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역경의 열매] 배정희 인도선교사<1>-<10>

영국신사77 2016. 12. 27. 20:58

[역경의 열매] 배정희 <1> “낮고 낮은 인도 슬럼가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

갈 때마다 하나님 손길 절실함 느껴… 지친 이들과 함께 아버지 집 가고파

입력 : 2016-11-24 21:16
[역경의 열매] 배정희 <1> “낮고 낮은 인도 슬럼가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 기사의 사진
싱글 선교사로 23년 동안 인도에서 사역하고 있는 배정희 선교사. 그는 “철저한 낮아짐을 통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23년 전 소명을 따라 인도로 갔다. 주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이 있었기에 그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희로애락이 점철된 삶이었다. 감사하게도 한 번도 그 길로 갔던 걸 후회해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의 음성보다 대적(大敵)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영적 전쟁터에서 살았지만, 추호라도 그분의 존재를 의심해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등 뒤에 계셨고, 내 앞에서 길을 인도해 주셨다.
 
유엔 센서스에 따르면 2016년 11월 현재 인도 인구는 13억4100만명이다. 수도인 뉴델리가 포함된 연방직할 지역인 델리에는 1868만여명이 살고 있다. 이중 절반가량의 시민이 슬럼가에서 삶을 영유한다. 인도 사회는 빈부 격차가 극심하기로 유명하다.  
 
델리 슬럼가를 방문할 때마다 소설가 김동인의 단편소설 ‘감자’가 연상되곤 한다. 큰 소리 나는 싸움, 위협, 도둑, 살인, 폭력, 매춘, 술주정, 본드로 취해 있는 사람들, 장애 아이들, 넝마 줍는 아이들, 구걸하는 아이들…. 더러운 물이 흐르는 개천 옆에는 오물이 쌓였고 화장터에서 뿜어나는 연기로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곳이다. 지옥이 따로 없다고 할 정도로 처참한 상태가 연출되고 있다. 

‘어떻게 똑같은 세상에 삶의 환경이 이다지도 차이가 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슬럼가를 애써 외면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난 가능하면 자주 찾는다. 방문 횟수가 늘어나면서 생각도 변했다. 처음엔 처참하게만 느껴지던 슬럼가 속에서도 희로애락의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슬럼가는 그 어떤 곳보다도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한 지역이라는 생각을 한다. 허물어진 길거리에서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란 제목의 가스펠을 부르게 된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중에서) 

내가 인도로 간 것은 낮고 낮은 마음으로, 복음의 불모지인 그곳에서 우리의 진정한 인도자는 하나님임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그곳에서 가난하고 지친 인도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라도 겸손하고 낮은 마음이 절실했다. 낮아지고 낮아졌을 때, 그들은 나를 친구로 받아들였다. 

싱글 선교사로 인도에 살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인도로 가는 그 길은 바로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 말이다. 나는 주님의 뜻에 따라 인도로 왔지만, 내가 가는 이 길은 영원한 본향인 아버지 집으로 가는 여정이다.

나는 사랑하는 인도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 집으로 가고 싶다. 아버지 집으로 가기 위해선 인도하심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 그분의 인도 없인 우리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내가 깨달은 바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은 철저한 낮아짐이었다. 가난하고 낮은 심령이 되었을 때에만 그분이 보이며,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이제 나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결국 당신의 뜻을 이루고 계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나의 등 뒤에서 나를 인도해주셨던 그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약력=△1958년 서울 출생 △한세대학교 목회학과 졸업 △인도 네루대학 사회학 석·박사 
      △굿피플 인도지부장 △2015년 코이카 대한민국해외봉사상 수상 


[역경의 열매] 배정희 <2> “내 사랑하는 딸아, 나를 위해 인도로 오지 않겠니?”

단기선교지 인도서 무더위로 고생… 몸 찬양하는 도중 작은 음성 들려

입력 : 2016-11-27 21:08
[역경의 열매] 배정희 <2> “내 사랑하는 딸아, 나를 위해 인도로 오지 않겠니?” 기사의 사진
1998년 인도 시장통교회에서 배정희 선교사(오른쪽)가 인도 현지 청소년들과 찬양하고 있다.

인도로 가는 길은 멀었다. 1993년 7월 7일, 내 인생 처음으로 인도를 찾았다. 나를 포함한 여의도순복음교회 월드미션 인도선교단기팀 13명은 남인도의 첸나이를 찾았다. 직항이 없기에 중간에 경유하고 기다리는 시간을 포함, 20시간 가까이 걸려 첸나이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기장은 첸나이의 기온이 섭씨 46도라고 안내해줬다. 46도란 말에 기가 질렸다. 기내에서 나오자마자 역한 냄새가 났다. 입국 수속을 받으려 줄을 섰다. 분명 에어컨이 가동될 텐데 너무나 더웠다. 공항 천정에서 빙빙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의 열기까지 합세해 숨쉬기가 힘들었다. 우리 팀은 현지에서 사역하는 K 선교사님의 안내에 따라서 버스로 이동했다.  

인도에는 3억3000만 개의 우상이 있다고 한다. 인간이 우상을 만들기에 매일 새로운 신들이 탄생하고 있다. 마하트마 간디도 신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길거리의 특별한 돌들도 신격화되고 있다. 솔직히 인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신을 만들든, 어떤 종교를 믿든, 그들이 얼마나 곤핍하게 살 건, 나와는 상관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사정이었다. 빨리 한국으로 가고 싶었다. 인도에는 인도로 부르신 특별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심한 갈증이 났다. 침을 삼키면서 속으로 절규하듯 외쳤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인도 선교사로 부르지 않아서요.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월드미션 인도팀은 사역의 일환으로 남인도 벵갈로르 지역에서 사역하는 L 선교사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방문했다. 예배 중에 인도팀원들의 몸 찬양 순서가 되었다. 우린 앞에 나와 몸 찬양을 했다. 처음엔 연습한대로, 다소 기계적으로 찬양을 드렸다. 

그런데 찬양이 지속되면서 뭔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며 찬양을 드렸다. 
“내 목소리를 높이고, 내 손을 높이 듭니다. 당신께 우리 삶을 들여 올립니다. 당신께 바칠 제물로….” 

갑자기 영어로 제물(offering)이란 단어가 심장 깊숙하게 박혔다. 그것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때 하나님이 나 외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작은 음성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내 사랑하는 딸 정희야, 나를 위해서 인도로 오지 않겠니?” 
인도 땅을 밟은 지 며칠 동안 그다지도 인도를 부담스러워 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인도행을 청하셨다. 
난 ‘오지 않겠니?’라는 그분의 청유형 어조에 가슴 찡했다.

하나님의 요청에 “예!”라고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며칠간 지낸 인도에서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믿음 생활을 한 이후부터 선교사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호기롭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한국에선 선교 열정으로 뜨겁게 뛰었던 내 심장의 고동소리가 
정작 선교 현장에서의 부르심 속에서 약해져갔다. 

그때 다시 성령께서 역사하셨다. 내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정희야, 넌 무엇을 위해 살겠니? 이 땅에서 집을 지을 생각이니? 
 그 곳은 너의 집이 아니야. 너의 집은 따로 있단다. 
 잠시 뒤에 넌 결국 집으로 돌아와야 해. 
 집으로 올 때까지 네가 할 일이 있단다. 그 일 마치고 와야지.” 

나는 “집으로 가자”는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에 거꾸러졌다. 
그 권유에 순복했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3> “장하다 내 딸” 어머니 축복 속 인도 사역 결심

한 달 동안 인도 전역 선교 정탐 여행… 하나님께서 지시한 그 땅이라는 확신

입력 : 2016-11-28 20:49
[역경의 열매] 배정희 <3> “장하다 내 딸” 어머니 축복 속 인도 사역 결심 기사의 사진
1995년 4월 인도 델리 근교에 있는 친구의 집 앞에 서 있는 배정희 선교사.

인도단기 사역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기내에서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이 나를 감쌌다. 집에 가서 내 결단을 어머니께 말씀 드렸다. 권사님이신 어머니는 담대하셨다. “그래, 하나님이 불렀다면 가야지. 장하다, 내 딸.” 어머니는 부르심에는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면서 간절히 축복기도를 해 주셨다.

인생의 전환점은 그렇게 이뤄졌다. 
1993년 12월 8일 교회로부터 인도선교사 파송장을 받고 인도로 가게 되었다. 
월드미션 단기팀으로 처음 인도에 발을 디딘 이후 반년 만이었다. 

인도 첸나이에 온 지 한 달 후, 조용기 목사님의 첸나이 성회가 열렸다. 
인도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던 내게 첸나이 성회는 커다란 자극제가 됐다. 
성회가 끝난 후 첸나이를 떠나 오직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가야 할 시점이 왔다고 생각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한 달 동안 인도 전역을 배낭 하나만 메고 다니기로 했다. 
선교 정탐 여행으로, 그 땅을 밟을 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야기해 주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먼저 벵갈로에서 사역하는 L 선교사님을 만나러 갔다. 
선배 선교사님 부부를 만나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고 마음에 적었다. 

“배 선교사님, 하나님의 선교에는 실패란 단어가 없어요. 
 그러나 부름 받은 선교사는 실패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며칠을 L 선교사님 댁에서 머물렀다. 그러다 성령께서 뭄바이로 갈 마음을 주셨다. 순종했다. 뭄바이 기차역에서 마중 나온 B 선교사님을 만났다. 인도 선교에 대한 그 분의 열정을 들을 수 있었다. B 선교사님은 영화 ‘슬럼독 밀리어니어’의 무대로 뭄바이 최대 슬럼지대인 다라비(Dharavi)로 나를 인도했다. 

뭄바이는 인구 1700만여명의 대도시로 교통 자체가 볼 거리였다. 철장이 쳐진 버스에 넘치도록 탄 사람들, 인도와 차도의 경계를 아예 무시하며 요리조리 운전하는 오토 릭샤의 행렬이 거대한 행위 예술판과 같았다. 

이후 푸네를 거쳐 델리로 갔다. 델리에 도착해 먼저 여의도순복음교회 안수집사이신 정영재 델리주재 한국 공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정 공사님 부부의 강권으로 그 집에서 기거하게 됐다. 델리 역시 첸나이 못지않게 더웠다. 델리 거리를 걸으며 슬며시 들어오는 마음이 있었다. ‘델리로 와야겠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가운데 소원이 생겼다면 성령께서 인도하신 것이다. 아마도 교회를 발견하기 힘든 델리에서 거룩한 욕심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정 공사님은 델리를 떠나는 날 아침식사 중에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선교사님, 인도에 먼저 온 입장에서 세 가지를 말씀드릴게요. 첫째로 인도는 광야입니다. 광야에선 쳐다 볼 곳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세요. 둘째, 언어 공부를 열심히 하세요. 언어가 약하면 초등학생 수준의 사람들과만 소통이 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언어를 잘 배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도에서는 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인도 사람들이 마음대로 산다고 해서 우리까지 법을 어겨선 안 됩니다.” 정 공사님의 세 가지 조언을 가슴에 새겼다. 

난 결국 북인도행을 결심했다. 그 곳이 하나님께서 지시한 바로 그 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4> 힌디어 공부에 몰입… 졸업식 때 5분간 연설도

살인적 더위·페스트 재앙 등 공포… 예수님 주신 ‘평강의 영’으로 극복

입력 : 2016-11-29 20:23/수정 : 2016-11-30 10:38
[역경의 열매] 배정희 <4> 힌디어 공부에 몰입… 졸업식 때 5분간 연설도 기사의 사진
2007년 인도 델리 순복음교회 성도들과 함께한 배정희 선교사(두 번째 줄 중앙).

1994년 6월 25일 인도 뉴델리에 다시 들어갔다. 뉴델리는 수도인데도 첸나이보다 훨씬 더 삭막하게 느껴졌다. 7월부터 뉴델리의 언어학교에 등록해 본격적으로 힌디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뉴델리의 여름은 상상을 초월할만큼 높은 기온으로 악명 높다. 연일 42도를 넘는 게 기본이다. 어떤 날은 체감온도가 47도, 심지어 50도를 넘기기도 한다. 그런 날엔 지칠 힘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인도생활에 적응돼 가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점점 인도 생활에 길들여져 갔다. 이곳의 환경이 어떠하든, 아무리 덥든, 수십 마리의 도마뱀이 한꺼번에 떨어지든, 온 몸이 벌레에 물리든 나는 이곳에서 견뎌야 한다. ‘부름 받아 나선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힌두어는 영어와 함께 1965년부터 인도의 공용어가 됐다. 인도와 네팔, 파키스탄, 피지 등에서 5억여 명이 힌두어를 사용한다. 인도에선 특히 북인도 지역에서 많이 통용된다. 남인도에서는 힌두어를 몰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난 북인도에서 주로 사역할 계획이라 힌두어를 반드시 배워야 했다.


뉴델리의 힌두어 중앙연구소에서 언어를 배웠다. 한 반에 아시아, 유럽, 미주 등에서 온 15명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다. 학생 가운데는 한국 선교사님들도 있었다. 나름 열심히 공부해 힌두어로 작문을 할 수 있게 됐다. 2년 동안 정말 열심히 언어 공부를 했다. 졸업식이 다가왔다. 샤르마 교장 선생님은 졸업식 때 인도 교육부차관이 참석할 거라면서 내게 힌두어로 5분 연설을 하라고 했다. 

처음엔 힌두어 회화를 못해 교장 선생님 앞에서 대성통곡했던 내가 교육부차관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인도에서의 나의 삶은 깊어져 갔다.  

94년 10월에 뉴델리는 페스트로 초비상 상태가 됐다. 언론은 연일 페스트 창궐을 톱뉴스로 다뤘다. 페스트가 발병한 환자 숫자가 400명을 넘어서 대재앙이 우려된다는 보도였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 대사관 직원 및 주재원들은 전세 비행기로 뉴델리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페스트가 인도를 넘어 인근 네팔과 파키스탄, 중국의 사천성 등지로 확산된다는 보도가 이어지자, 한국 정부에서도 주재원 및 현지 한인들을 위해 전세 항공기를 준비했다. 뉴델리의 한인들도 외출하지 않고 집에만 머물렀다.  

선교사는 선교지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페스트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페스트와 같은 죽음의 기운은 사역 내내 쫓아 다녔다. 보이는 페스트만이 죽음의 병이 아니었다. 죽음을 부르는 수많은 영들과 담대히 싸워야 했다. 이 담대함과 평강이 지금까지 인도 선교를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자주 묻는다. “선교사님, 어떻게 인도에서 혼자 지내실 수 있었어요. 무섭지 않았나요. 두려움과 외로움을 어떻게 견디셨나요.” 비결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생명의 영을 받는 것이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강의 영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  

96년 2월 어느 정도 힌두어를 배워서 기본적인 말을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사역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역을,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해야 할 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는 가장 강력한 일은 기도하는 것이었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5>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와 함께 교회 개척

장차 인도 교계 지도자 기르는 기회 강의하면서 먼저 나 스스로가 배워

입력 : 2016-11-30 20:55
[역경의 열매] 배정희 <5>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와 함께 교회 개척 기사의 사진
1993년 월드미션 단기팀으로 인도를 찾아 현지 아이들과 함께 한 배정희 선교사.
난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구하며 기도했다. 기도하면서 마음에 주신 감동은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라는 것이었다. 일단 과거 여의도순복음교회 대학선교회에서 강의했던 경험을 살려 인도 신학생들에게 필요한 강의를 시작하면 될 것 같았다. 계속 기도하자 성령님께서 분명하게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북인도 신학교의 이사장인 싱 목사님은 한국 장로회신학대에서 신학을 전공하셨다. 한국인 이명희 사모님과 결혼하신 후에 인도로 돌아와 북인도 신학교를 세우셨다. 이미 친분이 있었던 싱 목사님께 강의 자리를 부탁하면 허락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왔다. 그러나 싱 목사님께 전화하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싶었다. 그저 기도만 했다. 놀랍게도 다음날, 싱 목사님이 내게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배 선교사님, 시간이 되시면 우리 신학교에서 강의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정확히 일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도구란 사실을 새삼 느꼈다. 하나님은 내게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이제 인도 선교 사역의 첫 걸음을 떼게 됐다. 강의하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했다. 지난 2년간은 힌디어(hindi language) 공부에 집중했기에 학생들을 가르치며 먼저 나 스스로가 배울 수 있었다. 가르치기 위해선 기도하고 준비해야 했다. 북인도 신학교 학생들은 모두 장차 인도 교계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영광스런 일이었다. 

하루는 한 신학생이 기도제목을 나누고 싶다며 찾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갑자기 실명이 됐고 생활고로 병원에 갈 수 없어 기도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의 이름은 바반 쿠마르. 나의 첫 제자였다. “한 사람의 제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쿠마르가 첫 번째의 그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바반 외에 악발과 아닐, 비젠드라, 프렘 등도 나의 제자였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 한 뒤에 나와 동역했다.  

난 신학교 이사장이신 싱 목사님에게 다섯 명의 신학생이 졸업하면 함께 사역해도 좋은지 의논했다. 목사님은 쾌히 승낙하셨다. 선교지에서 이미 다른 선교사와 사역을 하고 있는 현지 사역자들에게 더 좋은 사례비를 제시하며 일종의 ‘빼내기’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런 일들을 통해 현지 선교사들끼리 관계가 악화되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질서가 중요했다.  

난 바울이 고백한대로 사역하고 싶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함이라.”(롬 15:20) 바울의 고백이 나의 선교 원칙이다. 그 원칙대로 난 절대로 남의 터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저 크건, 작건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바반 쿠마르는 신학교를 졸업한 뒤 싱 목사님의 축복 속에 나와 함께 교회를 개척키로 했다. 우린 델리에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장소를 물색했다.  

1994년 델리에 왔을 때부터 주셨던 소원이 교회 개척이었다. 인도에서 초대교회 같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꿈을 가졌다. 힌디어 공부가 끝날 즈음, 96년을 넘기기 전에 교회를 개척하고자 결단했다. 당시 교회 개척을 위한 기도를 하기만 하면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가까운 시장통인 무카(Muka) 지역이 마음 가운데 떠올랐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6> 개척 두달 만에 맞은 첫 성도… 부흥 물꼬로

방과 후 영어수업 주효… 학생들 모여들어 2년 안돼 공간 부족할 만큼 성도 늘어나

입력 : 2016-12-01 21:05
[역경의 열매]  배정희 <6>  개척 두달 만에 맞은 첫 성도… 부흥 물꼬로 기사의 사진
1996년 12월, 인도 델리의 무카 지역 시장에 세워진 선가티순복음교회에서 설교하는 배정희 선교사.
교회 개척을 위해 기도를 계속하면 인도 델리의 무카지역 시장 거리만 보였다. 무카엔 30만명이 살고 있다. 시장 주변으론 2500여명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시장을 오고 가면서 눈에 들어온 아이들의 모습이 마음에 머물렀다. 새벽에 헌 신문과 빈 병을 주워서 파는 아이들, 가게 터에서 잠을 자고 기지개를 펴는 아이들, 점포에서 일을 하는 키 작은 아이들, 넝마 줍는 아이들, 그리고 시장을 배회하는 아이들. 이들의 안쓰러운 모습이 마음에 다가왔다. 시장통에 교회를 세우고 싶었다.  

시장 상가 건물을 알아봤다. 몇 군데가 비어 있었다. 정확한 장소를 위해서 기도를 거듭했다. 1996년 11월에 무카 지역 시장 내 5층짜리 건물 3층의 10평 남짓한 공간을 계약했다. 인도에 온지 2년 만에 드디어 시장통에 교회개척을 했다. 96년 12월 1일 선가티순복음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사람들은 선가티순복음교회란 이름보다 시장통교회로 불렀다. 신학교 제자인 바반 전도사가 합류했다. 

창립예배를 마치고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됐다. 바반 전도사와 난 하루에 보통 4시간을 기도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늘 교회에는 둘밖에 없었다. 실망하지 않았다. 매일 새벽에 교회에서 2시간 동안 간구했다. 

“하나님, 제발 사람 좀 보내주세요.” 

두 달 만에 첫 성도가 왔다. 오디샤(Odisha) 지역 출신인 존슨 가족이 교회의 첫 성도가 됐다. 너무나 기뻤다. 존슨형제는 초등학교에서 선생님들을 돕는 일을 하는 성실한 형제로 전부터 바반 전도사를 알고 지내던 크리스천이었다. 두 번째 성도는 군인인 가브리엘 형제였다. 델리에 막 정착한 그는 물건을 사러 시장에 왔다 찬양소리를 듣고 자발적으로 교회에 들어왔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한 명 두 명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주셨다.

새 신자들은 힌두교, 이슬람교에서 막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지도,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독교 신앙생활을 했던 존슨 가족과 가브리엘 가족을 먼저 교회로 보내주신 것이었다.  

우린 의자 없이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성가대도, 주보도 없었다. 그러나 우린 초대교회처럼 가족이었다. 지체가 진정으로 연합하는 한몸 공동체를 꿈꿨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기도하는 일 외엔 방법이 없었다. 10평 남짓한 장소에서 우린 기도를 심고, 또 심었다.  

시장통교회를 시작한 지 1년 정도 지나자 주일학교 학생들만 80명을 넘어섰다. 방과 후 영어수업이 효과를 본 것이다. 1998년 중반쯤엔 장년 성도들이 80명이 넘었다. 주일학교 학생들도 지속적으로 늘어나 10평 공간의 예배당으론 자리가 부족했다.  

시장통 교회가 부흥하면서 일꾼과 조직이 필요했다. 97년 6월 북인도신학교의 제자인 프렘과 악발이 전도사로 동역했다. 바반 전도사에겐 장년 성도들을 맡겼다. 프렘 전도사는 청년사역을 책임졌다. 악발 전도사는 어린이 사역과 찬양 리더로 섬겼다. 현지인 사역자들은 나를 믿고 잘 따라 주었다.

교회에선 살아 있는 간증이 넘쳐났다. 쏟아져 나오는 간증은 평범했지만, 진심으로 드리는 간증이라서 마음을 흔들었다. 물이 정확한 시간에 나옴을 감사했고, 배가 아프지 않아 교회에 제 시간에 나올 수 있던 것도 감사하며 간증했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역경의 열매] 배정희 <7> 슬럼가 교회로 시작 4년 만에 4개 지교회 개척

전임 사역자 파송된 제자들 헌신… 선가티 본교회와 완벽한 팀 사역

입력 : 2016-12-04 21:08
[역경의 열매] 배정희 <7> 슬럼가 교회로 시작 4년 만에 4개 지교회 개척 기사의 사진
1998년 12월 인도 사하드 지역 영광순복음교회 성도의 아이를 안고 있는 배정희 선교사.
학교수업이 끝난 후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개방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난한 부모 밑에서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영어와 함께 말씀도 가르쳤다. 당시는 칠판이 없어서 나무판에 까만 페인트를 칠해 사용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120여명의 아이들은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을 즐거워했다.

아이들에겐 마음을 함께 할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거리에서 노는 것보다 교회에 나와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영어공부 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아이들로 인해 전도된 어른들도 많았다. 영어 학교와 더불어 유치원 사역도 시작했다.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은 선교 제한 국가인 인도에서 교회가 사람들과 교류하는 접촉점이 됐다. 어린이들을 통해 어른들이 점점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를 받아주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힌디어 설교를 했다. 부족했지만 힌디어로 설교를 하자 성도들이 더욱 말씀을 친숙하게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내게 지교회를 개척하라는 믿음을 주셨다. 하나님이 어떠한 마음의 소원을 주실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래서 마음에 든 생각은 실행해야 했다. 

우린 98년 10월 3일 델리의 외곽 슬럼가인 사하드(sahad) 지역에 지교회인 영광순복음교회를 개척했다.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슬럼가에 하나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졌다. 주변의 가난하고 어려운 성도들이 한 둘씩 모여들었다. 처음엔 세 명의 전도사들이 돌아가면서 말씀을 전했다. 악발 전도사를 정식으로 영광순복음교회 전임 사역자로 파송했다. 교회는 시장통 선가티순복음교회와 완벽한 팀 사역을 펼쳤다. 99년에는 청년 사역을 맡고 있던 프렘 전도사가 교회 개척을 위해 펀잡 지역으로 떠났다.  

2000년에는 아닐과 비젠드라 전도사를 이슬람권인 사란(saran) 지역으로 파송했다. 이 지역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한 곳이다. 우린 이 지역에 지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1년여 동안 기도하며 준비했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 아닐 전도사는 니겔순복음교회를, 비젠드라 전도사는 벧엘순복음교회를 개척했다.

때때로 핍박이 있었다. 두 전도사는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가서 16시간이나 조사를 받은 적도 있고, ‘예수 영화’를 상영했다가 몰매를 맞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부흥했다. 살아있는 교회는 반드시 증식하게 된다. 난 시장통교회를 개척할 때 ‘교회가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를 꿈꿨다. 그 꿈대로 개척 4년 만에 4개의 지교회를 개척, 사랑하는 제자들을 전임사역자로 파송했다.  

시장통 선가티순복음교회가 안정을 찾게 되자 본격적인 제자훈련을 시도했다. 제자들은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갔다. 훈련학교 제1회 졸업생 4명 가운데 디나나트, 하렌드라, 란지트는 주의 종이 되어 교회를 개척했고, 데이빗은 병원에서 간호사로 사역 하고 있다. 2016년 11월까지 102명의 제자가 세워졌다. 인도에서 사역하기 위해선 보혜사 성령과 동행해야만 한다. 난 매일 새벽마다 졸업한 102명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제자들을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교회가 성장하자 모두 함께 모일 더 큰 장소가 필요했다. 비좁은 곳에서 에어컨도 없이 예배드리는 인도 성도들이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서 2002년부터 땅을 보러 다녔지만 별 진전이 없었다. 땅도, 돈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께 기도만 했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8> 오직 기도의 힘으로 세운 미션센터

건축비 부족할 때마다 각계서 헌금… 인도에 온지 10년만에 헌당예배

입력 : 2016-12-05 21:18
[역경의 열매] 배정희 <8> 오직 기도의 힘으로 세운 미션센터 기사의 사진
2001년 9월 인도 델리의 ‘쿠툽 미나르’ 유적지에서 제자훈련 받는 학생들과 함께 한 배정희 선교사.
2002년부터 2년 동안 계속 기도하면서 인도 델리 주변의 땅을 보러 다녔다. 2004년 시장통교회 건물 주인의 아들 마이팔이 좋은 땅이 있다며 보러 오라고 했다. 경찰인 장인 소유의 땅으로 공항 근처에 있었다. 60평 정도의 부지로 상당히 좋아 보였다. 땅을 구입하려면 한국 돈으로 2000만원 정도가 필요했다. 돈이 없었다. 마이팔의 장인은 땅값은 차후에 받겠다며 명의 이전부터 해 주겠다고 했다. 한국 돈으로 약 100만원을 주고 등기이전을 했다. 난 믿음을 갖고 진행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 부지 마련 및 건축을 위한 세밀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서아세아선교회의 서영옥 장로님이 2만달러를 헌금해주셔서 매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축할 돈이 없었다. 국제교회성장연구소 이사로 있는 란짓 아브라함 목사님이 우리가 교회건축을 위해 땅을 매입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화로 약 300만원의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건축을 시작했다. 일단 공사에 착수했지만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막막했다. 란짓 목사님이 빌려주신 돈은 갚아야 하고 건축이 완료될 때까지는 자재 구입 및 시공 등 많은 재정이 필요했다.  

인도 행정당국과 경찰 관계자들은 건축에 대해 이리저리 트집을 잡으며 은근히 뇌물을 요구했다. 거절했더니 온갖 방해를 하기 시작했다. 건축과정에서 심신이 피곤해져갔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밀려오는 압박감 속에 결단하며 기도를 했다. 2004년 8월 25일 밤에 난 얍복강가에서 씨름했던 야곱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제 욕심으로 이 일을 하는 게 아니란 것 잘 아시죠. 지금 전 믿음으로 시작한 이 건축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말씀을 주셨다. “믿음과 은혜로 건축해라.” “그래요, 하나님. 은혜와 믿음으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게 기드온의 표적을 보여주세요. 제 개인 은행 계좌번호를 아는 사람은 다섯 명도 안 됩니다. 내일까지 누군가가 제 통장에 1000원을 입금하면 전 그것을 기드온의 표적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믿음으로 건축을 진행하겠습니다.”

실제로 당시 내 통장 계좌번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누군가 입금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다음날 통장을 확인해 보았다. 10만원이 들어 있었다. 절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던 그 시간에 누군가가 내 통장에 10만원을 입금한 것이다. 1000원을 구했지만 하나님은 백배 더 주셨다. 다시 깨달음이 왔다. ‘건축도 결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우리 교회는 자재비 등 외상값을 지불하지 못해 독촉을 받고 있었다. 며칠 후 경기도 파주에서 개척하신 김기식 목사님이 시무하신 교회에서 2500만원의 헌금을 보내주셨다. 놀라웠다. 난 시시콜콜한 것까지 걱정했지만 하나님은 모든 걸 계획하고 계셨다. 그는 우리의 위대한 장인(匠人)이셨다. 그 위대한 장인의 지휘 아래 건축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인도에 온지 10년 만인 2005년 1월 9일에 미션센터 헌당예배를 드렸다. 3층 건물로 예배당 뿐 아니라 지역주민을 위한 유치원과 컴퓨터실 등 다양한 용도의 공간을 만들었다. 시장통 교회 쪽방에 마련된 제자훈련학교도 더 넓고 쾌적한 장소로 이전할 수 있게 됐다. 아이들이 “새 집이 생겼다”며 너무나 좋아했다.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건축과정에서 겪었던 여러 어려움들과 고통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9> 더운 날씨·오염된 환경, 각종 질병 시달려

40도 이상 체온 오르고 인사불성… 죽음의 영이 옆에 기다리는 느낌

입력 : 2016-12-06 21:14
[역경의 열매] 배정희 <9> 더운 날씨·오염된 환경, 각종 질병 시달려 기사의 사진
1997년 3월 인도 델리 시장통교회 성도 삭군트라 집사의 발가락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배정희 선교사.
인도는 세계 어느 곳보다도 영적 전쟁이 심한 나라다. 다양한 사건들과 인간관계로 인한 갈등, 질병 등은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가하는 영적 전쟁의 여러 형태들이다. 이곳은 후방이 아닌 최전방 영적 전쟁터다. 셀 수 없는 전투를 치르면서 난 하나님의 강한 군사로 성장했다.  

언젠가 가나안농군학교 부지구입 차 인도에 오신 허승운 목사님과 씽 목사님, 현대중공업 뉴델리 지사의 상무이셨던 안종규 장로님과 함께 차로 이동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림잡아 300㎏이 넘는 소가 갑자기 우리가 타고 있는 자동차로 달려 들었다. 순식간에 소와 차가 충돌했다. 자동차 앞유리는 박살이 났고, 차 앞부분이 완전히 구겨졌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다. 차가 그렇게 크게 망가졌는데도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한 사건들은 부지기수다. 선교를 위해 파키스탄의 라호르(Lahore)로 가기 전날 가방을 잃어 버렸다. 가방에는 여권과 지갑이 들어 있었다.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두 시간을 기도하고 나니 깊은 심령으로부터 감사가 나왔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 보니 집주인 아저씨였다. 1시간 전에 어떤 남자가 찾아 왔는데 잃어버린 내 가방을 길거리에서 주워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인도에선 길에서 주운 가방을 찾아 주는 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다음날 무사히 라호르에 갈 수 있었다. 

비자는 제시간에 제대로 나온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예정된 목적지에 가지 못한 적은 없었다. 가끔 ‘하나님은 어찌해서 이리 어렵게 비자를 받게 하시지. 그냥 일사천리로 진행되도록 해주시면 안 되실까’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기도하라는 것이다. 선교사는 어디를 가든 해당 국가와 지역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 모든 곳이 영적 전쟁터임을 인식하고 사단의 세력을 물리칠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인도는 더운 날씨에 지역도 넓고 지저분한 편이라 환절기 때마다 각종 전염병과 풍토병이 발생한다. 2010년 8월쯤, 나는 11월로 예정된 전인도선교사대회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8월 30일 오후부터 갑자기 몸이 너무 아프기 시작했다. 열도 올랐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뎅기열에 걸렸다고 했다. 뎅기열은 뎅기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감염돼 생기는 병으로 사망확률도 높다. 다행히 치사율이 높은 뎅기 쇼크 증후군까진 가지 않아 5일 후 간신히 퇴원할 수 있었다.  

뎅기열뿐 아니라 장티푸스에 걸려 의식이 흐려지고 심각한 기억력 감퇴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말라리아와 열병도 수없이 걸렸다. 체온이 40도 이상 올라가는 열병에 걸리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면서 인사불성이 된다. 죽음의 영이 바로 옆에서 기다리는 느낌이 든다. 너무 아프다보면 하나님께 살려달라는 기도도 나오지 않는다. 사실 더 살고 싶지 않고 차라리 빨리 이 땅을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매번 신기하게도 며칠간 그렇게 앓다보면 다시 회복이 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님은 나로 하여금 육신의 고통을 통해 십자가를 체휼케 하신 듯하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10> “우리 동네에는 예수라는 사람 살지 않아요”

굶고 병든 사람들 하소연에 충격… 갑자기 복음이 무력하게 느껴져

입력 : 2016-12-07 21:09
[역경의 열매] 배정희 <10> “우리 동네에는 예수라는 사람 살지 않아요” 기사의 사진
1998년 인도 델리 외곽 노다지역 전도집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아주머니를 위한 축복기도를 하고 있는 배정희 선교사.
1998년 여름 교회 자매들과 시골마을에서 축호 전도를 하고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길에서 소똥으로 연료를 만들고 있었다. 우린 그에게 다가가 “예수님을 아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예수라구요? 잘 모르겠네요. 우리 동네에는 예수라는 사람이 살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아, 이 동네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랍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요.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씻기고 구원받아요.”  

“좋은 분이군요. 우릴 위해 돌아가셨다니. 그런데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밥입니다. 구원이고 나발이고 밥 먹여 주는 사람이 최곱니다. 난 사흘을 굶었어요. 배고파 죽겠다구요. 밥 좀 주세요.”

난 그 말에 충격 받았다. 아주머니는 사흘이나 배를 곯았다고 했다. 맨손으로 소똥을 긁어 손톱에 똥이 배어 있다. 온몸에 소똥 냄새가 났다. 그런 상황에서 복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아주머니는 소똥 냄새가 밴 손가락으로 소를 가리켰다. “여기 보세요. 이 소가 절벽에서 떨어져 등을 다쳤어요. 우리 집의 유일한 재산입니다. 저것마저 떠나면 난 죽어야 해요. 수의사한테 갈 돈이 없어 민간요법으로 약을 만들어 발라 줬어요. 예수라는 사람이 정말 있다면 이 소 다친 데를 낫게 해주면 좋겠네요.” 

소 등에는 소똥과 나뭇잎을 이겨 만든 약이 발라져 있었다. 그 등에 수많은 파리 떼가 붙어 있었다. 아무리 휘저어 보아도 파리 떼는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파리 떼가 꼭 죄의 덩어리 같았다. 수많은 죄들이 이 파리 떼와 같이 우리 인생의 찌꺼기에 기생하며 떨어지려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복음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이란 사치스러운 말 같았다.  

이들은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분명히 복음은 능력이고, 생명이라고 성경에 기록돼 있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이 확고하게 있으면 복음을 무력케 하는 여러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선교 제한 국가인 인도에서는 “예수 믿으세요”라고 해선 안 된다. 대신 “나 예수 믿어요”라고 말할 순 있다. 일상에서 복음의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자연스레 그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그 이후는 하나님이 하신다. 영혼의 구원 자체도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복음이 무력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소똥 냄새 나는 그 아주머니 생각이 난다. 그럼에도 복음은 능력임을 믿고 선포해야 한다. 그분도 어느 날 밥 먹는 것보다, 소를 치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더불어 선교사로서 복음과 더불어 떡도 나눠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떡이 더 중요하고, 그것이 복음을 전할 매개가 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교지에선 떡과 복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어떤 경우에도 우린 복음을 전해야 한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만나는 인도인들마다 이 말을 전한다. “나 예수 믿어요. 예수라는 분을 믿는다고요.” 주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아는 자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 앎으로부터 복음의 전파는 시작된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