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겟세마네에서 생긴 일
[1]지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골고다 언덕 위에 서있는 외로운 십자가의 영상이 깊게 새겨져 있다.
그것은 땅이 흔들리고 태양도 빛을 잃었던 인류 최대의 사건이었고
수많은 사람들과 민족들의 운명을 뒤집어 놓은 역사의 전환점이었으며
또한 그것은 인류기억 속에 우뚝 솟아 있는 최고의 명화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6∼39).
4천년에 걸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완성되어 가는 긴장된 순간,
지금도 짐작할 수 있는 그 숨막히는 분위기가
우리를 떨리게 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팽팽한 긴장 속에서 드려지는 예수의 간절한 기도는
누가복음이 더욱 그 분위기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2∼44).
이 긴박감 넘치는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 속에
나는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는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왜 예수께서는 다른 위인들이나 영웅들처럼
의연하게 죽음의 잔을 받지 않으시고,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 사건이 갑자기 닥쳐온 것도 아니고
예수께서는 평소부터 이일을 예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순종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계셨기 때문에,
몇번 씩이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셨던 것이다.......
[2]포도나무와 무화과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하시기 전의 행적을 살펴보려면
우선 베다니 사람인 나사로와
갈릴리 출신이였던 열 두명의 제자 사이에 있었던 불화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열 두 제자들이 나사로의 집으로 가기 싫어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유월절 만찬장소로 마가의 집 다락방을 고르셨다.
마가는 아직 어려서
제자들에게 정치적 경쟁자가 될 수 없었고,
그 어머니 역시 과부였으므로
시기심 많은 제자들이
안심하고 따라올 수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 사이에서
장소에 대한 시비가 있을까하여
미리 베드로와 요한에게 장소를 답사하여
그 집에 정치적 경쟁자가 없음을 확인하도록 하신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예수께서는 만찬 자리에 앉으셨고,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주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비장한 작별의 만찬이 끝난후,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다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감동적인 본을 보이시며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부탁하신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말씀이 시작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로 시작되는 이 감동적인 설교에서
당신과 제자들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신 다음,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 16:2)하는 말씀으로서
제자들도 당신과 똑같이 수난 당할 것을 예고하셨던 것이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을 때
나는 우선 예수의 기도 속에서
그분의 고민 중 하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흔히 세상의 위인들은 이런 경우
스스로 영웅적인 죽음을 택함으로써
후세에 훌륭한 이름을 남기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예수,
그분은 달랐다.
그는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면서
자기를 따르는 '모든 무리'들과 함께
수난 당하고
그들과 함께 천국을 건설하기로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를 따르는 모든 무리들을
수난의 길로 이끌어야 하는 예수의 아픔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로 생명의 길이며 승리의 길이며 영광의 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분은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일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막 14:33,34).
마가복음은 마가가 베드로의 구술을 따라서 기록한 것이니
뒤에 남아있던 마태의 기억보다는
기도하실 자리 근처까지 따라갔던 베드로의 기억이 더 정확했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의 기억에 따라
예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고 구술한 것이다.
왜 갑자기 예수께서는 놀라시며 슬퍼하셨던 것일까?
나는 당시의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생각하셨던 것이다!)
제자들 때문에
예수께서는 마지막 만찬을 나사로와 함께 하지 못하셨다.
그는 마지막 밤에
갑자기 그가 '사랑하시던' 나사로(요 11:5)를 생각하신 것이었다.
갑자기 나사로를 생각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다시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나사로는 유대인이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그와 같은 피를 흘리면 영광스런 수난의 길을 걸을 것이나,
바로 예수의 동포들인 유대인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도 예수께서는 저 미가의 예언을 생각해냈을지도 모른다.
미가서의 4장은 마지막 날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미 4:4)
포도나무 아래 앉은 사람들이
예수의 길을 따르는 영광스러운 수난의 길을 감당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무화과 아래에 앉은 사람들은
장자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예수를 죽임으로써,
세상 끝날까지 징계의 수난을 겪어야 했던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 중의 극히 일부는
세상 끝날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을 것이나
예수께서는 이미 그 무화과 나무아래 앉을 사람의 수가
너무나 적은데 대하여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셨던'것이다.
이 무서운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아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로 호소한 것이었다.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호소하신 이 겟세마네의 간절한 기도야말로
하나님과 사람을 함께 울려준 구언사의 처절한 클라이맥스였던 것이다.
<자료출처 : 김성일님의 '성경과의 만남'(신앙계)>
http://blog.daum.net/matsy/6654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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