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어렸을 때 교회 다닌 경험이 다들 있다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1968년 여섯 살 때쯤 일이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고 교인들이 가가호호 방문하고 다니길래 붕어 잡는 행사인 줄 알고 교회에 구경 가본 적은 있다. 부흥회를 붕어 잡는 것으로 오해할 정도로 기독교적인 배경과 전혀 거리가 먼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나는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한번 집을 나서면 저녁 늦게야 돌아오곤 했다. 동전 따먹기, 땅따먹기, 구슬치기 등 지금도 그 시절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설렌다. 유달리 욕심이 많아서 기어이 남의 것을 따먹어야 직성이 풀렸다. 내 것을 잃는 날이면 해가 넘어가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하는 내겐 호랑이 같은 큰형님이 있었다. 놀다 늦게 들어가는 날이면 대나무 뿌리로 종아리가 터지도록 때리는 형님이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맞을 때 맞더라도 놀 때는 놀고 보자 하는 마음으로 형님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한참 놀다가 형님의 대나무 뿌리가 생각나서 집에 들어갈 때면 시조라도 하나 외워야 했다. 열 대 맞을 것을 다섯 대로라도 감해보고 싶어서였다.
바로 이 큰형님이 내게 대나무 뿌리를 옆에 두고 웅변을 가르쳤다. 글짓기를 시키고 옆에서 지켰으며 고전을 읽도록 강요했다. 그날 숙제는 그날 반드시 검사받아야 했다. 억지로라도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참 묘한 섭리요 선하신 준비였던 것 같다. 그때 큰형님을 통해 기초를 다지고 연마했던 문학적 소양과 스피치 실력이 지금껏 목회에 너무나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큰형님이 군에 입대했다. 형님의 입대 영장 소식이야말로 내겐 너무나 큰 복음 중의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는 나도 자유인이다. 천하가 내 세상이구나.’
형님이 군대에 가고 난 뒤 나는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가게 됐다. 형님도 없겠다, 언제든지 읍내에서 놀 수 있으니 천하가 내 세상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형님이 군에서 제대했다. 형님의 제대와 함께 나는 또 대나무 뿌리 옆에서 공부해야 했다. 덕분에 군산제일고등학교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1970년대 군산은 남원보다 훨씬 큰 항구도시였다. 남원보다 큰 시내와 생전 처음으로 보는 넓은 바다가 촌놈에게 그렇게 매력적일 수 없었다. 마침내 형님의 대나무 뿌리의 영역을 벗어났기에 신나게 놀 수 있는 3년이 또다시 보장돼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함께 잘 놀던 후배 녀석이 자꾸 내게 접근했다. “형, 교회 한번 안 나올래요? 형은 너무 남자들하고만 노는데 여학생들하고도 놀아보세요. 교회에 예쁜 여학생이 많거든요.” 그 소리를 한두 번만 한 게 아니라 계속 종용하니 이상하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군산 명석교회(현 군산 사랑의교회)에 나가게 됐다.
아닌 게 아니라 예쁜 여학생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내해 주고 옆에서 찬송가도 펴주고 성경도 찾아줬다. 그런데 그날 목사님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내용의 설교를 하셨다. 그 설교를 듣고 너무나 화가 났다.
“이런 싸가지 없는 녀석 같으니,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닌 놈이 어떻게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어. 남자가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한번 고백했으면 예수님과 같이 감옥을 가고 십자가에서 같이 죽어야지, 제 목숨 살자고 스승을 배신해. 에라이 나쁜 놈 같으니라고.”
그러면서 ‘내가 진짜 한번 예수를 믿어버려’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날이 토요일 저녁이었는데 예배를 마친 후 2부 장기자랑 순서가 있었다. 대부분 찬송가를 부르는데 나는 당시 인기 가요였던 최헌의 ‘오동잎’을 불렀다. 그것도 다리를 떨며 아주 담대하고 자신만만하게 불렀다.
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녀석, 미쳤나 봐. 교회 와서 유행가를 부르게.” 그러나 그때 담임목사님이셨던 최국조 목사님께서 이렇게 격려해 주셨다. “소군, 어쩌면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가. 앞으로 교회 나오면 찬송가도 잘하겠네.” 그때 만약 목사님이 교회에서 유행가를 불렀다고 꾸중했으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2부 순서가 끝나자 옆에서 성경과 찬송가를 찾아주던 예쁜 여학생이 성가대 연습을 같이하자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익힌 곡이 ‘죄짐 맡은 우리 구주’였다. 그 노래를 연습할 때 왜 그토록 솜사탕이 흘러내리듯 마음이 포근했는지 모른다.
기숙사에 돌아와서도 그 향기로운 멜로디가 가슴 속에서 메아리쳤다. 이튿날 주일에 성가대에 섰고 많은 교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나는 어느새 교회로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됐다. 그때부터 큰형님 대신 예수님께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내 신앙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