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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편> ‘오직 은혜로’ - (37) ‘한국의 윌리엄 케리’ 언더우드/ 개화기 한국에 놀라운 선교 결실 이룬 ‘비전의 사람’

영국신사77 2017. 1. 29. 01:24

[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4편>] 개화기 한국에 놀라운 선교 결실 이룬 ‘비전의 사람’

<제4편> ‘오직 은혜로’ - (37) ‘한국의 윌리엄 케리’ 언더우드

입력 : 2017-01-22 21:58
[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4편>] 개화기 한국에 놀라운 선교 결실 이룬 ‘비전의 사람’ 기사의 사진
필라델피아 장로교 고문서실에 보관되어 있는 언더우드의 사진.

[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4편>] 개화기 한국에 놀라운 선교 결실 이룬 ‘비전의 사람’ 기사의 사진
언더우드가 1881∼1884년 다녔던 미국 개혁교회 소속 뉴브룬스위크신학교 도서관 전경으로, 언더우드 재학 시절 이용했던 그 모습 그대로이다. 필라델피아장로교 고문서실 제공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1859∼1916)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바로 그날 그를 파송한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라파엣애버뉴장로교회는 담임목사 카일러의 위임 25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교회 개척 25년 만에 출석교인 2000명이 모이는, 미국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장로교회로 성장했다. 설립 후 지금까지 역대 담임 목사는 7명에 불과했다. 한 목회자가 20∼30년을 섬긴 것이다.

필자는 언더우드의 발자취를 찾아 뉴욕대와 뉴브룬스위크신학교, 그리고 그를 파송한 라파엣애버뉴장로교회를 방문했다. 라파엣장로교회는 언더우드를 파송했던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교회 구석구석엔 평생 교회를 섬겨온 사람들을 기념하는 기념판이 붙어 있었고, 교회 사무실에는 언더우드 부부의 사진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다. 교회 서재에 들어서자 언더우드의 형 토마스 언더우드의 큼지막한 초상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필자는 지난 15일 주일 오전예배도 참석했다. 성령의 교통하심이 느껴졌고, 교우들은 밝고 친절했으며 낮선 방문객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해외선교와 부흥의 진원지 라파엣교회 

라파엣교회는 하나님께서 언더우드를 위해 예비해 두신 교회였다. 정오기도 부흥의 불길이 뉴욕 맨해튼 풀턴스트리트에서 미 전역으로 확산되던 1857년 브루클린에 설립됐다. 설립자 카일러 목사는 프린스턴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한 구(舊)학파 전통에 확고하게 선 부흥운동가였다. 역사적 기독교에 충실하면서도 성령이 충만했던 그의 메시지는 청중들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주었다. 그의 메시지를 통해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유명 인사들과 뉴욕 거부들은 복음의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교회는 설립 당시부터 부흥의 중심지였다. 해외선교도 활발했다.

“1884년. 한국선교회가 본 교회 교우 맥윌리엄스에 의해 조직되었고, 언더우드가 선교회를 이끌었다.”

라파엣교회 1884년 연혁이다. 온 교회가 열심을 다해 기도했고 그들의 재정을 모아 언더우드를 후원했다. 이 교회 교인이자 ‘언더우드 타자기’ 대표인 형 토머스 언더우드는 이 일에 언제나 선두였다.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도 이 교회를 다녔고, 무디의 찬양 동역자 생키도 무디가 세상을 떠난 후 시카고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마지막까지 이 교회를 섬겼다.  

해외 선교운동의 토대가 된 ‘영 피플 협회’도 여기서 조직되었다. 카일러 목사의 리더십 하에 1863년 컴버랜드 스트리트 예배당, 1866년 프로스펙트 팍 예배당, 1886년 아틀란틱 애버뉴의 카일러 예배당이 차례로 분립됐다. 1857년 설립된 교회가 불과 25년 만에 교회 분립과 세계 선교의 중심에 우뚝 섰다.

학문과 경건의 요람 뉴욕대학교 

언더우드는 1877년 뉴욕대에 진학했다. 당시의 영적 분위기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그곳은 학문과 경건의 요람이었다. 학교는 학생들의 경건과 품행을 엄격히 감독했고, 모든 학생들은 반드시 채플에 참석해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려야 했다. 뉴욕 시내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통학이 가능했지만 거리가 먼 학생들은 반드시 시내 경건한 가정에서 기숙해야 했다. 학기 중에는 절대 시내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품행이 나쁜 학생들은 제적당했다.

당시에도 의과와 법과는 인기가 많았고 인문학과도 수준이 높았다. 1880∼1881년 뉴욕대 카달로그를 확인한 결과 언더우드는 인문학과생이었다. 당시 인문학과에 입학하려면 높은 수준의 수학, 라틴어, 헬라어 실력을 갖추고 입학시험도 통과해야 했다. 3학기로 운영되었고 학생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반드시 강의에 참석해야 했다. 1학년은 물론 2학년과 3학년 때도 헬라어와 라틴어가 필수였다. 고전어 강독뿐 아니라 매 학기 헬라어와 라틴어 작문도 필수였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모든 학생들은 반드시 헬라어와 라틴어를 6학기 수강해야 졸업했다. 언더우드가 상당한 고전어 실력을 갖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엄격한 신앙교육과 고전어 교육을 통해 체득한 뉴욕대에서의 인문주의적 소양은 훗날 언더우드의 학교 설립, 성경번역, 사전 편찬, 문서선교 등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1881년 5월 21명의 동료와 함께 뉴욕대를 졸업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이끌린 한국 선교 

대학을 졸업한 언더우드는 미국 개혁교단의 뉴브룬스위크신학교에 진학했다. 1784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학교다. 당시 교수진은 소수였지만 우수했고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했다. ‘한국, 은둔의 나라’의 저자인 그리피스도 언더우드의 10년 선배다. 이 둘은 캠퍼스에서 처음 만났다. 뉴저지 뉴브룬스위크에 위치한 캠퍼스에는 언더우드의 체취가 가득했다. 1875년 완공된 도서관은 언더우드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고, 그가 모교에 보낸 저술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가 보던 많은 저서들도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

해외선교를 꿈꾸던 언더우드는 1884년 2월 성서공회 기록에 실린 조선의 ‘마게도냐인’ 이수정의 편지를 읽었다. 이 편지는 선교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에게 한줄기 빛을 비췄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이수정의 ‘진지한 호소’를 접하고 그의 심장은 ‘꿈틀거렸다.’ 개혁교회에 낸 한국 선교 청원이 거절되자 그는 1884년 7월 10일 미국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청원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 엘린우드로부터 라파엣장로교회 맥윌리엄스가 재정을 후원하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라파엣교회는 바로 한국선교회를 결성했고 선교부는 언더우드를 후보로 내정했다. 

성령께서 하신 놀라운 한국 선교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909년 1월 미국 북장로교 총회 소식지는 한국 선교 25년의 결실을 이렇게 집약했다. “한국에서 놀라운 사역이 계속되고 있다.…한국에서의 사역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오순절(Pentecostal)’이다.” 다시 그로부터 10개월 후 1909년 10월 15일 라파엣장로교회에 언더우드가 보낸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 편지에는 한국 선교 25주년 기념식 소식과 그동안 이루어진 놀라운 선교 결실이 담겨져 있었다.

“글로는 한국 선교의 결실을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한국 선교 첫 25년 동안 하나님께서 너무도 놀라운 진보를 이룩하셨습니다. 그 결실들은 우리 모두의 심령을 감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놀라운 결실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덧붙였다. 

언더우드는 비전의 사람이었고 새뮤얼 마펫이 증언한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라”는 ‘현대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케리의 신앙 소유자였다. 중국에 허드슨 테일러가 있고, 아프리카에 로버트 마펫과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있고 인도에 윌리엄 케리가 있다면 한국에는 언더우드가 있다. 복음전도 교육 의료선교 성경번역과 문서선교 연합운동에 이르기까지 언더우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만약 사도행전 29장이 기록된다면 그 주인공은 언더우드다. 

글·사진 박용규 총신대 역사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