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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현 기자의 인&아웃-②] 이웃 상인들이 '노아의 방주'라고 부르는 가게

영국신사77 2018. 1. 7.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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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뉴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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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뉴스부 차장
입력 : 2015.07.04 06:00


미용실에서 꿈을 찾다

멋 내는 걸 좋아했던 강윤선(사진)은 고등학교 과정 야간 전수학교 1학년 때 동네 미용실에 갔다가 인생의 전환점을 만났다. 밤에 학교 다니고 낮에 돈 벌러 다니던 시절이었다. 한 50대 아주머니가 미용실에 보따리를 맡겨도 되느냐고 부탁했는데, 미용실 주인이 차갑게 거절했다.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저 사람은 다신 이곳에 오진 않겠구나 생각했다. 나라면 안 그랬을 텐데….”

이후 그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미용실 하면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며칠 후 그는 무궁화고등기술학교에 등록해 미용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인생 전체를 좌우할 큰 결정을 한 셈이다.
“미용이 굉장히 좋은 직업으로 느껴졌다. 기술만 있으면 평생 굶어 죽지 않는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나로선 그 이상 대단해 보이는 게 없었다.”

그는 1년 과정을 마치고 동네 미용실에서 직원 생활을 한 뒤 잠깐 아는 사람과 동업을 거쳐 1982년 돈암동에 준오미용실을 열었다. 가게엔 항상 사람들이 붐볐다.

―미용이 천직이라는 느낌이 들던가.
“당시 미용은 생계를 위한 직업이었다. 수입이라야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일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장일현 기자의 인&아웃-②] 이웃 상인들이 '노아의 방주'라고 부르는 가게
―뭐가 그리 재밌었나.
사람 만나는 게 좋았다. 어릴 때 엄마는 공사판에서 일하다 언제나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집에서 사람 기다리는 게 무섭고 싫었다. 낮에 같이 놀던 친구와 헤어질 때면 가슴이 무너졌다. 그런데 미용실을 하니 언제나 사람과 같이 있을 수 있는 거다. 밤늦은 시간까지도. 손님들이 계속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님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게 사람을 좋아했으면 손님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을 것 같다.
“한 여자 손님이 회사에서 일을 끝내고 파마를 하러 온 적이 있었다. 다 끝나니 밤 12시가 됐다. 손님 혼자 보내려니 불안해서 안 되겠더라.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가서 버스 타는 걸 보고서야 가게로 돌아왔다. 마음으론 집까지 데려다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손님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걸 손님들도 아는 것 같았다. 손님이 돈으로 보이면 사업은 그 순간 끝나는 거다.”

―단골도 많았겠다.
“말도 마라. 하루에 손님 50명 이상 머리를 만지는 날도 허다했다. 한 번은 갑작스러운 폭우로 주변이 물바다가 됐는데, 환하게 불을 밝힌 우리 가게에 손님 20~30명이 가득한 걸 보고 이웃 상인들이 ‘마치 노아의 방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손님을 대하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헤어디자이너로서의 실력 아닌가.
나이보다 젊게 보일 수 있도록 감각적으로 표현을 잘했던 것 같다. 전통적이고 나이 들어 보이는 스타일은 안 했다. 파마를 할 때도 머리 전체를 꼬불꼬불하게 하는 게 아니라 두 가닥 정도만 말고 나머지는 펴는 식이었다. 손님에게 가장 잘 맞는 머리 스타일이 뭘까 항상 그 생각만 했다.”

그의 미용실은 꽤 유명세를 탔다. 감각이 앞서고 기술이 좋아서 전인화ㆍ최명길 등 당시 유명 여자 연예인들의 패션 잡지 화보 촬영 때 헤어 스타일링을 맡곤 했다. 그는 머리를 곧게 펴는 스트레이트 파마를 국내에 도입ㆍ보급하는 데도 앞장섰다. 부산ㆍ광주ㆍ대구 등 지방에 강연하러 가면 ‘환영, 강윤선 원장님’이라고 쓴 플래카드가 나붙기도 했다. <③편에 계속>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