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역경의 열매] 배정희 인도선교사<11>-<19·끝>

영국신사77 2016. 12. 27. 21:03

[역경의 열매] 배정희 <11> 처참한 폭우 피해 주민 끌어안고 함께 울어

통곡하는 라다크 현지인들에게 최고 선물은 그리스도임을 고백

입력 : 2016-12-08 20:50
[역경의 열매]  배정희  <11> 처참한 폭우 피해 주민 끌어안고 함께 울어 기사의 사진
2010년 9월 홍수피해를 입은 라다크 지역주민들과 함께 한 배정희 선교사(오른쪽 두번째).
2010년 8월 5일 인도 잠무카슈미르 주에 있는 라다크(Ladakh)에 폭우가 쏟아져 엄청난 피해가 났다. 라다크에 살던 희정 자매로부터 긴급하게 전화 연락이 왔다. “배 선교사님, 라다크로 좀 와주시면 안되겠어요.” 델리순복음한인교회에 출석했던 희정 자매는 인도인 제임스와 결혼해 그곳에 살고 있었다.

나는 애타는 마음으로 도움을 청한 희정 자매에게 일단 가겠다고 약속했다. ‘고갯길의 땅’이란 뜻의 라다크는 히말라야 산맥 북서부와 라다크 산맥 사이에 위치해 있다. 해발 3000m가 넘는 고산지대로 영하 20도를 넘는 겨울이 8개월 이상 지속되는 곳으로 아리아인과 티베트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비정부기구(NGO)인 굿피플의 양오현 회장님께 연락했다. 굿피플은 긴급구호팀을 보내기로 했다. 난 미리 라다크 지역 현장답사를 위해 김성준 선교사 등과 함께 8월 14일에 라다크로 떠났다. 델리에서 비행기로 약 1시간30분 정도 걸렸다.  

김 선교사와 나는 제임스가 몰고 온 지프를 타고 라다크 공항을 빠져 나왔다. 쓰러진 전봇대가 즐비했다. 뿌리째 뽑힌 산기슭의 나무와 침수된 집들이 보였다. 제임스에 따르면 폭우로 700여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겨울이 다가오기에 내복과 난로, 비상식량 등이 급히 필요하다고 했다. 

폭우피해는 극심했다. 군인들은 흙더미 속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찾아내 사진을 찍어 안내판에 붙였다. 도처에서 통곡 소리가 났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폭우가 이렇게 무서울 수 있구나.’ 자연 앞에 무력한 인간을 생각했다.

산을 오르면서 일일이 피해 입은 집들을 방문했다. 수재민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했다. 통역관을 대동했지만 나는 직접 손짓 몸짓 눈짓으로 그들과 소통했다. 우린 마음으로 위로와 감사를 나눴다. 허리를 다쳐 거동을 못하는 할머니가 계신 집을 방문했다. 밖에는 찬란한 햇빛이 비치고 있는데 방은 너무나 컴컴하고 추웠다. 할머니는 웃옷을 벗고 거죽대기로 몸을 가린 채 누워 있었다.  

통역관에게 “할머니를 위해 기도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라”고 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절히 기도해드렸다. “하나님, 할머니에게 참된 평화를 주십시오. 비록 하반신 마비로 거동하기 힘들지만 마음 안에 깊은 평강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할머니가 생명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주님 이 어두컴컴한 작은 집에 찾아오십시오. 오직 당신만이 빛 되신 구주이심을 고백합니다.”

난 할머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가장 좋은 선물, 가장 좋은 소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이 땅을 떠난다. 라다크 할머니처럼 외관상 비참하게 살건, 한국의 부촌에서 행복한 노후생활을 보내건, 결국 이 땅을 떠나 최후심급의 골짜기에 선다. 그 때 우리를 도와줄 이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 밖엔 없다.  

수재민들은 군부대 인근의 큰 텐트 안에 머물고 있었다. 자녀와 남편을 잃은 여자들은 처음 보는 내 어깨에 기대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모든 환경과 처지를 초월해 하나가 되는 방법은 매우 많다. 그 중 하나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 어깨에 기댄 채 눈물 흘리는 라다크 여인의 체온을 느끼며 나도 울었다. 우린 3일간의 긴급구호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델리로 복귀했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12> ‘거리의 아이’들 비참한 처지에 가슴 찢어져

박사과정 공부하며 102명 인터뷰… 인도의 문제 보며 더 열심히 전도

입력 : 2016-12-11 21:05
  • [역경의 열매] 배정희 <12> ‘거리의 아이’들 비참한 처지에 가슴 찢어져 기사의 사진
2001년 박사과정 지도 교수였던 인도 네루대학 간디 교수와 함께 한 배정희 선교사.
하나님은 내가 인도를 더 깊이 이해하길 원하셨다. 난 슬럼가에도 자주 갔다. 거기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인도의 국가·사회적 문제점들도 점점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도 언어 공부를 비롯해 인도를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했다. 인도의 전통 문화와 종교, 사회적인 배경들을 잘 알아야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가운데 학문적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라는 성령님의 강권하심이 있었다.

결국 1996년 7월 사회학 석사 과정으로 네루대학교에 들어갔다. 인도의 첫 총리였던 네루의 이름을 딴 네루대는 세계적인 석학들과 인도 지도자들이 배출된 학교다. 네루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게 됐는데, 영어로 진행되는 학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사역을 하면서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처음엔 너무 힘들어 ‘주님은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시지’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혜가 생기고 경험도 늘어 양쪽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병행할 수 있게 됐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이어갔다. 

2001년, 박사과정(Ph.D) 담당 지도교수였던 간디 교수를 찾아 갔다. 내가 다루고 싶었던 주제는 ‘거리의 아이들(Street Children)’이었다. 간디 교수는 거리의 여자 아이들과 관련된 델리의 국내·국제 NGO 기관을 방문할 것을 권하셨다. NGO 관계자들을 만나 자료를 모으면서 여자 아이들에 관한 인터뷰를 시작했다.

내가 만난 102명의 인도 소녀들은 각각 NGO 기관에서 기거하고 있는 8∼15세 미만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인도 저변에 깔려 있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직면했다. 이 아이들을 만나면서 인도 사회의 문제의 단면을 알게 되었고, 더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가 있었다.  

14세 소녀 모누의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알코올 중독 아버지의 폭행을 피해 동생들과 거리를 배회하던 모누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통곡했다. 학교를 다니고 싶은 꿈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리고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형부의 동생과 선생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모누는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 끝내 목숨을 끊었다. 모누뿐 아니라 비슷한 아픈 인생을 사는 인도의 어린 소녀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

인도 뉴델리 인근에 있는 하리야나에서 여아들은 5000루피(10만원)에 매매되는데 송아지는 2만 루피(40만원)에 팔린다는 기사를 인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여성의 지위가 가축보다 못한 것이 인도의 현실이다. 낮은 계급의 가정에선 여자 아이를 짐처럼 생각한다. 인도 사람들에게는 ‘다우리(Dowry)’라 불리는 결혼 지참금이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1980년에서 2010년 사이 인도에선 약 1200만 명의 여아 낙태가 자행됐다. 또 15세 미만의 어린 소녀들이 조혼으로 여성의 정체성을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 

인도는 평균 20분마다 성폭력이 일어나는 나라다. 인도에선 여자 아이들이 가족이나 친족, 혹은 길거리의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땅을 덮고 있는 사탄의 그림자가 있다. 인도의 거대한 사회악이 일소되기 위해선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야 한다. 복음은 모든 죽은 것들, 죽어가는 것들을 살린다. 제2, 제3의 모누가 나오지 않기 위해 더욱 힘써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13> 사랑하며 살다 기쁘게 죽음 맞으리라

어머니 위독 소식 듣고 급거 귀국… 여러 죽음 보면서 더욱 믿음 단련

입력 : 2016-12-12 21:15
[역경의 열매] 배정희 <13> 사랑하며 살다 기쁘게 죽음 맞으리라 기사의 사진
2005년 5월, 세계선교대회 참석차 한국을 잠시 방문했을 때 어머니 박봉주 권사(왼쪽)와 함께한 배정희 선교사.
난 인도에서 무수한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지 생각했다. 죽음 장면을 볼 때마다 죽음으로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랑을 실천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일본의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는 “죽음은 내게 주어진 최후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나도 죽음으로써 내 마지막 사명을 이룰 수 있을까.’ 인간은 결국 하나님 집으로 돌아가 거기서 주님과 영원히 거한다. 그 순간까지 주님 사랑에 힘입어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리라 다짐해 본다.  

타고난 중보기도자로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신 어머니는 2012년 11월 24일 84세를 일기로 이 땅을 떠나셨다. 어머니가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자 둘째 동생 복희가 당신을 모셨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무렵 치매 증세까지 있었다. 인도에서 난 매일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고 매주 월요일 전화를 드렸다. 전화상으로 말씀을 잘하셨기에 어머니가 그리 심하게 치매를 앓는 줄 몰랐다.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조용기 목사님 초청 인도 대성회’가 열리기 7일전인 2012년 11월 20일,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니, 엄마가 지금 죽어가고 계셔. 빨리 한국으로 나와.” 대성회에 참석하려던 나는 아무 준비도 없이 급히 한국으로 왔다. 한국으로 오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잘못하면 어머니를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다. 11월 23일 한국에 도착해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봤다.

“엄마 저 왔어요.” 의식이 없었다. 난 세 마디를 했다. “엄마, 정말 사랑해요. 엄마, 정말 미안해요. 엄마, 정말 감사해요.” 난 어머니가 그 소리를 들으셨다고 믿는다. 다음 날 어머니는 편안한 모습으로 천국에 가셨다.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인도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나를 기다리며 죽음의 시간을 연기하셨던 것이다.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순간 동생처럼 지냈던 차진호 목사가 떠올랐다. 전화를 했다. “진호야. 엄마 장례식 좀 준비해줘.” “누나,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차 목사는 어머니의 천국행에 아들 노릇을 해 줬다. 차 목사를 비롯해 수많은 장로님과 권사님, 성도님들이 오셔서 위로해 주셨다. 그분들 덕택에 슬프지만 아름다운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 치른 다음 날 곧바로 조 목사님의 하이데라바드 성회에 참석키 위해 인도로 떠났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수 있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확고한 천국 신앙을 간직하셨다. 어머니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신 것뿐이다. 천국으로 이사 가신 어머니는 지금도 세 딸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실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내겐 천국에 갈 아주 중요한 이유 하나가 더 생겼다. 사랑하며 살다 기쁘게 죽음을 맞으리라.

그 후로도 난 인도에서 수많은 죽음과 대면해야했다. 전기선을 만져 충격으로 죽고, 부엌에서 음식 만들다 옷에 불이 붙어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아이 낳다가 죽고, 병 걸려서 죽고, 홍수로 죽고, 지진이 나서 죽고, 길거리에서 자다가 죽고…. 그 대면의 순간마다 삶은 죽음과 연결돼 있음을 느낀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싫은, 이해할 수 없는 죽음도 있다. 슬프지만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죽음도 있다. 죽음을 통해 믿음은 단련된다. 나보다 먼저 죽은 자들은 한결같이 내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단 하루도 무의미하게 살지 마십시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14> 필요한 대로, 구하는 대로 채워주신 하나님

자동차 등 사역 비용 헌금으로 감당… 정직·투명하게 재정운용 원칙 지켜

입력 : 2016-12-13 20:39/수정 : 2016-12-13 21:11
[역경의 열매] 배정희  <14> 필요한 대로, 구하는 대로 채워주신 하나님 기사의 사진
2008년 2월 마더 테레사 수녀가 운영했던 인도 콜카타의 ‘죽음의 집’에서 복수가 차 힘들어하는 한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배정희 선교사.
23년 전 여행가방 하나만 들고 인도 땅을 밟았다. 혈혈단신 인도에 도착해 사역을 전개해 나갈 때 나를 지탱해 준 단어가 ‘인도하심’ 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나를 인도해 주셨다. 그 인도하심은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선교사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달란트와는 상관없이 재정 운용을 잘해야 한다. 내겐 재정원칙이 있었다. 모든 재정의 필요를 오직 하나님께만 고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기로 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재정을 공급해 주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나가기로 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말씀은 23년간의 인도 사역에서 그대로 적용됐다. 

인도에는 전 세계 빈곤층의 30%가 몰려 있다. 인구의 60% 이상이 절대 빈곤층이다. 카스트제도에 따라 가난도 세습이 된다. 이들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신다는 재정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도에서의 주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에게 올바른 성경적 재정원리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특히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때, 카스트제도상의 계급을 뛰어넘어 재정적으로도 새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난 인도 사람들에게 마태복음 6장 33절의 원리가 인도에서도 적용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울타리를 치는 경향이 있다. 자신만의 울타리를 치고 그 경계를 넘지 않음으로 풍성한 하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의 영역에선 나의 생각을 뛰어넘는 그분의 역사가 분명히 있다.  

인도에 온지 3년쯤 지났을 때였다. 언어과정을 마쳤기에 본격적인 사역을 위해서 자동차가 필요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다. 대학선교회에서 함께 사역했던 김기식 목사님이 무더운 여름에 운전을 하다 갑자기 내 생각을 했다. ‘인도는 한국보다 훨씬 더 더울 텐데, 우리 배 선교사님이 차도 없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자신의 차도 고장이 나서 수리해야 하지만 우선은 나에게 자동차를 후원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김 목사님은 그 해 목사 안수식에서 받은 축하비와 아이들 저금통까지 다 털어서 내게 보내줬다. 김 목사님의 사랑과 섬김이 나를 눈물짓게 했다.  

처음으로 인도의 땅을 구입할 때 도움을 준 강남순복음교회 조은수 권사님도 잊을 수 없다. “배 선교사님, 귀한 사역하시네요. 선교 사역에 쓰세요.” 조 권사님은 500만원을 헌금하셨다. 100만원은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을 사는 데 써도 좋다는 말씀도 하셨다. 감사로 그 돈을 받았다. 500만원은 인도에서 큰돈이었다. 돈은 필요하지만 돈에 초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나님은 돈과 관련해선 모든 면에서 투명하고 공식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지혜를 주셨다. 서아세아선교회 회장님께 조 권사님으로부터 사랑의 헌금을 받았다고 이야기 했다.

그 뒤로도 누군가가 내게 헌금을 하면 반드시 공식적으로 보고했다. 그것은 정직과 투명의 훈련이었다. 난 선교 현장에서 뜻으로 시작한 사역이 돈으로 끝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선 작은 일에서부터 정직과 투명의 훈련이 필요했다. 조 권사님이 헌금한 돈 전액은 구 선교센터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됐다. 한 권사님의 믿음의 씨앗이 인도 땅에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15> 사역 7년 만에 안식월…‘마음의 몸살’ 앓고 다시 인도로

6개월 쉬는 동안 영국서 훈련과 공부… “하나님이 인도서 기다리신다” 응답

입력 : 2016-12-14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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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인도 델리의 그린트리 유치원에서 성탄절 행사를 마치고 학생들과 함께 한 배정희 선교사(왼쪽 세 번째).

“저, 너무 힘들어요, 목사님. 그냥 잠만 자고 싶어요.” 

2000년 9월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에 마중 나온 런던순복음교회 김용복 목사님에게 난 어린아이 투정부리듯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인도사역 7년을 마친 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선교국으로부터 6개월간의 안식월을 허가 받았다. 

그랬다. 난 아팠다. 심한 몸살에 걸렸다. 감기 몸살이 아니라 ‘마음의 몸살’이었다. 육체적으로 탈진 직전까지 왔다. 인도에서 1994년부터 2000년까지 7년간 열심히 달려왔다. 부르심에 순종하며 인도에 갔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나 컸다. 카스트 제도라는 질긴 뿌리에 심겨진 검은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는 인도 사람들에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들과 관계 맺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선교 제한 국가인 인도에선 내놓고 복음을 전할 수도 없었다. 모든 상황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매일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과는 판이한 문화와 생활의 현실에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했다. 질병과 자연재해도 수시로 찾아왔다. 물론 이런 상황을 예상 못한 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 선교사 이전에 한 명의 여성이었다. 그것도 독신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벗어나고만 싶었다. 마음이 약해져갔다. 거의 탈진상태가 됐다. 육신의 몸살은 좀 쉬면 나아졌지만 마음의 몸살은 좀체 낫지 않았다. 남모르게 ‘꺼이꺼이’ 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보통 선교사들은 7년을 한 주기로 보고 이후 재충전을 위한 안식년을 갖는다. 인도생활 7년이 지나자 나는 무조건 쉬고 싶었다. 부르심을 재차 확인해 보기 원했다. 쉬면서 다음 사역 준비를 하고자 했다. 난 한국과 인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었다. 그 다른 곳으로 선택한 나라가 영국이었다.

런던 외곽의 국제YWAM(예수전도단) 베이스에서 시니어들을 위한 훈련과정인 CDTS를 6개월 동안 받았다. 전 세계에서 온 시니어 크리스천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집중했다. 말씀과 찬양 가운데 거하면서 진정한 회복이 시작됐다. CDTS 훈련을 마치고 WEC국제선교회에 가서 국제적인 리더십을 배웠다. 영국에서의 6개월이란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이제 인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전에 다시 한 번 인도를 향한 부르심을 확인하고 싶었다. 

떠나기 전에 영국 교회의 집회에 참석했다. 영국 목사님이 참석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셨다. 나도 그 앞에 섰다. 목사님의 기도가 내 맘에 박혔다. “인도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도 기다리고, 인도 성도들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큰 부르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성령의 불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다시 뜨거워졌다. 

‘나를 기다린다’는 말이 크게 와 닿았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거 하나로 갈 이유는 충분하지 않은가. 이제 확인은 끝났다. 뒤를 돌아 볼 필요가 없다. ‘가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다. 난 거기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소명이요, 숙명이다. 그 소명에 순명(順命)해야 한다. 인도로 돌아왔다. 

“시스터, 잘 오셨어요.” 

인도 도착 후 맞은 첫 주일에 인도 성도들이 한 아름 꽃을 내게 안겨주며 “우리가 시스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라고 말했다. 눈물이 났다. 그것은 어느 날 천국에서 그 분이 내게 해 줄 말이었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16> 성령님 아니었으면 도둑 맞을 뻔했던 큰 돈

주변서 맡긴 돈으로 ‘건물사라’ 말씀… 한국 다녀온 사이 살던 집 도둑 들어

입력 : 2016-12-15 21:21
[역경의 열매] 배정희 <16> 성령님 아니었으면 도둑 맞을 뻔했던 큰 돈 기사의 사진
2016년 2월 27일, ‘비전 캠프’ 후 제자들과 함께 기념촬영 한 배정희 선교사(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
2006년 선교대회를 앞두고 갑자기 제자훈련학교 호스텔 건물을 사게 된 사연도 잊을 수 없다. 미국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활동하시는 박찬길 장로님이 인도를 방문하셨다. 난 장로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진 그다지 친한 관계가 아니었다. 박 장로님은 미국으로 돌아가시면서 내게 8000달러를 맡기셨다. “박 장로님, 저를 어떻게 믿고 그 돈을 맡기세요.” “나도 사람 볼 줄 압니다. 배 선교사님은 그냥 믿음이 갑니다. 일단 맡아 두세요.”

난 박 장로님께 보관증을 써 드렸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인도에서 오랫동안 사역하다 추방된 A 선교사님이 잠시 인도를 방문했다. 선교사님은 인도의 제자에게 차를 사 주려 환전했는데 돈이 턱없이 부족해 살 수 없었다. 선교사님은 그 돈을 내게 맡겼다. 별안간 박 장로님의 돈과 A 선교사님의 돈을 맡게 되었다.

그 후 어느 날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제자훈련을 위해 호스텔 건물을 사라.” “하나님, 저에겐 돈이 없어요. 어떻게 건물을 사나요.” “너 지금 돈이 있잖니.” “무슨 돈이요.” “박 장로와 A 선교사 돈이 있잖아.” “잘 아시잖아요. 그 돈은 제 돈이 아니란 걸요.” “내 일을 하는데 네 돈, 내 돈이 어디 있니. 아무튼 그 돈으로 건물을 사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두 분에게 메일을 보내 맡긴 돈을 잠시 써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두 분은 흔쾌히 동의했다. 난 그 돈으로 청년들이 거주할 15평정도 되는 허름한 건물을 샀다. 급하게 등기까지 마무리 하고 선교대회 참석차 한국에 왔다. 그런데 인도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머물던 건물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윗집, 아랫집이 모두 도둑을 맞았다. 우리 집에도 도둑이 들어왔다. 사실 우리 집엔 도둑이 가져갈 것이 없었다. 순간 돈 생각이 났다. ‘아, 그 돈! 만일 그 돈을 그대로 두고 왔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그 돈으로 건물을 사라고 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신다. 그래서 이유를 알 수 없더라도 성령의 음성엔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난 시간이 지나 박 장로님과 A 선교사님께 빌린 돈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건물도 사고, 돈도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그 돈을 갚는 데도 하나님이 개입하신 스토리가 있다. 선교대회를 마치고 받은 건강검진에서 자궁에 혹이 발견됐다. 약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해 부득불 수술을 받았다. 다른 선교사님들은 모두 사역지로 떠났지만 난 수술하고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해 한국에 좀 더 머물러 있었다. 그때 서아세아선교회 사무실에서 양천대교구를 섬기시는 최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교대회에 오신 선교사님 가운데 인도 선교사님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인도선교사로선 나만 남아 있었다. 최 목사님을 만났다. “우리 교구에 육순남 지역장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새벽에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인도에 내 장막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재정을 헌금하라’고 지시하셨답니다. 우리 교구에 지정헌금을 하셔서 오늘 가져왔습니다.” 최 목사님은 내게 그 헌금을 주셨다. 그 돈으로 박 장로님과A 선교사님에게 빌린 돈을 갚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 인도 땅에 당신의 장막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을 통로로 사용하신 것이다.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스토리를 완성하기 위해 캐스팅된 사람이었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17> 현지인들의 온갖 방해 이겨내고 미션센터 헌당

자금 등 빈틈 없는 하나님 손길로 당초 계획보다 한 층 더 높여 건축

입력 : 2016-12-18 20:52
[역경의 열매] 배정희 <17> 현지인들의 온갖 방해 이겨내고 미션센터 헌당 기사의 사진
2015년 9월 15일 미션센터 테이프 커팅식에 참석한 배정희 선교사(중앙). 배 선교사 왼쪽은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
2015년 9월 15일은 나와 인도의 동역자들에게 뜻 깊은 날이다. 그동안 기도하며 준비했던 인도 미션센터 헌당예배 날이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센터가 차세대를 위한 복음의 전초기지가 될 것을 믿고 기도했다.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힘으로 인도에서 어떻게 그런 센터를 짓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우린 미션센터가 바로 옆에 있는 실상(實像)인 것처럼 믿고 기도했다. 그렇게 8년을 기다렸다.  

본격적인 건축은 2013년 11월부터 시작했다. 건축을 시작할 무렵, 신문에는 센터가 들어설 지역을 개발하려는 정부의 장·단기 미래 청사진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우리의 센터 건립과 발맞춰 정부가 이 지역을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확인해 보니 보도대로 델리 시 당국은 센터 주변을 대대적으로 개발키로 했다. 하수도 공사와 도로 확장, 지하철 공사와 고가도로 공사가 동시에 이뤄지게 됐다. 센터 지역의 개발 소식은 우리를 흥분케 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증을 하게 됐다. 

그럼에도 어려움은 이어졌다. 인도 건축업자의 음해와 속임수, 경찰과 건축 담당자들의 불의한 압박 등으로 우린 심리적·감정적으로 피로해져 갔다. 한 번은 건축현장에 누가 들어와 지하수를 건물 가득 차도록 흘려 놓았다. 막 건물 내부 전기선을 연결한 뒤였기에 우린 마음을 졸이며 일일이 물을 퍼냈다. 전기연결에 문제가 없기를 밤새워 기도했다. 건축업자들의 방해 공작들은 심했지만 우린 그들에게 더 큰 선을 베풀며 대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리어 우리는 재정적인 손실 없이 건축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센터를 건축하는 과정에서 여러 놀라운 일들을 겪었다. 당초 우리 계획은 센터를 5층 높이로 세워 맨 위층을 예배 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확보된 건축 재정으로는 4층 높이 밖에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빈틈없이 정확하시다. 갑자기 인도 현지 화폐 가치가 급락했다. 달러환율이 올라가는 바람에 그 차익으로 건물 한 층을 더 세울 수 있는 재정이 마련됐다. 한 층을 더 올리기로 결정한 후 알아보니 델리의 건축법이 일주일 전에 우리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모든 것이 짜 맞춰진 것처럼 정확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도에서 건축허가를 받기란 결코 쉽지 않다. 더구나 외국인 주도로 이뤄진 건물에 대해선 허가해 주기보다는 불허 하는 경우가 많았다. 2014년 12월 16일, 우린 인도 신문을 읽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힌두권 국가인 인도의 일간 신문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게재됐다. ‘2014년 이전에 건축을 시작한 건물은 어떤 구조로 세워졌든 정부에서 허가를 해 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정말 우리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우리는 이 예기치 않았던 선물을 통해 미션센터 건립을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인도 사람들은 우리가 정부의 배려를 받았다며 운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꼭 누가 우리를 돕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린 그 말을 듣고 씩 웃었다. ‘그렇지요, 우리에겐 너희들이 모르는 물주가 계시지요. 그 분 이름은 조물주이지요. 정부의 배려가 아니라 조물주이신 하나님의 배려로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된 거지요.’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18> 눈물을 흘리며 뿌린 씨앗에서 수많은 결실

‘시장통 교회’ 창립 20주년 맞아 2,558명의 성도들 영적 군사로

입력 : 2016-12-19 20:20
[역경의 열매] 배정희  <18> 눈물을 흘리며 뿌린 씨앗에서 수많은 결실 기사의 사진
2016년 12월 4일 ‘교회 창립 20주년 감사예배’ 후 제자들과 함께 한 배정희 선교사.

난 울보였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해 울었다. 죽어가는 사람들 옆에서 울었다. 몸과 마음이 아파서 울었고 지쳐서 울었다. 제자들이 속 썩여서 울었고 모함을 당할 때는 억울해서 울었다. 울고 나면 시원했다. 하나님께서 “이제 시원하니”라며 다독거려 주시는 것 같았다. 그런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기에 난 울면서도 후퇴하지 않고 변함없이 씨를 뿌릴 수 있었다. 참으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란 말씀은 진리였다. 

세월이 지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많은 결실을 보게 됐다.  
지난 4일 우리 교회는 창립 20주년을 맞아 감사예배를 드렸다. 성전을 꽉 채운 700여명을 바라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20년의 시간이 어느새 흘러 다시 하나님 아버지의 비전을 위한 새 출발하는 시간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고 송축하고 영광이 되는 예배를 드렸다. 주일학교에서 성장한 청년들이 찬양과 드라마로 예수님을 증거했다. 제자 목사들은 인도 전통옷을 입고 찬양과 기도를 했다. 그레이스 밴드는 목소리를 높여 주님을 찬양을 했다. 감사 예배를 드릴 때 20년 전 추억의 사진들이 한 장 한 장 넘겨지는 것 같았다. 그 때마다 우리들의 모습이 변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커졌다. 우린 비전을 이루가고 있으며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영적 군사들이 됐다.  


한치완 총회장님께서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전해주셨다. 20살이 된 우리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결단을 했다. 먼저 우린 추수감사절의 첫 헌금을 중동 선교를 위한 씨앗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다. 또 2024년까지 악발, 아닐, 비젠드라 목사가 각각 100개 교회를 품고, 그들의 제자들과 함께 300개의 가정교회를 세우겠다는 결단을 했다. 1억명의 영혼들이 곳곳에서 함께 예배드리면서 장차 주님 오실 날까지 영적 군사의 사명을 감당하기로 했다. 

20년 전 시장통교회에서 한 사람의 제자 전도사와 개척을 했는데, 지금 2,558명의 성도들이 하베스트(Harvest)의 공동체에 몸을 담고 영적 군사의 신앙으로 무장됐다. 이제는 복음을 위해 무서운 것이 없도록 단단히 사탄과 싸울 장비도 든든히 준비됐다. 우리는 이제 너무 뜨거워져서 복음의 증인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됐다. 지난 시간은 감사 그 자체였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님, 이영훈 목사님, 성도님들 그리고 선후배와 동료들이 함께 뛰었던 인도선교였다. 제자들과 함께 케이크를 자르면서 ‘그동안 함께 있었기에 감사하다’는 말을 눈물로 대신했다. 나는 행복한 선교사다. 

시장통교회 20주년을 맞아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하나님은 보너스로 내게 여러 선물까지 주셨다. 2010년 전인도선교사대회를 마치고 한 달간의 휴가를 받아 한국을 방문했다. 달콤한 쉼을 마치고 인도로 들어가기 전에 동생 집에서 이메일을 점검하니 기쁜 소식이 있었다. 내 박사학위 논문이 독일에서 출판됐다는 것이다. 함께 공부했던 친구의 남편은 인도 하층민인 달리트들을 위한 인권연구소 연구원이었다. 내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친구의 남편이 독일의 한 출판사를 연결해 주었다. 힘겨운 인도 소녀들의 문제가 국제적으로 부각되기를 원했던 나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영문으로 출판돼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었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정희 <19·끝> ‘좋은 소식’ 전하는 길, 고단하지만 감사한 삶

눈물을 기쁨으로 바꿔주신 주님… 생명의 말씀 전파할 책임감 느껴

입력 : 2016-12-20 20:55
[역경의 열매] 배정희  <19·끝> ‘좋은 소식’ 전하는 길, 고단하지만 감사한 삶 기사의 사진
2008년 2월 인도 콜카타 지역의 마더 테레사 수녀가 운영했던 ‘죽음의 집’에서 한 할머니의 얼굴을 만지며 눈물 흘리는 배정희 선교사.

2015년 9월 미션센터 건축 마무리를 위해 바쁘게 지내는 내게 국제 NGO인 굿피플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수상자로 추천됐다며 필요한 서류를 보내달라고 했다. 대한민국 해외봉사상은 한국을 대표해 현지인들에게 헌신적인 봉사를 한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된 상이었다.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이뤄진 인도 사역이었다. 특별히 상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돼 주저했지만 결국 주변의 강권에 따라 지난 22년간의 인도 사역을 정리해서 보냈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얼마 후 굿피플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코이카 해외봉사상 수상자로 최종 확정됐다며 왕복 비행기표까지 보내줬다. 그 해 11월 25일 코이카 본부에서 열린 제10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수상식에 참석했다. 함께 했던 수상자들의 빛나는 이력을 보니 내가 설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울보였던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손길을 느꼈다.

코이카 수상을 계기로 지난 사역을 뒤돌아 볼 수 있었다. 교회 개척과 선교 외에 빈민촌 아이들 교육, 의료캠프, 나환자촌 봉사 등 민간외교사절 활동을 했다. 주님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과분한 관심을 받게 하고 상까지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내 눈물을 기쁨으로 바꿔 주셨다. 재 대신 화관을 씌워 주셨다.  

윌리엄 캐리 선교사의 초라한 묘비에 쓰여 있는 글을 떠올려 본다. ‘가엾고 비천하며 연약한 벌레 같은 내가 주님의 온유한 팔에 안기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 그는 진정으로 낮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의 환호를 받기보다는 하나님의 주목을 받는 벌레가 되길 더 원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했다.  

난 인도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인도 땅에 왔다. 좋은 소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엔 없다. 주위를 돌아보면 모두 주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다.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누구나 주가 필요하다. 그들에게 생명의 주님을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우리에겐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할 책임이 있다. 

지난 23년간 기갈 속에 허덕이는 인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진력했다. 그들을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 자체도 내 힘으론 할 수 없다. 나에겐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할 아무런 힘이 없다. 사실 만군의 주이신 그분은 나 없어도 자신의 구원 역사를 이뤄갈 수 있는 능력의 분이시다. 나는 오직 그분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기쁨만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윌리엄 캐리 선교사는 스스로를 가엾고 비천하며 연약한 벌레로 칭했을 것이다.

이 글을 마치면서 좋은 소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난 주 예수님께 인생을 걸었다. 주님의 사역에 조금이라도 동참할 수 있었기에 의미 있는 나날들이었다. 인생은 한 번 사는 것. 이 단 한 번의 삶을 영원한 가치를 위해 투자하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우리 인생에 좋은 소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분이 우리를 보고 계신다. 이제 함께 그분 집으로 가자. 내 사랑하는 주님 계신 집으로…. 역경의 열매의 지면을 허락하신 국민일보에 감사드리며, 영광은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