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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인도한 부흥회서 핏덩이 토하고 병 나은 목사님 /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1> -<5>

영국신사77 2019. 8. 8. 20:30

병약해 헛간에 버려진 아이… 아홉살, 하나님을 원망했다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1>

입력 : 2019-07-04 00:08
홍예숙 서울 대망교회 사모가 2009년 부산 대망교회에서 열린 치유집회에서 성령충만을 통해 영육이 강건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길 간구하자고 당부하고 있다.

한국교회 부흥기에는 강력한 신유의 은사가 나타났다. 
신유사역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병든 자가 회복되면서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심을 믿게 됐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 오
늘날 교회의 사역도 이와 다르지 않다. 
홍예숙 서울 대망교회 사모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의 3대 사역 중 하나인 
신유사역의 성경적 의미를 살펴본다.

나는 1968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측 함양중앙교회 장로였다. 부모님은 충성스럽게 신앙생활을 하셨다. 그러나 당시 그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집에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죄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에 ‘없는 딸’이었다. 장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장애인 딸이 있다는 것을 굳이 밝히지 않으셨다. 교회에 덕이 되지 않을까 봐 숨기신 것이다. 새로 부임한 목사님조차 내가 홍 장로 딸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였다.

콩쥐팥쥐 동화를 봐도 내 모습이 생각났고 우렁각시를 봐도 내 모습이 떠올랐다. 교회에서도 할 일이 없었다. “너는 아프니까 가만히 있어.” 다들 아프다고 나를 배려했지만, 나는 너무나 찬양하고 싶었고 봉사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을 때 병원에 가셨다고 한다. 의사는 임신이 아니라며 약을 줬다. 그 후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병원에서는 낙태하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출산을 결심하셨다. 

낳아보니 너무나 작았다. 아기는 약에 찌들어 노랗게 된 상태로 태어났다. 병원에서는 황달을 없애야 한다며 또 약을 줬다. 약에 찌든 아기에게 또 약을 먹인 것이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그때 진급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교회를 나갔다 안 나갔다 하실 때였다. 

그런데 내가 태어난 후 크게 회개하고 열심히 교회를 다니게 됐다. 그래서 내 이름도 예숙이라 지었다. 내가 아버지가 예수님과 가까워진 계기가 됐으니 나를 보면 예수님 생각이 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진급시험 공부를 하면서 나를 곁에 두고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였다. 그런데 처방해준 양보다 더 많이 먹였다. 더 많이 먹이면 더 빨리 나을 거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내겐 치명적이었다. 약에 취해 혀가 안으로 말려들었고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했다. 그래서 옆집 아주머니가 어머니 몰래 헛간에 버렸다. 아기가 바로 옆에서 죽으면 어머니 눈에 밟힐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라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며칠 뒤 화장실에 가던 어머니가 헛간에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며칠 동안 약을 먹지 않아서인지 울음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너무 독한 약을 많이 먹어서였을까. 젖을 먹이던 중 아기의 목덜미 부분에 종기가 났다. 고약을 붙였더니 2~3일 뒤 손바닥 길이만 한 힘줄이 빠져 나왔다. 이후 목을 가눌 수 없게 됐고 목소리도 작아졌다. 하지만 병원에 데려갈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키우셨다.

아이는 자꾸 옆으로 쓰러졌다. 지금 같으면 병원에라도 가 보았을 텐데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일단 살 때까지만 데리고 있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아홉 살이 돼서야 함양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가방도 제대로 메지 못했다. 무릎이 깨져 운동화에 피가 흥건히 고이기 일쑤였다. 그래도 열심히 다녔다. 

교회보다 학교가 좋았다. 학교에서는 할 일도 있었고 열심히 공부한 만큼 인정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시작됐다. 친구들은 아픈 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을 시기했고,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선생님의 배려를 따돌림으로 대했다. 그러자 공부도 싫고 교회도 싫고 세상도 싫어졌다. ‘이렇게 살아서 뭘 할까. 부모님한테도 없으면 좋을 존재고, 우리 형제자매한테도 그렇고.’

당시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던 것 같다. 하지만 열심히 찾은 하나님은 교회에도 안 계셨고 학교에도 안 계셨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가족의 하나님이셨을 뿐이다. 부모님과 형제들의 하나님은 계신 것 같은데 내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다.

아홉 살, 철들기 시작하면서 반항기도 함께 왔다. 하나님께 원망이 생겼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는 긴 머리카락을 내가 감당하기 힘들다고 여기셨는지 짧은 커트 머리로 바꿨다. 순식간에 그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와르르 흘러내렸다. 한순간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 나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무서운 세상처럼 순식간에 바뀐 머리 모양은 내 마음을 잔뜩 조여왔다. 머리카락을 도로 붙여달라고 떼를 쓰면서 이틀이나 울었다. 정말 이틀을 꼬박 울었다.

어머니는 나를 달래 보기도, 야단을 치기도 하셨다. 그럴수록 나 자신의 아집과 고집은 더 강해졌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회초리를 드셨는데, 회초리가 세 개나 부러졌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을 뿐이다. 교회도 가지 않았다. 학교 가는 것도 소홀히 했다. 오로지 터져 나오는 건 내 머리 붙여 달라는 한마디였다. 나 자신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홍예숙 사모

약력=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 소속 서울 대망교회 사모, 저서 ‘나는 진실로 행복한 사람’


[출처] - 국민일보


최자실 목사 찾아가 “안수기도 해주세요”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2>

입력 : 2019-07-11 00:05
홍예숙 서울 대망교회 사모가 지난달 서울 송파구 석촌동 교회에서 금요치유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나를 살살 달래 1977년부터 대구 주암산기도원에 데려가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1주일 정도 기도원에 있었다. 그러다 아예 기도원에 머물게 됐다. 

그날 눈물이 많이 났다. “엄마도 나 싫어? 왜 엄마는 날 기도원에 갖다 놔? 학교 가야 하는데….”

어느새 기도원이 내 집처럼 됐다. 여자 기도원 원장님을 비롯해 많은 이들은 은혜받는 데 온통 마음이 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어떻게 하면 놀 수 있을까, 어떻게 예배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을까만 궁리했다. 그러면서 점점 기도원의 사고뭉치가 됐다. 무도 뽑아 먹고 고구마도 많이 구워 먹었다. 

나를 못 잡게 하려고 원장님 신발을 재래식 변소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래도 원장님은 나를 잘 대해 주셨다. “왜 이렇게 잘 대해 주실까?” 이 말을 원장님께서 들으시고 “너 은혜 받고 하나님 만나라고”라며 웃으셨다.

원장님에겐 자폐증을 보이는 아들이 있었다. 기도원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 외에는 그런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랬기에 원장님은 눈물을 뿌리며 기도하셨다. 그래서 나를 애틋하게 생각하신 것 같다. 

억지로 기도회에 참석하면 원장님은 “많이 울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울면 기도줄이 잡힌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냥 멀뚱멀뚱하게 바라만 봤다.

그러다 번뜩 생각이 떠올랐다. 얼른 수돗가로 내려가 수건에 물을 적셨다. 내가 앉은 자리 앞에서 수건을 짰다. 떨어진 물을 눈에 찍어 바르고 옷에도 뿌렸다. 눈물이 굉장히 많이 난 것처럼 보였다. 

원장님께 보이고 싶어 원장님 들으라고 창쪽을 보고 “주여”라고 고함을 쳤다. “주여, 주여, 주여” 몇 번을 크게 불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님께서 나의 마음을 노크해 주신 것이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정말로 눈물이 핑 돌았다.

기도원 생활은 지루했다. 하루는 피아노를 두드리다가 피아노 실력은 안 되고 해서 찬양만 신나게 불렀다. 그때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원장님이 내 찬양소리를 듣고 계셨던 것이다. 원장님은 그 후로 내게 특송을 많이 시키셨다. 나는 마치 찬양을 잘하는 사람이 된 양 기분 좋게 불렀다.

부를 때마다 사람들도 많이 울었다. 나도 울었다. 찬양을 부르고는 밖에 나가 놀았다. 그 시간만큼은 자유였다. 야단칠 원장님도 없고 다들 예배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기도원의 무는 정말 많이 뽑아 먹었다. 마치고 나면 여지없이 야단을 맞았다. 무 뽑아 먹은 죄, 예배 빼먹은 죄, 기도 안 한 죄… 또 죄인이 됐다.

한번은 화가 나서 “원장님이 죄인이지 나는 죄인이 아니에요”하고 고함을 질렀다. 원장님은 나를 야단치니까 죄인이고 매일 기도하면서 원장님 입으로 죄인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도 죄인이네. 날 이렇게 만드셨으니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나는 의인이다’라는 생각에 이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저 사람을 죄인 만들었다 하며 마음이 굳어져 갔다. 그러나 찬양할 때만큼은 내가 죄인이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아 하나님의 은혜로” 찬양을 부르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어른이 부르는 찬송가밖에 아는 것이 없었지만 좋았다. 

찬양을 하면 기도가 됐다. 집회에도 참석하고 싶어졌다. 내 마음에서 감사가 흘러나왔다.

주암산기도원 아래 시설 좋은 기도원이 하나 있었다. 내가 밤을 꼬박 새워 기도했던 날, 그다음 주에 훌륭한 강사님이 그 기도원에 오신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여자분이었다. 너무 인자해 보였고 쓰고 있는 모자도 멋져 보였다. 당시엔 여의도순복음교회 이름이 순복음중앙교회였다. 조용기 목사님과 함께 사역하시던 최자실 목사님이었다.

그 부흥회 자리에 참석했는데 최 목사님이 집회를 마치고 안수기도를 해 주셨다. 그런데 나에겐 안수기도를 해 주지 않았다. 서운했다.

 “강사님, 저 안수기도 못 받았는데요.”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들으시고 최 목사님이 
“네 머리 위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안수기도해 주셨단다. 너는 내가 부럽니? 
나보다 더 놀랍게 쓰실 줄 믿는다. 계속 기도해라” 하시고는 나가셨다. 

기도가 되지 않았다. 안수기도를 못 받았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서 강사님 방으로 안수기도를 받으러 갔다. 내가 머물고 있던 기도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강사님을 잘 아는 사람처럼 들어갔다. 집사님들도 그냥 보고만 계셨다.

“안수기도 받으러 왔니?” “네.” 

최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너는 될 놈이야” 하시면서 안수기도를 해 주셨다. 방언으로 기도하시는데 축복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 후로는 그 부흥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몰래 강사님 방에 들어갔다고 야단맞을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대신 산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나의 산기도가 시작됐다. 내 나이 열 살 때였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산기도 3년 “이제 올라오지 말라” 음성… 다리 회복 ‘기적’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3>

입력 : 2019-07-18 00:05
홍예숙 서울 대망교회 사모가 지난 12일 서울 송파구 교회에서 열린 금요치유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1977년부터 산기도를 다녔다. 평지에서도 잘 걷지 못하는 다리로 정상인도 오르기 힘든 대구 주암산 산꼭대기를 올라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 사람은 2시간 반 걸리는 거리를 나는 4시간 반이 걸려 기다시피 올라갔다.

꿇어앉아 기도하려고 하면 소변이 너무 마려웠다. 그 바람에 기도줄이 잡히지 않았다. 산꼭대기에서 자꾸 일어나니까 낭떠러지로 떨어질까 봐 겁이 나고 짜증도 났다. 

참을 때까지 참아 보자 하는 마음에 찬양을 열심히 부르고 몸부림을 치며 기도했다.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소변이 나와 버리기도 했다.

행여나 남이 볼까 싶어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어린 마음에 마르면 내려가야지 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또 소변이 마려우면 참을 수가 없어서 또 눠 버렸다. 

이러기를 세 번 정도 반복했을 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장애를 지녔다는 게 서러웠다. 한참을 소리 내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 보니 밤이 돼버렸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나 혼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얼마나 애절하게 하나님을 찾았는지 모른다. “무서워요, 하나님!” 고함을 쳤다. 하나님밖에 나를 도와주실 분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간이었다. 어두움이 무섭고 두려웠기에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미친 듯이 반복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마음에 평안함이 밀려오며 입에서 찬양이 튀어나왔다. 머리 위에 펼쳐진 밤하늘은 너무 아름다웠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하나님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이런저런 찬양을 하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동안 몇 날이 지났지만 눈 뜨면 밤이고 눈 뜨면 밤이어서 내게는 매번 같은 시간이라는 느낌이었다.

내가 기도한 주암산에는 금요일 밤이면 대구와 인근 지역에서 기도하는 분들이 많이 올라왔다. 이들은 금요일 밤에 올라와 토요일 아침이 되면 내려갔다. 시계가 없고 달력이 없어도 그분들을 보면 일주일을 알 수 있었다. 

금요일 밤이면 기도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주여!”라고 외치면 내 주님은 잠시 옆집에 놀러 가신 것 같았다.

매번 토요일에 내려와 주일까지 기도원에 있으면서 죽도 먹고 밥도 먹고 기도원 텃밭에 있는 무도 뽑아 먹었다. 토요일 한 끼를 먹고 주일엔 온전히 세 끼를 먹은 다음 다시 월요일에 산에 올라가면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그렇지만 먹는 것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너무 좋았다. 비가 오고 눈이 와도 올라갔다. 사람들은 내가 미끄러져 죽는다고 막았다. 하지만 또 올라갔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나의 살 길이요, 할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겨울에 기도하다 보면 덮어쓴 비닐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눈은 어깨에 수북이 쌓였다.

아무도 올라올 수 없는 추운 산에서 나와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좋았다. 어느덧 나는 산을 지키며 기도하는 아이로 사람들에게 인식됐다. 어떤 분은 물도 갖다 놓고 가고, 어떤 분은 기도제목도 살짝 던져놓고 갔다.

산에서 기도하다 보니 어린이 복음성가에 나오는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의 상황을 인식하게 됐다. 그것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의 체험이었다. 

어느 날 태풍이 몰아쳤다. 유난히 바람도 세차게 불고 비도 많이 왔다. 천둥소리도 컸다. 그러자 기도굴로 짐승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상하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짐승들과 같이 떨며 나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바람이 고요해지자 짐승들도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내 입에서 찬양이 튀어나왔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 내려오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살았다는 느낌과 함께 눈물이 흘렀다. 내 눈에 눈물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이 체험을 통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기도를 시작한 지 3년이 지난 13살 때 일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이 세차게 들려왔다. “이제 올라오지 말아라!” “예” 대답하고 내려왔다. 그러나 또 올라가고 말았다. 

몇 주가 지났다. 겨울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다. 산기도를 하고 하산하다 그만 굴러서 정신을 잃고 만 것이었다. 나를 구해 주신 분은 대구 동산병원 원장님이셨다. 원장님은 본인의 실수가 아니었지만 잘못된 수술로 책임지고 일을 수습하려고 기도원에 왔다가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다리가 동상에 걸려 썩어 가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무균실에서 고름을 닦아내고 또 닦아냈다. 그 한 달 기간은 육신적으로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고름이 빠져나가고 원래 살의 색깔이 돌아왔다. 기적적으로 다리가 회복됐다.

처음에 원장님은 내 다리를 자르려고 했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르지 마라. 내가 도우리라”고 하는 마음을 불일 듯 주셨다고 한다. 

그때부터 산에는 갈 수 없었고 기도원 집회에만 참석했다. 
산에서 기도한 감각이 있었기에 다른 사람보다 강하게 기도할 수 있었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산 기도 길 막은 하나님… 안수기도 받고 첫 번째 입신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4>

입력 : 2019-07-25 00:04
서울 대망교회 성도들이 지난 19일 서울 송파구 교회에서 열린 금요치유집회에 참석해 축복의 찬양을 부르고 있다.

“예숙아, 그만하면 됐다.” 1979년 동상에 걸렸던 발이 낫고 다시 산기도를 하러 올라가려 하자 하나님은 산기도의 길을 막으셨다. 마침 그때 최자실 목사님이 3년 만에 다시 대구 주암산기도원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오셨다.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된 것처럼 나는 너무 반가웠다.

목사님에게 그동안 하나님과 어떻게 깊이 만났는지 자랑하고 싶었다. ‘목사님, 축복하신 기도대로 됐습니다. 저, 하나님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써 주신대요.’ 이렇게 잔뜩 기대하며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목사님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왜 날 알아보지 못할까? 뇌병변 장애 때문에 남들보다 몸도 안 좋은데….’ 사실 전 세계를 누비며 복음을 전하시는 최 목사님이 몇 년 전 우연히 안수기도 한 번 해준 나를 모르실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몸 상태도 많이 좋아져 있었다. 하지만 서운한 마음에 기도가 되지 않았다. 목사님은 많은 사람 중에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에게만 안수기도해 주시고 나가버리셨다. 내가 안수기도를 받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최 목사님과의 두 번째 만남은 마치 산에서 태풍을 느꼈다가 고요해진 사건처럼 그렇게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서운했다. ‘진짜 하나님만 바라봐야지. 내 인생에는 아무도 없어. 하나님밖에 없어.’ 어린 마음에 수없이 고백하며 많이 울었다. 돌아보면 그때 그 일은 하나님만 앙망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몇 주 후 대구 주암산기도원 밑에 있는 기도원에서 부흥회가 열렸다. 우연히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강사님이 여자분이셨다. 최 목사님 못지않게 영권을 가진 분처럼 보였다. ‘이제부턴 사람 보지 말자.’ 그런 마음으로 부흥회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런데 부흥회가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하나님의 사랑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안수시간이 되자 열심히 찬양하고 부르짖었다. 산에 갈 수 없는 처지여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았다. 그러자 산에만 계실 거라고 생각했던 그 하나님께서 곧장 화답해 주셨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됐다. 다시 기도의 영이 임했고 산기도를 못가는 허전함이 채워졌다. 그리고 안수기도를 받는 순간 그 자리에서 나의 영이 뜨는 느낌이 들었다. 신비한 체험을 했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입신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입신이 뭔지 몰랐다. 방언이 뭔지도 몰랐다. 그런 내가 입신의 은혜를 체험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단지 천국이 있다면, 지옥이 있다면 한 번쯤 보고 싶다는 소원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내 생각까지 다 간섭하고 계셨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입신 때 불렀던 이 찬양이 평생 내가 해야 할 고백임을 깨닫게 됐다.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입신을 통해 당신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게 해주셨다. 

두 번째 입신을 통해선 영혼 구원의 절박함과 귀중함을 깨닫게 해주셨다. 영의 눈을 열어주셔서 참혹한 지옥의 현장도 봤다. 하나님께서 영혼 구원을 얼마나 바라시는지를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여러 차례 입신의 은혜를 통해 내가 본 천국은 
사랑이 넘치며 아픔 고통 절망 시기 분노 원망 이 
모든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다. 

3년 동안 산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속삭였던 그 모든 것이 은혜로, 사랑으로 자리하고 있는 곳이었다. 내 집도 있었고 모세도 있었다. 엘리야도 엘리사도 사도바울도 있었다. 그야말로 성경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천국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사실 자체가 놀라움이었다.

큰 은혜를 주셨던 그 여자 강사님은 매주 오기 시작했다. 그 1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내게 또 다른 차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말씀에 담긴 놀라운 비밀들과 이 세상에 이루실 계획과 뜻을 알게 해주셨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비밀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경우가 있었다. “저, 저, 저 이런 고민이, 고민이 있지요?” 그때 사람들이 다시 물었다. “방금 너 뭐라고 했니?” “아, 아, 아닙니다.”

그때부터 나는 내 말이 분명치 않음을 감사했다. 그때 만일 내 말이 분명해서 사람들에게 본 것, 들은 것, 알게 된 것을 다 말해버렸다면 지금과 같은 성경적 신유사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후 영안이 열려 신기하게 병이 보이고 그 사람의 고민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 저 사람은 암이 있네. 저 사람은 간질환자네. 저 사람은 뇌종양이네.’ 

덜컥 겁이 났다. ‘성경 말씀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런 초자연적인 일이 잘못된 쪽으로 흐를 수 있다.’ 
말씀을 봐야겠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동안 기도로 훈련해주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훈련을 시키셨다.

온종일 말씀만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도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말씀 보는 게 제일 어려웠다. 
그러나 말씀이 내 속에 거하니 내가 죄인임을 더 알게 됐다. 
기도할 때의 느낌과는 또 다른 뭔가가 있었다.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았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처음 인도한 부흥회서 핏덩이 토하고 병 나은 목사님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5>

입력 : 2019-08-01 00:08
서울 대망교회 성도들이 지난 26일 서울 송파구 교회에서 열린 금요치유집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다. 대망교회 제공

영안(靈眼)이 열려 사람의 병이 보이고 고민이 보이면서 괴로움도 따라왔다. 잘못하면 사람을 정죄할 것 같았다. 감사하면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자아가 죽으려면 금식해야 한다는 말씀이 생각나 금식을 해보기로 했다.

당시 나는 밥만 안 먹으면 금식인 줄 알았다. 물도 먹고 국도 먹었다. 이틀이 지났을 때 대구 주암산기도원장님이 물으셨다. “너, 밥은 왜 안 먹니?” “저, 저, 금, 금식해요.”

원장님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셨다. 
“금식은 밥 안 먹고, 국 안 먹고 물만 먹고 공기만 먹고 하는 거야.” 

머리가 아팠다. 
‘그럼 다 굶고 못 먹고 기도해야 한단 말이야?’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너, 3년 했잖아?” 

하나님께서 3년 동안 산에서 먹지 못하고 기도한 시간을 기억하고 계신 것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부터 물만 먹고 장기금식에 들어갔다.

당시 기도원 부흥회에 오신 목사님 한 분이 나를 유심히 보고 계셨다. 따로 알아보신 모양이었다. 멀리서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멀리서 봤는데 
그의 몸에 암 덩어리가 퍼져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간, 간, 간암인가 봐요.” 
목사님은 놀라지도 않은 채 빙그레 웃으시며 “금식 마친 다음 나 한 번 따라와 줄래”라고 물으셨다. 
나는 하나님 뜻이라면 가겠노라고 흔쾌히 말해 버렸다.

1980년 초 부흥회 강사로 초청받아 간 교회는 대구 황금동에 있었다. 
‘황금동? 황금이 많은 곳인가 보다.’ 
그러기에 그곳 이름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동네는 황금동이었지만 교회는 가난했다. 
개척한 지 얼마 안 되는, 이름만 교회였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지하 창고에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하나님이 계셨다. 
목사님은 큰 교회를 담임하시다가 
교회당을 건축하며 물질과 건강을 다 쏟아붓고는 
양들을 위해 병든 몸을 이끌고 
조용히 사임하고 나온 진짜 목자다운 목자셨다. 
목사님은 자신의 병든 몸을 
하나님께서 고쳐 써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하셨다.

“불길 같은 주 성령….” 이 찬송으로부터 부흥회가 시작됐다. 
그런데 부흥회 첫날 기적이 일어났다. 
목사님의 병이 나은 것이다. 
핏덩이를 토해내더니만 힘을 얻으셨다. 
찬송 인도를 하시는데 점점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굉장했다. 

‘바로 저거야. 저게 찬양이야!’ 

어린 마음에도 천국에서 들었던 찬양이 생각났다. 
나도 뜨겁게 찬양을 불렀다. 
그것이 내 인생의 첫 번째 부흥회였다.

이틀째 되는 날부터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무리 지어 오기 시작했다. 
한 분이 내게 말을 건넸다. 
근처에서 기도원을 운영하는데 
자기 기도원에 와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고 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목사님께서 좋은 생각이라며 적극적으로 권유하셨다.

그 기도원도 조그마한 상가 지하에 있었다. 
귀신 들린 사람이 왔다. 
놀랍게도 오자마자 정상으로 변해버렸다. 
그런 일을 처음 경험하는 내게는 놀랍고 신나는 일이었다. 
자신감이 붙었다. 

귀신들도 떠나가고 
거품을 토하며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신기했다.

기도원 집회가 계속되던 어느 날, 지나가던 미군들이 기도원에 들어왔다. 
기도원이 있는 건물 슈퍼에서 물건을 사려고 차를 세웠는데 
찬송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고 했다. 
마치 내가 미국말로 인도라도 하는 양 
알아듣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있었다. 
집회가 끝나자 미군 지휘관이 
미국에서 자신의 형이 목회하고 있다며 
나에게 미국 집회를 요청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계심을 느꼈다고 했다.

치유 받았던 목사님이 옆에 계시다가 나를 설득했다. 
말도 안 통했는데 목사님이 통역을 다 해주셨다. 
한·미통합부대 군목으로 몇 년 계셨다고 했다. 
나도 모르는 새 일이 척척 진행됐다. 

잘 알지도 못하는 미국에 선뜻 가겠다고 대답한 것은 
내 다리를 치료해 주신 원장님이 
미국에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찾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다. 
미국은 갈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미국에 가면 의사 장로님을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미국 땅이 그렇게 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980년 겨울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로 순회연설을 할 때였다. 
미국 교회에서 부흥회가 시작됐다. 
그러나 처음부터 어려움에 봉착했다. 
통역하시는 분이 뇌병변 장애가 있는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지금도 대화할 때 처음에는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 일하러 왔어요. 
아버지가 보내셨잖아요. 
모세에게 아론을 세우신 하나님, 
제게도 아론과 같은, 도울 자를 확실하게 붙여주시든지, 
예배 때만이라도 제 말이 통하게 해주세요.”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호소하며 기도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선포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통회자복이 일어났다. 
병자가 나았다. 
성령의 불길이 집회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말이 멈추고 말았다. 
“어, 어떻게 해요? 하려고 해도 안 나와요.” 
발을 동동거리며 하나님을 불렀다. 
“아버지, 도와주셔야 해요.” 

분위기상 흥분됐던 마음이 가라앉고 어느새 착잡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통역자가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부흥회는 나날이 뜨거워졌다. 
통역하던 분도 성령으로 하나 됐고 내 말을 잘 알아들으셨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