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역경의 열매]'외국인 근로자들의 엄마' 김상숙 홀리네이션스선교회 대표 <1>-<8>

영국신사77 2017. 3. 12. 19:32

[역경의 열매] 김상숙 <1> 조건 없이 치료 도와… 30명 본국 돌아가 교회 세워

‘하나님이 보내신 영혼’이라 생각… 선교회 앞엔 아픈 외국인들 줄서

입력 : 2017-02-09 00:01
  • [역경의 열매] 김상숙 <1> 조건 없이 치료 도와… 30명 본국 돌아가 교회 세워 기사의 사진
김상숙 권사(첫줄 오른쪽 세번 째)가 홀리네이션스선교회 직원, 
봉사자들과 함께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방문, 
캐나다 의료 선교사인 셔우드 홀 박사 묘소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홀리네이션스선교회 제공

‘모두 조건 없이 전액을 돕는다.’ 

2000년 홀리네이션스선교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고수하는 원칙이자 행동 지침이다. 
돌이켜보면 어려움에 처한 외국인 환자들을 
‘모두’ ‘조건 없이’ ‘전액’ 원칙으로 돕기로 한 것은 성령이 주신 특별한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을 주셨기에 기적과 은혜가 넘치는 현장에 있을 수 있었다. 
만약 교회에 나온 사람이나 교인 등록자에 한해 
치료비 일부만 돕고 수술비나 입원비는 지원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필요를 풍성히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직접 겪을 축복의 기회는 놓쳐버렸을 것이다.  

사역 초기 중환자들은 쉴 새 없이 몰려왔다. 
온 몸에 고름이 흐르는 희귀병에 걸린 외국인, 간농양 환자, 손가락이 잘린 환자, 
뇌출혈 환자, 폐결핵 환자 등 수없이 많은 환자들이 선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심지어 어떤 환자는 병원에 입원비 대신 
우리 선교회의 전화번호를 주고 
병원으로부터 그의 입원비를 대신 낼지를 전화로 물어 온 적도 있었다. 
물론 그때도 우리는 그 환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영혼으로 받아들였고 
기꺼이 치료비를 내주었다.

소문은 빨랐다. 
우리의 도움을 받은 외국인들은 아픈 동료들에게 선교회의 존재를 알렸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으로 퍼졌고, 
선교회 문 앞에는 아픈 외국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외국인 환자라면 누구든 만났고 어디든 찾아갔다.  

조지 뮬러는 동역자를 위해 기도할 때 이렇게 했다고 한다. 
“하나님 아버지, 저 혼자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좋은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선별해 주셔서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고아들을 돌볼 수 있는 사람들을 보내 주십시오.” 

부끄럽지만 나 역시 그렇게 기도했다. 
평범한 아내이자 엄마였던 사람이 
사랑의 통로가 되기를 원해 선교사가 되어 홍콩에서부터 섬긴 지 30년이 지났다. 
우리가 돕는 대상은 모두 엄청난 물질과 인력을 필요로 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한마음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섬겼다.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행진했다. 
우리는 이 사역의 장소를 ‘행복동’이라 불렀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신실했고 사실이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마 28:20)을 구체적으로 채우셨다. 
그동안 행복동에서 필요로 했던 재정은 50억원이 넘는다. 
그런데도 나는 한 번도 재정을 위해 기도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주님은 여러 모양으로 역사하셨고 
10원의 빚도 지지 않게 해결해주셨다. 
사람에게 구하지 않아도 채우셨다.  

행복동을 통해 수백 명의 외국인들이 입원 수술을 받았고 
수많은 외국인들이 세례를 받았다. 
30명의 외국인 신학생들이 한국에서 공부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교회를 세웠다. 
그들은 몽골과 러시아 네팔 중국 파키스탄 영국 등지에서 또 다른 열매를 맺고 있다. 

현재 홀리네이션스선교회에서 봉사하는 분들은 50명 정도다. 
교사와 설교자, 찬양인도자, 의료진, 식당 봉사자, 차량봉사자, 통역 담당자, 
미용 봉사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섬긴다.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정리=신상목 기자 

약력=△1948년 서울 출생 △중앙대 졸업 △85년 홍콩에서 선교활동 
△95년 말레이시아에서 말레이어 성경공부 교재 번역 등 선교활동 
△2000년 경기도 일산에 홀리네이션스선교회 설립 △고양 삼위교회 권사 
△저서 ‘나는 날마다 기적을 경험한다’ ‘주님, 오늘도 부탁해요’ 


[역경의 열매] 김상숙 <2> 전도 위해 두드린 홍콩 정부병원… 복음의 문 열려

남편 발령 따라 홍콩서 8년 거주 금식기도 끝에 병원 허가 얻어내

입력 : 2017-02-10 00:01
[역경의 열매] 김상숙 <2> 전도 위해 두드린 홍콩 정부병원… 복음의 문 열려 기사의 사진
김상숙 권사가 1980년대 중반 홍콩에 거주할 때 전도하며 만난 필리핀 이주자들이 김 권사의 집에서 음식을 나누며 교제하고 있다.

미국계 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근무하던 남편이 
홍콩으로 발령을 받은 것은 1985년 4월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때부터 두 번이나 홍콩에 가면서 만 8년을 살았다. 
홍콩에 거주한 지 1년 쯤 지나 한인교회에서 집회가 열렸는데 
그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마치 확성기를 귀에 대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졌고 
그때부터 회개하기 시작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현실로 다가왔다. 
집회가 끝난 뒤에도 통회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을 이어갔다. 
성령은 예수님의 피로 나의 죄를 철저히 씻어 내길 원하셨다.  

그 뒤로 나의 생각과 관점이 달라졌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의 마음이 솟아올랐다. 
무엇보다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망이 타올랐다. 
억지로가 아니었다. 
그저 주님을 아는 기쁨과 자유를 전하고 싶었다.

처음엔 전도 방법을 몰라 무작정 중국어 전도지를 나눠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홍콩 중심가 스퀘어파크를 지나던 중에 여성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만 보니 그들은 가사 도우미를 하기 위해 홍콩으로 온 필리핀 이주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다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복음을 소개했다. 
몇몇은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곤 했다. 
나는 굴하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찾아갔다. 
그러면서 알게 된 여성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생일이면 집에 초대해 식사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그녀들이 털어놓은 홍콩에서의 삶은 미움과 불평으로 가득했다. 
나는 자신을 괴롭히는 주인을 미워하기보다는 
미워하는 마음 자체를 없애달라고 기도하자고 권했다. 
함께 성경을 공부하며 사랑을 나누는 동안 그들의 모습은 눈에 띄게 밝아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다.
“미움을 없애 달라고 기도했더니 주인이 친절해졌어요.” 
“성경을 읽으며 구절을 노트에 옮겨 적었어요. 노트 좀 보세요.” 
나는 스퀘어파크에서 소외된 자를 부르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해외선교를 계속할 수 있도록 
남편을 다시 외국으로 발령시켜 달라고 기도했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내가 외국에서 복음을 계속 전할 방법은 
남편을 따라 외국으로 나가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홍콩을 마음에 두고 기도했다. 
홍콩은 처음 선교를 시작한 곳이지만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남편이 일하던 BOA의 아시아지역본부에서 홍콩 일을 제안했다. 
얼마 후 은행 구조조정이 단행되면서 남편은 사직서를 냈으나 
홍콩지점이 남편을 현지 채용하면서 홍콩에 다시 돌아오게 됐다.

홍콩에서는 한인들과 함께 집에서 성경공부를 했다. 
홍콩 정부병원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병원 전도를 위해 금식기도와 산 기도를 반복했다. 
한국도 아니고 외국 병원에서 복음을 전하기란 쉽지 않았다. 
허가를 얻기까지 몇 주를 기다렸고 기적적으로 통과됐다. 
성악도 신학도 모르는 가정주부 5명은 그렇게 찬양을 부르며 복음을 전했다. 
우리는 찬양과 율동을 할 때마다 말씀을 붙들었다. 
막레이호스병원과 퀸메리병원의 문은 이렇게 열렸다. 
나중에 홍콩을 떠날 때 헤아려 보니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경을 받은 사람만 1000명이 넘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상숙 <3> 테레사 수녀 “우린 성공 위해 부름 받은 거 아니다”

인도 슬럼가서 만난 ‘인류 어머니’… 내 신앙의 부끄러움 깨닫고 울어

입력 : 2017-02-13 00:07

[역경의 열매] 김상숙 <3> 테레사 수녀 “우린 성공 위해 부름 받은 거 아니다” 기사의 사진
김상숙 권사가 1994년 인도 캘커타(현 콜카타)를 방문, 마더 테레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홍콩에 머물면서 인도에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아시아 곳곳에 출장 다니는 남편을 통해 들은 인도인의 삶이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거리마다 넘치는 가난한 사람들, 
물이 귀해 더러운 웅덩이에서 몸을 씻으며 구걸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땅, 
나는 하나님께 인도에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주님의 뜻하심이 있다면 인도를 둘러보게 해주세요. 
원하신다면 비행기표를 보내주세요. 그러면 주님 뜻인 줄 알고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1년 정도 기도했을 때다. 
남편 동료 중에 알록이라는 인도인이 있는데 
그가 자주 이용하는 비행사에서 조건부 인도행 왕복 티켓이 왔다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내가 인도에 가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은 알록은 
남편을 통해 티켓을 보내줬다. 

인도를 향한 길은 결과적으로 
인도 아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인도에 다녀온 후 주위 사람들과 힘을 합해 
학교와 교회가 함께 있는 베다니스쿨을 짓는 동기도 됐다. 
1994년 설립된 이 학교에선 
수많은 힌두교인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더 테레사와의 만남을 잊을 수 없다. 
테레사 수녀를 만난 것은 내 삶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캘커타(현 콜카타) 슬럼가에 위치한 숙소에서 만난 인류의 어머니 마더 테레사는 
당시 83세였다. 등이 구부정했고 여타 인도인처럼 맨발로 나왔다. 
수녀님은 내게 입을 맞추었고 목걸이를 선물했다.

마더 테레사는 90년까지 50만명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2만명의 슬럼가 어린이들을 위해 124곳의 학교에서 가르쳤다. 
9만명에 달하는 한센병 환자들이 치료를 받도록 도왔다. 
이 사역을 시작할 때 그에겐 어떤 계획이나 확보된 기금 같은 게 없었다. 
오직 믿음뿐이었다.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신실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는 주님의 손 안에 있는 연필입니다
 (We are called upon not to be successful 
   but to be faithful. I am a pencil in HIS hand).”

나와 만나는 순간에도 테레사 수녀가 반복했던 말이 있다.
 “우리 하나님을 위해 아름다운 일을 합시다
  (Let’s do something beautiful for God).” 
그분은 가는 곳곳마다 이 글귀를 붙여 놓았다 한다.

이제껏 내 믿음의 모델은 하나님의 실체를 보여준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였다. 
그런데 마더 테레사를 만나고 나니 살아있는 뮬러를 만난 것 같았다. 
수녀들의 숙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고아원에는 갓난아기와 장애인들이 모여 살았다. 
그리고 마당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는 
성경말씀이 쓰여 있었고, 
그 옆에는 “내가 목마르다”(요 19:28)고 적혀 있었다.

나는 테레사 수녀에게 “행복한 일생이셨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의 행복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 믿음에 의심이나 불행 따위는 없습니다.” 
그는 매일의 기도와 묵상을 통한 영적 양식의 공급 없이는 
한 시간도 존재할 수가 없다는 말도 했다.  

마더 테레사와의 만남을 마치고 나는 교회에 앉아 울었다. 
나의 신앙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선교 사역을 하면서 어떤 일에도 으쓱대지 않게 된 것은 
이 만남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주님이 하신 것을 목도하는 것뿐이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상숙 <4> 막노동 청년들 도시락 들고 찾아가자 “마마”라 불러

말레이시아서 새로운 사역 시작, 별명이 ‘마마 킴’으로 된 계기

…언어장벽에 현지어로 성경 교재 제작

입력 : 2017-02-14 00:03

[역경의 열매]  김상숙 <4> 막노동 청년들 도시락 들고 찾아가자 “마마”라 불러 기사의 사진
말레이시아 김상숙 권사 집에 모인 말레이 청년들이 교제하고 있다.

홍콩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역과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다. 
바로 말레이시아로 우리 가족을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말레이시아에서 선교를 계속할 수 있도록 
남편의 직장에 은혜를 내려주셨다. 

영어가 통하는 홍콩과 달리 
말레이시아는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복음 전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내 나이 48세.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간단한 회화가 아니라 
현지인과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고급 회화까지 구사해야 했다. 

일단 어학원에 다니며 설거지나 집안일을 하면서 단어를 외웠다. 
3개월쯤 지나자 말레이어로 100개의 성경구절을 외울 수 있게 됐다. 

말레이시아는 동서로 구분돼 있다. 
수도 쿠알라룸푸르가 있는 곳은 서 말레이시아, 바다를 경계로 동 말레이시아가 있다. 
동 말레이시아는 서쪽과 달리 크리스천들이 많이 거주했다. 
반면 쿠알라룸푸르는 이슬람교가 강해 
무슬림에게 전도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말레이어를 공부하면서 
현지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에 교회를 찾았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은 영어가 통했지만 
젊은이들은 영어를 전혀 몰랐다. 
말레이어를 배운지 6개월 정도밖에 안 된 실력으로 성경공부를 인도하자니 
말레이어로 만든 교재 내용을 전부 외웠다. 
유창하지 않은 언어 실력을 보충하려면 그 방법밖엔 없었다. 
말레이어를 배울 때부터 성경구절을 암송하고 
그 다음엔 성경공부 교재를 암송하니 
말레이어 학습에 상당한 가속도가 붙었다. 

이 교재를 들고 말레이시아 현지교회인 SIB교회를 찾았다. 
목사님은 교재가 너무 좋다며 다른 교인들을 위해 책으로 만들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성경공부 교재 제작을 시작했고 
현지인 청년의 도움을 받아 10단계 성경공부 교재와 창세기, 
출애굽기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어 
3000권을 출간해 SIB교회에 증정했다.

그 즈음 말레이어를 좀 더 익히고 복음도 전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만났다. 
홍콩에 필리핀 가사 도우미가 와 있는 것처럼 
말레이시아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건축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원래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이주했기 때문에 말이 비슷했다. 
나는 인도네시아 청년들이 일하고 있는 공사판을 찾아갔다.

그러다 ‘요하니스’라는 청년을 만나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을 나누던 중 
“우리는 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한 가족이나 다름 없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요하니스는 “당신은 엄마 같아요”라고 했다.

그 말은 내 영혼을 흔드는 것 같았다. 
열악한 건축 현장에는 아침밥도 거른 채 일하는 청년들이 많았다. 
나는 일주일에 하루는 공사 현장을 찾아가 
청년들과 같이 점심밥을 먹고 성경을 나누기로 결심했다. 

그 다음 주에 요하니스와 다니엘 등 청년들을 만나 같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그들은 “함께 일했던 스물한 살의 한 형제가 어제 병으로 죽었다. 
이곳에 온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날부터 요하니스와 그의 동료들을 위해 
일주일에 한두 번은 도시락을 싸들고 찾아갔다. 
40명 남짓한 청년들은 나를 친엄마처럼 반겼다. 
얼마 후 그들은 나를 ‘마마’라 불렀다. 
그때부터 내 별명은 ‘마마 킴’이 됐고 
지금도 나를 아는 외국인들은 그렇게 부른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상숙 <5> 선교 이유 추방됐다가 3주 만에 돌아오는 기적이…

불가능해 보였던 비자 재발급 되자 “무슬림보다 예수님이 한 수 더 위”

입력 : 2017-02-15 00:03

[역경의 열매] 김상숙 <5> 선교 이유 추방됐다가 3주 만에 돌아오는 기적이… 기사의 사진
말레이시아 기독 청년들이 김상숙 권사 집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이들은 김 권사가 추방됐다 3주 만에 돌아오자 두려움 없는 신앙을 갖게 됐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는 동안 힘들고 버거울 때도 있었다. 
인생의 광풍 ‘유라굴로(행 27:14∼15)’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광풍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있으면 괜찮았다.

앞서 밝혔지만 말레이시아는 이슬람국가로 현지인 대상 전도가 금지된 나라다. 
기독교인의 차량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언제든 자동차 유리가 박살날 수 있는 나라, 
신변 안전을 위해서는 십자가 목걸이를 하지 않는 편이 좋은 나라, 
훤히 보이는 곳에 성경을 놓아둬서는 안 되는 나라였다. 

1995년 11월, 말레이시아에 도착해 4개월 지났을 무렵이다. 
나는 종종 한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원주민이 살고 있는 정글 지역에 갔다. 
그곳에서 매주 주일학교를 열었다. 
그림을 펼쳐 들고 예수님 이야기와 찬양을 가르치면 
귀를 기울이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어느 날, 순서를 마치고 막 간식을 나눠주던 참이었다.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하게 달려오더니 우리 앞에 멈췄다. 
종교경찰이었다. 
매주 이곳을 찾는 외국인을 수상하게 여겨 누군가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경찰은 우리에게 “어떤 기관에 속해 있느냐” “스폰서가 누구냐” 하며 다그쳤다. 
그는 우리의 차량과 소지품도 조사했다. 
증거물을 찾지 못하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원주민들이 사는 곳은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위기는 바로 찾아왔다. 
다른 마을 아이들이 선교사의 차에 올라타는 장면을 경찰이 목격한 것이다. 
경찰은 차를 돌려 추적했고 
결국 선교사의 신분증이 한인 교회 소속으로 돼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우리 일행 전체를 재조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 일로 며칠 뒤 이민국 사람들이 교회로 들이닥쳤고 
당시 선교사들은 강제 출국 조치를 당했다. 
하지만 외국은행 직원의 부인으로 와있던 나는 제외됐다.

그렇게 2년여 시간이 흘러간 어느 날, 
인도네시아 근로자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공용비자 기간이 만기가 돼 연장을 신청했는데 
가족 중 나 혼자만 연장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2년 전 그 사건으로 말레이시아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갔던 것이다. 

결국 나는 한 달 안에 출국하라는 명령서만 받게 됐다. 
아무 준비도 하지 못했다. 
남편은 애써 위로했다. 
“며칠 친정에 간다고 생각해요. 너무 걱정 말아요.” 

하지만 남편의 다짐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종교문제에 관한 한, 예외가 없었다. 
나는 그날 밤 운전을 하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내가 정말 주님을 섬기기 원하는가.’ 
이 질문 앞에 서자 갑자기 찬송이 나왔다. 
그러면서 확신이 솟았다. 
‘그래, 아직 덜 끝낸 성경공부 교재 번역이 남아 있잖아!’ 
이후 나는 현지 교회 송별회에서 “3주 만에 돌아올 것”이라 선포했다. 
그저 하나님께서 다시 불러 주시리란 믿음 하나였다.

그리고 정확히 3주째 되는 날, 
말레이시아 출입국소장은 내 이름을 블랙리스트에서 제외했다. 
대통령 비서실장도 해결할 수 없다던 비자가 재발급됐다. 
신비한 일이었다. 
말레이시아로 돌아오자 현지 교회 신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무슬림보다 한 수 위구나’ 하고 생각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상숙 <6> 취직 시켜준 외국인 노동자들 “마마, 기도해요”

귀국 후 외국인 대상 선교 활동, 홀리네이션스선교회 출범… 주님 1년간 100명 이상 일자리 인도

입력 : 2017-02-16 00:03

[역경의 열매] 김상숙 <6> 취직 시켜준 외국인 노동자들 “마마, 기도해요” 기사의 사진
홀리네이션스선교회 모임에서 다민족 출신 근로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선교회 출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홍콩에서 돌아온 1987년, 3년 정도 한국에서 지낼 때였다. 
당시 내가 속해 있던 ‘창성 안디옥선교회’에서는 
외국인 목회자의 현장 목회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선교는 사실상 그 나라 현지인에 의해 이뤄져야 가장 효과적이다. 
현지인들을 통해야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문제를 피할 수 있다.

당시 우리는 현장 목회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교회의 장점을 직접 경험하고 배우게 함과 동시에 
현지인 목회자들을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공부시켜 본국으로 파송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와 터키, 불가리아에서 초청했으나 미미한 숫자였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하나님은 이 땅에 셀 수 없이 많은 외국인을 보내주셨다. 
특히 복음을 쉽게 접할 수 없는 나라 사람들을 무수히 보내셨다. 
비행기 표를 마련해 줄 필요도, 엄청난 체재비용을 송금할 필요도 없었다. 
지하철역이나 공장 앞 골목길에서는 날마다 선교 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홀리네이션스선교회는 이렇게 시작됐다. 

말레이시아에서 돌아와 공단으로 나갔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만나니 너무 기뻤다. 
“아파 카바르(안녕하세요)”하며 인사했다. 
낯선 한국 땅에서 모국어를 들은 그들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카바르 바익(네, 좋아요).”

선교회를 시작하며 한국에서 복음을 접한 외국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또 다시 수많은 영적 아이들을 양육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의 계획과 내 계획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 번은 근로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지 않았다. 
알고 보니 회사에서 해고돼 오갈 데가 없다고 했다. 
일자리를 알아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범한 주부인 내가 6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취업시키기란 막막했다. 
일자리를 부탁하는 기도를 드리고 막 일어서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세 명이라고? 그래 알았어.” 
3명의 일자리가 결정돼도 시원찮을 판에 
외국인 3명이 더 취업해야 한다는 전화가 왔다. 9명이었다. 
대체 이들 모두를 어떻게 취직시킨단 말인가. 
나는 9명의 형제를 뒤로 한 채 
그 전에 일자리를 부탁했던 인도 청년 둘을 데리고 공장을 찾아갔다. 
일전에 내가 사는 아파트에 가끔 인사하던 분이 있었다. 
내가 외국인과 다니는 걸 보고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분이 있는데 
외국인이라도 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며 전화번호와 약도를 그려줬다. 

약도를 보고 공장으로 찾아갔다. 
“외국인 소개를 부탁했던 분 맞나요?” 아니었다. 
그런데 그곳 주인이 약도에 그려진 공장을 알려주다 말고 
“우리도 일할 사람 6명 정도 필요한데 소개해 줄 수 있어요?”하고 물었다. 
할렐루야! 그 자리에서 6명의 취직이 해결됐다. 
그리고 원래 가려했던 공장을 찾아가 인도 청년 2명을 소개하고 나오는데 
전화가 울렸다. 
“필요한 사람이 3명이라고요?” 그날로 정확히 9명 모두 취직이 됐다.

이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인도하셨다. 
중소기업에 아는 사람 한 명 없던 내가 
첫 1년간 취직시킨 외국인 노동자는 100명이 족히 넘었다. 
그러면서 유행어가 하나 생겼다. 
“마마, 기도해요. 사장님 전화 와요.” 
기도하고 응답받는 것을 옆에서 체험했던 외국인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 17:7)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상숙 <7> 외국인 근로자들에 숙식 제공할 쉼터 마련

이불 등 집기 채워지는 역사 경험… 실직 형제 등 많을 땐 60여명 거주

입력 : 2017-02-17 00:05

[역경의 열매] 김상숙 <7> 외국인 근로자들에 숙식 제공할 쉼터 마련 기사의 사진
외국인들이 홀리네이션스선교회가 마련한 야유회에 참석해 
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주부에 불과하지만 한 가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갖고 있다. 
주님만 믿고 그분의 지시만 따라가면 모든 일은 그분이 이뤄주신다는 것이다. 
9명의 외국인 취직을 위해서도 
그저 “하나님 어쩌면 좋아요” 하며 불평 반, 탄원 반으로 기도를 드렸던 게 전부였다. 

선교회를 시작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일은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쉼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예배는 선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경기도 고양시 삼위교회에서 드릴 수 있지만 
오갈 곳 없는 외국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할 쉼터가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기도했다. 

외국인 노동자에게 쉼터 같은 시설이 왜 필요하냐며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홍콩에서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필리핀 자매들을 섬기며, 
그리고 말레이시아에서 인도네시아 불법 체류 노동자들을 만나며 
그들도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임을 깨닫게 됐다. 
이 때문에 만약 내게 그들을 도울 기회가 주어진다면 편안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쉼터를 준비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간구보다 넘치게 베푸셨다. 
장소 마련은 재정적 문제를 떠나 매우 힘든 일이었다. 
처음엔 경험이 없어서 
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갈등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다. 
단지 깨끗한 아파트형 건물 한곳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마침 새로 지어 분양하려는 곳을 발견하고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양이 자꾸 미뤄졌다. 
상황이 급해서 하루빨리 장소를 정하려 했는데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만약 그때 거기에 쉼터를 세웠다면 
옆에 사는 한국인들과의 갈등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쉼터 공간의 최우선 조건은 
외국인들이 예배를 마친 뒤 의료 서비스를 받기 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배장소와 쉼터의 거리도 짧아 이동이 편리해야 했다.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곳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는 편이 나았다. 
결국 주님은 현재 삼위교회 바로 옆 건물을 마련해 주셨다.  

지금 쉼터에는 외국인들이 살고 있다. 
많을 때는 60여명까지 될 때도 있다. 
이곳을 찾는 누구든 무료로 숙식을 제공한다. 
쉼터는 외국인들에게 내 집 같은 곳이다. 
병원 치료를 받고 퇴원한 환자가 쉴 수도 있고, 
직장을 잃은 형제들이 찾아와 쉬기도 한다. 
쉼터가 있었기에 그동안 많은 외국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었다.

쉼터에선 부족한 것을 하나님이 채우시는 역사가 일어난다. 
한번은 외국인들이 많이 몰려와 이부자리가 모자랐다. 
그래서 시장에 가려고 하자 갑자기 영동세브란스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혹시 거기 덮는 것 좀 필요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다. 
이부자리를 사려던 참이라고 하자 “당장 오늘 갖다 주겠다”고 했다.

어느 날은 예배시간에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오케스트라 책임자는 접이식 의자 50개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전화를 했다. 
“접이식 의자는 몇 개 없어요. 권사님도 잘 아시잖아요.
…잠깐만요. 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네요.” 
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놀라운 소식이 들렸다. 
바로 전 주일에 교회에 등록한 성도 한 분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접이식 의자를 사오셨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필요한 수량의 접이식 의자는 모두 채워졌고 
연주회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그 의자는 지금도 교회 식당에서 잘 사용하고 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상숙 <8> 외국인 공장 노동자들 하나님의 종으로 양육

새벽 성경공부 후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 중국인들 신학대 마치고 고국에서 복음

입력 : 2017-02-20 00:01

[역경의 열매] 김상숙 <8> 외국인 공장 노동자들 하나님의 종으로 양육 기사의 사진
한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간 김영훈 목사와 교회 성도들이 성탄 행사를 하고 있다.

나는 매일 정오부터 오후 2시 사이에는 공장별로 점심시간을 이용해 양육을 한다. 
그 중 뛰어난 믿음의 자질이 보이는 형제들은 
새벽 6시부터 한 시간씩 따로 성경공부를 하면서 훈련한다. 
기르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그저 물을 주는 것이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태어나 한 번도 교회에 간 적이 없고 
예수님을 그저 성인의 한 명으로 알던 외국인을 
교회로 인도하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일대일 양육을 시작하게 하셨다.

형제들과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려면 새벽 4시30분에는 일어나야 했다. 
그래야 새벽기도를 마치고 제 시간에 공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장 근처는 한적한 곳이 많고 가로등마저 적어 사방이 어두웠다. 
여름엔 오전 6시라도 날이 밝았지만 
가을이 되고 겨울의 문턱에 이르면 사방이 칠흑같이 어둡다.

하지만 형제들은 그런 어둠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해 불을 켜놓고 나를 기다렸다. 
내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면 
전날 밤 12시나 1시까지 일한 형제들이 
진작부터 일어나 성경을 읽고 있다가 나를 맞았다. 
이런 형제들을 보면 힘이 솟았고 내 마음도 밝아졌다. 

사실 그들은 중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새벽 성경공부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성령이 그들의 마음 문을 열어 주셨고 
주님을 알기 원하는 마음이 넘쳐흘렀다. 
새벽 어둠 속에 새어나오는 방의 불빛은 생명의 빛 그 자체였다. 
세례 받은 형제들은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이렇게 새벽 성경공부를 했던 사람 가운데 
김영훈씨와 만봉씨는 우리 선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결실이다. 
중국에서 온 그들은 처음엔 예수님도, 교회도 전혀 몰랐지만 
새벽 성경공부를 하면서 놀라운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됐다.

연수생 자격으로 온 이 형제들은 
사장님도 칭찬할 정도로 성실히 직장생활을 했다. 
교회에서도 믿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실한 모습을 보였다. 
지친 그들이었지만 공장에서 같이 성경공부를 했고 
그동안 외운 로마서 8장을 암송했다. 
바쁜 공장 일정에 중노동까지 하면서 
언제 외웠는지 그들은 유창하고 진지하게 말씀을 줄줄 읊었다.

영훈 형제는 기도할 때마다 참다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했다. 
그는 한 번도 예배에 빠져본 적이 없고 아픈 적도 없었다. 
그는 무엇을 요구하는 법도 없었다. 그저 감사해 했다. 
그는 대부분 연수생들이 계약기간이 끝나도 
돈을 더 벌기 위해 불법체류자로 남는 것과 달리 연수기간 3년을 마치고 돌아갔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의 법도 지켜야 한다는 내 말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나는 그에게 요한일서 2장 17절 말씀을 항상 들려줬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또 다른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게 하셨다. 
그는 신학대에 진학해 3년 과정을 마치고 주의 종이 됐다. 
그는 ‘중국을 하나님께로’라는 꿈을 갖고 돌아가 
지금은 현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선교회에서는 지금까지 4명의 중국인을 하나님의 종으로 양육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