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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개혁자의 모델 학사 에스라/ [평신도 신학강좌] 성경인물 탐구

영국신사77 2017. 4. 12. 21:37

2011.07.11 17:48

[평신도 신학강좌] 성경인물 탐구

(53) 개혁자의 모델 학사 에스라

아론의 16대 자손으로서 학사(소페르/성경학자) 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가 제2의 모세, 유대교의 창시자, 랍비의 원조, 개혁자의 모델로 불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주전 539년, 고레스 황제가 유대인 해방령을 선포함으로써(스 1:2∼4) 5만여명(스 2:64∼65)의 유대인이 스룹바벨과 함께 예루살렘에 돌아와 우여곡절 끝에 다리오(페르샤 3대 황제/522∼486 BC) 6년(516 BC)에 성전을 재건한다(6:15). 이 성전 재건은 유대인 포로가 70년 만에 돌아와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을 예언한 예레미야의 예언(렘 29:10, 스 1:1)이 성취된 것으로 해석되어, 70년 전(587∼586 BC)의 비극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유대인들마다 감격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을 재건한 것만으로는 예레미야 등이 예언한 새로운 이스라엘 곧 야웨의 제사장 나라(출 19:6)가 회복된 것이라 할 수 없다. 마치 새 부대는 마련하였으나 새 포도주는 준비되지 않은 것과 같았다. 포로 이전의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온전한 예배도, 야웨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의식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스라엘을 멸망케 한 솔로몬의 죄 곧 이방 족속과의 잡혼(출 34:16, 신 7;3)이 공공연히 성행되고 있었다(스 9:2, 느 10:30 참조). 이와 같은 영적 무정부 상태는 50여년 계속되었다.

페르샤 5대 황제 아닥사스다(464∼424 BC)의 신임을 받던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가 등장한 때가 바로 이때였다. 에스라는 다니엘과 모르드개처럼 페르샤의 고관으로서 바벨론의 유대인들에게 모세오경을 가르치던 전문적 성경학자(학사)였다. 그는 이미 고레스의 칙령이 토라에 명시된 대로(레 25:8∼55) 희년 곧 50년 만에(587∼539/8 BC)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따른 것임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의 예고대로(스 1:1)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을 통해 70년 만에(587/6∼516 BC) 파괴된 성전을 재건케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려는 야웨의 역사 경영 패러다임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전 재건 이후 50여년간 지속된 유대인 공동체의 무정부 상태는 참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리던 에스라에게 실망과 조바심을 안겨주었다.

에스라는 제2의 모세가 되려는 비전을 품고 적당한 기회에 페르샤 황제의 신임을 얻어 새 이스라엘 개혁안 곧 모세오경을 들고 1500여명의 정예 야웨주의자들과 함께(스 8)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새 이스라엘 창건을 위한 에스라의 청사진은 성경 연구의 결과로서 계약갱신 축제를 통하여(출 34, 신 27) 모든 유대인을 영적인 야웨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집중된다. 13년 뒤에 도착한 유다 총독 느헤미야와 함께(느 1:1) 이스라엘 역사 최초로 예루살렘의 수문 앞 광장에서 성경통독사경회를 개최하고(느 8), 모든 공동체 일원이 과거의 죄를 자복하는 회개의 절차를 거쳐(느 9) 시내산에서 맺은 야웨와의 계약을 새롭게 갱신하고 이방 여인들과 결별하도록 조치한다(느 10). 이어 새 시대의 출발을 상징하는 초막절을 통해 명실공히 모든 유다인이 야웨의 언약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새 이스라엘 창건을 위하여 사람의 지식이나 권세보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야웨만 의지하고, 모세처럼 솔선수범, 회개하고 금식기도함으로써 말씀의 기초 위에서 새 이스라엘, 위대한 유대교를 탄생시킨 에스라를 생각하며 우리도 이와 같은 개혁자를 기다린다.

장영일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