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공부한 제1세대 중국 유학생인 쑹자수는 6명(3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쑹아이링은 중국은행 총재를 지낸 거부 쿵샹시(孔祥熙)와, 쑹칭링은 신해혁명의 주역인 쑨원(孫文)과, 쑹메이링은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각각 결혼했다. 세 자매는 각각 돈, 나라(중국), 권력을 상징한다. 또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장남(쑹자원)은 31세 때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재정부장과 외교부장을 지냈다.
쑹자수가 명문가를 이룬 데는 미국에서의 대학 교육, 기독교 수용, 차별 없는 혁명을 꿈꾼 쑨원과의 만남, 이 세 가지가 전기(轉機)로 작용했다. 그는 결혼도 대학 졸업 후 상해에서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다가 했다. 부부 모두 독실한 감리교도였는데 아무리 바빠도 밥상머리 자식 교육을 빼놓지 않았다. 특히 중국인에게 꼭 필요한 선진적인 자질, 즉 시간 엄수와 솔직한 대화 태도, 효율적인 일 처리, 인맥이나 사회적 지위보다 능력과 개성을 중시하는 자세를 키워주려 했다.
또 바깥 세계를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큰딸 아이링을 1904년 중국 여성으로 처음 미국 유학을 보내 웨슬리언여대에 입학시켰다. 1908년에는 열다섯 살의 칭링이 열두 살짜리 동생 메이링을 데리고 도미 유학하도록 했다. 지성과 미모, 부를 겸비한 세 자매는 유학 후 귀국해 중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