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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찬의 신명문가의 조건] [2] 샤토브리앙과 루소 가문, 부성애의 명암

영국신사77 2019. 1. 4. 20:06

[최효찬의 신명문가의 조건] 

[2] 샤토브리앙과 루소 가문, 부성애의 명암

조선일보
  •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 입력 2018.06.27 03:10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은 프랑수아 르네드 샤토브리앙(1768~1848). 

    프랑스 낭만주의 대표 작가인 그는 두 번의 장관과 영국 대사를 지내며 

    80세까지 정·관계와 외교가, 문화계를 누볐다. 

    하지만 브르타뉴 지방의 오래된 귀족 가문에서 

    그가 태어났을 당시 집은 파산한 상태였다.

    그의 아버지는 노예 매매까지 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 

    인근의 성(城)을 사고 백작 지위까지 얻었다. 

    그러나 무리한 행동의 업보로 아버지는 

    프랑스대혁명 중 혁명 세력에 의해 묘가 파헤쳐졌고, 

    형은 단두대에서 죽었다. 

    샤토브리앙 역시 영국에서 혹독한 망명 생활을 했다.

    특히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로 우울감에 젖었고 제대로 공부도 못했다. 

    큰 숲과 음산한 늪에 둘러싸여 있는 아버지의 저택에서 

    무뚝뚝한 아버지가 자아내는 공포 속에서 방황했다.

    샤토브리앙, 루소
    샤토브리앙, 루소
    샤토브리앙이 변신한 것은 그가 스무 살 무렵이었다. 
    막연한 충동으로 미국 여행을 떠나려는 샤토브리앙에게 
    아버지는 육군 소위 사령장을 얻어주었다. 
    궁정 등에서 장교로 복무하며 다양한 세상을 경험한 샤토브리앙은 
    그제야 강한 열망과 모험심을 가득 품은 젊은이가 돼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23세에 떠난 이 여행에서 그는 웅대한 자연에 매혹됐고 큰 영감을 받았다. 
    미국 체류 때 접한 인디언들의 삶의 무대를 배경으로 
    그의 대표작 '나체즈족'이 탄생했다.

    샤토브리앙은 아버지의 결정적인 '역할' 덕분에 
    비극적인 가족사와 소년기의 악몽을 딛고 일어섰다. 
    그는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문인의 길을 걷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샤토브리앙처럼 될 것,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위고가 말했을 정도로 
    당대 젊은이들과 후대에 많은 감화를 준 영웅이 됐다.

    샤토브리앙의 아버지는 사회적으론 '나쁜 인간'이었으나 
    아버지의 역할을 잊지 않고 아들에게 새 길을 열어주는 부성애를 발휘했다. 
    그것이 작가와 정치인·외교관으로 샤토브리앙이 족적을 남긴 원동력이 됐고, 
    그의 가문은 폐족에서 기사회생했다.

    샤토브리앙의 소년 시절 유럽 사상계를 풍미하던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정반대였다. 루소는 교육사상서인 '에밀'을 썼지만 엽기적인 아버지였다. 
    그는 자신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면서 5명의 자녀들을 고아원에 맡겨 
    나중에는 아이들의 행방조차 모르게 됐다.

    스위스에서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는 
    어머니가 자신을 낳다가 죽었고, 
    10세 때는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작은아버지에게 맡겨져 심부름을 하며 힘든 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불행을 자녀에게 고스란히 물려줬다. 
    부성애를 망각한 아버지 루소의 이기심(利己心)은 당연히 가족 해체로 이어졌다. 에리히 프롬은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아버지는 자녀에게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길을 지시해주는 사람이다"고 했다. 부성애는 자녀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등대의 역할을 한

    다. 

    명문가의 시작은 부성애에서 출발한다. 
    "너무 바빠서 도저히 아들을 돌볼 수 없다고 말하는 부유한 아버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돈에 눈이 어두운 인간들이여! 돈으로 아이에게 아버지를 사줄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그릇된 부성애를 질타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 글귀는 루소의 '에밀'에 나온다. 

    부성애는 결코 돈으로 살 수도, 대신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