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성전이 무너질 때
[1] 이 성전을 헐라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로부터 제출된 네가지의 교리적인 테스트
즉 권세, 납세, 부활, 계명에 관한 질문에 답변하신 후
갑자기 성전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예고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 24:1,2).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 사람들이 생명처럼 여기고 있는 거룩한 장소였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 가운데 살아있는 최고의 영웅 다윗이 계획하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한 신앙의 구심점이었고
계속되는 외세의 통치 아래서도
오직 하나 남아 있는 민족적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도 절기때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었다.
그는 이미 열두살 때에
성전에 가서 랍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곳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표현하였고(눅 2:49)
나중에 다시 장성하여 예루살렘에 올라 갔을 때에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며
'내 아버지의 집' 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격분한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요 2:13∼17).
그런 예수께서 그 소중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바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하신 말씀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이것이 나중에 그가 체포되신 후
'성전모독죄'로 고발되는 것이다(마 26:61).
어째서 예수께서는 그분 자신까지도
그토록 소중히 여기셨던 성전이 무너지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
예수께서는 그 거룩한 성전 안에서 무슨 징조를 보셨던 것일까?
나는 다시 그 마태복음 25장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자들이 성전 건물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왔다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무엇을 '가리켜 보이려고'했을 까…?)
나는 다시 마가복음의 같은 부분을 찾아보았다.
"예수께서 성전에 나가실 때에 제자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1,2).
아마도 갈릴리의 촌뜨기들이었던 제자들은
거대한 성전의 건물들을 가리키며
그 굉장한 규모에 감탄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이왕 시작한 김에 다시 누가복음도 찾아보았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美石)과 헌물(獻物)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눅 21:5∼6).
여기까지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 '가리켜 보이려고'했던 것은
성전건물들의 웅장함과 그 호화스러운 장식에 관한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성전 건물의 호화스러움에 대하여 걱정하셨던 것일까?
물론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성전의 장식들이 너무 호화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호화롭다는 것 하나만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집들 무너뜨리셨던 것일까?
나는 다시 마가복음을 찾아보았다.
거기엔 바리새인에게 대한 경고가 있을 자리에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는 과부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2] 두 렙돈의 비밀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은 것을 보실새…"(막 12:14).
예수께서는 분명히 의도적으로 연보 궤 앞에 앉아서
사람들이 거기에 돈 넣는 것을 관찰하신 것이었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 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에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리라"(막 12:41∼44).
나는 우선 이 과부가 연보 궤에 넣었던 두 렙돈이라는 돈이
얼마나 되는 금액인가를 알아보았다.
성경 77페이지의 난외 주에는
렙돈 : 헬라 동전의 명칭, 고드란트 : 로마 동전의 명칭이라고 나와있다.
이렙돈과 고드란트라는 동전은 동전의 최소단위로서
빵 한 개도 사먹을 없는 오늘날의 1원짜리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이를 그의 모든 소유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 과부는 빵 한 개도 사먹을 수 없는 그 동전을
차라리 성전의 연보궤에다 넣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그 대목을 들여다보다가 문뜩 한 곳에서 눈을 멈추었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나는 무심히 그 대목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과부'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러 부자'와 '한 가난한 과부',
이것은 곧 재물의 분배가 공정하지 못한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중산층은 많을 수 있을지 모르나
부자가 많은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여러 부자'와 '한 가난한 과부'가 있었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성전에 들어온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온 백성들 가운데는
많은 부자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빵 한 개도 살 수 없는 한 과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에 보면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는
제사장의 일을 맡은 레위지파를 먹여살리는 외에
또 한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신 26:12).
그런데도 성전의 연보궤에 돈을 많이 넣는 부자는 많은데
한 과부는 여전히 가난한 상태로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히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그 과부에게 십일조를 분배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이 장면 바로 앞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를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막 12:38∼40).
과연 우리의 시대에서는 십일조의 분배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대형 교회들이 호화로운 장식과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고 있을 때에
고아의 울음소리와 과부의 한숨소리가
우리에게 불길한 소리로 들려오고 있지는 않은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긴 옷을 입고 말씀을 가르치며
시장에서 문안 받고 잔치의 상석에 앉아 있을 때에
성전이 무너지고 있는 소리가 들여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우리는 지금 안전한 자리에 있는가?
우리가 지금 말세에 재물을 쌓고(약 5:3) 있는 것은 아닌가?
<자료출처 : 김성일님의 '성경과의 만남'(신앙계)-
http://blog.daum.net/matsy/6654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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