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舊約]강해/◆ 모세오경[강해]

창세기(Genesis)20장-30장 / 김효성 목사

영국신사77 2020. 4. 14. 13:51

제목 차례

20장: 그랄에서 아내를 빼앗김

21장: 이삭과 이스마엘

22장: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23장: 사라의 죽음

24장: 이삭의 아내를 택함

25장: 이삭의 두 아들

26장: 이삭이 그랄에 우거함

27장: 야곱이 축복을 가로챔

28장: 야곱의 꿈과 서원

29장: 야곱의 하란 생활--결혼

30장: 야곱의 하란 생활--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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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그랄에서 아내를 빼앗김

[1-2절]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아브라함은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 수풀[테레빈스 나무들] 근처에 거하다가(창 13:18; 18:1) 남방으로 옮겨 가데스와 술 사이에 살다가 그랄에 우거하였다. 원문의 뜻은 그러하고 대부분의 영어성경들도 그렇게 번역하였다. 남방(‘네게브’라고 부름)은 헤브론에서 애굽 시내와 가데스 바네아까지의 남쪽 지역을 가리킨다. 창세기 15:18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의 경계를 증거했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땅은 남쪽으로는 애굽 강 혹은 애굽 시내에서부터 북쪽으로는 큰 강 유브라데까지이었다. 그랄은 남방(네게브)의 북쪽에, 후에 블레셋 땅이라 불린 곳에 있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그랄에 거하면서 자기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말하였다. 사라는 89세가 된 때에도 여전히 아름다웠고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자기의 아내를 빠앗을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말 때문에 그는 아내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겼다. 그가 이전에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애굽에 내려가 우거할 때도 그 아내를 잃어버린 일이 있었는데(창 12:15), 이번이 두 번째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으나 거짓말함으로써 자기의 목숨은 보호했는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자기의 아내를 잃었다. 그는 자기 목숨과 아내를 맞바꾼 셈이 되었다. 거짓말은 죄악이다. 사람이 범죄하면 어려운 일을 당한다.

[3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하여 낭패를 당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도우셨다. 그는 그 날 밤 아비멜렉에게 꿈에 나타나 네가 남의 아내를 취하였으므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꿈에 말씀하시는 것은 옛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한 방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죽음으로 위협하셨다. 그것은 남의 아내를 취한 것이 죽을 만한 큰 죄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레 20:10). 더욱이 사라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아들을 출산할 자이었다. 죽음의 위협은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일들 중의 하나이다. 아브라함이 비록 연약하여 거짓말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비상하게 개입하심으로 위기에서 그와 그의 아내 사라를 건지셨고 보호하셨다.

[4-7절]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6절에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라는 원어는 ‘여인을 만지지 못하게 함’이라는 뜻이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 자신이 아직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하였고 자신이 그를 아내로 삼은 것이 의로운 일이고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했다고 변호했다. 아비멜렉은 상당히 도덕적 인물이었던 것 같다. 세상에서도 도덕적 인물이 인정을 받고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도 그가 비교적 양심적인 자임을 인정하셨다. 그래서 그를 막아 그로 ‘그에게 범죄치 않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죄는 무슨 죄나 다 하나님께 대한 죄이다. 요셉은 주인 보디발의 아내와의 불륜이 큰 악이며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창 39:9).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죄를 회개하면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고백하였다(시 51:4). 본문은 간음이 큰 죄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소개하셨다. 또 그는 그가 그의 아내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와 그에게 속한 자들이 다 정녕 죽을 것이라고 위협하시며 아브라함을 특별하게 위하셨다.

[8-9절] 아비멜렉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을 다 말하여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의 모든 신하들은 심히 두려워하였다. 아비멜렉은 남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큰 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가 왕으로서 그런 죄를 지으면 온 나라가 죄에 빠진다고 깨닫고 있었다. 이것은 양심에서 나온 판단이며 세속사회에 주신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였다.

[10-13절]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異腹)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아브라함은 그랄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서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세속사회에서 사람들의 도덕적 행위를 기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잠 16:6). 그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거짓말하는 죄를 지었다. 사라가 그의 이복누이이기는 했다. ‘나의 이복누이’라는 구절은 원문에 ‘나의 아버지의 딸이지만 나의 어머니의 딸은 아닌 나의 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사라는 그의 아내가 되었으므로 ‘나의 누이’라는 말은 사실상 거짓말이었다.

[14-16절]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너를 위해 눈을 가리우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아비멜렉은 양들과 소들과 노비들과 함께 은 천 개를 아브라함에게 주었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냈다. 아브라함은 연약 때문에 당했던 그 위기에서 구원을 얻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상한 개입으로, 그의 크신 긍휼과 돌보심으로 된 일이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17-18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사라 때문에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에게 내리셨던 징벌을 거두어주셨다.

창세기 20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하여 거짓말하지 말자. 아브라함은 그랄에 우거하면서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자기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하였다. 오늘날 우리도 사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면 거짓말하게 될 것이다. 또 우리가 거짓말하는 죄를 지으면 아내를 빼앗기는 것 같은 어려운 일도 당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하여 거짓말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내세를 확신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31).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비상한 도움을 항상 믿자. 아브라함은 비록 자신의 부족과 연약 때문에 아내를 빼앗기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을 아셨고 비상하게 그를 도우셨다. 그는 그 일에 개입하셨다. 그는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꿈에 나타나셨다. 그는 죽음의 위협으로 그가 아브라함의 아내를 도로 돌려주게 하셨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여 때때로 실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신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다는 것과 도우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된 우리 모두의 큰 복이며 특권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자들로 오직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아는 자이었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 단을 쌓는 생활을 했다. 오늘날 말로 하면, 그는 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경 읽고 기도하며 찬송하고 또 가정예배의 단을 쌓는 일을 한 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가장 복된 일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복을 늘 감사하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의 백성이 되는 길은 모든 죄를 버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막 1:15).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다고 증거했다(요 1:12).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버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21장: 이삭과 이스마엘

1-21절, 이삭의 출생과 이스마엘의 쫓겨남

본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신 일과 여종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내보내게 된 일을 기록한다.

[1-2절]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眷顧)하셨고[돌아보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25년 전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가 살던 하란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복을 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창 12:2-3). 또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는 오는 봄 정한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17:21; 18:10, 14).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택하신 자, 곧 그를 경외하는 아브라함에게 복된 약속을 주셨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아보셨고 그가 약속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 사라는 임신했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셨고 그 약속의 말씀도 신실했다.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인류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에 기록된 그의 모든 약속과 말씀은 신실한 말씀이다.

[3-5절]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8일 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100세라.

아브라함은 사라가 그에게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라고 하신 이름이었다(창 17:19). 이삭(이츠카크)은 ‘그가 웃는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난 지 8일째 되는 날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창 17:10, 1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이었다.

이삭이 출생했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이었다. 2절은 아브라함을 ‘늙은 아브라함’으로 말하고, 7절은 이삭을 ‘아브라함 노경에’ 얻은 아들로 말한다. 원문은 같다. 100세된 노인이 아들을 얻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창세기 17:17은 사라의 나이가 90세라고 말하며 또 창세기 18:11은 사라의 경수(經水)[월경]가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능력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었다(창 18:14).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

[6-7절]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사라는 이삭을 출산 한 후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셨다’고 말했다. 그의 웃음은 기쁨과 행복이 넘친 웃음이었다. 늙은 자신들을 통하여 아들이 출산된 것은 참으로 자신들 뿐만 아니라 그 소식을 듣는 모든 친지와 이웃도 함께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아브라함에게 감히 말할 자가 없었으나 그는 아브라함 노경에 아들을 낳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었다.

[8-9절]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大宴)을 배설하였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아이는 잘 자랐고 젖을 떼는 때가 되었다. 그것은 보통 3살쯤이라고 추측된다.36) 어린아이가 병약하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삭이 젖을 떼는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것은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려는 잔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사라가 보았다. 그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17살쯤이며 조심할 만한 나이이었다. 한 집에 배가 다른 두 형제가 사니 이런 일은 예상할 만한 일이었고, 하갈이 좀더 생각이 있었다면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엄히 교훈하고 단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것 같고, 사라는 그 일로 마음이 몹시 상하였다.

[10-11절]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고 말했다. 사라의 감정은 일반 여인들의 감정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의 요청을 들은 아브라함은 아들 이스마엘로 인해 심히 근심했다. 아들까지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큰 근심의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하갈을 첩으로 얻었을 때부터 예상된 문제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부족에서 왔고 한 집에 같이 살면서 해결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이었다. 사라와 하갈은 서로 헤어지는 것이 지혜로워보였다. 이스마엘도, 하갈도, 사라도 완전한 인격은 못되었다.

[12-13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문제로 고민하는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입을 것이지만, 사라에게서 난 이삭만이 아브라함의 계보를 잇는 기업 상속자가 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삭을 위해, 이삭을 위주로 섭리하실 것이었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또 그를 믿는 자들의 예표이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자들이다(요 1:12). 또 로마서 8:28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증거하였다.

[14-16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였다.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해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 그와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보냈다(후에 재물을 주었다고 보임, 창 25:6). 그의 가정의 갈등을 해소하는 지혜로운 길은 그들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여기에 인간의 연약함이 있다.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부족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갈도, 이스마엘도, 사라도 다 부족하였다.

하갈은 아들과 함께 나가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였다. 브엘세바는 유다 땅의 맨 남쪽에 있고 남방(네게브) 지역에 속했다. 가죽부대의 물이 다하자, 하갈은 그 아들을 한 떨기나무(관목; 줄기와 가지가 분명치 않은 나무) 아래 두고 살 한 바탕쯤 떨어져 아들 이스마엘을 마주 앉아 바라보며 크게 울었다. ‘살 한 바탕’의 거리는 몇 십 미터쯤 될 것이다. 하갈의 눈물은 자신과 아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그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아들 이스마엘도 울었다.

[17-21절]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다. ‘아이’라는 원어(나아르)는 ‘소년, 청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늘로부터 하갈을 불렀고 하나님께서 그 아이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또 그의 눈을 밝히시므로, 하갈은 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들에게 마시웠다.

이스마엘은 비록 이삭과 함께 살 수 없는 처지이었지만 아브라함의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불안하고 두려운 광야에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아브라함과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도 함께하셨다. 이스마엘은 커서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육신적으로 선택된 백성이 아닌 자들을 대표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2만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말씀하셨다(욘 4:11). 주께서는 하나님께서 햇볕과 비를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마 5:45).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받으신다고 말했다(행 10:35).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구원받을 자들이 있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신 약속대로 행하시는 자이시다. 1절,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돌아보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약속하신 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게 하셨다. 구주 예수님을 믿은 우리는 구원의 복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다. 그것은 주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우리는 요한과 함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사모하자.

둘째로, 아브라함의 깊은 근심은 자신과 사라의 부족 때문에 온 것이었다. 그들은 좀더 참고 기다려야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 방법으로 이루어보려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의 가정에는 갈등이 생겼고 그것은 그의 깊은 근심이 되었다. 그 갈등과 근심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우리는 그런 부족을 조심하자.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도 너그러우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이스마엘을 통해 한 큰 민족을 이루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의 자손들인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너그러우셨다. 그는 만세 전에 영생에 이르도록 구원하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영혼들을 택하셨다. 우리도 그들 중에 속했다. 시편 22:27-28,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이사야 45: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뜻을 감사하자.

22-34절,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음

본문은 그랄 왕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이 서로 언약을 맺은 이야기이다. 이것은 평범한 사건처럼 보인다. 이 평범하게 보이는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을 살펴보자.

[22-24절]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낸 때 즈음에,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하였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계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경건한 아브라함에 대한 이방인의 놀라운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랄 왕인 이방인 아비멜렉까지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하심이 이방인들에게도 증거된 것이다!

또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고 말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서로 해치지 않기를 맹세하는 언약을 맺자고 제안한 것이다. 환경적으로 불안하였을 아브라함에게 이런 언약은 더 나은 안정을 줄 수 있는 기회라고 보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아비멜렉의 요청에 응하였다.

역사상 신앙의 열조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하였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증거하였다. 아브라함이 그러하였다. 그의 아들 이삭도 그러했다. 창세기 26:28에 보면, 그랄 왕 아비멜렉은 그에게 와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고 말했다. 요셉도 그러하였다. 창세기 39:3에 보면, 그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 생활하고 있었을 때, 그 주인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하나님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다. 다니엘도 그러했다. 다니엘 4:8에 보면,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서도 느부갓네살 왕은 그의 안에 거룩한 신의 영이 있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셨다.

[25-31절]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빼앗은]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아브라함은 그때 아비멜렉의 종들이 자기가 판 우물을 빼앗은 일에 대해 말하며 그를 책망하였고 아비멜렉은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고 해명했다. 아브라함은 양들과 소들을 취하여 그에게 주었고 서로 언약을 맺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양들과 소들을 준 것은 자기가 판 우물을 돌려줄 그의 호의에 대한 보상이었다고 보인다. 또 아브라함은 암양 새끼 일곱을 따로 구별하여 그에게 주었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자신이 그 우물을 팠다는 것을 증거하는 표라고 그에게 말했다. 아브라함은 그곳을 브엘세바 곧 ‘맹세의 우물’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그 두 사람이 거기서 맹세하며 서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범사에 정당하고 너그럽게 처신하려고 애썼다. 그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상대에게 지적하고 책망하기도 하였으나 양들과 소들, 그리고 일곱 암양 새끼들을 선물로 줌으로써 상대방이 베풀 호의와 우정에 대해 미리 감사를 표하기도 하였다. 의와 선과 진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필수적 덕목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였다(엡 5:8-9).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 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벌려 해서는 안 된다. 잠언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잠 16:8). 또 집사의 자격에는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않는 것이 포함된다(딤전 3:8).

성경은 우리에게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라고 교훈한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고 하셨다(마 5:44-45). 사도 바울도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했다(롬 12:17, 20-21). 그러나 이런 말씀은 개인적으로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함을 보이는 것이고 국가 간의 정당방위적 전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32-34절]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웠고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는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다. ‘에셀나무’라는 원어는 ‘타마리스크 나무’(또는 위성류)라고 하는데, 사막 지대에서 자라는, 분홍색 꽃이 피는 작은 나무라고 한다.

또 아브라함은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원어(엘 올람)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천지만물은 그가 창조하신 것이다.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셨다(창 1:1). 그러므로 모세는 시편 90:1-2에서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신 영원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된 경건이며, 그 하나님 안에 영생의 길이 있다.

천지만물은 인류 역사 6,000년을 지나면서 낡고 쇠하여지고 있다. 시편 102편에는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언제나 동일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라고 말하였다(시 102:26-27). 성경은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전 1:2).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벧전 1:24-25). 그러므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썩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낡아지고 쇠해지고 썩지만, 오직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며 그의 말씀도 영원하고 불변하다(사 40:8; 벧전 1:25).

창세기 21장의 평범하게 보이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몇 가지 귀한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영생하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신 자이시다. 천지 창조 이전은 영원 세계이다. 주께서는 요한계시록에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말씀하셨다(계 22:12).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라고 썼다(요일 2:13). 한 분이신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구원이며 영생이다(요 17:3). 우리는 그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섬기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자가 되자.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증거하였다. 후에 요셉이 그러했고 다윗도 그러했고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그러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체험하며 살 뿐 아니라, 우리의 주위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느끼며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증거가 되기를 원한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경건하게 살고 그의 계명대로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특히 선하고 너그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그랄 사람들이 우물을 빼앗았으나 그들과 다투지 않았다. 그는 양들과 소들과 일곱 암양 새끼를 아비멜렉에게 주었다. 그것은 그들의 감정을 부드럽게 하는 행동이었다고 보인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선한 자로 창조되었으나 범죄한 후 악한 자가 되었다. 아모스 5: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깨끗하게 하신 것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딛 2:14). 천국과 영생의 구원을 받은 자는 세상에서도 선한 삶을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22장: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1-2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런 일들, 즉 이삭이 출생되어 자람, 이스마엘을 내보냄,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음 등의 일들이 있은 후, 아마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그에게 명령하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번제는 제물을 온전히 불태워 드리는 제사이다.

그 명령은 이성으로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지나쳐 보이는 명령이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 아닌가? 이스마엘로 인해 근심하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창 21:12)고 그가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귀하고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스런 아들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자이시며 그의 명령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오직 순종해야 한다. 사람은 그 명령을 가감하지 말고(신 4:2; 12:32),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신 5:32) 지켜야 하고 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매우 사랑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함을 교훈한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온전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조건을 초월한 절대적 순종이어야 한다.

[3-4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3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그의 명령에 대해 하나님께 무엇을 질문하거나 대항하지 않았다. 그는 지체치 않고 그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 즉 종들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하나님의 지시하신 곳을 향해 떠났다. 제3일에 그는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보았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까지는 3일 길이었다. 모리아 산은 바로 예루살렘이다. 역대하 3:1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라고 기록한다. 아브라함이 거주한 브엘세바에서(창 22:19) 모리아 산 즉 예루살렘까지는 지도에 보면 약 65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이며 그 정도면 서울에서 평택까지쯤 된다. 그것은 긴 여행이었다. 또 그 기간은 아브라함에게 매우 고통스런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묵묵히 순종하며 자신의 감정을 이겨내었다. 그의 순종은 일시적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3일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5-8절]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거기 머물게 하고 이삭과 함께 가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를 죽인 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히브리서 11:19는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함께 갔다. 번제할 나무를 진 것을 보면 이삭의 나이가 15살 이상은 되었을 것 같다. 그때 이삭은 말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들의 당황스런 질문을 듣게 된 아브라함은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이었다.

[9-10절]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거기서 단을 쌓고 나무를 가지런히 놓은 후 이삭에게 말했을 것이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눕혀 놓았다. 이삭은 아버지께 반항한 것 같지 않다.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아들 이삭도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것 같다. 아브라함은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죽이려 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막지 않으셨다면,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진짜 죽였을 것이다.

[11-12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것은 다급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죽이기를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의 뜻은 이삭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단지 아브라함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시험하여 무엇을 확인하신다는 것은 인간적 표현이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중심을 아시지만,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한지 확실히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사자는 말씀하시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다.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는 표현은 그가 곧 하나님 자신이심을 암시한다. 이와 같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종종 하나님의 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은 충분하게 검증되었다. 비록 그가 외아들 이삭을 매우 사랑했지만, 그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그를 사랑했고 그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였다. 이것이 참 경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시며 그의 명령은 인간이 순종해야 할 최고의, 절대적 명령이시다.

[13-14절]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 이삭 대신 한 숫양을 준비하셨다.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뿔이 수풀에 걸린 한 숫양을 보았다. 그는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보시리라 혹은 준비하시리라”는 뜻이다. 그 후에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15-19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하나님의 사자의 두 번째 음성은 아브라함에 대한 복의 선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면서 선언하셨다. 그의 모든 말씀은 믿을 만하지만, 특히 맹세하며 선언하신 말씀은 더욱 그렇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복을 선언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이다. 순종에는 복이 따른다(신 28:2-13; 사 48:17-18).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복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번창케 하시고 복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하시고 그들이 그 대적의 문을 얻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 자손이 혈통적으로, 수적으로, 세력적으로, 또 영적으로 번창할 것을 뜻한다. 또 대적의 문을 얻는다는 말은 대적들을 정복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확실히 메시아 약속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온 세상은 복을 받을 것이다. 과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마 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은 죄와 사탄의 권세와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 복이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신약교회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20-24절] 이 일 후에 혹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밀가가 그대의 동생(아키카)[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처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이 일들 후에 아브라함은 형제 나홀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의 아내 밀가는 여덟 아들을 낳았다. 우스는 욥이 살았던 땅의 선조 같고(욥 1:1) 브두엘은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낳았다. 또, 아마 밀가가 죽은 후, 나홀은 르우마를 후처로 얻어 네 아들을 더 얻었다.

본장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본받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버릴 정도로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증거이었다. 우리도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고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내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버리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사랑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복과 상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복과 상을 주셨다. 그는 그의 자손들의 번창과 그의 자손을 통해 세계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는 복을 약속하셨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아브라함의 자손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구원의 복이다. 예수께서도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높임과 영광을 받으셨다(빌 2:8-11). 순종에는 항상 상이 따른다(계 22:12).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세상에서도 큰 복을 누리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자손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감사히 받고 믿어 구원을 받자. 실상,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예표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번제물로 드리라고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본장의 숫양도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 숫양은 이삭 대신 번제물이 되었다. 죄인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았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은 죄인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이며 약속이다. 우리는 다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고 그 은혜에 거해야 한다.

23장: 사라의 죽음

[1-4절] 사라가 127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 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본장은 사라가 127세에 죽은 일을 기록한다. 성경의 내용은 매우 선택적이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단지 몇 가지의 내용만 기록하였다. 지난 장에서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던 사건을 기록한 후 이제 사라의 죽음을 기록하였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던 때가 이삭이 15살쯤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때에 아브라함의 나이는 115세이며 사라의 나이는 105세이었으니, 그로부터 22년의 세월이 흐른 때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내용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매우 선택적으로 기록케 하셨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성경의 모든 내용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사라, 아브라함과 결혼하여 아마 90년 이상을 같이 살았을 그는 이제 늙어 세상을 떠났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원문)에 거주하고 있었을 때이었다. 기럇 아르바는 헤브론의 옛 이름이었다(수 14:15; 삿 1:10).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사랑하는 사람도 죽는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 있고 아무도 그 시간을 알지 못한다.

아브라함은 장막에 들어가 아내의 시체 앞에서 슬퍼하며 애통하였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감정이다. 아브라함은 슬픔 중에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the Hittites)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葬事)하게 하시오”라고 말하였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나그네와 우거한 자로 살고 있었다. 사실, 세상은 사람의 영원한 거주지가 아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다. 다윗은 말하기를,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했다(대상 29:15). 우리의 참 고향은 더 이상 죽음과 이별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이다.

옛날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죽은 자의 시체를 매장(埋葬)하였다. 불교의 풍습인 화장(火葬)도 허용된다. 사무엘상 31:12-13에 보면, 사울 왕과 그 아들들의 시체는 화장하여 그 뼈를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 장사하였다. 오늘날 말로 수목장을 한 셈이다. 화장이 허용되기는 하지만, 매장은 성도의 부활 소망에 적합하다. 사람의 죽음은 몸과 영혼의 분리 현상이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몸을 떠나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가고 몸은 무덤에 묻힌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죽은 성도들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영생할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는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말했고(고전 15:51-52), 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라”고 말하였다(살전 4:16-17).

우리는 또한 영생을 믿는다. 사도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요일 5:13). 또 사도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말했다(딤전 6:12).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또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 자답게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5-6절]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葬事)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내 주여’라는 표현(6, 11, 15절)은 일반적인 존칭어이었다고 본다. ‘하나님의 방백’이라는 원어(네시 엘로힘)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라는 뜻으로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와 위엄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 사람들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이었다(딤전 3:7). 헷 족속은 아브라함에게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葬事)하소서”라고 말하며 호의를 베풀었다.

[7-11절]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거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어 장사(葬事)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準價)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때에 에브론이 헷 족속 중에 앉았더니 그가 헷 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의 듣는데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께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께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께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아브라함은 헷 족속의 호의적인 말에 대해 일어나 그들을 향해 몸을 굽혀 답례하며 에브론의 밭끝에 있는 막벨라 굴을 값을 받고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때에 에브론이 거기 앉았다가 모든 자들의 듣는데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굴을 주겠다고 말하였다.

아브라함이 헷 족속의 호의적인 말에 대해 감사하는 표시로 그들을 향해 몸을 굽힌 것은 그의 겸손함을 보인다. 우리는 전에 그가 집에 온 손님들을 접대하는 모습에서도 그의 겸손함을 보았었다. 그는 집 앞에 온 손님들을 보고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몸을 땅에 굽히며 그들을 영접하였었다(창 18:2). 경건한 아브라함은 겸손한 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을 교훈하신다.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주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겸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빌 2:5). 또 주께서는 교훈하시기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다(마 23:11-12).

[12-15절]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 백성을 대하여 몸을 굽히고 그 땅 백성의 듣는데 에브론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컨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400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較計)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16-20절]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데서 말한 대로 상고(商賈)의 통용하는 은 400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바꾸어 그 속의 굴과 그 사방에 둘린 수목을 다 성문에 들어온 헷 족속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정한지라.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

아브라함은 다시 그 땅 백성을 향해 몸을 굽히고 그 밭값을 정당히 지불하고 매입하기를 원하였다. 땅 주인 에브론이 그 땅을 그냥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아브라함은 정당하게 당시 장사들이 사용하는 세겔로 은 400세겔(약 4.6kg; 약 912데나리온 무게)을 달아 주고 그 땅을 샀다. 그 땅은 모든 증인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지가 되었다. 그런 후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의 시신을 그 밭의 굴에 안장(安葬)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밭을 정당한 값을 주고 샀다. 그는 물질 생활에서 남에게 손해를 주지 않고 정당하게 살려 하였다. 그것이 의와 사랑이다. 사람의 인격성은 그의 정확한 돈 계산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정당하게 돈을 벌고 정당하게 물건을 소유해야 한다. 도적질은 악한 일이며, 남의 것을 강탈하는 것은 더 악한 일이다. 그것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악들 중에 포함된다(고전 6:9-10).

창세기 2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죽음을 잘 준비하자. 사람의 죽음은 영혼이 몸을 떠나가는 것이다. 즉 몸과 영혼의 분리이다(전 3:20-21). 그것은 죄 때문에 왔다(창 2:17; 3:19; 5:5, 8, 11 등; 롬 6:23). 죽음은 생의 마감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죽음으로 마감된 생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전 12:14; 히 9:27).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얻었고(요 3:16; 5:24) 장차 죽어도 부활할 것을 소망한다(요 5:28-29; 11:25-26; 살전 4:13-18). 인생은 나그넷길이며 누구나 어느 날 죽는다. 우리는 참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의와 선과 사랑을 힘써 실천함으로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한다.

둘째로, 겸손한 자가 되자. 하나님을 아는 자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자임을 알고 자신을 낮춘다. 주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0:26-27).

셋째로, 정당하게 살자. 천국 소망을 가진 자는 세상에서 정당하게 산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는 강 같은 평안을 누린다(사 48:18).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해야 한다(마 6:33).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낫다(잠 16:8). 

24장: 이삭의 아내를 택함

[1절]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이때 그의 나이 140세이었고 사라가 죽은 지 3년 후쯤 되었다.37)

[2-4절]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아브도 제칸 베소)[그의 집에서 그의 가장 나이든 종](KJV, NASB)에게 이르되 청컨대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아브라함은 그의 외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를 원하였다. 그는 그의 집 모든 소유를 맡은 그의 가장 나이든 종을 불러 이삭의 아내 구하는 일을 맡겼다. 손을 ‘환도뼈 밑에’ 즉 허벅지 밑에 놓고 맹세하는 것은 옛날의 풍습이었던 것 같다. 여호와께서는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땅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아브라함은 그 종으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그 아들을 위해 아내를 택하지 말고 그의 고향의 친족 중에서 택할 것을 맹세케 하였다. 아브라함은 노아의 예언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노아는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리라”고 예언하였었다(창 9:25-26). 가나안은 저주를 받은 족속이었다. 인류의 경건은 셈의 후손들을 통해 전달되고 유지되어 왔다.

[5-7절]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아브라함은 그의 종에게 하나님께서 그 천사를 그 앞에 보내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안에서 가진 확신이었다.

[8-9절]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 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종이 이에 주인 아브라함의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아브라함은 종에게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가지는 말라고 두 번이나 반복하여 명하였다(6, 8절).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고향에서 불러내시고 이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10-11절] 이에 종이 그 주인의 약대 중 열 필을 취하고 떠났는데 곧 그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그 약대를 성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러 나올 때이었더라.

나홀의 성은 창세기에서 ‘밧단 아람’(창 25:20; 28:2, 5, 6, 7; 31:18; 33:18; 35:9, 26; 46:15) 혹은 ‘하란’(창 27:43; 28:2, 10)으로 언급되었다.

[12절]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 종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45절). ‘우리 주인’이라는 원어는 ‘나의 주인’이다. 그러면 창세기 24장에 ‘나의 주인’이라는 말이 19번 나오는 셈이다(12, 12, 14, 27, 27, 27, 35, 36, 36, 37, 39, 42, 44, 48, 48, 49, 54, 56, 65절). 그 종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13-14절]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섰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그 종은 기도 중에 이삭의 아내가 될 소녀를 확인할 구체적 방법을 제안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운 생각이었다. 노인에게 물을 대접하는 소녀는 착한 성품의 사람일 것이다. 또 약대들에게도 물을 마시게 하는 것도 착한 성품이다. 잠언 12:10,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15절] 말을 마치지 못하여서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그 종이 마음으로 한 기도를 끝내지 못하여서 응답이 왔다.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우물가로 나왔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즉각적이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그 경건한 종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16절]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에 내려가서 물을 그 물 항아리에 채워 가지고 올라오는지라.

리브가는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고 순결한 처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순결성을 지키는 자들을 받으시고 복을 주신다.

[17절] 종이 마주 달려가서 가로되 청컨대 네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

종은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얻은 기회를 빠르게 붙잡았다.

[18-21절] 그가 가로되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 항아리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마시우기를 다하고 가로되 당신의 약대도 위하여 물을 길어 그것들로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급히 물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약대를 위하여 긷는지라.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본문은 ‘급히’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하며(18, 20절), ‘달려가서’라는 표현도 사용한다(20절). 리브가는 즐거운 마음으로 선을 베푼 착한 성품을 가진 자임에 틀림 없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 소녀를 묵묵히 주목하면서 하나님께서 형통한 길 주신 여부를 알기를 원했다.

[22절] 약대가 마시기를 다하매 그가 반 세겔중 금고리 한 개와 열 세겔중 금 손목고리 한 쌍을 그에게 주며.

반 세겔은 약 5g, 열 세겔은 약 114g을 가리킨다. ‘고리’라는 원어(네젬)는 ‘코나 귀에 끼는 고리’를 가리킨다.

[23-25절] 가로되 네가 뉘 딸이냐? 청컨대 내게 고하라. 네 부친의 집에 우리 유숙할 곳이 있느냐? 그 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 또 가로되 우리에게 짚과 보리가 족하며 유숙할 곳도 있나이다.

‘보리’라고 번역한 원어(미스포)는 ‘마초, 꼴’이라는 뜻이다.

[26-27절]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가로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집(베스 아케)[형제들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그 종은 하나님께서 그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인자와 진실을 베푸셨고 자기를 선히 인도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하는 경건한 자이었다. ‘성실’이라는 원어는 ‘진실’이라는 뜻이다.

[28-31절] 소녀가 달려가서 이 일을 어미 집에 고하였더니 리브가에게 오라비가 있어 이름은 라반이라. 그가 우물로 달려가 그 사람에게 이르니 그가 그 누이의 고리와 그 손의 손목고리를 보고 또 그 누이 리브가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이같이 말하더라 함을 듣고 그 사람에게로 나아감이라. 때에 그가 우물가 약대 곁에 섰더라. 라반이 가로되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 들어오소서. 어찌 밖에 섰나이까? 내가 방과 약대의 처소를 예비하였나이다.

[32-33절] 그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매 라반이 약대의 짐을 부리고 짚과 보리를 약대에게 주고 그 사람의 발과 그 종자의 발 씻을 물을 주고 그 앞에 식물을 베푸니 그 사람이 가로되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라반이 가로되 말하소서.

그 종은 참으로 충성된 종이었다. 그는 자기의 일에 충실하였다.

[34-36절] 그가 가로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나의 주인의 부인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37-41절] 나의 주인이 나로 맹세하게 하여 가로되 너는 내 아들을 위하여 나 사는 땅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아비 집,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하시기로 내가 내 주인에게 말씀하되 혹 여자가 나를 좇지 아니하면 어찌하리이까 한즉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비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이니라. 네가 내 족속에게 이를 때에는 네가 내 맹세와 상관이 없으리라. 설혹 그들이 네게 주지 아니할지라도[만일 그들이 네게 주지 아니한다면] 네가 내 맹세와 상관이 없으리라 하시기로.

[42-44절] 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씀하기를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나의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대 내가 이 우물 곁에 섰다가 청년 여자가 물을 길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 하여 그의 대답이 당신은 마시라. 내가 또 당신의 약대를 위하여도 길으리라 하면 그 여자는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자가 되리이다 하며.

[45-46절] 내가 묵도하기를[마음에 말하기를](원어의 뜻) 마치지 못하여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와서 우물로 내려와 긷기로 내가 그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내게 마시우라 한즉 그가 급히 물 항아리를 어깨에서 내리며 가로되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기로 내가 마시매 그가 또 약대에게도 마시운지라.

[47-48절] 내가 그에게 묻기를 네가 뉘 딸이뇨 한즉 가로되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브두엘의 딸이라 하기로 내가 고리를 그 코에 꿰고 손목고리를 그 손에 끼우고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

[49절] 이제 당신들이 인자와 진실로 나의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고하시고 그렇지 않을지라도 내게 고하여 나로 좌우간 행하게 하소서.

[50-51절]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나쁘다 혹은 좋다]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그대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대로[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로 그대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52-53절]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리어 여호와께 절하고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 오라비와 어미에게도 보물을 주니라.

[54-56절] 이에 그들 곧 종과 종자들이 먹고 마시고 유숙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가 가로되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리브가의 오라비와 그 어미가 가로되 소녀로 며칠을 적어도 열흘을 우리와 함께 있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치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57-58절]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마음 속에도 이미 감동하셨다.

[59-60절]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종자들을 보내며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61절] 리브가가 일어나 비자[여종들]와 함께 약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62-63절] 때에 이삭이 브엘 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남방에 거하였었음이라.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수아크)(LXX, Vg, KJV, NASB, NIV)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

브엘 라해로이는 남방(네게브)의 최남단에 있었다. 이삭은 그곳에 거하다가 아버지 아브라함이 거주했던 기럇 아르바(헤브론)로 올라왔을 것이며, 아마 거기에서 리브가를 만났을 것이다.

[64-65절]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약대에서 내려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뇨? 종이 가로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면박을 취하여 스스로 가리우더라.

[66-67절]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고하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창세기 2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도의 결혼은 주 안에서, 믿음 안에서,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의 아내를 택하기 위해 자기의 종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의 여자를 택하지 말고 그의 고향의 친족 중에서 택할 것을 맹세케 하였다. 그것은 노아의 예언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노아는 가나안의 자손을 저주하였고 셈의 자손을 축복하였다. 또 아브라함은 혹시 여자가 이곳으로 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의 아들을 그리로 데려가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것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모세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사람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신명기 7:3-4,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성도의 결혼은 주 안에서,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고린도전서 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하나님께서는 불신 결혼을 금하신다.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영적으로 산 자가 영적으로 죽은 자와 결혼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신자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는 일이다. 그것은 성경의 교훈을 어기는 일이다. 불신자를 사귀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혹 사귄다면 먼저 상대방이 산 자가 되어야 하고 그 후에 결혼이 가능하다. 성도의 결혼은 믿음 안에서,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로, 복된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셔야 얻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를 그의 종 앞에 보내실 것을 확신하였다(7, 40절).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께서 그의 걸음을 인도하실 것을 기도했고(12절) 그의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음을 찬송했다(27, 48절). 라반과 브두엘도 그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다고 깨달았고(50절)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고 말했다(51절). 복된 가정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건립된다(시 127:1). 잠언 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그러므로 결혼 당사자들은 이 중대한 일을 위해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선한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셋째로, 미혼 여성들은 착한 성품을 준비해야 한다. 리브가는 남을 섬길 수 있는 착한 성품을 가졌고(14, 18-20절), 순결하였고(16절), 또한 겸손하였다(64-65절).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돕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여자를 만드셨다(창 2:18). 아내는 일차적으로 남편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착한 성품을 가진 자가 아니면 좋은 아내가 되기 어렵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종은 경건하고(12절) 민첩하고(17절) 믿음이 있고(21, 27, 48, 52절) 충성되었다(33, 54, 56절). 그는 아브라함을 ‘나의 주인’이라고 19번이나 말했다. 그는 자기 위치를 지키는 자이었고 맡은 임무에 충실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직분을 맡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충성이다(고전 4:2).

25장: 이삭의 두 아들

1-11절, 아브라함의 후년의 삶

[1-4절] 아브라함이 후처(잇솨)[아내]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고 아마 이삭이 결혼한 후 그두라라는 이름의 후처를 취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기력을 주셨고 그의 아내 그두라는 아브라함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다. 그의 자손들 중에는 스바, 드단, 앗수르 등 성경에 나오는 지역 혹은 종족의 이름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같은 이름의 사람들이나 종족들이 있으므로(창 10:7, 22, 28)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5-6절]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베네 핫필라그쉼)[첩들의 아들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아브라함은, 그의 사랑하던 아내 사라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인 이삭에게 그의 모든 소유를 주었다. 이삭은 그의 주상속자이었다. 또 아브라함은 자기의 다른 아들들, 즉 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과, 그두라의 여섯 아들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이삭을 떠나 동쪽 땅, 즉 오늘날 아라비아 반도로 가게 하였다.

[7-8절] 아브라함의 향년이 175세라. 그가 수(壽)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아브라함은 175세에 별세하였다. 그는 주전 2166년경에 출생하여 주전 1991년경에 사망하였다.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대의 인물이었고, 우리나라의 고조선 시대이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았고 기운이 다하여 숨이 끊어졌다. 본문은 그의 죽음을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창세기 15:15에 기록된 하나님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 이 표현은 사람이 죽음으로 그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영혼이 육체를 떠나 어떤 곳에 모이는 것을 보인다.

[9-11절]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 라해로이 근처에 거하였더라.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버지를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 복의 계대(繼代)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을 이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자가 될 것이다.

12-18절, 이스마엘의 자손들

[12-18절]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고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12방백이었더라. 이스마엘은 향년이 137세에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

모세는 이스마엘의 후예에 대해 먼저 기록한 후 이삭에 대해 기록한다. ‘후예’라는 원어(톨레도스)는 창세기에 11번이나 나오는 단어인데, 창세기가 한 사람의 저자 모세에 의해 쓰여진 책임을 잘 나타낸다. 그것은 ‘대략, 계보, 사적, 후예, 약전’ 등 여러 말로 번역되었다(2:4; 5:1; 6:9; 10:1; 11:10, 27; 25:12, 19; 36:1, 9; 37:1).

이스마엘은 12명의 아들들을 낳았고 그들은 다 열두 부족의 방백들이 되었다. 이스마엘은 137세까지 살았고, 180세까지 산(창 35:28) 이삭보다 일찍 별세하였다. 그의 자손들은 아라비아 반도와 홍해 서남쪽에 흩어져 살았다. 하윌라는 홍해 서쪽 최남단, 구스 남쪽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수적으로 번창하였다. 두 번째 아내 그두라를 통해 여섯 아들들이 출산되었고, 첩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통해 열두 명의 아들들이 출산되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고쳐주시고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창 17:5-6)고 말씀하신 대로 되었다.

19-26절, 리브가의 출산

[19-21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40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이삭은 40세에 결혼하였으나 60세가 되기까지 20년 동안 자녀가 없었다. 그는 자녀를 가지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의 기도는 아마 거의 20년 가까이 올린 기도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의 아내 리브가는 임신하였다.

이삭이 자녀를 위해 기도한 긴 기간은 하나님께서 언약 자손 이삭을 훈련시키신 기간이었다. 그의 조상 노아는 500세에 자녀를 가졌었다(창 5:32). 그의 부친 아브라함도 75세 이전에 결혼했으나 100세가 되기까지 자녀가 없었다. 이삭은 하나님께 자녀를 주시기를 구하면서 믿음이 자라고 인격이 성숙되었을 것이다. 그는 간절하고 끈질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의지하며 그의 응답을 체험하였고 그것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22-26절]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그 여자가] 가로되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그 여자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全身)[온 몸]이 갖옷[가죽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60세이었더라.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쌍동이를 잉태케 하셨셨고 또 그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특별한 말씀을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작정을 보인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

27-34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팖

[27-28절]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 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조용한] 사람인 고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그 쌍둥이 아이들은 잘 자랐다. 에서는 장성하여 익숙한 사냥꾼인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장막에 거하는 조용한 사람이 되었다. ‘조용한’이라고 번역된 말(탐)은 영어성경들에서 'plain'(솔직한, 순전한)(KJV), 'peaceful'(온화한, 조용한)(NASB), 'quiet'(온화한)(NIV) 등으로 번역되었지만, 성경에 사용된 예들(13번)은 주로 ‘순전한, 순진한’이라는 뜻이다(BDB). 고대 헬라어 70인역도 본문을 ‘순전한, 순진한’이라는 말(아플라스토스)로 번역하였다.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의 인물로 생각되는 욥에 대해 증거하는 욥기에는 이 말이 7번 나오며, ‘순전한, 온전한’이라는 뜻으로 쓰였다(1:1, 8; 2:3; 8:20; 9:20, 21, 22). 야곱은 순전한, 순진한, 온화한 사람이었다고 보인다.

[29-34절]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에돔’은 ‘붉다’는 말에서 나왔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며 평소에 장자의 명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고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다. ‘팥죽’이라는 말에서 ‘팥’이라는 원어(아다솨)는 ‘렌즈콩’(편두 혹은 불콩)이라는 뜻이다. 본문에 팥죽은 일종의 붉은 색의 콩죽이다.

이삭 가정의 장자 명분은 단순히 땅 위에서 부모의 유산을 배갑절 받는 것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장자가 부모의 유산을 배갑절 받는 것(신 21:17)은 아마 옛날부터의 관습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 가정의 장자 명분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계대(繼代)될 하나님의 언약의 복과 관계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22:18). 이 언약의 계승자, 이 언약의 복을 누릴 장자가 누구인가?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의 복을 중시하고 사모하였다고 보인다. 그것은 그의 경건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에서는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의 복을 무시하고 경홀히 여겼다.

창세기 25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기도 응답을 체험하자. 이삭은 결혼한 지 20년이 되도록 자녀가 없었다. 그것은 확실히 그의 신앙 훈련의 과정이었다. 이삭은 자녀가 없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응답하심을 사모하였고 마침내 응답을 얻었다. 그것은 낙망치 않고 하나님을 사모하며 기도한 긴 세월 후이었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자는 오래 참고 기다리는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인격의 훈련을 받는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며 성도의 특권이다(시 50:15; 마 7:7-8). 기도 응답의 체험은 곧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한층 더 성숙시킨다. 고난은 성도에게 걱정거리가 아니고 기도거리일 뿐이다. 우리는 기도 응답을 체험할 때까지 낙심치 말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며 복의 계대를 사모하자.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였다. 그는 단순히 장자의 복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약속된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였다고 보인다. 11절,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이삭에게 전해졌고, 이삭에게 주신 복은 아마 장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에서는 그 장자의 명분 곧 장자권을 가볍게 여겼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지 않았고 복의 계대를 사모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복이 에서 대신 야곱을 통해 이어질 것을 아마 믿었을 것이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합법적으로 장자권을 샀다. 에서는 맹세하며 그것을 야곱에게 팔았다. 과연 야곱은 하나님께로부터 그 복을 받을 것이다.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

하나님께서 신약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과 영생과 천국 기업을 이어받는 복을 주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얻은 복이다.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이 영생과 천국의 복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이 귀한 복을 이 세상에 허무한 돈이나 육신의 쾌락이나 며예와 바꾸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이 복이 계승되기를 위해 사모하며 기도하며 힘써야 한다.

26장: 이삭이 그랄에 우거함

[1-2절]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었는데, 이삭 때에 또 흉년이 들었다. 땅의 흉년은 주로 하나님의 징벌로 온다. 그것은 사람들의 도덕성을 유지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사람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 짓기를 두려워하고 양심의 각성을 가진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땅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다(사 45:7).

하나님께서는 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듯이(창 12:7; 15:1; 17: 1; 18:1) 이삭에게도 나타나셨다. 그는 아마 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셨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이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이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이삭이 가나안 땅에 머무는 것이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기로 약속하신 땅이다. 창세기 12:7,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3:14-15; 17:8).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땅에 머물러야 하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아야 했다.

[3-5절]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이 땅에 유하라. 그러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리라. 이는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며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며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임이니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이 땅에 유하라”고 다시 반복해 말씀하신 후 “그러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 항상 복되다. 후에,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었었다(창 39:2-3, 23).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 다시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가 그 부친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번성케 되어 이 모든 가나안 땅을 그와 그 자손들이 얻으며 그 자손으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복을 약속하셨던 것은 그가 그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기 때문이었다. 불순종 곧 죄는 징벌과 재앙의 원인이지만, 순종은 하나님의 복을 얻는 길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는 평안과 형통을 얻는다.

[6-8절]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이삭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에 거하였다. 그랄은 가나안 땅의 남서쪽의 해안 지역이다. 이삭은 믿음이 있는 자요 순종하는 자이었다.

이삭은 그곳에 거할 때에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해 묻자 그가 나의 누이라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그의 아내 리브가가 보기에 아름다우므로 그곳 사람들이 리브가로 인해 그를 죽일까봐 그의 아내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삭은 부친 아브라함처럼 인간적으로 연약하였다.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공통적 감정인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사람이 이런 연약함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삭이 그랄 땅에 오래 거하였는데, 어느 날 그가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보았다. ‘껴안다’는 원어(메차케크)는 ‘놀다, 장난치다, 껴안다’는 뜻을 가진다. 이삭은 그 아내 리브가를 간격 없이 친하게 대하며 사랑하였다. 그의 친근한 사랑은 바깥에서도 드러날 정도이었다. 부부는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 부부는 서로를 좋아하고 서로를 위하고 사랑해야 한다.

[9-11절]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아비멜렉은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고 말했다. 이방 세계에도 부모 공경이나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의 금지 등 약간의 도덕성이 있다. 그것은 양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이 사회 질서를 유지시킨다. 불완전하지만, 세속 정부의 역할은 바로 그런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이삭을 지켜주셨고 모든 일이 잘 해결되게 해주셨다.

[12-15절]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물질적 복도 하나님의 복이다. 물론 하나님의 복은 물질적 복 이상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구원의 복, 즉 죄사함과 영생과 천국의 복이지만, 물질적 복도 그의 복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양과 소가 떼를 이루었고 종들도 심히 많았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시기했다. 그들은 그의 부친 아브라함 때에 그 종들이 판 모든 우물들을 막고 흙으로 메웠다. 옛 시대에 우물은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데 그것을 방해하였던 것이다.

사람 속에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마음이 있다. 이것이 부패된 인간 본성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때때로 신자들 속에도 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어떤 이들이 투기와 분쟁의 마음으로 전도한다고 증거하였다(빌 1:15). 또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하였다(빌 2:2-3).

[16-22절]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 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옛 시대에 우물 하나를 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이웃 사람들이 다툼을 걸어올 때 그것을 피하였고 다시 다른 우물을 파는 일을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삭의 온유함과 인내심을 본다. 참된 경건은 선하고 온유한 성품을 동반한다. 성도는 할 수 있는 대로 남과 다투지 않아야 한다.

[23-25절]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하나님께서는 브엘세바에서 밤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전과 같이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삭은 거기에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이런 행위는 이삭의 경건함을 증거한다. 그는 그의 부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단을 쌓는 자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며 기도하는 자이었다.

[26-29절]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와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로 계약을 맺자”고 제안하였고 또 그에게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고 증거하였다. 이것은 이방인 아비멜렉이 이삭에 대해 증거한 놀라운 증거이었다. 하나님의 사람 이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에게도 선한 증거를 받은 자이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30-33절]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창 35:20; 47:26) 브엘세바더라.

이삭은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고 그들은 먹고 마시며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평안히 돌아갔다.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은 이삭에게 와서 자기들이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다고 말했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이다.

[34-35절] 에서가 40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모라스 루아크)[영(심령)의 고통]이 되었더라.

에서의 아내들은 이삭과 리브가의 심령에 근심이 되었다. 그 자부들에게는 경건과 도덕성이 없었을 것이다.

창세기 2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흉년 때에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참 교회에 속해야 한다. 이 세상은 죄로 인해 멸망할 세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성도에게도 때때로 어려운 일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다면,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다고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된 교회 안에, 성경적 믿음과 바른 삶 안에 거해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회복을 기도하며 참고 기다려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복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위험한 환경에서도 그의 아내를 지켜주셨고 물질적 복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천국과 영생의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내세의 복뿐 아니라, 현세의 복도 포함한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마 6:33, 전통본문).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은 믿음과 계명 순종으로 사는 것을 말하며, ‘이 모든 것’이란 의식주의 필요를 말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 사는 데 필요한 것들도 주신다. 사도 바울은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했다(딤전 4:8). 우리가 성경을 읽고 배우고 기도하기를 힘쓰면 내세의 구원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건강과 물질적 여유와 평안의 복도 얻는다.

셋째로,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온유해야 한다. 이삭은 그랄 사람들이 자기의 우물들을 메우며 빼앗을 때 온유함으로 양보하며 참았다. 온유와 양보는 성도들의 중요한 덕이다. 로마서 12:17-18,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빌립보서 4:5, “너희 관용[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야고보서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넷째로,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한다. 이삭은 이방인인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도다,” “너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니라”는 선한 증거의 말을 들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살면서 주위 사람들에게서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장로가 될 자격자는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했다(딤전 3:7). 사도 베드로는 교훈하기를,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고 했다(벧전 3:1-2). 믿지 않는 남편을 둔 믿는 아내는 그 남편에게 선한 행위를 보임으로써 그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교우들과 이웃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는 선한 증거를 듣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27장: 야곱이 축복을 가로챔

[1-4절]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이삭은 죽기 전에 맏아들 에서에게 마지막 축복을 하기를 원했다.

[5-10절] 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리브가가 그 아들 야곱에게 일러 가로되 네 부친이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염소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새끼 둘(쉐네)을](원문, KJV, NASB, NIV)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네가 그것을 가져 네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리브가는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통해 하나님의 복 받기를 원했다.

[11-17절]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그가 가서 취하여 어미에게로 가져왔더니 그 어미가 그 아비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리브가가 집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 그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매.

리브가는 별미를 만들었고 야곱에게 염소가죽으로 손과 목에 꾸민 후 그 별미와 떡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들어가게 하였다.

[18-24절]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른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야곱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이삭이 그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야곱은 아버지 앞에서 네 번이나 반복하여 거짓말을 하였다. 첫째, “네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둘째, 그는 가져간 고기를 사냥한 고기라고 말했다. 셋째,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는 말에 그는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대답했다. 넷째,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는 질문에 그는 “그러하니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거짓말을 반복했다. 그것은 확실히 악한 일이다.

[25-29절] 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삭의 축복은 세 가지 내용이었다. 첫째, 물질의 복의 기원이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둘째, 권세의 복의 기원이다. 그것은 사회적 안정을 포함할 것이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리라.” 셋째, 명예의 복의 기원이다.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주셨던 내용이었다. 창세기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30-33절]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비에게로 가지고 가서 가로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먼저 왔던 자가 에서가 아니었음을 알았을 때 이삭은 심히 크게 떨며 “내가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했다. 이삭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축복의 효력을 믿었다.

[34-38절]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심히 크고 쓰라린 통곡을 하였으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에서는 전에 장자의 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했었다. 그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동생 야곱에게 팔았을 때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기록하였다(창 25:34).

[39-40절]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떨어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떨어질]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이삭은 에서에 대해 몇 가지 예언을 했다. 첫째, 그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떨어지고 하늘 이슬에서도 떨어질 것이다. 둘째, 그는 칼을 믿고 생활할 것이다. 셋째, 그는 그 아우를 섬길 것이다. 넷째, 그는 안정이 없을 것이며 그때 그 아우의 멍에를 그의 목에서 떨쳐버릴 것이다. ‘네가 매임을 벗는다’라는 원어(타리드)는 ‘네가 안정이 없다’(BDB)는 뜻이라고 본다(NASB, NIV).

[41절]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에서는 실상 장자 권한을 주장할 입장이 못 됨에도 불구하고 욕심 때문에 그것을 사모했고 그것을 얻지 못하자 동생을 미워하고 죽일 마음까지 품었다. 야곱의 속임의 사건은 이와 같이 형제 사이의 극단적 불화로까지 진전되었다. 거짓말의 파장과 결과는 컸다.

[42-46절]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하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이런 상황을 말하고 하란의 외삼촌 집으로 피신하여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고 말한다. ‘그 몇 날’이 20년이 될 줄은 리브가도, 야곱도 몰랐을 것이다.

[46절]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리브가는 이삭에게 야곱이 헷 사람의 딸을 취하지 않도록 하자고 제안하며 그를 하란으로 보내도록 머리를 썼다.

창세기 27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축복의 귀중함을 알자. 이삭은 죽기 전에 맏아들 에서에게 마지막 축복을 하기를 원했다. 또 그는 비록 야곱을 에서인 줄 알고 축복했지만 야곱이 그 복을 받을 것을 알았다. 33절, “내가 그를 위해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축복은 귀하다. 야곱은 어릴 때부터 장자권과 하나님의 복을 사모했다. 리브가와 야곱에게는 하나님의 복을 사모함이 있었다.

신앙의 열조들은 때때로 예언적 축복을 했다. 노아는 그 아들들 셈과 함과 야벳에 대해 예언적 축복 혹은 저주를 했었고(창 9:25-27) 그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후에, 야곱도 죽기 전 요셉을 위해,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위해 축복했고(창 48:15-16) 또 그의 열두 아들들에 대해 예언적 축복을 했다(창 49장).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위해 예언적 축복을 했다(신 33장).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사모한다.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복을 사모해야 한다. 믿는 부모들은 자녀들을 성경의 바른 교훈으로 교훈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믿는 자녀들은 믿는 부모의 축복을 사모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에서는 부모의 마지막 축복을 받지 못했을 때 방성대곡하였다. 그는 전에 장자의 복을 무시했었다. 야곱은 비록 거짓말을 했지만 하나님의 복의 귀중함을 알고 그 복을 사모했으나 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야곱에게 맹세하며 팔았었다. 그는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었다(창 25:34). 그는 실상 아버지로부터 장자로서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라고 말하였고 소리를 높여 울었으나(창 25:34), 아버지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

히브리서 12:15-17은 이렇게 교훈하였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 리브가와 야곱은 거짓말하면서 이삭의 마지막 축복을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거짓말은 명백히 죄악이다. 그들의 거짓말은 형제간의 심각한 불화를 일으켰다. 또 야곱은 속임의 대가를 20년 동안 매우 고통스럽게 치루었다고 보인다(창 31:40; 47:9). 거짓말은 지옥에 들어갈 죄악이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악이다(계 21:8; 22:15). 참된 성도의 교제는 진실 위에서만 세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복을 사모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고 죽이려 하지 말아야 한다. 에서는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았으므로 장자의 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는 욕심을 버려야 했다. 그가 동생 야곱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결심한 것은 더 큰 악이었다. 요한일서 3:14-15,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28장: 야곱의 꿈과 서원

[1-4절]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38)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노아는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리라”고 예언했었다(창 9:25-26). 아브라함은 노아의 예언에 근거하여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려 할 때 그의 거하는 땅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가 아니고 그의 고향 그의 족속에게서 구하게 하였었다(창 24:3-4). 이제 이삭도 그 아들 야곱에게 그렇게 말한다.

이삭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있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영원자존자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께서만 참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만 인생에게 복을 주실 수 있고 그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

이삭은 또 야곱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기원하였다. 출산과 번성은 분명히 하나님의 복이다. 인간 사회가 잘 유지되고 발전되려면 좋은 인재들이 많이 출산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려면 경건하고 충성된 인물들이 많이 출산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은 출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출산은 확실히 복된 일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복은 메시아 약속을 포함하였다. 그것은 14절에서 증거된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민이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영육의 복과 현세와 내세의 복을 포함한다.

[5절]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었더니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미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야곱이 아버지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몇 가지의 단서로 그의 나이를 추측할 수 있다. 후에 야곱은 애굽에 내려가 바로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나이가 130세라고 말했고(창 47:9), 그때는 애굽에서 7년간의 풍년이 지나고 2년 동안 흉년이 든 때이었으므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지 9년 후쯤, 즉 요셉의 나이 39세쯤이었다(창 41:46-54; 45:6). 야곱이 하란에 14년 거주했을 때 요셉을 낳았으므로(창 30:25), 야곱이 130세된 때는 그가 하란에 내려간 때로부터 14년과 39년, 즉 53년이 지난 때이었다. 그러면 야곱이 하란에 내려갔을 때의 나이는, 130세에서 53년을 뺀 77세쯤이었다. 야곱은 나이에 비해 매우 건강했던 것 같다.

[6-9절]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하였고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좇아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

모세는 그의 서술방식대로(창 11:32; 25:17) 먼저 에서에 대해 기록한다. 에서는, 가나안 땅 헷 족속의 딸들인 유딧과 바스맛, 두 여자를 이미 자기 아내로 삼았었고, 그들은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큰 고통이 되었었다(창 26:34-35). 그는 또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세 번째 아내로 취했다. 에서는 일부일처의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과 부모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의 육신적 생각과 욕심을 따라 세 명의 아내를 취했다. 그것은 경건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은 아니었다.

[10-11절]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야곱은 가나안 땅 남쪽 끝부분에 위치한 브엘세바에서 떠나 대략 750킬로미터39) 북쪽에 있는 하란으로 향하여 갔다. 그가 80킬로미터쯤 갔을 때 해가 저물었고 들판에서 밤을 지내려고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잤다. 사랑하는 부모와 편안한 집을 두고 먼 곳에 있는 친척집을 향해 막연히 떠나온 야곱은, 비록 하나님을 경외했고 그의 복을 사모했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지 않으시고 그를 돌보지 않으시는 것 같아, 아마 불안하고 쓸쓸하고 두렵기까지 했을 것이다.

[12-15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옛 시대에 사람들에게 종종 꿈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야곱이 꾼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적 꿈이었다. 야곱은 꿈에 한 사닥다리가 땅위에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그 위에 서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몇 가지 내용을 말씀해주셨다. 첫째로,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둘째로,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하리라. 셋째로,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반복하여 주셨던 약속의 내용이었다(창세기 12:3, 7; 22:18; 26:3-4). 특히, 세 번째 내용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후에,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다고 증거하였다(갈 3:13-14, 28-29; 롬 4:16).

[16-19절]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기름을 붓는 것은 거룩하게 구별하는 뜻이 있다(레 8:10-11). 그는 그곳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지었다.

[20-22절]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가는 길에서 그를 지켜주시고 그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그로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기를 구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 세 가지를 서원하였다. 서원은 하나님께 맹세하며 약속하는 것이다. 첫째로, 그러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이다. 둘째로,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되리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창세기 28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구원의 복을 얻게 하셨다. 이삭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주시기를 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28:14). 이것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이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갈 3:13-14).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영생의 복이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는 이 복을 감사하고 찬송하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언제나 함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집을 떠나 쓸쓸히 먼 길을 가던 야곱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창 28:15). 야곱은 잠을 깨어 일어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말했다(창 28:16-17).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함께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후에 요셉과 함께하셨고(창 39:2-3, 21, 23), 여호수아와도 함께하셨다(수 1:5, 9).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했다(시 23:4).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마 28:20). 또 그는 그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고(요 14:16) 성령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우리 속에 계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범죄치 말아야 한다(수 1:7-8). 우리는 항상 믿음과 순종으로 주 안에 거해야 한다(요 15장).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섬겨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의 당연한 응답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구하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고 그곳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곳을 삼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하였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을 바로 섬길 것이다.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매우 힘썼다(행 2:42). 그들은 모일 때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배웠다(고전 14:26). 이런 경건한 모임은 중단되거나 폐지되지 말고 주의 재림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히 10:25).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의 첫 자리에 모시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와 찬송과 기도와 말씀의 교훈과 헌금으로 하나님을 바로 섬기자.

특히,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서원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십일조는 후에 하나님께서 율법에 명하신 바이다(레 27:30). 다윗은 헌금을 드릴 때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며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말했다(대상 29:11, 14).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라고 말했고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했고 그러면 물질의 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했다(말 3:8-12). 주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고(마 6:24),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라고 했다(딤전 6:9-10). 십일조는 참 경건의 표가 된다.


29장: 야곱의 하란 생활--결혼

[1-6절]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웠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물을 양떼에게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구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양에게 물을 먹이고는 여전히 우물 아구 그 자리에 돌을 덮더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형제여, 어디로서뇨? 그들이 가로되 하란에서로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가로되 아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가로되 평안하니라. 그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야곱은 고향을 떠나 외롭고 쓸쓸하게 먼 곳 동방 사람들의 땅 곧 하란 가까이에 왔다. 그는 한 우물곁에서 목자들이 세 무리의 양떼를 누이고 물 먹일 때를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하란에서 온 자들이었다. 야곱은 그들에게 나홀의 손자 라반의 안부를 물었다. 그들은 라반이 평안하다고 대답하며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떼를 몰고 오고 있다고 말했다. 야곱은 그의 아내가 될 라헬을 하란 부근의 들판 우물곁에서 이렇게 처음 만났다. 야곱의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신비롭다.

[7-14절] 야곱이 가로되 해가 아직 높은즉 짐승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뜯기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중에 라헬이 그 아비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침이었더라. 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내어 울며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비의 생질(아키)[친척]이요 리브가의 아들됨을 고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비에게 고하매 라반이 그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고하매 라반이 가로되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하더니.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중에 라헬이 양떼를 몰며 왔다. 야곱은 자기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양떼를 보자 나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야곱은 라헬에게 입맞추며 소리내어 울며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친척이며 리브가의 아들임을 말했다. 쓸쓸했던 긴 여행으로 그의 가슴은 눈물로 가득하였다. 라헬은 달려가서 라반에게 고했고 라반은 조카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였다. 야곱은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고하였고 한 달을 그와 함께 거하였다.

[15-20절]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의 생질이나 어찌 공으로 내 일만 하겠느냐? 무엇이 네 보수(報酬)겠느냐? 내게 고하라. 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안력(眼力)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7년을 봉사하리이다. 라반이 가로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라반이 야곱에게 무엇이 네 보수겠느냐고 물었을 때 야곱은 그의 딸 라헬을 사랑하므로 그를 아내로 주시기를 요청하며 그러면 외삼촌에게 7년을 봉사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라반은 그 일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야곱은 아내를 얻기 위해 7년 동안 수고로운 봉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야곱은 라헬을 위해 7년 동안 라반의 집에서 일했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 사랑은 수고로운 긴 7년간을 수일같이 여기게 만들었다. “7년을 수일같이!”--이것은 야곱의 사랑의 힘을 잘 증거한다. 사랑의 힘은 참으로 크다.

야곱의 결혼은 이렇게 준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섭리하신다. 그러나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롬 11:36). 야곱의 결혼은 라헬에 대한 참된 사랑으로 준비되고 있었다. 결혼은 사랑의 관계이다. 결혼의 중요한 조건은 사랑이다. 그 외의 다른 조건들은 부수적일 뿐이다. 다른 좋은 것들이 있어도 사랑이 없는 결혼은 삭막할 것이며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21-25절]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반이 그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그 여종 실바를 그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7년의 기한이 찼다. 야곱은 라반에게 아내를 주어 그에게 들어가게 하시기를 요청했다. 라반은 사람들을 다 모아 잔치를 열었고 저녁에 그 딸 레아를 그에게 데려다주었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이었다. 라반은 야곱을 속였다. 전에 아버지를 속였던 야곱은 이제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행한 대로 갚으셨다. 야곱은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기억했을 것이다. 사람은 행한 대로 받는다.

[26-30절] 라반이 가로되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7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7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7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라반이 또 그 여종 빌하를 그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7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이를 위해 7일을 채우라”는 원어는 “이 주간을 채우라”는 말로 레아를 위한 혼인 잔치 주간을 채우라는 뜻이라고 보인다(KJV, NASB, NIV). 7일 후, 라반은 그의 딸 라헬도 그의 아내로 주었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원치 않게 두 아내, 그것도 형제인 두 아내와, 그들의 두 여종을 얻게 되었고 또 7년간의 수고로운 봉사를 더 하였다. 야곱은 그의 두 아내로 인해 심적 고통이 컸을 것이다. 일찍이 아브라함은 여종 하갈로 인해 그런 고통을 당했었다(창 21:11). 또 야곱은 결혼을 위해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수고로이 보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혹독한 고난의 훈련 과정이었다. 인간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는 그의 종들을 고난을 통해 단련시키신 후 쓰신다. 후에, 요셉도 그러하였고 모세도 그러하였으며 다윗도 그러하였다.

[31-35절]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미움 받음,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無子)하였더라.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미움 받음,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섭리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레아가 미움 받음을 보셨고 그를 돌아보셨다. ‘총이 없다’는 원어(세누아)는 ‘미움을 받다’는 뜻이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 하나를 더 사랑하면 다른 하나는 미움을 받는 것이 된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이치이다(마 6:24).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했고 레아가 아무 잘못이 없이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레아를 동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태를 여심으로 그를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레아를 통해 야곱에게 자녀들을 주셨다. 야곱의 자녀들은 먼저 레아를 통해 출산되었다. 출산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레아의 태를 여셨다고 말한다(31절).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태를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신다(창 20:17-18; 30:2, 22; 삼상 1:19).

레아는 남편 사랑을 받지 못했던 과정을 통해 경건의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사람은 고난 중에 인격 단련을 받는다. 레아는 첫아들을 낳고 이름을 르우벤이라 지으며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아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라고 말했고, 둘째 아들을 낳고 “여호와께서 내가 미움받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라고 말하며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지었다. 그는 셋째 아들을 낳고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고 말하며 그 이름을 레위라 지었고, 넷째 아들을 낳고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고 말하며 그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다. 그가 지은 아들들의 이름을 보면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모하며 의지했는지 엿볼 수 있다.

창세기 29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랑은 수고로운 세월을 잘 견디게 한다. 야곱은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 또 그는 그 7년을 잘 참았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미혼자의 순결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옛날부터 경건한 사람들은 미혼자의 순결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참된 사랑은 상대방의 순결성을 귀히 여기며 참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7년을 잘 참고 수고로운 시간들을 잘 견디었다. 남녀간의 사랑도 이러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속죄제물로 내어주셨다(요 3:16; 롬 5:8). 우리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우리는 그의 모든 계명을 즐거이 지킬 수 있고, 주 안에서 형제된 자들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일들에 헌신하며 충성할 수 있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둘째로, 아버지를 속였던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했고 14년 동안, 후에 6년을 더하면 20년 동안 혹독하게 수고로운 삶을 살았다. 그것은 그 자신의 부족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나 훈련의 과정이었다고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특히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훈련이 있다. 갈라디아서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것은 하나님께 대해서든지 사람에게 대해서든지 동일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고난 중에서도 가정을 세우는 복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 가운데 야곱에게 두 명의 아내들과 여종들을 얻게 하셨고 그들에게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될 자들이 태어나게 하셨다. 결혼이나 자녀 출산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다. 특히 자녀 출산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31절은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식이 없었다”고 말한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고난 중에 믿음의 단련을 받았다고 보인다. 그는 자녀들을 낳을 때마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다,” “여호와께서 들으셨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는 믿음 있는 이름을 지었다. 육신의 가정 뿐만 아니라, 교회의 건립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구원과 양육과 참 교회의 건립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고린도전서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30장: 야곱의 하란 생활--재산

[1-2절]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자식]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成胎)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전장에서 우리는 레아가 네 명의 아들들, 즉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를 낳은 것을 읽었다. 그러나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야곱에게 자식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언니를 투기하여 야곱에게 말했다.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그러나 불임(不姙)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출산은 인간의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복 주심으로 된다.

[3-5절] 라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잉태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라헬은 남편에게 자신의 여종 빌하를 첩으로 주었다. 야곱은 이와 같이 자의가 아니고 타의로 첩을 얻게 되었다. 레아와 라헬에 이어 빌하까지 그의 아내가 되었고 그에게 아들을 낳았다.

[6-8절] 라헬이 가로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잉태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가로되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하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억울함을 푼다’고 번역된 원어(딘)는 ‘사정을 들어준다’는 뜻이다(BDB). 라헬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정을 들어주셨고 그의 소리를 들어주셨다고 말했다. 그는 자녀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고 응답을 얻었다. 빌하가 또 둘째 아들을 낳자, 라헬은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고 말했다. 라헬이 지은 아들들의 이름에서 우리는 그에게 언니 레아에 대한 경쟁심과 질투심이 많았음을 볼 수 있다.

[9-13절] 레아가 자기의 생산이 멈춤을 보고 그 시녀 실바를 취하여 야곱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였더니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으매 레아가 가로되 복되도다40) 하고 그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레아가 가로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레아도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자기의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첩으로 주었다. 레아도 동생 라헬처럼 경쟁심이 없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자기의 뜻과 상관없이 레아의 여종 실바를 네 번째 아내로 얻었다. 실바는 야곱에게 두 아들을 낳아주었다.

[14-16절] 맥추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두다임) (mandrakes)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합환채는 최음적(催淫的) 성분이 있다고 알려진 풀이었다(NBD).

[17-21절]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으므로 그가 잉태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가로되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가로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하고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레아를 들으셨다는 표현은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사모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믿음의 훈련을 받았음을 보인다.

[22-24절]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생각하셨다. ‘생각한다’는 원어(자카르)는 ‘기억한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정하신 때에 그에게 은혜를 베푸심을 나타낸다. 창세기 8:1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다”는 말씀에서 ‘권념하다’는 말이 이 단어이며, 또 사무엘상 1:19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하나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였을 때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라고 한 구절에서 ‘생각한다’는 말도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생각하셨고 그를 들으셨고 그의 태를 여셨다. 자녀 출산은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자녀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얻을 수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 라헬을 들으셨다는 표현은 라헬이 자녀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기도했음을 나타낸다. 사람은 부족한 것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이렇게 훈련시키셨다. 라헬은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말하며 여호와께서 다시 그에게 다른 아들을 더하시기를 원한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다.

이와 같이, 야곱은 아내를 얻기 위해 7년간 봉사했고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은 후 또 7년간 봉사하는 동안에 자녀를 11명이나 얻게 되었다. 그것은 레아와 라헬의 경쟁 속에서, 또 그들의 두 여종들까지 아내로 얻음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상하게 이루어졌다. 야곱은 7년이라는 기간에 11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다산(多産)의 복을 주셨다.

[25-30절]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또 가로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자신의 가족들이 외삼촌 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그때 그는 아무 재산도 없는 상태이었다. 그때 라반은 “여호와께서 너로 인해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고 말했다. ‘내가 깨달았노니’라는 원어(니카쉬티)는 ‘내가 점술로 알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라반의 미신적 행위를 보이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야곱 때문에, 그를 보시고 라반에게 복을 주셨다.

[31-33절] 라반이 가로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가로되 외삼촌께서 아무것도 내게 주실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내리니 이 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 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야곱은 라반에게 자신의 품삯으로 양떼나 염소떼 중에서 아롱진 것이나 점 있는 것이나 검은 것을 주시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면 후에 외삼촌이 양떼나 염소떼를 살피실 때 재산의 구별이 분명할 것이며 다른 것들은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4-36절] 라반이 가로되 내가 네 말대로 하리라 하고 그 날에 그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양 중의 검은 자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붙이고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떼를 치니라.

라반은 야곱의 요청을 허락하였다. 그는 이전의 품삯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는 물질적 이익에 관해서는 너그럽지 못하였다.

[37-39절] 야곱이 버드나무(리브네)[미루나무(poplar), 때죽나무 (storax-tree)]와 살구나무(루즈)[편도나무](almond tree)와 신풍나무(아르몬)[플라타너스](plane tree)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야곱이 미루나무, 편도나무, 플라타너스의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를 향하게 하였고 양떼들이 물을 먹으러 올 때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았다는 말씀은 신기한 일이지만, 야곱의 간절한 소원과 하나님의 응답과 복 주심을 나타낼 것이다.

[40-43절]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41절의 ‘개천’이라는 원어는 38절의 ‘물구유’라는 말과 같다(레하팀)(troughs) . 야곱이 많은 재산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것도, 신기하게 이루어졌다.

창세기 30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잉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하란 생활, 특히 그의 결혼과 자녀들의 출산을 섭리하셨다. 사람의 결혼과 자녀 출산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 달려 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생각하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그의 태를 여셨다. 22절,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라헬은 하나님께 자녀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믿음의 성장을 가졌을 것이다. 6절, “라헬이 가로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22절,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레아는 믿음이 더 있었다고 보인다. 17절,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으므로.” 18절,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20절,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셋째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복을 얻는다. 27절,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30절,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소원을 따라 그의 양들과 염소들이 많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사함과 새 생명을 주시고 내세의 복, 즉 천국과 영생을 약속하시고 보장하실 뿐 아니라, 광야 같은 이 세상의 삶도 섭리하신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의식주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마 6:33). 경건한 삶은 현세와 내세에 약속이 있는 복된 삶이다(딤전 4:8).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경건하게 성경 읽고 기도하며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