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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찬의 신명문가의 조건] [1] 괴테와 로스차일드 家門의 '결정적 차이'

영국신사77 2019. 1. 4. 19:58

[최효찬의 신명문가의 조건] [1] 

괴테와 로스차일드 家門의 '결정적 차이'

  •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입력 : 2018.04.04 03:10

동서고금을 통해 역사상 자녀 교육으로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가 회자된다. 여관업을 하던 아버지로부터 거액을 상속받은 괴테의 아버지 요한 카스파어는 명예직인 황실고문관을 재력으로 얻었지만 평생 직업을 갖지 못했다. 

신분적 지위에 콤플렉스를 느낀 아버지는 아들 괴테에게 가정교사를 두고 
문학과 예술, 외국어, 종교 등 전 과목에 걸쳐 과외를 받게 했다.

괴테의 어머니인 카타리나는 독일어를 겨우 해독할 정도였지만 
전래동화를 들려주는 '베드사이드 스토리텔링'으로 아들 괴테의 교육에 일조했다.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왼쪽)와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紋章).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왼쪽)와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紋章).
이렇게 '만들어진 천재' 괴테는 
25세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천재 탄생을 알렸고 
33세에 오스트리아 황제 요셉 2세로부터 귀족 칭호(von)를 받았다. 
프랑크푸르트의 괴테하우스는 
지금도 세계적인 자녀 교육의 '성지(聖地)'로 꼽힌다. 

정작 괴테 본인은 어땠을까. 괴테는 네 아이를 사산(死産)한 끝에 
41세에 늦둥이 외아들 아우구스트를 두었다. 

그런데 괴테는 그를 늘 과잉보호했다. 
아들의 학습, 대학 진학, 취직, 여행, 군 입대 문제까지 직접 챙겼다. 
전쟁 기간에는 상부에 청탁해 아들을 전투에서 빼돌리고 
대신 후방에서 군수품을 공급하는 일을 맡도록 했다.

괴테 역시 요즘 일부 부모처럼 자녀 문제에서는 이기적인 아버지였던 것이다. 
평범한 아들은 천재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채 알코올중독에 빠졌다. 
결국 이탈리아 여행 중 41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아들도 자신처럼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영감(靈感)을 얻고 
'제2의 탄생'을 하기를 바랐지만 괴테의 이 꿈은 물거품이 됐다.

괴테 전기(傳記) 작가에 따르면 
괴테는 26세에 고향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바이마르로 간 이후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냉담했다. 
고향에 있는 어머니 카타리나를 3번밖에 찾지 않을 정도로 외면했고 
어머니의 마지막 11년간은 혼자 살 정도로 방치하다시피 했다.

괴테는 아내와 39세에 동거를 시작해 18년 후에 결혼식을 치렀다. 
그럼에도 70세를 넘긴 말년까지 여성 편력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그의 임종은 아내도 아들도 없이 손자·손녀가 쓸쓸히 지켰다. 

괴테 가문은 손자 발터 볼프강에서 끝나 1885년 3대 만에 막을 내렸다. 
이렇게 짧은 영광의 이면에는 가족에 대한 그의 처신도 한몫했다.

 

괴테의 명성이 자자하던 시기에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에서 
사채업을 시작한 유대인이 있었다. 
훗날 '국제금융 황제' 로스차일드를 일으킨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1744~1812)였다. 
그가 세운 금융 제국은 
지금까지 8대, 250년에 걸쳐 명성을 유지해 오고 있다.

흥미롭게도 로스차일드가(家)는 
자녀들에게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장려했고, 
자녀들은 여행이 주는 모험과 도전, 자유와 해방감을 즐겼다. 
다음 세대를 맡을 '젊은 로스차일드'들을 여행을 통해 단련한 것이다. 

가족 간 끈끈한 결속력도 유지했다. 
마이어 암셸은 
"형제간에 화합하라. 흩어지면 번영은 끝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관통하는 철칙(鐵則)이 됐다.

비슷한 장소와 시기에 도약을 시작한 괴테가와  로스차일드 가문은

21세기 가족 해체 시대에 가족의 중요성과 자녀들의 여행·도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가족 결속력에서 두 가문은 판이했고, 

두 가문의 운명도 정반대로 달라졌다. 

때로 사소한 차이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데 두 가문이 그랬다. 

아울러 대문호 괴테조차 어쩌지 못했던 과유불급(過猶不及)은 

누구나 경계해야 할 교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