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聖地성화歷史[종합]

[사도바울행전] 21.다메섹에 가까이 가서/22.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23."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24.바울 회심기념일/25.회심,그리스도의 기적

영국신사77 2018. 2. 4. 20:49


다메섹에 가까이 가서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21)
[2756호] 2010년 06월 01일 (화) 12:36:20 [조회수 : 344]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다메섹, 유대인 회당 내부의 벽화들.

다메섹은 안티-레바논 산맥의 제벨 캇시운(표고 1220m) 산자락, 구우타 오아시스의 기름진 평원(표고 691m)에 자리잡고 있다. 이 평원은 바라다 강과 아와지 강으로 말미암아 곡창 지대를 이루고 있다.

도시 중앙에 아와지 강이 흐르고 있는 다메섹은 주전 10세기 무렵에는 아람 왕국의 수도였다. 주전 733년 이래로 앗시리아, 신바벨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의 순으로 지배를 받다가, 주후 1세기에 로마 제국의 속주 시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에 가자면 두 코스가 있다. 여리고로 내려가 요르단 골짜기를 거쳐 북쪽으로 향하는 동쪽 코스와, 사마리아에서 갈릴리 호수 서편 도시들을 지나 동북쪽으로 빠지는 서쪽 코스이다. 바울은 그 당시에 흔히 이용되던 서쪽 코스를 택했을 것이다.

바리새파의 간부들은 청년 바울의 열의를 흐뭇하게 생각하며, 다메섹으로 가는 데 필요한 소개장과 위임장을 바울에게 주었다. 바울은 성전 경비병 몇 명과 함께 나사렛 예수의 무리를 체포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향해 떠났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의 거리는 250km, 노새를 타고 실히 닷새는 가야 할 먼 길이었다. 청년 바울은 갈릴리 지역을 지나가며 나사렛 예수에 관해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스승 가말리엘의 발언을 상기했을 것이다.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사도들이 유대교 지도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을 때에 냉정한 율법학자 가말리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에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행 5:36~37).

청년 바울 일행은 마침내 시리아 국경을 넘었다. 한낮의 햇볕이 내려쬐는 모랫벌 건너에 다메섹의 성벽이 눈에 띄었다. 청년 바울은 자기가 개선 장군이나 되는 듯 우쭐거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바로 그 때에 큰 사건이 터진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가서 그리스도를 만나 회개하는 경위는 사도행전에 세번(9:3~9, 22:6~11, 26:13~18)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사도행전 9장 3~9절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리라".

사흘 동안 계속된 캄캄한 어두움 속에 하나의 그림자가 빛을 띠고 점점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의 모습이었다. 청년 바울은 그 때의 상황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김희보/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II. 다메섹에서 안디옥으로(22)
[2757호] 2010년 06월 08일 (화) 15:59:57 [조회수 : 406]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곳.

중세기의 전승에 따르면 바울이 나사렛 예수를 만난 곳은 다메섹 남서쪽 15km 지점인 제벨 엘 아스와드 산맥 북쪽 산자락(표고 779m) 코카브라고 한다. 여기에는 예로부터 바울의 회심을 기념하는 기념 예배당이 있었으나, 현재의 '코카브 바울교회'는 1965년에 신축한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청년 바울에게 헬라어가 아닌 히브리 말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시고, 이어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가시채는 "가축을 앞으로 몰기 위한 끝이 뾰죽한 막대기"이다. 청년 바울은 교회를 뒷발질하여 왔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바울이 상처지게 하였고,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따라서 정해진 방향으로 인도되고 있었다. '가시채'는 바로 나사렛 예수였다.

청년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죽음에서 부활한 나사렛 예수를 적대하여 왔다. 바울은 어리석게도 교회를 박해하였고, 그 박해를 통하여 유대교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것은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고생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청년 바울에게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행 26:16)고 명하셨다. 바울은 에스겔이 부르심을 받으며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셨다"(겔 2:2)는 말씀을 연상하였다. 나사렛 예수는 바울에게 사명을 주셨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6~18).

청년 바울은 나사렛 예수에게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하고 물었다. 주께서 바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행 22:10).

청년 바울은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미리 예약한 직가(곧은 거리)의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갔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행 9:8~9).

한편 다메섹 동문(東門) 근방에 나사렛 예수의 제자 아나니아가 살고 있었다. 그는 환상 중에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행 9:11)고 하는 나사렛 예수의 말씀을 들었다.

아나니아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시리아에서 예로부터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아나니아는 주 예수의 70명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스데반이 순교한 후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 닥친 박해를 피하여 다메섹에 피신한 터였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행 9:13~14).

김희보/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23)
[2758호] 2010년 06월 15일 (화) 17:41:20 [조회수 : 328]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바울의 소명(미켈란젤로, 바티칸 파올리나 성당).

영혼의 구원 사역은 본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제삼자를 통해서 행해진다. 청년 바울에게 가기를 꺼리는 아나니아에게 주께서 강하게 명하셨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5~16).

다메섹의 아나니아는 비록 주께서 청년 바울에 관하여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고 보증하셨으나 두려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청년 바울에게 가라고 거듭 촉구하셨다.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환상 중에 보았느니라"(행 9:12).

다메섹의 '직가(直街)' 곧 '곧은 길'이라는 거리는 시가를 가로질러 있었고, 그 양쪽으로 행인을 위한 인도가 나 있었다. 20세기에 들어 발굴한 결과 너비 20m의 포장 도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길거리를 따라 고대의 고린도식 기둥이 줄지어 서 있었고, 가게가 잇따라 있었다. "곧은 길"의 끝, 곧 도시 동쪽 끝에는 '동문(東門)'이 남아 있다. 이 문은 고대 다메섹을 에운 일곱 문 가운데 하나이다.

동문은 세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다. 가운데의 아치는 높이 11.5m에 너비 6m이고, 양쪽의 작은 아치는 중앙 아치의 반 가량인 크기이다. 유다의 집터에는 그 표지로 작은 이슬람 사원이 있다.

아나니아는 직가 유다의 집에 누워 있는 청년 바울을 찾아갔다. 그는 청년 바울에게 안수하며,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행 9:17)고 말하였다.

아나니아는 청년 바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서며,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명하였다. 청년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다. 그는 즉시 아나니아를 쳐다보았다.  아나니아는 청년 바울에게 말하였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그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청년 바울은 아나니아에게서 세례를 받으며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소명 의식을 분명하게 느꼈다. 그는 훗날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5~17).

다메섹 동문 북서쪽에 자리잡은 기독교인 구역에 아나니아가 살던 집 터에 지은 기념 성당이 있다. 좁고 가파른 돌층계를 내려가야 들어갈 수 있는 지하 예배당이다. 정면 강대 위에는 아나니아의 기도로 바울이 눈을 뜨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고, 좌우에도 바울과 관련이 있는 그림이 걸려 있다.

김희보 / 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바울 회심 기념일
II. 다메섹에서 안디옥으로(24)
[2759호] 2010년 06월 23일 (수) 09:28:48 [조회수 : 315]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26:15)('루이즈 드 라벨의 기도서' 그림, 15세기)

로마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의 교회력에는 성자 기념일이 있다. 바울 기념일은 베드로와 같은 날짜인 6월 29일이다. '사도 바울 회심 기념일'은 1월 25일로서, 원래 갈리아(프랑스) 지방에서 발생하여 9세기에 로마에서 받아들인 기념일이다.

신앙 위인의 전기를 모은 중세 시대의 책 '황금 전설'에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 예수를 만나고 회개한 날이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일이 있던 같은 해에 발생하였다. 그러나 달력상의 계산으로 같은 해라는 말이 아니라, 만 1년 동안의 기간이라는 의미에서 같은 해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짜는 3월 25일이었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한 날짜는 8월 3일이며, 바울이 회심한 날짜는 다음해 1월 25일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왜 사도 바울이 회심한 날짜를 다른 성인들이 회심한 날짜보다 더 뜻 깊게 여기는 것인가.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어느 죄인에게나 하나님의 사랑은 절망을 주는 일이 없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 하더라도 바울과 같이 거룩한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모범적인 예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둘째로 당시 바울의 박해 때문에 큰 슬픔을 당한 교회 신도들이 바울의 회심으로 말미암아 느끼게 된 크나큰 기쁨 때문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행하신 기적, 즉 한없이 과격한 박해자를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한 전도자로 변혁하신 위대한 기적 때문이다."

청년 바울의 다메섹 도상(途上)에서의 회심은, 그 사역을 행하신 그리스도 자신에게 기적이요, 그 일을 행하신 방법이 기적이며, 그 사건을 경험한 청년 바울 자신에게 기적이었다. 그 기적을 행하신 그리스도께서 청년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이 한마디 말씀에 청년 바울은 "주님, 누구시니이까?"하고 물었다. 이미 기적은 행해진 것이다. 청년 바울의 물음은 "주님, 주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하는 뜻이다. 이와 같은 대답을 하게 된 것 자체가 기적이다.

이 사건을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늑대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 늑대를 어린 양이 되게 하셨다. 예전에 흉악하게 날뛰던 늑대가 주님을 만난 후 순종하는 어린 양이 되었다."

청년 바울의 회심이 그리스도 자신의 기적인 또 한 가지 이유는, 청년 바울의 오만함을 하나님의 존엄하심으로 때리신 것이 아니라, 낮아지심으로 채찍질하신 사실이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그 위대한 지혜를 나타내셨다.

청년 바울의 "주님, 누구시니이까?"하는 질문에 주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다. 즉,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사람 예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당신의 하나님이라거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컫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일을 본받아서, 청년 바울의 오만한 비늘을 제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김희보 / 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회심,그리스도의 기적
II. 다메섹에서 안디옥으로(25)
[2760호] 2010년 07월 01일 (목) 10:38:28 [조회수 : 333]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바울의 회심(카라바조,1600년 쯤)

청년 바울의 회심이 그리스도 자신의 기적인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회심에서는 크신 인애하심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청년 바울이 교인들을 박해하려 하는 의지와 행위를 실행하고 있을 때에 회심하게 하셨다.

다메섹 도상의 청년 바울은 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는 교인들에 대한 협박과 그들을 모조리 잡아 살해하겠다고 하는 독한 숨을 쉬고 있었다. 또한 청년 바울은 악한 짓을 실행하려고 꾀하기도 하였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청년 바울은 악한 짓을 실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잡아오려고 예루살렘을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인애는 그와 같은 모든 악의 도상에서 청년 바울을 회심하게 하였다. 이 회심으로 청년 바울의 몸에는 세 가지 외적인 표지가 나타났다. 땅바닥에 던져졌고, 앞을 볼 수 없었으며,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다.

청년 바울이 땅바닥에 던져진 것은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고 명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청년 바울의 욕망이 낮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바울이 땅바닥에 던져진 것은 앞을 보지 못하게 되기 위해서였다. 그의 눈이 볼 수 없게 된 것은 새 사람으로 거듭 나기 위해서였다. 그가 새 사람으로 변화된 것은 주의 사도로 파견되기 위해서였다. 그가 파견된 것은 주 예수의 진리를 위하여 죽기 위해서였다."

미친 듯이 날뛰던 청년 바울은 징계의 채찍을 맞고 그리스도의 신도가 되었다. 늑대는 이빨이 뽑혀 어린 양이 되었다. 교회를 박해하던 자가 땅바닥에 던져져 복음의 선포자가 되었다. 방탕한 아들이 채찍에 맞아 택하심의 그릇이 된 것이다.

청년 바울이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그의 인식은 잔뜩 흐린 상태였다. 그는 앞을 볼 수 없던 사흘 동안에 명상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복음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배우고, 그리스도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높아졌다.

바울은 자기의 육신이 모든 선한 일에 대하여 온순하게 순종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기 육체에 고통을 주었다. 그의 육체는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온순하였다. 그는 굶주림을 견딜 수 있었고 만족할 줄 알았으며, 어느 곳 어떤 일에 대해서도 적응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리고 아무리 역겨운 일이라 하더라도 달게 받아 들일 줄 알았다.

사흘 동안의 금식 기도 후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행 9:18~19).

김희보 / 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