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주재 여 선교사들은 선교 봉사를 통해 절제된 욕망과 광범위한 성취감을 결합시킬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얻게 됐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 범위를 발견했으며, 동시에 개인적 봉사의 지고한 여성적 이상을 체현했다."

강선미(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연구원)은 지난 2월 8일 열린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211회 연구모임에서 '조선 파견 여 선교사의 역사적 성격' 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그 내용을 요약해 소개한다.

I. 여 선교사의 역사적 배경

1. 미국 정부와 해외선교사업
조선에 해외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다.

이 당시 선교사들은 전도 위주의 선교 전략에서 벗어나 교육, 의료, 복지 활동 등을 포괄하는 사회적 복음을 중시하고 있었고, 미 정부 또한 중국이나 일본을 정치적 식민지로 만드는데 드는 비용을 감수하기보다 차라리 선교 조직을 지원해 미국 문화의 영향력을 높이는 부분적 제국주의화 전략을 선택한 상태였다. 즉, 이 당시 선교사들의 선교 전략과 정부의 이해 관계는 맞아떨어졌다.

이런 연유로, 조선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교사나 의사로의 간접적인 선교 활동만을 허용하는 조건 하에서도 입국했으며, 미 선교사들은 신앙 뿐 아니라 서구 문물을 한국에 도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정책 및 미 정부의 이해 관계로 인해 선교사들이 발할 수 있는 정치 윤리 발언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선교사들이 수호코자 했던 것은 조선이라는 선교지와 선교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그들의 합법직 지위였다.

미 선교사들에게 조선 선교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선교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교사들의 선교 의지가 미국인들의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좋은 증거였다. 특히 정치로부터 분리돼 있었던 여 선교사들은 고도의 민족적 이타심을 상징했다.

2. 여선교사의 등장 배경
개신교 선교 사업에서 조선 여성을 위한 여성 교육이 처음부터 남성들을 위한 선교 사업과 동시에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괄목할 만 하다.

전문직 여 선교사라는 직분은, 성별 문화 때문에 여성들이 교회에 참석해 남 선교사가 전하는 설교를 들을 수 없는 아시아 지역에서의 선교 사업 과정에서 '여성의 일' 영역의 필요성이 대두되며 생겨났다. 또 선교사들이 기독교가 아시아에 심겨지려면 기독교 가정이 생겨나야 한다고 믿어, 교인의 아내와 어머니인 여성들에의 복음 전파를 시급하게 생각했던 것도 이의 또 다른 이유다.

물론 전문직 여 선교사라는 직분은 미 해외 선교 초기부터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전에는 주부 선교사들만이 있었다. '남성을 위해 창조된 존재'인 여성의 도움 없이 남성들은 한 곳에 정착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미 선교부는 남 선교사들이 같은 신념을 지닌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권하고 있었다.

문제는 주부 선교사들이 '여성의 일'을 전담하기에는 선교사 가정의 아내와 어머니로서 그들이 맡은 책임이 과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가정 일에 대한 부담 없이 '여성의 일'을 전담할 수 있는 독신 전문직 여 선교사들을 양산하는 배경이 됐다.

또 전문직 여 선교사 등장 배경에는 미 여성들의 남북 전쟁 경험 및 여성 고등교육 경험이 깔려 있다. 미 남북 전쟁 후 수많은 여선교사 협회들이 조직됐는데, 이 과정에서 초기 여자대학 졸업생들의 역량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여선교회는 여성 일꾼들에 대한 선교지의 요구를 충당하기 위해 결성되고 있었으며, 남 선교사 중심의 선교 본부는 여선교부를 제한, 견제하는 세력으로 작용했다. 이에 여선교부는 일반 헌금외의 특별 헌금인 '2차 헌금'으로만 재정을 충당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그러나 1880년대 말이 되면 미국 교회 남성 지도자들은 여성 사업을 무시, 배제하는 대신 그것을 통합하되 성별 준리 구조를 통해 여 선교사들을 통제하는 쪽으로 사업 방향을 바꿨다. 이는 여 선교사의 다수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된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정책 변화였다. 이 후 미 해외선교사업은 미 프로테스탄티즘과 여성 문화를 대표하게 됐다.

3. 조선에 파송된 여 선교사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초기부터 여 선교사들은 전체 선교사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민들의 경계를 늦추는 동시에, 미국인들이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대한 문화 제국주의적 편견을 벗도록 한 한국 문화 지킴이(cultural gatekeeper) 기능을 수행했다.

1885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에 입국한 북미 출신 남녀 선교사에 대한 자료를 조사했다.

여성 선교사들은 두 집단으로 분류돼, 한 집단은 '아내(Wives)'나 '보조 선교사(Assistant Missionary)'로, 다른 집단은 '단신 여성(Single Woman)'과 '여성 해외 선교사(Women Foreign Missionary)'로 표기되고 있는데, 이를 통합해 '아내'와 '보조 선교사'는 '주부 선교사'로, '단신 여성'과 '여성 해외 선교사'는 '전문직 여선교사'로 부르는 것이 혼동을 없앨 것으로 보인다.

주부 선교사로 확인할 수 있었던 여성의 수는 남 선교사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는데, 남 선교사들의 결혼을 권장했던 당시 선교사 정책을 고려해볼 때 주부 선교사들의 자료가 다수 누락됐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전체 북미 출신 선교사 집단의 32%가 전문직 여 선교사들이었는데, 취업 규정상 이들은 모두가 미혼 혹은 사별한 독신 여성들이었다. 당시 미국은 역사의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이 독신이었는데(25세 이상 여성 중 독신이 14%), 그럼에도 조선 주재 여 선교사들의 공동체 내 독신여성의 밀도의 이의 4.5배 정도로 높았다.

여 선교사들의 77%정도가 조선에서 10년 이상 봉사했으며, 30년 이상 봉사한 이들도 약 28%에 이른다. 해방 후 재입국했던 이들은 총 733명 중 70명에 이를 정도다.

이러한 여 선교사들의 긴 체류 기간은 이들이 민족적 차이를 뛰어넘어 조선 여성들과 협력하는 동역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척도다.

조선에서의 오랜 체류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관점 전환을 가능케 했으며, 때때로 조선 여성들의 투쟁에 여성주의적 동지가 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해줬다.

II. 여 선교사직의 사회, 문화적 동인

1. 여 선교사들의 종교적, 계층적 특성
가. 미 해외선교운동의 진원지는 뉴잉글랜드였다. 또 20세기 들어 중국에 왔던 선교 봉사 지원자들의 절반 이상이 미 중서부지역 출신이기도 햇다. 조선 주재 여 선교사들은 서부로 향하던 이민자들의 자녀로서 출신 지역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게 된 첫 세대였다고 볼 수 있다.

나. 선교 지원자들의 가족은 대부분 가난하지만 착실하고 개척 야망을 가졌던 기독교인들이었다. 개척 시대를 막 지나 농촌에 정착한 집단, 혹은 도시의 임노동자가 아닌 구중산층 집단에 속한 지원자들은 개신교 집단에 속하는 미국에서 출생한 대학 출신의 여성들이었다.

다. 당시 미 서부 농촌 출신 여성들은 삶을 통해 결단과 용기, 해방감을 맛보았으며, 그들의 이러한 성품 구성은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선교지 탐험에 동참하게끔 했다.

라. 이들은 도시의 사회 사업 종사자들과 달리 가계에 대해 두드러진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 봉급을 쪼개 고향의 부모들에게 송금하기도 했다.

마. 내한 당시 연령은 전문직 여 선교사들이 30.0세로 28.3세인 주부 선교사들보다 높아, 전문직 여선교사들이 주부 선교사들에 비해 조선 내한 전 이미 다양한 삶의 경험을 가졌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바. 선교 지원자들은 조선 입국 이전에 제도 교회 뿐 아니라 학교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자서전과 전기에는 주일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친 경험, 기독교 청년 운동에 대한 언급이 많다.

사. 이들은 환상을 보는 등의 극적인 회심을 경험했고, 선교사로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엇다.

아. 선교 사역은 인간적인 기쁨을 주기도 했다. 여 선교사들은 미 교회 내에서 영웅적인 인물로 여겨지며,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았다.

2. 여 선교사의 가족 배경
전문직 여 선교사들의 집안에는 이미 선교 봉사와 같은 선택을 한 전례들이 있었다.

당시 여 선교사는 아들과 같은 책임감과 성취욕을 보여줌으로써 아버지의 기대를, 여성적 헌신과 봉사를 구현함으로써 어머니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3. 직업으로서의 여 선교사
내한 전 가졌던 직업을 파악할 수 있었던 여 선교사들 32명의 직업을 분류해보면, 이들은 모두 전문직 여 선교사들로, 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19명으로 근 60%를 차지했으며, 선교사로 일했던 여성들이 9명로 28.1%를 차지했다. 그 밖에 의료 분야 및 사회사업 분야에서 일했던 여성들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선교사 지원 이전부터 경제적, 가족적 필요와 밀접히 관련돼 있었다. 순탄히 공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여성은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 사범 학교를 다녔으
며, 그외 상업대학, 인문 대학을 나온 여성들도 있었다. 집안 사정으로 공부를 그만두고 가정을 돌보기도 했으며, 이런 기간 동안 이들이 한 일의 종류는 매우 많다. 그리고 감리교 여 선교사들의 1/5정도가 일종의 '사업'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많은 직업 경험은 시골 학교 교사로, 전체의 약 70% 정도가 이에 해당된다.

조선에서 이들이 사역했던 기관들은 교육기관이 45.4%, 사경회 및 성경 학교가 32.8%, 의료 기관이 19.4%, 복지관이 7% 등이었다.

미국에서도 유사한 일을 했던 이들이 해외로 나와 또 다시 비슷한 분야에서 선교 봉사를 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전문직 여 선교사라는 직분이 가족의 다양한 기대를 만족시킬 뿐 아니라 직업과 전문성에 대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둘째, 이들이 선교 봉사를 지원한 것은 이들의 신앙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높은 지위나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선교를 지원했다.

셋째, 전문직 여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중시하는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미국 사회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19세기 말 미국의 여성들에게 주부에 견줄만한 직업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넷째, 전문직 여 선교사직은 결혼에 대한 압력에서 벗어나 외국에서 생계 걱정 없이 지속할 수 있는 평생직이었다.

다섯째, 선교 사역이 하나님의 명령한 바를 따르는 일로서 개인적 야망보다는 자기 부정을 요한다는 점도 하나의 매력이었다.

4. 선교사가 된 직접적 동기
-조선에서의 유인 요인들
그들은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삶 혹은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원하는 소망과 더불어 이런 자신의 소망조차 부끄러워하는 자기 부정의 자세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삶의 목적에 대한 뚜렷한 욕망을 가지고 있음에도, 거듭된 확신이나 자신의 헌신을 인정해 줄 집단적 열광의 경험을 필요로 했다.

-아내를 필요로 하는 남 선교사들
여성들을 조선으로 유인했던 가장 활발한 사회적 요인은 아내를 필요로 했던 독신 남 선교사들이었다. 남편과 함께 중국에 파견됐던 미 선교회 부인 선교사들의 2/3가 선교지
로 떠나던 바로 그 해에 결혼했다. 주부 선교사들 중 어떤 이들에게 결혼은 선교를 나가려고 했던 원래 계획에 대한 타협이었으며, 확신이 부족하던 또 다른 이들에게는 신의 섭리였다. 그러나 선교사로 파송되기 오래 전에 결혼한 여성들 중 일부는 선교에 대한 아무런 소명 의식 없이 오직 남편 때문에 선교지에 가기도 했다.

-선교사들에 의한 충원: 학생자원봉사운동의 영향
아마도 젊은 남녀가 선교 봉사에 뛰어들도록 유인했던 가장 큰 요인은 복음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의 학생자원 봉사운동이었다. 대학 교육을 받은 초기 여성들은 남북 전쟁에서 여성들이 보였던 모성적 역할을 본받아 국가 및 세게에 대한 특수한 책임의식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인식했다.

III. 성별화된 선교 사명과 역할

1. 주부 선교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 여성들에게 선교사와의 결혼은 낭만적인 결정일뿐 아니라 직업적이며 종교적인 결정이었다. 선교사훈련학교나 학생자원운동에서 남편을 만난 여성들은 이미 선교봉사를 결심한 상태였으며, 결혼은 이러한 그들의 결심을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휼륭한 기독교 가정을 이루는 일 자체가 중요한 선교 사업의 일부라고 본 선교사 공동체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주부 선교사들의 선교 영역과 일은 기존의 공사 구분을 무너뜨리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기에 끊임없는 논쟁 거리가 됐다.

주부 선교사들은 전도 사업에 참여해야 하는 것은 물론 모범적 기독교 가정 및 가족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주부선교사의 임신, 출산, 양육과 가사일
주부 선교사들과 전문직 여 선교사들 사이의 경험의 차이를 가져온 주요한 요인 중 하나는 결혼으로 인한 가사 일과 임신,출산, 육아의 부담이었다.

이로 인해 주부 선교사들이 독신 여 선교사들만큼 일의 보람을 느끼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들은 만일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남편과 자녀들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신앙으로, 생명의 출생과 죽음을 신에게 맡기고 살았다.

그러나 이들을 가장 괴롭힌 문제는 아이들의 질병과 죽음이었을 것이다.

또 그 당시 일반적인 미국 가정과 다르게 해외 선교사 가정에서만 남 선교사가 아내를 도와 가사일을 하는 새로운 생활 양식이 나타나기도 했다.

-주부 선교사의 이중 역할
임신, 출산, 육아 외에 당시 주부 선교사들이 맡았던 역할은 선교회의 전도 사업에 참여하는 종교적 역할과 기독교적 가족으로서의 모범적인 선교사 가정을 유지하는 가정적 역할이었다.

먼저 종교적 책임에서 주부 선교사들은 남성이 접근할 수 없었던 조선 여성들을 방문하고 여학교를 운영했다. 그들은 전도자, 교육자, 의료 선교사, 사회 정착 사업가, 가정학 교사, 음악 교사, 유치원 교사 등 매우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자신의 욕구보다는 자신이 속한 교회와 선교회의 필요에 따라 움직였다.

주부 선교사들은 남 선교사 중심의 선교회 본부의 연봉과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분리된 여 선교회의 통제와 행정지도를 받는 분야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 전문적 여 선교사
조선 주재 선교사 공동체 내에서 전문직 여성들의 영역은 여성의 일에 속하는 것으로 제한되어졌다.

역사가들은 선교직이 여성들이 남성들과 상대적인 평등 속에서 여성으로서의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분야였다고 평가하나, 실질적으로 여 선교사들은 선거권, 임금, 결혼 등의 권리에서 성적 불평등을 체험했다.

-선거권, 임금, 결혼의 권리에서의 불평등
교단마다 여성들의 선거권에 대해 다른 정책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성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여성들이 목사 안수를 받게 된 1931년 이전에는 자문 자격을 제외하고는 여성들이 선교회 총회의 의결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또 1898년 평양 널다리골에서 시작된 장로교회의 여선교회도 해방 후까지 여성들에게는 선서권,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조선 주재 여 선교사들은 여성들의 일에 관한 문제에 한해 참여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그나마 중요한 정책위원회의 여성 참여 자격은 여성의 일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들에게만 부여됐다.

그러나 여성들의 불평등한 지위를 규정한 것은 각 교단의 법규 뿐만이 아니었다. 전문직 여 선교사들의 임금과 봉사 기간, 선발 조건을 규정한 것은 바로 여선교회였다. 여 선교회는 여성들의 평등 증진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해 결성된 단체가 아니라, 오히려 공적 영역에서 조직된 '세계의 어머니'를 대표하는 기구였다.

여 선교사들은 보통 단순한 생계 유지 수준의 임금을 받았는데, 의미 있는 임금 수준 비교는 어렵지만 전문직 여 선교사들의 생활 수준은 선교회 본부 소속 선교사들의 생활 수준보다 떨어졌던 것 같다.

선교회 본부와 여 선교회 모두 봉사 시간에 대해 엄격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감리교 여선교회에서는 최소한 5년의 봉사 기간을 규정하고 있었다. 전문직 여 선교사가 되기 위한 조건 중 가장 논쟁적인 것은 그들이 봉사 기간 중 독신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선교회의 유언무언의 기대였다.

이렇듯 여 선교회의 성공은 기독교 여성의 여성적인 자기 희생을 제도적으로 전유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전문직 여성들에 대한 저임금과 계약 위반시(예를 들어, 결혼시)의 임금 상환 요구는 여 선교회가 부양 가족들까지 지원해야 했던 선교회 본부보다 훨씬 많은 비율의 지원금을 사업비로 돌릴 수 있었던 이유였다.

-여성주의 의식의 은폐와 분산
이러한 여 선교회 본부의 모금 운동과 사업 수행 능력은 선교회 본부들로서는 매우 매력적이어서, '여성의 일' 영역이 도입된 이후에도 각 선교회 본부는 여성의 일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재통합코자 계속적으로 노력했다.

미국 선교회 본부가 여 선교회 활동에 대해 이와 같이 큰 관심을 갖게 된 동기로는, 첫째, 여선교회의 노력이 여성참정권운동과 여권운동을 위장한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둘째, 이들의 운동이 미국 내 여성주의 에너지를 분산시켜 보다 큰 혼란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들 수 있다.

미국의 여성사가들에 따르면, 선교지의 선교사들보다는 미국 여선교회의 행정가와 살무자들에게서 의식적인 여성주의적 성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여권주의자들은 아니었지만, 종종 미국 교계의 남성 지도자들을 직접 대면할 시 자신들의 조직이 갖는 경제적, 행정적 자율성을 충성스럽게 옹호했다.

조선 주재 여 선교사들이 여성주의적 에너지를 조선의 여성들을 위한 자기 부정적 봉사에 쏟고 있을때, 이러한 에너지는 다시 돌아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했던 미국 내 여선교회 이사회로 흘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