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聖地성화歷史[종합]

[사도바울행전] 11."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 12.십자가의 죄인 /13.예수를 보지 못하였느냐/14.바리새파와 사두개파 /15.바나바와 스데반과 빌립

영국신사77 2018. 2. 4. 20:46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11)
[2746호] 2010년 03월 17일 (수) 17:00:29 [조회수 : 867]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예루살렘 시온산의 '계명(닭의 울음)'교회.


청년 바울의 스승 가말리엘은 유대교 신학자 힐렐(주전 60쯤~주후 20년)의 손자로서, 힐렐 학파의 후계자였다. 힐렐은 유대교를 단지 유대인만의 종교가 되게 하려고 하는 좁다란 생각에 반대하여,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도 유대교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자유로운 입장의 사람이었다.

바울도 스승 가말리엘을 통하여 그 사상과 만났을 것이며, 율법 해석 문제로 적지 않은 내면의 갈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주 예수의 복음을 온 세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데 좋은 준비 과정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자기를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정의하였다. 이 경우 '바리새인'은 유대교도 중 엘리트층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을 호되게 꾸짖으셨기 때문에(마 23장) 우리는 그들을 악한 무리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바리새인은 율법 연구에 열심이었고(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였고), 그 행함에서 흠이 없었으며(성경 말씀대로 살았으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말과 행함이 일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순수성을 존중하였고, 다른 문화에 물든 유대 민족의 타락을 비난하였으며,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는 애국자들이었다. 당시 바리새인의 수는 약 6천 명이었으나, 그 영향은 대단하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 나라에 두 사람이 들어가게 된다면 그 중 한 명은 바리새인일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에게는 종교인으로서 큰 흠집이 있었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시며,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하고 호되게 꾸짖으셨다.

'바리새(pharisai)'라는 말은 원래 '분리한다'는 뜻인 히브리어 파라슈(parash)에서 유래하였다. 즉, 그들은 순수주의자로서, 헬레니즘 문화와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자기들을 구별하여 분리하였다.

그 동기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서 독선과 배타의 정신이 생겨나게 되었다. 주 예수께서 가장 비난한 것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눅 18:9) 바리새주의였다.

인간은 자기가 어떤 숭고한 목적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을 때에는 그 속에 빠져들어 자기의 흠은 좀처럼 깨닫지 못하게 마련이다.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소수 집단이 될수록 더욱 더 자기들의 삶이 순수하고 올바르다고 착각하게 된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인 청년 바울은 기독교에 회심한 후에는 철저한 율법주의 부정을 주장하였다. 달리 말해서 바울은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초대 교회 속에서 유대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을 빠른 감각으로 꿰뚫어볼 수 있었다.

청년 바울은 바리새파였기 때문에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회심한 후에는 기독교가 간직하고 있는 진리를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체계를 세워 신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상의 사실들과 관련하여 당시 바리새인들의 본업, 곧 백성들을 가르치고 민사 소송을 재판하는 일은 보수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생활을 위하여 직업을 가져야 했다. 청년 바울도 천막을 만드는 일로 생활 문제를 해결하면서, 율법을 공부하고 또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년 바울의 내심은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십자가의 죄인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12)
[2747호] 2010년 03월 23일 (화) 17:19:25 [조회수 : 328]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예루살렘 시온산의 돌계단. 겟세마네 동산에 이른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학하고 있던 주후 30년 어느 날,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건이 있었다. 그는 유월절에 즈음하여 소수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가, 유대교 지도자들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주 예수는 처음에 유대교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에서 종교 재판을 받은 후,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재위 주후 26~36)의 판결을 받고, 흉악한 죄수만 처형하는 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혔다.

형장인 예루살렘 교외 골고다에서 오전 9시에 못 박힌 예수는 오후 3시에 운명하였다. 형이 집행되는 여섯 시간 동안에 나사렛 예수는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달린 행악자 중 하나가)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2~43).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 19:28).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요 19:30).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바울은 여느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나사렛 예수에 관한 소식을 들었고,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행 24:5)라고 비난하였다.

바울이 생전의 주 예수와 대면한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예수를 모세의 율법과 그 전통에 어긋나는 존재로 보며, 같은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를 두둔하는 니고데모를 향해 동료들과 함께 이렇게 비난했을 것이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 7:52). 바울은 훗날 나사렛 예수에 대한 감정을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했다(행 26:9)라고 고백하였다.

바울은 예수께서 전도하시던 기간에는 만나지 못하였으나, 골고다의 처형 현장에는 여느 바리새인들 속에서 예수를 만났을 가능성이 많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비방하는 무리 중에 끼었던 것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딤전 1:13~15). 바울도 "그 피를 우리 자손들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하고 외쳤을 것이다.




"예수를 보지 못하였느냐"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13)
[2748호] 2010년 03월 30일 (화) 18:15:22 [조회수 : 338]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예루살렘 '무덤교회'에서 '헬레나교회'로 내려가는 캄캄한 계단 벽에 중세 순례자들이 새긴 십자가.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주 예수와 만난 것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사도직에 관하여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전 9:1)

"내가 …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라고 하는 구절을 두고 통상 부활하신 예수를 본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해자들은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보았다"라고 능동태로 말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바울은 생전의 주 예수와 만난 일이 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와 만난 사건은 한결같이 "주께서 보이셨다"하고 수동태로 말하고 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살아나사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 5, 8)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행 13:30~31).

심지어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이 있은 후 앞을 보지 못하는 바울을 위해 기도하여 눈을 뜨게 한 아나니아도 바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를 수동태로 말하고 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행 9:17).

이와 같이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 현현하신 사실을 말할 때는 예외없이 모두 수동태로 "보이셨다" 또는 "나타나셨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의 자격을 말하는 고전 9장 1절에서는 "내가 …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라고 능동태로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주 예수와 바울의 만남이 골고다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십자가'라고 하는 낱말에 있다. 즉, 주 예수의 직제자인 베드로와 요한의 편지에는 '십자가'라는 말이 전혀 쓰이지 않았다. 베드로는 단 한번 '나무'라는 말을 쓰고 있을 뿐이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

'나무(xulon)'는 '형틀'이라는 뜻으로서, '십자가(stauros)'와는 다른 개념이다. 바울은 '십자가'라는 명사로서 10회, '십자가에 못 박히다'라는 동사로서 8회, 합하여 18회나 쓰고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바울은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나사렛 예수의 붐'은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에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김희보/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14)
[2749호] 2010년 04월 10일 (토) 09:50:19 [조회수 : 713]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사도들과 사두개인의 논쟁(프란체스코회의 미사 예식서 그림,15세기)
신약 시대의 유대교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사두개파와 시나고그(회당)를 중심으로 하는 바리새파가 양대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열심당이라는 과격한 그룹과 비밀 종교적 색채가 짙은 엣세네파 등의 분파가 있었다. 원래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분리된 자'라는 뜻이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분리된 자'라고 일컬었다. 무엇에서 분리되었는가 하면, 제사의식상의 부정함에서의 분리이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할 때 가장 부정한 것은 정치상의 영달(榮達)이었다.

따라서 '바리새'라고 하는 명칭의 유래 자체가 사두개파와의 어긋남을 나타낸다. 사두개파는 그 명칭이 다윗 왕 때의 제사장 사독에게서 유래하였다. 사독은 다분히 정치적인 인물로서, 다윗 왕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할 때에 언약궤를 메고 따라갔고,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한 이교도가 바리새인 샴마이에게 가서, 자기가 외발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 전체를 설명해 달라고 말하였다. 샴마이는 손에 들고 있던 자막대기를 들어 때리려고 하며, "그와 같이 불손한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내쫓았다.

그 이교도는 이번에는 힐렐에게 가서 같은 말로 설명을 부탁하였더니, 힐렐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율법의 알짜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계명에 있다. 그 외의 것은 전부 이 계명을 위한 주석이다."

바울은 이 힐렐의 손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 가말리엘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옹호하여 변명한 일이 있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사도들을 공회에 세우고 심문할 때에 가말리엘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8~39).

바울 당시 바리새파에도 여러 경향 및 그룹이 있었다. 그 중심적인 그룹은 메시아주의에 관해 이해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연구 중심은 어디까지나 율법에 있었다. 따라서 바리새파의 전통과 입장에 좋지 못한 영향을 주는 메시아 운동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이와 같은 때에 민중의 환호에 싸여 '나사렛 예수'가 등장하였다. 그의 말씀은 참신하였고, 그의 행위에는 권능이 넘쳤다. 그는 율법주의를 호되게 비판하며, 바리새인을 위선자라고 규탄하였다. 때문에 바리새인은 사두개인과 손잡고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가말리엘은 이 나사렛 예수를 두둔한 것이다. 공회에 끌려 온 베드로와 사도들은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다"(행 5:30)고 증언하였다. 이 신앙 간증에 힐렐파의 지도자 가말리엘은 동의한 것이다.

청년 바울은 나사렛 예수의 추종자들을 보는 관점이 스승 가말리엘과 달랐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청년 바울은 나사렛 예수의 사도들에 대한 일련의 조치, 곧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둔" 사두개파에 동의하였다. 가말리엘이 부닥친 정황과 젊은 랍비 바울 앞에 펼쳐진 형편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김희보 / 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바나바와 스데반과 빌립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15)
[2750호] 2010년 04월 13일 (화) 17:33:57 [조회수 : 400]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초대교회의 세례의식(마삿치오 그림, 15세기)

바울이 길리기아 다소를 떠나 예루살렘에 유학한 것은 열네 살 때였다. 그는 4년 동안 당시의 유대 청년으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 때에 바울은 구브로 섬 출신인 요셉과 친하게 사귀었다.

바울은 열여덟 살 때 학업을 마치고 풋내기 율법사가 되어, 바리새파의 사회 체제 속에서 엘리트 코스를 달리고 있었다. 그가 예루살렘 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 지나,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 있었다.

바울은 이 역사적 사건에 관하여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십자가의 극형으로 처형된 한 범죄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사렛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이 돌았으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그 시신을 도둑질하여 갔다는 소문을 그대로 믿었다. 

그러나 오순절에 있은 사건은 바울에게 작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나사렛 예수의 제자들, 갈릴리 어부 출신인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무식한 그들이 애굽어와 헬라어와 라틴어 등 여러 언어로 설교를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베드로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행 2:38)고 하는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 않는가.

바울은 지난날의 학우인 구브로 출신의 요셉이 유대교를 떠나, 나사렛 예수의 종파에 입교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얼마 후에는 요셉이 자기가 소유하였던 밭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헌금을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사도들은 요셉에게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 바나바라는 이름을 새로 주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들은 유대교의 안전과 우위를 위협하는 요소들이라고 청년 바울은 판단하였다. 더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 때에 때마침 예루살렘 공회에서 바울에게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에 관해 연구하여 그 이단성을 밝혀 달라고 의뢰하였다. 

바울을 비롯하여 예루살렘 공회의 의뢰를 받은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의 생활을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행 2:42)

한편 나사렛 예수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행 2:44~46)

날이 지나갈수록 나사렛 예수를 믿는 무리가 많아졌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구제도 추종자가 많아지는 요건 중 한가지였다. 사도들은 구제를 전담할 사람으로 일곱 집사를 택하였다. 곧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였다.(행 6:5)

바리새파의 젊은 율법사 바울이 볼 때에 나사렛 예수를 믿는 이 교파에는 아직 확고한 교리는 제정되지 않았다. 이 새로운 교단에서 사도들 못지않게 은사를 받아 활동하는 사람은, 헬라어를 능숙하게 말하며 설교에 뛰어난 스데반과, 신앙과 영감이 넘쳐 기적을 행하는 빌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