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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못하던 입 열리고 지체 장애인 일어서자 “할렐루야” /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6> - <10>

영국신사77 2019. 8. 18. 10:03

말 못하던 입 열리고 지체 장애인 일어서자 “할렐루야”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6>

입력 : 2019-08-08 00:03/수정 : 2019-08-08 00:16

오창균 서울 대망교회 목사와 홍예숙 사모가 2010년 미국 포틀랜드 온누리성결교회 전교인수양회 후 성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미국으로 부흥회를 간 것은 나를 치료해주신 의사 장로님을 만날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안 사실은 미국인 교회에는 한국 사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곱 군데 집회하고 나서야 알았다. 

어른이 되어 안 사실은 미국 교회 본당은 
우리나라 강당처럼 지어진 곳이 많다는 것이었다. 
교회가 크다 보니 일부를 한인교회에 빌려준 곳이었다. 
미국인, 한국인이 같이 부흥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거기에도 내가 찾던 의사 장로님은 보이지 않았다.

미국 부흥회는 한국 부흥회와는 다르게 밤에만 했다. 
키 크고 코 크고 덩치 큰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호소하며 나아가는 모습이 
한국과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점점 미국 부흥회 인도가 몸에 뱄다. 
병자들이 나았다. 
기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강사료도 받았다. 
미국 달러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몰라 나를 도와주시는 선교사님께 여쭤봤다. 
“이거 가져가면 우리나라 돈으로 바꿔줘요?” 
그분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많이 바꿔주죠.” 

덜컥 겁이 났다. 
‘우리나라 돈으로 주지…. 옷도 사 입고, 엄마도 갖다 주게.’ 
오래간만에 떠오르는 엄마 얼굴이 떠올라 너무 보고 싶었다. 
울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점점 미국에 정이 들기 시작했고 부흥회는 점점 커졌다. 

그때 두 가지 기적이 있었다. 
첫 번째 기적은 농아인의 입이 열린 사건이다. 

부흥회 시작 전 내 눈에 띈 예쁜 아가씨가 있었다. 

예뻐서 눈에 띈 것이 아니다. 

나를 보고 자꾸 웃었다. 그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도 같이 웃어주었다. 

그런데 웃는 모습이 나처럼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때부터 내 눈길이 그 아가씨에게 꽂혔다. 

집회가 시작되고 찬양을 하는데 이상한 것을 보았다. 

웃기만 하고 찬양을 따라 하지 않았다. 박수도 엇갈리게 쳤다.

내 머리에 뭔가가 스쳐 갔다. 

‘하나님이 보내셨구나. 작업하시려고.’ 

갑자기 기대됐다. 

‘아, 하나님이 나를 또 어떻게 쓰실까.’ 

마음이 두근거렸다. 

부흥회 도중, 갑자기 주체하지 못하고 감당 못 할 말을 했다. 

“앞으로 나오세요.” 

나도 모르게 그 아가씨를 앞으로 불러낸 것이다. 

그 뒤로부터는 정신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하나님 어떻게 해요?” 

급할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이 내 특기다. 

“하나님, 저 일 저지른 것 아시죠?” 

하나님을 연거푸 불렀다. 

통성기도를 시켰다.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나와 통역사, 그 아가씨와 보호자였다. 

그때 하나님께서 일하셨다.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붙들리라. 강하고 담대하라.”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담대하게 선포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에바다! 열릴지어다!” 

그 아가씨의 귀가 열렸다. 

정확하진 않았지만 말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두 손을 들더니만 입술로 하나님을 불렀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다 같이 찬양을 불렀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꿈꾸던 하늘나라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펼쳐진 것이었다. 

열광의 도가니였다. 

그 큰 덩치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아멘”을 외쳤다. 

언어는 다르고 몸짓은 달랐어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은 하나였다. 

두 번째 기적은 하체 장애인이 일어선 사건이다. 

하나님의 치유 역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임하지 않는 곳이 없다. 

부흥회를 인도하러 집회 장소에 들어갔다. 

미국인들은 처음에 강사가 들어가면 일어서서 환호해 준다. 

은혜가 넘치면 앉지도 않는다. 

새 술에 취한 듯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남의 눈치 안 보고 자유분방하다. 

그러면서도 타인의 인격을 존중해 준다. 

다 일어나는 분위기라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한 아주머니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휠체어를 탄 환자는 아니었다. 

나는 단지 성격이 조용한 분이거나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분 

아니면 몸이 아프신 분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유독 눈에 띄었다. 

오히려 많이 열광하는 분들보다 더 눈에 들어왔다. 

부흥회가 시작되고 찬양을 부르자 회개의 영이 임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사람들이 울기 시작했다. 

나도 울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나는 앉아있는 그 아주머니에게로 가서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서로 안고 기도하는 분께 축복해 주세요.” 

나는 그분에게 말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응답 받기를 원합니다.”

멀뚱멀뚱하던 그 아주머니가 울음을 터뜨렸다. 

통역사가 통역을 해주었다. 

“걷기를 원한대요.” 

통역사의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은 덜컹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하체 장애인이었다. 

‘잘못 걸렸네. 어쩌면 좋을까?’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급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딸아, 안심하라. 네가 하니? 내가 하지!” 

그 말씀 한마디에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힘을 다해 외쳤다. 

“평안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그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온전히 걸을지어다!” 

기적이 일어났다. 

아주머니가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하나님 없는 내 모습 발견… 미국 집회 중단하고 귀국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7>

입력 : 2019-08-15 00:05
홍예숙 서울 대망교회 사모가 지난 8일 서울 송파구 교회에서 열린 금요치유집회에서 파킨슨병 환자에게 치유기도를 해주고 있다.

미국에서 처음 집회를 인도할 때는 마이크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몰랐다. 기도를 어떻게 인도하는지, 통성기도를 어떻게 확산시켜야 할지도 몰랐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하나 꼼꼼하게 가르쳐 주시며 섬세하게 화답해 주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하나님을 잊기 시작했다. 내가 기도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착각했다. 초라했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능력을 소유한 자인 것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교만하지 마라. 첫사랑을 잃지 마라.” 하나님은 혼자 있는 시간이면 수없이 속삭이셨다. 그때마다 항변했다. “나, 잘하고 있잖아요. 아시잖아요.”

미국 집회는 계속됐다. 사람들은 갈수록 더 많이 모였다. 말씀과 기도, 안수로 기적이 계속됐다. 내가 마시던 물만 마셨는데 병이 낫는 체험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느 집회 때 일이다. 안수하고 있는데 늘 옆에 계시던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다. 뒤돌아보니 저만치 혼자 계셨다. “예수님, 거기서 뭐 하세요. 저와 함께하셔야지요.” “나 없이 너 혼자 잘하는데 내가 왜 필요하니?”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집회를 더 인도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없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얘기를 듣더니 모두 말렸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한창 전성기인데 집회를 접으면 어떻게 해.” ‘하나님 앞에서 전성기가 무엇이며, 어떻게 왔는가가 다 무엇인가.’ 그저 하와처럼 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대구 주암산 기도원으로 향했다.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잘 안 됐다. 좀처럼 교만이 꺾이지 않았다. 미국의 일들이 자꾸 떠올랐다. 하나님을 찾으면 찾을수록 내가 여기에 조용히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찬양했다. 하지만 억지로 하는 찬양이었다. 기도했다. 하지만 원망하는 기도였다. 모세가 왕궁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나왔을 때의 기분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처음 미국에 갈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기도원에선 부흥회가 계속됐다. 우스워 보였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가만히 있으려니 속에서 불이 났다. “하나님, 광야는 싫어요. 내가 왜 다시 여기에 있어야 하죠.” 수없이 외쳤다. ‘내가 부흥회 할 때는 앉은뱅이도 일어났는데…. 내가… 내가….’ ‘내가’가 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성경책을 툭 하고 펼쳤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나님께서는 내가 영으로 고백하기를 원하셨다. 호흡까지도 다시 하나님께 맡겨야 했다.

2차 금식이 시작됐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력한지, 잘났다고 그렇게 요동치던 내 마음을 한순간에 제압해 버리셨다. 사랑하신다는 그 한마디의 말씀 때문이었다. 그 순간 죄인임을 알게 됐다. 수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평안을 구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평안해.” 평안치 않았기 때문에 부른 찬양이었다.

비참한 내 인생이었다. 그런 내가 하나님을 만나 많은 사람에게 환호를 받을 만큼 놀라운 인생을 살게 됐다. 그런데 또 자아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괴롭기 짝이 없었다. 빛도 없이 성치 못한 몸을 갖고 사는 인생으로 돌아간다는 게 정말 싫었다.

그러나 나도 몰래 찾아온 교만과 아집을 떨쳐버려야만 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식해야만 했다. 수없이 울었다. 처음에는 억울해서 울었다. 금식하기 싫어 울었고 밥 먹고 싶어 울었다. 20일쯤 지났을 때 천국을 다시 보게 됐다. 마음에 감사가 일어났다. 30일이 지나자 하나님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의 말씀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셨다. 교만해지려 해도 교만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돌보심으로 40일 금식을 마치고 보호식에 들어갔다. 장기 금식은 보호식이 굉장히 중요하다. 장기 금식을 마친 뒤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다. 먹을 수 있게 됐다고 막 먹으면 안 된다. 그러기에 보호식 동안에도 자신과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자아가 죽는 과정인 셈이다. 먹는 것을 아무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금식 후에는 유혹이 따른다. 그 유혹을 이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호식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처음에는 된장을 조금 푼 물을 먹어야 했다. 이튿날에는 쌀뜨물 같은 연한 미음을 먹었다. 그것을 한 3일 동안 먹었다. 이때의 유혹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5일째가 됐을 때 곱게 간 미음을 먹었다. 이 미음을 10일 정도 먹어야 한다.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한다. 밥을 먹고 싶다고 밥을 먹어서는 안 된다. 위장을 다 버린다. 15일 정도 지나 통죽을 먹었다. 물김치도 먹었다. 물김치는 국물만 먹어야 한다. 밥을 먹기까지는 금식한 날만큼 죽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30일에서 40일이 지나면 밥을 먹는다. 그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금식은 너무 힘들었다. 꼭 해야 한다면 해야겠지만 순종하는 게 그보다 낫다. 그 후로는 금식을 하지 않고 순종하려 애쓰고 있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하나님, 미국 사역 길 다시 열어주세요”… LA서 부흥회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8>

입력 : 2019-08-22 00:04
오창호 부산 대망교회 목사가 2014년 2월 강원도 철원 성소기도원에서 열린 대망교회 원더풀가족캠프에서 두 손 벌려 찬양하고 있다. 대망교회 제공

1984년 미국에서 돌아와 두 번째 금식을 끝내고 보호식을 하고 있을 때 일이다. 
한 신사분이 대구 주암산기도원에 오셨다. 
기도원에는 하루에도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었지만 유독 그분이 눈에 띄었다.

소망고아원을 운영하는 장로님이었다. 원장님과 대화하며 고아 중 몇 아이가 속을 썩여 하나님께 고아원을 계속 운영해야 할지 말지를 기도하러 왔다고 했다.

“장로님, 장로님께서 안 돌보면 그 아이들은 죽습니다. 하나님이 장로님을 버려도 좋습니까. 하나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장로님에게 베푸신 그 사랑으로 품으십시오. 장로님도 하나님께 애 많이 먹였잖아요.”

금식 끝이라 영권이 있었는지 그 한마디에 영적 KO승이었다. 장로님은 사업이 아니라 사명감으로 고아를 품기로 각오하셨다. 그때부터 나도 고아를 생각하게 됐다.

소망고아원에 갔는데, 미국 사역과는 확실히 달랐다. 내가 희생해야 했다. 말도, 행동도 조심해야 했다. 조심할 것 투성이였다. 축복해도 반항이 왔다. 훈계해도 “너나 잘해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나 내게는 예수님의 권위가 있었다. 나이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주셨다.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들을 사랑으로 품자 점점 나의 말에 귀 기울여 주었다. 서로 끌어안았다. 그들의 아픔과 슬픔과 즐거움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공감하는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고아원 사역에 전력을 다했다. 미국에서 사역하며 강사비 받은 것이 좀 있었다. 쓸 줄도 몰랐고 감당할 수도 없는 달러였다. “하나님, 이 달러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주시려면 한국 돈으로 주시지….” 골치 아픈 달러를 없앨 기회가 왔다.

“원장님 달러 아세요?” 빙그레 웃으셨다. 그때부터 고아원을 지원했다. 대학에 가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나보다 나이 많은 아이들도 있었다. 참 감사했다. 그와 함께 아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쳤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축복, 세상에서 누릴 복을 가르쳤다. 그러는 동안 내 몸과 마음도 회복됐다. 대구 소망고아원 원장님은 다시 나를 미국에 가게 하는 통로가 됐다. 하나님이 다시 쓰시기 위해 만나게 하신 분이었다.

장로님에게 그동안 진행했던 미국 사역을 간증했다.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장로님의 처제가 미국인과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내 얘기도 들은 것 같다고 했다. “미국에 다시 가지 않겠습니까?” 내게 조심스레 물으셨다. “가고 싶죠. 하나님께서 뜻이 있으시면 홍해를 가르심같이 다시 길을 열어 주실 줄 믿습니다.”

미국은 내 힘으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귀국 후 2년여의 시간이 흐른 당시, 미국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내가 없었다. 한국 사람인 데다 어린 나이에 주의 일을 했기에 한때 기적의 사람으로만 회상될 뿐이었다. 다시 찾지도 않았다.

미국에서의 사역이 너무 그리웠다. 입에서 기도가 터져 나왔다. “하나님, 저 이제 생각까지도 아버지께 맡기오니 미국 사역의 길을 다시 열어주세요. 한 번만 더 열어주세요. 아버지를 위해 일할게요. 교만하지 않을게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장로님이 입을 열었다. “갑시다. 제가 도울게요.”

한 달이 지난 뒤 기도원에서 다시 소망고아원 장로님을 만났다. 장로님을 보자마자 ‘야! 미국 문이 열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장로님, 미국에 가게 된 거죠?” “어떻게 알았지요?” “하나님께서 장로님을 뵙는 순간 알게 해주셨어요.”

그때부터 미국 집회가 다시 잡혔다. 모든 서류는 장로님이 준비해 주셨다. 처음 갈 때와 달리 한국인과 동행했기 때문에 절차가 까다로웠다. 그러나 처음 간 행적이 있었기에 잘 해결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간 미국 길은 첫 번째로 간 미국 길과 너무나 달랐다. 처음에 길을 여실 때는 미국 현지교회 부흥회였는데 금식 이후 다시 여신 미국 사역은 주로 한인교회 집회였다.

집회는 LA에 있는 교회에서 열렸다. 미국교회당을 빌려서 예배드리는 한인교회였다. 한국인이 많이 모여 있었다. 

부흥회 첫날은 너무너무 답답했다. 다들 생계유지를 위한 피곤함에 찌들어 있었다.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찌들어 있던 육신과 영혼에 생기가 들어가고 기쁨이 샘솟았다. 몸이 낫고 부르짖기 시작했다. 찬양하고 박수를 쳤다.

부흥회 둘째 날이 되자 미국인도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집회는 계속됐다. 미국인이 많아지자 한국인이 통역을 했다. 그제야 좀 신이 났다. 미국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인들과 달랐다. 무엇보다 찬양 부르는 자세가 달랐다. 한국인은 타인의 시선을 보며 조심스러워하는 반면 미국인은 자유분방했다. 성령님이 임하시자 병자가 나았다. 한국인, 미국인 다 하나가 돼 부르짖었다. 첫 번째 때 나를 쓰셨던 그 하나님께서 다시 나를 사용해 주셨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내 팔? 네팔?… 무작정 따라간 힌두교 국가, 숨어서 부흥회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9>

입력 : 2019-08-29 00:07
오창균 서울 대망교회 목사(가운데줄 왼쪽 여섯번째)와 홍예숙 사모(가운데줄 왼쪽 네번째)가 2006년 1월 네팔 카트만두에서 목회자집회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두 번째 미국 사역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부흥 집회를 통해 많은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 병자들이 몰려올 때면 많은 사람 중에 눈에 띄는 한두 사람이 꼭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사람들은 반드시 치유됐다. 휠체어를 타고 왔던 여대생이 근무력증에서 치유됐고, 귀신이 들려 온 집회 장소를 혼란스럽게 만든 남성도 정상이 돼 돌아갔다. 각혈 환자, 암 환자, 각종 희귀병자들…. 참으로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셨다.

그러다가 네팔에 가게 됐다. 나를 도와주시던 신실한 선교사님 한 분이 네팔에 가야 한다고 졸랐다. “어디요?” 분명히 한국은 아니었다. 나는 하나님께 먼저 여쭤봤다. “가요? 말아요?” 하나님께서 인자한 목소리로 “가야지”라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후 선교사님께 다시 물었다. “갑시다. 어디라고 하셨죠?” “네팔이요.”

당시만 해도 나는 네팔이 미국에 있는 한 주인 줄로만 알았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짐을 꾸렸다. 비행기를 탔다. 평소보다 멀게 느껴졌다. 몇 번 잠에서 깨었는데도 비행기 안이었다. ‘내 팔은 이렇게 가까이 내 몸에 붙어있는데, 이놈의 네팔은 왜 이리 멀지.’ 가도 가도 끝이 없기에 그제야 선교사님이 설명을 해줬다.

주의해야 할 사항도 한두 가지 말씀하셨다. 네팔이 그런 곳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하나님께 타협이라도 해봤을 것이다. 그런 나를 보고 선교사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사명자이잖아요. 하나님께서 부르셨잖아요. 우리가 힘을 합하면 하나님 나라가 이뤄집니다.”

“우리는 사명자이잖아요.” 이 말 한마디가 나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마음에 확신이 생겼다. ‘이제까지 나를 통해 일하셨듯이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하나님께서 나의 지경을 넓히신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드디어 네팔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접해보는 인종이었다. 미국인에 비하면 색감도 없었고 옷도 후줄근해 보였다. 키도 작았다. ‘와, 우리나라보다 사람들 키가 작은 나라가 있나 보다.’ 미국에서는 사람들을 고개를 위로 들고 봐야 했는데 네팔에서는 눈높이에서 조금만 위로 보면 됐다. 그 점 하나로 마음이 확 풀려버렸다.

그때부터 신이 났다. 네팔에서의 집회는 미국과 확연히 달랐다. 게릴라 작전처럼 숨어서 집회를 해야만 했다. 찬양도 크게 부르지 못했다. 국교가 힌두교여서 기독교는 용납되지 않았다. 전 국민 중 0.1%가 기독교인이었다. 몰래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선교사님들이 목숨을 걸고 씨앗을 뿌린 덕분이리라.

집회가 시작됐다. 찬양이 점점 커졌다. 언어는 달라도 리듬을 같이 탔다. 곡도 같았다. 나는 한국말로, 네팔 사람들은 네팔말로, 미국 선교사님은 영어로 찬양했다. 성령의 불이 떨어졌다. 미국집회 이상으로 뜨거웠다. 그러는 사이 신고가 들어갔다.

네팔에는 동네에 통장이 있는데 주민들을 감시하고 정부에 보고한다. 그래서 요주의 인물이다. 그 사람이 신고하면 경찰이 출동한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가며 부흥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 숨바꼭질이었다.

네팔에서 부흥회를 하려면 동네 통장이 문제였다. 그 사람만 잘 구워삶으면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동네 통장이 원하는 것은 돈이었다. 고민이 됐다. 나한테는 미국 집회 때 받은 달러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한 2주 머물며 사역을 하였다.

네팔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피부병, 혈루병, 가난으로 인해 생긴 병들이 많았다. 암도 터져 나왔다. 핏덩이가 돼 암이 밑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선교사님들과 같이 보며 울었다. 모두가 주 안에서 하나가 됐다. 소문이 났다.

그런데 그것이 큰일이 되고 말았다. 통장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통장이 집회 장소에 나타났다. 네팔에서는 통장이 신고하기 전에 경찰이 먼저 오지는 않는다. 통장하고 타협만 잘하면 몰래 옮겨주기도 한다. 자기가 신고해 놓고도 돈만 찔러주면 알아서 처리한다.

선교사님이 얼른 달러를 건네주었다. 통장이 달러를 보며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조금 더 달래요.” 그때 내 주머니에 있는 달러가 생각났다. ‘아, 이것도 돈이구나!’ 있는 달러를 다 줬다. 그러자 통장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큰 금액을 보고 다리가 풀려버린 것이었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너, 돈 줄게. 예수님 믿을래?” 선교사님이 그대로 통역해줬다. 통장은 돈을 준다는 말에 울기 시작했다. 그때 느꼈던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방법으로 다양하게 일하신다는 것이다. 병든 자에게는 병 고침으로 찾아와 주시고, 가난한 자에게는 물질의 풍요로움으로 만나주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네팔 사역은 계속됐다. 통장이 성령님에 사로잡히니 부흥회가 너무 쉬워졌다. 암이 치유되고 각혈이 멈췄다. 뜨겁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모두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집회 인도 계속하기 위해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10>

입력 : 2019-09-05 00:09
오창균 서울 대망교회 목사(왼쪽)와 홍예숙 사모(가운데)가 지난 30일 서울 송파구 교회에서 열린 금요치유집회 도중 발작을 일으킨 학생을 위해 신유기도를 하고 있다.

1986년 네팔에서 사역을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한동안 집을 비웠더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교회에 출석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도원 출입으로 몇 년 전 교회에서 징계를 받았다고 했다. 당시 고신 교단은 기도원에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만나기 위해 대구 주암산기도원에 오간 것이 문제가 됐다고 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셨지만 마음에 늘 주의 종이 되고 싶다는 소원이 있었다. 그 일을 두고 눈물로 기도를 참 많이 하셨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아시는 목사님이 집에 들렀다가 우리 집 사정을 들으시고 신학을 권유한 것이다.

그 목사님이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 목사님이셨기에 아버지는 지방의 성결교신학교에 편입했다. 그리고 신학 공부를 하는 동시에 함양반석성결교회를 개척했다. 1985년의 일이다.

귀국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사역을 돕게 됐다. 처음에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나이도 어렸고 미국에서 주로 사역했기에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만나는 목사님마다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놀라운 신유의 역사에 감동했고,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전주 목포 광주 포항 등 전국을 누비며 부흥회를 인도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학교 문제였다. 그동안은 미국을 왕래하며 가끔 학교에 들러 1주일 정도 수업에 참석하고 시험만 치면 됐다. 함양여중까지는 그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진학을 앞두고 고민이 됐다. 학업을 위해서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야 했고, 주의 일을 하면서 공부를 부업으로 삼으려면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야 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실업계를 가야 부흥회를 인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참 괴로웠다. 

“하나님, 이제껏 저를 쓰셨으니 잠깐만 공부해도 될까요. 공부하고 나서 나중에 좀 쓰시면 안 되실까요. 그럼 더 하나님 일을 잘할 수 있잖아요.”

그때 떠오른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학업 문제가 풀리지 않으니 내 처지가 깜깜한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의 개척교회에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니 참 난감했다. 이상하고 신기할 정도였다.

소문을 낸 것도 아닌데 학교를 다녀오면 환자들이 교회당을 가득 메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희귀한 환자가 다 왔다. 암은 흔한 질병이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을 가진 분들이 많았다. 파킨슨병, 루게릭병, 폐병, 자폐증 등 질병을 안고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가방을 던져놓고 기도해야 했다. 교회는 개척교회가 아닌 것처럼 사람들로 북적였다.

당시에는 곤고함이 느껴졌다. 학교에 가면 공부를 해야 했고 집에 오면 환자들과 씨름해야 했다. 다른 지역 부흥회도 가야 했다. 게다가 부흥회는 일정상 제한이 많았다. 학교문제 때문이었다.

그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실업계는 인문계와 달리 기본 자격증만 취득하면 인문계 공부도 개인적으로 할 수 있고 취업도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숨통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부흥회에 나가는 것만 하나님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환자를 위해 기도하고 치료하는 일은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그랬기에 마음이 곤고했고 살맛이 나지 않았다.

실업계가 있는 함양종합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부기, 주산, 타자 연습에 매달렸다. 생소한 과목인지라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암기하며 주산 알을 튕겼다. 마음껏 날아다니던 새가 새장에 갇힌 듯 답답하고 힘든 시간이었다. 

그때 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와 주셨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도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질 때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가 맺히느니라.” 눈물이 쏟아졌다. 감사해야 했다. 하나님께 학교에 같이 가자고 졸랐다. “아버지, 학교 가요. 나 혼자 보내지 마시고 아버지도 함께 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나는 학생을 사귀기는 쉽지 않았다. 친했던 친구들이 대학 진학을 위해 인문계로 가버린 이유가 컸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학교생활에 점차 적응했다. 학교 갔다 와서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감사함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됐다.

몸이 불편한 나를 위해 같은 반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고 선생님도 예뻐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학교에 함께 가셔서 생활해 주시고 도와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학교 때처럼 가끔 학교에 오면서 의사소견서만 제출하고 병원에 가 있으면 안 될까요?” 고등학교에선 그런 사유가 통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선생님들이 자발적으로 도와주셨고 교장 선생님까지 내 편이 돼주셨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입도록 일해 주신 것이다.

마침내 길이 열렸다. 취직을 위해 잠시 임시직으로 일했다는 증명서만 받아오면 출석하지 않아도 수업 대체가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증명서는 집회현장에서 만나는 사업가들이 써줬다.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신유집회를 진행하는 데 자유함을 얻게 됐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96428&code=23111111&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