생각났을 것이다.


[26-28절]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곳을 떠났더니 한 사람이 객점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구에 있는지라. 그가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라는 말을 보면 형들 속에도 주권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29-36절]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 아비 야곱에게 이르러 그 만난 일을 자세히 고하여 가로되 그 땅의 주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나라 정탐자로 여기기로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독실한 자요 정탐이 아니니이다. 우리는 한 아비의 아들 12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말째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그 땅의 주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독실한 자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탐이 아니요 독실한 자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인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 아비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야곱의 마음의 고통은 매우 컸을 것이다. 그는 라헬의 아들 요셉도, 시므온도 잃었고 베냐민까지 잃어버릴 지경이 되었다고 느꼈다. 그가 사랑했던 라헬은 죽어 그의 곁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철저하게 훈련시키셨다. 그것은 그의 성화, 즉 영적 성장의 과정이며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육신적 애착을 끊는 과정이었다.


[37-38절] 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창세기 4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 요셉의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었다. 그 꿈은 22년 만에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뜻은 비록 더디게 보일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사야 46:10은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고 말했다. 오늘날 하나님의 약속은 주 예수님의 재림과, 몸의 부활과, 영광의 천국이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낙심치 말고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의 약속들을 굳게 붙들고 참고 기다리자.


둘째로, 우리는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버려야 한다. 형들은 22년 전의 잘못을 기억하고 뉘우쳤다. 죄의 기억과 양심의 가책은 오래갔다.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죄를 깨달았다. 사람의 양심의 가책은 하나님의 기억을 반영한다. 우리는 죄를 짓고 잊어버릴지 모르나, 죄는 우리에게 상처를 입은 자의 기억 속에 오래 남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죄인은 용서받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들을 미리 철저히 회개하고 청산하고 정리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의 애착을 다 끊어야 한다. 야곱을 위한 하나님의 훈련은 철저하였다. 그것은 세상 애착을 끊게 하는 과정이었다.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다 뒤에 버려두고 죽음을 맞을 것이며 홀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것이 헛됨을 미리 아는 것이 좋다. 우리는 세상 애착을 끊고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야 한다. 주께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37-38). 우리는 세상 것에 대한 모든 애착을 온전히 끊어버리고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고 소망하며 살자.


43장: 형들이 베냐민과 함께 다시 옴

[1-5절]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 유다가 아비에게 말하여 가로되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경계하여 가로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야곱 가족들이 살 던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온 것은 야곱의 아들들이 22년 전에 지은 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그 죄를 회개치 않았다. 기근은 일반적으로 그 거민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그러나 기근 중에도 애굽에 양식이 있었고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양식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에 베푸신 은혜이었다. 야곱의 아들들의 행위를 생각하면 은혜 받을 여지가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야곱을 긍휼히 여기셨다.

하나님께서는 기근의 때에도 자기 백성에게 생존할 길을 주신다. 시편 33:18-19,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욥기 38:41,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마 6:26-33).


[6-10절] 이스라엘이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오히려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하여 나를 해롭게 하였느냐? 그들이 가로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힐문하여[물어]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그저 살았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말을 조조이[조목조목] 그에게 대답한 것이라. 그가 너희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이전에 요셉을 팔 때 앞장서서 제안했던 유다이지만, 지금은 다른 형제들보다 앞서서 자신이 베냐민의 몸을 담보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과거의 잘못을 많이 반성한 것 같다.


[11-14절] 그들의 아비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을 삼을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榧子)와 파단행이니라. 너희 손에 돈을 배나 가지고 너희 자루 아구에 도로 넣여 온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차착[착오]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굶어죽느냐 아니면 베냐민을 함께 보내어 양식을 구하게 하느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베냐민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으나 그를 함께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야곱은 먼저 애굽의 그 통치자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였다. 그는 가나안 땅의 아름다운 소산 중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을 준비하였다. 비자는 견과들(nuts)을 가리키고 파단행(巴旦杏)은 편도들(almonds, 아몬드)을 가리킨다. 야곱은 그 통치자를 위해 정성의 선물을 준비하였다.

또 야곱은 양식값을 두 배나 넣게 하였다. 지난번에 어떤 착오로 돈이 지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돈 계산이 정확한 자,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이었다. 그것은 좋은 인격의 요소이다. 이런 요소는 장로와 집사의 한 자격요건이 된다(딤전 3:3[전통본문], 9).

야곱은 막내아들 베냐민을 그들과 함께 보내며 말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받기를 소원하였다. 참 신앙은 사람들이나 땅의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권적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의 주권적 처분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온전케 만들고 계셨다. 그는 이미 돈 계산이 정확한 도덕성이 있었다. 그는 전능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세상의 가장 귀한 것을 포기케 하시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며 의지하게 하셨다. 그것이 그에게서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먼저 데려가신 뜻이며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빼앗아가신 뜻이었고 지금 남은 베냐민까지 포기케 하시는 뜻이었다. 그는 베냐민을 포기하였지만, 그 대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뿐이었다.


[15-18절] 그 사람들이 그 예물을 취하고 갑절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의 앞에 서니라. 요셉이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그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오정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그 사람이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일 우리 자루에 넣여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를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19-24절] 그들이 요셉의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앞에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주여, 우리가 전일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객점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인의 돈이 본수대로 자루 아구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

요셉의 청지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던 것 같다.


[25-28절] 그들이 여기서 먹겠다 함을 들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오정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그 집으로 들어가서 그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니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가로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지금까지 생존하셨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비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29-31절]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가로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냐? 그가 또 가로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 듯하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32-34절]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하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하고 배식하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하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그들이 요셉의 앞에 앉되 그 장유의 차서대로 앉히운 바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요셉이 자기 식물로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5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요셉의 형들은 요셉 앞에 맏형부터 막내까지 나이 순서대로 앉히우자 서로 이상히 여겼다. 요셉이 처음부터 형들을 용서치 않은 것은 그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준 것일 것이다. 그가 양식을 살 돈을 그들의 자루에 도로 넣은 것을 보면 그들을 아주 미워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형들에 대한 그 자신의 감정도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그 동생 베냐민은 보고 싶었으나 자기를 판 형들은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면, 그들에 대한 그의 감정도 상당히 풀린 것 같다. 그래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이 낫다. 그는 지금 자기를 팔았던 형들을 용서하고 너그러이 대하고 있다.


창세기 4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기근 중에도 하나님만 의지하자. 가나안 땅에 기근이 극심했으나 애굽에는 양식이 있었다. 땅에 기근이 심해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먹을것과 입을 것을 예비하신다. 우리는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를 아시고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의 것을 염려하지 말고 오직 섭리자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대로, 그의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자(마 6:33).


둘째로, 우리는 야곱처럼 땅의 것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자. 야곱은, 강제적으로지만 라헬도, 요셉도, 베냐민도 포기했다. 주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마 19:21). 또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4:33). 그것이 제자의 길이며 그것이 영적으로 온전케 되는 길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살자.


셋째로, 우리는 요셉처럼 원수같은 형들도 너그러이 용서하자. 이것이 주께서 성경에서 교훈하신 온전함이다. 주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44).사도 바울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했다(엡 4:32).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44장: 베냐민을 남겨두려 함

[1-6절] 요셉이 그 청지기에게 명하여 가로되 양식을 각인의 자루에 실을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인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소년의 자루 아구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개동시에 사람들과 그 나귀를 보내니라. 그들이 성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미칠 때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악으로 선을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미쳐 그대로 말하니.

2절의 ‘그 소년’이라는 원어(학카톤)는 ‘가장 어린 자’라는 뜻이다(BDB, KJV, NASB). 그것은 베냐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7-13절]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우리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이런 일은 종들이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적질하리이까? 종들 중 뉘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우리 주의 종이 되리이다. 그가 가로되 그러면 너희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뉘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우리 종이 될 것이요 너희에게는 책망이 없으리라.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각기 푸니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수탐하매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오니라.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 것은 너무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버지 야곱이 염려했던 그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옷을 찢고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왔다.


[14-17절]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오히려 그곳에 있는지라. 그 앞 땅에 엎드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 잘 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유다가 가로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요셉이 가로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나의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유다가 야곱의 넷째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창 29:32-35) 본문이 “유다와 그 형제들이”라고 말하고 또 “유다가 가로되”라고 말한 것은 성격적으로 활달했거나 지도력이 있었거나 아니면 자신의 과거의 잘못에 대해 보상하려는 마음의 용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그 형제들은 만일 베냐민을 두고 가는 상황이라면 자신들이 모두 그의 종이 되겠다는 단합된 결심을 보였다. 요셉이 그 동생 베냐민을 남겨두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되지만, 형들에게 왜 자신을 밝히지 않고 이런 일을 했는지, 그의 속뜻이 무엇인지, 형들을 완전히 용서하는 마음이 아직 없었는지, 형들의 회개를 위해 좀더 시간을 주려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 성경은 거기에 대해 해석을 하지 않고 단지 그 사실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다.


[18-24절]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종으로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고하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옵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비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우리가 내 주께 고하되 우리에게 아비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 노년에 얻은 아들 소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 어미의 끼친 것은 그뿐이므로 그 아비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나로 그를 목도하게 하라 하시기로 우리가 내 주께 말씀하기를 그 아이는 아비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아비가 죽겠나이다.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말째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고하였나이다.

유다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한 말씀을 고하기를 청했다. 20절에 그가 말째 아우의 형이 죽었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 형제들은 아직도 요셉을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들에게 참 회개가 없었음을 나타낼 것이다. 자기 잘못을 사실대로 고백함이 없이는 참된 회개가 없다. 그들은 완전한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


[25-29절] 그 후에 우리 아비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말째 아우가 함께하면 내려 가려니와 말째 아우가 우리와 함께함이 아니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주의 종 우리 아비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내게서 나간 고로 내가 말하기를 정녕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너희가 이도 내게서 취하여 가려한즉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28절의 말씀대로 야곱은 지금껏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창 37:31-33), 그의 형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들의 잘못과 거짓말을 그대로 고백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들에게는 참된 회개가 필요하였다.


[30-34절]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유다는 전에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을 때 그를 죽이지 말고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고 제안하였었다(창 37:26-27). 그러나 동생을 종으로 팔아넘기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이었다(출 21:16). 그런 일들이 있은 후에, 유다는 그의 아내가 죽은 일이라든지, 그의 장자와 차자가 죽은 일, 또 그 자신이 며느리를 창녀로 알고 그에게 들어가 그로 임신케 한 부끄럽고 죄악된 일 등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징벌을 상당히 받았었다. 요셉의 형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기 시작했고(창 42:21) 이제 다 함께 베냐민을 위하여 종이 되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인격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유다가 나서서 베냐민을 담보하며 그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고백한 것은 그의 심령과 인격의 변화를 증거한다. 지금 유다는 이전의 유다가 아니다.


창세기 4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다 고백하자. 그것이 참 회개의 첫걸음이다. 형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아직도 아버지께 사실 그대로 고백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마침내 다 들추어내실 것이다.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실대로 고백하고 버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자. 유다와 그 형제들은 다 요셉에게 종이 되겠다고 고백했고 특히 유다는 동생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고 간청하였다. 유다는 착한 방향으로 많이 변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을 불평과 낙심으로 대하지 말고 달게 받자.


셋째로, 우리는 참 사랑을 실천하자. 유다는 베냐민 대신 자신을 종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그것은, 그가 과거에 요셉에게 행한 악의 보상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작은 보상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것은 유다의 회개의 열매이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15:13). 그는 친히 참 사랑을 보이셨다. 우리는 그의 사랑을 본받아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45장: 요셉이 자기를 알림

[1-4절]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요셉은 자신을 억제치 못했고 모든 시종하는 자들을 물러가게 한 후 형제들에게 자신을 알리며 큰 소리로 울었다. 20여년간 쌓였던 그의 슬픔과 외로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은 마침내 폭발하였다.


[5-8절]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2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5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놀라운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에 미리 보내셨다고 세 번이나 말한다(5, 7, 8절).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의 생명의 보존을 위하여 자신을 미리 보내신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에 대한 그의 놀라운 지식과 믿음이다.


[8-11절] . . .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에 미리 보내셨고 애굽에서 높은 지위를 갖게 하셨다고 두 번이나 말한다(8, 9절). 그는 자신을 ‘바로의 아비,’ ‘그의 온 집의 주,’ ‘애굽 온 땅의 치리자,’ ‘애굽 온 땅의 주’라고 표현한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그의 지혜 때문이 아니었고 우연이나 재수가 좋아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섭리하시는 주권자 하나님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런 지위에 오르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사상이며 놀라운 믿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과 믿음이다.


[12-15절]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당신들은 나의 애굽에서의 영화와 당신들의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고하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

요셉에게는 부모님에 대한 효심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특히 그의 눈물 속에는 확실히 형들에 대한 용서가 들어 있었다.


[16-20절]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 신복이 기뻐하고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비와 너희 가속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 땅 아름다운 것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이제 명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비를 데려오라.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하라.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는 원어는 그들의 물건들을 아까워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들이 그곳을 떠나 이곳으로 올 때 혹시 버리고 올 물건들과 소유물들이 있다고 해서 아까워하지 말라는 뜻이다.


[21-24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비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비에게 길에서 공궤할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노중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옷’이라는 말(칼리포스 세말롯)은 ‘갈아입을 겉옷들’이라는 뜻이다(BDB). “노중에서 다투지 말라”는 원어(알 티르게주 밧다렉)는 영어성경들도 대체로 그런 뜻으로 번역하고 있지만(NASB, NIV--quarrel), 히브리어 사전(BDB)과 성경 용례들(출 15:14; 신 2:25; 시 99:1; 사 64:1; 렘 33:9; 욜 2:1 등)을 볼 때, “길에서 두려워하지 마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25-28절]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비 야곱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을 믿지 아니하므로 기색하더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 아비에게 고하매 그 아비 야곱이 요셉의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창세기 45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믿음을 가지자.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에 미리 보내셨다고 세 번 반복해 말하고(5, 7, 8절)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로의 아비, 그의 온 집의 주,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세우셨다고 두 번 말한다(8, 9절). 그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았고 바르게 믿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홀로 다스리시는 자시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요 바른 믿음이다. 그것이 성경적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사 45:7). 시편 115:3은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주 예수께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29). 이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증거하는 성경말씀이다. 잠언 3:6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했는데,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그가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권적 창조자시며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한다. 이것이 바른 신앙이다.


둘째로,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모든 일을 합력해 선을 이루게 하신다. 야곱은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경험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결말을 행복하게 하셨다. 욥의 생애도 그러하였고(욥 42:12-17), 모세의 생애도 그러하였고, 다윗의 생애도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지극히 복된 천국을 예비하시며 또 이 세상에서 성화(聖化)를 이루게 하시고 또 환난 중에도 심신의 평안을 주실 수 있고 또 주시는 자이시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이 진리의 말씀을 굳게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자.


셋째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자는 겸손하고 참고 용서할 수 있다. 요셉은 성공했으나 겸손했고 형들에게 보복할 수 있었으나 용서하였다. 또 요셉의 생애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자는 고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인내할 수 있다.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자는 이런 은혜들을 덤으로 얻는다. 우리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믿음을 가짐으로써 겸손하고 참고 원수까지도 용서하자.


46장: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감

[1-2절]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브엘세바는 유다 땅의 가장 남단의 성읍이다. 희생을 드렸다는 말은 짐승 제사를 드렸다는 뜻이다. 짐승 제사 중 대표적인 것은 번제이며 그것은 속죄와 헌신을 나타낸다.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라는 말은 야곱의 가정에 경건이 계대되고 있음을 보인다. 신앙의 유산은 재물의 유산보다 훨씬 더 귀하다. 하나님 없이 참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성공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가능하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참 지식의 시작이요 핵심이다(잠 1:7; 9:10).

하나님께서는 ‘밤의 이상’(마르옷 할라옐라) 중에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상(異象)은 옛 시대에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한 방법이었다. 후에 사무엘을 부르셨듯이(삼상 3:3-9), 하나님께서는 밤에 나타나 “야곱아 야곱아”라고 그를 부르셨고 야곱은 대답했다.

[3-4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나는 하나님, 네 아비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라는 원어(하엘)[그 하나님]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나타낸다. 세상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그는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홀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며(창 12:7) 전에 조부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갔다가 아내를 빼앗긴 일도 있었다(창 12:10-20). 또 하나님은 이전에 아버지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다(창 26:2). 야곱은 그 일들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야곱에게는 두려움과 주저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려가라고 지시하시는 것이다. 또 원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왜냐하면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는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로 내려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내가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라고 말씀하셨다. 원문에는 ‘내가’라는 말(아노키)이 두 번 나온다. 인칭대명사는 히브리어에서 강조할 때만 쓰인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두 번이나 그것이 쓰였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내가’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강조해 말씀하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그의 눈을 감기리라고 말씀하셨다. 야곱은 애굽에서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보는 데서 임종을 맞을 것이다. 그것은 많은 고난을 당했던 야곱에게 큰 위로와 보상이 될 것이다.

[5-7절]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발행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의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비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웠고 그 생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야곱은 그 가족들과 가축들을 거느리고 브엘세바를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 애굽 거주는 야곱 자손들,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 훈련기간이 될 것이다. 애굽은 이 세상과 같고, 가나안 땅은 천국의 예표이다.

[8-15절]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이 이러하니 야곱과 그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시므온의 아들 곧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과 가나안 여인의 소생 사울이요 레위의 아들 곧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또 베레스의 아들 곧 헤스론과 하물이요 잇사갈의 아들 곧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요 스불론의 아들 곧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니 이들은 레아가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라.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33명이며.

8절부터 27절까지는 애굽에 내려간 야곱 가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레아가 낳은 32명의 자녀들의 이름이 나온다. 우리말 성경의 15절은 레아가 33명을 낳은 것처럼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이들은 레아가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며 또 그의[야곱의] 딸 디나라. 그의[야곱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이 모두 33명이라”고 되어 있다. ‘그의’(남성인칭어미)라는 말은 레아를 가리키지 않고 야곱을 가리킨다. 야곱의 아들들과 딸들이 모두 33명이라고 한 것은 야곱 자신을 포함한 숫자인 것 같다. 즉 야곱 자신과, 아들들 6명, 딸 1명, 손자 23명, 증손자 2명, 도합 33명인 것이다.

[16-18절] 갓의 아들 곧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요 아셀의 아들 곧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 곧 헤벨과 말기엘이니 이들은 라반이 그 딸 레아에게 준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라 합 16명이요.

레아의 여종 실바가 낳은 자녀들은 갓과 그의 일곱 아들들, 아셀과 그의 네 아들들과 한 명의 딸, 그리고 두 명의 손자들, 도합 16명이다.

[19-22절] 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이요 애굽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14명이요.

야곱의 아내 라헬이 낳은 자녀들은 요셉과 그의 두 아들들, 베냐민과 그의 열 아들들, 도합 14명이다. 본문은 특히 라헬을 ‘야곱의 아내 라헬’이라고 표현한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하는 참 아내이었다.

[23-25절] 단의 아들 후심이요 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이들은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니 합이 7명이라.

마지막으로, 라헬의 여종 빌하가 낳은 자녀들은 단과 그의 한 명의 아들, 납달리와 그의 네 아들들, 도합 7명이다.

[26-27절] 야곱과 함께 애굽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66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며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70명이었더라.

애굽에 이른 야곱 집의 사람들의 도합 70명에는, 야곱 자신과 레아의 자손 32명, 실바의 자손 16명, 라헬의 자손 14명, 빌하의 자손 7명이 포함되며, 야곱과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빼면 66명이다. 70명 속에는 야곱의 아내들과 자부들과 종들은 빠져 있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이라는 표현의 ‘몸’이라는 원어(야레크)는 ‘허벅지, 허리’라는 말로서 ‘생식기관’을 가리킨다.

70명의 적은 무리가 애굽에 내려가 살기 시작하였으나, 430년 후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남정만 60만명, 여자들과 아이들을 합하면 200만명 이상이 되는 거대한 무리가 될 것이다(출 12:37, 40).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3절) 그들은 거기서 큰 민족이 될 것이다.

70명의 명단에는 딸들이 두 명 들어 있을 뿐 대부분이 아들들이다. 물론, 세상에서 여성의 역할도 중요하다. 가장 큰 일은 출산이고 또 집안일을 하는 것도 큰 역할이다(잠 31:27; 딛 2:5). 또 여성들은 복음사역자들도 도왔다(눅 8:1-3; 롬 16:1, 3, 6, 12, 13). 그러나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에서 남성의 역할을 중요시하셨다. 그는 구약시대에 남자들을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이 되게 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사도와 목사와 장로가 되게 하셨다. 간혹 예외가 있지만 예외는 예외일 뿐이다. 오늘날도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에서 남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28-30절]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요셉이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아비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 목을 어긋맞겨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야곱과 요셉의 서로 얼굴을 보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것은 야곱이 받은 오랫동안의 고난의 보상과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다.

[31-34절] 요셉이 그 형들과 아비의 권속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비의 권속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라. 목축으로 업을 삼으므로 그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고센 땅은 애굽의 나일강 하구 동쪽의 비옥한 땅으로 가나안 땅과 가장 가깝다. 창세기 47장은 그곳을 ‘좋은 땅’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라암세스라고 말했다(6, 11절). 본장과 앞뒷장은 고센 땅을 강조한다(45:10; 46:28, 29, 34; 47:1, 4, 6, 27; 50:8). 요셉이 그들을 고센 땅에 거하게 하려 한 것이나 야곱이 고센 땅에 거하려 한 것은 나중에 떠날 것을 예상하여 애굽 사람들과 완전히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후에 애굽에서 올라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창 46:4) 야곱과 요셉의 믿음과 지식과 소망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창세기 4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의 삶의 길에는 때때로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불가피한 이사가 있다. 애굽에 내려가는 것은 일반적으로 좋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의 기근 때문에 그것은 불가피하였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명하셨고 허락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면 어디든지 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기도해야 한다. 시편 37: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리라.”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둘째로, 성도에게는 고난도 있지만 위로와 기쁨도 있다. 야곱의 생애가 그러했다. 오랜 고난 후에 그는 비록 가나안에서가 아니고 애굽에서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만났고 그의 섬김을 받음으로 큰 위로를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고린도후서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낙심치 말고 위로의 하나님을 믿고 바라고 그의 위로를 체험하자.


셋째로, 본문은 애굽과 고센이 이스라엘의 가족들의 영주지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들은 장차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다시 올라와야 할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내가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한다. 이 세상의 삶은 나그넷길이다(대상 29:15; 히 11:13; 벧전 2:11). 우리는 행인과 나그네 같은 자로 이 세상을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신앙인격의 훈련장일 뿐이며, 우리의 목적지는 천국이다. 믿음의 족장들은 이 세상의 본향을 찾지 않고 하나님께서 지으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히 11:13-16). 우리도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장차 주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자. 베드로후서 3:11-13,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는 그 신천신지를 바라보자.


47장: 이스라엘이 고센 땅에 거함

[1-4절]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가로되 나의 아비와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형들 중 5인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우거하러 왔사오니 청컨대 종들로 고센 땅에 거하게 하소서.

요셉의 초청과 하나님의 허락으로, 야곱과 그 가족들 66명은 애굽으로 내려갔고 요셉은 형들 중 5인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며 문안하게 하고 고센 땅에 거주하기를 요청하였다.

[5-6절] 바로가 요셉에게 일러 가로되 네 아비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비와 형들로 거하게 하되 고센 땅에 그들로 거하게 하고 그들 중에 능한 자가 있는 줄을 알거든 그들로 나의 짐승을 주관하게 하라.

바로는 요셉에게 땅의 좋은 곳 곧 고센 땅에 그들로 거하게 하고 그들 중에 능한 자가 있으면 나의 짐승을 주관하게 하라고 말했다. ‘좋은 곳’이라는 원어(메타브)는 ‘가장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BDB; KJV, NASB, NIV). 11절도 고센을 “애굽의 좋은 땅[가장 좋은 땅] 라암세스”라고 표현하는데, 원어는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많았던 야곱에게 큰 위로와 상을 주셨다. 그는 그와 그 가족들을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셨고 가장 좋은 곳을 주셨다.

[7-12절] 요셉이 자기 아비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넷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넷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요셉이 바로의 명대로 그 아비와 형들에게 거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세스를 그들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고 또 그 아비와 형들과 아비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식물을 주어 공궤하였더라.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바로 앞으로 인도하였고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왔다. 요셉은 바로의 명대로 그의 아버지 야곱과 형들에게 애굽의 좋은 땅 라암세스를 그들에게 거할 곳으로 주어 소유지가 되게 하였고 또 그들과 그들의 온 가족들에게 먹을 양식을 공급하였다. 야곱이 바로 앞에 선 때는 주전 1876년경이었고 애굽의 중왕국시대의 제12왕조(주전 2000-1780년경) 중 센우스레트 3세(주전 1888-1852년경) 때이었다고 보인다.

야곱은 자신의 지난날들을 “내 나그넷길의 세월”이라고 말했다. 그의 생애는 나그넷길이었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다. 역대상 29:15에서, 다윗은 인생을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고 표현했다. 베드로전서 2:11에서, 사도 베드로도 성도를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라고 표현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언젠가 떠나야 할 나그넷길이다.

야곱은 또한 자신의 나이가 조상들에 비하면 얼마 못된다고 말하였다. 그의 조부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고 그의 부친 이삭은 180세까지 살았다. 그러나 야곱의 나이는 아직 130세이었고 그는 고센 땅에서 17년을 살고 147세에 죽음을 맞을 것이다(28절).

야곱은 또 그의 지나간 세월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가 고향을 떠나 외삼촌이 있는 하란으로 간 때부터 고난은 시작되었다. 하란에서 20년 동안의 그의 양치기 생활은 육신적으로 고달팠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외삼촌 라반의 비인격적인 대우 때문에 힘든 시간이었다. 또 고향으로 돌아올 때 형 에서로 인해 심히 두렵고 답답했던 일, 세겜에서 딸 디나가 그곳 추장 세겜에게 강간 당한 일, 벧엘을 지나오면서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은 일, 맏아들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한 일,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어버린 일 등 그의 일생은 고통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후에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하기를,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하였다(시 90:10).


[13-15절]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식물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쇠약하니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몰수히 거두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오니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진한지라[떨어진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가로되 돈이 진하였사오니 우리에게 식물을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16-18절] 요셉이 가로되 너희의 짐승을 내라. 돈이 진하였은즉 내가 너희의 짐승과 바꾸어 주리라. 그들이 그 짐승을 요셉에게 끌어오는지라. 요셉이 그 말과 양떼와 소떼와 나귀를 받고 그들에게 식물을 주되 곧 그 모든 짐승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에 식물로 그들을 기르니라. 그 해가 다하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고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짐승 떼가 주께로 돌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전지뿐이라.

요셉은 백성들의 가축들을 받고 그들에게 식물을 주었다.


[19-20절] 우리가 어찌 우리의 전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식물로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고 전지도 황폐치 아니하리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 전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드리니 애굽 사람이 기근에 몰려서 각기 전지를 팖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요셉은 애굽의 모든 땅을 사서 바로의 소유가 되게 하였다.


[21-26절] 요셉이 애굽 이끝에서 저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제사장의 전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의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 전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날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전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추수의 5분 1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4분은 너희가 취하여 전지의 종자도 삼고 너희의 양식도 삼고 너희 집 사람과 어린아이의 양식도 삼으라. 그들이 가로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5분 1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까지(창 26:33; 35:20) 이르니라.

요셉은 백성에게 씨를 주며 토지 소득의 5분의 1은 바로에게 상납하고 나머지 넷은 그들의 심을 씨와 그들과 그 가족들의 양식을 삼으라고 말했다. 그것이 토지법이 되었다. 제사장의 토지만 예외이었다.


[27-28절]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하며 거기서 산업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더라[매우 번성하였더라](원어). 야곱이 애굽 땅에 17년을 거하였으니 그의 수가 147세라.

심히 어려운 그 기근의 때, 애굽과 가나안 땅에 모든 돈이 다 떨어지고 애굽의 짐승들도, 땅들도 다 바로의 소유가 된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안정된 거처와 먹을 것을 공급해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고센 땅에서 안정을 얻었고 생육하며 매우 번성하였다. 시편 33:18-19는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고 말했다.

[29-31절]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先塋)[조상들의 무덤]에 장사하라. 요셉이 가로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또 가로되 내게 맹세하라.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

‘환도뼈’라는 원어(야레크)는 ‘허벅지’(thigh)라는 의미이다. ‘침상’이라는 원어는 ‘지팡이’라고도 읽을 수 있고 그렇게 번역하는 성경들도 있다(히 11:21 참조).44)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 그들을 그곳으로 정녕 인도하여 다시 올라오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앙모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애굽 같은 세상에 사는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확실한 소망을 가지게 한다.


창세기 47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좋은 것을 공급하시고 그들에게 큰 위로를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고난의 세월을 보냈던 야곱과 그 가족들을 좋은 땅 고센으로 인도하셨고 그 기근의 때에도 먹을것을 주셨고 큰 위로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마다 육신적, 물질적 필요도 채워주신다(마 6:33). 그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롬 8:28).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 낙심치 말고 하나님을 더욱 바라자. 믿음에 굳게 서서 주의 교훈과 계명만 순종하며 살자. 주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둘째로, 인생은 나그넷길이며 우리의 참 본향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다. 야곱은 그 기근의 때에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으로 내려가 고센 땅에서 17년을 살다가 죽었으나,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요셉에게 자신을 가나안 땅에 매장해줄 것을 맹세시켰다. 우리의 참 소망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며 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뿐이다(벧전 1:3-4). 시편 39:6-7,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타 없어질 장망성 같은 세상에 너무 큰 애착과 의미와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수고롭고 허무한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천국에 참 의미와 가치를 두고 주님의 재림과 부활과 천국을 믿고 소망해야 한다.


48장: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함

[1-4절] 이 일 후에 혹이 요셉에게 고하기를 네 부친이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혹이 야곱에게 고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야곱은 이스라엘이라 불리었다. 그것은 그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께 받은 복된 새 이름이었다. 야곱은 병에 걸려 죽을 때가 가까웠을 때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복에 관해 말했다. 하나님에 관한 말씀은 경건한 성도가 자녀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나타나 복을 주시며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는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리라”는 것이며, 둘째는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조부 아브라함과 그의 부친 이삭에게 주셨던 복과 동일하였다(창 12:2, 7; 13:15; 15:18; 17:8; 18:18; 22:17; 26:3-4; 28:13). 물론, 하나님의 복은 이 두 가지에 더하여 “네 자손으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세 번째 내용, 즉 메시아 약속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창 12:3; 22:18; 28:14).


[5-6절]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 하에서 함께하리라.

성경은 요셉이 므낫세와 에브라임 외에 다른 아들들을 낳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만일 그가 다른 아들들을 낳았다면, 그의 아들들 중 므낫세와 에브라임, 둘만 야곱의 아들로 간주되고 나머지는 요셉의 아들로 간주되며, 그들은 그들의 형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지파에 나뉘어 소속될 것이다.


[7절] 내게 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노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오히려 격한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에브랏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 베들레헴이라고 불리었다.


[8-11절]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가로되 이들은 누구냐? 요셉이 그 아비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비가 가로되 그들을 이끌어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 맞추고 그들을 안고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뜻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소생까지 보이셨도다.

요셉은 자기 아들들을 ‘하나님께서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다. 시편 127: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가 보리라 뜻하지도 못했던 요셉뿐 아니라, 그의 아들들까지 보게 하심을 감사하면서 그들에게 축복하기를 원하였다.


[12-14절] 요셉이 아비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이스라엘은 오른손을 펴서 둘째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첫째인 므낫세의 머리에 얹었다. 므낫세가 장자이었지만, 팔을 어긋맞겨 얹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된 뜻을 나타내었다. 둘째 아들이 더 번창할 것이다. 야곱에게는 선지자적 감동이 있었다.


[15-16절]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힛할레쿠 레파나우)[그 앞에서 걸었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로에)[먹이신, 인도하신, 목자 되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야곱은 젊어서부터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였다. 그의 축복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이 드러나 있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을 그의 조부와 부친이 그 앞에서 걸었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경건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을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목자가 되셔서 그를 먹이셨고 인도하셨다. 셋째로, 그는 하나님을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셨다. 야곱은 그 하나님께서 요셉과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세상에서 번성케 하시기를 축복하였다.


[17-20절]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야곱에게는 예언적 영감이 있었다. 그는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할 때 둘째 아들 에브라임을 첫째 아들 므낫세보다 앞세웠다.


[21-22절]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셔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을 확신했고 또 그들이 가나안 땅 거민들을 정복하고 그 땅을 분배할 때 요셉에게 두 사람 몫을 줄 것을 약속하였다.


창세기 48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에 관해 말하자. 야곱은 병이 들어 죽을 때가 가까웠을 때 요셉과 그의 두 아들들의 방문을 받고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하나님에 관해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말할 기력이 있고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할 말은, 육신의 건강이나 부자 되는 것이나 출세하는 것에 대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의 구원에 관한 말씀이어야 한다. 자녀들에게 남겨줄 말들 중에 하나님에 관한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다.


둘째로, 우리는 자녀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자. 야곱은 요셉과 그의 두 아들들에게 축복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다. 하나님만 인생에게 복을 주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의 복을 이미 얻었고 또 평안과 물질적 여유와 건강의 복도 얻기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복 받기를 사모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항상 축복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확신하고 소망하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고 야곱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자손들과 함께 계셔서 장차 그들을 인도하여 그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을 확신했다. 오늘날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천국이다.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고 우리는 장차 그곳에 들어가 영생의 복을 누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성경에 밝히 기록해두신 그 천국을 확신하고 항상 소망하자.


49장: 야곱이 열두 아들들에게 예언함

[1-2절]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야곱은 열두 아들들에게 그들이 후일에 당할 일들을 예언하였다.


[3-4절]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威光)[위엄]이 초등(超等)하고[뛰어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물의 끓음 같다’는 원어(파카즈 캄마임)는 ‘물같이 불안정하다 혹은 자유분방하다’는 뜻이다. 르우벤이 이런 예언을 들은 것은 그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그것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야곱은 그가 내 침상에 올랐다고 반복해 말한다. 그것은 그가 서모 빌하를 범한 일을 말한 것이다(창 35:22). 르우벤은 장자로서 뛰어난 점들이 많았지만 큰 죄를 범함으로 그 장점들을 잃어버렸다(대상 5:1).


[5-7절]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시므온과 레위는 그의 누이 디나가 세겜에서 강간을 당했을 때 그 성을 습격하여 모든 남자들을 죽였었다(창 34:25-26). 야곱은 그 일을 좋지 않게 보았고 불쾌히 여겼고 매우 염려하였었다(창 34:30). 경건한 성도는 악한 일을 행치 말아야 하고 또 악한 일에 참여치 말아야 한다. 에베소서 5:11은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했다. 야곱은 그러한 혹독한 노염과 맹렬한 분기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이스라엘 중에서 나누며 흩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므온 지파는 그 수가 적었을 뿐 아니라(민 26:14) 유다 지파의 기업 중에서 기업을 얻었고(수 19:1-9), 레위 지파는 다 흩어져 거주하였다(수 20-21장).


[8-9절]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유다는 형제들에게 칭송을 받을 것이며 원수들의 목을 잡는 통치권을 발휘할 것이며 형제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또 유다는 사자 새끼라고 묘사된다. 그것은 왕권을 상징할 것이다. 그는 먹이를 움키고 찢는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다. 그를 성나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10절]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홀’이나 ‘치리자의 지팡이’는 ‘왕권’을 나타낸다. ‘실로’라는 원어(쉴로)에 대한 해석은 의견이 나뉜다. (1) 어떤 이들은 이 말을 ‘그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본다(탈굼역, 제롬, 칼빈). 히브리어 쉴은 ‘태아’라는 뜻이다. (2) 어떤 이들은 이 말을 ‘그것[치리자의 홀]을 가진 자’라는 뜻으로 본다(헬라어 70인역, 수리아어역, BDB, NIV). 그들은 이 말을 쉐(관계대명사)와 로(‘그에게 속하는’)의 결합어로 본다. (3)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메시아에 대한 명칭으로 본다(탈무드, KJV, NASB). 히브리어 솰라는 ‘조용하다, 편안하다’는 뜻이며, 쉴로라는 말은 ‘안식의 사람,’ ‘평화의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4) 다른 이들은 이 말을 실로라는 장소로 본다(NASB 난외주, 델리취). 이와 같이, 이 말의 해석은 다양하지만, 그 뜻이 메시아를 가리킨다는 데는 대체로 일치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 지파 다윗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셨다. 또 본문은 모든 백성이 그에게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 메시아는 모든 백성의 주(主)가 되실 것이다.


[11-12절]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본문은 유다 지파가 물질적 풍요를 얻게 됨을 나타낸다.


[13-15절]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할 것이며 잇사갈은 토지를 경작하는 수고로운 일에 종사하며 그것을 즐기며 생활할 것이다.


[16-18절]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단은 백성을 재판할 사사를 배출할 것이라고 예언된다. 이 예언은 사사 삼손에게서 이루어졌다. 또 단은 길의 뱀과 사나운 독사로 묘사된다. 이것은 단 지파 사람들의 사나움을 가리킨 것 같다. 야곱은 악하고 사나운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아 선과 평안의 상태에서 살기를 소망한다. 이것은 모든 성도의 소원이며 천국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19-21절]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갓은 용맹한 자들로 묘사된다. 후에 갓 사람들 중에서 다윗을 도왔던 용사들이 많이 있었다(대상 12:8-15). 아셀은 기름진 식물을 내어 왕의 진수를 공궤할 것이다. 납달리 사람들은 사사 드보라 때에 바락을 따라 전쟁에서 큰 승리를 하였다(삿 4:10).


[22-24절]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밋솸)[그곳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요셉은 형들의 핍박을 받아 이웃의 애굽으로 팔려갔으나 전능자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강건해졌다. “그곳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라는 말씀은 “전능자의 손으로부터 메시아께서 오시리라”는 뜻 같다. 메시아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실 것이다.


[25-26절]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부친과 조상들]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요셉이 요셉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을 도우신 하나님께서는 아들 요셉도 도우실 것이며 전능하신 그는 그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그 복은 영육의 풍성한 복일 것이다. 그 조상들의 복보다 더 풍성한 복이 요셉에게 임할 것이다.


[27절]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물어 뜯는 이리’라는 표현은 베냐민의 호전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베냐민은 이스라엘 자손들과도 전쟁을 치룬 적이 있었다(삿 20장). 베냐민 지파에는 용맹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대하 14:8; 17:17).


[28-33절] 이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부친과 조상들]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사람은 죽은 후 ‘그 열조에게로’ 천국 혹은 지옥으로 돌아간다.


창세기 49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죄는 우리의 모든 좋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한다. 르우벤은 장자로서 좋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서모와 통간하는 큰 죄를 범함으로 그것을 다 잃어버렸다. 사람은 범죄하면 타고난 좋은 재능을 다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무엇보다 범죄하는 일을 가장 두려워하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큰 은혜를 주신다. 비록 큰 죄를 지은 자라도, 철저히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쓰실 것이다. 유다는 큰 잘못을 범했으나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회개했다고 보인다. 그는 동생 요셉을 종으로 팔자고 제안했던 자이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두 아들을 잃었고 아내도 잃었다. 또 창녀에게 들어간다는 것이 그의 며느리와 관계를 갖는 수치스런 일도 저질렀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일을 회개한 것 같다. 그는 나중에 애굽의 총리 앞에서 베냐민 대신 자신을 종으로 삼게 해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는 후에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고 그의 자손에게서 메시아께서 오실 것이 예언되었다.


셋째로, 경건은 현세와 내세에 복된 길이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으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고 긴 고난의 시간들을 겪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와 함께하는 생활을 했다. 그는 범죄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며 피하였다. 경건하고 의로운 요셉은 큰 복을 받았다. 그는 온 가족들을 구원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욱 풍성한 복을 주실 것이다.


50장: 야곱과 요셉의 장례식

[1-3절]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40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70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야곱은 요셉의 초청으로 130세에 애굽에 와서(창 47:9) 17년 동안 산 후 147세에 애굽의 고센 땅에서 죽었다(창 47:28; 49:33). 요셉은 울며 아버지의 얼굴에 입맞추었고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방부(防腐)처리하게 했다. 미라로 만든다고 말하는 방부처리의 방식은 몸의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을 가득 채워 시체를 건조시킨 후 향유에 적신 천으로 묶고 전체를 싸는 방식이라고 한다(NBD).


[4-9절]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청컨대 바로의 귀에 고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바로가 가로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비를 장사하라. 요셉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그 아비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아이들과 양떼와 소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애곡하는 기한이 지나자 요셉은 바로의 궁에 말을 전하였다. 장례의 기간이므로 그가 직접 바로를 알현하지 않은 것 같다. 바로는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비를 장사하라”고 허락하였다. 많은 고난의 세월을 지났던 야곱의 장례식은 영광스러웠다.


[10-11절] 그들이 요단강 건너편 아닷 타작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호곡하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비를 위하여 7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가로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강 건너편이더라.

그들은 요단강 건너편 아닷 타작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소리내어 울며 애통했다. 아벨미스라임은 ‘애굽인들의 곡함’이라는 뜻이다. 그 땅은 요단강 건너편이었다. 본문에 두 번 나오는 ‘요단강 건너편’이라는 원어(아쉐르 베에베르 하야르덴)는 창세기를 쓴 저자 모세의 서술 위치가 요단강 동쪽임을 보인다.


[12-14절] 야곱의 아들들이 부명(父命)을 좇아 행하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요셉이 아비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군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요셉이 야곱을 매장한 굴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었다(창 23:16-19).


[15-18절]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형들의 말을 듣고 운 것은 자신의 고생스러웠던 과거의 일들이 기억났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 기이하고 컸음을 감사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19-21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그들을 위로하였고 그들의 마음에 말하였더라](원문직역).

요셉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말했다. 사람을 선악간에 판단하시고 보응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심판과 보응은 하나님의 소관이며 하나님의 일이다. 로마서 12:19,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또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말했다. 형들이 요셉을 해하려 하고 그를 애굽에 종으로 판 것은 분명히 큰 악이었다. 사람이 선과 악을 분명히 분간하고 판단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한 일을 바꾸셔서 야곱의 자녀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선한 일이 되게 하셨다.

또 요셉은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라고 말하였다. 과연 요셉은 그 후에 54년간이나 애굽에 살면서 형제들과 그 자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본문은 요셉이 형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했다고 말한다.


[22-23절]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110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3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요셉은 그 아버지의 가족들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110세를 살았다. 야곱이 죽었을 때 요셉은 56세쯤이었으므로 그 후에도 54년간 더 산 것이다. 그는 에브라임의 자손 3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겪었던 요셉에게 즐거움과 위로의 긴 세월을 은혜로 주셨다.


[24-26절]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돌아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110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말했다.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고 말하라.” 요셉은 110세에 죽었고 그의 몸은 방부처리되어 입관되었다.


창세기 50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한다. 야곱은 147세에 죽었고 요셉은 110세에 죽었다. 창세기는 첫 사람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어 이스라엘의 선조 야곱과 요셉의 죽음으로 끝난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죽는 존재이며 지금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우리는 어느 날 우리에게 올 죽음을 생각하고 지금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의 날에 후회할 것이 없는 자가 되도록 잘 준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멸망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원한 천국을 소망해야 한다. 야곱은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였고 자신을 그 땅에 장사하라고 맹세시켰고 또 요셉도 그 형제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리라고 말했고 또 자신의 유골을 그곳으로 메고 올라가게 맹세시켰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였다. 그것은 천국 소망을 예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천국을 바라보자(벧후 3:12-13).


셋째로,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었고 형들을 용서하였고 위로하였다. 그는 형들에게 보복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형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고 회개했다고 본다. 요셉은 자신을 애굽에 보낸 것이 하나님의 하신 일임을 믿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이었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적 섭리를 믿고 우리의 우리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의 계명과 교훈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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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The World Book Encyclopedia, 4. 709, 711.

2) 공기는 질소 78%, 산소 21%, 아르곤 가스 등 기타 1%로 구성되어 있고, 지극히 작은 양의 공기는 지상 1,600km까지 있다고 한다.

3) (1) 대류권(Troposphere)(8-16km), (2) 성층권(Stratosphere)(16-50km) --이 중 오존층(Ozonosphere)(20-50km)은 생물체에 해로운 태양광선(자외선, 우주선, 감마선 등)을 차단해준다, (3) 중간권(Mesosphere)(50-80km), (4) 열권(Thermosphere)(80km 이상). 그 중 전리층(Ionosphere)은 지상에서 발사하는 전파를 반사하는 층이다. 김영길 외 26인, 자연과학, 수정판 (서울: 생능, 1991), 83-85쪽.

4) 김영길, 자연과학, 97쪽.

5) 위의 책, 100쪽.

6) 지하 8-40km는 지각(Crust)층이고, 지하 2,900km까지는 맨틀(Mantle)층이고, 그 다음에는 중심핵이라고 한다.

7) 김영길, 자연과학, 96쪽.

8) 본 강해의 과학적 자료들은 The World Book Encyclopedia와 김영길 외 26인, 자연과학, 수정판 (서울: 생능, 1991)을 참고한 것이다.

9) 본문은 ‘만들다’(아사), ‘창조하다’(바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였고, 창세기 2:7은 ‘지으신다’(야차르)는 단어도 사용하였다. 이 세 단어는 서로 교대로 쓸 수 있는 동의어(同義語)라고 보인다.

10) 창세기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고린도전서 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 . .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11) ‘하나님’(엘로힘)이라는 말은 2,570회 사용되었고, ‘여호와’(예호와)라는 말은 약 6,823회 사용되었다. 그 외에 ‘하나님’(엘)은 217회, ‘하나님’(엘로아흐)은 57회 사용되었다(BDB).

12) 창세기 7:16; 17:1, 3과 출애굽기 3:4 등에는 두 명칭이 함께 나온다.

13) 마소라 본문(라켄)은 ‘그러므로’이며(KJV, NASB) ‘가인의 살인죄에 대한 벌이 이러하므로’라는 뜻일 것이나, 고대 역본들(LXX, Syr, 시마쿠스역, 데오도션역, Vg)은 ‘그렇지 않다’(로 켄)로 읽었다(NIV).

14) ‘자손의 계보’라는 원어(톨레도스)는 창세기에 10번 나오는데, ‘대략’(2:4; 36:1, 9), ‘계보’(5:1), ‘사적’(6:9), ‘후예’(10:1; 11:10, 27; 25:12), ‘약전’(37:1) 등으로 번역되었다.

15) 본장과 창세기 11장과 28장, 출애굽기 12:40, 열왕기상 6:1 등을 참고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연대는 대략 주전 약 4115년이 된다. J. B. 페인(Payne)은 창세기 11:32의 해석의 차이로 창조 연대를 주전 약 4175년으로 본다.

16) ‘낳다’는 원어(얄라드의 히필형)는 ‘낳게 한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된다’는 의미이다. 칼형은 주로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남자에게도 22회나 사용되었고 히필형은 170회 이상 사용되었다.

17) 원문은 ‘아들들과 딸들’이라고 되어 있음.

18) 고대역본들은 야돈이라는 원문을 야두르라고 읽었다.

19) Gleason L. Archer, A Survey of Old Testament Introduction, p. 210.

20) 히브리어 사전(BDB)에 의하면, 구약성경에 사람 이름이나 땅을 가리키는 ‘가나안’이라는 말이 90회 나온다.

21) 이 말은 헬라어 70인역(LXX)에서는 글로싸 glw'ssa로 번역되었고, 이것은 신약성경에 ‘방언’(글로싸 glw'ssa)이 ‘언어’임을 잘 증거한다.

22) The World Book Encyclopedia, x, 64.

23) J. P. Free, Archaeology and Bible History, pp. 49-50.

24)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을 낳았다면(창 11:26), 75세에 하란을 떠난(창 12:4) 아브람은 데라가 145세에 즉 그가 죽기 전에 하란을 떠난 것이다.

25) 모세는 후에 이스마엘의 죽음을 언급한 후 이삭에 대해(창 25:17, 20), 또 이삭의 죽음을 언급한 후 야곱에 대해 서술하였다(창 35:28; 37:2).

26) 염해는 크기가 남북이 78km, 동서 18km로 제주도의 절반 넓이 정도이며 지중해 해면보다 400m 낮은 곳으로 지구에서 가장 낮은 계곡이라고 한다. 이찬영, 성경지리총람 (서울: 소망사, 1993), 198쪽.

27) R. D. Wilson, Is the Higher Criticism Scholarly?, p. 20.

28) 카일과 델리취는 여기의 단이 신명기 34:1에 나오는 길르앗의 단이거나 사무엘하 24:6의 다냐안(야안의 단)을 가리킬 것이라고 본다. C. F. Keil and F.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I. Pentateuch (1864), I, 206.

29) 시 7:17; 9:2; 18:13; 21:7; 46:4; 47:2; 50:14; 57:2; 73:11; 77:10; 78:17, 35, 56; 82:6; 83:18; 87:5; 91:1, 9; 92:1; 97:9; 107:11; 단 3:26; 4:2, 17, 24, 25, 32, 34; 5:18, 21; 7:18, 22, 25, 25, 27.

30) 히브리어 원어성경의 마소라 액센트가 그러하다. NASB 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했다.

31) 히브리어 학자들은 아브라함이라는 말이 ‘우두머리’(아비르)라는 말과 ‘많은 무리’(함)라는 말의 복합어라고 추측한다(BDB).

32) 마소라 학자들은 본절의 ‘내 주여’를 아도나-이라고 읽었고 창세기 19:2의 ‘내 주여’라는 말은 사람을 향한 존칭어인 아도나이라고 읽었다. KJV는 본절의 ‘내 주여’를 "my Lord"라고 번역하였다.

33) 원문, “사라에게는 여인들에게 있는 것과 같은 것(오라크, 길)이 멈추었더라.” 이 표현은 여성의 월경이 멈추었음을 가리킨다고 본다(BDB).

34) 이것을 티쿠네 소페림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구절이나 하나님께 대해 무례하다고 본 구절들 등 18개의 구절을 수정하였다고 한다(Gleason Archer, A Survery of O. T. Introduction, p. 61).

35) 이찬영, 성경지리총람 (서울: 소망사, 1993), 198-199쪽.

36) 마카비하 7:27에는 한 여인이 자기 아들을 3년 동안 젖을 먹였다는 말이 나온다.

37)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았고(창 17:17) 이삭은 40세에 결혼했다(창 25:20). 또 사라는 127세에 죽었고(창 23:1)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 차이가 열 살이다(창 17:17).

38) ‘하란’을 가리키는 말로서 창세기에 10번이나 나온다(창 25:20; 28:2, 5, 6, 7; 31:18; 33:18; 35:9, 26; 46:15).

39)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444킬로미터라고 한다.

40) 원문에는 베가드 (by good fortune)[행운이로다]라고 쓰여져 있으나(케팁, LXX, Vg, NASB, NIV), 바 가드 (Good fortune has come) [행운이 왔도다]로 읽으라고 제안되어 있다(케레, Syr, Targ, KJV).

41) ‘평안히’라는 일반적 표현은 베솰롬 일 것이다(창 15:15).

42) 대략적으로, 30킬로미터는 합정동에서 수원까지의 직선거리이며, 45킬로미터는 수원에서 거의 천안까지의 직선거리이다.

43)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는 요셉이 애굽의 힉소스 왕조 때 총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힉소스는 셈족 배경을 가진 침입자들로서 애굽의 제15, 16왕조를 세웠고 약 150년간(주전 1730-1580년경) 통치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애굽 사람들이 히브리인들을 멸시하고 목축을 가증히 여겼다는 성경의 증거(창 43:32; 46:34)에 맞지 않는다.

44) 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은 밋타(침상)라고 읽고 어떤 영어성경들(KJV, NASB)과 한글개역성경이 그것을 따르지만, 고대 헬라어 70인역, 옛 라틴어역, 수리아어역, 근래의 어떤 영어역(NIV)은 맛테(지팡이)라고 읽는다. 신약의 히브리서 11:21은 헬라어 70인역을 인용한 것 같다. 본래의 히브리어 본문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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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목사 소개 Facebook 유투브 Youtube 이메일: oldfaith@naver.com

연세대학교(철학과) 졸업(B.A.); 총신대학 신학연구원[신학대학원] 졸업(M.Div. equiv.); 미국 필라델피아, 훼이스(Faith) 신학대학원 졸업(Th.M. in N.T.);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그린빌(Greenville), 밥 죤스(Bob Jones) 대학교 대학원 졸업(Ph.D. in Theology); 계약신학대학원 대학교 교수 역임; 합정동교회(서울, 마포구 합정동) 담임목사.

[저서]

『구약성경강해 1』(창세기-욥기), 『구약성경강해 2』(시편-말라기), 『신약성경강해』(마태복음-요한계시록)(2판), 『창세기 강해』(3판), 『출애굽기 강해』(2판), 『레위기 강해』(2판), 『민수기 강해』(2판), 『신명기 강해』(2판),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강해』(2판), 『사무엘서 강해』(2판), 『열왕기 강해』(2판), 『역대기 강해』(2판),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강해』(2판), 『욥기 강해』(2판), 『시편 강해』(2판), 『잠언 강해』(2판), 『전도서 강해』(2판), 『아가서 강해』(3판), 『이사야 강해』(2판), 『예레미야 및 애가 강해』(2판), 『에스겔 다니엘 강해』(2판), 『마태복음 강해』(2판), 『마가복음 강해』(3판), 『누가복음 강해』(2판), 『요한복음 강해』, 『사도행전 강해』(2판), 『고린도전서 강해』(2판), 『고린도후서 강해』(2판), 『갈라디아서 강해』(2판), 『히브리서 강해』(2판),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강해』(2판), 『요한1, 2, 3서 유다서 강해』(2판), 『조직신학』, 『기독교 교리개요』(10판), 『기독교 윤리』(6판), 『현대교회문제』(CLC),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현대교회문제』(5판)(옛신앙),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2판), 『에큐메니칼운동 비평』, 『복음주의 비평』, 『기독교 신앙입문』(10판), 『천주교회 비평』(2판), 『이단 종파들』, 『공산주의 비평』(4판) 등.

[역서]

J. G. 메이천, 『신약개론』, 『신앙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와 현대세계』, 

『그리스도인과 인간관계』; 로버트 G. 그로마키, 『현대방언운동 연구』; 개리 G. 코우언, 『신복음주의 비판』; 죤 E. 애쉬브룩, 『신중립주의』; 데이빗 O. 비일, 

『근본주의의 역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OPC, 『어린이 요리문답』 등.

옛신앙출판사(www.oldfaith.net)는 합정동교회(www.hjdc.net)의 한 사역으로서 

오늘날 배교(背敎, apostasy)와 타협(妥協, compromise)과 혼란(混亂, confusion)의 시대에 역사적 기독교 신앙(the historic Christian faith)과 개혁신학(the reformed theology)에 근거한 성경강해와 기독교 교리와 기독교 윤리 강론, 및 현대신학 강론을 책으로 출판하고 

또 인터넷을 통해 널리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