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聖地성화歷史[종합]

[사도바울행전] 16.은혜와 권능의 스데반/17.나사렛 예수를 핍박한 자/18.갈릴리 교인예루살렘 교인 /19.첫 순교자 스데반 /20.예루살렘교회와의 대결

영국신사77 2018. 2. 4. 20:47


은혜와 권능의 스데반
(16)
[2751호] 2010년 04월 21일 (수) 17:22:25 [조회수 : 217]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율법학자에게 끌려가는 스데반(돋을새김, 노트르담 성당)


여느 바리새인들과 같이 젊은 율법사 바울이 볼 때에 스데반의 설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이단이었다. 디아스포라인 스데반은 지난 유월절 때에 율법적인 열심에 감동하여 거룩한 예루살렘에 왔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가 예전에 믿던 모든 것에 대하여 큰 소리로 반대하고 있다. 그 목소리의 크기만큼 스데반의 발언은 위험하였다.

오순절 이전에 가말리엘이 나사렛 예수를 두둔하는 발언을 했었다면, 바울은 스데반을 만난 이후처럼 나사렛 예수의 무리를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볼 때에 스데반은 새로운 종교 운동의 제일인자로서 주의해야 하는 인물이며, 유대교 중에서도 특히 바리새파의 원수라고 생각하였다. 

스데반은 구약의 역사에 근거하여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비판하였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 예수는 참 그리스도시며, 유대인이 소망 가운데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로서, 7백년 전에 이사야가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인 '고난의 주의 종'이라고 힘차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년 바울은 욕되고 부끄러운 나무인 십자가에 못 박혀 흉악한 죄인처럼 죽은 나사렛 예수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하는 말은 듣기만 하여도 화가 치밀었다. 율법에는 분명히 나무 형틀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밝히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청년 바울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사렛 예수를 악인으로밖에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바울은 유대인의 독특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사물에 관한 생각 방법과 시야가 바늘귀만큼이나 좁았었다. 

청년 바울은 스데반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바울은 얼굴을 붉히고 주먹 쥔 손을 흔들며 말하였으나, 스데반은 미소를 머금고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이론이 정연한 열변가로 자처하는 청년 바울은 토론에서 밀렸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기 때문에 쉽게 반론을 펼 수 없었다.

청년 바울은 스데반 같은 부류 때문에 메시아께서 오시는 일정이 늦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빠르게 하거나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유대인의 율법 침범과 배교는 메시아가 오는 것을 지연시킨다고 가말리엘을 비롯한 바리새파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랍비 시므온 벤 요하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메시아의 오심은 사람들이 두 척의 배를 끌어당기어 양쪽을 밧줄로 묶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두 척의 배가 단단히 이어져 있으면 집을 지을 수 있으나, 배가 따로 뜨면 집을 지을 수 없다."

다가오는 메시아의 복된 날을 눈 앞에 두고, 율법을 열렬히 사랑하며 이스라엘의 일치를 이룩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말미암아, 청년 바울은 나사렛 예수를 믿는 유대인을 반대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청년 바울이 볼 때에 나무에 달린 자가 메시아일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의 분파 행동은 메시아가 오는 것을 더디게 하는 것이었다.



갈릴리 교인, 예루살렘 교인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18)
[2753호] 2010년 05월 06일 (목) 09:52:49 [조회수 : 357]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스데반의 순교(스데반 수도원의 벽화). 이스라엘 베이트자말 스데반 수도원.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해로 추정되는 주후 33년 당시, 예수의 제자들은 오순절 후에 두 지방에 나뉘어 있었다. 주 예수께서 전도하시던 갈릴리로 돌아가 그 뒤를 이은 교인과, 예루살렘에 남아 그 곳의 교인들과 공동체 생활을 한 그룹이었다.

갈릴리 교인들의 지도자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였다. 그는 주후 40년 무렵에 갈릴리의 왕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박해로 순교하였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행 12:1~3).

한편 예루살렘 그룹은 베드로와 요한이 지도하고 있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 3:1, 4:13).

베드로와 요한은 제사장과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신도들을 주 예수의 말씀에 따라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유대교도의 습관에 따라 성전에서 정해진 때에 기도하였고(행 3:1, 10:9), 율법에 정해진 식사 규정을 충실하게 따랐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행 10:14) - 이 때문에 엄격한 유대교도와의 마찰은 어느 정도 덜한 편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새로운 제자 중 특히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 신도 중에는 당당하게 유대교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대표자격인 스데반은 성전의 부당성을 규탄하고, 유대인들의 율법 생활에서 그릇된 점을 지적하며 공격하였다.(행 6:8~7:53).

"이른 바 자유인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였다"(행 6:9~10).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분노하여 주먹을 쥐고 흔들며 소란을 피웠다. 그 중에 건장한 한 명이 스데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 성전 회의실로 갔다. 흥분한 무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성전 회의실에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반둥근꼴로 자리를 이루고 회의하는 중이었다. 스데반은 공회원들 앞에서도 같은 내용의 말을 하였다. 그리고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며,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다"고 규탄하였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성전 회의실에 모여 있는 의회 의원들에게 스데반이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묻는 투표를 하였다. 투표 결과는 유죄였고, 선고는 율법을 어기는 자에게 내려지는 돌로 쳐서 죽이는 형이었다. 이 공회에서의 재판은 변호사도 없고 상고심도 없는 일방적인 재판이었다. 

열광적인 유대교도들은 성전 회의실에서 다메섹 문으로 스데반을 끌고 갔다. 그 무리 중에는 청년 바울도 있었다. 율법 위반자를 돌로 쳐 죽이는 형장은 사람 키의 곱절이 되는 높은 계단이었다. 스데반은 온화한 얼굴로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이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김희보/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첫 순교자 스데반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19)
[2754호] 2010년 05월 17일 (월) 10:00:17 [조회수 : 399]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스데반의 순교'(렘브란트, 1625)

무리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스데반에게 달려들었다. 스데반을 고소한 최초의 증인이 스데반을 계단에서 밀쳤다. 만일 희생자가 고개를 숙이고 떨어지면, 증인이 고개를 젖혀 위를 보게 하는 것이다. 둘째 증인이 큰 돌을 들어 희생자의 가슴을 향해 힘껏 던졌다. 이 일격으로는 죽지 않는다. 다음에는 율법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돌을 던졌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청년 바울은 돌로 스데반을 치는 증인들의 옷을 지키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는 스데반이 죽임 당함을 마땅한 일로 여겼다. 그는 스데반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는 기도를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율법을 거역하고 죄를 지은 자가 도리어 율법에 충실하려고 하는 자기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주 예수의 십자가에서 행한 기도와 꼭 같은 내용을 스데반은 최후로 기도한 것이다. 청년 바울은 그 기도를 생각하며 며칠 밤을 잠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새웠을는지 모른다.

스데반의 순교는 초대 교회가 좁다란 유대인의 민족적 치우친 생각의 껍질을 깨고 세계적인 넓은 교회로 발전하기 위하여 치른 귀중한 값이었다. 그리스도 자신도 죽음과 악마의 힘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

스데반은 그 순교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선구자 중의 선구자가 되었다. 교회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4~25).

주 하나님은 때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일꾼이 쓰러지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스데반이 죽은 지 1년이 되기 전에,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한 사람 중 한 명이 스데반의 뒤를 이었다. 바로 청년 바울이었다.

그는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 때부터 혹시 잘못된 것은 나사렛 예수거나 스데반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비롯한 바리새인들 자신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때로 마음에 떠오르게 되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일찍이 거부감을 가지고 들었던 나사렛 예수의 비유를 생각하곤 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세리는 멀리 서서… 이르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9~14).

스데반이 순교한 장소는 예루살렘 구시가를 에운 성벽 동쪽에서 약간 북쪽 방향의 문이다. 이 스데반 문(^ 다메섹 문) 양쪽 벽에는 두 마리 사자가 마주 서 있는 돋을새김이 있다. 그것은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1228~1277)의 문장(紋章)이다.

김 희 보
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예루살렘 교회와의 대결
<20>
[2755호] 2010년 05월 26일 (수) 15:50:25 [조회수 : 262]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 예루살렘 성벽의 일부.

스데반의 순교 결과 예루살렘에서는 교회에 대한 큰 박해가 일어났다. 바울은 그 핍박에 앞장섰다. 훗날 그는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갈 1:13)하는 말로 고백하였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1~3).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큰 박해 때문에 수많은 교인들은 도시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교회는 쇠퇴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각 지역에 전파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행 8:4~6).

순교한 스데반과 같은 헬레니스트이며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었던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남하하여,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에 이르렀다. 거기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 관리인 내시를 만나 세례를 주었다. 빌립의 전도 활동은 끝날 줄 몰랐다.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행 8:40).

교회에 대한 큰 박해를 피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난 나사렛 예수의 교인들 대다수는 시리아의 독립 도시 다메섹에 갔다. 오늘날 시리아 공화국의 수도인 다메섹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로서, 일찍부터 수많은 유대인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그 당시 다메섹의 지배자는 아레타스 4세(주전 9~주후 40)로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의 간섭을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이었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곳이었기 때문에 종교적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피난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새로운 전도 활동은 다메섹의 유대인들 사이에 퍼지게 되었다. 

청년 바울은 이 다메섹에 눈독을 들였다. 이 도시의 교인들의 활동을 반드시 저지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로마 정부는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도망 범인에 관해서는 예루살렘 대제사장이 범인 인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있었다. 그 권리는 마카베오 왕조 때부터 예루살렘 대제사장에게 주어졌었다.

"그러므로 만일 유다 나라에서 악질분자 노릇을 하던 자들이 당신 나라에 피신하거든 대제사장인 시몬에게 넘겨 그가 자기네 법대로 그들을 벌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마카베오 상 15:21)

청년 바울은 대제사장에게 가서 범인 체포 요구서를 발행해 달라고 하였다. 나사렛 예수의 무리를 찾는 대로 남녀 구별 없이 체포해 오기 위해 성전 경호병을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행 9:1~2).

김희보/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