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聖地성화歷史[종합]

[사도바울행전] 31.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32.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라 /33.그리스도인 디도/34제자 디모데 /35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

영국신사77 2018. 2. 4. 20:52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II. 다메섹에서 안디옥으로(31)
[2766호] 2010년 08월 18일 (수) 15:43:47 [조회수 : 319]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십자가형(피카소,1930년).

고향 길리기아 다소에서 기도와 명상으로 지내던 시기의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모름지기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었던 때처럼 유대인의 비난에 반론하고 항변하며 성난 말투로 토론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유대인의 비난에 침묵하고, 비난과 욕설을 말없이 들으며, 깊이 마음에 새기면서 '자아'를 죽이는 데 힘썼을 것이다. 훗날 바울은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다.

"십사 년 전"은 바울이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 머물던 때인 주후 53년 가을에서 55년 사이를 가리키며, 바울이 다소에 있던 시기에 해당된다. 바울은 다소에 있던 시기에 명상하는 가운데 주의 환상과 계시를 보며, '십자가의 도'에 관한 신학을 완성했던 듯하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1~4).

바울이 다소에 머물던 이 시기는 주위의 반대와 비난의 소리에 귀를 막고, 오로지 하나님 안에 깊이 자아를 잠기게 하고, 마음 속 깊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큰 여러 계시"(고후 12:6)를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십자가의 도'인 바울 신학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주의 환상과 계시를 본 사실을 자랑하였다. 왜? "그가 낙원에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바울은 주의 환상과 계시를 본 영의 사람인 자기는 자랑하였으나, 육의 사람인 자기에 관하여는,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주의 환상과 계시가 지적이고 이론적인 신학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여 말하였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바울이 다소에서 주의 환상과 계시를 보고 서신을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전한 지 1천200년 후, 스콜라 학파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식'으로 조직신학서 '신학대전'을 집필하였다.

문항 수 8백, 책의 부피는 독일어 판으로 49책에 이르는 '신학대전'은 철학의 인식론 및 존재론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논리로 하나님과 도덕 그리고 영혼에 관하여 해설하고 있다.

심지어 신의 존재 증명까지도 지식으로 해명하려 하였다. 제1의 증명은 사물의 운동, 제2의 증명은 작용인(作用因)의 근거, 제3의 증명은 가능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의 근거, 제4의 증명은 여러 사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완전성의 관계, 제5의 모든 것이 지니고 있는 목적의 근거라는 식이다.

'신학대전'은 오늘날에도 가톨릭 신학의 기본이며 교리이다. 그러나 저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제3권 전 12책 중 7책까지 쓰고 나서 갑자기 집필을 중단하였다. 제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보니, 내가 쓰는 것이 너무 초라한 내용이었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라
II. 다메섹에서 안디옥으로(32)
[2767호] 2010년 08월 25일 (수) 15:21:27 [조회수 : 423]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가시관(마네시에).


신약성서 외경에 바울에 관한 중요한 문서 3권이 있다. '바울행전' '세네카와 바울의 왕복 서신' '바울묵시록'이다. '바울묵시록' 서두에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 후 고린도후서 12장 1~5절을 인용하고, 이렇게 이어진다.

"바울은 셋째 하늘까지 이끌려 간 사람이 마치 자기가 아닌 제삼자인 것처럼 '그'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는 '그'라고 가리킨 사람이 실은 바울 자신이라는 것을 밝히 알 것이다. 이 '사도 바울의 묵시'는 바울이 그때에 체험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참고로 '바울묵시록'의 구성은, ①발견의 경위(1~2장), ②피조물의 호소(3~6장), ③천사의 보고(7~10장), ④죽음과 심판(11~18장), ⑤낙원 제1(19~30장), ⑥지옥(31~44장), ⑦낙원 제2(45~51장), ⑧맺음말(51장)로 되어 있다.

"내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을 때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셨다. - 이것을 사람들에게 권하라. 너희가 어느 때까지 범죄하여 창조주를 노여워하게 하려는가. 너희는 스스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고 일컬으면서 악마의 일을 행하고 있다"(3장).

"보라, 인자들이여,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만은 범죄하고 있다. 인자들아, 끊임없이 특히 해가 저무는 때에 주 하나님을 찬미하라. 해가 저무는 때에는 모든 천사가 주 앞에 나아가 그를 예배한다"(7장).

"나는 다시금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그때에 천사가 내게 말했다. - 따라오라. 의인들이 죽은 후에 이끌려 가는 곳을 네게 보여 주리라. 그리고 이어 너를 저승으로 안내하여, 죄인들이 죽은 후에 그 혼이 어떤 곳에 이끌려 가는 지 보여 주리라"(11장).

"천사는 나를 셋째 하늘에 이끌어 가서 문 옆에 앉게 하였다. 내가 주의 깊게 살펴보니 그 문은 황금으로 만든 문이었다. 그 문 앞에 황금 기둥이 두 개 있었고, 거기 걸려 있는 두 황금 판대기에는 글자가 가득히 씌어 있었다.(19장)

"멀지 않은 곳에 한 노인이 있었다. 천사 넷이 그를 불의 강에 던지고, 돌을 던져 그 얼굴을 상처지게 하였다. 천사는 내게 그가 누구인지 가르쳐 주었다. - 네가 보고 이는 것은 교회의 감독이었던 사람이다. 그는 생전에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행하지 않았었다"(35장).

"한 곳에서는 남녀들이 추운 곳에서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주여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셨다는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육체는 부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42장).

"나는 내가 본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내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이 비밀을 밝힐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길리기아 다소의 내 집 벽 아래 묻었다. 그러나 내가 죽어서 주 앞에 섰을 때에 주께서 말씀하셨다. - 바울아, 내가 환상과 계시를 네게 보여 준 것은 땅에 묻어 두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진리의 길에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라"(맺음말).



헬라의 그리스도인 디도
II. 다메섹에서 안디옥으로(33)
[2768호] 2010년 08월 31일 (화) 19:33:32 [조회수 : 654]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그레데 섬의 디도교회 유적.
길리기아 다소에서의 10여 년은 바울에게 훗날 눈부시게 전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정신적 활력이 키워졌고, 강하고 굳센 신앙이 자란 시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도'의 신학이 이룩된 시기였다. 

가족과 열성적인 바리새인들은 바울을 외면하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의 친구 중에는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그들이었다(롬 16:7).

이 두 사람은 어느 유월절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을 것이다. 다소에서는 주위의 압력이 심하여 새 신앙을 드러내지 못하다가, 바울을 만나고서 신앙이 다져져 훗날 그리스도 신앙 때문에 바울과 함께 옥살이를 한 신앙인들이다.

세월이 지난 후 다소 대학에서 바울을 강사로 초청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다소 대학은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대학과 더불어 헬레니즘 세계의 3대 대학 중 하나였다. 당시 대학에서는 스토아 철학이 학문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바울은 다소 대학에서 회심을 통하여 새로 믿게 된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도'를 힘있게 강의하였을 것이다. 그 대학 수강생 중에 헬라 청년 한 명이 있었다. 디도였다.

디도는 바울의 강의에 크게 감동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바울에게서 신앙 지도를 받아, 마침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얻게 된 헬라인 신도 제1호였다(갈 2:3).

디도는 바울 가까이 있으면서 신앙 지도를 받았다. 훗날 바울이 바나바의 권유에 따라서 시리아 안디옥에 갔을 때에 디도가 동행하였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일 년 동안 복음을 전할 때에 디도는 바울을 모시며 신앙이 성장하였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바울 당시의 대학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학과는 달라서, 특별히 임명된 교수가 없었다. 각 지방을 순회하는 교사들에게도 자유롭게 개방되어, 자기 자신의 학문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사례비는 수강생들이 자발적으로 사례하였다.

바울이 고향 다소에서 가족과 유대교도들에게서 비난을 받고 있을 때에, 오로지 다소 대학에서의 자유로운 강연 활동만이 그의 주장과 그리스도 신앙을 간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디도를 얻은 것은 바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안디옥에서 바울과 함께 지낸 디도는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바울과 동행하여 예루살렘에 가게 되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행 11:29) 그 일을 바나바와 바울에게 맡겼던 것이다. 바울은 디도가 동행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갈 2:1~3).

김희보 / 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보라,바울의 제자 디모데
II. 다메섹에서 안디옥으로(34)
[2769호] 2010년 09월 07일 (화) 10:36:25 [조회수 : 1384]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디모데(12세기,스테인드글라스).
길리기아 다소에서 처음 만난 젊은이 중 디모데가 있었다.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에 즈음하여, 실라와 함께 내륙 고원 지대인 루스드라에 갔을 때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행 16:1)라고 기록되어 있다.

헬라어 원문에는 '보라(idou)'라는 낱말이 있어서, 바울이 전혀 뜻하지 않게 디모데를 만난 감격스러움을 말해 주고 있다.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디모데에게 세례를 주었다. '보라'라는 감탄사는 그 이전에 다소에서 이미 디모데를 만났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여기 루스드라에서 그를 만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감정을 '보라'라는 감탄사가 말해주고 있다. 지난번 전도 여행 때에 신도가 된 사람이라면, 여기에 오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라'에는 그런 감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울이 다소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에 디모데는 그 수강생이었고, 다소라도 바울의 신앙 지도를 받은 것을 말해 주는 '보라'이다.

디모데는 다소에서 공부하던 때에 바울을 만났고, 외조모와 어머니를 통하여 배운 믿음(딤후 1:5)이 새로운 빛이 되어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 디모데는 그 무렵 디도와 같이 바울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으나, 바울의 '십자가의 도'에 관한 교훈에 크게 공감하는 학생이었을 것이다.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 때에 디모데는 다소의 대학생이었던 듯하다. 디모데의 외조모 로이스도 어머니 유니게도 유대인이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행 16:11).

토착 원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루스드라에서 헬라인은 지식 계층에 속하였다. 디모데의 가족은 루스드라에서 상류 가정에 속하였을 것이다. 외가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디모데는 신앙적인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는 교육열이 대단하던 시대였다. 헬라인인 디모데의 아버지는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루스드라에서 사흘길인 다소 대학에 유학을 보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디모데는 다소에서 바울의 강의를 듣고, 그리스도 예수의 신앙에 접하게 되었다.

제1차 전도 여행 때에 바울이 루스드라를 방문하였을 때는, 디모데가 다소 대학에 재학 중이기 때문에 만나지 못하였다.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때에 다시 루스드라를 방문하였더니, 뜻하지 않게 디모데를 만나게 되었다. 때문에 "보라!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라고 누가는 기록한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직후의 바울은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고, 또한 다른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명하기 위하여, 구약성서의 예언에 따라 그 해답을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다소에서 10여 년을 묵상하면서, 바울은 유대인뿐 아니라 널리 헬라인도 납득할 수 있는 '십자가의 도'의 신학을 이룩하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김희보 / 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이방인 선교의 전초 기지
II. 다메섹에서 안디옥으로(35)
[2770호] 2010년 09월 14일 (화) 15:15:14 [조회수 : 628]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다메섹의 아나니아의 집.
바울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회심 후의 비교적 조용한 내적 침잠의 생활을 하며, 밖으로는 소수의 친구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디모데와 디도 등 젊은이들의 신앙 지도를 하고 있을 때, 한편 시리아 안디옥에는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행 11:19)이 밀려들었다. 따라서 당시의 안디옥 교회는 새 신도들이 더하여 신앙의 열기가 타오르고, 복음 전도의 의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리스도의 신도들 중에는 지중해의 구브로와 아프리카 북해안 구브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헬라어를 말하였고, 유대인 이외의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행 11:20).

지금까지 유대인에게만 전해지고,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들의 테두리 안에서만 행해지던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가 이제 그 테두리를 넘은 것이다. 널리 이방인도 부르는 새로운 선교 역사, 이것은 실로 기독교 선교 역사상 획을 긋는 움직임이었다.

이방인을 향한 전도의 전초 기지 시리아 안디옥은 현재 터키의 동남쪽 끝 오론테스 강 남쪽, 표고 4백70m인 시르푀우스 산 북쪽 자락에 있다. 터키어로는 안타키야라고 일컫는다.

안디옥은 중간 시대에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재위 전 305~281)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서부 도시로 창설하였고, 기름진 평원과 통상 활동을 경제 기반으로 하여 번영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 장군으로서 '승리자'라는 별명으로 일컬어지던 니카토르는, 아버지 안티오코스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안디옥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주전 307년에 자기 부하 장병들 5천3백명을 이 도시에서 살게 하였다. 그 후 주전 64년에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하여 로마 속주 시리아의 수도로 정해졌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와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다음인 로마 제국 제3의 도시로서, 인구 50만 명 이상이 살고 있었다.

도시 북쪽 오론테스 강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거기에는 시리아 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오론테스 강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지중해에 닿는 실루기야 항구가 있다. 바울은 이 항구에서 배를 타고 전도 여행에 나섰다. 안디옥 북쪽에는 아마누스 산이 있고, 그 산을 넘으면 소아시아로서, 남쪽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이 뻗어 있다.

안디옥 시가는 성벽으로 둘러싸였고, 그 성벽에는 3백군데 이상 파수꾼의 탑이 있었다. 시가지의 주민은 본토박이 시리아 인 이외에 잘난 체하는 로마인, 쾌락을 탐하는 헬라인,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안디옥의 이방인 중에는 유대교에 관심을 가지고, 시나고그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하여 흩어진 그리스도인들 중 안디옥에 피신하여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이방인을 그리스도에게 안내하여 교회를 이루게 하였다.

안디옥 교회는 짧은 시간 안에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초대 교회의 제2 어머니 교회로 성장하였다. 훗날 안디옥 교회는 바울의 20년에 걸친 선교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적 기독교의 권위를 대표하고 있은 반면,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 교회를 대표하였고, 외국 전도의 근거지로서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이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가 있었다.

김희보 / 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