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인사이드피치] 승리 이상 그 무엇, 스포츠의 본질
평범함으로 영웅이 된 그들…리베라·유코·클롭
[중앙선데이] 입력 2019.02.09
무라카미 하루키가 2008년 쓴 『승리보다 소중한 것』 후반부에 일본 여자 마라토너 아리모리 유코에 대한 스토리가 있다. 하루키는 유코를 표현하는 글에서 이 책의 대표적인 문장을 등장시킨다.
“물론 나는 승리를 사랑한다. 승리를 평가한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기분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 승리 이상으로 ‘깊이’를 사랑하고 평가한다.
때로 인간은 승리하고, 때로 패배를 맛본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삶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라는.
‘금보다 땀’ 보여준 마라토너 유코
된 사람 표본 MLB 끝판왕 리베라
‘귀족보다 위대한 평민’ 클롭 감독
단순하면서 솔직하고 기본에 충실
진정한 스포츠 스타로 각광받아
결과 지상주의에 빠진 한국 반성을
유코는 마라토너다.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여자 마라톤 은메달을 땄다. 2시간 32분 49초로 1위 발렌티나 예고로바에게 8초 뒤진, 아쉬운 결과였다. 유코는 이후 부상과 목표 상실로 3년 동안 제대로 뛰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다시 금메달에 도전했다. 많은 기대 속에 펼쳐진 레이스에서 유코는 스타디움 트랙에서 추월당하는 아쉬움 속에 동메달에 그쳤다. 그러나 그때, 유코는 그 ‘아쉬움’이라는 세상의 보편적 관점과는 전혀 다른 소감을 내놓았다. 그때 유코는
“메달 색깔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내가 나를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그 말은 1996년 일본 신조어 유행어 대상을 받았고 유코는 TV 여론조사에서 ‘1년 동안 가장 열심히 산 사람’으로 선정됐다. 그는 하루키가 승리보다 소중한 것에서 말한 바로 그 의미, 승리 이상으로 ‘깊이’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그 ‘깊이’를 보여 주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 마라톤 해설자로 나선 유코는 하루키와의 인터뷰에서 선수로서의 소신을 이렇게 피력했다. “저는 그게 (금메달을 따려면 일부 인간적인 삶은 포기해야 한다는 당시 일본 마라톤팀의 지도방식)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결혼하고 가정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경기에 임할 수 있는 것. 그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선수이기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엉뚱한 얘기로 들릴지 모르죠. 선수라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게 가장 중요해 보일 테니까요.”
유코 “내가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지난해 11월 9일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일본 교육문화과학체육기술부, 도쿄 2020 재단 등과 협력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그때 일본을 대표해 게이츠와 나란히 선 인물은 어떤 정치인이나 기업가가 아니었다. 두 번의 올림픽에서 인상적인 레이스를 펼친 뒤 현재 유엔인구기금 친선 대사로 활약하고 있는 유코였다. 그는 그렇게 승리와 패배를 지나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가고’ 있다.
지난달 23일 미국 야구기자협회는 명예의 전당 투표 역사상 처음 만장일치로 마리아노 리베라(전 뉴욕 양키스)의 헌액을 결정했다. 파나마 출신의 리베라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무리 투수였다. 그는 통산 652세이브를 기록해 가장 많은 승리를 지켜냈다. 그렇다고 모든 게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끝내기 안타를 맞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내준 적(2001년)도 있고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단기전에서 연속으로 세이브 기회를 날린 아픔(2004년)도 있다. 그가 역대 최초 만장일치 입성자가 된 비결은 승리를 지켜낸 숫자와 우승반지의 개수보다 야구장 밖에서 보여 준 그의 모범적인 생활과 팀 동료와의 원만한 관계, 선수 이전에 사람으로서 더 존경받을 만한 인품의 배경이 더 크다. 그는 최고의 선수였지만 소시민적 삶을 살았다. 혹시 누군가 리베라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기는 싫더라도, 들어갈 수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세상의 정서가 있었다.
양키스 시절 동료이자 ‘캡틴’ 데릭 지터는 리베라의 명예의 전당 입성이 결정된 날 스스로 쓴 헌사에서 “그에게서 가식적인 면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차분하고, 명쾌하게 자신의 몫을 한다. 그는 조용하며, 사려 깊고, 진지하다. 신념의 상징이다”고 표현했다.
리베라는 작가 웨인 코피와 함께 쓴 자서전 『더 클로저(The Closer)』에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최상의 방법은 ‘심플함’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역자는 “야구를 대하는 리베라의 태도는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걱정하거나 섣불리 예상하는 것,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들어가도록 하는 것은 득이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심플하게 생각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말해 준다”는 서평을 썼다.
지금 프리미어리그 감독 가운데 대세는 위르겐 클롭(리버풀 FC)이다. 그는 2015년 10월 리버풀 감독으로 부임한 뒤 첫 기자회견에서 “아마도 나는 노멀 원(normal one·평범한 사람)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스페셜 원(special one·특별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지닌 주제 무리뉴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을 의식한 말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상징으로 내세운 평범함과 정직함에 주목했다. 그는 자신의 현역 시절에 대해 “나는 5부리그 수준의 재능과 분데스리가(1부리그)의 정신을 가졌다. 그래서 결국 2부리그 팀에서 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선수로서 마인츠 한 팀에서만 활약한 뒤 34살의 나이에 은퇴한 클롭은 2008년 분데스리가 2부리그 팀 마인츠 감독을 맡아 2년 만에 1부로 승격시켜 주목을 받았다. 그 뒤 도르트문트로 옮겨 3년 차인 2010~11시즌부터 리그 우승 2연패를 차지해 스타감독 반열에 올랐다. 분데스리가의 절대지존 바이에른 뮌헨을 제치고 우승한 것도 화제였지만, 2012년 시즌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서 무리뉴의 레알 마드리드를 침몰시킨 것이 그를 스타로 만들었다. 리그에서는 뮌헨이라는 거함을, 챔스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와 무리뉴라는 절대자의 상징을 무너뜨리며 클롭에게는 ‘귀족보다 위대한 평민’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는 퍼거슨처럼 고고하지도, 무리뉴처럼 언론과 언쟁을 벌이며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늘 솔직하게 말하고 조깅복을 입은 채로 그라운드에 나와 선수들과 거리낌 없이 스킨십을 한다.
클롭 “재능은 5부리그, 정신은 1부리그”
엘마 네벨링이 쓴 책 『위르겐 클롭』에 따르면 클롭과 유키, 리베라를 연결하는 이미지를 찾을 수 있다. 클롭은 스스로 “연극에는 전혀 소질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 이외 누구의 모습도 흉내 내지 않고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닌 인간적인 솔직함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한다. “세상의 이목에 관해서 말하면,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누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 말입니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저를 ‘정말 좋은 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고, ‘자기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우쭐대는 재수 없는 놈, 정말 거슬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양쪽 모두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제게 중요한 일을 신경 씁니다. 가족과 일, 저와 가까운 사람들이 저로 인해 이익을 볼 수 있도록 행동하려고 노력합니다” (『위르겐 클롭』 서평 중).
이처럼 유코와 리베라, 클롭의 케이스를 관통하는 어떤 개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다. 그들은 운동선수로서의 모습보다 일반 시민으로서, 평범한 인간 개체로서 자신들의 가치를 추구했다. 그 본질적인 가치를 위해 성적과 숫자가 주는 화려함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들이 보는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를 의식하기보다 소신과 신념을 갖고 자신의 가치를 추구했다. 그렇게 선수로서의 삶보다 인간으로서의 삶에 의미를 두고 살았기에 은퇴한 뒤에도 다른 사람의 표상이 되고 존경을 받고 있다. 금메달로 상징되는 성적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선수를 성적기계로 몰아왔던 우리 사회의 어른들이 뼈아프게 되새겨 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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