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만든 거짓된 하나님 상에 사로잡힌 신앙인보다
하나님에게 더 접근해 있다.”(폴 쉴링, ‘무신론 시대의 하나님’(현대 사상사, p16))
유대인 출신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갈파한 이 문장은
신학대 학부 시절에 읽었던 최고의 촌철살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버의 일침대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낸 거짓된 하나님 상에 사로잡힌 인간이
주이신 하나님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변질시킨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뒤 40일 동안 두문불출하자
성질 급한 이스라엘 무리들은 제사장 아론에게 모세를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론에게 이집트에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해낸 신을
만들어낼 것을 종용하고 압박하기에 이릅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아론은 대중의 물리력에 굴복해
이집트에서 갖고 나온 여인들의 금귀고리들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설상가상 아론은 여호와로 지칭된 금송아지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제사를 마치고 난 무리들은 여호와의 절일에 먹고 마시며 뛰놀았습니다.(6절)
6절을 신학적 해석 없이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대부분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된 이 사건의 정황을 볼 때
금송아지 형상 앞에 모여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행한 행위는
번제(올라)요, 화목제(제바-쉘라밈)였습니다.
송아지 형상이기는 했지만
상징은 고대 근동의 이상한 종류의 잡신(gods)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여 낸 신(god)이라는 분명한 인식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는 대노하시며
모세를 통해 두 돌판으로 금송아지 형상을 깨뜨리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기록에 의하면 그 형상의 파괴는
혹독하리만큼 무자비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너무 민감하셨던 것은 아닌가?
그러나 본문의 성서신학적인 주석을 전제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4절에 기록된 ‘송아지’로 번역된 ‘에겔’은
고대 근동에서 우회적으로 ‘애송이’라는 경멸의 의미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동시에 소는 고대의 신(神)들이 밟는 받침대로 사용됐습니다.
만들어진 금송아지는 ‘아주 하찮고 짓밟아도 되는 존재’라는
고의적 폄훼가 내포됐다는 증거입니다.
또 하나의 단어 ‘뛰놀더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차헤크’라는 동사는
고대 근동의 종교적인 제의에서
성적인 난교와 잔치를 벌일 때 사용하던 단어였습니다.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인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렇게 무너질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존재로 전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적당한 제사와 제물을 드릴 테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든 간섭하거나 끼어들지 말라고
하나님께 선전포고한 사건이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렇게 담대해졌습니까?
하나님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에게서 많이 느끼는 아픔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너무 안전한 하나님으로 남아주기를 원하는 아픔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한 복판에 들어오면 부담스러워합니다.
불편해합니다.
안전한 거리에서 나를 돌봐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손사래를 치는 명목적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비극입니다.
뉴욕 리디머교회를 이끌었던 팀 켈러의 경고가 크게 와닿는 오늘입니다.
“어떤 문화든 하나님을 몰아내다시피 하면
사람은 그 빈 자리를
섹스와 돈과 정치가 채우게 마련이다.”(팀 켈러, ‘내가 만든 신’(두란노, p169))
기막힌 통찰입니다.
한국교회가 나에게 편안한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만들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다.”
이강덕 제천세인교회 담임목사
◇충북 제천시 서부동에 위치한 세인교회는 세상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지향한다. ‘교회는 이타적일 때만 교회’라는 신념을 갖고 교회 예산 상당액을 대외 사역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