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성서공회 고문서실에서 발굴한 평양 장대현교회와 교우들 사진으로 국내엔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청중들을 향해 서있는 사람이 그레이엄 리와 함께 장대현교회를 공동 담임한 마포삼열 목사이다. 평양대부흥운동 전후로 촬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장대현교회가 위치한 장대재 언덕의 현재 모습으로 필자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촬영했다.
"만약 교회가 한국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기회를 선용한다면 한국은 근대에 기독교화된 첫 민족이 될 것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을 직접 목도하고 돌아간 존 모트가 한 고백이다. 평양선교의 기적은 하나님의 작품이지만 그 무대의 주역은 그레이엄 리(Graham Lee·사진)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처럼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평양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선교사도 드물다.
새뮤얼 마펫과 함께 평양선교부를 개설하고 장대현교회를 개척, 담임했으며 평양 전역에 많은 교회를 분립했고 평양선교의 기적을 창출했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도사경회 때 평양대부흥을 견인한 사람도 그였다. 과장인지 몰라도 그가 없었다면 평양선교의 기적과 평양대부흥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다른 모습으로 진행됐을지 모른다.
“내가 가장 선망하는 한 사람”
평양대부흥이 한창 진행되던 1907년 한국을 방문해 여러 선교지를 둘러본 미국의 잡지 ‘아웃룩’의 기자 윌리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필자가 미국을 떠나온 후 만났던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선망하는 한 사람, 그의 여러 면이 어떤 다른 사람보다 더 탐날 가치가 있는 듯한 그 사람은 평양의 그레이엄 리다. …수백명이 그를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라 부른다. 그는 교회를 세우고 민족을 세우는 일을 힘차게 돕고 있는 중이다.” 다른 글에서는 이렇게 썼다. “한국 평양의 그레이엄 리가 신었던 신발보다 더 닳아빠진 신발을 신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레이엄 리는 성령이 이끄는 사역을 사모했고 기도했고 실천했다. 1902년 그는 학생선교자원운동 국제대회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선교사역의 시작 때부터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령 하나님을 가장 적절한 자리에 위치시켜야 한다.…성령 하나님이 전 사역을 지배하게 하셔야 한다.” 그레이엄 리가 얼마나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을 최우선 자리에 올려놓고 사역했는가를 보여준다.
평양 선교의 기적을 이끌어
그레이엄 리는 1861년 미국 일리노이 록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레이크 퍼리스트 아카데미, 프린스턴 대학,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무어, 밀러, 스왈른 부부가 입국 동기다. 그레이엄 리는 1894년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 아내 웹(Blanche Webb)과 함께 돌아왔다.
미국의 모교회는 그들을 파송하면서 평양에 성령의 부으심이 임하길 기도했다. “모든 교회는 이 강퍅하고 유연성이 없는 토양(평양)에 이들 선교사가 선한 씨를 심을 수 있게 성령의 부으심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레이엄 리와 그의 동료, 그리고 모교회는 성령 하나님을 최우선했다. 게다가 그레이엄 리는 기도의 능력을 믿었다. 그 결과 성령이 이끄는 선교지 평양은 해마다 기적을 창출했다.
1898년 평양선교회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평양 이전의 선교 기록은 우리가 아는 대로 놀랍게 진행됐다. 그러나 지난해의 역사는 실질적 결과에 있어 이전의 어떤 해보다 능가했다.” 그로부터 5년 후 1903년 그레이엄 리는 이렇게 보고했다. “어제 우리는 평양에서 성찬식을 거행했다.…교회당은 사람들로 완전히 꽉 찼다. 1500명은 참석한 것 같다. 이 중 580명은 입교인(세례교인)이다.” 평양선교는 한국선교의 기적을 견인했고 장대현교회는 설립 10년 만에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다.
평양대부흥운동 놀라운 기도응답
그레이엄 리와 평양 주재 선교사들은 성령의 부으심을 사모하며 기도했다. 그런 가운데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열린 하디의 평양선교사 사경회와 9월 하워드 애그뉴 존스턴의 서울 사경회는 그들 모두에게 ‘벧엘’이었다. 평양 선교사들은 교파와 연령을 초월해 매일 기도회를 가졌다. 평양 교인들도 “성령의 부으심을 위해 매일 1시간씩 기도하기로 약속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기도회는 놀랍게 응답됐다. 1907년 1월 2∼15일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열렸다. 그러던 14일 저녁집회 때 간단한 설교가 끝난 후 그레이엄 리는 “기도하기를 원하면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이어 기도의 함성이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900명을 돌려보낸 후 남은 600명은 새벽 2시까지 자신들의 죄를 통회 자복하며 기도했다. 성령의 부으심이 문자적으로 임했다.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였다. 이튿날 성령의 역사는 더 강했다.
장대현교회에서 발흥한 평양대부흥은 평양 전역과 전국의 주요 도시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됐다. 부흥이 임하는 곳마다 동일한 역사가 나타났다.
1907년 2월 평양남산현교회에서도 강력한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는 것처럼 울부짖었다. 성령께서 평양에 모인 부인사경회 때 임하셨고, 평양 숭실대 개강수련회 때도 임하셨다. “하나님의 영이 너무도 강력하게 학생들을 감동시켜서 학교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심지어 중간고사 시간에도 학생들이 모여 기도했다. “그곳에는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지도자(the Leader)가 계셨으며, 그의 임재는 무시무시했다.” 거의 모든 학생이 성령의 권능을 체험했고, 전체 학생의 10분의 9가 성령으로 거듭났다.
중국에서 온 조너선 고포스와 두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놀라운 부흥을 목도하고 돌아갔다. 그들은 중국에서도 성령의 부으심이 있기를 간구했고, 그 기도는 곧 응답됐다. 이듬해 회개를 동반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중국에도 임했다. 소리 높여 절규하고 눈물을 흘리며 교만과 시기와 미움을 깊이 회개했다.
평양대부흥의 놀라운 결실
사람들은 깊이 감춰진 내면의 죄악들을 고백했고, 고백 후에는 형언할 수 없는 죄 용서의 기쁨이 찾아왔다. 부흥이 임한 후 한국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로 거듭났고, 수많은 불신 영혼들이 주께 돌아왔다. 미국의 한 저널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한국은 지금 막 수세기만에 찾아오는 바로 그런 기회를 맞았다. 당신은 미국의 교회가 이 사실을 깨닫도록 무언가를 말하거나 무언가를 할 수 없겠는가. 이 상황은 대단히 예외적이고 놀랄만하다. 온 나라가 추수할 만큼 무르익었다. 한국은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다.”
1904년 9000명이던 교세는 1907년 12만명으로 급증했고 개인의 각성이 사회변혁으로 이어졌다. 기생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 평양선교를 거룩한 사명으로 여긴 성령의 사람, 그레이엄 리가 1916년 12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이렇게 담담히 그의 부고를 알렸다.
“한국교회의 위대한 선교사 중 한 명이었던 그레이엄 리가 1916년 12월 2일 캘리포니아 길로이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엄숙하게 언급해야 할 것 같다.…그가 1892년 한국에 도착했을 때 평양과 황해도에 각각 한 교회만 있었다. 이후 그는 이 두 지방에서 자신의 위대한 선교 사역을 수행했다.”
글·사진=박용규 교수(총신대·역사신학)
새뮤얼 마펫과 함께 평양선교부를 개설하고 장대현교회를 개척, 담임했으며 평양 전역에 많은 교회를 분립했고 평양선교의 기적을 창출했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도사경회 때 평양대부흥을 견인한 사람도 그였다. 과장인지 몰라도 그가 없었다면 평양선교의 기적과 평양대부흥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다른 모습으로 진행됐을지 모른다.
“내가 가장 선망하는 한 사람”
평양대부흥이 한창 진행되던 1907년 한국을 방문해 여러 선교지를 둘러본 미국의 잡지 ‘아웃룩’의 기자 윌리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필자가 미국을 떠나온 후 만났던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선망하는 한 사람, 그의 여러 면이 어떤 다른 사람보다 더 탐날 가치가 있는 듯한 그 사람은 평양의 그레이엄 리다. …수백명이 그를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라 부른다. 그는 교회를 세우고 민족을 세우는 일을 힘차게 돕고 있는 중이다.” 다른 글에서는 이렇게 썼다. “한국 평양의 그레이엄 리가 신었던 신발보다 더 닳아빠진 신발을 신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레이엄 리는 성령이 이끄는 사역을 사모했고 기도했고 실천했다. 1902년 그는 학생선교자원운동 국제대회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선교사역의 시작 때부터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령 하나님을 가장 적절한 자리에 위치시켜야 한다.…성령 하나님이 전 사역을 지배하게 하셔야 한다.” 그레이엄 리가 얼마나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을 최우선 자리에 올려놓고 사역했는가를 보여준다.
평양 선교의 기적을 이끌어
그레이엄 리는 1861년 미국 일리노이 록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레이크 퍼리스트 아카데미, 프린스턴 대학,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무어, 밀러, 스왈른 부부가 입국 동기다. 그레이엄 리는 1894년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 아내 웹(Blanche Webb)과 함께 돌아왔다.
미국의 모교회는 그들을 파송하면서 평양에 성령의 부으심이 임하길 기도했다. “모든 교회는 이 강퍅하고 유연성이 없는 토양(평양)에 이들 선교사가 선한 씨를 심을 수 있게 성령의 부으심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레이엄 리와 그의 동료, 그리고 모교회는 성령 하나님을 최우선했다. 게다가 그레이엄 리는 기도의 능력을 믿었다. 그 결과 성령이 이끄는 선교지 평양은 해마다 기적을 창출했다.
1898년 평양선교회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평양 이전의 선교 기록은 우리가 아는 대로 놀랍게 진행됐다. 그러나 지난해의 역사는 실질적 결과에 있어 이전의 어떤 해보다 능가했다.” 그로부터 5년 후 1903년 그레이엄 리는 이렇게 보고했다. “어제 우리는 평양에서 성찬식을 거행했다.…교회당은 사람들로 완전히 꽉 찼다. 1500명은 참석한 것 같다. 이 중 580명은 입교인(세례교인)이다.” 평양선교는 한국선교의 기적을 견인했고 장대현교회는 설립 10년 만에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다.
평양대부흥운동 놀라운 기도응답
그레이엄 리와 평양 주재 선교사들은 성령의 부으심을 사모하며 기도했다. 그런 가운데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열린 하디의 평양선교사 사경회와 9월 하워드 애그뉴 존스턴의 서울 사경회는 그들 모두에게 ‘벧엘’이었다. 평양 선교사들은 교파와 연령을 초월해 매일 기도회를 가졌다. 평양 교인들도 “성령의 부으심을 위해 매일 1시간씩 기도하기로 약속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기도회는 놀랍게 응답됐다. 1907년 1월 2∼15일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열렸다. 그러던 14일 저녁집회 때 간단한 설교가 끝난 후 그레이엄 리는 “기도하기를 원하면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이어 기도의 함성이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900명을 돌려보낸 후 남은 600명은 새벽 2시까지 자신들의 죄를 통회 자복하며 기도했다. 성령의 부으심이 문자적으로 임했다.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였다. 이튿날 성령의 역사는 더 강했다.
장대현교회에서 발흥한 평양대부흥은 평양 전역과 전국의 주요 도시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됐다. 부흥이 임하는 곳마다 동일한 역사가 나타났다.
1907년 2월 평양남산현교회에서도 강력한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는 것처럼 울부짖었다. 성령께서 평양에 모인 부인사경회 때 임하셨고, 평양 숭실대 개강수련회 때도 임하셨다. “하나님의 영이 너무도 강력하게 학생들을 감동시켜서 학교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심지어 중간고사 시간에도 학생들이 모여 기도했다. “그곳에는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지도자(the Leader)가 계셨으며, 그의 임재는 무시무시했다.” 거의 모든 학생이 성령의 권능을 체험했고, 전체 학생의 10분의 9가 성령으로 거듭났다.
중국에서 온 조너선 고포스와 두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놀라운 부흥을 목도하고 돌아갔다. 그들은 중국에서도 성령의 부으심이 있기를 간구했고, 그 기도는 곧 응답됐다. 이듬해 회개를 동반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중국에도 임했다. 소리 높여 절규하고 눈물을 흘리며 교만과 시기와 미움을 깊이 회개했다.
평양대부흥의 놀라운 결실
사람들은 깊이 감춰진 내면의 죄악들을 고백했고, 고백 후에는 형언할 수 없는 죄 용서의 기쁨이 찾아왔다. 부흥이 임한 후 한국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로 거듭났고, 수많은 불신 영혼들이 주께 돌아왔다. 미국의 한 저널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한국은 지금 막 수세기만에 찾아오는 바로 그런 기회를 맞았다. 당신은 미국의 교회가 이 사실을 깨닫도록 무언가를 말하거나 무언가를 할 수 없겠는가. 이 상황은 대단히 예외적이고 놀랄만하다. 온 나라가 추수할 만큼 무르익었다. 한국은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다.”
1904년 9000명이던 교세는 1907년 12만명으로 급증했고 개인의 각성이 사회변혁으로 이어졌다. 기생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 평양선교를 거룩한 사명으로 여긴 성령의 사람, 그레이엄 리가 1916년 12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이렇게 담담히 그의 부고를 알렸다.
“한국교회의 위대한 선교사 중 한 명이었던 그레이엄 리가 1916년 12월 2일 캘리포니아 길로이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엄숙하게 언급해야 할 것 같다.…그가 1892년 한국에 도착했을 때 평양과 황해도에 각각 한 교회만 있었다. 이후 그는 이 두 지방에서 자신의 위대한 선교 사역을 수행했다.”
글·사진=박용규 교수(총신대·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