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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Genesis) 10장-19장[10장 노아 아들들-8.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 김효성 목사

영국신사77 2020. 4. 14. 13:50

제목 차례

1장: 천지 창조

2장: 사람 창조

3장: 타락

4장: 가인과 아벨

5장: 아담의 자손들

6장: 방주를 만듦

7장: 홍수 심판

8장: 방주에서 나옴

9장: 홍수 직후의 일들

10장: 노아의 자손들

11장: 연합과 분리

12장: 아브람을 부르심

13장: 롯과 헤어짐

14장: 롯을 구출함

15장: 믿음의 의

16장: 하갈과 이스마엘

17장: 할례(割禮)

18장: 하나님의 나타나심

19장: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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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노아의 자손들

[1-4절]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본장은 세계 민족들의 기원에 대한 개요이다. 노아의 세 아들들 중 야벳의 아들은 고멜, 마곡, 마대, 야완, 두발, 메섹, 디라스이었다. 고멜은 킴메리아인의 조상이며 지금의 터어키 북부에 거주했고 후에는 지금의 불가리아로 이주하였다. 마곡은 스구디아인의 조상이며 흑해 동쪽에 거주했고, 마대는 메데인의 조상이며 카스피 해 남부 즉 지금의 이란에 거주했다. 야완은 이오니아인의 조상이며 발칸 반도 남부 즉 지금의 그리스에 거주했고, 두발은 이베르인의 조상이며 지금의 터어키 동부에 거주하였다. 메섹은 갑바도기아인의 조상이며 흑해 남부에 거주했고 러시아인이 여기서 나왔고, 디라스는 아마 드라키아인의 조상이며 소아시아 서북부에 거주하였다.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 리밧, 도갈마이었는데, 아스그나스는 소아시아 북부, 본도와 비두니아 지역에 거주했으며 그곳의 호수와 항구는 아스카니어스라고 불리었고, 리밧도 같은 지역에 거주했고, 도갈마는 소아시아 중앙의 브루기아과 갈라디아 지역이나 아르메니아 지역에 거주하였던 것 같다.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 달시스, 깃딤, 도다님이었는데, 엘리사는 그리스 지역에 거주했던 것 같고, 달시스[다시스]는 이태리 서쪽이나 소아시아 동남부에 거주했던 것 같고, 깃딤은 구브로 섬(키프로스 섬)에, 그리고 도다님은 그리스 동북부에 거주했던 것 같다.

[5절]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라숀)[언어]21)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5절까지를 요약하면, 야벳 자손들은 처음에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어키 북부에 거주했고, 후에 북쪽과 서쪽으로 즉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바닷가의 땅’이라는 말은 지중해 연안과 그 섬들을 가리킨다.

[6-7절]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함의 아들들은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이었는데, 구스는 이디오피아와, 아라비아 서부에 거주하였고, 미스라임은 지금의 이집트에 거주했고, 붓은 아프리카 북쪽 즉 지금의 리비아에 거주했던 것 같다. 거기에는 붓이라는 강이 있었다. 가나안은 팔레스틴 곧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다.

구스의 아들들은 스바, 하윌라, 삽다, 라아마, 삽드가이었는데, 스바 [세바]는 이디오피아의 홍해 가까이에 거주하였고, 하윌라는 이디오피아 동북부에 거주했던 것 같고, 삽다는 아라비아 남부에, 라아마는 아라비아 남부와 서부에, 삽드가는 아라비아 남부에 거주하였던 것 같고, 라아마의 아들 스바[쉐바]는 아라비아 남부에, 드단은 아라비아 서부에 거주하였던 것 같다.

[8-9절]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구스는 또 니므롯을 나았는데 그는 세상의 처음 영걸이었다. ‘영걸’이라는 원어(깁보르)는 ‘용사’라는 뜻이다. 또 ‘특이한 사냥꾼’이라는 원어(깁보르 차이드)는 ‘사냥하는 용사’라는 뜻이다.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은 그의 탁월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하나님과 겨루듯이 자기를 높이는 그의 교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니므롯’이라는 원어는 ‘우리는 반역하리라’는 뜻이다. 니므롯은 단지 짐승 사냥꾼이 아니고 그 이름처럼 사람들과 나라들을 사냥하는 정복자이었고 고대에 나타난 강력한 권력자이었던 것 같다.

[10-12절]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성이라)을 건축하였으며.

니므롯은 바벨, 에렉, 악갓, 갈레, 니느웨, 르호보딜, 갈라, 레센 등의 성을 건축하였다. 바벨은 지금의 이라크의 알 힐라 지역이며, 에렉은 바벨에서 동남쪽 200km 지역이며, 악갓은 지금의 이라크의 바그다드 지역이다. 또 레센은 큰 성이라고 증거되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뿌리가 되는 시날 땅의 여러 성들은 본래 셈족에 의해서가 아니고 함족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그의 나라[왕국]’(마믈라크토)라는 표현은 니므롯의 나라가 옛 바벨론 제국이라고 불릴 만했음을 보인다. 그 제국의 특징은 본문과 다음 장 창세기 11장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힘과 교만이었던 것 같다. 또 힘과 교만의 사회는 폭력과 악과 압제의 사회가 된다. 그것은 사랑과 겸손, 선과 배려와 희생과 구제 같은 덕을 가진 사회와는 다르다. 교만과 힘의 사회는 부패하여 결국 멸망하고 만다. 그들은 높은 탑을 쌓으며 단합을 추구하였지만, 언어의 혼잡으로 결국 그 꿈은 실패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13-14절]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

미스라임의 아들은 루딤, 아나밈, 르하빔, 납두힘, 바드루심, 가슬루힘, 갑도림이었는데, 그들은 주로 아프리카 북부에 거주하였고 아프리카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 중에 가슬루힘의 자손은 팔레스틴의 서남부에 거주하여 블레셋 사람이 되었다.

[15-20절]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이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이었더라.

가나안의 아들들은 열 한 개의 종족들을 이루었다. 앞장의 노아의 예언에서와 본장의 고대 민족들의 이름들에서, 가나안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은, 창세기가 모세의 글임을 증거한다. 본문은 가나안 지경이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이었음을 증거한다. 가나안에 있는 종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었다. 또 19절에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언급한 것은 본 기록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전의 상황을 나타낸다. 모세는 이런 성들을 입으로 전해오는 말로나 기록물들을 통해 또는 하나님의 직접 계시로 알았을 것이다. 또 그는 가나안 족속들과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이 우상숭배나 음행으로 심히 부패하여 마침내 멸망하게 될 것을 예견했을 것이다.

요약해보면, 함의 자손들은 아프리카의 북부와 북동부, 즉 오늘날 리비아, 이집트, 이디오피아 등에 거주했고 또 일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가나안 땅에도 거주했다. 그들은 주로 아프리카 대륙에 퍼져 살았고 아프리카인들이 되었다고 보인다.

[21-30절]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야벳의 동생(원문 액센트, KJV, NIV)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었다. 에벨 자손은 히브리인을 가리킨다고 본다. 창세기 14:13은 최초로 아브라함을 ‘히브리(이브리) 사람’이라고 불렀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원어는 ‘에벨(에베르 ר������������)의 자손’이라는 뜻일 것이다. 또 히브리어 에베르는 ‘건너편의 땅’이라는 뜻이므로 그 말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서 온 아브라함에게 적합했다(창 11:31; 12:5).

셈의 아들은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이었다. 엘람은 엘람인 즉 파사인의 조상이며 페르샤만 북서쪽, 지금의 이란 지역에 거주했다. 앗수르는 앗수르인의 조상이며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거주했고, 아르박삿은 아마 갈대아인의 조상이며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하류에 거주했던 것 같다. 룻은 리디아인의 조상이며 소아시아 서남부에 거주했고, 아람은 아람인의 조상이며 지금의 시리아 지역에 거주했다.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이었다. 우스는 에돔 북쪽에 거주했고, 훌은 아르메니아 지역에 거주했다.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고 그때 세상이 나뉘었다. ‘세상이 나뉘었다’는 말은 다음 장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의 언어들이 혼잡되어 그들이 각 종족과 각 언어대로 온 땅에 흩어진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것은 고대에 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벨렉의 아우 욕단은 아라비아 남부의 원주민들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열 세 명의 아들은 아라비아 중남부의 종족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보인다. 그들의 거주지는 오늘날 사우디 아라비아의 남부와 예멘 지역이다.

[31-32절]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世系)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요약해보면, 셈의 자손들은 팔레스틴 북쪽과 메소포타미아 동쪽, 그리고 팔레스틴 남쪽의 아라비아 지역에 거주하였다. 그들은 동쪽 아시아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동양 민족들은 셈족에 속할 것이다.

본장은 세계 민족들의 기원에 대한 개요이다. 노아의 세 아들들은 인류의 삼대 인종을 형성하였다. 즉 야벳의 자손은 유럽에 거주하는 백인종을, 함의 자손은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흑인종을, 셈의 자손은 아시아에 거주하는 황인종을 형성했다고 보인다. 노아의 예언대로, 야벳의 자손들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번창했고, 함의 자손들은 많은 고난을 당했고, 셈의 자손들은 종교적 복을 얻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셈의 자손으로 오셨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경은 인류 초기의 중요한 역사를 담은 책이다. 성경의 내용이 역사가 아니고 신화라면, 본장과 같은 부분들은 전혀 무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적 성격을 깨닫고 본장뿐 아니라, 모든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진지하게 받고 믿자.

둘째로, 우리는 함의 자손의 번창과 몰락을 보자. 함의 자손 니므롯은 고대에 강력한 통치자이었고 그의 왕국은 매우 광대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 이유는 교만과 폭력과 부도덕 때문이었다. 마지막 때에도 적그리스도와 독재자의 출현이 예상된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와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멸망할 것이다(살후 2:3-8). 우리는 이 멸망할 세상 나라에 소망을 두지 말자.

셋째로, 인류는 모두 아담의 자손이며 또한 노아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한 가족같이 생각하고 귀히 여기며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인류는 복을 받을 자들과 멸망할 자들로 나뉠 것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을 모르고 구주 예수님을 모르고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에 던지울 자들이 있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실천하다가 영생의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있다(요 3:36; 벧후 3:8-13; 계 21:1-8). 여러분은 그 둘 중 어느 쪽인가?

11장: 연합과 분리

[1절] 온 땅의 구음(口音)[언어]이 하나이요 언어[말]가 하나이었더라.

오늘날 세계에 3,000개 정도의 언어가 있고 그 중에 5천만명 이상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19개라고 한다.22) 그러나 본래 아담의 자손들과 노아의 자손들은 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2절]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과 그들에게서 난 자손들은 ‘동방으로’ 이동했고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에 정착하게 되었다. 시날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중하류의 평지로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평원, 즉 오늘날 이라크의 동부이다. 바벨은 이라크의 알 힐라이다.

[3-4절]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城)(이르)과 대(臺)(믹달)[탑]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들은 시날 평지에 거하며 벽돌을 잘 굽고 역청을 접착제로 사용하여 큰 성과 높은 탑을 만들려 했다. 사람의 지혜는 뛰어났다. 바벨탑 건립은 아마 니므롯이 주도하여 행하였을 것이다. 바벨 남쪽 유브라데스 강 서편 언덕에 흔적이 남아 있는 빌스 니무룻이라는 명칭의 일곱 층계로 된 탑이 이 탑의 유적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노아의 자손들이 성과 탑을 건립하고자 했던 동기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 그러나 사람이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받았지만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이다(시 115:16).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는 생각은 실상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겸손히 자신들과 하나님 간의 무한한 차이를 인정하기보다 하나님과 견주려 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을 나타낸다. 교만은 하나님 앞에 가장 근본적인 큰 죄악이다. 사람은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만 높이며 자랑해야 한다.

둘째로, 그들은 온 지면에 흩어지지 않으려 하였다. 연합을 추구한 것이다. 그것도 니므롯이 주도하였을 것이다. 불경건과 교만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연합은 폭군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 것이다. 그들의 시도는 전체주의적 사회를 지향하였을 것이다. 전체주의란 개인의 모든 활동이 국가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역사상 독재 국가들에서 볼 수 있었던 생각이다. 그런 연합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

일반적으로, 연합은 선하고 좋으며, 분열은 악하고 나쁘지만, 강제적 연합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무시하기 때문에 좋지 않다. 그런 연합 아래서는 개인의 사유재산권과 신앙의 자유가 부정된다. 무신론적 전체주의 사회는 무서운 괴물과 같다. 우리는 주의 재림 직전에 적그리스도적 세계 통합과 교회 통합으로 전체주의적 국가와 교회가 나타나리라고 예상한다(계 13:7, 12, 16-17).

참된 연합은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연합이란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고 진리와 의 안에서 이루어질 때만 좋은 것이다. 진리와 거짓, 의와 불의, 선과 악은 섞이기보다는 분리되어야 한다. 불경건과 교만으로 연합하기보다는 차라리 분리된 상태로 있는 것이 더 유익하다. 거기에는 최소한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자유로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참된 연합은 경건과 의와 진실, 겸손과 사랑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5-9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인본주의적 연합 추구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들의 일을 악하다고 판단하셨다. 그는 오늘날도 참된 진리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연합운동을 미워하신다. 그는 내려오셔서 그들의 하는 일을 보셨다. 그것은 비유적 표현이다. 또 그는 그들이 언어가 하나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음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심으로 그 일을 중단케 하셨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 사람이 아무리 큰 일을 계획해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면 헛되게 될 것이다.

[10-26절]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100세 곧 홍수 후 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5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셀라를 낳은 후에 403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셀라는 30세에 에벨을 낳았고 에벨을 낳은 후에 403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에벨은 34세에 벨렉을 낳았고 벨렉을 낳은 후에 43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벨렉은 30세에 르우를 낳았고 르우를 낳은 후에 209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르우는 32세에 스룩을 낳았고 스룩을 낳은 후에 207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스룩은 30세에 나홀을 낳았고 나홀을 낳은 후에 2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나홀은 29세에 데라를 낳았고 데라를 낳은 후에 119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세기 7:11에 홍수가 노아 600세 2월에 시작되었다고 말하므로 셈은 노아가 502세 때에 낳은 아들이라고 보인다. 본문은 셈의 자손에 대해 말한다. 성경 역사는 하나님께서 셈의 자손 중에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으로 흘러 내려간다.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홍수 후 셈의 자손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초산 연령이 낮아졌다. 창세기 5장의 아담의 자손의 기록과 달리, 본문에서는 초산 연령이 전부 35세 이하이며 대부분 30세 전후이다. 둘째로, 수명(壽命)이 점점 줄어들었다. 홍수 전에는 사람이 보통 900세 이상 살았으나, 홍수 후에는 현격히 줄어 데라의 아버지 나홀의 수명은 149세이었다. 노아 시대 대홍수 때 하늘의 대기층에 변화가 일어났고 태양 광선의 많은 유입으로 노화(老化)가 촉진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26절]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원문은 창세기 5:32와 같이 “데라가 70세가 된 후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는 뜻이다. 27절과 29절에 보면, 하란은 결혼하여 롯과 밀가와 이스가를 낳았고 그 중에 밀가는 삼촌인 나홀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면, 데라의 세 아들은 아브람, 하란, 나홀 순서일 것이며, 또한 하란과 나홀의 나이 차이도 컸을 것이다. 데라의 연대는 아담 후 1878-2083년경이며, 아브라함의 연대는 만일 데라가 그를 70세에 낳았다면 아담 후 1948-2123년경이다.

[27-30절]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와 그 아들들이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오늘날 이라크의 나시리야에서 서쪽으로 10여km 떨어진 텔 엘-무카야르로 추정된다. 갈대아 우르는 옛 시대에 문명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당시에 중산층의 집은 열 개 내지 스무 개의 방이 있는 이층집이었고, 학교에서 학생들은 읽기와 쓰기와 산수를 공부하였고 곱셈과 나눗셈, 심지어 제곱근과 세 제곱근도 공부하였다.23)

데라의 아들 하란은 그 아버지보다 먼저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다. 데라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불행한 일을 경험해야 했다. 또 그의 아들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을 바꿈)은 아내가 자녀를 잉태치 못하였다. 그것도 아버지 데라에게 큰 근심거리이었을 것이다.

[31-32절]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205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24)

데라와 그 일행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었다. 창세기 15:7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고 말씀하셨다. 느헤미야 9:7도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마 아브람에게 어떤 계시를 주셨고(행 7:2)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를 설득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데라는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어떤 이유인지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다. 그가 중도에 주저앉고 만 것은 그의 연약 때문이었을 것이다. 갈대아 우르나 하란은 우상숭배적 환경이었다(수 24:2; 창 31:19; 35:2-4).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잘못된 연합 활동을 반대해야 한다. 노아의 자손들이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은 것은 잘못된 연합 활동, 인본주의적 연합 활동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에서 나온 생각이며 활동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높이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을 높이는 인간의 교만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교만에서 나온 바벨탑 쌓는 일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내려오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그 일을 중단시키셨다.

인본주의에 입각한 현대 과학과 문명은 바벨탑 쌓는 일이다. 인류는 또 다시 인간 만세를 부르고 있다. 사람들은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같이 생각한다. 인간의 삶 속에 더 이상 하나님께서 계실 곳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런 삶에는 인간의 목적도, 죄 문제나 죽음 문제의 해결도 없다. 교만한 세상에는 허무함만이 가득하다.

성경의 예언대로, 말세를 당해 많은 교회들이 잘못된 연합을 추구하고 있다. 교회들은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고 변질된 천주교회를 용납하고 심지어 이방종교들도 포용하려 한다. 보수적인 교회들조차도 이런 넓어진 교회들을 분별하고 배격하지 않고 교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은 성경에 밝히 계시된 교제의 교훈을 어기는 잘못된 연합이다. 우리는 그런 연합을 반대하고 그런 일에 참여치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거룩한 분리를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자손들 중에서 셈의 자손을 구별하셨다. 또 그는 셈의 자손들 중에서 데라를 구별하셨고 또 데라의 아들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함)을 구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데라와 그 아들 아브람 부부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자 하셨다. 그것은 우상숭배의 환경으로부터의 분리이었다. 우리는 갈대아 우르 같은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구원 운동은 분리 운동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와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또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불신자들과의 분리를 밝히 가르치고(고후 6:14-17), 이단들과의 분리를 밝히 가르치고(딛 3:10; 요이 7-11), 또 바른 교훈을 버리고 불순종하는 자들과의 분리를 밝히 가르친다(롬 16:17; 살후 3:6, 14). 신약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간에 서로 사랑하라고 밝히 가르치지만, 동시에 불신자들, 이단자들, 바른 교훈을 버리거나 불순종하는 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도 밝히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분리를 실천해야 한다.

12장: 아브람을 부르심

창세기 1-11장은 인류의 초기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고, 12-50장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에 대해 서술한다.

1-9절, 아브람을 부르심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하나님의 특별계시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만물을 통해서도 자신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시고 역사를 통해서도 자신의 공의의 통치를 나타내시지만,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책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기준과 규범이 된다.

아브람과 그의 아버지 데라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나 제2의 고향인 하란은 우상숭배의 땅이었다(수 24: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부르셨다. 그것은 그의 기쁘신 뜻에 따른 것이다. 그를 부르신 때는 그가 하란에 거하였을 때인 것 같다. 성경 다른 곳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셨다고 말한다(창 15:7; 느 9:7).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에게 어떤 암시를 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를 본격적으로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한 경건한 민족을 만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죄를 버리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것은 분리의 시작이었다. 데라는 분리를 위한 과도기적 역할을 했다. 이제, 아브람에게 분리된 삶, 성별된 삶이 필요했다. 나이 든 친척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아브람이 죄악된 전통과 풍습을 완전히 떠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 새 가문의 시작이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한 큰 민족을 만들기를 원하셨고 그들에게 한 땅을 주기를 원하셨다.

[2-3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복을 약속하셨다. 그는 아브람으로 큰 민족을 이루고 그에게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이 크게 되게 하고 그가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복의 근원’이라는 원어(베라카)는 ‘복’이라는 뜻이다. 아브람은 복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그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할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해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은 창세기 22:18에서와 이삭(창 26:4)과 야곱(창 28:14)에게서도 반복된다.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아브라함과 다윗을 이어서 내려왔다. 메시아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실 뿐 아니라,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 예언되었다(렘 23:5; 겔 34:23; 호 3:5). 신약성경 마태복음 1:1은 메시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음을 증거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요 5:3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를 통하여 구원의 복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값없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얻는 것이다.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75세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였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가지 말라 하시면 가지 않는 것이 순종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을 떠나라 명하실 때 떠났다. 그는 우상숭배의 삶을 청산하였다. 그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마땅한 삶이었다.

롯도 아브람과 함께 갔다. 롯이 아브람과 동행한 것을 보면, 그는 아브람의 영향으로 비교적 경건하였던 것 같다. 베드로후서 2:7-8은 롯을 의로운 자라고 증거한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이었고 아마 그의 부친 데라가 죽기 전이었을 것이다. 창세기 11:26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을 낳았다고 말하므로,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부친 데라는 145세이었을 것이다. 창세기 11:32에 데라가 205세까지 살고 하란에서 죽었다고 기록한 것은 창세기의 저자 모세가 역사를 기술할 때 데라에 대해 먼저 쓰고 그 다음에 아브람에 대해 쓰는 기술 방식 혹은 습관이었다.25)

[5-6절]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테레빈스 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여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라는 표현은 그가 하란에서 여러 해 동안 살았던 것을 증거한다. 그러나 그는 정들었던 그의 모든 환경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목표는 분명하였고 그는 그 목표대로 그 땅에 들어갔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위해 예정하시고 그에게 지시하신 땅이었다. 그 땅은 창세기를 쓴 모세가 강조하고자 하는 땅이었다. 모세는 그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땅이며 이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땅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장은 가나안 땅을 여러 번 언급한다. 5절,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창세기 11:31,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아브람은 가나안 땅 중부,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렀다. ‘상수리 나무’라는 원어(엘론)는 테레빈스(terebinth) 나무라고 한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함의 아들 가나안(창 9:22)의 자손이다. 그들은 후에 그들의 죄 때문에 완전히 멸망할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창 15:16).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람에게 또 다시 나타나셨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특별한 방식으로 종종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기도 하셨고, 구름이나 불 가운데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도 하셨고, 또 자신의 음성으로나 기적들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셨다. 이때는 아마 그가 직접 나타나신 것 같다. 하나님의 이런 직접 나타나심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요 1:14; 14:9).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는 지구의 한 지역을 누구에게 주실 권한이 있으시다. 그는 온 세상의 창조자요 통치자요 주인이시므로(시 24:1) 그럴 권한이 있으시다.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느니라.” 신명기 10: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았다. ‘단’이라는 원어(미즈베아크)는 ‘[짐승을] 잡아죽인다’(자바크)는 말에서 나왔다. 그것은 ‘짐승을 죽여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었다.

[8-9절]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네게브](NASB, NIV)으로 옮겨 갔더라.

아브람은 그곳에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거처를 정하고 장막을 쳤고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노아가 홍수가 그친 후에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 것과 같았다. 짐승 제사에는 하나님의 긍휼로 예비하실 속죄제물을 믿는 뜻이 있고 또 참된 헌신과 순종을 다짐하는 뜻도 있었다. 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배와 기도의 삶, 곧 경건한 삶을 가리킨다. 그것은 셋의 아들 에노스의 삶이었고(창 4:26), 에녹의 삶이었고(창 5:22, 24), 또 노아의 삶이었다(창 6:9, 22).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의 저장소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기준이며 규범이다. 성경 외의 다른 계시를 구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잘못이다. 성경 외의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사람은 성경보다 하나님의 현재적 직접 계시에 무게를 두게 되고 그것은 마귀의 미혹에 떨어지는 길이다.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누가복음 16:29, 31,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우리는 날마다 성경 읽기를 힘쓰고 성경을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상숭배의 세상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야 한다. 우리는 불경건하고 음란한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고 부도덕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과 함께 멸망을 받고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오늘날 약속의 땅은 세상에서는 교회이며 장차 들어갈 영광의 천국이다. 죄인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들 속에 오셔서 그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시며 그들을 도우셔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육신의 죄성과 싸워 이겨야 하며 이것이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정상적인 삶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단을 쌓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하나님께 단을 쌓는 일을 힘썼다. 그것은 경건한 삶이며 예배하는 삶이다. 우리가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교회에 들어오고 천국을 소망하게 된 후,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힘쓰고 기도하며 찬송 부르고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중에 첫 번째로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첫 자리에 모시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가장 귀히 여기자.

10-20절,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감

[10절]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인도하셔서 거하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 우거하려 하였다. 기근은 보통 하나님의 징벌로 온다. 아마 그 땅 거주민의 죄 때문에 기근이 왔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살던 아브람의 가족들에게도 타격이 왔다. 아브람은 사람의 일반적 생각을 따라 애굽으로 내려갔다. 애굽은 나일강 하류에 비옥한 땅이 많은 곳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므로 아브람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거하라고 명하신 땅에 머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 염려와 지혜와 판단으로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낭패의 길이었다. 사사시대에 엘리멜렉과 나오미도 비슷한 생각으로 흉년을 피해 유다 땅을 떠나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했다가 낭패했었다(룻기).

[11-12절]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아브람은 애굽에 가까이 왔을 때 한가지 걱정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믿음으로 행하면 담대함과 평안이 있지만,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행할 때는 염려와 걱정이 생긴다. 아브람의 걱정은 죽음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의 보기에 그 아내 사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기 때문에, 아브람은 애굽 사람이 자기의 아름다운 아내를 보고 자기를 죽이고 자기 아내를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낯선 땅에 우거할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생각과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를 도우시고 지키실 것을 모르는 생각이었다.

[13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람은 그런 상황에서 한가지 인간적 대책을 생각하여 아내에게 요청하였다. ‘원컨대’라는 표현은 아브람이 그 옛 시대에 평소에 아내에게 위협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고 인격적이고 사랑을 가지고 대했음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아내에게 사람들에게 “나는 그의 누이라”고 말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는 아내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그래서 쓸데없이 만용(蠻勇)을 부리지 않고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인간적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래가 그의 누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사래는 그의 누이였으나 지금은 그의 아내이다. 아브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다. 거짓말은 악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 두려운 상황에서 거짓말을 했다. 그것은 경건한 아브람의 연약한 모습이었다.

[14절]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아브람의 예상대로 애굽 사람들은 그의 아내 사래의 심히 아름다움을 보았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났을 때 75세이었고(창 12:4) 아브람과 사래의 나이 차이가 10살이므로(창 17:17),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사래의 나이는 65세 이상이었는데도 그 여자는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의 창조 세계의 본래의 모습이다. 아름다움의 주된 한 요소는 조화로움이다. 사람의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그의 얼굴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아름다움은 음란함으로 더럽혀져 있다. 그러나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은 인격성과 도덕성과 단정함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15절]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애굽 왕 바로는 대신들의 칭찬을 듣고 사래를 궁으로 취하여 들였다. 아브람은 하루아침에 아내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하고 평안한 삶을 누리려고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그곳에서 아내를 빼앗기는 슬픔과 낭패를 당했던 것이다. 그는 믿음으로 행하는 대신에 인간적 지혜와 판단으로 행했을 때 큰 것을 잃어버렸다.

아브람의 슬픔과 낭패는 하나님의 징책이었다고 보인다. 그것은 마치 훗날에 엘리멕렉과 나오미 가족의 경우와 같았다. 룻기 1:3-5에 보면, 기근을 피해 약속의 땅을 떠나 모압으로 간 나오미는 그곳에서 남편을 잃었고 자신의 두 아들을 위해 며느리를 얻었으나 그곳에 거한 지 10년 즈음에 두 아들도 다 죽었고 두 며느리와 함께 남겨졌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라고 말했다(룻 1:13). 또 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후 이웃 사람들에게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말했다(룻 1:21).

아브람은 처음부터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만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더라면,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진실했을 것이며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응답을 얻었을 것이다. 후에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아 1,754명의 유대인들을 인도하여 파사 나라로부터 유대 땅으로 돌아오고자 했을 때 길에 대적들의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군대의 지원을 요청치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였고(스 8:21-23) 무사히 잘 도착하였다.

[16절]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애굽 왕 바로는 사래를 인해 아브람에게 후한 선물을 주었다. 비록 아내 대신 양과 소와 남녀 종들과 암수 나귀와 약대를 많이 얻었지만, 그것이 아브람에게 무슨 기쁨과 복이 되었겠는가?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아브람은 비로소 애굽으로 내려오려 했던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기근이 있었더라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사래 때문에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 그것은 아마 무서운 질병이었을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큰 재앙을 내리셨는가? 그것은 바로의 행위가 간음죄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성하고 중요한 제도이며 그것을 어기는 것은 간음죄가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며 결혼 관계를 잘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미워하시며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말 2:16). 더욱이, 사래는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의 아내이며 남의 아내가 되어서는 안 될 자이었다.

[18-20절]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원문)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바로는 그 재앙이 사래 때문에 온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양심이 있어서 옳지 않은 일에 가책을 느낀다. 살인, 간음, 도적질이 죄악임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은 양심 때문이다. 요나의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선원들은 그 재앙이 누구 때문에 왔는지 알기를 원했다(욘 1:7). 헤롯 왕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려 하였고 또 그의 말을 들을 때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었다(막 6:20). 그들은 다 양심의 음성을 들은 것이었다.

바로가 양심적으로 두려워하고 사래를 돌려보낸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베푸신 크신 은혜이었고 긍휼하신 간섭과 도우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를 빼앗겨 슬퍼하며 낙심했을 아브람을 위해 비상하게 개입하셨고 그를 도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며 선한 뜻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했다(롬 8:28).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기근이 있다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자. 우리는 질병과 궁핍과 각가지 고난과 어려움이 있다고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자.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안에 거하고 참된 교회 안에 거해야 한다. 그곳이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평안과 기도 응답과 그의 보호하심이 있다. 우리는 고난 중에 낙망하여 세상으로 가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목숨 때문에 거짓말하지 말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부활과 영생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범죄치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주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우리는 죽음을 겁내어 비굴하게 거짓말하지 말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신 섭리를 믿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실수를 용서하시고 그를 도우시고 구원하셨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했다(시 23:4). 시편 91:1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라고 말했고, 시편 121:8은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롬 8:28) 하나님을 믿자.

13장: 롯과 헤어짐

[1-2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銀金)이 풍부하였더라.

아내를 빼앗겼다가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으로 다시 찾은 아브람은 그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애굽에서 나와 남방으로 올라갔다. ‘남방’(네겝)은 유대 땅의 가장 남쪽 지역 즉 사해(혹은 염해)의 서남쪽 지역을 가리킨다. 아브람은 애굽의 왕에게 양과 소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기 때문에(창 12:16) 육축이 풍부하였고 또 은금도 많았다. 아브람은 물질적으로 부요하였다.

[3-4절]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은 벧엘에 이르렀고 벧엘과 아이 사이, 즉 전에 하란에서 이곳 가나안 땅에 와 장막을 치고 처음 하나님께 단을 쌓았던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하고 기도했다는 뜻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단 쌓기를 힘썼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하고 기도하기를 힘썼다.

[5-7절]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과 롯은 각각 소유물이 많아 그곳에 함께 거하기 어려웠고 게다가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들과 롯의 가축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기도 했다. 사람은 더불어 살고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지만, 때때로 제한된 땅과 음식물로 인해 다툼이 생긴다. 가난과 불편함을 참고 이기는 것이 사랑이며 성숙한 인격이지만,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서로 다툰다.

[8-9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우리가 한 골육이니 서로 다투지 말고 헤어지자고 제안하였다. 함께 있으면서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 이해하며 서로 위하고 사랑한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사람의 연약성 때문에 때때로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좋은 사람들 간에도 부득이 서로 헤어지는 것이 필요한 때가 있다. 그러나 함께 있으면서 서로 다투는 것보다 헤어져서 서로 다투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나을 것이다.

아브람은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했다. 아브람은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그는 양보심을 발휘했다. 사람의 다툼은 대체로 욕심 때문에 온다. 야고보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말했다(약 4:1-2).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며 그 나라에 소망을 둔 자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 것에 욕심부리지 않고 세상 사람들처럼 다투지 않는다. 사람은 세상적인 욕심들을 버리고 하나님과 천국만 가장 큰 가치로 알 때 세상 것들을 양보할 수 있다.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았다. 요단 들은 사해로 이어지는 요단강 주위의 들판을 가리킨다. 요단 들은 소알까지 비옥했다. 소알은 소돔과 고모라의 이웃 도시이었고 사해 남단에 위치했던 것 같다. 그곳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후에는 황폐하여졌으나 그 당시에는 비옥하여 여호와의 동산 곧 에덴 동산 같고(창 2:8; 사 51:3; 겔 28:13) 애굽 땅과 같았다. 에덴 동산에는 강들의 근원들이 있어서(창 2:10) 비옥하였고 애굽 땅도 거대한 나일 강을 인해 매우 비옥하였다.

[11-13절]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롯은 요단 들을 택했고 아브람을 떠나 동쪽으로 옮겨갔다. 그는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 소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었다. 죄도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다. 사람이 약해서 실수로 혹은 알지 못하고 짓는 죄는 작은 죄이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도전적으로 짓는 죄는 큰 죄이다. 사람의 양심은 고의적인 죄를 어느 정도 통제하지만, 죄가 반복되고 양심이 무디어지면 그는 고의적인 죄를 담대하게 짓게 된다. 소돔 사람들은 큰 죄인이었다.

롯이 요단 들을 택하고 소돔 성 가까이에 장막을 친 것은 신앙적이지 못했다. 그는 물이 넉넉한 땅이라는 현실적 유익만 생각하여 그곳을 택했고 그가 살 곳이 그의 경건 생활에 얼마나 유익할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다. 만일 그가 바른 생각을 했다면, 그는 죄악된 환경을 멀리했을 것이다. 죄악된 곳에는 하나님의 재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롯과 달리 가나안 땅에 그대로 거하였다. 그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다(창 12:7). 그는 얼마 전 기근 때문에 그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큰 낭패를 경험했다. 그것은 그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가나안 땅에 그대로 거하였다.

[14-17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직접 혹은 환상 중에나 밤에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는 아브람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는 가나안 땅을 그와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이 그와 그 자손들에게 약속하신 땅임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다. 둘째는 그의 자손을 땅의 티끌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아브람의 자손들은 수적으로 번창하게 될 것이다.

[18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상수리 수풀’이라는 원어(엘로네)는 ‘테레빈스 나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 그것은 그가 짐승 제사를 드렸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받은 죄사함의 은혜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각오를 상징한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것은 인간의 합당한 삶이요 복된 삶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단을 쌓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4절,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18절,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송하며 기도했고 속죄 신앙을 가졌다고 보인다. 아브람의 경건한 삶은 모든 성도에게 본이 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복된 삶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4:23). 또 그는 이 세상의 종말과 그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신 후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눅 21:36).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교훈하였다(히 13:15). 또 시편 1편의 저자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말했다(시 1:1-3).

둘째로, 우리는 아브람에게서 양보심을 배워야 한다. 아브람은 그의 가축의 목자들과 롯의 가축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해결하려 했을 때, 양보심을 발휘하였다. 그는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전 1:2). 사람이 세상 것에 욕심을 내면 다투지만, 하나님과 천국에 가치를 두면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다. 주 예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남을 긍휼히 여기고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마 5:5, 7, 9), 또 악한 자들이나 원수들에게도 선을 베풀라고 하셨다(마 5:39-44). 사도 바울도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교훈했다(롬 12:10, 17-18). 또 그는 “너희 관용[혹은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했다(빌 4:5).

셋째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죄악된 환경을 피하자. 롯은 요단 들에 물이 넉넉함 즉 물질적 유여함이라는 조건만 보고 거주지를 선택하였다. 그는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거주지나 친구들을 조심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린도후서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우리는 참 교회를 세우고 그 안에서 교훈을 받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교제하며 살자.

14장: 롯을 구출함

1-16절, 롯을 구출함

[1-2절]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북방의 네 나라의 왕들은 남방의 소돔 성 주위의 다섯 나라 왕들과 전쟁을 했다. 시날은 바벨론의 수도 바벨과 아브람의 원고향이었던 갈대아 우르 지역을 가리키며 오늘날 이라크 동부 지역이다. 엘람은 페르샤만부터 카스피해까지 페르샤 지역을 가리키며 오늘날 이란 서부 지역이다. 엘라살과 고임은 그 주위에 있었을 것이나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남방의 다섯 나라들은 염해 남부 지역에 있었던 것 같다.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단지 “벨라 곧 소알”이라는 표현은 벨라가 옛날 이름이고, 소알이 모세가 창세기를 쓸 당시 사용되었던 이름임을 보인다.

[3-4절]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에 모였더라. 이들이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13년에 배반한지라.

북방의 연합군들이 남방의 왕들과 전쟁한 곳은 싯딤 골짜기이었다. ‘싯딤’이라는 원어(싯딤)는 ‘들판’이라는 뜻이며 그곳이 본래 들판이었음을 보인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라는 표현은 들판이었던 싯딤 골짜기가 후에 염해로 변했음을 보인다. ‘염해’(鹽海)는 ‘소금 바다’라는 뜻인데, 그곳의 물은 보통 바닷물보다 10배나 더 짠 30-33%의 소금물이라고 한다.26) 그 전쟁의 동기는 남쪽 나라들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12년간 섬기다가 제13년에 배반했기 때문이었다.

[5-7절] 제14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르바(거인), 수스, 엠, 호리는, 신명기 2장이 증거하는 대로, 옛날에 요단강 건너 동북쪽부터 요단강 남단 염해 동쪽과 남쪽, 즉 모압과 암몬과 에돔 지역에 살았던 족속들이다. 아스드롯 가르나임은 요단강 동북쪽 바산 땅에 있었고, 함은 갈릴리 호수 동쪽 게술 땅이며, 사웨 기랴다임은 요단강 동남쪽 르우벤 지파 땅에 있었고, 세일산은 에돔 지역이다. 엘바란은 에돔의 남단, 즉 홍해 북단 항구이며, 엔미스밧은 가데스 바네아일 것이다. 하사손다말은, 역대하 20:2에 의하면, 염해 중서부의 엔게디이다. 다시 말하면, 북방 연합군은 요단강 동북쪽 땅으로부터 요단강 남쪽 염해 동부와 남부와 서부를 쳤던 것이다.

본장은 그 내용의 역사적 성격을 잘 나타낸다. 옛날의 나라들이나 성들의 이름과 왕들과 족속들의 이름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R. D. 윌슨은 본장의 왕들의 이름이 고고학적 발굴 내용과 일치함을 증거하였다.27) 또 본장에는 창세기를 쓴 모세의 보충적 설명이 여러 번 나온다. 2절에는 “벨라 곧 소알,” 3절에는 “싯딤 골짜기 곧 염해,” 7절에는 “엔미스밧 곧 가데스,” 8절에는 “벨라 곧 소알,” 17절에는 “사웨 골짜기 곧 왕곡(왕의 골짜기)” 등이 그것이다.

[8-12절]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접전하였으니 곧 그 다섯 왕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과 교전하였더라.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북방의 네 왕들의 연합군이 남방의 소돔 성과 그 주위의 성들의 다섯 왕들의 연합군과 접전한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았다. ‘역청’(케마르)은 석탄이나 석유에서 나오는 ‘아스팔트, 콜타르, 피치 등’을 가리킨다. 그 전쟁에서 소돔 왕과 그 동맹국들은 패전하였고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겼다. 소돔에 거했던 롯도 포로로 잡혀갔고 그의 재물들도 다 빼앗겼다. 롯은 큰 낭패를 당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악된 도시 소돔에 내리신 경고의 징벌이며 또 인간적 생각과 욕심을 따라 요단 들을 선택했고 심히 죄악된 소돔 성에까지 내려가 거주하며 그들과 교제했던 롯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징벌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사람은 물질적 유여함을 가진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셔야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께서 침략자를 보내시면 하루아침에 모든 좋은 것들도 빼앗길 것이다.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은 오직 섭리자 하나님께 달려 있다.

[13절]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도망쳐 온 한 사람이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성경에서 여기에 처음으로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이브리)이 나온다. 이 말은 ‘에벨의 자손’이라는 뜻과 더불어 ‘강 건너편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 명칭은 아마 가나안 땅에 나그네처럼 거주했던 아브람에게 주위 사람들이 붙여준 것일 것이다. 그때 아브람은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다. 마므레는 에스골과 아넬의 형제이며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들이었다.

[14-16절]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

아브람은 평소 집에서 기르고 훈련시켰던 가신(家臣)들 318명과 함께 롯을 구출하기 위해 북방 나라의 왕들을 뒤쫓아갔다. 그와 동맹했던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도 거기에 참여하였다(24절). 아브람은 평소에 자기 방어를 위해 가신들을 훈련시켰다. 사람은 개인적으로 운동도 하고 체력도 단련시키는 것이 좋고, 세상에서는 군대도 필요하고 경찰력도 필요하다. 아브람은 단까지 쫓아갔다. 여기의 ‘단’은 사사 시대에 세워진(삿 18:28-29) 도시를 가리킬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단은 사사 시대에 세워졌을 뿐 아니라, 북방 왕들은 요단 동쪽의 바산 길(다메섹--랍바)과 왕의 대로(랍바--보스라--엘랏)로 내려오고 올라갔을 것이며 그 길은 그 성을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단은 길르앗에 속한 한 성읍을 가리킬 것이다.28)

아브람은 가신들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했고 다메섹 북편에 있는(원문의 뜻)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긴 재물과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부녀들과 사람들을 찾아왔다. 이것은 그의 조카 롯을 위해 자기 목숨의 위험을 무릅썼던 아브람의 사랑과 용기를 잘 나타내준다. 아브람의 믿음은 헌신적 사랑과 용기로 잘 표현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소극적 태도로가 아니고 적극적 참여와 순종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시지만(사 37:36),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자연적 수단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에나 충실해야 하고 자연적 수단도 감사함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행 27:30-31).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의 역사적 내용을 다 믿자. 창세기는 역사적 성격을 가진다. 예를 들어, 창세기 2장은 에덴 동산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10-14절), 7-8장은 홍수가 시작된 연월일과 물이 땅 위에서 마른 연월일에 대해 언급한다(7:11; 8:13-14). 10장은 노아의 자손들의 이름들과 그들로 인해 퍼져 나간 열국들의 이름들에 대해 자세히 증거한다. 11장은 바벨탑 사건에 대해, 12장 이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기록한다. 창세기는 첫장부터 끝장까지 역사적 성격을 가진다. 사실 성경 전체가 그러하다. 성경은 절반 이상이 역사이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믿자.

둘째로, 롯은 고난의 징벌과 기적적 구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되었던 소돔 성과 거기 살며 그들과 교제했던 롯에게 고난의 징벌을 내리셨다. 그러나 죄와 부족에 대한 징벌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롯을 긍휼히 여기셨고 기이한 구원을 주셨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한다(시 119:71).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세상의 헛된 것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의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은 오직 섭리자 하나님께 달렸다.

셋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 사랑과 용기를 가지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사용하셔서 롯을 구출하셨다. 아브람은 평소에 집에서 훈련시켰던 318명의 가신들과 함께 가서 롯을 구출하였다. 그것은 그의 사랑과 용기를 보인다. 우리는 어려움 당한 형제들과 이웃들을 사랑하고 도울 힘이 있을 때 그들을 도와야 한다. 우리는 이 험한 세상을 사는 동안 믿음 안에서 자신을 훈련시키고 사랑과 용기를 가지고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경건의 훈련과 더불어 체력 단련도 하는 것이 좋고, 또 우리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이든지 다 준비하고 대비하여 처리하는 지혜와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17-24절, 아브람이 이기고 돌아옴

[17절]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파하다’는 원어는 ‘치다, 패배시키다, 죽이다’는 뜻을 가진다. 옛날 영어성경은 ‘죽이다’는 말로 번역했다. 소돔 왕의 입장에서 아브람은 그들의 성읍 곧 그 나라 사람들과 그 빼앗긴 재물들을 찾아준 은인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돌아올 때 소돔 왕은 사웨 골짜기 곧 왕곡(王谷, 왕의 골짜기)에 나와 아브람을 영접하였다.

[18절]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살렘 왕 멜기세덱은 신비한 인물이다. ‘살렘 왕’은 ‘평화의 왕’이라는 뜻이고, ‘멜기세덱’은 ‘의(義)의 왕’이라는 뜻이다. 또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증거되었다. 그가 떡과 포도주를 가져온 것은 아브람과 그의 동료들의 원기 회복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본문은 그가 실제로 역사적 인물이라고 증거하는 것 같다.

많은 유대인들과 성경 연구자들은 멜기세덱을 셈이라고 생각한다. 아브람이 롯을 구한 사건은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창 16:3). 그러면 그때는 아담 후 2033년 이전이었다. 셈은 아담 후 1558년경에 출생하여 2158년경까지 살았으므로 또 그는 경건했을 것이므로, 멜기세덱과 비슷한 인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셈이 가나안 땅에 있었을까 하는 점, 그가 셈이라면 셈이라고 부르지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 것 같지 않다는 점, 또 히브리서 7:3에 멜기세덱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묘사된 점 등은 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멜기세덱이 실제 인물이라면 가나안 족속의 한 왕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히브리서 7:3의 말씀은 그에 대해 족보도, 출생일도, 사망일도 언급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경건한 인물을 가나안 땅에 숨겨두셨다.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흠모할 만한 은혜가 무명의 사람 속에서 더 분명히 빛난다. 왜냐하면 부패된 세상 속에서 멜기세덱은 그 땅에서 종교의 바르고 신실한 소유자요 수호자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매튜 풀은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최악의 장소들과 나라들 가운데서도 그의 남은 자들을 여기 저기 흩어두셨다”고 말했다(성경주석, I, 35).

[19절]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복을 기원하고 그의 대적들을 그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멜기세덱의 말에서, 우리는 그의 경건을 엿본다.

첫째로,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로 알았다. ‘주재’라는 원어(코네)는 ‘창조자, 소유자’라는 뜻이다(BDB, KB).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 천지만물의 소유자이시다.

둘째로,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알았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혹은 ‘지존자’라는 표현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그것은 시편에 적어도 21번 나오고 다니엘서에 14번이나 나온다.29) 하나님께서는 저 높고 광대한 하늘보다 더 높으신 자이시다. 그는 초월자이시다. 그의 지혜와 능력은 지극히 탁월하시다.

셋째로,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알았다. 복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다. 왜냐면 그는 만복의 근원이시며 전능하신 왕이시기 때문이다. 신명기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한나도 말하기를,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고 했다(삼상 2:6-7).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하여야 했다(민 6:24-26). 또 시편 1편은 악을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사는 자가 복되다고 증거했고, 또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성도들에게 항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였다(롬 1:7).

[20절]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10분 1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넷째로, 멜기세덱은 아브람의 대적을 아브람의 손에 붙이신 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이것은 성경적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힘이시며 방패시고 구원이시며 대적들을 그 발 아래 굴복케 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다섯째로,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으로 알았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해 찬송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자이시다. 사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었다. 이사야 43:7, 21,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사람의 첫 번째 존재 목적이 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그 얻은 것에서 10분 1을 주었다. ‘그 얻은 것에서’라는 말은 원문에 ‘모든 것의’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성경에서 최초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있다. 십일조는 10분의 1이라는 뜻이다. 아브람이 드린 최초의 십일조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표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 주심을 인정한 표, 즉 전쟁에서 이긴 것과 빼앗겼던 물건들을 다시 찾은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한 표이었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그의 복 주심을 인정하고 우리의 소득이 그의 복이며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이다.

멜기세덱은 신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족보도 없고, 출생이나 사망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는 아브람을 축복하였고 그에게서 십일조를 받았으므로 그의 자손인 레위보다 높은 자이었다. 히브리서 7:1-3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이름이 그러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義)의 왕이시며 평화의 왕이시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상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시다.

[21절]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소돔 왕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죽었거나 종이 되었다 할지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가족들, 친지들, 이웃들을 찾게 되었다. 그는 감히 물품들까지 되돌려달라고 말할 염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브람에게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말했다.

[22-23절]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致富)케[부자가 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소돔 왕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아브람의 믿음은 멜기세덱의 믿음과 같았다. 그는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를 믿었다.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진실을 말하는 행위이다. 맹세는 자신의 말이 장난삼아 하는 것이거나 경솔히, 가볍게, 혹은 거짓되이 하는 말이 아니고, 진지하게, 진심으로, 진실하게 하는 것임을 증거한다.

아브람은 그가 전쟁에서 도로 찾은 물건들 중 실 한 개나 신발끈 하나도 취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에게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음을 증거한다. 재물 욕심을 버린 자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보화로 삼은 자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모르고 돈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자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과 천국을 아는 자, 내세를 믿는 자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

가치관의 차이는 생활방식의 차이를 만든다. 주의 말씀대로,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기며 살 수 없다(마 6:24). 우리가 참으로 주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천국을 믿는다면, 네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는 주의 말씀(마 6:19-20)에 동의할 것이다. 주께서는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6:21). 또 그는 의식주의 문제 때문에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마 6:25 이하).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딤전 6:17-18).

아브람이 소돔 왕의 제안을 거절한 까닭은, 자신이 하나님 때문에가 아니고 소돔 왕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이었다. 그는 그런 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기를 원치 않았다. 경건한 아브람은 세상 재물을 작게 여겼고,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크게 여겼다. 사람에게 물질적 부요를 주실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의 이름은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 그 영광이 사람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은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 욕을 당하지 않고(롬 2:24)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24절]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단지, 아브람은 그와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소년들이 먹은 것과 그와 동행했던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수고의 댓가는 제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공정한 요구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참 하나님을 바르게 알자. 멜기세덱과 아브람은 천지의 창조자와 소유자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복을 주시는 하나님, 승전(勝戰)케 하신 하나님,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을 믿었다. 그것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이다. 우리도 그런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우리의 목자로 삼고 사랑하며 그의 복을 사모하며 그의 명령에 순종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물질적 소득의 십일조 이상을 드리자. 아브람은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다가 그를 맞아 축복한 신기한 인물인 멜기세덱에게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다. 그것은 그의 승리와 소득 곧 전쟁노획물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한 것이다. 다윗은 천지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헌금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고 고백했다(대상 29:11-17). 주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셨다(마 6:20). 십일조 헌금은 그런 믿음의 표시이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적, 물질적 이익보다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더 중히 여기자. 아브람은 물질적 욕심을 품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 중히 여겼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손상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처신하며 살아야 한다.

15장: 믿음의 의

[1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異像)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너의 상은 매우 크도다].30)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온 후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였다. 이상(異像)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하게 계시하시던 옛날의 방식들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꿈이나 이상(異像) 등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민 12:6).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람은 이상 중에 하나님을 뵈옵게 되니 두려웠을 뿐만 아니라, 아마 북방 연합군이 다시 쳐들어올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두려움을 제거해 주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는 너의 방패니라”고 말씀하셨다. 방패는 전쟁에서 적군의 칼과 창을 막는 무기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방패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침략자들의 공격을 막아 주시고 그를 지켜 주신다는 뜻이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방패가 되신다(시 18:2).

하나님께서는 또 아브람에게 “너의 상은 매우 크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아브람이 조카 롯를 위해 행한 헌신적 수고와 전쟁노획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은 선한 행위에 대해 큰 상을 주시기를 원하셨다. 사람의 선행은 보잘것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상을 주신다.

[2-5절]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無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때까지 그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브람은 자기 집에서 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그의 상속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3절에 ‘내 집에서 길리운 자’라는 원어(벤 베시)는 ‘내 집의 아들’이라는 말이며 영어성경들은 ‘내 집에서 난 자’라고 번역하였다(KJV, NASB). 그는 아브람의 집에서 종으로 나서 길리운 자이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했다. 하나님께서는 다메섹 엘리에셀이 그의 상속자가 아니며, 그의 몸에서 날 자가 그의 상속자가 될 것이며, 그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같이 셀 수 없이 많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의 말씀과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믿음을 그의 의(義)로 간주하셨다. 그는 아브람의 선하고 의로운 행위를 의로 간주하지 않으셨고 그의 믿음을 의로 간주하셨다. 사람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 간주될 만큼 완전치 못하며 부족투성이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선행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아브람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일의 본이 되었다(롬 4:1-3).

아브람의 믿음은 컸다. 그는 그와 그의 아내가 늙었고 자녀 출산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다. 로마서 4:19-21,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믿음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그의 약속과 그의 능력과 그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다.

[7절]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주셨던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다. 그는 가나안 땅을 그에게 기업으로 주기 위해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12:1에 기록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명령은 단지 하란에서가 아니고, 이미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이나 그의 부친 데라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창 11:31). 이 사실은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레위인들의 기도에서도 고백되었다. 느헤미야 9:7,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8-11절]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3년된 암소와 3년된 암염소와 3년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死體)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확증의 표를 요청했다. ‘무엇으로’(밤마 ה������������)라는 말은 그의 불신앙을 나타내기보다 믿음을 위한 확증의 표를 구한 것이다. 훗날에 기드온이나 히스기야도 비슷한 요청을 하였다(삿 6:37; 왕하 20:8).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3년된 암소, 3년된 암염소, 3년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제물로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람은 그것들을 준비하고 그 중간을 쪼개었다. 제물의 중간을 쪼갠 것은 언약을 맺는 당사자 어느 한 쪽이 그 언약을 어기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이었던 것 같다(렘 34:18-20). 솔개가 제물의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그것을 쫓았다.

[12-14절]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懲治)[심판,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자손이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어 이방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400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며 그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심으로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다 이루어졌다. 당시에 그들은 애굽에서 심한 학대와 고통을 당하였고(출 2:23-24), 그들은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 만에 그 고통과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왔고(출 12:40), 나올 때 큰 재물을 가지고 나왔다(출 12:35-36).

[15절]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또 너는 평안히 네 조상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라. 너는 장수하다가 장사되리라](원문, KJV).

‘조상에게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사람의 영혼이 몸의 죽음 후에도 계속 존재하며 어떤 장소에 모임을 암시한다. 이것은 영혼불멸에 대한 한 증거이다. 사람은 몸을 가진 자일 뿐 아니라, 불멸적인 영혼을 가진 자이다. 영혼은 몸이 죽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곳에 집결된다. 성경은 그 장소가 천국과 지옥이며, 의인의 영혼은 천국에 올라가 몸의 부활 때까지 쉬지만, 악인의 영혼은 지옥에 던지워 마지막 심판 때까지 고통을 당한다고 증거한다(눅 16:19-31).

[16절] 네 자손은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4대 만에’라는 말씀도 그대로 성취되었다. 야곱이 애굽에 내려간 때로부터 레위, 고핫, 아므람, 모세에 이르는 4대째에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다.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땅의 여러 족속들을 대표하였다(창 48:22; 왕상 21:26; 암 2:9-10). 아브람은 당시에 아모리 족속 곁에 살고 있었다. 창세기 14:13은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고 말한다.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는 말씀은 오랜 후에 있을 가나안 땅의 정복이 그곳 거주민들의 죄악의 많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일 것을 암시한다. 과연, 레위기 18:24-2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이 모든 일[심히 음란한 일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오랜 세월이 흘러야 이루어질 것이었지만 그대로 성취되었다. 신약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 즉 주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의 약속도 꼭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17-21절]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쪼갠 제물들 사이로 지나는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은 하나님을 상징한 것 같다(출 3:2). 그것은 아브람이 하나님께 요청한 하나님의 표증이었다. 그 날 하나님께서는 다시 가나안 땅을 약속하시고 그 땅의 경계와 당시에 거기 살고 있었던 열 족속들을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후에 다윗과 솔로몬 왕 시대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의 그 경계까지 거의 영토를 확장했었다(삼하 8:6, 14; 왕상 4:21, 24).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방패이시며 우리의 상급이시다. 그는 자신이 아브람의 방패이며 아브람의 상이 매우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환난과 시험이 많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대적들도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방패가 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상은 크다. 예수께서는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계 22:12). 우리는 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약속하신 상을 기대하며 열심히 믿음으로 살고 의와 선을 행하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의롭다 하심의 복을 주셨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그의 의로 간주하셨다. 우리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는 이치도 비슷하다. 우리의 행위는 늘 부족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된 우리에게 복된 기업을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경계가 애굽 강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까지라고 말씀하셨고 그 땅에 거하는 열 족속들을 언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 지금 하늘에 간직된 기업(벧전 1:4)을 약속하셨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21장에 기록된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은 천국의 예표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을 사모하며 바르고 충성되게 살자.

16장: 하갈과 이스마엘

[1-2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아브람이 믿었고(창 15:4-6) 그의 아내 사래도 믿었겠지만, 사래는 결혼한 후 처음부터 아이를 낳지 못했고(창 11:30) 그때까지도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좀더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 방법으로 이루려 하였다. 그것은 인간적인 연약한 생각이었다.

사래에게는 하갈이라는 애굽 사람 여종이 있었는데, 사래는 그를 자기 남편에게 주어 그를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는 그 일을 남편에게 권유했고 남편은 아내의 말을 따랐다. 마치 첫 사람 아담이 그 아내의 잘못된 권유를 받아들인 것처럼, 아브람은 아내의 인간적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의 권유라 하더라도 그는 거절할 것은 거절했어야 했다. 아브람은 우리와 같이 연약함을 가진 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함이 있다.

[3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10년 후이었더라.

‘첩’이라는 원어(잇솨)는 ‘아내’라는 말이다. 아브람은 아내가 둘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났다. 일부일처(一夫一妻)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의 갈빗대로 한 여자를 만드시고 부부가 되게 하셨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가 되게 하신 것이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동성간의 결혼이나 일부다처(一夫多妻)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4-5절]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으로 인하여 임신한 하갈은 자신의 임신함을 깨닫고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갈의 잘못이었다. 하갈은 종의 신분으로서 주인의 첩이 된 것이 여주인 사래의 덕분인 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여주인을 끝까지 존중하고 섬겨야 했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었고 마음이 높아졌던 것이다. 사래도 그런 일을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아브람과 자신의 가정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생각했던 일이 도리어 자기에게 고통으로 돌아와 당황했을 것이다.

[6절]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아브람은 사래에게 그의 눈에 좋은 대로 그 여종 하갈에게 행하라고 말했고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였다.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했으니 학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주인이 여종에게 멸시를 받고 그냥 지낼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의 일반적인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사래가 하갈을 좀더 참고 끝까지 잘 대해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자기 남편의 아기를 임신한 여종을 학대하는 것은 선한 일이 아니었다. 하갈의 인격이 부족해서 여주인께 감사하지 못하고 자기 위치를 벗어났으나 그가 그런다고 여주인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브람의 마음은 사랑하는 아내 사래에게 있었다.

학대를 받던 하갈은 사래의 얼굴을 피해 집을 나와 도망쳤다. 학대받는 자가 도망치고 싶은 것은 사람의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학대는 자신이 스스로 가져온 결과이었다. 그가 여주인을 멸시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런 학대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상 도망칠 일이 아니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겸손히 여주인 사래에게 복종해야 했을 일이었지만, 그는 도망쳤다.

[7-8절]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Shur)[슈르]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하갈을 만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배려이었다. 본문의 여호와의 사자는 단지 한 천사가 아니었다. 10절에 보면, 그는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케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13절에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이라는 말씀을 보면, 그는 구약시대에 종종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다(창 22:12, 14; 출 3:4).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광야의 샘 곁 곧 슈르 길 샘물 곁에서 하갈을 만나셨다. ‘슈르 길’ 곧 슈르로 가는 길은 당시의 주요한 도로 중의 하나이었고 그 길에 한 샘이 있었다. 여호와의 사자께서 하갈을 만나신 것은 그 샘 곁, 즉 구체적인 한 장소에서이었다.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하갈에게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시며 하갈의 신분을 언급하셨다. 그의 신분에 대한 언급은 하갈로 하여금 즉시 자신의 신분을 다시 깨닫게 했을 것이다. 하갈은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기가 멸시했고 그에게 학대받았던 사래를 ‘나의 여주인’이라 불렀다. 그렇다, 그는 사래의 여종이었다.

[9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은 여종의 마땅한 본분이다. 종은 주인을 멸시하지 말고 그에게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중히 여기신다. 또 임신한 몸으로 도망친 것은 자신과 태아 모두에게 해로웠다. 그 태아는 아브람의 아이이다. 그는 자신과 그 아이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정한 때까지 힘들어도 집에 머물러 있으며 여주인 사래에게 복종해야 했다. 그것이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힘들어도 질서를 존중하며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무질서와 혼란을 원치 않으신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학생은 선생님께 순종하고 직원은 상급자에게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힘들어도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적절한 다른 길을 보여주시기 전까지 현재 처한 환경에 적응하고 겸손히 자기를 부정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10-12절]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또 하갈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자녀의 다산(多産)은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복이다(창 1:28).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가 실수로 잉태케 한 하갈의 아들도 복주셔서 번식케 하실 것이었다.

또 그는 하갈이 낳을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고 그가 낳을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주신 것이다. 그는 사람이 고통 중에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또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시다(시 68:5).

또 그는 하갈이 낳을 아들이 사람들 중에 들나귀같이 되겠고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 것이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어떻게 활달하고 호전적 인물이 될지를 보인다. 이 말씀대로, 이스마엘의 자손인 아랍인들은 호전적 유목민의 특징을 가졌다.

[13-16절]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엘 로이)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86세이었더라.

하갈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주인집에서 도망쳐 나올 때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외로웠겠지만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을 때에 너무 감격하였을 것이다. ‘브엘라해로이’는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자의 샘물’이라는 뜻이다. 그 샘물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다는 언급은 모세의 보충적 설명이라고 보인다. 성경의 사건들은 사람이 지어낸 허구적 내용이 아니고 진실한 역사적 내용이다.

때가 되어 하갈은 ‘아브람의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은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지었다. 그때 아브람은 86세, 즉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1년쯤 되는 때이었다. 비록 아브람의 적자(嫡子)가 아니고 서자(庶子)이긴 하지만,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첫 아들이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고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사래와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하지 못하고 인간적 방법으로 그것을 이루려 하였다. 여종을 남편에게 첩으로 준 것은 잘못이다. 일부일처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때때로 서서히 이루어지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약속을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고 믿고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잘 지키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하갈이 여주인 사래를 멸시한 것은 자기 위치를 망각한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나 사래가 하갈을 학대한 것도, 인격적 결함을 가진 여종을 사랑으로 품지 못한 부족과 연약함이었다. 우리는 질서를 중히 여기고 서로 존중하고 피차 복종하며 또 모든 사람에게 항상 선을 베풀어야 한다. 종은 두려움과 성실한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엡 6:5). 또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사람의 감정을 따라 보복하거나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라고 말씀하셨다(마 5:39-48). 우리는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롬 12:17, 21).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있는 자를 감찰하시고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만 돌아보시지 않고 그의 여종 하갈도 돌아보셨다. 그는 하갈을 감찰하셨고 그의 고통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셨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자손도 번창케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돌아보시며 고통 중의 우리의 부르짖음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107:10-16,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어떤 사람의 고난이 비록 그의 부족 때문에 왔을지라도, 그가 하나님께 회개하며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며 그를 그 고통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17장: 할례(割禮)

[1절] 아브람의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99세 때에 나타나셨다. 그것은 창세기 16장에 기록된 하갈의 사건이 있은 지 13년 후의 일이다. 성경은 소수의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나 내용들만 기록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나타나지 않으시고 특별한 때에 나타나셨다.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계시 사건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이다.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몇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 그는 자신이 전능한 하나님(엘 솻다이)임을 증거하셨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창 18:14; 눅 1:37). 둘째, 그는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은 경건한 삶이다. 사람들 앞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 없이, 무신론적으로 살 수 있고 또 위선적으로나 가식적으로도 살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그는 사람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아브람에게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완전하다’는 원어(타밈)는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 양심에 거리낄 만한 것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의롭고 선하고 흠 없게 살기를 원하신 것이다.

[2-4절]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창세기 15:18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셨다고 말했었는데, 이제 본장은 본격적으로 그 언약에 대해 말한다. 본장에는 ‘내 언약’이라는 말이 9번(2, 4, 7, 9, 10, 13, 14, 19, 21절),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이 3번(7, 11, 19절), 그냥 ‘언약’이라는 말이 1번(13절), 도합 13번 나온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 당사자와 의논하는 쌍방적 언약이 아니고 일방적 언약이다. 그것은 일종의 명령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조건을 가진 약속의 형태이기 때문에 언약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에서 아브람에게 “내가 너를 심히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언약을 들은 아브람은 그 앞에 엎드렸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배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또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5-6절]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주셨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비’라는 뜻이지만,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는 뜻이다.31) 하나님께서는 그를 심히 번성케 하셔서 그에게서 나라들과 열왕들이 나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7-8절]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민족적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그 대대의 자손들 사이에 세워지는 영원한 언약이다. 그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또 그는 아브라함이 지금 우거하는 가나안 땅을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이미 여러 번 반복된 내용이었다(창 12:7; 13:15; 15:18).

[9-10절]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또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언약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가 지켜야 할 내용은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할례의 명령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의 자손 중 남자에게 해당되었다. 남자는 자손들을 대표하였다. 10절에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민족적 성격을 넘어섬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여기에 ‘너희’라는 말 속에는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날 아들 이삭뿐 아니라, 이스마엘과 지금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다른 종들까지도 포함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초민족적 성격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은 신약시대에 있을 이방인들의 구원을 암시하였다고 보인다.

[11-12절]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고 명령하셨다. 할례는 남자의 양피 곧 음경의 귀두를 싼 가죽을 자르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포경수술이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이었으며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든지 이방인에게서 돈으로 산 자든지,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다. 남자의 양피의 제거는 죄와 불결을 제거하는 뜻이 있었다. 남자의 성기는 인간의 죄와 정욕이 표출되는 부분으로 간주되었다고 보인다. 할례는 성결과 절제를 교훈한다고 본다.

[13-14절]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할례를 통해 언약의 표를 그들의 살에 두라고 말씀하셨고 또 할례를 받지 않는 남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할례를 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자로 간주되었다.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말은 그들의 사회로부터의 출교, 혹은 사형, 혹은 하나님의 직접적 징벌로 인한 죽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15-16절]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고쳐주셨고 그에게 복을 주셔서 아들을 낳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열국의 어미가 되고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사라’라는 말은 ‘공주 혹은 귀부인’이라는 뜻이다(BDB).

[17-19절]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100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며 100세된 자신과 90세된 아내 사라에게서 어떻게 자식이 날까 하고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께 이스마엘이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에게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지만, 그 약속이 여종 하갈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참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삭은 ‘그가 웃는다’는 뜻인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웃음을 기억나게 하는 이름이었다.

[20-21절]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衆多)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는 아브라함의 말을 들으셨고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셔서 그 자손도 번창케 하실 것이며 그가 열두 방백을 낳아 큰 나라가 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내년 이맘때에 아브라함에게 주실 아들, 이삭과 언약을 세우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출생을 분명하게 약속해주셨다.

[22절]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하나님께서는 땅으로 내려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다(마 6:9). 주 예수께서 올라가신 곳은 바로 그 하늘이다. 사도행전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그곳을 사모해야 한다.

[23-27절]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99세이었고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13세이었더라. 당일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생장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23절의 ‘이 날에’나 26절의 ‘당일에’라는 원어는 동일한데, ‘바로 그 날에’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바로 그 날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온 집안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99세이었고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이었다.

본장의 중요한 진리와 교훈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민족적 성격을 가지는 동시에 초민족적 성격을 가졌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의 백성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아브라함의 종들과 그의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에게도 해당되는 점이 있었다.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다. 그것은 이방인의 구원을 암시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복을 받은 자들이다(갈 3:29). 우리는 전에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었으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에 참여한 자가 되었고(엡 2:19; 3:6),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천국을 얻은 자가 되었다.

둘째는, 할례의 진리이다. 할례는 죄와 불결을 끊어버리는 것을 상징하였고, 그것은 중생(重生)의 씻음과 성화를 의미하였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다(레 11:44; 19:2).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들의 죄사함과 거룩한 삶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성경은 마음의 할례에 대해 말하며(신 10:16; 렘 4:4; 9:26), 그것을 강조한다(롬 2:28-29).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살전 4:3). 죄사함과 거룩한 삶은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교훈의 주요한 내용이다.

셋째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완전하라는 교훈이다. 그것은 경건한 삶과 책망할 것이 없는 의롭고 선한 삶을 가리킨다.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경건이다. 또 의롭고 선한 삶이 완전한 삶이다. 그것이 책망할 것이 없는 성화된 삶의 모습이다. 그것이 바로 거룩하고 성결한 삶이다. 성결과 절제, 의로움과 선함은,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써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


18장: 하나님의 나타나심

1-19절, 하나님의 나타나심

[1절]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엘로네)[테레빈스 나무들]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여호와께서 나타나셨다. 역사상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고 매우 드문 일이다. 창세기 17장은 아브람의 99세 때에 그가 나타나셨음을 증거했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인격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사람에게 나타나실 수 있고 나타나셨다. 그는 마침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14).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셨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초월자이시므로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실 수 없고 사람이 육신적으로 경험하거나 또 그 경험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잘못된 사상이지 성경 진리와 다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체적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셨다고 증거한다. 그것은 신화적 묘사가 아니고 사실적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장소는 마므레의 테레빈스 나무들 근처 장막문에서이었고 시간은 오정 즈음이었다. ‘오정 즈음’이라는 원어(케콤 하이욤)는 ‘낮의 뜨거움’이라는 말로 ‘한낮 즈음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체적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셨다.

[2절]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장막문에 앉았다가 맞은편에 사람 셋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세 사람은 둘은 천사요 하나는 하나님이셨다. 다음에 나오는 10절과 13절은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계속 아브라함과 말씀하고 계셨고 두 사람만 소돔 성으로 갔고 19:1은 두 천사가 소돔 성에서 롯의 영접을 받은 것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은 그 세 사람이 특별한 자들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히브리서 13:1-2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하였다. 정통 유대교 서기관들인 마소라 학자들은 3절의 ‘내 주여’라는 말을 하나님께 대한 호칭인 아도나-이로 읽었다.32)

[2-5절]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였다. 이것은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옷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본 것이 곧 주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5:35-36, 40). 또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였고(롬 12:13), 또 감독의 자격요건 중 하나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말하였다(딤전 3:2).

아브라함은 어떻게 손님을 대접하였는가? 우선, 그는 달려가서 그들을 영접하였다. 그것은 그가 즐거운 마음으로 영접했음을 보인다. 또 그는 몸을 땅에 굽혔다. 그것은 그가 겸손한 마음으로 영접했음을 보인다. 또한 그는 그들에게 ‘내 주여’라고 말했고 자신을 ‘종’이라고 말했다(3, 5절). 이것은 손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춤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고(마 20:26-27), 사도 바울은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며 피차 복종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0; 엡 5:21; 빌 2:3).

또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자신을 떠나 지나가지 말 것을 간청하며 그들에게 발 씻을 물을 드리고 떡을 제공하겠다고 말한다. 그의 대접은 자원적이었다. 성경은 우리의 선행이 억지같이 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되어야 할 것을 교훈한다(몬 14). 또 사도 바울은 우리의 헌금도 인색함이나 억지로가 아니고 즐거움으로 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고(고후 9:7), 또 사도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양 무리를 돌보는 목회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벧전 5:2).

[6-8절]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아브라함은 급히 그의 아내 사라에게 가서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떡을 만들라고 부탁했다. 세 스아는 약 22리터로 세 사람 먹기에는 넉넉한 양이다. 또 그는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해 하인에게 급히 요리하게 하였다. ‘기름지다’는 원어(라크)는 ‘부드럽다, 연하다’는 뜻이다. 그는 맛있는 고기로 대접한 것이다. 그는 뻐터와 우유와 송아지 요리를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모셔 섰고 그들은 먹었다. 요약하면,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하되, 즐거이, 겸손히, 간절히, 자원적으로, 정성스럽게 대접하였다.

[9절]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좋은 아내는 좋은 주부이다. 시편 128:3은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라고 표현했다. 디도서 2:4-5는 젊은 여자들이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것을 교훈한다. 반면에, 잠언 7:11은 ‘그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는 음녀’에 대해 묘사하였다. 좋은 아내는 집안일을 잘 하는 아내이다.

[10절]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카에스 카이야)[오는 봄에(BDB), 내년 이맘 때(NASB, NIV)]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9절에는 ‘그들이 . . . 이르되’라고 말했으나, 10절은 ‘그가 가라사대’라고 말한다. 주어가 ‘그들’에서 ‘그’로 바뀌었다. 여기에 ‘그’가 누구인지는 13-14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는 “내년 이맘 때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 14절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셨다.

[11-15절]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다.33)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웃으며 그와 그의 남편이 늙었으니 무슨 낙이 있겠는가라고 속으로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웃으며 부정적인 말 함을 지적하시며 그의 약속을 반복하셨다. ‘기한이 이를 때에’라는 말은 ‘오는 봄에’ 혹은 ‘내년 이 맘 때에’라는 뜻이라고 본다(왕하 4:16-17에도 같은 표현 나옴).

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민 11:23; 욥 42:2; 눅 1:37).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엘 솻다이)이시다(창 17:1). 그는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다(신 32:39; 롬 4:17).

[16-19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 소돔 성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몇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는 “내가 그를 택하였다”고 말씀하셨다(19절). ‘내가 그를 택하였다’는 원어(예다티우)는 ‘내가 그를 알았다’는 단어이다. ‘안다’는 말은 ‘호의적으로 안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선택하심을 의미한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둘째로,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의를 행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주관심은 사람이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그 자손들에게 명령하고 가르쳐야 할 내용이다. 부모는 자신과 자녀들을 의의 말씀인 성경말씀으로 교육해야 한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에베소서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8-19절).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12:3에 나와 있는 말씀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 복의 약속은 창세기 22:18에서도 반복될 것이다. 이 복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구원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자가 되자. 아브라함은 즐거이, 겸손히, 간절히, 자원적으로, 정성스럽게 손님을 대접하였다. 선행은 경건과 의의 열매이다. 하나님의 계명의 요점은 사랑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사람을 사랑하며 손님 대접도 잘한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장로의 자격 요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함으로 하나님을 대접하였다. 잠언 19:17은 가난한 자에게 구제한 것이 하나님께 꾸어드린 것이라고 말했다. 주께서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그의 제자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교훈하셨다(마 25:31-46).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고 구제하는 자가 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접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자. 99세된 아브라함과 89세된 사라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들처럼 회의주의자나 불신앙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 자들이었다(마 22:29).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들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부활과 천국과 영생에 대한 그의 약속을 믿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 곧 영생, 천국, 몸의 부활의 복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예수님 믿고 죄사함 받고 실제로 의롭게 살다가 마침내 그 복을 다 받는 것이다.

20-33절, 의인 열 명이 없어서

[20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한 도시가 악화되는 것은 매우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 같다. 처음에는 악한 자들의 악한 행위로 인해 의인들의 고통과 부르짖음이 있고 여론의 지적과 비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악의 세력이 커지고 악에 대한 반대는 약해진다. 도시는 점점 더 악에 물들어간다.

사회의 도덕적 갱신과 회복은 오직 종교적 각성에서만 가능하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잠언 16: 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종교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도시, 그 사회는 도덕적 갱신과 회복의 가망성이 없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컸다. 그것은,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의인들과, 그 사회에서 밀려나고 사라져 가는 순진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의 부르짖음이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伸寃)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고 외치는 큰 소리를 들었다(계 6:9-10). 그런 부르짖음이 소돔 성을 위해서도 있었을 것이다

또 선한 천사들의 부르짖음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의인들을 섬기는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다고 말씀하셨다(마 18:10). 또 소돔 성에 살았던 의로운 롯의 부르짖음도 있었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2:7-8에 보면, 소돔 성에 살았던 의로운 롯은 날마다 저 무법하고 불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들을 보고 들음으로 심령이 상하고 고통을 느꼈고 아마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것이다. 그의 부르짖음은 하나님께 들려졌다.

소돔의 죄악은 심히 무거웠다. 죄들은 다 악한 것이지만, 그래도 그것들 가운데 그 죄의 성격상 작은 죄가 있고 크고 중대한 죄가 있다. ‘부지중에 지은 죄, 실수로 지은 죄, 연약하여 지은 죄’는 작은 죄이고, ‘알면서, 고의적으로, 반항적으로 지은 죄’는 큰 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고의적인 큰 죄를 짓지 말고 작은 죄도 조심해야 한다.

[21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소돔 성의 죄악된 형편을 확인하기를 원하셨다. 그가 유한(有限)한 사람처럼 무엇을 직접 확인하셔야 비로소 그것을 아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全知)하시다. 시편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의 확인하심은 실상 우리로 확인케 하시는 뜻이 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죄악으로 인해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였다. 그것은 우리로 소돔 성의 멸망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이심을 알게 한다. 말세의 적그리스도 왕국과 배교한 교회도 그러할 것이다. 성경은 그 죄가 하늘에 사무쳤고 하나님께서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셨다고 말한다(계 18:5). 그때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다.

[22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그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세 명의 사람들 중 하나님을 뺀 나머지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창세기 19:1은 소돔 성에 두 천사가 나타났다고 기록한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라는 구절의 원래 히브리어 원문은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 앞에 계속 서 계셨더니”이었으나, 유대교 서기관들이 오래 전에 이 구절을 한글개역 본문과 같이 수정하였다.34) 그러나 원문에서 다음 절의 주어가 ‘아브라함’이므로(한글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본절의 주어는 ‘아브라함’보다 ‘여호와’가 더 자연스럽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떠나지 않으시고 계속 그 앞에 서 계셨다. 그는 아브라함을 친근히 하셨고 교제하기를 원하셨다. 이사야 41:8에 보면, 그는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부르셨다.

[23-25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50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50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갔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양심의 거리낌을 가지면 가까이 나갈 수 없다. 아담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 3:8). 주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요 3:20-21).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신명기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라.” ‘친근히 한다’라는 원어(다바크)는 ‘꼭 붙든다’는 뜻으로 ‘부종(附從)한다’고 번역되기도 하였다(신 11:22).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꼭 붙들어야 한다. 야고보서 4:7-8,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아브라함의 질문은 당돌해 보였다. 그는 하나님을 가르치고 책망하는 듯한 어투로 말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질문의 내용은 정당하였다.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다루셔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공의로 심판하셔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단지 아브라함은 세상을 너무 선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죄악된 소돔 성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의인이 50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 그는 무지했다. 그는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잘 모르고 있었다.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너무 절망적이게 보아서도 안 되겠지만, 세상을 너무 선하게 보아서도 안 된다.

[26-31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50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50 의인 중에 5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5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45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40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40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30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30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20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20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비천함과 무례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라는 원어(아노키 아파르 와에페르)는 ‘저는 티끌과 재입니다’라는 뜻이다. 사람은 티끌과 재이다. 그는 본래 흙으로 지음 받았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거기에 ‘흙으로’라는 원어(아파르 민-하아다마)는 ‘땅의 흙으로’라는 뜻이며, 거기에 ‘흙’이 바로 본문에 ‘티끌’과 같은 단어이다. 히브리어로 ‘아담’은 첫사람의 이름인 동시에 ‘사람’이라는 보통명사이기도 한데, 사람(아담)은 땅(아다마)에서 나왔다. 사람은 티끌과 재 같은 존재이다.

아브라함의 계속되는 끈질긴 대화는 그의 확고한 도덕적 신념을 보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과 악,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심판하셔야 한다는 신념이다. 그는 그의 무지한 관대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례한 대화를 계속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무지한 생각을 오래 참으셨고 너그럽게 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 아브라함을 상대해주셨고 그를 단번에 무시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너그러움과 인내심도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 더 바르고 좋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무지하고 무례한 질문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며 너그러이 대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32-33절]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10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10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소돔과 고모라 성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롯의 가족들이 겨우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그것도 그의 아내는 실패하고 두 딸들은 근친상간적 죄를 지을 것이다. 그러면 실상 의인은 롯 한 사람뿐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는 그토록 오랫동안 소돔 성에 살면서 마음 고생만 많이 했고 결국엔 빈손으로 그곳을 떠나야 할 것이다. 베드로후서 2:7-8,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20절부터 33절까지의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큰 죄를 짓지 말자. 죄들 중에는 그 성격상 큰 죄도 있고 작은 죄도 있다. 부지중에, 연약하여, 실수로 짓는 죄는 작은 죄이다. 물론 우리는 그런 죄도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모든 죄는 다 하나님을 근심시키고 노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알면서 짓는 죄, 고의적인 죄, 반항적이게 짓는 죄를 극히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큰 죄이다. 그것은 회개하기 쉽지 않은 죄이다. 그런 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고칠 수 없는 심령의 심각한 병이다. 우리는 고의적인 큰 죄를 짓지 말자. 우리는 멸망하는 소돔 성 사람들처럼 되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시고 공의로 보응하심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불의하거나 편벽된 심판자가 아니시다. 그는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키는 자가 아니시다. 그는 무정한 자가 아니시다. 그는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악에 대해서 엄하시다. 그는 사람들이 행한 대로 공의롭게 보응하신다. 그러므로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로마서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죄인들은 모든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도시와 나라의 멸망을 막을 의인 10명이 되자. 소돔 성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서울과 우리나라는 소돔 성보다 나은가? 오늘날 서울의 밤거리는 소돔의 밤거리보다 나은가? 오늘날 세상은 점점 더 불경건하고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 되고 있다. 현대 문명은 부도덕하고 음란한 문명이 되고 있다. 지구의 종말이 오고 있다. 이 세상이 멸망할 때, 거기에서 구출될 거룩한 교회의 회원들은 누구인가? 서울의 멸망을 막을 의인 10명은 어디 있는가?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할지라도, 우리는 남은 자가 되자.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지키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되자.


19장: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소돔 성이 위치한 요단 들은 비옥한 땅이었고 그들에게는 먹을 것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었다(창 13:10; 겔 16:49). 그러나 소돔 성의 사람들은 큰 죄인이었고 그들의 죄는 심히 컸다(창 13:13; 18:20).

[1-3절]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 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經夜)하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無酵餠)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아브라함에게 찾아 왔던 세 사람들 중 하나님을 제외한 천사 두 명은 날이 저물 때에 소돔 성에 이르렀는데,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몸을 굽혀 절하며 자기 집에 들어와 쉬었다 가기를 간청하였다. 그는 그들을 위해 식탁을 베풀고 누룩을 넣지 않은 가루반죽으로 빵을 구워 대접하였다. 롯은 손님을 친절히, 겸손히, 간절히 영접하며 대접하였다.

[4-5절]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상관하리라’는 원어(네드아)는 ‘알리라’는 말로서 ‘성적으로 관계하리라, 성 관계를 가지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동성애(同性愛)를 가리킨다. 동성애는 변태적 음란 행위의 한 형태로서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큰 죄악이다(레 18:22). 소돔 성은 어른이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또 온 사방이 전체적으로 매우 타락하여 있었다.

[6-8절]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롯은 자기 집에 들어온 귀한 손님들을 동성애의 악으로부터 지키기를 원했다. 그는 엄하게 키웠던 순결한 두 딸을 대신 내어주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그의 제안이 옳아 보이지 않지만, 그는 동네 사람들이 손님들에게 행하려는 행위는 더 큰 악이라고 보았다.

[9절]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소돔 사람들은 무법한 폭력자들이었다. 그들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 했다. 소돔 성은 무법하고 죄악된 도시이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남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다.

[10-11절]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으며 문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

천사들은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밖의 무리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문을 찾지 못하게 했다. 천사들은 필요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신기한 일을 행할 수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후에 엘리사 때에도 그를 잡으려고 도단 성을 포위한 아람 군사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었다(왕하 6:18).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 비상한 방법으로 자기의 종들을 보호하셨다.

[12-13절]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밖으로 이끌어내라.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소돔 성 거민들에 대한 부르짖음’은 죽은 의인들이나 롯이나 천사들의 부르짖음일 것이다. 그 성은 곧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롯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은 성밖으로 도피하여야 했다.

[14절]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후에 선지자 요나 때에 니느웨 사람들은 “40일 후에 이 성이 망하리라”는 요나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였었다. 그러나 멸망받을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

[15-17절]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그 성과 함께 멸망을 받지 않으려면, 롯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성을 멀리 떠나야 하였다. 이 세상이 장차 멸망할 곳임을 아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18-22절]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은 도망하기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로 그곳에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너의 말하는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롯은 산까지 도망가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한 작은 성으로 피하게 해주기를 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롯을 아끼셨다. 그는 그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그와 그 가족이 소알이라는 작은 성에 도피하기까지 기다려주셨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 그 두 성 뿐만 아니라 아드마와 스보임 성까지도(창 14:8) 멸망했던 것 같다(신 29:23). 단지 소알 성만 제외되었던 것 같다(21절).

[23-25절]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하고 음란한 소돔 성에 무서운 불의 심판을 내리셨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으로 증거되었던 하나님의 공의가 또다시 증거되었다. 그 비옥했던 요단 들은 사람들의 큰 죄로 인해 황폐하게 되었다. 그 후 소돔과 고모라 성은 유대 땅 동남부에 위치한 염해(鹽海) 속에 잠겨 있는 것 같다. 그 바다는 매일 평균 500만톤의 물이 흘러 들어오지만, 섭씨 40도의 고온으로 계속 증발하여 일정한 수위(水位)를 유지한다고 하며 그 염도는 보통 바닷물의 10배나 된다고 한다. 그래서 염해[소금 바다]라 불리고 또 물고기들이 살지 못한다고 해서 사해(死海, the Dead Sea)[죽음의 바다]라고도 한다. 아랍 사람들은 그것을 ‘소돔 고모라의 바다,’ ‘롯의 바다’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바닷물은 염분(염화 나트륨) 외에 마그네슘, 칼슘 등의 무기물이 풍부하고 그 주위에는 역청 진흙과 유황도 많다고 한다.35)

[26절]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사해 남단에는 ‘소돔의 산’이라고 불리는 소금 산이 있다. 길이 약 10km, 너비 약 5km, 높이 약 300m인 이 산의 표면은 몇 자 정도 흙으로 덮여 있으나 그 속은 딱딱한 소금이다(Amplified Bible).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가 아마 그 속의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다. 주께서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셨다(눅 17:32). 그것은 세상과 물질에 대한 애착 때문에 영생의 구원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교훈이다.

[27-29절]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어도 의롭게 살았던 롯은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그를 구하셨다.

[30-38절]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에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이 밤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롯의 딸들은 아버지께 술을 먹이고 동침하여 그로 말미암아 후손을 가지려는 생각을 하였다. 그 근친상간적 생각은 소돔 성에서 듣고 배운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가증한 죄악이었다(레 18장).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기다려야 했다. 롯의 딸들은 임신하여 각각 아들을 낳았고 그들은 모압 자손들과 암몬 자손들의 조상이 되었다.

창세기 19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는 소돔 성의 죄악이다. 소돔 성은 비옥한 땅에 위치하여 물질적 유여함을 누렸지만, 심히 죄악되었다. 그 증거가 본문에 기록된 무법하고 난폭한 동성애 풍조이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성적 순결과 단정함과 염치도 없었다.

둘째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음란한 소돔과 고모라 성과 그 주위의 모든 사람을 유황불비를 내려 완전히 멸망시키셨다.

셋째는 롯의 구원이다. 세상에 의인이 없지만, 롯은 하나님의 긍휼로 겨우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천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 또 그의 딸들은 비록 구원을 받았지만, 소돔의 죄악된 풍조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하였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자. 죄악된 세상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은 역사적 사건이다. 그것은 불경건하고 심히 음란한 도시에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의 한 예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마지막 불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성경은 살인자, 행음자, 우상숭배자, 거짓말하는 자 등 모든 죄인은 최종적으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갈 것이라고 경고한다(계 21:8).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자. 롯은 유황불비로 멸망할 소돔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유황 불못인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분은 모든 죄를 회개하고 청산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요 3:16; 롬 6:23). 또 우리는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해야 하고 이미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항상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죄를 짓지 말자. 소돔의 멸망은 죄악 때문이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을 본받지 말자(롬 12:2). 우리는 악인의 꾀를 좇지 말며 죄인의 길에 서지 말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고(시 1:1),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실천하고 행위 온전한 자가 되자(시 119: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