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舊約]강해/◆ 모세오경[강해]

★창세기(Genesis) 1장-9장[Ⅰ.천지창조, Ⅳ.노아의 역사] / 김효성 목사

영국신사77 2020. 4. 1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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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김효성 목사

2020년 2월 1일 수정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 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야곱 벤 카임이 편집한 제2 랍비 성경(봄버그판)을 표준적 마소라 본문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천지 창조

2장: 사람 창조

3장: 타락

4장: 가인과 아벨

5장: 아담의 자손들

6장: 방주를 만듦

7장: 홍수 심판

8장: 방주에서 나옴

9장: 홍수 직후의 일들

10장: 노아의 자손들

11장: 연합과 분리

12장: 아브람을 부르심

13장: 롯과 헤어짐

14장: 롯을 구출함

15장: 믿음의 의

16장: 하갈과 이스마엘

17장: 할례(割禮)

18장: 하나님의 나타나심

19장: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20장: 그랄에서 아내를 빼앗김

21장: 이삭과 이스마엘

22장: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23장: 사라의 죽음

24장: 이삭의 아내를 택함

25장: 이삭의 두 아들

26장: 이삭이 그랄에 우거함

27장: 야곱이 축복을 가로챔

28장: 야곱의 꿈과 서원

29장: 야곱의 하란 생활--결혼

30장: 야곱의 하란 생활--재산

31장: 고향으로 돌아감

32장: 얍복 강변에서의 씨름

33장: 형 에서를 만남

34장: 디나 사건

35장: 벧엘로 올라감

36장: 에서의 자손들

37장: 요셉이 팔림

38장: 유다와 다말

39장: 요셉의 고난과 형통

40장: 죄수들의 꿈을 해석함

41장: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

42장: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옴

43장: 형들이 베냐민과 함께 다시 옴

44장: 베냐민을 남겨두려 함

45장: 요셉이 자기를 알림

46장: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감

47장: 이스라엘이 고센 땅에 거함

48장: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함

49장: 야곱이 열두 아들들에게 예언함

50장: 야곱과 요셉의 장례식


서론

창세기의 원어성경 명칭은 맨 처음 단어인 베레쉬스 (‘태초에’)이다. 창세기(創世記, Genesis, 기원)라는 말은 헬라어 70인역에 따른 명칭이다. 창세기는 과연 기원에 관한 책이다. 본서는 세상의 기원, 인류의 기원, 결혼의 기원, 죄의 기원, 출산의 기원, 제사의 기원, 살인의 기원, 죽음의 기원, 심판의 기원, 언약의 기원, 나라들의 기원, 이스라엘 백성의 기원, 전쟁의 기원 등을 증거한다.

창세기 저자는 모세이다. 예수께서는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할례의 규례를 모세가 준 율법이라고 말씀하셨다(요 7:23). 또 원어 성경에서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가 ‘그리고’라는 말로 시작되는 것은 두 책이 연결된 내용임을 나타낸다. 창세기는 출애굽기 이후의 책들의 배경으로서 필요했다. 이 일을 위해 모세는 적합한 인물이었다. 또 창세기 50:10-11의 “요단강 건너편”이라는 표현은 창세기의 저자가 요단 동편에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모세의 저작성에 맞다.

창세기가 한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은 다음 두 사실에서 보강된다. 첫째, 히브리어 톨레도스 하는 말이 반복해 사용되었다. 이 말은 한글성경에서 ‘대략’(2:4; 36:1, 9), ‘계보’(5:1), ‘사적’(6:9), ‘후예’(10:1; 11:10, 27; 25:12), ‘약전(略傳)’(37:2) 등으로 번역되었다. 둘째, 선택되지 않은 조상의 족보나 역사가 선택된 조상의 족보나 역사보다 먼저 기술된다. 가인이 셋보다, 야벳과 함이 셈보다, 롯과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에서가 야곱보다 먼저 기록되었다. 이 사실들은 창세기가 한 사람의 저작임을 나타낸다.

창세기의 내용은 인류의 초기의 역사(1-11장)와 이스라엘 민족의 족장들에 관한 역사(12-50장)이다. 본서의 특징적 진리는 하나님의 주권의 진리이다. 창세기는 천지만물의 창조, 사람의 창조, 하나님의 처음 명령, 첫 사람의 범죄와 에덴 동산으로부터의 추방,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불비 심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선택과 언약과 보호,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메시아 예언 등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진리를 잘 증거하였다.

본문 혹은 각주에 자주 사용된 약어

KJV

영어 King James Version.

NASB

영어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NIV

영어 New International Version.

LXX

고대 헬라어 70인역.

Syr

고대 수리아어역.

It

고대 라틴어역.

Vg

고대 라틴어 Vulgate역.

BDB

Brown-Driver-Briggs, Hebrew Lexicon of the O. T.

KB

Koehler-Baumgartner,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Langenscheidt

Karl Feyerabend, Langenscheidt's Pocket Hebrew Dictionary to the Old

Testament.

Poole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NBD

The New Bible Dictionary. IVP.

Poole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JFB

Jamieson, Faussett, Brown의 주석.


1장: 천지 창조

1-5절, 첫째 날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본절은 1장의 제목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실제적 시작을 증거한다. 

1절이 단순히 제목이라면, 

원문 2절은 ‘그리고’ 혹은 ‘그런데’라는 말(웨)로 시작될 수 없을 것이다.


‘태초에’(베레쉬스)라는 말은 ‘맨 처음에’라는 뜻이다. 

그것은 시간의 시작을 가리킬 뿐 아니라, 우주 즉 존재 세계의 시작을 가리킨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 곧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라는 원어(엘로힘)는 복수명사 형태이며 

이 말이 때때로 이방의 신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하지만(출 23:13; 왕하 18:33 등) 

영원하신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의 크심을 나타내며 

또 그가 삼위일체이심을 암시한다. 


원어에서 복수명사는 복수동사를 취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을 가리킬 때 항상 단수동사를 취한다.

1절의 ‘천지’는 우주 공간과 땅의 원소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다음 몇 절들에서 분명해진다. 창조된 천지는 아직 원시 상태에 있었다.

‘창조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만 사용되는 단어로서(BDB) 하나님께서 무(無)로부터 무엇을 만드셨음을 잘 나타낸다. 사람은 이미 있는 재료로 집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든다. 재료가 없으면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 또 사람들은 이미 있는 자연법칙을 터득하여 전기도 발명하고 컴퓨터도 발명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 외에 아무것도 없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천지를 창조하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시다. 태초에 물질이 있지 않았다. 물질은 우주의 근본이 아니다. 물질은 영원하지 않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된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우주의 근원이시다. 그가 모든 것을 만드셨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근원적인 진리이며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세에게 자신을 ‘스스로 계신 자’라고 계시(啓示)하셨다. 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 . .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여호와’라는 그의 이름은 ‘있다, 존재한다’는 단어(하야)의 고어형(하와)에서 나온 말로 ‘스스로 계신 자’라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시편 90:1-2에서,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했다(시 90:1-2).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 40:28에서 하나님을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라고 불렀다. 요한계시록 22:13에서 주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2절] [그런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영]은 수면(水面)에[그 물 위에] 운행하시니라[움직이시니라].


본절은 원문에 ‘그리고’ 혹은 ‘그런데’라는 말(웨)로 시작된다. 그것은 창조된 천지(天地) 곧 하늘과 땅의 원시적 상태를 묘사한다고 본다. ‘혼돈’이라는 원어(토후)는 ‘형태가 없음, 혼돈, 공허’ 등의 뜻이며, ‘공허’라는 원어(보후)도 ‘텅 비어 있음’이라는 뜻이다(BDB). 창조된 땅은 아직 형태가 없고 텅 비어 있었다.

또 어두움이 깊음 위에 있었다. ‘깊음’이라는 원어(테홈)는 바다의 깊음을 가리키는 말이며(시 104:6), 이어서 ‘수면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깊음은 물로 뒤덮인 땅이나 수증기로 가득한 공간을 가리키는 것 같다. 피조세계에서 기본적 요소인 물은 창조된 천지의 초기 상태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 어두움이 천지에 가득하였다. 빛이 창조되기 전까지 온 우주는 캄캄하였다.

그때 하나님의 영께서는 그 물(함마임) 위에 움직이셨다. ‘그 물’은 앞에 말한 ‘깊음’(테홈)을 가리킨다. 땅과 우주 공간은 물과 수증기로 가득한 상태이었다. 그 창조 사역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그 물 위에 계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천지만물의 창조자이셨다(요 1:3).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어떤 이들은 본절이 천사의 타락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창조하신 땅이 천사의 타락으로 혼란하고 공허해졌다고 추측했다. 창세기 1장의 내용을 천지 창조가 아니라 천지 회복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본장의 구조상 1-2절은 첫째 날 안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창세기 1-2장과 출애굽기 20:11은 천지 창조가 엿새 동안에 된 것을 증거하며, 이것은 천사들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세계의 기원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또 창세기 1:31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은 천사의 타락이 천지 창조의 6일 이전에 있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인다.


[3절] [그리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조된 천지가 아직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고 캄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빛을 만드셨다. 그는 말씀으로 빛을 만드셨다. 본장에는 ‘가라사대’ 혹은 ‘이르시되’라는 말이 11번 나온다. 요한복음 초두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로고스 lovgo")이라고 불리었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증거되었다(요 1:3).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일하셨다. 그의 말씀은 능력이 있으셨다. 사람의 말도 약간 힘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완전한 능력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으로 빛을 만드셨다. 그는 어두움도 만드셨고 빛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어두움의 세계에 빛을 만드셨다. 빛은 신기한 물질이다. 우리는 태양빛 아래서 화로의 불이나 전기 빛을 보며 살고 있다.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은 빛 가운데서만 드러난다. 빛이 있어야 만물의 존재나 색깔이 드러난다. 어두움 속에서는 물체와 그 색을 볼 수 없다. 빛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며(요일 1:5) 그의 세계는 빛의 세계이다.


[4절]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빛이 좋았음을 보셨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은 창세기 1장에 일곱 번 나온다. 이 말씀은 창조된 천지만물의 본래 상태가 좋고 아름다웠음을 보인다. 창조된 세상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면, 그것은 사람 보기에도 좋고 아름다운 세상이었음에 틀림없다. 오늘날 세상에 있는 죄와 불행은 세상의 본래 상태의 모습이 아니고 사람이 범죄한 후 상태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만드셨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빛과 어두움은 본질상 서로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혼돈과 무질서를 싫어하신다. 그는 ‘나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그는 의와 불의, 선과 악을 나누시며, 마지막 날에 의인과 악인을 나누실 것이다. 마태복음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천국은 의의 세계가 될 것이다.


[5절]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셨다. 낮과 밤이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첫째 날 하나님께서는 공간과 땅의 원질, 물, 그리고 빛을 만드셨다. 천사들의 창조도 첫째 날에 두어야 할 것이다. 욥기 38:4, 7,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시편 148:5; 골로새서 1:16.

본장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온다. 이것은 본장에서 ‘첫째 날’ ‘둘째 날’ 등의 ‘날’이 일상적인 24시간의 하루에 적합함을 보인다. 본장의 ‘날’이 긴 시대를 가리킨다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은 무의미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엿새 동안에 창조하시고 일곱 째 날에 안식하셨고 또 이것에 근거하여 안식일을 명하셨음을 생각할 때 본장의 ‘날’을 24시간의 일상적 하루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천지 창조의 처음 3일은 태양 없는 날들이었을 것이다.

본문은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라는 말은 ‘스스로 계신 자’라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말은 그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셨다는 뜻이고 그것은 그가 영원하신 분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다. 이것은 위대한 철학적 진리이다. 고대로부터 철학자들은 존재의 세계의 기원을 연구해왔다. 이 세상은 어디로부터 혹은 무엇으로부터 기원한 것인가? 이것은 고대 헬라 철학자들의 공통적 질문이었다. 창세기 1:1은 그 대답이다. 그것은 위대한 철학적 대답이다. 기독교는 위대한 철학적 대답이다.

이 세상은 무신론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과학을 빙자한 학자들은 대체로 무신론적인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믿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진화론을 믿는다. 그러나 진화론이야말로 참으로 비합리적인 이론이다. 진화론자들은 태초에 물질이 있었다고 가정한다. 그들은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더욱이, 진화론자들은 그 물질에서 우연히 생명체가 나왔고 그 생명체가 발전하여 이 오묘막측한 우주와 생명세계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도대체 합리적인가? 물질이 전능한가? 인류의 문화적 흔적의 연대가 수천년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연대를 수십만년, 지구의 연대를 수십억년으로 보려 하나, 이것은 증명되지 못한 비과학적 가설일 뿐이다.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는 풍성하다. 오묘막측한 천지만물이 그 첫째 증거이며 하나님의 많은 특별계시들과 기적들이 그 둘째 증거이다. 그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수없이 많이 나타내셨다. 성경은 하나님을 체험한 자들의 증거 문서이다. 무신론은 아무런 증거가 없지만, 기독교는 수없이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인생의 근원적 질문들에 대한 참된 대답이시다.

둘째로,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천지만물과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여기에 인간의 바른 위치가 있다. 이 세상은 주인 없는 세상이 아니고 조종사 없는 비행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섭리자이시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지 않은 신들은 다 가짜이다(시 96:5). 우리는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섬겨야 한다. 그것이 구원과 영생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셨다. 빛은 존재 세계를 드러내고 거기에 질서와 아름다움을 주었다. 어두움은 이 세상에만 있다. 성경에서 어두움은 무지와 죄, 슬픔과 불행과 죽음을 상징하고, 빛은 지식과 의, 기쁨과 행복과 생명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기쁨과 행복이 기대되는 세계이었으나, 죄가 들어옴으로 무지와 슬픔과 불행과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현재 세상은 사람의 죄로 슬픔과 불행이 많지만, 구원은 지식과 의, 기쁨과 평안과 영생을 준다.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국은 의와 평강과 기쁨과 생명이 넘치는 나라이다.

6-13절, 둘째 날, 셋째 날

본문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 6일 중 둘째 날과 셋째 날에 하신 일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둘째 날 궁창을 만드시고 그것을 하늘이라 부르셨고, 셋째 날 궁창 아래의 물이 한 곳에 모여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시며 그것을 땅이라 부르셨고 그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셨다. 또 그 날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각종 식물이 나게 하셨다.


[6-8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첫째 날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날 그가 만드신 하늘은 우주 공간이라고 생각되며 그가 만드신 땅은 아직 형태가 없는 상태였다. 또 그가 만드신 원시상태의 천지는 물이 가득하였고 하나님의 영께서는 그 물 위에 움직이셨다. 이제 둘째 날에 그는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대로 궁창이 창조되었고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이 나뉘어졌다.

‘궁창’이라는 원어(라키아)는 ‘큰 공간’이라는 뜻이다. 궁창이라는 말은 이중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좁은 의미의 궁창은 땅과 구름 사이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 같다. 본장 20절은 궁창에서 새들이 난다고 말한다. 구름은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있는 것인데, 낮은 구름의 높이는 해면에서 1.8km 미만이고 높은 구름의 높이는 10km 혹은 18km 되는 것도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1) 그러므로 땅과 구름 사이 공간인 궁창 위에는 많은 물들이 있다.

땅으로부터 100km 정도까지를 대기권 즉 공기가 있는 공간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공기의 99% 이상이 있다고 한다.2) 과학자들에 의하면, 대기권도 네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3) 그 중 맨 아래 층인 대류권에 구름들이 있지만, 대기권 전체에 땅에서 80km 높이까지의 공기 중에 평균 3.12%의 수증기가 있으며, 대기 중 수증기의 부피는 약 13,000km3, 무게는 약 13조 톤이라고 한다.4) 바다와 육지에서 증발하는 수증기 양은 연간 약 519경 톤이며5) 이것은 1초 당 약 1,645억 톤이 된다. 이 수증기들은 비와 눈이 되어 땅 위에 내린다. 이런 것을 보면, 궁창 위에 많은 양의 물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궁창은 땅과 구름 사이의 공간뿐 아니라 하늘 공간 전반을 가리키기도 한다. 궁창은 하늘(솨마임)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이 하늘은 1절에서 언급된 하늘과 구별이 없는 것 같다. 또 본장 14절과 17절은 궁창에 해와 달과 별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때의 궁창은 구름 아래의 낮은 공간의 하늘이 아니고 높은 하늘이다. 달은 지구로부터 38만km 떨어져 있고, 해는 1억 5천만km 떨어져 있고, 별들은 그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있는 궁창은 우주 공간과 동일한 의미로 보인다. 이와 같이, 궁창은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고 보인다. 좁은 의미로는 땅과 구름 사이의 공간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우주 공간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9-10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마른 땅]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마른 땅]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절과 2절은 땅과 물이 첫째 날 창조되었음을 보였었다. 하나님께서는 셋째 날 단지 물을 한 곳으로 모으시고 마른 땅이 제 모습을 드러나게 하신 것뿐이다. 형태가 없고 텅 빈 것 같았던 땅은 이제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또 바다도 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는 거대한 공과 같다. 지구의 볼록 나온 배부분을 적도라고 부르는데 그 둘레는 약 4만 75km이며 거기에서 지구의 중심까지의 거리는 약 6,378km라고 한다. 지구의 무게는 약 6섹스틸리온 톤이라고 하는데, 섹스틸리온은 10의 21제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큰 공과 같은 지구는 팽이처럼 돌고 있는데(이것을 자전이라 한다), 한 바퀴 도는 시간이 하루 즉 24시간, 정확히 말하면 23시간 56분 4.09초이다. 또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서도 돌아가고 있는데(이것을 공전이라 한다), 그것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이 1년 즉 365일, 정확히 말하면 365일 6시간 9분 9.54초라고 한다.

물이 한 곳으로 모이며 이 거대한 지구는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지구에는 높은 산들도 있고 낮은 언덕들도 있으며 넓은 평원들도 있고 깊은 골짜기들도 있다. 흔히 지구에는 여섯 개의 큰 대륙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이 그 여섯 대륙이다. 이것을 육대주라고 말한다.

이 지구에는 더운 곳들도 있고 추운 곳들도 있다. 지구에서 제일 더운 곳은 섭씨 58도나 되고 제일 추운 곳은 섭씨 영하 89도나 된다고 한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는 세 개의 층으로 되어 있으며6) 세 번째 층 즉 가장 중심층인 중심핵의 중앙에는 섭씨 약 5,000도의 뜨거운 불이 있다고 추측한다. 이 불은 때때로 화산으로 분출된다.

물들은 모여 바다를 이루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가 가진 물의 총량은 약 1억 3,600만km3이며 그것은 지구 전체를 약 2.7km 깊이로 덮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7) 지구가 가진 물의 97.2%는 바닷물이다. 바다는 육지에 닿은 곳은 얕지만, 멀리 나가면 깊어지는데 깊은 바다는 보통 깊이가 5-6km나 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깊은 바다는 깊이가 약 11km이다. 지구에는 다섯 개의 큰 바다가 있는데,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빙양, 북빙양이 그것이다. 여섯 개의 대륙과 합하여 그것을 5대양 6대주라고 부른다. 땅과 바다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이다.


[11-1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셋째 날 하나님께서는 식물들도 창조하셨다. 식물들은 세 부류로 구분되었다. 첫째는 풀(데쉐, grass)이요, 둘째는 씨 맺는 채소(에셉, herb)이며, 셋째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에츠, tree)이다. 물론 이 세 부류 안에는 수많은 종류의 풀들과 채소들과 나무들이 있었다.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상에 식물들은 35만종 이상이다. 그 중 반 이상은 꽃을 피우는 것들이다.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다. 가장 작은 것은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규조류(dia- tom)라는 것이 있고, 가장 큰 나무는 키가 88m이며 너비가 9m라고 한다. 나무의 수명은 길어서 가장 오래된 것은 4,000~5,000년된 것도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식물들을 ‘각기 종류대로’(3번이나 언급됨), 즉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을 만드셨다. 또 그 식물들은 그가 보시기에 좋았다. 식물의 세계는 아름다운 다양성을 지닌 세계이었다.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세상이 광대하고 오묘막측한 세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우리가 사는 땅은 광대한 우주의 작은 한 부분이다. 우리는 광대한 하늘, 광활한 땅, 신비한 바다를 갖춘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 크고 오묘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지혜를 다시금 깨닫는다. 우리의 눈을 높이 뜨자. 우리의 마음을 넓게 열자. 그리고 이 광대한 우주만물을 지으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과 땅과 바다, 또 각종 식물들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들이었음을 다시 생각한다. 우리는 오늘날 세상의 문제가 자연만물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 문제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의 근본적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심히 부패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도덕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문제다. 즉 죄가 문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과 땅과 산과 들판들과 꽃들과 나무들과 풀들은 아름답건만, 성경의 증거대로 사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가장 필요한 일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고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다양성을 가진 세상을 만드셨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며 순종하면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존중하고 활용해야 할 것이다. 획일주의는 하나님의 창조의 방식이 아니다. 모든 식물과 동물의 세계에 다양성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도 다양한 재능과 취미와 기술과 직업을 주셨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일들이 있고 그들이 세상에서 해야 할 역할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와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14-23절, 넷째 날, 다섯째 날


[14-19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晝夜)[낮과 밤]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四時)와 일자(日字)와 연한(年限)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장엄한 천지 창조의 6일 중 넷째 날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궁창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다. ‘하늘의 궁창’은 땅에서 볼 때 저 높은 우주 공간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로 “징조들과 계절들과 날들과 해(年)들”을 이루게 하셨다. 또 그는 그것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게 하셨다. 그는 두 큰 광명(마오르) [발광체=빛을 발하는 물체]을 만드셔서 큰 것 즉 해는 낮을 주관케 하시고 작은 것 즉 달은 밤을 주관케 하셨고 그것들로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셨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

해와 달과 별들은 참으로 신기한 창조물들이다. 해는 빛을 발하는 거대한 공 같은 가스 덩어리로서 수소 75%와 헬륨 25%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해는 직경이 약 139만km로서 지구보다 약 109배 크고 달보다 약 400배 크지만, 달보다 400배나 멀리, 즉 지구에서 약 1억 5천만km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달보다 작게 보인다고 한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해는, TNT 1메가톤 즉 100만톤급의 원자탄을 1초에 천만 개씩 계속 터뜨리는 것과 같은 가스 폭발을 함으로써 그 열과 빛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것의 표면 온도는 섭씨 약 5,500도이며, 그것의 중심 온도는 섭씨 약 1,500만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하는 큰 물체이다. 달의 크기는 직경이 약 3,476km로서 지구의 4분의 1 정도이며 지구로부터 평균 약 38만km 떨어져 있고 타원을 그리며 지구를 돌고 있다고 한다. 달에는 공기도 바람도 물도 없다고 한다.

해를 중심으로 타원형을 그리며 도는 거대한 물체들이 있는데 이것을 행성(planets)이라고 부른다. 과학자들은 지구도 그 행성 중의 하나라고 본다. 행성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별들(stars)과 다르다. 별들은 그 자체에 열과 빛이 있지만, 행성은 그런 것이 없고 햇빛을 반사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밤하늘에 보면, 행성은 지속적으로 빛나는 물체이지만 별들은 반짝거리는 물체라고 한다.

해에서 가장 가까운(약 5천만km) 행성은 지구의 반보다 작은 수성인데, 표면 온도가 섭씨 영하 193도부터 영상 342도까지라고 한다. 그 다음은 지구보다 약간 작은 금성인데, 해에서 약 1억km 떨어져 있고 표면 온도가 약 455도의 고온이라고 한다. 금성은 해가 진 후에 서쪽 하늘에서 보이므로 ‘저녁별’이라고도 하고 또 해 뜨기 전에 동쪽 하늘에서 보이므로 ‘새벽별(계명성)’이라고도 한다.

그 다음에 해에서 약 1억 5천만km 떨어져 있는 지구가 있다. 그 다음은 역시 지구의 반만한 크기의 화성인데, 태양에서 약 2억 3천만km 떨어져 있고 표면 온도는 영하 124도부터 31도까지라고 한다. 그 다음에 있는 목성과 토성은 지구보다 10배나 크며 천왕성과 해왕성은 4배나 크다. 마지막의 명왕성은 해에서 가장 멀리 있는, 평균 약 60억km나 떨어져 있는 아주 작은 행성이다. 이 행성들은 다 영하 150도가 넘는다고 한다. 햇빛은 그곳까지 약 6시간 걸린다고 한다. 해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행성들을 태양계(solar system)라고 부르는데, 그 직경은 빛의 속도로 반나절쯤 걸리는 셈이다.

별들은 멀리 떨어진 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거대한 공 같은 가스 덩어리들이다. 해도 하나의 별이다. 별들은 지구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가장 가까운 별도 지구에서 40조km 이상 떨어져 있다고 한다. 이것은 가장 빠른 제트기로도 약 100만년이 걸리는 거리이다. 또 이 별은 가장 먼 별의 거리의 10억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별은 수소 75%와 헬륨 22% 등으로 구성된 가스 덩어리가 불타고 있는 것인데, 온도와 크기에 따라서 노란색, 붉은색, 파란색을 띈다. 붉은색 별은 온도가 섭씨 2,800도, 노란색 별은 5,500도, 파란색 별은 28,000도이며, 별의 중심 온도는 약 110만 도라고 한다. 별들의 크기는 다양해서 해보다 약 1,000배나 큰 별도 있고, 지구보다 더 작은 별도 있다고 한다.

맑은 날 밤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은 약 3,000개이지만, 과학자들은 하늘에 약 2,000경[2,000억 X 10억] 개 이상의 별들이 있다고 추정한다. 별들은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해와 같은 별 1,000억개 이상으로 구성된 은하수(galaxy)가 그것이다. 은하수는 직경이 약 10만 광년이며 중앙의 두께는 약 16,000광년이라고 한다. 빛은 1초에 거의 30만km를 가며 빛이 1년간 간 거리를 1광년(光年)이라고 한다. 1시간이면 10억 8천만km, 1일이면 259억km, 1년이면 약 9조 4,500억km의 거리이며 그것이 1광년의 거리이다. 그런데 은하수의 직경은 약 10만 광년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우주에는 약 1,000억개의 은하수(galaxy)들이 있다고 과학자들은 추정한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와 그 별들은 계산할 수 없이 크고 많다.8)


[20-2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다섯째 날, 하나님께서는 물들에 큰 물고기들(핫탄니님 학게돌림)[큰 바다 동물들]과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고 하늘의 궁창에 나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것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고기의 종류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지구상에 물고기(fish) 종류는 약 21,700가지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물고기는 오늘날 과학자들이 물고기에서 제외하는 고래나 바다표범 같은 큰 바다 동물들도 포함한다. 고래는 보통 물고기와는 다르다. 보통 물고기는 아가미로 숨을 쉬고 꼬리에 수직 지느러미가 있고 대부분 알을 낳지만, 고래는 허파로 숨을 쉬고 꼬리에 수평 지느러미가 있고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운다. 또 큰 강이나 바다에는 악어 같은 큰 동물이나 거북, 게, 조개, 소라 같은 것들과, 또 낙지, 문어 같은 것들도 있다.

물고기의 크기도 다양해서 작은 망둑어는 길이가 1.3cm이지만, 고래상어는 길이가 12m이며 무게가 14톤(코끼리의 두 배)이 되고, 청색 고래 같은 동물은 길이가 30m, 무게가 200톤이나 된다. 물고기의 수명도 다양해서 숭어는 4년, 철갑상어는 50년, 악어는 56년, 메기는 60년 이상, 그리고 거북은 최고 123년된 것도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의 종류들도 다양하다. 지구상에 새들의 종류는 약 8,600가지라고 한다. 크기가 5cm, 무게가 3g밖에 안 되는 벌새 같은 작은 새도 있고, 키가 2.4m, 무게가 140kg이 되는 타조 같은 큰 새도 있다. 타조는 알도 1.4kg 정도나 된다. 또한 7,600m가 넘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기러기 같은 새도 있고, 먹이를 잡으려고 내려올 때 시속 320km 이상으로 빠르게 내려오는 송골매 같은 새도 있고, 북극 제비갈매기같이 북극에서부터 남극까지 17,700km를 나는 새도 있다. 또 수명이 긴 새도 있는데, 타조는 수명이 50년이고 까마귀는 수명이 69년이라고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사역은 참으로 위대하고 놀랍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 산들과 들판과 바다, 각종 식물들, 해와 달과 별들, 공중의 새들, 바다의 물고기들은 참으로 놀랍고 아름답다.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을 나타낸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지혜와 능력은 지극히 크시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마땅히 창조자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와 영광을 세세토록 돌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가 창조하신 이 거대한 우주와 만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신다. 그는 우주만물을 운영하시는 뛰어난 경영자와 관리자이시다. 그는 이 거대한 우주만물을 지키시고 기르시고 먹이시는 자이시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로 흐르게 하셔서 들짐승들이 목을 축이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 깃들이며 들판에 풀들과 채소들이 자라게 하시고 바다의 생물들도 먹을 것을 얻는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신다고 가르치셨다(마 6장).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와 만물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를 의지하며 그에게 복종하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거대한 우주만물의 주인이시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고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고 땅의 식물들과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거대한 우주만물의 주인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몇 번 해와 달을 비상하게 운행하셨다. 그는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아홉 번째 재앙으로 애굽 땅에 3일 동안 캄캄한 흑암을 주셨고(출 10:21-22), 여호수아가 아모리 다섯 왕과 전쟁할 때 태양과 달을 얼마 동안 멈추게 하셨고(수 10:13), 유다 왕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려 통곡하며 기도했을 때 병을 낫게 하는 징조로 해 그림자 시계가 10도를 물러가게 하셨다(왕하 20:11). 또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정오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해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 계속되게 하셨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무지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도 앗수르 나라에 멸망하기 전 이방인들의 풍습을 본받아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였고(왕하 17:16), 유다의 므낫세 왕과 백성들도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였었다(왕하 21:3). 이것은 10계명의 제1, 2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이었고 하나님을 매우 진노케 한 죄악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해와 달을 숭배해서는 안 되고, 그것들을 만드신 하나님, 그것들의 소유자이시며 홀로 운행하시는 하나님,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만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품안에 있다. 우주는 수수께끼 같은 세계가 아니다. 사람은 어둡고 광막한 우주 속에 던져져 방황하는 고아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을 포함하여 천지와 그 가운데의 만물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의 품안에 있고 그의 품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90:1). 또 하나님의 종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23편).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그 품안에서 살자.

24-31절, 여섯째 날


[24-25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카예소-에레츠, 카이얏 하에레츠)을 그 종류대로, 육축(베헤마)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레메스)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섯째 날,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생물들을 창조하셨다. 본문은 땅 위의 생물들을 세 부류로 말한다. 첫째는 가축이고, 둘째는 기는 것이고, 셋째는 땅의 짐승이다. 첫째 부류인 가축은 소, 양, 말, 나귀, 낙타, 돼지, 개, 고양이, 토끼 등 집에서 기르는 동물들을 가리킨다.

둘째 부류인 기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과학자들은 기는 동물, 소위 파충류 동물을 약 6,000종으로 본다. 물론 그것에는 악어나 거북처럼 물에서 사는 것들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것들을 제외해도 도마뱀이나 뱀 종류만 거의 3,000종에 이르며 그 중에는 비단뱀같이 길이가 9m나 되는 것도 있고 어떤 도마뱀같이 길이가 5cm밖에 안 되는 것도 있다. 또한 거기에 더하여, 개구리나 두꺼비 종류가 약 2,700가지나 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메뚜기, 개미, 바퀴벌레, 거미 등 곤충(insects) 혹은 발이 여섯 개 달린 벌레들은 무려 80만종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셋째 부류인 땅의 짐승은 소위 포유동물 중 집에서 기르지 않는 것들이다. 포유동물은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우고 새끼를 보호하며 훈련시키고 또 머리털이 있고 체온이 있고 뇌가 발달한 특징이 있다고 하는데, 이런 동물들이 약 4,000종이라고 한다. 코끼리, 사자, 표범, 코뿔소, 곰, 기린, 사슴, 원숭이, 여우 등 야생동물들이 여기에 속한다. 코끼리는 키가 7.5m, 무게가 7.5톤이나 되는 것도 있고 치타는 시속 110km로 달릴 수 있다. 또 짐승의 수명도 다양해서 코끼리같이 60년이나 사는 것도 있고 쥐같이 1년도 못 사는 것도 있다.


[26-27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사람은 땅의 동물 중 하나이거나 원숭이 같은 저급한 동물로부터 진화(進化)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창조하신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다.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되심을 암시한다. 창세기 3:22에서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러한 암시는 더욱 분명해진다.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의논하심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여기에 사람의 가치성과 존귀성이 있다. ‘형상’이나 ‘모양’이라는 말은 특별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영적 특성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 바울은 그것의 핵심을 지식과 의(義)라고 말했다.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요소들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상실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통한 구원으로 회복된다.

성경이 범죄한 사람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기 때문에(창 9:6; 고전 11:7),10) 하나님의 형상은 지식과 의 외에 사람에게 있는 어떤 독특한 점들도 포함한다고 본다. 그것들은 사람의 인격성과 생물통치권을 포함할 것이다. 사람의 몸까지도 그것의 기능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한 모습을 닮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짐승이 몸의 구조나 새끼의 출산과 양육 방식이나 지능 등에 있어서 사람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과학자들은 사람을 포유동물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사람은 본질적으로 짐승과 다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이 바로 그 본질적 차이이며 사람과 짐승의 가치의 차이이기도 하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그는 남자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사람과 생물들을 암수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방식이었다. 남자와 여자간에는 기능의 차이와 질서가 있지만, 그 둘은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귀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 누리는 복과 영광은 동등하다.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신 일차적 목적은 출산에 있었다. 출산은 하나님의 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과 바다의 생물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었고(창 1:20, 22), 하나님의 이런 뜻은 땅의 생물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었다(창 8:17). 사람은 출산을 통해 땅에 충만해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후에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도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창 9:1).

오늘날 사람들이 자녀 출산을 짐스러운 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함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까지도 그런 풍조에 물든다는 것은 회개해야 할 문제이다.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믿음 안에서 결혼하여 자녀들을 많이 출산하는 것이다. 시편 127:3-5,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箭筒)[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를 찬송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지만(사 43:21), 일차적으로는 본문의 말씀대로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흔히 ‘문화 명령’이라고 불린다. 문화라는 말 속에는 인간의 삶의 물질적, 정신적 모든 부분들이 다 포함된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그 명령을 수행해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과학과 인터넷 문명까지도 포함한다. 오늘날 땅의 개발을 반대하고 환경 보전만을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 개발은 땅을 정복하는 일이다. 단지 우리는 그 개발이 다른 이들에게 해를 주는 개발이 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어려운 일일 것이지만, 사람은 생태계 파괴를 최소화하고 자연 환경을 고려하면서 땅을 정복해야 할 것이다.

또 사람은 생물들을 다스려야 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함으로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그 목적에서 떠나며 그 임무를 포기하고 오히려 피조물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적 악을 행하였다.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 속에는 노아 홍수 후에 허락된 대로 생물을 먹을 수 있는 권한도 포함된다(창 9:3). 생물들은 윤회(輪廻)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바이므로 금지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축이나 물고기를 감사함으로 잡아먹을 수 있다.


[29-31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食物)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예레크 에세브)[푸른 채소]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사람에게 먹을 양식으로 주셨다. 그는 또 새들과 동물들에게는 푸른 풀을 먹이로 주셨다. ‘푸른 풀’이라는 원어는 ‘푸른 채소’라는 뜻이며 이것은 풀과 씨 맺는 채소를 포함하였다고 보인다. 식물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것에게 주신 원래의 양식이다. 그렇다면 본래 모든 동물은 초식동물이었다. 동물의 일부가 육식동물이 된 것은 인류가 타락하고 세상이 악화된 이후, 특히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이후이었던 것 같다.

창조된 만물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7번 나오는데, 그 중에 31절은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증거한다. 창조된 세상, 하늘과 땅, 산들과 들판, 바다와 강들과 호수들, 들의 식물들, 공중의 새들, 물 속의 생물들, 땅의 동물들은 다양하고 아름답다. 사람의 마음의 지혜와 사랑도 아름답다. 거기에는 아직 죄가 없었다. 눈물도, 고통도, 죽음도 없었다. 오늘날 세상은 창조된 본래의 모습이 아니고 천사의 타락과 그의 꾀임을 받은 첫 사람들의 범죄로 변질된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본래 만드신 세계는 진선미(眞善美)의 세계이었다. 천국의 영광은 그 이상일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땅의 생물들을 각기 종류대로 만드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을 믿는다. 진화론은 세상에 처음부터 물질이 있었고 물질에서 생명체가 생겼고 단순한 생명체로부터 복잡한 생명체로 진화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화론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진화론은 무신론적 사상이요 허무한 사상이고 비도덕적 사상이다. 진화론에는 사람의 의미와 가치가 없고 도덕적 선과 의의 근거도 없다. 거기에는 사람과 짐승들 간의 본질적 차이가 없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선포한다. 본장은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들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음을 증거한다. 그것은 진화론의 잘못을 단번에 증거한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존재 세계의 시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둘째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그것은 사람에게 주신 지혜와 지식, 의와 선, 그리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사람은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는 일은 어느 정도 해왔지만, 지혜와 지식, 참된 의와 선은 잃어버렸고 생물들을 다스리는 일도 때로는 생물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행위로 나타났다. 물론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고 약간의 도덕성이 남아 있지만, 세상과 사람의 본성은 매우 죄악되고 악화되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였다. 사람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해져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셋째로, 창조된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이것은 창세기 1장에 일곱 번 언급된 사실이다. 본래의 세상에는 평안과 기쁨이 있었다. 땅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난 것은 사람이 범죄한 이후였다. 생물세계도 악화되었다. 인간사회는 더욱 그러했다. 수고, 고통, 미움, 다툼, 속임, 늙음, 살인, 죽음, 또 각종 자연재해들, 전염병들, 현대사회의 각종 대형사고들, 전쟁 등이 끊임없이 있는 불행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준다.


2장: 사람 창조

1-3절, 일곱째 날에 안식하심

[1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만물’이라는 원어(콜 체바암)는 ‘그것들의 모든 것들’ 즉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라는 뜻이다. 또 ‘이루니라’는 말은 ‘이루어지니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일은 6일 동안에 다 이루어졌다. 2절은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증거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의 일이 여섯째 날까지 다 이루어졌고 일곱째 날에는 그쳤다는 뜻이다.

천지와 만물 즉 천지에 속한 모든 것들이 6일 동안 다 창조되었다. 그것은 물질 세계의 모든 것뿐 아니라 영의 세계 곧 천사의 세계까지도 창조되었음을 뜻한다고 본다. 천사들은 영들, 곧 영적 존재들이다. 천사들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시편 103:20-22는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증거하였다. 천사들은 창조의 6일 중에 아마 첫째 날에 창조되었을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창조’라는 말은 최초의 천지만물들에게만 적용된다. 그 후에는 사람이나 동식물이나 출산 혹은 번식을 통해 퍼져나간다. 출산이나 번식도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의 활동이지만, 또 그의 창조 세계 속에서 그의 행하신 기적들을 포함하여 그의 섭리의 모든 일들이 그의 크신 능력으로 이루어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창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처음 6일로 다 끝났지만, 우리는 사두개파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지 말고(마 22:29) 하나님의 변함 없는 능력을 항상 믿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오늘날 기적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기적주의, 은사주의 같은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고 오히려 말했다.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시대에 그런 것들을 주셨으나 이제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신구약 성경말씀의 교리와 생활 교훈으로 우리를 다스리신다고 믿는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기적 체험이 아니고 성경이 가르친 매우 도덕적인 삶, 좋은 인격, 진실하고 선하고 정직한 삶이다.

[2절]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그가 만드신 그의 일을 그치시고 일곱째 날에 그가 만드신 그의 모든 일로부터 안식하시니라.” 3절 하반절은, “이는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말한다. 그 부분도 다시 번역하면, “이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그의 모든 일로부터 안식하셨음이더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창조 사역을 그치시고 안식하셨다. 그는 6일 동안 창조의 일을 하셨다. ‘일’이라는 원어(멜라카)는 ‘일, 노동, 수고’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많은 일을 하셨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안식한다’는 원어(솨밧)는 ‘쉰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에 천지만물을 만드시는 놀라운 많은 일들을 행하셨고 일곱째 날에는 그 일들을 그치고 쉬셨다.

하나님의 쉬심은 사람의 생활 양식에 본이 되었다. 이것은 사람도 6일간 열심히 수고하면서 일하고, 일곱째 날에 쉬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휴식이 필요하지 않으시지만, 사람은 휴식이 필요하다. 특히, 옛 시대에 종들에게는 휴식이 매우 필요했다. 가축들도 그랬다. 그래서 출애굽기 23:12에는 “너는 6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7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님의 본을 따라 사람들에게 7일을 단위로 하는 생활 양식이 나타났다. 우리가 날들을 7일 단위로 나누는 것은 창조 때 하나님의 쉬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노아는 방주에서 비둘기를 내어보낼 때 7일을 기다렸고 또 다시 7일을 기다렸다(창 8:10, 12). 또한 야곱은 결혼할 때 7일 간격으로 두 형제를 아내로 얻었다(창 29:27).

[3절]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다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며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그의 모든 일로부터 안식하셨음이었더라”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하신 날을 복되게 하셨고 거룩하게 하셨다. 구약의 안식일의 기원이 여기 있다. 이 일은 사람이 아직 범죄하기 전에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제7일을 복되게 하셨고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이와 같이, 안식일 계명 자체는 모세의 율법에서 성문화되었지만, 안식일은 창조 때부터 암시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그의 친 음성으로 주실 때 제4계명 즉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자신의 일곱째 날의 안식에 근거시키셨다. 출애굽기 20:8-11은 이렇게 말씀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구약의 안식일은 복된 날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 영적으로, 육적으로 유익하였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23:12는 “너는 6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7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고 말씀하였다. 이사야 58:13-14는 안식일의 유익을 가장 잘 증거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聖日)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業)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안식일은 사람에게 짐이나 부담으로 주신 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복이었다. 물론, 하루의 구별은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쉬라”고 명하셨다(출 34:21). 그러나 그것을 지킬 때 받는 영적 유익과 육적 유익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매우 크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막 2:27). 안식일은 사람에게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이것은 나중에 엄격한 계명과 법이 되었다. 그것이 십계명의 제4계명이다. 이 법은 매우 엄격하여 어기면 사형에 해당했다. 출애굽기 31:14-1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7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다. 이것은 엄한 명령이다.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참 안식을 예표한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또 “인자(人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8). 우리 주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죄인들을 위한 참 안식이 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16-17에서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증거하기를,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들]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다.

성도에게는 참 안식이 남아 있다. 히브리서는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교훈하였다(히 4:9-11).

이 세상은 수고로운 세상이다. 참 안식은 장차 천국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시편 90편 저자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한 후,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仁慈)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는데(시 90:10, 13-15), 하나님께서 주시는 천국에서의 안식이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신약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으로 인한 마음의 평안을 상당히 누리고 있지만,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일은 그쳤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 역사상 항상 있었고 지금도 있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눈은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시며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해 능력을 베푸신다(대하 16:9).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들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들에게는 힘을 더하시므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사 40:28-29, 31).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항상 사모하며 의지하고 환난과 고난과 핍박을 이기자.

둘째로, 죄인인 우리 인간들에게 참 안식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사도 바울은 교인들에게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기원하였다(살후 3:16). 참 안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안식과 참 평안을 항상 누리자.

셋째로, 우리는 천국에서 완전한 안식을 누릴 것을 기대하면서 세상에서 주일을 자원함으로 지키자. 우리는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지킴으로써 육신의 휴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성도들 간의 아름다운 교제와 자신의 영적 성장을 이루는 일을 힘써야 한다. 히브리서는 교훈하기를,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하였다(히 10:24-25). 우리는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 곧 복된 날로 자원함으로 지키자.

4-7절, 아담을 만드심

창세기 2:4 이하는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창조하신 일들 중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일을 좀더 자세히 증거하며 기록하였다.

[4절]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1장에서 하나님의 명칭으로 ‘하나님’이라는 말(엘로힘)을 줄곧 사용하던 모세는 본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예호와 엘로힘)을 사용한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보다 2.5배나 더 많이 사용된 명칭이다.11) ‘하나님’이라는 명칭(엘로힘)은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능력을 나타내는 것 같고, ‘여호와’라는 명칭(예호와)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심과 사람과 언약을 맺으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두 말은 때때로 구별 없이 사용되는 것 같다.12)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곧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여호와이시다.

창세기에 하나님의 두 명칭이 나오는 것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잘못된 추측대로 두 저자가 쓴 다른 문서들이 후대에 익명의 저자에 의해 편집되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니다. 창세기는 모세가 쓴 것이다. 물론 모세 이전에도 창조 사건에 대해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내용들이나 기록물들이 있었으며 모세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그런 것들을 참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 내용을 다 썼고 이 내용이 다 진리이며 사실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다(딤후 3:16).

본문에 ‘대략’이라고 번역된 원어(돌레도스)는 창세기에 10번 나오며 ‘대략’(2:4; 36:1, 9), ‘계보’(5:1), ‘사적’(6:9), ‘후예’(10:1; 11:10, 27; 25:12), ‘약전’(37:1) 등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이 말은 2장부터 37장에 이르기까지 사용됨으로써 창세기 저자가 한 사람임을 잘 나타낸다. 그가 바로 모세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던 시대에 책을 쓸 수 있었던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5-6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얼른 보면, 본문이 증거하는 천지만물의 창조 순서가 창세기 1장이 증거하는 순서와 달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창세기 1장은 천지만물의 창조 전반을 순서적으로 기술한 것이고, 창세기 2장은 사람 창조에 대하여 좀더 자세하게 기술한 것이다. 창세기 1장의 내용과 2장의 내용은 서로 보충적이다. 셋째 날에 풀과 채소와 나무가 창조되었지만, 여섯째 날에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않았었다. 초목이라는 원어(시아크)는 ‘떨기나무(관목)’를 가리킨다. 초목이나 채소가 아직 들판에 두루 퍼지지 않았고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고 있었다는 뜻이다.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지으셨다. ‘사람’이라는 원어는 아담이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생기(生氣)’라는 원어(니쉬마스 카이임)는 ‘생명의 호흡’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사람의 ‘영’의 창조를 가리켰다고 본다. 여기에 ‘생명’이라는 말(카이임)은 ‘생명들’이라는 복수명사로서 충만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었다’는 말은 ‘사람이 산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생령’이라는 원어(네페쉬 카이야)는 ‘생물’ 혹은 ‘생명체’라는 뜻이다. 창세기 1:20, 21, 24에서는 ‘생물’이라고 번역되었고 공중의 새들이나 바다의 물고기들이나 땅의 짐승들을 가리켰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진 몸과, 생명의 호흡으로 만들어진 영이 결합되어 산 자가 되었다. 사람은 몸과 영으로 구성된 존재이다.

사람이 몸과 영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는가(이분설), 아니면 몸과 영과 영혼의 세 실체로 구성되었는가(삼분설) 하는 문제는 역사상 신학적으로 변론되어 온 문제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사람은 몸과 영과 영혼의 세 실체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고, 몸과 영의 두 실체로 구성된 존재이다. 영과 영혼은 두 다른 실체를 가리키지 않고 한 실체에 대한 두 다른 용어일 뿐이다. 그 증거는 성경에서 영과 영혼이라는 그 두 용어가 구별 없이, 교대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성경은 사람을 전체적으로 묘사할 때 어떤 곳에서는 몸과 영이라고 말하고 어떤 곳에서는 몸과 영혼이라고 말한다(전 12:7; 마 10:28). 성경은 사람의 죽음을 묘사할 때에도 어떤 곳에서는 영이 떠난다고 말하고 어떤 곳에서는 영혼이 떠난다고 말한다(눅 23:46; 창 35:18). 성경은 죽은 자의 부활을 묘사할 때에도, 어떤 곳에서는 영이 돌아온다고 말하고, 어떤 곳에서는 영혼이 돌아온다고 말한다(눅 8:55; 왕상 17:21-22). 성경은 죽은 자들을 묘사할 때에도, 어떤 곳에서는 ‘영들’이라고 말하고, 어떤 곳에서는 ‘영혼들’이라고 말한다(히 12:23; 계 6:9). 또 영혼은, 소위 삼분설자들이 생각하듯이, 영보다 저급하지 않다. 성경은 동물에게도 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경우가 있고(전 3:21) 하나님의 영혼에 대해서도 말하고(암 6:8), 또 사람의 종교적 활동을 영혼에게도 돌린다(눅 1:46).

하나님께서 몸을 만드셨다는 것은 몸도 소중히 여겨야 할 요소임을 보인다. 몸은 저급한 것이 아니다. 물질세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이며 결코 저급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천사같이 영으로만 된 존재가 아니고 몸을 가진 존재이다. 장차 부활 때에도 사람이 영으로만 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영화롭게 변화된 몸을 가진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몸을 잘 먹이고 잘 보살펴야 한다. 사람이 몸을 위해서는 적당한 영양 섭취와 수면과 운동이 필요하다. 그런 것을 무시하고 몸을 학대하는 것은 건전한 생각이 아니다. 몸의 기본적 욕구를 부정하는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음식은 사람이 감사함으로 또 맛있게 요리하여 먹을 수 있는 것이며 결혼의 즐거움도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는 복이다.

사람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매우 약하다. 잘못 넘어지면 살이 찢어지고 터져 피가 나고 뼈에 금이 가거나 부러지기도 한다. 사람은 범죄한 이후 몸이 더욱 약해져서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또 세월이 지나면 노쇠해진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43은 현재의 우리의 몸을 ‘약한 몸’이라고 표현했고 고린도후서 4:7은 우리 몸을 ‘질그릇’이라고 말했고 4:17은 우리의 겉사람이 후패하며 낡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여성들의 몸은 연약하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7은 여성을 남편이 잘 보살펴야 할 ‘연약한 그릇’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몸보다 더 소중한 부분은 영이다. 영은 몸의 활동을 통제하는 사령관이다. 영은 생각하고 느끼고 결심한다. 마음은 영의 활동양식이다. 몸은 영의 지시와 마음의 결심대로 행동한다. 사람은 몸만 가진 존재가 아니고 또한 영을 가진 존재이다. 하나님과 영을 부정하고 세상에는 오직 물질만 있다고 보는 유물주의(唯物主義) 사상은 무지하고 허무하고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상이다.

사람은 영이 건강하고 평안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의 건강을 위한 양식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4:4). 사람의 영의 건강과 평안은 하나님 안에 있다. 죄는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의 근본 원인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받고 의의 길을 걷는 자들의 심령은 항상 평안하다.

사람의 영은 몸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마음이 평안하면 몸도 평안하지만,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살며 심령으로 평안하고 강건할 때 몸도 건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잠언 3:7-8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고 말했고, 잠언 18:14는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말했다.

사람은 몸과 영의 두 실체가 결합된 존재이며 그 둘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이다. 또 그 두 실체는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의 평안도, 몸의 건강도, 우리의 생명까지도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32:39에서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출애굽기 15:26에서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영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임을 알고 몸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의 정당한 욕구를 부정하지 말고 또 몸을 학대하지 말고 잘 먹이고 적당하게 쉬게 하고 잘 관리하고 보살펴야 한다. 적당한 영양 섭취와 적당한 수면과 적당한 운동은 몸을 위해 선한 일이며 그런 것을 천히 볼 것이 아니다. 특히 남자는 여성의 몸이 연약함을 알고 잘 보살펴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선한 일을 위해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영이 우리의 몸보다 더 귀함을 알고 영의 건강을 위해 힘써야 한다. 죄로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났다. 이제 영의 건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행하고 계명을 순종하며 죄 짓지 않고 의롭게 살 때 얻는다. 사람은 밥만 먹으면 사는 육적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고 그 말씀을 통해 평안과 힘과 용기를 얻는 영적 존재이다. 또 우리의 영은 몸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건강하면 몸도 건강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고 말했고 또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한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몸도 영도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몸도, 영도 다 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경건하게 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성경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했고(갈 5:16), 또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했다(딤전 4:7-8). 우리는 경건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자.

8-17절, 에덴 동산에서 주신 명령

[8-9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동방의 에덴’이라는 말은 에덴 동산이 모세가 글을 쓴 곳에서 볼 때 동쪽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에덴 동산은 실제 장소이다. 에덴이라는 원어는 ‘우아함, 기쁨,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그곳은 우아함과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이었다. 아담을 위해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준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아름답고 복된 천국,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을 준비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을 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움의 하나님이시며 그가 창조하신 세계는 아름다운 세계이다. 그가 만드신 나무들은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이었고 먹기에 좋은 열매들을 맺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사과와 포도, 복숭아와 감 등 다양한 과일들을 맺었을 것이다. 과일과 열매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주신 좋은 음식이다.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 이것들도 실제의 나무이었을 것이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그것을 먹으면 건강하고 영생할 만한 열매이었던 것 같다. 범죄한 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천사들과 화염검으로 그 길을 막으시고 지키셨다. 그 나무는 영생이 있음을 암시한다. 천국에도 생명나무가 있을 것이다(계 22:2). 한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람을 시험하는 나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를 두고 사람을 시험하실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선이 되고 거역하면 악이 됨을 알게 될 것이다.

[10-14절]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세째[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에덴은 높은 지대이었다. 거기에는 강들의 발원지인 샘이 있었다. 강은 에덴에서 시작되어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 에덴 동산에서 흘렀던 강으로부터 네 강들이 갈라졌다는 묘사는 에덴 동산이 실제적 장소이었음을 증거한다. 이것은 신화가 아니다. 이것은 에덴 동산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진실한 내용이다. 성경에서 비유와 상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역사적 서술을 비유적,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잘못이다.

첫 번째 강은 비손이다. 본문은 비손강이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다’고 말한다. 비손강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하윌라 땅은 아프리카 동북부의 이디오피아 지역이다. 세상이 창조된 이후 지구의 지형에 대변화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하윌라’라는 이름은 함의 손자, 구스의 아들 중에도 있고(창 10:7), 셈의 6대손 중에도 있다(창 10:29). 베델리엄은 그 정확한 뜻을 모르나 아랍역이나 다수의 유대교 랍비들은 그것을 ‘진주’라고 보았다.

두 번째 강인 기혼의 위치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 강이 구스 온 땅에 둘렸다는 표현은 나일강을 생각나게 하지만, 구스는 오늘날의 이집트와, 수단 동쪽 지역을 가리키며 나일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반면, 다음에 언급된 셋째와 넷째 강인 힛데겔과 유브라데는 북쪽에 있고 북에서 남으로 흐르기 때문에 지형의 대변화를 전제하지 않고는 이 강들의 공통적 근원지를 상상하기 어렵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 때 아마 지구의 지형에 대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셋째 강인 힛데겔은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는 티그리스강을 가리키고, 넷째 강인 유브라데는 오늘날 시리아와 이라크를 가로지르는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킨다. 이 두 강은 오늘날 아르메니아에서 발원하여 이라크로 흐르고 있다. 그것들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큰 강이다.

[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다스리다’는 원어(아바드)는 ‘일하다, 가꾸다, 경작하다’는 뜻을 가진다. 사람에게 처음 주어진 일은 동산을 가꾸며 경작하는 일, 즉 농사짓는 일이었다. 그것은 아담에게 즐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노동은 저주의 결과가 아니었다. ‘지키게 하셨다’는 말은 악한 자의 침입을 예상하는 말이다. 얼마 후 아담은 타락한 천사의 시험을 받을 것이다. 천사의 타락은 오래 전의 일이 아니고 단지 얼마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높으신 뜻 가운데 천사의 타락을 허락하셨다. 아담은 타락한 천사의 시험으로부터 자신과 그 에덴 동산의 기쁘고 복된 상태를 잘 지켜야 했다.

[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처음 명령을 주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 간의 기본적 관계를 보여준다. 즉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무엇을 명령하실 수 있는 위치에 계시고 피조물인 사람은 그에게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 기본적 관계는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모든 인류의 관계이며 또 어느 시대에나 변함이 없는 관계인 것이다.

아담의 실패와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은 이 기본적 관계를 잘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왔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도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고 그의 음성을 항상 거역한 데 있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신명기 10:12-13에서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였다.

전도서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증거하였다(전 12:13).

신약 성도들도 마찬가지의 의무 아래 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했다(롬 6:22).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처음 명령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유를 주셨음을 보인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나는 여러 가지 맛있는 과일들을 그가 원하는 대로 따먹을 자유가 있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먹는 즐거움을 누릴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자유는 하나님의 명령 안에서의 자유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명령에 금지하는 한가지 내용을 포함시키셨다. 그것은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허락하셨고 단지 한가지만 금하셨다. 그것은 아담의 순종을 시험하시는 내용이었다. 아담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기계와 같이 만들지 않으시고 자신의 형상과 같이 만드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자유로이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처음 명령을 주실 때 죽음에 대한 경고도 분명하게 주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보인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은 과장된 경고가 아니었다. 그 경고대로 범죄한 아담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순종은 생명이요 불순종은 죽음이었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롬 6:23). 성경은 그 죽음이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 단절됨으로 평안을 잃어버리고 불안과 공포와 고통 속에 사는 것과, 몸이 늙고 병들고 연약하다가 죽는 것과, 또 몸과 영혼이 함께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우는 것을 다 포함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처음 명령 속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암시도 있었다. 그 명령은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그 영생은 또한 에덴 동산 가운데 있는 다른 한 나무인 생명나무를 통해서도 암시되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39). 아담의 범죄는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죄씻음과 영생을 가져온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디도서 1:2-3,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 안에 영생이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간의 기본적 관계는 명령과 순종의 관계이다. 우리는 이 기본적 관계를 이해하고 기억해야 한다. 이 관계는 오늘날에도 변함 없는 진리이다. 인류의 불행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는 데서 왔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바는 죄와 불순종의 결과는 멸망이라는 진리이다. 우리는 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의 뜻을 거슬러 죄의 낙을 누리며 살았을지라도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고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자.

둘째로, 우리는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첫 사람 아담은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했다. 물론 아담의 자손인 인류는 선을 행할 자유 의지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시 몸의 죄성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성경책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하나님의 선한 일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즐거이 드리며 순종하며 충성하자.

셋째로, 우리는, 아담은 하나님의 처음 명령에서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받았음을 깨닫고 감사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죄사함과 영생의 소식이다. 이것이 성경의 요지이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며 방법이었다. 어떤 악한 자라도 구주 예수 앞으로 나아오면, 예수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인들의 추하고 더러운 죄를 다 씻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주실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밝히 증거된 복된 소식이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구원을 받았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분은 없는가? 사람이 구원받는 길은 구주 예수께로 나아와 그를 믿는 길밖에 없다.

18-25절, 여자를 만드심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獨處)하는[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여기시며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만드시기를 원하셨다. 아담이 홀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여자를 만드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물론 거기에는 자녀 출산이라는 하나님의 뜻도 있었다. 아담은 결혼을 통해 자녀들을 출산하여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기쁘신 뜻이었다.

‘돕는 배필’이라는 원어(에제르 케네그도)는 문자적으로는 ‘그 앞에 늘 있는 돕는 자’라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그에게 맞는 돕는 자’(a helper suitable for him)라고 번역하였다. 한글개역성경에 ‘배필’(配匹)이라는 말은 ‘짝’이라는 뜻인데 좋은 번역 같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목적은 남자를 위해 항상 그의 곁에 있어 그와 교제하고 그를 위로하고 그를 도와주는 짝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짝이 되게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둘 다 하나님의 형상이며 동등한 영적 특권을 누리지만, 이 세상에서 그들의 역할은 다르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지음을 받았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뜻이었다. 여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본래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가정이다. 여자가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은 여자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모범적 여자의 모습을 가르친 성경은 잠언 31:10-31이다. 거기에 보면, 모범적 여자는 ‘현숙한 여인’으로 표현되며 그 값은 진주보다 크다고 말한다. ‘현숙한’이라는 원어(카일)는 ‘힘있는, 훌륭한’이라는 뜻이다. 현숙한 여자는 가정에서 자기 남편을 잘 내조(內助)하는 여자 즉 아내로서 역할을 잘 행하는 여자이다. 그 본문에 보면, 그 여자는 “살아 있는 동안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12절),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13절),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15절), “간곤한[가난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20절), “그 집안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는” 자이며(27절), 그의 자녀들은 일어나 그에게 감사하고 그의 남편은 그를 칭찬한다고(28절) 묘사되어 있다.

[19-20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지으신 각종 들짐승들과 공중의 각종 새들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새의 몸은 다 흙으로 지음 받았으므로 죽을 때 흙으로 돌아간다(시 104:29; 전 3:20). 아담은 모든 가축과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기에 아담의 지혜가 잘 드러나고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도록 창조된 그의 권위가 잘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생물들은 아담과 본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그것들 중에는 그에게 돕는 배필이 될 자가 없었다.

[21-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 처음 여자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만드실 때 아담을 만드실 때처럼 흙을 사용하여 독립적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는 아담의 갈빗대를 사용하여 만드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를 잘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별개의 두 인격체를 만들지 않으셨다. 그는 한 사람을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로 다른 한 사람을 만드셨다. 즉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환원될 수 있는 자이었다. 그 둘은 한 몸처럼, 한 인격처럼 살아야 할 자들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사용하신 것은 뜻이 있어 보인다. 그는 아담의 머리뼈나 발뼈를 사용하지 않으셨고 그의 갈빗대를 사용하셨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거나 남자에게 짓밟힘을 받는 존재가 아니고 사랑의 대상인 것을 잘 나타낸다. 가슴은 사랑의 품이다. 사람이 사랑하면 가슴이 뛰고 사랑에 실패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러므로 아내를 구박하며 학대하는 남편은 자신의 갈빗대를 스스로 치는 자와 같다. 부부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관계이다.

[23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행하신 일을 알았다. 그는 자기 눈 앞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자가 하나님께서 바로 그의 갈빗대로 그를 위해, 그를 돕는 배필로 만들어주신 아내임을 알았다. 그는 그 여자를 보고 “이 사람은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다”라고 외쳤다. 그는 그가 자기 몸의 소중한 한 부분이며 자기가 가슴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알았다. 그는 그를 여자라고 불렀다. 히브리어로 ‘남자’는 이쉬라고 하고 ‘여자’는 잇솨라고 한다. 이쉬에게서 나온 그는 잇솨라고 불린 것이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본절은 결혼의 의미를 가르쳐 준다. ‘떠난다’는 원어(아자브)는 ‘버린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자녀가 부모에 대해 가지는 효도의 의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혼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말해준다. 사람은 어릴 때 부모의 보호와 감독 아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커서 결혼한다는 것은 부모의 곁을 떠나 독립된 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보면, 결혼은 부모를 떠나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결혼시키는 부모 입장에서도, 결혼하는 자녀 입장에서도 알아야 할 기본적인 사실이다. 부모가 결혼한 자녀를 자기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할 때 자녀 부부의 마음에 갈등이 생긴다. 효도는 자녀 편에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며, 부모가 교훈은 할 수 있어도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부모는 결혼한 자녀 가정의 독립성을 인정해야 하며 자녀도 결혼 후에는 부모 의존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결혼은 또한 부부간의 관계에서 보면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사랑은 연합이다.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에서 신부는 신랑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라고 한다(아 2:16; 6:3). 이것이 사랑의 성격이다. 사랑하는 부부는 서로 상대방에게 붙잡혀 산다.

결혼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 결혼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보다 더 밀접한 관계이다. 부모와 자녀는 한 몸이 아니지만 부부는 한 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남녀를 창조하신 뜻이다. 부부는 이 세상의 어떤 인간 관계보다도, 심지어 부모와 자식의 관계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한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즉 삶의 목적과 방식과 심지어 돈주머니가 하나이어야 한다. 결혼의 이런 원리를 알고 사는 부부들은 복되다.

부부가 한 몸으로 사는 성경적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약하면 사랑과 순종이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내는 바로 남편의 갈빗대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교훈했고(엡 5:25, 28), 또 사도 베드로는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교훈하였다(벧전 3:7).

지금부터 3,500년 전, 모세도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는 하나님의 법을 전하였다(신 24:5). 성경이 남편들에게 교훈하는 바는 아내를 사랑하고 배려하라는 것이다.

한편,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 성경은 아내들의 의무를 순종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사도 바울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교훈하였다(엡 5:22-24).

또 사도 베드로도,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고 교훈했다(벧전 3:1-6).

부부는 사랑과 순종으로 한 몸이 되며 거기에 결혼의 행복이 있다. 사랑과 순종이 없는 부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결혼과 연합의 복을 모를 것이다. 자기 아내를 학대하는 남편과 자기 남편을 멸시하는 아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는 자들이다.


[25절]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처음 사람들은 순수했고 그들에게는 죄악된 생각이나 감정이 없었다. 

부끄러움은 선악의 비교 의식에서 생기는 것 같다. 

아직 악이 없는 상태에서는 부끄러움도 없었다. 물론 범죄한 이후는 달랐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여자는 본래 남자를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다. 현숙한 여자는 그 남편을 돕는 역할을 잘 행하는 아내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자신의 본래의 역할을 알고 결혼을 귀히 여기고 사모하고 자신이 결혼하여 현숙한 아내 즉 남편을 돕는 좋은 배필이 되기를 소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다.


둘째로, 결혼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 제도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결혼은 하나님의 뜻이며 복된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은 결혼을 사모해야 한다. 또 우리는 결혼이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것임을 알고 결혼시키는 부모는 결혼한 자녀를 결혼 전처럼 자기 뜻에 순응시키려 하지 말아야 하고, 또 결혼한 자녀들도 부모를 의존하는 태도를 버리고 독립적으로 가정을 세워나가야 한다.


셋째로, 결혼한 부부는 사랑과 순종으로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갈빗대인 줄 알고 사랑해야 하며, 아내는 남편을 돕는 배필로 창조된 줄 알고 그를 돕고 순종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회의 순종을 남편의 사랑과 아내의 순종의 본으로 말했다.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순종해야 한다.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가 된 부부는 참으로 행복하다.


3장: 사람의 범죄와 그 형벌

하나님과 천지 창조와 사람의 범죄에 대한 지식은 사람이 알아야 할 기본적 지식들이다.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는 그런 내용을 증거한다. 

창세기 3장은 첫 사람의 범죄와 그 형벌에 대해 증거한다. 

첫 사람의 범죄 사건은 그가 자녀들을 가지기 전이었으므로(창 4:1) 

그가 창조된 후 오래되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고 보인다.


1-6절, 첫 사람의 범죄

[1절]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첫 사람의 범죄는 뱀의 시험을 통해 일어났다(고후 11:3). 이 뱀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 하나인 실제 뱀이었지만, 사탄이 사용한 도구이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2:9에는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기록하였다. 그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했다.

간교함은 사탄의 특징이다. 간교함은 이중적이고 거짓됨을 말한다. 그것은 성도의 품성에 반대된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며 그의 백성된 우리에게 진실함, 마음에 간사함이 없음, 순진함을 요구하신다(시 15:2; 32:2; 요 1:47). 그러나 사탄은 간교하고 거짓되다.

사탄과 악령들은 범죄함으로 타락한 천사들이다(벧후 2:4; 유 6). 요한일서 3:8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고 말한다. 사탄의 범죄는 인류 역사 초기에 일어난 것 같다. 그는 교만함으로 범죄하였다(딤전 3:6). 사탄은 악한 꾀를 내어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하였다.

뱀은 먼저 여자에게 접근했다. 그것은 그가 여자에게서 어떤 약점들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을 때(창 2:16-17) 여자는 아직 창조되기 전이었을 것이다. 여자는 아담에게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해 들었을 것이며 그의 지식과 믿음은 아담보다 약했던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약할 때 마귀의 공격을 받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책을 직접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묵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베뢰아에서 전도했을 때 그곳 사람들은 마음이 고상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헬라의 귀부인들과 남자들도 적지 않았다(행 17:11-12).

뱀이 여자에게 접근한 다른 한 이유는 아마 여자가 남자보다 감성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대체로 남자보다 더 감성적이며 덜 이성적이고 다른 이의 말에 잘 반응한다. 또 뱀은 남자가 여자에게, 그것도 사랑하는 여자에게, 약하다는 점도 노렸던 것 같다. 아내가 남편에게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성경도 그런 사실을 증거한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왕후가 우상숭배자일 때 왕이 쉽게 우상숭배에 빠졌다(대하 21:6). 그러므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경건하고 훌륭한 사람의 배후에는 경건하고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 잠언 31:30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뱀은 여자에게 물었다. 뱀이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지만, 사탄의 역사로 그렇게 한 것 같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나귀의 입을 열어 말하게 하신 경우가 있고(민 22:28), 또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장차 사탄의 활동으로 우상이 말하는 일도 예언되어 있다.

뱀은 여자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것은 부정확한, 지나친 질문이었다. 뱀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명령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질문을 통해 여자의 생각을 혼란시켰다. 사탄은 진리를 혼란시키기를 잘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른 생각과 지식으로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 바른 지식과 논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2-3절]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의 지나친 질문에 대해 여자는 지나치게 대답했다. 동산 중앙에는 두 개의 나무, 즉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고(창 2:9) 그 중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아야 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만 하셨지 ‘만지지도 말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임의대로 가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록한 말씀을 넘어가지 말고 그 말씀에 충실하도록 힘써야 한다. 고린도전서 4:6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


[4절]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은 확신에 찬 거짓말을 하였다. 그의 말은 확신이 있게 보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거짓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으나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주께서는 마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사탄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임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임하는 것,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이 모든 죄의 원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순종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신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중요한 일을 위해 성경을 주셨다. 거짓과 속임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배우고 확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딤후 3:13-17).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의 이 말은 부분적인 진리라고 보인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사람이 눈이 밝아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첫 사람은 범죄한 이후 자신이 악을 행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뱀의 이 말은 여자의 교만을 부추기는 뜻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막으신다는 뜻을 가진 것 같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길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여자의 교만을 부추겼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일 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된다. 교만은 불순종의 원인이다. 그러나 교만은 사람이 하나님 대신 자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같다(삼상 15:23). 사람이 하나님의 정해주신 한계선을 넘어서서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것은 매우 큰 악이다. 사람이 교만하면 결국 멸망하게 된다(잠 16:18).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자는 뱀의 거짓말에 영향을 받았다. 여자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깨어지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열매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그 나무를 본즉 그것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 그 여자는 마침내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

여자는 자기만 그것을 먹은 것이 아니고 그 남편에게도 주었고 그 남편은 그것을 받아먹었다. 본문은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라고 단순히 기록하였다. 사탄의 계산과 계획은 적중하였다. 여자가 먼저 범죄했고(딤전 2:14) 남편은 그 뒤를 따라 너무 쉽게 범죄하였다. 첫 사람 아담과 그 아내는 이렇게 범죄하였고 무죄 상태로부터 타락하였다.

에덴 동산에서의 첫 사람 아담과 그 아내의 행복한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시험 기간을 잘 통과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상태와 행복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그들만의 불행이 아니고 온 인류의 불행이었다.

오늘날도 세상에는 사탄과 악령들의 시험이 많다. 사탄은 예수님 당시에도 그를 시험하였다(마 4:1). 예수께서는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서 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나 원수 마귀도 세상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다닌다고 말씀하셨다(마 13:25, 38-39). 또 사도 바울은 ‘이 세상 신’이라고 불리는 사탄이 지금도 사람들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게 그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고 있고(고후 4:3-4) 공중에 권세 잡은 그가 지금도 세상 사람들 속에 활동하고 있다고 말하였다(엡 2:2).

또 성경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고 말하였고(딤전 4:1), 또 이단들이 많이 나타날 것을 예언했다(요일 4:1). 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징조로서 사탄이 교회를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배교와 거짓된 은사주의, 기적 운동을 예언하였다(살후 2:9-10). 또 요한계시록은 큰 성 바벨론으로 묘사된 마지막 때의 배교한 교회는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계 18:2).

우리의 신앙생활은 영적인 전쟁과 같다. 우리는 이 세상에 권세 잡은 사탄과 그를 따르는 악령들과 싸우는 자들이다(엡 6:12). 사탄과 악령들은 이 세상을 불경건과 부도덕으로 악화시키고 교인들을 교만과 불경건과 불신앙으로, 교회를 배교와 세속화로 이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오늘날에도 사탄의 시험을 물리쳐야 한다. 우리는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야고보서 4:7-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베드로전서 5: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마귀]를 대적하라.”

둘째로, 여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첫 사람의 범죄와 인류의 타락은 여자의 범죄로 시작되었다. 성경이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금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다. 디모데전서 2:14, “[여자의 목사직과 장로직을 금하는 이유는]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는 여자들이 조심해야 하고 남자들도 여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거짓말을 분별하고 대적해야 한다. 마귀는 부정확한 말로 사람을 혼란시킨다. 오늘날에도 온갖 거짓말들, 즉 온갖 이단사설들이 난무하다. 이것은 말세의 징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성경말씀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 부정확한 말, 즉 좌우로 치우쳤거나 지나친 말을 분별하고 배격하고 배척해야 한다. 요한일서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우리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마귀의 시험을 이겨야 한다(엡 6:17). 우리는 바르고 정확한 말, 즉 성경적 교훈을 믿고 확신하고 지켜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거역하지 말고 다 믿고 순종하자. 첫 사람은 마귀의 미혹을 받아 범죄함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얻은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고 의에게 종이 된 자들이므로(롬 6:17-18, 22) 성경에 밝히 증거되고 교훈된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순종하며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자.

7-24절, 첫 범죄의 결과


[7-8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담과 그 아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았다.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본래의 순진함을 잃어버렸고 죄의식과 더불어 수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거니시며 사람과 교제하곤 하셨다. 그는 사람과 교제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범죄한 그 날 교제에 이상이 생겼다. 아담과 그 아내는 서늘한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의 나무들 사이에 숨었다. 그들은 분명히 죄책감과 수치감 때문에 숨었다.

죄는 하나님과의 정상적 교제를 가로막는다(사 59:2). 죄인은 하나님께 나오기를 꺼려한다. 주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말씀하셨다(요 3:20).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의 얼굴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배를 탔고 배 밑창에 내려가 자신을 숨기려 했던 선지자 요나처럼,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 한다.


[9-10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선한 목자처럼, 아담을 부르시며 찾으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는 지금도 자기 백성을 찾으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대답하였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범죄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지만, 악인에게는 항상 두려움이 있다(잠 28:1).


[11-13절]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생긴 수치심이 그가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결과임을 깨닫게 하셨다. 아담은 여자가 그 실과를 주므로 먹었다고 대답했고, 여자는 뱀이 속이므로 그 실과를 먹었다고 대답했다. 그들이 범죄한 과정은 그들의 말 그대로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 속에는 잘못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핑계의 생각이 있었다.


[14-15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먼저 뱀에게 두 가지 저주를 선언하셨다. 첫째는 배로 다니며 흙을 먹으리라는 것이다. 뱀의 발들은 아마 그 후 퇴화하였고 발이 없는 뱀이 먹이를 먹을 때 흙도 먹는 것은 불가피하였다. 둘째는 사람과 원수가 되리라는 것이다. 여자는 하나님보다 뱀을 더 친근히 했고 하나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신뢰했지만, 이제 뱀과 여자는 원수가 될 것이다. 사실, 뱀은 여자의 친구가 아니고 원수이었다. 여자가 범죄한 것은 그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그는 여자를 속이고 그에게서 영생의 복을 빼앗고 영원한 죽음을 준 살인자이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사실이다. 사람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려 하고 뱀은 사람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려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구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파하실 것을 암시한다. 주 예수께서는 “여자에게서 나셨고”(갈 4:4)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셨다”(히 2:14). 이와 같이, 본문 15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처음으로 주신 메시아 약속이었다.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너의 고통과 너의 잉태를]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세 가지의 징벌을 내리셨다. 첫째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다. 여자는 임신하며 출산하는 큰 수고와 고통을 경험할 것이다. 둘째는 남편을 사모함이다. 사모한다는 말은 바라며 열망하며 원한다는 뜻이다. 범죄한 후 여자는 무슨 부족이 있는 자처럼 남편을 애타게 사모하는 연약한 마음이 생겼다. 셋째는 남편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들의 사랑 없음과 욕심과 횡포 때문에 생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범죄로 인한 불행한 결과이었다.


[17-19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도 세 가지의 징벌을 내리셨다. 첫째는 땅의 저주이다. 아담은 땅의 책임자이며 그의 범죄 때문에 땅은 저주를 받았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땅에는 천재지변과 질병과 병충해가 있을 것이다. 인류는 저주받은 땅에서 살게 되었다.

둘째는 평생 수고하며 땀을 흘리는 것이다. 아담은 평생 수고하며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게 될 것이다. 땀 흘리며 수고하는 삶은 세상에 사는 아담의 후손들에게 정상적인 삶이 되었다.

셋째는 죽음이다. 사람의 몸은 본래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창 2:7) 범죄한 사람은 그 본래의 흙으로 돌아가야 했다. 사람이 범죄치 않았더라면 몸의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의 몸은 비록 흙으로 만들어졌으나 사람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영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범죄한 몸은 본래의 원소로 돌아가야 했다(전 3:20; 12:7).

본문에 영혼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영혼이 불멸하다는 것은 성경의 진리이다. 주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신약성경뿐 아니라(눅 16:10- 31도) 구약성경도 이 사실을 증거한다. 시편 73:24는,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라고 말했고, 전도서 3:20-21은,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말했다.


[20절]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하와’(카와)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이며 그를 통해 사람은 번식할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죽을 것이지만, 하와를 통해 아담의 자손들이 많이 출산될 것이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메시아께서도 오실 것이다.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범죄하여 죽게 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다. 가죽옷은 그들의 수치감을 가려주고 몸의 약함을 보호할 영구적인 의복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졌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한 짐승을 죽이셨고 그 피를 흘리셨다. 사실, 죽임을 당해야 할 자는 아담과 하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대신하여 한 짐승을 죽이셨다. 여기에 짐승 제사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암시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하시기 위해 죽이신 짐승은 장차 인류를 위해 죽으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은 죄인들의 수치를 가릴 완전한 의의 옷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나(사 64:6),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의의 옷을 입혀주셨다.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2-24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사방을 향해 번쩍이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범죄하기 전에는 악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는 선악을 아는 자가 되었다. ‘우리 중 하나같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진리를 암시한다(창 1:26; 11:7; 사 6:8).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생할까 염려하심은 타락한 상태로 영생할까 염려하심을 의미하는 것 같다. 사람이 영원히 죄인이 되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보내셨고 농사의 일을 하게 하셨다. 그는 그를 쫓아내셨다(24절). 죄인은 에덴 동산에 적합하지 않았다. 더욱이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룹 천사들과 사방으로 번쩍이는 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그 후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할 수 없었고 영생을 얻을 수 없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첫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이 저주받은 땅 위에서 수고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자들은 결혼과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겪고 있으며 심리적으로 남편을 사모하는 연약함이 있으며 또 남편의 지배를 받아 때때로 심신으로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남자들은 일평생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며 살아간다. 세상에는 수고와 슬픔이 많고 질병과 눈물과 고난이 많다. 이것은 첫 사람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할, 아무도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세상에서 날마다 수고하며 사는 것은 정상적인 생활이다.

둘째로, 모든 사람은 마침내 죽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죽음도 사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이 현실을 긍정하며 그것의 원인을 알고 그것에 바르게 대처하며 살아야 한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내려진 징벌이기 때문에 죄사함 안에 부활과 영생의 길이 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구원을 암시하셨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에 대한 예언과 그들을 위해 지어 입히신 가죽옷에서 증거되었다. 성경의 요점이 여기에 있다. 예수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다 파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주 예수의 십자가로 이루신 완전한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셨다.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를 위해 의를 이루셨고(롬 10:4)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셨다(고전 1:30).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소망하며 사랑하고 순종하며 선하게 살아야 한다.


4장: 가인과 아벨

1-15절, 가인이 아벨을 죽임

[1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得男)하였다 하니라.

하와의 출산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부터 있었던 것 같다. ‘동침한다’는 원어(야다)는 ‘안다’는 뜻으로 ‘성관계를 가진다’는 뜻도 있다. 하와는 첫아들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라는 원어(엣-예호와)는 ‘여호와의 도움으로’라는 뜻이라고 본다(BDB).

[2절]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농사하는 것과 양을 치는 것은 가인과 아벨의 직업으로 인류 역사의 아주 초기로부터 있었던 가장 오래된 직업들이었다.

[3-4a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가인은 곡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 훗날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가인이 드린 곡물 제사는 정당한 제사의 한 방식이었고,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린 제사도 정당한 제사 방식이었다.

[4b-5a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열납하다’는 원어(솨아)는 ‘[호의를 가지고] 주목하다, 존중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을 주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주목하지 않으셨다. 두 사람의 제사의 차이가 무엇이었는가? 히브리서 11:4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말한다. 아벨의 더 나은 제사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라는 제물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점이었다고 본다.

첫째로, 아벨의 제물은 정성어린 제물이었다. ‘첫 새끼’는 짐승 중에 가장 귀한 것을 가리킨다. ‘기름’이라는 원어(켈렙)도 ‘가장 좋은 부분’이라는 뜻이 있다.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소득의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주고 레위인들은 그들이 받은 모든 예물 중 그 아름다운 것을 취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18:29-32). 거기에 세 번이나 나오는 ‘아름다운 것’이라는 원어가 바로 이 단어이며 영어성경들은 ‘가장 좋은 부분’이라고 번역하였다(KJV, NASB, NIV). 신명기 6:5는 우리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고 교훈했다. 잠언 3:9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교훈한다. 아벨은 바로 이런 정신으로 정성어린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둘째로, 아벨의 제물은 피가 있는 제물이었다. 그것은 속죄신앙이 없이는 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벨은 자신이 죽어야 할 죄인이며 장차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속(代贖)하실 구주를 보내실 것을 믿었다고 보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보내실 때 입히신 가죽옷을 통해 깨달았든지, 혹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로 말미암아 받은 진리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제사의 시작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었다. 죄인이 오직 대속하실 구주의 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진리이다(창 8:20; 레 1장; 히 9:7, 12; 10:19; 고전 11:25; 계 13:9). 죄인은 피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짐승 제사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레위기 17:11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말하였고, 히브리서 9:22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했다.

[5b-7a절]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안색이 변하였다’는 원어는 ‘얼굴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때 그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엎드려 회개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교만하였고 심히 분노하며 얼굴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그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정당치 않다고 지적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는 구절의 원어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열납되지 않겠느냐?”고 번역되기도 한다(Syr, Vg, KJV, NIV). 하나님의 말씀은 가인의 제사가 선하지 않았다는 뜻을 내포한다.

[7b절]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사람은 선과 악,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사람이 선을 행치 않으면 악을 행케 될 것이며 사람이 선을 행하면 악을 멀리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큰 죄를 짓는 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4:17은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하였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원어는 “그의 소원[그에 대한 소원]이 네게 있으며 너는 그를 다스릴 것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KJV). ‘죄’라는 원어(캇타스)는 여성명사이며, ‘그의’와 ‘그를’이라는 원어는 문법적으로 남성 인칭어미이기 때문에, ‘그의’와 ‘그를’이라는 말이 죄를 가리킬 수 없고 따라서 연결되는 명사는 아벨뿐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의 소원’ 즉 ‘그에 대한 소원’은 아벨에 대한 소원 즉 아벨을 이기고 지배하려는 소원을 가리키는 것 같다. 또 그가 아벨을 다스릴 것이라는 말씀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으로 보인다.

[8절]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가인은 그 아우 아벨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은 그 아우 아벨을 죽였다. 그의 교만과 불쾌함은 분노와 시기심과 미움으로 발전하였고 그 미움은 마침내 살인의 행위로 나타났다. 이것이 인류 역사 최초의 살인 사건이었다.

죄가 전혀 없었던 세상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살인이라는 추한 죄악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선하게 창조되었던 아담과 하와의 아들 가인 속에 이런 무서운 죄성이 있었다. 우리는 분노와 시기와 미움을 경계해야 한다. 성경은 이런 악을 행하는 자들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하였다(갈 5:19-21; 계 21:8; 22:15).

[9-10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거짓말을 했고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가인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벨의 억울한 죽음을 변호해줄 자가 아무도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호소하는 것을 들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살인 사건을 다 알고 계셨다.

[11-12절]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아벨을 죽인 죄의 결과는 컸다. 그는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사람이 땅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지 않고 저주를 받는 것은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또 땅은 다시 그 효력을 그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농사의 수확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인데, 땅이 다시 효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큰 물질적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또 가인은 땅에서 떠돌며 방랑하는 자가 될 것이다. ‘피하며 유리하는 자’라는 원어(나 와나드)는 ‘비틀거리며 방황하는 자’라는 뜻이다(BDB). 사람은 누구나 땅 위에서 평안과 안정을 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누릴 수 있는 복이다. 사람이 안정이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방랑하고 방황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13-14절]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또 가인은 하나님의 징벌이 너무 무거워 견디기 어렵다고 느꼈고 또 자신이 이후로는 하나님을 뵈올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또 그를 만나는 자들이 그를 죽이려 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세월이 좀 흐른 때의 일이었다고 보이며, 그때에는 가인과 아벨 외에 아담의 다른 자녀들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죄의 결과는 무거운 죄책감과 두려움이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나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친다(잠 28:1).

[1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혹은 ‘그러므로’].13)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긍휼을 베푸셨다. 그가 가인에게 주신 표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살인자에게 주신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가인은 그냥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드렸지만,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최상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신 6: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좋은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속자(救贖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시며 중보자이시다. 죄인은 죽어야 마땅하지만,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아벨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의 예표이었다. 속죄의 피는 성경 전체에 계시되어 있는 근본 진리이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대속제물이 되셨다(마 20:28). 우리는 그의 피로 죄씻음과 거룩함을 얻었고(히 9:12; 10:10, 14), 그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히 10:19).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셋째로,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사람들은 원죄 즉 아담의 죄책과 죄성(부패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중생한 자들 속에도 죄성이 남아 있다. 가인 속에는 교만, 시기심, 미움, 분노가 있었고 그것이 살인에 이르게 하였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죄악된 성질이다. 우리 속에도 이런 죄성이 있다. 우리 속에도 교만, 시기심, 미움, 분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죄성을 죽여야 하며 이런 죄악성을 경계해야 한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있고 또 의와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이 땅에서도 풍성한 평안이 있다.

16-26절, 가인과 셋

[16-18절]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가인은 하나님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했다. 그가 하나님의 앞을 떠나 나갔다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를 섬기는 일을 멀리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가인의 후손들에게서는 경건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주신 셋의 아들 에노스 때가 되기 전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줄 몰랐다.

가인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 놋이라는 원어는 ‘방랑, 떠돎’이라는 뜻이다. 그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는 표현은 에덴 동산의 위치를 추측케 만든다. 만일 에덴 동산이 오늘날 터어키 지역이었다면, 에덴 동산에서 네 강이 발원하였다는 말씀(창 2:10-14)이나 그가 에덴 동편에 거했다는 말씀과 조화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지역이 이전에 높은 산악 지역이었다가 후에 지형의 큰 변화로 낮아졌고 지중해 동쪽도 바다가 되었다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비손강은 아마 오늘날의 홍해이었고 기혼강은 나일강이었을 것이다.

가인은 그 아내와 동침하였고 에녹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인류의 초기에는 가족들 간의 결혼이 불가피하였다. 성경은 꼭 필요한 내용을 선택하여 쓴 역사이기 때문에 생략된 것들이 많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아담이 창조된 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의 일이었을 것이고, 그때에는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많은 딸들이 이미 출생되어 있었을 것이다. 가인은 에녹을 얻은 후에 한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불렀다. 그가 성을 쌓은 것은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인의 6대손으로 라멕이라는 인물이 태어났다.

[19-22절]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라멕은 두 아내를 취하였다.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여 부부가 되고 가정을 이루는 것 즉 일부일처(一夫一妻) 제도는 하나님의 뜻이다(딤전 3:2). 그러나 라멕은 특이하게 두 아내를 취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절제되지 않은 육신적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라멕의 아들들에게서 다양한 직업이 나타났다. 라멕의 첫째 부인인 아다의 첫 아들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장막에 거했다는 말은 그가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유목하며 살았음을 보인다. 즉 그는 유목민의 조상이 되었다. 아다의 둘째 아들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 그는 음악가와 연주가의 조상이 되었다. 라멕의 둘째 부인 씰라의 아들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 즉 대장장이 혹은 철공업자가 되었다.

[23-24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7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77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은 자기 아내들에게 그가 그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고 말했고 가인을 위해 벌이 7배일 것이라는 하나님의 긍휼의 배려를 인용하며 자신을 위해서는 벌이 77배일 것이라고 말하였다. 가인의 6대손 라멕 속에는, 가인 속에 있었던 거칠고 과격한 감정이 있었을 뿐 아니라, 가인보다도 더 뻔뻔스러운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25-26절]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그 여자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시작되었더라].

아벨이 죽고 아마 여러 해가 지난 후, 아담은 아내와 동침하였고 하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셋이라고 불렀다. 셋이라는 원어는 ‘둔다, 놓는다’는 말(쉬스)에서 나왔다고 보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뜻으로 지어졌을 것이다. 이것은 아벨이 죽은 지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의 일일 것이다. 창세기 5:3은 아담이 셋을 얻은 것이 그의 나이 130세 때라고 말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전 에덴 동산에서의 생활이 얼마 동안이었는지 모르지만 1년 정도 잡고 가인과 아벨의 출생과 성장에 약 40년을 잡는다면 아벨이 죽은 후 약 90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 될 것이다. 그 동안, 아담과 하와는 다른 자녀들을 많이 낳았을 것이다.

셋은 105세 때에 아들 에노스를 낳았는데(창 5:6), 그때에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표현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아담이 셋을 낳은 것은 130세 때이며 셋이 에노스를 낳은 때가 105세 때이니, 아담과 하와가 몇 세에 범죄했는지는 모르나, 그들이 범죄한 지 2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에, 또 아벨이 살해된 지 상당히 세월이 흐른 후에,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이 된다. 범죄한 아담과 그 자손들은 영적으로 매우 무디어져서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섬기지도 않았고 찾지도 않았던 것이다. 죄인들은 영적으로 어둡고 무지하였다.

본문을 정리해보자. 가인의 자손들을 통해 인류 사회는 다양화되고 있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성을 쌓았다. 그는 농업에 종사했고 건축술도 있었다. 가인의 7대손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목축하는 자, 즉 유목민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 잡은 모든 자들, 즉 음악가의 조상이 되었다. 그는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 즉 대장장이 혹은 철공업자가 되었다. 그에게는 공업적 재능이 있었다. 이와 같이, 가인과 그 자손들은 농업, 건축술, 목축업, 음악, 철공업 등 다양한 일들에 관여하였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 인류 사회는 고도로 복잡해져 있다. 오늘날도 여전히 인간 생활에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와 돈벌이에 직접 관계된 일들이 있다. 농업, 목축업, 광업, 공업, 어업, 상업은 인간 사회의 기본적 분야들이다. 거기에 더하여, 인간의 편리와 복지를 추구하는 일들이 있다. 과학의 여러 분야들과 예술과 오락 분야들이 첨가되었다.

이런 일반 대중들 위에서 사회를 지도하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자들이 있다. 정치가들, 경제정책가들, 공무원들, 법조인들, 언론인들, 경찰들과 군인들이 있다. 이들은 사회를 실제적으로 인도하고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런 지도자들보다 앞서서 정치 이념, 사회 이념, 경제 이념, 역사관 등을 정립하고 보급하는 철학자들, 역사학자들, 사상가들이 있고, 또 이런 이념들을 포함해 사회 전반에 대한 여러 지식과 기술을 교육시키는 일을 하는 자들이 있다. 오늘날의 사회 구조는 인류의 어느 시대보다도 복잡해 보인다.

그러나 성경이 가인의 자손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 것은 그 다음에 기록된 셋의 아들 에노스 때의 일과 대조하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 셋의 아들 에노스 때에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성경의 강조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러면 가인 자손의 문제점은 한마디로 불경건과 부도덕이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라멕은 두 아내를 취했고 살인까지 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들은 온갖 죄를 짓는다. 가인의 자손들은 세상일에는 힘썼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근본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본분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고 있었고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본문에는 언급이 없지만 성경 전체에 분명한, 인간의 삶에 대한 매우 중요한 진리는 영생에 대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삶이 있다. 그것은 이미 에덴 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를 통해 암시되었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하심이었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했다(딛 1:1-3).

그러나 이 영생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주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셨고(마 7:13-14), 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또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했다(행 4:12).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생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재능과 직업을 따라 일상 생활에 충실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본분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회복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교훈과 명령을 따라 경건과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5장: 아담의 자손들

[1-2절] 아담 자손의 계보14)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15)

[3-5절] 아담이 130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16)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17)를 낳았으며 그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6-20절]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807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12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815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05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게난은 70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84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10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마할랄렐은 65세에 야렛을 낳았고 야렛을 낳은 후 83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895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야렛은 162세에 에녹을 낳았고 에녹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62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21-24절]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31절]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782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969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안식’이라는 뜻)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595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777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32절] 노아가 500세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세기 5장은 아담의 자손들에 대해 증거하는데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로, 아담의 자손들은 오랫동안 살았고 많은 자녀들을 출산하였다. 아담 후 10대 중에서 여섯 명은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전까지 900세 이상 장수했다. 아담은 930세를 살았다. 아담의 8대손 므두셀라는 969세로 가장 오래 살았다. 아담의 10대손 노아까지도 950세를 살았다(창 9:29).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본래의 몸은 건강하였고 환경도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후 사람의 수명은 600세로 또한 점차 200세 이하까지로 급격히 줄어들었다(창 11:10-26). 노아의 아들 셈의 수명은 600세이었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를 살았다. 홍수 심판 때 지구 대기권에 큰 변화가 일어났던 것 같고 그 변화로 인해 사람의 몸이 빨리 노쇠해지기 시작하였음이 분명하다.

홍수 심판 전에, 사람들은 오래 살면서 아들들과 딸들을 출산하였다. 아담은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 자녀들은 부모의 외모와 기질을 이어받아 출생하였다. 아담의 자손들의 오랜 수명과 다산(多産)으로 인해 땅에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노아와 같이 500세가 되기까지 자녀를 얻지 못한 자도 있었다. 노아는 500세가 되기까지 자녀가 없었고 500세가 된 후에야 세 아들을 낳았다. 그들이 세쌍둥이였는지 아니면 몇 년 간격으로 얻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성경은 자녀가 하나님의 기업과 상급임을 말한다(시 127:3).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사람이 원해도 자녀를 가질 수 없다(출 23:26; 호 9:11).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녀를 허락하지 않으신 일은 노아에게 영적으로 큰 유익이 되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경건하게 훈련시키고 크게 쓰시려는 사람들에게 자녀 없는 고통을 주셨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보통 30세 전후에 결혼하였는데(창 11:11-24), 아브라함은 결혼한 지 약 70년 동안 자녀가 없었다. 이삭도 결혼한 지 20년이 되도록 자녀를 얻지 못했다(창 25:21, 26). 후에, 한나도 여러 해 동안 자녀가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한나는 장차 하나님의 사람이 될 사무엘을 낳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유익하게 섭리하신다(롬 8:28).

둘째로, 아담의 자손들은 땅 위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마침내 다 죽었다. 창세기 5장의 중요한 한 특징은 ‘죽었더라’는 말의 반복이다(5, 8, 11, 14, 17, 20, 27, 31절; 총 8번 나옴). 아담부터 노아의 아버지 라멕까지 에녹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다 ‘죽었더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에녹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담의 자손들이 다 죽었다.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홍수 심판이 시작되기 5년 전에 죽었고 노아의 조부 므두셀라는 홍수 심판이 있기 직전이든지 혹은 홍수 심판 때에 죽었다. 노아의 많은 형제들과 사촌들도 홍수 심판 때에 다 죽었다. 홍수 때 살아남은 자는 노아의 가족 여덟 식구뿐이었다.

사람들이 죽은 것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경고하신 말씀대로 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었다(창 2:16-17). 또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선언하셨었다(창 3:19).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말한 뱀의 말 곧 마귀의 말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었다.

사람의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 죄의 형벌이 죽음이라는 것은 성경의 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했고(롬 6:23), 또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를 통해 사망이 왔다고 했고(롬 5:12), 또 말하기를,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였다(고전 15:21).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었고 죽고 있고 또 죽을 것이다.

셋째로, 그러나 에녹은 예외적으로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갔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고 그는 세상에서 365세를 살았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21-24절).

아담의 자손들 가운데 오직 에녹에게만 ‘죽었더라’는 말이 빠져 있다. 그는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리워 갔다.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했다(히 11:5). 그가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말은 그의 승천을 가리킨다. 그는 후에 엘리야가 승천하였듯이(왕하 2:11), 또 우리 주 예수께서 승천하셨듯이(행 1:9-11), 그는 하나님께서 계신 곳, 천국으로 올라갔다. 에녹의 승천은 세상 너머에 하나님께서 계신 영광의 천국이 있음을 증거한다.

에녹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그는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본문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두 번이나 말한다. 한마디로, 에녹은 경건한 사람이었다. 대략적으로 말해, 에녹은 아담 후 622년에 출생하여 987년까지 365년간 살았다. 에녹은 아담과 308년 동안 같이 살았고 셋이나 에노스와는 평생 같이 살았다. 경건했던 그는 그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확신했을 것이다.

경건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 즉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로 나타난다. 또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어긴 모든 죄를 버리고 그의 뜻과 계명에 즐거이 순종해야 한다.

성경은 경건한 삶을 가르친다. 시편 1:1-3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말한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복된 삶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훈련]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모욕을 당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고 했다(딤전 4:7-10).

다른 이들의 900년 가까이의 일생에 비하면, 에녹은 365년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본장에 나오는 아담의 자손들 중에서 가장 복된 삶을 살았다. 말씀과 기도의 삶,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께서 세상에서 사셨던 삶이요 그가 친히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복된 삶이다.

본장의 내용에서 얻는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자녀 출산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임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창 1:28). 시편 127편은 말하기를,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고 하였다(시 127:3-5). 부모가 자녀들을 많이 낳아 잘 기른다면 참으로 복되다. 디모데전서 5:10은 나이든 여성들의 선한 행실의 한 증거로 자녀를 양육한 것을 꼽았다. 우리는 자녀 출산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임을 알고 그 일을 귀히 여기고 사모하자.

둘째로, 우리는 영생의 세계를 믿고 소망하자.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리웠다. 인간에게는 죽음 너머의 세계가 있다. 에녹이 올라간 세계가 있다. 하나님께서 계신 세계가 있다. 선지자 엘리야가 올리운 곳이 있다. 주 예수께서 올리우신 곳이 있다.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 있는 곳이 있다(히 12:23). 하나님께서 계신 영광의 천국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그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존재를 증거하셨고 그 천국을 기다리게 하셨다.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 대해 증거하였다(계 21:1-2).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확신하고 소망하자.

셋째로, 우리는 에녹의 경건을 본받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사도 바울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교훈했다(딤전 4:8). 경건은 훈련이 필요하고 훈련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우리는 에녹처럼 경건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계신 영광의 천국에 다 들어가자.

6장: 노아가 방주를 만듦

[1-2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본문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를 가리킬 수 없다. 왜냐하면 천사는 육체가 아니므로 본질상 사람과 결혼할 수 없으며(눅 20:35-36) 또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 천사들에게 징벌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징벌하셨기 때문이다. 본문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자손들을 가리켰고, ‘사람의 딸들’은 불경건한 가인의 자손들을 가리켰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하나님의’라는 말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경건한, 거룩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사람의’라는 말은 ‘사람에게 속한, 사람의 본성 그대로의’라는 뜻을 가질 것이다. 본문은 가인의 자손에게서는 이미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악이 나타났으나(창 4:19), 이제 셋의 자손들 가운데서도 그런 일이 많아졌음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일부일처(一夫一妻)는 하나님의 뜻이다. 일부다처의 풍조는 일부일처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람의 육체적 감정과 욕구대로 행하는 악한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했다.

[3-4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라”는 본문(LXX, Syr, Vg, Targ)18)을 영어성경들은 히브리어 본문대로 “나의 영이 항상(혹은 영원히) 사람과 다투지 아니하리라”고 번역하였다(KJV, NASB, NIV). 사람의 죄악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정도 통제되며 이로 인해 사람이 극도로 죄악된 상태에 떨어지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면 그가 심히 부도덕한 상태에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해 120년의 기간을 남겨두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성급하지 않으셨다. 그는 오래 참으셨고 사람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주셨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 즉 ‘거인들’이 있었고 또 셋의 자손들도 가인의 자손들을 취하여 고대에 유명한 용사들을 낳았던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은 더욱 부패해져갔다.

[5-7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노아 시대에 사람들의 죄악은 점점 커 갔고 그들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은 항상 악하였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 ‘한탄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슬픔을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타락과 부패를 원치 않으셨으나 사람들은 스스로 그 길을 택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과 동물과 새를 다 멸하기로 결심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이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납할 수 없으셨다.

[8-10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事蹟)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아담의 자손들은 누구나 죄인으로 태어나며 노아도 예외는 아니며 만일 그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죄 중에 살다가 다른 사람들처럼 멸망을 받았을 것이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노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의로운 삶으로 증거되었다. 노아는 의롭고 완전한 자이었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 이기적이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절 있는 삶으로 나타난다. 또 완전하다는 말은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물론 이런 말들은 절대적인 의미는 아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이 세상에 의인이나 완전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사람들과 여실하게 다른 선한 인격자이었다. 또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경건한 삶을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힘썼음에 틀림없다. 그의 중심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그의 뜻과 계명을 따르고자 힘썼다. 그것이 그의 의롭고 온전한 삶으로 나타났다.

[11-12절]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패괴하였다. 본문에는 ‘패괴함’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온다. ‘패괴하다’는 원어(솨카스)는 ‘부패되다, 더러워지다’는 뜻이다. 사람들의 패괴함의 한 특징은 ‘강포함’이었다. 노아 시대에는 강포함이 온 땅에 충만했다. 당시의 세상은 양심과 도덕과 법과 질서가 없고, 힘과 폭력만 있는 공포 사회이었다. 이런 시대적 풍조에 역행하여 노아는 혼자라도 바르게 살았던 것이다. 그는 좁은 길, 외로운 길을 걸었다. 여기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교훈이 있다. 노아는 우리 모든 성도에게 본이 된다. 우리는 이 시대가 심히 악할지라도 나 혼자만이라도 바르게 살겠다는 신념으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삶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13-16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칸]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300규빗, 광이 50규빗, 고가 30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사람들의 부패함과 강포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날, 곧 세상의 끝날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120년이나 참고 기다리시며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충분히 주셨으나, 세상의 도덕적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그 끝날이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중에서도 구원의 계획을 가지셨다. 그는 멸망할 세상으로부터 노아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기를 뜻하셨고 이 일을 위해 그로 하여금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

방주는 나무로 만든 네모난 큰 배이었다. ‘잣나무’라고 번역된 원어(고페르)는 소나무나 전나무의 일종이라고 한다. 방주의 크기는, 한 규빗을 약 50cm로 보면, 길이가 약 150m, 너비가 약 25m, 높이가 약 15m이었다. 방주는 3층으로 되었고 그 안에는 많은 칸들이 있었다. 위에서부터 50cm 아래로 창문 한 개가 있었고 문은 옆으로 있었다. 방주의 안팎은 역청으로 칠했다. 역청은 아스팔트나 콜타르 같은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좋은 방수제이었다.

어떤 구약 학자에 의하면, 방주의 부피는 오늘날 소 20마리나 양 100마리를 실은 짐승운반차 2,000대 분량이라고 하며, 오늘날 양보다 큰 짐승은 290종, 양부터 토끼까지의 크기는 757종, 토끼보다 작은 것은 1,358종이 있다고 하는데, 방주는 이런 동물들 한 쌍씩과 그것들을 위한 충분한 사료를 싣기에 넉넉한 공간이었을 것이라고 한다.19)

[17-21절] 내가 홍수(맙불)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氣息)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食物)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食物)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통해 땅을 멸하실 것을 선언하셨다. 원문에서는 ‘내가’라는 말(아니 힌니)[보라, 내가]이 강조되어 있다. 홍수를 일으켜 모든 생명체를 죽이실 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가 바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약속을 받은 것이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방주를 예비하였고 그것을 통해 홍수 심판을 피하였다.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모든 생물들이 암수 한 쌍씩 노아에게 나아올 것이며 노아는 그것들을 방주 속으로 들여 그 생명들을 보존해야 했다. 또 그는 그것들이 방주 안에 있는 동안 먹을 식물도 준비하고 저장해야 했다. 이 일들이 노아에게 주어진 임무이었다.

[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하나님의 명하신 그 일들을 다 준행하였다. 특히 방주 짓는 일은 심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 큰 방주를 짓는 데 아마 수십 년 혹은 100년은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위해 자기와 자기 아들들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다 쏟았음에 틀림없다. 방주 짓는 일은 그에게 부업이 아니고 본업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친척들이나 이웃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받았을 것이며, 아마 ‘미쳤다’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방주를 지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렸고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였다.

창세기 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노아 시대에는 사람들이 일부일처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일부다처의 길로 갔다. 그 시대는 쾌락의 시대이었다. 또 그 시대는 도덕적으로 매우 부패했고 사람들은 심히 강포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이었다. 오늘날도 불경건과 세속주의와 쾌락과 음란과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다. 우리는 쾌락과 강포를 멀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다. 그는 도덕적인 하나님이시며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신다. 그 심판은 참으로 두렵다. 그의 마지막 심판은 지옥의 불못이다. 주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이 회개해야 할 이유이다.

셋째로, 우리는 방주 안에 거해야 한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예표한다. 노아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온전히 순종함으로 멸망할 세상으로부터 여덟 식구를 구원했듯이, 주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택자들의 구속(救贖)을 이루셨고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구주가 되셨다. 참된 교회는 장차 임할 불 심판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할 방주이다. 사람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교회 밖에 있으면 구원받을 수 없으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면 구원받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 안에 거해야 한다. 그것이 방주 안에 거하는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그는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경건하고 의롭고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노아처럼 악한 세상에서 혼자라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온전하게 살아야 한다.

7장: 홍수 심판

[1절]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가족]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너와 네 온 가족은 방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 앞에 의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구원은 가정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구원해주셨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행 16:31). 구원은 개인적이지만, 아버지가 구원받으면 대체로 가족들도 구원받을 것이다.

[2-3절]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짐승들과 새들을 방주에 들여놓게 하심으로 그것들을 땅에 보존시키셨다. 홍수 심판은 대변혁이었지만,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변혁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들과 새들을 다시 창조하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방주에 보존하기를 원하셨다.

노아 시대에 벌써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이 있었다. 그 구별은 후에 모세의 율법에서 성문화되었다(레 11장, 신 14장). 암수 ‘일곱씩’이라는 원어(쉬브아 쉬브아)는 ‘일곱 일곱’이라는 뜻으로 암수 ‘일곱 쌍’을 가리킨다. 암수 ‘둘씩’이라는 말은 한 쌍을 가리킨다. 정결한 짐승들과 새들을 암수 일곱 쌍씩 보존케 하신 것은 그것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사용하며 또한 홍수 후에 번식하여 사람들의 식물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창 8:20; 9:3).

[4-6절] 지금부터 7일이면 내가 40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600세라.

하나님께서는 이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7일 후면 40일 동안 밤낮 비가 내릴 것이다. 땅에는 큰 홍수가 있을 것이며 그 홍수로 땅 위의 모든 생물은 멸망할 것이다. 그때 노아의 나이는 600세이었는데, 그것은 성경의 문자적 연대 계산에 의하면 아담이 창조된 후 1,656년경이며, 대략 주전 2,456년경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행했다. 그는 방주를 만들라는 명령도, 모든 생물을 방주 안으로 들여놓으라는 명령도, 모든 식물을 저장하라는 명령도, 또 그와 그의 온 가족이 방주로 들어가라는 명령도 다 행하였다. 의인 노아의 삶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었다.

[7-10절]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7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와 그 가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방주에 들어갔다. 그들은 필요한 생활 도구들과 식량을 방주로 옮겼을 것이다. 방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홍수가 시작되기 7일 전에 있었다. 아직 비가 오지 않는 때이었다. 이웃 사람들은 “무슨 홍수가 나서 세상이 망한다는 말인가” 하며 비웃었을 것이다. 그를 미쳤다고 놀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순종하였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생물들은 암수 둘씩 질서 있게 노아에게 나아왔다. 그것들은 다가올 홍수 심판을 예감이라도 하듯이 방주로 나아왔다. 그 많은 생물들이 순순히 방주 속으로 들어온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었지만, 이런 일이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그들은 다 방주에 들어갔다. 아무리 방주가 준비되어 있었을지라도 그 배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홍수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배 안으로 다 들어갔고 땅에는 홍수가 있었다.

[11-12절] 노아 600세 되던 해 2월 곧 그 달 17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그때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이었다. 연월일 단위는 인류의 초기부터 있었던 것 같다. 노아 시대 홍수의 정확한 날짜는, 입에서 입으로나, 토판(土版) 같은 기록물을 통해 전해 내려왔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해, 모세에게까지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만큼 성경은 정확하게 역사적 성격을 띤다. 성경은 역사적 책이다.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려 비가 밤낮 40일 땅에 쏟아졌다. 땅의 물 근원들은 터졌고 하늘의 수증기들은 창들이 열리듯이 땅에 부어져 내렸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어났다. 땅 위의 이상 기후 현상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일어난다.

[13-16절]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 곧 각양의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홍수가 시작된 그 날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다 방주로 들어갔다. 또 암수 한 쌍씩 그들에게 나아온 모든 생물들도 다 들어왔다. 방주 밖에는 심상치 않은 소낙비로 인해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노아의 식구들과 그 모든 생물들은 다 방주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명령대로이었다. 그러므로 16절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고 기록하였다.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신 이도 하나님이셨고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신 이도 하나님이셨다. 그 방주는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큰 배이었다.

여호와께서는 노아와 그와 함께한 자들을 방주 안에 닫아 넣으셨다. 방주 안의 사람들과 방주 밖의 사람들은 구별되었고, 방주 안의 생물들과 방주 밖의 생물들도 구별되었다. 방주 안에 있는 자들은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었고, 방주 밖에 있는 자들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정한 시간이 지났고 문은 닫혔다. 그 문은 사람이 닫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닫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닫으셨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 문을 열 수 없었다.

[17-20절] 홍수가 땅에 40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15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40일 동안의 비로 온 땅은 물바다가 되었다.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지자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다. 물이 더 많아져 천하의 높은 산들이 다 덮였다. 본문은 물이 15규빗, 약 7m 더 불어오르자 온 산들이 덮였다고 말한다. 노아는 아마 그 사실을 하나님의 계시로 알았을 것이다.

이 홍수는 한 지역에 국한된 홍수가 아니고, 온 세계에 미친 홍수이었다. 어떤 이들은 홍수가 유브라데강 유역에 국한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1) 히말라야 상봉을 덮으려면 현재 지구상의 물의 8배가 있어야 하며 (2) 그 물이 없어지는 것도 큰 문제이며 (3) 모든 식물이 1년간 소금물에 잠겼다면 살 가능성이 아주 적으며 (4) 어떤 지역은 침수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 등을 들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이 홍수가 지역적 홍수가 아니고 세계적 홍수임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본문은 천하의 높은 산이 다 덮였고 땅 위의 모든 사람과 모든 생물이 다 죽었다고 분명히 증거한다(19, 21-23절). 이 말씀을 부정하지 않고 다르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구 곳곳에는 땅이 깊이 갈라진 곳이 있고 그 속에 동물들의 골격이 남아 있다고 하며, 또 세계의 여러 민족들에는 홍수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인도의 마누는 다른 일곱 명과 함께 세계적인 홍수에서 배 타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며, 중국의 파헤는 그의 아내와 세 아들과 세 딸만 함께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하와이의 누우, 멕시코 인디안들의 테즈피, 북아메리카의 한 원주민인 알곤킨인들의 마나보조 등도 인류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받았고 오직 한 사람이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구원받았다고 전한다.

[21-24절]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물이 150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

홍수는 죄악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죄악되었던가. 일부일처의 가정 윤리는 깨어지고 남자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여자들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남녀의 순결성과 정절이 무의미하게 여겨졌고 부부 관계의 사랑과 육신적 욕구의 절제가 무가치하게 여겨졌다.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부패되었다. 또 강포가 땅에 충만하였다. 힘과 폭력이 지배하는 무서운 사회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다. 본문은 홍수로 땅 위의 모든 사람과 생물이 죽었음을 반복하여 증거한다. ‘다,’ ‘모든’이라는 말이 우리 성경에는 다섯 번, 영어 성경에는 여섯 번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철저한지를 잘 증거한다. 아, 하나님의 심판은 두렵고 엄위하다! 하나님께서 일어나 심판하시면, 그는 악인들의 부르짖음을 무시하시고 그들을 땅에서 다 쓸어버리신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동물들과 새들까지도 죽었다.

홍수 심판으로 땅 위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새들과 모든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것들이 죽었고,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었던 가족들과 생물들만 남았다. 방주가 아니었다면 그들도 다 죽었을 것이다. 방주는 그들에게 홍수로부터의 구원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새 세상을 위해 오직 그들만 남겨두셨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섭리자이시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그가 또한 온 세상을 섭리하신다. 섭리하신다는 말은 보존하고 통치하신다는 뜻이다. 그는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는 역사상 전무했던 큰 홍수를 일으키셨다. 그는 큰 깊음의 샘들은 터지게 하셨고 하늘의 창들을 열어 밤낮 40일 동안 비가 땅에 쏟아지게 하셨다. 그러나 그는 하늘의 새들과 땅의 생물들을 다 암수 둘씩 방주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다. 그가 이 모든 일을 하셨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심판자이시다. 앞장에서 읽은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일부다처의 풍조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였다.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였고 강포가 땅에 충만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홍수로 멸하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자이시다. 그는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셨다(벧후 3:6-7). 성경은 악인들을 위한 지옥 불못을 밝히 증거한다(계 21:8).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방주에 있는 모든 가족들과 생물들을 구원하셨다. 노아가 구원을 받은 까닭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기 때문이다(창 6:9; 7:1).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것은 몸의 죽음뿐 아니라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죄인이 구원을 받는 길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이다. 죄인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뿐이다. 방주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상징하였다.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구주 예수를 믿어야 하고 오직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8장: 노아가 방주에서 나옴

[1-5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150일 후에 감하고 7월 곧 그 달 17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10월 곧 그 달 1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들과 그들과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들과 새들을 권념하셔서 바람으로 땅 위에 불어 물을 감하게 하셨다. ‘권념(眷念)하다’는 원어(자카르)는 ‘기억하다, 생각하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들을 눈동자같이 보호하시고(신 32:10)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의 손바닥에 새기시고(사 49:16)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신다(시 121:8)고 표현하였다.

땅의 깊음의 샘들과 하늘의 창들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쳤다. 깊음의 샘들과 하늘의 창들을 여신 이는 하나님이시요 닫으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을 홀로 주관하신다. 비가 오는 것도 가뭄이 드는 것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자연법칙을 사용하시고 특별한 경우에만 기적을 일으키신다. 노아 시대의 홍수도 자연적 방법으로 이루어졌고 그 홍수의 제거도 자연적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150일 동안 세상에 가득했던 물이 서서히 줄어들게 하셨다. 건전한 믿음은 기적주의가 아니고 자연법칙이나 이성적 사고를 존중한다.

7월 17일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다. 2월 17일에 비가 오기 시작했으니 약 5개월이 지난 때이었다. 아라랏산은 오늘날 터어키의 동쪽 국경 부근, 아르메니아와 이란과 접한 곳에 있는 높이 5,165m 되는 산이다. 그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문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주위에 아라랏산보다 높은 산도 있고 또 멀리 동쪽 네팔 부근에는 히말라야 산맥의 높은 산들이 있었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아라랏산을 택하셨다. 그 지역은 홍수 후의 세계를 위해 선택된 곳이었다. 노아의 자손들은 거기에서부터 퍼져나갈 것이다. 물은 점점 줄어,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문 지 70여일이 지난 10월 1일에 산들의 봉우리들이 보였다.

[6-12절] 40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接足)할[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7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또 7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그 후 또 40일이 지난 11월 10일경, 노아는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놓았고 까마귀는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다. 노아는 또 비둘기를 내어놓았는데, 비둘기는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다. 7일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어놓았을 때 그 비둘기는 감람 새 잎사귀를 입에 물고 왔다. 노아는 그것을 보고 땅에 물이 많이 줄었다는 것을 알았다. 또 7일 후 비둘기를 다시 내어놓았는데 비둘기는 다시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땅이 말랐고 비둘기가 거할 곳을 찾았다는 증거이었다.

[13-19절] 601년 정월 곧 그 달 1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2월 27일에 땅이 말랐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편만하고](웨솨레추)(KJV, NASB, NIV)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노아의 나이 601년 1월 1일, 땅 위에 물이 걷혔다. 노아는 방주의 뚜껑을 제거하고 내려다보았고 땅에 물이 걷혔음을 확인했으나 땅이 완전히 마르지는 않았다. 또 두 달이 흘러 2월 27일에야 땅이 완전히 말랐다. 홍수가 시작된 지 1년 10일이 지난 때이었다. 그 기간은 온 세상에 대변혁이 일어난 시간이었다. 그 기간은 노아의 식구들에게 갑갑하고 지루한 시간이었으나 두려움 중에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와 찬송을 올린 시간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그 가족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와 함께한 모든 생물들도 다 이끌어내라고 하셨다. 이제 홍수가 끝나고 땅에 물이 말랐으니, 그들은 지루했던 1년 10일 간의 방주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방주에서 나와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홍수가 있기 전에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고 이제는 그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들어가는 것도 나오는 것도 노아가 마음대로 정하고 행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해야 할 일이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방주에서 나왔고 땅 위의 모든 생물들도 다 방주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야 한다. 그러한 생활 원리를 잘 보여준 것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를 따라 가야 했던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를 때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진을 쳤다. 혹시 구름이 장막 위에 하루만 머물 때에도 그들은 순종해야 했고, 한 달이나 일년을 머물 때에도 순종해야 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명령과 신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진을 치기도 하였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진행하기도 하였다(민 9:15-23). 이와 같이 주의 자녀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하심을 따라 가기도 하고 그의 명령과 인도하심을 따라 서기도 해야 한다.

[20-22절]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레아크 한니코아크)[그 속죄의 향기](BDB, KB, NASB)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방주에서 나온 후, 노아는 첫째로 하나님께 단을 쌓았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들을 취하여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다. 이것은 그의 자발적인 행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양의 첫새끼로 제사를 드렸던 의인 아벨의 발자취를 좇는 일이었다.

번제는 제물을 죽여 온전히 불태워 드리는 제사이다. 번제는 죽어야 마땅한 죄인들을 대속(代贖)하실 중보자의 죽음을 상징하는 뜻이 있다. 노아와 그 식구들은 홍수로 멸망한 자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짐승 제물로 예표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을 받았다. 죄인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는다.

번제는 또한 하나님께 대한 노아의 온전한 헌신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큰 구원을 받은 노아는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각오를 표현했다. 홍수가 있기 전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롭게 살았던 노아이지만,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은 이후 그의 심정은 하나님을 향해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이것이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번제의 단을 쌓는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의지하고 감사하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를 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했고(롬 12:1), 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교훈하였다(고전 6:19-20). 또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5:15).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드린 제물들의 향기를 받으셨다. ‘그 향기’라는 원어(레아크 한니코아크)는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속죄(더 정확히 말하면, 유화[宥和])의 향기)’(BDB, KB, NASB)라는 뜻이다(레 1:9 등).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그가 땅을 저주하였지만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겠고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쉬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성경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불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그 경고대로 마지막 심판의 날과 그 심판이 올 것이지만, 다시 홍수로 세상이 멸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자연만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비가 오게 하시는 이도, 홍수가 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비를 그치게 하시는 이도, 바람이 불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자연 은택 속에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해야 하고, 또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낙심치 말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를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그의 뜻에 합당하게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실 수 있고 또 풍성하게 주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자.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방주에 들어가기도 하였고 1년 10일간 방주 속에 머물기도 하였고 또 방주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하심, 즉 성경에 교훈된 대로 행해야 한다. 거기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기도 하고 서기도 해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 우리의 삶을 의탁하며 그의 교훈과 인도하심을 따라 한 걸음씩 행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본문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바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바이다. 원죄의 부패성은 어릴 때부터 나타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사람의 심령이다(렘 17:9). 사람은 심히 악한 존재이다. 우리는 죄악 중에 출생했고 우리의 모친이 죄 중에 우리를 잉태했다(시 51:5). 그러므로 사람은 거듭나야 하며 어릴 때부터 성경의 바른 교훈 속에서 양육되어야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한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사실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지옥 형벌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죄인들인 우리를 그의 긍휼과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하셨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뜻과 명령과 교훈을 따라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리자(롬 12:1-2).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여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행하자.

9장: 홍수 직후의 일들

1-17절, 하나님의 복 주심과 언약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께서는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도 복 주시며 동일한 말씀을 하셨었다(창 1:28). 복(福)은 좋은 것을 가리킨다. 본문은 자녀 출산을 복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이 많은 자녀를 출산하여 수적으로 많아지고 온 땅에 충만하기를 원하셨다. 다산(多産)은 큰 복이다.

[2-3절]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살아 움직이는 것]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사람은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창 1:26, 28). 사람이 그 동안 이 임무를 잘 수행했는지 모르나, 이제 다시 그 임무가 강조된다. 사람은 다른 생물과 본질이 다르다. 피조물들 중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생물들을 섬겨서는 안 되며 그것들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역사상 사람들은 무지하게 피조물을 조물주처럼 숭배했고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들의 형상들로 바꾸었다(롬 1:23).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본래의 음식은 채소와 나무 열매이었다(창 1:29). 그러나 홍수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물고기와 새와 땅의 짐승과 기는 것 등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음식으로 허락하셨다. 이제 육식(肉食)은 사람에게 정당한 음식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명령이라기보다 허용이었다. 아마 홍수 후 사람들의 기력은 급격히 약해진 것 같다. 사람의 수명은 1,000살에서 100살로 급격히 감소되었다.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용하신 것은 아마 이런 이유, 즉 사람의 기력의 쇠약해짐과 더 많은 영양분의 필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4절]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식을 허용하셨지만, 한가지 단서가 있었다. 그것은 고기를 살아 있는 채로, 즉 피가 있는 채로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런 단서를 두신 까닭은, 아마 산 생명체를 그대로 먹는 것이 잔인한 행동이며 피가 생명이라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함인 것 같다.

특히 피와 생명은 신비하게 연관되어 있다. 피는 곧 생명이다(레 17:11). 짐승의 생명도 피에 있고 사람의 생명도 피에 있다. 몸무게가 60kg인 사람의 몸에는 약 5리터의 피가 있고 그것은 약 46초 내지 1분마다 심장으로부터 뿜어져 나와 온 몸을 한바퀴 돈 후에 심장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피가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피는 곧 생명이다.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지만 피는 먹지 말라는 것은 후에 모세의 율법에 명문화되었다(레 17:10-11).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 자는 그것의 피를 다 뺀 후에 먹어야 했다. 그러나 구약의 이 법은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피를 먹지 말라는 법은 의식법에 속한다. 구약의 의식법들은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골로새서 2:16-17,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5절]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사람의 생명의 피를 찾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짐승이 잘못하여 사람을 죽였을 경우 그 짐승은 죽임을 당해야 한다. 출애굽기 21:28,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또 형제가 그 형제를 죽였을 경우 그는 사형으로 그 죗값을 받아야 한다.

[6절]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남의 생명을 존중히 여겨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그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마땅히 자신이 피를 흘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즉 살인죄는 사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다른 사람이나 심지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시려는 의도에서 주신 법이다. 이것은 개인적 보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정당한 재판에 의한 사형 집행을 뜻한다. 살인자를 사형으로 응징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짐승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살인은 사람에게 죄를 짓는 악일 뿐 아니라, 그를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 큰 악이며, 따라서 그 악은 사형으로 응징되어야 한다.

물론, 율법에는 고의적이지 않고 부지중에, 실수로 저지른 살인의 경우 그 살인자가 죽음을 모면할 수 있게 했다. 그런 자는 이스라엘 땅에 도피성들 중 하나로 피신하여 들어가 살 수 있었다(민 35:15).

사형 제도는 오늘날에도 필요하고 정당한 법이라고 본다. 사형은 극악한 죄에 대한 공의의 징벌과 그와 유사한 범죄의 예방을 위해 또 사회의 정의와 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는 주의 말씀(마 5:39)은 개인적 보복을 금하신 것이며 재판 제도와 사형을 부정하신 것은 아니라고 본다.

[7절]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1절의 내용을 반복하시며 강조하셨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수정하시거나 취소하신 적이 없다. 과거에 인구 증가와 자원 문제를 고려하여 산아 제한을 주장한 것이나 오늘날 여러 가지 경제적 여건을 구실 삼아 임신과 출산을 기피하는 것은 인간적 생각일 뿐이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 자녀를 많이 출산하는 다산(多産)은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이며 복이며, 사람의 의무이며 선한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건강이나 경제 여건이 아주 어렵지 않다면 또 특별한 사명의 걸음이 아니라면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을 복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시편 127:3-5,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箭筒)[화살 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물론, 낳은 자녀를 경건하고 도덕적이게 바르게 키우고 양육하는 것은 부모의 중요한 의무이며 책임이다. 세상 공부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며 또 필수적인 일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경건하고 도덕적이게 키우는 일이다. 바른 인격이 되지 못하고 세상 지식만 갖춘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며 세상의 구원과 평안을 위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8-10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언약을 세우셨다. 8-17절의 본문에 ‘내가 . . . 세우리니’ 혹은 ‘내가 . . . 세운’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11, 12, 17절). 또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내 언약’이라고 표현하신다(9, 15절). 언약의 대상은 노아와 그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과 또 그들과 함께한 모든 생물들, 즉 새들과 가축들과 땅의 짐승들, 즉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과 자연계 전체이었다.

언약(베리스)은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었다. 그는 에덴 동산에서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었다(창 2:16-17). 또 그는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며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창 6:18). 또 그는 후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 표로 할례를 명하셨다(창 17:7). 또 그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고(출 24:7; 34:27-28) 그 표로 안식일을 주셨다(겔 20:12). 이것이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옛 언약 곧 구약이다. 또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과 새 언약 곧 신약을 세우셨다(눅 22:20). 새 언약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이며 세례는 그 표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 자신을 낮추시며 스스로를 제한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겸손의 한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 사회의 계약과 달랐다. 인간 사회의 계약은 서로간의 동의 아래 이루어지는 쌍방적 약속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 약속이다. 그것은 일종의 명령, 즉 약속 있는 명령이었다.

[11절]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세우신 언약의 내용은 다시는 홍수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 즉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15절에서도 그는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약속이었다. 자동차 사고를 경험한 자가 자동차 운전을 두려워하고 꺼려하듯이, 홍수 심판 후에 사람들과 새들과 짐승들은 비가 많이 오면 혹시 다시 홍수로 인한 멸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통해 그들에게 이러한 두려움을 제거하시고 평안과 위로를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모든 사람들과 생물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호의와 은혜이었다.

물론, 세계적 홍수 심판은 다시 없을 것이나, 부분적, 지역적 홍수는 있을 것이며, 소돔과 고모라 성의 유황불비 심판이나 가나안 땅의 완전한 진멸 같은 지역적 심판도 있을 것이다. 또 마지막 날 세상에는 불 심판도 있을 것이다(벧후 3:6-7). 그러나 오랫동안 평안이 지속될 것이다. 본문 12, 16절에서, 이 언약은 “영세(永世)까지”(레도로스 올람) 세우는 언약이며 “영원한” 언약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8:21-22에서 암시되었었다: “. . .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12-17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증거 혹은 증표로 무지개를 주셨다. ‘무지개’라는 원어(케쉐스)는 ‘활(bow)’이라는 뜻이다. 무지개(rainbow)는 물방울로 만들어진 활 모양이다. 무지개는 언약의 표로 주어졌다. ‘증거’라는 원어(오스)는 ‘표(sign), 증표(pledge)’라는 뜻이다. 17절도 무지개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증표임을 말한다. 증표는 하나님의 언약의 확실함과 견고함을 나타낸다.

무지개는 비가 온 후 아직 공중에 물방울이 많이 있을 때 햇빛이 물방울에 굴절되어 일곱 가지 색깔을 내는 신비로운 모양이다. 비가 개었어도 사람들이나 새들과 짐승들이 홍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만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공중에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주실 것이다. 줄과 화살이 없는 활 모양의 그 무지개는 사람에게 공포를 주는 활이 아니고 위로를 주는 활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보실 때 그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실 것이며(15, 16절)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키실 것이다. 무지개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제거하고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복이다. 1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7절,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결혼과 자녀 출산은 하나님의 뜻이며 복이며 또한 사람의 의무요 선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고의로 그 뜻을 저버리고 거스르고 있다. 우리는 결혼과 자녀 출산이 짐스러운 일이 아니고 귀하고 복된 일임을 깨닫고 사모하며 감사히 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육식을 허락하셨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본래의 음식은 채소와 과일이었다. 그러나 홍수 심판 후, 아마도 사람의 기력이 쇠하여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육식을 허락하셨다. 살아 움직이는 것을 먹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살생은 죄가 아니다. 채소만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적이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자손들에게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그 표로 무지개를 주셨다. 이것은 홍수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위로이었다. 그러나 비록 홍수 심판은 없지만, 하나님의 마지막 불 심판이 남아 있다(벧후 3:7). 불의한 자들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며 회개치 않는 모든 죄인은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명령대로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18-29절, 노아의 실수와 저주와 축복

[18-19절]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인류는 노아의 세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나왔다. 이것은 인류의 기원에 대한 중요한 지식이다. 인류는 아담의 자손이며 또한 노아의 자손이다. 인류는 한 아버지에게서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한 가족같이 여기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노아의 세 아들을 말할 때 “셈과 함과 야벳”의 순서로 말한다(창 5:32; 6:10; 7:13; 9:18; 10:1; 대상 1:4). 그러나 출생 순서는 야벳, 셈, 함의 순서인 것 같다(Poole). 왜냐하면 (1) 창세기 9:24는 함을 “그 막내 아들”(NASB, NIV)이라고 부르고(히브리어에서 형용사에 관사를 붙이면 최상급, 즉 ‘가장 작은 아들’이라는 뜻), (2) 창세기 10:21은 원문에서 “[셈은] 형 야벳의 동생”이라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고(KJV) (MT 액센트에 맞음), (3) 창세기 11:10(“셈은 1백세 곧 홍수 후 2년에”)은 노아가 500세 때 셈이 아직 출생하지 않았음을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셈과 함과 야벳”은 중요성의 순서일 것이다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고 표현된다. 22절에도 함을 ‘가나안의 아비 함’이라고 말한다. 또, 25절은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 그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리라는 노아의 말과, 26절과 27절은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되리라는 말을 기록한다. 창세기 10:15-20은 함이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등 네 아들을 낳았고 또 가나안은 북쪽 시돈에서부터 남쪽 가사까지 흩어져 살았던 가나안 자손들의 아버지라고 좀더 자세하게 증거한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가 함을 ‘가나안의 아비’라고 반복해 표현하고 또 가나안에 대한 예언을 반복해 기록한 것은 장차 그들이 들어가 얻을 가나안 땅의 원주민이 누구의 자손이며 그들이 왜 저주를 받아 진멸(殄滅)되어야 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왜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후에 그 땅의 거주민들이 매우 우상숭배적이었고 음란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웠다(레 18:3, 25; 신 7:1-5).

창세기에는 가나안 땅에 대한 언급이 32번이나 나온다.20)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고(창 11:3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나(창 12:5), 그때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했고(창 12:6)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에게 그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을 뿐이었다(창 12:7).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다(창 13:12; 16:3). 후에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고(창 31:18; 33:18; 35:6; 37:1) 마침내 가나안 땅에 묻혔다(창 50:5, 13).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었다.

[20-21절]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는 농사일을 시작했다. 그는 포도원을 만들었다.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원어는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노아는 포도 수확을 했고 포도주를 만들었고 포도주를 마시고 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있었다. 그것은 노아의 부끄러운 실수이었다.

성경은 술에 대해 많이 교훈한다. 성경에서 술은 주로 포도주이다.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음료수로 여겨지기도 하지만(신 14:26; 시 104:15), 술취함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큰 죄로 분명하게 정죄되어 있다(고전 6:10; 갈 5:21). 술취함은 사람으로 올바른 정신과 판단력을 잃고 실수하게 하고 범죄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라”고 말했고(엡 5:18),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라고 말했다(잠 23:31). 또 교회의 감독이 되려는 자들은 절제하며 근신해야 하는데, 이것은 술 취하지 말아야 함을 내포하는 자격요건이며 또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해야 했다(딤전 3:2, 8).

노아의 실수는 인간의 본성의 부패성과 연약을 잘 드러낸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완전했지만(창 6:9) 엄격한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노아에게도 인간의 연약성이 있었다. 노아도 실수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인은 없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 어느 정도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 뿐이다.

경건한 노아의 술취함과 실수는 우리 모두에게 금주(禁酒)의 교훈을 준다. 술은 실수와 범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또 오늘날의 술은 적은 양으로도 사람을 취하게 만들기 때문에, 또 술은 건강을 해치고 경제적 낭비도 적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인의 완전 금주(禁酒)와 완전 금연(禁煙)의 좋은 전통을 지키는 것이 좋다.

[22-23절]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하체’라는 원어(에르와)는 ‘벌거벗음 혹은 음부(陰部)’라는 뜻이다(BDB). 함의 잘못은 이중적이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의 실수와 부족을 또 다른 사람에게 알린 것이었고, 둘째는 아버지에 대한 공경심이 없는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부족과 실수가 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부족을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 레위기 19:16,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특히, 부모의 실수와 부족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셨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라면 부모의 실수와 부족을 덮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함은 아버지의 실수를 보고 그것을 덮지 않고 다른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공경심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달랐다. 그들은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가렸고 얼굴을 돌이켜 그것을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공경심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자식으로서 올바른 태도이었다.

[24-27절]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학카탄)[막내](NASB, NIV)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는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5절)고 말했고 또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26절) “가나안은 그의[아마 ‘셈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7절)고 말했다. ‘종들의 종’이라는 표현은 가장 낮은 종이라는 표현이다. 모세는 노아가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되리라고 저주하였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셈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것을 암시한다.

함의 아들에 대한 노아의 저주는 함에 대한 저주보다 더 큰 저주이었다. 부모와 자녀는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출 20:5). 복된 부모의 자녀는 복되지만, 저주받는 부모의 자녀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부모가 범죄하면 그 자녀들에게 화가 미친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도 조심해야 한다. 노아의 저주는 가나안 족속들의 멸망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물론 실제적으로도 가나안 족속들은 심히 음란하고 우상숭배적이었다(레 18:24-25; 신 7:1-2). 저주는 의인들에게 임하지 않고 악인들에게 임한다. 노아의 저주는 예언적이었으나, 또한 공의롭게 성취되었다.

한편, 노아는 셈을 축복하였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복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며 하나님께서만 인간에게 복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셈과 함께하시니 셈은 복을 받은 자이다. 과연 셈족은 참 종교의 전파자가 될 것이다. 참 종교는 셈족에서 발견될 것이다. 참 경건은 셈족을 통해 전달된 유산이다. 하나님의 복은 셈족을 통해 이어져 왔다. 이스라엘 민족은 셈족이었고 그 족속을 통해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롬 9:5).

노아는 야벳도 축복하였다. 그에게는 창대케 되는 복이 선언되었다. 이것은 특히 문화적, 경제적 번창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야벳 족속은 서구 문명을 건립한 자들이다. 그들은 과연 번창하는 복을 받았다.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는 말은 야벳 족속이 셈의 종교적 복에 참여할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방인 구원에 대한 예언이다. 야벳의 자손들인 유럽인들은 셈의 자손인 유대인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그들은 셈의 장막, 곧 셈의 자손인 유대인들에 의해 시작된 교회에 들어왔다.

[28-29절] 홍수 후에 노아가 350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950세에 죽었더라.

노아는 아담 후 천년경에 출생하여 이천년경에 죽었다. 그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획을 그었다.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는 노아와 128년간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세상의 초기 역사가 아브라함에게까지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인류는 아담의 자손이며 노아의 자손이다. 그들은 홍수 심판 후 남은 자들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슬러 올라가면 다 한 조상의 자손이며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불쌍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술 취하지 말아야 한다. 노아는 술취함으로 실수하였고 그것은 그의 생에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았다. 술취함은 방탕한 일이며 실수와 범죄의 원인이며 또 천국 길을 가로막는 큰 죄악이다. 술 취한 자들은 천국을 기업으로 얻지 못한다. 우리는 완전금주와 완전금연의 경건한 기독교 전통을 귀히 여기며 술과 담배를 멀리하자.

셋째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 함은 아버지 노아의 실수를 덮고 감추려 하지 않고 형제들에게 알렸다. 그것이 함의 부족이고 그가 저주를 받은 이유이었다. 우리는 이웃의 부족과 실수를 볼 때 그것을 또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 하지 말고 그것을 가급적 덮어두어야 하고 특히 부모님의 부족과 실수에 대해 그러해야 한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 10:12).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 11:13).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넷째로, 노아의 저주와 축복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함의 자손들, 특히 가나안 족속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되어 완전히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반면에, 셈은 종교적으로 복을 받았다. 셈족에서 인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야벳은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번창하였고 셈의 종교적 복을 나누어가지게 되었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한 축복과 저주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셈의 복을 얻었다. 우리는 이 구원의 복을 감사하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녀들도 이 복을 누리도록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권면하며 본을 보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