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찬가 | ||||||
사도바울행전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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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롬
15:28~29).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6).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 바울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달음질'하는 것으로 보았다. 세속 사회에 머물며 "내 영혼아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하는 삶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천로역정'의 주인공과 같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하고 외치며 '좁은 문'을 향하여 달음질치는 삶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달음질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단지 인생의 수명이 짧으니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에서 "달음질하라"는 권면의 의미를 구체화하고 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이후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만 생각하였고 실행하였다. 그는 복음 전도의 보상으로 노후의 연금도 원하지 않았고, 호화로운 주택도 원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바울에게 배설물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며 세상 끝까지 달음질하는 일, 이것은 비단 바울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서 치미는 충동이 아니겠는가. 김 희 보 / 서울장신 명예학장 | ||||||
길리기아 다소 | ||||||
사도바울행전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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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리기아 지방은 소아시아 남부를 동서로 뻗어 있는 해발 3천5백m 이상의 높은 타우로스 산맥과 지중해 사이에 펼쳐진 평야로서, 시리아 서쪽에 맞닿은 지방이다. 다소는 원래 헬라인의 시민 도시였다. 구약에 나오는 달시스는 다소, 야완은 이오니아(고대 헬라인)를 가리킨다. 바울 당시 다소는 헬라 문화를 이어받아 문화의 한 중심지였고, 운하에 이어진 항구 도시로서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다. 로마 시대의 헬라계 지리학자이며 역사가인 스트라본(주전 64년쯤 ~ 주후 21년쯤)은 그의 '지리서'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다소의 시민들이 철학과 교양 일반에 걸쳐 지니고 있는 열의는 보통이 아니다.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시민의 수준을 훨씬 넘을 정도이다." 스트라본은 이어 길리기아 다소가 스토아 철학자 여러 명을 배출한 사실을 보고하면서, 특히 황제 아구스도의 스승인 아테노도로스(전 1세기 무렵)가 훗날 다소에 돌아와 황제의 두둔함 밑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사실을 말하였다. 바울은 라틴식 이름이다. 출생 때의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다. 사울은 회심한 후 이름을 바울로 고쳤다. 당시 유대인은 유대식 이름 외에 라틴식 이름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행 12:12)하는 구절에서 마가(마르코스)는 라틴식 이름이고, 요한은 유대식 이름으로서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고 하는 뜻이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사울과 바울이라는 이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바울은 처음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이름을 따다가 사울이라고 하였으나, 회심한 이후 '작은 자'라는 뜻인 바울이라고 불렀다. 바울 자신은 자기 이름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행 15:9). 중세의 추기경 야콥 데 보라기네는 그의 '황금전설'에서 바울이라고 하는 이름은 여섯 가지 뜻이 있다고 말하였다. 첫째로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복음을 전한 '나팔의 입'이며, 사랑을 말한 '사람들의 입'이며, 회심을 한 '기적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며, 자비량 전도를 한 '선택의 기적'이며, 명상을 한 '평안'이며, 겸손한 '작은 자'이다. 김 희 보 / 서울장신 명예학장 | ||||||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 ||||||
사도바울행전/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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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바울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지중해 둘레의 여러 도시에는 수많은 유대인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다소에도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 4세가 주전 171년에 이 도시를 재건하면서 유대인 거주 구역을 만들었다. 그 이래로 적지 않은 유대인이 팔레스틴에서 이주해 왔다.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농촌의 주민과 수공업자, 상인은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때문에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모국을 버리고, 보다 좋은 생활을 구하여 외국에 이주하였다"(E. 로제)고 한다. 특히 갈릴리 지방의 경우 바울의 조상은 베냐민 지파(롬 11:1)로서, 작은 부족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파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한편으로 상인으로서, 헬라인들과 적극적으로 교제하였다. 스트라본은 '지리서'에서 "유대인은 이미 모든 폴리스(도시)에 진출해 있었다. 무릇 사람이 살고 있는 땅치고 유대 종족을 받아들이지 않은 곳 또는 그들의 세력이 뻗지 않은 곳을 찾기는 어려웠다"고 기록하였다. 바울은 자기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고후 11:22). 이 경우의 '히브리인'은 단지 유대인 내지 이스라엘 사람과는 다른 뜻이 있다. 그것은 생활 양식 및 기질면에서 이스라엘의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관습에 지극히 충실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바울은 자기가 유대교의 전통에 열심인 바리새인이라고 강조하여 말하였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4). 바울은 자기를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행 21:39)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시민'이라는 말이 헬라 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는 헬레니즘 사회의 도시에서는 시의 행정에 참가하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을 의미한다. 시민은 그와 같은 권리를 가지지 못한 '주민'과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디아스포라로서 외지에 살고 있는 유대인 대부분은 '주민'으로서, '타관 사람'으로 소외되었다. 그러나 바울의 식구는 '시민'이었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인을 다소로 이주시킬 때 그들에게 헬라 시민권을 준 것으로 학자들은 고증하고 있다.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하고 고백하는 바울의 말에서, 그의 조상이 다소에 이주해 온 최초의 유대인 이주자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하게 된다. 따라서 바울과 그의 일가는 다소 시에서 확고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유력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로마 시민 | ||||||||||||||||||||||
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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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의 시민인 동시에 로마 시민권자이기도 하였다. 로마 시민은 황제가 살고 있는 황금의 도시 로마에 살고 있는 시민과 같은
자격과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김희보 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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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blog.daum.net/matsy/7172470[은별나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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