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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택 목사 크리스천의 생존. 6-10] <6> 중보기도의 위력, <10> 유황 쓰나미 재앙

영국신사77 2019. 8. 18. 11:04

[김서택 목사 크리스천의 생존] 결국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실패했나

<6> 중보기도의 위력

입력 : 2019-06-14 00:06
대구동부교회 청년들이 2015년 경북 김천 경북청소년수련원에서 개최된 여름수련회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 대구동부교회 제공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주위 여러 성의 운명을 두고 하나님과 협상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정치인이거나 학자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살려달라고 담대하게 중보기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 남을 위해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의 조건은 딱 한 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라서 사는 것이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않아도 그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해주신다.

하나님은 말씀을 들은 종들을 그분의 친구로 여겨주신다. 그리고 친구 모르게 어떤 일을 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알려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때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지 않고 격렬하게 반발한다. 절대 안 된다고 반발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 크게 오해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공연히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그때까지 그 도시의 멸망을 막고 계셨다. 하나님은 망하게 하시는 쪽보다 망하지 않도록 끝까지 지켜주시는 분이다. 그러나 더 이상 심판을 막을 수 없게 됐다. 왜냐하면 소돔과 고모라에 죄가 그야말로 꽉 찼기 때문이다. 정화조에 오물이 가득 차면 비우지 않을 수 없듯 말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협상을 시도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50명이 있을지라도 이 성들을 멸망시키겠느냐고 여쭤봤다. 아마도 거기에 의인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그토록 타락했는지 잘 몰랐다.

아브라함은 수만명의 목숨과 의인 50명의 목숨을 걸고 거래를 시도한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말하는 의인은 어떤 사람일까. 아브라함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믿지는 않지만, 동성애를 반대하고 도덕적으로 살려고 하는 덜 타락한 사람들일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당시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오직 아브라함만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소돔에도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아브라함의 협상에 응하신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50명만 있으면 멸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신다. 그럼 그 성들은 다시 소생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아브라함이 불안해한다. 천사가 의인의 수를 헤아리다가 혹시 한두 명 빼놓을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다시 협상한다.

아브라함은 왜 그런지 몰라도 의인의 숫자를 자꾸 줄여나간다.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줄이는 데 성공한다. 그는 왜 의인의 수를 줄였을까. 어떻게 해서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소돔과 고모라에 죄가 아무리 커도 의인의 숫자가 그들을 살린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약속을 받는 것이 소돔과 고모라가 사는 길이라는 것이다. 즉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은 그 순간 아브라함의 기도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왜 의인의 숫자를 10명에서 더 내리지 않았을까. 하나님께 기왕 매달리는 김에 5명, 아니 2명까지 내려도 되지 않았을까. 적어도 의인 10명은 있다고 믿었을까. 아니면 하나님과 협상하는 데 지쳐버렸을까. 만일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 숫자를 2명까지 낮췄다면 멸망하지 않았을까.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10명이 당시 한 가구의 구성원 숫자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마지막으로 제시한 숫자는 딱 한 가구를 나타내는 숫자였다. 그가 하나님과 마지막으로 협상했던 데드라인은 믿음이 바로 서 있는 딱 한 가구였다. 하나님은 한 가구만 믿음이 바로 서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면 소돔에 살았던 롯은 의인이었을까.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벧후 2:7)에는 의로운 자라고 나오지만, 그는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세상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 같기도 했다. 그의 딸들과 부인은 신앙이 없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셨다. 멸망을 막지 못했으니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실패한 것인가. 아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은 그 사람들의 실패일 뿐, 아브라함의 실패는 아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아주 중요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썩었더라도 자기 신앙만 분명하고 자기 가정의 신앙만 제대로 지켜도 세상을 얼마든지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중보기도는 위력이 있다. 우리가 아무리 썩은 세상에 살더라도 자신의 믿음과 자녀들의 신앙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멸망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김서택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83409

김서택 목사 크리스천의 생존] 달아나려다 결국 순종한 요나처럼… 말씀 붙들어야 위기 극복

<7> 같은 배를 탄 사람들

대구동부교회 청년들이 2017년 8월 경북 김천 경북청소년수련원에서 개최된 바울수련회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대구동부교회 제공

우리 국민은 대한민국이라는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이 배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도 많지만 믿지 않는 사람도 많다. 문제는 대한민국호가 먼바다에서 심한 태풍을 만난 배처럼 흔들리고 있어 우리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요나처럼 선장도 아니고 선원도 아니며 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만일 배가 난파되면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바다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폭풍을 만났을 때 배에 탄 사람들의 생명까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말씀하신다. 구약성경에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요나와 그 일행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나만 바다에 빠지고 모두 살았다. 신약성경에선 로마로 압송되다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던 사도 바울과 일행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요나와 바울이 위기 때 영적 리더십을 찾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다. 악한 성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욘 1:3), 즉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 도망친다. 듣기에 좋고 마음에 드는 말씀만 예언하고 사람들에겐 인기가 없는 말씀은 전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았다. 예배나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화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말씀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시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요나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혹은 이방인들 속에 숨어버리면 하나님이 못 찾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이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다.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에 큰 난리와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찌감치 포기하셨더라면 그냥 내버려 두시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이기심과 생활 편의에 더욱더 빠져들어 ‘뭐 별일 있겠어’라며 넘어가려 한다면 ‘폭풍’은 심해진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도전에 대해 응전하지 않는 나라나 문명은 망한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의 도전에 무엇이든 반응하고 응전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다. 그저 나 몰라라 하고 잠만 잔다. 요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선장으로부터 기어이 책망을 당한다.

아마도 선장은 배 밑에서 태평스럽게 자는 요나를 본 것 같다. 그리고 너무나 기가 막혀서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고 묻는다. 지금 모든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난리인데 너는 어찌된 사람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너도 좀 네가 믿는 하나님께 기도해보라고 책망한다. 한 사람이라도 힘을 합해 기도하면 어떤 신이든지 우리를 도와줄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창피한 일은, 어려움이 터졌는데도 너무 기도하지 않아서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기도를 좀 하라는 핀잔을 듣는 것이다. 그보다 더 창피한 일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제발 믿음을 좀 가져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드디어 선장은 극단적 선택을 한다. 이렇게 지독한 폭풍이 부는 것은 분명히 신이 노한 것이며 누군지 모르지만 신을 노엽게 하는 죄를 지은 자가 이 가운데 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살인하고 도망친 사람이나 도둑질한 사람이나 남의 여자를 빼앗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도망치는 요나 선지자가 뽑힌다.

폭풍이 불고 위기에 빠질 줄 알았다면 요나는 절대로 배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육로를 이용해 다른 곳으로 피했을 것이다. 그만큼 듣기 싫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피하려 했다.

요나는 일단 제비에 뽑혔기에 자기가 누구이며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나는 “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면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양심을 스스로 죽이는 것이다. 요나와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양심을 죽여 놓는 데 있었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라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상대화해왔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과 똑같이 취급했다. 아니 오히려 더 업신여겼다. 이것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죄였다.

요나에게 하나님의 영감이 회복되고 있을 때 목숨 걸고 말씀에 순종했다. 그랬더니 능력이 나타나면서 폭풍과 바다가 잔잔해졌다. 목숨 걸고 바다에 빠지자 큰 고래 같은 물고기가 와 그를 삼킨 후 나중에 토해내서 결국은 살게 됐다. 이처럼 목숨 걸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능력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온 천지를 만드신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부분만 듣거나 세상 이론을 섞으면 재앙이 일어난다. 우리 중에 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각오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살게 될 것이다.

김서택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84508

[김서택 목사 크리스천의 생존] 갓난 아들 운명을 하나님께 맡긴 엄마… 그래서 모세는 살았다

<8> 결단의 순간

대구동부교회 권사 임직자들이 2017년 10월 임직식에서 어머니의 심정으로 교인들을 돌볼 것을 다짐하며 기도하고 있다. 대구동부교회 제공

앞에 큰 장애물이 버티고 있어서 도저히 나아갈 수 없을 때 우리는 낙심한다. 이때 많은 사람이 자포자기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 수 있는 길을 얼마든지 준비해 놓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의 장벽이 아무리 높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

요즘 한국 사회 전체는 짙은 안개가 덮여 있어서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다. 청년들은 하나같이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며 낙심하고 취업과 결혼의 벽이 너무 높다고 한다. 이때 우리는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비참하게 살고 있을 때 일이다. 애굽왕은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를 강제로 줄이기 위해 남자 아기를 낳으면 무조건 나일강에 던져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아들로 태어난다는 것은 출생 자체가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믿음 좋은 레위 지파 부부가 그만 아들을 낳게 됐다. 신고하지 않고 몰래 키우다 들키면 식구들이 몰살당하는 상황이었다. 엄마는 아기를 버려야 할까. 엄마도 살고 아기도 살 방법은 없을까. 이제 엄마가 결정해야 할 순간이 왔다. 엄마는 밤마다 울면서 하나님께 아기를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때 엄마의 마음속에 지혜가 떠올랐다. 아기를 애굽인에게 주어서 아기가 살 수만 있다면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기를 살리기 위해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아기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요즘 우리나라에 환란과 심판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집중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 기도 내용은 내가 지금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여쭙는 것이다. 만약 큰 환란이 닥치고 난 후에 기도한다면 결국 수습은 되겠지만 그 피해는 엄청날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다고 하면서 할 것 다 하고 누릴 것 다 누리다가 나중에 일이 생기면 기도하겠다는 것은 자포자기와 같다. 지금 시간이 있을 때 내가 버려야 할 고집이 무엇이며, 포기해야 할 욕심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뜨겁게 기도해야 한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가치 있게 보시고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다.

내가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 여쭙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소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엄마는 아기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기를 애굽인에게 주어서 애굽인의 자녀로 키우게 하는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여기서 엄마에게 다시 믿음이 필요했다. 아기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엄마는 아기를 갈대상자에 넣어 애굽 공주나 귀족 부인들이 자주 와서 목욕하는 강가에 떠내려 보내는 것을 선택했다. 엄마는 아기의 누나인 미리암에게 망을 보게 했다. 여기까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다.

엄마는 아기를 바구니에 넣어 떠나보내고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 죽으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제발 우리가, 아기가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틀림이 없다. 이때 놀랍게도 바로의 무남독녀가 시녀들과 강가에 목욕하러 왔다. 시녀들이 아기가 들어있는 상자를 가져왔고 손가락을 빨고 있는 아기를 보고 공주의 마음속엔 말할 수 없는 모성애가 일어났다. 귀엽고 예쁜 아기를 보며 공주의 마음속엔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 아기는 죽여야 한다는 아버지의 명령과 아기를 키우고 싶은 모성애가 싸웠을 것이다. 공주는 결국 아기 이름을 모세라 짓고 아기 엄마에게 도로 아들을 주면서 “젖을 뗄 때까지 건강하게 키워야 한다”며 삯까지 줬다.

아기를 다시 찾은 엄마는 모세가 젖을 뗄 때까지 구전으로 내려오던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들려줬다. 모세는 아기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천지창조와 아브라함 이야기,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이를 성경으로 기록한다.

모세는 젖을 뗀 후 바로의 왕궁에 들어가 세상의 삶을 살았다. 그것까지 엄마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세의 마음속에는 애굽의 모든 영화로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갈망이 언제나 자리 잡고 있었다. 연어가 아무리 먼 바다에 가서 살더라도 때가 되면 처음 자신이 부화된 곳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축복이 있다. 미래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기도할 때다. 이때는 고집과 탐욕을 깨닫고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쓸데없는 자존심과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된 욕심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줄기차게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신실하신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김서택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김서택 목사 크리스천의 생존] 거인 골리앗 앞에선 소년 다윗… 믿음이 그를 이끌었다

<9> 여호와의 이름으로

입력 : 2019-07-05 00:09
대구동부교회 청소년들이 2017년 8월 교회에서 개최된 제10회 청소년은혜대축제에서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있다. 대구동부교회 제공

만약 우리나라에 핵무기가 있고 경제력과 군사력이 어마어마했다면 다른 나라들이 함부로 여기지 못했을 것이고 북한도 감히 도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발전했지만 사실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늘 전쟁을 걱정해야 하고 강대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형편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힘을 핵무기에 두고 있다. 일본의 무기는 기술과 경제력, 군사력이다. 중국은 어마어마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무기로 삼고 있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무기다.

우리는 무엇을 힘으로 삼고 있을까. 경제력은 미국 일본 중국에 한참 못 미친다. 군사력도 미국의 도움 없이는 지켜낼 수 없을 정도다. 정신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우리의 능력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예전에 이 비밀로 복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성공에 눈이 어두워지면서 이 비법을 잃고 말았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자기의 힘으로 삼고 산다. 그러나 나라 전체에 큰 전쟁이 일어나거나 지진이나 흉년을 겪으면 그런 개인적인 힘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때는 정말 기도의 힘밖에 없고 하나님의 능력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믿기 전 야생 동물의 기질을 갖고 있어 내 힘을 믿고 남들과 싸우고 경쟁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강한 자가 이기는 세상이 됐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고 나면 유순한 양으로 변하기 때문에 남들과 싸울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더욱이 전쟁은 이길 자신도 없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골리앗은 40일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욕이란 욕은 다 하고 참소도 했다. 40일간 욕을 먹었다면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다 들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심한 두려움과 좌절에 빠졌다.

참소는 약점을 들춰내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본래 마귀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사탄은 주로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복을 받아야 하는데 이렇게 못사는 것을 보니 잘못 믿어서 그렇다. 하나님이 너희를 버리셨다’는 식으로 공격한다. 기도할 의욕을 꺾어 버리고 자포자기하도록 만든다.

사탄은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지어내기도 하지만 있는 것을 과대 포장하거나 제멋대로 해석해서 공격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말로는 사탄을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다. 이들의 말은 너무나도 더럽고 거짓말투성이다. 막무가내로 억지도 부린다.

이때 하나님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소년을 등장시켜 골리앗을 죽이고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게 하셨다. 다윗이란 소년은 인물이 훤하지도 않았고 집안이 대단하지도 않았다. 형제 많은 집의 막내아들이었고 직업도 양치는 목동에 불과했다. 아무도 다윗을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선 다윗을 알고 계셨다. 사무엘은 멋있게 생긴 형들을 다 제쳐놓고 보잘것없는 막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렇게 했더니 다윗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

하나님의 종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그가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해도 성령이 임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매우 담대해질 뿐 아니라 그 어떤 적도 그를 이길 수 없게 된다.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갔다가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을 모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담대한 확신 가운데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다. 성령이 다윗에게 감동을 줬고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은 자신감이 있다. 성령이 주는 자신감이다.

다윗은 왕의 투구와 갑옷, 칼이라는 사울의 방식을 거절하고 실제적인 방법을 택했다. 이것이 다윗의 승리 비결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오려면 체면치레에 불과한 일들을 집어치울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이 지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남들의 말이나 기대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남들의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선택한 무장은 남들이 보기에는 창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싸움은 무기의 싸움이 아니며 힘의 대결도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나가는 것이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칼과 창 없이도 얼마든지 싸우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준비돼 있다.

골리앗은 완벽하게 무장했다. 그러나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것에 대한 대비일 뿐이었다. 하나님과의 싸움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반면 다윗은 가장 원시적인 무기로 싸웠다. 다윗이 물매를 던지자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혀버렸다.

우리는 때때로 내 능력으로는 절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루빨리 하나님의 능력을 내 능력으로 만드는 비결을 익혀야 한다. 그래서 블레셋 같고 골리앗 같은 강한 군대를 물리치는 크리스천이 돼야 한다.

김서택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김서택 목사 크리스천의 생존] 거인 골리앗 앞에선 소년 다윗… 믿음이 그를 이끌었다

<9> 여호와의 이름으로

입력 : 2019-07-05 00:09
대구동부교회 청소년들이 2017년 8월 교회에서 개최된 제10회 청소년은혜대축제에서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있다. 대구동부교회 제공

만약 우리나라에 핵무기가 있고 경제력과 군사력이 어마어마했다면 다른 나라들이 함부로 여기지 못했을 것이고 북한도 감히 도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발전했지만 사실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늘 전쟁을 걱정해야 하고 강대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형편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힘을 핵무기에 두고 있다. 일본의 무기는 기술과 경제력, 군사력이다. 중국은 어마어마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무기로 삼고 있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무기다.

우리는 무엇을 힘으로 삼고 있을까. 경제력은 미국 일본 중국에 한참 못 미친다. 군사력도 미국의 도움 없이는 지켜낼 수 없을 정도다. 정신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우리의 능력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예전에 이 비밀로 복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성공에 눈이 어두워지면서 이 비법을 잃고 말았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자기의 힘으로 삼고 산다. 그러나 나라 전체에 큰 전쟁이 일어나거나 지진이나 흉년을 겪으면 그런 개인적인 힘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때는 정말 기도의 힘밖에 없고 하나님의 능력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믿기 전 야생 동물의 기질을 갖고 있어 내 힘을 믿고 남들과 싸우고 경쟁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강한 자가 이기는 세상이 됐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고 나면 유순한 양으로 변하기 때문에 남들과 싸울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더욱이 전쟁은 이길 자신도 없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골리앗은 40일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욕이란 욕은 다 하고 참소도 했다. 40일간 욕을 먹었다면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다 들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심한 두려움과 좌절에 빠졌다.

참소는 약점을 들춰내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본래 마귀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사탄은 주로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복을 받아야 하는데 이렇게 못사는 것을 보니 잘못 믿어서 그렇다. 하나님이 너희를 버리셨다’는 식으로 공격한다. 기도할 의욕을 꺾어 버리고 자포자기하도록 만든다.

사탄은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지어내기도 하지만 있는 것을 과대 포장하거나 제멋대로 해석해서 공격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말로는 사탄을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다. 이들의 말은 너무나도 더럽고 거짓말투성이다. 막무가내로 억지도 부린다.

이때 하나님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소년을 등장시켜 골리앗을 죽이고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게 하셨다. 다윗이란 소년은 인물이 훤하지도 않았고 집안이 대단하지도 않았다. 형제 많은 집의 막내아들이었고 직업도 양치는 목동에 불과했다. 아무도 다윗을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선 다윗을 알고 계셨다. 사무엘은 멋있게 생긴 형들을 다 제쳐놓고 보잘것없는 막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렇게 했더니 다윗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

하나님의 종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그가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해도 성령이 임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매우 담대해질 뿐 아니라 그 어떤 적도 그를 이길 수 없게 된다.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갔다가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을 모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담대한 확신 가운데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다. 성령이 다윗에게 감동을 줬고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은 자신감이 있다. 성령이 주는 자신감이다.

다윗은 왕의 투구와 갑옷, 칼이라는 사울의 방식을 거절하고 실제적인 방법을 택했다. 이것이 다윗의 승리 비결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오려면 체면치레에 불과한 일들을 집어치울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이 지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남들의 말이나 기대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남들의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선택한 무장은 남들이 보기에는 창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싸움은 무기의 싸움이 아니며 힘의 대결도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나가는 것이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칼과 창 없이도 얼마든지 싸우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준비돼 있다.

골리앗은 완벽하게 무장했다. 그러나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것에 대한 대비일 뿐이었다. 하나님과의 싸움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반면 다윗은 가장 원시적인 무기로 싸웠다. 다윗이 물매를 던지자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혀버렸다.

우리는 때때로 내 능력으로는 절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루빨리 하나님의 능력을 내 능력으로 만드는 비결을 익혀야 한다. 그래서 블레셋 같고 골리앗 같은 강한 군대를 물리치는 크리스천이 돼야 한다.

김서택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김서택 목사 크리스천의 생존] 유황불이 떨어지기 전까지… 소돔과 고모라 멸망 조짐은 없었다

<10> 유황 쓰나미 재앙

입력 : 2019-07-12 00:09
김서택 대구동부교회 목사가 2017년 10월 본당에서 열린 임직식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대구동부교회 제공

성경에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멸망사건이 나온다.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멸망이다.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하늘에서 유황과 불이 떨어져 소돔과 인근 4개 성안에 있던 모든 것을 다 멸한다.

어느 날 유목 생활을 하는 아브라함에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 사람이 나타난다. 그들을 정성껏 대접하면서 하나님과 두 천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식사를 마친 뒤 자신을 여호와라고 소개한 분이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이 하늘까지 상달돼 그곳을 멸망시킨다”고 말씀한다.

지금 소돔과 고모라에는 멸망의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땅이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여진도 없다. 그런데 여호와는 분명히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다고 하신다. 소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 모두 농담이려니, 그냥 해보는 소리려니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가 소돔의 멸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대한민국도 현재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무기를 가지는 데 성공했다. 정치와 경제가 마비되다시피 하고 국민의 마음은 좌우로 나뉘어 있다. 자살과 동성애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창세기 19장 말씀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우선 이 멸망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타락의 지표는 다른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의 야간 난동이었다.

이 도시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다른 지표들도 많았을 것이다. 살인 자살 성추행 매춘 강탈 독재 등도 있었을 텐데 성경은 오직 딱 하나 동성애자들의 집단 난동만 언급한다. 동성애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큰 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낯선 사람을 환대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동성애자들이 롯의 집 앞에 우르르 몰려와 낯선 사람들을 내놓으라며 난동을 부렸다. 그들과 성관계를 하겠다고 한다. 이 소돔 사람들도 낮에는 정상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낮에는 장사하고 학교에 다니거나 농사도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가 떨어지고 난 후 그들은 동성애자라는 정체를 드러냈다. 그러나 롯처럼 도와주려는 관점이 아닌 성적인 눈으로, 욕망의 눈으로 관심을 두었다. 이것이 멸망하기 전 소돔성의 마지막 모습이다.

롯은 그들을 설득하려 애썼다. 딸을 내놓겠다는 이상한 타협안까지 내놓는다. 이는 롯의 윤리개념까지 얼마나 타락하고 오염됐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더 크게 소리 지르면서 “네가 뭔데 우리에게 재판장 노릇을 하느냐”고 따졌다.

대한민국에서 요즘처럼 동성애자들이 거리에 나선 적이 없었다. 집회와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크리스천들도 거리에 나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공만을 지향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대한민국이 이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동성애자들과 동성애를 옹호·조장하는 사람들을 통해 알려주고 계신다.

우리는 세상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 당장 짐을 싸서 다른 데로 도망칠 필요도 없다. 소돔에서 고모라로 간다고 해도 거기도 소돔이고, 그 옆 아드마로 가도 거기도 소돔과 똑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예민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 우리 크리스천은 망해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다.

두 천사는 롯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식구들과 하인을 데리고 당장 이 성을 떠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롯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딸들과 결혼할 사위를 만나 같이 피신하자 했지만, 농담으로 여겼다.

평상시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듣고 순종해야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듣지 않고 세상 이야기에만 빠져 사니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롯 역시 소돔에 미련이 많았던 것 같다. 도망치려고 보니 챙겨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돈을 가져가야 하나, 패물을 가져가야 하나, 옷을 챙겨야 하나 이 방 저 방 왔다 갔다 하다가 급기야 새벽을 맞고 말았다.

잠시 후 매캐한 냄새와 함께 노란 물체가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성냥을 만드는 재료인 유황이었다. 이후 하늘에서 불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불비와 쌓여있던 유황이 만나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하나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사람 한 명, 짐승 한 마리, 벌레 하나,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모두 유황불에 타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과 그 옛날 멸망했던 소돔과 고모라를 연결해 생각해보자. 언제부터인가 우리 도시에선 동성애자들이 집단으로 시위를 하고 지진이 일어나며 구제역과 조류독감이 발생한다. 북한이 핵으로 남한을 위협한다.

이러할 때 아브라함의 기도는 유효하다. 하나님은 그 많은 죄와 동성애자의 난동에도 불구하고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아끼시고 우리 민족도 너무나 사랑하신다. 그러나 정화조가 가득 차면 비워야 하듯 죄가 가득 차면 심판이 올 수밖에 없다. 기도와 영적 부흥으로 죄의 수위를 내려 심판이 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김서택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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