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舊約]강해/◆ 모세오경[강해]

창세기(Genesis)31장-36장[-36장 야곱의 노년기] / 김효성 목사

영국신사77 2020. 4. 14. 13:51

제목 차례

31장: 고향으로 돌아감

32장: 얍복 강변에서의 씨름

33장: 형 에서를 만남

34장: 디나 사건

35장: 벧엘로 올라감

36장: 에서의 자손들

===================

31장: 고향으로 돌아감

창세기 31장은 야곱이 하란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일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다. 이 긴 내용은 이 일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어떻게 역사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1-3절]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야곱은 라반의 아들들이 자기가 그들의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그들의 아버지의 소유로 인해 많은 재산을 얻게 되었다는 불평을 들었다. 똑같은 사건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야곱이 라반 때문에 많은 재산을 얻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라반의 소유를 빼앗았다는 것은 바른 말이 아니다. 그는 외삼촌과의 정당한 약속 아래서 재산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재산이 많아지자 라반의 아들들은 불평했고 라반의 안색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야곱이 하란을 떠나야 할 때가 이르렀다. 야곱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은 그의 현실을 이렇게 조성하시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4-9절]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떼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야곱은 먼저 자기 아내들을 그가 양떼를 치는 들로 불러 그들에게 그 상황을 말해주었다. 지금부터 3,900여년 전인 옛날에 야곱은 아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였다. 야곱은 아내들에게 장인의 안색이 그에 대해 전과 같지 않다고 말했다. 또 그는,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아내들이 알 듯이 그가 힘을 다해 장인을 섬겼지만, 장인은 그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으며 그러나 하나님께서 장인을 금하셔서 그를 해치 못하게 하셨고 장인의 짐승을 빼앗아 그에게 주셨다고 말하였다.

[10-13절] 그 양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더라.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야곱은 아내들에게 그가 꿈에 받은 계시를 말했다. 그의 꿈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양떼 중에 얼룩무늬 있고 점 있고 아롱진 새끼들을 주실 것을 암시했다. 또 야곱은 꿈에 하나님의 사자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에게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자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다. 그는 야곱에게 벧엘에서 그가 한 서원을 기억나게 하셨다. 야곱은 쓸쓸히 집을 떠나 올 때 벧엘에서 서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를 지켜 주시고 양식과 옷을 주시고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고 그가 세운 돌기둥으로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고 소득의 11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그 서원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14-16절]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라헬과 레아는 남편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재물을 취하여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의 소유로 주신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바를 다 행하라고 말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야곱이 아내들의 동의를 얻음으로 그 가족들이 하란을 떠날 수 있도록 여건을 준비해주셨다.

[17-20절]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게 태우고 그 얻은 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할새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

야곱은 곧 행동하였다.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사이, 그는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 태우고 그 얻은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을 이끌고 가나안 땅 아비의 집으로 떠났다.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적질하였다. 드라빔은 가정 수호신 같은 ‘가정 우상’이었다. 그것은 당시에 그 지역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으로서 부패된 종교의 산물이었다. 라헬은 경건과 도덕성이 부족했다. 야곱이 라반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떠난 것은 그가 뒤에 라반에게 말한 바와 같이 라반이 그의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의 아내들과 자식들과 그의 재산을 빼앗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21-24절] 그가 그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3일 만에 야곱의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라반이 그 형제(아크)[친척]를 거느리고 7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산에서 그에게 미쳤더니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야곱이 그의 모든 가족과 소유를 이끌고 유브라데 강을 건너 길르앗산을 향해 도망한 지 3일 만에 그가 도망한 사실이 라반에게 알려졌다. 라반은 그의 친척들을 거느리고 7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산에서 그에게 미쳤다. 그런데 그 밤에 꿈에 하나님께서는 라반에게 “너는 주의하여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야곱을 해치려는 라반의 생각을 미리 아시고 그 위험을 막아주셨던 것이다.

[25-30절] 라반이 야곱을 쫓아 미치니 야곱이 산에 장막을 쳤는지라. 라반이 그 형제로 더불어 길르앗산에 장막을 치고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내 딸들을 칼로 잡은 자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으며 나로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느냐? 네 소위가 실로 어리석도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젯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

라반은 야곱에게 왜 자기의 딸들을 칼로 잡은 자같이 가만히 끌고 갔느냐고 하면서 그가 즐거움과 노래로 그를 보낼 것인데 자기가 자기의 손자들과 자기의 딸들에게 입도 맞추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자기에게 그를 해할 만한 능력이 있지만, 어젯밤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주의하여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또 라반은 야곱에게 왜 자기의 신을 도적질하였느냐고 말했다. 라반은 하란의 우상숭배적 풍습대로 드라빔 즉 가정 우상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섬겼던 것이 분명하다.

[31-35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말하기를(아마르티)[내가 생각하기를](BDB, NIV; 창 20:11; 26:9)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적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얻지 못하매 라헬이 그 아비에게 이르되 마침 경수가 나므로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얻지 못한지라.

야곱은 라반에게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외삼촌의 신을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또 우리 친족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라고 말하였다. 야곱은 라헬이 그 드라빔을 도적질한 줄 알지 못하였다. 라반은 그것을 찾지 못하였다.

[36-40절]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척하여 가로되 나의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나를 불같이 급히 쫓나이까?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 보셨으니 외삼촌의 가장집물 중에 무엇을 찾았나이까? 여기 나의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두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내가 이 20년에 외삼촌과 함께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 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테바크쉔나)[외삼촌이 내게 물어내게 하셨으며](KJV, NASB, NIV)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야곱은 노하여 라반을 책망하며 지난 20년 동안 외삼촌의 양들과 염소들을 먹일 때 낙태한 것이 없고 외삼촌의 것을 먹지 않았고 물려 찢긴 것은 보충하였고 낮이나 밤에 도적을 맞으면 물어드렸다고 말했다. 또 그는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라고 회고하였다.

야곱은 20년 동안 성실하게 일했다. 성경은 나태를 정죄하고 근면을 장려한다(잠 6:6; 10:4-5, 26; 12:24, 27; 21:5; 27:23; 31:10, 13, 15, 27). 또 성경은 종들에게 눈가림만 하지말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단 마음으로 일하라고 교훈한다(엡 6:5-8). 우리는 성실히 살아야 한다.

[41-42절]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20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14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6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 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야곱은 하란에서의 20년을, 두 아내를 위해 14년, 양떼를 위해 6년 외삼촌을 섬긴 세월이라고 요약한다. 또 그는, 외삼촌께서 그의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셨으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그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그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을 것이나 하나님께서 그의 고난과 그의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감찰하시고 눈동자같이 보호하신다.

[43-50절]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떼는 나의 양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날 내 딸들과 그 낳은 자식들에게 어찌할 수 있으랴. 이제 오라. 너와 내가 언약을 세워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취하여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칭하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니 라반의 말에 오늘날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며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 피차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감찰하옵소서 함이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취하면 사람은 우리와 함께할 자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너와 나 사이에 증거하시느니라 하였더라.

라반은 야곱에게 자기와 언약을 맺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야곱은 돌을 가져 기둥을 세우고 언약을 맺었다. 또 그는 돌들을 가져 무더기를 만들고 그 곁에서(NASB, NIV) 함께 식사하였다. 갈르엣은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이다. 또 그것을 미스바(미츠파)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망대, 망루’라는 뜻이다. 라반은 야곱에게 자기 딸들을 박대하지 말고 다른 아내들을 취하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51-55절]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너와 나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않을 것이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의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경야(經夜)하고[밤을 새우고]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그들은 이 무더기와 기둥을 증거로 삼아 서로 이 경계를 넘어 상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로 하자고 말했고, 야곱은 그 아버지 이삭의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했다. 모든 일이 선하게 이루어졌다.

창세기 31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야곱은 20년간 라반에게 충성하였다. 야곱은 라반에게 손해가 되지 않게 양치는 일에 충실하였다(38-39절). 그는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다고 고백하였다(40절). 우리는 무슨 일을 맡았든지, 세상일이나 교회 일이나,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성경은 종들이 주인에게 그리스도께 하듯이 성심으로, 단 마음으로 순종해야 하고 눈가림만 하지 말아야 한다고 교훈했고(엡 6:5-8), 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했다(고전 4:2). 우리는 각자 맡은 일에 충성하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섭리하셨다. 그는 꿈에 나타나 그 일을 지시하셨다(3, 11-13절). 라반의 아들들의 불평이나 라반의 안색이 이전 같지 않은 것 등도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을 재촉하였다. 아내들의 동의도 그 일을 순조롭게 진행케 했다(4-16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모든 일을 섭리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그것은 우리의 성화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시 23:3).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늘 성경 읽고 기도하기를 힘쓰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늘 함께하셨고 또 앞으로 늘 함께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3절). 야곱은 아내들에게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고 말했고(5절) 또 하나님께서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다고 하였다(9절). 하나님께서는 라반이 야곱을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으나 그를 금하여 야곱을 해치 못하게 하셨고(7절), 밤에 라반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24절). 야곱은 라반에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지 않으셨더면 외삼촌이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라고 말했다(42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라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목자이시다(시 23:4). 성령께서는 영원토록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요 14:16).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32장: 얍복 강변에서의 씨름

[1-2절]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마카네)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마카나임)이라 하였더라.

마하나임은 ‘두 군대’라는 뜻으로 야곱의 가족들과 하나님의 사자들, 두 무리를 가리킨 것 같다. 이 신비한 사건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일행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지켜주실 것을 암시하였다고 보인다.

[3-5절]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내며 그들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는 이같이 내 주(主)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당신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 하였더니.

야곱은 형을 ‘내 주(主)’라고 불렀고 자신을 ‘당신의 종 야곱’이라고 표현하였다(4, 5절). 이 말들은 그의 겸손해진 마음을 보인다.

[6-8절]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400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종자[사람들]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야곱이 보낸 자들의 소식을 들은 형 에서는 400명을 이끌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었다.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보장하신 길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다. 그는 우선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과 짐승들을 두 떼로 나누었다.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라도 피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9절]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은 그의 조부와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그의 조부 때로부터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복과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다.

[10절]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인자, 자비]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야곱은 과거에 자신이 욕심을 품고 거짓말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넘치는 자비를 베푸셨고 약속 이행에 신실하셨음을 고백하는 것 같다. 그는 그의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강을 건넜으나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그를 지켜주셔서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다.

[11-12절]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엄마와 자녀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은 특히 하나님께서 형 에서의 손에서 자기를 구원해주실 것을 기도한다. 그는 형이 와서 자기와 자기 가족들을 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또 그는 “내가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같이 많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고 그것은 그의 기도의 근거이었다. 어려울 때 우리의 할 일은 기도뿐이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기도는 성도가 세상에서 직면한 어려운 문제들의 최선의 해결책이다.

[13-15절]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밤을 새우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200이요 숫염소가 20이요 암양이 200이요 숫양이 20이요 젖 나는 약대 30과 그 새끼요 암소가 40이요 황소가 10이요 암나귀가 20이요 그 새끼나귀가 10이라.

야곱은 밤을 지낸 후 그의 소유물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해 예물을 준비하였다. 야곱이 구별한 예물은 모두 아홉 떼이었다. 맨 마지막의 ‘새끼나귀’라는 원어(아이르)는 ‘수나귀’를 가리킨다(BDB).

[16-21절]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 종들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하고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고하고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야곱은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자기보다 앞서 건너가며 각 떼로 거리가 뜨게 하였다. 또 그는 앞선 자가 형 에서를 만날 때 그가 물으면 앞엣것은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나의 주’(원문)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라고 말하라고 일러주었다. 또 그는 뒤따라가는 모든 종들도 같은 말을 하라고 했다. 그것은 그가 예물들로 형의 감정을 푼 후 대면하면 형이 혹시 그를 받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잠 18:16).

[22-26절]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마아바르)(ford)[개울=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야곱은 그 밤에 편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는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개울을 건너게 했고 또 그의 소유물들도 그렇게 했다. 그에게는 많은 두려움과 염려가 있었다. 그는 이제 홀로 남았다. 무슨 중요한 일을 결단할 때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 앞에 홀로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인생은 고독한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함께 계셨다.

그 밤에 어떤 사람이 야곱 곁에 있었고 그와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하였다. ‘씨름한다’는 말(아바크)은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사용된 말이다. 이것은 비유적 말이 아닐 것이다. 야곱의 환도뼈, 즉 허벅지의 연결부분이 위골된 것을 보면 그것은 실제의 씨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의미가 담긴 씨름이었다.

야곱은 그가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 사자에게 자신을 축복해줄 것을 간절히 소원하였다. 그 사자는 그의 끈질긴 요청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야곱의 환도뼈를 쳤고 야곱은 그 씨름에서 환도뼈가 위골되었다. 날이 새려했으므로 그 하나님의 사자가 가기를 원하였지만,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며 그에게 끈질기게 매달렸다.

[27-28절]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마침내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물었고 그 이름을 고쳐주었다. 그는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야곱은 ‘그가 발꿈치를 잡는다, 그가 선수친다, 그가 속인다’라는 뜻을 가지고, 이스라엘은 ‘그가 하나님과 겨룬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은 야곱이 하나님과 사람들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음을 나타낸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한 간절함으로 에서나 라반을 이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도 이겼다. 호세아 12:3-4는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다”고 증거한다. 야곱은 간절하고 끈질긴 기도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고 인간 관계의 모든 복잡한 일들에서 승리하였다.

[29-32절]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 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그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야곱을 축복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그가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았다. 그는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창세기 3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과 보장하심 속에서 하란을 떠나 고향 땅을 향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 에서가 400명을 이끌고 그를 만나러 온다는 두려운 일을 당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도 그러하였다. 그들이 애굽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애굽을 떠난 후에 직면한 첫 번째 어려움은 홍해라는 큰 바다와 그들을 뒤쫓아오고 있는 애굽 왕 바로의 병거들이었다(출 14:1-7, 10).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을 당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겪은 풍랑들도 그와 비슷하였다. 그들은 배에 오르신 예수님을 따라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을 때 큰 풍랑을 만났었다(마 8:23-24). 성도는 하나님의 명령과 보장하심 속에서 행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어려운 일을 만난다. 시편 34:19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으로 바르게 살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낙심하지도 말고 더욱 인내하며 살아계신 섭리자 하나님을 소망하자.

둘째로, 야곱은 어려운 문제 앞에서 그의 조부의 하나님, 그의 부친의 하나님, 또 그에게 나타나셔서 하란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던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다. 그는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말했다(11-12절). 사도 시대에 헤롯 왕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도 잡아 옥에 가둔 후 유월절 후에 해하려고 작정했을 때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때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하심이 있었다. 사도 베드로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이하게 감옥에서 건져내셨다. 어려운 문제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하는 것이다. 야곱이 가족과 소유물을 두 떼로 나누거나 형을 위해 아홉 떼나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의 방법일지는 몰라도 참 해결책은 기도의 응답이다.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최선의 해결책이다.

셋째로, 야곱은 날이 새도록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며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며 끈질기게 간구하였다. 그의 간절한 사모함은 하나님의 사자의 응답을 받아내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주께서는 밤중에 친구에게 와서 떡 세 덩이를 빌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다. 이 사람은 자기 친구가 여행 중에 자기에게 들렀는데 자기가 먹일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했다. 밤이 늦었고 식구들이 다 침소에 누웠지만 그의 강청함 때문에 그 친구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눅 11:8).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주께서는 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날마다 와서 간청하는 바를 그 불의한 재판관이 들어주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교훈하셨다(눅 18:7). 우리는 하나님 앞에 때때로 ‘강청함’의 기도 즉 끈질긴 기도와, 낙망치 않고 항상 하는 기도를 올려야 한다.

33장: 형 에서를 만남

[1-4절]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야곱이 아내들과 자식들을 세 무리로 나눈 것은 그가 아끼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 같다. 그가 쌍둥이 형을 향해 몸을 입곱 번 땅에 굽힌 것은 그의 겸손과 자신의 과거의 행위에 대해 사과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그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며 콩죽 한 그릇으로 형에게서 장자권을 샀으니 축복받을 정당성이 있었을지라도, 아버지를 속이고 그의 축복을 받은 것은 잘못이었다. 야곱은 하란에서의 20년간의 혹독한 고난을 통해 확실히 자신의 부족을 반성하며 겸비해졌다고 보인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며 피차 운 것을 보면, 에서의 마음은 누그러졌다. 동생에 대한 미움과 적개심이 사라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야곱의 기도의 응답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또 야곱의 마음에서 두려움을 제거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

[5-7절]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자녀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자이다. 자녀는 하나님의 기업과 상급이다(시 127:3). 야곱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다. 또 그는 에서 앞에서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겸손히 불렀다. 본장에서 그는 자신을 두 번 종이라고 불렀다(5, 14절). 아내들과 자녀들이 나와 절하였다.

[8-11절]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내 주’라는 말(아도니)이 본장에서 다섯 번 나온다(8, 13, 14, 14, 15절). 이것은 야곱의 겸비함과 동시에 형 에서에 대한 그의 뉘우침을 나타낼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면서 형을 ‘내 주’(나의 주)라고 불렀다. 야곱은 상당히 겸손한 자가 되었다. 사람은 자신을 낮춘다고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낮추는 자는 오히려 높아지며 큰 자가 된다. 겸손한 자가 큰 자이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0:26-27). 또 야곱의 강권한 선물은 진심의 선물이었고 에서는 그것을 받았다.

[12-14절]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에서는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고 말한다. 인간은 연약하여 용서하면서도 약간의 감정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에서의 감정이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곱은 겸손히 이해를 구하며 사양한다. 야곱은 본문에서 에서를 ‘내 주’라고 세 번 불렀고 자신을 ‘그의 종’(원문)이라고 불렀다. 잠언 15:1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말한다.

[15-17절] 에서가 가로되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 야곱이 가로되 어찌하여 그리 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내가 내 종자 몇 사람을 네게 머물리라”는 제안도 야곱은 겸손히 거절하였다. 어려움이 즉시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마침내 에서와의 갈등이 해소되고 야곱은 그 고민스러운 문제에서 승리했다. ‘숙곳’(숙코스)은 ‘천막들’이라는 뜻이다. 거주할 천막 혹은 집을 세웠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심적, 환경적 안정을 찾았다는 뜻이다.

[18-20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100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야곱은 밧단아람에서부터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쳤다. ‘평안히’라는 원어(솰렘)는 고대 헬라어 70인역과 라틴어 벌케이트역이나 옛날 영어성경(KJV)은 ‘살렘’이라고 번역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본문을 “가나안 땅에 있는 살렘 즉 세겜성에 이르러”라고 번역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 살렘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온 셈이다(창 14:18; 33:18). 근래의 영어번역들은 ‘평안히’라고 번역하지만(NASB, NIV), ‘살렘’이라는 고대 번역이 옳을지도 모른다.41)

야곱은 세겜 성 앞에 장막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돈을 주고 샀다. ‘은’이라는 원어(케시타)는 옛시대의 무게 단위인데, 은인지 금인지 불분명하다고 한다(BDB, KB). 거기에서 야곱은 단을 쌓았다. ‘단’(미즈베아크)은 ‘짐승 제사를 드린 단’을 암시한다. 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속죄와 헌신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야곱의 경건을 나타낸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단을 쌓았고(창 8:20), 아브라함은 여러 번 단을 쌓았으며(창 12:7, 8; 13:18; 22:9), 이삭도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창 26:25). 이제 야곱도 하나님께 단을 쌓은 것이다.

창세기 3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야곱같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도 응답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두려움과 심적 고통으로 부르짖었던 야곱에게 문제의 해결과 평안을 주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께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우리의 처한 환경을 주장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므로 항상 기도 응답과 그의 도우심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둘째로, 우리는 겸손한 자가 되자. 야곱은 고난을 통해 겸손한 인격으로 변화되었다고 보인다. 고난은 겸손 훈련을 위해 유익하다. 겸손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필수적인 덕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사도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했고(빌 2:3) 또 겸손한 마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말하였다(빌 2:5).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단을 쌓는 생활을 힘쓰자. 무엇이 하나님께 단을 쌓는 것인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과 기도를 올리며 그가 주신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기를 결심하는 것이 하나님께 단을 쌓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며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신다(요 4:23-24). 하나님께 단을 쌓는 자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며 육신 생활에서도 성공할 것이다.

34장: 디나 사건

[1-4절]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본장은 야곱이 가나안 땅 세겜에 거할 때 그의 가정에 생긴 좋지 않은 일을 기록한다. 그것은 그의 아내 레아가 그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 일이었다. 이것은 야곱에게 고통스럽고 수치스런 일이었다. 야곱에게는 고난이 많았다. 하란에서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 돌아온 후에도 그는 이런 고통의 일을 당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야곱이 당한 가정적 고통은 하나님의 징책이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란에서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시면서 그가 벧엘에서 서원하였던 일을 회상시키셨다(창 31:3, 13). 그러나 야곱은 가나안 땅 세겜에 도착하여 땅을 사고 거기 거하려 하였다(창 33:17-19). 세겜과 벧엘 간의 직선거리는 약 30킬로미터이며 벧엘에서 이삭이 거주했던 헤브론까지는 약 45킬로미터이다.42) 야곱이 벧엘이나 헤브론으로 가려 생각하였다면 그곳에서 땅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곳에서 땅을 산 것은 옳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디나 사건을 통해 야곱을 징책하시고 그가 그곳에 머물지 않고 떠나게 하셨다고 생각된다. 야곱이 하란을 떠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외삼촌 라반의 아들들의 불평어린 말들을 듣고 또 라반의 안색이 전과 같지 않음을 보고 그의 마음이 불편했을 때 그에게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었다(창 31:1-2).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환경적으로 야곱을 불편케 하신 후에 그곳을 떠나게 하셨다(창 35:1). 디나 사건은 확실히 그에게 내린 하나님의 징책이었다.

본장은 세겜 땅의 추장 세겜의 잘못된 사랑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를 보고 한 눈에 반한 것 같다. 그는 그를 끌어들였고 강간하여 욕되게 하였다. 세겜의 마음은 디나에게 끌렸고 그 소녀를 사랑하였다. ‘연련(戀戀)하다’라고 번역된 원어(다바크)는 ‘붙들다, 끌리다’는 뜻이다. 또 그는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였다. 또 그는 그 아비 하몰에게 그 소녀를 자기 아내로 얻게 해주시기를 청했다. 세겜의 감정은 인간적으로 이해될지라도 그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행위는 이기적인 것이었다. 그가 한 부족의 추장이므로 그 지역에서 상당한 권세를 가졌겠지만, 그것이 그의 도덕적 탈선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오히려 디나 사건은 한 권세자의 도덕적 탈선을 드러낼 뿐이다.

[5-7절]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의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세겜의 아비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사람 사람이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치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강간은 부끄러운 일이며 일어나서는 안 될 부도덕한 일이었다.

[8-12절]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련하여 하니 원컨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취하고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하고 세겜도 디나의 아비와 남형들에게 이르되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청구하는 것은 내가 수응하리니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빙물과 예물을 청구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수응하리라.

8절의 ‘연련하다’는 원어(카솨크)는 ‘부착되다, 사랑하다’는 뜻이다(BDB). 세겜은 디나에게 반했고 그를 사랑했다. 19절도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카페츠)[기뻐함]이며”라고 기록한다. 본장은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끌렸고 사랑했으며 그의 마음을 위로했고(3절) 마음이 붙잡혔고(8절) 기뻐하였다고 말한다(19절).

세겜의 사랑은 참 사랑이 못 되었다. 그의 사랑은 강간이라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것은 정당치 못한 행위이었다. 혼전 동침은 하나님 앞에서 죄이다. 상대방을 배려함이 없는 이기적 사랑은 자기 욕망일 뿐이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므로 7년을 수일같이 참았다(창 29:20).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4-5).

[13-17절]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 아비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욕이 됨이니라.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취하며 너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너희가 만일 우리를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18-24절]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치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 아비 집에 가장 존귀함일러라.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성문에 이르러 그 고을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로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그러나 우리 중에 모든 남자가 그들의 할례를 받음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들의 생축과 재산과 그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 말대로 하자. 그리하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리라.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21절에 ‘친목하다’는 원어(솰렘)는 ‘화친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임으로 야곱의 사람들과 재산들이 결국 다 자신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성의 모든 남자들은 추장 세겜의 요청대로 할례를 받았다.

[25-29절] 제3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라.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이것은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힌 일에 대한 보복이었다. 추장 세겜의 잘못된 행동으로 그와 그의 부친과 그 성의 남자들이 다 죽임을 당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이었다고 보인다

[30-31절]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들이 가로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책망하며 그 땅의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 그와 그 집을 쳐서 멸망시킬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듯이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고 아버지께 반문하였다.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에게 속여 대답한 것이나 그들을 죽인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인정하신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을 허용하셨다.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의로운 분노가 있었다. 세겜이 디나를 욕보인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끄러운 일이며 행하여서는 안 될 악한 일이었다(7절). 그러므로 본장은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더럽혔다고 두 번이나 기록한다(13, 27절). 그것은 세겜이 받은 보복이 도덕적으로 마땅함을 보이는 것 같다. 강간은 분명히 벌받을 큰 악이다.

창세기 34장은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본장은 성도에게 고난이 많음을 보인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하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큰 근심거리가 또 생겼다.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다(시 34:19). 성도는 조금만 잘못을 행해도 하나님의 징책을 경험한다. 많은 경우에, 고난은 우리의 부족 때문에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당할 때 우리 자신을 성찰하며 마음에 깨달아지는 부족을 회개하고 고치기를 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본문은 우리가 지켜야 할 도덕이 있음을 보인다. 세겜은 디나를 강간함으로 그와 그의 종족이 큰 화를 당했다. 그 성의 모든 남자들은 죽임을 당했고 자녀들과 여자들은 사로잡혔다. 사람은 순간적인 자기 욕망을 제어하지 못함으로 범죄하고 큰 불행에 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 분별력인 양심을 주셨다. 살인과 간음이 죄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명확한 도덕법으로 주셨다. 십계명은 우리가 지켜야 할 생활 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그는 세상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고 살인하지 말아야 하고 간음하지 말아야 하고 도적질하지 말아야 하고 거짓 증거하지 말아야 하고 남의 것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죄의 결과는 죽음과 불행이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죄인은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계 21:8).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도덕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이 되는 것이다.


35장: 벧엘로 올라감

[1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세겜에서 디나 사건으로 인해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의 남자들을 죽인 일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세겜에 머물지 말고 벧엘로 올라가 거기 거하며 거기서 그에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셨다. 그것은 그가 벧엘에서 하나님께 서원하였던 바를 행하라는 뜻이기도 하였다.

[2-3절]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즉시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즉시 응답해야 한다. 야곱은 자기 집 사람들 즉 아내들과 아들들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 즉 종들에게까지 말했다. 그는 자기 혼자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 하지 않고 자기 집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순종하려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계명을 주실 때에도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출 20:10). 우리는 가족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해야 한다.

야곱은 그들에게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말하였다. 그들 가운데 여전히 이방 신상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장의 하나님의 징책의 또다른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방 신상을 가정에 두고서는 평안과 복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하여 먼저 자신들을 정결케 해야 했다. 의복을 바꾸는 일도 필요했다. 옷은 마음가짐과 관계가 있다. 평소에 입는 옷과 놀러 갈 때 입는 옷과 하나님께 예배하러 갈 때 입는 옷은 달라야 할 것이다.

[4-5절]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그의 가족들과 그와 함께한 자들이 다 모든 이방 신상과 귀고리들을 그에게 주었고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곳을 떠났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실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도우셔서 그 사방의 성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뒤쫓아오는 자들은 없었다. 우리는 실수와 부족이 많고 세상은 악하고 험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의 삶은 항상 안전할 것이다.

[6-8절]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8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본문은 갑작스럽게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에 대해 기록한다. 드보라는 죽어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되었다. 그는 이삭과 리브가와 함께 헤브론에 살고 있었을 것이지만, 어느 때, 아마 야곱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세겜에 머문 어느 때, 야곱에게로 보냄을 받은 것 같다. 그렇다면, 드보라를 야곱에게 보낸 것은 아마 야곱의 모친 리브가의 배려이었을 것이다.

[9-10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고 그에게 복을 주셨다. 또 그는 그의 이름이 다시는 야곱이라 불리지 않고 이스라엘이 그의 이름이 되리라고 말씀하셨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다. 얍복 강변에서 천사로 나타나 씨름하시면서 주신 그 이름을 다시 재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그 이름은 그의 새로운 삶을 증거한다. 그는 더 이상 형을 속이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이다.

[11-15절]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시며 많은 백성이 그에게서 나고 왕들이 그의 허리에서 나올 것이라고 하신 것은 그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말씀과 같았다. 그는 또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 곧 가나안 땅을 그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16-20절]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臨産)하여 심히 신고(辛苦)하더니 그가 난산(難産)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벤오니)(슬픔의 아들)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빈야민)(오른손의 아들)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가나안 땅의 삶은 여전히 쓸쓸한 나그넷길이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도 죽었고 사랑하던 라헬도 죽었다.

[21-26절]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 둘이라. 레아의 소생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라헬의 여종 빌하의 소생은 단과 납달리요 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야곱이 그 땅에 거할 때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의 첩 빌하와 통간하였고 이스라엘은 그 일을 들었다. 아직 청소년이었을 르우벤은 부끄럽고 악한 죄를 범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온 야곱의 가족들 안에도 여전히 죄악된 일이 있었다. 지상에서의 가나안 땅은 여전히 불완전하였다. 우리는 천국에서 완전한 성화를 볼 것이다.

[27-29절]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하던 헤브론이더라. 이삭의 나이 180세라.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이삭이 죽었을 때 야곱은 120세이었고 가나안 땅에 돌아온 지 약 30년 후이었다.

창세기 35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셨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께 서원했던 곳이다. 야곱은 온 가족과 더불어 자신을 정결케 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야곱에게 그 주위의 이방인들이 뒤쫓지 못하게 하셨고 그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복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명령은 신구약 성경의 모든 교훈들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이런 명령은 신구약 성경에 여러 번 반복되어 있다. 신명기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즐거이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고(마 28:20) 성경 말씀의 깨달음과 성령의 감동과 기도의 응답을 주실 것이다(요일 3:22).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이름을 감사하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와 ‘성도’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로마서 1:7,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귀한 새 이름들을 늘 감사하자.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이 나그넷길임을 알자. 야곱에게 가나안 땅은 여전히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 있고 인간의 부끄러운 실수와 죄악이 있는 나그넷길이었다. 우리에게도 이 세상은 나그넷길이다(대상 29:15; 벧전 2:11). 우리의 본향은 여기가 아니고 장차 올 저 세상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신앙의 열조들이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증거하였다(히 11:13- 16). 사도 베드로도 성도의 소망이 그를 위해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라고 말했다(벧전 1:4). 우리는 이 세상이 나그넷길임을 알고 천국을 우리의 본향으로 삼고 늘 사모하자.


36장: 에서의 자손들

[1절]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형인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었다. 창세기 25: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에돔이라는 말은 ‘붉은 것’이라는 히브리어 아돔에서 나왔다.

‘대략’이라는 원어(톨레도스)는 창세기에 11번 나온다(2:4; 5:1; 6:9; 10:1; 11:10, 27; 25:12, 19; 36:1, 9; 37:2). 그것은 ‘대략’ ‘계보’ ‘사적’ ‘후예’ ‘약전’ 등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이 단어가 창세기 전체에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은 창세기가 여러 사람에 의해 편집된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저작임을 증거하며, 그가 모세이었다고 본다.

[2절]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중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중 시브온의 딸 아나의 소생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취하고.

에서는 가나안 여인 중에서 아내를, 그것도 둘씩이나 취했다. 그의 아내들은 필경 우상숭배적이고 불경건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에서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한 것은 그에게 경건성이 부족했음을 보인다.

본문은 에서가 헷 족속 중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중 시브온의 딸 아나의 소생 오홀리바마를 아내로 취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창세기 26:34-35는 그가 헷 사람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사람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다고 기록했고, 창세기 27:4에 보면, 그의 어머니 리브가가 남편 이삭에게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내 생명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에서의 아내들은 헷 사람의 딸들이라고 불리었다. 그렇다면, 엘론의 딸 바스맛은 아다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고, 브에리의 딸 유딧도 오홀리바마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부친도 그러하고 종족도 혼합적이었던 것 같다.

[3절]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취하였더니.

창세기 28:9는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또 취하였다고 기록한다. 마할랏은 본절이 증거하는 대로 바스맛이라고도 불리었다. 그는 에서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다. 에서는 스스로 세 여자를 아내로 취하였다. 성경은 일부일처를 교훈한다. 에서가 세 아내를 취한 것은 그의 무절제한 욕망을 나타낸다.

[4-5절]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에서가 가나안 땅에 그 부친 이삭 가까이에 거하는 동안, 아다는 엘리바스를, 바스맛은 르우엘을,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알람과 고라를 에서에게 낳았다. 에서의 자녀들은 점점 많아졌다.

[6-8절]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의 우거한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인하여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산에 거하니라.

에서는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세일 땅, 에돔 들에 거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야곱은 하란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냈었다(창 32:3). 그러나 본문은 에서가 가족들과 소유물이 많아서 야곱과 함께 가나안 땅에 거하기 어려웠으므로 그를 떠나 세일산에 거하였다고 증거한다. 그것은 이제 거주 지역이 완전히 나뉘었다는 뜻일 것이다. 후에 신명기 2:5이나 여호수아 24:4는 하나님께서 세일산을 에서 자손의 소유로 주셨다고 증거하였다.

[9-11절] 세일산에 거한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대략이 이러하고 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은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 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요.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아들들 가운데 데만이 있다. 또 본장 15절도 에서의 자손 중 데만 족장을 언급한다. 욥기에 보면, 욥을 방문한 친구들 중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있다(욥 2:11). 욥기는 에서의 후손들을 배경으로 하는 것 같다. 욥은 우스 땅에 거주하였는데(욥 1:1), 예레미야 애가 4:21은 “우스 땅에 거하는 처녀 에돔아”라고 말한다. 또 70인 헬라어역 구약성경은 욥기 끝에, 욥은 시리아어 책에 이두매와 아라비아 국경지역의 아우시스 땅에 살았다고 묘사되었고 에서의 아들인 자레의 아들, 즉 아브라함의 5대손이라고 기록하였다.

[12-14절]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르우엘의 아들들은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미사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시브온의 손녀 아나의 딸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이러하니 그가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에서에게 낳았더라.

[15-19절] 에서 자손 중 족장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에는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과 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엘리바스로 말미암아 나온 족장들이요 이들은 아다의 자손이며 에서의 아들 르우엘의 자손에는 나핫 족장, 세라 족장, 삼마 족장, 미사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르우엘로 말미암아 나온 족장들이요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여우스 족장, 얄람 족장, 고라 족장이니 이들은 아나의 딸이요 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로 말미암아 나온 족장들이라. 에서 곧 에돔의 자손으로서 족장 된 자들이 이러하였더라.

12절은 엘리바스의 첩 딤나가 그에게 아말렉을 낳았다고 증거한다. 16절도 엘리바스의 자손 중에 아말렉 족장을 언급한다. 이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이스라엘의 원수로 등장하는 족속이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날 때, 아말렉 족속은 광야 생활로 피곤했을 이스라엘에게 싸움을 걸어왔고 르비딤에서 이스라엘과 싸웠다.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겼지만,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14절). 그러므로 모세는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라”고 말하였고(신 25:19) 후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다 없애라고 명령하셨었다(삼상 15:2-3).

[20-23절] 그 땅의 원거인(原居人) 호리 족속 세일의 자손은 로단과 소발과 시브온과 아나와 디손과 에셀과 디산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세일의 자손 중 호리 족속으로 말미암아 나온 족장들이요 로단의 자녀는 호리와 헤맘과 로단의 누이 딤나요 소발의 자녀는 알완과 마나핫과 에발과 스보와 오남이요.

세일 땅에는 본래 호리 족속이 거하고 있었다. 본문은 그들의 자손에 대해 증거한다. 창세기 14:6은 아브라함 때에 호리 족속이 세일산에 거하였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에서 자손들이 그 땅을 정복했다. 그러므로 신명기 2:12는 “호리 사람도 세일에 거하였더니 에서의 자손이 그들을 멸하고 대신하여 그 땅에 거하였으니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일반이었느니라”고 기록하였다.

[24절] 시브온의 자녀는 아야와 아나며 이 아나는 그 아비 시브온의 나귀를 칠 때에 광야에서 온천을 발견하였고.

‘온천’이라는 원어(예밈)는 성경에 한 번 나오는 단어로 성경 히브리어 학자들은 그 뜻을 정확히 모른다고 말한다(BDB). 옛날 영어성경은 ‘노새들’(mules)이라고 번역했고(KJV) 근래의 영어성경들은 ‘온천’이라고 번역한다(NASB, NIV). 이것은 고대의 라틴어 벌게이트역을 따른 것이다. 고대 시리아어역은 ‘물’이라고 번역하였다.

[25-30절] 아나의 자녀는 디손과 오홀리바마니 오홀리바마는 아나의 딸이며 디손의 자녀는 헴단과 에스반과 이드란과 그란이요 에셀의 자녀는 빌한과 사아완과 아간이요 디산의 자녀는 우스와 아란이니 호리 족속의 족장들은 곧 로단 족장, 소발 족장, 시브온 족장, 아나 족장, 디손 족장, 에셀 족장, 디산 족장이라. 이들은 그 구역을 따라 세일 땅에 있는 호리 족속으로 말미암아 나온 족장들이었더라.

[31-39절]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는 왕이 이러하니라.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의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의 이름은 딘하바며 벨라가 죽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고 요밥이 죽고 데만 족속의 땅의 후삼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고 후삼이 죽고 브닷의 아들 곧 모압 들에서 미디안 족속을 친 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 도성 이름은 아윗이며 하닷이 죽고 마스레가의 삼라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고 삼라가 죽고 유브라데 하숫가 르호봇의 사울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고 사울이 죽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고 하달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 도성 이름은 바우며 그 처의 이름은 므헤다벨이니 마드렛의 딸이요 메사합의 손녀더라.

31절,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는 왕이 이러하니라.” 창세기 35:11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신명기 17:14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할 때 그들 주위의 열국같이 그들 위에 왕을 세우려는 뜻을 가질 것을 예견하며 말했다. 모세 당시에 주변국들에는 왕이 있었다. 본문은 에돔 땅에도 왕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본문에는 ‘왕이 되었으니’ ‘왕이 되니’라는 표현(와이믈록)이 8번이나 반복해 나온다(32-39절).

[40-43절]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이름은 그 종족과 거처와 이름대로 이러하니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이라. 이들은 그 구역과 거처를 따른 에돔 족장들이며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

창세기 3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의 역사성을 믿자. 본장의 많은 사람과 족속의 이름은 성경이 역사적인 책임을 증거한다. 우리는 노아 자손들의 분포도가 기록된 창세기 10장에서도 성경의 역사성을 보았고 본장에서도 그것을 본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목사들은 성경의 역사를 불신임한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적 사건들을 진실히 증거하는 책이다(눅 1:1-4; 요 21:24). 성경의 역사는 믿을 만한 참된 역사이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적 진실성을 믿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인 에서도 돌아보셨음을 감사하자. 본장은 이방인 에서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보인다. 세계 모든 나라들의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주관하시는 섭리자이시다. 그는 특히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의 택하신 백성을 불러 구원하셨다. 우리는 전에 할례 없는 이방인이었고 약속의 언약과 상관없는 상태에 있었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으나 이제 구약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었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엡 2:11-12, 19).

셋째로, 우리는 경건하게 살자. 에서의 자손들에게는 아직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가 없었다. 본장은 에서의 자손들의 명단과 그들 가운데 왕이 있었음과 또 에서의 처가쪽 호리 족속 아나가 광야에서 온천을 발견하였음을 증거하는 정도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에서의 자손들이 아니고 야곱의 자손들인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전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고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유대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전체적으로 말해, 에서의 자손들은 불경건했다. 그러나 우리는 에서 자손들처럼 육신적으로 살지 말고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돈 사랑, 육신의 쾌락 사랑, 세상 사랑의 헛된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경건하게 살라고 교훈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그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그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교회를 위해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