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역경의 열매] 김형석 새천년 지구촌빈곤퇴치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그레이스교회 목사<1>-<16·끝>

영국신사77 2019. 10. 31. 14:55

[역경의 열매] 김형석 <1> 가족 3대가 겪은 전쟁 공포… “북한 선교로 전쟁 막자” 다짐

군의관 아들 복무 중 준전시상황 ‘충격’… “이 땅에 전쟁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

입력 : 2017-01-15 21:07

[역경의 열매] 김형석 <1> 가족 3대가 겪은 전쟁 공포… “북한 선교로 전쟁 막자” 다짐 기사의 사진
학군사관후보생(ROTC) 집체훈련을 받던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강원도 원주 36사단 교육장에서 동료 후보생들과 함께 한 필자(왼쪽).

2015년 8월 20일 오후 부산역에서 서울행 고속철도(KTX)를 기다리던 나는 가족 카톡방에 올라온 글을 읽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지금 전쟁 나는가 봐요. 인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요.” 며느리가 쓴 메시지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깜짝 놀라 TV 앞으로 가니 서부전선에 있는 우리 군부대가 북한군 진지를 향해서 30여발의 포탄을 발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연은 이랬다. 2주 전 경기도 파주의 비무장지대(DMZ)에 매설된 지뢰가 폭발하면서 부사관 2명이 각각 다리와 발목이 절단되는 중상을 입은 사고가 발생하였고, 우리 군은 대북 확성기방송으로 대응했다. 이에 북한군이 확성기를 향해 포격을 가해오자 우리 군이 다시 포격으로 맞서면서 준전시상태에 돌입했다. 

그런데 대응포격을 한 부대가 바로 작은 아들이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부대였다. 우리 군이 포격을 실시한 후 북한군이 원점타격으로 도발할 것을 우려한 부대에서는 가족들의 대피를 당부했고, 이에 따라 피난민 1호가 우리 집에서 발생한 것이다.

많은 국민들은 확전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밤잠을 설쳤지만, 우리 가정만큼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한 일간신문이 주관하는 ‘통일과나눔펀드’ 운영위원장으로 일하던 나는 다음 날 한강포럼의 조찬모임에 참석해 70, 80대 회원들이 마련한 성금을 전달 받고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어제 밤에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불행히도 저는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제 작은 아들이 어제 북한에 포격을 가하고 비상사태에 들어간 부대에 근무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대학 3학년 때 6·25가 일어나서 학업을 중단하고 참전했습니다. 전쟁 중에 입은 내상으로 국군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기에 내가 태어났습니다. 내가 대학 4학년으로 학군후보생(ROTC) 후보생 집체훈련을 받던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태가 확전될 경우에 현지 임관으로 참전한다는 통보를 받고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나는 이것으로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이 된 아들이 전시상황에 대처하느라 잠도 못자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힙니다. 이 비극이 3대로 그쳐야 할까요? 아니면 4대까지 가야하나요?”

인사말을 하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내 얘기를 듣던 어르신들 중에도 눈시울을 붉히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다행스럽게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이 열렸고 남북은 ‘무박4일’간의 마라톤협상 끝에 극적인 합의를 통해 평화롭게 해결되었다. 이 닷새 동안 나는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게 해주십시오. 평화통일을 주십시오.”

대를 이어 계속되는 우리 집안의 수난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사람들은 나를 ‘통일 전문가’라고 부른다. 북한을 100여 차례 다녀 온 목사인데다가, 대북지원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 사무총장과 한민족복지재단 회장을 지내고, 여러 신문사가 설립한 통일단체의 운영위원장을 역임했으니 당연한 말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경력만 보고 선입견을 가진 사람은 나의 설교나 강연을 듣고 보수적인 안보관에 놀랐다고 얘기한다. 어찌 보면 이율배반적인 것 같기도 한 나의 삶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북한선교 사역자로서 나의 길은 운명일까. 사명일까.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약력=△건국대 사학과 △경희대 대학원(역사학 박사) △전 총신대 교수 
△우리민족서로돕기 사무총장 △한민족복지재단 회장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새천년 지구촌빈곤퇴치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그레이스교회 목사

[역경의 열매] 김형석 <2> 탈북 여학생 “南서 보낸 약품으로 콜레라 치료”

“수액주사 13개 맞고 기적적 회복” 생생한 간증에 통일 사역 사명 굳혀

입력 : 2017-01-16 21:12/수정 : 2017-01-17 17:46

[역경의 열매] 김형석 <2> 탈북 여학생 “南서 보낸 약품으로 콜레라 치료” 기사의 사진
지난해 9월 부친 묘소를 국립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고 
자녀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필자(가운데).

1995년 8월 4일, 나는 그 날의 일을 잊지 못한다. 
대학교수의 길을 가던 나를 사역 현장으로 부르신 날이기 때문이다. 
총신대 연구실로 미국의 박세록 장로에게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김 교수님, 유엔 북한대표부 한시해 대사가 전화했는데 
 북한에 홍수로 수백만명 이재민이 발생했답니다.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창궐하는데 속수무책입니다. 
 방치하면 수백만명이 죽을지도 모르니 약을 속히 구해달라는 요청입니다. 
 미국에선 약을 구할 수가 없어 네덜란드 제약회사에 10만 명분을 주문했는데 
 약값 8만달러를 월요일까지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날이 금요일이니 사흘 동안에 8만달러를 보내달라는 요청이다. 
지금 생각하면 두 번밖에 만난 적이 없는 박세록 장로가 
내게 부탁한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내가 알겠노라 약속한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성령의 이끌림이었다. 
내게 수백만명의 생명이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운데 홍정길(남서울교회) 목사가 생각났고, 
옥한흠(사랑의교회) 하용조(온누리교회) 목사님께도 도움을 요청했다. 
월요일이 되자 남서울교회와 사랑의교회, 온누리교회에서 2만달러씩 보내오고, 
부족한 2만달러는 이랜드 박성수 회장이 보탰다. 
이렇게 의약품이 마련돼 북한으로 보내졌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08년 10월 19일 ‘평화한국’이 주최한 청년아카데미가 
사랑의교회 반석채플에서 열렸다. 내가 특강을 마칠 무렵에 
북한선교를 언급하면서 그때 얘기를 꺼내자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한 여학생이 안절부절못하며 갑자기 손을 들고 
“목사님, 저요”하고 소리쳤다.
 “무슨 일인데”하고 물으니,
 “그때 제가 살아났잖아요”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1997년에 탈북해 연세대 법대 4학년에 재학 중인 허태경이라고 했다.

“1995년 여름 콜레라가 창궐해 평양에도 환자가 넘쳐났습니다. 
김책종합대학 학생이던 나도 열병으로 중구역 병원으로 업혀갔는데 
병실은 물론 복도에도 환자들이 가득 누워 있었습니다. 
고열로 죽어가던 나는 외국에서 보내온 수액주사를 
13개나 맞고 기적적으로 살았습니다.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나게 됐는지 알았으니 
남은 인생은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살아 있는 간증이었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통일 후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탈북자를 통해서 간증을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라는 말처럼, 
 북한이 아무리 강력하게 통제하며 숨기려 해도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다. 
 생각해보면 1995년의 ‘큰물 피해’는 
 수많은 북한주민의 생명을 앗아간 엄청난 재앙이지만, 
 그렇게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과연 한국교회에 문을 열었겠는가 하는 점에서 
 ‘고난은 구원의 통로’라는 말씀이 마음에 다가왔다.

아무튼 그 사건 이후 하나님은 나를 사역의 현장으로 부르셨다. 
결국 나는 100여 차례 북한을 출입하는 가운데 
남모를 시련과 은혜를 반복하면서 많은 부침을 겪었다. 

2009년 사역을 다 내려놓고 개척교회 목사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J일보와 C일보라는 세상 매체를 통해 
북한을 돕는 사역 현장으로 다시 부르셨다. 
그곳에서 4년 동안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한 후에 
드디어 지난해 말부터 한국통일선교연합을 섬기며 
국민일보와 함께 복음통일을 준비하는 마지막 사명의 길로 인도하셨다. 
강원도 양양 남대천을 떠난 연어가 다시 회귀하는 것처럼…. 

정리=윤중식 기자


[역경의 열매] 김형석 <3> 5만원 마중물로 시작된 밀가루 300t 기적

서경석 목사와 손잡고 北 돕기 모금… 밀가루 1만5000포 적십자사 기탁

입력 : 2017-01-17 20:44/수정 : 2017-01-17 21:41

[역경의 열매] 김형석 <3> 5만원 마중물로 시작된 밀가루 300t 기적 기사의 사진
1990.10월10일 남강 이승훈 선생의 제주도 유배소 보존식 장면. 
왼쪽부터 고 한경직 목사, 정영택 제주성암교회 목사, 필자. 
한 목사는 필자가 북한 사역자로 일하도록 
안수해주신 첫 번째 안수자였다.

1995년 10월 25일 남서울교회에서는 
사단법인 한민족통일준비모임 창립총회가 열렸다. 
나는 박세록 장로의 지인들로 구성된 이 단체의 사무총장을 맡아 
통일부에 사단법인 설립을 신청했다. 
그러나 세 차례나 인가가 반려되는 바람에 출범도 못한 채 식물법인이 돼버렸다.

총신대를 퇴직한 나는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월요일 저녁마다 신반포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게 전부였다. 
1996년 1월 15일 기도회에 중국선교사인 오상희 목사와 함께 
수도침례신학교를 다니는 청년이 참석했다. 
아무 말 없이 돌아간 그 신학생이 
4주 후에 다시 참석해 5만원이 든 봉투를 내놓았다. 
서울 방배동에 있는 동명교회 전도사라고 소개하며 사연을 전했다.

주일학교 설교 시간에 
“북한에 있는 너희들 또래 친구들은 추운 날씨에 먹지도 못하고 있으니 도와야 한다”
고 말했더니, 아이들이 겨울성경학교 기간동안 금식하며 모은 헌금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 눈물이 나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 일은 참석자들에게 큰 감동이 됐다. 
그날부터 우리는 5만원을 마중물로 생각하며 
모일 때마다 책상에 헌금 봉투를 올려놓고는 
“예수님, 우리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며칠 후 아주대병원 이일영 교수 가족모임에 초대를 받았는데, 
그곳에서 경실련을 그만두고 정계 진출을 준비하던 서경석 목사를 만났다. 
그런데 4월 11일 치러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시 양천구에서 출마한 서 목사는 예상과 달리 낙선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를 다시 찾아가 통일운동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시발점이다. 
서 목사 주변에는 경실련에서 일하던 유능한 일꾼이 많아 이들로 조직을 결성하고 
내가 사무총장, 서 목사가 집행위원장을 맡아 드림팀을 꾸렸다.

서 목사는 조직의 귀재답게 6대 종단과 시민단체의 연합 구도에, 
다수의 원로가 공동대표를 맡는 방안을 제시했다. 
여기에 내가 공동대표를 33명으로 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 아이디어는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송월주 승려를 고문으로, 
서영훈 선생을 상임대표로 추대한 후 공동대표는 보수·진보 진영에서 절반씩 위촉했다. 
기독교 대표로는 김준곤 박상증 목사가 참여했고, 
6대 종단 대표자 외에 오자복(전 국방부 장관), 박재창(평남 지사), 강문규(YMCA 총무), 이윤구(월드비전 회장), 백낙환(인제대 총장), 손봉호 교수, 이세중 변호사 등 33인으로 구성됐다.

6월 21일 출범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1차 목표는 
추석을 맞아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필용 장로의 소개로 1991년에 한기총과 공동으로 ‘사랑의 쌀 보내기’를 추진한 적이 있는 H일보와 손잡고 모금에 들어가자 각계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동명교회 어린이들의 금식헌금 5만원이 첫 번째 성금으로 기탁됐다. 
추석을 닷새 앞둔 9월 17일에 성금 1억6500만원으로 
20㎏짜리 밀가루 1만 5000포를 마련해 대한적십자사에 기탁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건 분명 오병이어의 기적이었다. 
5만원을 놓고 기도했는데 6개월 만에 300톤의 밀가루를 보낼 수 있게 되니, 
수학적으로 계산해도 3300배의 놀라운 축복이었다. 
기쁨과 감격에 겨워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4> 北 잠수함 발견되자 사무실에 돌 날아와

‘사랑의 쌀 보내기’ 성공 감격도 잠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떠나게 돼

입력 : 2017-01-18 20:26

[역경의 열매] 김형석  <4>  北 잠수함 발견되자 사무실에 돌 날아와 기사의 사진
유엔경제사회이사회(ECOSOC)가 2007년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주최한 제1회 국제혁신박람회에서 반기문 당시 유엔사무총장(왼쪽 세 번째)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필자(왼쪽 두 번째).

‘사랑의 쌀 보내기’ 기쁨도 잠시뿐 다음 날 강릉 앞바다에 
무장공비를 태운 잠수함이 발견됐다. 
우리민족서로돕기 사무실은 밖에서 돌이 날아올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그 와중에 박세록 장로로부터 기존의 한민족통일준비모임을 재건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당초 내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사무총장을 맡았을 때 
박 장로와 서경석 목사의 면담을 주선해 
한민족통일준비모임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틀 안에서 운영하기로 하고, 
박 장로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미주 총재로 위촉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박 장로가 돌연 사임을 통보하며 
내게 한민족통일준비모임에만 전념해줄 것을 부탁했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6대 종단이 참여했기에 
선교 비전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4개월 만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나온 뒤로 정말 힘들었다. 
홍문수 목사의 배려로 신반포교회 교육관에 딸린 작은 공간에 
책상 두 개를 놓고 업무를 재개했으나 사무실을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수시로 기도원에 들어가 울부짖던 중 박은조 목사를 만났다.

1996년 11월 20일 오전 10시 연동교회에서 한민족복지재단 창립예배를 드렸다. 
한국교회의 전통인 장·감(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정신에 따라서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를 법인이사장, 중앙교회 정영관 목사를 운영이사장으로 추대하고 
박 목사가 상임이사를, 나는 사무총장을 맡았다. 
새로운 단체가 순조롭게 발전하려면 하루속히 법인 인가를 받아야만 했다. 
그렇지만 통일부는 법인 설립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통일부 대신 
외무부(현 외교부)에 등록하는 것이었다.

이 목사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법인등록 서류를 접수한 지 불과 3일 후인 1997년 2월 3일 재단법인 설립인가를 받았다. 당시는 몰랐지만 한민족복지재단이 후일 15개국에 지부를 설치하고 
경제사회이사회에 특별협의지위를 얻게 되자 
‘외무부 등록 법인’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알게 됐다.

때로 하나님은 더 좋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의 걸음을 막으신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목사와 박 목사, 그리고 여성복회사 제림(JR)의 박초영 권사와 
주영백화점 강영일 회장이 많은 금액의 선교헌금을 보내왔다.

한민족복지재단의 첫 프로젝트는 탈북자 정착을 돕는 자립형 농장(고향마을)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나는 두 명의 직원과 함께 이스라엘을 방문해 디아스포라들이 키부츠에 정착하는 과정을 살핀 후에 전북 장수군 장계면에 33만578㎡(10만평)의 부지를 구입했다. 

이곳에 주택을 짓고 양계장과 양돈장을 만들며 사과나무를 심어 탈북자들의 정착을 도울 계획이었다. 재단 행정실장으로 일하던 하성민 목사는 가족을 데리고 탈북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신앙생활을 지도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같은 내용이 보도되자 주민들의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어쩔 수없이 부지를 장애인 자활농장인 벧엘농장에 넘기고, 강원도 홍천에서 농지를 임대해 옥수수 농사를 짓는 것으로 변경했다. 하 목사와 탈북자 4명이 함께 생활하면서 자활의 꿈을 다지는 가운데, 영화교회(손훈 목사)를 중심으로 한 후원회가 조직됐다. 그러나 ‘고향마을 꿈’은 실패하고 말았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5> “북한 사람들 주세요” 장갑 30켤레 건넨 노점 할머니

라진선봉특구에 제약공장 세우러 방북… 서울서 50㎞ 거리를 27시간 걸려 도착

입력 : 2017-01-19 20:18/수정 : 2017-01-20 00:52
[역경의 열매] 김형석  <5> “북한 사람들 주세요” 장갑 30켤레 건넨 노점 할머니 기사의 사진
1998년 1월 유라시아 철도의 출발점인 라진역에서 털모자를 
쓴 일행들. 왼쪽부터 필자, 안승도 집사, 박은조 목사, 
심성우 최동규 집사.

재단이 설립되고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했지만 고향마을이 좌초되자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박세록 장로가 북한 라진선봉경제무역지대에 제약공장을 세우자는 제안을 했다. 문제는 미국 단체의 지부로 이름을 사용하고, 초청장 발급 대가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청자는 반드시 한민족복지재단으로 표기하고, 초청장 발급비용은 지불할 수 없지만 대신 방북 시에 식량과 의약품을 전달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처음에는 북한이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우리 요구대로 초청장이 도착했다.

통일부에서는 한국단체 명의로 초청장이 온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첫 방북단은 나와 이성희(연동교회) 최홍준(호산나교회) 목사, 박종철 한국의료선교협회 회장, 강영일 주영백화점 회장 등 6명으로 구성됐다. 

1997년 11월 4일 김포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중국 다롄을 경유해 옌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1박 한 후에 육로로 이동했다. 두만강 다리를 건너 비포장도로를 3시간 정도 달리니 라진항이 나타났다. 서울에서 50㎞도 되지 않는 북한 땅을 밟는데 중국을 돌아오느라 27시간이나 걸렸다.

출입국사무소에서 검사를 하는데, X레이 검색대조차 없어서 세관원이 손으로 가방을 뒤적이다가 성경을 발견하고는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성경책인데 여행 중에 읽으려고 가져왔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세관 검사서에 성경책이라고 기록하고 “나갈 때 꼭 가져가십시오”라고 당부했다.

두 번째 방북은 1998년 1월 20일 이뤄졌다. 그런데 그 전날이 대한(大寒)이어서 기온이 영하 15도나 되는 강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저녁예배를 마치고 장갑을 사러갔더니 백화점과 시장은 모두 폐점한 뒤였다. 하는 수 없이 이태원의 야시장을 찾았는데 한 할머니가 손수레에 장갑을 싣고 장사하고 있었다. 날씨가 워낙 추운 탓에 거리에 손님이라고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처음에는 내 것만 살 생각이었는데 할머니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라진에서 만날 사람들의 떠는 모습이 떠올라 20켤레를 달라고 했다. 내 말에 할머니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장갑을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사요?” 
“내일 북한 가는데 선물하려고 그럽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큰 비닐봉지에 장갑을 주섬주섬 담기 시작했다. 
“이것 그 불쌍한 사람들 전해줘요. 돈은 안 받을게.” 
“아니, 할머니! 이렇게나 많이…” 

집으로 돌아와 풀어보니 내가 산 것은 20켤레인데 
할머니가 준 것은 30켤레나 돼 코끝이 찡했다.

다음 날 옌지공항에 내리니 쌓인 눈이 족히 30㎝는 돼보였다. 라진 바람은 정말로 ‘골이 빠개질 정도’였다. 할머니가 거저 준 장갑이 그들에게 안성맞춤의 선물이 됐다.

한국에서 온 다른 팀들도 만났다. 
라진과학기술대학을 설립하기 위한 김진경 총장 일행과 
두레농장을 만들기 위해서 온 김진홍 목사 일행이었다. 
한국교회를 대표한 옌볜과기대(교육) 두레마을(영농) 한민족복지재단(보건의료)의 삼각편대가 각기 은사대로 사명을 띠고 찾아온 것이다. 
나는 대북선교 사역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경이로운 섭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먹이고(영농), 병 고치고(보건의료), 가르치는(교육) 것은 
예수님이 사용하시던 절묘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6> 제약공장 착공 감사예배서 북측 인사들 “아멘”

생명나무 뜻하는 ‘로뎀나무’로 명명… 나진·선봉지구 첫 남측 투자 성사돼

입력 : 2017-01-22 20:55
[역경의 열매] 김형석  <6>  제약공장 착공 감사예배서 북측 인사들 “아멘” 기사의 사진
1998년 12월 나진 외국인진료소 근무를 지망한 의료봉사단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오은성 치과의사, 박상은 내과의사, 박세록 산부인과 의사, 필자, 김경국 외과의사.

1998년 5월 15일은 제약공장(로뎀나무) 건립을 위해 
최종 합의서를 작성하고자 방북키로 한 날이었다.

호텔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 후 회담장에 들어서니 
평양에서 온 무역성 간부와 나진·선봉행정경제위원회 주요 간부들이 앉아 있는데, 
숫자로는 1대 8이었다. 

한 간부가 물었다. 

“로뎀이 도대체 어느 나라 말입니까.” 

나는 즉시 해설을 했다. 

“서양 사람들은 기독교 문화에서 자라기 때문에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로뎀나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나무는 사막 가운데 자생하는 콩과 관목으로 그 잎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기근이 들면 열매와 뿌리를 먹기 때문에 그야말로 생명나무라고 하지요.”

여기까지 이야기한 후 반응을 살피니 흥미를 느끼는지 나를 주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설립하려는 제약공장이 지금은 작지만, 
 앞으로 발전해서 세계로 수출하려면 
 이름부터 외국인들이 잘 알고 인정하는 것이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누구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착공일은 7월 30일로 결정됐고, 
거기에 덧붙여 선봉군인민병원 현대화사업을 위해 
외국인 진료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고 
그곳에 근무할 의료진으로 장기 6명, 단기 6명 
모두 12명의 상주를 허가한다는 내용의 최종 합의서까지 서명했다.

내용을 접한 통일부에서는 사회문화분야 남북협력사업 제1호로 승인했다. 
그로부터 2개월이 흐른 7월 29일 서울에서 제약공장 착공식에 참석할 대표단이 도착하자, 다음날 있을 착공식 일정을 의논했다. 
상대는 평양에서 착공식 책임자로 내려온 장영호(가명) 무역성 국장이었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나는 한민족복지재단은 기독교단체이고 남측 대표도 모두 크리스천이니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자, 
그도 우리 입장을 잘 이해한다며 내 제안에 순순히 응했다.

그날 저녁 장 국장이 일행을 환영하는 만찬을 주최했는데, 
이성희 목사의 식사기도가 끝나자 장 국장이 “에이멘”하고 화답을 했다. 
신기한 듯이 쳐다보자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81년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김성락 목사에게
 식사기도를 부탁하신 후 ‘아멘’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수령님께서 하신 그대로 나도 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명쾌한 설명이었다. 
드디어 7월 30일 청계동 제약공장 부지에서 9시30분부터 감사예배를 드렸다. 
나진·선봉 경제자유무역지대가 선포된 후 
처음 남측의 투자가 성사된 것이라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였다. 
만찬도 마찬가지였다. 장기천 감독이 축도를 마치자, 
장 국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에이멘”하고 선창했고, 
남과 북의 참석자 50명이 일제히 “아멘”하고 화답했다.

관심은 재단 홍보대사인 탤런트 정영숙 권사에게 집중됐다. 
누군가 “거,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는데 남측 여성도 참 예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껏 웃으며 이렇게 대꾸해줬다.

 “아니, 저 여성은 선천 출신입니다.”
 “아, 평안북도 선천이구만요.” 

분단 이후 남한의 연예인이 민간 차원에서 방북한 최초의 사례였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7> 北, ‘착공예배’ 문책으로 초청명단서 나를 제외

입력 : 2017-05-29 18:30:01

2006년 4월 9일 평양의 칠골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뒤 북한교회 지도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형오 장로(전 국회의장), 황민우(칠골교회) 장승복(봉수교회) 목사, 필자, 정영숙 권사(방송인), 송효순(조선그리스도교연맹) 목사.


9월 22일부터 선봉군인민병원 현대화사업을 본격 추진하기 위해 의료진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북한이 보내온 초청장에는 내 이름이 빠져있었다. 로뎀제약 건축 착공예배에 대한 일종의 문책성 경고였다.

북한의 대외정책에는 이른바 ‘모기장론’이 있다. 교류가 많아질수록 ‘좋은 문물’(달러)도 들어오지만 ‘해충’(기독교 등 반사회주의 사상)도 묻어오므로 모기장을 쳐서 걸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라진·선봉경제무역지대는 북한의 딜레마가 담긴 실험장이다. 북한은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노동당이 공인한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를 제외한 전국 어디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다만 나진·선봉에는 투자유치를 위해 외국인들에게 예배를 허용하는 특별법이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착공예배를 요구했고, 북한 당국도 처음으로 허용하였는데 하필 장소가 청계중학교 바로 앞이어서 현장을 목격한 학생들로 인해 파장이 컸던 모양이다. 갑작스런 돌발 사태로 9명중 방북 경험자라고는 칠순의 장기천(동대문교회) 감독 밖에 없었다.

나는 두만강까지 동행하며 주의사항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그런 후에 일행이 두만강 다리를 건너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백두산으로 향했다. 선원학교 교사로 와있던 이덕자 선생이 동행했다. 

누적된 피로와 상한 마음으로 심신이 지쳐 있던 나는 장백폭포 아래 서자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털썩 주저앉아 기도를 시작하자 눈물이 쏟아졌다. 왜, 이 힘든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 선생이 곁에서 시편 103편 1∼5절을 낭송해줬다. 나흘을 지내고나니 일행이 라진 방문을 마치던 날 영육이 회복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다.

무사히 방북을 마친 일행은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고 평가했고, 특히 영락교회 후원으로 치과 설비를 설치하고 북한 환자에게 진료까지 한 박태용 원장은 그때를 회상하며 감격스러워했다. 서울로 돌아온 박 원장은 북한에서 처음 진료한 남한 의사로 미국 CNN 방송과 인터뷰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런데 감격도 잠깐이고 이내 시련이 찾아왔다. 
이 방문단을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국적자의 라진·선봉경제무역지대 출입이 전면 금지됐기 때문이다. 제약공장을 건립하기 위해 외상으로 건축자재를 보낸 재단 입장에서는 눈앞이 아득했다. IMF 외환위기가 1년째 지속되면서 선교비도 줄어 부족한 운영비는 물론 
제약공장 건축 부채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방북이 재개돼야 약정된 헌금이 들어올 텐데, 당시로서는 남북관계가 풀릴 전망도 없었고, 기도 외에는 다른 해결 방법을 찾을 수도 없었다. 

연말이 다가오자 더 이상 버틸 여력도 없었다. 일주일을 기도원에 다녀온 후 절박한 심정으로 조선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북경대표부를 찾았는데 뜻밖의 제안이 나왔다. 한민족복지재단 초청사업을 추진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초청장에 관한 얘기는 비밀로 한다는 조건이었다.

며칠 후 정말 초청장이 도착했다. 재단 관계자는 물론이고 통일부 관계자도 놀랐다. 남한 사람에게 유일하게 열려 있던 라진·선봉경제무역지대의 문이 닫힌 지 1년 만에 다시 열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8> 방북 사실 기사화에 北 펄쩍… “당장 돌아가라”

모든 것 포기하고 라진서 철수 결정… 떠나기 전 北 운전사 “다시 오시라”

입력 : 2017-01-24 21:05
[역경의 열매] 김형석 <8> 방북 사실 기사화에 北 펄쩍… “당장 돌아가라” 기사의 사진
1999년 라진·선봉에서 영적 전쟁을 치른 후 북한 관리들의 환송을 받으며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송홍섭 염광교회 장로, 엄흥남 라선경제협조회사 사장. 박종철 서교동교회 장로, 맹철호 무역성 과장, 필자.

방북 이틀 전 연합뉴스 기자가 찾아와서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딱한 사정을 얘기하고 제발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사화하지 말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10월 30일. 서울을 출발한 우리 일행은 선양(심양)과 옌지(연길)를 경유해 라진으로 들어갔다. 숙소인 비파초대소에 짐을 풀자 곧바로 면담하자는 연락이 왔다. 급히 면담장소로 들어가니 분위기가 삼엄했다. 그들 앞에는 ‘문제의 기사’가 펼쳐져 있었다. 제목이 ‘북한, 라진선봉 1년 만에 다시 개방’이었다. 당시 라진은 개발 책임자이던 조선대외경제위원회 김정우 위원장이 총살을 당할 만큼 긴장된 분위기였다. 그날 조선중앙방송에서는 “남조선의 어느 누구도 라진선봉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제약공장이고 병원이고 다 필요 없으니 당장 싸들고 돌아가시오.” 

계속 윽박지르는 그들에게 마음을 가다듬고 제안했다. 

“아무리 그래도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게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시간을 좀 줘야 판단할 것 아닙니까.” 

30분 후에 회의를 속개하기로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세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각자 방에 들어가서 기도를 시작했다. 자칫하면 저들에게 억류당할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1년 전 미국 LA에서 온 이광덕 목사도 이곳에서 간첩혐의로 체포돼 103일 동안이나 억류됐다가 풀려난 적이 있지 않은가.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간절하게 기도한 후에 다시 모인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물었다. “그냥 주고 가자”고 의견이 일치했다. 이왕 되돌릴 수 없다면 담대하게 포기하는 것이 후일을 위해서도 낫겠다는 공통된 판단이었다. 

재개된 면담에서 재단 입장을 전했다. 

“우리가 여기 온 것은 북녘 동포를 도우러 온 것입니다. 
 지원물자를 보낸 순간부터 라진 주민에게 기증한 것인데, 
 가져가고 말고 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더러 오늘 가라고 하면 돌아갈 것이고, 
 예정대로 업무를 보고 가라고 하면 일을 보겠습니다.”

우리의 답변에 도리어 그들이 당황했다. 상부와 상의해서 알려주겠다고 말했지만 나흘 일정을 모두 소화할 때까지도 아무런 통보가 없었다. 그 사이 박종철 장로는 선봉군인민병원을 찾아 우리가 보낸 의료기들을 확인했고, 송홍섭 장로는 제약공장 건축 상황을 세밀하게 확인하는 모습으로 북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나흘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 아침 나는 무역성 맹철호 과장, 라선경제협조회사 엄흥남 사장과 함께 양도확인서에 서명했다.

“그렇게 힘들게 들어와 다 주고 가다니….”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이 허전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이 충만했다. 두만강에 도착하자 출국수속을 돕기 위해 안내원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운전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생님. 꼭 다시 들어오십시오. 그래야 우리도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 내 마음에 희망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헤어질 때 맹 과장이 웃음 띤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조심해서 가시고, 중국에 가면 꼭 북경대표부에 전화하십시오.” 

1997년 11월 4일 첫발을 디딘 지 2년 만인 99년 11월 3일이었다. 
그후 다시는 라진에 가지 못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9> “평양서 일할 생각 없습네까?” 북측 깜짝 제안

강덕순 아태평화위원회 실장 만나… 이화여대·농협 등 北 성금 잇따라

입력 : 2017-01-25 21:19

[역경의 열매] 김형석 <9> “평양서 일할 생각 없습네까?” 북측 깜짝 제안 기사의 사진
1995년 4월 남과 북, 해외에서 특별한 삶을 산 세 사람의 실향민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박세록 장로, 납북된 지 43년 만에 돌아온 국군포로 조창호 소위, 필자, 평남 정주 출신 예비역 장성 전제현 장로.

이대로 서울에 돌아가면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막상 옌지에 돌아오니 눈앞이 막막했다. 일단 맹철호 과장의 말대로 베이징 조선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대표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김종운 대표는 그냥 서울로 가지 말고 시간이 있으면 베이징에 한번 들렀다 가라고 했다. 

북경에서 만난 김 대표는 신문 한 부를 들고 왔다. 우리 일행의 라진 방문 사실을 부인한 조선중앙방송 보도 기사였다.

남북 간에 보도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모든 것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별인사를 했다. 그때 김 대표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런데 혹시 평양 가서 일해 보실 생각은 없습네까?”

그날 오후 김 대표 소개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강덕순 실장을 만났다. 

“내가 라진에 감찰 갔다가 한민족복지재단이 통 크게 일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라진보다는 평양에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내가 제안했던 것이지요.” 

그는 남북관계를 주무르던 실세로 
현대의 금강산 사업을 비롯해 국내 대기업들을 담당하던 사람이었다.

라진은 평양으로 진출하는 징검다리였다. 막혀 있던 북한의 문이 열리자 재단에도 기적이 나타났다. 11월 17일 오후 이성희 목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김 박사. 내가 오늘 이대 채플 갔는데 설교가 3분 일찍 끝나서 재단 얘기를 했더니, 
 장상 총장이 김 박사를 소개해달라고 하더군.”

다음 날 만난 장 총장은 

“얼마 전 KBS TV가 북한 의료실상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는데, 
 평양산원에 근무하는 이화 출신 의사가 출연한 것을 보고 
 동문들이 도울 방법을 찾고 있다. 송년모임에서 5000만원을 모금할 테니, 
 평양산원에 필요한 의료기구를 사서 전해줄 수 있느냐”

고 물었다. 
바로 2주 전에 ‘아태’ 관계자와 만나 평양에서 의료사업을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왔는데, 
너무 기가 막히는 제안이었다. 한번 일어난 기적은 연이어 일어났다.

24일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베이징으로 출장 갈 서류를 준비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운영이사회 부이사장인 정정애 권사였다. 

밤늦은 시간이지만 너무 중요한 일이어서 전화했다면서, 오늘 오전 10시에 주택은행을 찾아가자고 했다. 전날 재경 광주일고 총동창회 송년모임에 김정태 주택은행장이 참석하자 온통 축하 인사가 그에게 집중됐다. 창사 이래 최대인 480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는 보도 때문이다. 

그때 총동창회장으로 회의를 주재하던 정 권사 남편 이영일 회장이
 “그렇게 큰 돈을 벌었으면 좋은 일도 좀 해야지”라고 조언했더니, 
김 행장이 즉석에서 실직가정 자녀들을 위해 1억원, 
북한 어린이를 위해 1억원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12월 초에는 장 총장으로부터 다시금 연락이 왔다. 총학생회가 쌀을 모은 후 운동장에서 가래떡을 뽑아서 북한 어린이들에게도 보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떡국 떡이 무려 20t이었다. 이날 행사를 후원한 농협에서 연말 이웃돕기 행사로 전 직원이 2000원씩 각출해서 마련한 절반을 보내왔는데 그 돈이 5400만원이었다. 

떡은 평양시내 소학교에 전달됐다. 
계속해서 여러 교회와 학교, 기업으로부터 성금이 답지했다.

정리=윤중식 기자


[역경의 열매] 김형석 <10> “구충제 250만정 안되면 사업 관둬라” 北 고자세

입력 : 2017-05-29 18:30:01

52년 만에 평양을 방문한 실향민 전제현 박종철 장로, 송희준 이화여대 교수(왼쪽 두 번째부터)와 필자(맨왼쪽)가 2000년 3월 30일 모란봉 을밀대에서 추억을 떠올리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17년 전 1월 12일 북한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가 초청장을 보내왔다. 2개월 뒤 3월 13일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런데 조선영사관에서는 평양에서 아직 비자가 나오지 않았으니 다음 기회에 들어가라고 했다. 유감 표명이나 사과도 없이 그 한마디의 통보뿐이었다.

이렇게 한 차례 진통을 겪은 후 서울로 되돌아온 일행은 28일에야 방북할 수 있었다. 김명철 참사는 나에게 공무석(Business Class)을 타라고 권했다. 그런데 내 자리인 1A석에 가니 웬 뚱뚱한 북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조심스런 어투로 “제 자리인데요”라고 말하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옆자리에 앉으라는 눈짓만 했다. 하는 수 없이 1B석에 앉았다. 뒷자리인 2A석에는 우근민 제주 지사가 탑승했다. 우 지사는 제주감귤보내기운동 고문이라는 직함으로 방북했다.

다음 날 개선문 옆에 위치한 평양시 제1인민병원을 방문했다. 북한측 상대는 소아과 의사인 조선의학협회 장도경 치료예방부장과 평양시 제1인민병원 자순녀 소아과장이었다.
 1병원 건물 한 동을 비워 현대식으로 개조한 후 소아과 병동으로 꾸리기로 합의했다. 
그런 후 구충제 5만정 지원을 제안했다. 

그때 장 부장이 “5만정 가지고 무슨 구충사업을 합니까. 도와주려면 250만정을 도와주고 그렇지 못할 바에는 그만둡시다”라고 했다. 도와주겠다는데 고마운 줄은 모르고 고자세라니. 금세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때 자순녀 과장이 나섰다. “내 말 좀 들어보십시오. 내 나이가 68세인데, 수령님 은덕으로 40년을 소아과의사로 있으면서 아이들에게 제대로 해준 것이 없어 마음이 아픕니다. 요즘은 은퇴하기 전에 한 가지라도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바라는 간곡한 소원을 가지고 꿈속에서도 그렇게 되기를 빌었습니다. 병원시설을 고쳐주는 것만으로 너무 감사하니 구충제는 형편대로 도와주십시오.”

그 얘기가 내게는 특별하게 들렸다. 68세라면…(어쩌면 그녀가 크리스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잠자리에 누웠는데 자 과장의 말이 자꾸 생각났다. 어디선가 음성이 들리는듯했다. “너는 어째서 구충제 도와달라는데 대답하지 않았느냐?” 순간 머릿속이 멍했다.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북측의 구충제 250만정 지원 요청을 수락했다.

일행이 투숙한 곳은 고려호텔이었다. 1985년 8월 개관한 호텔로서 45층짜리 쌍둥이건물 2개 동이 공중통로를 통해 연결돼 있어 웅장하면서도 멋진 외관을 자랑했다. 그러나 500여 개의 객실은 거의 비어 있었고 실내는 항상 어두침침한 것이 겉과 속이 많이 달랐다.

룸메이트는 전제현 장로였다. 나에게 부모 같은 전 장로는 평양에서의 마지막 날 가슴에 담아둔 얘기를 꺼냈다. 

“김 박사, 내가 55년 전에 저기 보이는 평양역 시계탑 밑에서 동생과 헤어졌네. 아버지가 ‘장손인 너는 서울 가서 공부하라’고 해서 역으로 왔는데, 동생이 형과 헤어진다고 자꾸만 우는 통에 들킬까봐 동생에게 울지 말라고 구박한 것이 마지막이네.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 평양에 있는지 어디 있는지… 도무지 잠이 오지를 않네.” 

나는 느낄 수 없는 이산가족의 비애를 들으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11> 美 WOI 회장, 5분 면담 후 “할렐루야”… 지원 약속

北 어린이용 이유식·항생제 등 보내와 250만명분 구충제도 마련해 평양으로

입력 : 2017-02-01 00:07/수정 : 2017-02-01 10:40
[역경의 열매] 김형석 <11> 美 WOI 회장, 5분 면담 후 “할렐루야”… 지원 약속 기사의 사진
김형석 한국통일선교연합 사무총장이 2004년 로이 매큔 WOI 회장과 면담을 마친 뒤 관계자들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 사무총장, 매큔 회장, 임승표 장로.

첫 번째 평양 방문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다음 날인 4월 5일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평양 방문 2주 전에 로스앤젤레스(LA) 동양선교교회 주선으로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어린이 단체인 WOI(World Opportunity International)로부터 의약품을 지원받게 됐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사연은 이랬다. 동양선교교회 집사 한 분이 세탁소를 하는데, 노신사가 “너무 친절하게 해줘 고맙다”며 명함을 건넸다. WOI 회장 로이 매큔 목사였다. 그는 한민족복지재단 얘기를 듣고 지원을 약속했다. WOI가 보내온 리스트에는 항생제 영양제 탈지면 거즈 등 컨테이너 4개 분량이나 됐다.

출장의 임무는 WOI로부터 지속적인 지원과 함께 캐나다 바이타프로(Vita-Pro)사로부터 600만 달러어치 영유아용 이유식을 기증받는 것이었다. LA공항에 도착하자 마중나온 임승표 장로는 교회 게스트하우스에 짐만 내려놓고 곧장 WOI 사무실로 가자고 했다. 

매큔 회장은 내게 왜 북한 어린이를 도우며,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설명해달라고 했다. 서울을 출발할 때부터 간절히 기도해왔던 터라 담대한 마음으로 5분쯤 설명하자, 갑자기 “할렐루야”라고 말하더니 나를 껴안아주었다.

나는 후일 바이타프로의 탁월한 효과에 대해 자순녀 과장에게 들었다. 바이타프로는 콩이 주성분인 이유식으로 10일간 어린이들에게 먹였더니 몸무게가 180g 늘었다고 했다.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0개에 유통기한도 충분히 남아 있어 영양이 부족한 북한 어린이들에겐 안성맞춤이었다. 이후에도 WOI는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미국 출장을 마치자 구충제를 해결해야 했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세미나에서 만난 보건복지부 오대규 건강증진국장에게 자문을 구하니, 대뜸 한국건강관리협회 임한종 회장을 소개했다. 그는 경동교회 장로였다.

임 회장은 필생의 소원이 북한 어린이에게 구충사업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물론 러시아 중국을 통해 여러번 접촉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는 내 얘기를 듣고는 신풍제약 장용택 회장과 통화했다. 한국건강관리협회가 원료비를 부담하면, 신풍제약에서 구충제를 무상으로 제조해주기로 합의했다. 250만명분의 구충제가 한 번에 해결된 것이었다.

임 회장은 가슴에 맺힌 얘기를 꺼냈다. 

“서울대 의대 은사였던 라순영 박사가 6·25전쟁 때 납북된 후에도 북한에서 활동하며 기생충에 관한 논문을 국제저널에 계속 발표하는 것을 알고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생사여부라도 한번 알아봐주면 좋겠습니다.” 

9월 19일부터 임 회장과 평양을 방문했다. 한국건강관리협회와 대표단조선의학협회가 5년간 집단구충사업을 공동 진행하는 합의서를 체결했다. 기생충 없는 한반도를 만들려는 필생의 꿈이 이뤄졌다.

방북의 하이라이트는 임 회장이 스승 라순영 박사를 만나는 것이었다. 21일 밤 고려호텔에서 조선기생충학회장인 라 박사를 만나 감격의 포옹을 했다. 라 박사는 찬송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작곡한 고 라운영 선생의 친형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은 기적을 선물하신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12> 영락교회 北 위한 기도, 신의주 소아병원 현대화로 응답

한경직 목사 기려 6차례 개보수 지원, 2년 후 용천역 폭발사고 때 빛 발해

입력 : 2017-02-02 00:05
[역경의 열매] 김형석 <12> 영락교회 北 위한 기도, 신의주 소아병원 현대화로 응답 기사의 사진
2002년 2월 평양의 한 탁아소에서 굶주린 아이들이 빵 한 조각으로 요기하고 있다.

영락교회 의료봉사단 단장인 박태용 원장은 신의주에서 한경직 목사 기념사업으로 어린이병원 사역을 펼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수차례 북한 보건성에 신의주 소아병원 현대화를 요구했고, 2000년 11월 10일 신의주를 방문했다. 단둥에서 ‘조선’ 통행증을 붙인 지프가 철교를 건너는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신의주 보린원을 세워 어린이를 돌보던 한경직 목사의 뜻을 기리려는 영락교회의 50년 기도가 응답되는 시간이었다. 우리 일행은 평양에서 온 안내원 도움으로 압록강여관에 짐을 풀었다. 보건성 간부들도 내려왔다. 

그런데 병원을 본 순간 열악한 시설에 경악했다. 어떻게 도와주길 원하는지 묻자, 건축자재를 지원해주면 모래와 자갈은 자체 조달해 개보수 공사를 하겠다며 의료장비 교체도 요청했다.

이후 영락교회는 6차례 개보수 공사를 마치고 의료설비도 현대식 장비로 교체했다. 한번은 평양에서 만난 보건성 장도경 부장이 “총장 선생, 얼마 전에 전국 소아과의사 대회가 있었는데 평안북도 소아병원 시설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됐습니다”라고 했다. 한편 영락교회 성도를 대표해 최창근·이창로 원로장로의 방북이 추진됐다. 신의주를 떠나온 지 50년만의 귀향이었다.

이후 영락교회는 신의주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2002년 5월 6번째 방북 후 출입이 중단됐다. 신의주특구 개발 계획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04년 4월 22일 신의주에서 불과 8㎞ 떨어진 용천역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다음 날 나는 오전 10시에 재단을 대표해 ‘제8회 정일형·이태영 자유민주상’을 수상하러 서울 중구청 강당으로 갔다. 수상 소감을 말하면서 “어제 평북 용천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수많은 어린이가 희생당했습니다. 상금 전액은 용천 어린이를 돕는데 사용할 겁니다”라고 밝혔다. 

수상식을 마치자 이부영 열린우리당 당의장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말씀이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당에 긴급 간부회의를 지시해놓았으니 정부 차원에서도 도울 방법을 찾겠습니다.”

이 소식이 낮 12시 KBS 라디오뉴스에 보도되자 한나라당 사무총장 김형오 의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한나라당도 오후부터 당장 천막당사에서 모금을 시작할 것입니다. 성금은 한민족복지재단에 전달하겠습니다. 

피해도 컸지만 국민들의 호응도 뜨거웠다. 그런 가운데 불행 중 다행이라고 가슴 뿌듯한 소식이 들려왔다. 26일 SBS 저녁 8시뉴스는 “신의주의 한 병원은 용천 참사현장에서 후송된 부상자들로 넘쳐납니다. 한 남자 어린이는 이마부터 입까지 화상을 입은 채 간호사 품에 안겨 있습니다. 한 구호단체 요원은 폭발에 따른 충격으로 유리조각이 얼굴 살갗 깊숙이 파고들어 아이들이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습니다. 후송된 부상자는 모두 370여명, 하지만 열악한 현지사정 때문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라고 보도했다.

사고 현장에서 기차로 2개 역 떨어진 곳에 소아병원이 있었다. 2년 전에 그 정도라도 시설을 고쳐놓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생전에 신의주 어린이들을 사랑한 한경직 목사와 그 뜻을 기린 영락교회의 봉사가 용천폭발사고 현장에서 수많은 생명을 구한 것이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13> 북, 평양 남북연합예배 당일 대뜸 취소 통보

2002년 297명 민간차원 첫 직항기 방북, 전화로 “예배 대신 묘향산 관광 가시오”

입력 : 2017-02-03 00:04

[역경의 열매] 김형석 <13> 북, 평양 남북연합예배 당일 대뜸 취소 통보 기사의 사진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이던 2007년 직항기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방북단과 함께 기념 촬영했다.

남들은 상상도 못하는 직항기 방북을 나는 두 번씩이나 경험했다. 나는 왜 북한을 다녔는가. 북한에서 무슨 일을 했는가. 이제부터 그 물음에 답하려고 한다. 

2002년 6월 14일 남북연합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방북단 297명이 인천공항에 집결했다. 대한항공 전세기가 이륙한 지 10분도 안 됐다. 

“우리 비행기는 백령도 해상을 통과해 북한 영공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기내 방송에 일행은 일제히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는데 금방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서해직항로 531㎞를 정확히 65분 만에 비행했다. 순수 민간차원에서 직항기를 이용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방북이었다. 나의 33번째 방북은 이렇게 시작됐다. 방북단은 버스 10대에 탑승하여 고려호텔로 직행했다. 순조롭게 풀려가는 상황을 보며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불과 보름 전인 5월 30일 베이징에서 범태평양조선민족경제개발촉진협회(범태) 이도경 회장을 만나 “북한선교단을 조직해 직항기로 평양을 방문해주세요”라는 제안을 받고 남북연합예배를 준비한 지 1주일 만에 합의서와 비행허가서, 신변보장 각서 등 방북신청 서류를 전달받아 통일부에 제출했다. 그리고 다시 1주일 만에 300명의 방북단을 모집하고 전세기를 계약하고 방북 승인을 받았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지금 와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5박 6일 일정에 전세기를 이용해 평양에서 연합예배를 드린 후 백두산을 다녀오는데 회비가 150만원이었다. 긴박하게 진행된 15일 동안의 일정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고려호텔에 도착하자 아리랑축전영접위원회 관계자 4명이 찾아와 아리랑 공연부터 보러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합의서 대로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범태와 체결한 합의서에는 “아리랑공연은 남북연합예배를 드린 후 희망자에 한해 관람한다”고 돼 있었다. 

통일부의 방북허가서에도 “아리랑공연을 관람하지 말 것. 부득이 한 경우 방북 목적을 달성한 후에 일부 인원만 관람할 것”을 허가조건으로 제시했고, 나는 통일부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리랑 공연 관람을 놓고 북한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위)와 범태, 방북단 사이에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이 일로 방북단은 호텔 출입이 통제된 채 감금상태에 놓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남사업 주도권을 두고 공조직인 ‘아태위’와 김정남이 관련된 비선라인 ‘범태’가 극도로 대립하며 갈등을 빚던 때였다.

당초 남북연합예배가 예정된 16일 밤 12시43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리랑축전영접위원회 상무위원 김인철 참사였다. 그는 대뜸 “오늘 연합예배는 없습니다. 묘향산에 관광 가십시오.” 거세게 항의해도 소용이 없었다. 

착잡하기가 그지없었다. 53명의 목사를 포함한 297명의 방북단이 주일예배 대신 묘향산관광을 가야한다니 기가 막혔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은 어떤 박해를 당해도 반드시 주일성수를 해야 한다는 쪽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죽으면 죽으리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새벽녘에 최홍준 이사장을 깨워 상황을 알렸다. 최 목사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김 박사, 우리가 죽는 한이 있어도 주일성수는 꼭해야 한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14> 호텔서 6시간 예배… 북, 그제야 “교회 안내하겠다”

남북연합예배 취소에 자체 예배 강행… 북한 요원 200여명 예배 과정 지켜봐

입력 2017-02-06 00:02
[역경의 열매] 김형석 <14> 호텔서 6시간 예배… 북, 그제야 “교회 안내하겠다” 기사의 사진
2002년 6월 평양 고려호텔에서 예배를 마치고 방문한 봉수교회 앞. 왼쪽부터 엄대웅 목사와 김형석 사무총장 부부, 방송인 문회원 장로.
2002년 6월 16일 오전 7시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회와 예배를 갖기로 했다. 
최홍준 목사가 그 내용을 회원들에게 설명하자 한마음으로 동참했다. 
기도회는 자원하는 목사가 차례로 나와 
5분 정도 찬송 말씀 기도를 인도하는 형태로 진행했다. 

특별순서로 주선애 교수가 학창시절 평양교회를 회상하고, 
이만열 교수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특강했다. 
김양재(큐티선교회) 대표의 QT 특강도 곁들였다. 
이 기도회를 통해 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성도들은 회개와 결단의 눈물을 흘렸다. 
북한에서는 당이 정해준 장소 외에는 예배를 금지하고 있어서 
어쩌면 이 자리가 순교의 제단이 될지도 모를 일인데도 모두가 담대했다.

오전 11시가 되자 이정익(신촌성결교회) 목사의 인도로 예배가 시작됐다. 
모테트합창단이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을 찬양하자 
마음에 불안감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성령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피아노는 상한 심령을 보듬는 천상의 선율이었고, 
모테트의 찬양은 잠든 평양을 깨우는 힘찬 진군가였다. 
이어서 최홍준 목사가 ‘남북화해는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설교 중에
 “나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 평양에서 순교한 신앙의 선배들처럼 
 주일성수를 위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선포하는 모습은 
마치 평양대부흥운동을 이끈 길선주 목사처럼 위엄과 능력이 가득 찬 얼굴이었다.

누군가 다가와서 성찬식을 갖자고 제안했다. 
토스트 한조각과 대형 글라스에 담긴 포도주로 성찬에 참여하는 모습이 
CTS TV 화면에 담겼다. 찬송 기도 설교 성찬식 등 순서마다 은혜가 넘쳤다. 
계속되는 기도회와 예배에 북측은 200여 명의 요원을 배치하고 
찬송이 밖에서 들리지 못하도록 음악을 크게 틀었지만 예배는 일절 방해하지 않았다. 
식당 종업원과 안내원들은 예배가 신기한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배가 끝날 무렵 북측은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로 안내할테니 
호텔에서의 예배는 중단해달라고 제안했다. 
이때가 오후 1시 7분으로 오전 7시부터 시작된 예배가 6시간을 넘긴 상황이었다. 
광고시간에 이 소식을 전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영적 전쟁에서 거둔 승리의 개가였다.

이날 예배는 월드컵 열기에 묻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교회사는 물론 남북관계사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아무리 당시를 회상해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어떻게 평양 한복판에서 그런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최홍준 목사에게 전화로 그때의 소감을 물었다. 
첫 마디가 “김 박사, 그건 우리가 한 게 아니고 성령이 하신 일이야”하고 고백했다. 
이어 2006년 광주순복음교회에서 열린 통곡기도회에 강사로 갔다가 만난 탈북자가 
그 현장을 아는 보위부 요원이었다는 사실도 증언했다. 
최 목사는 북한에 가서도 “목사는 모가지(목)를 내놓고 사는 사람”이라면서 
보위부 요원에게 4영리를 꺼내놓고 전도했다. 
기도회를 첫 번째로 인도한 유관지 목사는 극동방송에서 근무하며 
북한선교에 헌신한 분으로 그날도 필자와 생사를 함께 하겠다는 유서를 남겼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역자의 눈물과 순교자의 피로 확장되는 것이다. 
지난 일을 회상하니 평양에 억류되어 있는 동갑내기 친구 임현수 목사의 얼굴이 떠오른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15> ‘호텔 예배’ 뒤 3년 6개월 동안 北에 못 들어가

입력 : 2017-05-29 18:30:01

2005년 9월 한민족복지재단 몽골 지부장이던 최순기 선교사(왼쪽)가 울란바토르 새생명교회 설립 10주년 예배에 강사로 참석한 김형석 사무총장 부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방북단이 평양을 떠나던 날 아리랑축전영접위원회는 평가회를 제의했다. 
이 자리에서 김인철 상무위원이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앞으로 한민족복지재단 김형석 사무총장은 
절대 공화국을 출입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이후 나는 방북을 금지 당했고 그들은 나를 ‘공화국 창건 이후 최대의 반동’이라고 비난했다. 모든 선교지가 그렇지만 그중에도 북한은 특별한 위험지역이다. 라진·선봉에서 활동하던 이광덕 목사, 김재열 목사, 케네스 배(한국명 배준호) 선교사는 체포돼 심한 구타와 함께 옥고를 치르고 추방당했다.

방북 일정 도중에 사망한 경우도 있다. 1990년 9월에는 나성영락교회 김계용 목사가, 
2006년 3월에는 몽골선교사 최순기 목사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지금도 북한에는 임현수 목사 외에 대한민국 국적의 김정욱 김국기 최춘길 목사가 억류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역자들은 계속해 북한을 드나든다. 왜 이렇게 위험한 곳인 줄 알면서도 찾아가는 것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성령의 이끌림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유럽 선교를 시작한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런 점에서 이들의 행적이 바로 사도행전 29장인 ‘북한행전’이다.

2001년 7월 한민족복지재단과 북한어린이돕기 캠페인을 추진하던 국민일보에는 ‘남한 의사 북한서 첫 암수술’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사연은 이랬다. 국제로타리클럽 후원으로 평양의대병원에 임시 수술장을 차렸다. 그래서 3640지구 총재인 김진복 박사가 모니터링 하러 가는 기회에 수술을 집도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이후 평양의대병원에서는 6차례에 걸쳐 남북한 의료진의 합동수술이 진행됐다. 주로 심장병 수술이었는데 기독의사들은 수술 전에 기도로 시작했다.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은 도울 자를 보내셨다. 그중에서도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한인교회 북한선교위원장 조명호 집사는 내가 방북을 금지당한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한·미·일 3개국에서 첨단 정보통신(IT)기업을 운영하며 북한 고위층과 교제를 나누던 그는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북한을 왕래하며 고려호텔 예배의 진상을 소명하기 위해 자원해 수고를 감당했다.

나는 2005년 12월 8일 민족화해추진협의회(민화협) 초청으로 개성을 방문했다. 3년 6개월만의 방북이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한국농업대학 박광호 교수가 개발한 복토직파농법을 실험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북측에서는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김인철 참사가 대표로 나왔다. 아리랑축전영접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주일예배 불허를 통보하고 나를 방북금지 시킨 장본인이었다. 그가 멋쩍은 듯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복지재단 회장이 되셨더군요. 지난 일은 잊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2006년 2월 11일 평양을 방문했다. 그 다음날 찾아간 곳은 평남 숙천군 약전리협동농장이다. 농업성 김명철 정책국장과 박명순 관리위원장을 비롯한 농장원들이 참석했다. 박광호 교수가 복토직파농사에 대해 설명하자, 박 위원장이 말했다. 

“농법은 좋은 것 같은데 그래도 농사는 일기가 좌우하지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일기는 내가 책임질 테니 농사만 잘 지으세요.”

나의 방북 재개를 위해 그토록 애썼던 조명호 집사는 이듬 해 하나님 곁으로 부름을 받았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16·끝> 한민족복지재단 퇴진 후 개척교회로

북 협동농장 사업 ‘추적60분’ 방영… KBS 게시판에 고발 댓글로 곤욕

입력 : 2017-02-08 00:00

[역경의 열매] 김형석  <16·끝> 한민족복지재단 퇴진 후 개척교회로 기사의 사진
2009년 4월 그레이스교회 설립 감사예배를 마치고 은준관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필자, 고 김창인 충현교회 원로목사, 유관지 목사(앞줄 왼쪽부터) 등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광호 교수는 복토직파농사를 성공하기 위해 20여 차례의 방북 일정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고, 북측에서는 정무원(총리실) 중점사업으로 지정했다. 

나는 그해에만 23차례 방북했다. 그간의 방북금지를 보상이라도 하듯 하나님은 북한문을 활짝 열어주신 것이다. 나는 매번 박 교수와 농학자, 농민, 후원자로 구성된 방북단을 안내했다. 

한번은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목사가 동행했는데 여행하는 내내 빨리 목사 안수 받을 것을 권면했다. 결국 1년 뒤 평양에서 받은 소명대로 안수를 받았다.

농사의 성패는 결국 하늘에 달려있었다. 복토직파농사는 좋은 결실이 예상됐지만, 추수를 앞두고 서리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 파종이 늦어져 조생종 볍씨를 심은 것이 문제였다. 평양은 ‘구구절 축제’로 들떠 있는데 홀로 평양에 남았다. 내 마음은 답답했다. 

‘오늘 밤 서리가 내리면 어쩌지….’ 호텔방에서 밤새워 기도했다. 열왕기상 18장을 묵상하는데 엘리야의 마음이 다가왔다. ‘주여, 저들이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깨닫게 하소서.’ 북한을 지배하는 악한 영의 세력과 싸움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날 밤 서리는 내리지 않았고 작황은 대풍년이었다. 북한 전역에 있는 협동농장을 대상으로 평가한 경진대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우승기를 받고, 모든 농장원에게 상금이 주어졌다. 약전리협동농장에서의 일은 권혁만 PD의 현장취재를 통해서 KBS ‘추적 60분’에 방영되었다. 

북한에서는 감사의 뜻으로 복토직파로 농사한 쌀 5t을 보내왔고, 이 쌀로 전북 지부는 북한 쌀과 남한 야채를 어우른 비빔밥을 만들어 잔치했다. 그뿐 아니라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2007년에는 고려항공을 이용한 두 번째 직항기 방북이 성사됐다. 새벽마다 ‘부흥’ 팀의 인도로 기도회를 열고, 낮에는 칠골교회에서 기념예배를 드렸다. 그때 고형원 선교사는 복음송 ‘동방의 예루살렘’을 작곡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

면류관에는 고난이 따라오는 게 성경의 이치이듯 혹독한 시련이 찾아왔다. 추적 60분의 게시판에는 나를 고발하는 댓글이 올라왔고, 인터넷에서는 정체를 모르는 단체로부터 고발이 이어지면서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됐다. 

대선정국과 맞물려 1년 넘게 계속된 조사를 마치던 날 “돈 문제는 깨끗하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검사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나는 한민족복지재단을 퇴진하고 개척교회 목회자로서 삶을 시작했다. 험난한 길이었지만 한순간도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의 말씀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7년이 지난 후 하나님은 20년 전처럼 이성희 목사와 함께 통일선교 사명을 감당하도록 나를 다시금 부르셨다. 통일 독일의 초대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는 “준비되지 않은 통일은 재앙이지만, 준비된 통일은 축복”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기에 한국통일선교연합이 나에게 부여하신 마지막 사명임을 인식하고 복음통일의 꿈을 이루는 그날까지 달려갈 것이다. 소중한 지면을 열어주신 국민일보와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678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