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사도행전 22-28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2. 21:12


사도행전 제목차례

사도행전 22장(87)

(87) 바울의 자기 변호(사도행전 22 : 1 - 30)


사도행전 23장(88~89)

(88) '담대하라'(사도행전 23 : 1 - 11)

(89) 하나님의 손길(사도행전 23 : 12 - 35)


사도행전 24장(90)

(90) 벨릭스 앞에서의 변증(사도행전 24 : 1 - 27)


사도행전 25장(91)

(91) 가이사에게 호소하노라(사도행전 25 : 1 - 27)


사도행전 26장(92~93)

(92)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사도행전 26 : 1 - 23)

(93)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사도행전 26 : 24 - 32)


사도행전 27장(94~95)

(94) 바울과 함께 하신 하나님(사도행전 27 : 1 - 26)

(95) 바울의 위로(사도행전 27 : 27 - 44)


사도행전 28장(96~97)

(96) 독사에 물린 바울의 경우(사도행전 28 : 1 - 10)

(97) 로마에 당도한 바울(사도행전 28 : 11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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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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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바울의 자기 변호

(사도행전 22 : 1 - 30)


위기에서 벗어난 바울은 결박을 당한 채 영문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때 바울은 천부장에게 허락을 받아 유대인의 무리들에게 히브리 방언으로 변명을 시도했습니다. 바울은 이 변명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핍박자로써 어떻게 복음의 일꾼이 되었는가에 대한 자기 신앙의 간증을 피력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의도는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의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뜨거운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같은 자기 변명이 먹혀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군중들의 감정을 격하게 하여 분노를 더욱 크게 자아내게 된 것입니다.


1. 바울의 자기 소개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소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같은 바울의 시도는 논리적으로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감정이 격앙된 유대인의 무리들에게 흥미를 주게 되어 그들을 조용히 만들 수 있었습니다.

(1)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요 또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사람임을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큰 의문을 던져주면서 그러면 왜 이 자가 이 도에 미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란 지방에서 태어났음을 밝혔습니다. 또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곳은 수준 높은 교육 기관으로 이곳을 나오면 사회적으로 훌륭한 랍비 교육을 받은 것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가말리엘은 학문에 있어 해박하고 유대인들 중에 랍비로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가말리엘 출신을 알아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같은 신분으로 하나님께 열심 있는 자였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그 증거로 지난날 자신이 행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핍박을 사례로 들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2)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신봉자가 되었는가에 대하여 설명해 나갔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열심인 나머지 자기 스스로 대제사장으로부터 다메섹 교회에 있는 성도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에 처하려고 많은 무리들을 이끌고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바울을 둘러 비취었습니다. 그리고는 누군가가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오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는 음성이 들려온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으며 이때 예수를 핍박했던 자신은 죽게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2. 군중들의 반항

이 때 바울의 말을 듣던 군중들이 바울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면서 '이같은 놈은 죽이자 세상에서 없이하자'고 떠들어 댔습니다. 그들의 소요가 얼마나 큰지 천부장이 바울의 신변의 위험을 염려하여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들 군중들의 이해 할 수 없는 소요 사태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 문을 열어 주지 아니하시면 천사의 말을 듣는다 해도 결코 받아 드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같은 사실을 로마서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너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느 모로 보든지 바울의 신앙적인 체험은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을 나타낸 것입니다.

(1) 복음은 그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셔서 받아 드립니다. 두아디라 성에 있는 루디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써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고 했습니다(행16:14).

(2)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의 마음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까? 마음 문이란 곧 우리의 죄악을 의미합니다.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하나님께로 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신 것처럼 주님께서 내 마음의 죄악의 담을 허셔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다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마음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마음을 정결케 한 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결론 : 영문 안으로 이끌려 간 바울은 로마 군병의 잔인한 심문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 때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항의했습니다. 로마 시민권 소유자는 피 점령군의 이방인들과는 달리 인권이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천부장은 이 사실을 알고 바울의 결박한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려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는 일에 생명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사도행전 23장(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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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담대하라'(사도행전 23 : 1 - 11)

(89) 하나님의 손길(사도행전 23 : 12 - 35)


(88) '담대하라'

(사도행전 23 : 1 - 11)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들려준 간증은 오히려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작극하여 그들의 격분을 사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도 유대인이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운 자요 하나님께 열심있는 사람이었고 특히 그리스도교를 핍박했을 뿐 아니라 이 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자리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을 들려주었을 때 그들 가운데서 이 같은 자는 살려 둘 수가 없다고 큰 소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소요로 바울의 신변이 위태해지자 천부장이 바울을 결박하여 영문으로 끌어 드려 채찍으로 때렸으나 바울이 로마 시민인 사실을 알고는 그의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다가 도대체 바울이 저지른 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제사장과 온 공회를 모으고 재판을 받도록 한 것입니다.


1. 바울의 법정 진술

바울은 한 죄인의 몸으로 공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공회란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킵니다. '산헤드린'이란 말은 '함께 결정함'이란 뜻입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 장로, 서기관들이나 그 가족들 중 탁월한 사람 71명으로 구성되며 유대인들 간에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이 모두 이 회의에서 다루어집니다. 로마의 통치자들은 종교적인 문제나 유대인들 간의 율법적인 문제의 소송을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하는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이 재판에서는 최고 사형까지 언도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로마의 지방 행정 장관에 의해 합당하다는 인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형 언도가 이 같은 경위에 의해 빌라도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1) 바울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말로 자기 변명을 다시 시도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의 진실한 마음의 고백입니다. 바울의 이같은 노력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한 말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흠이 없는 자라고 한 말은 율법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고전4:4절에서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겨 온 그의 믿음을 이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2)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로 더불어 다투었을 때 지혜를 썼습니다. 이곳에 대제사장으로 나와 있는 인물은 예수님을 잡아 끌고간 안나스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주후 47년 칼시스의 헤롯 왕으로부터 관직을 임명 받아 12년간 대제사장직에 머물러 있었던 인물입니다. 이 자가 바울 곁에 있는 자에게 명하여 그 입을 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모욕을 가하며 인권을 유린하는 이 아나니아를 향하여 '희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나를 치려하느냐'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명한 자가 대제사장이란 사실을 알고는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노라'고 하면서 정중히 사과했습니다.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사과한 것은 문제의 핵심을 흐리지 않으려는 그의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울은 저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려는 뜨거운 열의에서 많은 것을 참고 양보했습니다.


2.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다툼

피고로 공회 앞에 선 바울은 공회의 분위기를 쉽게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공회는 여러 계층의 유대인들의 지도급 어른들이 모였기 때문에 이 사실을 간파하고 지혜를 썼습니다. 그들 중에는 바리새파 사람들도 있었고 사도개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요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점을 끄집어내어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난번처럼 복잡하고 긴 간증을 시도하지 않고 핵심을 찔렀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같은 바울의 호소는 당장에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실상인즉 바울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이 부활의 증거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로 인하여 공회 안은 난데없는 집안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 간의 신학적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논쟁 때문에 이제 공회는 더 이상 바울의 재판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동을 겪은 그 날 밤이었습니다.

주님이 자리에 누워 있는 바울 곁에 스셔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바울은 주님이 언제나 자기 곁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함께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새 힘이 솟아났습니다. 그는 이 때 주님의 말씀으로 얻은 그 새 힘으로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바울의 경우처럼 우리들이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해도 예수님은 언제나 내 곁을 떠나지 않으심을 믿고 담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네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9) 하나님의 손길

(사도행전 23 : 12 - 35)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자 분히 여기고 다시 바울을 죽이려는 새로운 계획을 짰습니다. 그들은 한가지 기막힌 계획을 세워 그 방법대로 추진키로 했습니다. 그 방법이란 대제사장과 장로들로 하여금 바울에 대하여 더 심문할 것이 있으니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라하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죽이자고 짠것입니다.


1. 바울을 해치려는 계획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왜 이같은 고난을 받아야 한 것입니까? 바울에게는 로마로 가는 길이 아마도 자신이 겪고 있는 이런 어려움이 없이도 하나님께서 능히 로마에 보내실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는 일에 바울이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같은 하나님의 방법이 왜 필요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로 더욱 하나님만을 의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잠3:14절 말씀을 보면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고 했습니다.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바울에게 내려 주실 위대한 상급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우리의 생애가 우리들이 세운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인즉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평안하고 형통하는 방법으로만 인도하시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쓰셨던 방법으로 우리의 생애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구원을 이루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인도하시며 그 방법이 나에게 주시는 최선의 방법인줄 알고 어떤 일을 만나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에 어려움이 오고 핍박이 오고 시련이 와도 이 모든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의 의해 인도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 일을 계획하시고 친히 인도하시는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답답해 하고 발버둥쳐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의 신앙적인 자세는 '하나님이여, 당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벨렉스 총독 앞에 서게 된 바울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는 간계를 때마침 바울의 생질이 알아내어 바울에게 고하였고 바울은 생질로부터 들은 그들의 음모를 천부장에게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려고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지 않고 가이사랴로 보내기로 하고 이 일을 비밀에 부쳤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안전한 호송 속에 가아사랴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천부장의 편지를 받은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그 앞에 세우고 바울이 어느 고장 사람인지 심문했습니다. 관할 재판권 때문에 물어 본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기대에서 벗어나 천부장의 배려 속에 안전한 호송을 받으며 벨릭스 총독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이곳에서 재판을 다시 받게 되며 이 재판의 결과 로마의 가이사 앞에 서기 위해 로마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은 험준한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생애나 그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전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몇 가지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1) 주님의 뜻만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경우 자신의 뜻을 따르려고 한다면 그의 생애에서 거둘 수 있는 것은 실패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에 자신에게 십자가를 지는 일이 온다 해도 그 일이 주님의 뜻이라면 그 짐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지혜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연고로 십자가를 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같은 일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에는 지혜를 가지고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3) 끝까지 인내로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기 사명에 충성하며 지혜를 얻었다 하면 주저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때까지 인내로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좋은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환난의 지극히 경한 것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고 사도 바울을 인도하셨던 그 선한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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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벨릭스 앞에서의 변증

(사도행전 24 : 1 - 27)


바울은 총독 벨릭스 앞에 섰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천부장의 호송으로 인하여 안전하게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총독의 재판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바울을 송사하려는 무리들이 닷새 후에 가아사랴에 도착하였는데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을 이끌고 총독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바울을 송사하는 원고로 출정했는데 그는 유명한 법정 변사 더들로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재판은 유대인들이 세운 변사 더들로와 바울의 변론으로 치열했는데 서로 만만치 않아 결국 무승부로 결판이 나지 아니했습니다. 그 후 벨릭스가 바울을 오랜 기간 자기 휘하에 구류하여 둠으로 재판이 진행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1. 더들로의 송사

변사 더들로는 고소인을 대리하여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송사하게 되었습니다. 더들로는 매우 간교한 변론으로 벨릭스 총독에게 아첨하면서 변론을 전개해 나아갔습니다. 그의 변론은 간결하면서도 요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앞에서 그의 송사가 먹혀 들어갈 리가 없었습니다. 더들로가 바울을 송사한 세 가지 요점은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자, 나사렛 이단의 괴수, 성전을 더럽힌 자 등입니다.

(1) 그는 바울을 가리켜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자라고 송사했습니다. 만약 바울에게 유대인을 소요케 했다는 증거만 제시 될 수 있었다면 유죄 판결이 나왔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소요는 로마 정부의 골칫거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들로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벨릭스 총독의 유죄 판결을 이끌어 낼 수 없었습니다. 더들로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염병이라고 악평했습니다.

(2) 다음에 더들로는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고소했습니다. 나사렛 이단이란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쳐진 모욕적인 말입니다. 더들로는 이런 말로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이야말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위험 인물이며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들고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존재로 부각시키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부친 이단이란 말은 율법의 의를 인정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복음의 핵심이 그들이 신봉하는 율법과는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율법적인 견지에서 볼 때 이단이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3) 다음에 세 번째 내용은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게 함으로 잡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송사는 어느 정도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죄목도 그들의 억지 죄목으로 벨릭스 총독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더들로가 총독에게 아첨한 말도 허식에 불과한 것임을 총독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같은 더들로의 수식어가 벨릭스의 마음에 감동을 줄 리가 없었습니다.


2. 바울의 변증

이제 피고로 벨릭스의 법정에 선 바울이 변증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총독은 바울에게 머리 짓으로 표시하여 말하라고 바울의 변증을 허락했습니다. 바울은 더들로가 바울의 죄목으로 지적한 세 가지 송사에 대하여 차례로 변증해 나갔습니다.

(1)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들을 소요케 한 사실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내 세웠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기간이 짧았고 그 기간 중에도 누구와도 변론한 일이 없었으며 성중에서 무리들을 소동케 하는 일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를 송사하는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저들이 능히 총독 앞에 내 세울 증거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 바울은 또 더들로가 이단이라고 정죄한 복음에 대하여 변증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이 이단이 아닌 사실에 대하여 변증하기를 '이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말했습니다.

(3) 바울은 더들로가 세 번째로 내 세운 성전 모욕죄에 대하여 변증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서 규정한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 제물을 드리고 또한 결례를 행하였으며 바울의 이같은 일은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밝혔습니다.

(4) 그리고 바울은 결론적으로 벨릭스 총독에게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근원적 원인을 밝혀 주었습니다. '오직 내가 너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이 유대인들의 걸림이 되어 벨릭스앞에 서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결론 : 바울은 그의 소신과 복음의 진리를 담대하게 그리고 당당히 변증했습니다. 더들로의 말처럼 과연 복음은 염병과 같은 전염력으로 번져가습니다. 바울이 복음으로 뜨거워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에 사랑이 이토록 컸기에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마치 염병처럼 이 복음을 퍼지게 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 바울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25장


(91) 가이사에게 호소하노라

(사도행전 25 : 1 - 27)


바울의 재판은 자꾸 지연되어 갔습니다. 바울로서는 매우 답답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모든 일은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었으니 바울은 로마에서 황제뿐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행22:14-16).


1.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이란 두 인물

원래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군의 천부장으로부터 바울을 인계 받아 재판을 한 자는 총독 벨릭스였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재판의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벨릭스가 총독의 자리에서 파면을 당하는 변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벨릭스의 재임 마지막 시기에 가이사랴의 유대인들과 이방인 주민 사이의 내란 때문인데 이 내란에 벨릭스가 개입하여 중재하려다가 여의치 못하여 유대인 당파 지도자들의 피를 많이 흘린 것이 원인이 되어 총독 자리에서 파면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벨릭스는 파면되어 떠나가는 시간까지도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으려고 바울을 구류시켜 두었다고 했습니다. 베스도는 바로 이 벨릭스의 후임자로 온 총독입니다.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받아 부임한 베스도는 보르기오 베스도로 가이사랴에서 짧은 기간 통치하였는데 그가 부임하기는 주후 59년이었고 61년에 그가 죽기까지 통치한 것으로 그 기간은 삼 년에 불과한 기간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등장하는 아그립바 왕은 아그립바 2세를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 출생 당시의 왕이었던 헤롯 대왕의 증손이며 야고보를 죽인 헤롯 왕 곧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입니다(마2:1; 행12:1, 23). 그리고 아그립바 왕의 아내로 등장하는 버니게란 여인은 왕과 친 남매지간으로 서로 부부관계를 맺고 있는 처지로써 도덕적으로 타기 받을 만한 인물인 것입니다. 이 자가 아버지 아그립바 1세가 죽은 후, 약 10년 뒤인 주후 53년경부터 그의 숙부가 되는 칼시스의 헤롯이 다스렸던 칼시스 지방과 팔레스틴의 북부쪽을 다스려 왔습니다.


2. 베스도 앞에 선 바울

베스도는 가아사랴에 부임한지 사흘만에 예루살렘에 가서 유대인의 유명 인사들을 접견했습니다. 그들과 유대를 맺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바울에 관한 죄에 대하여 고소하면서 그를 예루살렘으로 데려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해 달라고 베스도 총독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바울을 예루살렘까지 데려와 재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스도는 얼마 후에 그 곳을 떠나야 할 공무상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베스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아사랴로 돌아와 재판 자리를 마련하고 바울을 불렀습니다. 이 재판 자리에 원고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장로들과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참석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들은 베스도 앞에서 이 사건을 중대한 사건인 양 송사 했지만 그들의 송사를 증명할 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재판에 승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제 바울의 변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누구에게도 죄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율법에 대해서도 죄가 될 수 없는 것은 율법은 복음을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도 유대인들의 거짓에 기인한 모함일 뿐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가이사에 대해서도 범죄한 일이 없었습니다. 복음의 진리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가이사 황제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그와 충돌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 재판을 받을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이 일은 베스도가 유대인들에게 아첨하여 자신의 지위를 견고히 하려는 우유부단한 행동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큰 위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가이사에게 호소하노라'고 대답함으로 바울의 재판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공회가 아니라 가이사의 법정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가이사란 그 당시 로마 황제의 보편적인 호칭이었습니다. 바울이 호소한다고 한 가이사는 그 당시 반 기독교적 폭군으로 이름난 네로 황제를 말합니다. 그는 아직 반 기독교적인 인물로 변신하기 이전이었습니다.


결론 : 이같은 재판이 있은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베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왔다고 했습니다. 이 때 베스도는 바울의 일을 아그립바에게 말하고 로마 황제 앞에 상소할 확실한 사실을 알기 위해 도움을 청하게 되어 바울이 다시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 서서 변명하도록 사건이 전개됩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바울이 로마 황제앞에 서기 위해 로마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이 하나님께 있으니 바울처럼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그 어떤 길이던지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92~93)

◆ 밤중소리 11-06 | VIEW : 5,756

(92)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사도행전 26 : 1 - 23)

(93)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사도행전 26 : 24 - 32)


(92)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

(사도행전 26 : 1 - 23)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 섰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지 아니하고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호소한다는 진술을 하였기 때문에 로마 시민으로 황제의 최종적인 판결을 받기 위해 가이사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으로 말하기를 허락 받고는 변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이 변명에서 유대인이며 바리새인인 자신이 어떻게 왕 앞에까지 서게 된 것인가에 대하여 설명해 나아갔습니다.


1. 바울이 행한 자기 변명의 서론

바울은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변명할 수 있게 된 일에 대하여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변명이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하여 자신의 변명을 너그럽게 들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특히 아그립바는 그의 조상적부터 유대인들이나 예루살렘 통치에 깊이 관여했던 왕가의 자손이었음으로 그가 유대인의 모든 풍습과 문제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그립바가 복음을 들으면 많은 이해심과 지식을 가지고 들을 것이므로 어쩌면 왕이 복음을 받아 드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 하면 아그립바 왕에게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믿게 할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하면서 그의 변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2) 바울이 왕 앞에 서서 재판을 받는 일이 다른 문제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소망 때문인 것을 문제로 부각시켰습니다. 바울은 여러 가지 면으로 유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해박한 학식은 말할 것도 없고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도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에게까지 인정을 받아 온 처지였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문제시하고 있는 죄과는 무엇인가? 바울은 이에 대하여 아그립바 왕에게 이처럼 말했습니다.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와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고 진술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과 풍습을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송사는 가이사 황제에 대한 반역이나 범법적인 악행에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견해 차이에서 나온 분쟁임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바울이 증거한 문제의 핵심

바울은 자신이 고소를 당한 문제의 핵심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높은 사람들에게 알려 줄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고 반문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에 관하여는 많은 유대인들이 성경적으로 믿고 있었으며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확고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당신들이 어찌하여 예수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일에 대하여 믿지 못할 것으로 여기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도 지난날에 예수를 핍박했던 자였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이 핍박한 그 예수를 믿게 된 동기에 대하여 소상히 밝혔습니다. 바울은 바로 다메섹까지 찾아간 그 때에 일어난 일들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 대목에 가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의 관심을 끌기 위해 '왕이여'라고 부르면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하늘의 강렬한 빛과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음성을 친히 듣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시는 음성을 들려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일에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왕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왕에게 결론적으로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에서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는 선전을 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핍박을 받아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곤욕을 당하게 된 이유를 정리하여 이처럼 말했습니다. 자신이 전파한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뿐인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논증이야말로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자기는 하늘에서 내려 주신 소명만을 위해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 죄 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분명한 어조로 증거 했습니다.



(93)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사도행전 26 : 24 - 32)


바울은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증거하고 또 자신이 회심하기까지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 나아갔습니다. 물론 이 재판에서 재판을 진행시키고 있는 주역은 베스도와 아그립바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는 자세가 각기 달랐습니다. 베스도는 이 사건에 대하여 아는 바도 없었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이란 말은 전혀 생소한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난 베스도는 크게 소리 지르며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했지만 아그립바 왕은 자신이 알고 있는 유대인의 종교와 근간에 일어난 예수를 중심한 여러 사건들, 그리고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과의 갈등 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이야기를 시종일관하게 흥미를 가지고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베스도 총독의 바울을 나무라는 큰 소리를 듣고 놀래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1. 네가 미쳤도다

베스도는 바울의 변명을 더 듣기에 그의 이성이 허락지 아니했습니다. 모두가 허황된 미친 사람의 소리로 들렸습니다. 베스도는 그의 변론에서 바울이 학식이 많은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울의 학문이 깊고 학식이 많음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울의 변명에 하나도 이해할 수 없으며 바울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에 저처럼 열정을 쏟으며 고난을 자초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미친 짓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베스도를 향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1) 바울은 자기의 말은 참된 말이라고 했습니다. 참되다는 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아직까지 자신을 변명하면서 증거한 사건 내용은 정말로 참된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고 증거했습니다. 예수께 관한 사건들은 그 시초부터 종말까지 한편 구석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일들이 아닌 것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은 정신차린 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향하여 미쳤다고 말하는 일은 어느 면으로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때 그것을 이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듣는 이방인의 태도에 대하여 이처럼 말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롬1:21-25).

부르심을 입지 못한 이방인인 베스도에게는 바울의 변명이 마치 정신병자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베스도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미친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은 매우 긴장된 가운데서도 똑똑히 차려진 상태에서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친 것은 사실인즉 베스도가 미쳤고 바울은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생명의 도리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2. 왕은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바울은 그의 시건을 아그립바 왕에게로 돌렸습니다. 왕은 바울이 변명한 모든 사건의 개요를 알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1) 바울은 왕을 향하여 왕은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고 물었습니다. 바울의 이같은 질문은 그가 유대인의 율법이나 그 율법을 전달한 선지자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알고는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그는 본디오 빌라도 만한 판별력은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진리가 무엇인지 몰랐었던 것처럼 아그립바 왕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는 하고 있었겠지만 믿거나 그 이상의 호응은 보여 줄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2) 왕은 즉각적으로 바울을 향하여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도다'고 나무랐습니다. 왕의 이런 꾸지람은 한편 바울보고 미쳤다고 말한 베스도를 의식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왕은 바울의 변명과 그 논조에 대하여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작전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3) 바울은 왕에게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의 진실한 마음의 호소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고 정죄하려는 이 무리들의 영혼을 위해 그의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론 : 바울에 대한 그들의 판결은 결국 무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호소했음으로 로마로 호송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더욱 어려움이 가중되는 일이 따르겠지만 이처럼 행하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94~95)

◆ 밤중소리 11-06 | VIEW : 4,246

(94) 바울과 함께 하신 하나님(사도행전 27 : 1 - 26)

(95) 바울의 위로(사도행전 27 : 27 - 44)


(94) 바울과 함께 하신 하나님

(사도행전 27 : 1 - 26)


이미 가이사에게 호소한 바울은 베스도 총독에 의해 로마로 보내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로마)로 호송할 다른 죄수들도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과 함께 일행이 되어 율리오라고 하는 아구사도대(隊)의 백부장의 인솔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백부장은 바울에게 대단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 일행은 아드라뭇데노배를 타고 가다가 무라항에서 알렉산드리배로 옮겨 탔습니다.

그 당시 항해하는 모든 선박은 군함을 제외하고는 거의 범선이었기 때문에 바람이 없었던 연고로 미항이라고 하는 항구에 겨우 도착하였는데 이곳에서 바울은 더 이상 항해하지 말고 겨울을 지낸 다음 떠날 것을 권면했지만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의견을 듣지 않고 오히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임하여 뵈닉스에서 월동하기로 하여 항해 하다가 유라굴라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 왜 배가 광풍을 만났는가?

우여곡절 끝에 배가 미항이라는 항구에 간신히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미항이란 곳은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볼 때 과동하기에 불편한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미 오랜 시일이 지나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게 되었는데 이 절기는 유대력으로 7월10일경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중해에는 9월 중순경부터 이듬해 3월 중순경에 이르기까지는 계절적인 광풍이 불어 항해하기가 매우 위험했으므로 항해하는 배들이 이 기간 동안 항해를 삼가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항해 여부에 대하여 처음부터 의견이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미항은 과동하기에 불편하니 더 항해하여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는 것으로 이 견해는 선장과 선주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주장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에 대하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고 말하면서 만류한 것입니다. 선장의 주장은 자신의 경험과 인간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요 바울의 주장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주장이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의당히 바울의 견해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의견을 더 신임했습니다. 그리하여 미항을 떠나 뵈닉스를 향해 항해한 것입니다. 사람은 옳은 견해를 따를 줄 알아야 안전한 생애를 살 수 있으며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바울이 말한 올바른 견해를 무시하고 선장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에 결국 자신뿐 아니라 그 배에 타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큰 위험을 주게 된 것입니다. 이들의 항해가 처음에는 득의하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미항을 떠나뵈 닉스로 떠나는 그들의 배는 때마침 순한 남풍이 불어오므로 이제 그들의 계획이 적중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잠24:19절에서 '너희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완악한 자들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 풍랑을 만난 배

그러나 바울의 권고를 듣지 아니하고 미항을 떠난 배는 얼마 안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불어 왔습니다. 배가 바람과 파도에 밀려 바람을 맞추어 나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풍랑으로 인하여 애쓰다가 이튿날 할 수 없이 짐을 바다에 풀어 던지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까지 내려 버리게 되었습니다. 풍랑으로 인하여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였고 계속하여 바다에 큰 풍랑이 있으매 살아날 여망이 전혀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풍랑 중에 바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풍랑으로 모든 사람의 생명이 백척간두에 서 있게 되었을 때 바울은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 곁에 서서 이르기를 '바울아 두려워 말란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요나의 경우는 요나 때문에 배에 풍랑이 일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지만 바울의 경우는 바울 때문에 죽을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담대하여 그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가장 좋은 것은 참된 위로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로에 어려움을 이길 만한 힘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에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위로를 받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바울의 위로는 온 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가닥 미지의 소망을 주게 되었습니다. 때에 맞는 말은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의 위기에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기 때문에 이 위로를 주고 또 이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 :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네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따르면 반드시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위험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95) 바울의 위로

(사도행전 27 : 27 - 44)

바울의 견해를 따르지 않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라 뵈닉스로 출발한 배는 얼마 안가 유리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바다 한 가운데서 심히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배의 짐과 배의 기구까지 바다 속에 내어 버렸지만 광풍에 밀려 미친 듯이 포류하는 배를 베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의 여망도 사라져 버리고 바울의 말을 따르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감에 젖어 허탈감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난밤에 기도하는 중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이 배에 대한 안전을 약속 받았다는 사실을 일행에게 알려주고는 그들에게 새 힘을 돋구었습니다. 어려울 때 낙심과 절망은 그 사람으로 어려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참된 위로에서 나오는 새 힘인 것입니다.


1. 계속되는 환난

가운데서 그런데 바울의 이같은 확신 있는 생명의 보장과 모든 사람의 안전을 자신 있게 말했지만 그러나 날씨는 계속 악천후였고 바다의 파도는 잠잠할 줄 몰랐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더딘 것도 아니요 또 성급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빠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약속을 주신 후에도 하나님은 얼마간 약속이 없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환난 중에 방치해 두시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끝까지 약속의 말씀을 믿고 소망 가운데 약속을 바라보는 신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사공들은 바울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아니했습니다. 바울과 함께 배에 타고 있었던 사공들은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이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는 배를 버리고 도망하는 일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뱃머리에서 닻을 내리는 척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았습니다.

거루란 구명보트로 몇 명밖에 탈 수 없기 때문에 배 안에 있는 276명의 생명이 그들의 손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생명을 위해 자신들만 구명보트를 타고 도망갈 것을 계획한 것입니다. 사람이란 언제나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사람의 진실성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삯군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님으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11-12).

(3) 이 사실을 짐작한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사공들의 행실을 만류하도록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바울의 말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백부장은 사공들이 타고 도망치려는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렸습니다. 사공들이 거루에 타기 전에 그 줄이 끊어졌기 때문에 거루는 바다 위로 빈채로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2. 바울의 위로

바울은 아직도 죽음의 위협 속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시 위로의 말을 들려주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이 배는 얼마 있지 않아 파선이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다 파도를 헤치고 육지에 헤엄쳐 가야 했기 때문에 열 나흘씩이나 굶주린 그들로서는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배 안에 있는 276명의 사람들에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위로는 때로는 하나님의 종들이 권면하는 말로 나타내실 때도 있으십니다.

위경에서 공포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바울의 위로는 그들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육신적인 힘을 얻으려면 양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 중 머리 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바울은 친히 떡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축사하고 자신이 먼저 든 다음에 그들에게 권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위로는 그 자리에서 당장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환난 중에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해 줄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함께 한 사람들의 생명을 책임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그들 중 한사람처럼 절망하며 울며 나약했었다면 그 배 안의 모든 사람의 생명은 어떻게 되었을 것입니까?


결론 : 이제 배는 점점 위경에 이르렀지만 바울의 위로와 자신 있는 믿음에 모든 사람들이 소망을 가지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배는 물결에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혹은 헤엄을 치고 혹은 널 조각이나 배에 실렸던 물건에 의지하여 육지에 상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배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한 보장은 받았지만 그 배는 파선이 되고 사람들은 바다에서 구사일생의 위기에서 살아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내시는 자리에서도 이처럼 우리의 피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모든 일에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8장(96~97)

◆ 밤중소리 11-06 | VIEW : 3,978

(96) 독사에 물린 바울의 경우(사도행전 28 : 1 - 10)

(97) 로마에 당도한 바울(사도행전 28 : 11 - 31)


(96) 독사에 물린 바울의 경우

(사도행전 28 : 1 - 10)


바울의 일행이 탔던 배는 큰 풍랑을 만나 파선이 되었으나 그 배에 타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바울의 말한 대로 모두 구원을 받아 멜리데라고 하는 섬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섬은 토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는데 비가 계속 내리고 날씨가 차매 토인들이 이들 바울 일행을 동정하여 나무를 가져다가 불을 피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섬에서 과동하고 때마침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가 있었음으로 그 배편의 도움을 받아 최종 행선지인 로마로 떠날 수가 있었습니다.


1. 바울의 위대한 승리

1절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라고 한 말은 바울의 위대한 승리를 말해 줍니다. 바울은 항해의 위험을 주장했지만 이같은 바울의 견해가 무시되어 배는 뵈닉스 항구를 향하여 떠나게 되었으며 그러나 도중에 바다 한 가운데서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을 만나 어려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풍랑 중에 공포에 떨고 있는 선원들에게 그들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장해 주신다는 말로 위로헤 주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도와 자신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한다고 하는 사실보다는 그 어려움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다는 일이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심한 병에 걸린 사람이 이제 나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스스로 절망에 빠져 버린다면 그 병에서 희생할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직 배에만 손상이 있을 뿐,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그들에게 들려주었을 때 바울의 이 말은 그들에게 놀라운 메시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배처럼 구원받을 길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놀라운 메시지인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같은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한가지는 이 배의 안전 운행입니다. 이 배의 항해는 우리가 걸어가는 우리의 생애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항해를 사람의 권면이나 생각을 따라 운행하면 우리의 생애에 류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운행해야 합니다.

(2) 다음에 배가 위험에 처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파선 직전에 있는 그 배 안에 바울이 함께 타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배 안에 있는 무리가 되지 말고 그 배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형편에 있던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3) 다음에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풍파와 노도 속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까지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독사에 물린 바울

섬의 본토인들이 불을 피워 모든 사람들을 영접했을 때 바울도 그들 가운데 끼어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 때 불 주변에서 불을 쬐고 있던 사람들이 제가끔 나뭇단을 집어서 불 속에 집어넣음으로 바울도 한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뭇단 속에서 독사 한 마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물고 도망친 것이 아니라 문 채로 손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본 토인들은 아연 실색하면서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독사는 누구나 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독사가 사람을 물때는 물리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인지, 믿지 않는 사람인지 구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물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환난이나 시련이나 질병을 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제가 어려움을 당할 때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 안 됩니다. 이 사건은 두 가지 면에서 보는 견해가 다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사람 편에서는 정죄가 따릅니다. '진실로 살인한 자로다' 이처럼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난은 인내로 그 결과가 나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독사에 물렸을 때에는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한다는 비방을 들었지만 얼마 안가 그 비방은 사라져 버리고 바울을 향하여 신이라고 지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론 : 물론 이 소문이 섬 안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이 때부터 바울은 본토민 뿐 아니라 다른 일행에게까지도 마치 하나님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이 섬에서 신분이 가장 높은 보블리오란 사람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바울이 들어가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려운 생애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위로가 따르고 형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97) 로마에 당도한 바울

(사도행전 28 : 11 - 31)

바울은 드디어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멜리데 섬에서 석달을 보낸 바울은 알렉산드리아의 배 디도스구로호를 타고 출발하여 수라구사에 삼일을 정박하다가 레기온에서 하루를 기다려 남풍을 타고 그 다음 날 보디올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그 곳 성도의 집에서 7일간을 지낸 후, 육로로 로마를 향했습니다. 바울은 비록 가이사 앞에 서야 할 한 죄수에 몸으로 로마에 도착했지만 사도로서의 바울의 활동은 이 때부터 보람 있게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1. 로마 교회 성도들의 영접으로 위로 받은 바울

로마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바울의 마음은 착잡했을 것입니다. 한편 바울은 그토록 원했던 로마에 발을 디뎠으니 감회가 무량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바울에게 큰 위로와 담대한 마음을 준 아름다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교회의 몇 성도들이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나온 일입니다. 로마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60여킬로나 되는 먼 거리인데 바울을 맞으러 마중 나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랑의 영접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 교회로 보내는 편지를 보낸지 만 3년만에 로마에 당도하게 되었는데 바울이 비록 죄수의 몸으로 오지만 복음을 위해 갇힌 몸이 되어 로마로 호성되어 오는 바울을 따듯하게 영접한 것입니다. 바울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종도 역시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을 때 위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성도들이 베푸는 위로로 담대함과 새 힘을 얻었습니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고 했습니다(살전3:7). 우리는 언제나 연약한 형제들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어주어야 하며 용기를 잃지 않도록 위로를 주어야 해야 합니다.


2. 바울의 애족심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삼일 후 로마에 있는 유대인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면담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었으며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에서 이처럼 시도한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 자기 민족을 퍽이나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고백하기를 자신에게는 동족을 위하여 큰 고민이 있다고 했습니다(롬9:1-3).

(1) 우리는 바울과 같은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죄에서 떠나 생명을 얻도록 뜨거운 사랑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애국 애족 사상입니다. 바울은 자기 민족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차라리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차라리 원하는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 동족은 고사하고 내 가족만이라도 이같은 바울의 간절한 마음을 가진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이겠습니까?

(2) 전도의 사람은 가장 애국하는 사람이요 애족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기 민족의 생명을 구원하려고 애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 동족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내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입으로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을 외치는 것보다 말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 골방에서 민족과 나라의 운명을 위해 눈물을 뿌리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이 사람들이 위대한 애국하는 사람이요 애족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3) 바울의 간절한 소원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우리지 아니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그들의 불신을 크게 책망하고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주시려는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로 알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에에게 복음을 전해도 그들이 복음을 배척할 것이라고 이미 오래전에 예언했던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하여 들려주신 말씀은 그들은 복음을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4) 완악한 자들은 귀가 둔하고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에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완악한 사람의 귀는 듣기에 둔합니다. 영적 귀가 열리지 않은 사람은 들어도 제대로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완악한 사람의 눈은 감겨져서 그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감겨진 눈은 영의 눈을 의미합니다.


결론 : 이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눈이 감겨져 있고 귀가 막혀져 있는 상태로서는 복음을 들어도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완악해진 이유는 그들의 마음에 죄가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 어린 양되신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유대인의 마음이 이처럼 완악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여 마음의 완악함을 면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