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 저는 아주 중요한 주제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사람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세상과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1973년 5월 30일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1918∼)이 서울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 앞에서 행한 설교 서두다.
4박 5일 동안 열린 빌리 그레이엄 서울전도대회에서는 무려 10만명이 회심했다. 빌리 그레이엄만큼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도 드물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복음전도에 그가 이룩한 족적은 경이적이다. 1947년부터 2005년까지 그가 전 세계에서 가진 공식 전도대회만 417회였다. 그는 125개국 2억 이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22억명이 그의 설교를 들었다. 그레이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에게 설교한 전도자였다.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위튼대 안에 있는 빌리 그레이엄 센터 모습.
강력한 회심, 놀라운 능력의 집회
역대 부흥운동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빌리 그레이엄의 영성은 그의 영적 회심과 성령의 역사에서 나왔다. 1918년 11월 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롯의 낙농장 개혁장로교회 가정에서 태어난 빌리 그레이엄은 1938년 3월, 강력한 부르심을 체험하고 구령의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1940년 9월 위튼대에 진학한 그레이엄은 그곳에서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중국 의료선교사 넬슨 벨의 딸 루스(Ruth Bell)를 만나 결혼했다.
그레이엄은 1949년 에드윈 오와 함께 집회를 인도하던 중 산에서 혼자 기도하다 성령 충만을 경험하고 전도자가 됐다. 그해 9월 25일부터 11월 20일까지 열린 LA집회는 대단했다. 8주 동안 35만명이 참석했으며 라디오 카우보이 가수 스튜어트 함블렌, 노름꾼 미키 코헨과 함께 일하는 전자악기 전문가 짐 바우스, 그리고 올림픽 우승자 루이스 잠페리니가 이때 주를 영접했다.
‘타임즈’와 ‘라이프’ 그리고 ‘포춘’지를 창간한 헨리 루스가 그레이엄을 적극 지원하면서 그는 곧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전도집회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졌고, 50년 11월 5일 애틀랜타에서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으며, 52년부터 75년까지 200개 신문에 ‘나의 대답’을 연재했다. 56년 ‘크리스채너티투데이’와 60년 ‘디시전’을 창간했다. 그의 저작 ‘하나님과의 평화’(1953)는 125만부가 판매됐고 ‘어떻게 중생을 받는가’는 80만부, 계시록 첫 장에 기초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1983)는 50만부 이상이 팔렸다. ‘천사들, 하나님의 비밀 기관들’은 90일만에 100만부가 팔렸다.
한국전쟁 가운데 임한 부흥
그레이엄은 세계적 부흥사였지만 한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아직 총성이 멎지 않았던 52년 12월 성탄절 때 그는 그레디 윌슨, 밥 피어스, 국제십대선교회(YFC) 저널리스트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750명의 한국 거주 외국 선교사들, 수천명의 군인과 군목, 수많은 한국인들이 그의 메시지를 들었다. 50세의 한경직이 34살의 그레이엄 통역을 맡았다. 그의 한국 방문과 전도집회는 실의에 빠진 백성들과 상처 입은 군인들에게 큰 힘이 됐고 한국전쟁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전 세계에 알리는 전기가 됐다.
그는 미국에 돌아가 자신이 한국에서 목도한 성령의 역사를 이렇게 보고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한국에서 재연되고 있다. 당신들이 선교한 한국 장로교 안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다. 만일 오늘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믿을 수 없다면 지금 한국에 가보라.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 바닷가 산언덕에 천막을 치고 난로도 피우지 않은 곳에서 새벽 4시에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거리에서 전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백명의 목사, 전도사가 공산당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끌려가서 생사를 모르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학교마다 수백명이 모여서 순교자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을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는 1958년, 73년과 84년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서울전도대회
70년 11월 20일 한경직은 빌리 그레이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는 그레이엄 박사님,… 저는 지금 아주 긴급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한국교회들은 박사님을 한국에 오시게 해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한국에 영적인 갈급함이 있는 이때에 가능하시다면 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극히 초교파적인 단체가 지난밤에 모여서 우리가 당신이 와주기를 갈급하게 부탁드린다는 데에 만장일치로 결의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오십시오!”
이 편지를 받은 빌리 그레이엄은 52년 방문 당시 한국인들 가운데 임한 놀라운 부흥을 기억하고 다시 방문해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강한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그는 한국 방문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73년 5월 30일 빌리 그레이엄 서울전도대회 첫날, 복음에 목마른 이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웠다.
“이것은 확실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일 수밖에 없다.” 그레이엄의 고백이다. 대회 첫날 그곳에 참석한 51만명에게 그는 이렇게 메시지를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로 내려오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인류 역사를 가장 많이 변화시킨 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자기 일생 동안에 100여 마일을 가보지 못한 이 예수가 누구입니까. 그는 33세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인류의 역사에 나타난 이 유일한 분은 누구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바쳐야 할 이 예수가 대체 어떤 분입니까.”
한국교회를 도약시킨 대중전도운동
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열린 빌리 그레이엄 서울전도대회에는 연인원 325만 명이 참석했다. 마지막 날에는 100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100만 명이 넘는 청중들에게 설교하는 영광을 가졌다. 그레이엄은 “내가 한 전도집회 사상 이처럼 많은 군중을 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이듬해 열린 ‘엑스플로 74 전도대회’에 연인원 655만 명이 모일 수 있었던 것도 빌리 그레이엄 서울전도대회 덕분이다. 그는 1984년 한국선교 100주년 때도 방한해 감동과 도전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한국교회와 민족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가 무엇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언제가 가장 적합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50년대 한국교회와 민족이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도전을 주었고 70∼80년대 한국교회가 제2의 부흥기를 만날 수 있도록 중요한 밑거름을 제공했다. 이후 한국교회와 민족은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며 분단의 벽을 넘어 아시아와 세계로 뻗어갈 수 있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 때도 그랬지만 확실히 70년대 부흥을 경험한 교회와 민족은 달랐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진정한 부흥이다.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지만 아무 곳에나 임하는 게 아니다. 사모하는 곳에 임한다. 우리 모두 무릎으로, 기도로 나가자.
박용규 총신대 교수
글·사진=박용규 총신대 교수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