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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교단 선교부의 내한
한국 개신교회는 선교사 내한 이전에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 만주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부분적으로 시작되었고,
또 셰례자도 생겨났지만 이것은 작은 시작일 뿐이다.
본격적인 한국 개신교 선교는 해외 선교사들의 입국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미국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의 입국으로 선교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뒤따라 들어온 각국 선교부는 한국에 교두보를 확보하면서
서서히 한국 복음화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는 구라파의 국교형교회(the established church, state-church)가 아닌
교파형교회(denominational church)가 안착하게 되었다.
교파형 교회는 갈등과 반목이라는 부정적 요인도 있지만,
선의의 경쟁과 협력이라는 긍정적 요인도 있어,
한국교회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그러나 교파형교회의 치명적인 약점인
교파 교회 난립이라는 피해 갈 수 없는 문제를 후세에 남겼다.
1. 미국 북장로교회
1) 첫 선교사 알렌(Horace Allen) 의사의 입국
길고 지루한 준비 기간이 끝나고 1884년 9월 한국에 마침내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으로 입국하였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한국인으로 처음 영세를 받은 때로부터 정확하게 100년이 지난 때였다. 따라서 1884년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기점이 되는 해가 된다.
개신교 첫 선교사의 영예를 얻은 사람은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의사 알렌(Horace N. Allen, M.D. 安連 1858-1932)이었다.
알렌은 미국 독립 전쟁 당시의 영웅이었던 이탄 알렌(Ithan Allen)의 후손으로 1858년 4월,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Delaware)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하고, 이어 신시내티에 있는 마이애미(Miami)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1883년 의사 자격을 얻었다. 알렌이 대학을 다니던 때 미국 전역을 휩쓴 제2차 각성운동의 영향이 각 대학으로 파급되어 많은 대학생들이 선교사로 지원을 했고 선교 현장으로 잇달아 나가고 있었다. 알렌도 이 영향으로 선교사가 될 것을 다짐하고 의과대학으로 진학했다. 따라서 그는 의사면허를 취득한 후인 1883년 봄 미국 북장로교회에 의료 선교사 지원서를 보냈고 이것이 곧 허락되어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알렌은 한국 세관 고문으로 있던 조셉 헤스(Joseph Hass)에게 한국 주재 외국인들에게 의사가 필요한지 여부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 헤스로부터 긍정적인 답신을 받은 알렌은 이어 뉴욕의 선교 본부에 한국에는 의사가 한 사람도 없어서 외국 공관들과 세관에서 의사를 몹시 필요로 하므로, 본부가 허락한다면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하는 편지를 보냈다. 뉴욕 본부로부터 한국으로 가도 좋다는 연락을 받고 알렌은 일단 그의 아내를 상해에 남겨 둔 채 한국으로 떠났다.
그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4년 9월 20일이었다. 이로써 알렌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개신교 선교사로 (물론 그 때는 선교사라는 신분을 밝힐 수가 없었지만)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 일로 한국에 개신교 선교의 시대가 마침내 개막되었다. 알렌은 미국 공사관뿐만 아니라 영국, 중국, 일본 등 여러 공사관과 외국 거류민들의 의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또한 그는 날마다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일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극적으로 조선 왕실과 연결되는 사건이 1884년 12월에 일어났으니, 이 사건이 곧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이 사건은 한국 개신교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고비가 되는 사건으로서, 언더우드는 이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holy providence)라고 술회했고, 헤론은 “특별한 섭리”(special providence)라고 기록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수구파와 개화파로 나뉘어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개화파의 주요 인물들이었던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이 수구파의 거세를 위한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1884년 12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식 우편 제도를 시행할 우정국(郵政局) 건물을 완성하고 낙성식(落成式)을 하는 피로연이 세관 고문 묄렌도르프(P.G.Mӧlendorf) 집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때를 기하여 개화파들이 수구파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고 개화파들로 새 내각을 구성하여 개혁, 개방 정치를 하려고 하는 음모를 꾸몄다. 12월 4일 저녁 피로연이 한참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불이야!” 하는 소리를 신호로 연회장에서 뛰쳐나오는 수구파들을 잠복해 있던 자객들이 무차별 칼로 난자해 죽였다. 이 때 수구파의 거두이며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 영익도 전신에 칼을 일곱 군데나 맞아 혈관이 끊기는 등 깊은 상처를 입고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미국 공사 푸트와 세관 고문 묄렌도르프가 민 영익을 응급 처치하고는 즉시 알렌에게 통지하여 급히 오도록 조치하였다. 알렌이 통지를 받고 오는 동안 벌써 어의(御醫)를 포함한 한의사들 여러 명이 모여 치료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끊어진 혈관과 칼로 난자되어 찢겨진 몸을 한방 의술로는 어찌할 수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다. 이 때 알렌이 당도하였고, 그는 환자의 위급함을 즉시 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렌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자기가 이 환자를 치료하여 살리지 못할 때 자기에게 돌아올 책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치료를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의사로서의 도리가 아닌 것이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민영익을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알렌의 치료는 극적인 효력을 나타내었고, 민영익은 얼마 되지 않아 완치 되었다. 민영익은 후에 알렌에게, “우리 백성들은 당신을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당신이 아메리카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이 사건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칭송하였다.
이 사건은 알렌으로 하여금 서양의 뛰어난 의술을 왕실과 고위관리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서양문물의 우수성을 입증한 좋은 기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알렌과 왕실이 급격히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알렌은 곧 고종의 시의(侍醫)로 임명을 받았고, 민영익을 구해 준 대가로 국왕으로부터 참판(參判) 벼슬까지 얻게 되었다. 이 일은 앞으로 전개되는 개신교 선교 사역에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득”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갑신정변으로 인한 개신교 선교의 교두보 확보와 이 일이 선교에 큰 도움이 된 사실을 한국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갑신정변은 한·미 양국의 우호관계를 가장 밀접하게 만든 기연(奇緣)이 되었으니, 이때부터 그처럼 엄격하고 금피(禁避)해 오던 서교도(西敎徒)라 하더라도 미국에서 보내온 선교사라면 왕실에서부터 호의를 가지고 특별히 묵인해 주며 돌보아 주는 태도였다. 이 때문에 세기(世紀)를 앞서 전래된 천주교에 비하여 미국으로부터 전래된 기독교는 단시일 내에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된 것이 사실이요, 나아가 그들의 부대사업으로 시작된 교육·의료·학술면의 모든 시설은 진실로 이 나라에 근대 문화를 소개하는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 겨레가 ‘자유,’ ‘민주’를 알고 ‘평등,’ ‘박애’를 알게 된 것도 정녕 이 때로부터였으니, 한국 근대 문화에 아메리카적인 요소가 다른 서구 제국의 그것보다도 가장 뿌리 깊게 박힌 것은 결코 심상(尋常)한 인연에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알렌은 그가 의사이기 때문에 병원을 설립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런 기회에 궁중으로부터 허가를 얻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병원이 필요하다는 논리 정연한 편지를 1885년 봄 미국 공사 푸크(G.C.Foulk 福久)를 통하여 정부에 제출하였다. 왕이나 관리들은 알렌의 뛰어난 의술과 한국민에 대한 사랑을 잘 알고 있는 터여서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정부는 알렌의 청원을 순순히 받아 주었다. 그 결과 마침내 1885년 4월 9일에 알렌은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였다. 정부에서는 몇 사람의 관리들을 보내 이 치료소를 관리하게 하였고, 개원한 지 2주일쯤 지나서(4월 23일) 이름을 광혜원에서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의미의 ‘제중원’(濟衆院)으로 바꾸었다. 그 후 제중원은 집은 좁은데 환자는 계속 늘어나 1887년부터 갑신정변 때 피살된 홍영식(洪英植)의 저택으로 옮겨 1904년까지 진료하다가 다시 현재 을지로 입구에 위치한 외환은행 본점 근처인 구리개(銅峴)로 옮겨왔다.
언더우드가 목사로서는 처음으로 입국하자마자 이곳에서 일하게 된 것은 아직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때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제중원은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던 시기에 선교사들이 때를 기다리던 곳이었고, 합법적으로 체재할 수 있는 거처이며 활동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 제중원이 후에 세브란스병원이 되었고, 오늘의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이 되어 한국 의학계의 선두 주자로서 공헌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 산 증거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2)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목사의 입국
안수를 받은 목사 선교사로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은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 元杜尤 1859-1916)였다. 언더우드는 뉴욕대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네덜란드 개혁교회 계통의 뉴저지 주 소재 뉴브룬스윅(New Brunswick)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 2학년이었을 때 한·미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의 급우 중 하나가 이 기사가 실린 신문을 오려서 교실 벽에 붙여 놓은 것을 언더우드가 읽었다, 이것이 그가 자기의 전 생애를 바쳐 일하게 될 한국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1883년 10월 언더우드는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Hartford)에서 열린 미국 신학교연맹대회에 참가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훌륭한 연사들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고 선교사로서의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는 아펜젤러(H.G.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를 만났는데, 그는 언더우드와 같은 배를 타고 한국에 온, 그래서 일생 동안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된 사람이었다. 언더우드는 1884년 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곧이어 뉴욕대학교에서 문학석사 학위도 받았다. 그 해 11월에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뉴 브룬스윅 대회(The Classis of New Brunswick)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당시 일본 명치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올트만(Albert Altmann) 목사가 방문하여 한국 선교사로 나갈 사람이 없느냐고 물으면서, 그곳에 죽어가고 있는 영혼 1,300만을 위해 일할 선교사 지원을 호소하였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 즈음에 맥윌리엄스가 한국에 선교 헌금을 약속하였으므로, 북장로교회는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공식 임명하였다.
25세의 젊은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4년 12월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이듬해인 1885년 1월,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그 곳에 있던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한국에 들어가는 배를 기다리면서 그 곳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로부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마침 삼능사(三菱社) 소속의 기선 하나가 한국에 들어가게 되자 언더우드는 이 배를 타고 한국으로 출발하여 4월 2일 부산에 이르렀다. 거기서 하루를 보낸 후 3일에 제물포로 출발하여 5일, 그러니까 바로 부활주일 오후에 비 내리는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이 배에는 전에 1883년 10월에 하트포드(Hartford)에 열렸던 미국 신학교연맹대회 때 만났던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부부가 미국 북감리교회의 파송을 받고 한국으로 가기 위해 탑승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동시에 한국 땅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아펜젤러는 1882년 미국의 유명한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Phillip Schaff)가 졸업한 프랭클린 마샬(Franklin Marshall)대학을 졸업하고 드류(Drew)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했다. 그 후 미국 북감리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은 후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선교사들이 같은 날 도착한 셈이었다. 이렇게 우수한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것은 한국 교회 성장이 경이적일 수 있었던 한 요인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훌륭한 선교사들을 한국에 보내어 우리 민족 복음화에 공헌하도록 섭리하셨다.
2. 호주 빅토리아(Victoria) 장로교회
미국 북장로교회와 북감리교회가 한국에 와서 선교를 시작한 후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가 그 다음을 이어 한국에 선교의 기초를 닦았다.
1889년 10월 처음으로 한국 선교사로 나온 데이비스(J.H.Davies 代牧師 1858-1890) 목사가 출석했던 멜보른(Melbourne)의 모 교회와 그 지역의 지 교회들이 한국 선교를 위해 힘을 모아 데이비스와 그의 여동생 메리(Mary T.)를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데이비스는 1857년 빅토리아 주 멜보른(Melbourne)에서 출생하였고 그 곳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쳐 문학사와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계속해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마음을 정하고 영국 에딘버러(Edinburgh)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그의 누나가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인도에 가서 선교 사역을 돕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육하고 있을 때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호소문을 읽고 결의를 다지며 내한하였다.1888년 빅토리아 지역 교회 남, 여기독청년들이 ‘장로교청년성경연구신우협회’(The Presbyterian Fellowship Union for Bible Study)를 조직하였는데, 데이비스가 출석하던 멜로른시 투락(Toorack)에 있는 모 교회 신우협회와 그 지역의 여러 협회들이 힘을 모아 데이비를 초대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파송을 받은 데이비스 목사 남매는 1889년 10월 서울에 도착하여 미국 선교사들의 영접을 받았다. 언더우드는 데이비스가 “활동가요, 다방면에 재주를 가진 믿음의 사람이요, 내한 선교사 중 뛰어난 인재 중 하나다.”라고 말한 바 있다. 데이비스는 한국에서 활동할 지역을 탐사하기 위하여 이미 선교사들이 일하고 있는 서울이나 서북 지방은 피하고, 아직 선교사들이 가지 않은 남부지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누이는 서울에 남겨 두고, 어학 선생과 수행원 하나를 데리고, 충청, 경상도를 거쳐 부산까지 가는 약 400Km 이상의 장거리 여행이었다. 아직 여독도 제대로 풀리지 않은 몸으로 여행을 강행하다가 몸이 허약해지면서 천연두에 걸리게 되었고, 폐렴까지 겹쳐 목적지 부산을 눈앞에 두고 쓰러졌다. 당시 부산에서 일하고 있던 게일(J.S.Gale) 선교사가 이 소식을 듣고 자기 집으로 급히 후송하였으나 이미 손을 쓸 시기가 지나간 때였다. 한국에 도착한 지 6개월 남짓 된 1890년 4월 15일, 채 일을 시작해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순직)한 첫 희생자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데이비스가 한국에서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한 호주 교회는 한국 선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의 흘린 고귀한 피는 새로운 선교 시작의 씨앗이 되어, 1890년 조직된 장로교부인선교회가 신우협회와 협동하여 한국 선교 사업에 동참을 결의하였다. 데이비스가 순직한 이듬해인 1891년에 매케이(J.H.Mackay 梅桂 ?-1919) 부부, 멘지스(Miss I.B.Menzies 民氏 ?-1935) 양, 페리(Miss J. Perry ?-1935) 양 등 4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경남 지방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호주장로회가 처음으로 세례를 준 사람은 멘지스 양의 어학선생이었던 심서방(沈書房)이었는데, 그는 1893년 북장로교회 선교사 베어드(W.M.Baird)목사에게 세례를 받아 첫 열매가 되었다. 호주 선교부 여선교사들은 고아들에 관심을 보이면서, 먼저 고아 3명을 데리고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고아원의 목적은 “이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교육시켜 성장한 후에 자기 동족에게 선교할 수 있게 하려 함이라.”라 하여 이들을 전도인으로 교육 시킬 계획을 세웠다. 1895년에는 고아들이 13명으로 늘어 성장하였으며, 후에 남자 아이들도 모아 최초의 수세자 심서방의 아버지에게 교육과 관리를 맡겼다. 이것이 발전되어 1897년 남자학교가 세워져 멘지스 양이 관리 하였다. 이렇게 호주 선교부는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에 치중하면서 선교 영역을 부산 이외의 지역으로 확대하여, 각처에 교두보를 확보해 나갔다.
3. 미국 남장로교회
미국 남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북장로교회보다 7년 늦은 1892년에 시작되었다. 남장로교회 선교는 언더우드의 절대적인 공헌에 기인했다. 남장로교회 소속 프레스톤(J. F. Preston 邊要翰 1875-1975) 선교사는 언더우드를 가리켜 ‘남장로교회 한국 선교의 아버지’ 라고 피력한 바 있다. 1891년 언더우드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갔을 때 시카고에 있는 매코믹(McCormick)신학교에 가서 한국 선교에 대한 연설을 하였다. 이 때 이 신학교의 학생이었던 테이트(L. B. Tate)가 많은 감동을 받아 한국에 선교사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테네시 주 내쉬빌(Nashville)에서 미국 신학교연맹 연차대회가 열렸는데, 언더우드는 이곳에서도 연설을 하였다. 이 대회에는 당시 벤더빌트대학에 재학하고 있던 윤치호(尹致昊)도 연사들 중에 한 사람으로 끼어 있었다. 이들의 강연을 들은 학생들 중에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 있는 유니온신학교 학생이었던 존슨(C.Johnson), 레널즈(W.D.Reynolds 李訥瑞 1867-1951), 그리고 이미 언급한 매코믹신학교 학생 테이트(L.B.Tate 崔義德 1862-1925)가 한국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작정하였다. 그 후에 역시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의 전킨(W.M.Junkin 全緯廉 1865-1908)이 이들과 합류하였다. 이 네 사람은 남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위원회는 “한국과 같이 잘 모르는 나라에는 새로운 선교의 문을 열 사람도, 방법도, 생각도 없다.”라는 부정적인 회신을 보내왔다. 그러나 이들은 실망하지 않고 언더우드와 함께 미국의 남부 여러 주들을 순방하면서 한국 선교 보고와 선교의 시급성을 역설하고, 한국에 관한 여러 가지 기사들을 교계 신문에 게재하여 교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의 열성적인 노력의 첫 결실은 언더우드 집안에서부터 나타났다. 언더우드의 형인 존 언더우드가 한국 선교에 사용해 달라면서 2,500달러를 남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에 보내왔다. 이즈음 한국 선교를 시작하기에 좋은 여건이 성숙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남장로교회의 선교지였던 그리스(Greece)가 정치적 변동으로 인하여 선교를 중지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다. 따라서 남장로교회는 중지를 결정하고 다른 선교지를 찾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선교를 위해 예정해 두신 일이었다. 존 언더우드 외에도 몇 사람이 선교 헌금을 해서 모두 3,000달러가 넘어서자 드디어 남장로교회는 한국 선교를 착수하기로 결정하고, 1892년 2월 7명의 선교사를 임명하였다. 그들은 테이트와 그의 누이 메티(Mattie S.Tate 崔馬太 ?-1940) 양, 리니 데이비스(Linnie Davis F. ?-1903) 양, 레널즈 부부, 그리고 전킨 부부였다. 맨 먼저 한국에 도착한 사람은 데이비스 양이었다. 그녀는 1892년 10월 18일 한국의 고관 이(李)씨 부인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이튿날 서울에 들어와 당시 미국 공사관의 서기로 있던 알렌의 영접을 받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11월 3일 역시 제물포에 도착한 당일로 서울에 당도하여 북장로교회 선교사 마펫의 영접을 받았다. 이로써 미국 남장로교회의 한국 선교가 그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1년여를 지내면서 ‘목이 곧고 히드라의 머리를 가진 괴물과 같은’ 한국어를 수업하고 한국의 서남쪽인 전라도 지방 선교를 위해 내려갔다. 1893년의 선교부는 테이트와 전킨을 호남 지방의 중심도시였던 전주(全州)에 항구적인 선교부 설립을 위해 파송하기로 결정하고 일차 방문을 하게 했다. 이듬해 다시 테이트가 그의 누이와 함께 그 곳을 방문함으로써 서양 여자의 첫 한국 남부지방 방문의 기록을 남겼다. 1895년 2월 테이트와 레널즈가 전주에 와서 선교사들이 거처할 집과 대지를 구입하여 이 지역 선교의 거점을 확보하였다. 1897년 여름에 전주에서 첫 세례 지원자들이 생겨 레널즈가 5명에게 세례를 베풂으로써 이 지방 선교의 첫 열매를 얻었다. 군산에 제2의 선교 지부를 둔 후, 제3의 지부로 목포를 결정하였으나, 선교사들이 전라도 전역을 답사한 후, 1896년 1월 만장일치로 나주(羅州)로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인구가 많고, 내륙에 있어서 건강에 좋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유진 벨(Eugine Bell 裵裕祉 1868-1925)이 책임을 맡아 나주로 가서 집 한 채를 구입하고 사랑방을 크게 만들어 일반인들을 접견하면서 전도하였다. 그러는 동안 1897년 10월, 목포가 개항장으로 지정되면서 목포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선교부는 지부를 나주에서 목포로 옮기기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현하 동양의 불안정한 사태에 비추어 체스터(Chester)박사와 기타 인사들과의 회의 끝에 목포에 즉시 선교지부를 설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불의의 사태 발생으로 인하여 내륙에 있을 수 없게 될 경우를 생각하여 목포를 정식 본거지로 하고 여기를 기점으로 하여 순회 전도로 선교 사업을 할 수 있겠다. 이외에도 다른 정당한 이유가 있으므로 선교부는 목포에 선교사의 주택을 짓기 위하여 건축비를 요청하였다.……벨목사를 임시로 그 선교 지부 주소지에 거주하게 하였다. 지부 변경의 주요 이유는 내륙에 어떤 변고가 있을 때 철수가 용이치 않으므로 항구로 옮긴다는 내용이다. 결정에 따라 벨은 나주 지역 사역은 그의 어학선생에게 맡기고, 1898년 목포에 내려와 집 두 채를 짓고 의료 선교사 오웬(C.C.Owen 吳基元 1867-1909)과 함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목포에서의 사역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는데, 그 지역 물이 좋지 않아 건강에 위협이 되었고, 무엇보다 교인들이 목포 지역 보다는 내륙에 흩어져 거하기 때문에, 차라리 전라남도 도청 소재지인 광주에 지부를 두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1904년 9월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광주를 선교 본부로 정하고 전라도 일대의 선교를 관장하였다. 그러나 신자들 중 신앙을 버리는 자들이 늘어났고, 사역은 기대만큼 진척되지 못했으나 선교부는 최선을 다해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면서 차차 결실을 보게 되었다. 다른 선교부와 마찬가지로 남장로교회도 전도 사역을 위시하여 의료 사역도 병행하였다. 군산에서는 다니엘스(T.S.Daniels)가, 전주에서는 매티 잉골드(M.Ingold)가, 광주에서는 요셉 놀란(J.W.Nolan)이, 목포에서는 포사이드(W.H.Forsythe)가 진료소를 세우고 사역하였다. 의료 사역 외에도 각지에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사회봉사도 겸하여 전개하여 많은 결실을 얻었다.
4. 미국 남감리교회
미국의 북감리교회는 일찍이 1885년 언더우드가 입국할 때 아펜젤러가 같이 입국하여 선교가 시작되었지만, 남감리교회의 선교는 약 10년 후인 1896년에 시작되었다. 남감리교회의 한국 선교 시작에는 윤치호(尹致昊 1865-1945)의 공이 컸다. 중국 중부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남감리교회는 중국 북부에 선교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1894년 2월 리이드(C.F.Reid 李德 1849-1915) 박사를 파송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곳에 벌써 여러 선교부가 선교를 이미 오래 전부터 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으로 맨 처음 감리교회 신자가 된 윤치호는 갑신정변 때 상해로 탈출하여 그 곳에 남감리교회가 경영하던 중서학원(中西學院:Anglo-Chinese College)에 입학하여 2년간 수업하면서 뛰어난 성적을 얻었다. 그는 그 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1887년 4월 3일 세례를 받았다. 그 즈음 미국 아틀란타 소재 에모리(Emory)대학교의 총장 캔들러 (W. A. Candler)가 그 곳을 방문하였다가 윤치호의 비상함을 간파하고 그를 에모리 대학에 유학하도록 주선하였다. 윤치호는 그 대학에 유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벤더빌트(Vandervilt)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여러 곳을 다니며 연설하였는데, 연설을 해서 받은 사례금 200달러를 캔들러에게 보내면서 한국 선교를 위해 사용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윤치호는 공부를 마치고 다시 상해의 중서학원 교사로 와서 가르치는 동안 중국 여인과 결혼하였다. 그가 교사생활을 하고 있던 중 한국에서 고위 관리로 오라는 청빙을 받고 한국을 떠난 지 10년 만인 1895년 귀국하였다. 그가 한국에 들어가면서 남감리교회가 한국에 선교를 시작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리이드 박사와 헨드릭스(E.R.Hendrix) 감독은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1895년 10월 내한하였다. 이들은 윤치호의 알선으로 국왕을 알현하고 국왕으로부터 교사들을 더 많이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감동하며 돌아갔다. 미국 남감리교 해외 선교부 연차대회가 1896년 5월에 열렸을 때 한국 선교를 결의하고 리이드 박사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그가 가족과 함께 한국에 왔을 때가 1896년 8월이었다. 남감리교회는 1897년 5월 2일에 경기도 고양(高陽)에서 장년 24명과 유아 세 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집사를 한 사람 임명하여 헌금을 관리케 함으로써 첫 교회를 조직하였다. 그 때 윤치호가 집 한 채를 기부하여 예배당으로 사용케 하였다. 같은 해 6월 20일 리드 목사 사택에서 공동예배를 드렸는데 이곳이 후에 광희문교회가 된다. 남감리교회 본부는 송도(개성)에 있었는데, 송도 사람들은 자만심이 강하고, “검약하고, 근면하고, 보수적이며, 개인주의자들”이었다. 개성 사람들은 고자세여서 1897년 콜리어(C.T.Collyer) 선교사가 이곳에 왔을 때 고용인으로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전도로 첫 수세자가 나오면서, 1899년 제일남부교회가, 1901년에는 세례교인 25명, 학습교인 35명으로 읍내교회가 세워졌다. 남감리교회는 서울, 송도, 원산에 선교지부를 두고 열심히 사역하여 괄목할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 교회가 빠른 속도로 사역이 활성화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들어와 선교하던 다른 선교회가 한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고 장점만을 취한 때문이다. 한국 남감리교회는 초기에 중국 연회(年會)에 속해 있다가 1897년 5월 미국 내쉬빌에서 모인 선교국 결의에 따라 독립하고 리드가 감독이 되었다. 남감리교회는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할 때까지 꾸준히 그리고 활기차게 사역을 지속했다.
5. 캐나다 장로교회 - 매켄지의 순교
캐나다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를 논하기 전에 캐나다 사람으로 이 땅에 와서 홀로 선교하다가 외롭게 죽어 간 매켄지(W.J.McKenzie 梅見施 1861-1895)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매켄지는 캐나다 노바 스코티아(Nova Scotia) 출신으로 1891년 핼리팩스(Halifax)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를 읽던 중 한국에 가서 선교할 뜻을 갖고 캐나다 장로교회에 가서 한국에 가기를 청했지만, 그 교회는 아직 한국 선교의 계획을 갖지 않았다. 그는 직접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한국 선교를 역설하여 모금하였다. 여비와 1년간의 선교비가 마련되자 독자적으로 1893년 12월에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한국말을 속히 배우기 원했지만, 이미 들어와 있던 선교사들 틈에 살면서 영어만 사용함으로 한국어 습득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한국인들과 함께 살면서 말도 배우고 생활양식도 배우며 전도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황해도 갯마을 솔래로 내려갔다. 그는 시골 마을에서 한국인들과 더불어 동고동락하면서 한국인으로 살아갔다. 메켄지는 서양의 음식 맛에 대한 향수를 없애려고 크리스마스 때에 서울의 언더우드가 선물로 보내준 빵, 케익, 우유, 설탕 등 맛있는 음식들을 입에 대지도 않고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주위의 주민들에게 폭넓은 인정과 존경을 받으며 살았으므로 동학당들이 이 지역을 휩쓸고 지나갈 때도 주민들의 보증으로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이렇게 2년 동안 성자 같이 한국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가던 그가 한여름에 일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흐려지는 정신으로 마지막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어제 선편으로 서울에 가기를 결정하였다. 내일 누구 한 사람 오라고 전보를 쳤다. 잠을 들 수가 없다. 오늘은 심방객들을 오지 말라고 하였다. 나가지도 아니 하겠다. 너무도 허약하다. 오늘 오후에는 전신이 추워진다. 의복과 더운 물주머니가 있어야겠다. 땀을 내야겠다. 조금 나은 것 같다. 죽음이 아니기를 바란다. 한국을 위하여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한국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내가 조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 여행하고 밤이면 공기가 추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 앞에서 애 닲어 하는 그의 모습이 여실히 보인다. 달아오르는 고열에 그만 정신착란을 일으킨 그는 엄습하는 고통과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아 숨을 끊고 말았다. 가족, 동료도 없이 외롭게 한국인들 사이에서 살다가 쓸쓸히 생을 마치고 황해도 솔래 해변에 묻혀 하늘나라로 간 매켄지의 순교를 한국교회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캐나다 장로교회 총회는 푸트(W.R.Foote 富斗一 1869-1930)목사 부부, 던컨 맥레(D.McRae 馬求禮 1868- 1949) 목사, 그리고 의사 로버트 그리어슨(R.Grierson, M.D. 具禮善 1868-1965) 부부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1898년 9월 한국에 도착하여 기존 선교부의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자연히 선배 선교사 매켄지가 선교하던 솔래 지방으로 가서 선교하려 했으나, 그곳은 메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미국 북장로교회가 선교 활동을 하여 많은 진척을 보고 있었다. 따라서 그곳은 한국말에 익숙한 선교사가 요청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작은 시골 마을이어서 대도시로 옮겨갈 필요를 느꼈다. 미국 남, 북, 호주 장로회 선교회가 조직한 ‘장로회정치를 갖는 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in Korea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Government)가 관북(關北) 지방, 즉 함경도를 선교 구역으로 정하라는 조언에 따라, 원산으로 올라가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원래 함경도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 구역이었으나, 캐나다 선교부에 양도함으로써, 그들의 선교 사역과 거기에 딸린 재산을 인수하고, 1898년 11월, 푸트 목사 부부가 그곳으로 옮겨가 사역을 시작함으로써 함경도가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 구역이 되었다. 캐나다 선교부는 미국북장로교회 선교부로부터 64명의 교인을 가진 교회 하나와 남자학교 하나를 인수하여 사역을 시작하였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사건이 터지자, 난을 피해 한국으로 온 루이스 메켈리(L.H.McCully)양이 가담하면서 인원이 보강되었다. 1901년, 그리어선 의사 부부가 성진(城津) 항으로 이동하여 사역하면서 그곳에 지부가 설치되었고, 1905년에 도청 소재지인 함흥에 지부를 설치하여 맥래 선교사 부부가 책임지게 하여 선교 지경을 넓혀 나갔다.
선교부의 선교 정책
1. 네비어스(Nevius) 선교 정책의 채택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선교사들은 대개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한국에 온 사람들로서 목회 경험이나 선교사로써의 경험은 전무한 형편으로 오직 선교의 열정 하나만을 갖고 현지에 왔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선교지에서의 처녀 선교 사역이란 그렇게 생각처럼 용이한 일이 아님을 곧 깨닫게 되었다. 이 문제를 가장 깊게 느낀 사람은 언더우드였다. 그는 몇 차례 본국 교회의 해외 선교본부에 경험 많은 선교사를 한사람 보내어 그로부터 선교의 경험과 선교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허락 해 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선교본부는 그의 요청을 받고 중국 산동성에서 선교 활동을 오래동안 하면서 선교방법론에 대한 탁월한 논문을 계속연재하고 있던 네비어스(John Nevius) 선교사를 한국에 가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따라 네비어스는 부인을 대동하고 1890년 6월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는 2주간을 한국에 머물면서 이 곳에 있는 선교사들을 모아 놓고 선교 전략과 방법론을 강론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네비어스 선교정책”(The Nevius Principle or Methods) 이라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이 방법을 곧 한국 선교 현장에 적용시켜 실천함으로써 이 정책으로 인해서 한국 장로교회는 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고, 이 방법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있게 한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 되고 있다. 네비어스 선교 정책의 핵심적인 것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선교사들 개인은 폭넓은 순회선교를 통하여 전도한다.
2. 자립전도: 신자 각인은 타인의 [복음의] 선생이 된다.
3. 자립정치: 모든 그룹은 봉급 받지 않은 지도자들과 봉급 받는 조사(助師: Helper)들이 후에 각 지역과 전국적인 지도자를 만들기 위해 훈련한다.
4. 자립보급: 모든 예배당은 신자들 자신들의 힘으로 건축되어야 한다. 교회가 설립되면 조사들의 봉급을 책임진다. 목사들의 봉급은 결코 선교사들의 보조에 의존하면 안된다.
5. 모든 신자들은 그들의 지도자조사들에 의해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해야 한 다. 그 지도자들과 조사들은 “성경반”(Bible Classes)에서 공부해야 한다.
6. 성경에 규정한 벌칙에 따라 엄중한 훈련과 치리를 해야 한다.
7. 다른 단체 [교회]들과 [긴밀한] 협조와 연합을 해야 한다. 적어도 지역을 분할 하여 일한다.
8. 소송 문제 같은 것은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9. 가능한 한도 내에서 사람들의 경제면에서는 서로 협력해야한다.
이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보통 줄여서 삼자정책(三自政策: Three-Self Principles)이라고 부른다. 즉 자치(自治: Self-Government), 자립(自立: Self-Support), 자전(自傳: Self-Popagation)이다. 이 3자 원칙은 원래 영국 후즈필드(Huddesfield) 교구 목사였던 헨리 벤 (Henry Venn)의 선교 이론에 근거한 것으로,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교회를 운영한다는 것과, 원조 받지 않고 자기 교회를 운영한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 전도한다는 것으로 압축된다. 이 선교 정책은 한국에 나와 있던 선교회 간의 협력이 있어야만 그 효력을 낼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 선교부 만으로는 그 효력을 내기 어렵고, 선교회 간의 협력이 요청되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에 나와 선교하고 있던 4 장로회선교회 (미국 남,북, 카나다, 호주)는 이 정책의 실현을 위해 장로교협의회(The Presbyterian Council)을 결성하고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선교지를 분할하는 소위 “예양협정”(禮讓協定, Commity Arramgement)을 맺었다. 이 협정의 정신은 동일한 지역에서 중복적인 사업을 예방하기 위해 한국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선교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이에따라 북장로교회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경상북도, 남장로교회는 전라도와 충청도, 호주 장로교회는 경상남도, 캐나다 장로교회는 함경도 지역을 담당하여 선교 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선교지 분할 정책은 북장로회와 북감리회 선교회 간에도 이루어졌다. 북장로교회와 북감리교회의 선교가 점차 활기를 띄기 시작 하면서, 그 활동 범위가 북으로 넓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한 지역에서 두 교파 선교회가 동시에 선교를 하게 되는 일이 나타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1888년에 이런 선교사역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선교지를 분활 하자는 안을 북감리교 선교부에 내어 놓았다. 결국 그의 이 제안은 두 선교회가 협의를 한 끝에 1892년 6월 최종적으로 합의하게 되었다. 두 교회가 동의한 내용을 보면 그들은 인구가 5,000명 또는 그 이상인 도시에서는 [두 교회가] 같이 선교하며, 5,000명 이하의 도시에서는 어떤 [교인들의] 모임이 정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모임이 일년에 4회 이상 [교회 지도자들의] 방문을 받으며, 그 방문이 선교사가 2회 이상 방문하는 곳이라면, 다른 선교회는 그곳에서 선교하지않고 모임이 없는 곳으로 이동한다. 한 교회가 다른 교파의 교인을 받을 때에는 반드시 교회의 편지 (이명증서)가 있어야 하며, 각 선교회는 다른 선교회의 권징을 존중하고, 월급을 받는 한 선교회의 전도자를 그 선교회의 허락 없이는 다른 선교회가 고용하지 못한다. 또한 책 [성경,전도지는 무상으로 공급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북장로교회와 북감리교회 사이의 협의는 감리교회의 감독 포스터 (R. S. Foster)의 반대에 부딪쳐 성사 되지 못했으나 후에 지역분할의 한 표본이 되었다. 네비어스 정책을 한국의 상황에 맞게 세분하여 선교에 적용하도록 한 안이 채택되었는데 그 중요한 것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상류 계급 보다는 근로 계급을 상대로 해서 전도하는 것이 좋다.
2. 부녀자에게 전도하고 크리스천 소녀들을 교육하는 데 특별히 힘을 쓴다. 가정 주부들, 곧 여성들이 후대의 교육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3. 기독교 교육은 시골에서 초등 정도의 학교를 경영함으로써 크게 효력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학교에서 젊은이들을 훈련하여 장차 교사로 보내도록 한다.
4. 장차 한국인 교역자도 결국 이런 곳에서 배출될 것이다. 이 점을 유의 하고 있어야 한다.
5. 사람의 힘만이 사람을 개종 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신다. 따라서 될수록 빨리 안전하고도 명석한 성서를 이들에게 주도록 해야 한다.
6. 모든 종교 서적은 외국 말을 조금도 쓰지 않고 순 한국말로 쓰여 지도록 하여야 한다.
7. 진취적인 교회는 자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는 사람의 수는 될수록 줄이고, 자급하여 세상에 공헌하는 그러한 개인을 늘여야 한다.
8. 한국의 대중들은 동족의 전도에 의해서 신앙하게 되어야 한다. 따라서 전도를 우리 자신이 나서서 하는 것 보다는 전도자의 교육에 전력해야 한다.
9. 의료 선교사들은 환자들과 오래 친숙하게 지내므로 써 가르칠 기회를 찾게 되고, 또 깊은 마음의 문제에 골몰하는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시약(施藥)만 가지고서는 별 효과를 낼 수 없다.
10.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은 고향의 마을에 자주 왕래하게 해서 의료 선교사들의 인애에 넘치는 간호의 경험을 본받아 전도의 문을 열도록 해야 한다. 이상에서 열거한 선교 정책은 참으로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한국 장로교회의 선교정책을 적시(摘示)하고 있다. 노동계급, 부녀자 전도 같은 것은 한국적 상황을 가장 확실하게 꿰뚫고 있는 점이며, 순 한글 서적의 보급, 성경의 보급 등은 바로 한국 교회가 빠른 속도로 성장 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고 판단 된다. 그러나 네비어스 정책에 대한 비판 또한 만만치 않다. 예를 들면, 자치와 자급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오직 자기 교회만을 생각하고 네비어스가 강조한 협력의 정신을 망각하고 지나치게 개 교회주의로 흘러간 것은 네비어스 정책의 결함이라는 지적을 줄 곧 받아왔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개 교회 주의가 팽배되고 연합사업이 잘 되지 않은 근원을 여기서 찾으려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이는 네비우스 정책을 잘못 시행한 결과이지 정책 자체가 잘못되어 나온 결과는 아니다. 왜냐하면 네비어스는 협력과 연합을 누누이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과 교회연합운동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약소국 한국은 힘이 다스리는 냉엄한 국제 질서 속에서 비극적 역사를 맞게 된다. 한국이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은 연속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참히 짓밟힌 결과였다. 첫째는‘가츠라-태푸트밀약’이었고 둘째는 제2차 ‘영·일동맹(Anglo-Japan Alliance)조약"이고, 셋째는 로·일전쟁을 마무리하는 미국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맺은 ‘러·일조약’이다. 그러나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첫 번째 ‘가츠라-태프트 밀약’이었다. 1905년 7월 27일 일본 동경에서 미국 육군성 장관 윌리엄 테프트(W.H.Taft)는 당시 미국 대통령 데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belt)의 밀지를 받고 일본수상 계태랑(桂太郞:가츠라 다로)과 소위 ‘가츠라-테프트 메모’라는 비밀협정에 조인하였다. 이 협정은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고, 일본은 필리핀 군도에 대한 아무런 침략 의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 밀약으로 1882년 한·미간에 맺어진 조약은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비열하게 움직이는 ‘정글의 법칙’의 역사에서 힘없는 조선은 그렇게 강대국 사이에 먹이가 되었다. 이에 따라 그 해 11월 일제는 저 치욕의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압적으로 선포함과 동시에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1906년 2월 이등박문이 통감으로 와서 본격적으로 한국의 식민화를 구체화하였다. 원한경(H.H.Underwood)은 그래서 “일제의 한국 통치는 사실상 러·일 전쟁을 위해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1905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일제는 1907년에 정미(丁未)조약을 역시 강압적으로 맺어 한국의 경찰과 군대를 해산하고 사실상 국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1907년 '해아(海牙:Hague)밀사사건'을 트집 잡아 고종을 왕위에서 강제로 퇴위시켜 왕권까지 좌지우지하면서 급기야는 1910년 한일병탄을 이루고 말았으니 500년 조선왕조는 사실상 그 끝을 보고 말았다. 이때부터 시작된 일제의 한국 침탈의 역사는 저들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패퇴하여 이 강토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서운 박해와 착취로 점철되었다.이렇게 어려운 때에도 교회는 계속 성장하여 1907년에 독(립)노회(Independent Presbytery)가 조직되고, 1912년에는 장로교 총회가 창립되었으며 감리교회도 연회를 조직하여 선교와 교육에 전념하면서 때를 기다리게 되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었으며 장차 다가올 일제의 폭압에 교회가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비축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1907년의 대부흥운동에서 그 힘을 얻고 축적한데 원인이 있었다.
1. 대부흥운동
1) 기원과 진행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한국 교회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전기였다. 이 운동이 일어나게 된 데는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이 있다. 먼저 원인을 살펴보면 190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함경남도 원산 지방에서 선교하던 감리교 선교사들이 스웨덴 목사 프란슨(F.Franson)이 이 지역을 방문 했을 때 원산의 바닷가에서 기도회 겸 성경공부를 갖게 되었다. 이 기도회는 감리교 선교사들과 더불어 장로교, 침례교 선교사들과 일부 한국교인들도 참여하는 연합 기도회로 확대되어 그곳 창전(倉前)교회에서 매일 밤 일 주일간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기도회와 성경공부에 남감리교회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강원도에서 수년 간 선교활동을 하였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한 하디(R.A.Hardie, 河鯉泳 1865∼1949)가 자기의 무력을 깨닫고 통회 자복의 기도를 드린 것이 부흥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하디는 본디 캐나다 토론토대학 YMCA 소속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일하다가 1898년에 남감리교회에 가담하여 강원도에서 선교 활동을 한 선교사였다. 그는 개척 선교를 하였으나 별 진척이 없었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나는 3년 동안 강원도에 [남감리]교회가 처음 세워진 지경터(地境垈) 지역에서 애써 일하였으나, 거기서 사업에 실패하였다. 이 실패담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었고, 나는 일을 더 할 수 없으리만큼 기진맥진하였다. 라고 하여, 선교 사역이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선교사들 앞에서 솔직히 자기의 실패와 그 원인을 고백하였으며, 기도 중에 성령이 자기에게 임재 하심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 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많은 성신이 내 안에 충만하신 실증을 가지고서 나는 부끄러움과 혼미에 찬 얼굴로 나의 교만과 완악함과 신앙의 부족함과 또 그 상태가 빚어낸 모든 결과를 자복하였다. 이에 회중은 강한 죄의식과 회개로써 신앙생활의 깊은 체험상의 작용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단순한 신앙으로 내가 성신의 은사를 받았음을 알려 주었다.그 때 그 곳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하디의 적나라한 죄의 고백과 성령의 충만한 은사 체험을 목도하고 그들도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게 되어 부흥의 불길이 서서히 붙기 시작하였다. 이런 사경회는 이듬해인 1904년 정월에도 그 곳 원산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이 때 장로교 선교사 로브(A.F.Robb, 鄴亞力 1872-1935)는 “특은(特恩)을 받아 다일간(多日間) 금식통회(禁食痛悔)하며 가로상(街路上)에서도 간구부절(懇求不絶)”하여 성령의 체험을 하였고, 이런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러나 이런 은사의 체험은 원산을 중심한 일정 지역에 국한된 것이었고 넓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원산 지방의 부흥 소식을 들은 평양의 선교사들은 1906년 여름에 하디를 강사로 초빙하여 장·감 선교사들이 연합으로 일주일 동안 기도회로 모여서 성령체험을 갖고자 하였다. 그 기도회 후에 북장로교회 연차 총회가 서울에서 모였는데 이 때 뉴욕의 존슨(H.A.Johnson) 목사가 한국 방문 중에 인도와 웨일즈(Wales)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의 소식을 전하여 주었다. 존슨 목사는 또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한국 교인들을 상대로 한 집회에서 외국 교회 부흥의 소식을 전하면서, “조선에서는 누가 성령 충만을 받고자 하느냐? 원하는 자는 거수하고 기립하라”고 하자, 감히 응답하는 자 없었다. 당시 장대현교회 장로인 길선주가 감동하는 바 있어 거수하고 일어섰고 존슨 목사는 한국의 부흥을 예언하고 돌아갔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위하여 길선주를 미리 예비하여 놓으신 것이다. 선교사들은 나라 잃은 설움에 울고 있던 백성들에게 영적인 위안과 하늘의 소망을 일깨워 주기 위해 계속해서 사경회를 이끌고 나갔다.1907년 부흥운동의 직접적인 동기는 1907년 정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던 평안남도 남자 도사경회(都査經會) 성령의 불길이 떨어짐으로써 비롯되었다. 이 사경회는 정월 6일부터 시작되어 열흘 동안 계속되었다. 주로 성경공부를 하였으나 저녁에는 전도 집회로 모였다. 그런데 이 부흥의 불길이 붙게 된 동기 가운데 하나는 그 교회가 새벽기도회로 이 사경회를 준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전 해 가을부터 시작된 새벽기도는 길선주 장로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새벽기도야 말로 세계 어느 교회도 갖지 않은 한국 교회 특유의 기도회로써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길선주 장로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믿기 전에 행하던 관성교의 새벽 예불 습관이 남아 있었으므로 같은 교회 장로인 박치록(朴致錄)과 함께 국가의 어려운 상황을 염려하면서 새벽에 예배당에 나가 기도하였다. 이에 여러 교인들이 호응하여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후에는 300∼500명의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길 장로는 교회의 공식적인 허가 없이 매일 수백의 교인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당회로부터 정식 허가를 얻음으로써 공식적으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는 1906년 가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서 비롯된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는 수많은 동네의 조용한 새벽을 예배당에서 울리는 새벽 종소리로 깨우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겨울 바깥 공기는 살을 엘 정도로 혹독하게 차가웠고, 예배당 안도 뼈를 쑤시는 냉기로 가득 차 있었지만 교인들의 마음은 따뜻했고 기도의 열기는 뜨겁기만 했다. 따라서 1907년 대부흥운동의 원인은 두 가지 흐름, 즉 선교사들의 자성하는 성경공부와 길선주 장로의 새벽기도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이 운동은 선교사들의 ‘말씀공부’와 한국 지도자들의 ‘기도’가 서로 어우러져 이룩된 성령의 역사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말씀과 기도에 기인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과 기도로 준비된 사경회가 시작되어 리(G.Lee, 李吉咸 1861-1916) 선교사가 요한1서를 강론하면서 은혜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의 불길이 떨어졌다. 14일 저녁집회 때였다. 북장로교회 선교사 블레어(W.N.Blair, 邦偉良 ?-1970)가 고린도전서 12장 27절을 읽고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지체들이라.”고 설교한 후 성령의 불같은 역사가 시작되었다. 교인들은 교회 안에 신비한 힘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강한 성령의 역사가 임재 해 있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날 밤에 일어났던 현상에 대해 영국의 저명한 신문인 「더 타임스」(The Times)가 게재한 기사 내용을 옮겨 보기로 하자. 이 글은 영국의 세실(Sir William Cecil) 경이 직접 목도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가 ‘나의 아버지’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자 비상한 힘이 밖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와 온 회중을 사로잡은 듯하였다. 서양 사람들은 이 힘의 나타남을 폭공적(暴恐的)이라고 기술하였다. 거기 참석한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애절한 침통(沈痛)에 사로잡혔다. 각 사람의 마음에는 자기의 죄가 자기생활에 정죄 판결을 선언하여 주는 느낌을 가지게 하였다. 어떤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자기의 죄를 자백할 기회를 얻어 털어놓고 양심의 안정을 얻으려 하고, 어떤 사람은 말없이 있었으나 복받치는 괴로움을 억제할 수 없어 주먹을 쥐고 머리를 땅에 찧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자기의 죄과를 폭로하려는 거동을 막으려는 다른 힘과 싸우고 있는 경황을 볼 수 있었다. 이 때 선교사들은 어떤 사람들의 엄청난 죄의 고백을 듣고 어찌 할 바를 모를 만큼 놀라기도 하고, 또 이러한 기사를 생기게 한 능력이 강림하심을 보고 떨면서 그들이 평소에 사랑하던 한국인 제자들의 참회의 고통에 동정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집회를 끝내었으나 많은 한인 신자들은 온 밤을 새웠는데, 어떤 이는 기도하며 새웠고, 또 어떤 이는 심각한 심령의 싸움으로 새웠다. 다음 날 선교사들은 이 사태가 지나가고 거룩한 위로의 교훈으로 지난밤의 상처를 싸매게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또다시 이와 동일한 통회와, 이와 동일한 죄의 자백이 되풀이되었으며, 이러한 사태는 여러 날 더 계속되었다. 이 부흥의 불길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 부흥운동을 사실상 계속 이끌고 간 사람은 길선주 장로였다.
2) 길선주(吉善宙) 목사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 또는 “가장 위대한 한국 개신교 인물 중에 한 사람”인 길선주(1869-1935) 목사는 1869년 3월 15일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봉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길선주는 그의 부친이 말년에 얻은 자식이므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의 가정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생활에 곤란을 받지는 않았으므로 어려서부터 부모들의 기대 속에 일찍 글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가 열한 살 되었을 때, 당시의 관습에 따라 안주 성에 살던 신 협의 외동딸 선행 양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 1녀를 두고 해로하면서 말년까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길선주는 한때 병을 얻어 병도 고치고 도(道)도 닦을 겸 조용한 곳에 가서 수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용악산에 입산하여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때 그는 관성교(關聖敎)에 심취되어 그 교(敎)의 주문 보고문(譜告文)을 만독(萬讀)하였다. 그러나 관성교에서 더 이상의 영적 만족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관성교를 포기하고 스물한 살부터 선도(仙道) 수련에 몰두하게 된다. 길선주의 종교 편력은 다양했지만, 아무 것도 그의 영적 만족을 주지 못했다. 1893년 미국 북 장로교회 선교사 마펫(Samuel A. Moffett 馬浦三悅)이 처음으로 평양에 와서 선교의 교두보를 얻어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후에 그와 함께 신학교 첫 졸업생이 된 한석진(韓錫晋)이 그의 선교활동을 돕게 되었다. 길선주의 가까운 친구인 김종섭이 마펫과 교분을 가지면서 그에게도 기독교 신앙에 대해 탐구해 보라고 강권하면서, 여러 가지 기독교 교리서를 건네주었다. 학문적 탐구심이 강한 길선주는 그 책들을 탐독하면서 차차 기독교 진리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를 기독교로 이끈 결정적인 책자는 존 버니언(J.Bunyon)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었다. 그러나 그가 최종적으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것은 김종섭의 권유를 받고 기도 하던 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경험에서였다. 그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기 위해 깊은 명상과 기도에 열중하면서 결정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체험의 일단을 그의 아들 길진경(吉鎭京)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예수가 인류의 참 구주인지 알려 주옵소서.” 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옥피리 소리가 방을 진동하더니 요란한 총소리가 흔드는 소리에 선생이 깜짝 놀라는 순간, 공중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고 세 번 부르는 소리를 듣고, 너무 무섭고 떨려서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엎드린 자세대로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제 죄를 사하여 주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그 때 비로소 마음이 터지고 마음이 열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아 방성대곡하였다.…… 선생의 기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마음에는 기쁨이 용솟음치고 감사한 눈물이 샘물처럼 넘쳐흘렀다.…… 예수가 구주임을 알게 해 달라고 상제께 기도드릴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순간에, 선생은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다.
길선주는 19세에 관성교에 입문하여 29세까지 선도에 몰입하였다가, ‘아프리카의 성자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결국 기독교에서 그의 영적 만족을 얻게 된 것이다. 1897년 7월 12일 29세 되던 해에 그레이엄 리(Graham Lee)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길선주의 기독교 입문에 대해, 김린서 목사는 경하할진저! 선생의 입신하던 날은 조선 교회의 지대(地帶)에 한 큰 초석을 정하던 날이요, 선생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시작하던 날은 조선 교회의 건설 공사를 시작하는 날이었다. 조선 초대교회에 선생을 불러 내세운 주님은 당신의 경영을 위하여 축복의 손을 조선 위에 펴신 것이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길선주의 개종 이야기는 미국 만국주일공과에 게재된 바 있으며 또한 독일의 어떤 교회학교에서는 이 이야기에 감동한 나머지 헌금을 보낸 일까지 있었다. 길선주는 개종하던 해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영수(領袖)직을 받았고, 33세 되는 해에 장로로 선출되었다. 1902년에 마포삼열 선교사는 선생에게 평양 장대현교회와 황해도 각 교회의 조사(助事:전도사) 임무를 맡겼는데, 그는 비록 보잘것없는 보수였으나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 일에 진력하였다. 1903년에는 당시에 마펫에 의해 새로 시작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교하여 1907년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 해에 설립된 독노회에서 안수 받고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무를 시작하여 20년 동안 목회하였다. 1926년 박윤근(朴潤根) 등이 유지회(有志會)를 조직하여 길목사와 당회를 배척하는 교회 분규가 일어났다. 결국 그를 따르는 500여 명의 교인들이 갈라져 나와 이향리(履鄕里)교회를 창립하여 길목사를 청빙하므로 그는 그곳에서 목회하면서 전국 교회의 부흥 사경회를 인도하였다.길선주는 1935년 11월 25일 평서노회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마지막 날 설교를 마친 후 강대 위에서 졸도한 지 하루 만인 26일 오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한국 교회가 낳은 위대한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었다.
3) 운동의 발전
기왕에 불이 붙은 부흥회는 길선주에 의해 더욱 불붙게 되었다.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을 사로잡았다. 길장로가 설교하던 때 현장에 있었던 정익로(鄭益魯) 장로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정경을 기록하였다. 처음부터 길[선주 목사]의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한때 완전 소경이었고, 당시의 시력도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위대한 권위와 권세로 차 있었다. 그의 얼굴은 순결과 거룩함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길목사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세례 요한에 대해 말하였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는지를 말하였다.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부르고 계셨다.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무서운 죄악들이 우리들 앞에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 이것을 떨쳐 버릴 수가 있으며, 어떻게 도피할 것인가 하는 것이 큰 의문이었다. 오, 하나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이 영감이 내리는 순간 길목사는 무리들에게 세례 요한과 같은 존재였다. 회개하라고 외치는 소리는 무리들에게 던져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떨어진 성령의 불길은 참석한 모든 사람의 마음을 태우고 더욱 확산되었다. 정월에 평양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2월에 각 급 학교가 개학을 하면서 여러 학교로 퍼져 나갔다. 숭실전문과 숭실, 숭덕, 광성중학교와 숭의중학교 학생 약 2,500명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어 심지어 초등학교 학생들까지도 부흥운동에 동참하였다.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사경회에 참석하였으며 3월에는 장로교회 부인 사경회가 12일간 열렸는데, 이때도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 모든 참석자들이 성령 체험을 하게 되었다. 4월 초에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이 3개월 만에 개강하는 교육을 받기 위해 학교에 모였을 때 교수(선교사)들은 학생들을 위하여 특별 사경회를 열었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강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서 학생들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새로운 각오로 사역자로서의 훈련을 받게 되었다. 한 선교사는 “장차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될 이 사람들은 성신의 불로 그들의 죄가 모두 태워져 버림을 체험하였다.”고 말하였다. 평양에서 시작된 이 부흥의 불길은 전국으로 펴져 나갔다. 선교사 하디, 져다인(J.L.Gerdine 全約瑟 1870-1950)그리고 길선주 등이 전국을 누비면서 교회가 있는 곳은 어디나 부흥사경회를 열었고, 성령의 강한 역사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길선주 목사가 서울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여 큰 은혜가 내린 사실을 「장로회사기」(長老會史記)는 “평양교회 길선주 장로가 경성에 내(來)하야 경기도 도사경회(都査經會)에 성신 도리(道理)를 교수할 시에 성신의 감동을 받아 각기 죄를 자복하고 애통하며 중생의 세례를 밧앗고 열심으로 전도하야 도내 각 교회가 크게 부흥하니라”고 기록하였다. 리 선교사는 선천으로, 헌트(W.B.Hunt 全緯廉 1869-1953)는 대구, 스왈른 (W.L.Swallen 蘇安論 1865-1954) 전남 광주로 가서 동일한 성령이 역사하는 힘 있는 집회를 계속 개최하였다. 1907년 한국을 방문했던 세계 YMCA 총무였으며 후에 세계기독학생연맹의 의장이었던, 세계 에큐메니컬운동의 지도자 존 모트(J.R.Mott) 박사가 한국 교회를 둘러보고 나서 다음과 같은 술회를 하였다. 근래 내가 극동을 순방하고 나서 나는 깊은 확신을 얻게 되었는데 만일 한국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선교부의 협력 사업이 계속되고, 또한 가까운 장래에 확대된다면, 한국은 비기독교 국가권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다. 내가 알기로 한국에서보다 더 크고 놀라운 선교의 결과가 나온 선교지는 없었다. 모트는 한국의 부흥의 열기에 젖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교인들의 숫자와 모든 교인들이 하나같이 열정적으로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 한국의 복음화가 눈앞에 와 있음을 보았고 한국이 피선교 국가 중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을 예견하였다. 그가 와서 보았던 상황은 적어도 그런 생각과 확신을 갖게 할 만큼 무르익어 있었다. 남장로교회 선교사 니스벳(A.M.Nisbet 柳西伯 1869-1949)도 한국이 이 세대 안에 복음화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모트 이전에 이런 말을 한 사람은 만주에서 선교하면서 의주의 청년들과 더불어 성경을 번역하고 복음을 선포하였던 존 로스였다. 그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기 거의 10여 년 전에 “한국은 동양의 국가들 중에서 기독교 국가가 되는 첫 나라 중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부흥의 열기는 중국에까지 퍼져 나가서 만주 지방에서 일하던 중국 교회 목사들이 평양에 와서 부흥회에 참석하고 은혜를 받아 본국에 돌아가서 부흥운동을 주도 하였다. 이 부흥의 열기는 심양, 요양, 만주, 그리고 북경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때까지 중국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기만 했던 우리 민족이 복음과 부흥을 그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은 참으로 가슴 벅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4) 운동의 결과
대부흥운동은 향후 한국 교회의 신학과 교회 형성에 지대한 결과를 남겨 놓았다. 우리는 여기서 그 결과 중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이 운동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게 하였으며 기독교 진리가 한국 기독교인들 마음에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여러 가지 동기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참 기독교 진리를 터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참된 회개와 성신의 감동,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결단하는 삶, 즉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됨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던 사당(祠堂 devil house)들을 이 부흥운동이 지난 후 헐어 버리는 사례가 빈번히 나타난 현상에서 이를 입증할 수 있다. 한 선교사는 부흥운동이 가져온 한국인들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이 신앙 체험의 결과로서……신자들 가운데 의와 죄의 의식을 심화한 것이다. 이 문제 대한 기독교의 교훈은 한인들에게는 생소하였다. 한인들에게도 죄와 의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들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 부흥은 교인들의 마음에 죄의 극심한 죄악성을 깨닫게 하여 주는 동시에 의에 살고 행하는 것이 우리의 평생 책임이 된다는 인식을 깊이 넣어 주었다. 특히 이때 많은 사람들이 회개 하는 중, 지금까지 유교적 관념으로는 전혀 죄로 여기지 않았던 축첩, 노비 소유, 조혼, 음주, 흡연, 아편복용, 아동구타 등의 죄악을 고백하고 참회하였다. 이에 따라 첩과 소실을 정리하고, 노비를 해방시키는 등의 기독교적 가치관에 따른 행위들이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한국 교회 형질(形質)의 정착은 앞으로 이 교회가 민족교회로서의 갈 길을 찾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1910년 에딘버러(Edinburgh)에서 모였던 국제선교협의회에서 한국의 대부흥에 대해, “신생 한국 교회에 독자적인 성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 것과 같이 한국의 독자적인 교회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는 한국 교회의 급격한 성장이었다. 어느 부흥운동이든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그러하듯, 1907년 전국 교회에 부흥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 필연적으로 나타난 결과 중 하나는 신자들의 전도에 힘입은 교회 부흥이었다. 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언더우드는 다음과 같은 통계 자료를 제시하였다. 1906년에서 1907년 사이에 장로교회의 성장은 세례자 수가 12,506명에서 15,097명으로 29%가, 원입은 44,587명에서 59,787명으로 15,200명이 늘어 34%가 증가하였다. 따라서 1906년의 교인 수 54,987명에서 1907년에는 73,844명으로 증가하여 34%가 증가한 셈이다. 감리교회도 역시 그 수가 증가 하기는 마찬가지여서, 1906년에 18,107명의 교인이 1907년에는 39,613명으로 무려 118%의 증가를 나타냈다.또한 부흥운동은 기독교 학교의 증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서 1906년 6월 현재 208개의 학교가 이듬해 같은 달에는 344개로 늘어나 무려 130개 이상의 학교가 증가되었다. 자연히 학생들도 늘어나 1906년에 3,456명이었던 학생 수가 이듬해에는 7,504명으로 늘어났다.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이 늘어났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늘어났다는 의미이고 이는 앞으로 일어날 항일운동의 선두 주자가 될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사실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이 학생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에 기미 3·1 독립운동이 촉발되었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셋째는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 교회의 특징이 확립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부흥운동은 길선주 장로가 주도한 ‘새벽기도회’라는 한국 교회의 독특한 기도회의 형태로 정착되었다. 새벽기도회야말로 세계 그 어느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교회 특유의 기도회 모습이다. 이 기도회에서 목회자들과 일반 교인들이 영적인 힘을 얻고,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소원을 아뢰어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는 귀한 기도의 시간이 되었다. 새벽기도회가 시작된 이래로 각지의 교회에서 새벽기도회가 실시되었다. 평북 강계의 한 교인은 개종하고 교회에 나오면서부터 새벽기도회에 출석하여 지금까지 16년간을 계속한다는 다음과 같은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장 셰샹에 드물고 모범 만한 일은 주문언(朱文彦)씨라는 로인이 16년 전 본 곳 교회 설립시로부터 례당에 와셔는 벽 긔도를 오날까지 계쇽다더라.” 이 새벽기도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회에 계속되어 오면서 교회의 성장과 영적인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기도하는 통성기도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일은 목격자의 기록에 의하면 이렇게 시작되었다. 간단한 설교가 끝나고 그레이엄 리(Graham Lee) 선교사가 사회하면서 회중에게 기도하자고 하자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시작하므로 그가 “여러분이 다 이와 같이 기도하기를 원하면 다 같이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니 온 회중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정황은 실로 글로 적을 수 없는 정도였다. 아무런 혼란도 없었고 도리어 심령과 심령이 호응하는 화음이 서리었고 기도를 올리고 싶은 충격을 저항할 수 없던 마음과 마음이 사귀는 심교(心交)였다. 기도 소리는 마치 폭포수 소리와 같아서 기도의 대해조(大海潮)가 하나님의 보좌로 밀려 올라가는 듯하였다. 부흥운동은 이렇게 통성기도라는 한국 특유의 기도 방법을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어 새벽기도와 함께 부흥운동의 결과로 남아 오늘까지 한국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주요 기도 방식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이 기간 중에 철야기도가 시작되었다. 저녁집회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으므로 멀리서 온 교인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교회에 남아 철야하면서 기도하고 다음 날 새벽기도회에 참석함으로써 철야기도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평양을 방문했던 영국 성서공회 본부 총무 릿슨 (J.H.Ritson)은 “사람들이 밤새 교회에서 기도하며 머물러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특징적 모습들 때문에 “기독교가 더 이상 서양의 종교가 아닌 것으로 묘사될 수 있었다.” 넷째로 에큐메니컬 정신의 구현이었다. 즉 대부흥운동을 통해서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 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형제 의식이 굳어지게 되었다. 그 동안 선교사들은 그들이 한국 교회에 복음을 가르쳐 주고 신앙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자연히 우월의식을 갖고, 언제나 위에서 가르치는 태도를 취했다. 반면 배우는 한국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항상 낮은 데 위치하는 등식이 은연중에 설정되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따라서 이런 구도 속에서 이 두 그룹들 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을 통과하면서, 선교사들도 자신들이 죄인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자신들도 언제나 선생이나 거룩한 자들로 남아 있을 수 없는 존재들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한 선교사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금년 (1907)까지 나는 다소간 한인을 멸시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니, 이 양자 사이에는 유사성이나 공동한 광장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왔다.……피상적으로 볼 때에는 서양과 정반대되는 일이 수천 가지가 있겠지만, 한인은 그 내심과 또 기타 근본적 인생문제에는 서양인 형제들과 꼭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전 생활을 신앙화 함에 있어 기도와 단순하게 어린 아이같이 의지하는 점은 동양이 서양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점이 보다 더 많을 뿐만 아니라 더 심오하기도 하다. 선교사들이 이제 한국의 교인들을 자기들과 동등한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되었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인에게 더 이상 선교사들은 선생으로 남아 있지 않고 같은 동료 형제로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부흥운동이 남긴 값진 결과였다. 이것은 특히 그 해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일곱 사람의 첫 졸업생이 나오고 목사안수를 받음으로써 이제는 한국 사람도 당당히 목사로 선교사들과 함께 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게 되었고, 평신도 선교사들과 선교사 가족들이 한국인 목사를 선생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도래된 데도 그 원인이 있었다. 이로써 부흥운동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임”(갈 3:28)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부흥운동의 에큐메니컬 정신은 교파를 초월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사경회가 장·감 연합으로 모이게 되었고, 두 교회는 서로 강단을 교류하였다. 특히 길선주 목사는 여러 감리교회에 다니면서 사경회를 인도하였고, 감리교회 목사들도 장로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초교파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부흥운동은 그 동안 눈에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그어져 있던 교파간의 간격과 갈등을 해소하는 좋은 결과를 가져 왔다. 이상에서 부흥운동의 몇 가지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결과를 검토하였는데, 이 운동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논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그들의 주장은, 이 부흥운동이 한국 교회를 비정치화(非政治化) 시켰고, 몰역사화(沒歷史化)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즉 선교사들은 1905년 을사늑약이 선포되고 한국이 점점 일제의 식민지화되어 가면서 이에 격분한 일반 시민들과 교인들 사이에 반일적 태도가 구체화되어 가고 무력항쟁의 소지가 높아간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한국 교회로 하여금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영적인 면에만 치중하게 하여 예수 믿고 천당에 가는 일에만 몰두하게 하였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교인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것들, 특히 정치적인 면에는 일체 간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 부흥운동을 주도했고, 그 결과 부흥운동이 끝나고 나서부터 한국 교회의 항일정신이 희박해졌고 교인들은 내적 신앙에만 치중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이런 시각의 대표적인 글을 하나 인용해 보기로 하자.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이러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민중의식과 사회 변혁적 열망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일제의 식민지 모순과 함께 봉건적 잔재를 떨쳐 버리려는 민중의 힘이 교회 공동체를 중심하여 응집되어지자 이를 복음의 변질로 우려하는 일부 보수적 선교사들이 정치 불간섭주의와 일제의 식민지 종교 정책으로 인하여 현실 모순을 도외시한 채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반역사적인 기독교가 되어 갔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부흥운동의 본원을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온 곡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부흥운동, 즉 성령운동이 선교사 몇 사람이 모여 성령운동을 일으키자고 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님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만이 주도하신다는 것은 성령론 첫 장에 나오는 내용이 아니던가? 또한 비정치화의 문제도 ‘교회와 국가’의 문제라는 커다란 명제에서 보아도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기 위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얼마나 처절한 투쟁을 벌였는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나온 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예컨대 1789년 미국의 헌법에서도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명문화했다는 것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교회는 반드시 비정치화 되어야만 한다.” 교회는 정치화할 수 없는 집단이다. 교회가 정치 집단화하여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수행하는 곳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렇다고 교회가 사회의 온갖 부조리나 구조적인 악이나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고 성경이나 읽고 기도만 하고 예배만 드리자는 뜻은 물론 아니다. 국가가 비 복음적인 일을 자행할 때는 당연히 교회가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할 수 있고, 또 사회의 부조리 척결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점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가 정치문제를 직접 교회의 모든 조직을 통해 대응해 나간다면 교회는 정치 집단이지 하나님의 교회일 수 없다. 교인 개인은 얼마든지 정치 집단을 만들 수 있고 정치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 자체가 정치화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문제는 천도교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1894년 동학군이 패배하자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 손병희는 진보회(進步會)라는 정치조직을 만들어 정부의 부패를 없애고, 필요하면 민중의 힘을 규합하여 조선의 정치적인 독립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의 책임을 맡은 이용구(李容九)는 진보회를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제의 앞잡이 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 소식에 접한 손병희는 크게 노하여 종교를 정치로부터 분리시켜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꾸고, 교육과 훈련을 통한 독립을 모색하고자 30개의 학교를 세우고, 1개 소 이상의 전도소를 만들었다. 부흥운동이 한국 교회를 몰역사화, 비민족화했다는 평가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비록 무력항쟁에 앞장서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참 그리스도인은 민족의 고난이나 국가 독립의 상실에 결코 무관심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 만일 어떤 기독교인이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은 그가 기독교 진리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이 고난에 처했을 때 항상 기독교인이 앞장선 사실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 볼 3.1 독립운동에서도 이 현상은 분명히 나타난다. 이런 맥락에서 부흥운동 후 교회가 비정치화, 몰민족적 모습을 보임으로써 적지 않은 민족 지도자급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분석하는 시각이 있다면 이것도 부흥운동에 대한 단견에 불과하다. 민족 지도자들이 교회를 떠난 것이 교회가 비정치화한 데 기인한다면, 그 지도자들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평가 할 수밖에 없다. 1907년 부흥운동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섭리하시고 역사하신 성령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통해 한국 교회는 비로소 민족교회로서의 틀을 잡아 나가게 되었다. 여기서 얻은 영력으로 앞으로 겪어야할 수난의 가시밭길을 헤쳐 나갈 힘을 비축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과거 일백 년 동안에 세계를 통하야 신긔독교(개신교)가 잘 발전되는 중 조선에서만큼 급속도로 발전된 일은 엇던 나라에서든지 보기 드문 사실이다. 조선의 40년간의 신긔독교의 통계표는 다른 나라의 일백 년간의 그것보다 더 나은 셩적을 보고한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2. 백만 명 구령운동(救靈運動)
1907년 대부흥의 물결이 2, 3년 지나자 부흥의 열기가 차차 식기 시작하면서 교인들의 열성이 기울기 시작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일제가 기왕에 시작하였던 한국 식민지화를 가속화하더니, 급기야 1910년 8월 한국을 강점 병탄하여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따른 사회의 불안과 모든 사람들의 좌절을 보면서, 교회는 이런 때에 낙담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을 일깨우면서 교회의 부흥운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이 운동이 곧 ‘백만명구령운동’(The Million Souls for Christ)이다. 이 운동은 1909년에 개성에서 감리교 선교사 스톡스(M.B.Stokes 導瑪蓮 1882-1968), 갬불(F.K.Gamble 甘保利 1880-1969), 리드(Miss W.T.Reid) 등 3인이 다시 한국 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당기기 위해 사경회와 기도회를 일주일 동안 갖기로 하고 한국 교인 몇 사람과 함께 산상기도회를 개최한 데서 비롯되었다. 기도회에 참석했던 선교사들은 1909년 9월에 개최되었던 남감리교회 연차대회에 참석하여 “20만 명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를 채택하도록 요청하여 채택되었다. 이 연차대회가 폐회된 후 바로 열렸던 복음주의선교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the Evangelical Missions)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에 참석한 위의 세 선교사들은 이 공의회의 전도 목표 채택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백만 명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였다. 여기서 백만 명 구령운동이 정식으로 출범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기독교 인구가 불과 몇 만 명 정도밖에 안 될 때 백만 명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실현하기 어려운 숫자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전 국민을 상대로 대전도운동을 벌이면서 그런 목표를 정하고 추진하게 된 것이다. 선교사 게일은 이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큰 운동은 한국에서 특별한 노력을 요청하는 것이다. 백만 명 구령이라는 소리는 민족의 실망이 절정에 다다른 이때에 널리 울려 퍼지고 있다. 자기의 잘못으로 파멸과 굴욕의 구렁에 빠져 자기 방위와 자주 정치의 능력을 상실한 이 나라 사람들은 만국 백성의 능멸을 받는 처지로 전락되고, 국가의 주권은 빼앗겼으며, 재정권은 남의 손에 넘어가고, 습관화된 사기와 기만의 생활이 끝났다. 오늘날에 와서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망국민의 판정을 받고, 더할 나위 없게 된 이 나라는 한 구세주를 찾고 있다. … 오늘이 전도할 날이요, 이곳이 전도할 그 곳이다. 활짝 열린 전도의 문 앞에 겸손하게 서 있는 수많은 백성과 초라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선교사들은 이때가 한국의 중대한 고비라고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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