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처음으로 군산 명석교회(현 군산 사랑의교회)에 나갔을 때 누가 곁에서 신앙 지도를 해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슨 열정이었는지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수요예배, 주일저녁예배, 새벽기도회까지 다 다녔다.
하루는 새벽기도에서 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보고 싶었다. 그러나 입에서 아버지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시골에서 힘들게 농사 지어 쌀 팔아서 학비 보내주고 기숙사비 보내주시는 아버지께 미안해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안 나왔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데 아버지라는 말만큼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고 정말 예수님을 믿는 자녀라면 옆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처럼 제 입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불러보게 하옵소서.”
잠시 후 가슴이 갑자기 뜨거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입에서 “아버지, 아버지”가 나오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고등학교 2학년 말이었다. 교회 시멘트 바닥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고 또 부르며 울고 또 울었다. 동녘의 해가 뜰 때까지 아버지를 부르고 또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때가 주님 앞에 거듭난 순간인 것 같다.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는 순간 너무나 마음이 시원하고 행복했다. ‘아,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었단 말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나니 이렇게 마음이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다니. 아,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신비하고 놀랍기만 하구나.’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못 부른 것을 회개했다. 종교적 열심과 인간적 생각으로만 교회를 다녔던 것을 회개하고 진심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게 됐다. 12월 초쯤이었는데 새벽녘에 내린 된서리도 아름답게 보였다. 아직 다 베지 않은 배추가 서리를 맞아 시들어 있는데 속배추가 노랗게 보이는 것마저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스스로 자존감이 높아지고 신앙생활도 더 당당하게 할 수 있었다. 교회 다니는 애들한테 “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제 나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랑했다. 그때부터 완전히 교회에 빠지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군산제일고등학교는 교육에 열망이 높은 분이 학교를 인수해 학생들을 일류대학에 보내려고 집중하고 있었다. 고3을 앞둔 2학년 2학기 말부터는 주일이 돼도 학생들이 교회에 못 나가게 했다. 특히 기숙사에 있는 학생은 더 철저하게 감시했다. 아예 사감선생님이 기숙사 입구에서 몽둥이를 들고 지키고 서 있었다. 그래서 목사님, 장로님 자녀도 꼼짝없이 교회에 나가질 못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교회가 좋은지 미치도록 예배에 가고 싶었다. 사감선생님의 눈을 피하려고 기숙사 3층에서 1층으로 뛰어 내려 교회를 갔다. 마침 바닥에 겨울 난로를 켜려고 톱밥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는데 그 위로 뛰어내려 교회를 간 것이다. 나중에 이 사실을 들켜 사감선생님께 몽둥이로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다. 이튿날에는 교장실까지 끌려갔다.
교장선생님께서 눈을 부릅뜨고 경고했다. “소강석. 교회에 계속 나갈래, 아니면 학교를 선택할래.” “저는 평일에는 열심히 학교공부를 할 것이고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오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감선생님이 방망이로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런 싹수도 하나 없는 자식, 네가 학생이냐. 그러고도 기숙사에 있을 자격이 있어. 이 자식아, 너 당장 기숙사에서 나가.”
그때 울면서 교장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교장선생님, 공부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주일날 교회만 나가게 해 주십시오.” 끝까지 주일날 교회 예배에 가겠다고 고집하다가 결국 기숙사에서 퇴사 당했다. 기숙사에서 나와 자취를 시작하면서 학교의 제한을 덜 받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성적은 사정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금도 목회를 하면서 믿음 좋은 집안에서 자라나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압력밥솥으로 고구마를 찌듯이, 그때라도 농축된 신앙생활을 하고 속성으로 신앙적 경험을 축적한 것이 큰 축복이라 생각한다. 그때 물불 가리지 않는 열정이 오늘날 목회의 밑거름이 됐다. 교회 성도들에게 고등학생 시절 만난 주님을 간증하고 열정의 꽃씨를 뿌리다 보니 그것이 전달돼 열정의 공동체를 이뤘다.
기숙사에서 나와 신앙생활의 제한을 받지 않게 되자, 이듬해 고3 여름수련회도 갈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마침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는 영적 소명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