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부흥기에는 강력한 신유의 은사가 나타났다.
신유사역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병든 자가 회복되면서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심을 믿게 됐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 오
늘날 교회의 사역도 이와 다르지 않다.
홍예숙 서울 대망교회 사모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의 3대 사역 중 하나인
신유사역의 성경적 의미를 살펴본다.
나는 1968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측 함양중앙교회 장로였다. 부모님은 충성스럽게 신앙생활을 하셨다. 그러나 당시 그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집에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죄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에 ‘없는 딸’이었다. 장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1968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측 함양중앙교회 장로였다. 부모님은 충성스럽게 신앙생활을 하셨다. 그러나 당시 그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집에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죄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에 ‘없는 딸’이었다. 장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장애인 딸이 있다는 것을 굳이 밝히지 않으셨다. 교회에 덕이 되지 않을까 봐 숨기신 것이다. 새로 부임한 목사님조차 내가 홍 장로 딸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였다.
콩쥐팥쥐 동화를 봐도 내 모습이 생각났고 우렁각시를 봐도 내 모습이 떠올랐다. 교회에서도 할 일이 없었다. “너는 아프니까 가만히 있어.” 다들 아프다고 나를 배려했지만, 나는 너무나 찬양하고 싶었고 봉사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을 때 병원에 가셨다고 한다. 의사는 임신이 아니라며 약을 줬다. 그 후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병원에서는 낙태하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출산을 결심하셨다.
콩쥐팥쥐 동화를 봐도 내 모습이 생각났고 우렁각시를 봐도 내 모습이 떠올랐다. 교회에서도 할 일이 없었다. “너는 아프니까 가만히 있어.” 다들 아프다고 나를 배려했지만, 나는 너무나 찬양하고 싶었고 봉사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을 때 병원에 가셨다고 한다. 의사는 임신이 아니라며 약을 줬다. 그 후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병원에서는 낙태하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출산을 결심하셨다.
낳아보니 너무나 작았다. 아기는 약에 찌들어 노랗게 된 상태로 태어났다. 병원에서는 황달을 없애야 한다며 또 약을 줬다. 약에 찌든 아기에게 또 약을 먹인 것이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그때 진급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교회를 나갔다 안 나갔다 하실 때였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그때 진급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교회를 나갔다 안 나갔다 하실 때였다.
그런데 내가 태어난 후 크게 회개하고 열심히 교회를 다니게 됐다. 그래서 내 이름도 예숙이라 지었다. 내가 아버지가 예수님과 가까워진 계기가 됐으니 나를 보면 예수님 생각이 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진급시험 공부를 하면서 나를 곁에 두고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였다. 그런데 처방해준 양보다 더 많이 먹였다. 더 많이 먹이면 더 빨리 나을 거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진급시험 공부를 하면서 나를 곁에 두고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였다. 그런데 처방해준 양보다 더 많이 먹였다. 더 많이 먹이면 더 빨리 나을 거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내겐 치명적이었다. 약에 취해 혀가 안으로 말려들었고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했다. 그래서 옆집 아주머니가 어머니 몰래 헛간에 버렸다. 아기가 바로 옆에서 죽으면 어머니 눈에 밟힐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라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며칠 뒤 화장실에 가던 어머니가 헛간에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며칠 동안 약을 먹지 않아서인지 울음이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살라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며칠 뒤 화장실에 가던 어머니가 헛간에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며칠 동안 약을 먹지 않아서인지 울음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너무 독한 약을 많이 먹어서였을까. 젖을 먹이던 중 아기의 목덜미 부분에 종기가 났다. 고약을 붙였더니 2~3일 뒤 손바닥 길이만 한 힘줄이 빠져 나왔다. 이후 목을 가눌 수 없게 됐고 목소리도 작아졌다. 하지만 병원에 데려갈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키우셨다.
아이는 자꾸 옆으로 쓰러졌다. 지금 같으면 병원에라도 가 보았을 텐데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일단 살 때까지만 데리고 있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아이는 자꾸 옆으로 쓰러졌다. 지금 같으면 병원에라도 가 보았을 텐데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일단 살 때까지만 데리고 있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아홉 살이 돼서야 함양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가방도 제대로 메지 못했다. 무릎이 깨져 운동화에 피가 흥건히 고이기 일쑤였다. 그래도 열심히 다녔다.
교회보다 학교가 좋았다. 학교에서는 할 일도 있었고 열심히 공부한 만큼 인정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시작됐다. 친구들은 아픈 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을 시기했고,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선생님의 배려를 따돌림으로 대했다. 그러자 공부도 싫고 교회도 싫고 세상도 싫어졌다. ‘이렇게 살아서 뭘 할까. 부모님한테도 없으면 좋을 존재고, 우리 형제자매한테도 그렇고.’
당시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던 것 같다. 하지만 열심히 찾은 하나님은 교회에도 안 계셨고 학교에도 안 계셨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가족의 하나님이셨을 뿐이다. 부모님과 형제들의 하나님은 계신 것 같은데 내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다.
아홉 살, 철들기 시작하면서 반항기도 함께 왔다. 하나님께 원망이 생겼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는 긴 머리카락을 내가 감당하기 힘들다고 여기셨는지 짧은 커트 머리로 바꿨다. 순식간에 그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와르르 흘러내렸다. 한순간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 나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무서운 세상처럼 순식간에 바뀐 머리 모양은 내 마음을 잔뜩 조여왔다. 머리카락을 도로 붙여달라고 떼를 쓰면서 이틀이나 울었다. 정말 이틀을 꼬박 울었다.
어머니는 나를 달래 보기도, 야단을 치기도 하셨다. 그럴수록 나 자신의 아집과 고집은 더 강해졌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회초리를 드셨는데, 회초리가 세 개나 부러졌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을 뿐이다. 교회도 가지 않았다. 학교 가는 것도 소홀히 했다. 오로지 터져 나오는 건 내 머리 붙여 달라는 한마디였다. 나 자신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약력=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 소속 서울 대망교회 사모, 저서 ‘나는 진실로 행복한 사람’
그러나 학교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시작됐다. 친구들은 아픈 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을 시기했고,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선생님의 배려를 따돌림으로 대했다. 그러자 공부도 싫고 교회도 싫고 세상도 싫어졌다. ‘이렇게 살아서 뭘 할까. 부모님한테도 없으면 좋을 존재고, 우리 형제자매한테도 그렇고.’
당시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던 것 같다. 하지만 열심히 찾은 하나님은 교회에도 안 계셨고 학교에도 안 계셨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가족의 하나님이셨을 뿐이다. 부모님과 형제들의 하나님은 계신 것 같은데 내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다.
아홉 살, 철들기 시작하면서 반항기도 함께 왔다. 하나님께 원망이 생겼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는 긴 머리카락을 내가 감당하기 힘들다고 여기셨는지 짧은 커트 머리로 바꿨다. 순식간에 그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와르르 흘러내렸다. 한순간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 나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무서운 세상처럼 순식간에 바뀐 머리 모양은 내 마음을 잔뜩 조여왔다. 머리카락을 도로 붙여달라고 떼를 쓰면서 이틀이나 울었다. 정말 이틀을 꼬박 울었다.
어머니는 나를 달래 보기도, 야단을 치기도 하셨다. 그럴수록 나 자신의 아집과 고집은 더 강해졌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회초리를 드셨는데, 회초리가 세 개나 부러졌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을 뿐이다. 교회도 가지 않았다. 학교 가는 것도 소홀히 했다. 오로지 터져 나오는 건 내 머리 붙여 달라는 한마디였다. 나 자신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약력=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 소속 서울 대망교회 사모, 저서 ‘나는 진실로 행복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