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태신앙인이었던 나의 삶속에 슬며시 어둠이 스며들더니 아차 하는 순간 내 멱살을 잡아채고 아예 내 위에 걸터앉아 나를 좌지우지했다. 이 어둠은 수없이 나에게 속삭였다. 있다면 어떻게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어.” 우리 사회의 최고 지성인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신 따위를 신봉하지.” 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왜 이제야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느냐는 마음이 들었다. 술과 담배, 이성과 합리주의, 사회적 성공 따위들이 나를 휘감았다. 외교부의 3대 ‘한량’으로 불릴 정도로 세속주의자가 돼버렸다. 거듭나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엿새동안은 철저한 세속인, 주일은 경건한 기독인이라는 이중생활을 하면서도 그 어떤 두려움이나 거리낌도 느끼지 못했던 나였기 때문이다. 새벽설교를 위해 날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야 하는 목사님들의 피곤한 삶을 지켜보며 나는 절대 목회자는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내가 새벽기도를 생활의 중심축으로 삼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또 국내외 교회에서 ‘성경의 맥을 잡아라’ ‘체험하는 성경의 맥’ 등을 이끄는 성경공부 모임 인도자까지 됐다. 출장 때문에 밤 비행기를 타고 있을지라도 새벽기도 시간만은 꼭 지킨다. 수면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기내 화장실에 가서 나 혼자 기도를 드린다. 오대양 육대주를 건너면서 좋은 화장실에서 새벽기도를 드리는 것은 생각보다 운치가 있다. 기도가 더 잘된다. 그러나 새벽에 정말 일어나지 못하겠어요.”
새벽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건네는 말이다. 요즘 ‘아침형 인간’이라는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나는 여기에 한 마디 더 거든다면, 모든 기독인들이 새벽형 인간으로 변화될 때 개인과 가정은 물론 교회와 지역사회, 나라가 건강해질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나 또한 쓰디쓴 실패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새벽기도를 다녀온 첫날, 나는 곯아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천근만근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날 저녁에는 성경공부모임에까지 참여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과거 술을 퍼마시고 돌아다닐 때는 어디에서 기운이 나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 다음날도 영 몸이 말이 아니었다. 담배를 끊기보다 더 어려웠다. 마치 금단현상이라도 일어난 듯 온 몸이 축 늘어졌다. 비몽사몽간에 새벽기도를 간신히 마쳤다.
셋째날, 나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무병장수에 중요하고 아침에 업무 능력이 향상되기 때문에 사회생활에 오히려 득이 된다며 여러 차례 세뇌시켰다. 1∼2주동안 광장히 힘들었다. 매순간 투여되던 니코틴이 들어오지 않으니 몸이 꽤 놀란 눈치였다.
점차 새벽예배의 별미를 느끼면서, 새벽기도가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대예배처럼 드려야 한다는 믿음이 싹텄다.
새벽예배의 목적은 주님과 1대1로 교제하는데 있다. 목사님 말씀을 듣고 귀를 배부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날 하루를 살아가면서 붙들어야 할 말씀을 듣기 위한 것이다. 오늘 내가 붙들 말씀을 구하고, 그 말씀으로 기도할 때 영의 통로가 열려서 성령님이 임재하신다. 그런 자세로 예배를 드리면 아무리 말씀 전하는 분의 말투가 어눌하다 해도 성령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솔직히 나도 목사님 말씀에 실망한 적이 있다. 특히 외국에서 한인교회를 섬기다 보면 그럴 때가 참으로 많다. 교회 사정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목사님 설교를 피하려고 하지 않고 그 목사님을 위해 기도한다. 눈물을 쏟아가며 기도한다. 그러면 다음날 말씀 전하시는 목사님이 뭔가가 달라져 있다. 힘들 때 새벽기도를 하게 되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도가 막 튀어나온다.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외교부 동북아1과장, 주중국공사, 아태국장, 주뉴질랜드대사, 주미정무공사 △현재 외교부 본부대사 △'성경의 맥을 잡아라' 및 '체험하는 성경의 맥' 등 성경공부 모임 인도자 △온누리교회 피택장로
|
[역경의 열매―문봉주⑵] 고교시절 매점서 일하며 공부 |
나는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믿고 교회에 출석했다. 초등학교 시절 외할머니와 이모의 손에 이끌려 부흥회에 자주 참석했다. 성령이 뭔지 잘 몰랐지만 부흥사의 안수기도로 병고침을 받고 귀신을 쫓겨나가는 기적을 많이 목격했다.
하지만 어린 나의 눈에는 비친 기독인의 모습은 부정적이었다. 하나님을 외치면서도 싸움이나 하는 기독인, 사랑이 없는 기독인이 더많이 보였다. 집회에 참석할수록 오히려 “정말 아니야”라는 확신이 들었다. 창신동 낙산 뒷자락 조그만 판잣집에서 살던 나는 늘 부모님을 그리워했다. 아버지는 돈을 벌겠다며 바닷가를 전전했고, 어머니는 이단에 빠져 가정을 내팽개쳤다. 누이와 단 둘이서 집을 지키곤했다. 물지게를 지고 언덕배기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 방과후 나의 일과였다. 키가 자라지 않은 이유가 그때 물지게를 너무 많이 졌기 때문인 것같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늘 자신만만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살았다. 누이도 혼자 힘으로 공부를 해야했기에 도와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네요.” 어느날,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찾아오셨다. 부모님없이 누이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그 선생님은 등록금을 면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고등학교 매점에서 일하게 됐다. 뛸듯이 기뻤다. 요즘도 단팥빵을 보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단팥빵을 무척 좋아한다. 고등학교 1∼2학년 동안 매점에서 일하면서 점심으로 때우라고 매점 주인이 건네준 단팥빵을 즐겨 먹었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음치였다. 중학교 3학년때 음악선생님이 악기를 배우면 노래를 잘 할 수 있다고 해서 악기를 하나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침 어머니가 고등학교 입시학원 등록을 위해 주신 돈으로 기타학원에 등록했다. 기타에 얼마나 깊게 빠졌는지 나중에 학원에서도 프로연주자로 대우할 정도였다. 아예 그룹사운드를 만들어 연주자로 데뷔시켜주겠다고 나섰다. 이에 나는 대학 진학도 미루고 전문 연주자의 길을 걸으려고 했다. 딱 1년만 연주자의 길을 가겠어요.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다시 학교로 돌아올께요.” 그러나 제대로 한번도 연주자 생활도 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려야했다. 미 8군무대에서 일하도록 해주겠다던 음악학원 원장의 약속이 공수표가 됐기 때문이다. 선생님,공부를 꽤 잘했던 저를 왜 여기 넣어주세요?” 선생님의 조치에 서운했다. 하루 서너시간만 자면서 중학교 기초과정부터 무섭게 파고들었다. 몇달이 지나지 않아 예전 실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났더니 집 앞 공주상회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가게를 옮겼냐고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무슨 소리냐며 오히려 핀잔을 줬다. 눈동자 양 옆에 초점을 맞춰주는 근육이 있는데 너무 오랫동안 한 곳만 바라보다가 그 긴장감을 이기지 못해 한 쪽 근육이 끊어졌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았다.
수술을 받고 회복되려면 서너달은 걸려야했기 때문이다. “또래 아이들보다 1년이나 늦었는데,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요.” 수술을 받고 두달간 요양하고 입시 준비에 몰두했다. 각고의 노력끝에 서울대 외교학과에 합격했다. 이는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같은 인물이 돼 통일조국을 이루겠다는 꿈의 실현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대학생활은 신앙과 멀어지는 계기가 됐다.
|
|
미국연수, 청와대 파견 근무, 동북아1과장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반면 하루라도 술이 없으면 허전함을 느낄 정도로 영혼은 병들어갔다. 사진은 대학졸업식에서 가족과 함께 한 청년 문봉주.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이단의 활동을 허용하시는 것일까?” 이단에 빠진 누이와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같은 생각이 나를 떠날 줄 몰랐다. 하나님의 절대성에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서 세상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담배 연기로 가득 한 생음악 감상실 쎄시봉을 집처럼 들락거렸다. ‘차가운 네 눈길에 얼어붙은 내 발자국, 가랑비야, 내 얼굴을 더 세게 때려다오…’ 애절한 가사에 나의 삶은 더욱 세속적으로 변해갔다. 당시 서울대 출신도 외무고시를 합격하는 사람이 2명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암자를 찾아가 공부에 매달렸다. 사과궤짝 위에 책을 펴놓고 호롱불 밑에서 공부했다. 눈이 아파 1시간 이상 공부를 하면 무리가 왔다. 다행히 1972년 대학을 졸업할 무렵 외시에 합격했다. 세상에 나보다 잘난 사람이 없어 보일 정도로 콧대가 높아져갔다. 군복무에 이어 1년간 외교부에서 근무한 나는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연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당시만 해도 해외나들이 자체가 굉장한 위세였기 때문에 맘속에 교만이 싹텄다. 더욱이 1977년 후반 청와대 의전비서실 파견 근무를 시작하면서 권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됐다. 자신들보다 한참 새파랗게 젊은 27세의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대통령의 친서나 금일봉을 받을 정도였다. 그때 가정집에 전화를 놓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하니까 영동전화국장이 직접 집에 찾아와서 전화를 놓아줬다.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을 떠났다.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배를 탈 수 없습니다.” 나를 보는 순간 그는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안돼요. 당장 나가요”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거만하게 굴던 그는 사시나무 떨듯이 “청와대 비서관이 이렇게 갑자기 암행어사처럼 나타나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사죄했다. 그러곤 뜬금없이 회사 운영 상황을 브리핑했다. 선장에게 아내와 나를 위해 특별운행을 당부했다. 덕분에 우리는 시원한 음료수를 마셔가며 여름바다를 만끽했다. 88년 동북아1과장 시절,한?일 과거사 교섭 때문에 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담배도 평소보다 더 많이 피웠고 스트레스를 풀 겸 친구들이나 주한일본대사관 직원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는 일이 많아졌다. 술을 마셔도 보통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루가 멀다하고 새벽 늦게까지 마셨다. 스트레스 때문에 한 잔, 끝없이 건수를 만들어 술자리를 가졌다. 서너곳 단골 술집을 순례하다보면 새벽 2∼3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나와 술 먹는 것을 좋아했다. 어떤 노래든지 기타반주를 할 수 있었고 술자리를 압도할 수 있는 입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을 끊으면 친구들이 모두 사라질 것같았다. 한국 사람끼리도 처음 만나면 어색한데 외국인과 만나 술도 안 마시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마음이 나를 짓눌렀다. 십일조를 거르지 않았고 잠들기 전에 기도하는 것은 생활습관이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 돌아왔다고 해도 감사기도를 드린 뒤 잠자리에 들었다. 손만 엉거주춤하게 모은 상태로 무슨 주문을 외는 것처럼 횡설수설했다. 실제는 ‘가짜 크리스천’이었다. |
[역경의 열매―문봉주 ⑷] ‘술·담배에 찌든 삶’반성… 반성… |
갑자기 아내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전날 술을 잔뜩 먹어 취기가 가시지 않은 채 주일날 교회에 갔었다. 아내의 한 마디에 나는 마치 커다란 쇠망치가 내 머리를 찍어내려 누르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 명색이 교회 집사가 주일 예배에서 찬송도 부르지 못할 정도로 술과 담배 냄새에 찌들어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니까 아예 입을 다물라고?’ 아내의 말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나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던 아내가 내 입을 가로막다니.’ 제 정신을 차리자 지독한 술냄새가 풍겨왔다. 온몸이 알코올 덩어리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정말 엉터리로 살았구나. 집사라는 사람이 세상 사람보다 훨씬 죄를 많이 짓고 돌아다녔는데도 여태 그걸 깨닫지 못하다니….” 91년 당시 나는 힘든 과정에 있었다. 동북아1과장을 거친 나는 요직인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에 부임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대와는 영 딴판이었다. 이제까지의 관례와는 영 다르게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워싱턴이 아닌 스위스 제네바로 발령이 났다. 내가 왜 미역국을 먹어야 했는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너는 당해도 싸다. 예수 믿는다면서 그렇게 엉터리로 살았으니…’ 이런 생각에 이르자 이제부터라도 좀 크리스천답게 살아야겠다는 소망을 갖게 됐다. 이후 나의 삶은 점차 변해갔다. 그러나 집에서는 담배를 피운 적이 없다. 그러나 회사에 출근하면 곧장 커피를 마시고 피워 무는 담배는 밤늦게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나의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루 서너갑을 간단히 넘어서기 일쑤였다.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내가 담뱃갑으로 보인다면서 눈이 따가워 근처에도 오기 싫다고 말할 정도였다. 월급의 반을 털어서 금연학교에 강제 등록을 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1년 가까이 담배를 끊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어려웠다. 오죽했으면 초보신자였던 아내가 침대에서 제발 담배 냄새 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겠는가. 여러 차례 많은 시도를 해보았지만 도저히 담배를 끊을 수 없었다. 제네바로 부임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렇게 즐기던 일본담배와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것이다. 아울러 짤막하게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이 정말 저를 변화시켜 주시려면 담배를 끊게 해주세요.” 아내는 “며칠이나 가나 보자. 그 버릇 남 주겠느냐”며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네바에 온 뒤로 담배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미국이 아닌 스위스로 보내셨다. 더욱 놀라운 일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제네바에서 예비하신 일이 펼쳐진 것이다. 대사관 직원끼리 환영회를 갖기 마련이다. 제네바에서 나를 환영하는 만찬 약속이 잡힌 날, 낮에 진지하고 성실해보이는 참사관 한 분이 찾아와 이런 말을 던졌다.
제가 다른 특별한 일이 있어서 잠깐 있다가 먼저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습니다. 양해해주세요.” 스위스로 출발하기 전 어느 구역장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제네바에 가면 엄낙용 집사님이 있어요. 그 분께 많이 보고 배우세요. 아주 신앙이 좋아요.” |
[역경의 열매―문봉주⑸] 세가족 모여 성경공부때 가장 행복 |
혹시 저녁에 성경공부 모임이 있어서 그러신 거 아니세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저녁약속을 미루고 성경공부 모임에 끼어도 될까요.” 나의 요청에 엄 집사는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너무나도 좋아했다. 부인도 함께 오시면 좋겠네요.” “성경공부 모임이 있으니 나와요.” 늘 밖으로만 나돌던 남편이 성경공부 모임에 함께 가자니 아내는 웬일인가 싶었다. 그동안 난다긴다하는 외국인들을 만나고 한번도 거칠 것이 없던 나였지만 그날만은 참으로 이상했다. 부부 세쌍과 젖먹이 아이, 꼬마가 우리를 반겼다. 오늘은 참 복된 날입니다.” 예일대와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SUN핵물리학연구소에 파견나와 있는 제원호(현재 서울대 교수) 박사 부부, 입양아 출신으로 스위스 자동차회사에 근무하는 김 집사 부부, 성경공부 모임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엄집사 부부 등 세 가정이 매주 수요일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학술대회 주제발표보다 더 심각했다. 내게는 생경한 분위기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심히 성경공부라는 걸 해본 것같았다. 그런데 이제까지 교회에서 느낄 수 없었던 기쁨이 몰려왔다. 나는 그때까지 남자끼리 만나서 술 마시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모임에서 술을 마시지 않고도 충분히 서로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게다가 부부가 함께 말씀을 배우고 나누는 모습을 보니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 없었다. ‘그동안 철없던 나를 용서해줘. 정말로 미안했어요.’ 왜 가정이 천국의 모형이어야 하는지, 왜 부부를 한몸이라고 하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됐다. 하루는 엄 집사가 구원이 나오는 성경구절을 하나씩 떠올려보자고 했다. ‘교회를 오래 다녔으니까 아무거나 댈 수 있겠지.’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제 박사부터 돌아가면서 성경구절을 제시했다.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 도대체 차례가 다가오는데 성경 구절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성장해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었다. 모태신앙인인 나는 42년간 들어왔던 설교만 해도 수천 편이었다. 게다가 중고등학교를 미션스쿨을 다니며 교과목으로 성경을 배웠던 터였다. 그런데 구원에 관한 성경 구절 하나도 댈 수 없다니 충격이었다. 그날 이후 열등감에 휩싸였다. 다른 것은 잘 외우겠는데 웬일인지 성경 구절은 외워지지 않았다. 자신이 이끌던 유학생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해달라고 했다. 자신없어 하자 그는 자신이 사용하던 교재가 있으니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면서 격려해주었다. 나는 그 주에 가르칠 내용을 철저히 준비해갔지만 문제는 준비한 것 외에 다른 것을 질문할까봐 조마조마했다. 급기야 일이 터지고 말았다. 유학생 중 한 명이 칼뱅의 예정론이 뭐냐고 물어왔던 것이다. 머뭇거리다가 잘 모르겠다고만 대답했다. 그날 밤 나는 수치감에 떨어야 했다. 나는 최소한 창피를 당하지 않을 만큼의 성경 지식은 가져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국내에 들어갈 날만 애타게 기다렸다. 그 무렵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워야겠다는 결심에 불을 당긴 책 한 권을 접했다. 김성일 권사의 ‘성경대로 살기’.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성경이란 목사나 신학박사같은 분들만 깊이 연구해서 가르치는 것인줄 알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평신도도 얼마든지 성경을 연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
[역경의 열매―문봉주⑹] 술친구 심의관과 中서 신앙동지 |
1년에서 길게는 1년6개월이 지나면 다시 해외로 나가게 된다. 제네바 근무를 마친 나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구역장을 찾았다. 그때까지 내가 다니던 교회에는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잘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말씀을 배울 만한 데를 좀 가르쳐 주세요.” “온누리교회에 가보세요. 매일밤 성경공부 세미나가 열려요.” 출석교회의 담임 목사님을 찾아가 상의를 드렸다. 어려서부터 목사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신앙의 철칙으로 교육받은 터라 교회를 함부로 옮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서 말씀을 잘 배우세요. 하용조 목사님은 저의 친구이기도 해요.” 목사님은 내 전후 사정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오히려 격려해주었다. 저녁약속을 없애고 저녁마다 성경공부 세미나에 참석했다. 성경공부 모임이 없는 날은 다른 교회에까지 원정을 갔다. 토요일 오후에는 두란노서원의 성경공부 세미나에 참석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책별 강의는 물론이고 데니스 레인 목사님의 강해설교까지 두루 섭렵했다. 중보기도 등 신앙성장과 관련된 세미나에도 참석했다. 몸은 비록 힘들고 피곤했지만 주님이 새롭게 부어주시는 은혜 가운데 저녁마다 빈 속을 말씀으로 가득 채웠다. 변화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 속에 새벽기도를 시작하니 일찍 일어나는 것이 생각보다 쉬웠다. 아예 출근할 요량으로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새벽기도회에 나갔다. 그러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개인기도 시간만 되면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러면 입이 막혀버렸다. 그럭저럭 몇 마디 더 보탠다고 해도 5분, 10분을 넘기기 어려웠다. ‘주변 사람들은 눈물 콧물 쏟아가면서 저렇게 하소연할 게 많은가. 아니면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가’ 그 뒤 기도세미나에 참석하고 기도와 관련된 책을 보면서 기도란 무엇인가를 깨달아갔다. 키가 크고 얼굴이 희멀건한 사람과 부딪쳤다. 엉겹결에 당한 일이라 어리벙벙해 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상대방을 쳐다본 나는 경악했다. 나와 함께 강남 술집을 주름잡던 외무부의 소문난 한량 김광동 심의관이었다. 우리는 ‘서로 당신이 여기를 어떻게’라는 표정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브뤼셀에서 근무하면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에 돌아와 나처럼 한창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동역자를 만난 것으로 생각했다. 둘이서 밤마다 주말마다 성경공부하러 뛰어다녔다. 어김없이 두란노서원이 세들어 있었던 박림빌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두란노해외선교회(TIM) 중보기도 모임이 열렸기 때문이다. 하용조 목사님도 꼭 참석하시곤 했다. 그때 김 심의관은 중국으로 발령을 내달라고 기도하던 중이었다. 중국과 수교 직후라 한국에 중국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나는 중국에 무관심했다. 영어 프랑스어 일어권에서 일한 것으로 충분하니 이제는 영어권에서 근무하고 싶었다. 3∼4개월뒤 동역자였던 김 심의관은 정말 중국으로 발령이 났다. 매일 붙어다니던 친구를 떠나보내려니 섭섭했다. 1995년 그는 경제공사, 나는 정무공사로 함께 근무하게 된 것이다. 가기 싫어하던 나를 왜 그곳으로 보냈는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잘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게 됐다. ‘어둠형’ 생활을 서로 감시해주고 비판해주는 관계가 됐다. 예를 들면 서울에서 정치인들이라도 오면 저녁 접대 자리에 어울릴 수밖에 없는데, 체면치레로 아주 조금만 술을 마실까 하다가도 김광동 경제공사의 얼굴이 아른거려서 포기할 정도였다. 그만큼 경건생활을 유지해 나가는데, 우리 둘은 서로에게 많은 도전과 위로가 돼주었다. 정리=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
[역경의 열매―문봉주⑺] “위암4기”청천벽력 같은 선고 |
이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또 청년부 임원들이 1주일에 한번씩 모임을 가질 때 식사 한 끼 사주시면 됩니다.” 1부는 장년부 예배, 2부는 청년부 예배다. 특히 청년부 예배에는 유학생들이 주로 참석했다. 졸지에 청년부를 맡아 한달 정도 지났을 때 나는 청년들의 얼굴에서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님을 갈망하며 열심히 찬양하는 청년들에게 밝은 모습이 없다니….’ 힘빠진 그들의 어깨를 바라보며 무엇인가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들을 위한 성경공부 모임을 가져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목사님은 내게 청년부 성경공부를 이끌어줄 것을 부탁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1년 6개월여동안 성경공부 모임을 쫓아다녔던 기억이 새롭게 되살아났다. 이 문제를 놓고 새벽에 주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좋은 영감이 떠올랐다. ‘성경의 맥을 잡는 성경공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훑으면서 성경의 구조와 흐름을 잡아주고 그 뼈대를 따라 읽으면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성경탐구 40일’ 강의를 듣던 게 기억났다. 베이징 한인교회의 ‘성경의 맥을 잡아라’는 성경공부는 이렇게 시작됐다. 나는 청년들에게 두 가지를 제안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전체 구조에 살을 붙여나가자는 것과, 성경에 나타난 지명을 찾아가며 지도를 그려보자고 했다. 청년들과 매주 함께 성경을 통독해 나갔다.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을 성서지도에서 찾아 표시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신구약 성경에 표기된 지명이 다를 경우 난감했다. 우리는 영문성경과 성서지리책을 참조해가면서 지도를 그리는 한편, 등장인물의 움직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면서 신약의 사렙다 과부가 구약에서는 사르밧 과부로 나오는 것을 알게 됐다. 성경공부 모임은 순식간에 교회 청년들 사이에서 인기과목이 됐다. 어떤 청년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되살아났다면서 감사엽서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감동 때문에 감격하고 더욱 열심히 했다.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아들의 서울대 유학을 위해 대사관을 찾은 베이징의과대 내과과장과 만남을 가진 뒤 병원을 찾은 것이다. 내일 무조건 병원으로 오세요.” 한 손으로 습관적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음날 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했다. 20∼30분이면 끝날 검사가 길어지면서, 의사들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저 내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중국어는 “매우 심각한데요”라는 것뿐이었다. 내과과장은 내게 좀 심각한 것같다며 검사 결과는 다음주에 나온다고 말했다. “당신, 최근에 베이징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받았어요? 오늘 내과과장이라는 사람한테 연락이 왔는데 내일 당장 수술받아야 한대요. 위암 4기래요.” 내 속 어디가 그렇게 망가졌다는 것인지 실감할 수 없었다. 급하게 휴가를 내 서울로 향했다. 정리=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
'◈성경연구·강해[종합] > 성경의 脈을 잡아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험하는 성경의 맥 <동영상> (0) | 2017.02.06 |
---|---|
[역경의 열매―문봉주 ⑻~(13,끝)] "말씀을 가르치든지, 배우든지 하십시오.” (0) | 2017.02.06 |
34년 외교관 생활 접고 2009년 10월 목사 안수 받는 문봉주 장로 (0) | 2017.02.06 |
성경의 맥을 잡아라 - 제 5강/ 신약의 구조1. 4복음서, 2. 서신서 (0) | 2017.02.06 |
성경의 맥을 잡아라 - 제 4강/6. 단일왕국, 7. 분열왕국, 8. 포로시대, 9. 포로귀환시대 (0) | 2017.02.06 |